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흘러가는 대로 살기
- 옛말에 ‘순리대로’라는 말이 있다. 살아가면서 모든 것들은 억지로 거스르려 하지 말고, 흐르는 대로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저 이치와 섭리에 따라 물 흐르듯 순응하며 산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말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욕심이 생기고, 그 과욕이 넘쳐서 파생되는 문제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된다. 순리의 법칙을 무시하고, 결국 일이 터져 안간힘으로 수습함은 오히려 더 큰 불상사를 일으키곤 한다. 때로는 그 과욕이 몸을 다치게도 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필자는 이른 아침 시간이면 운동하기로 하루를 시작한다. 미국에서는 배드민턴이나 등산으로 하루의 일과를 열었다. 노동으로만 사는 미국 생활에서 운동은 어쩌면 필수였다. 이제 한국에 와서도 수영을 하는 것으로 그날의 시작을 알린다. 운동을 안 하면 뻐근하니 몸이 아파지고, 그날은 모든 일들이 경쾌하지가 않다. 그날도 여지없이 수영을 나갔다. 수영장 안에서 언젠가 목사님 사 모라며 정겹게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이 손짓을 한다. 그녀는 필자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인사와 고갯짓을 하며 가깝게 다가갔다. 그녀는 갑작스레 수영이 잘 되느냐며 거만하게 묻기를 한다. 이제 초보자인 그녀가 중급인 필자에게 물어오는 엉뚱스러운 질문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지난번에는 수영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잘 못하겠다며 이것저것을 물어왔던 그녀이다. 그런 사람이 갑작스레 교만한 질문을 하니 당황을 할 수밖에 없다. 단순하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그녀는 태연하게 무작정 호흡을 잘 참고 열심히 해보라며, 필자에게 여러 번에 걸쳐 교묘한 충고를 한다.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이상한 언행이었다. 기분이 나빴지만 참고 무시하면서 한 바퀴를 더 돌았다. 그 여자는 슬금슬금 다시 내 곁으로 다가왔다.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소리로 또 필자를 불편하게 한다. 참다못해 왜 그러느냐고 했다. 그녀는 지난 언젠가 필자가 자기한테 수영 법에 대해 물어왔는데 대답을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싶다. 필자는 그런 적 없다며 손 사래를 쳤다. 너무나 어이가 없으니 귀담지 않고 다시 한 바퀴를 돌았다. 그 여자는 또 따라왔다. 필자는 참다 못해 화가 치솟았다. 아침부터 내 돈 내고 운동하러 왔는데 왜 괴롭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왜 그러세요?”라며 다짜고짜 따져 물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필자의 기에 눌렸는지, 무작정 미안하다고 했다.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이다. 기가 막혀 필자는 화가 더 났다. 도체 무엇을 그리 잘못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무조건 잘못을 했다니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녀가 도무지 정상인으로 보이지를 않았다. 그녀는 샤워 실에서도 탈의실에서도 끝끝내 따라 불었다. 이번에는 필자와 대화를 좀 하자는 것이다. 자기를 변명하겠다는 것이다. 소위 중형교회(교인이 1500명이라고 했다) 사모라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필자는 순간에 정이 뚝 떨어졌다. 부딪히는 자체도 싫고, 욕심으로 가득 차 보이는 그녀가 마음에 전혀 다가오지 않았다. 대화는커녕 말도 섞기 두려웠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이 이른 아침부터 다른 사람에게 이유 없이 상처를 준다는 것은 이해도 되지 않고 몹시 불쾌했다. 말없이 조용히 나와 다음날은 수영을 가지 않고 하루를 걸렀다. 다시 수영장을 나갔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가왔다. 정말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정신 나간 사람 같았다. 살금살금 곁으로 다가와 이번엔 행동에 오버를 하는 것이다. 필자는 갑자기 '스톡 거' 같다는 느낌이 들어 무조건 피했다. 상대하고 싶지 않을 만큼 무섭게 느껴졌다. 그녀는 여전히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따라다니며 사과를 해왔지만 도대체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상대에 대한 나쁜 마음을 먹는 필자가 싫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상대는 목사님의 사모였다. 신앙을 전달하고 신을 섬기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그리 좋은 일 같지가 않았다. 곰곰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처음부터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수영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무척 잘하고 싶어 안간힘을 썼다. 그렇게 여유시간이 많은지는 몰라도 그녀는 하루 3시간씩 수영장에 머물렀다. 어느덧 몇 개월이 지났고 지금은 나름대로 실력이 붙었나 보다. 그렇지만 실력은 시간이 말해주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필자에게 과시하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필자는 그녀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도 돌아가서 생각해보았고 하나님 앞에 기도도 했을 것이다.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기에, 아마도 잘못을 사과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욕심에 이글거리는 모습만이 눈에 보여 와, 필자는 단순하게 싫고 그 집념이 무서웠다. 남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이 왜 쓸데없는 시간에 낭비를 하며 또 욕심을 내고 있다. 자기가 저질러 놓고 또 주워 담고 싶어 억지로 용을 쓰는 것이다. 필자도 마음은 편치가 않아,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만 싶다. 그저 순리대로 흐르는 것에 순응하며, 욕심내지 말고 마음 편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뒤늦은 후회만 하는 것은 오히려 화만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 2016-08-22 18:33
-
- 일본 초등학교 전학(3)
- 전학한지 한 일주일 되었을 가였을 때, 혼자 집안 청소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외국에 가서 제일 겁나고 무서운 게 전화 벨 울리는 것이다. 영어는 그래도 배웠다는 게 있어서 그런지 덤벙거리지만 말고 침착하게 잘 듣고 있으면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단어의 뜻이라도 알 수 있어 짧은 대답 장도는 무난했다. 그러나 일어는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고 상대방이 일어로 말하는데 내 입은 왜 영어로 대답을 하는가 말이다!? 내 영어에 상대방이 놀라 서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되고 서로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끊게 되었다. 끊고 나면 후회막급이었고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대답하도록 나 자신에게 타이르면서 지냈고 전화벨이 울리면 우선 마음을 가다듬고 혼자 ‘모시모시(여보세요)’를 연습하곤 했다. 그런데 그날 또 전화벨이 울린 것이다. 마음속으로 천천히 그리고 잘 들어 보자하며 천천히 여보세요? 했다. 목소리가 귀에 익은 2학년 아들 담임이었다. 우선 아침 인사를 서로 주고받았다. 선생님께서 오늘 방과 후에 학교에 한 번 오시라는 말씀이었다. 그 후로는 침착함을 십분 발휘해서 절대 당황하지 않고 상대방 말을 잘 들으면서 전화도 제법 받을 수 있는 내가 되어갔다. 정말 다행이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매일 친구들하고 와서 게임을 하면서 즐겁게 놀고 4시만 되면 모두가 인사를 급하게 하고는 정확하게 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로 아마도 남의 집에 가서 놀다가 4시가 되면 집에 오도록 가정교육을 받는가 보다며 편하게 생각 했다. 하나같이 친절하고 예의를 깍듯이 지키는 아이들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한 사람처럼 그렇게 인사도 똑같이 하고 시간도 꼭 같은 시간에 정확하게 전부 일어서서 인사하고 가는지 놀랍기만 했다. 오후에 학교에 가서 교실을 찾아 갔다. 담임 성생님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반갑게 맞아주며 앉으라고 권했다. 다른 게 아니라 일주일 학교생활 하는 걸 눈여겨보았더니 아주 잘 적응하고 있다며 머리가 좋고 이해력이 빠르다고 칭찬을 했다. 내 언어 실력이 무슨 말씀이냐고 선생님 덕분에 정말 감사하다는 말만 겨우 했다. 선생님은 오히려 문제없이 결석 지각없이 학교에 잘 와 줘서 고맙다 했다. 성생님께서는 우리 애와의 언어 소통을 위해 한일사전을 직접 사 가지고 찾아가며 단어의 의미를 가르쳐 주며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감동했다. 오늘 계속 설명을 했는데 이 말을 아직도 정확하게 모르는 거 같다며 국어 책을 꺼내서 보이길 레 문맥을 보니 어떤 의미인지 나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선생님께 걱정 말라고 집에 가서 우리 애한테 잘 설명해 주겠다고 하니 고맙다며 몇 번이나 인사를 한다. 그리고 첫날 사회시간에 배운 걸 바로 시험을 봤는데 우리 애가 혼자 100점을 맞았다며 놀라워하는 것이었다. 그 시험지를 꺼내 보여 주었다. 시내버스의 구조와 이름들을 적는 거였는데 전부 답이 맞게 적혀 있었다. 집에 와서 아까 선생님께서 가르치는데 몰랐던 뜻도 알려 주려고 책을 가져 오라하니 엄청 연필로 선생님이 고생한 것이 역력했다. 동그라미가 수없이 그려져 있었다. 뜻을 말하자 아하아~ 하며 그렇게 쉬운 걸 몰랐다니 하며 기뻐하는 얼굴이다. 2학년 애가 저러니 4학년 애는 보통 고생이 아닐 텐데 싶은 마음에 측은해졌지만 조용히 보고만 있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엄마한테 도움을 청하라 해도 괜찮다며 얼굴에는 별 표정을 짓지 않았다. 4학년 선생님은 우리 애 보고 네가 하고 싶은 공부만 하라고 한단다. 그래서 자긴 그리기를 좋아하니까 그리기 공부를 하고 있다며 걱정 말라고 만 했다. 2학년 담임은 모든 것을 열심히 가르치려 애를 썼지만 4학년 담임은 고학년의 시작이라는 시점에서 겪는 방대한 학습 자료를 전부 가르치는 게 힘겹고, 그걸 습득하게 하기에는 불쌍해서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배려만 준 것이었다. 성생님의 성격상 전연 다른 가르침의 자세였다.
