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和만사성의 조건 Part 7] 인문학 한길…文香으로 통하다 - 김태준 동국대 명예교수·효민 고려대 교수 부자

기사입력 2016-05-26 09:10 기사수정 2016-05-26 09:10

▲공역한 <의산문답>을 들고 있는 김태준 동국대 명예교수·효민 고려대 교수 부자의 모습.(이태인 기자 teinny@)
▲공역한 <의산문답>을 들고 있는 김태준 동국대 명예교수·효민 고려대 교수 부자의 모습.(이태인 기자 teinny@)

김태준(金泰俊·79) 동국대 국문학과 명예교수는 조선 후기 실학자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容 1731~1783) 사상의 권위자로 잘 알려졌다. 담헌은 서른다섯 살 때 작은 아버지의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연행(燕行)길에 올라 두 달간 중국에서 머무르며 자신의 세계관을 깨부수고 새로운 견문을 넓힌 인물이다. 그처럼 아버지인 김태준 교수의 자제군관으로 연행을 다녔다는 김효민(金曉民·47) 고려대 중국학부 교수 역시 그때의 경험이 그의 진로에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했다. 동아시아 인문학이라는 커다란 흐름 속에서 부자의 연으로 함께 노를 젓고 있는 그들을 만나봤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김태준 교수는 <18세기 조선 지식인 홍대용의 북경 여행과 체험>으로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홍대용>, <홍대용 평전>을 출간하는 등 그야말로 ‘홍대용 전문가’라 할 수 있다. 그런 그는 2008년 담헌 사상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의산문답(醫山問答)>의 번역을 아들 김효민 교수와 함께 작업했다. 그전에도 <의산문답>의 번역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개 오래된 책들이라 일반인이 해석하기 어려운 번역투 사용이 잦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현대인들도 우리 고전을 쉽게 읽고 이해하도록 하는 데 의미를 두었다.

“(김효민)제가 먼저 원서를 번역하면, 아버지가 맥을 살펴주시고 주석을 달아주셨어요. 공동 역자로 임하다 보니 많이 부담됐죠. 예전 번역본을 읽으면 그 내용이 신경 쓰일까 봐 아예 보지 않고 처음부터 꼼꼼히 혼자 해냈죠. 작업하면서 홍대용의 사상에 감탄하기도 하고, 아버지가 하시는 연구도 이해할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역시 내 아들! 역시 내 손주로다!

부자 관계라 해도 서로 전공하는 분야의 교집합이 작다면 뜻을 함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김태준 교수의 세 자녀(2남 1녀) 중에서도 막내인 김효민 교수만이 아버지와 한길을 걷고 있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지만, 그런 아들이 늘 자랑스럽고 대견하다는 아버지다.

“(김태준)나는 국문학자고, 아들은 중문학자이지만, 같은 인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해요. 특히 <의산문답>과 같은 고전은 한국, 중국 가릴 것 없이 우리의 문학으로 바라볼 수 있죠. 연행록에 매력을 느끼는 편인데, 그런 연구는 나를 여행하게 하고, 내 자식과 손주까지 함께 다니며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힐 수 있어 유익해요. 그런 경험이 아이들에게 좋은 자극이 된다면 아버지 세대로서는 반가운 일이죠.”

아버지의 모습은 아들 세대, 그리고 손주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등학교 3학년인 김효민 교수의 아들도 할아버지와 같은 국문학을 전공하겠다는 뜻을 품었으니 말이다. 그런 아들의 결정에 아버지인 김효민 교수도 격려를 아끼지 않지만, “역시 내 손주”라며 가장 기뻐한 사람은 할아버지였다.

“(김효민)아들의 진로 선택에 할아버지 영향이 컸어요. 오히려 제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흥미를 못 느낀다고 하거든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집에 아버지 제자들이 많이 왔고, 연구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참 존경받는 일을 하시는구나’라고 느꼈어요. 고등학생 때 아버지가 ‘중문학을 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는데,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나는 그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이 굳어졌던 것 같아요.”

▲김태준 교수는 아들, 손자와 함께한 여행을 소중한 추억으로 여긴다. 2011년 여름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김효민 교수 소장 사진)
▲김태준 교수는 아들, 손자와 함께한 여행을 소중한 추억으로 여긴다. 2011년 여름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김효민 교수 소장 사진)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은 단순히 진로 결정만은 아니었다. 인문학자의 삶을 살면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등 더 깊은 정신이 스며들고 있었던 것.

“(김효민)아버지는 문학이라고 하는 텍스트에 국한된 연구를 하시지 않고, 여행이나 우정 등 그 외적인 것에 더 관심을 기울이셨어요.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대해 접근하시는 걸 좋아하셨죠.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그게 옳다고 생각했고, 연구할 때도 항상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있어요.”

김태준 교수에게는 아들이 대견했을 때, 그리고 김효민 교수에게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을 때가 언제인지를 물었다. 김태준 교수는 “아버지로서는 아들이 나와 비슷해지면 좋겠죠. 아들 입장에서는 힘들기도 할 텐데 내 바람을 들어주어 참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김효민 교수는 “언제나 자랑스러운 아버지입니다. 무엇보다 홍대용이라는 위대한 실학자의 최고 정수에 있는 글을 이 분야 큰 스승과도 같은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었으니 그보다 더한 영광은 없죠”라며 그 후로도 오랜 시간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묵묵히 미소 짓던 아버지는 문득 서운해진 눈치였다.

“(김태준)근데, 이런 이야기는 그동안 나에게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어요. 그러고 보면 이런 인터뷰 자리가 참 좋네요. 그렇지 않으면 아들하고 이런 대화를 하는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요.”

대부분 부자의 모습이 그렇듯, 이 부자도 서로 말보다는 마음으로 통하는 모양이었다. 칭찬에 인색했던 아버지에게 서운했던 적이 없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고 아버지의 삶을 이해할수록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던 깊은 사랑을 느끼게 된 아들이다. 2014년 김효민 교수는 김태준 교수의 <긴내 선생의 문향>에 발문을 썼는데, 이를 보면 말하지 않아도 부자의 끈끈한 정을 확인할 수 있다.

‘재주 없음을 뻔히 아시면서도 보잘것없는 막내의 글로 의미 깊은 문집의 마지막을 장식하고자 하신 그 뜻에 이미 ‘치유의 토닥거림(?)’ 이상이 담겨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더욱이 아들로서 아버지의 문집에 발문을 쓰는 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또 언제 다시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을 가져보니 그저 감사함이 돋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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