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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기심 없이는 발견되지 않는 세상
- 초등학교 통지표에 ‘의자에 앉는 자세가 바르지 못하다’는 말과 함께 나오던 단골 멘트는 ‘나름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서 오류가 많다’였다. 필자는 그 시절 자그마한 걸상에 비스듬히 앉아 선생님의 설명을 듣기보다는 마루 사이에 낀 지우개 가루를 쉽게 파내는 방법 따위를 생각하느라 골몰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 말씀이 맞다.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올 땐,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노량진의 오래된 동네라 구불구불 골목이 많았다. 필자는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새로운 경우의 수를 조합해보느라 분주했다. 가끔은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헤매기도 했지만 나만의 지름길을 발견하면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수학 문제를 풀 땐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풀려고 애를 썼다. 책읽기를 좋아했지만 정답에 동의하기 어려워 국어 성적은 늘 형편없었다. 새로운 것을 찾는 성향은 어른이 돼서도 여전했다. 특히 운전할 때 도드라졌다. 길을 가다 막히면 망설임 없이 골목을 찾아 들어갔다. 운이 좋게 지름길을 발견할 때도 있지만 길을 찾지 못해 되돌아 나와야 할 때도 많았다. 그러면 아이들은 “엄마, 오늘도 또 길을 잘못 들었잖아. 제발 아는 길로 가” 하며 뒷좌석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왜 아는 길 편안한 길을 놔두고 굳이 새로운 길을 찾아 헤매는 걸 즐길까? 집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지하철역으로 들어가 이쪽 혹은 저쪽 플랫폼에서 전철을 기다리는 일.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고 세탁소에 맡긴 세탁물을 찾으며 치킨 먹을래 피자 먹을래? 집으로 전화 거는 일. 이런 시시콜콜한 일상 너머에 존재하는 거대하고 새로운 세상은 헤매지 않고는, 호기심 없이는 발견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필자에겐 낯선 것 자체가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다. 그래서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요란한 소리와 불규칙한 진동, 간질간질함에서부터 설렘은 시작된다. 입국 허가 스탬프를 찍어주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무뚝뚝하지만 생김새는 저마다 다르다. 칭다오 버스 안에서 맡았던 퀴퀴하고 쿠린 냄새는 여행을 후회하게 만들고, 말간 얼굴에 순진한 미소로 다가와 빵 값을 사기치던 하노이 소녀에겐 버럭 화를 내기도 했지만 이런 불쾌함이나 두려움도 낯섦이라는 필터를 통과하고 나면 행복한 경험이다. “여행은 문과 같다. 우리는 이 문을 통해 현실에서 나와 꿈처럼 보이는 다른 현실, 우리가 아직 탐험하지 않은 다른 현실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것이다.” 기 드 모파상의 말은 낯설고 새로운 것을 찾는 필자의 삶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 2017-03-2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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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느리가 주고 간 보석
- 며느리가 세상을 떠난 지 이제 3개월이 되어간다. 그동안 뭔가 정리가 안 된 듯 미진함이 늘 남아 있었다. 어느 날 영정 사진이 필요하니 찾아놓으라는 아들 전화를 받고 사진을 찾다가 아들 방 한쪽에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흰 주머니를 봤다. 뭘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 살짝 열어보니 새하얀 봉투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알고 보니 며느리 장례식 때 조문객들에게 받았던 봉투들이었다. 필자는 그 봉투들을 하나씩 꺼내봤다. 봉투 주인들의 마음이 아주 또렷하게 전달되었다. “감사합니다!” 봉투를 하나씩 꺼내어 거기에 쓰인 글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읽으며 저절로 나온 말이었다.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필자의 목소리는 너무 예의 바르고 정중했다. 필자가 봉투를 꺼내보고 있는 그 방엔 아무도 없었다. 듣는 이도 대답하는 이도!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한 명 한 명 다 보였고 필자의 인사를 반갑게 받아주는 아름다운 모습도 환하게 보였다. 아직 슬픈 마음이었지만 그들의 어려운 발걸음에 필자의 마음을 꼭 전하고 싶었다. 후회 없도록 진심을 건네고 싶었다. 차가운 냉방에서 홀로 그런 예식을 치르고 나니 온몸에 냉기가 돌았다. 흰 봉투는 말이 없었지만 이 세상을 함께한 인연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다녀간 사람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내를 잃은 아들을 위해 온 후배와 선배와 친구들 이름이 어느새 마음속에 빼곡했다. 그날 장례식장은 사람들로 엄청 북적였다. 젊은 나이에 폐암 선고를 받은 며느리는 여섯 살짜리 딸을 두고 절대 가기 싫었을 테지만 가야만 할 이유가 있었나보다! 이런 생각에 미치는 순간 필자는 며느리의 물건을 정리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는 걸 직감했다. 전화번호도 정리해야겠지? 저 많은 책도 버릴 건 버려야지? 사시사철 며느리가 입었던 옷들도 누굴 주든지 아니면 버리든지 해야겠지? 세간들도 꼭 써야 할 것들만 남기고 정리하자….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던 머릿속을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죽음이란 자신의 삶을 정리할 시간도 안 주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며느리는 죽음이 눈앞에 와 있음을 알아차렸을 때 자신의 주변을 얼마나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었을까.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부 내맡긴 채 생이 닫혀가고 있는 시간을 바라봤을 것이다. 그리고 통탄했을 것이다. 미약한 호흡이 끊어져가던 며느리의 모습이,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필자의 허탈감이 온몸을 휘감았더랬지. 그래 이 순간부터야. 지체하지 말고 정리하자. 주변의 모든 것들을 직접 내 손으로 간추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음에 감사하며! 필자는 마치 빛나는 보석을 움켜쥔 듯 봉투가 든 흰 주머니를 들고 아들 방을 나왔다.
