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 결혼식에 신경을 써야 할 일 중 하나가 주례이지 싶다. 주례를 모시기가 녹록지 않아서다. 그래서 필자는 결혼 주례 부탁을 받으면 특별한 일이 겹치지 않으면 들어주는 편이다. 40대 중반부터 주례를 해왔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점도 한몫을 한다. 보람 있는 일이고 베푸는 일이라 여긴다. 주례는 대체로 신랑의 은사나 혼주의 지인 중에서 덕망이 있는 분을 모시게 된다.
그런데 큰아들이 결혼할 때 은퇴 후 일거리로 주례하는 직업 주례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주례를 맡아주기로 했던 지인이 결혼식 전날 갑작스럽게 해외 출장을 가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져 본인의 의사와 달리 주례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당사자의 연락을 받고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난감했다. 다른 주례를 찾았으나 날짜가 촉박해 쉽지 않았다. 주례가 식장으로 오는 도중 변고가 생겨 하객이 대타로 나서는 경우를 보기도 했다. 주례 경험이 있는 필자가 직접 하라는 의견도 있었고 주례 없는 결혼식을 진행할 생각도 해보았으나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과 상의 끝에 직업 결혼 주례를 세우기로 했다. 당시 은퇴 후 용돈벌이를 겸해 소일거리로 주례로 나서는 분들이 결혼식장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필자도 주례를 구하기 힘든 젊은이를 위해 은퇴 후 봉사 차원으로 한 예식장에서 주례를 여러 번 선 경험이 있다. 예식장 담당자와 상담해 직업 주례를 선택해 진행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주례의 필요성에 의문점을 많이 갖기도 하던 시대였고 주례가 없는 결혼식에 젊은이들이 관심을 두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마냥 늘어지는 주례사로 축하 분위기를 다소 감소시키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다. 그뿐만 아니라 귀한 주례 선생을 모셨을 경우 이에 따른 인사치레 등 번거로움이 있기도 했다. 필자는 1996년 부산광역시에서 손해보험사 본부장으로 근무할 때 직원 결혼 주례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꽤 많이 했다. 모두 잘 살고 있어 보람도 느낀다. 신입사원 시절엔 직장 동료의 결혼식 사회를 도맡다시피 했고 주례를 처음으로 하는 분의 주례사를 대필하기도 했다. 뛰어난 재능은 갖지 못했으나 초등학교 때부터 해왔던 웅변이 뒷받침을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결혼 주례 부탁을 받아들이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새로운 부부 인연을 맺고 한 가정을 시작하는 신랑 신부에게 귀감이 되어야 하기에 자신의 결혼생활이 문제가 없어야 하고 결혼식 분위기를 잘 이끌어가는 말솜씨도 필요해서다. 필자 부부는 평범하지만, 행복하게 살기에 주례를 해도 부끄럽지 않은 마음이다.
애초에 주례를 맡기로 했던 그분은 출장 간 일이 잘되어 더 좋은 일을 맡게 되었다. 대타로 모신 직업 주례의 집전으로 결혼식을 치른 아들 내외도 큰 탈 없이 잘 살고 있다. 세월이 흘러 손자가 둘이나 태어났고 큰손자가 내년에 초등학교 입학을 한다. 존경하고 덕망이 있는 그분을 아들 결혼 주례로 모시지 못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삶에는 나름으로 정해진 인연이 있듯 아들 녀석의 결혼 주례 인연은 아니었음을 세월 속에서 깨닫기도 했다. 황혼을 바라보는 그분과의 인연은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그때 주례를 하지 못한 일이 더 가까운 인연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세상일은 인간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있음을 실감했다. 그동안 밝히지 않았던 아들 결혼에 얽힌 뒷이야기를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나이를 산다.
극작가 노경식(盧炅植·79)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어떤 얘기든지 들려주세요.”
극작가란 무언가. 연출가에게는 무한대의 상상력을, 배우에게는 몰입으로 안내하는 지침서를 만들어주어 관객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자가 아닌가? 그래서 달리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인생 후배로서 한평생 외길만을 걸어온 노장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무대 위 모노드라마를 관람하듯 말이다.
자, 그럼 이제 커튼을 열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봐 주시겠습니까?
노경식 희곡집 1권 을 꺼내 들다
인터뷰에 나가기 전 서재에서 책 하나를 찾아냈다. 노경식의 첫 희곡집 이었다. 노경식 작가와도 가까웠던, 지금은 고인이 된 은사에게 2004년 초판을 선물로 받았다. 책을 받고 13년 만에 일종의 필자 사인회를 거행(?)한 것.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로 당선된 걸 생각하면 한참 시간이 흘러 희곡집을 발간했다.
“내가 책을 늦게 냈거든. 그래도 지금까지 7권이나 나왔어요. 희곡은 한 40편 되는 것 같아. 그중에 5편 정도 빼고는 다 공연을 했습니다.”
전북 남원 출신인 노경식 작가는 경희대학교 경제학과를 거쳐 서울예술대학교의 전신인 드라마센터 연극아카데미에 들어가 동랑 유치진, 여석기 선생으로부터 극작 수업을 받았다. 올해 80의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한국 리얼리즘의 대표 현역 극작가다. 노경식 작가는 토속적인 색채에서부터 역사, 정치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작품을 써왔다. 앞서 언급한 1971년 작품 으로 제8회 한국연극영화 예술상(백상예술대상) 희곡상과 연기상 등을 받아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작년 극작50주년 기념공연 을 비롯해 , , 등은 노경식을 대표하는 역사 시대극이다.
“내가 왜 역사나 정치에 관심이 많냐면 경제학과 중에서도 경제사를 전공했기 때문입니다. 조선, 한국 경제 그런 쪽. 그래서 시대극이나 역사적인 소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독립운동사라든지 임진왜란도 많이 썼고요.”
