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붓을 들어 글을 쓰고 연구하다 보니 따르는 이들이 생겼다. 스스로를 제자라 칭했다. 그리고 스승을 따라 정진했다.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서로 의지해 돕는 일이 생겨났다. 눈빛 한 번에 손발 착착 맞는 환상적인 어울림으로 함께 익어간다. 사제지간 정이 쌓일수록 서로가 내는 향기는 깊고, 우정은 돈독하다. 일생일대 대업(?)을 마무리하고 오순도순 나들이 간다는 서예가 하석 박원규와 그의 제자 모임인 겸수회를 따라가 보았다. 마음 따뜻한 사람들의 소풍 길에는 기품 넘치는 특별함이 있었다.
何石이 아닌 兼修會가 주인공입니다
6월 초 화창했던 토요일 이른 아침,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주차장. 대형 관광버스 한 대가 겸수회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5월 말, 예술의전당 한국서예박물관에서 있었던 하석 박원규(이하 하석) 선생의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전’이 잘 마무리된 것을 축하하는 여행이었다. 하석 선생이 작업한 ‘부모은중경’의 실제 소장자이자 이번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지원한 석주미술관 류성우 관장이 마련한 자리였다. 지금까지 노고를 아끼지 않은 하석 선생은 물론, 그 옆에서 그림자처럼 따라준 제자들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을 전하는 뜻이라고 했다. 겸수회원들은 이날 광주시립박물관 서예전 ‘예결금란(藝結金蘭)’을 관람하는 것으로 일정을 시작했다. 이어 류성우 관장이 20년 넘게 조성 중인 대단위 문화 공원 ‘청사지향(靑思之鄕:영원한 청춘의 고향)’으로 가서 맛있는 요리와 공연을 즐겼다.
‘겸손함과 배움을 아울러 닦는 모임’이라는 뜻의 겸수회(兼修會)는 서두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서예가 하석 선생을 따르는 제자 모임이다. 하석 선생의 작업실인 석곡실에 모여 글을 배우고 익힌다. 지역도 세대도 성별도 직업도 너무나 각양각색인 하석 선생의 제자들. 제자라지만 그들 또한 누군가에게는 대 스승이기도 하다. 실로 색채 강한 무림고수 모임. 그럼에도 ‘겸수회’란 이름으로 모이는 순간 채도를 낮추고 묵색으로 모여 어우러짐을 즐긴다.
겸수회는 12년 전인 2006년에 생겨났다. 하석 선생이 붓을 잡은 지 55년이 됐다는데 너무나 늦은 출발이다. 하석 선생은 애초부터 본인을 중심으로 한 제자 모임 자체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제자들이 작은 모임을 만들면 하석 선생은 모임 이름을 지어주는 정도였다. 스승의 이름이 높아질수록 문하의 의미 또한 커졌다. 겸수회 총무 배효룡 씨는 겸수회 조직 배경에는 일종의 압박(?)과 필요에 의한 떠밀림이 있었다고 말했다.
“서예가 학정(鶴亭) 이돈흥(李敦興) 선생의 제자 모임인 연우회 때문이었어요. 2006년에 우리 서단의 대표적인 스승과 문하, 문파가 모여서 합동 사대문파 사문전을 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석 선생님은 제자 모임이 없으니까 연우회 임원진이 당황한 거죠. ‘도대체 하석 선생님 제자와는 어떻게 연락을 하냐!’, ‘하석 선생도 전체 제자 모임을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답니다. 그 바람에 겸수회가 생겨났죠. 2006년에 겸수회 창립전시 도록에 보면 왜 우리가 겸수회를 만들 수밖에 없었나가 적혀 있습니다.(웃음)”
당시 사문전이 없고 다른 서예가 제자의 요청이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모임이란 뜻이다. 조직을 만들어 세력을 키우는 데 별다른 흥미가 없었던 하석 선생의 뜻도 품성을 잘 알기에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겸수회는 생기고 난 뒤 다양한 면에서 하석 선생을 돕는 전문 지원단이 됐다.
느긋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전시 달인들
하석 선생이 6년의 공을 들여 쓴 ‘부모은중경’은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친 불교 경전 중 하나다. 이를 폭 145cm, 높이 340cm의 한지 여든한 장에 광개토대왕비에 쓰인 서체로 수를 놓듯 써내려갔다. 전시회 당시 눈에 잘 띄지 않는 높은 벽까지 이용해 작품을 걸어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후세에 역사적으로 남을 대작을 꿈꾸었고 길고 긴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진행한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하석 선생은 ‘부모은중경’ 여든한 장 중 마지막 장을 일종의 영화 엔딩 크레디트처럼 장식했다. 겸수회 제자의 활약도 여기에 기록했다. 이번뿐만 아니라 행사 때마다 도록 제작, 홍보, 현장 지원 등을 겸수회원이 도맡는다.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고 나서거나 서두르지 않고 잔잔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바로 겸수회다. 전시회가 끝나고 나서는 아무 일 없었단 듯 벼루 앞에 앉아 먹을 갈고, 종이 위에 한 자 또 한 자 글을 써나가는 사람들. 우리 시대의 잊힐지 모르는 것을 지키고 앉아 하루하루를 산다. 평범한 듯 특별한 겸수회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닐까 싶다
청룡포(淸泠浦). 정작 섬은 아니지만 섬처럼 외진 곳이다. 서강(西江)이 삼면을 휘감아 돌아나가고, 남서쪽 육육봉은 벼랑처럼 가팔라 어디에고 육로가 없다. 일러, ‘육지 속의 섬’이다. 배를 타야 닿는다. 강폭은 넥타이처럼 좁아 도선에 오르자마자 내려야 하지만, 강상으로 펼쳐지는 산수란 풍광명미, 눈을 뗄 겨를이 없다.
배에서 내려 청룡포 안통으로 접어들자 우뚝한 것이, 미끈한 것이, 당당한 것이 눈길에 가득 차오른다. 소나무들이다. 하나같이 굵고 크고 높으니 나무의 장한(壯漢)들이다. 또 여겨보자니 미모도 이런 미모가 없다. 풍만하면서도 늘씬하다. 쭉쭉 벋었으나 미묘하게 휘어 수려하다. 미인송(美人松)들의 경연장이라 할 만하다. 항간에, 산간에, 공원에 무시로 눈에 띄는 게 소나무이지만, 청령포 소나무들을 첫손가락에 꼽는 이들이 숱하다.