- 2017-03-2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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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광철 전 원주시 부시장과 아내 안춘희씨, 바이크 보헤미안 부부의 수상한 두 바퀴 여행
- ‘정해진 둥지도 없어 아무 데나 누우면 하늘이 곧 지붕이다. 코끝에 스치는 바람, 흔들리는 풀잎 소리, 흐르는 도나우 강물이 그저 세월이리라. 우린 자전거 집시 연인이다.’ 최광철(崔光撤·62) 전 원주시 부시장이 유럽 자전거 횡단 중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자유로운 영혼의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그의 여정에는 빠질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아내 안춘희(安春姬·59)씨다. 자전거의 두 바퀴처럼 언제 어디서나 나란히 함께하는 두 사람의 유유자적 여행기를 들어봤다. 최광철 전 부시장이 50세가 되던 해의 어느 날, 부부는 여느 때처럼 한강변을 거닐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잠시 쉬는데, 한 청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흙으로 범벅된 청년의 자전거를 본 남편은 호기심이 발동했다. “자전거가 흙투성이라 물어보니까 산악자전거라는 거예요. 어? 왜 위험하게 자전거를 산에서 타지? 이상하게 생각했죠. 조금 이따가 그 청년이 다시 자전거를 타고 터널로 달려가는데, 그 뒷모습이 참 터프하고 멋져 보였어요. 그러고 조금 지나니 뭔가 아쉽더라고요. 우리는 그런 것도 못 누렸는데 나이가 들어버렸잖아요. 근데 아내도 그런 감정을 느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길로 아내랑 같이 가서 자전거 두 대를 질러버렸죠.” 인생 2막의 ‘도전’, 인생 1막으로부터의 ‘도피’ 우연한 기회로 취미를 찾은 부부는 전국 방방곡곡을 달리며 부지런히 페달을 밟았다. 그리고 10년 후, 남편은 은퇴를 앞두고 인생 2막에 대한 고민에 휩싸였다. “은퇴를 하고 나면 어떨까? 나름 부시장이라는 직책으로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모든 환경이나 생활리듬이 바뀌면 적응할 수 있을까? 하릴없이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직장 동료라도 만나면 우울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이곳(원주)에서 그대로 지내는 게 영 가시방석처럼 불편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고민 끝에 그가 찾은 돌파구는 ‘자전거 세계일주’였다. 영혼의 동반자이자 자전거 파트너인 아내도 함께 가기로 했다. 은퇴 후 무력감에 빠지지 않도록 최대한 일찍 떠나고 싶었다. 퇴직일은 2016년 6월 30일, 그로부터 보름 후인 7월 16일을 디데이(D-day)로 잡았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발해 독일, 룩셈부르크, 프랑스, 영국을 가로지르는 3500km 횡단 종주를 목표로 하고, 여행 기간은 3개월로 정했다. 부부가 자전거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들의 도전에 감탄하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은 ‘도전’보다는 ‘도피’에 가까웠다고 말하는 남편이다. “여행을 다녀와서 인터뷰도 많이 했지만 아직도 그 계기에 대해 스스로 되묻곤 해요. 남들은 은퇴하고 크루즈를 타고 지중해도 가고, 더 편하고 고상하게 여행을 즐기는데 난 왜 그 험난한 여정을 택했을까? 그동안은 누가 물어보면 도전이나 열정처럼 그럴싸한 이유를 댔는데, 사실 그보다는 현실도피에 가까웠던 것 같아요. 공무원 생활을 하며 평탄하게 지내왔는데, 뭔가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져보고 싶었어요. 그런 담금질의 기회를 얻고 나면 용기와 자신감이 생기고, 막연하게나마 새로운 희망이 보이리라 생각했죠.” 남편에게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아내에겐 ‘남편’ 그 자체가 이유가 됐다. 오랜 시간 자전거를 취미로 삼았지만, 유럽 횡단은 꿈도 안 꿨다는 아내다. 낯선 환경에 장기간 해외여행이라는 점도 우려스러웠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아내의 건강이었다. 떠나기 3개월 전, 허리에 통증이 와서 병원을 찾은 아내는 척추협착증 진단을 받았다. 자전거를 무리하게 타지 말라는 주의를 받은 터라 무작정 일정을 강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어렵겠다는 판단을 내리려던 그때, 아내는 병원에서 두 달 치 진통제를 처방받아왔다. 체념 섞인 비장함으로 그렇게 무리수(?)를 던진 부부는 예정대로 여행을 떠났다. 부부가 함께 쓰는 명함 유럽 자전거 여행을 성공리에 마친 그들은 다음 해에 동북아 자전거 횡단 길에 올랐다. 첫 여행의 두려움과 낯선 자신감과 희망으로 채워졌다. 점점 탄력이 붙어 최근에는 ‘달려라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뉴질랜드를 누비고 왔다. 당시 기자와의 첫 통화에서 “뉴질랜드에서 아내와 자전거 타고 있어요!”라고 말하던 최 전 부시장의 건강한 음성이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그 후 한국에 돌아와 만난 부부의 건강한 미소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똑같은 헬멧에 똑같은 점퍼, 똑같은 아웃도어를 입은 부부는 똑같은 명함을 내놓았다. ‘수상한 여행, Bike Bohemian 최광철·안춘희’라고 쓰여 있는 부부명함이다. “영화 를 보면 칠순 할머니가 우연히 청춘사진관에 들어갔다가 20대로 변하거든요. 다시 젊음을 만끽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우리 여행이랑 콘셉트가 맞더라고요. 그래서 ‘수상한 여행’이라고 지었어요. 직장이나 직함 대신 자전거 집시 ‘바이크 보헤미안(Bike Bohemian)’, 그리고 나와 아내의 이름을 넣었죠.” ‘소박하고 쾌활하게 유랑생활을 하면서 삶의 고통을 이해하고 아름다움의 근원을 찾아가는 자전거 여행 부부’라는 의미가 담긴 명함이라고. 새 명함으로 은퇴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는 남편처럼, 아내 역시 명함이 생기면서 이전과는 다른 생동감을 느끼며 산다. “잠깐 직장생활을 하긴 했지만, 30년 넘게 전업주부로 살다 보니 명함이 익숙하지는 않았어요. 필요성을 못 느끼기도 했죠. 남편 덕분에 명함이 생겨서 요즘엔 어디 가면 나도 내 명함이라고 주기도 하고 그래요. 그러다 보니 뭔가 더 의미부여도 되는 것 같고, 남편이랑 함께 쓰는 명함이라 그런지 더 좋더라고요.” 그런 아내의 모습에 가슴이 뿌듯해지는 남편이다. 최 전 부시장은 다른 이들에게도 자신들처럼 부부명함을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얼핏 이런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한 건데, 막상 만들고 보니까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남들이 들으면 주책없다 할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동행할 사람인데 같은 명함 쓰면 좋잖아요. 직장생활 할 때도 상무든 대표든 그의 아내 누구 이렇게 써놓으면 어때요. 그게 뭐 나쁜가요? 부부는 일심동체인걸요.” 시간이 지배하던 일상을 벗어나다 명함에 적힌 ‘보헤미안’이라는 수식어처럼, 해외여행을 다니며 그야말로 집시의 삶을 살았다는 그들이다. 가고 싶은 곳으로 달리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미션은 단 하나, 90일 안에 최종 목적지인 영국 서쪽 대서양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유유자적하고 낭만적인 모습에 부러움을 사는 그들이지만, 이러한 생활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고 한다. 특히 38년 공직생활에 몸담아온 남편에게 자유란 출퇴근보다도 낯선 존재였다. “9시에 출근하고, 9시 반에 회의하고, 10시에 기관 협의하고…. 그렇게 30분, 1시간 단위로 하루를 살았어요. 내가 시간을 관리한 게 아니라 시간이 나를 관리했던 거죠. 특별한 게 없는데도 6시엔 호텔에 도착해야지, 8시엔 저녁을 먹어야지. 그런 시간의 강박관념 같은 게 있는 거예요. 6시에 호텔에 가면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나? 누가 나를 기다리나? 아직 배가 안 고픈데 저녁 좀 늦게 먹으면 어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조금씩 시간의 틀에서 벗어나 편안해지더라고요.” 그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내 의지대로 사는 것이 바로 보헤미안의 삶’이라며 아직은 온전히 그 자유를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그 과정에 있으니, 점점 더 좋아지리라 희망한다. 일상에서의 탈피는 또 다른 변화를 불러왔다. 익숙했던 배우자의 새로운 면모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새벽에 잠을 푹 자고 일어나서 아내 얼굴을 봤는데 ‘어? 이 사람이 누구지?’ 깜짝 놀랄 정도로 새롭고 낯설 때가 있어요. 여행을 하다 보면 ‘여기가 어디더라?’ 그런 생소함이 들기도 하고요. 내 환경이나 의식이 완전히 탈태됐다고 할까? 직장생활 할 때는 나는 나대로 일하느라 바쁘고, 아내는 아내대로 혼자 집에서 뭔가를 했잖아요. 우리는 텐트생활을 많이 했는데, 텐트는 혼자 개고 펴기가 쉽지 않아요. 서로 마주보고 양쪽 귀퉁이를 잡아야 접을 수 있고, 다시 펴는 것도 함께해야죠. 그렇게 함께하는 것들이 많아지니 전보다 더 가까워진 기분이에요.” 아내 역시 “때론 남편이 멋있어 보이기도 한다”며 알콩달콩 장단을 맞췄다.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이국에서 남편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고, 낯선 레스토랑에서 즐기는 와인 한 잔은 연인들의 데이트처럼 로맨틱했다.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마오! 모든 순간이 그렇게 낭만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텐트에 비가 들어 눅눅한 채로 잠들어야 하는 날도 있었고, 밤늦게 길을 잃어 경찰이 출동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무더운 날씨에 오르막길을 오르며 체력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남편은 어쩐지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우격다짐해서 온 건데 아내가 후회하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드니까 오히려 ‘집에 가고 싶지 않냐, 힘들지 않냐’ 못 물어보겠더라고요. 나도 힘든데, 아내는 얼마나 더 힘들겠어요. 내가 그렇게 물어보면 대번에 돌아가자 할 것 같은 거예요. 그럼 내 마음도 약해지니까, 더 못 물어봤죠.” 애써 힘든 줄 알면서도 마음을 감춘 남편의 마음을 아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남편이 나에게 ‘돌아갈까?’ 이렇게 묻지 말아 달라고 속으로 바랐어요. 그렇게 물어보면 정말 가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그이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왔는지 잘 아는데, 나 때문에 포기하게 할 수 없었어요. 만약에 내가 집에 가자고 했으면 다 접고 왔을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힘들어도 절대 그런 나약한 소리는 하지 않았죠.” 부부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했던가. 함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꾹꾹 감춰뒀던 속마음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졌다. 보헤미안 부부처럼 행복한 여행을 꿈꾸는 이들이 있을 터. 그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은퇴하고 배우자가 여행을 가자고 하면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40~50대부터 함께 취미생활도 하고 시간을 보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갑자기 여행을 떠나는 게 쉽지는 않을 거예요. 시간이 나면 배드민턴을 하든 탁구를 하든 작은 취미활동이라도 함께하길 권해요. 그리고 자유여행을 가게 된다면 너무 완벽한 계획을 세워서 가지 않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거기에 맞추느라 재미가 없거든요. 큰 흐름을 갖고 함께 겪어가면서 즐거운 흔적, 또 조금 힘든 흔적을 남겨가면서 추억을 만들다 보면 더 자유롭고 신선한 여행이 될 거예요.”
