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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이 풍진세상 희망가를 부르는 소리꾼 장사익
- 장사익 소리판 대전 공연이 있던 날. 대전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인터뷰에 앞서 도리였다. 노래가 전부라는 사람, 장사익(張思翼·68). 작년 초 자신의 인생을 걸고 성대결절 수술대에 올랐던 그는 8개월 뒤 불사조처럼 힘차게 일어섰다. 공연을 보지 않고서 어떻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나. 더욱 단단해지고 깊어진 소리가 가슴을 뒤흔들었다. 음악 안에서 행복하다는 그가 살아 돌아와 부르는 노래.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했다. 대전 공연에서 만나고 수 주가 지난 뒤, 찻상을 사이에 두고 장사익과 마주앉았다. 종로구 평창동 그의 자택 너른 창 앞이었다. “다섯 잔은 해야 소통이 된대, 차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 찻잔에 차를 따르면서 말을 건넸다. 인터뷰 때마다 치르는 장사익만의 통과의례이자 손님을 극진하게 맞이하는 인사법은 바로 차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차를 마시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마냥 수다스럽게 안부를 묻고, 지난 공연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한창 담소가 무르익어갈 무렵, 창밖으로 보이는 산 뒤쪽으로 해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보였다. “나 어렸을 적 살던 홍천 우리 집에는 동산이 있어서 오전 9시나 10시나 돼야 아침이 됐죠. 대신 뻘건 일몰은 수도 없이 봤어요. 나이 먹으니 거꾸로 됐어(웃음). 그게 바로 인생이라. 초창기 때 내가 되게 힘들었어요. 노을만 보는 인생이었어. 근데 지금은 해가 뜨는 걸 본단 말이야. 지금이랑 옛날이랑 완전 정반대죠. 내 인생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사는 것과 지는 해를 보고 사는 것과 어떤 게 더 힘이 있어?” 대한민국 중·장년층에서 장사익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공연 때마다 매진 사례를 기록하고, 장사익 콘서트 티켓은 효도상품이 된 지 오래다. 1만7000명이나 되는 팬들과 여름과 겨울 꾸준히 팬 미팅을 진행하는 대형 가수이자 올해 예순여덟인 시니어 세대의 젊은 오빠(?) 장사익이다. 그가 세상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은 놀랍게도 1994년. 그의 나이 마흔다섯 되던 해다. 노을 드리우던 굴곡진 젊은 시절을 지나 밝게 떠오르는 인생을 40대 중반이 돼서야 비로소 맞이했다. 마흔다섯, 내 입에서 ‘행복하다’는 말이 새어 나왔다 속이 뻥 뚫릴 만큼 유행가를 불러 젖히는 장사익. 소리꾼이 되기 전 그는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웃음기 없는 가장이었다. 15가지나 되는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동안 아련하게나마 위안이 됐던 것이 어렸을 적 동네 아저씨가 불던 태평소 소리였다. “세상에 그 어려운 밥벌이하느라 직장에서 얻어터지면서 살았어요.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일, 그걸 죽을힘을 다해 한번 해보자고 선택한 것이 태평소였어요. 아부지 장구 칠 때 옆에서 정말 태평소를 잘 불던 아저씨가 제 기억에 늘 있었거든요. 아무 욕심도 없고 별 볼일 없는 것에 내가 좋아서 목숨을 걸었어요.” 태평소를 손에 쥐면서 삶의 판이 바뀌어갔다. 노래하는 인생에 길을 내어준 것은 분명 태평소였다. “노래가 운명이었나봐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5년 동안 웅변 연습 삼아 목청을 풀었어요. 20대 초반에는 첫 직장 다니면서 대중가요도 3년 동안이나 제대로 배웠고요. 지금 부르는 유행가는 대부분 그때 알게 된 노래입니다. 군 3년 동안에는 문선대 가수로서 전라남도를 돌아다녔어요. 그땐 소리꾼이 되리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정말 신기하게 노래란 놈이 다가왔어요.” 그 운명의 끈은 피아니스트 임동창을 만나게 해주었다. “1993년 1월 4일부터 이광수 사물놀이패에 끼어서 태평소를 불기 시작했어요. 임동창은 그때 김덕수 쪽에서 악보를 정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요. 나는 이광수 쪽. 그러니까 사물놀이 전설의 라이벌 밑에 둘이 각자 있었던 거야. 공연할 때 뒤풀이에서 둘이 운명적으로 만난 거지. 나는 ‘저 피아노 치는 친구 잘하네’ 했고 임동창이도 ‘어! 저놈 노래 잘하네’ 한 거야. 내가 뒤풀이에서 조용필이야 조용필(웃음). 그때 임동창이가 ‘형, 그러면 한번 나가봐’ 그랬어요.”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그의 인생 첫 콘서트가 계획됐다. 1994년 11월 6일, 7일 이틀에 걸쳐 열렸다. 벼락이 치는 소리만큼이나 강렬한 임동창의 피아노와 김기영의 북장단에 맞춰 ‘찔레꽃’을 비롯해, 20대 초 장사익이 낙원동 골목에서 배우고 흥얼거렸던 유행가를 관객 앞에서 불렀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00석 규모 공연장에 이틀 동안 800명의 관객이 찾아온 것이다. 장사익이 드디어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셋이서 그냥 논 거야. 웃기는 거 아냐? 그때 내 나이가 마흔다섯이었어. 밤새도록 연습해가지고 딱 한 번만 하자 했어요. 첫날 공연 끝나고 나서 다음 날 아침 ‘이게 행복이구나.’ ‘행복’이라는 단어가 툭 튀어나왔어요. 노래를 딱하고 그다음 날 일어났는데 너무 행복하고 좋은 거야. 그때부터 웃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 주름살이 웃는 주름인 거예요. 하회탈마냥 웃잖아.” 노래 부르는 인생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일까? 장사익은 공연 뒤풀이에 가서도 노래를 꼭 부른다. 긴 시간 공연에 쉴 만도 한데 그의 흥은 죽지 않는다. 함께 고생한 스태프와 팬만을 위한 무대가 뒤풀이 장소에서 더해진다. “제 인생에 신조가 있어요. 내가 속한 집단은 늘 행복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인상 쓰고 먹으면 독이 돼요. 아무리 허술한 음식이라도 즐겨 먹으면 약이 된단 말이에요. 일도 그래. 인생이 다 그런 거 같아요.” 근본 없는 세상, 희망가를 부르다 장사익의 대전 공연이 있던 작년 11월 2일은 온 나라가 대통령 비선실세, 국정농단 사태로 떠들썩했다. 콘서트장을 찾은 사람들의 얼굴은 밝았지만 무거운 돌덩이 하나쯤 가슴 한쪽에 안고 있지 않았을까. 장사익은 공연 중간 ‘근본 없는 세상이라 이런 일도 생긴 것’이라 말하고 ‘희망가’로 관객들을 위로하며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노래하는 놈이 목을 다쳐서 수술을 했단 말이지. 100m 달리기 선수가 달리다가 다리 부러진 거여. 그럼 어떻게 해요? 당장 앞이 안 보이잖아. 긍정적인 생각부터 해야지. 다행히 완벽하지는 않지만 목소리는 일단 찾았어요. 이렇게 노래하고 있을 때 행복하고 노래가 더 소중합니다. 우리나라도 똑같이 승승장구하다가 걸린 거예요. 정지. 그러면서 주변을 살펴보는 거예요. 이건 아닌데. 가만히 보니까 폼도 잡고 있고, 객기도 부리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목을 다치니 뒤도 좀 돌아보고 내 모습도 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도 해보더군요. 이런 소중한 기회를 이번에 아프면서 알았어요. 이건 돈 주고도 못 사요. 그런데 딱 목에 신호가 와서 잠시 멈춘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러니까 우리나라도 반성하면서 곪고 터진 것들을 다 도려내야죠. 민주적으로 사정없이 혼내야죠.” 대규모 집회가 매주 집 주변에서 열리던 상황. 혹시 ‘희망가’를 불러달라는 요청이 있다면 응할 용의가 있는지 물었다. “예전에는 많이 했어요. 요즘에는 별로 얘기 않더라고(웃음). 나는 이렇게 같이 덩달아서 하는 것도 좋지만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지요. 제의가 있다면 늘 마음은 있습니다.” 인생, 3할대만 쳐도 성공하는 거예요 성대결절 수술 후 장사익은 8개월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절대안정은 지금도 여전하다. 병원에서는 무리하지 말라고 하지만 목 또한 악기인지라 연습하고 가다듬어야 소리가 제대로 난다. 목 상태를 조금이라도 유지하려면 음이라도 좀 내려 불러야 하련만 장사익 사전에 타협은 없다. “여기서 죽으면 관둬야 해(웃음). 그러니까 죽기 살기로 하는 거여. 노래가 모두 다 좋을 수가 없어요. 특히 찔레꽃은 클라이맥스에서 톡 쏘는 느낌이 관객에게 전달돼야 하는데 그게 안됐을 때는 노래 전체가 살지 않아요. 