- 2016-08-22 17:57
-
- [미니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
- 나는 1952년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한 시골 마을 방앗간 집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아들만 여섯인 아들 부자 집이다. 원래 어머니는 아들만 일곱을 나으셨는데 첫 째는 돌도 못 넘기고 잃었다고 한다. 그 후 집안의 귀한 첫 아들로 태어난 나는 태어난 후 사흘 동안 눈을 뜨지 않아 부모님의 애를 태웠고, 어릴 때 비행기만 떠도 놀라서 경기가 드는 아이였다고 한다. 우리형제들은 모두 호적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일 년 씩 어리게 되어있다. 돌까지 살아남으면 호적에 올려주었다. 아마 첫째를 돌전에 잃었기 때문인 듯하다. 이 덕분에 나는 퇴직 시 명퇴금을 1년 치나 더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고향 마을에서 한집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셨는데 그 중간 집에 사시는 분이 중매를 하셨다고 한다. 우리 부모님은 동네에서 잉꼬부부로 소문난 금슬이 좋으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엄격하시고 강직한 분이셨다. 반면 어머님은 따뜻하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아들들을 한없이 칭찬하고 격려하시고 보듬어 주신분이다. 우리 형제들은 우리집안의 유일한 여자 분인 어머님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도 우리 형제들은 돌아가신 지가 15년이 지났지만 모이면 어머니 애기를 자주하고 다섯째는 대기업의 임원이지만 술 한 잔 되면 보고 싶다고 울곤 한다.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지극하셨다. 손자들이 많았기에 우리는 돌만 지나면 사랑방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잤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이불을 덮어주시고 음식도 챙겨주셨다. 손자들에 대한 자랑과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친구 분들이 오실 때면 언제나 불러 인사를 시키셨다. 우리형제들은 그 당시 초등학교에서 형제들 모두가 급장을 다 하던 때라 자랑이 대단하셨다. 내가 나중에 취직이 되어 첫 월급을 새 돈으로 할아버지께 용돈을 드렸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을 보관하고 계셨던 분이다. 우리 할머니는 연약하신 분이지만 우리 형제들은 모두 할머니 등에 업혀 자랐다. 낳아주신 분은 어머니이고 키워주신 분은 할머니이다. 할머니 등은 손자들의 코 때가 지워지는 날이 없었다. 서울에서 방학 때 내려가면 맨발로 뛰어 나오시던 분이다. 나는 첫 손자로서 조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받고 자랐다. 우리 집의 가훈은 우애(友愛)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어릴 때 귀가 닿도록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셨다. ‘조선팔도 다 다녀도 형제같이 화합할까’ 할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에게 하시던 말씀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 말씀을 어머님 돌아가신 15주기 때 고향 우리 집 정원에 비석으로 새겼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모범생 이었다. 한 학년에 두 반인 작은 시골 학교였지만 나는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6년간 급장을 했고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부모님도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소먹이기, 풀베기, 나무하기 등 집안일도 잘 도와드렸고 어머니가 가지 오이 등을 장에 갖다 팔아야 할 때는 리어카에 실어다 드리는 착한 아들이었다. 나는 1968년 무장공비 김신조가 청와대 담을 넘어 공격하던 해 서울 경기상업고등학교로 유학을 왔다. 경기상고는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하지만 우수한 아이들이 많았다. 청운중학교와 같은 교정이어서 청운 중학교 출신도 많았다. 고향 초계중학교에서는 서울로 두 명이 유학을 왔는데, 친구는 배제고등학교를 가고 난 경기상고에 입학했다. 친구는 고모 집에서 다니고 나는 삼촌 집에서 다녔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나는 은행원이 되었고 친구는 고대의대를 나와 강릉의 유명한 외과의사가 되었다. 경기상고는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립상업고등학교로 도상이라 불렸던 학교로 일제 때부터 훌륭한 선배들이 많았다. 당시 정·재계에는 태완선 총리, 김종희 한국화약 회장님 등을 비롯한 분들이 포진해계셨고 특히 금융권에는 임원들이 많았다. 내가 경기상고를 선택한 것도 유연이다. 아버지와 서울에 올라와 어떤 학교를 가야할지 고심할 때 삼촌 이웃에 양정고등학교 선생님으로 퇴직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도상을 추천해주셨다. 아버님은 대구상고를 나와 제일은행에 취직한 고향의 내 친구 형으로부터 ‘은행에 취직을 하니 당장 선생님의 월급보다 많더라’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아들을 은행에 취직시키고 싶어 하셨다. 양정고 퇴직 선생님은 상고 중에는 도상이 최고라며 당장 도상을 추천해 연희동에서 청운동까지 버스를 갈아타면서 먼 길을 삼년을 다녔다. 상고에서 은행에 취직하는 것은 인문계학교에서 대학에 진학하는 것과 같았다. 매년 어느 은행에 몇 명이 합격했는지 통계를 내고 홍보하던 때였다. 우리학교는 한 학년이 7개 반으로 6개 반이 취직반이고 마지막 7반이 진학 반이었다. 취업반은 은행 취직을 위한 전략을 세워 공부했다.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은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순으로 가고 다음 조흥, 상업, 제일, 한일, 서울은행 등을 갔다. 나는 신설된 한국신탁은행을 지원 했다. 신설된 은행이 향후 전망이 나을 거라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셨다. 그해 경쟁률이 높아 우리학교에서는 나를 포함해 두 명 만이 합격했다. 대졸 중견 30명, 상고 졸 초급 60명을 모집했는데, 대졸 중견은 서울 대 출신이 반이 넘고, 나머지는 연대, 고대 등 대부분 명문대 출신이 전부였다. 71년 당시는 지금처럼 삼성, 현대, 엘지 같은 대기업이 성장하기 이전 이어서 공무원, 한전, 은행 등으로 인재들이 몰리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은행의 대우는 좋았다. 복지제도가 좋고 각종 수당이 수시로 나왔다. 그러나 입행을 하고나니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건국대학교 경영학과 야간 학부에 시험을 봐 합격했다. 그러나 말단 직원이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는 것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이듬해 야간 전문대학인 서대문에 위치한 국제대학을 지원 해 입학했다. 이 학교는 야간만 있는 대학으로 저녁 6시에 수업을 시작해 그 당시 인기가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정원이 30명으로 우수한 인재가 많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상고출신이 많았다. 적은 인원의 대학이지만 그 당시 매년 사법, 행정고시, 공인 회계사 등의 합격자들을 배출했던 시기이다. 내 친구도 산업은행에 다니면서 공인회계사 전국 수석 합격했다. 그때는 그야 말로 주경야독을 했던 시기이다. 은행의 업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대학 수업시간에 맞추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만 했다. 상사들의 눈치도 봐야 했다. 저녁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라면으로 때우기가 일수였다. 4년을 그렇게 생활하니 위장병이 생길 것 같았다. 토요일도 근무하던 때라 일요일은 도서관에서 공부해야했다. 그래서 나의 이 시기는 다른 애들처럼 취미생활을 하거나 연애를 할 틈이 없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짐이 있었다. 둘째 동생이 서울로 올라와 중대 앞에서 자취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다. 얼마 후에는 막내를 제외한 세 명의 동생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동생들과 힘든 시기를 보냈다. 아버지는 학비와 쌀을 올려 보내주시지만 아들들이 공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기에 나는 힘을 보텔 수밖에 없었다. 나는 75년 2월에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12월에 군에 입대를 했다. 나 혼자 만의 일이라면 대학 2학년 정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오는 것이 좋겠지만 동생들을 남겨놓고 입대할 수가 없어 4학년을 마치고 친구들이 다 제대를 할 즈음 입대를 해야만 했다. 내가 입대를 해도 은행은 본봉의 월급이 나오는 때라 그 돈으로 동생들은 학교를 다녔다. 지금도 이야기 한다. 동생들이 형의 월급을 받으려 은행에 갔던 시절을… 둘째 동생은 중앙대 법대에 나왔다. 졸업 후 삼성생명에 입사해 항상 전국에서 일등의 업적을 내는 유능한 직원이 되었다. 신한생명 초기에 스카우트되어 신한그룹 최연소 임원이 되어 부사장 까지 승진해 8년이나 임원생활을 하고 지금도 퇴직해서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그 때 동양중학교 학생으로 다니던 다섯째 동생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 지금은 롯데 칠성의 임원으로 재직 중이다. 