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모랭이는 박물관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추억의 물건들이 진열돼 있어 먹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보는 즐거움까지 만끽할 수 있다. 향수가 느껴지는 양철 도시락, 괘종시계, 타자기, 기타, 축음기, 뻥튀기 기계 등 주인장의 남편이 30년 넘게 모은 것들이라고 한다.
중·장년에게는 추억을 되새기는 가슴 따뜻한 공간이면서, 아이들에게는 옛 물건들을 살펴볼 수 있는 교육적인 곳이라는 점이 매력적이다. 몇몇 테이블은 수십 년 된 집의 마루를 뜯어 만들어 빛바랜 나무 무늬가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낸다.
천장을 가득 메운 글과 그림은 주인장 시누이의 작품들이다. 그 밖에도 찬찬히 살펴보면 수백 년 된 기와, 전통방식으로 엮은 짚단, 옛날 동전, 고서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가끔 물건을 살 수 없느냐는 손님들이 있지만 어렵게 모은 것들인 만큼 판매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 대신 마음껏 여유롭게 구경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라고.
주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풍세로 289
문의 041-622-6262 백숙 메뉴 예약 필수
영업시간 10:00~22:00 매주 월요일 휴무
“이 아이는 물을 많이 먹어요.” “저 아이는 추위에도 잘 자라죠.” 애정 어린 말투로 야생화들을 ‘아이’라고 부르는 백경숙(白慶淑·63) 백경야생화갤러리 대표. 그녀는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갑작스러운 병마로 교단을 떠나야 했지만, 야생화 아이들과 싱그러운 ‘인생 2교시’를 맞이하고 있다는 그녀의 정원을 찾았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백 대표는 건강하게 자라나는 야생화를 보면 자신의 몸과 마음도 튼튼해지는 것 같다고 한다. 예쁜 꽃망울이 맺히면 덩달아 마음도 예뻐지는 듯하고, 촉촉이 이슬을 머금을 때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화분 하나하나에 정성이 깃든 만큼 감정이 스며 건강한 기운을 똑같이 느끼게 된다는 그녀다.
“아침에 일어나 정원에 나가보면 화분마다 이슬이 맺혀 있어요. ‘아! 이슬 먹고 산다는 게 이거구나’라고 느낄 정도로 싱그럽죠. 바짝 말라 있던 이파리가 이슬을 먹고 촉촉해지면 나도 그 이슬을 먹은 듯하고, 흙과 땅의 기운도 나누는 것 같아요. 그런 모습을 보고 느낄 때 엔도르핀이 마구 솟아나죠.”
백 대표의 인생 활력소인 600여 개의 화분 중에서도 가장 큰 힘이 되는 ‘아이’는 20여 년을 함께한 ‘둥굴레’다. 그녀가 병마와 싸울 무렵부터 현재까지의 희로애락을 모두 알고 있기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몸이 아프지만 교직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동네 한 화원에 갔더니 가게 주인이 팔다 남은 것을 한번 키워 보라면서 둥굴레 두 뿌리를 줬어요. 아플 때 꽃을 키우면 위안이 된다는 말도 함께 건네면서 말이죠. 지금은 얼마를 줘도 팔지 않지만, 아마 당시 한 뿌리에 500~1000원 정도 했을 거예요. 그랬던 ‘아이’가 큰 화분을 가득 채울 만큼 무럭무럭 자랐죠. 지금은 작은 화분에 분재해서 가꾸고 있어요. 꾸준히 이 ‘아이’에게서 생명력을 받았고, 덕분에 지금의 야생화 인생도 꽃피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녀를 기분 좋게 하는 또 다른 ‘아이’는 ‘석창포’다. 백 대표는 매일 아침 물을 줄 때마다 “어머, 네가 나를 건강하게 해줄 수 있니?”라며 석창포를 쓰다듬는다. 둥글게 솟아 얇고 긴 이파리가 수북하게 난 석창포를 어린아이 머리 매만지듯 문지르면 상큼한 향이 올라온다. 아침마다 이 향을 맡을 때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정신이 맑아진다고 한다. 그 외에도 의미 있는 화분이 많다. 흔하게 생긴 야생화라도 그녀에겐 저마다 특별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백 대표 역시 몸이 아프지 않았거나 지금의 나이에 이르지 않았더라면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젊어서는 자연을 모르고 살잖아요. 할 일이 너무 많고, 자기 미래를 생각하며 굉장히 힘들 때니까요. 저도 그랬고요. 사람마다 취미나 성향이 다르긴 하겠 지만, 그런 성장기를 지나 나이가 들면 자연을 돌아보게 돼요. 흙과 공기가 중요하다, 자연을 섭취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런 게 정말 피부로 와 닿는 거죠. 특히 야생화 가꾸기는 자연과 더불어 적은 돈으로 평생 할 수 있는 취미생활이기 때문에 중·장년의 관심이 높다고 생각해요.”
잘만 키우면 평생 취미가 될 수 있다는 야생화. 무엇보다 경제적으로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백 대표는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데는 한 달에 30만~50만원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마음껏 꽃과 흙을 사고 화분을 가꾸는 데 드는 돈이 그만큼이기 때문이다. 연금도 있고 강의료도 나오는 덕분에 야생화와 함께하는 그녀의 노후는 평안하다. 그러한 삶의 여유는 새로운 것들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여기에 오니까 사람들이 왜 장을 안 담가 먹느냐는 거예요. 예전에는 직장생활에, 몸도 아프니까 친정이나 시댁 어머니가 담가주시는 걸 먹었죠. 근데 두 분이 다 돌아가시고 얻어먹을 곳이 없어졌잖아요. 여기 와서 생활이 익숙해지니까 장이 담가지더라고요. 정말 신기하죠. 아파트에 살았을 땐 꿈도 못 꿨을 일들을 나이 들며 자연하고 살다 보니 되는 거예요. 우리 집에 항아리가 세 개 있는데, 많아서 우리 식구만 먹을 수도 없어요. 그걸 또 이웃과 나누어 먹죠. 그런 게 사람 사는 것 아닐까 생각해요.”
△ 서울시 강동구 암사동 102-39번지에 있는 ‘백경야생화갤러리’의 모습. 담벼락이 없어 자유롭게 방문하고 구경할 수 있다.
2008년 초연 당시 전회 매진 기록을 세우며 중·장년 관객의 호응을 얻었던 연극 가 2009, 2011, 2014년에 이어 다시 대학로 무대를 찾았다. 살아 있는 남편과 관객의 눈에만 보이는 죽은 아내의 엇갈린 대화를 통해 애틋한 부부애를 표현한 작품이다. 가슴뭉클한 이야기로 관객에게 감동을 선사한 박춘근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2008년 초연 이후 작품과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
작품은 조금씩 변했습니다. 그때마다 이유가 있었는데 아마 제가 변한 탓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사이 아이가 하나 더 생겼고, 극중 남편의 나이가 되어가고 있지요. 작품의 운명을 작가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좋은 배우들과 계속해서 이 작품을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 못했습니다. 공연을 통해 알게 된 부분도 많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남편보다 아내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Q. 작품을 쓰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
작품 속에 커다란 사건이 휘몰아치듯이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떤 변곡점이 있기는 했지요. 1장을 써놓고, 사건으로 밀어붙일 것인지, 그들의 조곤조곤한 인생으로 조탁할 것인지를 두고 제 속에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조금 어려운 선택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지점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Q. 주인공 안중기와 닮은 점이 있다면?
