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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처럼 살자
- 도시생활만 해온 사람이 무모하다 싶게 은퇴지를 결정했다. 은퇴지가 제주도라서 무모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제주도에도 택지로 조성된 터가 많고 도시적인 주거 조건에 맞는 집들이 많다. 꼭 제주도에서 집을 신축할 필요도 없고 집터가 임야일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무 생각 없이 빈터를 매입했고 그 빈터는 임야였다. 억새와 잡풀은 나무라 할 만큼 키가 웃자라 있었고 덩굴식물들이 엉겨 붙어 있어 걸으면 수북하게 쌓인 눈길을 걷는 것처럼 발이 푹푹 들어갔다. 우선 나무라도 심어야겠다고 마음먹고부터 굴삭기 기사를 불렀다. 토목에는 전혀 안목이 없고 땅을 어떻게 고르는지도 몰라 아이디어가 전혀 없었다. 필요한 만큼만 조금씩 공사를 해나가기로 했다. 우연히 소개로 만난 굴삭기 기사는 성격이 유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필자에게 자기 의견을 강하게 제시하거나 자기 아이디어대로 일을 밀고 나가지 않았다. 필자가 요구하면 큰 무리가 없는 한 필자 원하는 대로 일을 해주어 고마웠다. 그 인연이 20년이 훌쩍 뛰어넘었고 이제는 매해 만나는 사이로 발전했다. 며칠 전에도 굴삭기 작업을 했다. 말할 것도 없이 바보처럼 살자는 굴삭기 기사와 함께했다. 이전에 땅을 고른 후 판판한 터에 깡마른 나뭇가지 같은 향나무, 단풍나무, 애기동백나무, 은목서 같은 정원수 묘목을 심었다. 이놈들이 제법 자라 빽빽하여 답답해 보였다. 저들도 공기가 필요할 것도 같았다. 그보다는 정원수라는 관념 때문인지 밭의 다른 농작물이나 땅꼬마 화초들 같지 않게 군거하니 오히려 주위와 어울리지도 않았다. 잘난 사람이 노숙자로 전락한 모양새라 그들에게 어울릴 법한 자리로 이식을 했다. 필자 집에서 지대가 좀 높은 위치의 공터로 나무를 이식하면서 굴삭기 기사는 다른 기사들 같으면 담배 한 대 피우고 잠시 휴식할 시간에 멋들어진 노래 한 가락을 뽑는다. 애기동백을 옮길 때는 동백아가씨가 애잔하게 흘러나온다. 굴삭기 기사는 오래전에 취미생활을 즐기는 멋쟁이로 제주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필자가 기사를 처음 만났을 때는 해변 외딴 집에 드럼 세트를 구비하고 드럼을 열심히 배우고 있었다. 그 무렵 밤낚시를 즐긴다기에 초대해달라고 부탁했더니 어느 날 집으로 오라 했다. 집에 가서 보니 창고로 사용하는 해변의 외딴 집은 사람이 생활하는 흔적은 없으나 그런 대로 큰 생활 터전이었다. 그런데 그 집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필자 눈에 들어온, 힘찬 휘호로 쓴 한글 액자가 보였다. 내용은 ‘바보처럼 살자’였다. 처음 일을 맡기려고 전화로 거래를 틀 때다. 너무 쉽게 이쪽에서 하자는 대로 ‘그러라고 그러자고’ 쉽게 동의하기에 필자는 ‘내가 도인을 만났나? 혹 뻥은 아닐까?’ 했다 사실은 가격도 필자가 깎는 대로 그대로 응해주었다. 고맙고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스럽기도 했다. 일 시작하면서 보기 드문 사람임을 금방 알아챘다. 생활 속에서 힘들이지 않고 말없이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터득한 사람이라 느껴졌다. 같이 일하는 기회가 거듭되면서 신뢰도 생기고 친밀감도 쌓였다. 평소의 생활 태도와 속사람이 궁금해지기 시작하여 집 방문의 기회를 만든 것이다. 다른 동업자에 비하여 적은 값으로 일을 해주는 그와 일을 하려면 적어도 두어 달 전에 예약해야 한다. 늘 일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혹 너무 오래 기다렸다 싶으면 쉬는 날 하루를 억지로 내어 필자 집에 온다. 얼굴에서 피로함이 느껴지면 “급하지 않으니 다음에 해도 되는데…”라고 말한다. 참 반가운 소식은 요지의 상가에 4층 빌딩을 올렸단다. ‘바보처럼 살자’의 힘찬 울림이다.
- 2016-11-2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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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뉴욕은]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 김영순 화이트웨이브 무용단 단장 겸 예술감독
- 뉴욕 브루클린에서는 지난 9월 29일부터 4일간 큰 춤판이 벌어졌다. 8개국 70개 댄스팀이 참가한 덤보댄스축제다. 이 춤판은 맨해튼 다리 밑, 버려진 공장지대였던 덤보(DUMBO, Down Under the Manhattan Bridge Overpass) 지역을 문화의 중심지로 변신시킨 일등공신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축제를 뉴욕 5대 무용축제로 선정했고, PBS 방송은 올해 뉴욕의 5대 행사로 꼽았다. 이 춤판을 벌여온 주인공은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불리는 김영순 화이트웨이브 무용단 단장(예술감독 겸임). 뉴요커의 자랑인 덤보댄스축제는 김 단장의 집념과 열정 그리고 고난과 눈물의 결정체다. 김영순 단장이 미국으로 건너온 것은 1977년.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후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댄스스쿨로 유학을 온 것이 미국생활의 출발점이었다. 세계 현대무용계의 신데렐라를 꿈꾸며 시작한 유학생활은 고난 그 자체였다. 굳게 마음먹고 준비한 유학이었지만 턱없이 부족한 돈이 문제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선일여자중고등학교에서 무용교사로 재직하면서 월급의 70%를 저축해 모은 유학 자금을 장춘동 국립극장 소극장(현 달오름극장)에서 공연을 하면서 다 써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국내 사상 최연소 단독 현대무용 공연이었고 ‘잔잔한 호수 위로 퍼덕이며 뛰어오르는 은빛 찬란한 물고기’라는 평가도 받았지만 당초 계획에 없었던 공연이었다. 김 단장은 40년 전 그 공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던 입학허가를 받고 미국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는데 거부를 당했어요.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을 했기 때문인지, 젊은 여성이 미국에 눌러 살까 우려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앞이 캄캄했어요. 그때 멋진 공연을 해서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면 비자를 받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 공연을 하게 됐어요.” 아니나 다를까 공연을 마치자마자 바로 비자가 나왔다. 그런데 체재비는 고사하고 항공료조차 부족했다. 철도공무원인 아버지 김철주씨의 5남 4녀 중 셋째인 김 단장은 형편이 어려운 부모님께 차마 손을 벌릴 수 없었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입양아 두 명을 미국까지 데려다주면 항공료를 지원해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8개월과 11개월 된 두 아이를 양팔에 안고 22시간 넘게 비행을 했다. 침례교회가 운영하는 양로원의 자그마한 방 한 칸을 댄스스쿨에서 알선해줬지만 아침식사를 포함해 주당 25달러인 숙식비와 학비를 감당하기가 벅찼다. 하루 12시간 이상 무용 연습을 하면서도 베이글 하나로 견딜 때가 많았다. 때로는 밤늦게 돌아오다 너무 힘들어 남의 집 계단에 앉아 달을 보고 엉엉 울기도 했다. 김 단장은 그때의 심경을 토로했다. “아버지는 그 당시 대부분의 부모님들처럼 딸이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현모양처로 살기를 원하셨지 유학 가는 것을 바라시지 않았어요. 딱 1년만 공부하고 오겠다고 통사정을 해서 허락을 받았어요. 그리고 춤꾼이 되고 싶었으나 집안 어른의 반대로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어머니의 기대까지 짊어지고 있었어요. 김포공항을 떠날 때 외할머니께서는 부적을 한 장 주시면서 엄마의 꿈을 대신해서 이루어달라고 당부하셨어요. 그래서 아무리 어려워도 포기를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를 극심한 생활고에서 구해준 것은 루돌프 누레예보 장학금이었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30 대 1의 경쟁을 뚫고 장학생 오디션을 통과한 그는 뉴욕서 열리는 공연이라면 단역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출연했다. 얼굴을 알릴 수 있었고 얼마 안 되는 출연료였지만 생활에 큰 보탬이 되었다. 1980년, 경쟁률 300 대 1의 오디션을 통과해 뉴욕 10대 명문 무용단인 제니퍼 뮬러 현대무용단 전속 단원으로 발탁되면서 그는 프로페셔널 댄서로 우뚝 서게 됐다. 미국은 물론 유럽, 중남미, 캐나다 등 세계 곳곳으로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검정머리 휘날리며 춤추는 동양의 신비한 무녀’라는 찬사를 받았다. 1년에 9개월간 해외 공연을 하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뉴욕에 머무는 3개월은 트론댄스시어터(Throne Dance Theater) 같은 소규모 무용단에서도 활약을 했다. 겹치기 출연을 해야 할 정도로 이미 명성이 높았다. 당시 한 유명 평론가는 “무대에서 춤추고 있는 많은 댄서들 가운데 눈을 뗄 수 없는 댄서”라고 극찬했다. 1988년, 드디어 그는 자신의 무용단을 창단한다. 하얀 파도가 세계로 용솟음친다는 의미의 ‘화이트웨이브(White Wave) 김영순 무용단’이다. 하얀 파도는 백의민족을 상징한다. 경쟁이 치열한 뉴욕에서의 무용단 창단은 실력과 명성과 인간관계를 모두 갖추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 단장은 그 해 88서울올림픽 현대무용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국내 팬들에게 현대무용의 진수를 선보이기도 했다. 홍콩에서 단독공연을 할 때는 홍콩스탠더드 신문이 ‘춤추기 위해 태어났다(Born To Do It)’는 제목으로 그의 삶과 춤을 전면에 소개했다. 