필리핀 펩시콜라 사장을 5년 동안 역임했고 우리 동생 중 아직도 떠오르는 별이다. 나머지 두 동생도 대구에서 사업을 잘하고 있다. 힘든 시기를 넘겨 좋은 결과가 있어 보람은 있는 일이었다. 79년 제대를 앞두고 아버지의 권유로 첫선을 보았다. 휴가 중 서울의 작은 다방에서 맞선을 보았는데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쉽게 평생의 배필을 선택 했는지 신기하다. 서로의 가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부모님께서 미리 선을 봐 합격점을 준 상태라 하지만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내는 면장님의 둘째 딸이라 자라면서 큰 힘든 일은 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규수였다. 그 당시 나는 장남으로서 결혼 후에도 동생들을 데리고 있어야 할 형편이어서 아내를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대학에서 나를 따르는 여자도 있었고, 은행에서 자취집에까지 찾아온 여자도 있었지만 결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었다. 79년 6월 제대를 하고 11월에 결혼을 했다. 아버지는 내가 장남이라 전통혼례식을 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아내는 족두리를 쓰고, 난 사모관대를 쓰고 혼례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멍석을 펴놓고 상위에는 살아있는 닭이 퍼덕 거렸다. 첫날밤은 신부 집에서 보내기로 하는데, 그 날 밤 신랑을 짓궂게 장난을 거는 사람 들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어 나와 아내는 저녁에 해인사로 피신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밤중에 택시를 타고 해인사로 향하던 신혼 여행길에 노루가 튀어 나와 놀라던 추억이 새롭다. 내가 아내를 단한번의 선을 보고 선택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내 일생의 가장 잘 한 선택이었다. 아내는 검소하고 강하고 현명한 사람이었다. 지금 형제들이 성공하여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은 대부분 아내의 공로인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후회스런 일을 꼽으라면 신혼초기 아내가 힘들 때 너무 도와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동생들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기 힘들 때 연탄불 한번 갈아준 적이 없고, 아이들 한번 제대로 봐준 적이 없다. 아내는 밤중에 아이가 깨어 울면 남편 잠 못 자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까봐 아이를 다른 방으로 대려나가 밤새 혼자 방을 새우곤 했다. 아내는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오직 나를 위해 정성을 쏟은 그런 여자였다.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철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은행에 입행해 퇴직을 하기까지 만 38년을 다녔다. 지나고 보니 나는 직장 운은 좋았고 축복을 받은 사람이었다. 은행이란 직장은 안정되고 복지가 훌륭하고 좋은 직장이었다. 아이들 대학까지 등록금을 주고 집을 마련하도록 사원주택 아파트를 주고, 월급날 하루도 늦은 적이 없고 지점장 시절 억대가 넘는 연봉에 퇴직금도 적지 않은 직장이다. 재직 시에도 지점장 명함이면 누구나 신뢰하고 인정을 해주는 곳이다. 나는 초년 시절부터 성실했고 열심히 노력했다. 언제나 상사의 인정을 받았고 지점에서 언제나 대부계 같은 요직을 담당했다. 자기계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88년에는 해외 OJT연수를 미국 시애틀 은행으로 다녀왔다. 그 후 은행의 중요 부서인 종합기획부에 과장으로 근무하고, 카드 사업부, 개인금융부 등에서 차장으로 근무했다. 1998년 지점장으로 나갈 때 까지 황금기의 시절을 보냈다. 카드사업부에 근무할 때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많았다. 일본 JCB카드사, 미국 비자사, 마스터 카드사, 유럽 유로페이 등 카드사를 매년 연수를 다니면서 여행할 수 있었다. 특히 시애틀 연수 후 미주, 유럽, 하와이, 동남아, 핀란드, 스페인, 지중해 해협 등 유럽 전역을 장기간 여행한 경험은 좋은 기회였다. 은행 승진도 남보다 늦지 않게 진급했다. 지점장 진급은 아이러니컬하게도 IMF 덕분에 빨랐다. 선배들이 명퇴를 하고 서울은행, 제일은 행이 매스컴에서 회자될 때 오히려 해택을 보았던 셈이다. 하나은행과의 합병 시에도 많은 직원이 퇴직을 했지만 그때도 살아남아 십년이 넘도록 지점장 생활을 하고 임금피크제 까지 일 년을 하고 퇴직할 수 있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은행원의 천수를 다한 셈이다. 지점장 생활은 10년 동안 시흥남, 관양동, 수원, 서빙고, 부천, 성남 등 6개 점포를 거쳤다.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점포는 처음으로 부임한 석수역 앞에 위치한 시흥남지점 이다. 첫 지점장 발령을 받고 휴일 혼자 점포를 찾아가 어떤 전략을 구사할 것인가 많이 고심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내는 많은 걱정을 했다. 사교성도 없는 고지식한 사람이 점포영업을 잘 할 수 있을 까 걱정을 많이 해, 지점장으로 승진을 했는데도 그렇게 좋아하지 않은 듯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지점 실적이 부진하여 평가에 하위 성적을 받으면 명퇴의 우선대상자가 되어 퇴사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예상외로 난 지점장으로서의 점포경영을 십년이상 훌륭히 잘 수행했다. 내가 부임한 점포는 전임 점포장이 실적 부진으로 불명예 퇴진한 곳이 많았지만 나는 훌륭히 점포를 잘 부활시켰다. 나는 점포 경영의 핵심은 직원들의 관리와 경영 전략에 있다고 믿는다. 점포장의 철학과 의사결정이 중요하다. 그 핵심은 사람의 관리에 있다고 확신한다. 2009년 1월 은행을 퇴직했다. 재직 시에 시간이 없어 못했던 골프를 학교친구들이나 동생들과 같이할 수 있어 좋았다. 5월에는 홀인원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양재천과 대공원을 몇 년을 걸으면서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퇴직 1년 전에 과천어울림 남성합창단에 입단했다. 매주 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연습해서 매년 연말에 시민회관에서 정기공연을 한다. 벌써 정기 공연을 일곱 번을 넘겼다. 7년이 지난 셈이다. 단원이 30명이 넘어 지역사회에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알게 되었다. 플루트는 퇴직 후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아들결혼식 때 연주하고 퇴직직원 모임 등에서도 연주했다. 지금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주 목요일 부림동 문회센터에서 연습하고 레슨도 받는다. 퇴직 후 5년을 쉬고 나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2014년 새로운 준비를 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다. 유통관리사를 3개월 동안 과천도서관에 다니면서 공부해 합격을 했다. 그리고 경영지도사 공부를 시작해 지난해 1차 시험에 합격하고 2차 시험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이듬해 3월 호서대글로벌창업대학원에 입학해 이제 졸업을 위해 논문 준비 중이다 2014년에는 건국대학교 미래지식교육원에서 시니어플래너 과정을 공부하고 같이 공부한 동료들 5명이 KSP교육협동조합을 만들고 나는 이사장직을 맡았다. 다음해는 도심권이모작센터의 열린강사에 선정되어 평생 처음 강사로서 강의를 3차례 해보았다. 2015년에는 KDB 시니어브리지 아카데미 과정을 공부하고 시니어블로거협회에 참여하게 되어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머니투데이 방송에 시니어 악기배우기라는 주제로 방송에도 출연했다. KBS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의 패널로도 출연하고 한겨레신문 시니어통신에 기고도 했다. 2016년 3월에는 공무원연금공단 미래설계교육 여가 주거부문 강사로 선정되었다. 매달 2회 제주, 설악산, 수안보, 천안 등에서 퇴직을 앞둔 공무원들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있다. 대학원 동문들과는 석사 박사과정을 마친 24명의 동문들이 참여해 컨설팅프렌즈라는 컨설팅회사를 창업했다. 졸업을 하면 이 멤버들과 할 일이 많아질 것 같다. 퇴직 후 만 7년의 세월이 지났다.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남아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속도는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내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조금은 알 것 같고, 인생이란 직접 경험해보아야만 알게 되는 것이 많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지금부터는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가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고 아들과 딸은 독립하여 제 몫을 잘하고 있다. 손녀의 재롱이 귀엽고 한 때 어려웠던 시절을 보냈던 동생들과 할아버지의 가훈처럼 화목하게 지낸다. 이러한 가족 간의 사랑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주변의 사람들도 돌아보고 작은 재능이지만 나누는 삶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라 믿는다.
