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비로소 몸에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고 했다. 삐걱대던 시절을 지나 생각을 바꾸고 삶을 대했더니 희망이 찾아들었다. 나이 먹고 퇴역 군인처럼 산다는 건 있을 수 없다는 이 사람.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는 이유? 일이 더 하고 싶어서란다. 멋진 목소리의 DJ, 활기찬 시니어 기자 소리 듣는 게 좋다는 윤종국 동년기자를 만났다. 화창했던 어느 화요일 낮. 라디오 방송 대본을 들고 마주 앉았다.
“어젯밤에 대본 연습을 거의 새벽 2시까지 했어요. 녹음기를 놓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서울노인복지센터(서울시 종로구 경운동) ‘탑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만난 윤종국 동년기자는 살짝 긴장한 눈치였다. 매주 화요일 30분씩 ‘이야기가 있는 풍경’이라는 센터 내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는 윤종국 동년기자. 이날은 입이 타들어 가는지 물컵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마포FM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서울노인복지센터 방송국으로 스카우트(?)돼 온 지 3개월이라고 했다. 익숙할 만도 한데 무슨 일일까?
“제 인생에 인터뷰 기회가 항상 있는 일도 아니고 또 권 기자님이 초대 손님으로 출연하니 제가 잘해야죠.”
인터뷰 전에 제안을 하나 했다. 윤종국 동년기자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초대 손님으로 출연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함께 동년기자단에 대해 복지센터에 모인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었다. 대신 라디오 방송 대본을 제대로 써드렸다. 두 번 정도 대본을 맞춰보고 진행된 생방송은 주거니 받거니 뚝딱 하고 흘러갔다. 방송을 마치자 한결 여유로워진 모습. 안도 섞인 웃음이 윤종국 동년기자 얼굴에 번진다. 라디오 스튜디오 안에 혼자 앉아 콘솔 조절하고, 얘기하고, 음악 트는 것과는 또 다른 경험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윤종국 동년기자는 작년 2기로 동년기자단에 합류했다. 첫인상부터 남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시 마포구 지역 방송인 마포FM에서 DJ를 하고 있을 때였다.
“저는 한국 시니어 블로그 협회 회원입니다. ‘내 고장 마포’라고 마포구청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객원기자로 일한 지도 10년이고요. ‘우리마포복지관’ 산하 ‘우리복지신문’에서 봉사기자단으로도 활동하고 있고요. 우리마포시니어클럽 커뮤니티 맵핑(지도제작)팀에서 매퍼(지도 만드는 사람)로서 장벽 없는 동네지도를 만드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요새는 마포구의 작은 도서관 지도를 만들고 있어요. 작다고 하니 어린이 도서관으로 생각하는데 남녀노소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거든요. 그리고 이 라디오 DJ는 재능봉사입니다. 힐링되고 마음부자가 되는 것 같아 가능하다면 계속하고 싶어요.”
시니어 세대를 위한 정보라면 뭐든 관심 있게 보던 차에 동년기자단 모집 공고를 접하게 됐다. 47년생, 빡빡머리, 돼지띠 윤종국 동년기자는 오늘도 내일도 미래를 준비하고 성장해나가는 청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친구들은 벌써 은퇴해서 퇴직 연금으로 생활한다는데 정작 본인은 나이 의식해 뒷선으로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렇게 저에게 기회를 준 탑 방송국과 다른 매체에 다 고마워요. 늦게나마 인정받는 게 참 좋습니다. 뭔가 인생에 큰 힘이 되고 용기도 나고 말이죠. 요즘 나 자신을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술로 버텼던 시간을 지워가다
“젊었을 때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방송 관련 직업에 관심이 많았어요. 울진에서 살다 고등학교 때 서울로 유학 와서 교내 방송도 하고, 대학교 때는 학보사에도 몸담았습니다. 그런데 일이 좀 복잡하게 꼬이더군요.”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국가가 제동을 걸었다. 사회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 줄줄이 부정당했다. 이데올로기 전쟁이 낳은 연좌제 피해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때 처음 느꼈습니다. 학군단(ROTC) 신청 때 신원조회에서 문제가 있었습니다. 방송사 성우 시험, 국가공무원으로 있을 때도 어려움을 겪었어요. 사실 나이가 드니까 이 말 꺼내는 게 싫고 쑥스러워요. 변명처럼 느껴지고 내 자신을 모독하는 것 같고 말이죠. 얘기 안 하고 싶은 부분입니다. 그냥 제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안 된 거겠죠. 가령 ‘키가 남보다 작아서 학군단 입단이 안 됐다’라든지 말이죠.(웃음)”
지금은 웃으며 옛일을 말하지만 그때는 매번 닥치는 고통을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폭음으로 이어졌다. 관계에도 서서히 금이 갔다. 젊은 시절 고무신 거꾸로 안 신고 고집 피워 결혼해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들, 오랜 시절 아끼던 친구들이 견디지 못하고 등을 돌려버렸다.