그래서 항상 긴장하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늘 숙제하는 기분입니다.” 그는 노래가 잘될 때도 또 안될 때도 있다면서 인생을 야구의 타할에 비유했다. “요새 하는 생각인데요. 야구 상위 타자가 몇 타를 치는지 알아요? 3할 중반은 넘지만 4할은 못 넘어가요. 기가 막히죠. 백인천이 옛날에 4할을 치기도 했지만 말이죠. 국민 타자 이승엽도 10개 중 6~7개 정도는 칠 수 있을 거 같은데 못 치잖아요. 인생은 3할만 가도 성공하는 거예요. 세 번에 한 번. 그리고 두 번은 버려야 해. 욕심이야. 다 잘할 수 없어요. 그게 진리더라고요. 세 번에 한 번만 잘 쳐도 상위 타자로 들어가는 거야.” 그는 인생이 다 좋을 수는 없다고 했다. 최선을 다했다면 어떤 결과가 오든 수용해야 한다고, 그게 세상살이라고 말한다. “2할대 타자도 준수하게 치는 거야. 3할도 하고 5할도 하려다가 모두 도둑놈 되는 거여(웃음).” 은퇴와 죽음이 맞닿을 나의 무대, 무대! 늦은 나이에 소리꾼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섰지만 그에게도 분명 생각하고 있는 마지막 모습이 있을 것이다. 특히 성대수술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터이다. 역시 그의 끝은 무대 위를 꿈꾼다. “옛날에 내가 좋아하던 조갑녀 선생님이라고 있어요. 이분은 마지막 춤을 내 무대에서 췄어요. 90에 휠체어를 타고 무대에 나왔는데 딱 일어나서 1분을 췄어요. 그 어떤 춤보다도 기둥 하나가 춘 거여. 밀양 북춤의 대가 하보경 옹의 무대도 제 눈으로 봤습니다. 그분도 제자가 번쩍 들어서 무대에 올려놓았어요. 농악 장단이 들어가고 1분 있다가 손을 번쩍 드는데, 언제 저렇게 땅이 무너지는 춤을 또 볼 수 있을까. 다 벗어버려야 해요.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해요.” 장사익은 최근 유명을 달리한 노래하는 음유시인 레너드 코헨(캐나다·2016)과 차벨라 바르가스(멕시코·2012)의 노래를 좋아한다. 이들의 노래를 ‘죽음을 코앞에 두고 부르는 노래’라고 표현한다. “이게 진짜 노래예요. 앞으로 나는 힘 좀 빼고 나이 먹는 것을 되게 기다리고 있어요. 남들은 나이 먹는 걸 두려워하잖아요. 나는 80에 90에 어떻게 노래를 부를까 궁금해요. 지금도 주름살이 골목길처럼 있는 놈이 더 늙어져서 지팡이 짚고 나와 비틀비틀하면서 노래를 부른다면 얼마나 멋있겠어요. 그런 꿈을 꾸고 있어요. 내가.” 일생에 좋은 노래 하나, 좋은 공연 하나, 안 했을 수도 있고 이미 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여전히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장사익은 말한다. “진짜 저런 공연, 저런 노래, 그런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인생을 사는 것인지도 몰라요.”
- 2017-01-0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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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환자 좋은 의사 되기] 간암과 사투를 벌인 바닷가 사내와 암 잡는 방사선종양학 전문의의 라뽀
- 거친 바다 마을 출신의 사내라 해도 이 우주선 같은 치료기는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폭풍우 속 배 위가 더 속 편하지 않았을까. 돌아가는 기계 위에 누워 있으려니 좀이 쑤시고 욕지거리가 나올 것 같았다. 낮은 목소리의 소음은 조용했지만 시끄러웠다. 임재성(林在聲·56)씨는 그래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 기계가 큰 병을 낫게 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암(癌)이라는 큰 병을 말이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보통 암이라고 하면 자신의 건강을 과신하던 어떤 사람이 느닷없는 선고에 당황하게 되는 병이라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런 사례가 많다. 그런데 국립암센터에서 만난 임재성씨는 그에 반해 억울한 구석이 많은 경우다. 전라남도 여수시에서 주유소 사업을 하던 그는 교직에 있는 아내와 함께 평범한 가정을 평탄하게 꾸려나가고 있었다. 사업은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유지됐고, 그의 활달한 성격에 주변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자녀도 1남 1녀다. 마치 동사무소 입구에 꽂혀 있는 홍보물 표지 사진 속 가족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이 반짝이는 가족의 삶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89년부터다.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건강검진에서 B형 간염에 감염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매년 빠짐없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원래 건강에 자신이 있었어요. 실제로 간염 환자가 겪는다는 식욕부진이나 피로감 같은 것은 하나도 느끼지 못했어요. B형 간염도 어머니를 통해 받은 것이니 크게 동요할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정기적인 검사만 제때 받으면 되겠지 하고 평소처럼 생활했어요. 주변 사람들과 자주 어울리면서요. 그때만 하더라도 주(主)님이 아닌 주(酒)님을 모실 때였죠(웃음).” 그 시절부터 그는 정기적인 건강검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B형 간염은 까딱하면 간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경고를 들어왔기 때문에 건강검진만큼은 반드시 지키는 생활을 이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작은 균열은 조금씩 더 벌어지기 시작했다. 2014년 말, 광주에서의 건강검진 결과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간암일 수 있다는 의사의 말. 하지만 그를 더 화나게 한 것은 정기검사 때마다 만났던 의사의 태도였다. “간 상태가 나쁘지 않아서 아직 B형 간염 약을 먹을 단계는 아니라고 했거든요. 그랬던 그 의사에게서 느닷없이 암 진단을받았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요. 그 상황에서 요즘 의술이 좋아져 초기 간암은 치료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위로가 위로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더라고요. 그럴 수밖에 없잖아요?” 당연히 암 선고는 그에겐 충격이었다. 여느 암 환자처럼 그 역시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부정과 분노 등 다양한 과정을 거쳤다. 죽기 전에 손주는 볼 수 있을까, 죽음을 준비해야 하나, 고통은 어느 정도나 될까, 더 괴로워지기 전에 차라리 생을 끝내는 것이 나을까. 말도 안 되는 걱정과 의문들이 그를 괴롭혔다. 심지어 검게 변해 죽어 있는 물고기들이 바닷가로 잔뜩 밀려오는 악몽을 꿀 정도였다. 그렇게 암 선고에 당황해하고 있을 때 처가 쪽 친척으로부터 일산으로 올라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일산에 국립암센터가 있으니 진단이든 치료든 그곳이 가장 정확하고 믿을 수 있는 곳 아니겠냐는 조언이었다. ‘약사님’ 친척의 조언이었기 때문에 의심할 필요도 없었고, 믿어보기로 했다. 그 길로 바로 서울로 향했다. 그러고는 국립암센터의 방사선종양학 전문의 김태현(金泰現·46) 교수를 만났다. 비장의 카드 ‘양성자치료기’ 김태현 교수는 “임재성씨는 간암 환자 중 우리 주위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형태의 환자예요”라고 설명했다 . “B형 간염은 한국 사람들에게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독 한국과 중국 사람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어요. 이에 반해 일본과 서양인들은 C형 간염 보균자가 많죠. 최근에는 간염 예방 백신의 보급이 적극적으로 이뤄지고 있어 그 수가 줄고 있지만, 그래도 B형 간염 보균자는 우리 주위에 적지 않습니다. 이 간염이 우리 몸에 들어오면 염증이 일어났다 나았다를 반복하는데, 이러다 암으로 발전되는 경우가 많아요.” 임씨의 경우 간암 초기였기 때문에 경동맥 화학색전술로 치료를 했는데, 원하는 만큼 예후가 나오지 않아 간암고주파열치료술까지 시도했다. 경동맥 화학색전술은 간 전체에 여러 암세포를 치료할 수 있도록 약을 뿌리는 방식이고, 간암고주파열치료술은 특정 암세포에 고주파를 쬐어 높은 마찰열을 발생시켜 괴사시키는 치료법이다. “문제는 임재성씨의 증세가 다발성(多發性)이라는 것이었죠. 암세포가 또 발생했는데 이번에는 그 위치가 애매했어요. 접근이 무척 어려운 부위라 수술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양성자치료였어요.” 