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개띠들이 하면 유행이 된다. 폭발적인 우리 사회 인구증가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58년생들은 사회 변화와 유행을 주도한, 지금으로 치면 ‘완판남’·‘완판녀’로 부를 수 있는 세대다. 그들의 문화적 파괴력은 굉장했다. 여러 분야 중 특히 여행과 관련한 58개띠들의 문화주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빈궁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의 혜택을 보기 시작한 이들은 다양한 여행을 경험해나갔다.
1978년. 58개띠들이 만 스무 살이 되던 해. 당시 8월 17일자 경향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린다. ‘바캉스 파장 … ‘고요’ 되찾는 산하, 연인원 5천만 기록’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당시 여름휴가를 위해 산과 계곡, 바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를 증언한다. 재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작년 대비 피서객이 40% 늘었다는 대목이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성인이 된 58개띠들이 피서객 증가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도 제주도는 관광지로 인기가 좋았다. 평소 600석 내외로 운영되던 서울-제주 간 항공편은 피서기간에는 1000석 이상으로 증편돼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다음 해인 1979년, 철도청은 고급여행을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새마을호 객차 확충을 서둘러 진행했다.
물론 58개띠들이 여행 보따리를 맘껏 싸기 시작한 원인에 경제성장의 수혜도 빼놓을 수 없다. 1977년은 우리 경제의 상징적인 시기였다. 1인당 GDP가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해 1034달러를 기록했고, 수출 역시 최초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배고픔은 점차 잊히고 있었다.
가장 원하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
그렇다면 58개띠들의 신혼여행은 어땠을까. 통계청이 2011년 발표한 ‘최근 30년간 초혼자료 분석’에 따르면, 1981년의 남성 초혼 연령은 26.4세, 여성은 23세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58개띠들의 결혼이 이뤄진 시기는 이들이 23세에서 26세를 지낸 1981년에서 1984년 사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1982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젊은이들의 신혼여행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등장한다. 한국갤럽이 18세 이상의 남녀 12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많이 다녀온 신혼여행지는 부산(21.6%), 경주(12.6%) 순이었다. 아무래도 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제주도는 3위(12.2%)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재미있는 것은 순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존재다. 당시 지방 거주민들에게 서울은 충분히 매력 있는 여행지였다. 신혼여행으로 서울을 선택한 이들은 5.4%나 됐다.
가고 싶은 신혼여행지로는 역시 제주도(46.5%)가 가장 많이 꼽혔고, 당시 왕래가 여의치 않았던 외국을 꼽은 이들도 13.1%나 됐다. 3위는 설악산(11.8%)이 꼽혔는데, 다녀온 여행지에서 7위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설악산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1978년 진갑을 맞은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관광지도 개발이 막 시작된 설악산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천지개벽’
58개띠가 해외 땅을 밟은 것은 ‘여행’보다 ‘일’이었다. 물론 해외 출장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고위직 공무원이나 주요 기업의 임원이 해외 출장이라도 나가면 모두 기삿거리가 됐다. 그만큼 해외 방문은 쉽지 않았다. 출장이 목적이어도 회사의 매출 규모가 낮은 기업은 여권을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
중동에서 일어난 건설 붐은 58개띠들의 해외 구경의 좋은 구실이 됐다. 굳이 따지자면 58년생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말까지 일었던 중동 붐의 막차를 탄 세대다.
1985년 해외로 나간 한국인은 약 48만 명이었다.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 이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많았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다.
서울올림픽 개최 다음 해인 1989년이 되면서 전 국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졌다. 1983년만 하더라도 50세 이상인 사람이 관광예치금을 200만 원 이상 맡겨야 관광여권을 받을 수 있었지만 매년 대상 연령이 낮아지다가 1989년에 완전 자유화가 이뤄졌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1990년부터 신문 지면에는 ‘배낭여행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즐겨 찾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에서 태국이나 필리핀으로 바뀌었다.
세운상가 외제장사 아시나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해외 출장 근로자들의 부업 중 하나는 바로 소니와 산요로 대표되는 일본 가전제품을 내다 파는 일이었다. 이들이 면세점 등에서 구매해 들여온 카메라, 오디오, 전기밥솥 등은 세운상가 상인들에게 늘 환영받았다.
그러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지면서 소비자들이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사갖고 들여오는 문화가 확산됐다. 이런 문화의 아이콘으로 ‘코끼리 밥통’이 있다. 일본 조지루시 전기밥솥은 밥맛이 좋다고 입소문을 타면서 고소득층 사이에서 필수품 대접을 받았고, 점차 대중화되어갔다.
매일경제신문은 1992년 광복절 ‘일제선호 불치병인가’란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일본 버블경제의 거품이 꺼져가면서 가전제품 상점가가 몰려 있는 아키하바라역 인근 가게들은 불황을 겪고 있지만, 한국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밥통 등 가전제품을 사주는 덕에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최근 중국 관광객 유커들이 백화점에서 한국산 밥통을 사재기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당시 58개띠들의 나이는 34세였다. 김포공항 입국 수속 행렬에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신문에 게재된 해외여행 광고를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도 일본, 미국, 동남아로 지금과 차이가 나지 않았고, 도쿄 4일 여행상품이 70만 원 선, 필리핀 4일 여행 상품이 48만 원 선으로 가격도 비슷하다. 다만 다른 부분이 있다면 중국 관광의 유무다. 58개띠들이 중국 관광지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1994년 중국여행 전면자유화 이후부터다.
[추억 한토막] 대전역 가락국수 맞먹는 앵커리지공항 우동의 추억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났던 대전역. 선로가 붐비고, 대기시간이 길었던 탓에 대전역 승강장의 가락국숫집은 승객들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됐다. 비행기 여행과 관련해서도 대전역 가락국수와 비슷한 추억의 공항이 있다. 다소 엉뚱하게도 미국 알라스카 앵커리지공항이 그곳이다.
대한항공이 1975년 서울-파리 여객노선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노선이 늘기 시작하면서 앵커리지 공항은 상당수 여객기가 들러야 할 경유지였다. 당시 여객기들의 비행거리가 짧았고, 냉전으로 인해 소련 영공을 지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절차였다. 이런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 버블시대 해외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던 일본의 항공사들도 이곳을 들러야 했다.
환승보다는 급유의 목적이 컸기 때문에 앵커리지에서 머무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해외 출장이 잦았던 상사맨들이나 항공사 관계자들은 당시 앵커리지의 추억을 기억한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했던 안영희 동년기자는 “한 시간은 있어야 했는데 승객들이 딱히 할 만한 것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면세점들이 장사가 잘됐죠”라고 설명한다.
이 공항에서 인기가 가장 높았던 매장은 바로 ‘우동’. 해외 왕래가 잦았던 한국과 일본의 ‘밀리언 마일러’ 사이에선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성지였다. 일본의 몇몇 사이트에 남아 있는 기록의 편린을 맞춰보면, 앵커리지 우동은 주인이 두 번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주인은 미국계 일본인으로 육수 제작과 제면을 직접 하는 정통파여서, 본토 일본인들도 인정할 정도였다고. 가격은 10달러 내외로 비싼 편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선 ‘앵커리지 우동’이란 단어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수준 높은 우동집을 칭하는 대명사처럼 통용되고 있다.
장사가 잘되자 한 항공사 자회사가 주인을 밀어낸다.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물론 우동은 인스턴트로 바뀌었다. 냉전의 종말과 항공기 성능의 향상으로 앵커리지 경유 노선이 줄자 이 우동집은 한국인 사업가에게 넘어간다. 맛도 한국식으로 변했고, 단무지는 별매여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대한항공에서 정년퇴직한 정용진 기장은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서 앵커리지공항의 우동은 자주 언급될 정도로 유명했어요. 우동과 함께 팔았던 연어 고기도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이어서 인기가 많았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통영 한산도는 이순신이 창건한 조선수군의 수도였다. 조선 개국 이래 버려져 있던 섬이 ‘이순신 수국(水國)’의 서울이 되어 국방과 경제·산업의 심장이 되었다. 그가 삼도수군통제사로 지낸 3년 8개월 동안 국가 경제의 중심지였고, 피란민을 구제한 사실상의 수도이기도 했다.
싸우면 이기는 막강 조선수군의 병권을 쥐고 독자적인 행정 사법제도에, 과거(무과)까지 시행해 민중의 신망이 높아진 이순신은 차차 왕의 의심을 사기에 이른다. ‘한산수국’이 강대해지자 위협을 느낀 선조는 끝내 그에게 죄를 씌워 죽이려 했다. 그 사이 통제사 자리를 꿰찬 원균이 첫 전투에서 궤멸당해 한산도는 다시 이름처럼 한산한 섬이 되고 말았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수영을 차린 것은 전라좌수사 시절인 1593년 7월 16일의 일이다. 왜적이 들끓는 경상도 수역에 자주 지원 출동을 나가게 되자, 여수에서 힘들게 노 저어 가 싸우고, 되돌아가기가 버거웠다. 7월 8일 한산대첩 때 이 섬의 가치를 눈여겨보았던 이순신은 조정에 이진(移陣)을 품신(稟申), 허락이 떨어지자 신속하게 진을 옮겼다.
이진의 필요성은 왕래의 불편함만이 아니었다. 남의 관할에서 싸우는 객장(客將)의 위치가 불편했을 것이다. 전투의 주장(主將)은 번번이 경상우수사 원균이었다.