- 2016-08-19 19:11
-
- [미니 자서전]우물 안 개구리 세상 구경한지 50년 되던 해까지의 얘기
- 나는 수원이란 작은 동네 서둔동에서 살았다. 초등 1학년부터 결혼할 때 까지 이사 한 번 안 하고 컸다. 서둔동에는 서울 농과대학과 진흥청이라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곳이 자리하고 있는 관계로 오랫동안 수원의 교육열이나 교육관계의 문제라면 모두 통계로는 전국 1위권이었단다. 수원에서 자라는 동안 연습림이라는 하늘이 안 보이게 빼곡하게 들어선 소나무 밭을 놀이터로 뛰어다니며 그 왼쪽으로 달려가면서 산속에서 나는 따먹는 앵두, 보리수, 오디, 산딸기... 건 다 우리들 것이었고 버섯이라든지 나물들은 우리의 밥상 반찬이었고 화가 나도 서러워도 산 속을 돌아다니며 목청껏 노랠 불러가며 풀었다. 학교 자연시간에 배우면 뭐든지 다 실험할 수 잇는 선이었다. 예를 들어 개미에 대해 배운 날, 나는 쇠로 된 긴 꼬챙이 하나를 들고 산으로 가서 개미 집 구멍에 그걸 깊이 끼워서 위로 세차게 올려 보면서 개미들이 만든 집 구조를 열심히 공부했다. 내 공부를 위해 놀란 개미들이 번데기를 입에 물고 질서정연하게 도망가는 걸 어리석음에 공부하는 거라고 불쌍히도 안 여겼으니... 언딘가로 이어지는 행렬은 대답했고 작은 구멍은 작은 집이었고 큰 구멍은 으리으리한 대궐이었다. 어른이 되어서 ‘개미’ 란 책을 읽으면서 혼자 많이 슬퍼했었다. 하나 밖에 모르는 단순한 애였었다. 그러한 나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고 서울대학 축산학과 교수가 아버지로 형제는 5이었고 딸이 넷인 딸부자 집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화산 목장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외갓집에서 출산 주비를 하고 있었다 한다. 임신한 내내 입덧이 심해 고생은 했지만, 낳을 때는 별로 큰 아픔도 없이 세상 구경을 나온 나는 무럭무럭 잘도 자라줬다고 한다. 날짜도 안 잊어버린다며 7월 13일에 사과가 먹고 싶다하니 아버지가 그 당시 근무하던 사리원 중학교 학생들이 익지도 않은 풋 사과를 어디서 구했는지 가져왔더라나? 아마도 아무리 찾아도 사과를 구할 수 없으니 학생들에게 말한 듯하다며, 어머니가 먼 하늘가를 가끔 바라본다. 너무 일찍 가버린 낭군님이라도 생각하는지...‘뭐가 그리 바빠 정년도 못 채우고 갔는지...’ 하며 요즘엔 입버릇이 되었는지 더욱 더 자주 중얼거리곤 한다. 하얀 칼라를 반듯하게 다려 입고 귀밑 2센티미터의 머리로 자르고 다녀야 하는 중학생이 되자 제일 큰 사건은 우리 집 우편함에 연애편지가 다발로 배달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 집배원 아저씨는 노끈으로 묶은 편지 다발을 뒤흔들면서 내 동생들과 일하는 언니를 기쁨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며 소리 지르게 했다. 밤에 그걸 읽어대며 쿡쿡 거리고 신나할 생각으로 달뜨게 하는 편지다발이었다. 정작 읽어야 할 본인은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다. 그래서 벌을 받는 기분이 가끔 들기도 한다. 내게 중, 고등학생 시절은 길에 다니는 남자들은 나를 그냥 보내면 섭섭했던 듯...했다. 그 당시 내가 친구들에게 즐겨 하는 말은 ‘내가 자기들 말에 홈빡 속아 넘어 갈 듯 순진하게 보이나봐. 병신같이 쉽게 생긴 거지 뭐~~’ 대학에 갈 목적이 서 있던 나는 공부에만 전력투구했다. 정직하게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일엔 눈도 안 돌렸다. 제일 바보라는 모범생으로 6년을 보냈다. 시시콜콜 재미있는 일도 있었겠지만 그저 배우고 공부하면서 먹으면서 지냈던 기억이다. 그러면서 대학생이 되었다.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 세상에 나와 오만가지 구경에 빠지기 시작한 거였다. 만나는 것, 보는 것들이 다 생소했고 흥미유발에 호기심 난동이었다. 배울 것, 사람 만날 일, 영화와 연극 볼 일, 친구들과 수다를 즐길 일, 숙제할 일, 모르는 곳 찾아다니기...할 일이 너무너무 많아지면서 즐기다 보니 내가 보기에 언제나 오동통했었는데 몰라보게 아주 급 날씬해져버렸다. 더군다나 버스 안에서의 투쟁은 나에게 큰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콩나물시루 버스타기가 다이어트의 주요인이었지만 집에서부터 40여 분을 넓은 대로를 내 맘대로 걸어 다니며 학교를 다녔던 여고 시절 12년간의 여유로움과 조용함을 한꺼번에 몽땅 잃어버렸다. 홍릉과 신촌을 오가는 1번 버스는 S대와 Y대 학생들과 우리들을 가득가득 실어 나르기 바빴다. 완전 짐짝 같았다. 그 속에서의 가지가지 에피소드는 정말로 끝이 없는 얘기 거리다. 그런데 5월부터 데모를 해대는 바람에 휴교령이 내려져 수원 집에 내려오게 되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동생들 뒷바라지로 서울로 가고 그 대신 수원 살림을 내가 도맡게 되어버렸다. 엄격하고 규칙적인 아버지 시중드는 것과 처음으로 두 여동생 도시락 준비와 청소 집안 일 그리고 세끼 밥 해 주는 일이 내겐 버거웠고 힘들었다. 어느 면으로 편했던지 가을이 되면서도 어머니는 내 생활을 되돌려 주지 않아 나는 아닌 밤에 홍두깨 식으로 서울로 통학을 하게 되어 버렸다. 처음 하는 통학생 생활에 어리바리 적응도 어려워 힘 드는 판에, 남학생들은 새로움을 맞아 즐기는 속에 나는 밀려들어 쳐 박히게 되었다. 봄(입학시즌)에는 없었는데 가을바람 부는 계절에 새로운 여학생이 나타났다는 뉴스는 첫 칸부터 입으로, 입으로 소문이 바람보다 빠르게 퍼져가기 시작~통근열차기 시끄러워지고 말았다. E 여대 배지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러나 우리의 S대, Y대, E대 생으로 구성된 코라스(지금은 판코라고 함)라는 클럽의 힘으로 보호를 받으면서 지낼 수가 있어 천만 다행이었다. 클럽 남학생들의 관심어린 보호를 받으며 늦게 타도 자리는 언제나 맡아져 있었다. 그 덕으로 심심한 적도 없이, 내가 일학년이니 모두가 선배님들이라 든든했다. 집에서도 여자들이 많은 나는 남자들의 세계를 처음 새색시 방을 몰래 숨어서 훔쳐보듯 하나하나 알아갈 수 있는 환경에 접했다. 여러 가지 성격의 남자들을 한꺼번에 대해 가면서 생소한 경험들을 했다. 남동생은 한참 아래였고 딱 아버지라는 남자 한 사람이 있던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왔던 나에게는 무엇이든 이상하게 느껴졌다. 생각하는 방식이 달랐고, 말도 같은 문장과 단어들이지만 나랑은 완전 다른 반응으로 다가오기도 했고, 이해하기 쉽다가도 어느 순간 완전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보여 ‘으응?’ 하는 날들이 많았다. 점점 약아져 가는 나를 얼핏 발견하고는 웃기도 했다. 그렇다 해도 나는 어떤 일이든지 면전에서는 아무 것도 트집을 잡는 다거나 이상한 발언을 못하는 성격이라 귀여운 여동생쯤으로 이해해줘서 모든 것들은 다 편하게 넘어갔다. 그렇게 대학 생활은 평탄했고 놀라운 재미는 없었지만 학교에서 교내 활동도 해 가면서 잘 보냈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선생님의 꿈을 가지고 열심히 실력을 닦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졸업이 가까워 오는 9월 정도에 이력서를 넣었다는 소리와 함께 은행으로 발령이 나 버렸다. 초등 담임 교수님께서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빛을 발하며 기대하고 있었는데 왜 은행으로 가는 거냐며 호통을 쳐서 무서웠다. 그때 내가 좀 더 내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따져보는 똑똑 이였으면 그 교수님 심중의 깊은 뜻을 헤아려 좀 더 신중하게 상담을 해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때도 아직 우물 안 개구리였으니 뭘 알았을까? 기껏해야 교수님 말씀을 부모님께 전달하는 정도였으니... 그렇게 선생님 되는 것이 꿈이었으면서도 자기의 갈 길을 부모가 정해주는 대로 걸어가는 멍청이였으니. 그야말로 쉽게 말해서 철이라곤 없는, 쉽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밥통이었던 나였음이었다. 자기주장이 약했고 남이 살아 주는 듯 강 건너 불 보듯 언제나 우물 안 개구리 시절을 못 벗어난 덜 떨어진 상태로 그때 까지도 정신을 못 차렸던 거 같다. 그래도 이상하게 계속 꿈을 꾸면서 이뤄지리란 것을 확신해 가며 살았던 일이 하나 있었다. 어려서부터 일본어에 관심이 많았다. 고모에게 여러 가지 작문을 지어 일본어로 말하는 것을 배워서 외우면서 언제 일본어를 할 수 있을까를 당연한 일처럼 기다리면서 살았던 것이다. 결혼해서 나의 보물 1호와 2호가 태어났다. 그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그 기회가 온 것이었다. 남편이 일본 주재원으로 발령이 난 것이었다. 마음속에서는 두 가지 갈래 길로 갈팡질팡 이었다. 가자니 4학년이었던 위의 아들이 5,6년 있다가 오면 교육적인 문제로 학교생활 적응문제가 일어날 거라는 우려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일본이란 나라는 어려서부터 ‘왜놈, 아니면 일본 놈..’이라면서 36년간의 설음으로 뭉친 원한 맺힌 선생님들과 부모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에게 아주 안 좋은 경험담들을 귀에 딱지 앉을 듯 교육 받으며 살아왔었던 지라 겁도 났었다. 한국을 업신여겨 아이들 마음에 상처라도 입게 한다면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이 서려왔다. 그러나 고집불통인 남편의 우격다짐은 담임선생님과 나는 안중에 없었다. 나의 소원이었던 일본어는 외국인에게 일어를 가르칠 수 있는 일어 교사자격증을 따는 정도의 실력을 쌓게 되었지만, 한국에 왔을 때, 아이들의 학교 문제는 심각했다. 내 꿈은 저절로 이뤄졌지만, 나의 보물 1,2호는 쪽발이라는 수모까지 받아야 할 고생문이 훤하게 열려 있었다. 