- 2017-03-27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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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에 사는 차기설·정현숙씨 부부, 연꽃처럼 맑게 순하게
- 서울이라는 ‘황야’를 누벼 먹이를 물어 나르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새벽 침상에서 와다닥 일어나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 실려 가는 출근길부터가 고역이다. 직장에선 너구리 같은 상사와 노새처럼 영악한 후배들 사이에 끼어 종일토록 끙끙댄다. 퇴근길에 주점을 들러 소주병 두어 개를 쓰러뜨리며 피로를 씻어보지만, 쓰린 속을 움켜쥐고 깨어난 이튿날 새벽이면, 황급히 넥타이를 목에 동여매고 다시 일터로 달려가야 한다. 이 치열하고도 고단한 양상은 일과처럼 반복되기 십상이다. 그러는 사이에, 세월이라는 도둑은 사람의 청춘은 물론, 꿈과 희망, 체력과 정력까지를 앗아가고, 급기야 생의 강 하류에 우리를 내동댕이친다. 정년(停年)이라는 일종의 날벼락이 도래하는 건 이즈음이다. 올해로 13년째 시골생활을 하는 차기설(62)씨의 귀농 계기도 정년을 앞둔 시점에서의 고민에서 주어졌다. “쉰 살에 가까워질 때였어요. 정년 뒤엔 뭘 할까? 뭘 해서 먹고 살까? 어떻게 살아야 노년의 안정을 구가할 수 있을까? 별안간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어요. 아파트 경비원을 하기는 그렇고, 날마다 기름내에 절어 살아야 하는 통닭집을 하기도 싫고, 대체 무얼 하면 좋을지 궁리하게 됐어요. 그러다가 문득 어! 농사? 옳지, 농사가 괜찮지 않을까? 그건 정년이라는 게 없지 않은가? 그런 착상을 하게 됐어요.” “세상에 못 믿을 직업이 농사라고, 과히 권장할 일이 아니라고 홍보하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게다가 선생은 농사 경험조차 전무했다죠?” “섬세하게 재거나 따지지 않았어요. 일단 농사에 필이 꽂히자 자못 매력적인 직업일 거라는, 가망성 있을 거라는 결론에 곧장 닿았어요. 일테면, 상당히 무모하게 귀농한 것이죠. 그러나 무작정 귀농을 하면 실패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 알고 있었기에 준비랄까, 공부랄까, 그런 건 미리 좀 해뒀죠.” “흔히 아내들은 귀농을 꺼려합니다. 고생길이 뻔히 보여서. 부인께선 아마도 반대했겠죠? 당신 혼자 잘해보소서! 그러며….” “어, 잘 아시네? 제 아내(정현숙·56) 역시 결사적으로 반대했어요. 처음 딱 한 번 내려와 보고 나서는 발걸음을 끊어버립디다. 3년 정도가 지난 뒤에야 합류를 했죠. 농사를 한답시고 혼자 먹고 자는 저의 몰골이 형편없어서였죠(웃음).” 차기설씨는 건축 관련 잡지사 편집장을 끝으로 서울생활을 청산했다. 검게 그은 피부, 소탈한 매무새, 거칠어진 손…. 농사꾼으로 변신한 지 오래인 그의 외형은 날렵한 도시인의 그것과 다르다. 억실억실 전신에 무르녹은 농부다운 풍색을 통해 그가 이미 머리 대신 몸을 쓰는 근로와 근면을 숭상하는 사람으로 변한 걸 짐작할 수 있다. 그가 과거에 지녔던 인생에 대한 관점과 사유도 새로운 지평을 굽이치고 있을 법한 일. 여하튼, 유한한 인생에 흥미와 생기를 부여하기 위해선 반전과 반동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차기설씨는 귀농으로써 방향타를 휘익 돌려 미지의 세계로 접어들었다. 연꽃에 심은 꿈 차기설씨의 농장엔 ‘우리 맘 연애(蓮愛) 이야기’라는 달달한 이름이 붙어 있다. 연꽃을 테마로 한 농원이다. 연(蓮)을 길러 거두어 연잎밥, 연잎차, 연근차, 연근환 같은 가공식품을 생산한다. 요새는 전국 도처에 연꽃농원이 산재하지만, 그가 연 농사에 뛰어들었던 당시엔 미답의 영역이었다지. 어떤 내력으로 연 농사를 시작했지? “귀농을 준비하며 가장 고심한 건 작목 선택이라는 문제였어요. 저의 성향과 실력에 부합하는 작목을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죠. 흠. 나름대로 파악을 하고 보니, 쌈채류는 돈은 되는 대신 매우 부지런해야 하는 작목입디다. 날마다 꼬박꼬박 상품을 출하해야 하니까. 그러나 저는 몹시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라 적합하지 않다 봤어요. 과수는 어떤가? 이건 노련한 전지(剪枝) 등 갖가지 노하우가 필요하고, 벼농사의 경우는 장비 구입에 비용이 너무 많이 먹힌다는 걸 알았어요. 포기해야 할 작목들이었죠. 그럼 뭘 하나? 별다른 장비 없이 최소의 농토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작목, 1차 농업이 아닌 가공 농업, 그게 뭘까, 오래 고심했는데, 어느 날 문득 연꽃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래, 연이다, 연꽃에 꿈을 심자, 그런 작심에 이르렀던 겁니다.” “시인의 영감처럼, 별안간 연꽃 농사를 발상한 거예요?” “아닙니다. 제가 40대 중반 즈음, 공주 시골에 사는 친척 형님의 부름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그 형님을 찾아 내려갔는데 아, 글쎄 1만 평에 달하는 연밭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 양반의 요점이 뭐냐 하면, 앞으로 연 농사가 유망할 것이다, 연을 활용한 각종 가공식품이 각광받을 것이다, 뭐 그런 얘기였어요. 심드렁히, 건성으로 들어 넘기고 말았죠. 당시엔 귀농이라는 걸 생각조차 하지도 않았거니와 시골살이에 동경 같은 것도 전혀 없었으니까. 그런데 몇 년 뒤, 그 형님의 연 농사 권장에 썩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일이 시작됐어요.” 은인을 만난 셈이다. “초기 한동안은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너무도 힘들었거든요. 온통 몸으로 때워야 하는 일들이라서 말이죠. 게다가 연 재배나 가공에 관한 자료가 거의 없었어요. 비용도 생각보다는 많이 들었죠. 연 방죽에 드디어 연꽃이 만개했을 때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지만, 뭐 변변히 팔 게 없었어요. 사람들이 남기고 간 쓰레기만 잔뜩 쌓이더라고.” “부인의 불평불만도 쌓였고?” “남편으로서 스타일 구겨지는 상황이었죠. 당시에 팔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수련뿐이었어요. 그래 간간이 수련을 팔며 활로를 모색했는데, 사람들이 요구하길 수련을 아예 자배기에 심어달라고들 하는 게 아니겠어요? 당장에 자배기를 들여오고, 덩달아 갖가지 항아리며 질그릇을 왕창 떼다가 전시 판매하게 됐어요. 뜻밖에도 그게 먹혀들었어요. 연꽃 농원이지만 그릇 장사로 재미를 봤고, 그게 정착의 기반이 됐습니다. 이후, 연 가공식품의 생산과 판매에 탄력이 붙었죠.” 차기설씨의 농원은 목 좋은 곳에 있다.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광평리, 휴일이면 나들이 인파가 바글거리는 궁평항이나 제부도를 지척에 둔 곳이다. 자연스럽게, 수월하게 구매자들이 출입할 수 있는 입지인 셈. 애당초 나들이객들이 오가는 길목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터를 잡았더란다. 몸을 주로 쓰는 게 농사라지만, 머리라는 건 녹슬도록 마냥 놀려 먹이라고 있는 물건이 아니다. 차기설씨는 농원의 성장을 위해서는 일단 완전한 자연산 고품질 연 가공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철칙을 세우는 한편, 홍보에 주력했다. 연꽃축제를 매년 거하게 개최해 사람들을 유인했으며, 블로그와 홈페이지를 개설해 농원을 열심히 소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인생의 목적을 마음의 평온과 안락에 두었지만, 차기설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농원을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일을 1차적 목표로 삼았다. 