400억원 넘는 꿈의 치료기 양성자치료기는 CT나 방사선치료기와 같은 ‘의료기기’로 생각하기 쉽지만 ‘의료시설’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국립암센터의 양성자치료기도 장비가 먼저 자리 잡은 뒤에 그 위로 건물이 지어졌다. 지어진 건물 안으로 장비를 넣는 것이 불가능한 규모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양성자치료 장비는 가속기 반경이 4km 정도였다. 우주의 기원을 좇는 입자가속기와 유사한 가속기를 통해 수소 원자의 핵을 빛의 속도로 가속시키면 튕겨져 나오는 방사선을 받아 암세포에 쏘이는 방식이다. 의사들에게 이 장비가 꿈의 장비로 불리는 이유는 일반적인 방사선치료 장비와 달리 주변 조직에 미치는 영향이 최소화되기 때문이다. 일반 방사선 장비는 방사선을 투과할 때 암세포 앞뒤의 정상 조직이나 장기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방사선 조사각을 이리저리 돌려 쪼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반면에 양성자치료기는 정확히 암세포에만 조준사격이 가능하다. 주변에 미치는 영향도 훨씬 미미하다. 암세포를 죽인 뒤 몸을 통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소멸한다. 치료하는 의사 입장에서도 부담이 적은 셈이다. 일반적인 방사선치료가 식욕부진이나 설사, 두통 등의 부작용을 동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립암센터의 양성자치료기는 2007년부터 본격 치료를 시작했고, 지금은 삼성서울병원에 한 대가 더 도입돼 국내에 2대가 운용 중이다. 국립암센터의 양성자치료기 도입 예산은 약 480억원이었고, 삼성서울병원이 밝힌 양성자치료기 도입 예산은 1000억원 선이다. 일반인이 상상하기 힘든 규모의 치료 시설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60대가 안 되는 귀한 장비다. 치료비는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면서, 예전의 10분의 1 수준이 됐다. 암종, 치료기간, 치료횟수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00만~800만원 수준이다. 김 교수는 “최대한 건강한 간 조직을 유지시키는 데 가장 주의를 기울였어요. 임씨와 같이 만성 간변병증이 있는 경우는 낮은 백혈구·혈소판 수치 때문에 출혈이 잘 멈추지 않아 수술을 하려면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치료가 잘되어 이제는 더 이상 암세포가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됐어요. 다행이죠.” 암 환자 더욱 위험하게 하는 건 ‘얇은 귀’ 임씨가 양성자치료기를 통해 본격적인 치료를 받은 것은 2016년 2월부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의사들은 가능성과 확률을 이야기하지만, 기본적으로 B형 간염 보균자는 간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시는 편이 도움이 될 거예요. 우리나라에 이렇게 B형 간염 보균자가 많은데, 그에 비해 경각심은 너무 부족한 것 아닌가 싶어요. 저도 그랬으니까요. 이와 함께 또 경각심을 가져야 할 곳이 있어요. 바로 언론이에요. 요즘 종편에서 의학 관련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믿어선 안 될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암 환자는 기본적으로 귀가 얇아질 수밖에 없어요. 마음이 다급하니까요. 이 마음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일부 엉터리 프로그램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는 주변의 다른 암 환자들과 등산을 하거나 모임을 갖는 등 활동을 해왔는데, 불필요하게 효과도 없는 건강식품에 돈을 쏟아 붓는 사람을 적지 않게 목격했다. 효과가 좋다고 암 환자들을 유혹하는 각종 식품들에 대해 김 교수도 비슷한 의견을 말한다. “흔히 암에 좋다는 음식 중 상당수는 몸에서 분해되는 과정에서 되레 간에 부담을 주는 경우가 많아요. 간암은 간을 보호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인데 간을 쉬지 못하게 만들어요. 그러니 예후가 좋을 리 없죠. 환자가 어느 날 갑자기 간 수치가 나빠져서 오는 경우가 있는데, 결국 원인은 음식인 경우가 많아요.” “그래도 난 운이 좋은 사람” 임재성씨는 그래도 스스로를 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간암이라는 장벽을 만났지만 남들보다 훨씬 수월하게 위기를 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비교적 일찍 암을 발견한 것이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덕분에 초기에 치료를 받았잖아요. 또 간암에 효과적이라는 양성자치료기를 알게 되어 혜택을 받았는데, 치료를 받기 직전에 건강보험 적용이 돼서 혜택을 많이 받았어요. 치료 과정에서 임상시험 대상자로 뽑혀 치료비 부담도 줄였고요.” 양성자치료는 아직 모든 암에 적용되지는 않지만 일부 암종을 대상으로 2015년 9월부터 국민건강보험 급여화가 됐다. “워낙에 가무에 능했는데, 이제는 술과 이별을 해서 대신할 만한 것이 필요했죠. 그래서 드럼연주를 시작했어요. 절로 흥이 나면서 즐거운 마음이 되더라고요. 보통 큰 병에 걸리면 주변 사람들에게 왜 신경 안 써주냐, 왜 이건 안 해주냐며 화를 내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자신의 병은 자신이 챙겨야 해요. 스스로 아무것도 안 하면서 몸이 좋아지길 바라면 그게 이뤄지겠어요? 또 이런저런 주변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의료진의 진료에 따르는 것이 제일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 2017-01-0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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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관 답사기] 황순원 문학관
- 어린 시절, 소설을 읽다 사랑에 빠져버린 첫 작품이 바로 다. 푸르른 무밭하며 실개천 돌다리길, 소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는 소나기처럼 온몸에 녹아들었다. 애잔하지만 환상적인 사랑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소설 . 의 작가 황순원의 따뜻함을 간직한 그곳에 찾아갔다. 황순원 문학관은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마을의 2009년 개관과 함께 문을 열었다. 경기도 양평군에 조성된 황순원 문학촌은 소설 를 소재로 문학 테마 공원으로 꾸며졌다. 황순원의 장편소설 을 주제로 한 ‘해와 달의 숲’과 단편소설 의 분위기를 빌린 ‘너와 나만의 길’, ‘고백의 길’, ‘소나기 광장’ 등이 조성돼 있다. 개관 이후 우리나라 문학관 중 유료입장객이 가장 많은 문학관으로도 꼽힐 만큼 관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윤초시네가 이사 간 곳에 황순원 문학관 그렇다면 왜 경기도 양평군에 황순원 문학관이 생긴 것일까? 소설가 황순원은 1915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은 평양과 오산에서 짧게 보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 후 한국전쟁 발발 전에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와 서울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경희대학교 국문과에서 23년 6개월 동안 교수생활을 할 때까지 실질적으로 양평에 적을 둔 적이 없다. 양평이 황순원 문학관의 최적지가 된 이유는 바로 소설 때문이다. 2000년 9월 14일, 세상을 떠나 고향도 연고도 없이 병천 공원묘지에 유택을 마련한 황순원. 경희대학교 제자들은 황순원 문학관을 짓기 위해 뜻을 모았다. 소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라는 내용과 소설 속 주인공인 소년과 소녀가 만난 징검다리 등 소설의 배경과 닮은 곳이 바로 양평이었기에 문학관 자리로 낙점됐다. 황순원 부부, 문학촌 안에서 잠들다 문학관 개관과 함께 황순원의 유골은 이장돼왔다. 2014년 한국 나이 100세로 숨진 동갑내기 부인 양정길씨도 이곳에 함께 안장됐다. 두 사람은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자유연애로 만나 결혼했다. 평양에 살 때부터 교제한 사이로 알려졌는데 황순원은 숭의중학교, 부인 양정길씨는 숭의여중에서 문예반장을 했단다. 1935년 둘은 일본 유학 중에 결혼해 1938년 장남 황동규를 낳았다. 이후 차남 남규, 딸 선혜, 3남 진규를 차례로 얻어 다복한 가정을 꾸렸다. 장남인 황동규는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나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성장했다. 