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라는 사람은 “될 대로 돼라.”
B라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겨우 열넷, 열다섯 살이었던 우리들에게 이따금씩 이런 물음을 넌지시 던지면서 조용히 자신을 성찰해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시던 분이 있다. 바로 통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계신 박순직 선생님이다. 필자가 정신적으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은사님 중 한 분인데 그 후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다’가 필자 생활의 지표가 되었다.
“사과 반쪽이 남아 있으면 A라는 사람은 ‘겨우 요것밖에 안 남았어?’ 하고 B라는 사람은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았네' 합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겠어요? 이왕이면 부정적인 시각보다는 긍정적으로 보면서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 거울을 볼 때는 얼굴만 보지 말고 마음도 비춰보도록 하세요. 혹시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은 없는지, 터무니없는 욕심을 담고 있지는 않은지 하면서요.”
야학교 동급생 석순이는 부모님을 일찍 여윈 가엾은 아이였으나 어려운 세월을 살아낸 사람 특유의 원숙함과 포용력이 몸에 배어 있다. 필자에게 그녀는 눈 쌓인 고향집이고 품 넉넉한 어머니다. 야학 시절 석순이네 집은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건넌방 책꽂이에는 당시 한창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설국’, ‘양 치는 언덕’, ‘빙점’ 등의 책들이 꽂혀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끝끝내 그 책들을 모른 척했다. 그때만 해도 지독한 국수주의자였고 그래서 손해 보는 것은 필자였지만 어쨌든 너무 싫어했던 일본인들의 문화는 접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신적인 지도자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대로 추종자에게 투영되게 마련인데 당시 박 선생님은 배일사상이 아주 투철하신 분이었다.
일본인을 가리켜 ‘쪽바리놈들’이라고 하실 정도로 극도로 싫어했던 박 선생님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민족의 시인 김소월을 좋아했다. 그 덕에 필자도 김소월의 시를 좋아하게 됐다. ‘진달래꽃’, ‘산유화’, ‘가는 길’,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등을 외우고 다녔는데 처음에는 누구나 알고 있는 김소월의 시가 시시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우리 민족의 정서를 너무도 곱게 그리고 섬세하게 그린 그분의 시야말로 진짜 시라는 결론을 얻게 됐다. 특히 ‘진달래꽃’은 어려운 세월을 내색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이 땅의 여인들의 고우면서도 강인한 심성을 너무도 잘 그려낸 시다.
“우리는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른 아침이면 홀로 깨어 평원에 어리는 안개와 지평의 한 틈을 뚫고 비쳐오는 햇살 줄기와 만나야 한다. 가만히 마음을 열고 한 그루 나무가 되어보거나 꿈꾸는 돌이 되어봐야 한다. 그래서 자기가 대지의 한 부분이며, 대지는 곧 오래전부터 자기의 한 부분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자연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약한 자가 될 수 없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 속에서 세상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배워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지 전체가 어머니의 품이고, 그곳이 곧 학교이며 교회라고 믿는다. 대지 위의 모든 것이 책이며 스승이고 서로를 선한 세계로 인도하는 성직자들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교회와 책과 스승을 알지 못한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중에서
얼마나 철학적이고 시적인가! 인디언들의 생각을 적어놓은 이 책을 읽은 후 필자 가슴에는 감동의 물결이 잔잔하게 일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서부극에 그려진 대로 그들을 잔인하고도 호전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편견이(평화롭게 살고 있는 인디언들을 침략하고 학살한 것은 미국인들이었다). 필자가 이 책을 알게 된 것은 박 선생님을 통해서였다. 얼마 전 안부전화를 드렸는데 필자에게 읽어보라고 권하셨다.
박 선생님은 야학 시절부터 늘 좋은 책을 선정해서 팔자에게 권유해주시곤 했다. 그러면 그 책을 어떻게든 구해서 보곤 했다. 박 선생님은 시간을 최대한 쪼개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분이기도 하다.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책상머리에서만 외우려 하지 말고 몇 개 적어서 화장실에도 붙여놓고 몇 개는 부엌에도 붙여놓고 설거지할 때마다 한 번씩 들여다보세요. 버스 타고 갈 때도 영어 단어를 외우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분들이 우리 선생님들이었다.
특히 박 선생님은 학구적이고 의지가 남달랐다. 새우젓 장사를 하시며 어렵게 선생님을 공부시킨 어머님의 기대가 헛되지 않게 부단히 노력하셔서 교수님이 되었다. 선생님에게 야학 활동은 단순히 감상적 차원이 아니라 생활의 한 부분이었다. 필자가 농대에 있어봐서 안다. 연구, 실험, 거기에다 학부 학생들 강의까지 대학원 시절이 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것을.
그런데 선생님은 시간, 경제적인 면 어느 것 하나 여유가 없는 가운데서도 학부 시절은 물론이고 대학원 시절까지도 야학 활동을 하셨다.
1985년 봄, 통신대학교 국문학과 1학년에 입학한 필자는 수원시 고등동에 살고 계시던 박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들쳐 업고 간 세 살 난 아들을 방바닥에 뉘어놓은 후 선생님께 마음을 다해 큰절을 드렸다. 진심으로 존경하는 은사님께 고마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표시하고 싶어서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는 치즈 시장은 어디일까? 와인이나 참치 등 다양한 식품을 소비해내는 세계 시장의 블랙홀 중국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 주인공은 한국이다. 우리나라 치즈 시장은 2011년부터 6년간 56%가 성장했다. 한국인의 입맛이 치즈에 길들여지는 상황에서 시니어의 두 번째 직업으로 치즈 공방은 어떨까? 전문가들은 “은퇴자의 새로운 직업으로 적당하다”고 입을 모은다. 귀농과 결합한 생활 설계가 가능하고, 소자본으로도 시작해 볼 수 있다. 농촌 토착민들과 경쟁해야 할 가능성도 낮다. 굳이 시골이 아니어도 좋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치즈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1960년대. 벨기에 출신 지정환 신부가 임실 사람들에게 자급자족할 수단을 만들어주기 위해 산양 두 마리로 치즈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다 1990년대 이후 프랜차이즈 피자 식당이 대중화하면서 치즈 소비는 급격하게 늘기 시작했다. 한국 낙농가들이 치즈를 제조하기 시작한 계기는 1998년 7월이다. 국립순천대학교에서 낙농가를 대상으로 한 유제품 제조 교육을 최초로 시작한 것이 시초가 돼 생산이 본격화됐다.
국내에서 개인이 유제품을 생산하는 방식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직접 젖소를 키워 생산한 원유로 유제품을 만드는 목장유가공장과 원유를 외부에서 공급받아 제조해 유통하는 소규모 유가공장 그리고 지역민을 대상으로 하는 가내수공업형 치즈 공방이 있다. 목장유가공장과 소규모 유가공장은 식품위생법에 따라 식품제조가공업에 속하지만, 치즈 공방은 즉석제조판매가공업으로 분류 신고 대상이다.
큰 욕심내다간 ‘낭패’
여러 가지 형태 중 은퇴자들이 교육을 받고 유제품을 만들어 수입을 낼 수 있는 형태로 전문가들은 가내수공업형 치즈 공방을 꼽는다.
국내에서 최초로 목장유가공 교육을 실시해온 배인휴 국립순천대학교 동물자원과학과 교수는 낙농업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무리해 사업화하기에는 넘어야 할 기술적, 제도적 장벽이 높다고 설명한다.
“국내에선 완전히 정착된 산업 분야가 아니어서 도전해볼 만합니다. 유제품으로 식품제조가공업을 하기 위해선 고도의 유가공 기술뿐만 아니라 위생을 위한 시설도 갖춰야 하고, 까다로운 해썹(HACCP) 인증도 받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역민을 대상으로 하는 수준이라면 치즈 공방으로도 충분해요. 큰돈 바라지 않고 친척이나 자녀, 손주에게 건강한 먹거리 나눠주며 할 수 있는 사업을 원한다면 이것보다 좋은 것은 없을 거예요.”
만약 유제품을 만들고 싶다면 원유를 얻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재 국내 낙농가에서 생산되는 원유는 남아서 문제가 될 지경이지만, 관련법상 살균 상태에서만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관련 시설을 갖춘 목장을 찾아야 한다. 국내 원유의 품질 수준은 세계적으로도 높은 편이어서 좋은 유제품을 만들기에 적당하다. 목장의 수배가 마땅치 않다면 대형 유가공 회사의 저온살균유나 유기농시유를 구입해서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제조시설을 갖추는 데도 큰돈이 필요하지는 않다. 3중 재킷 솥의 일종인 치즈 배트(vat)와 발효탱크, 숙성고, 냉장고에 상온을 유지할 냉·난방장치 정도면 가능하다. 10평 내외의 공간에서 이런 장비를 갖추려면 약 300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
위치는 공간 확보만 가능하면 도심에서도 가능하다. 관련법상 시설에 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지만 지키기 까다로운 수준은 아니다. 몇 가지 절차만 따르면 백화점 설치도 가능하다. 만약 규모를 키워 식품제조가공업 수준으로 확장하려면 어떨까? 전문가들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고 경고한다. 관련 규정이 까다로워 규제를 철폐해야 한다는 주장은 낙농업계의 숙원사업이 됐을 정도다. 가공 기준과 성분 검사도 매달 받아야 하고, 품목별로 자가품질검사도 필요하다. 각종 농장일지도 철저하게 작성해야 한다. 해썹 인증을 받으려면 지켜야 할 규정이 더욱 많아진다. 관련 규정이 대기업형 유가공 공장을 기준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생산 인원이 일정 규모가 되지 않으면 교육 이수 규정을 지키기도 어렵다고 낙농가들은 말한다.