그해 5월 이순신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섬멸하라”는 어명을 받았다. 즉시 여수를 떠나 걸망포(통영), 칠천량(거제), 세포(거제), 역포(고성) 등을 돌며 잠시 머물 진지를 찾았다. 그러나 배를 감추고 기동이 편리한 포구를 찾지 못해 한산해전 때 봐두었던 섬으로 옮겨갔다. 한산도 두을포(豆乙浦), 지금의 두억리다.
한산도는 바다에서 보면 밋밋한 섬이다. 그러나 가서 보면 배를 숨기기 알맞은 포구를 감추고 있다. 섬 한가운데 제법 높은 산(망산·293m)이 있어 남해바다를 감제하기 안성맞춤이다. 무엇보다 견내량(見乃梁) 바다가 가까워 왜적의 동태를 파악하기에 편리한 곳이다.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좁은 물길 견내량은 전라도 해로의 길목이다.
이순신의 편지글에는 한산도를 선택한 까닭이 드러나 있다.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인데 만약 호남이 없다면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 是無國家). 그래서 어제 한산도로 옮겨 진을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진 다음날 지평 벼슬에 있던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답서에 그는 이진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조정의 공도(空島)정책으로 그때까지 한산도는 무인도였다. 완만한 경사지 너른 풀밭에서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을 뿐이었다. 이 한산하던 섬이 삽시간에 번잡한 군사 도시가 되었다. 이진 1개월 만에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빈번해진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의 불화가 전쟁 수행의 장애 요인이라고 판단한 영의정 겸 도체찰사 유성룡이 이순신의 직첩을 높여 원균을 휘하에 두도록 배려했다. 삼도수군통제사는 그때까지 없던 직급이었다. “그대 휘하의 장수로서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그대가 군법대로 시행하라”는 선조의 교지에 그 뜻이 숨어 있다. 이때까지는 싸우면 이기는 이순신이 미뻤던 모양이다.
삼도수군통제사란 지금으로 치면 해군참모총장이다. 육군은 존재감이 미미했고, 오직 수군만이 왜적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바다를 끼고 있는 70여 개 고을이 통제사 관할 아래 들어왔으니 가히 ‘수국’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교서지 한 장만 내려왔을 뿐이다.
조정은 지원은커녕 일선 장수들에게 손까지 내밀었다. 조정에서 요구하는 물품을 올려 보낸다는 이순신의 장계가 여럿 전해온다. 1592년 9월 18일 행재소에서 소용되는 종이를 넉넉히 올려 보내라는 지시를 받고 “우선 장지 10권을 보낸다”는 장계를 시작으로, 9월 25일 의연곡(義捐穀, 기부한 곡식)을 모아 한 배로 보낸다는 장계도 있다. 신하가 왕에게 종이와 쌀을 모아 보낸 것이다. 1594년 6월 26일자에는 “단오절 진상물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수많은 장병을 먹이고 입히고, 전함과 무기 화약 등 각종 군수품을 조달할 책임은 당연히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한 것이 유명한 둔전(屯田)책이다. 그에게는 전라좌수사 때 영남에서 몰려든 피란민을 구휼할 방책으로 돌산도 둔전을 시행한 경험이 있다. 통제사가 되자 군량 해결책으로 둔전 개간을 청원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전라좌수사 시절 “전라좌우도 소속 1만7000명 군사를 먹이는 데 적어도 하루 100석, 한 달에 3400석이 필요하다”고 한 장계를 근거로 추산하면, 3도 수군의 하루 군량이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있다. 이 많은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그는 연안 지역과 빈 섬의 버려진 땅을 개간해 경작자들에게서 세곡을 받아들이자는 방안을 낸 것이다.
공도정책에는 어긋나지만 당장 뾰족한 방도가 없는 조정으로서는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둔전에서 식량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개간 기간과 수확이 나오기까지의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그는 병사들을 동원해 칡을 캐고 고기잡이를 했다. 칡은 대용양식, 물고기는 부식이 되었다. 남는 고기는 내다 팔아 곡식으로 바꾸었다.
여러 병영에서 필요한 갖가지 경비를 조달할 방책으로는 소금을 구워 팔았다. 그 시절 소금은 ‘백금’이라 불릴 만큼 값진 식품이었다. 미역, 다시마, 김 등 해조류와 조개류를 채취해 경비에 보탰다. 200여 년 공도정책 덕분에 남해 연안 지역과 섬들마다 황금어장이었다.
에는 쇳물을 부어 철부(鐵釜, 다리가 없는 솥)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소금 굽는 쇠솥을 주조했다는 말이다. 남해안의 소금 제조는 바닷물을 오래 끓여서 만드는 전오(煎熬) 제염법이 주류였다. 그만큼 많은 쇠솥이 필요했을 것이다.
개간이 끝난 농지에서 쌀과 잡곡이 나오기 시작한 뒤로 사정은 좋아졌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200척이 넘는 전선을 건조하고 총포와 화약, 창과 칼, 활과 살 등 무기와 장비를 확충하기에 돈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것들은 관련 산업을 일으켜 해결했다.
특히 조선업 진흥은 지역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고을마다 솜씨 좋은 목수들이 한산도와 각 지역 수군병영으로 떼 지어 몰려들었다. 좋은 소나무와 참나무 같은 목재들이 실려 오고, 대장간마다 쇠 소리와 풀무질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군사 1283명에게 밥을 먹여 산에서 선재용 나무를 끌어왔다.” 이런 일기가 자주 보이는 것으로 보아, 전선(戰船) 건조사업의 규모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배들이 날로 늘어갔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멀리 바라보니 우리의 배들이 바다에 가득 차 있다. 적이 비록 쳐들어온다 해도 섬멸할 만하다.” 1594년 5월 10일자 일기에는 수많은 전선이 건조된 것을 뿌듯이 여기는 마음이 가득하다.
조총까지 제조되었다. 임진년(1592년) 4월 부산포에서 우리 병사들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던 그 총을 만들어냈다. 왜적에게서 노획한 총을 본떠 만든 것이다. 1593년 9월 14일자 일기에는 “정철총통(正鐵銃筒)은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 무기이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드는 법을 몰랐다. 오랜 연구 끝에 이제야 만들어냈다. 왜의 총보다 성능이 좋아서 명나라 사람들이 진중에 와서 시험사격을 해보더니 다들 잘되었다고 칭찬하였다. 이제는 그 묘법을 알았으니 순찰사와 병사에게 견본을 보내고 공문을 돌리도록 하였다”고 기록했다.
그 뒤의 일기에 “총통 두 자루를 부어 만들었다” 같은 내용이 자주 보이는 것으로 보아, 거푸집을 만들어 두고 필요할 때마다 만들어 쓰고 선물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환도(還刀) 대검(帶劍)을 선물로 사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주물 공업의 발달상을 알 만하다.
임진왜란 직후 300년 동안 조선수군의 수도였던 통영에 전통 공업이 발달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통영에는 옛날부터 12공방이 있다고 일컬어져 왔다. 나전칠기, 갓, 놋쇠, 부채, 신발, 목가구, 질그릇, 은세공 등등 격조 있는 집기와 일상생활의 소소한 일용품 제조업 발달에 한산도 시대의 몫이 컸다.
이 정도로 ‘수국’이라 할 수는 없다. 끈질긴 상소 끝에 한산도에서 독자적인 무과(과거)시험을 실시한 것이 한산도를 ‘한산수국’ 수도로 만든 결정적 사건이었다. 과거시험 출제와 관리를 군대 책임자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비상시가 아니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1593년 12월 이순신은 전주에 내려와 분조(分朝, 임진왜란 때 임시로 세운 조정)를 떠맡은 세자 광해군에게 당돌한 장계를 올린다. 수군만의 무과를 자신의 주관으로, 그것도 전주가 아닌 한산도에서 시행하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12월 27일 전주부에 과거 시험장을 열도록 명령하셨다고 하니, 진중의 모든 군사들이 달려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물길이 멀고 왜적과 대치해 있는 상황이라 뜻밖의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정예용사들을 한꺼번에 내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수군에 소속된 군사들에게는 진중에서 시험을 볼 수 있게 해주시어 그들의 소원을 풀어주시옵고….”
수하들을 이끌고 전주에 와서 과거를 보라는 분조의 지시를 따를 수 없으니 시험장을 한산도로 해달라는 요구였다. 분조에서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는 세력이 있었지만, 그 명분을 외면할 수 없어 이순신의 건의는 채택되었다. 날짜는 4개월 늦춘 1593년 4월이었고, 합격자 100명도 거의 진중의 장병이었다. 시험과목 중 말을 타고 달리면서 쏘는 기사(騎射)는 편전(片箭)으로 바뀌었다. 이순신의 요구가 100% 수용된 셈이다.
한산도의 번영과 영광은 그때까지였다. 이순신이 함거에 실려 한양으로 끌려가고 몇 달 뒤 한산도는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의 자리를 차지한 원균이 첫 출전 부산포 해전에서 대패하고, 경상우수사 배설이 자신의 함대 12척을 이끌고 돌아와 병영을 불 지르고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유성룡의 에는 그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원균은 자기 수하의 배만 이끌고 지키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오자 달아났기 때문에 그의 군사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한산도에 도착한 그는 무기와 양곡, 건물 등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남아 있는 백성들과 함께 대피했다.”
뒤따라 한산도에 들이닥친 왜적은 그동안 이순신에게 당한 분을 풀어보려는 듯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분탕질을 했다. 한산도에 진을 치고 전라좌수영까지 점령해 남해를 자기네 안마당으로 만들었다.