“아주 심했던 것 같아요. 이제야 이야기를 꺼냅니다. 고통 때문에 술을 엄청 마셨습니다. 좋아서, 억지로, 서러워서, 분노를 참지 못해서요. 거리, 안주, 주량 불문하고 술자리가 있다는 연락이 오면 정신없이 달려갔습니다. 혼자 저를 키우신 어머니도 돌아가시면서까지 제 걱정을 하셨다더군요. 아내는 이종사촌 동생 친구로 만나 6년 연애하고 결혼했습니다. 뭐 하나 제대로 안 되는데 술까지 마셔서 저 때문에 고생 많았어요.”
급기야 몸에 이상 신호가 오고 말았다. 6년 전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대장 파열이었다. 아들 결혼식을 앞두고 응급수술을 받았다. 의사에게 각서까지 쓰고 휠체어에 몸을 실어 아들 결혼식에 참석했던 일화는 작년 ‘브라보 마이 라이프’ 9월호 동년기자 페이지에 게재됐다. 이 일이 있은 후 마음속부터 몸 끝까지 전부 다 바꾸겠다고 다짐했다.
“제2 또는 제3의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각오로 머리부터 밀었습니다. 술도 완전히 끊었습니다. 하루도 안 빠지고 마시던 그 술을 말이죠. 끊고 한 3년 힘들었어요. 지금은 잘 극복했죠.”
가끔 딸아이가 빡빡 밀어버린 머리를 쓱 만지고 가면서 “우리 아빠 사람 됐네”, “복권 당첨 확률보다 아빠 술 끊는 게 더 어려웠잖아” 라며 아버지 자리로 돌아온 윤종국 동년기자에게 칭찬 섞인 말을 건네기도 한다. 아들과는 손주가 둘쯤 생기고 나서야 부자지간이라는 게 뭔지를 좀 알게 됐다. 특히나 고마운 것은 자신이 못다 이룬 방송인의 꿈을 아들이 대신 이뤘다는 점이다. 아들은 모 방송사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한번은 아들이 저한테 게스트로 방송에 좀 나오면 안 되겠냐고 물었어요. 내가 뭘 그런 걸 하냐며 안 한다고는 했지만 한편으로 너무 행복했습니다. 아빠의 모습으로 나타나줘서 고맙다고 아들이 표현해준 것이죠. 정말 아빠로서, 남자로서, 가장으로서, 사회인으로서, 국가의 일원으로서 내 위치로 돌아가는 것만이 살길이었습니다. 그렇게 먹고 싶은 술을 6년 동안 입에도 안 댔습니다. 제사 지내고 음복은 입에만 댔고요. 제가 왜 이걸 강조하냐면 저도 제 자신이 굉장히 예뻐 죽겠으니까요.(웃음)”
‘이야기가 있는 풍경’ DJ 윤종국입니다
술을 끊으니 얼굴색도 표정도 달라졌다. 생각이 달라지니 보이는 것도 많았다. 마포FM을 통해 시작한 DJ 활동도 술을 끊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객원기자로 활동하는 신문에 쓴 제 글을 보고 마포FM 대표가 연락을 했더라고요. ‘나의 삶, 나의 길’ 라디오 초대 손님으로 말이죠. 그때 출연하고 나서 목소리가 좋은 거 같다며 DJ 제안을 받았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까 중장년층을 위한 프로그램 방송이 있더라고요. 제가 왜 마다하겠습니까? 덥석 시작했습니다.”
1년 정도 마포FM 라디오 스튜디오 안을 누볐다. 화요일 녹음하고 그다음 주 월요일 아침 8시부터 9시까지 마포구 내 집과 상점 등으로 전파를 타고 흘러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좀 오래하고 싶었는데 젊은 세대와 함께 호흡을 맞추다 보니 엇박자가 나는 듯했습니다. 나이 먹은 사람은 몇 안 됐어요. 적응할 만하면 스태프가 바뀌고 말이죠. 1년 동안 열심히 했는데 다른 데가 없겠나 싶었습니다. 마침 예전에 알고 지내던 분이 네이버 밴드로 연락을 해왔습니다. 서울노인복지센터에 DJ 자리가 있으니 생각이 있으면 한번 검토해보라고요.”
서울노인복지센터 탑 방송국은 윤종국 동년기자의 친구이자 동년기자 1기 출신인 장혜섭 씨가 적극 추천했다.