신문 제목처럼 그는 타고난 춤꾼이었다. 6세 때 인근 무용학교에서 들려오는 장구소리에 이끌려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7세 때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사냥꾼’ 이야기를 춤으로 표현해 호남예술제에서 1등을 차지했다. 무용단 운영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 , 등 60여 가지의 레퍼토리를 선보였을 때 월스트리트저널이 ‘댄스의 영역을 뛰어넘은 새로운 예술세계 창조’라고 논평하는 등 주요 언론들의 호평이 이어졌지만 무용단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다. 소호(SOHO)에 있던 스튜디오를 임대료가 저렴한 이스트 할렘으로 옮겼으나 70평 남짓한 스튜디오 임대료를 제때 내지 못해 이불을 덮어쓰고 울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2000년에는 맨해튼 스튜디오가 상가로 바뀌면서 새 터전을 찾아나서야 했다. 소호에서 밀려난 가난한 예술인들이 몰려든 덤보 지역은 앞이 캄캄했던 그에게 축복의 땅이었다. 기업인 존 라이언(John Ryan)씨가 든든한 후원자로 나타나면서 25만 달러를 지원받아 이스트 강변에 100석짜리 무용 전용극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덤보댄스축제와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미술·패션쇼·음악·필름스크린·댄스 등 5개 예술 분야로 나눠 열리는 덤보아트축제의 이사진과 댄스 부문 기획을 담당했던 친구의 권유로 2001년 제1회 덤보댄스축제의 총감독을 맡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사실 덤보아트축제는 ‘예술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사업이 번창한다’는 부동산개발업체의 경영전략에서 출범한 축제다. 덤보 지역이 번창하자 다른 분야의 축제는 사라지고 댄스축제만 남아 뉴요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김 단장은 신예 안무가들이 기량을 마음껏 펼치면서 뉴욕으로 진출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주겠다는 신념으로 댄스축제를 지켰다. 그는 여세를 몰아 2004년부터 쿨뉴욕(Cool New York) 댄스축제를, 2006년부터는 웨이브라이징시리즈(Wave Rising Series) 무용축제를 잇따라 개최했다. 뉴욕타임스는 2008년 “다운타운 현대무용계는 김영순 단장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하나도 하기 힘든 페스티벌을 세 개나 하고 있다”며 대서특필했다. 이때부터 그는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축제를 통해 총 2600여 무용단과 1만3500명의 안무가들은 7만여 관객 앞에서 기량을 발휘했다. 창무회 & 김매자, 김윤정 프로젝트댄스, 장유경 무용단, 길섭무용단, 박신애, 정석순, 김정환과 박봄, 박정윤, 최성옥 메타댄스 프로젝트 등 수많은 안무가들이 그들이었다. 그는 현재 뉴욕시가 매년 수여하는 댄스·연기대상(Bessie Award)과 예술지원기금 무용 부문 심사위원을 맡고 있다. 그의 무용단은 3년 연속 뉴욕시 지원 대상 문화예술단체로 선정되는 등 공로와 능력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마티 마코위츠(Marty Markowitz) 브루클린 구청장은 수년째 덤보댄스축제가 개막되는 날을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의 날’로 공표하고 있다. 그의 공로는 곤경에 처했을 때 더 빛이 났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로 인해 이스트 강이 범람해 극장이 침수 피해를 입자 온라인 성금이 답지했다. 루도 셰퍼(Ludo Scheffer) 드렉셀대학 교수는 상속 재산 중 상당액을 기부했다. 김 단장은 수많은 무대에 올라 많은 박수를 받았지만 2014년 한국계 안무가로는 처음으로 브루클린 음악아카데미(Brooklyn Academy of Music, BAM) 무대에서 새 작품 을 성공리에 공연한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뉴욕에는 링컨센터 등 굴지의 공연장이 즐비하지만 공연 대상 선정이 가장 까다로운 BAM이 화이트웨이브무용단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링컨센터의 뉴욕공공도서관은 그의 공연을 촬영해 DVD로 영구 보관하고 있다. 그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꿈은 세상 사람들이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는 멈출 수 없다. 자신의 무용단을 통해 끊임없이 새 작품을 무대에 올리고, 국제댄스페스티벌을 잇따라 열어 다양한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걸작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다. 화이트웨이브 김영순 무용단은 요즘 인류 화합을 주제로 한 이라는 대형 작품을 새로 무대에 올리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이 작품의 일부는 이번 덤보댄스축제에서 선보였다. 작품이 완성되면 내년쯤 한국 팬들에게도 소개할 계획이다. 그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당장 시급한 것은 전용 공연장이다. 덤보 지역도 이제는 예술인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임대료가 뛰어 브루클린 내 다른 지역을 열심히 물색하고 있다. 김 단장은 새 공연장을 임대할 경제적 여력은 없지만 절실하면 이루어진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이제까지 그런 믿음으로 험난한 무용인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왔고 ‘뉴욕 현대무용계의 대모’라는 독보적 위치에 걸맞은 활약을 오늘도 펼쳐나가고 있다.
- 2016-10-3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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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들면 더 참지 못한다
- 며칠 전 77세의 집안 형님과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에서 술자리를 같이했습니다. 형님은 77세이지만 신체 건강하고 노인복지관에서 일본어, 중국어, 한문 등 *쉼 없이 공부도 하는 신세대 노인입니다. 지혜도 있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갖고 있다고 평소 생각했던 분인데 술이 취하자 감정을 참지 못하는 것을 보고 깜작 놀랐습니다. 나이 탓인지 술 탓인지 애매하지만 필자는 나이 탓이 더 크다고 봅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면 너무 고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날 일어난 일은 대략 이렇습니다. 누구나 술을 먹다가 시간이 흐르면 소변이 마렵습니다. 그날 형님은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음식점에서 공동 화장실 열쇠를 받아 나갔습니다. 화장실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다가 건물 경비를 만났다고 합니다. 화장실 위치를 물어보자 70대의 경비가 “찾아보세요” 하고 퉁명스럽게 말했다고 합니다. 경비의 태도에 형님은 참지 못하고 화가 폭발했습니다. “이 XX 너 임무가 뭐냐? 고객이 물어보면 성실히 대답을 해야지 뭐? 찾아보라고?”, “뭐? 이 XX? 야! 임마! 저기 화장실이라고 쓴 글씨 안 보이냐? 눈XX은 뭐하러 달고 다니냐!” 하고 서로 주먹다짐이 오가는 걸 내가 뛰어가서 겨우 뜯어 말렸습니다. 고객은 화장실을 처음 물어보지만 하루에도 수백 명이 들락거리는 시외버스터미널 인근의 상가 경비원 입장에서는 똑같은 질문을 여러 사람에게 받다 보니까 짜증도 났을 겁니다. 경비원 눈에는 너무나 잘 보이는 ‘화장실’이라는 붉은 글씨입니다. 그러나 알면 잘 보이지만 모르면 앞에 두고도 찾는 법입니다. 직업이 안내 겸 경비원이니까 누가 백번을 물어봐도 백번 대답하겠다는 심정으로 처음에는 입사했을 겁니다. 또 형님도 찾으라니 찾아보지 뭐! 하고 한 번 더 둘러보면서 화장실을 찾았으면 아무런 문제 없었을 겁니다. 나이가 들면 무시당한다는 느낌이 자주 들고 옳다고 생각하면 목소리를 높여 지지 않으려 합니다. 이런 생각이 싸움까지 할 정도로 분노를 일으킵니다. 나이 들면 별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제일 큰 문제가 상대가 미안한 기색을 보이고 알아 들는 제스처를 취하면 멈춰야 하는데 항복문서를 받을 것처럼 계속 야단을 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젊은이가 새치기를 합니다. 나이 드신 분이 새치기하지 말라고 한마디했습니다. 젊은이는 고개를 숙이며 급해서 이 버스를 타야 된다는 간절한 눈빛으로 사정을 합니다. 무슨 급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구나 하고 넘어가면 좋았을 것입니다. 나이 드신 분이 내 말이 먹혀들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상대가 고개를 숙이고 미안해하니 만만하게 보고 이럴 때 몰아붙여야 한다고 생각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더 큰 소리로 싸가지가 없는 놈이라고 막말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젊은이의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내가 언제 새치기했느냐고 덤벼듭니다. 궁지에 물린 쥐가 고양이에게 덤벼든다고 지나친 질책이 지나쳐 역으로 봉변을 당합니다. 자기 잘못은 잘 모릅니다. 내가 좀 손해보고 산다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보통 수준의 생활입니다. 말로는 남의 얘기에 경청하고 좋은 말하고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나이 들수록 점점 꼰대가 되어갑니다. 점점 완고해지는 내 모습에 나도 깜작 놀랍니다. ‘유하게 살자’ 늘 다짐합니다.