국립축산과학원 자료에 따르면, 2014년 기준 국내 목장형 유가공 사업을 통해 낙농가는 총 103여 개소로, 유제품 제조와 판매를 하고 있는 목장은 목장 42개소, 낙농체험목장은 13개소, 유제품 판매와 낙농체험목장을 겸한 곳은 48개소로 추정된다.
신선치즈로 틈새 노려야
치즈는 크게 가공치즈와 자연치즈로 나뉘고 자연치즈는 신선치즈와 숙성치즈로 구분된다. 우리가 흔히 먹는 슬라이스 치즈는 가공치즈에 속하고, 피자 위에 뿌려지는 슈레드(shred) 치즈나 리코타 치즈같이 만들어 바로 먹는 것을 신선치즈, 15일부터 3개월 이상 숙성해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것이 숙성치즈에 해당한다.
국내 치즈 시장을 살펴보면 피자용 치즈로 사용되는 모차렐라가 60%로 압도적이다. 이어 가공치즈가 35% 정도이고 신선치즈나 숙성치즈가 차지하는 비중은 5% 내외에 불과하다. 국내 치즈 자급률, 즉 국산 치즈가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14년 기준 4.5%에 불과하다.
시니어들이 치즈 공방을 통해 창업에 도전한다면 신선치즈가 적당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배 교수는 “신선치즈는 냉동 상태로 수입되기 때문에 신선하게 만들어 판매한다면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국내 소비자들의 입맛이 고급화·서구화하고 있어 향후 시장이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며, 와인이나 빵처럼 치즈와 어울리는 식품과 함께 판매하면 상품성을 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장인 되려면 3년 이상 시행착오 겪어야
국내에서 유가공 관련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충남대학교 동물자원연구센터에서 매년 두 차례 진행하는 목장형유가공 과정과 경북대구낙농농협이 진행하는 목장형유가공 교육과정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서울에서 진행하는 교육과정으로는 한국낙농유가공기술원이 건국대학교와 함께 진행하는 유가공기술 기초과정이 있다. 역사가 가장 오래된 순천대학교의 경우 지난해 교육과정이 폐지됐다. 사설 교육기관으로는 에코드림치즈연구소가 운영 예정에 있다. 교육비는 대부분 60시간 교육과정 기준 75만 원 내외이며 일부 교육과정은 우유자조금에 의한 낙농가 대상 비용 일부가 지원되고 있다.
해외 교육기관으로 눈을 돌리는 이들도 있다. 한때 김정은의 입맛을 위해 북한 공무원의 입학신청에 퇴짜를 놓은 프랑스의 국립유가공기술학교(ENIL)도 한국인 졸업생을 배출한 바 있다. 캐나다의 구엘프대학교(University of Guelph)의 치즈 제조 단기 교육과정도 유명하다. 치즈는 인류사에서 역사가 오래된 식품인 만큼 유럽과 아메리카 등지에도 다양한 교육기관이 운영되고 있다.
물론 교육 한 번으로 유제품 장인이 될 수는 없다. 전문가들은 교육 후 생산하는 유제품이 일정한 수준 이상 오르려면 3년 이상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숙성과정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경험과 감(感)이 필요하다. 실제로 각 기관에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같은 과정을 수차례 반복해서 수강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이론만큼이나 실기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치즈에 미쳐 뉴질랜드에서 공부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직접 제조한 치즈를 와인과 함께 판매하고 있는 이태원 치즈플로의 조장현 셰프는 치즈를 너무 쉽게 생각하면 낭패를 보기 쉽다고 경고한다.
“치즈 분야는 육체적으로 많이 힘듭니다. 또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수준까지 오르려면 오랜 기간 공부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하고요. 안정적으로 원유를 공급받을 수 있는 루트를 확보하는 것도 큰 숙제입니다. 공부하고 노력하면서 많은 분이 도전하신다면 시장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요.”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조선 도공 후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0년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 외상으로서, 전쟁 회피와 종전 교섭에 깊이 관여했던 사람이 조선인 후예였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름은 박무덕(朴茂德). 조선인 피를 받은 그가 어떻게 그런 높은 지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걸까?
의문을 풀기 위해 애썼지만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철저한 일본인으로 살았던 우수한 관료였다. 그러나 그가 외무성 관료로 활동한 시기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극심했던 시절이어서 그것만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사찰로 악명 높았던 일제 경찰이 까다로운 외교관 임용 신원조사를 왜 그토록 허술하게 했을까. 이것이 제일 큰 의문이었다. 그의 출신지와 가계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조선 도공의 후예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일본 제국의 마지막 각료로 패전을 맞을 때까지 그에게는 ‘조선인 후예’라는 천형 같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조선인 피를 가진 사람이 대신이 되어 폐하를 모시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가 두 번째로 외상이 되었을 때 이 같은 괴문서가 정부와 시가지에 뿌려진 일이 있었다. 극우세력이 저지른 일이었다. 군 내부에 동조 세력이 나타나 술렁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옥에 갇히게 되자 사람들은 더 흥분했다. 그의 고향 가고시마(鹿兒島) 현 미야마(美山) 옛집에 돌팔매까지 했다.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이 떨어졌을 때 ‘전범이므로 나쁜 사람’이라는 낙인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을 민족 절멸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준 사람’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의 옛집에 세운 공덕비 비문에는 “종전(終戰) 공작의 주역을 맡아 대업을 완성하고 일본국과 국민을 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비문은 당시 일본 관방장관 사코미즈 히사쓰네(迫水久常)가 썼다. 그 뒤 그의 집이 있던 자리에는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이 들어섰고, 그를 연구하는 모임까지 생겨났다. 이러한 현실은 시대 조류의 급격한 역류를 의미하고 있다.
도고 시게노리에 관한 이야기는 도예가 ‘14대 심수관’으로부터 들었다. 1990년 7월 미야마에 있는 그의 가마를 찾아갔을 때였다.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옛 이름으로 유명한 ‘사쓰마 야키(薩摩燒)’ 발상지 취재차 찾아간 특파원에게 그는 고향 자랑을 하면서 ‘도고 센빠이(선배)’에 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외무성 관료가 되어 금의환향한 그가 모교에 찾아왔을 때 “심수관이 누구냐?”고 물었다고 한다. 심수관이 손을 들고 나가자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도공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을 입구에 “거짓말하지 말라, 지지 말라, 약한 자를 괴롭히지 말라, 도고 선배를 본받자”는 내용이 쓰인 팻말이 세워져 있었던 때라 그는 어깨가 으쓱해졌다고 한다. 평생을 시게노리 현창(顯彰) 사업에 바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도고 시게노리 기념관은 그가 발의해 사업 추진까지 도맡았다.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朴壽勝)의 도자기 작품을 수집해 미술관에 기증한 사람도 그였다. 시게노리의 아버지가 뛰어난 도공이자 유능한 사업가였다는 사실도 세상에 알렸다.
시게노리는 1882년 나에시로가와 심수관의 이웃집에서 박수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수승은 세상을 읽는 눈이 뛰어난 사업가였다. 메이지 정부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조치로 사족(士族) 신분을 박탈당하고 관요(官窯)가 폐지되어 나에시로가와 도공 마을에 찬바람이 불어닥쳤을 때 각자도생의 길을 헤쳐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역경이 그에게는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 도쿄 요코하마를 무대로 외국인들에게 도자기를 팔고 수출하는 사업에 눈을 뜬 것이다.
그 재력을 바탕으로 가고시마 시내로 이주, 명문 도고(東鄕) 가문의 족보를 사들여 도고 성(姓)을 취득한 그는 당당한 일본인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박수승은 ‘도고 주카쓰(東鄕壽勝)가 되었고, 네 살배기 무덕은 ‘시게노리(茂德)’가 되었다. 시게노리는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이였다. 사족 가문 성을 가진 데다 뛰어난 두뇌와 아버지의 재력 덕에 사족 출신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교 가고시마 제일중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족 출신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 폐번치현 이후 나에시로가와는 ‘옹기마을’로 불리며 급속히 ‘천민부락’으로 전락했다. 그가 옹기마을 출신이라는 것을 급우들이 다 아는데 어떻게 사족 대접을 받았겠는가.
대접은커녕 ‘가짜 사족’ 놀림까지 받았다. 도고시게노리기념사업회가 펴낸 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그는 입학 후 점점 말없는 소년이 되어갔다. 사정을 알아주는 친구 하나를 제외하고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다. 그는 무섭게 공부에만 매달렸다. 영어사전의 단어를 다 외우고 그 페이지를 찢어 씹어 삼켰다는 일화는 가고시마의 전설이 되었다.