“담당 직원이 DJ 의사를 물어보며 전화 연락을 해왔을 때 제가 건 계약조건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한 달 해보고 마음에 안 들면 ‘방송에 지장이 되니까 나가달라’고 미련 없이 말하라고 했어요. 서운해하거나 오해하지 않겠다면서요. 아직 제가 미약한데도 존중을 많이 해줍니다. 전파 방송과 구내 방송이라는 방송 도달 거리 차가 있지만 라디오라는 성격은 같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좋은 점이라면 청취자들의 취향이나 피드백을 바로바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이죠. 하루 평균 2000명은 된다고 합니다. 아직까지 나쁜 소리는 안 들었으니 잘하고 있다는 거겠죠?”
라디오 DJ 활동을 통해 세상과 교류한다면 손자와는 태어나기 전부터 소통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윤종국 동년기자. 어떤 방법을 사용했다는 뜻일까?
“손자는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태명 ‘둥이’라는 카카오톡 계정을 만들어 소통했습니다. 물론 실제 대화 상대는 며느리였지만 손자인 척 며느리가 대답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동네 DIY 제작소에서 버린 자투리 나무토막으로 도미노 게임을 해주면 손자가 아주 좋아해요. 제 인생을 정리해서 말해드리자면, 젊었을 때는 말 그대로 ‘고난’이었어요.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 살았어요. 답답해서 이민 생각도 해봤지만 스물일곱에 혼자되신 어머니를 두고 해서는 안 될 불효라 포기했습니다. 술에 빠져 살아보니 이러다가는 내가 가족도 잃고 남는 게 없겠다, 반성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손글씨로 스스로를 치유하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치유의 한 방법이 펜을 들고 글을 쓰는 것이라고 했다. 함께하는 라디오를 앞두고 컴퓨터로 작업해서 보내드린 대본도 굳이 손글씨로 써서 볼 정도이니 손글씨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보인다.
“매일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한 주제를 가지고 집중적으로 쓸 때가 있고, 때로는 그냥 악에 받쳐 쓸 때도 있고 말이죠. 서술적으로 쓰다가도 누가 싫으면 최대한 아주 싫다는 걸 표현합니다. 지금까지 모아놓은 일기장이 너무 많아서 아내는 좀 정리하라고 하는데 잘 안 됩니다. 그래도 딸아이는 아빠의 유물(?)을 인정해줘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앞으로 더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물었다. 역시나 손글씨 이야기가 나온다.
“시니어만을 위한 옛 추억을 담은 손편지가 오고 가게 할 수 있는 길을 만들고 동아리도 만들고 싶어요. 정착이 되면 이메일이 아닌 손편지로 마음이 오고 가는 운동도 하고 싶고 말이죠.”
많은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지만 시니어의 감성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줄 아는 세상이기를 윤종국 씨는 바라기 때문이다.
“글씨를 좀 삐뚤삐뚤 쓰면 어때요. 잘못 쓰면 어떠냐고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가지고 손주나 며느리나 딸한테 편지를 쓸 수 있는 게 얼마나 멋집니까. 50대 이상 모든 시니어 세대를 버무려서 손편지를 주고받는 세상을 한 번 만들고 싶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했던 것처럼 편지로 정보를 나누기도 하고요. 쓴 편지는 우체통에 넣으면 좋고요. 누군가는 편지를 기다리는 맛도 있겠죠? 어떻게 하면 아날로그 감성이 제대로 살아날까 생각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윤종국 동년기자의 도전은 지금부터 제대로 시작이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영등포에 있는 당중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오목동에 있는 화산목장으로 봄 소풍을 가던 길이었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간밤에 내린 비가 논둑을 넘쳐서 도로 위로 흐르고 있었다. 난감했다. 우리들이 주저주저하며 선뜻 건너지 못하고 있자 구두 또는 운동화를 벗고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남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당신들 등을 내미셨다. 당신의 구두와 양말은 등에 업힌 아이에게 들리고.
아이들의 신이 젖을 것을 염려하신 선생님들은 하나하나 업어서 그 길을 건네주신 것이다. 그때 말간 봄햇살에 드러난 선생님들의 다리는 유난히도 하얘 보였다.
필자도 선생님 등에 업히기를 가슴 설레며 한참 기다리고 있었는데 생물 선생님인 조형렬 선생님이 필자를 보시더니 짐짓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셨다.
“너는 크니까 걸어서 가~ 임마.”
‘아이고 무안해라’
순간 얼굴이 화롯불을 뒤집어쓴 듯했다.
귓불까지 화끈거렸다.
‘어머 선생님, 여태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러시는 게 어딨어요. 그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건너갔잖아요’ 하고 속으로만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까 그 말씀을 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이 왜 가을날의 홍옥빛이었을까?
필자는 왜 그렇게도 눈치가 깜깜이었을까? 아까부터 필자를 제쳐두고 다른 애들만 서둘러 업어주던 선생님의 심중을 진작에 간파했어야 하는 건데.
수줍은 성격의 선생님 등에 업히기에는 필자가 너무 컸었나보다.