오늘의 한산도에서는 제승당 포구에 자리 잡은 요트 선착장이 세월의 힘을 대변하고 있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격전의 현장에 생겨난 레저시설이라니! 오전 10시 통영 여객선 터미널을 떠난 페리 연락선에는 금요일 오후의 여가를 역사의 현장에서 즐기려는 관광객으로 만선이었다. 긴 물거품을 끌고 달리는 페리 갑판 위에서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아이들의 환호성이 비명처럼 높았다.
30여 분의 항해 끝에 다다른 제승당 포구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배가 들어온 쪽을 돌아보니 사방이 뭍으로 둘러싸였다. 고동산 돌출부와 한산대첩비 돌출부가 길게 뻗어 나와 내해를 방파제처럼 에워싸고, 그 너머로 미륵도와 통영 반도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멀리서 접근해오는 호화 요트 두 척이 제승당 포구에 들어와 접안하는 것을 보고야 그곳이 관광요트 선착장이라는 걸 알았다. 420년 사이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음을 충무공에게 고하려 함일까!
현장에 가서 본 수루(戍樓)의 위치는 참으로 절묘했다. ‘섬 안의 반도’라 해야 할 내해의 곶이었다. 그 위에서 바라보면 개미 새끼 한 마리의 움직임도 포착할 수 있었겠다 싶었다. 제승당 뒤편 망산 꼭대기에서는 견내량을 감제하고, 좌우 물길과 뭍으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으니 그런 지리(地利)를 가진 곳이 또 없다. 이곳에서 유명한 ‘한산도가(閑山島歌)’를 지었다는 달밤이 저절로 상상됐다.
수루 뒤편 중앙에 잡은 제승당(制勝堂)은 본래 이름이 운주당(運籌堂)이었다. 이순신이 수하 막료들과 작전 계획을 세우고 장졸들의 의견도 듣던 곳으로, 집무실 겸 주거 시설이었다. 이런 곳에 원균은 첩을 들이고 울을 둘러 수하들의 출입을 막았다. 배설이 불태워 폐허가 되었던 자리에 1739년 제107대 통제사 조경(趙儆)이 건물을 복구해 제승당으로 당호를 바꾸었다.
통제영 시설 가운데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곳이 활터 한산정(閑山亭)이다. 바다를 끼고 145m 건너편 산비탈에 과녁 셋이 있다. 밀물과 썰물 교차를 이용해 해전에 필요한 실전거리 적응을 위해 일부러 바다 낀 곳을 골랐다는데, 아마도 국내에 이런 활터는 없으리라 했다. 매일같이 활쏘기를 연마하던 이곳에서 “수하들과 내기를 해 진 편에서 떡과 술을 내 배불리 먹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1594년의 과거시험 활쏘기 시험장으로도 이용된 역사의 현장이다.
원균의 패전 이후 통제영은 통영으로 옮겨갔다. 통영에서 제일 유명한 곳은 국보 제305호 세병관(洗兵館)이다. 1604년 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 시절 두룡포(오늘의 통영)로 통제영을 옮기고 이듬해 건물을 지었다. 두 차례 증개축을 통해 앞면 9칸, 옆면 6칸의 목조 건물이 되었다. 여수 진남관과 함께 바닥 면적이 가장 넓은 객사 건물로도 유명하다.
뭐니 뭐니 해도 통영을 대표하는 것은 그 땅의 지명이다. 300년 동안 수군통제영이 있었던 곳이라는 유래에서 비롯된 이름이어서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박정희 정권 시대 충무공 시호에서 유래된 ‘충무’로 불리기도 했지만, 옛 지명을 선호하는 여론 때문에 다시 통영이 되었다.
친구와 그녀를 만나기로 한 7월 둘째 주 토요일, 새벽녘에 우르릉 쾅쾅 천둥소리와 함께 요란한 장대비가 쏟아졌다. “이렇게 비가 오고 궂은날 설마 거리 캠페인을 나가겠어?” 약속을 취소할 요량으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평택에 살고 있는 친구는 “우리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그냥 밥이나 먹고 오자”고 했다. 전에 두어 번 본 적 있는 그녀는 평택 친구와 여고 동창이다.
일산 정발산역에 도착할 즈음 다행히 빗방울이 잦아들었다. 2번 출구로 빠져나와 일산호수공원으로 가는 길목, 유동인구가 가장 많이 몰리는 문화공원의 한 중심에 그녀가 있었다. ‘사단법인 고양시 유기동물 거리입양 캠페인’을 운영하고 있는 박정희(58) 대표. 그녀의 성격만큼이나 정열적인 빨간색의 천막에 새겨진 ‘사지 말고 입양하세요’라는 독특한 내용의 글귀가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박정희 대표는 주인에게 고의로 버려졌거나 부주의로 잃어버려 가족과 이별한 애완동물들을 돌봐주고, 다시 새로운 가족을 찾아주기 위해 매주 토요일마다 거리에 나와 봉사를 하고 있다.
“비가 온다고 쉬면 되나요? 이 아이들을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이어주기 위해 태풍이 오든 폭설이 내리든 언제나 토요일엔 거리로 나옵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이동했을 때 박 대표가 육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구수한 청국장찌개를 먹으며 그녀가 말했다.
“원래부터 고기를 안 먹었던 건 아니에요. 딸애가 사춘기일 때 저랑 갈등이 많았어요. 그때 모녀 사이를 풀어준 계기가 된 게 유기견 입양이었답니다. 그 후 하나밖에 없는 딸이 결혼을 했고 우울증이 몰려왔죠. 본격적으로 유기견 돌봄 봉사에 뛰어든 건 그 무렵이었어요. 6년째 유기견 봉사를 해오면서 식습관도 자연스레 채식으로 바뀌었죠.”
활달하고 적극인 성격의 박 대표는 처음엔 봉사할 방법을 몰라 동물 관련 프로그램을 다루는 방송국에 문의를 했다고 한다. 알선을 받아 동물보호소에서 시작한 봉사활동이란 맨날 똥 치우는 일이었다고. 그 뒤 맘먹고 개털을 깎아주고 예쁘게 다듬어주기 위해 미용 자격증을 땄다고 한다.
미용 봉사에 푹 빠져 지내던 중, 2011년 8월쯤 80여 마리의 유기견을 보호하고 있는 일산의 한 보호소로 미용 봉사를 갔다. “갈 데 없어 곧 안락사당할지도 모를 많은 유기견들을 보니 마음이 아팠어요. 우선 네 마리를 데리고 와 이태원에서 처음으로 거리입양 캠페인에 나섰죠. 참 신기하게도 그날 모두 입양이 됐어요. 용기를 얻어 용산에서 세 군데 더 확장했다가 지금은 맨 처음 네 마리를 데리고 온 인연을 생각해 아예 일산에다 자리를 잡았답니다.”
유기동물 거리입양은 일반 입양 절차에 비해 살짝 까다로운 편이라고 한다. 입양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병원 검진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지정된 동물병원에서 종합접종, 신종플루 예방접종, 외부 기생충, 마이크로칩, 심장사상충 검사, 중성화 수술을 해야 한다. 비용은 20만 원 정도이고 입양자가 결제를 하고 데려가면 된다.
“요즘 팻팸족(pet+family)이라는 신조어가 말해주듯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도 이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어요. 어느덧 반려동물 1천만 시대에 접어들어 관련 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한편에선 인터넷이나 불법 경로를 통해 무분별하게 사고파는 등 부작용도 생겨나고 있어 안타까워요. 돈이 된다 해서 강아지 공장(puppy mill, 상업적 목적으로 강아지를 사육하는 농장)을 버젓이 운영하는 행위를 보면서 안타까웠죠. 그런 곳의 강아지를 사주지 않아야 그런 농장들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무 곳에서 ‘사지 말고’ 제대로 절차를 밟아 ‘입양하세요’라고 토요일마다 나와 외치는 겁니다.”
박 대표는 이어 ”유기견은 보통 보호소에 입소하면 약 10일 정도 머무른 후 데려갈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락사를 당하죠. 그걸 보는 게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동안 우리 ‘고유거(고양시 유기동물 거리입양 캠페인)’에 관심 갖고 도와준 좋은 분들이 많아 후원금도 상당히 모아졌어요. 그 후원금으로 ‘고유거 유기견 쉼터’도 오픈했답니다. 우리 쉼터에는 안락사 기간이 없어서 마음이 뿌듯해요.”
내후년이면 35년여의 국방부 근무를 마치고 정년퇴직을 하는 박정희 대표. 어떻게 하면 노후를 더 보람 있고 멋지게 보낼 수 있을까 구상 중이라 했다. 평소 수영과 마라톤으로 체력을 다지고 늘 뭔가를 끊임없이 배우고 있는 박정희 대표의 멋진 노후가 어떻게 펼쳐질지 무척 기대된다.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사극은 역사 속 인물을 소환해 현재적 의미를 부여한 뒤 생명력을 불어넣고 오늘날의 사람들과 만나게 한다. 그동안 이순신, 정조, 사도세자, 장희빈, 이성계, 광해군, 연산군, 허준, 윤동주, 김원봉 등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수많은 역사적 인물이 새로운 시각에서 극화됐다. 또한 드라마 의 장금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발굴해 역사적 의미와 존재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 사극의 역사적 인물의 소환은 새로운 문화 트렌드와 시대의 아이콘을 창출하는 진원지 역할도 한다.
올해도 MBC 사극 의 홍길동, 영화 의 독립운동가 박열 등 전통사극, 퓨전사극, 타임슬립 등 다양한 형태의 사극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다양한 역사적 인물을 소환하고 있다. 올해 사극을 통해 만나는 인물 중 단연 눈길을 끌고 화제가 되는 인물은 신사임당이다.
