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좀 안다는 사람에게 전혜성(全惠星·88)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녀 자신이 24년간 예일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4남 2녀를 모두 명문대에 입학시킴으로써 자녀교육의 전설적인 대가로 일찌감치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때 화제가 됐던 그녀의 자식들은 지금 교수 또는 미국 정부 차관보로 지내는 등 사회의 최고 엘리트로서 활동하고 있다. 여전히 교육에 있어 현역 활동을 하고 있고 그 와중에 한국을 찾은 전혜성 박사에게서 특별한 교육철학과 인생의 보람에 대해 들어봤다.
무려 24년 동안 예일대학교 교수를 지낸 전혜성 박사는 그녀 자신의 커리어도 커리어이지만 무엇보다도 자녀교육의 대가로 유명하다. 큰딸 고경신씨는 중앙대 화학과 교수였으며, 장남 경주씨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건후생부 장관을 지냈다. 2남 동주씨는 매사추세츠 주립대 의대 교수이며, 3남 홍주씨는 미국 연방정부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를 지냈다. 차녀인 경은씨도 예일대 법대 교수이며 4남인 정주씨는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야말로 일일이 경력을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미국 이민자 가정이 이뤄낼 수 있는 최고의 엘리트들을 키운 그녀의 자녀교육 철학은 수많은 부모들에게 귀중한 영감이 되었다. 미국 사회에서 그녀는 한국의 위대한 어머니이자 세계적인 사회학자로서 ‘교육의 대모’로 불리며 그녀의 자녀교육법은 오바마 정부의 교육부에 의해 아시아계 미국인 가정교육의 성공사례로 연구됐다.
골든 에이지, 전혜성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
전 박사는 주미대사관 공사를 역임한 남편 고광림 박사(1989년 작고)와 함께 동암문화연구소(ERI)를 설립,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한-미 문화교류에도 큰 역할을 했다. 저서로는
(1972년), (1982년), (1996년), (2006년), (2010년), (2012년)가 있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에 걸쳐 계속 만들어진 책들은 그녀가 자신을 꾸준하게 단련하는 학자임을 우회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녀의 공부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녀가 입주한 실버타운은 미국에서 최고급에 속하는 곳으로 총장급을 비롯한 교수 사회의 지식인층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곳에선 사회에서 은퇴했지만 인생에서는 은퇴하지 않은 시니어들이 살아가고 있다.
“실버타운에 입주했을 때 미국 사회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짐도 풀기 전에 한 할머니가 저에게 한국 문화에 관해 강의해달라고 요청하더군요. 자기가 어시스턴트를 해주겠다고. 알고 보니 헌법 교수였어요.”
그녀가 한국 문화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하니 첫 강의에 34명이 등록했다. 그런데 재미있었던 일은 34명 중 70%는 그녀가 아는 사람이거나 지인 또는 자녀들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실버타운 사람들은 그날 아침 를 읽지 않으면 저녁을 먹으러 나가지 않을 정도로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들이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면 책 한 챕터는 쓸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갸륵한 라이프 스토리가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한국 문화 강의를 요청했던 헌법 교수는 겨울에 나가서 깡통을 집어와요. 그걸 팔아서 번 돈을 기증하기 위해서죠. 항상 남루한 옷만 입고 다니는 그녀가 한번은 화려한 옷을 입었길래 어디서 구했냐고 물어보니 중고장터에서 산 옷이라고 하더군요. 가족의 백그라운드가 하버드대 교수들로 이뤄진 집안의 딸이 청빈을 유지하며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 거죠.”
휘트니 센터라고 불리는 이 실버타운에는 동아리가 19개가 있다. 음식에서부터 강의 커뮤니티 등등. 전 박사는 계속 배우고 누릴 수 있는 삶이 만족스러워 마치 “천당에 온 것 같다”며 실버타운 생활은 기대 이상이라 했다.
“그런데 서울에 왔을 때 실버타운을 가보니 제가 묵고 있는 실버타운과는 너무나도 운영 시스템이 달랐어요. 한국은 사우나와 골프장이 몇 개씩 있지만 호사만 시키는 거지, 사회에 기여를 해서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은 없더군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나이 들었다고 하루하루를 그저 흘려보내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며 미국에는 이처럼 독립적으로 시니어들이 자랑스럽게 삶을 연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고 했다.
열정적이되 지치지 않게
평생을 공부하는 사람답게, 전 박사는 공부를 시작하면서 16세 때부터 마음먹은 것이 있다고 말했다.
“해방 후에 감옥에서 우국지사들이 나와서 정치를 했는데, 정책적인 아이디어가 너무 없었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해서든 한국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싶었죠. 그걸 위해선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서울여자대학교 설립자인 고황경 박사가 여러 가지 활동을 했지만, 결혼을 안 하니 주변에서 인정을 안 하더군요. 그래서 한국에서 인정받으려면 혼인하고 아이를 낳은 후 박사 학위를 가져야겠구나 하고 결심하게 됐어요.”
이화여대 영문과 2학년을 마치고 미국 유학에 나섰고, 22세가 되던 해에 결혼한 그녀는 고광림 박사와 하버드대에서 최초로 한국학 과정을 신설했다. 사회 참여적 인물로서 그녀의 의지는 그만큼 확고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준비되고 예상한 대로 흘러간 것은 아니다. 전 박사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유교사상이 너무 강한 집안이었어요. 고단했고 할 일도 많았고…. 집을 나가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녔죠. 그런데 내가 선택한 것이니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극복했어요. 더구나 내가 명색이 비교문화 사회구조를 연구하는 사람인데 싶었고(웃음).”
부모는 행동과 실천으로 아이를 설득해야
고통스러웠던 결혼생활 끝에, 전 박사는 ‘이런 도전을 주신 것은 하느님이 필시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 라고 인정하게 됐다고 한다.
“바깥의 고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니 스트레스가 사라지더군요. 그리고 사람을 바꾸는 건 어렵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아들을 잘 키워서 며느리들은 편하게 해주자 싶었죠(웃음).”
시간이 흐르면서 예상치 못한 일들도 일어났다.
“아이들은 서양식으로 자랐으니까, 아버지에게 여기가 미국인데 왜 한국식으로 사시냐고 따지는 일도 일어났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난 항상 중간 역할을 하게 됐어요. 나중에 남편이 없을 때 자식들과 함께 지내게 되면 내가 남편 역할을 하기도 했죠.”
전 박사는 본의 아니게 남편 역할을 하게 되는 일이 종종 생기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자녀교육에서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하고 어머니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밸런스였다.
“부모 중 한 사람만이 아이를 키우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려면 닦달하고, 쉬게 하고, 사랑도 하고 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부부 두 사람이 공동 목적이 서면 역할 교환이 잘되더군요.”
대를 이어가는 자녀교육 철학
전 박사는 부모의 역할 모델이 가장 중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간단히 말하면 “공부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같이 공부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녀는 말이나 기계적인 지식의 한계를 알고 있었고 지극히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행동의 중요성을 믿고 있었다.
“말의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말로 하면 23%가 전달되고,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면 100% 전달됩니다. 말보다 행동이 더 중요한 거지요. 자녀교육의 핵심은 부모가 열심히, 성실하게, 그리고 봉사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행동으로 보여줬습니다. 가정 내에서 의사소통이 계속 이뤄질 수 있도록 아침식사를 늘 같이하며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꾸준히 귀 기울였어요. 요즘에는 아이들이 우리가 모르는 걸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 하나하나를 한 명의 성인으로 보고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선 가족 공동의 목적을 세워 그걸 이루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방법이 좋겠죠.”