앞에 업힌 애들은 다 필자보다 키가 작았으니까.
토마스 하디의 ‘테스’에서 마지막으로 그녀를 업어서 시냇물을 건네준 엔젤은 테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 라헬을 건네주기 위해서 세 레아를 건네주었다”라고.
그러나 필자는 선생님의 레아도 라헬도 아니었다. 그 바람에 작은 애들은 신을 적시지 않았는데 필자는 신을 몽땅 다 적시며 길을 건너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코가 뾰족하고 키가 장대 같은 미군들이 야학을 방문했다. 우리들에게 예방주사를 놓아주려고 온 것이었다.
우리들은 왼쪽 팔뚝의 옷을 미리 걷어 올리고 차례를 기다리며 길게 끝도 없이 서 있었다.
마치 밀가루를 뒤집어 쓴 것 같은 얼굴의 미군들은 무표정한 사람도 있었지만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우리를 친절히 대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드디어 필자 차례가 되었다. 알코올을 묻힌 솜이 왼편 팔뚝을 ‘쓱’ 닦고 지나가더니 아주 시원한 감촉이 느껴지는 동시에 주삿바늘이 꽂혔다. 간단히 따끔하고 끝나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사탕은?
‘달랑 하나?’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앞의 작은 아이들은 두 개씩 주었는데 필자는 한 개만 주었던 것이다. 그 사탕이 필자 손에 쥐어 쥘 때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내게도 당연히 두 개를 주겠지’ 하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밖에 안 주다니….
무슨 예방주사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미군들은 우리들에게 주사를 한 대 놓고는 사탕을 주었다. 커다랗고 누런 종이 상자에 가득 담긴 사탕은 다이아몬드처럼 생겨 배가 볼록 튀어나왔고 펄이 섞인 듯 ‘알록달록’한 색상이 너무도 고왔다.
먹어보니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 사탕이 어찌나 맛있었는지 그 뒤 어떤 사탕도 필자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했다.
이때나 지금이나 필자는 늘 평균의 키와 몸집이었는데 사람들 눈에는 큰 키로 보였다보다. 그때처럼 키가 작은 아이들이 부러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 봄 소풍 날 두 번째로 작은 아이들이 부러웠다.
조 선생님은 얼굴이 하얗고 갸름하시며 목소리는 버터 바른 듯해서 꼭 미국 사람 같았다. 걸음을 걸을 때도 상당히 절도 있게 걸어서 인상 깊었던 조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멘델의 법칙, 드 프리스의 돌연변이설 등을 열심히 설명해주셨다.
선생님들은 소풍을 갈 때마다 우리들의 사진을 여러 장 찍어 주셨고 당신들 돈으로 사진을 빼서 야학생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주셨다.
사진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지금하고는 비교되지 않는 흑백 사진이었다. 크기도 작아 사진 속의 인물이 누군지 잘 구분도 안 되는 사진이지만 지금 들여다보면 소중한 추억이 담겨 있는 고마운 사진들이다.
즐거운 취미생활은 인생의 달달한 간식시간과도 같다. 차곡차곡 단지에 꿀을 모으듯 취미도 오래, 그리고 깊게 즐기다 보면 어느새 꿀단지가 가득 차 삶의 밑천이 되고 보람이 된다. 그러다 보니 좀 더 특별하면서도 의미 있고, 생산성 높은 취미활동을 찾는 이가 많다. 반면에 여전히 독서, 영화감상, 등산에만 머물러 있는 이들도 있다. 아직 취미를 제대로 찾지 못한 이들을 위한 다양한 취미 관련 프로그램 가이드를 준비해봤다.
STEP 1. 취향 따라 두루두루 ‘백화점 문화센터’
무엇을 취미로 삼을지 막연하다면 가까운 백화점 문화센터를 방문해보자.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적힌 카탈로그를 쓱 훑어보면 호기심이 생기는 몇몇 강좌가 눈에 띌 것이다. 문화, 스포츠, 예술, 생활 공예 등 일회성 프로그램에서부터, 여러 달에 걸쳐 진행되는 프로그램까지 다양하게 마련돼 있다. 장기 프로그램의 경우 분기별로 신청할 수 있고, 단기 프로그램은 강좌 스케줄에 따라 별도로 참여 가능하다. 눈여겨볼 만한 3대 백화점 문화센터 주요 강좌들을 정리해봤다.