어디선가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전혀 없다고 했는데, 억울하게도 잘 믿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굳이 저와 비슷한 인물을 꼽자면, 노부인에 가깝지 않을까요? (농담입니다) 조금은 보편적인 인물, 이야기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특정한 누구의 이야기라기보다 우리의, 당신의 이야기이기를 바랐습니다. 혹시 극중 인물이 누군가와 닮았다면 그건 그들이 우리의 어느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Q. 중장년 관객들이 보았을 때 공감할 수 있는 장면(또는 대사)
어떤 장면 또는 대사가 아닐 것 같습니다. 공연은 고작 수십 분 안에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무대는 수십 년이 흐르지요. 장면과 장면 사이, 그사이에 흐르는 수십 년의 이야기를 함께 채워가길 바랍니다. 언젠가 아는 어르신이 공연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참 많네.” 한참 그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을 생각했습니다. 어르신의 삶을 정보로는 알고 있지만, 제가 어찌 그분의 삶을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들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신 어르신을 생각하며 이 작품이 조금은 위로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Q. 작품을 본 관객이 어떤 메시지를 얻어갔으면 하는지
어떤 특정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을수록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다소 특정한 메시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래도 그 메시지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어떤 계기나 변화 앞에 놓이신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에게 이 작품은 계속 그랬던 것 같습니다.
>>박춘근 작가
연극 , , , , 뮤지컬 , 오페라 등 극본.
연극
일정 7월 1일~9월 18일
장소 수현재씨어터
연출 김수희
출연 전노민, 이일화, 이한위, 황영희, 김민상 등
문국진(文國鎭·91)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법의학자다. 1955년 설립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창설멤버인 문 박사는 당시 국내에 생소했던 ‘법의학’이라는 분야를 뿌리내리고 기틀을 잡는 등 한국 법의학계의 큰 스승과 같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말하는 인생의 스승은 바로 ‘죽음’이라고 한다. 수많은 주검을 부검했던 문 박사는 요즘도 부검을 하고 있다. 바로 ‘책 부검’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죽음’의 교훈은 무엇인지, ‘책 부검’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을 통해 들어봤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전문서, 교양서 등 통틀어 53권의 책을 펴낸 문 박사의 저서 중에는 , , 등 법의학과 예술이 어우러진 작품들이 상당수 차지한다. 작가의 성향이나 느낌을 중시하는 예술 분야와 객관적 증거와 분석을 통해 이루어지는 법의학이 과연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문 박사가 법의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대학생 시절 소나기를 피해 잠시 헌책방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처음 ‘법의학’에 대한 책을 봤어요. 책에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이 임상의학이라면,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이 법의학이다. 법의학은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가 발달한 민주 국가에서만 발달한다’는 내용이 있었죠. 그 글을 보고 가슴이 뛰더라고요. 어찌 보면 예술에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지만, 두 분야 모두 인간을 중심에 두고 풍부한 인간성과 사회 문화 창달을 목적으로 한다는 데는 공통점이 있지요.”
이러한 뜻으로 문 박사는 정년 후 인생 이모작을 ‘예술과 법의학을 접목하는 융합과학’에 힘쓰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생소하고 어려운 일을 시작한 지도 20여 년이 지났고, 그동안 펴낸 책만 10여 권에 달한다. 그는 명확하지 않았던 예술가들의 사인을 밝혀내고 의학적 관점에서 예술작품을 해석했다. 문 박사는 법의학박사가 아니라면 분석해내지 못했을 요소들을 발견해 작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독특한 작업을 ‘책 부검(book autopsy)’이라고 표현한다. 특히 은 사람의 오감 중 후각적 요소에 집중해 다양한 예술 작품을 헤아려 보고자 했다.
“알고 보면 인간의 오감(五感) 중에 가장 천대받는 것이 후각이에요. 시각은 빛이 있어야만 기능하고, 청각은 일정 데시벨 이상의 소리가 있어야 하지만 후각은 숨 쉴 때마다 작용하죠. 사람의 오감 가운데 오직 후각만이 의식으로 인식되기 전에 감정 반응을 먼저 일으켜요. 그래서 후각과 예술을 접목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삶의 경험과 새로운 지식의 융합으로 만나는 ‘인생 이모작’
에는 ‘조제핀의 제비꽃향 체취와 나폴레옹의 운명’, ‘막달라 마리아와 나드 향유’ 등 흥미로운 주제의 이야기들이 예술적, 의학적 분석과 함께 담겨 있다. 글에 나오는 그림이나 조각, 작가의 초상화 등을 함께 볼 수 있어 가볍게 교양서로 읽기에 좋고, 작품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해석이 있어 예술적 식견을 넓히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예술, 과학, 법의학 등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권해볼 만하지만, 그가 특별히 중·장년에게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떠한 분야의 전문가라도 정년퇴직하고 나오면 현역 때 가지고 있던 지식이 낡아져요. 나 역시 그런 기분이 들어 한동안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죠. 정년을 앞둔 후배들에게도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라는 조언을 해요. 한 분야를 마스터하고 다른 분야를 접하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거든요. 그동안 갈고 닦은 경험에 또 다른 경험을 융합하면 정말 기가 막힐 일들을 해낼 수 있어요. 이러한 내 경험이 담긴 책이 인생 이모작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요.”
문 박사가 중·장년 세대에게 강조하는 것은 한 가지 더 있다. ‘지식을 환원하자’는 것이다.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학술대회나 강연회에 나가고, 언론사 칼럼이나 인터뷰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는 54권째 책을 집필 중이라고. 그가 이토록 가만있지 못하는 이유는 서둘러 지식을 환원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말 한우물만 팠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법의학에만 매진하며 살아왔어요. 그런데 그런 내 지식과 경험을 나만 알고 느끼면 될까요? 강의를 하든 글을 쓰든 무엇으로든 남겨야죠. 그럼 이것들을 남기기만 하면 되느냐? 자꾸 알리고 이야기해서 많은 이에게 환원될 수 있도록 해야죠. 이제 이만큼 살았으니 돌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서둘러서 내 모든 것을 사회에 남기고 환원하고 가려고 해요.”
‘시활사(屍活師)’, 살아 있는 가장 큰 스승은 바로 ‘죽음’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갈 것이라는 문 박사의 말대로 그가 환원하고자 하는 것은 학술적인 것만은 아니다. 가능하다면 자신이 가진 금전, 지위, 명예 등을 모두 내려놓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한다. 법의학자로 살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죽음을 직접 마주했던 그는 누구든 죽음을 앞두면 생전에 지녔던 모든 욕망이 사라지고 순수한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 정주영 회장처럼 부와 명예가 대단했던 사람이 죽을 때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가지고 가는 게 없구나!’라고 했대요. 우리가 살아 있을 때 가지고 있던 재산이나 명예는 다 자기 만족이고 욕심일 뿐이지 죽을 때는 다 놓고 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우리가 매달리던 것들이 결코 행복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죠. 죽음 바로 직전에 말이에요. 야속하기도 하지만 인간에겐 죽음이 삶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인생의 가장 큰 스승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뜻으로 ‘시활사(屍活師)’라는 말을 쓰고 있죠.”
문 박사는 나이가 들면서 ‘항시 죽음을 생각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강조했던 선현들의 혜안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죽음’이 지닌 또 하나의 가치는 삶을 의미 있게 만든다는 것에 있다고 덧붙였다.