이후 13년 만에 드라마에 복귀한 이영애에 의해 표출되고 있는 사임당이 시청자와 만나고 있다. 바로 1월 26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SBS 퓨전사극 다. 사임당을 사극으로 이끌어낸 이유는 뭘까.
“현모양처라는 박제된 이미지의 ‘신사임당’의 틀을 깨고 여자로, 예술가로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여자 사임당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드라마 제작에 돌입하며 제작진이 밝힌 기획의도다.
‘현모양처’ 이미지 탈피 노력
극본을 쓰고 있는 박은령 작가는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삶도 중요하지만, 예술가로서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여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가는 모습에 주목했다.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힘든 일인데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극 중 사임당의 아버지 유언이 ‘삶을 선택하라’였다. 사임당이 삶을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적극적으로 개척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조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출을 맡은 윤상호 PD는 “대한민국 사임당을 드라마화하기 위한 기획 의도는 대한민국 국민의 자긍심과 자부심을 위한 좋은 드라마를 만드는 것과 연결된다”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13년 만에 드라마에 복귀해 현대(서지윤)와 조선시대(사임당)를 오가며 1인 2역을 하는 이영애의 사임당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500년 전 사임당도 지금 5만원권에 박제된 듯한 모습을 원하진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자로서의 사임당에 생명을 불어넣어 새 인물로 만드는 게 재밌었다.”
는 한국 미술사를 전공한 대학 시간강사인 워킹맘 서지윤이 이탈리아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임당 일기에 얽힌 비밀을 조선시대와 현재를 넘나들며 풀어내는 타임슬립 퓨전사극이다. 는 일기 속에 숨겨진 천재 화가 사임당의 불꽃같은 삶과 ‘조선판 개츠비’ 이겸과의 불멸의 인연과 사랑을 아름답게 담았으며 현모양처라는 고정된 이미지의 사임당이 아닌 워킹맘이자 예술가로서의 열정에 초점을 맞췄다.
현대적 여성상 반영할 수 있을까
사임당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라는 획일화한 표상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각인된 게 사실이다. 사임당 하면 떠오르는 고정화한 이미지와 그녀에 대한 불편한 시선과 편견은 사임당의 삶이 아닌 후대의 필요에 의한 해석과 의미부여 작업으로 초래된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박정희 정권 시절 육영수 여사의 국모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른바 사임당의 현모양처 이미지를 강화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5만원권 지폐의 인물로 등장하면서 불편한 시선과 편견이 확대 재생산됐다.
는 전통적 여성상으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현모양처의 표상이었던 사임당을 시대와 운명, 남성 중심의 인식을 뛰어넘어 자신의 삶과 사랑, 예술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주체적 인간의 아이콘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도 2017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다양한 의미와 현실로 다가오는 ‘워킹맘’이라는 문양으로 말이다.
최근 들어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다. 직업을 갖는 여성도 급증하고 있다. 그리고 출산을 하고도 일하는 워킹맘들도 많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인식이 엄존해 있고 남녀차별 더 나아가 여성혐오 행태마저 빈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는 의도가 개입된 획일화한 해석으로 우리에게 ‘현모양처’, ‘전통적 여성상’으로 인식되어온 사임당을,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이 어우러진 작업을 통해 2017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감과 희망을 제시하는 주체적 여성상으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새로운 시선과 의미가 투영된 사임당으로의 전환은 지난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이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사임당이 새로운 문화 트렌드와 아이콘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가 시청자, 특히 이 땅의 수많은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현재적 가치를 체화한 2017년의 사임당을 잘 구현해야 한다. 또한 사임당에게 덧씌워진 편견과 왜곡된 시선을 자연스럽게 걷어내면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오늘의 의미를 담보해야 한다. 그것도 우리 사회에 엄존해 있는 남녀차별적 시선과 여성혐오적 행태를 무력화하는 긍정적 이데올로기를 드라마에 완벽하게 승화하면서 구현해내야 한다.
는 정치적 시선,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사극에서 좀처럼 소환하지 않았던 신사임당을 오늘의 시청자와 만나게 하고 있다. 사극으로 부활한 사임당은 올해 시대정신을 담보한 새로운 인물 아이콘으로 눈길을 끌며 강력한 문화 트렌드로 부상할 수 있을까.
박정희 혜담(慧潭) 인상코칭 연구원장 iliseo80@naver.com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정국으로 인해 19대 조기 대선이 가시화되고 있다. 대통령의 탄핵은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무너진 사건임에 틀림이 없다. 선거철이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대통령 상(相)이 따로 있나요?’이다. 인상학을 공부하면서 배운 군주의 상은 이렇다. 첫째는 눈이 맑고 빛이 나며 자애로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둘째는 관골이 잘 싸주면서 코의 기운이 우람해야 한다. 세 번째는 수주(귓볼)가 두툼하고 풍윤해야 한다. 넷째는 이골(턱 주변)이 강하고 힘이 있어야 하고 탄력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는 음성에 힘이 있어야 한다.
맑고 빛이 나는 눈은 명석함과 현명함을 나타내며 자애로움은 사랑을 담아 사람을 바라본다는 의미다. 관골이 잘 싸준 코는 재물에 대한 힘이 강해 부를 가져다주고 신의 또한 굳건하다. 두툼한 귓불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능력이 있으며 세상을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지혜가 있다. 턱의 힘이 강하면 상하 간의 조화로움을 중요시할 것이다. 음성에 힘이 있어야 내면의 힘과 상대를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느껴진다. 이 모든 조건들을 다 가진 후보자가 과연 있을까. 지금부터 대선 후보들의 인상을 들여다보자.
우선 최근에 가장 많이 거론되는 4명의 인상을 비교해보자. 먼저 눈을 살펴보자. 반기문 후보의 눈은 가로로 길고 눈동자에 강한 힘이 담겨 있다, 반면 안철수 후보의 눈은 쌍꺼풀이 짙지 않아 부드러워 보이기는 하지만 어떤 것을 직시할 때는 강한 불꽃이 튀는 듯한 매서움이 느껴진다. 문재인 후보의 눈은 짙은 쌍꺼풀에 검은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 있어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물불을 가리지 않을 것 같은 면모가 드러나 보인다. 박원순 후보의 눈은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가 조용하고 편안하게 보이지만 감추어진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기회가 주어지면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강인함이 느껴진다.
눈은 정신을 담는 그릇으로 그 사람의 인상을 좌우하는 대표적인 부위다. 대화를 나눌 때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은 그만큼 강력한 소통 욕구가 있다는 의미다. 반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의 눈을 회피한다.
다음은 코를 살펴보자. 코가 가장 잘 발달된 후보는 안철수 후보라고 할 수 있다. 산근(눈썹과 눈썹 사이)의 힘이 좋고 콧대가 반듯하고 힘이 좋다. 명예를 중요시하며 자신이 가진 명예가 재물이 되는 코다. 반기문 후보는 자신의 삶에서 두 번째 행운을 만날 수 있었던 시기가 코의 나이, 즉 40 이후라 할 수 있다. 치밀하고 계산적이며 자신에게 온 행운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 코다. 문재인 후보는 욕망은 강하지만 그것을 담을 수 있는 창고(콧방울)가 다소 약해 보인다. 박원순 후보의 코는 창고가 잘 발달되어 있지만 창고 문이 커서 실속이 부족해 보인다.
코는 재산 관리 능력과 욕망, 지위 등을 나타내주는 부위로서 특히 대통령의 코는 국가 경제와 위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직 대통령 중 한 분은 콧구멍이 너무 크고 콧방울(준두)에 힘이 없어 취임 초기부터 경제가 어려워질 것이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과연 우려했던 것처럼 많은 사건과 사고가 나서 국민들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매우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대통령의 코가 힘 있게 반듯하게 잘 내려가 있고 콧방울이 튼실한데다 관골까지 잘 발달되어 있으면 금상첨화여서 자신의 위상이나 재물운도 좋지만 나라의 경제도 튼튼하다.
입은 우리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부위로서 먹고 말하는 문제가 담긴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대선을 치를 때마다 입을 중요하게 보라고 한다. 특히 입술이 안으로 말려들어가 있는가를 잘 보라고 주문한다. 입술이 안으로 말려 들어간 사람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자신감이 부족하고 현재 속이 타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는 입술이 뒤집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입술이 활짝 뒤집힌 사람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 성향이 있다. 이러한 해석은 여자에게 더 해당되는 말이지만 남자 역시 비켜갈 수 없는, 얼굴이 주는 언어다.
19대 대선 후보들의 입은 잘생겼다고 할 수 없다. 다행인 것은 대부분 턱이 강하고 늘어져 있지 않아 하극상을 당하지는 않을 관상들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하늘이 낸다는 말이 있다. 결국에는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과 다가올 시간들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따라 그에 맞는 적절한 인물이 선택될 것이다.
◇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인상
71세 트럼프의 강경 성향을 얼굴에서 살펴보려면 이마와 코부터 봐야 한다. 잘생긴 이마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넓고 반듯한 이마와 곧게 잘 다듬어진 콧대. 좋은 가정에서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금수저의 전형이지만 그는 돈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 신문배달을 하며 용돈을 마련했다고 한다. 트럼트의 경제관념을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현재 트럼프의 모습은 그의 살아온 시간들의 이면을 정확히 보여준다. 그의 재산이 100억 달러라고 하니 실로 어마어마하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자신의 사업적 역량으로 키운 것이 아니라 잘 지켜서 자산 가치가 더 커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두 번의 이혼에도 재산을 잃지 않았다. 그의 콧방울은 사업가로서 부를 축적하는 코라기보다는 가진 것을 잘 지키는 코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부동산을 이용해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견고해진 턱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지구력과 자신감의 소치가 아닐까. 트럼프의 얼굴에서는 타인에 대한 동점심이나 나약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치밀하고 계산적으로 보이는 눈, 넓고 잘 발달되어 있지만 각이 지고 단단한 이마는 냉정해 보이는 코와 함께 그의 면모를 강인하고 냉정한 사람으로 각인시키고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그의 입은 크고 잘 발달되어 있다. 법령(입가의 주름) 또한 턱까지 잘 발달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모습들을 관찰해볼 때, 작은 주변국들을 지원해줄 것이란 기대는 내려놓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나마 작은 희망이라도 가져볼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트럼프가 명예를 중요시하는 강한 인상을 가졌다는 것이다.