손자 도고 시게히코(東鄕茂彦)가 쓴 ‘할아버지 도고 시게노리의 생애’에 나오는 일화는 그의 치밀하고 느긋한 성격을 잘 보여준다. 소학교 시절 하굣길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친구들은 다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비를 피하는데 시게노리만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른들이 그 모습을 보고 “시게노리, 뭐하는 거야? 빨리 뛰어와!” 하고 소리쳤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쪽에도 비가 오는걸요.” 그렇게 말하고는 집까지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1901년 제일중학을 졸업한 뒤 그는 가고시마 7고에 입학한다. 문부성 직할 구제 고등학교였다. 학교 이름에 번호가 붙었다 해서 ‘넘버 스쿨’로 불리던 일본의 명문고교였다(1고는 도쿄, 2고는 센다이, 3고는 교토, 4고는 가나자와, 5고는 구마모토, 6고는 오카야마, 8고는 나고야에 있었다). 그해 개교한 7고에는 각 넘버 스쿨 입시에 낙방한 학생들이 몰려들어 경쟁이 치열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재들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투리가 심해 학교 측은 고심 끝에 가고시마 방언과 표준어로 된 두 가지 안내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시게노리는 7고를 졸업하고 도쿄대학교 문학부 독문학과에 진학한다. 아버지는 법대를 나와 내무성 관리가 되기를 원했지만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던 시게노리는 아버지 염원을 배반했다. 그러나 끝까지 아버지의 소원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졸업 후 외교관 시험에 도전, 3수 끝에 합격의 영광을 얻는다. 그의 나이 30세 때였다. 외교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를 의식한 탓도 있지만, 고향 선배 외교관의 영향이 컸다. 독일 문학에 몰입했던 대학교 시절의 이상이었던 ‘동서양 문화의 조화’를 실현할 기회로 여겼기 때문이다.
첫 부임지는 만주였다. ‘펑톈(奉天) 일본국 영사관 영사관보’가 공식 직함이었다. 펑톈은 지금의 선양(瀋陽)이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 그는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해 열차로 만주에 부임했다. 뒷날 발견된 당시의 메모에는 열차로 한반도를 종주하면서 느낀 감회는 한 구절도 없었다. ‘경복궁’과 ‘한강’. 아무 감상 없이 언급한 고유명사만이 조선과 관련한 메모의 전부였다.
아마도 그의 의식을 지배하던 ‘조선 트라우마’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고 부임을 준비하던 무렵,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수모를 겪는다. 결혼을 약속한 도쿄의 명문가 규수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일방적인 파혼 통보를 해온 것이다. 이유는 끝내 밝히지 않았지만 출신성분 조사에서 조선 도공의 후예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게 일본 외교가의 정설이다.
그 뒤로 그는 결혼을 포기하고 살다가 37세 노총각 시절 아이가 다섯이나 딸린 독일인 이혼녀 에디 드 라론드와 결혼, 뒤늦게 가정을 이룬다. 그가 트라우마를 가졌다 해서 조선인의 피를 부끄럽게 여긴 흔적은 없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해 금의환향했을 때 옥산궁(玉山宮)을 참배한 일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옥산궁이란 나에시로가와에 있는 단군 사당이다. 비록 일본 관복 차림이었지만, 마을 수호신을 찾아 고마움을 표하며 합장한 사람의 마음속에는 단군의 후예라는 뿌리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외교관 시절의 일화도 있다. 외무성 본부 국장 시절, 퇴근길에 조선인 과장 장철수를 허름한 술집으로 데리고 가 “사실은 내게도 조선인 피가 흐른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열심히 일하게, 인내라는 말을 소중히 하고!” 하면서 동족에 대한 격려도 잊지 않았다. 독일대사, 소련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거치며 ‘외교의 달인’이라는 평가를 들어온 그는 마침내 외무대신 자리에 오른다. 미국과의 사이에 전운이 감돌던 1941년 대미 교섭 임무를 짊어졌던 첫 외상, 종전 교섭의 사명을 띤 두 번째 외상 직무의 하이라이트는 1945년 8·15 광복 직전의 무조건 항복 결정이었다. 연합국 수뇌들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지만, 전쟁광 집단인 일본 군부는 결사항전 태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덩달아 언론도 연일 군부의 ‘1억 옥쇄론’을 부채질하는 사설을 내보내던 때였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까지 참전한 상황에서도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수상을 필두로 한 군부는 미치광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원자폭탄 피해의 심각성을 파악한 시게노리는 천황을 찾아가 전쟁 종결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각료들에게도 같은 주장을 거듭했지만 군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교착상태에서 또 하나의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그날부터 일본 제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무조건 항복이냐, 결사항전이냐를 앞에 둔 운명의 갈림길에서 시게노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쿠데타설과 암살 위험을 무릅쓰고 그는 종전 결정의 불가피성을 설득해나갔다. 군부의 위세에 눌려 입을 닫고 있던 각료들은 13일 각료회의에서 “각자의 의견을 말해보라”는 수상의 요구에 12명은 ‘포츠담선언 수락’ 또는 ‘수상 결정에 위임’, 3명은 반대 의견을 냈다.
14일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외무대신의 전쟁 종결 의견에 각료 다수가 찬성한 사실을 강조하면서 “나는 연합국의 포츠담회담을 수락하기로 결정했다”고 선언했다. 만주 침략으로 시작된 길고 긴 15년 전쟁의 종결 선언이었다.
전후 시게노리는 연합국 도쿄재판에서 금고 20년 형을 선고받고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50년 7월 23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68세. 도쿄재판 도중 그에게 조선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아사히신문은 “도고는 꼭 외국인이 일본어를 말하는 것 같은 억양으로 진술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보도했다. 그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에둘러 강조한 것이다. 한 신문은 ‘과거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던 지역 출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조선인 출신이라는 낙인이 천형처럼 그의 이마에 찍혀 있었던 셈이다.
1990년 미야마에 처음 갔을 때 시게노리 생가는 폐가처럼 버려져 있었다. ‘A급 전범’이라는 멍에 탓이었다. 마당에는 잡초가 키 높이로 자라 있었고, 대문에는 각목을 X자로 못 박아놔 사람의 출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가 일전되는 데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다. 경제번영의 격양가 속에 자연스레 ‘민족 절멸의 위기에서 일본을 구출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2010년 남규슈 여행길에 들렀을 때 가 보니 생가 터에 아담한 기념관이 들어서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사코미즈 히사쓰네의 비문이 선명하게 보이는 송덕비, 그 오른편으로는 시게노리의 동상이 서 있다. 기념관 안에는 도쿄대학교 시절 시게노리의 모습과 외상으로 지냈을 때의 초상화, 복역 중일 때 가족과 면회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한국말과 일본말로 나에시로가와 마을과 조선 도공을 설명하는 안내서도 걸려 있다. “나에시로가와에서는 메이지 시대가 끝날 무렵까지 조선의 풍속과 언어가 남겨져 있었다. 조선 도공의 수호신이 된 옥산궁 신사에서는 머나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제사가 행해졌다.” 안내문의 한 줄 내용에 이 마을의 400년 역사가 함축되어 있었다.
도공 박문(朴門)의 업적을 소개하는 안내문에는 “박정관이 제작한 백 사쓰마 도자기가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사쓰마 도자기 이름을 유럽까지 알렸다”고 씌어 있다. 안내문에 나오는 박정관(朴正官)은 근세 사쓰마 야키를 일으켜 세운 사람으로 추앙되는 인물. 정유재란 당시 사쓰마에 끌려온 도공들의 리더 박평의(朴平意)의 후손이다. 시게노리의 손자는 할아버지 일대기에 “할아버지 가문이 박평의 후손이라는 근거는 없지만, 그때 끌려온 도공 가운데 박 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고, 같은 도공이었다는 점에서 할아버지와 피가 통하는 관계로 본다”고 썼다.
시게노리와 에디 사이에는 이세(いせ)라는 이름의 딸이 유일한 혈육이다. 시게노리는 외동딸을 자신의 비서관 출신 외교관과 결혼시킨 뒤 사위를 양자로 삼았다. 그는 훗날 주미대사를 역임한 도고 후미히코(東鄕文彦)다. 사위 겸 양아들 후미히코와 딸 이세 사이에는 아들 쌍둥이가 있다. 1945년생인 손자 시게히코는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나와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아사히신문 기자를 거쳐 워싱턴포스트로 옮겨 오랜 기간 도쿄 특파원으로 지냈다.
동생 가즈히코(東鄕和彦)는 도쿄대학교를 나와 3대 외교관이 되었다. 북미국장 주미대사 등 외무성 요직을 두루 거쳤고 퇴직 후에는 미국, 대만 등지의 대학교에서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2007년에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강의한 적도 있다. 그는 역대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외교관으로 유명하다. 현역 시절 김대중 납치사건, 문세광 사건 등 한일 현안 문제에 관여한 경력이 있으며, 2006년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중단을 요구하는 회견으로 일본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냥 개띠가 아니다. ‘58년’ 개띠라야 진짜다. 개띠 앞에 ‘58년’이 붙으면 마치 대단한 인증 마크를 받고 태어난 것만 같다. 전 세대를 아울러 태어나면서부터 기 쎈(?) 아이콘으로 살아가고 있는 58년 개띠가 올해 벌써 환갑을 맞이했다. 베이비부머로 불리는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한국 사회 속 이야깃거리이자 사회 현상 지표가 됐다. 이들의 특별했던 인생 이야기와 지금의 모습을 담기 위해 58년 개띠 모임 현장에 찾아가 봤다.