사실 전 박사의 삶의 저변에도 부모님의 존재가 두텁게 드리워져 있다.
“어머니는 과거부터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리고 아무리 똑똑해도 덕망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죠.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사실 제가 아버지 어머니에게 약속한 걸 성취하려고 평생을 살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그녀 자신도 부모님의 성공적인 자녀 교육의 영향권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녀교육의 철학은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부모가 삶의 목적을 먼저 세워라
미국 최고 대학의 교수이자 여섯 남매의 어머니, 그리고 엄격한 유교 집안의 며느리로 살아야 했던 전 박사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삶에서 ‘일과 가족’은 새의 두 날개와 같다고 말하며 자신이 속한 사회와 가족을 한데 묶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제대로 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좋은 아내, 현명한 엄마라면 사회에 대해 그만큼 알아야 하며 일과 가족 사이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 쉽지 않은 모든 것들을 겪어내면서 어떻게 자신에 대한 힐링을 했는지 물어봤다.
“나는 의식하지 못하고 한 일인데 그 일이 젊은이들에게 큰 도움이 돼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에게 다시 찾아오는 일이 있어요. 정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오죠. 그게 제 자부심을 높여줍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 후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삶이 그녀가 말하는 가치 있는 삶임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삶의 목적이 뚜렷하고, 자식들과 대화할 수 있는 부모가 되면 아이들이 잘된다”고 말했다. 부모가 자식의 삶의 모범이 되면 자연스레 아이들은 따라온다는 것이다.
성공보다는 성취에 목적을 두고 삶의 목적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삶이 정립되면 부모와 아이들 인생 모두는 성공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자식을 잘 키우면 노후가 행복해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다.
장수가 악몽이 되는 노후파산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다양한 사회 지표는 우리 사회에 노후파산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누구나 아름답고 행복한 노년을 꿈꿀 수 있지만 아무나 행복수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녀 교육이든 노후 문제이든 일생을 염두에 두고 계획적으로 삶을 설계해야 한다는 전 박사의 조언이 긴 여운으로 남았다.
서울에 왔을 때 실버타운을 가보니 제가 묵고 있는 실버타운과는 너무나도 운영 시스템이 달랐어요. 한국은 사우나와 골프장이 몇 개씩 있지만 호사만 시키는 거지, 사회에 기여를 해서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은 없더군요
신라호텔 룸에서 만난 백발의 전혜성 박사는 다리만 빼고 다 건강하다고 말한다. 한국과 비교해서 실버타운 생활을 얘기하던 중에 그녀는 “오래 사는 것보다 보람 있게 사는 게 더 중요하다”며 “자녀 교육 못지않게 부모의 노후 대비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초등학교를 사이에 두고 가까이 사는 쌍둥이 손주들과 아침마다 학교에 같이 간다. 엊그제 입학한 것처럼 생각되는데 어느새 2학년이 되었다. 새봄을 맞아 학교는 아이들의 건강을 위하여 ‘아침걷기운동’을 권장하고 있다. 고구려 기병들의 말발굽 먼지처럼 운동장이 온통 뿌옇다.
미세먼지도 없는 화창한 수요일, 손주들이 걷는 날이다. 여느 때처럼 쌍둥이가 운동장을 몇 바퀴 도는 동안 아이들의 책가방, 신발주머니와 과제물 가방을 한아름 들고 교실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몇 학년이세요?” 어느 아이가 물었다.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하였다.
나도 모르게 “나는 7학년”이라고 중얼거렸다. 아이가 다시 “누구를 찾으세요?”고 물었다. 이제야 아까의 질문을 이해하였다. 그 사이 손녀와 손자가 운동장 돌기를 마치고 돌아왔다. 가방을 메고 교실 안으로 뛰어가면서 손을 흔든 모습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오후에 다시 보자”면서 교문을 나섰다.
아내와 함께 날마다 아침에 출근하는 아들과 며느리를 대신하여 가까이 사는 쌍둥이 등하교를 보살피러 간다. 아침 등교가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지난지금은 아이들이 기상, 씻기, 옷차림은 어른처럼 혼자서도 매우 잘한다. 여기까지는 다 자란 것 같아서 매우 행복한 생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학교수업이 끝나는 낮부터는 문제가 달라진다. 방과후 수업과 학원 보내기는 날마다 일정이 들쑥날쑥하여 도통 중심잡기 어렵다. 두 녀석 일정표를 집안 곳곳에 붙여 놓고 스마트폰에 올려서 내 일정표보다 더 열심히 쳐다보아야 하는 과제가 되었다. 집에서 대기하거나 적어도 비상시 즉시 달려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까지만 외출하여야 한다.
왜 ‘7학년’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였을까.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면서 독서량이 엄청 늘고 놀이문화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아진다.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모른다고 하면 대화상대에서 제외된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이에게 거꾸로 질문을 하면 효과가 크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정말 열심히 설명한다. 훗날 엄청 큰 자산이 될 터이다. 하기야 손자에게도 배우라고 하지 않았는가.
오후가 되자 두 녀석이 즐거운 표정으로 집에 들어섰다. 한참 클 때가 되어서인지 손 씻자마자 간식부터 챙긴다. 손녀는 가까운 학원으로 같이 가고, 손주는 버스에 태워서 보낸다. 귀가시각을 아들네와 조율하면 하루해가 저문다. 뜨거운 사랑이 있는 가족만이 할 수 있는 일과임이 분명하다.
과거에는 수치로 여겼던 휴학과 유급을 요사이는 취업절벽 때문에 자청하는 경우가 많은 세상이 되었다. 부족해서만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다. 보다 즐겁고 알찬 대화를 위하여 시니어의 하루는 바빠야 한다. 배우다 보면 어느새 꼼짝 없이 멋쟁이 제7학년 초등학생이 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국민 드라마 의 바르디바른 둘째 아들 용식, 뜨거운 열정과 헌신으로 무대에서 빛나는 베테랑 연극인, 그리고 막말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문화체육부 장관까지. 어느새 올해 67세를 맞이한 유인촌의 이미지는 이렇듯 여러 갈래로 만들어져 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매스컴의 요란한 스포트라이트에서 어느 순간 사라져 연극인으로 돌아간 그는 OBS의 대담 프로그램 MC를 맡아 3년째 드라이빙하고 있다. 광대로서, 그리고 뼛속까지 순간예술인임을 자각한 유인촌과의 만남 뒤로 생각보다 진중한 얘기가 있었다.
유인촌은 자신이 맡은 OBS 의 방향성이 최근의 방송 트렌드와는 다르게 진중한 점이 좋다고 한다. 뭐든지 예능화되는 요즘 TV 프로그램들과 비교하면 그가 과거에 진행자로서 인기를 얻었던 에 가까운 느낌이다.
“요즘 방송은 장점보다는 단점을 드러내고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그래서 이 프로그램만은 정말 좋은 점, 장점, 들어서 감동할 수 있는 점을 중심으로 만드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물론 그렇다 보니 방송이 원하는 자극은 없어요. 그러나 보고 나면 따뜻해져요. 다행히 OBS가 그걸 지켜주고 있습니다. 매주 다른 분을 만나기에 그분들에게 보고 배우는 게 많아요.