>>박정희(朴正姬) 전 동방대학원대학교 문화교육원 인상학 교수
혜담 인상코칭연구원 원장으로 기업체와 대학에서 특강을 하고 있다. tv조선 인상학자 패널, 관상학 전문가 패널로 밝고 아름다운 인상미학에 대해 전파하고 있다. 저서로 , 등이 있다.
승승장구, 탄탄대로 인생을 사는 이들이 있다. ‘천운을 타고났나?’, ‘사주팔자가 좋은가?’라며 그들의 성공을 진단해보기도 하지만, 뭐든 타고난 운만 가지고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만의 비법으로 성공운을 거머쥘 수 있었던 이들의 유형을 살펴봤다.
◇ 운명개척형
일본 최대 소프트웨어 유통회사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손 마사요시) 대표는 젊은 시절 자신의 운명을 미리 점쳐놓았다. ‘20대에 이름을 날린다. 30대에 최소한 1000억엔의 군자금을 마련한다. 40대에 사업에 승부를 건다. 50대에 연 1조엔 매출의 사업을 완성한다. 60대에 다음 세대에게 사업을 물려준다.’ 손정의가 20대에 세운 50년 인생계획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스스로도 자신을 천재라 여겼다고 한다. 사업 제휴를 맺는 상황에서도 “나는 천재다”라고 말했을 정도. 일찍이 그는 자신의 잠재성향과 운을 꿰뚫었고, 그 덕분에 막힘없는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스타항공 회장을 지낸 이상직 전 국회의원은 요즘말로 흙수저 출신이지만, 자신만의 ‘텐배거’ 로드맵을 만들어 금수저 반열에 올랐다. 텐배거(Ten bagger)는 10루타라는 뜻으로 야구가 아닌 금융투자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투자자에게 10배, 1000%의 수익률을 안겨주는 대박 종목을 의미하는데, 이상직은 1998년 텐배거에 도전해 2년 만에 투자원금 1300만원으로 그의 15배에 달하는 2억원의 수익을 올렸다. 이후 그는 텐배거 법칙을 사업뿐만 아니라 인생의 기본 원리에 적용했다. ‘10루타를 쳐라’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그는 현대증권에서 10루타 종목을 연이어 터뜨렸고, 이스타항공의 대박 신화를 창조해냈다.
◇ 대기만성형
피카소처럼 타고난 천재성 덕분에 명성을 떨친 예술가가 많다. 그러나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의 경우는 달랐다.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법과 대학을 다녔던 그는 돌연 화가라는 꿈을 꾼다. 이후 세잔은 선천적인 재능이 아닌 고뇌와 노력의 산물로 세계적인 명작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실제 피카소는 20대 중반에 그린 작품들이 60대에 그린 작품들보다 4배가량 비싸게 팔렸는데, 세잔의 그림은 60대 중반에 그린 것들이 젊은 시절 작품들보다 최대 15배의 가격에도 팔렸다고 한다. 현재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최고 작품들 역시 모두 인생 말기에 그려진 것이다.
20세기 세잔이 대기만성형 예술가라면, 21세기 대기만성형 과학자를 꿈꾸는 이가 있다. 서울중앙지법원장 출신 강봉수 박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물리학에 관심이 많아 고등학교도 이과를 택했고, 서울대 원자력학과를 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대 법대를 지원했고, 이후 40년간 잘나가는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면서도 과학자의 꿈을 잃지 않았던 그는 퇴직 후 66세에 물리학 공부를 위해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 후 7년 만에 머시드 캘리포니아대 대학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땄다. 당시 그의 나이 73세였다. 하루 15시간씩 공부에 매진한 덕분에 이제는 ‘강봉수 물리학 박사’로 불리며 활발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 장수형
무병장수를 꿈꾸는 100세 시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도 무탈한 인생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조선시대 왕 중에서 가장 오래 산 왕은 83세까지 살았던 영조다. 영조의 장수비결은 규칙적인 식사습관과 소식(小食)이었다고 한다. 고기와 생선을 멀리하고 보리밥과 채소를 즐겨 먹었던 영조는 감선(減膳: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왕이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며 근신하는 것)을 89차례나 했는데, 신하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감선을 넘어 단식까지 감행하며 절대권력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식습관으로 영조는 장수뿐만 아니라 그에 비례하는 수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영조처럼 식습관을 잘 다스린 덕분에 장수한 역대 대통령 중에는 제4대 대통령인 윤보선이 있다. 그는 94세까지 살았는데, 평생 절주를 하며 콩·보리·팥 등이 섞인 잡곡밥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1949년 상공부장관 시절 도시락을 들고 다녔던 윤보선의 일화도 유명하다. 도시락은 부인인 공덕귀 여사가 직접 만든 샌드위치와 잡곡밥 등 검소한 식단이었다고. 이런 소박한 식습관은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계속됐고, 그의 삶을 오랫동안 건강하게 해주었다.
◇ 인(人)형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남다른 인연 덕분에 승승장구하는 일생을 살았다. 그가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6기)에 다니던 시절, 당시 교관으로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수학 실력이 뛰어난 박태준을 눈여겨보게 된다. 성격이나 취향이 비슷했던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벗어나 인간적인 정을 쌓게 됐고, 서로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게 될 때도 만남을 이어간다. 이후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같은 해 박태준은 소장 진급과 함께 군복을 벗었다. 이듬해 설날 박정희는 박태준을 청와대로 불러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관련해 박태준을 대통령 특사로 일본에 보낸다. 특사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박태준은 철강과 제철 분야에 매진했고, 강철 1000만 톤 시대를 연 주역으로 우뚝 선다. 이후 국회의원, 국무총리, 포스코 회장, 포스텍 창립자 등 수많은 직함을 얻었지만, 퇴직금 한 푼, 주식 한 주도 갖지 않았을 정도로 청렴한 철강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 별별유형
1) 독서형: 미국의 대부호 빌 게이츠,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는 젊은 시절 도서관에서 읽은 책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한국의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도 자신의 성공의 8할은 독서에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외에도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박원순 서울시장, 윤송이 엔씨소프트 회장,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 등도 잘 알려진 독서광이다.
2) 명상형: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과 코비 브라이언트 등은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명상의 효과를 언급했다. 포드자동차의 빌 포드 회장도 명상으로 경영위기를 극복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한국 메이저리그의 신화 박찬호 역시 현역 시절 슬럼프가 찾아올 때마다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스렸고 124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3. 산책형: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생각의 발로는 ‘발’에서 나온다”고 강조했다. 셰익스피어, 괴테, 칸트, 베토벤, 모차르트 등은 산책이 영감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2011년 여름 49일간의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당선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등산을 통해 인재를 모으고 집권했는데, 민주산악회가 대표적인 핵심 조직이다. 김 대통령은 매주 목요일 등산을 즐겼고, 산에 올라 기도를 했다고 한다.
✽참고 도서 , , ,
1977년 10월 24일 김포공항. 자유로운 해외여행이 어려웠던 시기.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생이별을 앞둔 인파로 가득했다. 한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형제, 자매와 조카까지 모두 공항에 자리를 잡았다.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고, 힘줘 잡은 두 손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곧 먼 이국의 땅으로 떠날 파독(派獨)광부들을 환송하는 자리. 그 자리에는 만삭의 아내와 두 아이를 끌어안고 이별을 고하는 민석기(閔錫基·66)씨도 있었다. 그리고 39년이 흘러, 그는 이날의 이야기를 자서전에 기록해 세상에 내놓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장소협조 Frenchie B
1960년대 초 대한민국. 당시 경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박정희 군사정권 초반 시행한 경공업 위주의 수출 지향 정책은 되레 실업자 양산과 외화 부족 현상을 증가시켰다.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된 방안 중 하나가 바로 ‘인력 수출’이다.
당시 독일은 ‘라인 강의 기적’이 완성돼가고 있었다.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했고, 일자리는 많았지만 사람이 없었다. 일자리를 고를 수 있는 상황에서 거친 일을 하려는 사람이 부족했다. 당연히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일자리는 외면당했다. 독일 정부 역시 비슷한 선택을 했다. ‘인력 수입’이다.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약 7900여 명의 광부가 독일에서 근무했다. 500명을 모집했던 첫해, 첫 번째 모집에는 4만6000여 명이 몰릴 만큼 좋은 일자리는 절실했다. 민석기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독일에서 찾던 ‘경력 광부’
한때 광부만 2000명이 넘었던 함태광업소. 사촌누나와 매형 덕분에 광부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2년을 일했다. 독일로 갈 사람을 뽑는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도 그때였다.