일본에 있을 때는 오히려 대우를 받아가며 한국인이라는 위상을 빛내며 멋진 형제로 뛰어난 아이들로 칭송 받으며 살아왔는데... 세상에 모국에 와서 더군다나 강남 8학군이라는 학교에 배정을 받았지만 기가 막혔다. 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무식한 선생님들이 쪽발이라면서 구박을 일삼았다나? 동생은 중학생이었는데 선배들이 심심하면 교육시킨다며 데리고 가서 때렸다고... 두 형제는 딱 하루 학교 갔다 와서, ‘엄마 완전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이야. 어떻게 자기 나라가 더 어렵고 힘든 거지? 이해가 안 돼’ 라며 귀국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가는 게 어떠냐는 말을 거역하고, 한국으로 온 것을 내내 후회하는 두 녀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나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 고집을 피워서라도 미국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갈 것을 하는 후회막급한 날들이 쌓여만 갔다. 그때부터 우물 안 개구리가 멋모르고 밖으로 나와 당해 가며 사는 세상은 험악하고 어지러웠다. 어느 것도 상식을 벗어났고, 공중도덕이 없는 세상은 우리 식구를 어느 늪 속에 내동댕이쳐버린 거 같았다. 계속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당하면서 많은 것들을 잃어 갔다. 명랑 발랄 했던 우리들의 웃음을, 언제나 즐거웠던 대화를 잃어갔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아주 놀랍게도 똘똘 뭉치는 가족애를 만들어 갔다.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게 서로를 사랑해 주고, 이해해 주고 아껴가며 일본에서 배워서 익혀 온 좋은 것들을 잃지 않으려 달팽이처럼 속으로 감춰가며 간직해가며 살아냈다. 우리가 겪어낸 것들을 사랑으로 감싸며 이란 글을 거실에 걸어 놓고 새겨가면서 서로를 아끼고 굳은 의지로 세상과 타협하는 법을 늦으막하게 나마 익혀 가며 깨달아가며 말이다. 서로를 보살펴 주고, 서로의 안쓰러운 눈물 닦아줘 가며 그렇게 아프게 살아가며 덕을 쌓아오고 있었는데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나에게 청천벽력의 같은 사건이 일어났고 우릴 단숨에 무너뜨렸다. 그 일은 우릴 마구 두들겨 팼다. 깡패가 이유를 묻나 불문곡직하고 두들겨 패면 맞아야 하는 그 공포와 두려움이 가득한 어둠 속 낭떠러지로 밀어 넣어졌다. 우리는 그 나락으로 계속 떨어져 갔다. 나의 1호 보물이 슬어져 갔다. 겨우 남은 2호 보물과 나의 울부짖음 그리고 법이란 것에의 올바름에 억울하기만 한 원통함과 원망, 용서, 거짓말. 진실, 미움, 그리움, 보고픔, 사랑, 하늘, 별, 내 아들.... 내 아들... 나의 인생 50년이 마감되던 날이었다. 1995년 11월 20일 새벽이 나를 개벽시켰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넋 놓고 있기를 거부했다. 세상 밖의 어지러움 속으로 스며들며 이겨내려 발버둥을 친다. 앞으로 다가오는 날들은 조금 더 똑똑하게 살아봐야지...번데기 밖으로 나온 나비처럼 날아 봐야지... 나비야 네가 허공으로 새 삶을 위해 날아오를 때, 나도 나의 새 삶을 위해 네다리 폴짝 거리며 연못으로 뛰어 들 꺼야...
- 2016-08-19 19:01
-
- [브라보가 만난 사람] 문주현 MDM 회장의 돈의 철학 “돈은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맡아 놓은 것, 사회를 위한 나눔으로 거듭나야”
- “어느 언론사 기자가 문주장학재단에 대한 기사를 썼는데 내가 환갑이 되기 전에 기금 200억 원 달성이 목표라고 마음대로 쓴 거야. 그래서 당신 때문에 200억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랬지. 그래서 달성해 버렸어(웃음).” 국내 디벨로퍼(부동산개발 업체) 1세대의 대표주자인 문주현(文州鉉·58) MDM 한국자산신탁 회장은 유쾌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에서 비범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다. 문 회장은 자신의 회사와 함께 문주장학재단을 세웠다. 그리고 재단은 어느새 회사 자본금보다 더 큰 규모가 됐다. 이제 남부럽지 않은 경력과 성취를 이루게 된 그가 어째서 그토록 사회 환원을 추구하는 걸까? 문 회장이 갖고 있는 돈과 사회, 그리고 시니어로서의 삶에 대한 철학을 들어본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 사진 이준호 기자 jhlee@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일만 하는 ‘노예’처럼 살았던 그는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지독하게 가난했다. 후배 집에 얹혀살면서 생활비를 벌어 겨우겨우 필요한 돈만 메꿨던 생활. 2015년 매출액 4193억원을 기록한 MDM의 회장이자 한국자산신탁 회장을 겸하고 있는 국내 디벨로퍼 1세대 성공 신화의 주인공 문주현 회장의 20대 시절 얘기다. 가난한 사람이 돈의 소중함을 안다 “그러던 시절, 대학교 3학년 때 모 독지가로부터 전액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그때가 시작이었어요. 세상에 아무런 조건 없이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내가 돈을 벌게 되면 나도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고.” 그의 약속은 현실이 되었다. 그는 현재 200억 원가량의 기금으로 운용되는 문주장학재단을 갖고 있다. 2014년 기금 100억 원을 달성한 후 불과 2년 만에 그 두 배를 달성한 것이다. 재단은 2002년부터 초·중·고·대학생 1750여 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2001년에 장학재단을 세우니 직원들 사이에선 회사 일을 안 하려나 보다 하고 소문이 났어요. 그러나 사람은 자기만족이잖아요? 내가 약속한 거고 신세를 졌는데, 해야지.” 문주장학재단의 수혜 대상자는 무조건 형편이 어려운 사람으로 선정된다. 그 외 특별한 선정 기준은 없다. 요즘은 돈을 많이 가질수록 공부도 더 잘하는 세상이다. 문 회장은 가난한 이들은 돈을 소중하게 쓴다는 신념이 있다. 그것은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세상에 증명한 사실이다. “장학 대상자는 웬만하면 바꾸지 말라고 해요. 다만 성적이 급격히 떨어지면 바꾸라고 하죠. 돈까지 대주는데 공부를 안 하는 건 기본이 안 된 거니까.” 돈이란 내 것이 아니다 문 회장은 장학재단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이 쑥스럽다고 말했다. 그저 자신이 하고자 했던 일을 할 뿐이라는 말이었다. “장학재단을 하다 보니 나를 돈을 많이 벌었다고 소개를 안 해주고 좋은 일을 한다고 소개해줘요(웃음). 아 세상이 이렇구나 싶었죠. 물론 나보다 돈 많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런 거겠지만, 회사보다 자본금이 더 큰 장학재단을 갖고 있어서 그렇겠죠.” 문 회장의 사회를 향한 지원에는 장학재단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고향인 전라남도 장흥의 모교에 씨름부를 만들고 공공버스도 운용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덕분에 전국 우승도 다수 경험하는 강한 씨름부로 거듭날 수 있었다.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에 마련된 서울책방이 다시 문을 여는 데는 문 회장이 쾌척한 1억원이 있었다. 국내 최초의 여자바둑대회에는 2억원을 내놨다. 모교인 경희대학교에도 매년 1억원 이상을 기부한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그가 갖고 있는 돈의 철학이란 무엇일까? “돈이란 무엇인가? 내 것인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사회로부터 얻은 거고,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관리하라고 맡긴 겁니다. 이걸 갖고 자기 거라고 유세를 떠는 건 잘못된 거예요. 그리고 이 돈이 내게 관리하라고 온 것은 일정 부분을 사회에 내놔야 한다는 의미라고 봅니다.”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을 돕지 않으면 이 사회의 양극화가 해소될 방법이 없고 시장경제가 지탱할 수 없다. 문 회장의 ‘돈은 내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은 그러한 진실을 우회해서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그가 유독 젊은이들에게 기부의 타깃을 맞춘 것도 그들이 우리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부모를 잘못 만난 것은 자기 탓이 아닙니다. 대신 정신이 올바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문주장학재단은 예술계 쪽 지원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한다. 아직 본격화된 것은 아니지만 여러 방향에서 검토하는 중이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보니 문화예술계 쪽이 굉장히 어려워요. 그런 사람을 도와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능력 있고 자질 있는 사람을 골라서 지원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이상문학상’처럼 공모를 통해 권위가 있도록 만들어야겠죠. 아직 밑그림을 정확하게는 안 그렸지만 오페라, 소설, 악기 쪽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시재생, 사회를 위한 또 하나의 인생 목적 최근 문 회장이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도심재생 사업이다. 