1년에 50여 명을 만나니 지금까지 150여 명을 만난 셈이죠.”
그는 기억에 남는 사람이 많지만 특히 이어령 박사,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 김희수 건양대학교 총장을 꼽았다.
“이어령 선생은 첫 방송에 모셨고 개인적으로도 존경하는 분이죠.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은 과거에 김영삼 정부 시절에 교육부 장관을 하셨던 분인데 인생 스토리가 너무 놀라웠어요. 한국전쟁 전에 걸어서 월남한 뒤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시다가 검정고시로 서울대 철학과를 입학한 분이죠. 김희수 건양대학교 총장은 김안과를 만드신 분인데, 지금도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학교에 간다는 얘기를 듣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죽을 때까지 연구할 게 생겼다
유인촌을 의 영원한 둘째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그가 어느새 67세라는 나이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아주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제가 공직에서 나와 다시 연극을 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지금이 전성기다.”
유인촌에게 전성기라는 개념은 철저히 연극인 유인촌으로서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연극에서의 시간은 보통 삶의 시간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영상은 젊은 사람들이 잘할 수 있지만 무대는 달라요. 희곡 작품 자체가 일상이 아니라 어렵거든요. 그런 것들이 소화되고 공감대를 가질 수 있으려면 남자는 40이 넘어야 해요. 그 전에는 아기 같아요. 사실 40대까지는 대학생 역할을 했었어요. 성인 남자의 역할은 40대 후반에서 50대가 되어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이 전성기’라고 얘기한 거죠.”
그것이 4년 전 얘기. 지금 유인촌은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지금은 개인으로서 하려 했던 일은 거의 다 했다고 생각해요. 그건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동안 했던 걸 모두 지우고 연기자로서 새로운 뭔가를 다시 시작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연기 외의 다른 사업이라든지 기관장이라든지 말고요. 순수하게 내가 배우로 뭘 한다고 하면 그동안 쭉 쌓아왔던 걸로는 다 했어요. 그래서 공부를 다시 하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배우 훈련입니다. 발성부터 다시 공부하고 있어요.”
연극인 유인촌이 발성부터 다시 배운다? 납득이 되지 않는 얘기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동안 해왔던 작업이 겉으로만 보였던 거라면 이제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들에 집중하고 싶어요. 특히 저는 우리만의 전통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양복을 입고 있어도 한국 사람이 갖고 있는 전통의 멋이나 깊이를 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이제부터 그런 연구를 시작하고 정리해 죽을 때까지 할 계획입니다. 수련하는 느낌으로.”
아이들에게 자아를 찾는 기회 주고파
근본으로 돌아가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는 그는 올해부터 의미와 가치에 중점을 둔 계획을 여러 가지 세우고 있다.
“사실 극장도 내가 퇴직하고 나와서 대관료를 만원 받으며 운영했었어요. 젊은 친구들 하라고. 그걸 3년을 했네요. 올해는 청소년, 특히 소년원과 쉼터에 있는 아이들이나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자아를 찾는 기회를 주기 위해 자전거 여행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어요. 여름방학 기간에 4박
5일 동안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라이딩 투어를 준비하고 있죠.”
그러고 보니 그는 소문난 자전거 마니아이기도 하다. 그와 자전거는 어떻게 인연이 맺어진 걸까?
“오래전부터 탔죠. 그런데 옛날에는 그냥 설렁설렁 타다가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한 건 한 15년쯤? 늘 탔지만 취미 내지는 생활처럼 된 건 그 정도 됐죠. 저는 배우를 했잖아요. 연기를 하기 위해 모든 기능적인 걸 다 배워야 했어요. 수영, 자전거, 바이크, 펜싱, 검도, 스쿠버다이빙, 윈드서핑…. 다 연기할 때 필요한 것들이었죠. 그러다 보니 적당히 한 게 아니라 업계에서 알아볼 정도로 했죠. 승마도 장애물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지금은 다는 못하고 걷기, 자전거, 수영, 스키, 스노보드 정도만 하고 있죠.”
그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단다. 취미도 운동도 생활 속에 깊숙이 배어 있다. 특히 걷기는 그가 여전히 좋아하면서 계속할 수 있는 취미이자 운동이다. 670km를 걸어서 종단한 경험이 있는 그는 아직도 웬만하면 걸어 다닌다. 장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삶의 보람을 일깨운 마지막 햄릿
연극인으로서의 성공, 정치인으로서의 논란. ‘개인적으로 할 건 다했다’고 말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유인촌의 삶의 그래프는 급격하다. 그가 ‘내가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였을까?
“작년에 이해랑연극상 수상자들과 함께
공연을 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나는 햄릿을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60대 중반 넘어선 사람에게 왕자 역할 하라고 하면 욕먹는다고. 그런데 이해랑연극상 받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이 없었어요. 윤석화가 전체에서 가장 막내였고 내가 그다음이었으니. 그래서 결국 내가 햄릿 역할을 하게 됐는데, 굉장히 책임감이 느껴졌죠. 다행히 유종의 미를 거뒀어요. 어떻게 보면 그게 저의 햄릿 역할의 마지막이었습니다. 내 연기 인생의 전반부가 으로 정리가 됐어요. 그러면서 연기하고 연극하길 참 잘했다고 처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계산하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정의했다. 물질적 계산보다는 명분과 충분한 목적과 필요성이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 그가 세운 극장도 처음에는 한 달에 2500만원씩 빠져나갔는데 그때마다 다른 곳에서 일한 돈으로 메꾸면서 운영했다고 한다. 꼭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저질렀다는 그의 말에서 평소의 신념과 의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내 일에 더 집중하려고 해요. 주변에 여러 가지가 연관이 되어 있는데 정리하고 있어요. 제게 섭섭한 것도 있고 아쉬운 것도 있겠지만 좀 좁히려고요. 이제 와 일을 벌이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해요. 연극도 1년이나 2년씩 구상하고 준비해서 하려고 해요. 작년에는 의도치 않게 연극 일이 많았지만, 올해는 쉬면서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는 책을 써볼까 합니다.”
나이는 장애가 아니다
“젊다는 것은 젊어서 좋은 거예요. 그것 외에는 크게 장점이 없어요. 그러니까 늙는다는 것은 핸디캡이 아니에요.”
그는 ‘어차피 늙는 건데 (인생을) 잘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침 그가 주연과 연출을 맡았던 연극 중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를 원작으로 한 라는 작품이 있는데, 늙어감에 관한 총체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가 유난히 애착을 가진 작품이기도 했다.
“제가 를 1997년에 호암아트홀에서 초연했는데 지금까지 매번 적자였어요. 그러나 작품의 의미나 형식이 너무 좋아서 적자가 나는데도 계속 공연을 하고 있어요. 이 작품의 대사 중에 ‘중후하게 늙을 것인가 가련하게 늙을 것인가, 중후하고 가련하게 늙을 것인가’라는 말이 나와요. 그 질문을 관객에게 계속하는 거예요.”
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삶을 관조하는 늙은 얼룩말을 맡았던 연기자 유인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간이다.