“독일로 갈 광부를 뽑는다네.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났어.” 동료 광부의 전언이 계기가 됐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민석기씨는 새로운 꿈이 생겼다고 했다. 당시 독일 광부들의 월급은 600마르크(약 160달러) 정도로 한국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제가 독일에 지원했던 시기는 파독광부제도 시행 후반이었어요. 초기에는 해외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 만한 머리 좋은 사람들을 주로 뽑았죠. 처음에는 대학생들이 많이 갔는데, 일을 안 하고 요령 피우는 친구들이 많았나봐요. 그래서 힘쓸 만한 사람들 위주로 뽑았더니 이번엔 폭력사건이 골치를 썩였죠. 그래서 독일 측에서 요구했대요. ‘진짜 광부’를 보내달라고. 이때 탄광일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우대해줬고, 저도 되겠다 싶어 지원하게 됐죠.”
들어 올리지 못했던 가마니
영화 에는 파독광부를 지원했던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가 체력시험을 보는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반드시 합격하겠다는 일념으로 쌀가마니를 힘겹게 머리 위로 들어올리는 장면. 1977년에는 그 체력시험이 서강대학교에서 있었다. 독일인 심사관도 통역을 받으며 지원자들을 지켜봤다. 하지만 현실은 영화와 달랐다. 번쩍 들 필요도 없이 어깨 위에 들쳐 매기만 하면 됐는데 그것조차 되질 않았다. 쌀 대신 모래가 들어 있던 60kg짜리 가마니는 꼼짝도 하질 않았다.
“시원하게 떨어졌죠. 이해할 수 없었어요. 평소 같으면 쉽게 들 수 있었을 텐데 안되더라고요. 요령이 없었나봐요. 그렇게 풀이 죽어 태백으로 돌아갔는데, 후에 연락이 왔어요. 다시 시험을 보라고. 그래서 서울로 향하기 전에 열심히 모래가마니를 들어올리는 연습을 했어요. 그것도 열심히 하니까 요령이 생기더라고요.”
두 번째 도전에서는 필기시험까지 일사천리로 합격했다. 합격하고 나서도 독일로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경비가 30만원이나 됐다.
“당시에 대구에서 집 한 채 사는 데 150만원이었으니 엄청나게 큰돈이었죠. 하지만 돈을 빌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요. 그 시절에는 ‘독일 가는 데 돈 좀 빌려달라’고 하면 잘 모르는 사람도 선뜻 빌려줬어요. 그만큼 파독광부는 선망의 대상이었고 신용도 높았어요. 어떤 기수는 한국에서 한 달짜리 사전교육까지 다 마쳐놓고도 떠날 날짜가 자꾸 미뤄져 빚이 늘어나는 경우도 있었어요. 곧 독일에서 큰돈을 벌 테니까 하는 마음에 빚으로 흥청망청 생활했던 거지요. 다행히 저는 사전교육을 제대로 마칠 수 없을 정도로 출국일이 급하게 잡혀 별일 없이 독일로 향할 수 있었어요.”
3년 후 돌아오겠다는 약속 못 지켜
“3년만 꼭 참아. 3년만 참고 일하면 한국에서 잘살 수 있을 거야.”
출국심사를 하기 전 눈물을 흘리는 아내에게 민석기씨는 이렇게 말했다. 기본 계약이 3년이었으니 그 시간만 채우고 돌아오면 한국에서 무엇을 시작해도 쉽게 할 수 있는 밑천을 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때는 자신의 귀국이 훨씬 늦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도 못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과 곧 대구의 시댁으로 내려가야 하는 아내를 뒤로 한 채 그는 루프트한자 항공기에 올랐다.
“당시엔 비행기 자체가 신기했던 시대였으니까요. 타고 있던 커다란 것이 두둥실 떠오르면서 진짜 떠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젠 내릴 수도 없고, 도망갈 곳도 없다는 현실이 체감됐어요.”
버스는 어둠 속을 5시간을 넘게 달렸고, 잔뜩 겁먹은 얼굴의 한국인 무리가 낯선 향기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차에서 내렸을 때 그들은 딘슬라켄의 땅을 밟고 있었다. 이들이 독일의 광부로서 생활을 시작한 로벡 광산이 있는, 먼 훗날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아리랑파크’가 건립된 장소였다.
“처음엔 말도 못하게 고생했어요. 말이 안 통했으니까요. 이걸 들라는 건지 내리라는 건지 당기라는 건지 밀라는 건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죠. 멍하니 들고 서 있을 때가 태반이었어요. 망치, 톱, 정 같은 공구 이름도 전혀 몰랐고요. 갱도 내에서는 무전으로 지시를 받는 경우가 많아 더 알아듣기 힘들었어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저녁에는 괜한 군기를 잡겠다는 선배들의 괴롭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역시 지옥 같은 갱도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00m쯤 갱도를 내려가면 작은 터미널 같은 것이 나와요. 개미굴같이 여러 소규모 갱도들로 연결되는 철로들이 집결되는 곳이죠. 거기서 열차를 타고 10분 넘게 들어가면 다시 지하로 내려가야 하고, 내려가서 실제 작업하는 곳까지 다시 수백m를 더 들어가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내려가고 들어가기를 여러 번 반복하기도 했고요. 석탄을 찾아 따라다니는 것이죠. 공기가 공급되는 환풍기 근처는 찬바람 때문에 서늘했지만, 바람이 통하지 않는 곳은 지열 때문에 40℃가 넘기 일쑤였죠. 거기서 독일인들의 고함을 들어가며 일했어요.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고.”
그래도 말이 들리고 일이 익숙해지자 독일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변했다. 한국에선 쉬는 날도 없이 작업시간이 길었지만 독일은 달랐다. 주 5일 근무에 공휴일도 꼬박꼬박 쉬었고, 하루에 8시간만 근무하면 그만이었다. 막장에 들어가는 데 1시간, 나오는 데 1시간,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면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5시간에 불과했다.
독일에서 나 홀로 이름 지어본 ‘새마을협동농장’
처음에는 3년만 있자 하고 온 독일이었지만, 첫 휴가는 그보다 훨씬 뒤인 7년 만에 이뤄졌다. 한 달 휴가 동안 도로공사나 다른 일을 하면 큰돈을 쥘 수 있었고, 더 돈을 모아 금의환향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한국에 도착했을 땐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8남매가 모두 모여 민석기씨를 환영했다. 형제 대부분이 직·간접적으로 독일에서 큰돈을 벌고 있는 민석기씨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빨갛고 파란 테두리가 그려진 아빠의 국제우편을 늘 기다리던 막내는, 막상 난생 처음 아빠를 만나자 낯설음에 뒷걸음쳤다가 곧 아빠 품에 안겼다. 그렇게 가족들은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었다.
휴가 때 그의 마음을 흔든 것 중 하나는 ‘새마을운동’이었다.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조국은 많이 변해 있었고, 그 변화의 중심에 새마을운동이 있다고 믿었다.
“당시에 전 기숙사를 나와 인근 마을의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농장에서 지내는 것이 훨씬 편했고, 주말에도 쉬지 않고 일할 수 있었으니까요. 주말에 시간이 남는 한국인 광부들을 유혹하는 것들은 너무나 많았어요. 전 아예 나와 있어서 이런 유혹을 피할 수 있었고 농장일로 가욋돈까지 벌었죠. 그때 농장 주인의 제안으로 빈 땅에 직접 배추와 무, 갓 등을 심으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새마을협동농장이라고 이름을 지었죠.”
후에 그의 이 농장은 현지 신문에 소개되면서 지역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그의 ‘외도(?)’가 회사에까지 알려져 곤란을 겪기도 했다.
외로운 말년의 파독광부 많아
한때 아이들을 독일로 불러 완전한 정착도 꿈꿔봤지만, 아이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자 1989년 민석기씨는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휴일도 없이 일해서 모은 목돈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리라 기대했지만 돌아와서 보니 그것과는 먼 삶이었다. 다른 파독광부들처럼 남의 손에 관리가 부탁된 돈들은 형제들에게 그리고 처가로 스며들었고, 되찾기 어려운 상황이 돼 있었다.
“잘된다는 말만 믿고 형님 건설회사에 계손 돈을 보탰지만, 실제로는 까먹기만 했어요. 또 처가 쪽으로도 돈이 흘러가 수중에 남는 게 없었죠. 결국 가기 싫다는 아이들을 설득해서 독일에서 엄마와 살게 했고, 전 딸아이와 한국에 남았어요. 그 후 식당일부터 안 해본 일이 없었죠. 건강이 나빠졌을 때는 간이식을 받으러 중국까지 갔었어요. 굴곡이 많은 삶이었지만 그래도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고 잘 살아온 것 같아요.”
독일로 가 인생의 대박을 맞이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어려움이 많았던 민석기씨. 그렇다면 다른 광부들의 사정은 어땠을까.
“파독광부들이 잘산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아요. 독일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300명 정도의 사람들은 돌아오고 싶어도 못 돌아오는 상황인 거죠. 한국에 돌아온 사람들 중 주변 사람들에게 속아 빈털터리가 된 경우도 적지 않아요. 심지어 재산권 때문에 ‘오지 말라’고 하는 친척들도 있죠.”
마침 그를 만난 12월 9일은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발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날이었다. 민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가결 소식이 들려왔는데 그 소식을 듣는 그의 표정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읽혔다. 현 대통령의 아버지에 의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고, 또 평생을 지지했는데, 이제는 상당수 국민이 그의 딸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로서는 명쾌하게 답을 낼 수 없는 상황일 것이다.
“그래도 독일에 다녀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광부들이 한국인의 성실함을 몸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경제성장의 동력이 된 차관도 독일로부터 빌려올 수 있었죠. 또 조국과 민족, 가족을 위한다는 마음이 있어 막장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일할 수 있었고요.”