이는 지당한 실사구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바야흐로, 그의 농사는 성장세를 타고 있다. ‘느림의 미학’을 배우는 삶 “무슨 일이건 10년은 한 우물을 파야 빛을 본다죠? 농사도 마찬가집니다. 저희는 5년 만에 흑자를 보기 시작했지만 10여 년이 흐르고 나서야 안정궤도에 접어들었어요. 그러나 통장을 보면 지금도 마이너스예요. 왜냐, 재투자가 계속되기 때문이죠.” “귀촌이나 귀농을 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어려움이 있다면 그건 뭐죠?”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관계 맺기일 겁니다. 교류에 실패하고 소외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일단 시골에서 살고자 한다면 도시의 아파트식 사고를 빨리 버려야 해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도시와, 거의 완전히 오픈된 시골의 풍습은 매우 다르니까. 가령, 시골 노인네들은 이웃 사람이 외출을 할 때 꼬치꼬치 물어오는 경우가 흔합니다. 어딜 가느냐, 언제 돌아오느냐. 이걸 기분 나빠할 일이 아녜요. 노인네들은 이웃이 언제 돌아올지를 미리 알아두었다가 그 집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죠. 가장 좋은 건 동네잔치를 가끔 하는 거죠.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녜요. 국수를 삶아 함께 나눠 먹으면 되니까.” “농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향으로는 어떤 게 있을까요?” “단연, 매우 게으른 성향의 소유자죠. 그런 분들은 아예 안 내려오는 게 정답이에요.” “다소 게으른 건 미덕일 수도 있죠. 노력이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게으름이 아니라, 일테면 유유한 태도 같은 거, 매사에 너무 악착 떨기를 스스로 자제하는 거….” “그걸 ‘느림의 미학’이라 해도 되겠죠. 제가 원래 매우 성미 급한 사람이었어요. 시골에 살면서부터는 많이 변하더라고요. 마음이 편해졌어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힘이 좀 생긴 것 같아요. 때가 되면 되겠지 하는 태도랄까. 천천히 자라나는 작물들을 바라보면서 배운 덕이죠. 농작물만이 아니라 시골의 묵묵한 자연 순환이나 풍경들에서도 좋은 영향을 받습니다. 도시에서 사람의 삶이 초침(秒針) 단위로 돌아간다면, 시골에선 분침도 아닌 시침(時針) 단위로 돌아간다고 비유하고 싶어요.” “연꽃의 매력은 뭐라 보시는지?” “연꽃만이 아니라, 모든 꽃들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죠. 막말로 성격 나쁜 사람도 꽃 앞에선 꽤나 순해지지 않던가? 저처럼 말이죠(웃음).” 시골의 산천 안에 살다 보면 유심히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슬쩍 열린다. 가만히 소소한 들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는 중에 굳었던 감관이 깨어난다. 이윽고 사는 일의 본연에 생각이 닿게 마련이다. 귀농으로 한결 느긋해지고 순해졌다는 차기설씨의 토설에 솔깃해진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 2017-03-27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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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에서 넓힘까지
- 마음자리 넓히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남편은 여전히 불교 쪽, 아내는 기독교 쪽으로 기웃거린지 이제 몇 개월 남짓 되었다. 어떤 이 들은 한 집안에 종교가 난립한다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히려 공평하고 종교의 자유가 동등하게 있으니 차라리 평화가 깃들었다. 몇 달 전부터 필자는 전혀 상상치 못하던 일을 책임지게 되어 그 역할이 매우 무거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둥둥 떠밀려 그 자리에 올랐지만, 후회스러울 만큼 감당키 힘든 일들은 마구 펑펑 터져 나왔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새로운 삶의 황무지에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 부는 시간들이었다. 도저히 홀로선 마음 만으로는 인내하기 힘들었고 몰아치는 감정의 앙금들은 풀리지가 않았다. 필자는 평안을 위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또한 사치에 불과했다. 마음은 더욱 뜨겁게 불타올라 상대에 대한 미움만으로 하루, 아니 몇 달이 몸과 마음을 만신창이로 만들고 훌쩍 지나가 버렸다. 교만한 자신만으로는 견디기가 힘들어 두 손 모아 기도로, 엎드려 절을 해댐으로써, 마음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한주는 교회에서, 한주는 절에서, 끝없이 중얼거리는 입술의 부딪침으로 요동쳐 대는 육신과 정신을 잡아달라고 매달렸다. 수없는 번뇌의 증후군 속에서 마음만이라도 평안하게 해달라고 빌어댔다. 그리고, 매서운 고통도 끝내는 시간과 함께 사그라들기 마련이었다. 또 살아 버티기 위해서는 마음먹기 습관이 우선이었고,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지면서 자신도 모르는 어느 날, 마음에는 넓은 바다가 넘실대고 있었다. 드디어 아무리 큰 고통도 겪고 보니 또 별것 아닌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결국 마음의 평안은 끝내 마음이 하늘과 바다처럼 넓어지는 것이었다.' 세상 속에서 이런저런 색깔로 저마다 살다 보면, 오르고 또 내리고 헤쳐나가야 할 앞길이 수없이 펼쳐진다. 삶이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높은 산처럼 넘어야 할 장애물들의 연속이다. 그러나 올라와 내려다보고, 넘어와 돌아보면 결국은 고통도 행복도 지나온 삶의 아마득한 일부일 뿐이었다. 다시 시작했다. 마음자리 넓게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내 품 안에 품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고개 숙여 두 손 합장으로 기도하고, 무릎 꿇어 몸 낮이며 몇 번이고 수없이 반복해보았다. 화를 내지 않는 법이란 책을 늘 끼고 다니기도 했다. 드디어 어느 날, 수없는 습관 속에 삶의 맷집이 더 커져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날 이후로 작고 사소한 일에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수시로 참지 못해 화가 치솟아 고함치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렇게 힘들어 죽을 것만 같았지만 지금 멀쩡히 살아있음이 그 증거가 되었다. 단지 지나온 과거의 한 페이지로 발을 딛고 또 새로운 날의 희망 속으로 앞을 향해 여전히 달리고 있다. 모든 것들은 마음먹기가 힘들 뿐이다. 아니 그 마음공부의 실행이 무거울 뿐이다. 이제 당당하게 견디며 강건하게 앞으로 나아가면 끝내는 얻어질 것이라는 신념이 또 찾아올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 못할게 무엇이랴. 또다시 우직하게 움츠린 마음 활짝 펴고 넉넉한 마음자리 길로 성큼 나아가기를 희망해본다. 찾아올 내일을 위하여, 무소의 뿔처럼...
