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위한 내 꿈, 다시 뛰는 4050’ 캠페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서울시 보람일자리사업을 통해 인생의 재도약을 꿈꾸는 4050 세대를 응원하기 위해, ‘모두 위한 내 꿈, 다시 뛰는 4050’ 캠페인을 펼칩니다. 본지는 서울시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함께한 보람일자리 사업을 통해 사회 곳곳에서 공공에 기여하고 있는 중장년들을 소개합니다.
중년 이후 찾아온 여유. 그러나 무료하게 보내는 ‘빈 시간’이 계속되자 일상은 무기력해졌다. 나를 채워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마침 보람일자리 도서관지원단이 눈에 띄었다. 접수 마감 1시간을 남긴 때였다. 정신없이 서류를 작성하면서도 망설임은 없었다. 결과는 합격. 김요경 씨는 “이 일을 하게 된 건 운명과 같다”고 말한다.
더브릿지 작은도서관. 아담한 공간에는 아이들을 위한 도서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도서관 업무는 난생처음이지만, 아이들을 상대하는 일은 낯설지 않은 김요경 씨다. 두 자녀의 엄마이자 수학학원 강사로 지낸 경험 덕분이다. 최근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왔지만, 그는 소위 말하는 ‘경단녀’(경력단절 여성) 시절을 겪었다. 본업은 컴퓨터 프로그래머. 당시는 개인용 PC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로, 각광받는 직업 중 하나였다. 전산통계학과 졸업 후 공장자동화 프로그램을 주로 개발했는데,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일을 그만두게 됐다. 자녀 친구들을 가르치다 학원 강사까지 했지만 원하던 길은 아니었다. 그렇게 그의 경력은 쓸모를 잃어가는 듯했다.
“프로그래머나 수학 강사나 해온 일은 이과 쪽인데, 도서관지원단 일은 문과에 가깝잖아요. 막상 내 적성에 맞을까 걱정되더라고요. 사실 여기 관장님께서도 보람일자리 파견을 처음 받아보신 터라, 제게 어떤 일을 맡겨야 할지 고민하셨죠. 일단 제가 잘하는 일이면서 도서관에 도움이 될 일을 찾는 게 관건이었습니다. 보니까 도서관 홈페이지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제가 만들어보겠다고 했죠. 관장님께서도 만족해하셨고, 그렇게 만든 홈페이지가 지금 쌩쌩 잘 돌아가고 있답니다.”
자신감 심어준 ‘보람’일자리
물론 그는 도서관 본연의 업무인 서가 정리 및 도서 관리, 북큐레이션 지원 등의 업무도 소화한다. 그러면서 프로그램 홍보물을 직접 제작하고, 도서관과 연계된 그룹홈 아이들의 학습을 지원하는 등 그간의 경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자신의 모든 걸 할애하면서도 역으로 더 많은 걸 얻어가는 요즘, 하루하루 보람을 채워가고 있다.
“보람일자리에서 ‘일’도 중요하지만, ‘보람’이 주는 게 더 큰 것 같아요. 특히 관장님이나 담당 사회복지사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배웠어요. 사실 노후에 뭘 할까 고민하다가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땄거든요. 경제적인 부분을 고려한 선택이었죠. 그런데 이제는 ‘나도 작은도서관을 한번 만들어볼까, 어떤 봉사활동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노후 계획도 결이 많이 달라진 셈이죠. 그렇게 보람일자리는 저를 또 다른 세상으로 연결해줬어요.”
보람일자리 참여 후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를 묻자 “바로 지금”(인터뷰하는 것)이라 답했다. 그렇게 매 순간 새로운 경험과 마주하고, 새록새록 호기심이 생겨나며 무력했던 일상도 활력으로 가득해졌다. 그리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와 자존감도 생겨났다.
“여기 와서 관장님께서 칭찬도 많이 해주시고, 서울시50플러스재단 담당자분들도 북돋아주신 덕분에 상당히 자신감을 얻었어요. 잘한다고 하니 어린애처럼 더 열심히 하고 싶고, 동기부여도 되더라고요. 앞으로 꼭 뭐를 하겠다고 정해두진 않았지만, 이것저것 둘러보고 배워가며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볼 계획입니다.”
긴 노후, 실현 가능한 도전을 향해
젊은 시절 못지않은 의욕을 불태우지만, 아무래도 나이 때문에 체력의 한계는 무시 못 한다는 김요경 씨. 인생 1막과 2막의 차이를 ‘건강’에서 느낀다고 했다. 무모한 도전보다는 심신을 돌보며 차분히 노후를 준비하겠다는 다짐이 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난해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겠다고 엄청나게 무리했어요. 어지럽고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갔다가 뇌경막하수종 진단을 받았어요. 그때 비로소 나이를 체감했죠. 인생 1막과 2막의 경계도 아마 그런 것 같아요. 뭔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게 있겠구나 깨달았습니다.”
의욕과 달리 체력이 부족해 도전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을 테다. 자칫 좌절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는 오히려 욕심을 비워내고 감사하는 마음을 들여놓기로 했다.
“저희 시어머니께서 103세까지 장수하셨는데, 100세 때 그러시더군요. 마음만큼은 열여섯이라고요. 제 마음도 그래요.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마음이야 그렇지만 무모하게 도전해서 건강 잃으면 손해잖아요. 이제 노후는 길게 봐야 하니까요. 욕심을 내려놓고, 어떤 목표나 기준점도 살짝 낮추려고 해요. 대단하지 않더라도 내가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감사히 여기고, 앞으로도 성실하게 살아가려 합니다.”
옷장 깊숙한 곳에 있는 셔츠, 철 지난 바지도 얼마든지 멋지게 입을 수 있다. 10년, 20년 뒤를 꿈꾸게 하는 ‘취향 저격’ 멋쟁이를 발견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좋다. 취향 앞에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면, 노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김동현 사진작가의 사진과 감상 일부를 옮겨 싣는다. 다섯 번째 주제는 ‘목도리’다.
1 ‘타이다이 아버님’. 타이다이(옷을 끈으로 묶은 다음 염색하는 방식) 청바지를 입고 계셔서 ‘타이다이 아버님’이라고 했다. 독특한 패션에 비해 목도리는 차분한 편이다. 패션의 밸런스를 맞춘 느낌이다.
2 ‘빨간 니트 어머님’. 빨간 니트를 목도리로 활용하신 어머님. 블랙과 레드의 조합에서 패션 센스와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3 ‘회색 코트 어머님’. 대구 중앙로에서 촬영하고 있는데, 지하철역에서 나오시는 어머님이 눈에 들어왔다. 브랜드 펜디의 머플러가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어머님은 지하철역 입구에서 자신감 있게 포즈를 취해주셨고, 그 순간이 카메라에 담겼다.
4 ‘첼시 부츠 아버님’. 전체적인 패션 톤이 ‘갈색’이다. 목도리부터 첼시 부츠까지 갈색 톤이 깔끔하게 이어진다.
5 ‘최훈석 아버님’. 지난해 추운 겨울 동묘를 돌아다니던 중 니트 목도리에 독특한 가방을 든 아버님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미군이 연상되는 패션인데, 실제로 과거 미군의 방독면 가방을 착용하셨다고 했다.
6 ‘보랏빛 향기 어머님’. 모자부터 옷, 가방, 그리고 목도리까지 모두 보라색이다. 어머님의 수줍은 미소와 보라색이 잘 어울린다.
7 ‘주황 목도리 아버님’. 해사한 미소가 인상적인 아버님. 셔츠와 비슷한 패턴의 목도리로 패션에 포인트를 줬다.
문화 예술 활동을 통한 고령사회 문제 해법을 찾기 위해 열린 2023 실버문화포럼에서 고령자 다양한 문화적 욕구에 대한 열띤 토론이 진행됐다. 이번 포럼에 모인 전문가들은 베이비부머 세대가 노인 인구로 편입되면서 욕구가 다양해졌다면서 이들의 특성에 맞춘 문화 프로그램들이 필요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국문화원연합회 주최하고, 시니어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주관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한 실버문화포럼 ‘실버 두 잇! 꽃대를 꿈꾸며’가 27일 서울 마리나 행사장에서 진행됐다.
포럼 사회는 이호선 숭실사이버대학교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가 맡아 분위기를 유쾌하게 이끌었다.