58년 개띠 형님들 문 좀 열어주세요!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58년 개띠 모임은 많아 보였지만 저마다 철옹성을 방불케 하는 완벽 수비. 58년 개띠가 아니면 접근 불가였다. 빗장을 열어젖히는 게 쉽지 않았다. 모임 운영자에게 쪽지라도 보내봤으면 좋으련만. 이마저도 불허(不許). 그래도 기다림 끝에 낙이 있다고 했던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린 곳에서 연락이 왔다. 네이버 밴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국 58개띠방’이다. 작년 1월 개설했는데 전국 각지에서 400명에 가까운 인원이 모여들어 밴드는 그야말로 문전성시였다. 채팅방도 6개로 나눠져 300명 넘는 개띠 남녀가 온종일 뜨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게 바로 개판(?). 동갑 친구들은 이름을 트는 순간 반말을 하고 다짜고짜 이름을 부른다. 처음 들어온 회원이 당황하는 시간은 5분이면 충분하다고 모임의 리더를 맡고 있는 박지양 씨가 말했다.
“이 방은 말 그대로 전국 모임방입니다. 각지의 58년 개띠들이 모여 있어요. 사업하는 사람도 있고, 회사에 다니는 사람도, 당연히 주부도 있습니다. 전국 58개띠 친구들의 친목단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대화도 하고 서로 알고 지내자는 개념이죠.”
전국 58개띠방의 공개창 대화는 밤낮 가리지 않고 이뤄진다. 새로운 친구들이 오면 반기고 마음속 깊이 잘 왔다며 안아주는 모습이 정답다. 대화창에서 자주 보고 대화를 하다 보니 실제로 만나 인사를 해도 금방 알아보고 쉽게 말을 놓는다고 한다. 옛 친구를 만난 느낌처럼 말이다.
2017년 12월 15일, 대망의 수도권 송년모임
마침 얘기를 나누고 정식으로 인터넷 밴드 모임에 들어가 보니 수도권에서 송년 번개모임을 갖는다는 소식! 그럼 어디 한번 급습해볼까? 염치불구하고 가겠다고 했더니 기분 좋게 반겨주신다. 서울·경기 지역에서 스무 명가량의 58개띠 친구들이 모여 친목을 다질 예정이라고 했다. 잠시 잠깐 느낀 인터넷 속 활기찬 느낌이 실제 얼굴을 봤을 때도 똑같을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약속 당일, 시간에 맞춰 사당동의 한 고깃집으로 향했다. 연말 송년모임이 많은 기간인 만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사람들이 식당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개띠 모임과의 만남. 벌써부터 고기를 굽고 술을 나눠 마시는 중이었다. 다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일까? 한두 명을 제외하고 대부분 이날 첫 만남이라고 인천에 사는 최선희 씨가 귀띔해준다.
“친구 영림이가 우리 가게에 와서 재밌는 모임이 있다고 해서 들어와 봤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여기 들어온 지 한 달 보름밖에 안 됐는데 만난 지 1년도 더 된 느낌이에요. 58년 개띠들은 이런게 좋아요. 이 나이에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게 이토록 설레는 일인 줄 몰랐어요.”
이때 전라도 지역 총무를 맡고 있는 김미정 씨가 등장. 회원들의 환영을 받았다. 김미정 씨는 수도권 모임 친구들에게 나눠주려고 완주에서 본인이 직접 만든 유자차를 가지고 왔다.
“예전에 수도권 친구들이 호남 지역 모임에 참석했어요. 서로 이렇게 오고가는 거죠. 58년 개띠라는 것 하나만으로 부담이 없는 거 같아요. 진짜 친구를 만나는 거죠. 그리고 2018년은 우리 58년 개띠들에게 특별한 해입니다. 개띠 해이고, 또 우리 모두 환갑을 맞이하고요, 삼재도 나가는 삼재라고 하더라고요. 58년 개띠들 모두 행복한 한 해가 될 것 같아 좋습니다.”
‘베이비부머’, ‘무시험제도’
어찌됐든 ‘58년 개띠’. 무슨 때만 되면 세상의 화젯거리다. 그 어떤 연도에 태어난 이들이 환갑이 됐다고 집중조명 받은 적이 있던가? 자신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왜 그렇게 회자되고 있는지 신성애 씨에게 물었다.
“(한국)전쟁 끝나고 생활이 좀 안정될 때쯤 어르신들이 아이들을 많이 낳은 것 같아요. 1958년에 나라 재건하느라고 바쁘게 살면서도 어르신들이 집중적으로요.(웃음)”
무엇보다도 58년 개띠 하면 나오는 얘기가 중·고등학교 무시험 제도에 관한 이야기였다. 곽기복 씨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입학할 때 무시험 제도로 바뀌었어요. 그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인 박지만 때문이라고 하잖아요.”
이어서 공형복 씨가 할 말 많은 듯 끼어들었다.
“우리가 어떤 세대냐 하면 한문을 배웠다가 안 배웠다가 했었어요. 박지만이 한문 싫다고 해서 한문이 없어졌다는 얘기도 있었어요. 중학교도 무시험으로 갔어요. 고등학교도 평준화가 됐어요.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가고 싶었는데 발이 묶였어요. 미쳐버리는 거죠. 우리 58년 개띠만큼 웃긴 세상을 산 세대도 없을 것입니다. 피해자죠. 내 인생을 확 바꿔버렸습니다.”
과거의 경쟁 상대, 지금은 얼싸안고 절친
역사적으로 척박했던 시절, 하필이면 같은 해에 많이도 태어나 피곤하고 힘든 삶을 함께 이겨낸 58년 개띠 사람들. 안양에서 온 박태관 씨는 나이가 들어 나름의 여유가 생겼기에 이렇게라도 안부를 묻고 사는 것이라고 했다.
“58년 개띠들은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속에서 성장해온 사람들입니다. 앞만 보고 치열하게 살았어요. 자식들 다 키우고 여유가 생기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온 거죠.”
모임에서 만나는 58년 개띠 친구들은 지역, 사회, 지위를 초월해 서로 교감하고 만나고 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도 같은 시대를 산 너의 인생을 인정한다는 뜻이라고. 처음 만남에도 불신 따위는 접어놓는단다. 뜨겁게 살아온 58년 개띠들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각종 포털 사이트에 ‘58’만 쳐도 줄줄이 나오는 58년 개띠들의 모임들. 왜 그들이 모이고 서로를 격려하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56년 개띠 여러분,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58년 개띠입니다.” 어느 모임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첫마디다. 개띠의 당당함과 그들의 파란만장한 세월이 그 한마디에 포함되어 있다. 1953년, 전쟁이 끝나고 아기가 많이 태어났는데 그 절정기가 1958년이다. 개띠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뺑뺑이 추첨으로 배정받아 들어갔다. 58년 개띠라는 말은 사회 여러 방면에서 이전 세대와 차별되고, 이후 세대와도 분명하게 구분되어 생긴 용어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운동장에 가득했다. 교실이 모자라 오전과 오후반으로 나뉘었다. 필자는 비 오는 날 잠시 낮잠을 잤다가 오후반 등교가 늦어 엉엉 운 적도 있다. 그 시절은 중학교에 입학하지 못하는 가난한 집 아이가 꽤 많았다. 대부분 도시로 나가 공장에 취직했고, 여자들은 식모살이를 했다. 그러나 형편이 괜찮은 아이들은 과외도 했다. 필자는 학교가 너무 멀어 쌀 두 가마니를 주고 친척집에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때 펜팔을 했다. 단양 골짜기에 사는 소년에게 줄곧 편지를 써댔다. 엄마가 공부에 지장이 있다며 편지가 오면 아궁이에 집어넣곤 했다. 그 일로 엄마에게 대들던 사춘기가 떠오른다. 펜팔은 얼굴도 모르는 누구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냥 누군가에게 솔직한 말을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것 같다.
고등학교 때는 서울에 사는 준이라는 소년에게 편지질을 했는데 아침이 오면 지난밤에 쓴 편지가 너무 유치해서 박박 찢어버릴 때가 많았다. 저 별은 나의 별, 이 별은 너의 별. 별과 달을 자주 글 소재로 써먹었다. 편지를 자주 쓰다 보니 글 솜씨가 좋아져 친구들 연애편지를 대필해주고 옥수수와 고구마를 얻어먹기도 했다.