- 2016-10-1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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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트레비소 마을과 닮은 아름다운 소도시 담양
- 순천에서 두 시간 정도면 담양읍에 갈 수 있다. 담양에는 대나무 숲이 유명하다 해서 이번 여행 코스에 넣었다. 순천만을 돌아보느라 피곤했지만 일단 숙소를 옮겨야 해서 담양으로 향했다. 그런데 역시 방을 구하기 어려웠다. 큰 길에서 보이는 펜션, 모텔 등에도 빈방이 없었다. 동네 주민에게 민박집을 찾으니 전남도립대학교 앞에 있는 한 집을 소개하면서 방 두 개에 8만원은 받아야 한다고 했다. 혼자 잘 거라 큰 방이 필요 없다고 하니 더 찾아보라고 했다. 비싸긴 했지만 날도 어둡고 다리도 피곤한데다 배까지 고파 더 찾아볼 기력이 없어 그냥 묵기로 했다. 아래층에 음식점을 겸하고 있어 식사까지 해결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저녁 6시 반인데 음식점 불이 꺼져 있었다. 담양은 그 시간이면 다들 문을 닫는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랬다. 오면서 봤던 다른 음식점들도 불이 꺼져 있었다. 변두리라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담양 중심지라고 했다. 겨우 대통밥 정식을 파는 음식점에 들러 저녁식사를 했다. 반찬 종류는 많은데 서울의 한정식 정도였다. 밥값은 1만3천원을 받았다. 막걸리를 주문하니 다 떨어져서 없다고 했다. 연휴에는 음식점들도 좀 늦게까지 문을 열고 막걸리도 준비해놨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반응이 없었다. 서울처럼 경쟁이 심하지 않은 것 같았다. 마치 오늘까지만 장사하고 그만둘 음식점처럼 보였다. 막걸리 대신 약주를 주문했더니 1만원이나 받았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 관방제림으로 갔다. 대나무 정원인 죽녹원은 아침 9시에 문을 열기 때문에 그전 두어 시간을 다른 데서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담양읍으로 들어오는 다리를 다시 건너 초입부터 개울을 따라 걷는 길이었다. 조선시대에 홍수가 자주 나자 제방을 쌓고 거기에 나무를 심은 것이다. 관에서 주도해 방제를 위해 만든 숲이란 뜻이다. 수백 년 된 느티나무들이 10m 가격으로 서 있었다. 한 그루 한 그루가 보호수 지정을 받을 만큼 컸다. 나무 밑에는 쉼터가 줄지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그늘 아래에서 한여름을 보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500m쯤 가자 차도가 나오고 메타세쿼이아 길이 나왔다. 좌우로 이어진 그 길 옆으로는 메타 프로방스라는 유럽식 마을까지 조성되어 있어 마치 딴 나라에 온 것 같은 분위기였다. 주변 상가 건물들도 모두 예뻤다. 명소로 충분히 사람들을 불러 모을 만했다. 서울 주변이었다면 관괭객들로 몸살을 앓을 정도로 예쁜 동네였다. 메타세쿼이아 길은 1972년에 조성된 약 8km에 달하는 가로수 길이다. 원래는 차가 다니는 아스팔트 길이었는데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길로 만들었다. 메타세쿼이아는 아직 수령이 40년 정도밖에 안 되어 서울의 아파트 주변에 심은 메타세쿼이아와 별다른 차이는 없다. 다만 양쪽으로 심어져 있어 그 사이로 걷는 특별한 맛이 다르다. 담양의 백미인 죽녹원에 갔을 때는 장마철처럼 비가 쏟아져 우산이 소용없을 만큼 젖었다. 그래도 울창한 대나무 숲은 볼 만했다. 2003년부터 대나무 숲을 가꾸다 보니 어느 새 이 지방의 명물이 되었다고 한다. 죽녹원 때문인지 동네에는 대나무로 만든 음식, 가구, 기념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대나무로 만든 공예품들은 중국제처럼 보이기도 했다. 죽녹원의 대나무는 그리 굵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굵은 대나무에는 칼로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 몰지각한 관광객들도 있다고 한다. 담양은 언젠가 가본 이탈리아의 트레비소(Treviso)를 연상케 하는 마을이다. 밀라노 근방의 소도시인 트레비소는 인구도 많지 않고 동네 한가운데 개울이 흐르고 가로수가 조성되어 있는 아름다운 도시다.
- 2016-10-1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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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아풀, 불로초다
- 먹으면 덜 늙게 하는 풀을 불로초라 이른다. 불로초를 생각하면 진시황을 떠올리게 된다. 오래 살기 위하여 몸에 좋다는 약초를 얻으려고 나라 안팎으로 신하를 보내기도 하였다. 제주에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오매불망 불로초를 찾았지만, 당신은 49세에 떠났다. 당시 백성들의 평균수명에 견주어 보면 장수한 것이 아닐까 싶다. 비슷한 시대의 조선 왕 평균 수명이 43세였으니 6년을 더 산 셈이다. 오래 살려고 노력한 결과인지 모른다. 조선 왕 평균수명과 비교하면 대략 14% 포인터를 더 살았으니 수리적으로 장수했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사람이 먹어서 늙지 않는 풀이 있을까? 나이가 들면 늙어가지 않을 수야 없겠지만, 그 속도를 조금 더디게 할 수 있지 싶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건강 유지다. 수명은 놀라울 정도로 늘어 100세 장수시대에서 100세 건강시대로 바뀌고 있다. 특별한 질병이나 사고가 아니면 대체로 100세를 건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고인들의 나이가 그렇다. 근래에 다녀온 장례식장의 고인의 수명이 대부분 90세 중반이었다.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되는 현실이다. 엊그제 조문한 상가도 백수를 석 달 남겨둔 99세로 세상을 떠난 분이었다. 그것도 건강한 상태에서 돌아가셨기에 “9988234(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 3일 앓다 저세상으로 간다)”였다고 상주가 전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의술이나 의학의 발달로 머지않아 세계인의 평균수명이 120세에 다다른다고 예측하고 있음이다. 식물인간 상태의 수명 연장은 큰 의미가 없다. 다른 사람의 큰 도움이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상태, 즉 건강 나이가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타고난 체질과 사주팔자가 한몫을 하겠지만, 자기의 건강관리가 중요하지 싶다. 먹고 마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영양과 사는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다. 공기 좋은 곳에서의 자연 친화적 환경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근심 걱정거리를 내려놓고 사는 분들이 의사들도 포기하였던 질병을 이겨낸 사례를 듣곤 한다. 필자도 그런 환경을 찾아 도심에서 가깝지만, 주변이 논밭이고 동산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이사하여 살고 있다. 만 2년이 됐다. 마당에 텃밭을 만들어 그곳에서 채소를 가꾸어 먹는다. 물론 농약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최근에 방아풀이라고 부르는 식물을 빈터에 심어 가꾸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고향 마을에서 먹고 자란 식물이어서 다소 강한 향이 나기는 하여도 좋아한다. 남쪽 지방에서 많이 먹는다. 생선 매운탕 등 비린내가 나는 음식을 조리할 때에 넣으면 비린내를 잡아주기도 하여 자주 활용한다. 특히 부침개를 할 땐 필수 보조 재료다. 상추쌈을 싸 먹을 때 한 잎 곁들이면 향이 입안에 은은하게 베인다. 이 녀석은 다른 보조재료와 달리 음식에 넣어도 주재료의 맛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살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점을 이용하여 지난 여름에 들깻잎 장아찌를 담을 때에 방아풀을 곁들여 그 맛을 관찰해 보았다. 상상 이상으로 깻잎 장아찌의 맛이 방아잎을 넣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좋아졌다. 여러 자료를 조사해 본 결과 이 방아풀의 성분에 노화방지제가 들어 있음을 발견했다. 세포노화방지제는 세포의 노화를 막는 기능이어서 필자는 이 방아풀을 불로초라 부른다. 번식력도 강하고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자랄 수 있다. 손가락 길이 정도의 여러 꽃송이가 달린 꽃대에서 눈에 보일 듯 말듯한 많은 씨가 달리고 땅에 떨어져 다음 해 봄에 많은 싹이 튼다. 옮겨 심어도 잘 자란다. 한 포기만 심어도 한 해가 지나면 텃밭을 이룬다. 다년생이어서 늦가을이면 줄기가 마르고 다음해에 새 싹이 돋아난다. 화분에 심어 키워도 잘 자란다. 햇볕이 잘 드는 베란다에서 키워서 요리할 때 잎을 뜯어 사용할 수 있다. 방아풀 활용으로 젊음을 유지해보자.