개회사에서 김태웅 한국문화원연합회 회장은 “인구의 32.6%를 차지하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노인으로 편입되는데, 노년이라는 단어가 부정적 이미지가 있어 ‘실버’라는 말을 많이 쓴다. 하지만 그보다는 영-올드(young-old) 세대로 살아가는 게 좋지 않나 생각해본다. 꽃대가 되어 꽃을 잘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면 도리어 인정받고 존경받는 노년 생활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라며 “이번 포럼을 통해 실버 세대의 생각이 바뀌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포럼의 시작을 알렸다.
김종훈 이투데이피엔씨 대표 역시 개회사를 통해 “인류학자들이 평균수명을 120세로 전망한다는 건 상당수가 130세까지도 살 것이라는 의미로 노년기의 신체나이도 젊어지고 있다. 실버 세대를 노인이 아니라 이제는 인생 2막을 꿈꾸고 가꾸는 ‘후기청년’ 세대로 봐야 한다”면서 “이번 포럼에는 세대 간 벽을 허물고 꿈과 문화, 세대를 잇고 엮어보자는 의미를 담았다. 이제는 후기청년이 된 실버세대가 꼰대가 아니라 청년들이 피울 꽃을 받쳐줄 꽃대가 되기를 바란다”고 응원했다.
문화 경험이 활기찬 노년 만들어
김태웅 회장과 김종훈 대표의 축사에 이어 기조강연과 3명의 연사 강연이 이어졌다. 기조강연을 맡은 박영란 강남대 실버산업학과 교수(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민간위원)는 ‘100세 시대 건강하고 활동적 노년을 위한 문화 패러다임 전환’에 대해 말했다.
박영란 교수는 “최근 노화를 이야기할 때 ‘창조적 노화’라는 말을 많이 한다. 문화적 관점에서 노화를 본다는 것인데, 나이가 들어 창의적 활동을 얼마나 하느냐에 따라 질병 예방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도 나오고 있다. 노년기 문화적 활동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라고 진단하면서 국내외의 다양한 고령자 문화 활동 사례를 소개했다.
박 교수는 “10년 안에 인구 절반이 50대가 된다는 것이 현실이고 향후 문화 활동에 대한 욕구나 수요가 폭발할 텐데 이를 수용할 인프라가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보면 할 일이 많다. 100세 시대에 건강하고 활동적인 노년기를 보내기 위해서는 문화적 환경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건강한 고령자뿐 아니라 몸이 아픈 고령자도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국내외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면서 “확실한 것은 무엇보다 다양한 베이비부머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양한 문화 활동이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에 정말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윤소영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박사는 ‘대상 세분화 전략을 통한 실버 문화정책의 방향’에 대해 발표했다. 노인 문화 정책이 어느 시점까지 와 있으며, 해당 정책 수혜자인 고령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을 다룬 강연이었다.
윤소영 박사는 “우리나라 고령자의 문화·여가 생활을 지원하는 정책은 수혜자인 고령자를 문화를 향유하는 대상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앞서 기조강연에서 박영란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고령자도 문화적 생산자일 수 있다. 따라서 고령화 사회에서 문화 정책은 장기적으로 수혜자가 원하는 방식 또는 그들의 잠재적 욕구를 끌어내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분석했다.
이어 “60세에 갑작스럽게 이전에 해오지 않던 것을 새롭게 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면서 내 몸에 문화 나이테를 새겨야 한다. 일 경력뿐 아니라 레저 경력도 쌓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야 생애주기에서 후반기에 들어섰을 때 여가 경력과 축적된 문화 자본이 발현된다. 중요한 건 문화적 경험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고령층을 세분화하고 문화 지원 전략도 세분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현준엽 로쉬코리아 대표는 ‘문화여가 산업을 통해 발견한 베이비부머의 문화적 욕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현준엽 대표는 “먼저 액티브 시니어를 다시 정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통 액티브 시니어라고 하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이들만 떠올리지만, 시장에서의 액티브 시니어는 좀 달랐다. 시니어에게 여가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고민하면서 내린 결론은 ‘내 삶을 적극적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이를 누군가 도와준다면 크든 작든 지불 의사가 있는 사람’이 액티브 시니어라고 본다”면서 “이들의 문화적 욕구는 다른 세대와 다르지 않다. 잊지 못할 즐거운 경험을 선사 받는 것이다. 이들의 행복을 찾고자 하는 잠재적 욕구도 정말 크다. 전국에 500개 정도의 문화 인프라가 있는데 한 달에 수용 가능한 시니어는 4만 명이 채 안 된다. 1500만 명이 넘는 시니어 인구 중 오프라인에서 여가를 즐기고 싶은 이들은 10% 남짓으로 약 15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이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50대 이상 시니어들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다른 세대와 마찬가지로 문화적 욕구는 높으나 그것을 만족시키기는 매우 어렵다. 그런데 문화 공급자들은 정해진 틀 안에서 여가를 제안하고 있다. 트렌드를 잘 읽고 보여주는 OTT처럼 문화 공급자들도 시니어의 경험을 넘어서 접근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제공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유소영 과천문화원 팀장은 ‘실버 두 잇! 우리는 꽃대 현장 사례’를 통해 현장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유소영 팀장은 운영하고 있는 ‘경험 공유 학교’ 사례를 다양하게 소개했다. 유 팀장은 “딴짓하기 워크숍, 서로의 이슈를 들어보는 이슈 워크숍, 나비 워크숍 등 다양한 활동을 했고 마을 잡화 활동, 낙서 예술 학교 등 프로젝트 5개를 운영하면서 어르신들은 스스로 무언가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마을 잡화 활동으로 지역 곳곳에서 설문조사를 다니던 한 어르신은 실버기자단에 들어갔다더라”면서 “이렇게 꽃대가 될 어르신들은 혼자보다 여럿이 함께할 때 더 좋은 에너지를 내는 것 같다. 지역 활동가, 청년 활동가, 컨설턴트 선생님, 한국문화원연합회, 과천문화원 등이 경험을 공유할 장을 만들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가능했던 것 같다”며 고령자의 문화 활동은 여럿이 함께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이날 포럼에서 전문가들은 “고령자의 문화적 취향은 굉장히 다양하고 이를 반영할 인프라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65세 이상 노인이라고 해서 한 집단으로 묶어 같은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사는 곳도, 사는 방식도, 사는 사람도 다 다른 다양한 개인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령자를 대상으로 하는 문화여가 프로그램이나 지원, 정책 등이 이들의 다양성을 세분화해서 반영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가 귀농한 지 어언 15년이 지났지만, 처음이나 지금이나 농장의 모습은 변한 게 없단다. 처음부터 그냥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농사를 지었는데, 지금도 그냥 그렇게 자연의 생리를 좇아 일을 지속하고 있다는 거다. 한 가지 변한 건 있다. 처음 몇 가지 소소하게 길렀던 채소, 과일, 화초의 수가 자그마치 300여 종으로 늘었다. 그 많은 식물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지? 그다지 넓지 않은 농장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려도 단박에 알아보기는 불가능하다. 비정형적으로 또는 제멋대로 작물이 산재하고 있거니와, 그마저도 수북이 자란 풀들과 동거하기 때문이다. 얼추 야생의 풀밭을 연상시키는 농장이다. 그렇다면 이건 지리멸렬한 농사의 산물? 아니다. 농장주 한은영(59, 아르아르농장 대표)은 옥천군에서 알아주는 이가 많은 선진농업 경영인이다. 매우 독특한 농법으로 순풍을 돛에 매단 배처럼 질주하고 있다.
서울에서 살았던 한은영이 이곳 옥천군 외진 시골로 내려와 관심을 가진 건 양봉이었다. 과천시 변두리에서 양봉을 했던 부모님의 어깨너머로 좀 익힌 양봉 기술이 있어서였다. 그래 벌통 몇 개를 놓고 소규모 양봉 농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진정한 관심사는 자급자족에 있었다. 이왕 시골살이를 할 거라면 내가 먹을 건 내 손으로 길러 취하자는 생각으로 텃밭 농사 스타일의 농장을 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겐 수칙 하나가 있었다. 농약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농법을 시종일관 유지하겠다는 기본 방향을 설정한 것이다. 농장은 한적하고 조용한 야산 아래에 있다. 저 멀리 사방에도 나지막한 산들이 펼쳐져 싱그럽다.
“이곳에 터를 잡은 건 아늑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아, 좋다! 우연히 지나가다 만난 곳이지만 첫눈에 호감을 갖고 탄성을 터뜨렸다. 양봉을 할 만한 밀원(蜜源)도 있어 적격이었다. 무엇보다 먹거리를 자급하며 재미있게 살 수 있는 산골이라는 생각에 즐거웠다.”