STEP 2. 내면이 차오르는 취미활동 ‘서울시 평생학습 포털’
다양한 취미활동을 맛보며 몸 좀 풀었다면, 이제 내면의 즐거움을 채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살펴보자. 서울시평생학습포털(sll.seoul.go.kr)을 이용하면 각종 온라인 강좌를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에 있는 서울시민대학 강좌를 신청할 수 있다. 인문, 철학, 문학, 교양 관련 강좌 및 외국어, 취업, 자격증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STEP 3. 커리어 플러스 ‘50플러스인생학교’
여러 가지 취미활동을 하면서도 뭔가 남는 것이 없고 아쉽게만 느껴진다면 좀 더 전문적으로 구체화해볼 필요가 있다. 취미로 시작했지만 장차 제2인생의 커리어로 발돋움하길 원한다면 50플러스캠퍼스의 문을 두드려보자.
널리 알려졌다시피 도시는 대체로 각박하다. 매력도 편익도 많지만 경쟁과 계산이 불가피한, 일종의 정글이다. 그렇기에 흔히들 남모를 고독을 안고 도시를 살아가기 십상이다. 내가 아는 서울의 어떤 화가는 작업실에 쥐를 기른다. 외로워서 쥐를 기른다. 그는 아마 쥐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너도 외롭니? 나만큼 외롭니?”
쥐를 바라보며, 슬픈 노래를 부르는 가수처럼 그가 처량하게 늘어놓는 대사는 대강 그렇다. 그는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다. 무심한 세월을 관조한 끝에 그가 신중하게 내린 결론은 간명하다. 늙을수록 외롭다!
도시를 예찬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결례이겠지만, 내가 보기에 도시는 그리 성공한 작품이 아니다. 물질은 풍부할망정 인정이 메마른 탓이다. 물론 도시에도 인정스런 사람들이 왜 없으랴. 그러나 인정을 쓰기보다 인상을 쓰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거리의 행인에게 왜 쳐다보냐고 시비를 걸어, 마침내 죄 없는 사람을 먼지 나도록 늘씬하게 두들겨 패는 변괴마저 벌어지는 게 도시이지 않던가. 남의 흉을 볼 것도 없다. 나 자신부터가 그렇다. 나도 때로 거리에서 마주친 애먼 눈길에 까닭 모를 적의(敵意)를 느끼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이 타락한 영혼을 무슨 약으로 고쳐야 하나.
내가 나의 몰인정한 치부를 들여다볼 때면 부끄러워진다.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었지만 여차하면 옹색한 마음이 도드라진다. 운동장 사이즈의 넉넉한 마음그릇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항복! 대번에 주눅이 든다. 이럴 땐 헛살았다는 회의가 밀려든다. 쥐를 기르는 화가처럼, 다독이기 난처한, 먹먹한 외로움에 사로잡힌다. 나이 들수록 따뜻한 생각을 위주로 하고 싶고, 너그러운 가슴으로 만고의 불한당마저 살포시 감싸며 살고 싶지만, 웬걸, 심사가 뒤틀리면 간장 종지처럼 비좁아진다.
그러고 보면 이미 엉터리 인생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렇다고 쥐를 기르거나 쥐약을 마실 수는 없는 일. 궁지에 몰린 기분일 때, 나는 가급적 햇살 쪽으로 마음을 옮겨둔다. 따뜻한 추억을, 따뜻한 사람을, 따뜻한 정경을 떠올려 시린 가슴에 온기를 부여한다. 남도의 어느 산골 마을에서 만난 노부부의 얘기를 해볼까.
전라도의 외진 산촌을 돌아다니던 때였다. 도시의 소음과 아귀다툼이 침범 못할 후미진 산골. 도토리 키 재기를 하는 야산들의 품에 안긴 마을은 하염없이 낙후했으나 포근했다. 돌담을 두르고 옹기종기 들어앉은 농가들은 하나같이 허름했으나 정겨운 풍색이었다.
나뭇가지로 엮은 사립이 곱살한 어느 집 텃밭. 할머니 한 분이 동그랗게 웅크려 앉아 호미질을 하고 있었다. 호미질에 몰입된 그 얌전하고 바지런한 모습은 아무런 결함이 없이 수려했다. 시골 노인들과 나누는 담소는 늘 즐겁다. 그들의 입에서 순후하게 흘러나오는 인생사와 세사란 범상해서 공감이 쉬우며, 혹간 의표를 찌르는 얘기가 튀어나와 슬며시 나를 돌아보게 하는 게 아닌가.
나는 할머니 앞에 앉아 이모저모 소식을 물었다. 언제부터 이 마을에 사셨느냐, 읍내 오일장엔 자주 나가시느냐, 건강은 괜찮으시냐, 면사무소 복지계에서 출장 나온 김 주사처럼 시시콜콜 캐물었다. 별안간 쓱 출현해 눈앞에 앉은 인간이 돌팔이 약장수이거나 남파된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야박한 의심 따위는 눈곱만치도 하질 않는 게 분명해 보이는 할머니는 오직 선선히 응답했다. 마치 무슨 횡재라도 한 사람처럼 상냥한 대꾸로 일관했다. 사람의 입이란 친절을 베푸는 데 오직 그 용도가 있다는 양 자상한 언사들이 흘러나왔다.