민씨의 이야기는 가족과 부모 이야기를 자서전으로 엮는 회사 ‘뭉클스토리’의 기획 행사에 선정돼 함께 독일에 다녀온 간호사 노금희, 황보수자씨의 이야기와 함께 책으로 만들어져 지난 10월 정식 출간됐다.
인터뷰 내내 함익병(咸翼炳·57)은 시원시원하고 거침이 없었다. 성공한 피부과 의사이자 방송인으로서 활발히 활동했던 모습보다는 최근 TV조선의 시사 프로그램 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사 닥터(?)로서의 모습이 더 강하게 드러났다. 인터뷰에서 그는 대통령 탄핵까지 가게 된 현재의 혼란스러운 정국에 대해 이 나라의 한 국민으로서의 분노를 여과 없이 쏟아냈다. 바로 19대 대통령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것. 그렇다, 그는 현실 정치의 참여를 선언한 것이다. 자신을 진보와 보수의 틀을 넘어선 합리주의자라고 강조하는 함익병의 문제적 발언들을 들어보자.
“낙태는 여성에게 선택권이 있는 게 당연합니다. 임신, 출산, 육아까지 모든 부담을 여성이 져야 하니까요.”
어느 급진적인 진보 성향을 가진 사람의 말일까? 아니다. 과거에 과의 인터뷰에서 “아직 군대를 마치지 않았던 아들에게 국민의 4대 의무를 모두 마치지 않았으니 내가 지지하는 보수 진영 후보자를 지지하도록 압박했다”, “국민이 행복하고 잘살 수 있으면 무능한 민주정보다 좋은 왕정이 낫다”는 말을 해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타칭’ ‘합리적 보수주의자’ 함익병의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인간에게는 여러 모순적인 면들이 많은데 그걸 진보, 보수라는 이분법적인 언어로 규정하고 재단하려드는 건 잘못된 거라고 봐요. 그래서 그런 용어 자체를 아주 싫어합니다.”
진보, 보수라는 틀 속에 갇히기 싫다
그는 자신이 어떤 면은 진보적이지만 어떤 부분은 굉장히 보수적이라고 말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페미니즘 논란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도 그렇다.
“제가 결혼하고 아내와 함께 처음 한 일이 재산 분할에 관한 약속이었어요. 아내 50%, 나 50%로 이혼할 때 재산 분할로 싸울 일 없도록 미리 합의를 해뒀죠. 그걸 30년 전에 했습니다. 아들 딸 두 자녀를 키우고 있는데 딸도 아들과 똑같이 키웠고, 만약 재산이 남아서 물려준다면 똑같이 물려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여자가 아침밥 해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구닥다리이기도 해요. 이런 나는 페미니스트인가요? 아닌가요?”
그의 주장은 간단하다.
“언어적 규정은 사람을 오해하게 만든다.”
재벌 중심 경제는 1960년대 경제 프레임, 새 판을 짜야 한다
그는 경제관을 얘기하면서 현재의 재벌 중심 경제 구조를 강하게 비판했다. 기본적으로는 자유경제를 선호하지만 현재 우리나라 재벌 구조가 과연 공정하냐는 반문이다.
“1961년에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고 대일청구권 자금이 들어왔을 때, 그 돈을 n분의 1로 나누자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랬으면 아마 다 같이 가난해졌을 겁니다. 그 돈으로 포항제철을 만들었기에 오늘의 한국의 기간산업들이 일어설 수 있었다고 봐요. 당시 한정된 자본을 소수의 경영자들에게 집중 지원하여 우리 산업의 발판을 만들었고 그 과정 중에 재벌이 생긴 거죠. 그걸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때 이병철 회장에게 지원한 자금을 자신이 받았을 때, 자신이 오늘날의 삼성 그룹과 같은 기업을 만들 역량이 있었는가를 생각해봐야 해요.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은 사업이 보국이었어요. 그래서 재벌 1세대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재벌 3세의 경영 승계가 과연 옳은 일일까요? 지금과 같은 방식의 편법적인 경영 승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의 배경에는 재벌들의 편법적인 경영 승계를 위한 불법적인 로비가 개입됐을 수도 있어요. 이런 편법과 불법을 바로잡자는 것을 두고 진보라느니 계획경제라느니 얘기하면 안 됩니다. 보수는 수선해서 쓰니까 보수예요. 그때그때 흐름에 맞춰 고쳐 쓰는 게 보수입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어떤가요? 60년대 경제 프레임에 계속 갇혀 있으면서 그걸 지키는 게 보수이고 애국이라고 하죠. 그건 낡은 수구적 생각이에요.”
이치를 따지려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사실상 이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기도 했다.
“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합리적 사고를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것은 진보, 보수를 정치적으로 팔아먹는 것입니다. 그걸 팔아서 정치적 이익을 얻는 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우리나라가 더 발전하려면 이런 사람들이 사라지고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최순실 사태는 내란죄로 다스려야 한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얘기가 자연스럽게 최순실 사태로 옮겨갔다. 할 말이 많은 듯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최순실 사태에서 진보, 보수가 어딨습니까? 합리적인 잣대를 들이대면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맞아요. 최순실의 존재가 드러났을 때 저는 ‘아, 이건 내란죄를 물어도 되겠구나’ 했어요. 최순실은 내란죄로 바로 기소가 가능하다고 판단했어요.”
피부과 의사가 법을 논하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근거도 없이 그렇게 말할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나라 형법 제87조를 보면 내란죄의 기준이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라고 되어 있어요. 간단해요. 최순실 사태는 국토 참절은 아니죠. 국헌 문란에 해당되죠. 내란죄는 목적범입니다. 그런데 최순실의 경우 국헌 문란의 목적을 확정하지 못해서 내란죄 기소가 불가능하다는데, 국헌 문란의 목적성을 적용할 수 있는 판례가 있어요. 바로 10·26사태입니다. 김재규가 내란목적 살인죄로 처형됐어요. 그냥 살인죄만 적용해도 사형시키는 데 문제가 없었는데 대법원에서 살인죄가 아닌 내란목적 살인죄로 판결했어요. 6명의 대법관은 소수 의견으로 살인죄라고 했지만. 김재규의 살인 행위가 내란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자연인 박정희가 아니라 대통령 박정희를 죽였기 때문에 내란적 상황이 발생하여 ‘결과적 내란목적’이 성립된다는 거였습니다.”
함익병이 최순실 사태가 내란죄에 해당한다고 계속 주장하는 이유는 이번 국정농단이 대통령 개입 없이는 벌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다.
“형법 제91조 1호에는 국헌 문란을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이라고 되어 있어요. 지금 상황에 딱 맞잖아요. 그리고 다시 제87조로 돌아가면,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라고 되어 있는데, 폭동에 대해 찾아보면 ‘다수가 폭력적 행위나 ‘협박’을 통해 한 지방의 안녕과 질서를 파괴하면 폭동’이라고 해요. 최순실은 폭력을 동원하지는 않았지만 협박을 했잖아요. 여기서 말하는 협박이라 함은 일상적인 협박이 아니라 상대방이 협박이라 받아들이면 협박이 성립되는 광의의 협박입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내란죄 처벌 때도 계엄령 전국 확대를 통한 협박을 내란목적 협박으로 적용해 내란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는 최순실 사태가 터졌을 때 처음부터 내란죄로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변호사들에게 물으니 “검사가 당신처럼 치고 나오면 기소는 가능하고 판사 앞에서 다툴 여지는 충분히 있다”는 의견을 줬다고 한다. 그는 지금 국민이 원하는 것은 내란죄 처벌 정도의 수위라고 강조해서 말했다.
현실적인 어젠다를 제시하겠다
이제 대통령에 대한 얘기다. 그는 19대 대통령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시원하게 밝혔다.
“이번 대선에 어떤 형태로든 적극적으로 참여할 생각입니다. 지지하는 사람의 당선도 중요하지만 일반 국민들이 바라는 바를 정치인의 시각이 아닌 평범한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 선거 공약에 반영하려는 목적이에요. 물론 직접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면 제가 생각하는 의제들을 알릴 수는 있겠지만, 실현 가능성이 너무 낮겠죠(웃음)?”
그는 정당들에게서 따로 정치 입문 제안을 받은 적은 없다고 말했다.
“이런 부담스러운 얘기를 하는데 캠프에 참여하라고 하겠어요(웃음)? 저 같은 사람은 정당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 거예요. 제가 정치적 겸손을 싫어하거든요. 물론 정치적 위선은 필요하겠죠. 그런데 위선적이고 싶지도 않아요.”
위선적이지 않아서 그런지 그는 “키 커~ 잘생겼어~ 똑똑해~”라며 자기 자랑을 거침없이 해댄다. 이런 마초성이라면 귀엽고 매력 있지 않은가.
“우리는 선거할 때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으로 투표를 해요. 그건 지도자를 뽑을 때 할 행동은 아니죠. 박근혜 대통령도 불쌍해서 뽑았잖아요? 그 아버지, 그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실 분이 아닌데 싶어서 빚진 감정도 있었고.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게 바라봐야 해요. 정말 잘난 사람이라고 흔쾌히 인정해줄 만한 지도자를 본 적이 없어 저는 항상 현실이 불편했죠.”
그는 “이런 네가지(?) 없는 말을 하니 누가 저를 뽑아줄까요?” 하며 웃었다. 하긴 자리 욕심이 없으니 정치적 의사 표현에 큰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는 뇌에 종양이 생긴 상태, 당장 수술이 필요
“어렸을 적부터 대통령이 꿈이었어요. 공부는 잘했지만 영재는 아녔어요. 머리보다는 손과 엉덩이로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었지.”