- 2016-09-19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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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55년생, 나의 글쓰기는 혼자 밀크캐러멜 먹기
- 글 한만수 소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충북 영동은 워낙 산골이라서 전국적으로 소문난 난시청 지역이다. 1시간 거리에 있는 대전이며 김천만 가도 몇 개의 라디오 프로가 나오지만 영동은 FM 주파수 하나만 간신히 잡힌다. 그 시절 라든지 라는 심야 방송이 유행했었다. 별도 새도 잠든 한밤중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듣는 프로그램은 내게 신세계였다. DJ의 감미로운 목소리도 좋았지만 시청자들이 보내는 엽서의 내용이 가슴의 심장 박동 수를 빠르게 했다. 쿵작쿵작하는 트로트 선율에 길들여져 있던 내게 ‘상하이 트위스트’ 라든지 ‘울리불리 트위스트’, 톰 존스의 ‘킵 온 러닝’ 같은 신나는 노래는 가슴을 확 트이게 하는 청량음료였다. 그 밖에도 비틀스, 롤링스톤스, 사이먼 앤 가펑클 등의 목소리는 14세 중학생의 가슴 깊은 곳에 흐르는 감성의 강물에 뜨겁게 소용돌이쳐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커스단이 들어왔다. 가수가 엘비스 프레슬리 흉내를 내며 ‘하운드 독(Hound dog)’을 불렀다. 가수가 무대에 섰을 때 막 밀크캐러멜 포장을 뜯고 한 개를 입에 넣었다. 가능한 한 아껴 먹으려고 밀크캐러멜을 천천히 빨았다. 노래가 끝났을 때는 언제 먹었는지 열두 개의 캐러멜을 모두 먹어 버렸다. 그는 다른 가수들처럼 마이크 앞에서 얌전히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요란한 밴드 음악에 몸을 맡기고 ‘개다리춤’을 추면서 부르는 노래는 완전히 충격이었다. 소풍을 가면 기껏해야 남진의 ‘님과 함께’를 함창하면서 손뼉이나 치고 있던 그 시절. 도시학생들처럼 나팔바지를 입고 야외전축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에 맞춰 개다리춤과 트위스트를 추었다. 친구들 앞에서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 되긴 했지만 성격은 지극히 내성적이어서 글쓰기를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 나는 아무도 모르는 광기를 품고 있었다. 나만 광기를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시절은 요즘과 달라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야 살아갈 수 있는 시대다. 부모님에게 상속받을 유산도 없었지만, 세상은 어차피 혼자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던 시대라서 모두들 미래에 대한 광기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처음 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이다. 백일장에서 ‘운동장’이란 제목으로 산문을 써서 당선된 날 밤이다. 우등상도 아니고 모범상도 아닌 그저 글 잘 써서 받은 상은 집에서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혼자 밤중에 상장을 쓰다듬으면서 이다음에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은행원이 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은행배지를 양복 재킷 깃에 찬란하게 달고, 잘 마시며 잘 먹다가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는 졸병 시절부터 우연찮은 기회로 선임들의 펜팔편지, 혹은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기 시작했다. 글은 쓰면 쓸수록 는다. 편지를 잘 쓴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다. 동기들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할 때 나는 연애편지를 대필했다. 일요일에도 동기들은 화장실 뒤에 숨어 과자를 나누어 먹을 때 나는 나무 그늘 밑에서 선임이 사다 준 초코파이를 먹으면서 편지를 썼고, 동기들이 칼바람을 맞으며 얼차려를 받을 때 나는 내무반 페치카 옆에서 편지를 썼다. 어느 날 문득 중학교 2학년 때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부터 시간이 있을 때마다 소설을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설이라 할 것도 없다. 연재 형태로 써서 내무반에 돌렸는데 세월이 고래심줄처럼 질길 때여서 나름 인기는 있었다. 전역을 하고 복직을 했지만 작가의 꿈은 버려지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사표를 내고 절간에 들어가거나, 어떤 소설가처럼 영등포역 근처 닭장 방을 한 칸 얻어서 글을 쓰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결정적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나이 36세 때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습작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원치 않은 부서로 발령이 났다. 그날 혼자 술을 마시면서 고민을 했다. 새로운 임지로 가면 똑같은 날이 계속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을 하고, 때가 되면 보너스를 타고, 또 한 해가 가고, 결국 나이가 들면 퇴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주 싫었다. 고생이 되더라도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남은 생을 살면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식 형제가 눈에 걸렸다. 전업주부로 사는 아내의 얼굴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임지로 전출 인사를 하러 가는 대신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서를 제출하기까지는 갈등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막상 사표를 내니까 오히려 초연해졌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지만 지점장은 형식적인 반려와 함께 사표를 받아들였다. 서운함보다는 내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뼈가 저리도록 느꼈다. 세월은 결코 움켜잡을 수가 없고, 흘러간 세월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만약 그때 상사들이 사직서를 반려했더라면 나는 지금쯤 은퇴자로 아파트 경비를 서고 있거나, 등산복을 입고 산에 오르거나, 선글라스 쓴 얼굴에 강아지를 끌고 공원 산책을 하며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산골 고등학교 출신의 사직서는 대학을 졸업한 지점장의 눈에는 퇴직금 청구서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점이 내게 축포를 터트려 준 셈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장 어려웠던 점은 경제적 곤란이다. 그다음으로 새털처럼 많은 시간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서른여섯 살이 되도록 타인의 시간에서 살아왔던 탓에 내가 직접 시간을 조정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마음은 어서 빨리 글을 써야 경제적인 문제가 풀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매일 집에 있으니까 아침부터 술을 마셔도 되고, 새벽까지 마시고 늦잠을 자도 되는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결국 1년 만에 서울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 보내지 못해 부모들이 안달을 하던 시절이다. 책 한 권 없는 내가 글을 쓰겠다고 고향에 내려가니 모두들 수상쩍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 어린 시절의 영혼을 나누어 가졌던 초등학교 동창들도 모임을 하고 있었지만 나에게 가입 권유를 한 것은 무려 4년 쯤 뒤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생존해 계시던 아버님의 절망과, 형제들의 보이지 않는 무시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서 고생을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형제들의 눈에는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일 것이다. 무슨 횡령이나, 사고를 쳐서 잘린 것이라고 자기네들끼리 단정을 지었던 것 같았다. 지금은 사정이 바뀌었지만 아직까지 가족들에게 그 시절에는 왜 나를 그렇게 대했냐고 묻지를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까 나라도 가족들과 같은 시선으로 못마땅해하고 동네 사람들 보기에 창피했을 것 같았다.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원고가 완성돼서 출판사에 우송하면 대답이 없다.