솔숲 사이 오솔길에 초록이 너울거린다. 허공을 통째 가릴 기세로 무성히 뻗친 솔잎. 그 사이를 간신히 통과한 햇살이 숲으로 스며든다. 그 한 줌 은빛 햇살마저 덩달아 푸른 기운을 머금는다. 초록 솔에 젖어서다.
숲 안에 감도는 공기는 가을처럼 서늘하다. 살갗으로 차게 다가오는 공기엔 후각을 자극하는 상큼한 향이 서려 있다. 이건 소나무들이 일제히 내뿜는 에테르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숲길에선 오감이 열릴 수밖에 없다. 시각과 촉각과 후각을 흔들어 일깨우는, 저 ‘감각의 제국’을 보라.
살면서 사귄 초목이 많고 많지만 소나무를 보면 늘 반갑다. 이승에서 만난 가장 친숙하고 가장 오래된 동무라 할 만하다. 저승 가는 길목에도 소나무 조경이 돼 있다면 발길이 더 사뿐하리라. 매양 사람에게 베풀기를 거듭한 나무이지 않던가. 나 태어날 적 대문간엔 생솔가지 꺾어 꽂은 금줄이 걸렸다. 지상의 첫날부터 소나무가 보초를 서줬던 거다. 무엇보다 소나무는 목재로 흔히 쓰여 사람에게 이바지한다. 건축의 재료로 불려가 집을 이루고, 집 안에선 가구가 되고, 가구 앞에서는 다탁이 되고, 다탁 옆에서는 바둑판이 된다. 구들을 데우는 땔감이기도 하고, 송화주(松花酒)와 솔바람과 솔그늘을 희사하기도 한다. 종단엔 관재(棺材)가 돼 사람의 마지막 여행길에 동행한다. 보시(布施)에 보시가 겹겹이니, 가히 소나무 보살이렷다!
청령포 숲엔 700그루쯤의 금강송이 주민을 이루어 산다. 촌장은 숲 복판에 선 관음송(觀音松). 높이 30여 m에 600살쯤의 나이를 자셨다. 위풍당당한 거목이다. 나무 아래에 선 순간 나는 물방개처럼 납작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관음송인들 풍진 세파를 피할 길 있었으랴만, 하늘 괸 기둥처럼 그저 헌칠하고 묵연하다. 둥치 곳곳에 땜질을 입은 건 비바람의 농간이 극심했다는 증명이겠지. 상처 없는 지속이 있는가. 장애 없는 활보가 가능하겠는가. 풍상이 곧 비결임을 암시하는, 저 향기로운 노거수!
소년 하나가 숲길을 걸어간다. 관음송 가지 틈새 턱에 걸터앉는구나. 누군가? 나어린 임금 단종(端宗)이다. 단종은 여기 청령포 숲에서 유배를 살다가 사약을 받았다. 정적(政敵)이 정적을 부리로 찍고 발톱으로 찢어발겨 피 묻은 권력을 틀어쥐는 게 인간세의 생리. 단종은 악마와 협약을 맺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탈취당했다. 1452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임금이 되었으나, 3년 만인 1455년 계유정난으로 실권을 장악한 숙부에게 왕위를 넘기고 형식상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이듬해 6월,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의 단종복위 음모가 발각되면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야사는 전한다. 소년 유배객 단종이 저 관음송 가지 턱에 자주 걸터앉아 궁궐을 그리워했다고. 명민한 준재였다 하니 사념이 깊었을 게다. 슬픔이 북받치면 소나무를 붙들고 울고 바위를 치면서 울었을 게다. 강물 가에 웅크려 소쩍새처럼 흐느껴 울었을 게다. 울었던 건 단종만이 아니었다지. 충신들이 문안을 왔다가 핏줄이 떨리게 울었다. 고을의 백성들이 서강 저편에서 절을 하며 울었다.
청령포 솔숲이 비경이라지만, 여기에 서린 서러운 역사란 꿈자리 어지러운 구렁텅이와 다를 바 없다. 청령포 물가에 놀빛 잠긴다. 붉은 해는 반드시 서쪽으로 지는데, 어린 유배객의 혼령은 어디로 흘러갔는가.
탐방 Tip
영월군 남면 광천리 서강변에 있다. 소나무 숲속 곳곳에 단종의 유적이 있다. 단종 어소(御所), 영조의 친필을 음각한 비(碑), 금표비, 왕방연 시조비 등등. 인근에 있는 장릉과 관풍헌도 단종 유적이니 연계 답사한다. 청령포 관람시간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입장료는 성인 3000원. 주차장과 배편은 무료.
세종특별자치시에는 모두가 잊고 있는 ‘개헌’이 살아 숨 쉬고 있다. ‘행정수도 세종, 개헌으로 완성’이라고 써진 현수막과 세워 놓는 간판이 곳곳에 설치되어있다. 옹골차다. 젊은 인구가 가장 많은 곳, 성장이 제일 빠른 곳으로 이미 이름을 날리고 있다. 광역지자체이지만 인구는 서울의 구청 하나 규모다.
세종의 남산 원수산
세종 신도심에서 등산할 수 있는 곳이 나지막한 원수산(251m)이다. 원수산은 도담동에서 걸어서도 접근할 수 있다. 등산로 입구에는 세종둘레길 안내판이 있어 각자의 체력에 따라 맞는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가장 기본은 이곳에서 출발해서 정상으로 가는 2코스다. 길지 않는 구간이며 한 시간 남짓이면 즐겁게 산행할 수 있다.
원수산 정상은 서울의 남산처럼 세종의 전망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동쪽과 북쪽으로 대단지 주택공사가 한창이고, 남쪽으로는 금강변에 수목원 조성공사가 바쁘게 진행되고 있다. 세종으로 이사하면 이곳에서 시가지를 한 번쯤 조망해보라고 권한다.
원수산 습지생태원
원수산 습지생태원은 산 중턱의 기존 골짜기에 있는 묵은 논에 다양한 습지를 조성하고 생태적 기능을 향상해 도시에 사는 아이들에게 소중한 생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 수생식물습지, 건생습지, 둠벙 등 생육조건에 적합한 수생 화초류가 식재돼 있다. 주변에는 어린이 모험놀이터, 야외피크닉장, 숲속 쉼터 등 시설이 마련돼 있어 가족과 연인이 함께 가벼운 소풍을 즐길 수 있다. 습지생태원을 가려면 원수산 근린공원 입구 덕성 광장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하고, 왼쪽 등산로를 따라 도보로 10분 정도 걸어 오르면 습지생태원을 찾을 수 있다.