당시 수학여행을 가면 다른 학교 남학생들이 주소가 적힌 쪽지를 여학생들에게 던졌다. 누구를 지정해서 쓴 쪽지가 아니라 줍는 사람이 그 쪽지의 임자. 그렇게 편지를 주고받다가 결혼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필자가 아는 사람 중에도 있다. 그 부부는 딸이 “엄마 아빠는 어디서 어떻게 만났어?” 하고 물어볼까봐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다 한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 누가 뒤를 바짝 따라오며 말했다. 누군가 필자에게 호감을 보이는 게 싫지는 않았다. 그래도 일단은 “왜 이러세요” 하며 튕겼다. 예전에는 대부분 남자가 프러포즈를 했다.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스무 살 봄, 이종사촌과 잘 알던 그는 계속 필자를 따라다녔다. ROTC 복장을 하고 자주 필자 앞에 나타나곤 했다. 그 시절은 주로 남자들이 데이트 비용을 부담했다. 돈이 없을 때는 전당포에 손목시계를 맡기기도 했다. 주로 만나는 장소는 다방이었고, 커피 한 잔을 시켜 둘이서 나눠 먹기도 했다. 가끔 이종사촌 커플과도 만나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필자는 예술을 좋아했다. 한눈에 그에게 반해서가 아니라 외로움 때문에 가까워진 것도 같다. 만남은 운명이다. 필자는 말라버린 우물가에 누워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평생 동안 그 순간이 그 낯선 장면이 자주 떠오른다. 그가 속내의를 사서 아버지를 찾아왔던 일, 아버지와의 어색한 만남, 죄책감에 당황스러워하던 그의 표정. 아버지는 서너 달 후 뇌졸중이 와서 길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돌아가셨다. 그는 장례식에 참석했다. 필자는 숙명으로 결혼을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판돈으로, 대우에서 나온 컬러텔레비전과 냉장고를 샀다. 컬러텔레비전은 그 해 혼수품으로 처음 나온 제품이었다. 시어머니는 밤색 모직코트 옷감을 혼수함에 넣어주었다, 양장점에 가서 모직바지와 코트를 맞춰 입었다. 지금도 그 기억이 남아 옅은 밤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시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다.
신혼여행을 가야 하는데 입고 갈 마땅한 옷이 없었다. 그 시절의 결혼 예복은 긴 소매 옷, 앞이 막힌 구두가 상례였다. 신혼여행을 안 가면 남들 보는 눈도 있고 후회도 될 것 같아 아산 현충사로 갔다. 하룻밤 있었나.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젊은 날의 쓸쓸함이여! 그때 그 얇은 마음이 얼마나 외로움에 떨었을까.
결혼을 후회하지 않으려 무척 애를 썼다. 7남매의 맏딸로 태어난 필자는 늘 동생들에게 모범이 돼야 했다. 지금은 홀가분하다. 58년 개띠 인생. 이제부터는 자존감 회복에 중점을 두고 싶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사랑하자. 그래야 상대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더불어 살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다.
필자는 58년생 개띠다. 당시 대학에 입학하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미팅이었다. 미팅하러 대학에 들어간다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 시절 대학 1~2학년생들에게 미팅은 대단한 로망이었다. 내성적이어서 미팅을 기피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미팅을 수십 번이나 한 친구도 있었다. 한창 이성에 눈을 뜰 때니 그럴 만도 했다. 이성과 교제하고 싶어 안달이 난 친구들은 입학식 다음 날부터 미팅타령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맘에 드는 여자 친구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성 사귀기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두세 달마다 여친을 바꾸는 선수(?)들도 드물게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미팅에 성공하지 못했다. 마음에 안 들거나 이성 교제 경험이 없어 서툴었기 때문이다. 또 데이트를 하려면 돈이 좀 필요한데 그 시절엔 모두들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았다. 집이 가난해서 중·고생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벌어야 하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미팅은 주로 학과 대표가 여대 학과 대표들과 연락을 해서 이루어졌고, 발이 넓은 남학생들이 여자 친구들을 통해 모임을 주선하기도 했다. 미팅 인원은 세 커플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한두 커플이 오붓하게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미팅 자리에 나오면 먼저 “00학과 0학년 000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런 뒤 각자 소지품을 꺼내어놓고 마음에 드는 사람의 물건을 선택하기도 하고, 드물게는 주선자가 눈치껏 파트너를 정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또 남학생들끼리는 미리 점찍어둔 여학생을 서로 고백해 은근히 자기가 원하는 파트너에 다른 학생이 관심 갖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파트너가 된 여학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레스토랑이나 커피숍에서 커피만 마시고 바로 헤어졌다. 그러나 여학생이 마음에 들면 커피도 마시고, 영화도 보고, 레스토랑에 가서 햄버그스테이크, 비프스테이크, 돈가스 등을 먹으며 늦게까지 데이트를 했다.
필자는 두 번의 미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한번은 대학 1학년 때 했던 미팅이었다. 늦은 가을날, 학과 사무실 옆을 지나는데 우편함에 단정한 글씨로 쓴 엽서가 얼핏 보였다. 필자에게 온 엽서였다. ‘누가 보냈지?’ 하며 엽서를 꺼내서 보니 하단에 주희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주희가 누구지?’ 했다. 그러다 2주 전쯤 미팅에서 만난 한 여학생 얼굴이 떠올랐다. 아담한 체구의 귀여운 여학생이었다. 마침 시험기간 중이어서 그 여학생을 깜빡 잊고 있었다. 엽서엔 단정하게 써내려간 글자들이 빼곡했다. 그간의 일상과 계절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글이었다. 그녀의 감성적인 표현들이 필자 가슴에 와 닿았다.
글로 자기 마음과 생각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닌데, 그녀는 글 쓰는 재주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필자는 글 쓰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대학신문을 보내주면서 “엽서 보내줘서 고마워, 연락 못해서 미안해”라고 간단히 메모를 썼다. 그리고 1주일쯤 뒤 그녀에게서 또 엽서가 왔다. 이번에도 글이 빼곡했다. 엽서 하단에는 “깊어져 가는 가을 자꾸만 생각 키워지는 이에게 보냅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필자는 그녀가 엽서로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그 마음이 고마워서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커피도 마시고 대화도 나누고 맛있는 저녁도 먹어야지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만 먹고 실천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어쩌다 그 시절이 생각나면 그녀가 생각나면서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자로서의 자존심도 접고 먼저 엽서를 보냈을 텐데 말이다.
기억이 나는 또 하나의 미팅은 대학교 2학년 초겨울 무렵에 있었다. 다른 대학에 다니는 친구가 같은 학과 여학생들과의 자리를 마련했는데 깔끔하고 단정해 보이는 K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첫눈에 마음을 빼앗긴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가 밖으로 나왔고 가는 방향이 같아 버스를 함께 탔다. 빈자리가 없어 손잡이만 잡고 나란히 서 있었는데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하는 바람에 필자에게 그녀가 넘어졌다. 필자는 얼떨결에 한 팔로는 손잡이를 잡고 한 팔로는 그녀가 쓰러지지 않도록 꼭 안았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그녀도 필자가 싫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우리는 버스에서 내려 자연스럽게 광화문의 한 커피숍으로 갔다. 그 시절은 커피숍에도 DJ가 있어 노래를 신청하면 틀어주곤 했다. 커피를 마시다가 그녀도 음악을 신청했다. 그런데 노래 제목이 필자가 좋아하던 노래여서 깜짝 놀랐다. 그 노래에 대해서는 얘기도 나누지 않았는데 그녀가 우연히 그 노래를 신청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커피숍을 나온 뒤에는 세종로를 함께 걸었고, 쌀쌀한 날씨인데도 추운 줄도 몰랐다. 만난 지 몇 시간 안 된 사이인데도 오래 만나온 사람처럼 편안했고 잘 통하는 기분이 들었다.
필자는 지나가다 리어카에서 파는 햇귤을 두 개 사서 그녀에게 건넸다. 상큼하고 싱싱한 귤 냄새가 좋았다. 그녀도 좋은지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오후 2시에 만나 커피를 마시고 좀 걸었을 뿐인데 시간은 벌써 오후 6시 반이 지나고 있었다. 약간 출출했지만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던 필자는 옛 한국일보사 옆에 있는, 기자들이 자주 다니는 식당으로 가서 냄비우동을 시켰다. 밀가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냄비우동이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물론 좋아하는 그녀랑 같이 있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밤 10시가 지나서야 우리는 헤어졌다. 필자가 버스를 타고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줬다. 그녀는 집 근처에 이르자 좀 망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첫눈 펑펑 내리는 날, 우리가 갔던 광화문 ‘그 커피숍’에서 다시 만나요.”
다시 만나자는 그녀의 말에 필자의 가슴은 쿵쾅쿵쾅 뛰었다. 10여 일쯤 지났을까. 기다리던 첫눈이 펑펑 내렸고 필자는 그녀가 말했던 커피숍으로 달려갔다. 혹시 그녀가 그새 맘이 변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약속 장소에 가자 환하게 웃으며 그녀가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우리는 그곳에서 첫 만남 때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나눈 대화와 진한 커피 맛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그녀는 필자에게 따뜻한 겨울장갑을 선물로 줬다. 눈 내리던 경복궁 옆길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서울대 사대에 다녔던 그녀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낼까? 필자는 가끔 그 시절로 돌아가 추억에 젖곤 한다.
매혹적이다. 그러나 불편하다. 이 찰나의 간극 속에 그의 ‘붉은 산수’가 있다. 하고많은 색깔 다 놔두고 하필 붉은 풍경이라니… 어디서도 마주친 적 없는 역설이다. 사람들은 그의 ‘산수’에서 유토피아를 찾고 디스토피아를 본다. 그가 장치한 은유와 비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탐을 내는 작가 이세현(李世賢·51).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 페라가모가 러브콜을 보내고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 울리 지그가 그를 만나러 영국까지 날아갔다. 붉은색을 화두로 삼은 뒤의 이야기다.