황순원 문단 데뷔는 소설이 아닌 시 황순원이 쓴 작품은 단편소설 104편, 중편소설 1편, 장편소설 7편이다. 놀랍게 시도 104편이나 된다. 사실 황순원은 시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17세 때 문학잡지 에 ‘나의 꿈’이라는 작품으로 데뷔를 했다. 이 작품은 일제 강점기에 나라 잃은 17세 소년의 꿈을 잘 드러냈다는 평을 들었다. 많은 독자가 그를 소설가로만 기억하지만 70세 이후로는 그는 다시 시의 세계로 돌아갔다. 간결하고 단단한 문체를 구사하면서도 순수와 서정미가 돋보이는 글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황순원. 깔끔하고 잡문을 일절 쓰지 않는 군더더기 없는 성격과 등단 초기 시작(詩作)의 영향이 역작에 그대로 배인 것이다. 황순원은 한국 근대소설의 대가다. 사람들은 그가 일필휘지하듯 글을 썼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한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공책을 열 권, 스무 권, 백 권 가까이 쓰면서 교정을 보고 글을 고쳐 완성했다. 교정도 절대 제자들한테 맡기지 않았다. 문학관에 전시돼 있는 그의 초고 공책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의 글을 엄격하게 대했는지를 알 수 있다. 황순원은 라는 수상집을 제외하고는 시와 소설만 썼다. 신문 기고문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순원의 작품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4·19, 5·16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질곡을 작품 하나하나에 녹여낸 결과다. 그의 작품들은 영화, 드라마, 연극 등으로 제작돼 다양한 계층의 공감을 샀다. 서양화가 김환기는 황순원의 작품 , , 의 책 표지 그림을 그려주었는데, 그가 표지 그림을 그려준 작가는 황순원이 유일하다. 소박한 일상이 엿보이는 황순원의 서재 황순원이 마지막까지 작업을 했던 서재를 문학관에 옮겨놓았다. 책상 뒤 병풍은 서예가 평보 서희환(1934∼1998)이 황순원 선생의 작품 제목을 써서 만들었다. 황순원의 문학전집 4권의 글씨도 그가 썼다. 황순원 선생의 제자 황재국(76)이 쓴 미도거진(味道居真)이라는 서예 작품도 눈에 띈다. 이 글에는 ‘도를 맛보게 하고 진실되게 가르쳐주신 것에 감사합니다’란 뜻이 담겨 있는데 스승에게 고희 기념으로 선물한 것이다. 경희대학교에 학생들을 가르치러 갈 때마다 트레이드 마크처럼 입고 다녔던 트렌치코트와 베레모가 서재 왼편에 전시돼 있다. 살아생전에 쓰던 낡은 시계와 면도기 등도 전시돼 있는데 특히 면도기는 1934년부터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절제의 미학은 바로 군더더기 없는 그의 소박한 삶에서 비롯된 것임이 느껴진다. ☞관람 정보 관람시간 오전 9시 30분~오후 5시(11월~2월), 오전 9시 30분~오후 6시(3월~10월) 요금 어른 2000원, 청소년·군경 1500원. 유치원생 무료 주소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수능리 산 74(소나기마을길 24) ※가능한 한 자가용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함.
- 2016-12-30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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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소 나를 돌보기 PART6] 마음공부, 스스로에게 자격증을 주는 마음 다스리기
- 현재 시니어들은 국가와 가정을 위해 몸을 혹사하고, 마음 돌볼 시간조차 없이 열심히 살아온 세대다. 그래서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지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회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상식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다. 이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할 때다. 이번 호에서는 명상의 대가 안동환 코치를 만나봤다. ‘마음공부’를 통해 나를 알고 내 마음을 간수하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다. ‘몸을 느끼고, 맘을 살피고, 숨을 다스리자’는 몸맘숨 명상은 마음을 돌보는 데 최적이라고 한다. 서강대 사학과 76학번이고 올해 61세의 안동환 코치는 나이보다 훨씬 젊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가 활동하는 분야를 생각하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라 할 수도 있다. 그는 대체의학의 심신건강과 코칭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다수의 대기업과 정부기관을 비롯해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서 강의와 수련을 지도해왔다. 그의 대표적인 브랜드는 동서양의 심신수련법과 코칭을 접목한 ‘몸맘숨 명상’. SK그룹의 손길승 전 회장, 최종현 전 회장 등 28년 동안 임직원을 대상으로 심기신 수련(몸맘숨 명상)도 지도해왔다. 안동환 코치가 몸맘숨 명상을 시작하게 된 데에는 ‘아픈’ 사연이 있다. “젊었을 때 편협한 사고 속에서 보내다가 5년 동안 아팠습니다. 간, 눈, 기관지 천식 등 안 아픈 데가 없었어요. 그때가 스물여덟 살 무렵이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때 쓰러졌어요. 전두환 대통령 부류가 보기 싫어 속병이 났었나봐요(웃음).” 안동환 코치는 1956년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그런 태생이 영향을 미쳤을까. 그는 운동권 활동을 열심히 했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기가 막혀서 기가 막힌 병’에 걸렸다. 그러면서 자신이 투쟁가의 기질을 가진 인간은 아님을 깨달았다. “이쪽 진영의 신념으로만 세상을 재단하고 행동으로 옳기려니 힘이 들었어요. 평소 측은지심이 많은데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정의로운 성향이어서 전투적이고 투쟁적인 사고를 흡수하기엔 벅차고 힘들었나봅니다. 그것이 몸에 영향을 끼쳤고요.” 고통스러웠던 젊은 시절, 몸맘숨 명상을 통해 극복 그가 쓰러진 곳은 도망 다니다가 숨어 들어간 시골 외삼촌댁이었다. “얼마 동안 기절해 있었는지 몰랐어요. 1분인지 한 시간인지… 일어났는데 기운이 없는 거예요. 걷지도 못하고 눈도 확 나빠지고 변비와 설사 증세가 한꺼번에 나타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쓰러질 만큼 몸이 힘들었죠. 그렇게 무기력증이 심해지고 기가 막힌 병들에 의해 심신이 망가져갔죠.”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마음의 병도 점점 깊어갔다. “동료들은 잡혀 들어가 있는데 나는 안 잡히고… 죽지 못해 살았지.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허리까지 망가졌어요. 오래 서 있지도 못하고 누워 있어도 아파서 잠도 안 오고. 그런데 양의학 병원에 가니 간수치도 정상이고 소변검사를 해도 문제가 없었어요. 내시경 검사를 해도 원인이 발견 안 되고.” 한의원에 가도 딱히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간경화다 뭐다 얘기만 많았고 나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5년 동안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보며 투병을 했다. 그러다가 단전, 기공을 접하게 됐고 그때부터 급속하게 몸이 나아졌다. 기를 터득하면서 안경도 벗게 됐고 허리도 아프지 않게 됐다. 고집 센 마음을 유연한 마음으로 돌리는 게 마음수련 그는 아픈 와중에 역사 교사로 일했다. 한 시간 수업하고 한 시간 양호실에서 보내야 하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그러다 몸맘숨을 접하고 이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은 후 교사를 그만두고 지도자가 되어 3년간 보급활동을 하면서 SK그룹과 만나게 됐다. 그는 SK그룹의 손길승 전 회장, 최종현 전 회장의 마음훈련 코치를 도맡아 했다. “나이가 들어 노화로 몸이 망가지기도 하지만, 몸을 다스리는 건 마음입니다. 마음을 잘 다스려야 몸도 잘 다스릴 수 있어요.” 그는 몸과 상관없이 나이가 들면 마음도 늙어간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마음이 늙어갈 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귀띔해준다. 첫 번째 부류는 고집이 세지는 사람들이다. 통계로 보면 상당수의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고집이 세지면서 고정관념이 강해진다. 