수문 개방한 세종보
수문개방 6개월 만에 '맑은 금강'이 돌아오고 있다는 세종보다. 강바닥은 옛날 우기를 맞은 아프리카 초원처럼 푸른 식물로 가득하다. 세종보 수력발전소는 멎은 지 오래고, 배수 문을 흐르는 물줄기는 푸르기만 하다. 남는 것은 세종보의 시멘트 잔재물과 녹슨 발전소, 인적이 뜸해진 어두컴컴한 관리사무소다. 무엇에게 홀려서 그렇게 빨리 만들었다가 금방 부수는가. 한 가지 위안이라면 시민이 금강변 따라 쾌적한 환경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왕암은 울산 동구 해안가에 있다. 오랜 세월 파도에 침식된 기암괴석의 자태는 과연 ‘대왕’이라는 단어를 쓰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 대왕암과 함께 동해의 세찬 바람을 잘 버텨내고 있는 소나무 숲이 만드는 경관은 신비롭다. 그래서 건축 관련 일이나 강의가 있어 울산에 가면 시간을 쪼개서 그곳을 찾는다.
대왕암이 있는 동구는 접근성이 좋지 않다. 울산시를 경유하는 열차노선은 시의 서쪽 외곽으로 지나간다. 양산 통도사에서 멀지 않아 역사의 이름도 울산(통도사)역이다. 울산엔 도시철도가 없다. 울산역에서 시내로 들어가려면 택시나 리무진을 이용해야 한다. 특히 대왕암이 있는 동구는 출퇴근이 아닌 시간대에도 리무진으로 한 시간이 더 걸린다. 울산역은 시의 서쪽 끝이고 대왕암은 동쪽 끝이다. 서울에서 울산까지 KTX 소요시간이 두 시간 조금 더 걸리는 것과 비교하면 접근성이 상당히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접근성이 좋지 않은 탓에 대왕암 공원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평소에도 관광객이 적다. 이것은 오히려 자연 보존에 유리한 면도 있다. 공원 입구 주차장에서 약 1km 거리에 있는 대왕암으로 들어가는 길 주변에는 해송이 빽빽하다. 그 해송을 배경으로 고목 동백나무가 죽 늘어서 있다. 봄에 유난히 붉은 동백꽃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대왕암에 이른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해송 사이로 난 산책로를 지나 해안가에 조성된 오솔길로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아 대왕암으로 갈 수도 있다.
얼마 전에 울산 동구 퇴직자 지원센터에서 강의의뢰가 왔다. 퇴직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인생 재설계 과정 중 주거부문 특강이었다. 강의 장소가 마침 대왕암이 있는 동구라서 더 설레었다. 특강 시간이 아침 시간에 잡혀있기도 했지만 새벽에 대왕암 공원을 크게 한 바퀴 돌고 싶어서 그 전날 저녁에 울산에 갔다. 자고 나니 밤새 비가 내린 모양인데 새벽에 숙소를 나설 때는 빗줄기가 강했다.
대왕암 공원의 운무와 소나무 군락이 연출하는 환상적인 경관은 신비롭다. 해안 산책로를 따라 걸으니 해안 곳곳에 숨어있던 절경이 자태를 드러낸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바다운무에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 숲을 지나고 해안 오솔길을 한 바퀴 돌아 대왕암에서 넋을 놓고 있다가 어느 순간 강의 시간에 늦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충분히 시간 여유가 있었지만 비도 내리고 택시를 호출하는 것도 불안해서 공원 입구로 나왔다.
그런데 택시호출에 문제가 생겼다. 대왕암 공원 인근에서 호출에 응하는 택시가 없다는 것이었다. 공원에 인적도 없고 들어오는 버스도 보이지 않았다. 무작정 큰길까지 걸어 나가면서 계속 택시를 호출했다. 그렇게 40분가량 걸어 나오다가 운 좋게 빈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비는 계속 내렸다. 땀도 닦고 택시 운전사에게 울산의 열악한 교통 상황에 대해 한참 하소연했다.
그러다 창밖을 보니 왼편으로 바다가 보였다. 목적지가 대왕암 공원에서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분명 오른쪽에 바다가 보여야 했다. 목적지를 잘못 가고 있는 거 아니냐 했더니 같은 이름의 호텔이 울산에 두 군데 있다는 거였다. 내가 가야 할 호텔의 반대편에 있는 동명의 호텔로 가고 있었다. 위험한 빗길을 뚫고 속도를 내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택시를 구경할 수 없었다. 울산 동구는 현대중공업에 종사하거나 퇴직한 사람들이 많이 산다. 대부분 자가용이나 오토바이로 출퇴근하므로 대중교통 수요가 적을 수밖에 없다. 겨우 강의 시간에 맞추긴 했지만 이런 상황을 모르고 새벽부터 여행 기분 내다가 큰 실수를 할 뻔했다.
사람은 누구라도 이 풍진 세상을 살아나간다. 그러다가 결국엔 생로병사로 삶을 마감한다. 이어 장례를 치르노라면 인생처럼 허무한 게 또 없음을 새삼 천착하게 된다. ‘때 되면 고작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거늘 왜 그렇게 지독하게 살았을까…’라는 화두를 놓고 고인에 대한 평가까지 ‘난상토론’으로 이어지는 곳이 장례식장이다.
5월 20일 타계한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생전 미담이 새삼 세인들의 존경의 대상으로 우뚝하다. 평소 소탈했던 성품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감동을 더하고 있다는 뉴스가 도배를 이뤘다.
“몇 년 전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주차장에서 후배 몇 명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한 노신사가 ‘어이쿠 실례합니다’하며 급하게 걸어오길래 길을 비켜드렸다. 노신사는 미안한 듯 멋쩍게 웃었는데, 구본무 회장님이셨다. 그룹 총수가 수행원 없이 다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작년 화담숲에서 모자 쓴 어떤 할아버지가 더운 날 힘들게 걷던 만삭 임신부를 보고 모노레일을 무료로 타고 내려갈 수 있게 배려해 주더라. 자세히 보니 회장님이셨다.”
“아버지가 LG에서 일할 때 회사 구경을 갔다가 회장님을 만났는데 ‘꼬마 신사님, 커서 훌륭한 사람 돼서 다시 만나요’하며 용돈을 주신 것이 생각난다. 권위 의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쏟아지는 칭찬이 이 같은 주장의 방증이다.
이러한 고인의 ‘추모 글’에서 사람은 과연 어찌 살아야 현명한 것인지를 거듭 되돌아보게 된다. 이는 또한 한진그룹 재벌 총수 일가의 그야말로 ‘무차별 갑질’이 국민들 반감의 정점으로 떠올랐음과 크게 비교된다.