- 2017-03-2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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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혼생활과 수명은 어떤 관계일까?
- 결혼생활은 사람의 수명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최근 황혼이혼이 증가하고 있다.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독신으로 혼자 산다면 계속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보다 행복할까? 나아가 이혼 후 다른 배우자를 만나서 재혼을 하면 짜릿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을까? 이혼과 재혼은 여명(餘命)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혼자 사는 사람들을 보면 처음부터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평생을 산 사람이 있고 결혼해서 부부가 함께 살다가 무슨 이유로 이혼을 하는 경우도 있고 부부 중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서 어쩔 수 없이 독신이 되는 경우도 있다. 사별이든 이혼이든 혼자 살다가 다른 배우자를 찾아서 재혼을 하는 사람도 있고 독신을 고집하며 계속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사람의 삶이 행복한 삶이었느냐 불행한 삶이었느냐는 다분히 주관적이어서 논외로 치고 이 중 누가 가장 오래 살았을까? 궁금한 사실에 대한 통계자료가 있다. 1921년 스탠포드대학의 심리학 교수 루이스 터먼 박사는 1910년 전후에 태어난 소년소녀 1500명을 선발해 무려 80년 동안(터먼 박사의 후배 연구자들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이들의 결혼과 이혼에 관련한 수명을 분석하였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가 달랐다고 한다. 결혼과 수명 사이의 관계를 살펴봤을 때 남자의 경우, 결혼하고 부부가 계속 같이 산 사람이 가장 오래 살았고 다음으로 아예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그 뒤를 이었다. 다음으로 이혼하고 다시 재혼한 사람이 오래 살았고 맨 마지막이 이혼 후 독신으로 계속 산 사람이었다. 여자의 경우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결혼한 뒤 부부가 함께 해로한 사람이 가장 오래 살았고 다음으로 이혼 뒤 재혼하지 않고 혼자 독신으로 계속 산 여자가 이혼하지 않고 함께 산 사람과 비슷했다. 다음으로 아예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이 그 뒤를 이었고 가장 수명이 짧은 여성은 이혼 후 재혼한 여성이었다. 결혼 후 혼자가 된 홀아비는 일찍 죽지만 이혼하였거나 과부로 살아가는 여자는 오히려 재혼한 여자보다 오래 살았다는 통계는 일반인의 상식을 뒤집는 통계다. 부부가 함께 사는 것이 건강보조제를 먹는 것처럼 효과가 있다면 남녀에게 공평해야 할 텐데 남자에게는 적용되고 여자에게 적용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부부가 함께 살면 어떤 점이 좋을까? 우선 의학적인 면만으로 살펴보면 긴급한 사항이 닥칠 때 대신 119를 불러주고 아플 때 옆에서 간호해주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된다. 환자가 되어 말을 제대로 못할 때 의료진에게 병의 진행 상태를 대신 말해줄 수도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배우자는 스트레스 완충 역할을 한다. 직장에서 좋지 못한 일이 생겼을 때나 아이들이 말썽을 부릴 때 기타 사건사고가 생겼을 때도 배우자에게 털어놓으며 위로를 받기도 하고 공동으로 해결책을 강구하는 정신적 원군이 되는 것은 분명 결혼생활이 수명 연장에 좋은 점이다. 부부가 함께 살면 어떤 점이 불편할까? 서로 지향하는 인생관이 달라서 사사건건 트집만 잡고 바가지만 긁는 배우자라면 오히려 결혼생활이 스트레스로 작용하여 수명이 단축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갓 결혼한 부부라면 남자는 원래 이런 동물인가? 여자는 본래 이런 성격인가? 하며 자신을 상대에게 맞추려는 노력을 한다. 더구나 젊을 때는 유연성이 높아 자신을 변화시키는 범위나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화성남자와 금성여자가 결혼해도 잘 맞추고 산다. 하지만 이미 부부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전 남편 전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의 행동이 몸속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재혼한 지금의 상대와 비교를 하게 되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서는 강하게 반발한다. 재혼이란 평탄한 결혼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자식이 있는 경우에는 양육 문제나 재산분할 문제로 시끄러울 확률이 높다. 방송에서 보도되는 사건사고를 보면 재혼 후 새롭게 구성된 가족 내에서 성폭력도 일어나고 계모나 계부의 방임이나 유기 등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도 발생한다. 결국 행복하려고 한 재혼이 파멸에 이르고 만 것이다. 실제 이웃이나 친척, 친구들을 봐도 행복을 찾아 단행한 이혼이 해피엔드로 끝나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한쪽은 행복해도 다른 한쪽은 이혼한 것을 후회한다. 여자 혼자서 또는 남자 혼자서 살아가기가 뚜렷한 독신주의의 인생관이 있다 해도 녹녹하지 않은 세상이다. 그래서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찾아 결혼이나 재혼을 적극 권장하지만 재혼한 부부가 또다시 갈라설 확률은 높고 통계가 이를 증명한다. 이혼을 하고 팔자를 고치면 노다지를 캘 것 같은 환상에서 깨어나야 한다. 인생은 두 번 살 수 없다. 선배들이 살아온 삶의 추적같은 통계자료를 보면서 처신에 신중해야 한다.
- 2017-03-18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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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속 불륜 미화가 우려스럽다
-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길 수 있다. 그래도 가정을 파괴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속속들이 사정을 들어보면 자의든 타의든 그런 일이 종종 있기도 하다. 필자는 좀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서 어떤 사정이 있다 해도 외도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단언했었다. 특히 잘나고 우위에 있는 쪽이 외도로 인해 상대방을 버리는 경우 더욱 분통이 터졌다. 그런데 요즘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비록 외도로 만난 사이라 해도 너무너무 사랑해서 죽고 못 살 정도라면 그래 길지도 않은 인생 후회 없도록 한번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드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판단에 따른 상처나 피해는 전적으로 당사자들이 짊어져야 할 일이다. 최근 주말 드라마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남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어떤 면에서는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줘 흥미롭게 시청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외부의 요인(남편의 과거 여자, 시어머니의 계략 등) 때문이긴 했지만 엄연히 가정을 가지고 있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렸다. 그것도 상대가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잘생기고 능력 있는 의사였다. 필자는 매우 보수적이다. 그래서 왕자님을 만나 신분상승하는 신데렐라 신드롬도 싫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남자를 유혹해 불행에 빠뜨리는 팜므파탈도 싫다. 이런 사고방식의 필자가 남편 외의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고 일탈하는 여자에게 공감을 느낄 리는 절대 없다. 아, 물론 당사자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외도로 가정이 깨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데도 드라마를 보면서 가끔 아름다운 그 불륜 남녀에게 응원을 보내는 자신을 보며 멋쩍은 웃음을 짓곤 했다. 어느 날 불륜 남녀가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나무 아래서 포옹을 하는 장면이 나왔을 때 이성적으로는 ‘어어~ 저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속으로는 은근히 격려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니 이 무슨 조화속일까. 저렇게 선하게 생기고 잘난 남자가 괴로움에 빠진 여자가 마냥 좋다는데, 여자가 유부녀인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 관계를 지지해주고 싶은 이 속마음은 뭘까. 다가오는 남자 배우가 너무 멋져서 여주인공이 필자였다면 과연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해봤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외도를 허락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해서 화들짝 놀라면서 쓴웃음을 짓곤 했다. 그러고 보니 자극적인 소재의 드라마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알겠다. 아름다운 남녀 배우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불륜을 미화시키면서 드라마에 열광하는 일반 사람들에게 외도가 나쁘지 않다고 설득하는 것 같아 두렵다. 요즘 세상에는 어느 한쪽의 잘못을 참고 살아가는 부부는 드문 것 같다. 딸을 시집보낸 요즘 부모들은 자기 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절대로 속 썩지 말고 이혼하고 돌아오라 얘기한단다. 인간이므로 잠깐의 실수도 있을 수 있는데, 뭐가 문제인지 알아보면서 토닥이고 달래서 잘살 수 있도록 조언해줘야 하는 게 부모 입장인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이러하니 젊은 사람들이 부부관계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쉽게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모두가 천편일률적으로 도덕적이기만 한 세상도 재미없을 거라는 생각도 살짝 해본다. 그러나 외도 같은 위험한 상황에는 절대로 빠질 염려가 없는 나이에 와 있는 필자라서 할 수 있는 생각일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니 약간 서글프기도 하다. 어쨌든 결론은 자신만 생각하고 배우자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외도는 없는 세상이면 좋겠다.