그는 파주 출판단지에 자리한 로우 갤러리(Raw Gallery)에서 보자 했다.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작업실 한쪽에 마련한 비영리 문화공간.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냥 놀이터다. 오후의 햇살을 잔뜩 빨아들이고 있는 ‘RAW’라는 글자가 문패처럼 달려 있었으므로 헤맬 일은 없었다. 저 ‘날것(raw)’의 의미는 그의 ‘붉은색(red)’과 또 어떤 방식으로 한바탕 내통하는 걸까. 느닷없는 상상을 하며 갤러리 안으로 들어섰다.
‘붉은 산수’와 맞닥트렸을 때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지 꼼짝없이 포위당한 느낌이었다. 매혹적이었지만 속수무책의 버거움도 몰려왔다. 그것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이었다. 잠시라도 놓여나기를 바라는 사이 이세현 작가가 나타났다. 그를 따라 작업실로 들어갔다. 화가들이 붓질하는 공간이 대개 그러하듯 캔버스와 수백 장의 밑그림, 물감, 붓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가 데려온 자연이 ‘붉은 산수’로 다시 태어나는 방이었다.
‘비트윈 레드(Between Red)’라는 제목으로 ‘붉은 산수’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영국 유학 시절이다. 2004년, 서른아홉에 유학을 떠났다. 꽤 늦은 나이였다. 무엇이 그를 충동질했을까.
“20대에는 학원 강사로 지냈고, 30대에는 계원예술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작업도 하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요. 회화, 설치미술, 조각 등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실험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작품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한 무명작가였죠. 그러다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고 싶은 건 그림인데, 그래서 하기 싫은 일도 하는데,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가혹하게 물었습니다. 예술가 흉내나 내면서 적당히 살고 있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결기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타성에 젖은 나날이었다고 표현했지만 그는 자신과 끊임없이 불화한 듯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청산하듯 전세금 뺀 돈 6000만 원을 쥐고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친 듯 그림만 그려보고 싶어서였다.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는 그림
영국에 도착해 런던 첼시디자인아트컬리지에 입학했다.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그만큼 간절했을 유학생활. 하지만 처음부터 녹록지 않았다.
“입학하자마자 영국 학생들 앞에서 내 작품을 슬라이드로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눌한 영어로 들뢰즈의 철학을 들먹이고 라캉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내 모습에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부끄러웠어요. 반대로 생각해봐요. 서양 학생이 동양 학생들 앞에서 공자 왈, 맹자 왈 하면 제대로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릴 하는 건지 우습지 않겠어요? 순간 식은땀이 났고 더 이상 아무 말 못하겠더라고요. 그날을 계기로 제 그림들을 다시 들여다봤어요. 서양의 저 거대하고 찬란한 현대미술은 그동안 내 것이 아니었구나, 뼈저리게 느꼈죠.”
낯선 땅에서 사고방식이 다른 서양인들을 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들의 아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쭙잖게 흉내나 내지 말고 내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이후 작업 방식도 바뀌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그때만큼 고민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매일 묻고 또 물었죠. 결국 동서양의 차이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과 문화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그리고 내 뿌리가 되어준 것들을 새로운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잠자고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작업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우리의 전통음식, 제사상, 돼지머리 등을 소재로 삼아 변화를 모색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군 복무 시절 야간 투시경으로 바라본 비무장 지대의 풍경이 불현듯 떠올랐다. 충격적일 만큼 아름다웠지만 온통 붉어 두려움과 공포감마저 들게 했던 우리의 산하. 야간 투시경 속 산하는 그렇게 ‘비트윈 레드’ 시리즈로 재탄생했다.
‘붉은 산수’를 본 사람들은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런던에서 졸업을 앞두고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려대던 날. 하루는 스위스에서 온 여자가 우연히 그가 그리고 있던 붉은 산수를 보고 마음에 든다며 작품이 완성되면 자기가 꼭 구입하고 싶다 했다. ‘붉은 산수’ 첫 번째 작품을 손에 넣은 사람은 버거 컬렉션 대표 모니카 버거였다.
그 뒤 그의 이름은 유럽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졸업전시회 때 내놓은 작품도 평론가와 수집가들에게 모두 팔려나갔고 여기저기서 전시 제의도 들어왔다. 이후 미국 페이스 갤러리, 프랑스 페로탱 갤러리 등에서 손을 내밀었고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유명 기업들도 그의 작품을 사갔다.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 울리 지그는 런던으로 직접 찾아와 그림을 사갔다. 외국에서 인기가 더 많은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붉은색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요. 이데올로기적 트라우마도 있고요. 또 집에 걸어두고 감상하기 편한 그림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외국 사람들은 취향이 다양해요. 작품에서 드러나는 철학과 시대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객도 많아요. 울리 지그가 제게 그러더군요. ‘당신 그림은 분단과 같은 한국 문제를 다루고 있어 참 좋다, 메시지가 분명하다, 묵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름답다, 물론 다른 훌륭한 한국 작가들도 많지만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당신 작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림이다’라고요. 그의 말에서 큰 답을 얻었습니다.”
어머니, 다비화실, 12색 모나미물감
전통 산수화의 다시점과 서양화의 묘사 방식을 통해 그가 재해석해낸 자연의 풍경은 겸재 정선과 같은 진경산수화 대가들의 정신을 더듬으며 다양한 변주의 과정을 거친 듯 보인다. 자연은 눈에 보이는 풍경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의 체험과 만나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이세현 작가에게 자연은 삼라만상이다. 인간사, 세계사와 분리될 수 없는 풍경이다.
자연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한 사람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군 복무 시절 돌아가신 어머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짧은 생이었다.
“어머니를 화장하는 동안 벌판에 앉아 있는데 들꽃 향기가 났어요. 그만 슬퍼하라고 어머니가 주시는 마지막 선물 같았어요. 순간, 지나온 시간들이 아득해지면서 자연이 다르게 보였어요. 아름다운 풍경 뒤로 삶과 죽음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더군요. 어머니의 유해는 원하신 대로 처녀 적 살았던 통영의 작은 마을 해안에 뿌려드렸어요. 그런데 유학을 떠나기 전 그곳을 다시 찾았다가 깜짝 놀랐어요. 제2거제대교가 생기면서 마을이 통째로 없어졌더라고요. 어머니를 한 번 더 잃은 것처럼 슬펐습니다.”
온 나라가 개발의 신열에 들떠 있던 시대였다. 통영에도 관광지 개발 바람이 불면서 어머니에게로 가는 길은 끊겨버리고 말았다. 어린 시절이 몽땅 추방당한 듯했다.
거제도에서 태어난 이세현 작가는 부모를 따라 부산, 통영, 울산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아버지의 나전칠기 사업이 망해 도시빈민이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는 허약한 몸이었지만 닥치는 대로 일했다. 결국 건강이 더 나빠진 어머니는 통영 이모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됐고 어린 그는 어머니를 만나러 갈 때마다 자신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어쩌다 용돈이 생기면 문제집을 사서 공부했어요. 대학을 가야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나봐요. 미대를 가고 싶어 고등학교는 전통공예학교로 들어갔어요. 회화반이 있었거든요. 학교에 가보니 미술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태반이었어요. 나는 그런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본 적도 없고, 그때까지 12색 모나미물감이 최고인 줄 알았어요. 어느 날 학교에 가져가 자랑스럽게 펼쳐놓았는데 다른 애들은 전문가용 물감을 내놓더라고요. 기가 팍 죽었죠.(웃음)”
그래도 그림 그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고1 때부터 운 좋게 미술반 청소를 담당하게 되어 선배들 그림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면서 매일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려댄 그림은 100장이 되고 수백 장이 되었다. 그만큼 실력도 늘었다.
고3이 되면서 대학 진학을 결정해야 했다. 집안 형편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무턱대고 학력고사를 봤다. 성적이 괜찮게 나왔지만 철없다는 소리나 들을 게 뻔해 몰래 홍대 미대에 입학원서를 내고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다른 학생들은 학원에서 특강을 받는 등 분주해 보였다. 학원은 꿈도 못 꾸는 상황에서 그들과 경쟁할 생각을 하니 초조했다. 가난한 아버지가 밉기도 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문득 후배가 다니던 다비화실이 생각났다.
“어머니 몰래 쌀을 훔쳐 학원으로 들고 갔어요. 돈이 없으니 쌀이라도 받고 그림을 좀 봐달라고 했더니 학원 선생님이 어처구니없어 하더라고요. 기특하면서도 맹랑한 놈이라 생각했겠죠.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그래, 한번 해보자!’ 하더군요. 옛날이니까 그게 가능했지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죠. 당장 그날부터 차가운 평상에 스티로폼을 깔고 함께 먹고 자면서 실기시험 준비를 했어요.”
결과는 합격. 게다가 장학생으로 붙었다고 하니 집에서도 서울 유학(?)을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계속 이어질 캔버스 속 이야기
이스라엘의 유명 아트딜러인 세르주 티로시는 이세현 작가의 작품에 대해 “매우 독특하면서도 세계 미술시장에서 주목받을 만한 무언가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국내외에서 핫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동안 국내는 물론 스위스, 미국,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중국 등지의 유명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갖는 등 빡빡한 일정을 보냈고, 2015년에는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 페라가모가 협업을 요청해와 스카프, 머플러, 블랭킷 등을 제작해 선보이기도 했다. 1월에는 홍콩문화원 개관전 기획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 하루가 48시간이어도 모자란 듯 보인다. 지금까지 그린 대부분의 ‘붉은 산수’를 해외 컬렉터들이 구입해갔다니 놀랍다. 캔버스 속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나이 듦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술가는 뭔가 다르게 대답할 줄 알았다.