때문에 이를 보자면 두 재벌은 마치 겸손과 교만의 교차로에 서 있는 듯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물컵 갑질’로 시작된 대한항공 사태가 한진그룹 오너 일가의 비리 의혹과 사정당국의 전방위 조사, 기업 가치 하락 등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다는 건 오너리스크의 자충수가 아닐 수 없다.
오너리스크의 부끄러운 작태는 비단 한진그룹의 경우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생각나는 것만 하더라도 남양유업, (주)피죤, 네이처리퍼블릭, 미스터피자, 호식이 두 마리 치킨 등 그야말로 부지기수인 까닭이다.
‘사람이 미래다’라고 했음에도 정작 20대 1~2년짜리 신입사원들에게까지 희망퇴직을 강요하다 뭇매를 맞은 두산그룹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
미국 듀크대학교 교수 댄 애리얼리는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이란 저서에서 “사람들은 모두 자기합리화가 가능한 선에서 거짓말과 부정행위를 저지른다”고 했다.
그렇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는 법이다. 거짓말과 부정행위는 언제든 부메랑으로 되돌아와 자신과 심지어 가족까지 벨 수 있다.
필자가 걸었던 길 중 추천할 만한 곳을 골라봤다. 몇 번을 걸어도 새롭게 느껴지는 길들이다. 어느 날엔 노란 꽃이 피어 있고 어느 날엔 무성한 녹음이 반기고 낙엽이 흩어지고 흰 눈이 하얗게 뒤덮여 있다. 사계절의 맛을 제대로 느끼고 즐길 수 있는 길이다. 혼자서도 좋고 애인이나 가족과 가도 좋다. 복잡한 채비를 하지 않고 가벼운 차림으로 다녀와도 좋다. 낭만과 먹거리도 함께 있어 오감이 만족되는 길이다.
괴산 삼막이길
괴산 삼막이 옛길은 충북 괴산군 칠청면 외사리 사오랑 마을에서 산골 마을인 산막이 마을까지 연결된 옛길을 개발해놓은 곳이다. 괴산댐이 착공되면서 만들어진, 물과 숲이 어우러진 자연 친화적 트레킹 코스다. 총길이는 4km. 한국관광공사가 뽑은 ‘걷기 좋은 길 10선’에 들기도 했다. 숲속을 걸으면서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고 길마다 이야기가 담겨 있어 지루하지 않다. 출렁다리와 연화협 구름다리, 여우굴바위, 연화담, 망세루, 남매바위, 매바위, 앉은뱅이약수, 삼신할매바위, 신랑각시바위, 병풍루, 괴산바위(산뫼) 등을 만난다. 200년 된 당산나무 밤나무는 이 마을을 지켜준다. 산막이 옛길은 찾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즐길 수 있는 코스가 다양하다. 강변을 따라 숲속 길을 2시간 정도 왕복해서 걸을 수도 있고, 유람선을 타고 오갈 수도 있다. 또 트레킹을 원할 경우 주차장에서 등잔봉까지 약 1·2km를 오르고 호랑이굴, 매바위를 거쳐 새뱅이 유람선 선착장까지 이동해 각시바위 근처까지 가서 신랑바위를 보고 차돌바위 선착장으로 내려오는 등 다양한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3시간 정도 걷고 즐길 수 있는 길들이다. 산막이 옛길은 괴산호가 생기기 전 봇짐장수들이 마을과 마을을 오가던 길이라 한다. 괴산댐이 생기면서 옛 봇짐장수가 걷던 이 길을 물길을 따라 그대로 복원했다.
제주 올레길 6코스
제주 올레길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중에서도 기억이 많이 남는 곳이 올레길 6코스다. 물론 어느 코스가 가장 좋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특색이 있다. 6코스는 쇠소깍을 출발해 제지기오름→보목포구→구두미포구→소천지→천지연폭포→삼매봉→외돌개까지 걷는 코스다. 쇠소깍에서 외돌개까지의 거리는 13.5km다. 쇠소깍의 쇠는 소, 소는 웅덩이, 깍은 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쇠소는 용암이 흘러내리면서 굳어져 형성된 계곡 같은 골짜기다. 깊은 수심과 용암으로 이루어진 기암괴석의 독특한 지형으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물의 맑기도 바닥이 다 드러나 보일 정도로 깨끗하다. 쇠소깍을 출발해 걷다 보면 이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야자수가 눈앞에 나타나고 생이돌과 모자바위를 만나게 된다. 모자바위는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떠난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와 아들을 형상한다 해서 모자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바닷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섶섬도 만난다.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다. 각종 희귀식물과 난대식물이 기암괴석과 어우러져 있어 해상 유람선을 타고 이곳을 즐기는 사람이 많다. 가는 곳마다 돌하르방이 인사를 한다. 한 번에 다 돌기에는 풍경이 아까운 길이다. 두고두고 여유를 갖고 걸어야 좋은 길이다.
요즘은 훌쩍 여행을 떠나면서 그곳에 걷기 좋은 길이 있는지 먼저 살핀다. 멋진 풍광과 맛난 먹거리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걸으면서 힐링이 되는 여행지를 너도나도 챙기는 추세다.
흐르는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걸으며 자연 속에 파묻혀볼 수 있는 걷기 좋은 길이 있다. 육지 안에 있는 아름다운 섬마을 경북 예천의 회룡포(回龍浦) 길은 손 타지 않은 수수함이 매력이다. 이 길을 걸으면 자연에 푹 안기는 맛을 느낄 수 있다.
혹시 액티비티한 놀이를 즐기는 분이라면 근처의 문경에 잠깐 들러 짚라인(zipline)을 타보는 것도 좋다. 공중으로 신나게 미끄러져가는 짚라인을 체험하는 순간의 짜릿함을 추천한다. 아울러 문경 예천의 유명한 순대국밥집에서 점심을 먹은 후 산에 오르면 배도 든든하다.
회룡포는 예천에 속하는 아늑한 섬마을이다. 낙동강 지류로 강이 돌아나가는 지형이 마치 용틀임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을 볼 수 있는 전망대는 한적한 고찰 장안사 뒤편으로 올라가야 한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느릿느릿 숲길을 걷다 보면 드디어 회룡포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오고, 강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물길이 마을을 감싸면서 유유히 흐르고 있다. KBS2 드라마 ‘가을동화’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멀리 마을을 이어주는 뿅뿅다리도 길게 보인다. 다리를 건널 때 발판 구멍으로 물이 퐁퐁 솟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KBS2 프로그램 ‘1박 2일’ 촬영으로 더 유명해진 다리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출도 아름답다. 특히 물안개 낀 날은 몽환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이어지는 숲길은 4~5Km의 트레킹 코스다. 가을날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푹푹 밟으며 걸으면 세속의 걱정거리들이 다 사라진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어느덧 그 산을 벗어나 비룡교가 시원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다리 중간 전망대에 오르니 바람이 세차다. 상쾌한 공기를 원 없이 들이마신다. 다리 아래 넓은 갈대밭도 풍성하게 반짝인다. 얕고 푸른 강물은 유유히 흐른다.