작가 황순원의 눈에 든 남원 촌놈
처음 노경식의 가능성을 알아본 사람은 경희대 재학 시절 만난 소설 의 작가 황순원이다. 황순원은 노경식이 수강하던 교양국어의 담당 교수였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하와이’란 제목의 수필을 교내 학보사에 투고했어요. 저는 당해본 적 없는데 전라도 출신 선배들이 서울에 올라와 가난 때문에 차별당한 이야기를 쓴 글이었어요. 꽤 길었는데 학보에 실렸더라고요. 그것을 보고 황순원 선생님이 잘 썼다며 칭찬해주셨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황 선생님도 동경 유학 시절 비슷한 차별을 당한 적이 있으셨더군요.”
황순원은 학생 노경식을 볼 때마다 “너 수필 잘 쓰더라”며 글쓰기를 부추겼다. 결국 또 한 번 파란의 주인공이 됐다.
“우리 학교에는 그때 교내 문학상 제도가 있었어요. 미술, 음악, 시, 소설, 그림…. 1등이 되면 등록금이 면제였습니다. 황순원 선생님 역시 제가 글을 문학상에 내보기를 계속 권하셨습니다. 저는 그냥 희곡이나 한번 써볼까 해서 써냈습니다. 근데 그게 또 1등이 된 겁니다. 희곡을 쓴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상을 주는 교수들의 입장이 사실 난감했다. 이전 수상자였던 무역학과 학생이 장학금만 받고 글쓰기를 멈춘 것이다. 경제학과인 노경식 또한 장학금을 받고 글을 쓰지 않으면 주나 마나 한 상황이 되니 심사위원 교수끼리 회의를 열었다.
“희곡 심사위원이었던 김진수 선생 옆에 있던 황순원 선생님이 ‘왜? 경제학과야? 노경식?’ 하더니 ‘어, 노경식이 내가 알아. 내가 보증할게’라고 해서 제가 된 겁니다.”
결국 노경식은 빚을 톡톡히 갚은 거다. 대학 시절 희곡으로 장학금을 타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는 극작가로 사니 말이다.
“ 초연 때 모셨는데 작품이 마음에 드셨나봐요. 내 손을 꼭 잡고 ‘애썼다. 잘 썼다’ 그러시면서 ‘희곡이 소설보다 좋은 거 같아. 관객을 놓고 박수도 받고 야, 희곡 좋은 거 같다’ 나한테 그런 말씀도 하시더라고. 뭘 잘해드린 적도 없는데 참 예뻐해주셨어요. 황순원 선생님이 결혼식 주례도 서주시고 말입니다. 선생님이 서주신 제자가 많이 없을 겁니다.”
현역 작가로서 저력을 과시하다
인터뷰 차 만났던 9월 대학로의 한 카페. 그 어느 때보다 한결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지난여름 제2회 늘푸른 연극제를 통해 무대에 올린 연극 가 관객의 뜨거운 호응과 평단의 찬사 속에 막을 내린 것. 공연이 끝나고 원로 연극인들과 함께 기분 좋은 온천 여행을 다녀왔다고 덧붙였다.
늘푸른 연극제에서 노경식 작가가 선택한 는 신의 한수였다. 그와 함께 연극제에 초청된 배우 오현경, 이호재, 연출가 김도훈은 대표작을 내걸고 공연했다. 노경식 작가 또한 대표작인 을 공연할 것이라 대부분 사람들은 예상했다.
“는 2005년에 극단 미학에서 초연했던 작품입니다. 기대만큼 결과가 좋지 않았어요. 그런대로 성과가 나면 모르겠는데 미치지 못하니 작가는 한 번 더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잖아요. 도 마침 생각하고 있었는데 늘푸른 연극제에 선정됐습니다. 나를 선정한 거니까 내가 맘대로 작품을 고를 수 있다기에 를 선택했습니다. 좀 오래전에 써서 개작을 많이 했어요. 이번에는 만족합니다.”
그의 대표작 을 기다린 관객에게는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노경식 작가는 현역 작가로서 과감한 도전에 박수받기를 택했다. 원로 연극인으로서 지금껏 살아온 노고에 대한 격려 대신 말이다.
“만족이야. 기분 좋습니다. 이번 연출을 맡은 김성노씨한테 고맙다는 소리를 몇 차례 했어요.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습니다.”
는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제헌국회에 설치했으나 1949년 친일 경찰의 ‘6·6습격사건’을 기점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는 과정을 보여준 정치극이다.
여전히 잘 팔리는 극작가
“나는 잘 팔려, 고민 안 해(웃음).”
연극 가 끝나기가 무섭게 노경식 작가는 신작을 내놓았다. 이미 세상에 내놓은 것, 꼭 쓰겠다고 작정한 것 두 가지 작품이 있다. 여전히 잘 팔린다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재밌다. 우선 세상에 내놓은 작품은 이라는 제목의 4·19혁명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4·19혁명에 관한 작품이 없어요. 왜 없는 줄 알아요? 4·19혁명이 나고 5·16 군사정변이 났잖아. 그 이야기에 손댔다가 시끄럽고 어쩌고… 몸을 사리는 거지 작가들이. 내가 4·19세대거든. 나라도 본격적으로 4·19 얘기를 써야 되겠다. 내가 겪은 이야기니까. 그래서 마침내 성공을 했어요.”
4·19혁명과 관련해 작가로서의 사명감이 오래전부터 있어왔다는 노경식 작가. 몇 달을 걸려서 자료를 찾고 화보집을 보면서 작품을 썼다.
“내가 아는 얘기, 겪었던 일이에요. 그리고 4·19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민초의 이야기죠. 구두닦이, 우리 학생, 대학생, 초등학생들도 나왔어요. ‘총 쏘지 마세요’라면서요. 양아치들, 매춘부까지 다 나왔던 민초들이 이뤄낸 역사입니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매춘부라며 깜짝 놀랄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작가의 고향 남원과 관련한 토속적인 얘기를 쓰고 싶단다.
“사실 봄꽃이 아니었으면 먼저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자꾸 뒤로 밀리고 있어요. 늘 생각은 있어요. 우리 집안의 얘기도 관계가 있고요. ‘밤으로의 긴 여로’ 같은 것을 쓰고 싶은데 어찌 될지.”