마음이 점점 굳어지는 것이다. 두 번째 부류는 첫 번째 부류와 반대로 유연해지는 사람들이다. “살다 보니 이쪽 얘기도 맞고 저쪽 얘기도 맞다는 걸 깨닫고 유연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수련은 고집이 세지는 마음을 유연한 마음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존경받으며 잘 늙어갈 수 있어요.” 그러나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왜 그런 걸까? “마음공부 한다고 자격증 주는 거 아니잖아요? ‘마음이 다스려지는 거냐? 그냥 이렇게 사는 거지’ 하죠. 전부 돈 되는 공부만 하고, 몸 관리만 하고. 마음관리는 신경도 안 쓰죠. 그나마 마음공부 한다는 사람들도 종교단체에나 가서 하죠.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몸과 마음을 형식적으로 관리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교회에 다니지만 종교로 마음공부를 하라는 말은 못 하겠어요. 종교를 뛰어넘는 마음공부를 해야 해요.” 그는 마음수련에서 호흡을 중시한다. “호흡하는 것이 곧 마음관리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만들면 그는 숨이 거칠어지겠죠. 그런데 중환자실에 가보면 환자들 숨이 거칩니다. 즉 몸이 나빠도, 마음에 스트레스를 받아도 숨이 거칠어진다는 거죠. 그러니까 숨을 다스리면 몸과 마음을 동시에 다스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거죠.” 그는 마음이 거칠어진 사람들의 몸을 살펴보면 비틀려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자세만 바르게 해도 신경의 흐름이 달라져 마음이 평정을 얻는다는 주장이다. 그가 말하는 숨 호흡법은 어떻게 이뤄지는지 들어보자. “우선 자세를 바르게 한 다음에 배꼽 밑 아랫배에 의식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시면서 풍선처럼 배를 부풀려야 해요. 그다음엔 숨을 내쉬면서 풍선에 바람을 뺍니다. 그러면서 배꼽 밑 아랫배에서 무슨 냄새가 나나, 무슨 소리가 들리나, 어떤 일이 벌어지나 집중하면서 심(깊게), 장(크게), 세(가늘게), 균(균등하게) 하는 거죠. 배꼽에 마음을 놓고 보는 겁니다.” 시니어의 위기, 마음을 다스려야 해결된다 처음부터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몸이 아파서 마음만이라도 편안해지려고 마음공부를 시작한다. “젊을 때는 격렬한 운동을 통해 몸과 마음의 스트레스를 풀지만 점점 몸이 늙어지면 그렇게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나이가 들면 동적인 방법에서 정적인 방법으로 몸과 마음을 관리해줘야 합니다. SK그룹에서 제가 강의를 할 때 마흔 살 이상 임원진들에게 이 방법을 추천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수련은 결코 쉽지 않다고 말한다. “마음수련은 정적이고 재미도 없고 지루해서 모두들 실천하기 어려워하죠. 하지만 이 방법은 사람다워지려고 하는 것이지 무슨 테크닉이 아니에요. 일단 맛을 봐야지요, 첫 숟갈에 배부를 순 없어요. 마음수련은 스스로에게 일종의 자격증을 주는 일과 같습니다.” 퇴직 후 위기에 빠지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감도 떨어지고 ‘내가 왜 잘렸지?’ 하며 자책하는 마음이 심해지기도 한다. 아내와 딸이 뭐라고 툴툴대기라도 하면 ‘내가 월급 안 갖다 줘서 저러나’ 하는 생각에 화가 나는 날도 있다. 안 코치는 그럴수록 마음을 잘 다스려야 가정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종현 전 회장이 폐암으로 세상을 떴는데 몸맘숨 명상은 잘 하셨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경제계의 수장으로 최 회장님이 겪은 스트레스를 감안했을 때, 심신수련을 하셨기에 그나마 육십에 돌아가시지 않으시고 칠십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삶과 죽음에 결코 연연해하시지 않았고 책을 쓰시다가 죽음을 평화롭게 맞이하셨습니다.”
- 2016-12-12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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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의 맛] 겨울철 건강 챙기는 따끈한 산약초 샤브샤브
- 찬바람 부는 겨울이면 뜨끈뜨끈한 국물이 떠오른다. 특히 모임이 잦은 연말에는 함께 즐기기 좋은 샤브샤브가 제격이다. 고기와 함께 채소와 버섯 등을 풍부하게 먹을 수 있어 부담 없이 즐긴다는 것도 매력. 여기에 우리 몸에 좋은 산약초까지 곁들인다면 어떨까? 산약초 샤브샤브 맛집 ‘솔내음’을 소개한다.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서대산 기운을 가득 담은 자연 한 상 충청남도 최고봉인 서대산(西臺山) 아래 자리 잡은 ‘솔내음’ 입구에는 그 이름처럼 커다란 소나무가 우거져 솔향기가 솔솔 번지는 듯하다. 도심과 떨어져 있어 한적하고 여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금산군에서 지정한 제1호 금산약초명품전문음식점으로 몸에 좋고 맛도 좋은 산약초 요리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어 멀리서 찾아오는 단골도 많다. 매일 사용하는 식재료는 그 전날 서대산 고산지대(700m)에서 직접 재배한 친환경 약초들을 주인장이 직접 채집해 마련한다. 산마늘, 부지깽이, 두메부추, 오가피 순, 당귀, 곰취, 삼채 등 다양한 산약초가 계절마다 조금씩 다르게 올라온다. 싱싱한 재료와 함께 직접 담근 매실 효소와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은 요리의 맛을 더해준다. 산약초샤브샤브(1인분 2만원)는 8가지 내외의 산약초와 질 좋은 한우, 백만송이·황금송이 등 다양한 버섯을 즐길 수 있다. 약초로 맛을 낸 육수에 갖가지 재료를 취향에 맞게 넣어가며 천천히 음미한다. 날것으로 먹으면 쌉쌀한 약초들이 육수에 살짝 데워지면 한결 부드럽고 달큰한 맛을 낸다. 육수 또한 각각의 재료가 내뿜는 맛을 고루 품어 시간이 지날수록 뒷맛이 깊고 진해진다. 데친 산약초와 버섯, 고기 등은 특제 소스에 찍어 먹거나 산약초 장아찌와 곁들여 맛볼 것을 추천한다. 두메부추·명이·오가피 장아찌와 제철 약초와 나물로 만든 기본 반찬이 입맛을 돋운다. 샤브샤브 재료를 다 먹고 나면 산부추칼국수 사리를 넣어 끓인다. 일반 면과 다르게 산부추즙을 넣어 반죽해 진한 녹색을 띤다. 샤브샤브만으로 부족하다면 가죽전(1만원)이나 가죽비빔밥(1만원)을 곁들여보자. ‘웬 가죽인가?’라는 생각에 의아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용하는 가죽은 우리가 떠올리는 동물의 껍질인 아닌, 참죽나무의 잎이다. 솔내음이 있는 금산군의 제사상에 빠지지 않고 올라간다는 가죽은 독을 제거하고 염증을 없애는 효과가 있다. 가죽을 우린 물로 밥을 짓고, 가죽 튀김과 가죽 가루를 넣어 만든 고추장이 올라간 가죽비빔밥은 금산약초 명품음식 중 하나다. 가죽과 더불어 이곳의 주요 산약초로 꼽히는 두메부추는 일반 부추보다 잎이 두껍고 끝이 둥그스름한 것이 특징이다. 날것 그대로의 맛은 알싸하고 달달한데, 두툼한 부분을 잘라 잡아당기면 미끌미끌한 진액이 늘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뮤신 성분이 다량 함유돼 있기 때문인데, 이외에도 사포닌과 비타민 등이 풍부해 위와 신장기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아울러 어혈을 없애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성질이 있어 겨울철에 즐겨 먹으면 좋은 산약초다. 솔내음에 가면 꼭 찾아봐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서대산 일부를 돌아볼 수 있는 ‘모노레일’이다. 가게에서 5분 남짓 거리에 있는 모노레일은 주인장이 전문가와 함께 직접 고안한 것으로 약초를 채집하러 갈 때 이용한다. 손님에게도 개방한다고 하니 원한다면 모노레일을 타고 산약초를 구경할 수 있다(1인 1만원). 안전하면서도 볼거리가 있는 코스로 짜여 있어 식사 후 재미 삼아 휴식 삼아 즐기기 좋다. 주인장은 “직접 모노레일을 타고 돌아본 자연산 약초를 식탁 위에서 만나는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한 서비스”라고 설명했다. 모노레일을 타고 나면 인근 서대산 약용자연휴양림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가는 길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홍골1길 142
- 2016-12-06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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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 변호사의 법률 가이드] 가정 포기남도 이혼 청구할 수 있나?