여기에서 산 15년 가운데 절반의 세월이 흐르기까지는 자급자족을 위한 작은 농사를 했을 뿐, 계획적인 생산이나 판매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지?
“그렇다. 애초 무슨 구상을 가지고 귀농을 한 게 아니었다. 그저 농약 치지 않은 깨끗한 먹거리를 길러 건강한 밥상을 차리고, 거둔 것들을 친지나 이웃들과 나누자는 데 가치를 두었다. 따라서 비닐하우스 두 동 외에 농업 시설이나 장비를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시작한 귀농의 나날은 정신적으로 여유로웠다.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살아 유쾌했다. 작물을 가꾸고 꽃을 키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농사 초심자였던 만큼 유기농에 필요한 기술 습득이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초기엔 씨앗이 싹을 틔우고 싱싱하게 잘 자라는 재미에 빠져 무엇이든 갖다가 잔뜩 심었다. 한 평 땅에 20여 가지 채소류를 가꾸기도 했다. 서툰 재배 기술은 마을 어르신들에게 여쭈어 보완했다. 그런데 농업기관에서 나온 이들이 작물마다 특화된 농약과 비료가 있다며 만류하더라. 자칫 다 죽을 수 있다면서. 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 얘기였다. 있는 그대로 자연조건을 고려해 심은 식물들이 잘 자라는 걸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수확량은 관행 농사보다 적을망정 생태농업을 통해 깨끗한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게 너무도 좋았다.”
이곳에서처럼 무농약농업, 생태농업을 하는 농가가 드물지 않다. 그러나 수익성이 낮아 흔히 고전한다.
“무농약농업은 제초 작업부터 버거운 게 사실이다. 나는 풀을 베어 거름을 만들거나, 발로 밟아 쓰러뜨려놓거나, 그냥 그대로 놔둔다. 농토를 최대한 자연 상태 그대로 두고 식물을 기르는 게 사리에 맞다는 생각에서다. 한때는 소 한 마리를 기를 생각도 했다. 기계장비로 밭을 가는 것보다 소 쟁기질로 일을 처리하는 게 땅이라는 자연을 존중하는 길이라고 봤는데, 소 한 마리 사육을 위한 축사 허가가 불가능한 걸 알고 포기했다.”
생계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나? 먹거리 자급자족만으로는 생활 유지에 한계가 있었을 텐데.
“소득원이 있었다. 서울에서 해왔던 직업 활동의 일부를 이곳에서도 틈틈이 계속해 문제를 해결했다. 경제적 불확실성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판매 목적의 농사 방식을 선택했을 것 같다. 농사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고 살지는 않았다.”
긍정적인 신호로 가득한 나날들
한은영에겐 서울에 근거를 두고 활동했던 직업이 있었다. 그는 국악을 전공했다. 비파라는 전통 현악기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활동했다. 한동안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비파를 복원한 유공자이기도 한 그는 강의를 했고, 제자를 양성했다. 이와 같은 경륜과 재능 일부를 시골 생활에 접목했다. 이를테면 원데이 클래스 같은 걸로 일정한 수입을 얻으며 긍정적인 신호로 가득한 나날을 꾸려왔던 것이다.
이채로운 건 또 있다. 그는 여동생 한은미(57)와 이곳에서 함께 산다. 즉 이 농장은 자매가 지향점을 공유하며 공동으로 일군 노력의 소산이다. 한은미도 예술을 전공했다. 금속공예로 기량을 발휘했다. 이런 한은미 역시 텃밭 농사를 즐기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지역에서 공예 관련 일을 함으로써 수입원으로 삼았다. 언니와 마찬가지로 인근 학교 아이들에게, 또는 농장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재능을 나누며 생활에 지장 없는 수준의 소득을 올렸다. 농장에선 자매의 컬래버레이션으로 기획된 예술적 프로그램이 자주 펼쳐졌던 것 같다. 어쩌면 농장이 통째 두 사람의 예술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날갯짓하는 오픈 스튜디오, 혹은 꿈의 공간일지도. 한은미는 요즘 인근 학교의 도서관 사서로 일한다. 이날도 출근해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삶이란 묘한 것이다. 사람을 미처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데려가기도 하니까. 변신이랄까, 한은영은 귀농 중기에 이르러 완전한 농부가 됐다. 직업으로 농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먹거리를 스스로 해결하는 한편 이웃들과 결실을 나누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으나, 시나브로 농장 상황에 한결 긍정적인 변화가 오면서 판매 활동에 나서게 됐다.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풀들과 함께
본격적인 농사, 그러니까 남들에게 생산물을 팔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나?
“7~8년 전부터다. 당초 농작물 판매는 계획에도 없었고 예감하지도 못했다. 일찍부터 우리 농장엔 방문객이 많았다. 구경 삼아, 체험 삼아 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풀밭에서 자라나는 온갖 식물들을 신기해했다. 단장을 하지 않아 농장은 어수선했지만, 말 그대로 ‘자연이 준 선물’에 가까운 친환경 생산물을 거둔다는 데 관심을 갖고 지지해줬다. ‘정신 나간 농사’라는 말도 들었지만 말이다.(웃음) 그러나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조차 우리가 나누어준 먹거리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구매를 원했고, 그 수가 날로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 부응해 상업적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저절로 고객층이 형성되다니. 이는 흔히 보기 어려운 신개념 판매 루트에 가까울 것 같다. 농민들에게 가장 어려운 판로 문제가 선행적으로 자동 해소된 ‘넘사벽’ 마케팅이다.
“구매를 원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입소문도 덩달아 나서 주문이 잦았다. 그런 상황 변화에 따라 농장 일이 한결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택배 꾸러미를 만들어 배송을 하거나 로컬푸드 마켓을 통한 판매 활동 같은 게 일상화된 지 이미 오래됐다. 소규모 농장이라 생산 물량은 많지 않다. 매출도 크진 않지만 일찌감치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했다. 읍내 재래시장 안에 작은 가게도 차렸다.”
가게까지? 어떤 물건을 판매하나?
“식당 겸 농산물 매장을 겸한 공간이다. 먹을 수 있는 약용 꽃들을 콩처럼 넣어서 지은 밥으로 만든 ‘꽃김밥’이 주력 상품이다. 모든 상품이 자연농법으로 거둔 청결한 것들이라 인기가 있다.”
농장 연매출액은 얼마나 될까?
“농산물 판매와 체험 교육으로 얻는 수입, 그리고 식당에서 나오는 매출 등을 합해 1억 원 이상이다.”
적지 않은 매출이다. 한은영은 애초 생태농업에 관한 인식조차 없이 그저 당연지사처럼 자연환경에 순응하는 농사를 시작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풀들과 공생하는 농사를 지속하고 있다. 이런 생활이 그는 즐겁다. 소농이지만 상당한 수준의 이득을 내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어쩌면 불안하거나 순진한 농사라 할 수 있는 생태농업의 가치와 지속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얻는 자신감과 보람 역시 크기만 하다. 그의 농사를 두고 ‘이상적인 미래 농업의 모델’이라 하는 평하는 사람도 있다. 한은영의 농사법엔 인상적인 게 더 있다. 주변 농가들과 협업하는 방식이 그렇다.
“농사에 욕심부릴 것 없다는 생각이다. 가령 토마토 3개를 수확했다고 가정할 경우, 그중 하나는 내가 먹고, 하나는 이웃과 나누고, 나머지 하나는 자연에 돌려주는 게 옳다는 생각으로 농사를 지어왔다. 특히 나의 농장 일이 이웃 농민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마음을 썼다. 예컨대 마을 분들을 나의 고객들과 연결시켜 농산물 판매를 적극 거들곤 했다. 이렇게 하면 그들도 어떤 식으로든 우리 농장 일을 돕는다.”
농사는 물론 식당 일까지 하느라 일상이 매우 분주할 것 같다. 한 이틀쯤 완전한 자유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나?
“이걸 어쩌나? 난 자유에 갈증을 느낀 적이 없다.(웃음) 내 딴엔 즐거운 일상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식당 일도 어렵지 않다. 시장 할머니들과 사이가 좋아 사나흘 가게에 못 나가도 그분들이 알아서 척척 장사를 대신 해주신다. 행운처럼 난 귀농 이후 많은 주민들과 좋은 인연을 맺었다. 이 역시 즐거운 생활의 원천이다.”