- 2017-03-1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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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지성인 윤석화, 돌꽃처럼
- 마치 부드럽게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그 강은 사람들이 쉬이 찾지 않는 산속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길을 내어 고고히 흘러가는 강이다. 한 시간 동안 윤석화와 인터뷰를 끝내고 든 느낌이다. 42년간 활동한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배우로서, 그리고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늦깎이 엄마로서 그녀는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과 그런 엄격함이 빚은 솔직한 결론들을 청명한 울림으로 던져줬다. 배우와 모성에 대해 그리고 고난을 감히 축복이라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윤석화는 인터뷰하는 동안 쑥스럽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그리고 아직 사진 찍히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고 말했다. 의외다. 우리나라 최고의 연극인을 꼽으라면 항상 첫 손가락에 들어갈 그녀가 사진에 익숙하지 않다니? “연극배우란 것이 늘 배역에 대해 면밀히 연구한 후 제 마음속에서 새로이 만들고, 조금씩 조금씩 표현하는 연습을 통해 저한테 그 인물을 오게 하는 거죠. 저는 그런, 어찌 보면 미련한 작업에 익숙한 사람이라…. 제가 처음부터 꿈이 모델이었다거나 어찌어찌하다 모델이 됐다면 이렇게 쑥스러울 것 같지 않은데, 그렇게 미련한 작업에 익숙하기 때문에 사진 찍는 게 굉장히 부끄러워요. 그리고 나이가 드니(웃음), 아주 쑥스러워요 정말.”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소녀 미련한 작업에 익숙한 사람, 윤석화의 어린 시절 꿈은 다름 아닌 ‘현모양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꿈도 어느 정도 이룬 그녀는 연극인으로서 살아온 지 올해 42년. 불꽃같은 ‘돌꽃’ 윤석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물론 저에겐 소망이 있죠. ‘무대에서 참 아름다운 배우다’라는 얘기를 듣고 싶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속일지 몰라도 저 자신은 속이기 힘들죠. 그래서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작품을 선택하면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다해왔어요. 연극인으로서 살아온 삶을 생각해보면, 늘 똑같아요. 어떤 때는 제가 참 괜찮은 배우 같고, 어떤 때는 이렇게 해도 되나 싶고.” 그녀의 토로에는 살아온 시간에서 증명되는 모종의 깊이가 담겨 있었다. 동시에 그녀가 여전히 현장에서 뛰는 배우임을 깨닫게 해줬다. 그녀는 ‘속도야 달라지겠지만 은퇴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배우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존재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제나 좋을 수는 없고 언제나 나쁘지도 않고.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아직도 배우 윤석화에게 하고 싶은 역할이 남아 있는지 궁금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이제는 한계가 있는 것도 인정을 해야겠죠. 저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에 대해 그렇게 말할 자신이 없는 사람이에요. 후배들이나 주변 사람들은 저의 식지 않은 열정을 얘기하죠. 예전에는 어떤 작품을 꿈꾸게 되면, 예를 들어 열 작품을 꿈꾸면 최소한 다섯은 현실로 이뤄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자신감이 예전 같지 않아요.” 대한민국 최고의 연극배우가 가진 고민은 허심탄회하게 흘러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와 그 한계를 순순히 인정했다. “연극에 대한 애정은 더 깊어졌지만 연극을 할 수 있는 환경은 예전에 비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요. 그렇다 보니 환경과 싸워야 할 것들이 더 많아졌죠. 십 년 전만 해도 작품을 할 때 ‘거침없이 하이킥’이었는데 이제는 그런 시도들이 조금 겁도 나고 두렵고…. 나이가 드니 계획을 세우면 젊었을 때는 이삼 일 정도면 실행했는데 지금은 일주일이 되어야 움직이는 것 같아요(웃음). 이러다 혹시라도 직무유기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되죠. 제가 생각하는 최선에 이르지 못했을 때 다음 스텝에 많은 걸림돌이 될 테고요.”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삶의 가치 ‘제대로 하지 않을 거면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고 말하는 윤석화는 맺고 끊음이 분명한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태도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때때로 삶에 대한 깔끔한 태도는 나이가 주는 지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요. 나이가 단순히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그 순간부터 지혜가 발휘되는 거겠지요. 내 앞의 현실을 수용해야지, ‘이래도 할 수 있어’라고 우기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추해보일 수도 있고, 교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에요.” 나이에 대한 그녀의 생각에는 자연스러움에 대한 수용을 추구하는 본인의 기준이 담겨 있었다. 그만큼 그녀는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모습을 고집한다. 그녀의 꿈은 예쁜 할머니가 되는 것이고, 지금 기자 앞에 있는 그녀는 자신의 꿈을 충실히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보톡스를 안 맞는 거죠. 배우는 자기를 관리하는 게 의무입니다. 그런데 너무 인위적으로 젊음을 유지하면 안 예뻐 보이더라고요. 예전부터 하는 얘기지만 나이든 얼굴은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책임지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것이 사실 굉장히 두렵죠. 저도 그것에 대해선 자신 없죠.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냥 잘하려고 노력해요. 가능하면 모든 것에 감사하고 기도하고 기뻐하고 내게 있는 것을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는 삶을 살길 바라는 거죠. 그렇게 나이 들다 보면 향기가 나지 않을까요(웃음)?” 배우로서 사랑받는다는 의미를 깨닫다 윤석화는 연극배우로서 살아왔고 연극배우로서 세상을 익혔다. 그래서 그녀의 삶의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연극이다. “제가 연극배우로서 삶을 배우고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그런 관점이 저를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TV나 영화나 음반 제의가 많았어요. 그런데 저는 정말 유명해지는 게 싫어서 연극을 했어요. 연극을 해보니까 이건 유명해지지도 않고, 굉장히 의미가 있는 일 같았죠.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연극이 무엇인지 깨달을 무렵 내가 평생을 걸어도 좋을 나의 업이다 싶어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미국을 갔죠.” 그리고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언론은 그녀를 스타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러한 꾸밈조차 싫었다.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가 없었다면 좀 더 자유롭게 큰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을지도 몰라요. 늘 주목을 받는다는 게 제게는 자유를 뺏기는 기분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산도 넘고 저 강도 건너면서 여기까지 왔어요. 스타란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백 명이 날 좋아한다고 쳐요. 그중 구십 명은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불특정 다수이고 열 명은 정말 윤석화를 사랑하는 팬으로 남을 수 있겠죠. 그러나 생각해보면 어찌됐든 인기가 있다는 것, 윤석화를 보러 그 연극을 보러 온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거예요. 인기가 있었으니 그만큼 연기를 할 수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지금은 감사해요.” 연극에 뼈를 묻고 살아온 윤석화가 변신을 하려는 걸까? 