- 사례> A는 B와 1968년 초부터 동거하다가 1971년 12월 15일 혼인신고를 마친 법률상 부부로, 둘 사이에 자녀 C를 두었다. A는 B와 서울에서 혼인생활을 하던 중 1981년경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곳으로 이주하여 B 및 C와 함께 생활하다가 1987년경 스리랑카로 이주하여 건설업체 생산업체 등을 운영하였다. A는 1995년 3월경 여자 문제로 부부싸움을 한 후 집을 나가 연락을 끊고 스리랑카에서 알고 지내던 노르웨이 여성과 스웨덴에서 동거를 시작하였다. B는 A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자 1995년 6월경 A가 운영하던 사업체들을 정리한 후 귀국하였다. 그 후 A는 귀국하였으나 B의 연락을 피하였고, 2006년경 노르웨이 여성이 사망할 때까지 스리랑카에서 동거하며 생활하였다. A와 B는 A가 최초 가출한 이후 자녀 C의 결혼식장 등에서 잠깐 만났을 뿐 거의 왕래를 하지 않고 16년 넘게 서로 떨어져 별개로 생활을 영위해왔다. A는 자녀 C가 결혼할 때 상당한 돈을 지원하였다. B는 귀국한 이후 시댁 식구들과 연락하거나 시댁을 방문한 적이 없었고, 투병 중인 시아버지를 문병하거나 시아버지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도 없었으며, 자녀 C도 거의 왕래가 없었다. B는 A와 혼인생활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고, 혼인생활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한 상태다. A는 B를 상대로 이혼청구를 하였다. A의 이혼 청구는 인용될까. 혼인생활의 파탄에 주된 책임이 있는 배우자는 원칙적으로 그 파탄을 사유로 하여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는 것이 민법의 기본적인 태도이나 예외적으로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허용할 수 있다. 위의 사례에서는 장기간의 별거 및 혼인 파탄에 관하여는 다른 여자와 장기간 동거한 A에게 주된 책임이 있으나 자녀에 대해서는 최대한 배려를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위의 사례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B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A가 가출하여 다른 여자와 동거하였지만, B가 시댁과 따로 생활하면서 B는 물론 자녀 C의 시댁과의 유대관계도 사실상 단절되었다. 또한 B가 그 유대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거나 A로 하여금 가정에 복귀할 수 있도록 갈등원인을 제거하고 관계를 복원하기 위한 시도를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위와 같이 혼인 실체가 완전히 해소되는 과정에서 피고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 보기도 어려우므로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에 대한 인용 가능성을 신중하게 고려할 수 있다.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예외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지를 판단할 때는, 유책배우자의 책임의 양태·정도, 상대방 배우자의 혼인 계속의사 및 유책배우자에 대한 감정, 당사자의 연령, 혼인생활의 기간과 혼인 후의 구체적인 생활관계, 별거기간, 부부간의 별거 후에 형성된 생활관계, 혼인생활의 파탄 후 여러 사정의 변경 여부, 이혼이 인정될 경우의 상대방 배우자의 정신적·사회적·경제적 상태와 생활보장의 정도, 미성년 자녀의 양육·교육·복지의 상황, 그 밖의 혼인관계의 여러 사정을 두루 고려하여야 한다. 위 사례의 경우 대법원은 유책배우자의 이혼 청구를 예외적으로 인정하였다. 따라서 A의 이혼 청구는 인용된다.
- 2016-11-2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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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공감] 영화 <할머니의 먼 집> 관객과의 대화
- 어느 날 갑자기 화순(전라남도)에서 사는 어머니가 자살을 시도했다. 아흔 넘은 노모의 충격적인 행위는 다큐멘터리 영화 의 모티브가 됐다. 이승을 떠나고 싶은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는 딸, 아직은 할머니와 헤어질 때가 아니라는 손녀를 중심으로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세대 간의 입장 차이를 조명한 . 관객과의 대화 현장을 찾아 영화에 담긴 이야기들을 들어봤다. 장소 한국영상자료원 일시 2016년 9월 27일 감독 이소현 진행 맹수진(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맹수진(이하 진행)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슬픔보다는 감동이 전해지는 영화인데 현재 할머니의 건강상태는 어떠신가요? 이소현(이하 감독) 올해 아흔여섯 살이십니다. 건강은 영화에서보다 더 안 좋으시고요. 죽는다는 말은 여전히 계속하고 계셔요. 진행 따님이 영화 찍는다고 할 때 뭐라 하셨나요? 장춘옥(이하 어머니) 맨날 와서 찍는데 도대체 뭘 찍느냐고 물어봤어요. 어느 날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봤는데 내가 악역 중에 악역이더라고요(웃음). 뭘 이런 것을 찍느냐고 했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좀 빼달라고 딸아이한테 부탁했는데 잘 안 됐어요. 진행 이 영화의 검열관이셨군요? 어머니 죽고 싶은 엄마 마음을 이해하니까요. 물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를 원하는 건 불효막심이죠. 그런데 지금도 어머니가 어서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진행 감독님은 어머니와 다른 의견이신 거죠? 감독 제가 이 영화에서 표현하고 싶었던 부분도 그 지점이에요. 할머니는 자신이 빨리 돌아가시기를 원하고, 엄마도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계셔요. 저는 할머니가 오래오래 살아계셨으면 하고요. 현상학적으로는 다르게 표현됐지만 너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각자의 마음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저 또한 어머니를 설득했다고 생각해요. 진행 그래도 어머니는 못마땅한 부분이 있으실 거 같은데요. 나름 편집자 역할을 하신 거 같은데 어떤 부분을 뺐고 또 어떤 부분을 영화에서 살렸나요? 어머니 우선 어머니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내용을 뺐으면 했는데 빼지 않았더라고요.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제가 말하는 내용이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니 빼면 안 될 거 같더라고요. 관객 질문 할머니께서 자살을 결심한 이유는 뭔가요? 감독 영화 초반 제가 할머니께 물어봤을 때 “성가신께”라고 대답했어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어요. 같이 생활하면서 느낀 건데 할머니는 삶의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할머니에게는 살아 있는 친구가 얼마 남지 않으셨고,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본인 손으로 손자·손녀 13명을 다 키우셨어요. 이젠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끼신 것 같아요. 오늘 아니면 내일이라는 죽음의 거리가 손녀인 저와는 아주 다른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부분에 있어서 이런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능동적인 선택을 하신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머니 제 생각은 큰아들인 저희 오빠가 위암 수술을 해서 엄마 음식을 먹을 수 없었어요. 