“만약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어떨까요? 더 행복할까요? 아닙니다. 불로장생할 수 있다면 귀중한 것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목적이나 욕망을 가질 필요도 없고, 또 누군가를 진지하게 사랑하는 일도 생기지 않을 거예요. 생명이 그 의미를 잃게 되는 거죠. 인간은 죽음을 알기에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하면서 인생의 즐거움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겁니다.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더 우리가 사는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어요?”
사주나 점을 믿지는 않지만, 매번 '무난’, ‘평탄’ 같은 단어가 튀어 나온다. 전반적으로 필자 삶을 돌아 볼 때 과연 맞는 말인 것 같다.
인생 전반의 삶
인생의 여러 중대사가 결정되는 1970년대가 필자 20대 나이였다. 그 시기 대학교에 입학하고 군대에 갔다 오고 취직해서 결혼했으니 말이다. 아들딸까지 낳았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운이 좋았는지 대학교도 단번에 합격하고 군대도 카투사로 갔다 왔다. 취업도 서로 오라는 데가 많아서 골라서 들어갔으니 요즘 청년들에 비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첫 직장에서 아내를 만나고 건설회사인 둘째 직장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독일 근무를 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스포츠 장갑을 만들어 수출하는 중소기업에 스카우트 되어 임원으로서 12년간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전혀 연고도 없던 회사에 기존 임원들보다 10세 연하인데도 젊은 패기로 승승장구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입사 6년 만에 단일 바이어에게 거의 의존하던 매출구조를 미국, 유럽, 내수시장으로 확장해 건전한 포트폴리오대로 만들면서 세계 스포츠장갑 1위 업체로 부상시켰다.
1997년 IMF 금융위기는 당시 대표를 맡고 있던 스포츠 브랜드 UMBRO 사업에도 직격탄이었다. 미화로 지급해야 하는 로열티와 수입대금도 막대했지만 국내 시장이 초토화되어 더 이상 사업을 끌고 나갈 수 없었다. 결국 경영책임을 지고 퇴사한 것이 21세기를 두 달 앞둔 1999년 10월이었다. 직장 생활 23년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나이 49세였다.
묘하게 퇴직 1주일 후 섬유의날 시상식에서모범경영인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재직 중이었더라면 큰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자리였으나 찜찜하게 퇴직하고 난 처지라서 가족들과 단출하게 자축할 수밖에 없었다. 퇴직했으니 앞으로가 막막했으나 대통령 표창은 큰 용기를 주었다. 뭔가 큰 힘이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이다. 실제로 표창은 위력을 발휘했다. 이탈리아 스포츠 브랜드 KAPPA의 한국 런칭도 그 덕분에 이뤄졌다. KAPPA의 성공 덕분에 JAKO 등 다른 스포츠 브랜드 도입도 수월했다. 비즈니스뿐 만 아니라 각종 서류 심사 때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
밀레니엄 시대라는 2000년부터 퇴직 이후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UMBRO 대표 시절에 여러모로 도와줬던 업자가 동대문 사무실에 나와 소일하라며 권유했다. 그의 사업도 도울 겸 필자 사업으로 스포츠 장갑을 수출하던 시절에 가까웠던 바이어들과 연락하며 지냈다. 주문량이 적은 바이어들은 본사에서도 귀찮아하던 것을 필자가 주문을 대신 처리해줬다. 한 바이어는 당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공식 스폰서가 되면서 대량주문을 해 와서 그때 꽤 짭짤한 수익을 건졌다. 그러나 9.11테러 이후 미국 경기가 급속하게 하락하면서 이 비즈니스도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중국의 저임금을 활용하여 그나마 주문을 소화했었는데 중국의 인건비가 급속하게 올라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여기서 더 비즈니스를 이어가려면 중국보다 임금이 더 저렴한 나라를 찾아다니며 바이어들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했으나 비즈니스는 이쯤에서 접자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 인생도 50 줄인데 돈을 더 벌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면 인생을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필자랑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 퇴직 대열에 합류하면서 실패하는 사람도 봤고 건강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건강을 잃으면 모두 잃는 것인데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번뜻 든 것이다. 그래서 자전거, 등산을 비롯하여 건강을 위한 삶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여러 가지 시도해본 결과 댄스스포츠가 가장 잘 맞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댄스 이야기
93년 한국에 댄스스포츠가 체계를 갖춰 상륙하자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했었다. 당시만 해도 댄스스포츠를 제대로 알고 가르치는 곳도 드물던 시절이었다. 독일에 주재원으로 근무할 때 어느 와인 촌 홀에서 백발의 할아버지와 고등학생은 되어 보이는 소녀가 같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완전히 매료된 충격적인 일이 기억났다. 그 춤을 제대로 배워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몇 몇 선생을 거치도 갈증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10년 만에 다시 댄스스포츠에 빠져 들었다. 집 근처 올림픽공원 스포츠교실에서 라틴댄스를 가르치는 데 완전히 매료된 것이다. 한번은 5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댄스 경연대회를 했는데 하루 종일 예선부터 뛰어 최종 챔피언으로 등극하는 일이 생겼다. 춤에 대한 재능을 처음으로 확인한 일이다. 다음 해에도 챔피언 자리를 유지했다.
이 정도 했으면 필자도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이 되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경기대학교 사회교육원의 ‘댄스스포츠 코치아카데미 코스’에 도전했다. 1년 만에 1, 2급 자격증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 올림픽공원에서 가르치던 선생이 영국 유학을 권했다. 댄스스포츠의 본고장은 영국이며 거기 가서 공부하고 국제지도자 자격증을 따가지고 오면 우리나라 댄스 역사에 드문 일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영국에 유학할 준비로 개인 레슨을 받으며 국제지도자 자격증 코스를 공부했다. 6개월 공부 후에 영국 런던의 유서 깊은 ‘쌤리댄스스쿨’에 갔다. 지도교사로 'Technique of Latin Dancing' 이라는 책을 낸 라틴댄스 계의 전설 월터 레어드의 비서였으며 현존 최고의 지도자 준 먹머르도 여사를 만났다. 2개월간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집중적인 댄스 공부와 연습을 하며 결국 ‘국제지도자 자격증(IDTA:International Dancesport Teachers Association)’을 따 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영국에 가서 이 자격증을 따 온 사람은 몇 몇 댄스 계 원로에 불과했는데 동호인에 불과한 필자가 이 자격증을 들고 들어온 것이다.
개선장군처럼 귀국한 필자 주변에 댄스동호인들이 모여들었다. 그렇게 해서 ‘댄스엔조이’라는 댄스 동호회를 만들었다. 무려 5년 동안 회장을 맡으며 댄스스포츠 동호회를 키웠다. 당시에는 1주일의 거의 절반을 댄스 강습으로 보냈다. 그 과정에 샤리권(권금순)이라는 학원 원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영국에서 귀국 직후 ‘댄스엔조이-라틴댄스’라는 책을 내려고 ‘댄스스포츠코리아’라는 잡지사에 찾아 갔다가 그 자리에서 편집 기자 자리를 제의받았다. 책도 나왔고 3년 후에는 ‘댄스엔조이-
라틴댄스 실전과 이론’, ‘댄스엔조이 – 모던댄스’, ’댄스엔조이 - 즐거운 댄스 라이프‘ 3권을 동시에 냈다. 그리고 10년 후 낸 ’캉캉의 댄스이야기‘까지 내면서 댄스 칼럼니스트로서 자리를 굳건히 했다. 특히 ‘댄스스포츠코리아' 잡지사의 기자 자리는 필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댄스 잡지는 드물지만 국내에서 발행되는 유일한 댄스 잡지라서 권위가 있었다. 국내 댄스 경기 대회나 행사에는 언론사 자격으로 VIP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국내 댄스 계 중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세계적인 챔피언들을 인터뷰하여 기사화할 수 있었다.