세찬 바람을 맞으며 강둑을 걸으면 어느새 삼강주막이다. 이 시대 마지막 남은 주막이라 하여 유지 보존하고 있는 곳인데 1900년경에 생겨 2006년 주모 유옥련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영업을 했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지자체의 노력으로 각종 축제를 열어 오래전의 우리네 삶의 한 풍경을 지켜내고 있다.
낙동강 나루터를 건너온 보부상들이나 과거를 보러 가던 유생들이 주막에 걸터앉아 막걸리 한 잔 마시는 풍경을 혼자서 그려본다. 그리고 양은 주전자 기울여 막걸리 한 사발 마시며 배추전과 도토리묵으로 회룡포의 바람 속을 걸어온 몸을 달래본다. 행복한 여행의 마무리다.
짚라인
경상북도 문경시 불정동 336-3 불정자연휴양림(1588-5219)
www.ziplinemungyeong.co.kr
용궁단골식당(용궁순대, 오징어불고기)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 299-2 (054-653-6126)
회룡포 숲길
경상북도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 회룡포(장안사 주차장(0.5km)→회룡포전망대(0.7km)→용포마을(0.5km)→사림재(1km)→비룡교(1.2km)→삼강주막(1km))
삼강주막
경상북도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길 27 (054-650-6395)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임진ㆍ정유왜란 피랍인 후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이는 14대 심수관이다. 일본 도예의 대명사가 된 사쓰마 야키(薩摩燒) 중흥의 주인공이라는 게 그 이유일 것이다.
1969년 그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오’가 화제가 되자 그의 명성도 부풀어 올랐다. 정유재란 때 납치된 도공들이 규슈 가고시마(鹿兒島) 땅에 터를 잡고 400년 동안 조선인 혈통을 이어가며 살아온 이야기가 독자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한국에서는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로 유명했다. 1974년 한국에 온 그는 서울대학교 강당에서 강연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일제 치하 36년에 대해 묻는 학생들에게 “여러분이 36년을 말한다면 나는 370년을 말해야 합니다. 과거에 매이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답했다.
그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면서 유명한 노래의 합창이 울려 퍼졌다. 마침 그가 노란 티셔츠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14대째 한국 이름을 쓰고 있는 데 대한 존경과 사랑의 표시였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건 오래전 이야기이고, 근래에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그의 집을 방문하고, 한일 각료회담 간담회가 그의 집에서 열린 일로 유명해졌다. 2004년 12월 18일 가고시마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이 끝난 뒤, 유명 온천 휴양지 이부스키(指宿)로 가는 길에 노 대통령이 그의 집에 들러 차 한 잔을 마신 일이 있었다.
1998년에는 가고시마 한일 각료회담 후 양국 각료들이 그의 집에서 간담회를 가진 일도 있었다. 30년째 주일 한국대사관 명예 총영사직을 수행하고 있는 그의 가교역할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양국이 서로 편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81년 도쿄에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작품과의 만남이었다. 게이오대학교 신문연구소에서 공부할 때 우연히 신주쿠 이세탄(伊勢丹)백화점에서 ‘심수관 도예전’이 열린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달려갔다. 먼저 놀란 것은 작품 값이었다. 막사발로 보이는 그릇 하나에 30만 엔짜리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도예에 까막눈이었던 젊은 기자의 눈에는 큰 놀라움이었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그가 심수관이란 이름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분명 일본인이었고, 그의 선대가 납치되어온 지 400년을 바라보는데 아직도 우리나라 이름을 쓴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재일동포 대부분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통명(通名)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지 않은가.
그 일이 있은 후 꼭 한 번 그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소원은 10년 만에 이루어졌다. 1990년 7월, 주일 특파원으로 발령받아 도쿄에 부임하자마자 가고시마로 달려갔다.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후쿠오카까지 7시간, 거기서 특급열차로 가고시마까지 5시간, 다시 로컬 열차로 30분을 달려, 시골 역에서 택시로 30분을 더 가야 했다. 중간에서 하룻밤을 머문 여정이었다. 미야마(美山)라는 지금의 마을 이름보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옛 이름이 더 유명한 곳이다.
그는 10년 지기처럼 환대해주었다. 수장고에서 선대들의 작품들을 둘러보는 사이, 14대가 가마에서 나왔다는 전갈이 왔다.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이 이웃집 아저씨 같은 푸근한 인상이었다. 잉크빛 작업복은 개량한복 같았다. 따스한 손길에 이끌려 사랑채에 오르니, 낡은 선풍기 저편 벽에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글씨가 눈길을 끌었다.
“선친께서 조선에 가셨을 때 황해도 해주의 어느 정자에서 탁본을 떠온 것이오. 우리 집 가보요.”
수인사가 끝나고 액자를 화제 삼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며, 가문의 내력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많은 것을 물었고, 많은 말을 들었다. 정유재란 때 붙잡혀온 도공 후예들이 사는 마을이라기에 당신처럼 조선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집뿐이오” 했다. 성은 그대로인 임(林) 씨가 있지만, 읽기는 일본식(하야시)으로 하는 집이 하나, 나머지는 모두 일본 성으로 바뀌었다 했다. 200여 호 가운데 50%는 조선 도공 후예들이고, 나머지는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흘러 들어온 일본인들이라 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메이지 유신 무렵까지만 해도 마을에 서당이 있어 글 읽는 소리가 낭랑했답니다. 조선의 혈통을 보전시키려는 사쓰마 번(藩)의 보호정책 덕분에 모두가 사족 대우를 받으며 경제적으로도 유족하게 살았지요.”
그는 나에시로가와 마을이 번 당국으로부터 어떤 보호를 받았는지를 강조하는 사례로, 마을 사람 하나를 죽인 범인과 관련자 6명이 모두 처형당한 사건을 들었다.