그에게 시기가 괜찮은지를 물어보자 확신처럼 ‘해야 할 시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시재생을 지금까지는 자기 지역, 구역 별로 민간에서 했는데 민간이 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앞으로의 세계는 도시가 국가 브랜드입니다. 싱가포르, 홍콩, 도쿄, 뉴욕 등등을 봐요. 관광할 때 그 나라를 왜 가느냐는 겁니다. 관광은 자연관광과 도시관광으로 나눌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자연관광이 취약합니다. 그렇다면 도시관광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을 도시 관광 국가로 만들려면 도시재생이 이뤄져야 합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살 거주 공간으로서의 도시의 공급이 부족했다. 그래서 신도시를 마구, 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저출산, 저성장기가 도래했다. 더 이상 신도시는 안 만들어질 것이라고 문 회장은 진단했다. 그렇다면 오래된 도시를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도시재생이 중요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그리고 이 분야에서 문 회장은 발 벗고 뛰는 적극적인 ‘전도사’였다. “공청회나 세미나를 하자, 우리나라의 발전 방향을 토론해보자. 하다못해 광화문, 테헤란로 등등으로 나눠 섹터 별로라도 하자라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는 민간과 같이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에요. 도시 부동산은 대개 개인 소유라.” 문 회장은 우리가 아이디어가 부족한 나라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관광을 대개 일본이나 홍콩, 싱가포르로 가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가서 보는 게, 결국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이 지어 놓은 걸 보는 거예요.” 실로 예리한 한마디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못할 게 뭐가 있겠는가? “개발과 보존은 공존해야 합니다. 북촌이나 서촌 같은 문화적 가치가 있는 지역은 보존해야죠. 다만 재개발해야 하는 곳은 과감하게, 제대로 개발해야 합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대성공하면서 흔히 강남스타일이라는 표현을 하지만, 막상 강남을 가면 갈 데가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밤이 되면 거리는 죽고 뒷골목만 살아난다. 문 회장의 주장대로 도로 옆에 문화공간을 배치하여 문화 향유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함으로써 진짜 ‘강남스타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건설회사는 도면대로 짓고, 도면이 없으면 한 삽을 못 떠요. 하드웨어라고 할 수 있죠. 반면 디벨로퍼는 지휘자고 소프트웨어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상상력을 실현하는 이들이죠.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우리나라에도 종합부동산 금융그룹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실버타운, 도시와 함께 하는 공간이 되어야 “나이 들어 은퇴하면 인생에 낙이 없어요. 즐거움, 기쁨, 재미가 없어지죠. 젊었을 때는 뭐든 재미있었는데. 그래서 더욱 손주에게 끌리는 거겠죠. 나도 늦둥이가 있어요. 지금 제주도에 있는데 ‘네가 아빠 희망이지’라고 말하곤 해요. 손주도 마찬가지라고 봐요.” 시니어이자 부동산 전문가로서 문 회장은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의 마음도 꿰뚫고 있었다. “실버일수록 도심으로 들어오고자 합니다. 전철, 공원, 병원 옆으로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손주들을 못 보기 때문이에요. 실버가 되면 외롭습니다. 그러니 무조건 전철역 근처에 자리를 잡게 되는 거예요. 어느 성공한 시니어가 하는 말이, 자식들이 손주를 데리고 와서 자신에게 맡기고, 장을 보러 간다든지 하면 손주와 함께 있는 게 그렇게 즐겁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이 지방에 있으니 전화만 하고 안 와서 섭섭하다는 겁니다.” 문 회장은 실버타운을 짓는다면 신경을 써야 할 부분으로 기능적인 구분을 꼽았다. 몸이 불편하여 간병인 등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곳과 건강한 사람들이 모여 친구들과 취미 생활 등을 할 수 있는 시니어 타운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혹은 두 영역을 합친다 해도 중간에 병원을 두어 병원을 중심으로 분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둘 다 도심에 있어야 한다는 건 공통된 조건이다. “실버타운은 구성원의 특성상 죽음과 밀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젊음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사람들과, 도시와 섞여 살아야 해요. 구분을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장은 굉장히 성장할 것이고, 정부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주위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라며 산다 문 회장은 올해로 환갑을 목전에 둔 나이가 됐다. 그에게도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 있을까? “사실 후회를 좀 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돈은 벌었을지 모르지만 내 청춘이 가버렸잖아요. 생각해보세요. 제가 연애를 잘 해봤겠어요? 당구도 못 치지. 그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삶 자체가 옆을 볼 수가 없었던 시절이었죠. 아내가 저에게 ‘음악을 알아?’, ‘그림을 알아?’ 하고 물어요. 그럼 저는 ‘몰라’라고 대답할 수밖에요. 저는 솔직한 얘기로 너무 안 해본 게 많고 모르는 게 많아요. 내 업무와 내가 하는 부분만 알지. 그래서 요즘은 정말 여행을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될 수 있으면 비행기로 6시간 이내로 끊어서 가려고 해요. 좀 더 많은 여행을 하는 것, 그게 제 인생을 위한 중요한 일이겠네요.” 문 회장은 아내가 자신을 보며 종종 불쌍하다고 말한다고 한다. 일밖에 모르니까. 그런데 그는 일이 없으면 공허해지는 것 같다고도 말했다. 말하자면 문 회장은 자신을 돌보고 아끼는 데 익숙하지 않은, 그 부분을 일로 채우는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렇게 안 하려고 해도, 그게 쉽게 안 돼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비빔밥이에요. 비벼서 빨리 먹고 일하러 가야겠다는 생각인 거죠. 그리고 비생산적인 데에는 투자를 안 하려고 해요. 와이프는 왜 남은 도와주면서 자기는 그렇게 안 하냐고 타박합니다. 그런데 남을 도와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는 일이죠.” 힘들었던 어린 시절, 서른 살이 넘어 입사한 나산에서의 승승장구, IMF 한파로 인한 퇴직, 퇴직 후 MDM 설립과 한국자산신탁 회장이 되기까지. 고난과 성공을 오가며 쉼 없이 살았던 그가 살면서 이것만은 지켜야겠다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주위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내 돈 몇 푼이 중요한 게 아니고 뭘 하든지간에 같이 상생할 수 있는 일을 우선했습니다. 이 일을 하면 참여자들이 만족하느냐, 소비자가 만족하느냐, 사회가 만족하느냐가 기준이었죠. 그래서 저는 디벨로퍼의 도덕성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건물을 짓는다고 했을 때, 이걸 짓다가 멈춰 서버리면 사회적 악이 돼요. 금융사, 시공사, 협력업체, 분양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도시의 흉물이 되잖아요. 그만큼 디벨로퍼란 정> 문주현 MDM 회장 1958년 전남 장흥에서 9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1978년 대입 검정고시를 보고 군대까지 다녀온 뒤 1983년, 27세의 늦은 나이에 경희대 회계학과에 입학·졸업했다. 1987년 나산실업에 입사, 부동산개발 사업에 발을 들였고, 7번의 특진을 통해 최연소 임원이 됐다. 하지만 나산그룹은 IMF 외환위기를 맞아 부도를 맞았다. 그는 재취업을 고민하다가 1998년 분양대행 업체인 MDM을 만들었다. 2007년 첫 시행사업에 나서기 전까지 ‘분당 코오롱 트리폴리스’, ‘분당 파크뷰’, ‘목동 현대 하이페리온’ 등 굵직한 주상복합 건물의 분양대행을 도맡았다. 2001년 재단법인 문주장학재단을 설립해 현재 출연금을 200억원까지 늘렸다. 2010년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했으며 2012년 한국자산캐피탈을 창립했다. 2013년부터 서울시탁구협회 회장, 2014년부터 한국부동산개발협회 회장, 2015년부터는 전국검정고시 총동문회장을 맡고 있다.
- 2016-08-18 08:41
-
- 반려동물은 내 가족.