는 병든 말 ‘홀스또메르’를 통해 인간 삶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화자인 얼룩말은 다양한 역경을 겪은 늙은 말이다. 이 얼룩말의 시각을 통해 이야기되는 사랑과 고통, 아름다움과 추함, 젊음과 늙음 등은 인간사 희로애락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술의 보람과 감동을 알기에 놓을 수 없다
“‘인간은 자기 땅이라고 하면서 밟아보지도 않아. 자기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을 욕해. 내 여자라고 말하면서 다른 여자와 살아.’ 는 이런 인간의 속성을 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어요. 관객 중에 홀스또메르가 말하는 이런 사람이 꼭 있어요. 그 사람은 나와 눈을 못 마주쳐요. 그래서 흥행은 안 되죠(웃음). 하지만 나이 들어 이 연극을 보신 분들은 공연이 끝나도 일어나지를 못해요. 자신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울기도 합니다. 저도 그 작품을 생각하면 지금도 두근두근해요.”
한번은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내고 자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친구 때문에 를 보게 됐는데 이 연극을 본 후 죽으면 안 되겠다는 걸 깨달았다고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는 거지. ‘내가 꼭 성공하겠다, 그리고 당신을 후원하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어요. 그걸 보면서 예술로서의 목적이 달성됐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그런 편지 하나 때문에 연극 일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거니까요.”
궁금했다. 유인촌은 어떤 이유로, 어떤 힘으로 연극이라는 자신의 세계를 이렇게 끌고 올 수 있었을까? 그 의문이 다소 풀리는 순간이었다.
기억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제가 같은 작품을 했는데 어떻게 늙어갈지를 왜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렇다. 지금의 유인촌은 그 고민의 결과다. 예술은 사람에게 화두를 던질 수 있고 그 화두를 접한 사람은 더욱 발전할 수 있다.
“운동을 하기 싫지만 취미를 갖고 싶으면 예술을 가까이 하는 게 좋아요. 일본의 단카이 세대들은 동호회가 많이 활성화돼 있어요. 그래서 박물관의 날, 미술관의 날 등을 정해서 집중적으로 예술을 접합니다. 돈을 모아서 강연회를 열기도 해요. 아주 지적인 취미생활인 거죠. 우리도 할 게 많아요.”
기자가 늘 놓치지 않고 묻는 마지막 질문, 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물었다.
“예전부터 그랬어요. 저는 기억되지 않는 게 좋다고. 가족에게도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뿌리라고 말해뒀어요. 광대 팔자라는 게 그런 거예요. 남기지 않는 게 좋다. 연극은 순간예술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거죠. 저는 저를 영상으로 남기는 게 어색하거든요. 그래서 영화를 안 했어요. 필름은 50년, 70년 돼도 남는 것이라 부담스럽거든요.”
방송에 나오지 않으니 젊은 사람들은 이미 자신을 몰라서 지하철을 타도 아무 불편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그는 살짝 웃었다.
“사람마다 저에 대한 느낌을 갖고 있겠죠. 누군가에게는 방송인으로, 누군가에게는 배우로. 그냥 그렇게 각자의 나름대로 가벼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좋겠어요.”
유인촌과 ‘홀스또메르’가 오버랩되면서 옳다 그르다 선을 긋기 전에 인생역정 겪고 마침내 거울 앞에 선 그에게 다시 오는 것과 오지 않는 것은 무엇일지 큰 의미가 없을 듯하다. 편협한 생각으로 나눴던 대화, 그끝에 알게 된 건 그가 영원한 연극인이라는 거다.
옛날에는 읽고 싶은 책이 매우 부족하였다. 첫 월급으로 부모님 옷 선물과 책 구입이 당시의 풍습이었다. 지금은 그 양이 너무 많아서 관리에 문제가 많다. 책을 과감히 정리하겠다는 각오로 온종일 뒤적였지만 별 성과 없이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쓸데없더라도 어렵게 모았던 책을 버리기는 더 아깝게 느껴졌다.
이삿짐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던 젊었을 때다. 휴일을 잡아 친구끼리 품앗이 이사가 당시의 풍속이었다. 가까운 곳은 손수레로, 먼 곳은 삼륜차에 사람과 이삿짐이 짐칸에 뒤엉켜서 거리를 내달렸다. 그때는 짐칸에 탑승하는 것이 교통경찰의 집중단속 대상이었다. 이사할 때마다 신줏단지 모시듯 보관하였던 책들은 친구들의 기분에 따라 많은 양이 쓰레기로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겉모습은 그럴듯하지만 별로 필요하지 않은 책만 남는 경우가 더 많았다.
책을 보유하느라 고생했던 시대는 지났다. 종이인쇄시대가 가고 전자시대다. 전문서적의 정보도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책으로 가지고 있어 봐야 얼마 지나면 아무 소용없는 경우가 많다. 논문ㆍ제안서와 입학ㆍ입사 지원서도 책자가 아닌 파일로 제출하는 시대다. 종이책 대신 전자 책 출판으로 바뀌었다.
PC가 대중화 되면서 고민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인쇄문화가 가고 디지털화가 급속히 진행된 것이 기회가 되었다. 불편한 책 보관의 의미가 사라지고, 편리한 활용에 방점이 찍혔다. 이용하기 편하고 시간이 절약되는 디지털화가 정답이었다.
책 한 권을 요약하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A4 용지 1매 이내로 파일에 담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파일마다 관리번호를 부여했다. 일자ㆍ관리번호ㆍ일련번호를 부여하면 자료 활용이 매우 편리하다. ‘20120425.01.2 삼국지’ 식이다. ‘20120425’는 2014년 4월 25일 독서를 끝냈다는 뜻이고 ‘01’은 책 성격 분류 번호, ‘2'는 같은 분류 중 일련번호다. 일자는 책 출판일, 책 구입일 등도 있으나 실제로 읽은 날짜가 제일 의미가 있다. 같은 책도 읽는 날에 따라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책 제목 외에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읽는 시기별 요약이나 간단한 독후감을 넣어도 좋다. 전문가 서평ㆍ반론ㆍ자기 의견 등 역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책 이외에 사진ㆍ졸업증서ㆍ자격증도 이같이 정리하면 된다. 사건이나 명언별로 구분하여도 자료 이용에 편리하다. 스크랩 자료ㆍ일기나 메모 등 파일화가 어려운 자료는 적어도 연도별 관리번호를 부여하면 찾아보기 쉽다. 글 쓸 때 사진을 먼저 올려놓고 자료를 연결하면 상상력을 크게 보완할 수 있다. 신문기사 작성 때도 사진을 확보하는 일이 먼저다.
장년은 책을 아무리 붙잡아도 다시 읽을 기회가 오기 힘들다. 먼지 쌓인 책을 찾다가 세월 다 간다. 우선 마음을 비우자. 쓸모없는 종이로 변하기 전에 사회에 확 기증하자. 꼭 필요한 책은 공공도서관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는 시대다.
전문서적이나 고서 등 꼭 보관이 필요한 책을 백여 권 이내로, 서가 한 개 이내로 줄이기 실천을 하고 있다.
각 학교에서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이다. 이 시기에는 아이들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입학해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를 겪으며 힘들어하기 마련. 흔히 이런 현상을 ‘새학기증후군’이라 부른다.
아이가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입학해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로 제때 화장실에 못 가거나 낯선 곳에서 변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반복되면 소아변비가 생길 수 있다.