10년 후 당신의 농장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10년 전 과거의 모습과 현재가 다르지 않듯이, 10년 뒤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풀들은 여전히 가득하고, 새들과 곤충들이 지천이고, 그냥 지금처럼 그렇게.”
현실에 만족이 커서 미래에도 별다른 기대가 없다는 얘기다. 현재 그가 지닌 고민은 딱 한 가지. 어떤 방법으로 지역 친환경 농가들의 이익 창출에 이바지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자신의 농사는 이미 자리를 잡았으니, 이젠 남들을 도울 차례라는 것이다.
한은영이 주는 귀농 Tip
•시골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귀농 생활로 만족을 누리려면 우선 소박한 삶의 방식을 기획하자.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감성을 끌어내 마음을 돌보는 일도 중요하다. 그게 ‘소확행’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농사로 성공하기 쉽지 않다. 치밀한 준비 없이 귀농해 큰돈을 벌 욕심에 사로잡힐 경우 실족할 가능성이 높다. 생계유지조차 버거울 수 있는 게 농사라는 걸 유념하자. 큰돈을 벌고 싶다면 차라리 도시에서 사업을 하는 게 낫다.
•과도한 투자를 하지 마라. 농토도 가급적 작게 확보해 농사를 시작하는 게 안전하다.
•그림 같은 집보다 편안한 집을 지어라.
•좋은 풍경만 보고 산속 외진 곳에 터를 잡는 건 좋지 않다. 밤마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질려 떠날 수밖에 없는 불운을 초래할 수 있다.
편안한 직장 상사이고 싶을 때
매일 가는 회사지만 하루쯤 달라 보이고 싶다면?
‘화이트 앤드 블랙’의 클래식 룩에 ‘스카프’로 포인트를 준 간절기 맞춤 패션이다. 특히 얇고 긴 트윌리(Twilly) 스카프 활용을 추천한다.
단정한 느낌을 주는 남색, 블랙 등 어두운색의 원피스를 활용해보자. 허리 벨트, 목걸이나 귀걸이 등의 액세서리로 포인트를 주면 좋다. 이번 F/W 시즌에는 골드 액세서리가 유행이라고 하니 참고하자.
야외 활동 즐기고 싶을 때
산책부터 등산, 캠핑 골프까지 활동을 즐기는 중년은 주목.
야외 활동을 한다고 해서 트레이닝복, 등산복을 입을 필요없다. 평상시에 입는 상의를 그대로 착용해도 된다. 무엇보다 캐주얼한 니트는 간절기에 제격인 아이템이다.
하의는 청바지나 밴딩이 들어간 팬츠를 추천한다. 편안해 보이면서도 클래식함을 잃지 않는 패션이 완성된다.
센스 있는 학부모가 되고 싶을 때
학교나 학부모 모임에서 주눅들 걱정 없는 패션.
50대 학부모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특효약은 화려한 옷이다. 옷장 속, 컬러풀한 옷을 꺼내 입어도 좋다. 스타일링에 힘을 주면 저절로 자신감이 높아진다.
하의는 슬렉스나 부츠컷 청바지가 적당하다. 화려한 상의 아래 스커트를 입으면 과해 보일 수 있다. 깔끔한 스타일 팬츠로 세련미도 놓치지 말자.
취재 손효정 기자shjlife@etoday.co.kr, 기획 문혜진 기자hjmoon@etoday.co.kr, 의상 반포드레스, 모델 정윤선·박지영
계절이 바뀌는 간절기는 패션 스타일링이 어려운 시기다. 무슨 옷을 언제 어떻게 입을지 고민이거나, 외출 전 옷장 앞에서 서성이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상황별 코디 세 가지를 참고해보자.
STYLE 1. 편안한 직장 상사이고 싶을 때
열심히 살아온 당신. 직장 내에서 팀장, 부서장 등의 직급에 있을 것이다. 매일 가는 회사지만 하루쯤 달라 보이고 싶다면, 이 코디를 추천한다. ‘화이트 앤드 블랙’의 클래식 룩에 ‘스카프’로 포인트를 준 간절기 맞춤 패션이다. 특히 얇고 긴 트윌리(Twilly) 스카프 활용을 추천한다. 이렇게 입고 회사에 가는 순간, 카리스마와 편안함을 모두 갖춘 상사가 될 수 있다.
STYLE 2. 캠핑, 골프 등 야외 활동 즐기고 싶을 때
산책부터 등산, 캠핑, 골프까지, 건강관리가 중요한 중년은 다양한 야외 활동을 즐기고 있다. 이제 트레이닝복, 등산복 등을 입는 시대는 지났다. 정유정 반포드레스 대표는 “편안해 보이면서도 중년의 우아함과 클래식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STYLE 3. 센스 있는 학부모가 되고 싶을 때
결혼과 출산이 늦어짐에 따라 50대 학부모도 늘어난 상황이다. ‘학교도 방문해야 하고 학부모 모임에도 참석해야 하는데, 젊은 엄마들 사이에서 주눅 들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할 수 있다. 그 고민을 해결해줄 특효약은 바로 화려한 옷이다. 스타일링에 힘을 주면 저절로 자신감이 높아진다.
의상 반포드레스
‘소중한 나’를 슬로건으로 하는 중년 여성 패션 쇼핑몰. 30대부터 70대까지 고객의 연령대 폭이 넓다. 반포드레스 대표 정유정은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고 있는데, 구독자가 6만여 명에 이른다.
모델 정윤선, 박지영
시니어 모델 정윤선, 박지영은 시니어 모델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엘리트모델에이전시 소속이다. 정윤선과 박지영은 모두 ‘트리플루트’(여성 패션 브랜드) 서포터스로 활동 중이다.
젊은 시절 모델 경력이 있는 정윤선은 지난해 10월 시니어 모델로 활동을 재기했으며, 한복 패션쇼에 주로 참여했다. 박지영은 ‘한식 레스토랑 서리재’ 홍보영상 CF 출연, ‘어바웃엠브로’ 룩북 모델 활동 경력을 갖고 있다.
내 자식은 취업이 안 돼 애가 타는데 대기업에 취직했다는 둥, 의사 며느리를 봤다는 둥 묻지도 않은 자기 새끼 자랑하는 동창 녀석이 나를 욱하게 한다. 심지어 자랑질하면서 술값도 밥값도 안 내니 더욱 욱한다.
좋은 대학 졸업시켜놨더니 일할 궁리는 안 하고 독립은커녕 내 연금 타 먹으며 같이 살겠다는 딸이 나를 욱하게 한다.
‘삼식이’ 노릇도 징글징글한데 비만 오면 술 한잔 걸칠 생각에 부침개 부치라고 독촉하는 남편이 나를 욱하게 한다.
육십 평생 뼈 빠지게 일하고 은퇴했더니 내가 번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처자식이 나를 욱하게 한다.
내 얘기에 집중하지 않고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는 친구가 나를 욱하게 한다. 무시당한 것 같아 속에서 천불이 난다.
화장실 휴지가 떨어졌는데 다음 사람 생각도 안 하고 근처에 있는 새 휴지 갈아 끼우지 않고 나간 앞사람이 나를 욱하게 한다.
안톤 슈낙(Anton Schnack, 1892~ 1973)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수필을 썼다면, 필자는 ‘우리를 욱하게 하는 것들’을 씁니다.
인디언 추장 이야기
옛날 어느 인디언 추장이 손주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우리 마음 안에는 두 마리 늑대가 살고 있단다. 한 마리는 하얀 늑대로 용기, 희망, 자신감, 신념, 확신 등을 먹고살지. 또 한 마리는 까만 늑대로 분노, 좌절, 공포, 짜증 등을 먹고살아.”
그러자 어린 손주는 “그럼 두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라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추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긴단다.”
툭하면 욱하는 사람들
하루에도 몇 번씩 욱하고 화내는 이놈의 성질머리를 고치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없냐는 75세 사례자 질문에, 법륜스님은 ‘즉문즉설’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그 성질 고치지 말고 그냥 살라고 답변합니다. 그래도 꼭 고치고 싶다는 애원에 스님은 주저하다 비방 두 가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는 바로 전기충격기를 사서 욱하고 화가 치밀어오를 때마다 몸에 갖다 대는 것입니다. 죽었다 깨어나지 않으면 그 오랜 습관 고치지 못한다고 하면서요. 다른 한 가지는 화가 날 때마다 3000번 절을 하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왜 화가 날까요 : 기대와 영역 그리고 비교
화는 보통 상식을 넘어선 말이나 행동, 경우에 맞지 않은 행위를 할 때 일어납니다.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를 하지 않았을 때도 화가 솟구칩니다. 그렇다면 상식이나 경우, 도리는 누구의 기준일까요? 사람마다 시대마다 상황마다 기준이 달라 갈등이 생기고 화가 납니다. 내 기준과 기대치를 상대가 충족하지 못할 때,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가 해주지 않을 때 우리는 욱하고, 화내고, 분노합니다. 상대에게 묻지도 않고 나 혼자 세워놓은 기준과 기대를 요구합니다. 또 자신은 바꾸기 싫으면서 상대만 바꾸려고 합니다. 내 영역만 소중하고 상대 영역은 무단침입하려 합니다. 친구와 친척, 이웃과 비교하고 저울질당할 때도 욱합니다.