얼마 뒤, 부디 건강하시라, 덕담을 건네고 일어서 나오려던 때였다. 할머니가 호미를 놓고 일어서더니 나를 잡아 세우는 게 아닌가?
“워매, 그냥 가실라고라? 쪼께 기다려보쇼잉!”
그냥 보낼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밥상을 차려 내올 테니까 잠깐 기다렸다가 먹고 가라는 채근이었다. 읍내 식당에서 점심을 이미 먹었던 나는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자못 합리적인 고사(固辭)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막무가내였다. 찬은 변변치 않지만 한술이라도 뜨고 가야 한다며 거듭 성화였다. 나는 사양에 사양을 반복했다.
“아따! 그러지 말고 잡숫고 가시랑게!”
할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거듭 식사를 권했다. 그러나 뱃속엔 이미 빈자리가 없으니 어쩌란 말인가. 나는 사정을 재차 주르룩 설명했다. 그때였다. 토방 빈지문이 열리더니 할머니의 서방님이 마루로 걸어 나왔다. 아마도 낮잠을 주무시다가 지상의 한낮에 벌어진 묘한 분쟁에 잠을 깬 모양이었다. 이 영감님은 단숨에 소란한 사태를 평정하겠다는 양 큰 소리로 탕탕 외쳤다.
“하이고, 한술 뜨고 가랑게 시방 어째 그러는 거시여? 엔간하면 자시고 가셔! 객지에 나오면 고생이잖여? 든든히 먹어둬야 한당게!”
이런! 남들이 이 희귀한 경치를 바라보았다면 셋이서 쌈박질을 하는 것으로 비쳤으렷다. 내가 노부부의 호의를 사양한 유일한 이유는 더 이상 밥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것이었으나 노부부가 나를 붙잡은 이유에 비하면 실상 무가치한 것에 불과했다. 할머니는 다음처럼 나직이 중얼거려 마침내 나를 꺾어버렸다.
“이날 이때까장 때 돼서 내 집에 들어온 사람, 밥 안 멕여 보낸 적이 없었는디 워째 그런당가?”
결국 나는 밥상을 받았다. 산골 노부부의 삶에 감도는 인간애, 육화된 인정에 탄복하며 밥을 먹었다. 내 부모 외에 그 누가 나에게 밥 한술 먹이고자 그토록 안간힘을 다했던가.
그리워라, 할머니가 차려준 조촐한 밥상이여! 정갈한 인정이여! 아무런 계산이나 속셈이 없는 그 도타운 인정을 그들은 어디서 얻어왔을까. 평소 이렇다 할 선행을 한 적이 없는 채, 그저 쌀벌레의 일종으로 살아온 나는 뭔가 켕겨 괴로웠으며, 또 심히 행복했다. 오늘날까지 지구의 인간 생태계가 그나마 무사한 것은 오직 그 노부부 덕분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봄기운이 완연한 4월. 곳곳마다 피어난 꽃구경에 눈이 호강하는 달이다. 이맘때쯤이면 주꾸미도 제철을 맞는다. 한껏 물오른 주꾸미를 더욱 특별하게 선보이는 곳이 있다. 올망졸망 기지개를 켠 꽃송이만큼이나 앙증맞게 짧은 다리를 활짝 편 주꾸미의 조화가 예사롭지 않은 이곳, ‘우미대가왕쭈꾸미’를 찾아갔다.
이 조합이 가능해? 한식과 양식이 한곳에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위치한 ‘서오릉(西五陵)’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자 사적 198호로 지정된 명소다. 다섯 능을 돌아보며 걷기에 부담 없어 봄나들이 코스로도 제격이다. 한 바퀴 산책을 마치고 나면 서오릉에서 도보로 10분 거리, 벌고개 인근 식당가를 찾게 된다. 식당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서 쓱 훑어보면 ‘우미대가왕쭈꾸미’ 건물이 눈에 띈다. 개나리처럼 노란 외벽에 갈색 지붕, 파란 창문이 인상적이다. 외관상으로는 카페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주꾸미집이라고 하니 조금 의아하게 느껴진다. 단순히 주꾸미 집으로 알고 들어서면 또 한 번 생소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이곳의 메뉴 구성이다. 주꾸미와 피자, 불고기와 파스타, 김치말이국수와 꽃 샐러드 등 색다른 조합이 가능하다.