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해 보면 “원고는 좋지만 우리 출판사와 색깔이 다르다”라는 무성의한 대답을 수없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식으로 문학수업도 들어 보지 못한 내가, 간신히 소설 쓰는 것을 배워서 출판사에 제출했으니 채택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때는 피를 말리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무렵 ‘천리안’ 이라는 PC통신이 생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새로운 것들에 대한 목마름이 강하다. 태블릿 PC도 일찌감치 구입을 했다. 스마트폰의 웹 활용법이라든지, 내 또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액정 태블릿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것도 성격 탓이다. 그 당시도 나는 보기 드물게 16비트 중고 컴퓨터와 ‘도트프린터’를 가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갈 때 청계천 전자상가에서 산 것으로 워드 기능은 있는데 통신을 할 수가 없었다. 통신을 하려면 단말기가 있어야한다. 담뱃값이 없어서 100원짜리 환희를 피우고 있는 내게 통신을 할 수 있는 단말기는 그림의 떡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집으로 왔다. 한국통신에서 ‘하이텔’ 이라는 통신을 개설하면서 농민후계자들에게 단말기를 한 대씩 대여해준다는 것이다. 천리안이며 하이텔 통신은 문학의 아웃사이더였던 내게 밀크캐러멜 같은 것이었다. 내 시야는 PC통신으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넓어졌다. 동호회에 가입을 하고, 작품을 평하고, 가끔은 회원들을 영동 산골로 불러 내려서 밤을 새우며 문학을 토론하고, 소설을 이야기하고 시를 논했다. 유니텔이라는 통신회사가 생겨나면서 통신업계는 3파전이 됐다. 더불어서 대학생과 전문가들 전용이던 통신 세대는 고등학생부터 일반 직장인들까지 넓어졌다. 통신이 보편화 되면서 유료소설 사이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통신에서 익명으로 글을 올리던 작가들은 급속하게 유료소설 사이트로 편입이 됐다. 나는 유료사이트에 글을 쓰면서 두 마리 토끼를 노렸다. 연재가 끝나면 종이책을 내겠다는 계획이다. 통신으로 보는 문장과 종이책으로 보는 문장은 여러 부분으로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통신 세대들의 가독률쪽에서 보면 종이책의 문장은 무겁다. 나는 그 점을 재미와 신선한 스토리로 보완 하며 내 존재감을 드러냈다. 컴퓨터가 ‘286’으로 진화를 하면서 윈도라는 것이 생겼다. 윈도는 과거 텍스트 위주의 통신에 새로운 바람을 집어넣었다. 초등학생들까지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유료소설 사이트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PC통신에 연재를 하던 작가들은 모두 자기만의 숲에 고요히 잠겨들었지만 나는 본격적으로 종이책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거의 10년간 하루 12시간 이상, 많을 때는 14시간 동안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기도록 키보드를 두들겼다. 통신에 연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늘어난 필력이 있었기에 시간이 없어서 글을 못 쓰면 못 썼지.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아서 글을 못 쓴 적은 없었다.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이 붙을 무렵 서서히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빵을 살 생각으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이아몬드로 연탄집게를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라면 적어도 펄 벅의 같은 소설을 써야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어깨를 짓누르는 날들이 하루가 다르게 크기를 더해갔다. 나는 2002년 5년 정도 기한을 잡고 현대사 반세기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집필에 들어갔다. 계획과 다르게 12년 6개월 만에 원고지 2만5000매 분량의 15권짜리 이 완간됐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2015년 1월에 ‘작가의 만남’ 행사를 가졌다. 많은 분들이 참석을 해서 성황을 이루었다. 하나같이 “이제 그만 쓰고 쉬어라, 쉬는 것이 어려우면 몇 년 쉬고 다시 시작하라”는 등 그동안의 여정을 치하했다. 나는 그 다음 날 새벽 6시 20분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을 쓰면서 창작노트에 메모해 두었던 장편소설 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소설을 쓰고 있다. 내게 소설을 쓰는 시간은 밀크캐러멜의 맛을 아무도 모르게 음미하는 시간들이다. 내 사직서를 선뜻 받아 준 상사분들에게 땡규!를 보내면서.
- 2016-08-26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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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초등학교에 전학] (1)
- 우리가 일본에 도착해서 전학서류를 전부 내서 학급배정을 받은 것은 3학기 때였다. 우리에게는 2학기 까지는 있었는데 3학기라니... 암튼 그렇다 하니 그대로 따르면 되는 일이라 특별히 힘든 일도 아니라 그러려니 했다. 큰 애는 4학년 2반이었고 작은 애는 2학년 1반이었다. 큰 애 담임은 부끄러움 반에 걱정 반으로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어쩔 줄 모르는 남자 총각 선생님이었다. 외국 학생이란 것에 언어도 전연 모른다는 사실에 근심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작은 아이 담임은 당돌하고도 똑부러지게 뭔가를 바로바로 알아채는 여자 선생님이었다. 교장 선생님께 인사를 마치고 나오자 방과 후라, 비어 있는 교실에 우리를 데리고 가서 내일 가져올 물건과 학교에서 생활하면서의 필요한 준비물들을 여자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었다. 4학년 담임은 한 곁에 앉아 수줍음으로 말은 한마디도 없이 여자선생님께서 설명하는 걸 듣고만 있었다. 일어는 모르지만 그 표정이나 비슷비슷한 발음으로 된 단어들이 귀에 그렇게 낯설지는 않았다. 물론 젊은 아가씨 통역 자를 데리고 갔었지만 내가 전부 알아듣고 대답을 잘하자 사무실에 가 봐야겠다며 도중에 가 버렸다. 참고서, 노트, 교과서, 급식에 사용할 손수건, 연필, 연필통, 가방, 지진훈련용 모자, 교모... 정말 열심히 설명해 줬다. 나는 알아들은 것들은 우리말로 잘 모르는 것들은 그대로 일본어 발음대로 적었다. 내 눈치가 좀 모르겠다고 느껴지면 다시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여 선생님은 친절했고 정확해서 마음에 딱 들었는데, 계속 ‘말도 못하고 쓸 줄도 모르니 어떡하나? 아이 불상도 해라’ 만 중얼거리고 있는 4학년 담임은 내겐 큰 걱정이 되었다. 학교에서 나오면서 선생님께서 준비해 오라는 물건들을 하나씩 사기 시작했다. 급식용 손수건은 하루걸러 빨아 와야 하니까 한사람 앞에 세 개씩 만들어 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사각 손수건 정 가운데에 고무줄을 달아 오라 했다. 왜 그러느냐 했더니 손목에 손수건 고무줄을 끼우고 식사를 하면서 흘리면 입을 닦기 편하게 이름을 꼭 새겨서 만들어 오라는 것이었다. 정말 요령 있게 정확한 일본인들의 습관이 이렇게 몸에 배는 구나 싶었다. 모든 물건에는 이름을 꼭 써야 한다고 당부를 했다. 설명하는 선생님의 표정과 얘기가 아주 알아듣기 쉬웠고 재미있었다. 교과서나 손수건, 고무, 노트, 준비... 같은 말들은 대강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으로 어쩌면 금방 일본어는 배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우리는 중간에 길을 잃어 헤매기도 했지만 둘째가 길을 찾아 모든 것들을 잘 사가지고 왔다. 외국에 가면 며칠을 집 주변을 길을 익혀야 하므로 걸을 수 있는 정도로 셋이 손잡고 돌아다닌다. 학교가 있는 방향은 가 본 적이 없어서 물건을 사느라 정신이 팔려 그만 가게만 돌아보면서 상가가 있는 길 끝까지 가버린 것이었다. 다 사고 집으로 가려 하자 여기가 어딜까? 가 된 것이었다. 자꾸만 같은 길을 몇 번을 돌았다. 긴장해서 한쪽으로만 가 보자고 정해서 걸어 내려갔다. 우리가 한 번 걸었던 곳이 드디어 나왔던 것이다. 꼬마가 내가 확인하고 올 테니 형이랑 엄마는 짐 들고 있으니까 여기서 기다리라고 의견을 내 놓는다. 알았다 하자 뛰어 갔는데 안 온다. 약간 걱정 하고 있을 때 ‘맞아~’ 하며 신이 나서 다시 뛰어 오는 걸 보고 안심했었다. 우리 맨션 옆이 동해대학이 있는데 밤에 보니 빨간 안테나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 집은 이제 절대로 못 찾는 일이란 없어진 거였다. 저녁을 먹고 각자 자기 가방을 챙기는데 나는 준비물들을 확인하며 도왔다. 내일 부터는 학교에 다닌다는 생각을 하며 80몀 정도의 아이들이 있는 콩나물 반이었는데 30명도 채 안 되는 교실에서 공부를 한다니... 아이들도 나도 약간 흥분되는 저녁이었다.