- 필자는 강아지를 좋아한다. 길 가다가 지나는 강아지를 보면 그 개가 예쁘건 못생겼건 다 귀여워서 한 번씩은 꼭 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지금 강아지를 키우진 않는다. 예전에 키웠던 강아지와의 이별이 너무나 슬펐기 때문이다. 개로서는 명을 다한 15살의 나이였지만 우리 가족의 충격은 매우 컸다. 어떤 동물이건 한 번 키우기 시작하면 죽을 때까지 돌봐줘야 하는데 요즘 많은 사람이 예쁘다고 키우다가 필요 없다고 쉽게 버리는 일이 있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쮸쮸는 어릴 때 기르던 우리 강아지 이름이다. 15년을 같이 살았으니 강아지라고만 할 수는 없겠다. 필자가 대학생일 무렵 지인으로부터 낳은 지 일주일밖에 안 되는 눈도 잘 못 뜨는 강아지 한 마리를 선물 받았다. 요즘은 혈통을 중시한다지만 우리 강아지는 그때 당시 많았던 잡종 스피츠였다. 잡종이면 어떠랴, 우리 식구들은 강아지를 쮸쮸라 이름 지어주고 정말로 예뻐했다. 한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작았던 녀석이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다. 그때는 한옥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께서 개는 마당에서 기르는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엄마와 딸들은 쮸쮸를 방안에 들여놓고 지냈다. 운동시키러 밖에 나가 동네 한 바퀴를 돌 때면 두 귀를 팔랑거리며 달리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모른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온몸을 흔들며 꼬리를 쳐 우리를 반겨주었고 예쁜 모습으로 우리 식구들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사랑스러운 개였다. 하얀 털이 북슬북슬한 모습으로 예쁘고 멋지게 자라났지만, 봄가을 털갈이 때는 좀 곤란하기도 했다. 어찌나 빠진 털이 날리는지. 온 집안 구석이 털투성이가 되곤 했다. 엄마랑 우리는 식구들은 못 먹어도 강아지에게는 쇠고기 살코기를 사다 먹일 정도로 애지중지 키웠다. 그런데 자라면서 예쁘다고 너무 많이 먹여서인지 비만 개가 되었다. 살이 찐 후에는 운동도 잘 안 하려 했다. 그래서인지 옆구리 쪽에 혹이 생겨났다. 그 당시는 동물병원이 흔하진 않았는데 우리가 새로 이사를 한 동네 골목 어귀에 새 동물병원이 생겼다. 그곳에 데리고 가니 무슨 암이라고 해서 입원시키고 수술을 받았다. 사람들은 무슨 개를 수술까지 시키느냐면서 우습다 했지만 우리는 한번 키우기 시작한 동물은 죽을 때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한 식구나 다름없게 생각했다. 정말 그렇다. 요즘 세태에는 예쁘면 키우고 맘에 안 들면 버리는 풍조가 있다고 한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다. 서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동물인데 한번 키우게 되면 죽을 때까지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쮸쮸는 15년 살고 죽었다. 생각해보니 쮸쮸는 사람으로 치면 비만에 고혈압이었던 것 같다. 좀 덜 먹이고 운동도 더 열심히 시켜줄 걸 하는 후회도 든다. 그래도 15년간을 우리 옆에서 살다 갔으니 행복하지 않았을까? 애완동물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모두 끝까지 책임지는 마음으로 키우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이다.
- 2016-08-16 16:59
-
- 젊은 시절 결혼하여 살면서 온몸으로 느낀 삶의 지혜
- 우리 시니어 모두다 세상에 애기로 태어나서 자라나 어린이로 학생으로 성장하여 특별한 경우 외에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자녀를 결혼시키고 나이 들어가는 과정이 계속 되고 있다. 부모로서 지혜로운 삶의 지혜를 말해도 다 잊어버리거나 자신의 부모가 하는 말은 늘 하던 잔소리로 들을 수 있기에 글로 써본다. 1.공부하는 자녀들에게 낳아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너의 인생을 맘대로 결정지어 미안하다. 그래도 바뀌지 않을 환경을 직시하여 어떻게 해야 좀 더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지혜로운 상황일까 뭔가 안보여도 안 잡혀도 끓임 없이 포기하지 말고 노력하기를 권하고 싶다. 사춘기때 필자도 포기하는 모습으로 부모님을 일부러 속상하게 해보고 싶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결국 본인이 손해였던 것을 알았을 때 돌아가서 다시 이루기에 시간이 많이 소요된 인생이었음을 고백한다. 우리 인생이 마라톤이라고 해도 역시 마라톤우승자는 1그룹으로 치고 나간 사람 중에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 나중에까지 일할 수 있는 것 등 지금보다 더 장수시대가 될 테니 미래와 노후를 미리부터 준비하는 인생을 상상이라도 해보기 바란다. 필자는 첫 번째 대학의 과선택은 잘 할 자신이 있고, 취직이 잘 되는 과를 선택하여 선택했으나 결혼 후 아기를 가지면 더 이상 유치원평교사로 음악에 맞춰 뛸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기억한다. 2. 결혼을 앞둔 자녀들에게 옷매장에서 점원이 딱 내 옷이라고 부추긴다고 그냥 샀다가 후회하는 경우가 있었는가 부모님을 생각해서 떠밀리듯 하는 결혼은 하지마라 자녀들은 이미 낳아서 어린 시절 부모에게 줄 기쁨을 다 준 존재들이다. 부모자격시험없이 부모가 되었다는 것을 지금생각하면 참 걱정스런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이모저모 다 따져봐도 결혼은 했던 것이 잘 한일이라고 인생 후반에 미소 지을 자신이 있다면 해도 좋다. 신혼집인 것 말안해도 그 동네 지나다니는 사람이라면 이사올 때부터 다 안다. 문단속을 소홀히 하는일이 없어야 하며, 확인후 문열어주도록 한다. 어떤 피해가 있었다면 본인도 책임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잠깐의 외출도 길가집이라면 외부로 통하는 창을 반드시 잠그는 것은 기본이다) 임신을 한 경우 아기를 소중히 여기고 감사히 여기고 아기를 기다린다. 한 생명은 소중한 것이니 뱃속에서부터 귀하게 여기기 바란다. 필자의 뼈아픈 경험이니 꼭 명심하기 바란다. 3, 아기를 키우는 초보부모들에게 뜨거운 다리미를 다루거나 주방에서 음식할 때 만일에 일어날 사태를 생각하면서 일을 하라. 잠깐 이라도 집을 나설 때는 주방가스나 전기렌지를 끄고 움직인다. 모양이 예뻐도 아이가 어릴때는 유리주전자나 유리컵 사용등은 자제하라고 하고 싶다. 깨진후 위험은 물론 완벽하게 제거하는 과정은 생각만 해도 땀나는 일이다. 책자에 나오는 내용대로 싱크대에게 아기목욕을 시키지 마라. (지역에 따라 집에 따라 뜨거운 물이 갑자기 나와 여린 아기가 화상입을수 있다) 결론은 위험한 행동 ,만일에 일어날 일을 염두에 두고 안전하게 자녀를 키운다. 실제 경험한 내용만 적어보니 다른 분들도 어마어마한 실제 삶속의 경험속의 지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2016-08-16 16:48
-
- 부산 여행을 혼자 갔다 온 이유
- 이번에 부산 노사발전위원회에서 강의 요청이 왔을 때 사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강사료와 교통비는 준다고 했지만 과연 멀리 부산까지 가야한다는데 부담이 생긴 건 사실이다. 더구나 한창 휴가철이다. 거절할 명분도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처럼 멀리 부산까지 가는데 여름휴가 차 며칠이나 또는 일박이라도 할 생각도 했었다. 부산에는 지금까지 5번 정도 갔다 왔는데 그동안 많이 변해서 볼만한 곳도 많고 도시 자체가 휴양지라서 관심이 있었다. 우선 누구랑 같이 내려가는 방법이 있는데 갈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남자들은 아직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일을 빠질 수 없다. 놀고 있더라도 마침 휴가철이라 이미 휴가를 즐기고 있거나 계획을 짜고 있을 것이다. 또 남자들은 지나치게 과음을 해서 아침에 깨고 나면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몸도 무겁고, 속도 안 좋고, 머리는 아픈데 서울 올라갈 생각을 하면 까마득해진다. 여자의 경우는 남자랑 일박 여행을 할 만한 여자를 구하기는 어렵다. 구한다 해도 방을 따로 잡자니 경비가 2배이고, 같은 방을 쓰자니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는 일이다. 혼자 내려가서 부산의 지인들을 만나는 계획도 생각해 봤다. 그간 부산에 내려 간 것은 대부분 일 때문에 내려갔는데 그 때는 내가 갑이었다. 당연히 대접 받을 자격이 있었으므로 잘 먹고 거기서 끝난다. 그런데 지금 부산에 사는 지인들은 갑을 관계가 아니다. 부산 내려 왔다고 하면 반갑게 맞아 줄 사람들은 몇 명 있다. 저녁에 해변 횟집에서 바닷바람 맞아가며 술이라도 곁들이면 즐거운 한 때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서울 올라와서 내게 연락하면 나도 신세를 갚아야 한다. 돈 들어가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그 사람이 연락해 왔을 때 내가 시간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입장이 난처해진다. 내가 시간이 없어서 못 만난다고 하면 대단히 섭섭해 할 것이다. 더구나 내가 부산에 내려 갈 일보다는 그 사람들이 서울에 올라 올 일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혼자 부산 여행을 하는 방법도 있다. 요즘은 관광제도가 잘 갖춰져 있어 지도 한 장 놓고 목적지를 정하고 전철 타고 가면 된다. 그러나 이렇게 폭염 속에 고생하며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어 포기했다. 숙박업소를 찾는 것도 휴가철이라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사시사철 외국 관광객들로 넘치는데 더구나 휴가철 아닌가. 숙박료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혼자 비싼 호텔에서 청승을 떨 생각을 하니 고개가 가로 저어졌다. 잠들면 그만인데 숙박료처럼 허무한 것이 없다. 회사 다닐 때 경비 처리 될 때와도 다른 것이다. 그래서 혼자 바람처럼 내려갔다가 혼자 올라오는 것으로 정리했다. 모처럼의 기회를 몸만 피곤하게 당일로 갔다 온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최선의 판단이었던 것 같다. 남들에게 전혀 부담 안 주고 나도 홀가분하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나마 소득이다. 계절적으로 이렇게 너무 덥지만 않았다면 다음에는 혼자 여행 계획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또 강의 요청이 없더라도 부산에 일부러 여행 계획을 잡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얘기를 하다 보면 다음에는 먼저 나서서 꼭 같이 가자고 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갑자기 생긴 일이라 미리 염두에 두지 않아서 그렇지, 나도 일부러 관심을 갖고 사람을 찾아보면 같이 갈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경비 일체를 내가 댄다는 조건을 내걸 것이다.