소아변비란 배변 횟수가 일주일에 2회 이하거나 단단하고 마른 변 때문에 대변보기 힘들어하는 상태를 말한다. 아이들은 변비 증상을 잘 몰라 정확한 의사 표현이 어려워 관심이 필요하다. 만일 아이가 배가 팽창된 상태로 복통을 호소하거나 상체를 뻣뻣하게 세우고 발끝으로 걷는 모습을 보인다면 변비 증상이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소아변비는 아이의 영양흡수를 방해해 성장 장애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전문의들은 경고한다.
변비가 심해져 항문에 힘을 주는 것이 반복되면 항문이 밖으로 빠지거나 항문 점막이 찢어지기 쉽다. 이때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대변 배출이 반복되면 소아치질로 발전할 수 있다.
아이에게 항문 질환이 생기면 항문 주위가 가려운 항문 소양증도 함께 나타날 수 있다. 항문에서 흘러나온 점액질이나 대변이 제대로 닦이지 않으면 가려움증을 유발하기 때문. 만일 아이가 화장실을 다녀온 후 항문 주위를 계속 긁는다면 항문 소양증을 의심해 봐야 한다.
어린 아이의 경우 깔끔하게 뒤처리하는 습관이 잡히지 않아 배변 속 독소나 세균이 주변 피부를 자극해 가려움증이 생길 수 있다.
메디힐병원 유기원 부원장은 “항문소양증은 밤에 증상이 특히 심해지므로 아이가 숙면을 취하기 어려울 수 있고 무의식적으로 항문 주변을 계속 긁으면 다른 항문질환이 추가로 생길 수 있다”며 “항문에 습기가 있는 경우 가려움증이 심해지므로 몸에 물기를 완전히 없애고 통풍이 잘되는 헐렁한 옷을 입혀 엉덩이 부위에 땀이 차지 않도록 하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3월 2일 새봄, 쌍둥이 손녀ㆍ손자는 2학년으로 진급하였다. “동생들이 생겨서 기분이 좋다”고 제법 어른스러운 소리를 하였다. 초등학생이 되면 유치원생이 어려보이고, 중학생이 되면 초등학생보다 엄청 크다고 느낄 터이다. 상급학교 진학과 한 학년 진급을 되풀이 하면서 어린이는 무럭무럭 성장한다.
쌍둥이가 2학년이 되고 방과 후 관리가 문제다. 두 아이가 한 반으로 편성되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방과 후 일정은 각각 다르다. 아침 등교를 보살피고 오후에는 집에서 대기하거나 학습장으로 데려가야 한다. 할아버지ㆍ할머니가 꼭 필요한 대목이다. 아들가족과 가까운데서 사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아내와 교대로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부터 오후까지 아이들과 함께 할 예정이다.
유치원을 졸업한 외손자는 작년의 사촌 쌍둥이 누나와 형처럼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집과 가까운 학교이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호기심에 차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같은가보다. 엊그제의 유치원 친구들과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다시 만남을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다.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넓고 깨끗한 체육관에서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도 엄숙한 분위기다. 6학년 형들이 사이사이에 앉아서 신입생에게 입학을 축하하면서 선물을 주었다. 교장선생님의 환영사가 있었다. 신입생 대표의 선서가 또렷하게 진행되었다. 형들과 교가를 같이 부르는 신입생들의 모습이 든든하게 보였다. 며칠 전 유치원생과는 완전히 다른, 엄청 큰 아이로 느껴졌다.
교감선생님의 안내말씀에 좋은 학교라는 인상을 받았다. “혁신학교로 지정된 학교입니다. 공부만을 강조하지 않고, 다양한 체험을 하도록 아이들 지도에 많은 노력을 할 터이니 지켜보고 격려해주십시오.” 학부형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담임선생님과 방과 후 선생님 두 분이 아이들을 지도한다. 교실과 선생님이 부족하여 몇 개 학년 합반수업을 하였던 수십 년 전, 외손자의 부모가 다녔던 대도시의 학교와도 비교되었다. 아이들이 좋은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좋은 책을 읽었기에 학교에서 받은 책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을 터이다. 예쁜 책가방과 필기구는 입학선물로 이미 챙겼다. 장난감으로 재미있는 놀이하기를 좋아한다. 방과 후에는 뛰어놀면서 체육관, 학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딸 가족과 함께 외손자의 귀여운 모습을 기념사진에 남기고 교문을 나섰다. 먼 훗날 아이들의 추억에 오늘이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
아버님ㆍ어머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랑과 은혜를 후세대에게 되돌리고 싶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 그 쓸쓸함에 대한 이야기를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보내주셨습니다.
글 이근후 이화여대 명예교수
누님. 이렇게 불러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이젠 누니~임 하고 소리 높여 불러도 대답 없을 당신에게 띄웁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참 바보 같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누님 앞에 서라면 아마도 그때 그 시절처럼 한없이 작아질 것입니다.
누님 결혼식 날, 축시를 읽어주기로 약속해놓고선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축시를 읽어드리지 못했습니다. 기억나세요? 내가 막 예식장에 도착했을 때 누님은 차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차 안에서 내게 손을 흔들어줬습니다. 그날 내가 왜 늦은 줄 아세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기억인데 이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날은 정말 누님이 미웠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가 고등학교 시절입니다. 내 여동생의 S 언니가 되면서입니다(그 시절엔 S 언니 동생이 유행이었습니다). 동생의 언니이니 당연히 나한테는 누님이 된 것입니다. 누님과 내 나이 차이는 딱 한 살입니다. 누님이 생겼으니 공연히 즐겁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동생을 통해 말로만 듣던 누님을 만난 것은 훨씬 나중 일입니다. 마침 나와 가장 친한 친구가 누님과 친척이었는데 조카뻘이었습니다. 그러니 동생으로 인해 누님을 얻고 누님으로 인해 조카를 하나 얻은 셈입니다.
어느 날 친구를 앞세워 누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갔으나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는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선 다음에 만나면 이런저런 말을 해야지 하면서도 그 말들을 지금까지 하지 못했습니다. 대학시험에 낙방하고 실의에 빠져 외가 근처에 있던 직지사에 들어가 한 학기 동안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누님 꿈을 생전 처음으로 꾸었습니다. 글쎄요. 나 혼자 간직하고 싶었던 꿈이었지만 지금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누님이 나한테 키스를 해주었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누님이 나한테 해주셨습니다. 그 황홀한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깨어보니 허망하게도 꿈이었습니다. 계속 그런 꿈을 꾸고 싶었습니다. 그날의 꿈이 아쉬워 그 꿈을 꾸었을 때의 환경에 맞춰 여러 번 잠을 자보기도 했습니다만 그 후로는 한 번도 그런 꿈을 꾸지 못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누님은 영문과를, 나는 의예과를 다니던 시절이라 만나는 일이 잦았습니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참 즐거웠습니다. 그렇게 가깝게 지내면서도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입 밖에 내지도 못했습니다. 누님을 만나고 나면 즐거움만큼 아쉬움도 컸습니다. 꿈같은 대학 시절을 보내고 내가 모교 병원에서 인턴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누님은 결혼을 한다며 내게 축시를 부탁했습니다. 나는 기꺼이 승낙했고 당일 낭송하기 위해 축시를 하나 지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뭐라고 썼는지 지금은 기억에 없습니다. 시를 쓰고 그림도 그려 시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림에 눈물이 떨어져 번져버렸습니다. 축시를 쓰면서 왜 눈물이 났을까요?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은 너무나 명쾌히 그 이유를 압니다.