- 2016-08-18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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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
- 1. 가락지를 낀 용의 꿈 필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나의 할아버지는 용꿈을 꾸셨단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그런데 자세히 보니 용의 다리에 가락지가 끼어 있어 그것이 무엇인지 걱정스러웠다고 하셨다. 그 덕택에 필자가 양자로 가서 잘 살 수 있었음에도 할아버지는 당신 손자를 남겨 두는 결심을 하고 나의 사촌 형을 양자로 보내셨다고 한다. 필자는 서울에서 식품사업을 하시던 아버님 슬하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나 겨우 걸음마를 하던 다음 해에 바로 6.25 사변으로 인해 어머니는 필자를 들쳐 메고 아버지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는데 기차를 타고 남으로 가던 중 인민군 비행기들의 기총사격에 전 승객이 정신없이 숲 속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올라타고 매달려서 가는 행렬이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왼쪽 다리를 약간 삐어 낮에는 잘 놀고 밤마다 아프다고 했으나 시골에서는 당시 마땅한 병원도 없었으니 아이의 꾀병이라고 그냥 넘긴 것이 화근이 되어 2~3세 때부터 심한 골수염을 앓게 됐다. 그러나 신이 나를 살리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침 당시 부산에 전후 서독에서 파견된 서독병원이라는 것이 부산 대신동에 있어 그곳에서 진료를 받고 바로 완쾌 상태로 퇴원하게 되었다. 당시 나이 8살이었는데 병원에서는 통원치료를 하던지 약 1년간 입원을 시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 갈 나이라 입학을 시키고 통원치료를 결정한 것이 화근이 되어 아직 후유증을 앓고 있어 보행이 불편하다. 어린 나이에 너무 활발하게 놀다 보니 환부가 제대로 치료되지 않고 후유증이 남게 된 것이었다. 2. 학문의 길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에게 통지표의 국어 과목에 ‘수’가 없으니 ‘수’를 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말해 국어에 ‘수’를 받을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필자는 대체로 우수한 학생 측에 들었다. 그러나 당시 진해에서 일류중학이라는 진해중학교에 응시하여 입학시험을 치르고 나서 혼자 고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였다. ‘과연 합격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거의 꼴찌 수준으로 겨우 합격하였다. 합격 이후엔 학문에 뜻을 둔 공자와 비슷한 나이 15세에 공부의 즐거움을 깨우치기 시작하였는데 꼴찌 수준의 합격이 필자를 자극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1학년 첫 학기부터 상위권의 수준으로 시작했던 필자는 중학 시절 내내 상위권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공부를 잘해 수석으로 졸업했으나 가정 사정이 여의치 못해 대학 진학을 잠시 미루고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장남인 필자는 4명 동생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필자는 일하는 와중에 지방 행정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마침 동생들이 대학 공부를 시작하고 어느 정도 사회생활에 익숙해질 무렵 지난 7년간 접었던 대학 공부를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70년 당시 5급을류 지방 공무원 월급은 약 1만 원 정도로 집 월세 충당하는 정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사직하고 학원 강의를 하던 시기에 배움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된 것이다. 필자는 상대에 진학하여 공부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축적하는 길이 꿈을 실현하는 첩경임을 생각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며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을 꼭 가야 하는지 대학 생활을 통해서 이를 확인하고 싶다는 강한 집념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년이 지나서 진학한 대학 4년은 꿈같은 세월이었다. 엄청난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생활 중에 터득한 사업 경험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계기도 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물 안의 개구리가 세상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한국경제의 흐름을 읽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방향설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대학 4년은 학문의 즐거움을 알게 된 시기기도 했다. 이런 즐거움으로 수석 졸업할 수 있었지만 한편에선 미래의 진로에 대한 걱정이 생겼다. 그러나 아직도 동생들 학업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학계로 나아가고 싶은 생각이 맘은 접고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다시 산업전사로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먼 훗날 이론과 실제를 최대한 일치시키는 교수가 될 수 있으리라는 꿈을 안고 현실 속의 길을 찾기로 하여 당시 최고의 보수를 주는 대기업 건설회사에 취업하게 되었다. 3. 중동 건설 현장을 누비면서 아라비아 상인의 숨결을 느끼다. 필자가 취업한 시기에 건설회사는 한참 중동 붐이 일어 대졸 신입사원에게 최고의 월급을 주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당시 중소기업이었던 한국유리(주) 기획실에 동시 합격하였지만 모든 사람이 추천한 건설 회사로 취업하였다. 희망하던 기획실이 아닌 자재부로 인사명령이 났다. 기왕이면 큰 뜻을 펴기 위해 나는 중동근무를 지원하였더니 사우디아라비아 TEP 본부 자재구매 담당으로 명령을 내주었다. 여기서 사우디아라비아 상인들의 상술의 대단함을 깨우쳤고 향후 중동국가와 업무상 협상하는 기술을 배우는 전기가 되었다. 영어가 능통하여 구매업무도 그리 어렵지 않게 진행할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말도 좀 익혔다. 운전 기술도 익히는 기회가 되었다. 1980년대 초 리야드 시내는 상가도 크게 형성되지 않았다. 따라서 건설용 자재를 구매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아서 해외에서 구매하여 조달하였으나 급한 자재는 현지에서 조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사 팀으로부터 자재 조달 독촉을 받았던 독특한 자재 A가 생각난다. 당시 필요한 자재는 상권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아 수소문하여 어느 주택가에서 상호를 달고 있는 공급업자를 찾았다. 급한 김에 대충 가격 협상을 하고 공급을 하고 나서 보니 약 3배나 비싸게 구매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동국가의 무표정한 협상력 앞에서는 국내 업자는 한순간 실수하면 엄청난 바가지를 쓴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되었다. 모든 물건을 생산하지 않고 수입해서 판매하는 까닭에 부르는 것이 값이 되고 모르면 속아 넘어가게 되어 있는 곳이 중동이었다. 이후 상대와 협상 시에 얼굴에 표정을 나타내지 않는 기술을 터득하여 많이 활용하고 있다. 그런대로 사우디아라비아 생활은 재미는 있었지만 33세에 결혼하여 바로 해외근무를 하게 되어 아직 아이가 없는 관계로 회사에서는 연장근무를 요청하였지만 귀국을 결심하였다. 4. 세계 제1의 중공업 회사를 만들어내다 대학 재학 중에 아산학자금을 받아 공부했던 연고로 인하여 귀국 후에 현대중공업(주) 플랜트 사업본부 계약관리부에 근무하게 되었다. 구매부서의 업무도 재미있고 할 만했지만 주위에서 바라보는 의혹의 눈초리는 아주 거북스러웠다. 따라서 수출과 관련된 업무를 하려고 하던 차 현대중공업(주) 계약관리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당시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현대에서 정주영 회장과 함께 일을 하던 한유동 전무가 담당 중역이었다. 필자가 계약관리부로 가게 된 것도 한 전무의 뜻이었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계약서의 핵심 사항을 짚어가면서 일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기도 하였지만 리더십도 출중하여 회사의 임직원들이 많이 존경하는 그런 분이었던 것 같다. 1981년 만 하더라도 한 달에 한 번 정도 쉴 수 있었고 그 외는 업무에 전념하는 시간이었다. 당시 필자는 혼자 회사에서 제공한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업무에 전념하였다. 우리는 현대가 이미 국가적인 회사였으므로 현대가 잘되는 길이 우리나라가 잘되는 길이라는 믿음으로 열심히 근무하였다. 계약관리부서는 요즘 PM 부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조직으로 회사의 대표이사로부터 프로젝트에 대한 전반적인 위임을 받아 사장을 대신하여 업무를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 영국 등 구미 국가를 위시하여 호주, 인도, 중국 등 전 세계적인 프로젝트를 총괄관리하다 보니 각 국가 및 회사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해양플랜트 분야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선진국의 기업들과 계약과 협상 업무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의 업무도 세계화의 수준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회의하면서 영문으로 회의록 (MOM)을 만들고 노트북이 생기면서 회의 시 바로 회의록을 작성하여 상호 서명하는 수준까지 이르니 어떤 계약과 협상 업무도 가능하게 되었다. 