댄스 인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얘기하자면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빼 놓을 수 없다. 원래 장애인들과의 만남은 94년 ‘댄스 동호회’에 나온 시각장애인들을 통해서였다. 몇 사람을 가르치고 있는데 혼자는 힘들다며 도와달라고 하여 갔던 것이다. 자이브를 중심으로 가르쳤는데 시각장애인들도 곧잘 했다. 처음에는 물론 막막했으나 그들도 노력했고 필자도 가르치는 노하우가 생겼다. 그들과 함께 여성의날 행사에 오프닝 무대에서 춤췄는데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참석한 자리였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도 함께 오프닝 무대를 자이브로 장식했는데 그때는 당시 영부인 권양숙 여사가 참석했었다. 시각장애인의날 행사 때 객석을 보니 대부분 시각장애인이라 보이지도 않는데 춤을 춰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시큰둥했던 필자가 부끄러웠다. 보이지도 않고 댄스화 갈아 신기도 귀찮으니 운동화 신고 그냥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 파트너는 진지하게 임했다. 끝나고 사진을 같이 찍자고 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사진을 찍어 봐야 볼 수가 없는데 왜 찍느냐”고 물었더니 아이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아이들은 정상적인 시력을 가졌다고 했다. 이들과의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댄스대회가 없어 더 이상 끌고 나가기 어려웠던 탓이다.
또 다시 10년만인 2013년 서울시장애인댄스연맹에 코치 겸 선수로 들어가게 되었다. 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이 정식으로 발족하여 전국적으로 경기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너무 나약해서 안마사 시험에도 떨어졌다는 40대 할머니를 파트너로 하여 선수로 출전했다. 처음엔 왈츠 단일 종목으로 동메달을 겨우 땄는데 스탠더드 5종목을 다 연습하고 나니 금메달까지 딸 수 있었다. 한 대회에 3개 부문까지 출전할 수 있으니 출전만 하면 메달을 수확했다. 이 할머니 파트너가 은퇴하고 나서 만난 파트너 중 최고였다. 나이도 40대라 젊고 체형이 날씬했다. 국내 ‘스타킹’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플라멩코 춤에서는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이 파트너 덕분에 국립극장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장애인 문화예술 대상’에서 대중무용 댄스스포츠 부문에서 수상을 했다. 장애인 댄스경기 대회는 대개 오전 중에 끝나지만 이 파트너와는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댄스경기대회에도 출전했다. 2014년 여수에서 벌어진 ‘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는 오전에 장애인 부문에서 3경기를 뛰고 오후에 일반인들끼리 겨루는 장년부, 일반부, 아마추어부까지 결승에 올라 나란히 우승, 우승, 준우승하는 쾌거도 이뤘다. 스탠더드 5종목을 뛰려면 대단한 체력이 요구돼 세 부분을 연속해서 출전하는 선수도 처음이라며 화제가 되었다. 이 파트너도 건강상 그만두게 되어 아쉬웠다.
2015년에는 새 파트너를 만나 ‘전국체전’에서 동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뤘다. 비록 동메달이나 덕분에 서울연맹이 ‘댄스스포츠 전국대항전’에서 간발의 차이로 우승할 수 있었고 전체 장애인종목에서도 만년 단골 우승인 경기 다음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글쓰기
필자에게 글재주가 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이다. 국어시간에 다음 배울 것을 짧게 축약해 오는 ‘짧은 글짓기’에서 늘 선생님의 칭찬을 받았다. 받아쓰기는 늘 만점이었고 국어 성적도 거의 만점을 받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는 것. 그래서 글쓰기가 좋아졌다. 그 당시만 해도 책은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만화를 많이 본 것이 어휘 구사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에는 전국적으로 글쓰기 열풍이 불어 학교 내에서는 물론 서울 단위에서도 ‘어린이글짓기대회’가 열렸다. 당시 대회에서 필자는 후배 여학생과 단 둘이 입상하고 돌아와 교내 스피커를 통해 방송도 하고 전체 조회 시간에 교단에 서서 수상작 낭독도 했다. 그 인기 덕분에 전교어린이회장까지 했다.
중학교 때는 문예반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당시 ‘학원’이라는 학생 잡지에서 하는 ‘학원문학상’에 응모했더니 수상했다. 당시 학교 정문에 플래카드가 붙기도 했다. 당시 그림도 좋아해서 미술반에 들어갔으나 저녁 식사도 못 한 채 매일 밤 10시까지 버티기가 힘들어 그만 두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중학교 때 못한 그림 공부에 미련이 남아 사진반에 들어갔다. 그림은 한 장 그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사진은 셔터만 누르면 되니 적성에 맞았다. 예술사진이니 작품성도 있어야 하고 설명과 제목도 멋지게 달아야 하는데 그림과 글쓰기에 대한 갈증을 한꺼번에 충족시켜주는 것 같아 한동안 사진에 빠져 들었다.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도 구성해서 활동했다.
사진에 꽂혀 있떤 필작 다시 글에 손을 댄 것은 40대 초반으로 직장에서 자리가 잡혔을 때였다. 젊었을 때부터 외국을 자주 다니면서 느낀 점들을 신문에 독자 투고했는데 인정받았다. 1000여 편의 독자투고 내용을 책으로 3권 냈고 서울 서초구청장으로부터 기록인증서도 받았다.
독자투고는 글이 짧아 하고 싶은 말을 간단명료하게 담아내야 했다. 그러나 글이 길지 않아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댄스 동아리를 만들면서 이 갈증을 충족할 수 있었다. 당시 인터넷에 댄스 칼럼을 길게 올린 것이다. 이 칼럼은 인기도 높었다. 그 글들을 모아 2004년 영국 유학 후 ‘댄스엔조이’라는 책을 4권 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7년 ‘유어스테이지’에 시니어 리더로 합격하면서부터였다. 블로거를 모집했는데 당시 필자는 블로그가 뭔지도 몰랐으나 그간 인터넷에 올린 글들 덕분에 합격한 것이다. 그때부터 ‘캉캉의 글모음’이라는 블로그를 만들었다. 이 블로그로 2012년에는 ‘대한민국 100대 블로거상’도 받았다. 필자 블로그는 하루 방문객 1500명 내외이더니 2016년 5월 드디어 누적 방문객 300만 명을 돌파했다.
2010년에는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한 ‘액티브 시니어 자서전 공모전’에서 우수상으로 2등상을 수상했다. 1등상을 수상한 사람은 필자보다 10세 이상 연배로 전쟁도 직접 겪었고 인생을 모범되게 살아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방송, 잡지 등에서는 필자에게 출연 교섭을 많이 해왔다. 춤이 그림이 되기 때문이다.
블로그의 힘은 대단했다. 필자 블로그를 검색한 방송, 잡지 등에서 섭외가 많이 들어 왔다. ‘시니어 파트너즈’에서 지원해준 덕도 많이 봤다. 한국의 모든 공중파에 나갔고 케이블 TV까지 합하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출연했다. 한 방송국에서는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며 무려 10일간을 매일 녹화하기도 했다.
블로그는 현재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이다. 하루에 글 하나는 꼭 올린다. 글을 쓸 때 가장 마음이 편하고 생각이 정리되어 힐링되는 것 같다. 자꾸 희미해지는 기억력을 붙잡으려면 일상이든 독후감이든 영화 감상문이든 바로 써둬야 한다.