내가 사랑한 누나를 다른 사람이 채갔기 때문입니다. 누나를 채간 사람에 대한 분함과 그 사람을 따라간 누님에 대한 서운함이 범벅이 되어 눈물로 떨어졌습니다(나이답지 않게 참 바보 같았네요). 예식시간에 맞춰 예식장에 충분히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우물쭈물하다 시간이 늦어버렸습니다. 핑곗거리는 충분했습니다. “환자가 많아서 그랬습니다”라는 핑계입니다. 그러나 기실 환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분노와 서운함이 밀려와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맞추지 못한 것입니다. 그 분노와 서운함을 직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생각하면 그 뿌리는 깁니다.
내가 대학시험에 낙방해 직지사에서 한 학기 동안 칩거하면서 제일 많이 생각한 사람은 누님입니다. 공부하는 시간보다 누님을 상상하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그냥 보고 싶다는 수준이 아니라 결혼까지 하고 싶을 만큼 많은 시간을 누님과 함께하는 상상 속에서 보냈습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항상 얼굴을 붉혔습니다. 속마음을 누군가에게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면 언제나 얼굴을 붉혔습니다. 결혼을 할 수도 있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항상 나를 통제하는 나만의 도덕적 기준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기준이지만 그땐 정말 바보스러웠습니다. 그 기준은 누님하고 어떻게 결혼할 생각을 하느냐는 자문이었습니다. 죄의식이었습니다. 참 바보스러웠지요. 누님은 내 혈연적 누님이 아니잖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님과의 결혼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생각에 얽매였습니다. 누님하고의 결혼이라니…. 그런 불순한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해선 안 된다는 마음이 서로 상충하는 양가감정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한 학기 동안 가슴앓이만 하다 내려왔습니다. 이런 깊은 사연이 있습니다. 결혼식 날 예식장에 늦게 도착한 것이 꼭 환자 때문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턴 과정을 마친 뒤 정신과 레지던트 과정 수련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내가 갓 결혼해 신혼생활을 시작했을 때입니다. 그 뒤 20여 년 동안 나는 누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첫아들이 개혼할 때 누님에게 청첩장을 보냈습니다. 아들 결혼식을 준비하다 불현듯 누님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예식장에서 누님을 20여 년 만에 만났습니다. 반가워서 잡은 손을 한참 놓지 않았습니다. 그날 나는 누님 손을 처음 잡아봤습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옛날 생각이 나서 혼자 웃었습니다. 이젠 누님을 채간 분에 대한 분노도 누님에 대한 서운함도 내려놓은 지 오래돼서 그런지 그날은 그냥 미소를 짓게 하는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날은 정말 반가웠습니다. 바보스러웠던 내 모습을 생각하면서 누님 손을 오래 잡고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군가가 그리운 사람이 있다면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또 세월이 많이 흘렀지요. 인편에 누님이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다시 옛날 생각이 밀려오면서 누님이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전화를 드렸지요.
“누님 나 대구 갈 일이 있는데 누님 집에 들려도 돼요?”
“오지 마.”
내 기대와는 다른 답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누님은 아파서 누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고 했습니다. 체중이 35kg밖에 안 나간다니 그 모습을 상상하기 싫었습니다.
“대신 전화 자주 해.”
나는 그래서 매일 전화를 했고 옛날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다가 네팔로 봉사를 떠났습니다. 네팔에 가 있는 동안 나는 누님이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내내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네팔 봉사를 마치고 귀국하면서 곧바로 누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벨이 한참을 울리는데도 누님은 받질 않았습니다. 불길한 예감에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러곤 전화를 걸 용기가 나지 않아 한동안 걸지 않았습니다. 누님의 부음을 들은 것은 그 후 한참 지나서였습니다. 나는 또 바보짓을 했구나 싶었습니다. 두려워도 참고 전화를 걸어볼걸. 자책하고 또 자책했습니다. 전화를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지금도 내가 그런 바보입니다.
그때는 마치 기적과도 같았다. 백인 청년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좀 전까지 걷기 힘들었던 다리가 동양의 비술을 만나자 5분 만에 나아버렸다. 한의학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반드시 이 학문을 익히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주변의 만류가 심했다. 한의대에서 거절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한의사 국가고시 사상 최초로 합격한 백인이 되었다. 자생한방병원 국제진료센터 라이문드 로이어(Raimund Royer·53) 센터장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푸른 눈의 한의사. 많은 언론에서 라이문드 로이어 원장을 지칭하는 수식어다. 이 수식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편견이 보인다. 한의사라는 단어보다는 푸른 눈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외국인으로 바라보는 시선. 그 시선으로 인해 그는 역경도 겪었고 혜택도 받았다.
오스트리아인인 그가 처음 한국에 온 것은 1987년. 무역회사에 다니던 그는 동양의 아시아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나라를 찾았고, 그중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가 눈에 들어왔다고.
“당시 한국은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어요. 1988년 서울올림픽 이전이었으니까 유럽에서 한국에 관한 정보는 전무했어요. 그렇게 무작정 서울에 도착했을 때 인상 깊었던 것은 젊은이들의 활기로 가득한 도시의 모습이었죠. 서울의 역동적인 모습은 알프스 산맥의 작은 동네 출신인 저를 사로잡았어요.”
한국에서 지내다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노란띠를 매고 한창 재미가 붙을 무렵 훈련 중 발목을 다치게 된다. 그리고 이때 한의학과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발목이 다쳐서 갔는데 엉뚱한 부위에 침을 놓더라고요. 처음엔 당황해서 보디랭귀지를 섞어가며 항의했어요. 그런데 5분 만에 통증이 사라지면서 걸을 만해지더라고요. 마법 같았죠. 한의원 특유의 한약 냄새, 약장의 모습 등이 낯설고 신기했습니다. 한의학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더라고요. 알아보니 영화에 등장하는 무술처럼 엄청난 스승을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대학을 통해 체계화된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도 절 놀라게 했어요. 당장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그의 뜻과는 달리 한의사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주변의 만류도 컸다.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자까지 알아야 하는데 가능하겠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대학 쪽에서도 난색을 표했다. 유명 한의대에 입학 가능 여부를 문의했는데 거절한다는 회신이 왔다. 이미 한 차례 외국인이 도전했다가 중도 포기한 전력이 있기도 하고, 외국인이 제대로 된 수강이 가능하겠느냐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표현(한국어로)대로 그는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사내였다.
한국어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해서 어학당을 다니며 한국어를 익혔다. 한문과 동양문화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고 해서 강릉대학교에서 동양철학을 배웠다. 그때 대관령 자락에 있는 빈집에서 장작불을 지펴 가마솥밥을 해먹고 다녀, 주변에서 미친놈 소리까지 들었다.