“나이 드는 게 좋아요. 이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용기가 생겼어요. 오해받는 것도 불편하지 않고요. 아, 또 하나 있네요. 포기할 줄 아는 것.”
얼마나 명료한가. 아무런 기교도 필요치 않은 저 투명한 각성은.
꿈은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다. 꿈을 꾸는 자 이룬다. 꿈을 꾸지 않는다면 희망이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데면데면한 일상이 되고 삶의 의욕도 상실된다. 상암동에서 펼쳐진 월드컵 경기에서 대한민국은 큰 꿈을 함께 꾸었고 끝내는 그 꿈을 이뤘다. “꿈은 이루어진다!” 한국인이 새로 만들어낸 희망 메시지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라 질문하였을 때 망설이지 않고 자기의 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꿈을 가진 사람은 생각보다 적었다. 삼성의료원사회건강연구소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의 성인 중 꿈을 가진 사람은 아주 적었고 86%가 꿈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조사됐다. 하루하루를 대충 살아가고 있음이다. 꿈이 없기에 활력 또한 있을 수 없다. 수명은 장수시대로 가고 있다. 100세 시대를 넘어 120세 시대도 머지않았음을 예고하고 있다. 미래 학자 레즈 커즈와일은 2045년쯤이면 인간은 죽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미래 예측을 하고 있다.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본인들의 건강관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의학과 의술의 발달로 그 이야기에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노화된 인체구조의 교체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 삶의 질 또한 좋아진다. 우리나라에서도 114살 된 할머니 아직 정정하게 활동하고 있음이 방송되기도 했다. 특별한 경우로 넘길 수도 있으나 조문을 위해 장례식장에 들러보면 고인의 나이가 이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가 은퇴 후에 살아가야 할 시간은 상상 이상으로 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살아온 만큼 더 살아야 할지 모른다. 40~60년 더 나아가 70년이 될 수도 있다. 엄청나게 긴긴 시간이다. 하루 중에서 먹고 자고 배설하는 등의 생리적 필수시간을 제외한 여가를 11시간으로 계산했을 때 60세 은퇴하여 10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여가가 16만 시간에 이른다. 120살로 계산하면 20만 시간이 된다. 짧아 보일 수도 있으나 참으로 긴 시간이다. 양치질 적정 시간을 3분이라 한다. 당신은 그 3분을 다 사용하고 있나요? 대체로 3분간 이를 닦는 사람은 극소수에 이른다고 한다. 3분이 길게 느껴진다. 그렇게 대비해보면 16만 시간은 엄청나게 길고 긴 시간이다. 길고 긴 여가를 보내야 하는 우리들이 하고 싶은 일이 없이 무료하게 보낸다면 고통이 따로 있을 수 없다. 그 자체가 고통이고 불행이다.
(어디로 굴러가야 할까? 변용도 동년 기자)
실제 꿈이 없는 것일까? 누구나 꿈을 가졌다. 생업에 매달리면서 그 꿈을 접어두었을 뿐이다. 오랫동안 끄집어내지 않고 있다 보니 잊고 살아간다. 이제 그 꿈을 끄집어내어야 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28년 동안 건설현장에서 청춘을 불살랐던 이서형(74세, 현재 서양화가) 씨도 마찬가지였다. 건설회사 CEO로 일선에 물러난 이 씨는 초등학교 시절에 자기가 그린 그림을 앞에 놓고 부친과 친구분이 “그림에 재능이 있구나!”라고 한 칭찬을 떠올리며 자기의 꿈이 화가였음을 되새겼다. 이 씨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은퇴를 하자마자 용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학사 편입하여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쉽지는 않았을 것이나 하고 싶은 일, 자기의 꿈이었기에 각고의 노력으로 서양화가가 되어 행복한 후반생을 보내고 있다. 뒷전에 미뤄두었던 꿈을 끄집어낸 성공 사례다. 누구에게나 꿈은 있기 마련이다. 가족이나 회사를 위하여 접어두었던 꿈을 끄집어낼 차례다. 이제 당신에게 “당신의 꿈은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면은 거침없이 그 대답이 나오지 싶다. 그것만으로 당신은 후반생 행복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은퇴는 隱退가 아니라 Retirement다. 꿈 학교 입학을 축하한다.
인아야 앞으로는 나를 '코델리어'하고 불러줘. 알았지."
"알았어 엄마. 내가 엄마의 다이애나가 되어 줄게"
몇 달 전 나와 우리 딸의 대화 내용이다.
우리는 둘 다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고 있다. 나는 소설세대이고 딸애는 만화세대이다. 일본작가가 그린 빨강머리 앤의 그림들은 소녀들의 취향에 딱 맞기에 나와 우리 딸을 그 그림 속에 퐁당 빠트렸다.
소설 '빨강머리 앤' 은 캐나다의 몽고메리 여사 작품이다.
'빨강머리 앤'은 고아이지만 감성이 풍부하고 씩씩한 소녀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인 '앤'이 아무래도 너무 평범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느 날 그녀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코델리어'로 불러주기를 주문했다. 다이애나는 그녀의 단짝친구 이름이었다.
<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빨강머리 앤 귀여운 소녀
빨강머리 앤 우리의 친구 >
지금도 나는 고아소녀 빨강머리 앤의 주제곡을 가끔 부르며 추억에 젖어보곤 한다. 그녀는 내 10대를 행복하게 해준 행복의 아이콘이다.
"와우! 빨강머리 앤이다!"
얼마나 좋았던지 지금도 50년전 그때의 감격을 잊지 못하겠다.
내가 빨강머리 앤을 만난 것은 서둔야학 3학년 시절인 1967년 봄이었다. 야학 운동장에 서있는 내게 조용민 선생님이 야학에 오시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손에 건네주셨다. 선생님께 인사를 하며 살펴보니 선생님 손에 책들이 있는 것이었다. 책을 광적으로 좋아하던 나였다. 금세 호기심으로 긴장됐다. 저게 무슨 책일까? 다섯 권으로 되어있는 소설 빨강머리 앤이었다. 아직도 잉크냄새가 가시지 않은 듯한 새 책이었다. 그때까지 거의 새 책을 만져보지 못했던 내게 그것은 엄청난 기쁨이었고 감동이었다. 야학생들을 위해서 새 책을 선물해 주신 조 선생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책 선물을 받아들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내게 조 선생님은 웃음이 얼굴 가득 환하게 웃으셨다. 나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순수한 앤이라는 캐릭터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단번에 다섯 권을 다 읽어버렸다.
그해에 서울대 농대 농교육과 신입생으로 입학하신 조용민 선생님은 야학생들에 대한 사랑이 유난히 깊으신 분이라서 우리들도 모두 그 선생님을 많이 따르고 좋아하고 있었다.
소풍날이었다.
한해 후배인 명희는 눈은 샛별 같이 빛났고 코가 오똑한 예쁜 소녀였다. 그러나 그 애는 골수염으로 다리를 절었다. 노래를 끝낸 그 애에게 선생님들과 우리들은 가엾어서, 동정심으로 ‘잘했다’고 칭찬 해주며 손바닥이 따갑도록 박수를 쳐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눈치 없게도 정말 자기가 잘해서 칭찬해 주는 줄 알고 거푸거푸 자기만 계속 노래를 부른다고 하여 그 애를 보기가 참으로 딱했고 선생님들 뵙기가 민망했다.
그날 명희가 소풍을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조용민 선생님 덕이었다. 가장 어린 축에 속하면서도 병마와 싸우느라고 가엾을 정도로 몸이 말라 있었던 명희는 힘이 들어서 쉬엄쉬엄 걸어야 했기에 소풍을 따라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것을 안쓰럽게 생각하신 조 선생님이 야학교에서 칠보산까지의 20리가 넘는 왕복 길을 기꺼이 업어주셨다. 시간을 보시려면 늘 바지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서 보시던 조 선생님이었다. 당신 자신도 너무 마르셨던 조 선생님의 손목이 견디기에는 시계가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그리고 등가죽과 배가 거의 맞붙어버리다시피 했던 선생님은 허리가 너무 없었기에 수업 중에도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연신 추켜올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 선생님 몸 어디에 그런 힘이 숨어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국사 선생님이었던 조 선생님은 시에도 관심이 많으셔서 한용운 시인의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이나 신석정시인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와 변용로 시인의 '논개'등을 칠판에 적어주시곤 하셨다.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 - 논개 중 -
나는 강렬한 색채의 대비로 내 가슴에 깊게 각인되던 논개의 애국심이 눈 부시게 아름다웠다.
후에 조 선생님은 말하셨다.
야학생들의 수업이 끝날 때쯤에는 일부러 상록사에서 나와 야학에 가서 야학생들과 합류하곤 하셨다고. 우리들이 집에 갈 때는 연습림 골짜기에 노래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지곤 했다. 선생님들과 제자들이 같이 '바위고개' '가고파' '고향생각'등의 우리 가곡이나 '메기의 추억' '아름다운 꿈'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등의 미국민요를 부르며 연습림 오솔길을 걸어서 집에 가곤 했던 것이다. 조 선생님은 그 시간이 너무 좋으셨단다. 선생님의 야학수업이 없는 날도 우리들과 그 시간을 함께하고 싶어서 야학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야학에 가곤 하셨단다. 나도 그 시간들이 내 가슴에 가장 아름답게 회상되는 부분이다.