사회 활동
초등학교 때 어린이회장을 한 이래로 감투 복은 있는 모양이다. 대학 시절에 4학년이 관례로 맡던 사진반 회장을 2학년 올라가자마자 맡더니 ‘전국대학생사진동아리’’를 결성하여 회장단을 꾸리기도 했다. 군 생활 때도 동기들과 선배들이 즐비한데도 중대 전체의 선임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참여하는 곳마다 크고 작은 모임에서 회장을 많이 했다. 리더십도 있는 편이지만 말이 많지 않아 카리스마가 있다고 한다. 틀이 좋다거나 돈이 많거나 말을 잘하는 일반적인 요소는 없으나 중심을 잘 잡고 전체와 미래를 보는 시각이 있다는 평이다.
퇴직 후 삶은 IMF 외환위기로 고통받을 때를 생각해 보면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직장 생활 때 인적 관계는 퇴직 이후 거짓말처럼 멀어져 갔다. 새로 새로운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댄스스포츠에 집중한 덕분에 ‘댄스엔조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었고 5년간 회장을 맡았다. 동호회를 운영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유어스테이지’에서 공모한 시니어 리더들의 모임에서도 5년째 회장을 하고 있다. 회장 맡은 것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회장을 맡은 덕분에 책임감을 가지고 여러 좋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다는 것이 좋다. 그런 면에서 ‘브라보 마이라이프’ 기자 활동과 새로 맡은 운영위원회장 자리도 기대가 크다.
요즘은 유난히 발이 넓은 동네 친구 덕분에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 대표로 참여하고 있다. 그 덕분에 ‘KDB 시니어 브리지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동문회 등 거기서 파생되는 여러 모임에도 나가고 있다. 협회 자체의 행사나 프로그램도 많다.
강의도 자주 나간다. 퇴직을 앞둔 우리은행 지점장급 직원들을 대상으로 생산성본부에서 해마다 인생 이모작 강의를 했었다. 200명을 대상으로 하루 8시간 하는 강의이다. 퇴직 후 16년차에 들어섰으니 인생 이모작 선배로서 그간 경험한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경험을 전해주는 강의이다. 노사발전위원회에서도 공모전 입상을 한 덕분에 비슷한 내용으로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도심권 이모작 센터’’, ‘사회연대은행’ 등에서도 강의를 해오고 있다. 댄스스포츠 강의도 하지만 홀로 살기, 파워 블로거 되기 등 테마도 다양화하고 있다.
필자 스케줄 표를 보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꽉 차 있다. 동호인들끼리 댄스하는 날, 노래배우러 가는 날, 책 만들러 가는 날, 댄스 동아리 강의 하는 날, 장애인 댄스 교습 및 댄스 선수 연습하는 날이 고정되어 있다. 일요일만 비워두고 있다. 그렇다고 전혀 틈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그런 스케줄은 대부분 저녁 모임이거나 한 나절 정도 걸리기 때문에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다. 특히 남는 시간은 집 근처에 공유사무실이 있어 글쓰는 데 활용한다.
어떤 면으로 보면 너무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매력 없는 남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여유 있게 차 한 잔 하면서 같이 대화라도 나누고 싶은데 필자처럼 바쁜 사람에게 전화했다가는 바쁘다며 거절당할 게 빤하다는 것이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가까운 사람들 인터뷰가 있었다. 필자도 동석한 자리이므로 좋은 대답을 기대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절대 바쁜 척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전에는 댄스 하러 가는 날이면 다른 스케줄은 아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댄스는 어차피 여기저기서 하고 있고 한두 번 쯤 빠져도 큰 문제 아니니 결석을 택한다. 다른 고정 스케줄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가 60대 중반에서 70대 중반이라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런 것 같다. 아직 건강하고 활동력도 있다. 노후 대비 경제력을 걱정할 정도는 아닌 것도 다행이다. 사주에서 보듯 무난하고 평탄하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인생의 정점에서 ‘브라보 액티브 시니어 인생’을 사고 있는 셈이다.
은 무용가 겸 명상 수행자 홍신자가 1993년에 낸 동명 에세이의 개정판이다. 당시 70만 부 이상 팔리면서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고 일본과 중국 등에도 번역되는 등 수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아방가르드 무용가로 잘 알려진 홍신자는 뉴욕에서 활동하던 중 돌연 인도로 떠나 수행했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무용·예술 전반에 걸쳐 다양한 활동을 해온 그녀는 71세 때인 2001년 독일인 베르너 사세 교수와 결혼했다. 끊임없이 갈등하며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다시 을 펴낸 계기
이 책을 펴내기 전 저는 이미 예술가로, 명상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제 남다른 삶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이들을 위해 이 책을 다시 펴내자고 여러 출판사에서 제안이 오기도 했고요. 요즘 시대는 물질적으로 아주 풍요로워지고, 또 시대적 상황도 개인의 생활도 매우 자유로워졌지만, 아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찾을 자유를 얻지 못한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에 담긴 내 삶의 경험들이 도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유를 위한 변명’이라는 제목의 의미
자유는 이미 우리 안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자유란 좀 더 내면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우리 생명과도 같은, 공기와도 같은 것들이지요. 그러나 아주 멀리 있다고 착각하고 그것을 찾으려고 방황하며 온갖 만행(萬行)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것이 다 변명이 아닐 수 없지요.
23년 전 책을 낸 이후 삶의 변화
그때는 진솔하게 그때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그대로 써 나갔을 뿐입니다. 사실대로 썼던 것이니, 지금이라고 다르게 쓸 수가 없지요. 다만 제가 그 책을 썼을 때만 해도 지금보다 젊었습니다. 젊음은 좀 더 역동적이고, 야망과 불안한 미래에 대한 의심과 혼란으로 뒤엉켜 앞만 보고 달려가는 시기이기에, 무언가를 놓친 것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 이후의 이야기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20~30대 시절과 비교해, 현재의 삶에서 누리는 자유
나이가 들수록 비우는 연습을 많이 하게 됩니다. 나누고 용서하고 정리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어제보다 오늘이 더 중요하고 내일보다도 오늘이 더 중요하게 됩니다. 즉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젊음은 앞만 보고 질주하는 시기이고, 무언가를 축적하는 시기입니다. 젊은 시절에 비해, 지금은 이 풍요로운 ‘지금의 시간’을 누릴 자유가 늘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도에서 지내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냈는데,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죽음은 ‘무(無)’입니다. 우리는 점점 무가 되기까지 가벼워지고, 작아집니다. 죽음이란 것을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막연한 두려움을 품고 있지만, 사실 새털처럼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면 무슨 두려움이 남아 있겠습니까?
자유를 갈망하지만, 어려워하는 중·장년을 위한 조언
많은 침묵을 가지세요. 우리는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침묵을 통하여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 해답을 찾으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지요. 고요한 침묵이 아닌 시끄러운 소리들, 책이나 남의 말을 빌려 쉽게 자유를 찾으려 한다면 더 늦어지거나 영원히 못 만날 수도 있습니다.
>>홍신자
현재 , , 등 국제무대에서 솔로공연을 하면서 인문학 콘서트, 힐링 캠프 등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 등이 있다.