그 후 전국을 수소문한 끝에 자신을 받아주겠다는 대구한의대(당시 경산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렇게 원하던 한의대생이 됐지만 자격을 획득하기까지 또 다른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1993년에 약사에게 한약 조제권을 주는 것을 놓고 한의대생들의 수업거부가 있었어요. 그때 다른 학생들의 뜻에 따랐기 때문에 수업을 제대로 못 받았죠. 어렵게 한의대생이 됐는데 말이죠. 그리고 1995년에 약학대학 안에 한약학과를 설치하는 문제 때문에 또다시 수업거부가 있었어요. 그때는 안 되겠다 싶어 강의를 꼭 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교수님들이 파업을 하시더라고요(웃음).” 정작 수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한문이 낯선 것은 한국 학생들도 마찬가지였고, 전공 수업이 익숙해지면서 성적은 점점 향상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서양인 최초 한의사라는 감격적인 타이틀을 따냈다. 아직까지도 서양인 한의사는 그가 유일하다.
한의사가 되고 난 후 그는 또 다른 목표를 세웠다. 그중 하나가 한의학의 세계화다. 자생한방병원에서 그에게 국제진료센터를 제안했을 때 어렵지 않게 수락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효과가 좋고, 체계적으로 발전해온 한의학이 아직 세계 속에 자리매김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제 고국에 인접한 독일의 경우 TCM(중의학) 관련 단체만 60개가 넘어요. 소속된 양의사들이 3만~5만 명 정도 돼요. 한국의 한의사보다 많은 셈이죠. 이들은 양의학의 테두리 안에서 침술과 같은 동양의학의 장점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양의학과 한의학 사이의 벽이 너무 높아요. 왜 이렇게 싸우나 의문이 들 정도죠. 확실한 건 체계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면 분명 한의학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거예요. 특히 한약의 우수성은 중의학이 못 따라옵니다. 부작용 적고 효과 좋은 한약의 장점을 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한의학을 알리고 싶다는 그의 열망은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CNN 등 다양한 해외 매체와의 접촉을 통해 한의학의 장점을 알렸고, 국제학술대회 등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한한의사협회에 소속돼 일하기도 했다.
의사로서의 그는 어떨까. 병원 관계자는 그를 찾는 환자들이 많아 실적만으로도 병원 내에서 상위권이라고 귀띔한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용하다는 소문이 난 덕분이다.
“이젠 고향이에요.” 한국 생활이 어떠냐는 질문에 돌아온 그의 대답. 한국 생활 30년. 어지간한 젊은 청년들보다 한국 생활을 오래한 그다. 그럴 수밖에.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그 의문이 머릿속에 맴돈다. ‘푸른 눈’에 가려 그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누구보다 한의학을 아끼고 사랑하며, 환자 걱정을 멈추지 않는 그. 이제 그를 바라볼 때 인종을 구분하는 수식어는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 그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멋진 韓醫師다.
‘동안(童顔)이란 생명력이 왕성해 노화의 증상이 전혀 없는 얼굴’이라는 정의를 내리고 칼을 대지 않는 시술로 본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래성형외과 김종환(66) 원장. 메디컬아티스트라고도 불릴 만큼 예술을 사랑하고, 행복을 사유하는 그는 스스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노라 자부한다. 철저한 시간 관리와 변치 않는 삶의 철학을 지녔기에 가능한 결과였다고. 김 원장이 이야기하는 성공의 의미와 행복의 미학을 들어봤다.
최고의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성공적인 삶이라고 말하는 김 원장은 요즘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즉 잘 풀리는 인생을 사는 셈인데, 탄탄대로인 삶의 비결을 묻자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라는 대답이 먼저 나왔다.
“나는 학창 시절을 파란만장하게 보냈어요. 그땐 시험을 보고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삼수까지 했지만 결국 원하는 곳에 가지 못했죠. 당시에 서울대 법대를 가고 싶었는데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에서는 거기에 입학한 학생이 한 명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학교를 나와 검정고시를 준비했죠. 그러던 중에 부모님의 권유로 의대를 목표로 삼게 됐어요. 원래는 문과생이었는데 늦깎이로 이과 공부를 하려니 만만치 않았죠. 결국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관건이었어요. 똑같은 시간이라도 남들보다 배로 활용하려고 노력했죠. 그때의 습관이 몸에 밴 덕분에 지금도 시간 관리는 아주 철저해요.”
그는 ‘인생은 곧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단 1분 1초도 소홀히 보내지 않으려 했던 노력 덕분에 현재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우리의 일생을 시간으로 따지면 기껏 해봐야 80만 시간입니다(90세 정도의 삶을 가정했을 때). 만약에 한평생 사는데 80만원만 쓰고 죽으라고 해봐요. 1원조차도 얼마나 아까운지. 그렇게 시간을 생각한다면 순간순간을 헛되이 보낼 수가 없어요. 오히려 800만 시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야겠죠. 그게 저의 시간 철학입니다. 지금까지 한 60만 시간을 살았을 텐데, 돈에 비유했을 때 단 1원도 허비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시간을 벌었지.”
인생의 터닝포인트, 삶의 철학을 다지다
의대를 졸업하고 정형외과를 개원하기까지, 철저한 시간 관리로 상향곡선을 그리던 그의 인생에도 변곡점이 찾아왔다. ‘행복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물음이 마음속에 맴돌았던 것. 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김 원장은 깊은 철학적 고뇌에 빠지게 된다.
“자유직업을 갖고 싶었고, 그래서 의사를 하게 됐는데, 막상 정형외과 의사로 살다 보니 자유롭지 않더라고요. 돈은 좀 벌었으니 이제 인생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행복’이라는 화두가 떠올랐어요. 과연 행복이 뭘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행복은 아름다움에서 비롯된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됐죠. 내가 정말 행복해지려면 아름다움을 알아야겠다, 그때부터 예술·철학·종교 등에 대해 깊이 공부했어요. 그 안에서 발견하는 내적, 외적, 물질적, 정신적 아름다움에 대해 파고들기 시작한 거죠.”
김 원장은 결국 의학적 아름다움의 해답을 ‘미용성형’에서 찾았다. 그 길로 일본어를 공부해 일본 세계미용성형외과 학회장을 지낸 와타나베 박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3년간 수련을 거친 후 한국으로 돌아와 1994년 미용성형병원을 개원했다.
“처음 몇 년은 칼을 대는 시술을 열심히 했죠. 그런데 아, 이게 아니구나. 건강을 해치면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칼을 대면 젊어 보이게 할 수 있지만, 결국 완전히 젊어지기 위해서는 얼굴에 칼을 대면 안 된다고 느꼈죠. 그때부터 ‘칼을 대서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없다’라는 철학이 생겼습니다. 그 뒤로는 15년 동안 칼을 대는 시술은 하지 않았어요. 흔들림 없는 철학적 해석을 가지고 거기에 어긋나지 않는 시술(골드해피리프트)을 하려고 노력했고, 오랜 기간 그것을 연구하고 정리해 하나의 완벽한 학문 체계를 이뤘다고 자신합니다.”
감각을 키워야 행복의 질이 높아진다
15년 전, 자신만의 철학을 정립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삶이 무척 허무했을 것이라 말하는 김 원장이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그의 인생철학은 인생의 고비마다 그를 지탱해주는 무게중심 역할을 했다.
“아마 아무런 기준 없이 수입만 좇았다면 지금의 행복은 없었을지도 몰라요. 내 인생이 행복할 수 있는 철학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며 살아온 것에 수입은 덤처럼 따라온 거라 생각해요.”