화(火)의 실체
화는 실체가 있을까요? 화는 실체가 따로 없다고 합니다. 도로에서 앞차가 신호 없이 끼어들 때 어떤 사람은 차를 세워 몽둥이로 상대 운전자를 때리거나 차량을 부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많이 급한가 보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똑같은 상황, 똑같은 사람, 똑같은 말인데 누구는 격분하고, 누구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그냥 넘깁니다.
화는 오로지 내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말은 내가 화를 만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화가 났을 때 화내지 않고 꾹 참는 것은 좋은 것일까요? 가족이나 친구, 곁에 있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니까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화를 참는 것은 화를 내는 것과 똑같은 에너지, 그 독기(毒氣)와 살기(殺氣)가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가 언젠가는 남에게 폭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참기보다 잘 달래야 합니다.
객기(客氣)와 정기(精氣)
화는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반쯤 미쳐 있는 상태입니다. 제정신이 아니란 말입니다. 화는 손님, 객식구입니다. 손님은 잘 대접하고 고이 보내야 하듯 ‘객기’(客氣)인 화도 잘 달래고 풀어줘서 보내야 합니다. 손님을 보내고 ‘정기’(精氣)인 나 자신으로 돌아와 주인 노릇을 해야 합니다. 화는 캔에 든 콜라와 같습니다. 당장의 조갈(燥渴)은 해소하겠지만 좀 있으면 또 목이 마릅니다. 쏟으면 얼룩이 지고 흔들면 폭발합니다. 정기는 맑은 물과 같습니다. 갈증 해소는 물론 쏟아도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화를 잘 다스리지 못할 때 오히려 우리는 마음의 주인이 아니라 화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화가 나의 주인 행세를 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을까요.
울화병에 대한 ‘동의보감’ 처방전
욱하고 성내고 화내는 게 잦고 깊어지면 화병(火病)이 되기 쉽습니다. 한의학에서 울화병(鬱火病)으로 불리는 화병은 ‘Hwa-byung’이라는 병명으로 등재될 만큼 공식적인 용어로 자리 잡은 듯합니다. ‘동의보감’(東醫寶鑑) 잡병(雜病)편 화문(火門)에 ‘화를 조절하는 방법’(制火有方)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마음을 기르라고 강조한 것은, 화가 함부로 동하고 날뛰는 것을 막는 근본적인 처방이기 때문입니다. 화가 동하는 것은 마음에 그 원인이 있기에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 바로 화라는 불길을 끄는 방책이라는 것입니다. 화 일기 쓰기로 그 어렵다는 마음을 다스려볼까요.
화 일기 1
저는 이혼하고 혼자가 된 뒤 오빠 집에 같이 사는데 친정엄마가 밤 10시에 시작하는 ‘미스터 트롯’을 보시는 거예요. 조카들 숙제하고 독서하는 시간을 방해하는 것 같아 올케언니 눈치가 보여서 화가 났어요. 아이들이 실제 공부하는 시간대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버럭 화가 치밀어 엄마한테 막 해댔어요.
저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제가 엄마의 여가와 즐거움에 대해 인정도 이해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드라마 보는 것은 죄악이고 성경 읽기만 바람직한 행위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었던 것 같아요. 드라마를 통해서든 대중가요를 통해서든 종교적 깨달음을 통해서든 삶의 여유와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또 내가 엄마 인생에 개입해왔네요. 함부로 단죄하고 평가하기를 일삼고 엄마만의 즐거움에 대해 무시하고 모른 체하면서요.
엄마의 사생활과 삶의 즐거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내 기준으로 엄마의 삶을 좌지우지하지 않고 판단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올케 눈치라는 핑곗거리를 내세울 게 아니라 엄마는 엄마대로, 조카는 조카대로 지켜보며 간섭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몇 년 전 필자가 분노 조절 수업에서 같이 나누었던 사례입니다. 화 일기를 쓰면서 화난 자신을 바라보고, 왜 화가 났을까 스스로 분석하다 보면 나와 상대방을 조금은 더 이해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마치 유체이탈(遺體離脫)하듯이 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하는 셈입니다. 또 다른 화 일기를 볼까요.
화 일기 2
많이 베풀어도 고마움을 모르는 시동생과 동서 때문에 화가 납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분노가 치밀까 생각해봤습니다.
‘난 왜 꼭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하지. 내가 뭔가 대가나 보상을 바란 것은 아닐까. 시동생네 살아가는 모습과 내 모습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괴로워하는구나.’
지금 형편이 많이 여유로워졌는데도 나는 자신을 위해 돈을 쓰지 못하는 반면, 시동생네와 시어머니는 내가 베푼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것 같아 못마땅해하고 있었네요.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내가 간섭할 영역이 아닌데 자꾸 내 잣대로만 평가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가 원해서 베풀었으면서도 고맙다는 말이나 보상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사례는 실제 우리 주변에서 비근하게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다행히 당사자는 화가 났다는 것을 얼른 알아차렸고,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봄으로써 시댁 식구들을 이해하게 된 거죠.
국수 삶기에서 배우는 분노 조절
분노, 화는 글자 그대로 불같은 감정입니다. 불이 타는 듯, 폭발할 듯 끓어오르는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분노 조절에는 두 가지 등급, 고수와 중수의 처방이 있습니다. 국수 삶을 때 물이 끓어 넘치면 어떻게 하나요? 바로 옆에 둔 찬물을 한 사발 붓습니다. 그것도 잠시, 금방 또 끓어오릅니다. 다시 찬물을 붓고 이렇게 세 번쯤은 해야 국수가 쫄깃하니 맛나게 삶아집니다. 내 안의 화도 같지 않을까요. 나만의 찬물이 필요합니다. 심호흡, 1부터 10까지 세기, 산책, 무엇이든 좋습니다.
찬물 처방이 중수라면 끓어 넘치지 않게 국수를 삶는 사람이 바로 고수입니다. 찬물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크고 깊고 넓은 그릇만 있으면 됩니다. 필자가 직접 실험해봤으니 믿으셔도 됩니다. 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찬물 없이도 내 마음 그릇을 키우면 화를 줄이고 분노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분노 조절의 최종 목표
해와 달은 서로를 비교하는 법이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시간대에서 빛날 뿐입니다. 타인의 삶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제 노릇만 그저 할 뿐 비난하거나 평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교하지 않고, 지나치게 기대하지 않고,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화가 훨씬 덜 납니다. 나아가 상대를 대할 때 거리낌이 없고 거스름이 없고 막힘이 없는 상태, 화를 안 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 화가 안 나는 단계가 분노 조절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하나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평화로울까요. 거창하거나 어렵지 않게 안정과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같이 해보실까요.
▶ “그렇겠네”, “그랬구나” 맞장구치면서 있는 그대로 들어줍니다.
▶ “그러니까 내 말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합니다.
▶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말 끊지 않고 궁금해하며 충분히 말하게 합니다.
“성냄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화해야 하는 것이다.”
- 토머스 애덤스
“분노에 집착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던지기 위해 뜨거운 숯을 움켜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 석가모니
건강을 잃고서야 절절한 심정으로 세상과 자신을 돌아보는 게 사람이다. 위중한 병을 얻었을 때 인생의 유한함을, 시간의 소중함을 비로소 뼈저리게 절감하며 새롭게 눈을 뜬다. 함지애(58, ‘지애의 봄향기’ 대표)는 40대 때 폐암 1기 선고를 받고 투병을 했다. 용케 조기에 발견된 암인 데다 수술이 잘돼 예후가 좋았다. 천운으로 병마를 다스렸으니 정상적인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 듯싶었다. 하지만 얼마 뒤 폐암보다 무섭다는 폐섬유증(폐가 굳어지면서 심각한 호흡 장애를 불러일으키는 질환)이 다시 기습했단다. 어이하나? 어떻게 일어서야 하나? 폐섬유증 수술을 마친 함지애는 고심 끝에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김제로 내려갔다. 그건 요양을 위한 낙향이었지만 귀농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남은 인생을 덤으로 여기고, 이제 시골에서 제대로 한번 잘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는 점에선 당찬 투신이자 기꺼운 모험이었다.