장진 감독의 영화 을 원작으로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내레이션이라는 형식을 더한 작품이다.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5년 만에 특별 귀휴 대상자로 선정돼 처음 아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찾아간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렸다. 아버지와 아들의 애틋한 감정을 담아낸 다양한 음악 레퍼토리로 눈과 귀가 즐거운 연극을 관람할 수 있다. 작품 속 아들과 같은 또래의 아들을 둔 아버지, 정태영 연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연출을 맡게 된 계기
10년 전 장진 감독의 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따뜻한 이야기에 감동했고, 무대에서 표현하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정용석 프로듀서가 이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면 어떻겠냐고 제안해 흔쾌히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관객과 따뜻한 이야기를 함께할 생각에 설렙니다.
무대를 연출하며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업
영화 시나리오를 무대 언어로 바꾸는 작업이 우선되었고, 15년 만에 만난 아들과 아버지가 함께하는 하루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자간의 정과 사랑을 어떻게 형상화할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연극이지만 음악적 요소를 도입하여 노래와 인물들의 테마를 만들어 정서의 흐름을 이어지게 했습니다.
연극 속 아들의 나이와 비슷한 고등학생 아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부자의 경험이 작품에 반영된 부분이 있는지
연습하는 동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들과의 경험을 반영하기보다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장년 관객이 보았을 때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장면(또는 대사)은?
아버지 강식이 15년 만에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 또 얼굴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아들과 만나는 장면.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숨이 가빠옵니다. 오늘날 아버지라는 대부분의 존재가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바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많은 아버지가 가족과의 소통이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그 아버지는 아버지이기 이전에 아들이죠. 누군가의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이 연극의 많은 장면이 관객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에는 좋은 대사가 많지만, “난 오늘 이 집에 온 손님입니다. 오늘 난 아들에게 손님이랍니다. 왔다 가는 인사하고 안부를 나누고 그러다가 인사를 하고 가야 하는 손님입니다. 안녕. 잘 지냈니? 잘 지내라. 다음에 행여 기회가 된다면 또 보자. 안녕”이라는 대사가 현시대의 많은 아버지가 공감할 수 있는 대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추천하는지
모든 아들, 아버지. 이 시대 모든 가족 구성원에게 추천합니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나의 존재가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더불어 바쁜 사회생활 속에 살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정태영 연출
연극 , 뮤지컬 외 다수 연출.
시니어 전직지원 전문 ‘앙코르 브라보노 협동조합(이사장 신창용)을 찾았다. 충정로 소재 이동교육장을 살피고 궁금한 점은 정운관 이사에게 질문하였다.
창업을 준비하는 이재동(73) 교육생에게 궁금점 몇개를 물어왔다.
△참가동기와 희망은 무엇인가.
“100세 장수시대라지만 50대 초반이면 은퇴가 시작되는 것이 현실이다. 70대 중반에 이르렀지만, 인생 재설계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에서 터득한 귀중한 경험을 후세대와 공유하며 보람차게 살고 싶다. 청장년 일자리창출에 기여하는 창업을 하고자 한다.”
앙코르 브라보노협동조합은 2015년 10월 13일 설립하였다. 조합원 11명은 20~30년 금융, IT, 제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을 가진 40~60대 중장년으로 구성되었다. 사회적 경제, 전직지원, 상담 및 코칭 등 협업도 전문화 되었다.
△조합의 사업목적은 무엇인가?
“장년 퇴직(예정)자 및 경력단절 여성에게 인생후반 수입 뿐 아니라 개인적 의미, 사회적 가치를 만족하는 앙코르 커리어를 제공하고, 사회적 경제 기업에 진정성과 지식을 갖춘 앙코르 인재를 육성, 연결하는 것이다.”
△사업모델 및 상품, 서비스는 어떻게 특화되었는가?
“앙코르 커리어로의 전직지원, 전직지원 코치, 상담, 전문가 양성 및 커리어 전환을 위한 컨텐츠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현장중심 커리큘럼을 운영한다.“
조합은 2015년 사회연대은행 KDB 시니어브리지를 시작으로 신나는조합, 사회적기업진흥원, 동부여성발전센터 등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사회적기업가 육성, 취업과 전직지원전문가 과정을 운영한다.
전직지원 성공요인은 어디에 있는가?
“조합원은 열정과 시간을 가진 퇴직자가 중심이다. 신나는 조합, 사회연대은행 등 사회적 기업 중간관리기관과의 협약을 통한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교육과 전직을 연계하는 사업이 주효하다.”
△교육생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영리 기업에서의 오랜 경륜은 살리되 새로운 일터, 사회적 기업의 특성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일을 지시하던 과거와 달리 많은 것을 직접 해야 하므로 자기 역량 강화에 노력하여야 한다.”
정운관 이사는 장래 계획을 “한국의 선도적 사회적 기업으로서 특히 베이비부머의 안정적인 앙코르 일거리 찾기에 주력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80년 만의 초여름 더위가 대지를 달구고 있다. 건강에 유의하면서 시니어의 전직지원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바라며, 정운관 이사의 보충설명에 감사한다. 홈페이지: www.encorebravono.com
역사학자 문강 이이화(文岡 李離和·79). 그의 아버지이자 주역의 대가인 야산 이달(也山 李達: 1889~1958) 선생이 지어준 독특한 이름과 호에는 빛난다[離]는 뜻과 글 봉우리[文岡]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야산 선생은 다섯 아들과 딸에게 8괘 중 부모를 뜻하는 ‘건’과 ‘곤’을 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선견지명일까? 문강 선생은 역사 통서 를 집필해 높은 평가를 받았음은 물론이고 한국사의 대중화를 위해 한 줄기 빛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겪은 대한민국 역사 중 가장 잊지 못할 사건은 1987년 6월에 일어났다. 거리는 마스크를 쓴 시위대와 전투경찰, 짱돌과 최루탄, ‘호헌 철폐, 독재 타도’가 적힌 피켓과 닭장차가 맞서며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6월 항쟁이다. 당시 50세였던 문강은 하루도 쉬지 않고 눈물과 함성으로 젖은 현장에 나가 민족 헌법 쟁취를 외치며 정보를 수집하고 다녔다. 그는 를 보며 그날의 역사 속 그날을 떠올려본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6월 항쟁이 일어나기 전해 2월, 이이화 선생(현 역사문제연구소 이사)과 서중석 교수(현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는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이것을 대중화한다’를 목표로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당시 집중적인 집단 연구에 열성을 다하던 그들에게 6월 항쟁은 가장 생생하고도 의미 있는 사건으로 남았다. 수많은 이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이 정치적 상황과 무지로 인해 훼손되어가는 것이 안타깝다는 문강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 교수는 우리 국민이 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2005년 를 출간했다. 문강은 그가 집필하는 동안 응원을 아끼지 않았고, 초판본(2005)에 추천사를 쓰는 등 적극 격려했다.
“해방 이후부터 6월 항쟁까지 사진, 만평, 우표, 지도 등을 곁들여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했어요. 책이 나오자마자 읽어보고, 이건 정말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했죠. 현대사에 관한 책을 쓰려면 영어 원서도 보고 해야 하는데, 나는 한자는 능통하지만, 영어는 한계가 있거든요. 이런 책을 써서 대중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늘 했는데, 서중석씨가 한다 해서 정말 기뻤어요.”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절규로 가득했던 6월의 거리
문강은 자신의 책에서 주로 다뤘던 고대사나 삼국시대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우리 현실에 가장 가까운 현대사를 알아야 현재의 어려움에 대처하는 판단력이 생긴다고 역설한다. 특히 6월 항쟁과 같은 민주운동은 자신의 이야기이자, 누군가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이며 결국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
“지금도 6월 항쟁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뿌듯해요. 매일 시위 현장에 나갔어요. 지나가던 버스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 사람들의 함성, 진동하는 최루탄 냄새까지 생생하게 떠오르죠. 우리 국민 스스로 민주 헌법을 쟁취하고 민주주의 절차를 찾아냈다는 점에서 세계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사건이라 생각해요.”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역사문제 연구 자료를 발표하거나 강의하는 곳에는 수백 명의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를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는 문강은 과거에 비해 그런 열기가 부쩍 줄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 시절을 겪은 중·장년도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 사건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니 아이들은 더 모를 수밖에요. 인터넷상에 퍼지는 그릇된 정보나 얕은 지식만 가지고 시위나 데모 등 민주운동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여기기도 하죠. 역사를 정확히 알고 그 배경을 이해해야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도 나름의 근거에 의한 판단을 할 수 있는데 말이에요.”
