‘검소한 일본인’은 옛말, ‘메리하리’ 액티브 시니어 부상

입력 2025-10-17 11:43 수정 2025-10-17 11:47

[이준호의 시니어 비즈니스 인사이드 ⑲]

일본의 시니어 소비자들이 달라지고 있다. 한때 ‘저축 대국’ 일본의 상징으로 불리던 노년 세대가 이제는 ‘쓸 때는 쓰는 사람들’로 변하고 있다. 절약은 여전히 일상의 기본 원칙이지만, 그 안에서도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경험과 건강, 취미에는 과감히 투자하는 새로운 ‘액티브 시니어’가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의 소비자 조사 기업 플라넷이 지난 9일 발표한 조사 ‘액티브 시니어의 쇼핑 의식과 행동 2025’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조사 대상은 전국의 60세 이상 남녀 2200명으로, 코로나 이후 고령층의 소비 행태 변화를 다각도로 분석했다. 응답자의 77.8%가 “생활비를 줄이려 노력하고 있다”고 답했지만, 동시에 62.9%는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했다. 또 61.3%는 ‘메리하리(メリハリ) 소비’를 실천한다고 답했다. ‘메리하리’는 쓸 곳에는 쓰고, 아낄 곳은 아끼는 ‘균형 잡힌 소비 습관’을 뜻하는 시사용어다.

즉, 일본의 시니어는 단순한 절약형 소비자가 아니라 ‘선택적 소비자’로 이동하고 있다. 과거에는 ‘싼 게 최고’였다면 이제는 ‘내게 가치 있는가’가 기준이다. 응답자 10명 중 7명(68.4%)이 “품질이 좋다면 조금 비싸도 괜찮다”고 했고, 특히 여성층에서 그 비율이 높았다. 또한 “가격보다는 브랜드 신뢰를 우선시한다”는 답변도 41.6%에 달해, 충동 구매보다는 ‘정보 기반의 합리적 소비’를 추구하는 태도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 체험형 소비 부각

이번 조사에서 ‘앞으로 더 돈을 쓰고 싶은 분야’를 묻자, 1위는 ‘여행’(40.4%)이었다. 코로나 이전부터 이어진 ‘보상 심리’와 함께, 인생 후반기를 스스로 축하하는 ‘나를 위한 선물’ 개념이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뒤이어 ‘건강관리 및 증진’(26.8%), ‘식품 및 일상생활용품’(24.5%), ‘취미 활동’(18.9%), ‘외식’(18.1%)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75세 이상에서는 ‘건강관리’ 지출이 33.3%로 여행을 앞질러, 연령이 높을수록 ‘자기 몸에 대한 투자’가 더 중요해지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건강 관련 소비 중에서도 눈에 띄는 분야는 ‘건강식품’(45.8%), ‘의료기기 및 웰니스 기기’(28.3%), ‘피트니스·체조 등 운동 관련 서비스’(21.6%)였다. 또 ‘미용·피부관리 등 외모 유지’(15.2%)에 대한 지출 의향도 증가했다. 과거라면 사치로 여겼을 법한 미용 관련 소비가 ‘건강 유지의 연장선’으로 인식되는 변화가 생긴 것이다.

여행 소비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응답자의 57.4%가 “단체 여행보다 개인이나 소규모 맞춤형 여행을 선호한다”고 답했다. 이동의 편리함보다 ‘내가 좋아하는 곳에, 내 방식으로 가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진 것이다. 실제로 ‘숙소에서 조용히 쉬는 여행’(44.9%)이나 ‘온천·자연을 즐기는 힐링형 여행’(39.1%)이 상위를 차지했다.

‘노후 준비 소비’에서 ‘현재를 즐기는 소비’로

이전 세대의 일본 노인은 ‘노후 대비’라는 명분 아래 지출을 억제해 왔다. 하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노후를 대비하기보다는 지금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돈을 쓴다”는 응답이 58.5%로 나타났다. 이들은 자신을 ‘관리 대상’이 아닌 ‘능동적 소비자’로 인식하며,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자율성을 중요시했다.

실제로 ‘쇼핑의 즐거움’을 묻는 질문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39.8%)과 “스스로 고른 상품을 사용하는 만족감”(36.2%)이 높게 나왔다. 이는 ‘소유’보다는 ‘경험’을 중시하는 가치관으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또 응답자의 47.7%가 “온라인 쇼핑을 자주 이용한다”고 답해, 디지털 이용 격차도 점차 좁혀지고 있음을 시사했다.

한편 “예전보다 돈을 쓰지 않게 되었다”는 응답도 44.9%로 적지 않았지만, 그 이유는 단순히 소득이 줄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절반 이상(53.1%)이 “필요 없는 물건이 많다고 느껴서”라고 답해, 물질적 소비보다 ‘공간과 시간의 여유’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싸게 사는 것보다, 낭비 없는 합리적 소비로

플라넷은 보고서에서 “액티브 시니어의 소비는 절약에서 합리로, 합리에서 자기표현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응답자의 74.2%는 “가성비보다 만족감을 중시하는 가심비를 중시한다”고 답했고, 32.5%는 “가격이 비싸더라도 신뢰할 수 있는 기업 제품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경향은 ‘브랜드 충성도’와도 연결된다. 65세 이상 여성의 58.7%는 “평소 쓰던 브랜드를 계속 구매한다”고 답해, 시니어층이 장기 고객으로서 기업의 안정적 수익 기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이전보다 활발히 돈을 쓴다”는 응답은 12.8%에 불과했으나, “좋아하는 상품이라면 비싸도 산다”는 응답이 27.2%로 두 배 이상이었다. 특히 여성 응답자의 35.6%가 “자기만족을 위한 소비”를 꼽았다. ‘자신을 위한 소비’가 죄책이 아닌 ‘삶의 보람’으로 전환된 셈이다.

한국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주거복지, 실버푸드, 웰니스 산업, 여행·취미·교육 시장이 고령층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일본의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시니어를 위한 제품’이 아니라 ‘시니어 자신이 선택한 제품’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인생을 설계하고 가치를 더하는 시니어 소비자들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더 궁금해요0

관련 뉴스

  • “젊음의 경계가 사라진다” 2026년 초고령사회의 기회
    “젊음의 경계가 사라진다” 2026년 초고령사회의 기회
  • 한국의 공허함과는 다른, 미국 요양시설의 ‘사랑’
    한국의 공허함과는 다른, 미국 요양시설의 ‘사랑’
  • 백화점의 변심, “시니어 고객 환영합니다”
    백화점의 변심, “시니어 고객 환영합니다”
  • IFA 2025가 보여준 시니어 가전의 미래 ‘음성’과 ‘예측’
    IFA 2025가 보여준 시니어 가전의 미래 ‘음성’과 ‘예측’
  • 자격증의 숲에서 길을 잃은 돌봄
    자격증의 숲에서 길을 잃은 돌봄
저작권자 ⓒ 브라보마이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브라보 스페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