인생의 철학이 그의 삶에 좌표가 되었다면, 아름다움의 발견을 통한 행복은 일상에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들이 많아질수록 행복해질 수 있는 요소도 더 풍부해진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 원장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한 방법으로 ‘예술작품 감상’을 권했다.
“아름다움, 행복이라는 것은 느낌이잖아요. 시를 읽고, 맛을 보고, 음악을 듣는 것은 모두 감각을 필요로 하죠. 더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모든 감각을 최대로 끌어올려야 해요. 감각을 키우기 위해서는 감각을 자극할 수 있는 것들을 많이 보고 경험해야죠.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행복을 느끼는 차원이 달라요. 길가의 전봇대를 그냥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과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삶을 바라보는 시각도 다르겠죠.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으면 그만큼 질 높은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의 부치지 못한 편지가 지난해 연말 편집부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열어보니 가슴이 먹먹합니다.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
인간의 끝이 없는 탐욕의 수렁으로 인해 빚어지는 이승의 혼탁함 속에서도, 평생 맑게 살다 얼마 전 저 세상으로 떠난 대학 과동기인 제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 친구는 어느 지방대학 교수이면서 북한학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국제정치학 교수였는데, 그간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오퍼를 받았지만 끝까지 강단과 연구실을 지켜온 천생 학자였습니다. 친구는 그의 어머니께서 노산으로 낳은 막내아들로 몸이 약했는데 평생 담배를 염소같이 많이 피더니 결국 60대 중반에 폐암을 얻었고, 힘들게 치료를 해 몇 년 지나 완치가 되었나 했더니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어서 병원에서 몇 달 있다가 한 열흘 전에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저와 몇 명 안 되는 과동기들은 천안의 공원묘지에 가서 그 친구를 전별했고 공원 입구에서 산 자들은 맛대가리 없는 육개장을 한 그릇씩 훌훌 먹고 그를 남겨둔 채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카톡을 통해 그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가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우들에게
먼저 갑니다.
아직 책을 더 써야 하고 그 밖에도 못다 한 일들이 남은 것 같아 아쉬움도 있지만
게으른 천성에 지금까지 살아온 것으로 자족해야 하겠습니다.
새는 죽음을 앞두고 우는 소리가 더욱 아름답고,
사람은 죽음을 맞이함에 그 마음씨가 선해진다고 합니다.
저 또한 보다 조용하고 겸허해지고 싶습니다.
귀거래혜(歸去來兮·도연명)에서 도연명은 국화꽃 피고 술 익는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갔다지요.
저는 아지랑이 피는 봄날,
장다리꽃 위로 노랑나비, 흰나비 날아드는
어릴 때 뛰어놀던 서울 근교의 밭길을 걷습니다.
그 옆으로 이어지는 숲길도 보입니다.
그 너머로 모든 미련이나 원망, 죄의식도 훌훌 털어버리고
가을처럼 높고 푸른 하늘을 지나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곳으로 표표히 떠납니다.
인생이 한 조각 뜬구름이라 했거니와, 제게는 또한
한 가닥 미풍과 같습니다.
- ○○○ 드림
날짜는 없었습니다. 사후 발송 같습니다. 아마 떠나기 며칠 전 혼수상태 이전에 혼신의 힘을 다해 썼든지 또는 혼미한 상태에서 구술한 것을 가족이 적어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간 후에 발송해달라고 가족에게 부탁한 것 같습니다.
저는 발송 경위를 알아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 친구가 하늘에서 보낸 것이라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 편지를 보고 울컥 먹먹해지며, 그 친구가 떠나면서 봤을 것 같은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습니다.
영화 의 주인공 막시무스 장군(러셀 크로우 배역)이 로마의 사악한 왕에게 비겁한 공격을 받고 죽어가면서 그가 보는 장면입니다. 어떤 좁은 문을 지나 고향의 들판과 아름다운 꽃, 그리고 가족들을 파노라마처럼 보는 것이지요. 아마 동양이나 서양이나 하늘로 떠나는 사람은 고향, 특히 어릴 적 놀던 그곳을 찾아가 보는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답장을 했습니다.
자네 말마따나 게으르고 느려터진 친구가 갈 때는 왜 그렇게 성미 급하게 떠났나?
지난 5월 어느 날인가 나도 암수술 후 6개월 정기검진 때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
자네가 마침 이런 문자를 보낸 것 기억하나?
“조 사장! 수술 후 회복 잘되고 있으리라 믿소.
나는 지난달에 신우암이 또 생겨 좌측 신장 절제를 했는데
3년 전 수술한 폐암과는 다른 종류인데 모두 담배가 유력한 원인이라네.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하면서 한 번쯤 평생 담배 핀 것을 후회해볼까 생각하네.
우리 중고차 잘 유지 보수하며 삽시다.”
이런 내용을 보냈어. 내게 말이야….
그 후 9월까지 몇 번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9월 이후 그렇게 급격히 악화될 줄 몰랐네.
그 성미에 아픈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결국 나는 자네 병문안도 못 가지 않았나? 어차피 우리들도 하나둘 자네 뒤를 따라갈 것이니 자리 잘 잡아놓게.
그때 가서 너무 고참 행세 하지 말고.
그는 천재였습니다. 제가 1969년에 서울대 문리대(지금은 사회대, 인문대, 이과대를 합친 단과대)를 차석으로 입학했는데
이 친구가 하필이면 같은 과에서 전체 단과대 수석 합격을 해서 나는 결국 수석도 못했고 등록금 면제 대상도 안 되게 만든 악연(?)이 있습니다.
그 당시 민주화 세대였던 우리는 극렬한 학생운동 대열에 들어가거나 일찌감치 고시공부를 해서 정부로 들어가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민간기업에 취직할 기회도 적었지만 말썽꾸러기 데모꾼 정치학도를 받아줄 회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제3의 길, 즉 드물게 학문을 하는 먼 길이 있었는데 그 천재는 그 먼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운이 없어서 박사학위도 매우 늦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늘 유쾌했고 잡학박사였고 잡담(농아리)의 대가로 이상파와 현실파가 다 좋아하는 뼈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집은 늘 우리의 아지트였지요. 밥도 제일 많이 얻어먹었는데 어머니는 늦둥이 아들 친구라고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려주었지요. 많은 추억거리가 있지만 그는 어떤 허세나 재주도 부리지 않고 올곧게 학자로만 일생을 살았고, 도대체 건강을 위한 운동이라고는 전혀 안 했고 담배만 열심히 피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인간입니다.
언젠가 그가 속한 학회의 회장으로서 국제학술대회를 한국에서 주최하는데 한전에서 조금만 협찬을 해달랬는데, 명분이 약하다고 못 해준 것이 지금 저는 마음에 많이 걸립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비슷하겠지만, 저는 매우 우울합니다. 어차피 티끌 같고 미풍 같은 짧은 인생인데, 왜 그렇게 절제 없는 욕망의 화차를 맹목적으로 몰다 온 나라의 전복을 걱정할 정도로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어야 할 신뢰가 더욱 아쉬운 이때에, 쓸쓸한 만추의 어느 날 오후에, 주변머리 없이 제 가치를 지키다 맑고 아름답게 간
친구 이야기를 두서없이 적어봤습니다.
부디 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아직도 담배 피시는 분들, 이 글 읽고 한 번쯤 금연 시도해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