프리한 80? 행복한 극작가!
노경식 작가와 얘기하는 동안 머리에 맴도는 의문 한 가지가 있었다. 지금까지 만나온 극작가는 대부분 연출과 겸업을 하고 자신만의 극단을 거느리고 있다.
“나는 한 번도 극단에 들어가본 적이 없어요. 단원이 돼본 적도 없고. 그냥 늘 자유롭게 조직에 구애받지 않고 연극을 했어요.”
듣고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노경식 작가가 극작가로 데뷔한 1965년도에는 출판사 편집장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드라마센터 동기들이 연극판으로 몸을 옮겼을 때 노경식 작가는 매일 출근을 해야 했다. 대신 누구든 노경식 작가가 쓴 대본을 넘겨주면 공연을 하겠노라고 했다.
“국립극단에서도 내 작품을 하겠다고 하니까 극단에 소속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내 극단을 가져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다들 잘해주고 공연 잘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 무엇보다 스스로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떤 작가들은 연출 해석이 잘못되면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에요. 혹시라도 연습실에 가면 앉았다가 ‘술이나 한잔하자!’ 그러면 땡이고. 술 마시다가 살짝 얘기하면 되지. 화내고 그럴 필요 전혀 없어요. 한 사람 머리보다 두 사람이 낫지 않겠어?“
연출자도 작가도 창조자이고 작품을 좋게 만들 뜻으로 만났으니 서로의 신뢰가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대학로 만빵 모임 좌장 납십니다!
경계 없이 만나고 사귄 덕에 주위에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러다 만든 모임이 바로 만빵 모임이다. 노작가가 좌장(?)으로 있는 만빵 모임은 2년째 대학로 바닥을 주름 잡는 원로 연극인 모임으로 자리 잡았다.
“두 주에 한 번씩. 매주 목요일 오후 5시. 만원씩 가지고 빈대떡 주점에서 모이다가 ‘만빵 모임’이 된 거예요. 혼자 부담하려면 너무 크니까. 여유 있는 친구들이 가끔 다 내기도 하고 나오면 받고 안 나오면 안 받고 그래요. 우리도 한번 모여보자 해서 만나는데 만빵 모임의 존재를 아는 후배들이 빈대떡 주점에 돈을 맡기고 갈 때도 있더라고요. 만나서 한잔하고 그러면 좋잖아.”
원래는 70세 이상만 모이다가 가끔 후배들도 종종 참여하고 있다. 만나서 막걸리는 기본. 웃고 떠들고 과거를 추억하다 요즘 젊은이들의 연극에 대한 걱정도 한다.
“평가라기보다 우리 연극이 좀 시류를 따른다고 해야 하나, 영합한다고 해야 하나. 가볍다고 말하기도 그렇고. 좀 묵직하고 그런 작품들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적어도 만빵 늙은이들은 그렇게 생각해(웃음).”
사실 이런 말을 하고 싶어도 이제 젊은 후배들을 만날 기회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정말 특별한 인연이라 꼭 좀 와주십사 연락하는 사람이 있으면 연극을 보러 가는 정도다. 아무렴 어떤가! 그래도 늘 행복한 웃음을 잃지 않는 노경식 작가는 어딜 가나 인기가 높다. 지금 이 시간 해피 바이러스 내뿜으며 젊음의 거리를 거닐고 있을 노경식 작가에게 인터뷰 중 약속했던 한마디를 남기고자 한다.
“고향에 관한 연극 꼭 쓰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젊은연극제란? 전국의 연극영화전공 학생들이 주축이 된 연극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해 졸업한 딸이 당연히 유학을 갈 줄 알았는데 안 가겠다고 선언을 했다.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 공부를 시작해 대충 한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열공을 해 수상 경력도 많고 어려서부터 유명세를 탄 딸이었다.
딸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으면 유학을 포기하겠다고 선언을 할까. 그 마음 헤아려 얼마 동안 하고 싶은 대로 놔뒀다. 그러는 동안 딸은 어느새 29세가 되었다. 이번에는 조바심이 난 필자가 딸에게 강력하게 선언했다. 시집을 가든지, 유학을 가든지 선택을 하라고.
딸은 쉬면서 취직도 해보고 다른 길을 모색해보려 했지만 흡족한 것이 없었던 것 같았다. 나이 들어가는 딸이 불안해 몰아치자 섬머스쿨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미국에서 섬머스쿨을 마치고 음악 도시들을 여행하며 재충전을 하더니 다시 피아노 공부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유학을 결심했다.
두려운 마음으로 지원을 하고 유학을 떠난 딸이 드디어 대학원을 졸업했다고 전화를 해왔을 때 필자는 “이제는 결혼을 해야지!”라고 말했다. “네가 아무리 유명한 피아니스트라 해도 싱글은 안 돼”라고 하니 남자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서울로 와서 선을 보라고 했다.
고민해보겠다던 딸은 며칠 후 다시 전화를 해왔다. “엄마, 사실은 나를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겠다는 사람이 있어.” 누구냐고 물었더니 나이가 많이 어리다고 했다. 필자는 난감했다. 지금 ‘no’ 하면 혼기를 넘길 게 분명했다. 일단은 “그래? 그러면 결혼하면 되지 뭐”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겁이 덜컥 났다. 우선 마음을 진정하고 날을 잡아 보스턴으로 갔고 그곳 시청에서 시댁 식구와 우리 부부, 그리고 유학 중인 아들이 참석해 결혼식을 올렸다.
딸은 사위를 섬머스쿨 때 만났다고 했다. 그런데 유학을 가서 다시 만나게 되어 인연인가보다 했단다. 딸은 졸업을 했지만 사위는 아직 대학원 재학 중이라서 보스턴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둘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필자도 마음이 놓였다.
그 해 여름, 서울에서 다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들은 신랑이 몇 살이냐고 물어왔다. 필자는 시침을 떼며 차이가 나는 나이의 반을 줄여 대답했다.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나 모국에 처음 온 사위는 매우 신기해하며 한국이 너무 좋고 맛있는 것도 많다며 서울에 와서 꼭 살고 싶다며 흥분했다.