완결 10년, 그리고 다시 10년
이이화 선생 하면 를 빼놓을 수 없다. 1994년부터 10년간 22권으로 펴낸, 그야말로 인생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책이 완결되고 약 10년이 흐른 2015년, 그는 개정판을 냈다. 처음 완성하는 데만 10년, 그리고 다시 펴내는 데만 10년이 걸린 셈이다. 여전히 독수리타법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그가 오랜 시간을 투자해가며 개정판을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 책을 낼 때는 우리 민족사·민중사·생활사 등을 어느 한쪽에 편협하지 않고 두루두루 종합적으로 쓰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완성하고 난 뒤에 새로운 사건들이 일어났죠. 동북공정이나, 일본 위안부 문제 등 더 이야기해야 할 것들이 생겼어요. 우리 아이들도 볼 책인데 그런 내용이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가 한국통사를 쓰고자 결심하고 아들에게 컴퓨터를 배워 1권을 낸 지도 20여 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그가 느꼈을 변화가 궁금했다.
“현대에 들어오니 민주운동은 다 사라지고, 오히려 민주운동을 하는 사람은 경제발전에 방해되는 인물로 취급하더라고요. 젊은이들은 ‘종북좌파’니, ‘빨갱이’니 하는 말을 개념 없이 쓰고요. 민주의식이 결여되다 보니 배려나 나눔의 정신도 사라졌죠. 오늘날 이만큼 살만하면 남을 배려할 줄도 알고, 인권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한데 더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아요.”
문강은 그런 의식을 지닌 부모세대의 영향이 자식세대에 뻗치는 것을 우려한다.
“요즘 부모들을 보면 영어, 수학 공부는 시키면서 정작 인성교육은 소홀히 하는 것 같아요. 아이를 인간답게 키우기보다는 잘난 사람으로만 만들려 하죠. 자기 자식만 해를 입지 않으면 된다는 이기심에 공동체 생활에서 지켜야 할 교통질서나 예의범절은 뒷전이고요. 예전에는 안 그랬거든요. 남을 생각하고 민족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시위도 활발할 수 있었죠.”
그는 어른세대가 아이들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것과 더불어 나누고 베푸며 살길 바란다고 말했다.
“6월 항쟁 때 상인들은 거리의 학생들에게 김밥이나 사이다 같은 것을 아낌없이 주었어요. 요즘처럼 자기 이익만 생각한다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없었겠죠. 나는 한국전쟁 유족이나 독립투사 후손을 만나면서 내 개인 소득에 비해 돈을 많이 썼어요. 나야 세 끼 밥 잘 먹고 있고, 병도 없고, 어디 투자하는 것도 아니니 삶의 여유가 그런 쪽으로 흐른 셈이죠. 그게 나눔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해외 재벌들을 보세요. 사회에 다 내놓잖아요. 그런 걸 보면 우리 사회는 나눔의 문화가 부족하다고 느껴요.”
어린이 도서관 인기쟁이 ‘역사 할아버지’
그가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 그동안 낸 책만 100여 권이다. 개정판이나 공동 저서 등을 포함하면 200여 권에 달한다고 한다. 그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어린이를 위한 역사책이다. 문강은 “역사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쉽고 친근하게 역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그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표현하려고 애쓰는데 쉽게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아는 게 많아도 어린이 책을 쓰는 데는 지장이 생긴다는 것을 느꼈어요. 보여줄 것만 보여주면 되는데, 자꾸 내가 아는 걸 다 드러내려고 하니까 그게 참 어려워요.”
책을 쓰는 것 외에 그가 꾸준히 하는 일 중 하나는 독자와의 만남이다. 요즘도 그가 사는 파주 헤이리 근처 도서관에서 어린이 독자를 만나고 있다고. 문강은 어린이 팬 사이에서 ‘역사 할아버지’로 통한다며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얼마 전에도 춘천에 있는 마을도서관에 다녀왔는데 그때 온 부모와 아이들이 인터넷으로 편지도 주고 참 즐거웠어요. 최근 인터넷에 한 군인이 를 10권째 읽었다며 소감을 썼더라고요. 자신이 나중에 사회생활을 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다면서요. 역사 공부가 다른 게 아니에요. 과거에는 이랬는데 나는 이렇게 살아야겠다. 그런 상상력을 키우고,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는 과정이죠. 그런 독자를 만날 때면 내가 그동안 헛짓을 한 건 아니라는 생각에 보람을 느껴요.”
히 식스(He 6). 1960~1970년대 미8군 무대와 이태원·명동 일대 음악 살롱을 격렬한 록 음악으로 장악하던 여섯 명의 청년(권용남, 김용중, 김홍탁, 유상윤, 이영덕, 조용남)이 있었다. 당시 젊은이들의 우상이자 거울과 같았던 그들은 4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또 다른 세대의 거울 앞에 섰다. 중·장년의 답답한 마음을 달래주고, 낭만을 추억하는 그들의 새로운 이름은 ‘파파스(PAPAS)’ 밴드다. 그 이름처럼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음악만 있다면 언제나 20대로 돌아간다는 그들을 만나봤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히 식스 원년 멤버였던 조용남(曹龍男·69), 유상윤(兪尙潤·68), 김용중(金用中·68)을 주축으로 조용필 밴드 ‘위대한 탄생’의 이건태(李建泰·63), 변성용(卞成鏞·63), 와이키키브라더스의 리더 최훈(崔薰·59)이 합세한 파파스 밴드. (다른 히 식스 멤버들은 건강이 좋지 않거나 해외에 거주해 함께하지 못했다고) 히 식스 2기로 함께 활동했던 고(故) 최헌(1948~2012)을 추모하기 위해 다시 모인 것이 밴드 결성의 계기가 됐다.
“(조용남)보컬이었던 최헌씨가 작고한 후, ‘2013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에서 대통령표창을 받았어요. 고인이 되어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 수 없으니 같은 팀이던 우리가 그를 위해 연주하면 어떨까 생각했죠. 그렇게 잠시 모여 공연을 했었는데, 김용중씨가 못내 아쉬웠는지 ‘우리 다시 뭉쳐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그 친구가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정말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뜻을 모았죠.”
당시 간암을 앓고 있던 김용중씨는 자신을 가장 활력 넘치게 했던 젊은 날의 그 음악이 간절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한 음악으로 삶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았다.
“(김용중)다 같이 모여 연습하는 것은 일주일에 하루뿐이지만, 그 하루를 위해 6일 동안 열심히 준비해야 해요.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푹 빠져 지낼 수 있으니 참 행복하고 재밌어요.”