2018년, 드디어 58년생 개띠들이 회갑을 맞이한다. 우리나라는 61세가 되면 회갑(回甲) 또는 환갑(還甲)이라 하여 특별히 생일잔치를 열었다. 요즘이야 식구들 모여 소박하게 밥 한 그릇 나누어 먹지만 말이다. 회(回)나 환(還)은 한 바퀴 돌아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는 뜻이라는데, ‘자리로 돌아왔다’는 그 말에서 알 수 없는 무게가 느껴진다. 어쨌든 회갑을 맞이하는 벗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다.
땡볕 내리쬐는 공사장에서, 시끄럽고 위험한 공장에서, 갑갑한 사무실에서, 긴장이 넘치는 병원에서, 영혼 없는 학교에서, 쓸쓸한 들녘에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모든 삶터에서 앞만 보고 달려온 벗들에게 인사를 전한다.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 잘 견뎌주어 고마우이.” 그리고 안타깝게도 다시 못 올 길로 먼저 떠난 벗들에게도 머리 숙여 인사를 전한다. “그대들 몫까지 살다가 곧 따라갈 테니 기다려주시게나.” 벗들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왜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까?
가난했지만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
나는 1958년 5월 5일 경남 마산시 월영동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말이 좋아서 ‘마산시’이지, 똥구멍 찢어지도록 가난한 마을이었다. 신발과 양말이 귀했던 때라 추운 겨울에도 고무신에 양말조차 신지 못하고 학교를 다니는 바람에, 내 발은 겨울철만 되면 동상에 걸려 붓고 가려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메주콩을 수건에 싸서 밤마다 내 발을 감싸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게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 우리 마을은 거의 초가집이었다. 그때만 해도 집집마다 꽃이 피고, 마당에는 온갖 푸성귀들이 자랐다. 그래서 반찬거리를 돈 주고 사 먹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 집은 아주 작은 초가집이었지만 마당과 들머리에는 아침마다 맨드라미, 봉숭아, 접시꽃과 같은 수십 가지 꽃이 피었다. 채송화만 해도 여름 내내 하루 천 송이가 넘게 피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옆집 친구랑 꽃송이를 헤아리다 학교에 지각한 적도 있었다.
사람들은 우리 집을 ‘석류나무 집’이라 불렀다. 마당가에 나보다 나이가 몇 배나 많은 석류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석류가 빨갛게 익으면 어머니는 제일여고 정문 앞에서 석류를 팔았고, 석류 판 돈으로 한 해 쓸 공책과 연필을 사주었다. 가끔 서리꾼이 나타나 석류를 도둑질해가는 바람에 아버지는 석류나무 가지 사이에 탱자나무 가지를 꺾어서 걸쳐놓곤 했다. 가끔 그 석류나무를 생각하면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온다.
가난은 전염병처럼 오래도록 우리 식구들을 못살게 굴었다. 형은 집을 나가 공장에서 돈을 벌어 스스로 고등학교를 다녔고, 누나 셋은 모두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뒤 부산 가발공장으로, 대구 섬유공장으로 돈 벌러 갔다. 나는 가난이 싫어서 스스로 학교를 포기하고 공장에 다녔다. 그때는 부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하루는 거나하게 술에 취한 아버지가 “사람은 배워야 사람이 된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낮에는 공장에 다니면서 내가 번 돈으로 뒤늦게 야간 중학교(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야간 중학교 수업을 마치고 걸어서 집으로 가면 거의 밤 열한 시가 넘었다. 몇 시간 겨우 자고 나면 아침 일찍 공장에 가야 했기 때문에 늘 잠이 모자랐다. 그때 내 나이 열네 살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야간 중학교 학생들은 모두 집안이 가난했다, 더구나 같은 학년인데도 나이 차이가 많았다. 서너 살 많은(1954~1957년생) 형들도 뒤늦게 공부하고 싶어 야간 중학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같은 또래들보다 ‘세상’을 일찍 배웠는지 모른다. 지금 돌이켜보면 가난하고 불편했지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결코 내 삶을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으니까 말이다.
첫 시집 ‘58년 개띠’
나는 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58년생 개띠다. 쉽게 58년 개띠라 불러주어 고맙다. 왜냐하면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친근감이 드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1995년에 보리출판사에서 첫 시집 ‘58년 개띠’를 내고 세상에 이름이 조금 알려졌다. 시집을 내고 가톨릭여성회관 강당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100명이 넘는 손님들(거의 현장 노동자들이었다)이 찾아와 강당에 신문지를 깔고 여기저기 둘러앉아 막걸리에 파전을 먹으며 시를 읽거나 ‘민노래’를 불렀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행사를 하면 손님들이 방명록에 이름을 적는다. 그때 손님들이 방명록에 적은 내용은 대부분 ‘띠’에 관한 글이었다.
“70년생 개띠 왔다 갑니다. 저도 12년 뒤에 선배님처럼 꼭 시집을 내고 싶습니다.”, “58년 개띠 친구가 시집을 내다니, 내 시집처럼 기쁘네그려.”, “60년생 쥐띠인데요. 왜 58년생 개띠만 유명한가요?”
사람들은 ‘58년 개띠’에 실린 시들 중 ‘58년 개띠’라는 시를 좋아한다. 지면을 줄이기 위해 줄과 연을 조금 붙여서 옮긴다.
58년 개띠 해
오월 오일에 태어났다, 나는
양력으로는 어린이날 음력으로는 단옷날
마을 어르신들
너는 좋은 날 태어났으니
잘 살 거라고 출세할 거라고 했다.
말이 씨가 되어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 살고 있다.
이 세상 황금을 다 준다 해도
맞바꿀 수 없는 노동자가 되어
땀 흘리며 살고 있다.
갑근세 주민세 한 푼 깎거나
날짜 하루 어긴 일 없고
공짜 술 얻어먹거나
돈 떼어먹은 일 한 번 없고
어느 누구한테서도
노동의 대가 훔친 일 없고
바가지 씌워 배부르게 살지 않았으니
나는 지금 ‘출세’하여 잘 살고 있다.
시집 ‘58년 개띠’는 20년 남짓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로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삶의 기록이다.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시집 제목과 표지를 의논하기 위해 서울에서 네 사람이 모였다. 보리출판사 차광주 대표, 편집부 강순옥 선생, 함께 편집 이야기를 나누었던 분과 나까지 모두 58년 개띠였다. 그래서 모두 시집 제목을 ‘58년 개띠’라 하자고 했다. 그때 그 자리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펄펄 살아서 빈 공간을 가득 메웠다. 58년생 개띠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한평생 옆집에서 살았던 친구처럼 반갑고 정겨웠다.
58년생 개띠들이 모여 ‘58년 개띠’ 시집을 내고 4년 뒤, 글을 써서 밥 먹고 살아가는(대부분 글만 써서는 밥을 못 먹고 산다) 58년 개띠 작가들 모임을 가졌다. 1999년 6월 4일, 첫 모임을 가진 곳이 서울 종로경찰서 맞은쪽 ‘동루골’이라는 조그만 술집이었는데 전국에서 서른 명쯤 모였다. ‘서울’이라는 먼 길을 비행기 타고, 기차 타고, 버스 타고 올라온 58년생 개띠 작가들 모임은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개판은 엉망이라는 말이 아니고 ‘개띠’다운 술판이 벌어졌다는 말이다. 그날 모인 58년생 개띠 중 창비 김이구 평론가와 박영근 시인은 몹시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지만….
회갑을 맞이하는 당신들에게
나는 13년 전에 복잡하고 어지러운 도시를 떠나 어릴 때 내가 살던 곳과 같은 작은 산골 마을에 뿌리를 내렸다. 이 나이에 13년째 마을 청년회장(?)을 맡고 있다. 도시에서 나를 돌아볼 새도 없이 바쁘게 살았으니, 이제 남은 삶은 작물을 가꾸듯 살고 싶다. 외로움을 벗 삼아 산골 이웃과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깨달으며 살아가는 맛이 아주 깊고 그윽하다.
아스팔트와 시멘트 숲을 떠나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산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다 보면 어느새 내 몸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 농부가 되고서야 내 몸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물려받은 땅 한 뙈기 없어 남의 논밭을 빌려 농사지으며 살아왔지만,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살아가는 벗들이 있어 든든하고 더없이 행복하다.
벗들이여, 이제 우리 나이 예순한 살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말은 받아들인다는 뜻이겠지. 몸을 쓴 만큼 섬겨야 한다는 것을. 머리 쓴 만큼 비워야 한다는 것을. 뱉은 말 만큼 들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 만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받은 만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떠나는 그날까지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벗들이여,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허둥거리며 바쁘게 살지 마시기를! 사람으로 태어나 바쁘게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마음이 강물처럼 깊어져 미련도 원망도 욕심도 그냥 내려놓을 수 있기를! 살다 보면 어찌 눈물 마를 날이 있으랴마는, 그 눈물로 메마른 세상 흠뻑 적실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