경주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딸네 부부는 바로 보스턴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년 후 첫아들을 낳고 대학원을 마친 사위는 딸과 함께 서울로 왔다. 현재 대학 교수로 자리를 잡고 제자를 가르치며 연주생활에 열중하고 있다. 사위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이며 여러 악기를 다루고 작곡도 한다. 재주꾼에 꽃미남이다. 하루는 연주회에 참석한 기자가 “저 부부는 좀 이상하다”며 취재를 했다. 딸보다 8년 어린 사위의 정보는 곧 모두 공개가 되었다. 그러면서 딸네 부부의 인기는 더 올라갔다.
딸이 결혼할 때만 해도 연하 남자는 흔치 않았다. 지금은 연상·연하 커플도 많고 다른 사람 눈치 보는 시대도 아니다. 필자도 이제 사위의 나이를 더 이상 숨기지 않는다. 꽃미남인 사위가 가족모임에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면 귀여워서 저절로 싱긋 웃는다. 우리 딸의 남편 선택은 정말 기발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며느리가 전화를 걸어왔다. 아파트 분양에 다자녀 특별 분양신청을 했더니 당첨이 되었단다. 아파트 경쟁률이 몇 백대 일이 되어 도저히 붙을 가망이 없었는데 자식이 셋인 덕분에 정부의 다자녀 특별 분양 혜택을 톡톡히 봤다고 한다. 셋째 막내가 복덩어리라고 이웃에서 모두가 한 마다씩 덕담을 해준다고 며느리 목소리에 잔뜩 기쁨의 웃음이 배어있다.
또 하나 다자녀의 혜택을 본 것이 있다.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시립유아원에 아이들이 쉽게 들어간 것이다. 시립유아원을 선호하는 아이들은 많은데 원생 수는 한정되어 있어 그림의 떡으로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입학 희망자가 넘치다보니 다양한 방법으로 점수 누진제를 하여 최고점을 받은 사람이 입학을 한다. 공평하게 입학기회를 준다고 제도화 하였지만 워낙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차례가 돌아오기가 하 세월이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셋째가 입학 적령이 되면서 다자녀 점수로 단번에 앞사람 여러 명을 제치고 입학하게 되었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지금은 다자녀에게 혜택이 있지만 우리가 젊었던 시절에는 반대로 산아제한이 있었다. 아이를 못 낳게 했다. 그 당시는 정관수술한 사람이 오히려 가점을 받아 아파트 당첨이 유리했다. 아파트를 받으려고 70대 노인이 정관수술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웃었는데 이제는 정반대가 되었다.
인구가 자꾸 줄어드니까 출산을 장려하기위해 정부나 지자체에서 여러 가지 혜택을 주면서 출산을 장려한다. 다자녀에 대한 어떤 혜택이 있을까 인터넷을 통해 찾아보니 생각보다 많다. 지자체별로 혜택 내용도 다르고 명칭도 다르고 금액도 다르지만 대략이나마 알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알아본 내용을 옮겨본다.
1, 다자녀우대카드를 발급받아 수목원이나 박물관 무료입장 가능
2, 전기요금 상하수도 요금 감면
3, 년말정산 시 자녀 추가공제
4, 자동차 취득세 면제
5, 대학등록금 감면
6, 국공립어린이집, 병설유치원, 국립유치원 우선권 부여
7, 출산비용 지원
8, 통신비 할인
9, 중, 고등학교 수업료지원
10,국민연금 가입기간 추가인정
11,셋째 아이 교복 구입비 지원
12,도시가스 요금 감면
보건소에서도 특별 혜택이 있는 것 같다.
아들의 집 문제가 해결되니 그 밑의 딸아이의 집 문제가 또 걸린다. 딸은 이제 8개월의 아이가 있는 새댁이니 좀 더 전세를 살아도 된다. 하지만 오빠가 집을 마련했다니 ‘오빠 축하해’ 하는 목소리 속에 부러움이 들어있다. 딸도 다자녀를 낳아 이런 저런 혜택을 받고 정부정책에 호응하는 집안이 되었으면 하는데 자식들의 결정에 관여할 생각은 없다.
국가경쟁력의 첫 번째가 인구수라는데 우리나라는 저 출산으로 인구수가 줄어든다고 걱정이 많다. 다자녀에 대한 혜택도 필요하지만 아이들 키우기가 쉽도록 정부에서도 제도적으로 보완해주고 기업에서도 배려를 해주었으면 한다.
5070세대는 먹고살기 힘들었던 헝그리(hungry) 세대다. 악착같이 모으고 아끼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자신보다는 가족, 소비보다는 저축이 몸에 배어 있다. 자식과 가족을 위해서는 아까운 줄 모르지만 ‘나’를 위해 쓰는 것은 몇 번이나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이 5070세대다. 필자의 부모님도 평생 자신을 위해 옷 한 벌 제대로 사 입은 적이 없는 분들이다. 어쩌다 자식들이 좋은 옷을 선물로 드리면 “이건 얼마짜리냐?”, “환불은 안 되냐?” 하며 자식들 눈치를 본다.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를 위해 소비하는 것에 인색하고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거 5070세대가 모으고 아끼고 저축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꼈다면 이제는 ‘나’를 위해 투자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누리면 어떨까? 이에 이번 호에서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소비(이하, 나·행·소)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 원칙을 살펴보고자 한다.
소유가 아닌 경험을 위해 소비하라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호 교수는 “행복의 기준이 과거에는 돈을 어떻게 버느냐에서 이제는 돈을 어떻게 소비하느냐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즉 지금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하고 나눌 수 있는 소비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소비는 크게 ‘소유를 위한 소비’와 ‘경험을 위한 소비’로 나눌 수 있다. 과거 5070세대는 소유하기 위한 소비가 대부분이었다. 가령 자동차, 집, 옷 등을 소유하고 사용하면서 행복을 느꼈다. 그러나 이런 소비의 행복감은 단발적이고 일시적이다.