서당 이야기가 끝나자 그는 잠시 자리를 뜨더니 ‘한어훈몽(韓語訓蒙)’과 ‘숙향전(熟香傳)’ 고본을 들고 왔다. 한어훈몽은 자녀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칠 때 쓰던 교과서다. ‘매오 다’(매우 좋다), ‘책을 닐러라’(책을 읽어라) 같은 우리말 고어 옆에 일본 글자로 훈이 붙어 있었다. 그렇게 가르친 우리말로 자녀들에게 ‘숙향전’ 같은 책을 읽혔다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말 잔재가 많고, 한동안은 개고기를 먹는 풍습에서부터 제례 혼례에 이르기까지 조선 색채가 남아 있었다 했다. 그가 어렸을 때 돈이 없다는 말은 ‘동가 샤가나이’, 방귀 뀌었다는 말은 ‘방구 시타’라고 했다. 공방과 가마에는 그런 표현들이 더 많다. ‘안질통’은 가마에서 일할 때 쓰는 간이의자다. 물그릇은 ‘무루사쿠’, 흙덩이는 ‘동그레’, 주걱은 ‘비코세’, 막대기는 ‘찌르레’, 흙을 두드려 펼 때 쓰는 연장은 ‘슈르레’, 장작은 ‘찍순’이라 했다. 일본어에는 없는 말들이다.
점심 대접을 받은 뒤 그가 운전하는 벤츠 승용차를 타고 단군사당 옥산궁(玉山宮)부터 찾아갔다. 자동차 라디오에서 우리말 방송이 나왔다. KBS 제주 방송이었다.
“우리말을 알아들으시네요.”
“아닙니다. 뜻은 몰라도 들으면 편안해서 그냥 틀어놓습니다.”
우리말을 몰라서 미안해하는 표정에 어린아이 같은 부끄러움이 묻어 있었다.
차를 내려 차 밭 사이로 난 나지막한 언덕길을 잠시 오르니 대숲 가에 옥산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량기와로 지붕을 이은 정자 같은 건물 앞에 작은 도리이(鳥居, 신사 입구에 세운 기둥문)와 돌 등롱이 서 있었다. 일본 신사 분위기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가까이 가 보니 사당은 많이 퇴락해 있었다. 상주 관리인이 없는 탓인지 잡초가 무성했다.
“오래전에 신관이 죽고 새 사람을 모실 수 없어 이렇습니다. 아무나 신관으로 앉힐 수도 없는 일이라서… 다시 사당을 부활시키자는 논의가 있으니 머지않아 문을 열게 되겠지요.”
그렇게 된 것이 자기 책임이라도 된 듯, 표정에 미안해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러면서 얼른 옥산궁의 유래를 말하기 시작했다.
“살기에 여유가 생기고부터 마을에 갈등이 심했던 모양입니다. 서로 자기 가문이 잘났다고 티격태격한 것이지요. 어느 날 밤 현해탄 쪽에서 커다란 불덩이 하나가 날아와 이곳에 떨어졌는데, 다음 날 아침에 와 보니 큰 바위가 있더래요. 사람들은 서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살라는 단군의 계시로 알고 이 자리에 사당을 세웠답니다.”
옥산궁이 생긴 뒤 매년 설날과 추석에 단군제가 열렸다. ‘오노리소’라는 신축가가 그때부터 불렸는데, 이제는 노랫말 뜻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도자기 작품에 새겨져 내려오는 노랫말은 ‘오는 날도 오는 날도 매일 매일이 오늘과 다름없네. 날이 저물고 또 해가 떠올라도 오늘은 오늘, 언제나 같은 세월’이라 돼 있다. 고국에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인고의 세월에 오늘과 내일의 차이가 있겠느냐는 체념과 실망의 의미를 담은 글이다.
옥산궁을 떠난 자동차는 이웃 구시키노(串木野) 시가지를 지나 시마비라(島平) 해안에 멎었다. 1598년 겨울, 1대 심수관 일행 42명이 표착한 해안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14대는 성큼성큼 해변으로 걸어가더니, 검은 빗돌 아래에서 잡초를 한 움큼 뽑아냈다. 선조들의 도래 400주년을 앞두고 그가 세운 기념비다.
비석에는 ‘게이초 경장 3년 겨울, 우리들의 개조 이 땅에 상륙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돌을 세운 경위를 설명하고 나서 그는 해안 바윗돌에 올라, 먼 지평선을 가리키며 고난의 역사를 설명했다. 조선을 떠난 피랍인 배는 3척이었다. 두 척은 맞은편 가고시마 해안에 상륙했는데, 그들의 조상 42명을 태운 배만 이곳에 표착했다. 그 까닭은 아무도 모른다 했다.
오랜 굶주림과 뱃멀미에 시달린 도공들은 뭍에 오르자마자 지쳐 쓰러졌다. 배 안에서 숨을 거둔 사람도 있었다. 그 무덤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아녀자들은 신음 섞인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당장 먹을 것과 바람을 피할 움막이 필요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마른풀과 잔가지를 꺾어 움막을 짓고, 진흙을 파서 가마부터 만들었다. 먹고살 방도는 그것뿐이었다.
이상한 말을 쓰는 사람들이 구워내는 그릇은 곧 현지 마을의 화제가 되었다. 곡식과 채소를 가져와 바꿔가기도 했고, 돈을 가져오는 사람도 있었다. 맨손으로 와 빼앗아가려는 무리도 있었다. 어느 날 왜인들이 떼 지어 몰려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무리의 지도자 심당길과 박평의(朴平意)는 의논 끝에 마을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유약과 공방 도구부터 챙겨 넣고 옷가지와 취사용품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한 채 하염없이 걷다가 발을 멈춘 곳이 나에시로가와였다.
“여기 지형이 남원 천지와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발길을 멈추고 짐을 내린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의 고향 남원 땅을 닮은 곳이라는 것이었다. 그곳에 새 둥지를 틀자마자 번 관리가 성하촌(城下村)으로 이주하라는 명을 가져왔다. ‘성주인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의 명령’이라 했다. 마을 어른들은 단호히 거부했다. “군부(君父)를 팔아먹은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남원성 함락 때 요시히로 군을 지름길로 안내한 주가전(朱嘉全) 같은 자들이 거기 모여 산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으니 거기 그대로 살게 하라. 대신 그들의 조선인 혈통을 철저히 보전토록 하고, 도자기 생산을 적극 지원하라.”
히데요시가 죽은 뒤 열도의 패권을 겨룬 세키가하라(關が原)전투에서 돌아온 요시히로는 애써 붙잡아온 도공들이 생각난 듯, 적극적인 보호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도공 마을에 잡인의 출입을 금하라, 조선의 언어와 풍속을 이어가게 하고 반드시 동족끼리만 혼인하도록 하라, 한 번 결혼하면 이혼할 수 없게 하라, 도자기 생산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말라. 생산된 제품은 모두 성에 납입하도록 하라….”