서울에 살 때 그는 의류유통업을 했다. 중년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을 동대문 상가, 남대문 상가에서 뛰었다. 뛰더라도 그냥 뛴 게 아니라 경주마처럼 열렬한 질주를 했나? 그의 가게엔 자주 고객들이 줄을 섰다지. 아마도 그의 천성일 패기와 근성이 성과를 불러들였던 것 같다. 마침내 자수성가로 우뚝하게 일어선 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이르렀다. 몸에 중병이 찾아와 위세를 부리는 일이 없었다면 서울을 뜰 일이 없었으리라. 시골살이? 그건 그의 사전에 아예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시골 생활은 무섭고 싫었다고 한다. 그러나 병을 통과하면서 생각이 변했다. 삶의 방향이 확 바뀌었다. 이렇게 뜻밖에 찾아온 변곡점은 차라리 하나의 기쁜 선물이었다. 낙향 이후의 삶이 한결 새롭고 만족스럽다는 게 아닌가. 시골에 내려와 비로소 인생의 향긋한 열매를 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이왕 삶을 바꿀 거라면 다 내려놓고 가자!”
낙향 때 그의 머리에서 나부낀 기치가 그랬다. 인생을 레이스하는 데 쓸모가 큰 방편으로 여겼던 욕심과 경쟁심을 모두 내려놓기로 했다. 물질이든 행복이든 가급적 손아귀에 한가득 움켜쥐고자 했던 지난날의 타성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생존의 정글에서 지친 노루가 쉴 만한 물가를 찾아가듯이 마음을 비우고 낙향했다. 사람이 마을을 비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지만,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무가치한 것들을 종량제 봉투에 담아 내다 버렸다. 그게 병에서 벗어나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유력한 길이라고 봤다. 함지애가 김제로 내려간 건 2012년. 초기 한동안은 요양에 전념했다.
“텃밭 농사로 거둔 깨끗한 채소류를 먹거나, 산야에서 약초를 얻어 섭취했다. 도시에 비할 수 없이 맑은 공기도 몸에 좋았다. 무엇보다 반가운 건 시골 생활이 주는 평온함이었다. 마음이 그토록 편안해지다니, 예상과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맛보며 안도했다. 건강도 좋아졌다. 빠른 속도로. 웃음을 달고 살다시피 했으며, 이웃들과 좋은 사이로 지냈다. 아, 시골에 오기를 잘했어. 좀 더 빨리 내려올걸!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유능한 강소농 모델로 떠올라
잃었던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으면서 함지애는 슬슬 농사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고즈넉한 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을 해야 성장한다는 게, ‘일에 대한 불타오르는 열정이 있어야 즐거울 수 있다’는 게 그가 인생에서 배운 일종의 공리다. 농사에 뛰어드는 방식은 다분히 조직적이었다. 여러 농업 교육기관을 통해 공부부터 충실히 하는 한편, 대담하게도 5000여 평의 전답까지 마련해 바닥을 다졌다.
“농토에 벼, 찹쌀, 보리, 콩 등을 재배했다. 농사 방법은 친환경 농업을 추구하기로 했다. 안전하고 깨끗한 농산물로 고추장, 된장, 청국장, 간장을 만들자는 게 기본 방향이었다.”
혼자서 5000평이나 되는 너른 전답에 농사를?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주로 위탁영농 방식으로 농사를 했다. 이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라. 봄철의 논밭 갈이부터 가을철 수확까지 전 과정을 대행해주니까. 그런데 귀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교육이다. 사전에 부지런히 교육을 받아야 한다. 난 나름대로 열심히 농업을 공부했다. 건강에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면서 농사에 뛰어들었지만, 사실 초기 5~6년은 수련기였다. 거의 공부 기간이었다. 이때 다수의 농업 관련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았나?
“전주에 있는 한국농수산대학 가공학과에 적을 두고 배웠다. 버섯과 화훼 공부도 병행했다. 김제에 있는 농업기술센터를 통해서도 배운 게 많았다. 전통장류, 조청, 꽃차 등에 관한 이론과 실재를 교육받았으니까. 이렇게 공부하며 농어촌체험지도사, 전통장류제조사, 꽃차 소믈리에, 천연발효식초 제조관리사 등 자격증 여러 개를 취득했다.”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판로 부문이다. 판로와 관련해서도 사전에 공부해둔 게 있었나?
“판로 문제야말로 농업 경제의 핵심이라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정보화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덕분에 농사 시작과 동시에 SNS 마케팅을 위해 블로그를 운영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농사의 출발은 식초 사업으로 열었다지?
“2018년에 식초 생산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다. 작업장과 체험장을 지어 생산과 체험 교육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가공 분야 가운데 식초를 선택한 이유는?
“아까 말했지만 난 농업 관련 공부에 많은 시간을 썼다. 딴엔 제법 공부를 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어느 수준인지, 뭐 좀 실력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 테스트할 필요가 있었다. 테스트 수단으로 식초 사업을 택한 건 식초가 사람 몸에 가장 좋은 식품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나의 건강을 위해서도, 남의 건강을 위해서도 식초만큼 좋은 게 없다고 봤으니까.”
촘촘한 사전 준비에 힘입어 식초 사업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특유의 현미식초를 만들어 특허 등록을 냈으며, 연잎식초라는 희귀한 제품을 만들어 역시 특허를 받았다. 스스로 설정한 테스트를 좋은 성적으로 통과한 셈이다. 이후 그는 식초의 이웃사촌인 술 만들기에 뛰어들었다. 전통주에 관한 공부를 미리 해둔 상황에서였다. 따라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일단 필이 꽂히면 냅다 덤벼들어 몰두하는 평소의 습성과 기량을 풀가동해 전통주 개발과 생산에 주력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가 주어졌다. 각종 경연대회에 출품한 그의 술이 큰 상을 연달아 받으며 일약 알아보는 눈이 꽤 많은 실력자로 부상했다는 게 아닌가. 그는 2019년 충남도 농업기술원이 후원한 ‘우리 발효술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2021년엔 ‘대한민국 명주대상’ 경연에서 청주 부문 대상을, 2022년엔 광주MBC가 주관한 ‘우리 술 어워즈’에서 ‘왕중왕’상을 거머쥐었다. 전통주 초심자가 거둔 만만치 않은 성취였으니 이변이라 말 못 할 것도 없겠다. 이제 그는 술과 더불어 유능한 강소농의 모델로 떠올랐다.
투병 이후의 삶은 덤으로 주어진 것
“난 술에 미친 여자다.(웃음) 좋은 전통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양조엔 디테일한 기술력이 필수다. 누룩에서 발생하는 미생물 효모로 단맛과 신맛 등 풍미를 지닌 술을 빚어내기 위해선 반복적 실험이 선행돼야 한다. 술맛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도 쉽지 않다. 미치지 않고선 도달할 수 없는 게 양조다.”
어떤 술들을 만들고 있나? 가장 자부하는 술을 꼽는다면?
“현재 6종류의 술을 생산한다. 대표 상품은 ‘초야’(初夜)라는 청주다. 신혼 첫날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술에 담았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탁주인 ‘순애보’ 역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술이다.”
시중에 수많은 민속주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당신의 술은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있나?
“남들은 흔히 말한다. 여러 가지 꽃을 양조 재료로 삼은 꽃술은 함지애의 것이 뛰어나다고. 민속주를 만드는 이라면 누구나 ‘이게 바로 한국의 술이야!’라고 자신할 만한 술을 만들고자 노력할 텐데, 나 역시 그렇다. 그런데 술의 풍미 수준을 가르는 건 기술력보다 정성스러운 마음과 손길에 달렸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어린 자식에게 먹일 음식을 만들 때처럼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마음. 그게 좋은 양조의 비결이라 믿는다.”
양조란 창의적 감각이 요구되는 난해한 장르다. 자력으로 단기간에 일정한 성취를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궁금하다. 누군가에게 도제식 수업을 받은 적은 없었나?