그렇다면 경험을 위한 소비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가령 학습하며 강의를 듣는 것, 여가활동, 여행을 떠나는 것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직접 체험하며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소유보다는 경험을 위한 소비가 훨씬 행복감이 크다고 한다. 그 이유는 뭘까? 경험은 이야깃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가활동으로 가장 선호하는 여행([자료1] 참조)을 예로 들어보자. 여행을 떠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해한다. 왜 그럴까?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여행이라는 경험을 통해 나만의 이야기가 생기고 주변 사람들과 나누면서 행복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5070세대에게 ‘경험하고 체험하는 소비’는 익숙하지 않다. 경험을 위한 여가활동은 기껏해야 TV 시청 정도뿐이다. 5070세대가 성장해왔던 과거 1970년대에는 마땅한 여가 활동도 없었다. 화투 정도가 전부였고 1980년대에 와서야 도심에서 탁구, 당구, 볼링, 테니스 등을 즐겼다. 최근에는 골프와 캠핑 등도 여가활동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경험을 위한 소비’가 반드시 여가활동이나 여행일 필요는 없다. 은퇴 후 ‘제2의 인생’의 좌표를 배움에서 찾는 5070세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2013년 기준 60세 이상 학점은행제 등록자는 2만2915명(대학학점인정 과정 기준)이며, 55~64세의 평생교육 참여현황은 OECD 평균보다 높은 편이다(교육과학기술부 국가평생교육 통계조사). 또한 지난 2013년에는 1972년 방송통신대 개교 이래 최고령자인 정한택(입학 당시 91세)씨가 입학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5070세대의 ‘나를 행복하게 하는 소비’를 위해서는 ‘갖고 싶은 것’에서 ‘하고 싶은 것’으로 소비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일본에서도 여가활동의 주역이 10대에서 60대 이상으로 변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생산성본부에 따르면, 고수입의 활동적인 70대가 레저시장의 주도세력이다.
유병장수시대 행복하게 하는 소비
과거 학창 시절 무조건 외우기만 했던 ‘매슬로우 욕구 5단계 이론’을 기억할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에 따르면, 사람은 의식주와 안전의 욕구가 해결되면 상위 욕구로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나의 존재를 확인받고 더 나아가 자아실현을 궁극적으로 꿈꾸고 싶어 한다고 한다. 물론 모든 욕구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경향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 이론이자 경험론이다. 나·행·소 관점에서 매슬로우의 욕구이론을 적용해보면 어떨까? 1단계 생리 욕구는 의식주 관련 소비로, 2단계 안전 욕구는 건강 예방을 위한 소비로, 3단계 소속감 욕구는 친구/동호회 활동을 위한 소비로, 4단계 존경 욕구는 학습/교육 활동을 위한 소비로, 5단계 자아실현 욕구는 여행을 위한 소비로 매칭할 수 있다([자료2] 참조).
앞서 필자는 ‘경험을 위한 소비’가 나·행·소 첫 번째 요소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매슬로우 욕구 이론에 따르면 모든 5070세대가 ‘경험을 위한 소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제아무리 빼어난 경치라도 당장의 배고픔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한다. 은퇴생활을 하는 5070세대의 소비 성향과 욕구도 동일하지 않다. 은퇴 후에 소득이 중단되어 의식주 관련 소비가 전체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지는 경우도 있다([자료3] 참조). 여기에 의료, 간병을 위한 소비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경험을 위한 소비’는 사치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5070세대가 나·행·소를 위한 소비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소비욕구 5단계에 따르면 1, 2단계처럼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노화와 건강과 관련된 소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은퇴재무설계 관점에서, 자산을 모으는 웰스(wealth)가 아닌 건강을 지키는 헬스(health)에 관심을 갖는 50대가 많아지고 있다. 건강이야말로 최선의 노후대책이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아닌가. 건강하지 못하면 노후생활의 질은 떨어지게 된다. 반대로 준비된 노후자산은 조금 부족해도 몸이 건강하면 긴 노후의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산의 품질이 아닌 몸의 건강품질을 높이는 소비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어쩌면 건강은 목표가 아닌 수단이 될지 모른다. 건강을 통해 더 젊게 살고, 더 즐겁게 살며, 더 행복하게 사는 궁극적 가치에 한발 다가서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잘 먹고, 건강을 예방하는 가장 기본적인 소비야말로 나를 지키고 행복하게 하는 소비가 아닐까?
Clean & Dress up 소비에 인색하지 말라
몇 년 전 개봉한 라는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 퇴직 후 은퇴생활을 즐기다 시니어 인턴으로 일하는 70세 노신사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주인공(로버트 드 니로)은 다운타운에 방 여럿 딸린 자택을 소유한 나름 성공한 중산층이다. 비록 아내와 사별했지만 자녀도 별 탈 없이 잘 자라 독립했고, 취미로 요가나 화초 재배를 하며, 가끔 손자 재롱 보는 것을 삶의 낙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평범한 은퇴세대다.
주인공은 혼자 사는 은퇴세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소 옷매무새 하나도 빈틈이 없다. 그는 언제나 젊은 사람보다 더 깨끗하고 말끔한 시니어다. 옷차림새뿐만 아니다. 항상 주변을 깨끗이 한다(Clean up). 수십 년 직장생활에서 비롯된 노하우와 나이만큼 풍부한 인생 경험은 CEO뿐만 아니라 젊은 직장 동료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액티브시니어들도 나이가 들수록 옷차림에 더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옷은 비즈니스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편한 게 좋은 것이여!”라며 집에서도 외출할 때도 늘 입는 아웃도어 복장은 아닌지 살펴보라. 이왕이면 깔끔하게 잘 갖춰 입고(Dress Up) 다니자. 나이 들수록 깨끗하게 잘 차려 입어야 한다. 옷이 날개란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반듯하게 차려 입은 상대에게 더 호감을 느낀다. 손주들도 좋은 향기가 나는 할아버지를 더 좋아한다. 무엇보다 잘 차려 입은 옷은 자신감을 더해준다. 그러므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Clean & Dress Up 소비’에 절대 인색하지 말자.