보호·지원정책에 힘입어 조선 도공 마을의 도자기 산업은 날로 융성했다. 번의 지원을 받은 박평의가 백토를 발견한 뒤로 도자기 생산이 가능해졌다. 유명한 ‘시로 사쓰마(白薩摩)’의 탄생이다. 도자기란 자석(磁石) 없이는 아름다운 색과 빛을 낼 수 없는데, 흰 자석을 쓰게 되니 금상첨화가 된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시로 사쓰마 한 점이 ‘일국일성(一國一城)에 값한다’는 말로 평가되었다. 차(茶) 문화는 발달했으나 다기(茶器)가 조잡했던 문명의 수준 탓이었다. 이렇게 양산된 사쓰마 야키는 번 재정에 엄청난 보물단지가 되었다. 나가사키 항을 통해 외국에 수출하고 국내 시장에도 출하해 막대한 수입을 거머쥘 수 있었다.
정유재란 때 일본 무장들이 도공 납치에 혈안이 되었던 까닭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메이지유신 때 사쓰마 번이 조슈(長州, 현재 야마구치) 번과 함께 중심 역할을 한 것도 그에 힘입은 것이었다. 사쓰마 야키는 1873년 오스트리아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12대 심수관 작품이 은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졌다.
심수관 가 수장고에 있는 ‘히바카리(ひばかり)’ 막사발은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다. 이를 만든 도공도, 흙도, 유약도 모두 조선의 것인데 오직 불 하나만 일본 것이라는 뜻이다. 사쓰마 야키 개조 심당길이 표착 초기에 만든 이 작품은 1998년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열린 ‘400년 만의 귀향전’에 출품되어 화제가 되었다. 사쓰마 야키 400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14대가 주관한 전시회였다.
14대와의 두 번째 만남은 1993년 8월 대전엑스포 ‘한국의 도자기 귀향비교전’ 취재 때였다. 고국과 오랜 왕래가 있었던 그는 친한 도예 작가들과 얼싸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는 것 같았다. 같은 처지이지만 고국과 유대가 없어 서먹서먹해하는 도공 후예들에게는 친절한 가이드 역할을 했다.
일본 도자기의 신이 된 이삼평(李參平)의 12대 가네가에 삼페에(錦が江三兵衛), 가라쓰 야키 13대 나카사토 다로에몽(中里太郞衛門), 다카도리 야키 12대 다카도리 하루산(高取八山), 하기 야키 12대 사카 고라이자에몽(坂高麗左衛門), 고다 야키 11대 아가노 사이츠케(上野才助) 등이 ‘한국의 도자기 귀향비교전’ 출품자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자신이 한국계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한다는 사람도 있었고, 조상이 어디서 붙잡혀 갔는지 확실한 연고지를 몰라 “이번 기회에 꼭 확인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고국에 올 때마다 조상이 붙잡혀간 남원과 관향인 경북 청송읍을 찾아보는 14대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삶이었다.
‘400년 만의 귀향전’ 때 그는 불까지 조국의 것으로 하자는 뜻으로 남원 교룡산성에서 채화된 불씨를 일본으로 가져가는 행사를 주관했다. 그 불씨는 지금도 미야마 도유관(陶遊館)에서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후손들은 가마에 불을 지필 때마다 거기서 불씨를 채화한다.
400주년 기념 행사들을 마친 뒤 14대는 “이제야 선대의 비원을 이루어 감회가 깊다. 특히 400년 사업을 부탁한 선친의 유언을 받들어 기쁘다”고 했다. 그 모든 사업이 단군의 보살핌 덕분이었다는 말도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질 때 귀중한 선물을 받았다. 돌아와서 열어보니 아름다운 꽃병이었다. 나무상자 안쪽의 친필 휘호에 감격했다. ‘本是同根-14代 沈壽官’ 생면부지의 특파원을 동족으로 대해준 따뜻한 마음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그가 심수관 도원 당주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준 지도 30년째다. 그는 이탈리아 유학에서 돌아온 아들을 또 한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도예의 기본은 옹기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아들의 아들도 벌써 공방과 가마를 드나들며 흙일을 배우고 있다.
올해 93세가 된 그는 16대를 습명(襲名, 선대의 이름을 계승함)하게 될 손자에게 흙일을 가르치고 있다. 근래 한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는 “거동이 불편해 2013년 이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다”면서, 지금도 최후의 여행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어를 아는 택시 운전사를 만나 한국의 각 지방을 돌며 고향 산천과의 작별을 고하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 했다.
요즘 휘발유 값이 너무 비싸다. 필자가 처음 운전을 시작했을 당시는 1만 원어치 넣는 게 보통이었다. 그 정도만 넣어도 충분히 달렸던 것 같다. 그때는 정말 기름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았다. 요즘은 5만 원어치 넣는 게 기본이 되었다. 그래도 며칠 타지도 못한다.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는 이유다.
셀프주유소 휘발유 값이 저렴하다 해서 몇 번 가 보았다. 그런데 갈 때마다 조바심이 나고 기름 넣는 방법을 제대로 몰라 걱정이 됐다. 처음엔 직원의 도움으로 주유를 했다. 다음에 갔을 땐 방법을 잊어버려서 또 허둥거렸다. 언젠가는 주유 버튼을 잘못 눌렀는지 500원어치만 들어가고 주유기가 멈춰버렸다. 너무 당황해서 직원을 콜 했지만 오지 않아 할 수 없이 버튼을 눌러 다시 주유했다. 그랬더니 5만 원과 오백 원짜리 영수증이 한꺼번에 나왔다.
어쨌든 그렇게 겨우 주유를 하긴 했어도 다음에 가면 또 못할 것 같다. 하지만 휘발유 값이 일반 주유소보다 싸니까 관심이 가고 또 찾게 된다. 그런데 셀프주유소라고 다 저렴한 것일까? 인건비가 일반 주유소보다 많이 들지 않으니 당연히 가격이 저렴해야 맞다. 셀프주유소 가격은 어떻게 책정되는 걸까? 인건비가 관건이긴 하지만 공급에 따라 가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주변에 경쟁 주유소가 없다면 셀프주유소 가격은 비쌀 수밖에 없으며, 또 전용 주유기 설치 투자비 때문에 오히려 비쌀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무조건 셀프주유소라고 쌀 거라 생각하지 말고 주변 주유소 가격과 비교해봐야 한다.