단지 기술적으로 좀 미진한 부분은 세계적인 설계회사와 하도급 계약을 하던지 합작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하는 식으로 보완해 나갔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어느 사이 우리도 모르게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선박을 만드는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고 조선업 세계 1위 회사로 성장해 나아갔다. 초기 단계에 인도 ONGC사로부터 수주한 Win, Wips 공사는 실행률이 85% 정도가 되는 수익이 많이 나는 프로젝트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도 클레임 보험사고 처리 등의 업무에서 600만 달러 이상의 순익을 창출하는 데 기여했다. 해양사업본부는 인도 ONGC사로부터 인정을 받아 약 25년간 매년 지속해서 프로젝트를 수주하여 한때 ONGC사업본부라는 호칭으로 불리기도 하였었다. 이와 관련 인도는 미국, 프랑스, 일본 등에 발주하지 않고 한국의 현대에게 지속적인 발주를 함에 따라 위 기간 약 20억 달러 이상의 예산을 절감하는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5. 함께하여 행복하다 먼 길을 갈 때는 함께 가라고 했다. 필자는 사랑하는 5남매들과 함께하여 행복했다.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필자가 존재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리 오남매는 어려운 가정 사정으로 집도 절도 없는 상황임에도 함께 노력하여 다 대학을 졸업한 자랑스러운 사람들이다. 필자 집안에 행복을 몰고 온 사람은 어쩌면 나의 아내인 것도 같다. 아내와 결혼하자마자 5남매의 장남인 필자를 도와 얼마 되지 않은 월급을 쪼개 동생들 학업을 지원하고 집안을 평화롭게 이끌어왔다. 회사 야유회 때 부부동반이라 같이 가자고 하였더니 옷이 없어 함께하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순간 너무나 미안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난다. 어려운 상황에서는 아들 둘은 이제 장성하여 결혼하여 독립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또한 큰 행복이라 생각한다. 손자를 보고 손자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 이 즐거움 또한 어디에 비길 수가 있을까? 며느리가 수시로 전화로 안부를 물어오는가 하면 손자가 커가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내 우리 부부를 즐겁게 해주고 있다. 6.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서 도전 대기업 30년 중소기업 10년의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양자의 주요한 차이는 도덕성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필자가 앞으로 살아가는 방향은 도덕성을 지키면서 살 수 있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 개인사업자 등록을 하여 필자만의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필자가 스스로 도덕성을 허물지 않는 한 누구도 필자에게 도덕에 반하는 일을 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에서 외자 유치 3500만 달러를 성사시킨 필자는 이를 회사가 갚지 못할 시 처할 수 있는 어려움을 생각하면서 도덕성이 모자란 그런 결정을 했는데 당시 이런 생활을 접기로 했다. 필자는 전문성이 있으면서 혼자서 할 수 있는 국제계약 컨설팅을 하는 일이다.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한양대 및 중앙대나 전문 교육기관, 한국플랜트협회, 건설전문공제조합 등에서 국제계약 관련 강의를 한다. 신문사에서 집필 요청이 있으면 글을 쓰기도 한다. 강의는 대학 졸업 당시 학계로 나가고 싶었던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루에 7시간 강의를 하는 필자를 보고 아내는 철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강의 자체를 즐기다 보니 강의를 시작하면 나는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필자가 또 하나 사명감을 느끼는 일이 있다.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창출하는 일이다. 원래 국가가 앞서서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국가 발전의 새로운 동력으로 삼아야 할 일이나 현재 국가가 해주기를 기다릴 수 없는 실정이다. 서울시에서 실시하는 SBA의 창업 닥터 과정을 이수하면서 청장년들의 창업을 지원하는 창업닥터로서 자격을 취득하고 KDB 시니어브리지 센터 1기 과정 도심권 인생설계 1기과정 등을 수료하면서 많은 뜻을 함께하는 좋은 동지들을 만나게 되었다. 개인적인 꿈도 있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붙여 장학회를 하나 만드는 것이다. 이름하여 가칭 ‘태성(太晟)장학회’ 다. 가난으로 인하여 젊어서 배우지 못하는 후손이 없도록 해두고 싶은 생각으로 오래 동안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있다. 바야흐로 100세 시대다. 시니어들이 건강한 삶을 살면서 국가와 사회를 위해, 또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또 다른 이상 사회를 꿈꿔가는 것은 필자의 또 다른 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 인생의 최고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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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8-17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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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92세 현역 법무사 이종태, 풍파 이겨 내고 100세 인생 향해 오늘도 일합니다
- 이종태(李鍾台·92) 법무사를 만나기 전 단서는 딱 두 가지였다. 90대 현역 법무사이고 봉사단체인 ‘망월원’의 이사장이라는 것. 90대 현역이라니. 고령의 노인이 여전히 일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존경스럽고 놀라운 일 아닌가. 달리 질문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백년 가까운 시간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이유가 있겠지. 이종태 법무사가 입을 여는 순간, 시간 여행이 시작됐다. 뜨거운 7월의 어느 날, 목동 3단지 아파트 상가 건물 이종태 법무사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20년간의 법원 생활을 접고 1979년 법무사로 일을 시작해 서소문, 여의도 사무실을 거쳐 1987년 이곳으로 와 일하고 있다. 우선 우리 잡지에 대한 설명을 해드린 뒤 취재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나 같은 사람 뭐 볼 게 있냐”고 되물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대전 사람인데 왜정(일제강점기) 때 일본 군대에 끌려갔다 와서 광복 직후부터 14년 동안 국어 선생을 했어. 그리고 서울로 와서 법원 생활 20년을 마치고 법무사 생활을 지금까지 하고 있지”라며 92년 인생을 한마디로 설명한다. 잘 짜여진 영화 로그라인(영화 투자를 위해 감독이 한두 마디로 영화를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정확했다. 이렇게 자신의 인생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공부하고 싶던 어린 이종태, 삶이 꼬이다 그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들어가는 시점에서 시작했다. “당시 충청남도에는 중학교가 대전과 공주에 하나씩 있었어요. 대전에 있는 중학교는 일본 사람이나 총독부 직원의 자식들이 다니는 곳이었고 조선 사람들은 다닐 수 없었어요. 그때 마침 큰 형님의 친구가 일본 도쿄의 메이지 대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그분 옆에서 고학(苦學)할 생각으로 일본행을 준비했습니다.” 내선일체라 했지만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이 심해 일본으로 가려면 관할 경찰서의 승인을 받은 도항증명서가 필요했다. “일본의 사립학교 지원서를 만들어서 경찰서에 제출을 했는데 며칠을 계속 미루는 거예요. 얼마 안 있다 도항증명서가 아닌 일본군 지원병 훈련서를 순사들이 가지고 와서는 도장 찍으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동아전쟁이 한창이고 군인이 너무나 부족한데 젊은 사람이 애국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요. 지금은 쓸데없이 공부할 때가 아니다, 천황폐하(일왕)를 위해 싸우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희 아버지가 아주 엄격하셨어요. 세수하실 때 수건 들고 서 있어도 봤고, 아버지 명령을 어긴 적도, 말대꾸를 해본 적도 없었어요. 아버지에게 여쭈어보고 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순사가 ‘아버지가 일왕보다 더 중요하냐’며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지금 지원서를 쓴다고 해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필기시험과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기에 지원서를 냈습니다.” 1924년 갑자생의 비애, 첫 징병 대상자로 기억되다 결과는 뻔했다. 빵점을 맞기 싫어 필기시험은 한두 개 정도 맞혔다. 이 정도면 안 될 거라 생각했는데 신체검사에 합격했고 결국 징집 대상이 됐다. 그 다음 해인 1941년 6월 14일 육군사관학교 자리에 있던 지원병 훈련소에 입소해 6개월 전투 훈련을 받았다. “1942년 1월에 용산 제23부대에서 입영통지서가 왔어요. 이제 진짜 전쟁에 나가는 거였죠. 제가 1924년생인데 우리 나이서부터 징병 실시를 했습니다. 나보다 윗사람들은 탄광으로 징용 끌려가 고생했고, 우리 때부터는 징병돼 전투에 나가게 된 거죠.” 이종태 법무사는 자대인 제42사단으로 가기 전 중국 칭타오(靑島)로 가 일본에서 징집된 일본인 훈련병들과 또 한 번 6개월의 전투 훈련을 받았다. 전투에 곧바로 투입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랐다. “저는 전투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뉴기니에 있는 제42사단에 배치를 받았는데 떠나기 바로 직전 신체검사에서 폐결핵 보균자로 판명이 난 겁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이후 이 법무사는 중국에서 4개월여 병원 생활 후 히로시마 병원을 거쳐 우쓰노미아(宇都宮) 육군병원에 입원했다. “사실 당시 폐결핵 환자는 약이 없었어요. 