지금의 중장년층에게 커다란 생채기를 남긴 IMF. 도시농부 김재영(金宰永·58)씨 역시 나라가 휘청거릴 만한 큰 위기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원래는 인쇄기계를 제작하는 일을 하고 있었죠. 인쇄업이 사양산업이기도 했지만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더 이상 회사를 유지할 수 없었죠. 그래서 결국 사업을 포기하고 다른 일을 찾아봤어요.”
원래 생각했던 것은 귀농이었다. 부모가 이미 가평에서 텃밭을 가꾸며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기댈 곳은 그곳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당장 서울을 떠날 수 없었다. 아이 교육이나 여러 가지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결국 미루고 미루다가 2010년에 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했어요. 기왕 귀농을 하려면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죠. 2014년에 졸업하고 나서는 좀 더 실무적인 교육과정을 찾았어요. 이론과 현실은 다르니까요.”
인연이 닿은 것은 서울시 농업기술센터 도시농업전문가양성과정이었다. 그는 이 교육을 통해 현장에서만 할 수 있는 교육을 배웠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재미있는 스토리 중 하나는 그의 아내 이광희씨의 존재다. 이광희씨는 김씨와는 부부 이상의 상호보완적 관계로 방송통신대학교 농학과도 함께 졸업하고 도시농업전문가양성과정도 함께 다녔다. 부부가 된 이후에 캠퍼스 커플이 된 셈이다.
도시농부가 된 뒤에는 사단법인 도시농업포럼이나 서울특별시도시농업전문가회, 서울특별시시민정원사회 등의 단체를 통해 주로 강사로 활동했다. 그러다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은 올해 초의 일이다.
“아내도 도시농부다 보니 여러 가지 작물을 키워요. 주로 음식이나 차에 쓰이는 허브 종류가 많은데 습한 곳에서 자라는 작물은 옥상정원이나 텃밭에서 키우기 어렵다며 제게 이런저런 주문을 했어요. 그런 아이디어를 모아 부분적으로 작물을 키우는 데 적용하고 있었죠. 그런데 주변에서 서울시에서 하는 도시농업경진대회에 한번 출품해보지 않겠냐고 권유를 하더라고요.”
출품자가 너무 적으면 관련 기관에서 애를 먹을 수도 있어 모르는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가 출품한 것은 다양한 장치를 활용한 아이디어 텃밭. 2층 구조로 설계해 아래쪽에는 햇볕이 직접 닿으면 안 되는 음지식물을 심고 위에는 양지식물을 심는 구조였다. 타이머와 빗물받이를 이용해 우수가 저장되면 식물의 생육에 활용할 수 있게 했다. 한쪽에는 태양전지판을 설치해 보조 조명을 밝히는 전원으로 썼다. 해충기피 식물의 배치도 심사위원들의 점수를 얻었다. 그의 아이디어 텃밭은 최우수상을 차지했다.
“깜짝 놀랐어요. 아내와 주변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현실화한 것뿐인데. 예전에 기계 관련 사업을 했던 것이 제작에 많은 도움이 됐죠.”
그의 텃밭은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주최하는 생활원예 중앙경진대회에서도 최우수상에 뽑혔다. 전국의 농촌 출신의 진짜 농부들을 제치고 얻은 도시농부의 쾌거였다.
“도시농업은 저처럼 쉽게 농촌으로 떠나기 힘든 은퇴자들에게 딱 맞는 직종인 것 같아요. 하지만 제대로 준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 있어요. 교육을 다니다 보면 어디서 어떻게 교육을 받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주변에 살펴보면 교육받을 수 있는 기관은 생각보다 많아요. 거기서 한 걸음씩 시작하시면 좋겠습니다.”
한 살이 채 되기 전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읍내와 가까운 집성촌 친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첩첩산중 외가로 피난을 갔다.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살았던 외가는 차를 본 일도 타본 일도 없는, 해방소식도 종전 다음 해에야 알았다는 곳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입학을 준비할 때가 되었다. 신원이나 부동산공부 정리가 매우 미진하였던 시절, 제대로 된 ‘호적’이 필요하게 되었다. 면사무소가 상당히 먼 거리에 있어서 한 차례 일처리하려면 며칠이 필요했던 옛이야기다. 민원서류가 당일 처리되지 않고 며칠 후 찾으러 다시가야 했다. 이장이 면사무소로 출장 갈 때가 되면 동네 사람들의 민원대행을 자청하였다. 농사에 바쁜 주민들은 그에게 민원심부름을 부탁하면서 고마워하였다.
아버님은 아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자세히 기록하여 이장에게 출생신고를 부탁하였다. 하지만 막걸리를 좋아한 그는 제때 심부름을 이행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급한 일 없는 주민들도 재촉할 이유도 없었다. 시간이 지난 다음 꼭 서류가 필요할 때에 챙기곤 하였다. 몇 해 넘겨서도 처리되지 않아 시비가 붙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다른 사람과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형의 출생신고가 누락되어 동생 것이 먼저 되는 일도 생겼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 이장이 내미는 호적등본을 보고 아버지는 기겁을 하였다. 집에서 부르고 족보에 기록된 내 이름 ‘백형섭’은 온데간데없이 ‘백외섭’으로 바뀌었고, 나이는 두 살이나 늦게 기록되어 있었다. 전쟁 중 태어난 세 살 터울 동생 이름에도 ‘외’가 붙었고 나이는 한 살 줄여서 두 살 차이로 만들었다. “이름과 생년월일이 이렇게 틀려서 되겠느냐?”고 아버지가 추궁하였다. 이장은 술이 취하여 작사ㆍ작곡한 잘못을 부인하면서 “외가에서 자라면 외자를 붙여야 되지 않느냐”고 오히려 반문하였다고 한다.
문제는 초등학교 다니면서 발생하였다. 동네에서 같이 놀던 친구들이 이름표에 새겨진 ‘외’자를 보고 놀려대기 시작하였다. “외가 뭐야, 참외야 물외(오이의 사투리)야?” 참외는 맛이 있지만, 물외는 반찬이나 만드는 맛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별다른 관심이 없던 때였다. 부끄러워서 학교에 다니기 싫었다. 아버지에게 이름을 원래대로 바꾸어 달라고 떼를 쓰곤 하였으나 별 대책이 없었다. ‘외섭’은 수십 년 동안 족보에 오르지도 못했다.