필자가 너무 겁을 먹어서 그렇지 셀프주유소의 이용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주유기 터치스크린 화면에서 원하는 기름의 종류와 가격을 누른 후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고 결제가 끝나면 주유기를 주유구에 넣은 다음 손잡이를 누르면 주유가 시작된다. 이때 조심해야 할 일은 손잡이를 주유구에 꽉 끼우기 전에 누르면 기름이 샐 수 있다. 필자도 그게 가장 걱정이 되는데 자주 하다 보면 익숙해질 것이다.
우리가 셀프주유소를 찾아가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기름 값을 아끼려는 마음에서다. 그렇게 알뜰한 것도 좋지만 기름 아끼는 습관을 갖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일 듯하다. 급출발, 급정거하지 않고 차 트렁크에 짐을 많이 넣어두지 않고 규정 속도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기름 값을 절약할 수 있다 한다. 생활 속 지혜를 잘 활용해 주유비도 아끼고 알뜰한 살림을 해보자.
살아 온 날 중에 댄스스포츠 경기대회에 출전한 일들은 하나하나 귀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수백만 명의 댄스 스포츠 동호인 중에 정식 댄스 스포츠 대회에 선수로 참가해 본 사람은 극소수이다. 그러므로 그런 면에서는 행운아인 셈이다.
처음 댄스 대회에 출전한 것은 댄스에 입문한지 10년이 지난 2000년대 초 쯤으로 기억된다. 당시 동덕여대 총장 배 대회에 라틴 포메이션으로 출전했다. 필자 외에 여러 커플이 한 팀으로 출전했다. 주차장에서 연습을 하는데 필자의 옷소매 단추가 파트너의 가발에 걸려 낭패를 본 적이 있다. 필자가 팔이 짧아 소매 단추가 걸린 것이니 팔을 크고 높게 돌리라는 주의를 받았다. 막상 본 대회에서는 우리 팀 중 가장 키가 큰 커플이 같은 사고를 냈다. 소매 단추가 와이프의 가발에 걸리자 가발을 뽑아 내동이친 사람 때문에 꼴찌를 했다. 퇴근 후 모여 밤늦게 까지 연습을 했는데 그런 결과가 나오니 맥이 풀렸다.
올림픽공원에서 500여명이 모여 하루 종일 벌어진 자이브 페스티벌에서는 뜻밖에도 필자가 초대 챔피언이 되었다. 유력한 우승 후보가 결승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필자가 어부지리로 덕을 봤다. 그날 모인 여러 사람들 중에 단 한 커플 챔피언을 가리는 경쟁이어서 기분이 날아갈 듯 했다. 다음 해에도 이어서 계속 챔피언 자리에 오르자 축하 보다는 질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로부터 다시 10년 후 모던댄스로 전향했다. 시각장애인을 가르쳐 왈츠 단 종목으로 같이 출전했는데 첫 대회는 동상에 그쳤다. 그러나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 후 종목을 늘려 모던 5종목까지 할 수 있게 되고 성적도 좋았다. 그러나 파트너가 고령으로 은퇴하는 바람에 다시 다른 파트너와 시작해야 했다.
2015년은 필자 댄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해였다. 새로 젊은 장애인 파트너를 만나 가르쳤는데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협회에서도 장애인 대회만 뛰기에는 아까우니 일반인 대회까지 해보라고 했다. 청주대회는 새벽 4시에 만나 하루 종일 대회에 출전하고 서울에 와서 허기를 달래니 다음 날 새벽 4시였다. 여수 대회에서는 오전 장애인 대회에 이어 오후 일반인 대회 장년부, 일반부, 아마추어까지 출전했는데 3부문 모두 결승에 올라 우승, 우승, 준우승의 쾌거를 이뤘다. 모던 5종목으로 출전했으니 대단한 체력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파트너가 밤에 일을 해야 한다고 해서 멋진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하고 부랴부랴 KTX를 타고 상경한 것이 아쉽긴 했다. 그 파트너 덕분에 국립극장 무대에도 서 봤으나 그게 끝이었다. 코앞의 전국체전에서는 다시 새 파트너와 나갔으나 무관으로 돌아 와야 했다. 그러나 얼마 후 남한산성 배 대회 등에 출전하여 트로피를 들었다.
장애인들을 인솔하고 참가한 대구 대회에서는 대회가 끝나고 산중의 정화여상에서 부랴부랴 짐을 꾸려 터미널로 가야하는데 택시는 안 잡히고 시간이 촉박했다. 지나가던 봉고 차를 세워 모두 태우고 가까스로 버스 시간에 맞췄던 일이 잊을 수 없는 무용담이다.
전국의 여러 도시를 돌며 젊은 선수들과 같이 움직이는 일도 즐거운 일이었다. 시간이 나서 같이 바닷가를 거닐던 추억, 저녁에 같이 어울리던 추억, 같은 방을 쓴 룸메이트들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제주대회 때는 당일 경기도 댄스파티 날짜와 겹쳐 댄스파티 참가는 포기했었다. 그러나 주최 측의 강력한 요청으로 부랴부랴 혼자 비행기를 타고 와서 다시 택시를 타고 파티에 정시에 참석한 일화도 흐뭇한 추억이다.
댄스 대회 시작은 장애인과 같이 했으나 그 덕분에 일반인 파트너와도 대회에 출전할 수 있었다. 울산 대회에 KTX를 타고 당일 아침에 갔을 때는 모던 5종목 타임 테이블이 오전으로 변경되어 출전도 못하고 나머지 종목으로 출전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용인대회에서는 오전 예선에 착오로 출전하지도 못했으나, 주최 측의 배려로 결승에 추가로 참가하여 트로피를 건졌다. 대회마다 음악을 트는 순서가 달라 엉뚱한 위치에 서 있다가 당황한 적도 있다.
전국체전에 4번이나 나가 3번 메달을 딴 것도 귀중한 추억이다. 평창 올림픽 폐회식을 보며 대구에서 벌어진 당시 전국 체전 입장식이 떠올랐다. 젊은 선수들과 어울려 스타디움의 수많은 관중들에게 손을 흔드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지금도 댄스 대회장에 가서 쿵쾅거리는 음악을 들으면 몸이 들썩인다. 플로어를 지날 때면 연미복을 입고 경기를 뛰던 생각이 나서 흥분하게 만든다. 아직 선수 은퇴선언을 한 것은 아니지만, 선수로 플로어를 누빌 기회가 다시 올 것 같지는 않다. 집에 있는 몇 개의 찬란한 트로피와 메달이 그나마 위안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