파파스 음악, 중장년 마음의 ‘사이다’
보컬그룹사운드라는 것을 강점으로 내세운 그들은 각자의 포지션(베이스-조용남, 색소폰·건반-유상윤, 리듬기타-김용중, 건반-변성용, 드럼-이건태, 리드기타-최훈)과 더불어 모두 보컬을 겸하고 있다. 그들이 주로 연주하고 부르는 음악은 1970년대를 풍미하던 올드 팝과 로큰롤이다. 젊은 시절 손끝이 닳도록 기타를 치고, 목청이 나갈 정도로 불렀던 노래들이다. 부른다기보다는 부르짖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당시 나온 기사들만 보아도 그들의 모습을 ‘폭발하는 젊음의 절규’, ‘화려한 조명 아래 정글에 가까운 노래’ 등이라 표현했으니 말이다.
파파스 밴드의 맏형인 조용남씨는 히 식스 시절 한 인터뷰에서 “젊은 세대의 음악인 우리의 울부짖음을 통해 위안을 얻는 거죠. 청량음료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의 참 마음을 (어른들이) 알아달라고 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언어 중에 ‘사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이다(탄산음료)처럼 시원하게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을 표현할 때 쓰는 신조어다. 그 시절에 그들의 음악이 바로 ‘사이다’ 같은 존재였던 것. 위축되고 권태에 짓눌린 젊은 세대의 마음을 톡톡 쏘는 음악으로 시원하게 만들어준 그들이다. 그리고 현재, 그들이 그때의 곡들을 다시 연주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유상윤)젊은 사람들이 요즘 중·장년은 트로트나 뽕짝 같은 것만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당시 우리에겐 그룹사운드의 음악이 가장 세련되고 인기 있었죠. 밴드 간 경쟁도 대단했어요. 그 치열하던 시절에 심취한 음악을 연주하다 보면 꼭 20대로 돌아간 것 같아요. 패기와 열정으로 함께한 친구들도 같이 있으니 철없던 시절 추억들도 새록새록 떠오르고요.”
뭉클한 옛 기억에 잠기는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파파스의 음악을 듣는 관객 역시 혈기왕성했던 시절의 추억 한 자락을 곱씹어 본다.
“(최훈)얼마 전에 우리 공연을 보고 간 한 관객이 자기 블로그에 ‘팬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말에 울컥했다’고 썼더라고요. 젊은 친구들은 경험하기 어려운 오랜 팬과의 음악적 교감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죠. 우리의 음악을 통해 그런 짙은 감정을 공유할 때가 참 뿌듯하고 흐뭇해요.”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순간의 감동과 즐거움일 수도 있지만, 파파스 세대에게 음악이란 과거의 리듬을 되살아나게 하는 촉매제와도 같다. 조용남씨는 “음악이 그래서 좋은 거잖아. 내가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음악이 나오면 그 시절로 확 돌아가는 거야!”라며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보였다. 그의 말에 “맞아! 맞아!”라며 맞장구치는 파파스 멤버들의 모습에서 그들이 간직하고 있을 뜨거운 추억의 온도를 가늠할 수 있었다.
‘배려’로 다져지는 파파스 음악
그룹 ‘와이키키브라더스’와 ‘믿음소망사랑’의 핵심 멤버였던 기타리스트 최훈. 사실 그도 웬만한 공연에 나서면 대선배 대우를 받지만 파파스에서는 귀염둥이 막내다.
“(최훈)히 식스의 팬이었는데 그들과 함께 연주하는 지금 이 순간이 무척 영광스럽고 소중해요. 형님들의 완벽한 소리를 들을 때면 지금도 전율이 느껴지곤 하죠. 다른 데서는 저도 긴장을 안 하는데 선배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늘 신경 쓰고 풀어지지 않으려 해요. 그러면서 음악에 더 집중하고 완성도를 높일 수 있어 좋더라고요.”
그만큼 록 밴드 사이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그들이지만, 원로(元老) 대우는 사양한다. 왜일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유상윤)음악 하는 그 순간만큼은 스무 살이라니까. 나는 젊고 싱싱한 기분으로 연주하는데 극진한 원로 대접을 받으면 어쩐지 팍 늙어버린 기분이 들잖아요. 무대에 올랐을 때의 마음가짐은 몇십 년이 지나도 한결같은 걸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음악과 함께해 온 그들에게 무대는 편안한 놀이터와 같을 것이다. 하지만 무대에 오르기 전 긴장과 설렘으로 여전히 손에 땀이 난다.
“(이건태)연주하며 표현하는 퍼포먼스나 스킬은 능숙해졌을지 모르지만, 무대에 임하는 자세는 거의 변함이 없어요. 열심히 애정을 가지고 준비한 음악을 관객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늘 떨리고 신중하죠. 경력에 상관없이 청중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고요. 오히려 명성 때문에 책임감과 부담이 더 커졌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 더 신경 쓰이고 가슴이 뛰죠.”
그런 그들이 오랜 밴드 생활을 하며 터득한 삶의 지혜는 ‘배려’와 ‘양보’다. 밴드 음악은 무엇보다 팀워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파파스는 리더를 따로 두지 않았다. 모두 각 분야의 리더인 만큼 솔선수범하되, 서로를 존중하자는 의미에서다.
“(이건태)혼자 너무 튀려고 하거나 자기만 잘하려고 하면 좋은 음악을 만들 수 없어요. 젊은 시절에는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랐죠. 연습하다가 치고받고, 그러다 팀이 깨지는 경우도 많았어요. 지금 파파스 멤버들은 그 세월을 지나왔기 때문에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해요. 밴드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그게 옳다는 것을 아는 거죠. 그러다 보니 공연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세련되고 성숙한 음악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인터뷰 동안 변성용씨는 유독 말이 없었다. 하지만 틈틈이 멤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호응하고, 따뜻한 미소를 짓는 모습에서 그들이 말하는 팀워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팀 내 건반을 맡아 부드러운 멜로디로 멤버들의 개성을 살려주고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그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게만 보여…
그들의 무대는 ‘Can’t take my eyes off you’, ‘Boxer’, ‘Hotel California’ 등 팝을 비롯해 ‘초원의 빛’, ‘물새의 노래’ 등 히 식스 시절의 음악을 주요 레퍼토리로 구성한다. 대부분 30~40년 전 노래이지만, 가장 최근 만들어진 ‘사랑은 무슨 사랑’을 타이틀곡으로 선정했다. 이 곡은 1997년 조용남씨가 속해 있던 ‘2040 밴드’의 멤버인 김기표가 작곡했다. 20년 가까이 된 노래이지만, 당시 이미 중년이었던 그들의 마음을 담아 만든 곡이다. 가사는 이러하다.
‘왜 이럴까/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음악 속에 묻혀 산 나날/ 어느덧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게만 보여/ 그날의 꿈은 어디에/ 내 열정은 어디에/ 뒤돌아보면/ 못 견디게 그리워/ 가거라 아주 가거라/ 사랑은 무슨 사랑/ 내 나이 몇이더냐/ 이제부터인 것을…’
전반부는 담담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열정을 토해내는 듯한 보컬이 인상적인 곡이다. 특히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작게만 보인다는 노랫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조금은 씁쓸하게도 느껴지는 가사이지만, 그들은 “그거야 (나이가 들었으니)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음악과 동고동락한 지금까지의 삶이 살아갈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자 가치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파파스 멤버들이다.
나이가 몇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무대 앞에서는 늘 새로 태어나기 때문. 타이틀곡의 마지막 구절을 힘 모아 불러보는 그들이다.
“이제부터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