- 2016-08-11 19:01
-
- 평생을 당뇨병환자와 고혈압환자처럼 사는 인생
- 몇 년 전 피곤함이 연속으로 와서 피곤하면 얼굴까지 아플 정도로 상태가 안좋아지곤했다. 그럴 때는 전신마사지를 받거나 머리에 침을 맞거나 심하면 링거를 맞거나 했다. 하루는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갔다가 진맥을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몸이 안 좋으니 내과에 가보라고 하여 기본검사를 하니 이미 당뇨병초기였다. 보약 먹으라고 하지않고 우선 피검사, 소변검사를 해보라고 한 그 한의사분에게 고마운 마음이 가득하다. 참 고마운 분이다. 그래서 당뇨를 비교적 빨리 발견하여 다행이었다. 맛집을 자주 다니고 공사다망했던 필자는 모임메뉴에 따라 아주 맛있게 식사를 하였다. 반찬 남으면 밥을 추가로 주문하고 밥이 남으면 반찬을 리필 받았다. 한참 일을 많이 할 때라 피곤도 모르고 지방도 다니고 날아다녔다. 50세 중반 넘어 가장 바쁜 사람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서울에서 새벽ktx타고 부산 갔다가 점심먹고 대구와서 일보고 밤에 다시 서울와서 저녁식사를 하였으니 체력적으로나 식사메뉴조절도 안하고 먹는 것도 단 것, 기름진 것을 좋아했으니 몸이 안 좋아진 것 그때였던 것이다. 발견 이후 당뇨체크를 하면서 흰밥의 양을 줄이거나 선택이 가능하다면 비빔밥이나 샤브샤브를 주문하여 야채를 많이 먹고 흰밥과 국수의 양을 줄였다. 이전에는 밤에 일을 해야 할 경우에는 야식으로 식빵두개속에 땅콩버터와 딸기잼을 넣고 믹스커피 두 개를 뜯어서 뜨거운 물을 붓고 마시면서 그 맛있는 땅콩딸기잼샌드위치를 다 먹고 새벽까지 일을 하였다. 밤에 애들 핑계대고 피자나 치킨 주문하여 입이 짧은 가족들 남긴 것까지 다 먹고 탄산음료도 많이 마셨다. 이제는 정말 라면이 많이 먹고 싶으면 물과 함께 배추속이나 버섯을 세로로 슬라이스 하여 넣고 끓이면서 라면은 원래 한 봉지 양의 4분의 1정도를 넣고 스프는 다 넣는다. 한결 그 국물이 야채나 버섯의 성분이 국물 속에 우러나고 간도 딱 좋다. 정말 먹고 싶은 날에는 피자도 토마토슬라이스하여 그 위에 토핑하듯 토마토위에 피자 조각을 얹어서 하나씩 먹는다. 하나둘 먹으면 먹고 싶은 욕구도 해소되고 이러면 안 되지 하는 맘도 들어 저절로 손을 놓게 된다. 그렇게 하고 잠자기전 당뇨수치를 재어본다. 신기하게도 생각보다 평소보다 약안먹고도 낮은수치에 놀란다. 반대로 먹고 싶다고 무방비상태로 마구 당뇨수치올릴 음식을 먹으면 영락없이 후회한다. 혈압도 당뇨도 매우 걱정스런 병이지만 더불어 잘 다스리면 오히려 준비 없이 당하는 경우보다 훨씬 삶이 건강하게 유비무환의 양호한 인생으로 안정되게 살아가게 된다. 밤의 야식과 밀가루음식과 기름에 튀긴 음식을 즐기지만 않아도 혈액이 맑아지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훨씬 가벼운 느낌을 갖게 된다. 내 몸이 몇 년간 스스로 임상 실험하여 얻은 내용이고 실제로 검사하러 가면 결과에 다 나온다. 당뇨와 혈압은 이미 아직 안 걸린 분들에게도 발옆에까지 언제나 와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더 가까이 다가온다. 인생의 모범생이 되기 위해 의사선생님말씀 잘 듣고 약도 생활도 처방대로 하려고 오늘도 노력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맘이 편해야 한다.
- 2016-08-10 14:37
-
- [내가 패셔니스트- 나만의 코디법] 모자에 반한 그 남자
- 필자는 모자 쓰기를 좋아한다. 아주 간단히 멋쟁이로 만들어주는 기막힌 물건이기 때문이다. 특히 오래전 모자 때문에 덕을 보기도 했으니 이 코디를 더더욱 버릴 수 없다. ◇용감한 외출 20여 년 전 남편이 이미 미국에 이민 가서 필자가 혼자서 모든 고난을 감당할 때 일이다. 아파트와 모든 것들이 경제 위기 속에 날리고, 손에는 한 푼도 남지 않았다. 당시 유일한 탈출구는 신용대출이었다. 그래서 단골 은행을 찾아갔는데 코웃음만 쳤다. 할 수 없이 다른 은행을 찾아갔다. 오랜 대기 끝에 상담했지만 이번에도 대답은 영 시원치가 않았다. 확실한 대답을 얻지 못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돌아 나와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다음날 오후 전화가 왔다. 전화 속의 목소리는 전혀 않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상대는 대뜸, 필자에게 대출에 관심 있으니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전날 두 번째로 찾아갔던 은행 대부계의 과장이라고 했다. 수상한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은 서둘러 은행으로 나갔다. 은행에 갔더니 안쪽에 선비 같은 모습의 대출 과장이 앉아 있었다. 필자를 반갑게 맞이한 그 사람은 차까지 대접하며 친절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상담해주었다. 필자는 솔직하게 모든 상황을 털어놓았고 상대는 아주 자상하게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해주었다. 필자는 그 순간에 눈물이 쏟아져 내렸고, 속이 후련해졌다. 설사 대출받지 못한다 해도 후회스럽지 않을 만큼 그 남자는 자상했기 때문이다. ◇진솔한 친구, 은인 사이 그 사람은 “윗분과 상의한 후 결정해야 한다”며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 격려해줬다. 그 직원의 말을 듣고 희망 반, 걱정 반 속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될 즘, 핸드폰으로 또 연락이 왔다. 시원스럽게 한마디로 원하는 대출을 해주겠다는 것이다. 무조건 필자라는 인간 하나를 믿고 해주는 대출이니 꼭 갚아 달라고 했다. 필요했던 어려운 대출이 이루어지고, 하루아침에 걱정이 사라졌으니 그 사람은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필자는 그 사람에게 먼저 전화를 해 만나자고 했다. 이번에는 필자가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했다. 그 사람은 쾌히 승낙했고, 필자는 정성껏 준비한 작은 선물과 함께 약속 장소로 나갔다.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필자는 궁금증에 질문했다. 어떻게 그리 쉽게 “아무 조건 없이 해줄 수가 있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고객님을 모자를 쓴 모습을 처음 본 순간 너무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 한참을 바라보았다”고 했다. 필자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태연한 모습으로 커피까지 마셨다. 하지만 그 사람과 대화하다 보니 흑심을 품은 남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후엔 속마음도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친한 남자 친구가 되었다. 그야말로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순수한 관계였으나 그 후로부터 모든 은행 일은 아주 쉽게 해결되었다. ◇ 아픈 추억 이 일이 있고 얼마후 필자도 미국으로 이민 갔다. 당연히 연락도 못 했다. 그리고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고, 미국에서 잠시 다니러 나왔다. 설레는 마음에 만나기로 한 어느 날, 그 친구는 뼈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들어가 연락을 취한 어느 날에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있었다. 똑똑하고 인간다운 진실했던 친구를 보내고 필자는 한동안 가슴에 큰 구멍인 듯 가슴앓이했다.
- 2016-08-08 1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