오전, 오후 한 시간만 입원실에 누워 있거나 안정을 취하고 있으면 됐습니다. 그 외 시간은 공부하는 데 썼어요. 특히 우쓰노미아 육군 병원 도서관이 참 좋았어요. 그게 얼마나 좋아요. 어렵고 힘들 때는 소설보고 과학, 철학책을 많이 봐서 스스로 깨쳤습니다. 정식으로 공부한 것은 보통학교 과정이 전부였는데 결과적으로 일본에서 독학을 한 거죠.” 이종태 법무사는 1944년 11월 말 경에 퇴원해 이듬해 광복을 맞았다. 교직생활 14년, 그리고 법원 생활 20년 광복이 되자마자 이 법무사는 교사의 길을 14년 동안 걸었다. 미 군정 당시 초등 공민학교, 고등 공민학교, 호서민중대학의 설립에 동참했다. 또한 학교 경영부서의 책임자로 일을 하면서도 초등 공민학교와 고등 공민학교의 국어 교사로 일했다. 호서중학교, 대전상고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계속해서 벌어졌다.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되면서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이 부하들과 함께 남하하다 옥천 근처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이 대대적으로 대전 시내를 불태웠고 이때 이종태 법무사가 살던 집도 학교도 다 타버렸다. “학교라도 빨리 복구하고 싶어 돈 있는 사람을 끌어 모았다가 그만 학교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참 그땐 많이 힘들었어요.” 평생 직업이 된 법무사, 우연히 시작된 봉사 이 일이 있은 뒤 대전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갔다. 대법원에서 판사를 하고 있던 장인 덕에 법원에서 임시직으로 일할 수 있었다. “임시 서기보로 들어갔다가 서기로 일했습니다. 법원에서 오래 일할 생각이 아니었어요. 학교로 돌아가고 싶었죠. 그런데 또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법원에 눌러앉았다 결국 20년을 일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법무사로 37년간 살다보니 90이 넘었네요.” 법무사 일과 동시에 시작한 것이 바로 봉사활동이다. 그의 인생에서 교사와 법무사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바로 사회복지법인 망월원의 이사장직일 것이다. 서울가정법원에서 20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서소문에 법무사 사무실을 개소하고 일주일도 안 돼 한 일본 여자가 이종태 법무사를 찾아왔다. “모치즈키 카즈(望月カズ)라는 여자였어요. 전쟁고아들을 거두어 100여 명을 키우고 있던 고마운 사람이었어요. 아이들의 호적 정리가 필요해 도움을 청하러 왔더라고요. 일본 고아 남자 아이 4명을 함경도에서 월남한 분들에게 부탁해 입적을 시켰다고 했습니다. 징병 통지서가 날아와 호적에서 거둬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하더라고요. 그 아이들은 일본 사람으로 호적을 다시 만들어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그때 도움준 것을 계기로 법률관계 관련해서 내가 돕기로 했어요.” 이후에 모치즈키 여사를 돕는 후원단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법률문제와 관련해 뭐든 무상으로 봉사하기로 했다. 일을 좀 도왔나 싶었는데 1984년 모치즈키 여사는 60세가 채 안 돼 숨을 거뒀다. 10년 후, 일본과 한국에서 모인 후원금으로 세웠던 모치즈키 여사의 유일한 재산인 서울 낙원동 상가 건물을 바탕으로 한국 아이들을 돕자고 법인을 만든 것이 바로 사회복지법인 망월원이다. “사실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서 이사장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예전에 봉사상을 탄 적도 있고요.” 오랫동안 운동 마니아로 사시길 바라며… 사실 이종태 법무사는 운동 마니아다. 88세까지는 등산도 잘 다녔다. 작년까지 마라톤 대회에도 나갔다. 어딜 가든 늘 최고령자. “참 다행인 게 머리숱이 많아요. 검게 염색도 했으니 내 나이보다 훨씬 젊게 보더라고요. 사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수영을 했는데 이제 체력이 떨어지는지 좀 하기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제 생각에는 온몸이 쑤시고 아픈 데는 수영만한 것이 없어요. 90이 넘으면서 2층 오르내리는 것도 힘들어서 요즘에는 간단히 체조하고 걷는 것 정도만 합니다.” 사실 요즘 이종태 법무사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지난해 10월 아내 송광섭(宋光燮)씨와 사별하면서부터다. “신혼생활 때부터 자식들 키우느라 뭘 잘 해주지도 못했는데, 병이 들고서 얼마 안 돼 떠났어요. 지병을 알고 약 먹고 준비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종태 법무사는 어디를 가든 꼭 버선발로 나와 잘 다녀오라고 손 흔들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집 사람은 옛날 조선 시대 여자처럼 살다 갔습니다. 여보, 당신 해본 적도 없고 존댓말도 꼭 극존칭을 썼어요. 나는 그저 예사 높임 정도로 얘기했었고 대드는 일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나도 많이 위해줬죠.” 작년 10월에 떠났기에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이종태 법무사. 꿈에 좀 나왔으면 하는데 도무지 만날 수가 없어 슬프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꿈에서라도 만날 기회가 있다면 ‘미안했다,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렇게 안 나타나요.” 요즘 이종태 법무사는 5년만 더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무장으로 일하는 큰아들이 올해 예순 여섯인데 좀 더 일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 때문이라고. 인터뷰가 끝나고 사진 촬영을 하는 이종태 법무사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주름 사이로, 순탄치 않았던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 숱한 날들을 이긴 그의 이야기. 단순히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닌 우리 역사였다.
- 2016-08-10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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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간] 술잔 함께 기울이던 친구가 기억나는 곳!
- 1970년대 강남 부흥의 상징 같던 한 아파트는 2014년 재건축되면서 기억 속에서 잊혔다. 적은 돈으로 푸짐한 음식을 배불리 먹으며 친구들과 술잔 기울이던 피맛골 또한 개발이란 이름으로 영영 사라졌다. 도시의 지도가 바뀌고 변화한 거리. 뭐든 새것이 좋다지만 우리네 따뜻했던 옛 시절도 아름답지 않던가. 혹시 그때가 그립다면 서울역사박물관(서울 종로구 새문안로)에 가보시라. 정겨웠던 이웃, 친구들과 술잔 부딪히던 그때 정취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다. 판자촌 위에 쌓아 올린 시민 아파트 전시실에 들어서서 1950년대 생활상을 지나 1960년대 ‘서울은 공사중’ 전시실로 들어서면 ‘돌격건설’이라고 크게 써 붙인 포클레인 삽이 건설현장을 연상하게 하는 모래 속에 처박혀 있다. 이 설치물 뒤쪽으로 1960~70년대 세워졌던 시민아파트 내부 모습을 클레이 아트로 꾸몄다. 아파트 속을 재현한 클레이 아트를 살펴보면 마루에 누워 TV 보는 남편, 아파트 상가의 레코드 가게, 금은방, 지금은 거의 사라진 곤로 파는 가게, 다방 등 시대상을 재미있게 표현해 놓았다. 1960~70년대 서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도심 주변으로 판자촌, 즉 무허가 불량주택이 급격하게 불어나자 도시 경관 개선을 이유로 1968년부터 시민아파트 건설이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1969년에만 32개 지구에 406동 1만5840 가구의 아파트가 판자촌 위에 세워졌다. 시민아파트 건설은 1970년 4월 8일 마포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로 중단됐으나 판자촌 마을에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서울의 모습이 크게 변화하는 계기가 됐다. 피맛골이 그립다! 안국역과 광화문역 일대에는 굽이굽이 작은 골목 사이로 정(情)을 한가득 담아내던 오래되고 허름한 음식점들이 모여 있었다. 피맛골이라 불리던 이곳은 도시 재개발로 사라지기 전까지 고단한 하루를 풀어주던 우리의 이웃이자 친구였다. 그중 광복 직후부터 2010년 2월까지 가장 오랜 기간 그 자리에서 영업을 했던 ‘청일집’이 서울역사박물관에 그대로 옮겨져 전시 중이다. 손님들이 끼적인 낙서부터 사용하던 의자, 국자, 전을 굽던 철판, 주전자 등 옛 청일집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청일집 단골이었다면 향수에 젖기 딱 좋은 장소. 기억 속 친구와 술 한잔이 떠오르는 독자라면 부디 가보길 바란다. 우리가 살던 집이네 실제 아파트도 재현해 놓았다. 1978년 입주가 시작된 강남구 지금은 서초구 서초삼호아파트 9동에 살던 한 가족이 쓰던 가구, 생활용품, 집 내장재 등 기증품으로 꾸민 집이 전시실 마지막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1939년생, 1943년생 부부와 아들과 딸, 네 가족이 살던 아파트다. 주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1981년 입주 초기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다고. 식탁 의자에는 호돌이가 새겨진 강남구청 수건이 걸려 있다. 골드스타가 선명하게 쓰인 냉장고, TV, 믹서기, 밥통 등도 낯익다. 아이들이 쓰던 방 책꽂이 앞에 놓인 가방은 옛 추억을 방울방울 샘솟게 해 준다. 취재 당시 어린 아들과 함께 온 한 엄마는 “여기 엄마가 살던 집이랑 정말 똑같다”고 말하면서 즐거워했다. 관람시간 3~10월 평일 09:00~20:00 토·일·공휴일 09:00~19:00 / 11~2월 평일 09:00~20:00 토·일·공휴일 09:00~18:00 휴관일 1월 1일, 매주 월요일(1층 학습실, 서울역사자료실, 로비전시관, 강당, 식당, 카페테리아 개방) 관람료 무료 전화 02-724-0274~6 홈페이지 museum.seoul.kr
- 2016-08-01 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