“운 좋게도 좋은 스승들을 만났다. 명품 전통주 ‘호산춘’의 명인 이연호 선생님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한국전통주연구소 소장인 박록담 선생님을 통해서도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이 스승들 덕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사실 시골에 내려온 이후 나는 이렇다 할 실패나 착오를 겪지 않았다. 이건 순전히 좋은 인간관계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좋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좋은 걸 배웠고, 배운 걸 토대로 일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일뿐만이 아니다. 삶의 질 자체가 아등바등 살았던 서울에서보다 훨씬 좋아졌다.”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로 일과 생활, 양면에서 선순환을 해왔다는 얘기다. 남의 가르침과 의견을 경청해 피드백으로 삼기. 이웃과 도타운 우정을 나누는 일에도 사업 이상의 정성을 쏟아 감흥을 누리기. 이쯤이면 결함 없는 생활이다. 인생의 중세시대라 할 만한 투병기는 어느덧 종료됐다. 여러 측면에서 서울에 살 때와 완연하게 변했다. 이제 그가 지닌 지배적인 감정은 만족감, 그 하나란다.
다만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지되고 있는 양상이 있으니, 여전히 바쁘게 산다는 게 그렇다. 함지애가 만드는 건 식초와 전통주만이 아니다. 들에선 곡물을 생산하며 장류 사업도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대파에서 피어나는 보랏빛 꽃을 부재료로 가미한 이색 꽃두부도 생산한다. 마을 부녀회장을 맡기도 했던 그다. 김제 시내에 오픈 스튜디오를 두고 대표를 맡고 있는 ‘징게맹갱 우리술 협동조합’의 기지로 활용하고 있기도. 독거노인과 결손가정을 돌보는 자선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시내의 침체된 구역 일부를 놀이문화 공간으로 재생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일의 가짓수가 이토록 넘치다니. 그는 남몰래 비명을 지르는 건 아닐까? 일에 치여 부질없이 소비되는 뭔가가 있는 건 아닐까?
“투병 이후의 삶은 덤으로 주어진 거라고 생각하자 모든 게 감사하게 다가왔다. 희로애락은 여전하고 때로 눈물도 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걸 비로소 하고 있다는 실감으로 행복하다. 돈을 벌려고 바동거렸던 과거에서 벗어난 것만도 어딘가? 밝고 에너지 넘치는 본성을 회복한 건 또 어떻고? 욕심을 내려놓고, 짧고 굵게 살다 가면 된다는 생각이다.”
돈보다 소중한 가치를 가진 게 많다는 걸 알면서도 흔히들 까먹고 산다. ‘욕심에 휘둘리는 삶은 이제 싫어!’ 함지애의 드라마를 난 그런 외침으로 새겨두기로 했다.
함지애가 주는 귀농 Tip
•땅과 집을 마련하기 이전에 귀농 교육부터 충분히 하라. 지자체마다 운영하는 ‘1년 살아보기 프로그램’ 같은 걸 통해 농촌 생활을 미리 경험하는 것도 좋다. 그 과정에서 나의 숨겨진 역량을 발굴할 수 있으며, 과연 귀농을 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귀농 초기 3년 정도는 성공을 위한 수련기로 삼아 나를 알아가는 시간 내지는 농사의 방향을 모색하는 기간으로 활용하자. 농업의 경제 효과는 현명한 운영을 했을 경우에도 대체로 귀농 5년 이후에나 발생한다고 보면 된다.
•도시에서 쌓은 경륜이나 특기를 살려 재활용하라. 이를테면 꽃에 조예가 있다면 꽃차 사업에 도전하는 식으로.
•여성의 단독 귀농을 두려워하지 마라. 다만 남다른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귀농 초기엔 소득 발생이 전혀 없을 가능성이 많다. 예비비 확보가 필수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오는 ‘새 신랑’, 배우 심형탁(45). 그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긍정 에너지가 결혼 후 한층 강화됐다. 그런 심형탁을 향한 대중의 시선은 호의적이다.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는 “저는 착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솔직한 사람 같다”면서 “내 감정에 솔직하고,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에 솔직할 뿐”이란다.
심형탁은 “좌우명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진심으로 좋아하는 상대를 계속해서 좋아하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어른이 되면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숨기는 사람이 많은데, 심형탁은 달랐다.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 ‘도라에몽’ 덕후(마니아)라고 당당하게 공개했다. 현재는 아내 히라이 사야(이하 사야)에게 무한 애정을 쏟으며, “이렇게 예쁜 사람은 세상에 없다”면서 팔불출 같은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그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사랑꾼이 아닐까.
“‘덕후’ 문화는 굉장히 중요해요. 덕후가 세상을 움직이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저는 초등학생 때부터 도라에몽 캐릭터를 좋아했어요. 당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소개되기 전이라 ‘동짜몽’으로 불리던 해적판 만화만 있었습니다. 전 그걸 구해서 읽곤 했어요. 도라에몽은 미래에서 온 로봇으로 진구를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제가 도라에몽을 좋아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어요. 진구에게 저를 투영해서 도라에몽이 저를 도와줬으면 했던 거죠. 그런데 도라에몽이 진짜 저를 도와줬고, 그걸 넘어 선물을 줬어요. 대중적으로 제 이름 석 자를 알리게 해줬고, 이슬이(진구 여자친구)보다 더 예쁜 사야를 만날 수 있게 해줬죠. 도라에몽의 선물인 사야와 함께 잘 살아간다면 앞으로 더 좋은 일들이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능형 배우로 성공하기까지
건장한 체격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심형탁은 모델 출신이다. 1997년 ‘신원 SIEG 모델 콘테스트’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모델로 데뷔한 그는 직접 에이전시를 뛰어다녀 일자리를 얻어냈고, 업계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서 성격이 많이 변했다는 심형탁은 ‘학창 시절 왕따를 당했다’는 사실을 고백한 바 있다.
“제가 초등학생, 중학생 때는 키가 정말 작았어요. 지금도 기억하는 게 중학교 1학년 때 키가 150cm가 안 됐고, 1번이었어요. 그저 작다는 이유로 무시와 괴롭힘을 좀 많이 당했죠. 키가 확 큰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였어요. 그런데 덩치만 컸지 마음은 그대로니까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걸 극복한 건 일에 대한 의지 하나였습니다. 모델 활동을 하고 싶어서 운동을 했고, 그러면서 자신감이 붙고 성격도 많이 달라진 거죠.”
모델 활동을 하면서 연기에 관심이 생긴 심형탁은 수원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배우 전문 기획사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배우 활동을 하게 됐다. 2001년 SBS ‘남과 여-우리 다이어트할까요?’가 그의 데뷔작이다. 벌써 23년 차 배우가 된 심형탁은 “배우로 이루고 싶은 것이 아직 많아서 늘 시작하는 단계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출연작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을 꼽으라고 하면, tvN ‘식샤를 합시다’가 아닐까 싶어요. 처음으로 미니시리즈 주연을 맡아본 작품입니다. 그 전까지는 사람들이 저를 일일드라마 배우라고 인식했는데, 그 드라마 이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기분을 느꼈어요. 그래서 제 배우 인생에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KBS 2TV ‘브레인’의 완벽주의자 캐릭터, MBC ‘천 번의 입맞춤’에서 찌질한 남편 역할을 한 것도 좋았어요.”
심형탁은 예능 출연으로 더 유명해졌다. 2014년 KBS 2TV ‘안녕하세요’를 시작으로 MBC ‘무한도전’, ‘나 혼자 산다’에서 도라에몽을 비롯한 애니메이션과 피규어 등을 좋아하는 순수한 모습으로 대중적 호감을 얻었다. 그 스스로 “나의 배우 인생은 도라에몽 덕후를 밝히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말하기도. 이러한 상황에서 ‘예능형 배우’로 통하는 것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요즘 배우들은 드라마나 예능 중 한 가지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두 가지 모두 가능한 ‘멀티 엔터테이너’(이하 멀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계속해서 멀티로 활동하고 싶습니다. 물론 배우에게 예능 활동은 장·단점이 따를 수밖에 없죠. 연기하는 제 모습을 본 사람들이 ‘도라에몽이 보인다’고 하기도 하고, 주로 코믹한 역할을 제안하시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장점도 있습니다. OCN ‘타임즈’(2021년 방영)에서 악역을 연기했는데, ‘심형탁이 저런 연기도 가능해?’ 하면서 많이 놀라시더라고요. 예능에서 보이는 것과 정반대 모습이 통한 거죠. 결국 제가 연기를 잘해야 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고 느끼고,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도라에몽의 선물, 아내 사야
심형탁이 아내 사야에 대해서 ‘도라에몽이 준 선물’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두 사람의 운명적인 첫 만남과 관련이 깊다. 심형탁은 촬영차 일본의 도라에몽 박물관을 방문했는데, 유명 완구회사 직원인 사야는 그날 현장 총괄책임자를 맡았다. 첫눈에 사야에게 반한 그는 운명의 짝임을 직감했다.