성인이 된 다음에는 상대방이 내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원봉사 때나 사회교육 현장에서 자기소개를 하면서 인사를 나누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저는 ‘백-외-섭’입니다. 세상에 하나뿐인 이름입니다.” 다른 사람이 기억하기 쉽도록 또박또박 끊어서 큰 소리로 말한다. 이렇게 설명하고 나면 대부분 내 이름을 기억한다.
세상에 하나뿐인 이름 덕분에 편리한 점이 많다. 우편물이 착오로 배달되거나 엉뚱한 고지서가 날아오는 경우는 없다. 동명이인으로 헷갈리는 일도 없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하나뿐인 내 이름에 감격한다. 다른 사람과 혼용되지 않는 오롯이 나의 글과 이야기다. 이런 호사를 누린 경우는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막걸리 한잔에 취하여 남의 이름을 확 틀리게 만들었던 옛 이장에게 오히려 고마움을 느끼는 대목이다.
이름은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좋아야 한다. 그렇다고 작명소를 찾거나 점집을 기웃거릴 필요는 없다. 항렬을 따지다가 집안끼리 중복되거나 비슷하여 웃음거리가 되어서도 아니 된다. 한자식을 고집하여 남자 이름이 여자 같고, 여자 이름은 남자 같은 경우를 주위에서 많이 본다.
대한민국에 하나뿐인 내 이름이다. ‘참외든 물외’든 외자 붙은 내 이름을 사랑한다.
요즘 한낮의 태양이 너무 강렬하다. 필자는 원래 선글라스를 즐겨 착용하는데 꼭 멋을 내기 위한 건 아니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눈이 나빴다. 기억하기로는 안경을 처음 착용한 게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다. 엄마 아빠 손잡고 대전의 중심가인 은행동에 있는 윤 안과에 가서 검사를 하고 안경을 맞췄다. 처음 안경을 착용했을 때, 바닥이 꿈틀대는 듯 약간 어지러웠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그 후에도 계속 안경을 썼는데 중․고교 시절에는 외모에 신경을 쓰느라 잘 안 보이는데도 수업시간 외에는 끼지 않았다. 대학 입학 후에는 처음으로 콘택트렌즈를 착용했다. 무교동의 신예용 안과에서 맞춰 낀 당시의 렌즈는 하드 렌즈였다. 딱딱한 플라스틱 재질에서 오는 이물감 때문에 오래 사용하지 못했고 곧 소프트 렌즈로 바꿔 착용했다.
안경 없이 눈이 잘 보이니 얼굴도 예뻐 보이고 마치 딴 세상에 온 것처럼 기분도 좋았고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손 소독도 깨끗이 했는데 어느 날인가 눈병이 나고 말았다. 며칠 동안 눈도 제대로 못 뜨고 몹시 고생을 했다. 렌즈를 사용하려면 손 소독은 필수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외출할 때 외모를 생각해서 계속 소프트 렌즈를 착용해왔다. 그런데 요즘은 얼굴이 못생겨 보이거나 말거나 편하게 안경을 쓰고 다닌다. 특히 시력 때문에 햇빛을 잘 못 보는 필자는 선글라스가 여름철 필수품이 되었다. 한때는 선글라스 끼는 걸 안 좋게 보는 시선이 있었다. 하지만 멋내기용이 아닌 눈을 보호하기 위한 선글라스는 꼭 필요하다. 자외선에 의한 눈 피해가 심각하므로 눈을 보호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자외선은 파장이 짧고 투과성이 높은 강한 에너지라서 직접 쏘이면 다양한 눈 질환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한다. 장기적으로 노출될 경우 백내장을 유발하고 시력 상실까지 가져올 수 있다니 정말 무서운 일이다. 그러니 눈 보호를 위해서라도 선글라스 착용은 이제 필수품이 된 것이다. 선글라스는 렌즈에 색을 입힌 뒤 전자파 차단막과 수막 그리고 자외선 차단막을 코팅한 것이다. 렌즈 표면과 컬러의 균일성이 가장 중요하며 자외선 차단기능(UV 마크) 표시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해변 등 햇빛이 강렬한 곳에서는 자외선 차단 효과가 크고 눈의 피로를 덜어주는 녹색이나 회색이 좋고, 황색이나 갈색은 신호등을 구별하는 데 좋으므로 운전할 때 적합하며, 노란색이나 붉은색 계통은 흐린 날이나 원거리 경치를 볼 때 착용하면 좋다고 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검정 계통을 선호하는데 잘 어울리는 듯해서다. 선글라스 판매는 매출액 기준으로 볼 때 외국 제품이 70% 정도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데 내면 코팅 등 렌즈 생산 기술과 수백 가지 모델을 통해 국산 제품도 우수함을 인정받고 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이 있다. 눈 보호를 위해 국산제품의 선글라스를 하나씩 장만하는 것도 여름철의 무시무시한 자외선으로부터 우리 눈을 지키는 방법이 될 것 같다.
올해 77세로 미수를 맞는 남편과 필자는 다섯 살 차이다. 남편은 6․25전쟁 때 아버지가 납치된 후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런 남편이 가끔 아버지가 납치되기 전 자장면을 배달시켜서 먹었다며 그 시절의 이야기를 가끔 즐겁게 하곤 한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자장면을 먹어본 기억이 없는 필자는 남편이 6.25전쟁 전에 자장면을 먹었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전화도 없고 또 오토바이도 없었던 시절에 어떻게 배달을 시켰으며, 중국집이 있기나 했냐며 거짓말하지 말라고 한다.
지방에서 개인 병원을 하신 필자의 아버지는 주말에나 서울로 올라오셨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거의 아버지 없는 아이처럼 살았다. 당시에는 순진해서 다른 집 아버지들도 주말에만 집에 오는 걸로 알았을 정도다. 어쨌든 그 당시 음식을 배달시켜 먹은 기억이 전혀 없다.