그런데 어머니 낙이 큰아들 밥해주는 것이었어요. 아들이 당신이 해준 밥을 먹는 것이 보람이었고 살아가는 이유였죠. 당신 음식을 못 먹고 병원 음식이나 주로 죽을 먹었는데 아마 거기서도 재미를 전혀 못 느끼셨던 거 같아요. 할머니가 어서 빨리 돌아가셨으면 한다 했을 때 어머니의 진짜 심정이 궁금합니다. 어머니 우선 저희 집을 보면, 위암인데 술밖에 줄 수 없었던 오빠가 영화를 찍던 도중에 먼저 갔잖아요. 둘째 오빠도 지금 건강이 좋지 않고요. 어머니는 지금 요양원에 혼자 외롭게 계셔요. 저는 적어도 어머니가 자식들 더 가기 전에 가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독님은 할머님이 어떻게 돌아가셨으면 하나요? 감독 저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할머니를 만나러 가요. 마음 같아서는 제가 곁에 있을 때 돌아가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서울에 있을 때 일이 생기는 건 상상하기도 싫어요. 영화를 보면서 어머니의 마음이 이해가 됐습니다. 사랑해서 그랬다고 생각해요. 혹시 할머니가 돌아가시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의 이기심은 아닐까요? 감독 제가 너무 이기적이라서 그런지 아직은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한테 묻고 싶은데요, 사람이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다시는 그 사람을 못 본다는 슬픔 때문인데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어머니 내가 보고 싶은 것보다도 우리 어머니가 지금 사는 것이 너무 괴로우니까요. 인과응보의 원리에 의하면 여태까지 좋은 일을 하고 사셨기 때문에 다음 생에는 아주 좋게 태어날 것이라는 기대, 그리고 그렇게 믿으면서 어머니를 보고 싶겠지만 그런 것에 연연해하고 싶지는 않아요. 좋은 곳으로 가셔서 다시 좋은 삶으로 태어나길 바라요. 감독 할머니께서 자살 시도를 하시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어요. 나중에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없으니 할머니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을 더 늦기 전에 기록해두자, 어쩌면 저를 위한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나중에 취업준비 한다고 나갔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면 얼마나 후회될까, 그래서 계시는 동안 많이 보고 시간 할애하면서 제 이기심 채우고 있습니다. 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있다면요? 감독 문학도인 제 친구가 지어줬습니다. 물리적으로 할머니가 사는 곳이 제가 사는 서울과 많이 멀기도 하죠. 또 이 영화는 삶이라는 공간의 집에서 죽음이라는 공간인 또 다른 집, 즉 무덤으로 가는 여정의 한순간을 기록하는 영화가 될 것 같다고 해서 지어진 제목입니다.
- 2016-11-14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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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관 답사기①]박경리 문학관 ‘박경리’라는 거목의 풍경을 찾아
- 글 박원식 소설가 지리산 자락,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산야에 살포시 내려앉은 9월의 소슬한 가을빛. 한낮이지만 핼쑥한 가을볕을 받은 능선도, 숲도, 나무도 덩달아 수척하다. 연신 허리를 틀며 휘어지는 언덕길 양편엔 상점이 즐비하다. 사람들의 발길도 연달아 이어진다. 소설가 박경리(1926~2008)의 대하소설 의 무대이자 드라마 촬영장인 ‘최참판댁’을 관람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다. 언덕 끝자락 외진 곳엔 ‘박경리문학관’이 있다. ‘최참판댁’ 일대엔 들고나는 사람들로 바글거리지만, 바로 옆에 있는 문학관은 찾아드는 이가 드물어 고요하다. 문화보다는 관광을, 문학보다는 눈요기를 포식하는 일로 만족을 구하는 항간의 경향이 여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박경리는 생시에 를 기념하는 공간인 ‘최참판댁’을 조성하는 일을 당최 마뜩치 않아했다. 죄스럽기까지 하다고 토로했다. ‘최참판댁’이 필시 요란한 관광상품으로 쓰일 것을 미리 내다보았으며, 가뜩이나 넘쳐나는 ‘관광지’ 홍수에 또 하나의 관광지를 보태는 게 달갑지 않았으며, 결국은 지리산에게 누를 끼치는 일이라 보았다. 세상과 세태를 읽는 박경리의 냉철한 눈과 광활한 가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경리문학관’은 하동군이 올해 5월 개관했다. 이전에 ‘전통농업문화전시관’으로 쓰였던 한옥 건물을 개조해 문학관을 꾸몄다. 건물의 형용은 덤덤하거나 밋밋해서 슬쩍 섭섭하다. 그러나 내부에선 박경리의 혼이 스멀거린다. 300㎡쯤 되는 공간의 벽면과 진열장에 작가의 개인사와 창작열과 일상을 더듬을 수 있는 갖가지 책자와 초상화, 사진, 영상물 등이 전시되었다. 다분히 정형화된 구색이자 구성이지만, 박경리가 생시에 사용하거나 아꼈던 유물 41점이 흥미롭다. 이 소중한 유물들은 박경리의 딸이자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인 김영주에 의해 무상 대여 받은 것들이다. 박경리의 는 자그마치 25년이라는 긴 집필기간을 통해 5부 16권으로 완간한 걸작이다. 그는 오직 칩거한 채 에 매달린 장구한 시간을 ‘빙벽에 걸린 자유, 주술에 걸린 죄인의 세월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암 수술을 받고 퇴원한 날에도 가슴에 붕대를 감고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썼다. 탁발한 재능의 소유자이기 이전에 그는, 유례가 드문 독종이자 강골이었다. 유리 진열장 안에 놓인, 방울방울 피를 뿜듯이 써내려갔을 육필원고 뭉텅이들이 숙연한 감동을 자아낸다. 글씨체에선 활달한 기운이 생동한다. 늘 곁에 두고 수시로 뒤져 알토란같은 토속어를 건져 올렸을 게 분명한 국어사전은 낡아 너덜거린다. 소설이란 여하튼 모국어와의 내밀하고도 치열한 통정(通情)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유품이다. 특유의 도회적이고 지적인 용모를 한껏 돋보이게 하는 데에 이바지했을 원피스와 재킷, 일상의 실용적인 동향을 짐작하게 하는 싱거 미싱, 안경과 만년필과 가죽장갑, 도자기와 그림부채 같은 유물들이 눈길을 오래 붙잡는다. 박경리의 끽연 습성은 생과 함께 유구하게 지속됐는데, 진열장 안에 덩그마니 놓인 저 아리랑 담배와 재떨이와 라이터를 무시로 애용했던 사람은 지금 우주의 어느 푸른 공간에 거주하는가. 빛바래고 균열이 간 흑백사진 하나에 다시 눈길이 오래 머문다. 박경리의 소녀 적 사진이다. 자못 그윽한 눈매, 고집스레 두툼한 볼, 헌칠한 이마…. 자존감과 내향성이 도드라지는 모습이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그는 진주여고에서 소녀기를 보냈는데 유별난 독서광이었다. 책에 푹 빠져 지냈던 소녀 박경리는 마치 예정된 길로 접어들듯이 문학이라는 꽃길, 혹은 가시밭길로 자연스럽게 걸어들어갔으며, 게걸스러운 독서를 통해 얻은 상상력으로 소설의 산정(山頂)에 올랐다. 많은 소설가들이 실증과 조사를 중시해서 작품을 쓰지만, 박경리는 붙박이 장롱처럼 칩거한 채 매진한 독서를 통한 상상력이라는 폭약을 창작의 화톳불로 삼았다. “내 소설의 밑천은 오로지 상상력이오!” 그는 그리 거듭 말했다. 해외여행이라는 걸 거의 하지 않았던 그는, 놀랍게도 의 배경지인 이곳 하동 악양 땅조차 작품을 완간한 뒤에야 처음으로 밟았다는 게 아닌가. ‘박경리문학관’은 박경리라는 거목을 하나의 풍경과 세계로 새삼 눈여겨 바라보게 하는 재료를 제공한다. 박경리는 자신을 추켜세우는 기념관 명색을 극구 꺼렸다. 그러나 그를 기리고 그리는 사람들에겐 흡족한 선물일 수밖에. 박경리문학관 관람 정보 주소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길 79 관람시간 09:00~18:30 관람요금 성인 2000원 / 청소년·군인 1500원 / 어린이 1000원 ※박경리문학관은 하동 최참판댁 안에 있습니다.