그녀는 최근 SBS 드라마 에 출연했다. “드라마를 무조건 안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좋은 드라마가 있으면 하고 싶어요. 그런데 워낙 안 하는 사람으로 인식이 됐죠. 물론 제 본분은 연극이니 선배로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첫 번째 의무라고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고집들에서 좀 자유로워졌어요. 뭐든 때가 있는 거겠죠(웃음).” 어머니는 위대하다 연극인으로서의 삶만큼이나 윤석화의 삶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늦깎이 엄마로서의 삶이다. ‘가슴으로 낳은’ 수민(아들 14세), 수화(딸 10세)를 키우고 있는 그녀는 어떤 엄마가 되고 싶은 걸까? “어머니는 정말 희생이에요. 육아를 해보니 힘들더라고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머니가 된다면 어떤 이유라 해도 아이를 통해 대리만족을 꿈꾸면 안 될 것 같아요. 어머니는 그 아이가 정말 행복하게 자랄 수 있도록, 그 아이답게 자랄 수 있도록 아이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아는 게 중요하죠.” ‘제일 부러운 사람이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가 있어서 급할 때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그녀의 말에서 그간 겪었던 육아의 고통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저의 경우 가장 힘든 것은 아이 입장에서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그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모르죠. 공부를 하라고 해야 하는지 놀라고 해야 하는지, 야단을 쳐야 할지 칭찬을 해야 할지… 정말 ‘뇌가 흘러내린다’는 표현이 딱 맞아요.” 그녀는 어머니가 가정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단적으로 말했다. 가정은 여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인내심도 많아야 하고 포용력도 있어야 되고 단호함도 있어야 해요. 그게 여자예요. 남자는 그게 안 돼요.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옳은 선택을 하는 건 아니지만, 생각을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결과는 정말 다르다고 생각해요.” 국내 입양 위한 일곱 번째 자선 콘서트 아이에게서 너무 멀찌감치 떨어져 생각 없이 말하는 것보다는 다치고 상처받더라도 다가가야 한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지만 윤석화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들이 사춘기가 되니 그렇게 예뻤던 애가 지금은 내 아들이 맞나 싶고…. 한편으론 애가 컸구나 싶어 뿌듯하지만 ‘잘못 크면 어떻게 하지?’ 걱정도 돼요. 말하는 것만 봐도 ‘으유~!’ 이러고 싶을 때 있죠. 그러나 ‘엄마 말 들어봐~’하며 인내심으로 달랩니다. 이론은 쉽죠. 저는 말하는 게 굉장히 직설적인데 아이한테는 그럴 수 없어요.” 아이를 키우기로 했을 때, 그녀는 한 치의 고민도 없었다고 한다. 그녀가 과감한 결정을 한 것은 열악한 국내 입양 현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래서 그녀는 국내 입양을 위한 자선 콘서트와 바자회를 지금까지 여섯 차례 열었다. 2015년에는 이틀 동안 가수 이문세, 배우 황정민과 박건형, 기타리스트 함춘호 등 그녀와 친분이 있는 유명인사들이 무대에 나와 그녀를 도와줬다. 올해는 하루 더 늘려서 5월 5, 6, 7일 3일 동안 동숭동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일곱 번째 콘서트와 자선 바자회를 연다. 그녀는 2003년부터 국내 입양기관과 미혼모 자립을 위해 자선 콘서트를 계속 열어왔으며 여기서 나오는 수익금도 모두 기부하고 있다. 의연하게, 담대하게, 온유하게 “제가 오늘 밤 갑자기 죽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에요. 기쁘게 죽을 거예요. 저 자신을 위해선 할 만큼 했고 누릴 만큼 누렸어요. 누군가는 가소롭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제 그릇이 그러니까요. 물론 제 신념은 ‘죽을 때까지 결코 죽지 않겠다’예요. 미리 죽지 않고 그래서 그냥 인생을 다 사는 여자(웃음).” 시원시원한 목소리 톤만큼이나 인생을 논하는 그녀의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나 후회가 없다고 말하는 그녀에게도 아직 해보고 싶은 게 있지 않을까? “왜 없겠어요, 많죠. 하지만 사람이 자기가 해보고 싶은 거 다 할 수는 없으니까요. 뭘 해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는 것 자체가 살아있음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그걸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면서 길을 가야겠죠.” 그녀가 마지막으로 한 “저는 저답게 살기를 바라요”라는 말에는 윤석화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마침내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 사람이 말할 수 있는 확신에 찬 결론이기도 했다. “누구처럼 멋있게, 누구처럼 돈 많게, 누구처럼 가난하게도 아니고 저다운 저를 바라보고 생각하며 저답게 살고 싶었어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십 넘게 살면서 약간의 후회는 있죠. 부족하고 거칠었던 철없던 날들이었지만 다시 다잡고 살았어요. 그래도 살아오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의연하고 담대하고 온유하게 산 것이 바로 저다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조금 더 깊어지면 예쁜 할머니가 되겠죠(웃음).”
- 2017-03-14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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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렇게 돌아설 것을... "
-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다. 하물며 오랜시간 정을 나누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 언제 그랬냐는듯 등을 돌리며 얼굴에는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지난시간, 받기만 했던 감사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오랜만에 미국으로 전화를 했다. 그녀는 웬일이냐며 반갑다고 아주 큰목소리로 답을 해왔다. 그러나 여전히 욕심으로 지글지글 끓어 오르는 목소리에는 한국의 제주도를 운운하고 있었고, 지난날에 대한 후회의 목소리도 역력했다. 아직도 변함이 없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보다는, '그 언젠가는 변하겠지?' 라는 미련을 남기며 또 한동안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와는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하며 알게된 관계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다방면에 상당한 욕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한계는 멈출줄을 모르고 현재 진행형이었다. 커다란 병원빌딩에서 남편은 닥터로 병원을 하고 있었고 저택도 지니고 있었다. 병원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 여기저기 땅을 사들였다.1년에 두어번은 한국을 오가며 강남에 건물도 사들였고 아파트도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를 지니고 똑똑한 그녀는 돈만 생기면 늘 금 은 덩어리를 주어 모았다. 그녀는 엄청난 구두쇠였지만 언젠가 필자가 돈이 필요하다고하면 아주 잠깐이라도 덩어리 채로 빌려주곤했다. 뿐만아니라 학구적인 열정도 누구보다 남달라 쉴새없이 하늘로 치솟았다. 병원에서는 간호원을 못믿겠다며 직접 주사를 놓기위해 한의대도 다니고 있었다. 필자는 어느날부터 그녀의 대단한 열정에 관심을 두면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후로 부터 그녀도 필자의 딸에게 묘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급기야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서 의사가 된, 필자의 딸에게 이글거리는 욕심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필자에게 서서이 다가오며 물질공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본격적으로 접근을 하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병원으로 필자부부를 불러대며, 온갖 것들로 마음을 사로잡으려 안간힘을 써댔다. 주로 먹을것 들이었다. 이런저런 과일에서부터 생선까지, 미안해서 사양을 할라치면 감히 입을 뗄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더구나 명절때가 되면 그녀의 저택으로 초대해 떠들썩하게 자기의 부를 과시하곤 했다. 