“사야가 원래 그날 선배하고 같이 나왔어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처음으로 혼자 일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만약 그날 선배가 나왔다면, 일본의 선후배 문화가 철저하기 때문에 저는 사야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을 거예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만약 제가 도라에몽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도라에몽 박물관을 가지 않았다면, 사야의 선배가 그날 나왔다면, 우리는 연결되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저와 사야는 정말 몇십만분의 1의 확률을 뚫고 만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심형탁은 무려 8개월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사야에게 적극적인 구애를 펼쳤다. 포기를 모르는 그를 보고 사야의 닫혔던 마음도 열렸다. 열여덟 살 연하의 미모의 아내를 얻은 비결이다. 심형탁과 사야는 4년의 연애 기간을 거쳤고, 7월 8일 일본에서 웨딩마치를 울렸다. 한국에서는 8월 20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혼인신고는 진작에 마친 부부는 한국에서 함께 살고 있다. 심형탁은 잘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한국에 온 아내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낀다.
“어른들이 ‘결혼하고 느끼는 행복은 다르다’고 하잖아요. 그 말의 의미를 체감하면서, 사야와 함께 더할 나위 없는 행복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도 사실 가끔씩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화가 나다가도 아내의 얼굴을 보면 화가 싹 풀리더라고요. 하하. 그뿐 아니라 서로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잘 풀려고 노력하죠. 저희 부부의 시급한 목표는 2세를 갖는 거예요. 아무래도 제가 나이가 많아서 마음이 좀 급합니다. 사야는 3명, 저는 2명의 아이를 갖고 싶어 해요. 그리고 사야가 한국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응원해줄 생각입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재능이 있어서 그쪽으로 진출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결혼으로 여는 제3의 인생
심형탁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결혼’에 대한 생각이 크지 않았다. 그런 그가 40대 나이에, 그것도 일본인과 결혼할 줄 누가 알았을까. ‘결혼을 꼭 해야만 할까’라는 입장에서 ‘결혼전파자’가 됐다.
“제 나이대가 되면 결혼을 포기하시는 분도 많을 텐데, 그분들께 말하고 싶어요.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결혼 생각이 없었던 저도 사야를 보자마자 ‘저 사람하고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정한 사랑은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주변에 있을 수도 있고, 다른 나라에 있을 수도 있죠. 물론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혼을 안 할 수도 있지만, 할 의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늘 청년 같은 모습이지만 스스로 ‘중년’이라고 말하는 심형탁. 특히 사야를 만난 후 자신의 인생을 ‘제3의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제1의 인생은 배우가 되기 전까지, 제2의 인생은 사야를 만나기 전까지 배우로 활동한 시기라고 정의 내렸다. 새 신랑으로서, 가장으로서, 그리고 중년으로서 새롭게 펼쳐질 ‘제3의 인생’. 심형탁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꿈꾼다. 기분 좋은 부담감이 설렘으로 전해져온다.
“예전에는 중년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이 든 느낌이었잖아요. 지금은 그렇지 않죠. 몇 살부터 몇 살까지가 중년인지도 정해져 있지 않은 것 같아요. 브래드 피트, 산드라 블록 등을 보면 중년인데도 멋진 삶을 살고 있잖아요. 삶의 방향을 잘 잡아서 살아나가면, 중년의 시기를 즐겁고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중년이 되어도 남들이 봤을 때 ‘저 사람처럼 힘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활기찬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무엇보다 좋은 가장이 되어 우리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1동료와 담소를 나누는데 고등학생 두 자녀의 걱정이 크다. 고3 아들은 키가 훤칠해서 일찌감치 남자승무원이 되겠다고 진로를 정했다. 자신감이 있는지 열심히 놀러 다닌다고 했다. 반면 고1 딸은 하고 싶은 게 없다며 늘 시무룩하며 공부에 열심인데 성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한다. 농담이겠지만 가끔 공부도 지치고, 장래 희망도 없고, 자기 적성이 뭔지 몰라 종종 죽고 싶다고 푸념을 한다고 한다.
#2어느 날 진료실에 55세 남자 환자가 찾아왔다. 이유는 의욕이 없고 늘 피곤하다는 것이었다. 매년 회사에서 건강검진을 하는데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회사 임원으로 삶의 안정을 이룬 상태였지만,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고, 회사를 갈 의욕도 없다고 했다. 특히 1년 전 흔히 말하는 오십견이 오면서 정형외과 치료를 꾸준히 받고 있는데, 그 이후로 피로감이 더욱 심해졌다고 했다.
인생을 먼저 살아본 노인들의 지혜를 모아 정리한 노년 연구들이 있다. 그리고 인간의 일생을 추적해서 행복과 건강에 대한 비결을 찾는 연구도 있다. 그런 과학적인 연구들뿐만 아니라 실존 철학자들은 인간 본질과 삶의 의미를 집요하게 탐구해 왔다. 이 모두를 통합해보면 인생은 두 단계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생존을 위해 집단 속에서 경쟁하는 인생 전반기와 나머지 하나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홀로 고뇌하는 삶의 후반기다.
하이데거는 인간이란 어떤 목적도 가치도 없이 세상에 던져지듯 태어난다고 말한다. 탄생의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면서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이유를 찾아야 하는 과업으로 일상을 살아간다. 일단은 안정적으로 살아남아야 의미를 일굴 기회를 가질 수 있기에 부모의 보호 아래서 자립의 훈련을 받는다. 학교란 안정적인 생존을 가르치는 훈련기관이며, 현대사회에서 적자생존의 경쟁은 성적을 통해 가름 짓는다.
타고난 신체로 도전해 볼 수 있는 진로를 찾은 동료의 아들은 마치 쉽게 생존할 수 있는 길을 찾은 냥 한시름 놓은 듯하다. 반면 아직 자기 진로를 정하지 못한 딸은 공부에 전념해야 하는 상황에 몸과 마음이 모두 짓눌린 듯 보인다. 인생이 어디 호락호락할까. 당장 눈앞의 길이 풀리건, 막히건 막상 세상살이를 겪으면 매일이 불확실이고 생존이란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앞날의 불확실함이란 우리 인생 그 자체다. 은퇴를 5년 앞둔 중년 남성은 생존의 안정을 이뤘으나, 이제 노화에 대한 불안에 휘둘리는 듯하다. 오십견은 단순한 어깨의 통증을 넘어 그의 삶의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왔음을 깨닫게 했다. 은퇴 이후 삶에 대한 자각은 마치 어느 날 깨어보니 차가운 아침 공기에 계절의 변화를 느끼듯 미처 대비하지 못한 서운함일 것이다.
요즘 세상에는 생존 경쟁을 위한 정보와 기술들이 넘쳐난다. 현대인들은 자녀들의 대학 진학을 위한 사교육 정보부터 취업과 결혼, 출산, 육아, 부동산과 주식까지 경제적 안정과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삶의 성공이라 믿으면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그러나 아무리 생존 경쟁에서 성공을 거둬도 우리가 하루하루 늙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삶의 덧없음을 메워주진 못한다. 죽음에 대한 사색은 물질적 성공보다는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결국 인생의 결말이란 언젠가 마주하게 될 자신의 죽음 앞에서 덤덤히 만족을 고백할지 아니면 공포에 몸부림칠지 둘로 나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인생은 전반전과 후반전으로 나뉜다. 열심히 경쟁해 생존해야 하는 전반전과 그리고 삶의 의미를 위해 고독하게 자신과 마주해야 하는 실존의 후반전이다. 세상이 정해놓은 계단은 중년까지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도 삶의 후반전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지혜를 나누지도, 깊이 있게 알려주지도 않는다. TV와 같은 대중매체도 늘 육아와 부동산, 재테크에 대한 프로그램은 넘치지만, 노년의 삶의 만족과 죽음에 대한 준비에 대해서는 부정하다는 듯 다루지를 않는다. 생존에 성공했다면 이제 어떤 의미를 남길지 자신만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 철학자들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실존이라고 말한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군부독재시기까지 숱한 삶의 격변 속에서 생존이 우선 가치였던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에 결여된 것은 인생 후반기 삶의 의미를 일구며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실존의 문화다. 당신은 준비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