- 2016-11-0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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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젊게 사는 비법
- 보통 나이 들면 욕심부터 버려야 한다는 말이 있다. 부질없는 자존심이나 과거의 연공서열에 대한 자부심도 잊으라 한다. 그러나 정신건강 멘토인 이시형 박사님은 과거 명함을 지켜야 20년 젊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은퇴 후 남성을 불행하게 만드는 건 낮은 자존감이라는 이야기다. 자신이 가장 잘해왔던 과거 명함을 지켜야 자존감 높고 활력 넘치는 인생 후반전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을 위한 배려로 봉사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나는 물론 남도 행복해지는 친절한 행동을 하고 만나는 사람 누구나 행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옥시토신과 세로토닌이 분비되고 미주신경이 활성화되어 젊어지고 건강해진다고 한다. 잡지를 읽다가 건강 멘토 몇 분이 인생시계를 되돌려 20년 젊게 사는 비법을 공개하는 글을 보았다. 누구라도 젊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비법이 있다니 어떻게 하면 될까? 멘토들이 말하는 대로 따라 하면 필자도 20년 젊게 살 수 있을지 열심히 기사를 읽어보았다. 80대에는 남자나 여자나 똑같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이는 의학적으로 맞는 말이라 한다. 이미 여성호르몬, 남성호르몬 분비가 줄어 남자나 여자나 별 차이가 없게 되지만 100세 시대에 20년 젊게 살려면 남성은 남자답고 여성은 여성다워야 하며 비록 호르몬은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설렘 호르몬인 EPA 호르몬은 여전하다는 것이다. 50세부터 인생 후반전이라 하면 100세 시대에 80대는 제2의 중년기이자 전성기가 되니 인생의 멋을 아는 여유 있는 제2의 중년기를 즐기면 되겠다. 배우자도 좋고 친구도 좋으니 우아한 차 한 잔의 시간에 설레는 마음이 들면 된다고 한다. 또 다른 조언으로 자신만의 플라시보(위약효과)를 가지라 한다. 건강하고 젊게 살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몸은 점점 나이 들어가고 있어서 그런 확신을 가지기가 쉽지는 않으니 어떻게 할까? 그 비결은 ‘믿는 구석’에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운동이, 또 다른 사람에게는 약 종류가 될 수도 있는데 “난 헬스를 열심히 하고 있으니 젊을 거야”라거나 “나는 좋은 음식을 먹고 있으니 건강할 거야”라는 신념이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플라시보 효과다. 젊을 때는 좋은 음식을 먹거나 운동을 해서 더 건강하고 젊어질 수가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어떤 노력으로도 더 젊어지거나 건강해지기는 어려우니 더 나빠지지 않게 유지하는 게 좋다. 그러려면 노화의 주범인 발생기 산소 생성을 막아야 하는데 발생기 산소는 혈관이든 장기이든 몸속 어느 곳에서나 발생해 노화를 일으킨다. 이를 덜 발생시키거나 생긴 발생기 산소를 빨리 없애는 것이 노화 방지의 비결인데 이미 생긴 발생기 산소를 없애려고 비타민을 복용하거나 채식을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발생기 산소를 생기지 않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할 거다. 발생기 산소를 생기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심리적 안정을 유지하는 것인데 “나는 젊다, 나는 건강하다”라는 확신으로 얻는 마음의 안정이 중요하다고 한다. 운동이나 소식, 채식, 절주와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운동을 하고 있으니 괜찮을 거야”라거나 건강검진을 꾸준히 받는 사람이라면 “난 건강검진을 잘 받고 있으니 괜찮을 거야”라고 믿게 되는 플라시보가 될 만한 것을 찾아보는 게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이 해볼 수 있는 방법이니 잘 받아들여서 행동하면 20년 젊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의 안정을 유지해서 노화의 주범인 발생기 산소를 없애고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한 말과 행동으로 옥시토신과 세로토닌을 분비시켜 우리 모두 더 젊고 건강하게 살아보자.
- 2016-10-1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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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높이에 맞는 표현에 대하여
- 지난 남도 여행에서 민박집 할머니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같은 한국 사람끼리 이렇게 말이 안 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는 귀도 잘 안 들리고 전라도 토종 사투리를 쓰니 더 못 알아들었다. 내게도 잘못이 있다. 영감이 물려준 초가 집 하나로 먹고 사는 민박인데 내가 “펜션”이냐고 물으니 못 알아들은 것이다. “내비게이션으로 찾아 가려는데 주소를 불러 달라”고 했더니 역시 못 알아들었다. 내비게이션을 “내비”라고 한데다 자동차 운전에 필요한 내비게이션과는 전혀 관계없는 80대 할머니이니 당연히 무슨 소리인지 몰랐을 것이다. 낙안읍성 근처에는 펜션이라고는 없고 대부분 민박집이니 “펜션”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더라도 외래어의 경우 상대방을 봐서 써야 한다. 작년에 케이블 TV 방송국과 휴먼다큐멘터리 작업을 보름 간 한 적이 있다. 내 일상 생활을 따라다니며 찍어서 방송에 내보내는 작업이다. 육중한 카메라를 메고 담당 PD와 여기저기 다니며 촬영을 해야 했다. 가는 것마다 “휴먼다큐 찍는 중인데요” 하며 양해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 못 알아듣고 일단 손사래부터 쳤다. 뭔지 모르니까 거부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해준 말이 “인간 극장 찍는다고 해요”였다. 그 다음부터는 일이 술술 풀렸다. 어느 책에 보니 어떤 사람이 라디오 진행자를 맡았는데 게스트를 모시고 대담을 나누는 형식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게스트마다 각계의 전문가라서 그때마다 그 방면의 공부를 해서 겨우 진행을 했지만, 상대는 이미 그 계통의 전문가이고 본인은 이제 와서 대충 겉만 훑어서 방송을 하려니 죽을 맛이었다는 것이다. 자격도 없는 것 같고 너무나 힘들어서 그만 두려고 하던 중에 마침 일이 생겨 한 주 다른 사람이 그 프로그램 진행을 맡았다는 것이다. 역시 전문가가 나왔는데 진행자도 그 방면의 전문가라서 대담은 매끄럽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청자 평은 자기네들끼리는 잘 아는 내용이니까 대화가 잘 된 것 같지만 시청자들은 너무 어려워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진행자는 일반 시청자들의 눈높이에서 방송을 진행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잘 모르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블로그나 카페에 올리는 글도 마찬가지이다. 나 혼자 보는 글이라면 내 마음대로 쓰면 된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보고 읽는다. 그렇다면 평소 말하는 것처럼 대화체나 구어체가 좋다. 평소 안 쓰던 말을 글에서는 마구 써 놓으면 읽는 사람들이 피곤해 한다. 내가 전국의 유명 댄스 카페에 댄스 칼럼을 쓰면서 호평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글을 쉽게 쓴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댄스 강사들은 몸으로는 잘 하는데 말로는 쉽게 설명을 잘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일부러 어렵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쉽게 설명 잘 하는 사람이 명강사이다. 수필 공부를 하면서 다른 사람의 글을 읽으며 토론하는 모임이 있다. 유명 작가일수록 처음 들어보는 단어가 툭툭 튀어 나온다. 한자 세대라도 잘 모르는 한자로 된 단어가 나올 뿐 아니라 순수 우리말이라며 굳이 안 들어가도 되는 풀이름도 자주 등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래야 할까 하며 의견을 묻는다. 공부하는 우리들은 한결같이 평소 안 쓰던 단어에 대하여 성토한다.
- 2016-10-18 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