심지어는 그녀의 아들에게 직접 요리를 하게하며 미래의 장모에게 점수를 따려고 갖은 묘책을 써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대단한 가족들이었다. 급기야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몇번에 걸쳐 한국까지 달려가 필자의 딸을 만나고 오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말았다. 그러나 남녀관계의 결혼인연이란 그리 쉽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던 어느날엔가 부터 찬바람이 서서히 불기 시작한다. 상냥하기만 하던 얼굴에 어딘가 모르게 그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필자를 맞이하는 모습에도 그림자가 지기시작했다. 아마도 그녀의 목적의식에 금이 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서서히 그렇게 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을 느끼면서도 필자는 냉정하게 돌아설수만은 없었다. 늘 받기만해 아주 부담스러워했는데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유를 모르니 이럴수도 저럴수도 없는, 아니 그녀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그후로 부터 그녀의 일방적인 욕심은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으나, 늘 그녀의 특기인 후회스러움이 필자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필자도 서서히 마음을 돌리며 억지스러운 인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관계란 바람처럼 스쳐가는 가벼운 가식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바다건너 전화속에서도 그녀는 아직도 결혼을 하지못한 그녀의 아들을 또 가식적으로 자랑만 펼친다. 그러나 필자의 딸은 이미 훌륭한 배필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녀가 생각하듯 세상사 모든것이 욕심만으로 채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아보니 더구나 자식문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러나 아직도 변함없이 뭔가 똘똘뭉쳐있는 그녀의 아집속에서는 못내 아쉬움이 남았다. 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유는 알수없는 미스테리이다. 오랜만에 미국으로 연락해 차마 물어볼수도 없었다. 다만 지금도 그녀는 필자의 딸을 잡지못함은 끝내 애석함으로 남아있는 듯했다. 돌이켜 지나온 이민 생활을 생각하니 웃음반으로 헛웃음도 나온다. 또 그모든것들은 지난 과거속에 서서이 묻어져만 간다. 단지 한때의 추억으로 남을 뿐이다. 그녀는 필자가 잊지않고 국제전화로 연락해 줬음에 깊은 고마움을 전해왔다. 사람의 관계는 한번 끊겨지면 언제 다시 연락할 사이가 될지 모르지만, 필자는 그녀가 지난날 퍼부어 주었던 고마움에 감사함은 변함이 없다. 언젠가 나이를 더 먹고, 욕심의 기운이 소진을 할때면 다시 만나, 지난 과거속 이야기에 함께 머물며 자식들 이야기로 웃고 떠들며 인생을 나누고 싶다. 그저 이해타산이 없고, 소소한 정이 담긴 삶의 관계에서 자식과 함께 늙어가는 사람냄새로 만나고 싶다. 그녀와 훈훈한 인정으로 만날수있는 언젠가 그날을 기다려 본다.
- 2017-03-1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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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 뒤의 불행’
- 누구에게나 견디기 힘든 삶의 아픔은 있다. 그러나 그 순간 들을 잘 참아 낼 때 드디어 환한 한줄기의 행복이 살며시 찾아온다. 어느 날엔가 초췌해진 친구가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자초지종을 묻기 시작했다. 친구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기막힘을 털어놓는다. 어제 바로 교도소에서 나왔다고 했다. 필자는 눈을 크게 뜨고 어이가 없어 그냥 듣기만 했다. 갑작스레 나타나 교도소를 운운하니 어안이 벙벙했다. 언젠가 친구는 남편의 외도를 눈치 채기 시작했을 때, 어째야 하느냐고 눈물로 하소연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때 필자는 그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말고 일단은 참고 기다리라고 충고 아닌 충고를 했었다. 그리고 몇 달 만에 친구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어 잘 돼가는 줄만 알았다. 결국 친구는 남편의 내연녀를 만나며 일은 벌어졌다고 했다. 손아래 시누이를 대동하고 혈압이 올라 참지 못하고 내연녀를 만났다고 했다. 이런저런 실랑이 끝에 싸움이 벌어졌다. 나이 어리고 철이 없던 시누이는 그녀와 함께 폭력을 휘둘렀고, 그녀가 끼고 있던 다이어 반지까지도 강제로 빼앗았다고 했다. 자기 오빠가 해준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라며 내놓으라고 했단다. 끝내 남편의 내연녀는 경찰서에 신고를 했고, 그 자리에서 폭력 및 물건 갈취 이유로 유치장으로 향했다. 그길로 한 달 남짓 교도소 생활을 했고, 돈으로 겨우겨우 빠져나와 이제야 나왔다는 것이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말도 안 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더구나 재판에까지 휘말린 친구는 더욱 난감하게 되어 시집에서도 코너로 몰리게 되었다. 시누이가 앞장을 섰건만 끝내는 남편은 물론이고 시부모들까지 알게 되어 졸지에 가해자로 몰리며 죄인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시부모는 시도 때도 없이 친구를 불러들여 무릎을 꿇리고 반성하도록 시켰단다. 여자가 참지 못하고 집안 망신을 시켰다며 온종일을 괴롭혔다고 했다. 시부모는 친구가 타고 다니던 차도 팔아 치었다. 차가있어 쓸데없는 짖을 하고 다녔다는 이유였다. 도저히 더 이상은 못 살겠다며 친구는 이혼을 강행했다. 필자도 더 이상은 어떻게 위로해줄 수가 없었다. 그저 며칠간 필자의 집에서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일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후, 필자가 한국에 돌아와 25년 만에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다행히도 다른 남편을 만나서 서로 의지하며 잘 살고 있었다. 그러나 전 남편은 결국 지난해 어이없이 저세상으로 갔다고 말을 했다. 그것도 자신의 넓은 땅에서 자기가 직접 운전하던 포클레인 차가 뒤집어져 그 밑에 깔려서 운명을 다했다고 했다. 가족들은 고사하고 부모님도 모르게 그 즉시 사망을 했다고 했다.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 필자는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성남에서 손가락 안에 들던 어마어마한 땅 부자였는데 결국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었다. 그것도 전 부인인 친구의 딸 이 둘, 새 여자와 살면서 입양한 자식인 딸도 하나, 그리고 새로운 부인에게서 뒤늦게 낳은 아들 하나를 남겨두고 순식간에 떠났다고 했다.장례식을 치르자마자, 자식들과 새엄마 그리고 친구까지 합세해 재산 전쟁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필자는 친구의 덤덤한 이야기를 듣는 내내, 가슴이 답답해 왔다. 도대체 현실이 아닌 소설 속에 이야기처럼 황당한 이야기들 모두가 마치 꿈속에서 웅성거리며 들려오는 것 만 같았다. 사람들은 왜 그리도 무지 속에서 앞으로 다가올 운명을 눈감은 채 그렇게 마구 살아가는 것인지 참으로 모르겠다. 갑작스레 지난날 친구가 화려하게 결혼하던 장면이 눈앞을 스쳐갔다. 성남의 부잣집 장남에게 시집을 간다고 온 동네가 떠들썩했었다. 그때는 그 누구도 그들의 등 뒤로 다가오는 불행의 그림자가 그렇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몰랐을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불과 60년도 못 살고 갈 것을, 사람은 돈과 욕정과 독선 속에서 한 가정이 갈기갈기 찢어져 엉망진창이 된 것이다. 물론 남은 가족들은 돈이 있으니 다 살기 마련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 큰 불행이 가져다줄 해결의 실마리는 좀처럼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를 술술 토해냈으나, 지난날 친구 남편의 부유에 넘친 웃음 띤 얼굴을 떠올려 보며 생각하니 가슴이 저며 왔다. 그렇게 매몰차게 친구를 내쫓고 새 여자 만나 한평생 잘 살 것 같더니만 결국은 그렇게 먼저 가고 말았다. 아무리 순서 없이 떠나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숱한 페이지를 진하게 장식한 친구의 삶이 못내 씁쓸하게 다가왔다. 필자도 가끔은 뒤돌아보며 오늘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이 다가오는 내일에 후회가 없으려면 더욱 열심히 순간순간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친구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다가오는 인생의 뒤안길이 부끄러워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 2017-03-10 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