국가대표 셰프가 만드는 요리 앙상블
한식과 양식의 독특한 만남은 총괄 셰프인 조우현 대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한민국요리 대표팀 ‘수라’의 팀장이자 감독을 맡았던 그는 2009 아시아컬리너리컵 대상, 2014 룩셈부르크요리월드컵 은상·동상을 수상하는 등 각종 세계요리대회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조 대표는 “아무리 톱 셰프일지라도 고객이 만족하는 음식을 만들 수 없다면 최고라 할 수 없다”는 철칙으로 고객의 입맛을 사로잡고자 했다. 그렇게 다양한 시도를 통해 탄생한 것이 지금의 메뉴들이다. “주꾸미 집에서 파는 피자가 맛이 좋겠어?”라고 시큰둥하다가도 막상 먹어보면 여느 피자 전문점 못지않은 맛에 감탄하게 된다. 오히려 그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피자 반죽만 해도, 취나물을 갈아 넣어 숙성한 도우를 사용한다. 일반 밀가루 도우보다 영양분은 물론, 더 쫄깃하고 담백한 식감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사시사철 만끽하는 봄기운 한 상
이곳 메뉴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재료가 있다. 바로 ‘식용 꽃’이다. 팬지, 카네이션, 패랭이, 국화, 장미 등 알록달록 꽃들이 피자와 샐러드 등에 올라간다. 크게 맛을 좌우하는 재료는 아니지만, 시각적으로도 예쁘고 기분도 산뜻해지는 요소가 된다. 단골들이 가장 선호하는 구성은 불주꾸미와 꽃 피자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세트 메뉴다.
외식을 하면서 이 세 메뉴를 한 상에서 만나볼 일은 극히 드물 것이다. 생소한 조합이지만 예상외로 궁합이 잘 맞는다. 매콤하고 쫄깃한 주꾸미볶음을 먹고 얼얼해진 입안을 폭신하고 고소한 피자가 달래준다. 반대로 치즈가 들어간 피자를 먹다가 느끼하다 싶을 때 칼칼한 주꾸미를 먹으면 입안이 개운해진다. 특별한 경험의 연속인 이곳에서는 물 한 잔도 평범하지 않다. 생수나 보리차 등 일반 식당에서 내오는 식수가 아닌, 로즈메리 허브차를 제공한다. 찻주전자를 고체 연료 위에 올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차가 따끈하게 유지된다. 티타임을 더 즐기고 싶다면 야외 정원 카페를 이용해보자. 투명한 벽면으로 된 카페에서는 아름다운 봄 풍경이 그대로 한눈에 담긴다.
아버지는 섣달그믐날 저녁에는 밤새도록 온 집안에 불을 밝혀놓아야 조상님들이 잘 찾아오실 수 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느새 해가 지면서 집안 곳곳에 불이 밝혀졌다.
어머니는 며칠 전 동네 방앗간에서 뽑아다 놓아 꾸덕꾸덕해진 가래떡을 써셨다. 설날 아침에 끓일 떡국 떡을 준비하시느라 밤늦도록 떡국떡 써는 소리가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뜨리곤 했다. 섣달그믐날에 잠자면 눈썹이 하얘진다는 속설 때문에 아이들은 졸린 눈을 비비면서 억지로 버티다 결국 자정 조금 넘은 시간에 모두 곯아떨어졌다.
어김없이 설날 아침은 밝아왔다. 아버지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큰 마당은 물론 아랫동네로 내려가는 마을 어귀까지 50여 미터 이상 말끔히 쓰레질을 하고 들어오면서 전날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직도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는 우리들을 대갈일성(大喝一聲)으로 깨우셨다. 새벽에 아버지가 말끔히 쓸어놓으신 길 따라 두루마기 옷고름 휘날리면서 사촌 남동생들 앞세워 휘적휘적 대문 안으로 들어서시는 작은아버지의 손에는 정종병이 달랑 들려 있었다.
드디어 대청마루에 정성껏 차례상이 차려지고 조상님의 상청이 열렸다. 설빔으로 모두 갈아입고 대청마루에 서니 그 숫자만 해도 열서너 명쯤 되어 보인다. 필자의 형제는 8남매, 그중 아들이 5형제. 작은아버지의 자손들까지 순서대로 늘어서 있으니 대청마루가 꽉 찼다.
차례 예식이 시작되면 조상 윗대 할아버지에서부터 차례차례 떡국과 빚은 술을 정성껏 올리신 후 아버지는 나직한 헛기침을 하셨다. 그 신호에 맞추어 우르르 엎드려 절을 올렸다. 필자를 포함해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어른들 따라 대청마루에 쪼르르 엎드린 채 어른들이 언제 일어나나 좌우로 눈치를 살피곤 했는데 그때마다 항상 늦게 일어나는 아이가 있어 킥킥대며 웃기도 했다. 모두가 일어설 때 엎드리고, 엎드릴 때 일어서는 아이 때문에 안 그래도 겨우 참고 있었던 웃음보가 터지면 참으려고 애를 써도 웃음은 멈추질 않았다. 열 번도 넘게 절을 하는 동안 킥킥거리는 아이들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아버지는 산만해진 아이들 쪽을 쓱 한번 훑어보셨다. 그러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모두들 움찔 놀라 얼어붙은 표정이 됐다.