필자의 외식에 대한 추억은 대학교 입학 후 영어 과외를 해서 번 돈으로 동생들과 사먹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여고 시절에도 빵집이나 광화문 근처 국수집에서 외식을 한 적이 있기는 하다. 대학 시절에는 연애를 했던 남편과 함께 OB`s Cabin’ 같은 명동의 레스토랑에서 햄버그스테이크도 사먹었다. 다진 고기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특별한 맛이었다. 그 당시 남편 사준 메밀국수를 먹다가 고추냉이(와사비)에 혼이 난 기억도 있다.
요즘은 아들네 식구가 주말에 오면 일하기가 싫어 외식을 하곤 한다. 메뉴는 주로 손주 입맛에 따라 결정한다. 손주는 고기를 좋아하는데 주로 숯불에 구운 고기를 된장에 찍어 먹는다. 피자나 자장면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아이다. 요즘 아이들 같지 않고 순전히 토종 식성이다.
밖에서 식사를 한 후 커피는 집에 와서 마신다. 일요일인 어제는 스파게티 소스가 있어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었다. 손주에게는 햄버그스테이크를 만들어줬다. 겨자를 얹어주었더니 그건 안 먹고 김치만 먹는다. 이 다음에 연애할 때 겨자 못 먹으면 그 옛날 할머니처럼 쑥스러울 거라며 겁을 주며 먹어보라고 해도 손주는 먹어볼 시도도 안 한다. 제 엄마인 며느리의 토종 식성을 그대로 빼어 닮은 것이다.
요즘 식당이나 커피 집은 거의 프랜차이즈다. 외국엔 몇백 년 된 식당이 많다. 몇 대에 걸쳐 음식을 만드는 식당이 인정을 받는데 우리나라는 특별한 브랜드의 음식들을 좋아하고 유행에 민감하다. 그래서 누가 별다방(스타벅스) 커피를 먹으면 따라서 먹는 경우가 많다. 핀란드에는 각 가정마다 마시는 커피 맛이 다르다고 한다. 커피콩도 다르고 커피 내리는 방법도 달라서 당연히 획일화된 맛의 프랜차이즈 커피 집이 잘될 리 없다. 우리나라도 그 도시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음식을 먹으러 여행도 하고 관광사업으로도 연계되어 지방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여고 시절 제2 외국어를 선택할 때 영어 선생님께서 문학이나 웅변을 하려면 독일어를 택하고, 사랑을 하려면 불어를 택하고, 돈을 벌려면 영어를 열심히 공부 하라는 우스개 소리를 하셨다.
오래 전에 작고하신 친정 아버지는 의사이면서 정치를 부업으로 하셨다. 비록 정치에 실패를 하셔서 많은 돈을 날리셨지만, 본업인 의사로 재기를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워낙 욕심이 많으셔서 우리 집 6남매 중 아들 셋 중 둘은 의사로 하나는 약사로, 딸도 셋 중 둘은 간호학과를 입학 시켜서 작은 병원을 하나 운영해도 되겠다는 소리를 어렸을 때부터 우스개 소리로 많이 들었다.
그런데 친정 6남매 중 필자만 유일하게 문과인 영문과를 전공으로 택하였다. 사실은 필자까지도 아버지가 의대를 가라고 했으나 아버지가 대한 이유 없는 반항으로(?) 영문학을 전공했다.
서울대 영문과를 입학하자 마자 교수님들이 소개로 소위 재벌 가 자제의 영어 과외를 맡아서 하게 되었는데 그 시절 대기업 사원보다 수입이 많아, 일반 사립대보다 훨씬 싼 서울대 학비는 벌고도 남았다.
등록금을 내고도 남은 돈으로는 우리 집 가전제품도 새로 구입하고 또 동생 두명의 취미 생활에 필요한 것도 사줄 수 있었다. 당시에 텔레리비젼이 처음으로 생산되어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수요에 비해 공급이 딸려 지금의 일가구일주택 정책처럼 한 가족당 한 대만 살 수 있었다.
동생들의 취미를 위해서는 스케이트나 정구 라켓은 물론 Made in Italy 자전거까지 남동생에게 사 주었다. 그 때 산 배드민턴 장비도 지금은 별거 아니지만 그때는 아무나 못 사고 또 뭔지도 몰라서 동네 길 바닥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놀면 친구들이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던 기억이 있다.
또 대학을 졸업 후 홍콩에서 외국 항공사 스튜어디스로 근무를 했는데, 봉급이 여자로서는 다른 직종보다 많은 편이었다. 그 때는 워낙 우리나라가 못 살던 1970년도 시절이라, 항공사에서 함께 일하던 ‘홍콩 차이니즈’라 불리는 중국 아이들도 우리가 영어를 못한다고 깔보고 뒤에서 수군거리곤 했다.
그 때 중국 애들은 얼굴은 중국인이지만 당시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영국 여권을 갖고 다니며 우리 나라를 우습게 보았다. 또 당시에는 우리나라의 화폐 가치가 형편 없고 너무 낮아서 월급으로 받은 달러를 서울의 부모님에게 보내면 남대문 시장에서 야미(?)로 바꾸면 은행의 거의 두배가 되어서, 홍콩의 비싼 주거비와 생활비를 제외 하더라도 우리나라 대졸 임금의 두배 가량을 저축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파키스탄이나 베트남 출신의 동남아 근로자들이 한국 생활을 어려워하듯이, 필자도 부모 형제들과 떨어져서 생활 해야했기 때문에 외로움과 또 낯 선 외국 생활에 적응이 쉽지 않았다. 결국 일 년 반 만에 모든 걸 정리하고 도망치듯이 귀국하여, 그 후로 결혼도 하였다. 결혼 후에도 남들과 달리 계속해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 것은 현지에서 배운 영어 덕분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즘은 영어는 기본이고 제2.3 외국어까지 잘하는 젊은 사람이 많아도 직업 선택이 쉽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