침묵이 흐른 다음 아버지는 다시 눈빛을 풀고 차례를 마치셨고, 불호령이 떨어질 줄만 알았던 아이들은 아버지가 “조반을 서두르거라!” 한마디 하면 “휴! 천만다행이다!”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머니의 정성이 깃든 떡국으로 아침상을 물린 후 아버지가 미리 준비해놓은 음식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서면 아이들도 따라 부지런히 선산(先山)으로 향했다.
산소 위에 남은 잔설을 치울 때도 있었지만, 눈이 아주 많이 왔던 어느 해에는 눈 위에 그대로 돗자리를 펴고 절을 했다. 조상님에 대한 아버지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은 손과 발이 시려 꼼지락거리기 일쑤였다.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동네 어르신들이 모인 사랑방에 들러 한 분 한 분께 세배를 하며 새해 인사를 올렸다. 이때 어르신들은 덕담과 함께 세뱃값으로 한과(漢菓)나 떡, 식혜 등을 내놓았으며 슬그머니 눈깔사탕을 손에 쥐어주셨다. 달콤했던 그 맛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간식거리였다. 세뱃값으로 먹을 것을 내놓았던 그 시절은 참으로 마음이 풍요로웠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요즘 아이들처럼 세뱃돈 받으려고 미리 계산을 하거나 떼를 쓰지도 않았다.
아파트이건, 오피스텔이건 집이 깔끔하고 살만하다 싶으면
비싸다. 가격도 문제이지만 필자는 동네 형님들이나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더 안 내킨다.
뭔가 집안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보자.
두 아이들이 우리부부의 품을 떠난 주말
너무 허전하고 아이들이 보고 싶고 안쓰럽고 걱정도 되면서
그래 확 이사도 가고 싶고, 변화도 갖고 싶고 그냥 살아야할 현실 속에서 고민한다.
필자는 아들 방으로 홈카페물건 넣어두었던 것을 아들 책장을 갖고나와
혼자작은발매트아래에 깔고 살살 끌고 나와서 tv옆으로 두고 홈카페의 물건을
옮겨본다.
신혼시절 작은 방에서도 이렇게 옮겨봐야지 하면 남편이 출근한 뒤에 혼자 이렇게도
저렇게도 바꾸곤 했다.
왜 이렇게 힘들게 하냐고 걱정해주던 남편이 역시 뭔가 집안가구나그릇을 움직이는 소리에
방에서 나와 걱정해준다.
별로 큰 움직임이 아닌 줄 알고 있다가 거의 이사가는집수준으로 해놓으니
어쩌려고 이러냐고 밥도 안 먹고 일하는 필자를 위해 중구집전화번호 쓱 가져가서
간짜장을 주문해준다.
이번 추석 때도 아이들 두부부가 이야기만 하고 과일 먹고 커피마시고 엄마만 애를쓰니
설거지를 좀 하면 안 되냐고 내편을 들어준 남편은 확실한 내편이다.
오래살기를 바란다.
감사히 간짜장먹고 다시 집안에서 가구의 대이동이 이뤄진다.
가구 속의 홈카페의 생두나 커피 잔으로 쓰는 도기류나 유리잔세트는 물론
책장이라 책도 모두 꺼내서 다시 내려놨다가 또 옮기고 내일은 일요일이라
저질렀는데 생각보다 너무 무거운 찜질기가 복병이었다.
친정엄마께서 살아계실 때 교통사고 당한 딸을 위해 사주신 제품이기도
하지만 따뜻하고 시원하고 아주 좋은 고가의 찜질기라 거실 쪽으로 움지이니
어머, 삭신이 쑤실 테지만 힘좀 썼다.
두손,두팔,심지어 두 다리를 지렛대삼아 밀기도 한다.
미쳤나보다. 왜 시작했나. 할 정도이다.
막내아들 결혼 후 외국으로 일하러 나간 후 첫 주말이다.
오늘 밤 잠은 다 잔 것같아 내몸을 힘들게 하고 뭔가 허탈하고 무기력해지는 나를 못살게 하고 싶은데 새로운 분위기를 위해 가구를 새로 구입할까 아니면 슬라이드 장으로 짜야하나
상담하러 갈까 하다가 집에 있는 아들이 두고 간 책장을 이용해본다.
홈카페장이 있던 자리엔 김치냉장고를 가져온다.
물론 이것도 머리로 그림을 그려본 내용이다.
계속 하다 보니 오후3시쯤 시작한 일이 밤 11시가 다 되어 마치게 되었다.
그런 김에 청소도 하고 버릴 것도 버리고, 집안 분위기도 바꾸고 일석삼조이다.
대단하다. 필자는 온몸이 힘들지만 아주 대 만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