대통령이 꿈이었다고 하지만 어쩌면 그 꿈이라는 것이 그 세대의 남자 아이라면 누구나 꿈꾸어봤을, 장군· 과학자· 대통령 같은 그런 희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선택은 문과가 아닌 이과였다.
“아버지 세대는 정치를 목숨 걸고 하는 일이라 생각했어요. 데모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죠, 사실 그 시대는 그랬으니까. 장남이라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진학해야 했죠. 그래서 의사가 됐어요. 그런데 살아보니 의사라는 직업이 여유롭고 좋더라고요.”
그러나 그는 이제 정치에 참여하려고 한다.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번 최순실 사태를 겪기 전에는 정치에 참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아니에요. 정치에 직접 참여해야겠어요. 내가 하는 일 열심히 하고 정치는 정치하는 사람이 열심히 하면 잘될 거라 믿었는데 정말 해괴망측한 일들이 벌어졌잖아요. 그렇다고 꼭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대통령과 같은 무엇이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당에 들어가 지속적으로 정책을 챙기고 권력의 올바른 행사를 감시하는 건전한 시민의 목소리라도 내야겠어요. 이번과 같은 일이 다음에는 안 벌어질까요? 끊임없이 감시하고 목소리를 내야만 정치 환경이 달라질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를 인체에 비유하면 뇌에 종양이 생긴 거예요. 서둘러 수술을 해야 합니다. 그 수술 팀에서 일조하고 싶어요.”
우리나라가 지킬 것이 많은 나라라고 생각한다는 그는 지켜야 할 보수의 가치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의 보수는 너무 많은 흠이 생겼다. 그렇다고 보수의 가치를 버릴 수는 없다. 그 지점에서 그는 자신이 할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문제에는 국가가 개입하지 말아야
그는 인생에서 지키고자 하는 특별한 철학은 없지만 마땅히 실천해야 할 생활 철학은 많다고 했다.
“우선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 하루에 한두 시간은 꼭 운동하고 세끼 밥 챙겨 먹고 7~8시간 자요. 그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하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걸 지키는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어요. 건강을 위해 기본적인 것도 안 지키면서 뭘 먹으면 건강할까 묻는 그런 모순된 사람들을 많이 보죠.”
그는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는가에 별로 관심이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을 많이 써요. 왜 그런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하죠? 나도 나를 잘 모를 때가 많은데 남이 나를 어떻게 보나 그런 것까지 생각해야 해요?”
그는 예전에 네이버 검색어 1위에 올랐던 적이 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문제의 인터뷰 건으로 촉발된 논란 때문이었다.
“도덕적이며 능력 있는 사람이 지도자면 왕정이어도 좋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어요.” 그런데 아들과 대화하면서 그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뛰어난 군주가 세습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역사에 없어요. 지속 가능성이란 관점에서 보면 조금씩 뒤뚱거려도 민주정이 왕정과는 비교할 수 없이 우수해요”라는 아들의 반론에 공감한 것이다. “군대도 그래요. 군대 안 나온 사람은 공직에 있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신체 건강한 사람이 ‘나이 초과’나 ‘만성 두드러기’ 등으로 병역을 면제받고 공직에 나서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죠. 정부에서 출산을 장려하는 것도 웃겨요. 그건 우수하고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재벌들 논리지 개인의 행복과는 아무 상관없는 논리예요. 직장 수보다 구직 인구가 더 많아서 취업도 안 되는데 인구가 왜 늘어나야 하죠? 젊은이들의 삶이 행복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아기는 말하지 않아도 갖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그런 개인적인 문제까지 국가가 개입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나는 합리주의자, 멘탈이 센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인터뷰로 논란이 있었을 때도 마음고생을 전혀 안 했다고 말했다. 멘탈이 센 걸까?
“멘탈이 센 게 아니라 그런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이에요.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거죠. 내 인터뷰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당연히 있을 수 있어요. 그리고 그건 그 사람 의견일 뿐이에요. 멘탈이 센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이죠. 결국 탄핵까지 갈 이런 상황은 못 견뎌하는 게 정상이에요. 그 정도의 멘탈이 되려면 합리성이 결여돼야 해요.”
합리적 엘리트주의를 지지하고 여성의 성 역할론을 당연시한다는 점에서 그는 보수주의와 통하는 게 있다. 그러나 동성애, 페미니즘, 심지어 마약 문제까지 관용적으로 바라보는 그의 태도는 한국의 전통적 보수주의와 갈릴 수밖에 없다.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지만 그 때문에 한국 정치 현실에서는 경계인이 될 수밖에 없는 함익병은 과연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현실 정치에 반영할 수 있을까? 성역을 인정하지 않는 그의 기질이 만들 작은 도전이 우리 정치 현실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흥미롭게 지켜보게 될 것 같다.
글 박정희 혜담(慧潭) 인상코칭 연구원장 ilise08@naver.com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사회활동을 하는 시기도 길어졌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기간도 길어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엘리베이터 거울에서 문득 마주하게 된 자신의 얼굴이 낯설 때가 있다.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서글퍼지는 것은 모두가 공감하는 부분이다.
장자(莊子)의 에 ‘오상아(吾喪我)’라는 말이 나온다. 나를 잊은 나, 내가 나를 잊어야 진정한 내가 된다는 의미다. 현실은 어땠는가. 나를 잊을 정도로 바쁘게 살아오면서 진정한 내가 되었는가? 아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철학적 사유를 하면서 그동안 삶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한번 돌아보고 싶은 마음은 나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또 거울 속의 너무 늙어버린 얼굴이 서글픈 탓만도 아닐 것이다. 행복한 시간을 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면 더 늦기 전에 내 삶의 여정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지금의 나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얼굴을 마주하자. 그리고 내가 좋아하고 즐거운 일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자. 그러기 위해서는 본연의 나[吾]인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내[吾] 안에서 활동하고 공감하는 나[我]를 찾아야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부터 자아를 찾아가는 방법을 살펴보자.
먼저 상대방에게 확고한 인상을 심어주자. 미국 남자들 대부분은 골드토(Gold Toes) 양말을 한 켤레씩은 갖고 있다고 한다. 골드토 양말은 발가락 끝부분에 금색 장식이 되어 있으며 남성용 양말 중 최고 인기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 양말은 단지 품질이 좋고 견고하며 오래 신어도 탄력이 있는 양말이 아니다. “당신의 발을 빛나게 하라”를 외치며 양말에 금색 실을 사용해 수를 놓음으로써 황금색이 주는 고급스러움과 화려함을 차별화 전략으로 내세워 소비자를 단박에 사로잡은 양말이다. 골드토가 금색의 수를 놓아 다른 양말들과 차별화를 시도한 것은 제품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 그리고 경쟁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겠다는 생존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를 어필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누군가와 처음 만날 때 가장 강하게 어필이 되는 신체 부위는 얼굴이다.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은 자신의 얼굴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라는 말이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흐뭇하고 행복한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도록 스스로를 가꾸라는 주문이다. 내 모습이 만족스러워야 어느 곳에서든 자신 있게 나설 수 있다. 거울 속에서 나를 만날 때마다 이렇게 이야기해보자 “너는 왜 그렇게 멋있니?”, “당당해서 보기 좋아!” 이러한 칭찬이 자신감을 만들어주는 데 큰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그다음으로는 관심의 대상이 되도록 노력하자. 거리를 나가 보면 유행하는 옷을 똑같이 걸쳐 입은 비슷비슷한 분위기의 사람들이 너무 많다. 대체적으로 개성과 색깔이 안 느껴지는 모습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반화된 유행에서 탈출해야 한다. 아침이 되면 매일 뜨는 태양, 그러나 사람들은 정작 태양에는 관심이 없다. 너무 익숙하고 친숙한 일상의 한 부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기 색깔이 없는 얼굴은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나이 들어가는 주름진 얼굴이니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변화를 줘야 한다.
개성과 색깔은 젊고 예쁜 얼굴을 말하는 게 아니다. 개성 있는 얼굴을 만들어주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얼굴 분위기도 함께 바뀌어간다. 그래서 마음이 가는 방향은 매우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되고 관심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을 바꾸는 일에는 게으르다. 욕구만 있고 마음이 일어서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바뀌는 건 절대로 없다. 어떻게든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왜? 왜 그래야 하지?”라는 질문에 분명한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막연하고 자신감이 없는 답변은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나를 바꾸고 싶다면 왜 바꾸고 싶은지 정확한 이유부터 찾아보자.
이유가 찾아진 뒤에는 실천을 해야 한다. 자신의 매력 포인트를 찾아보자. 남보다 잘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어필하면 된다. 자신의 강점을 부각하다 보면 어느 새 차별화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저 친구 말을 들으면 늘 좋은 일들이 생겨.”, “저 사람은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 이런 소리를 듣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차별화된 나를 만들었다면 내 매력이 상대방에게도 유익한지 생각해봐야 한다. 갈고 닦아 만든 개성이 상대방에게 거부감과 불쾌함을 안겨주면 개성 없는 사람보다 못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칭찬을 잘해주고 좋은 말도 많이 해주는데 이상하게 만날 때마다 기분이 안 좋은 사람이 있다. 억지로 하는 칭찬과 아부는 얼굴에 다 드러난다.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진심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눈빛이 흔들리지 않고 부드럽다. 저절로 미소가 가득한 얼굴이 된다. 이런 모습을 봐야 상대방이 진심을 느끼고 즐겁고 행복한 기분이 되는 것이다.
인간관계에서는 얼굴 생김새가 중요한 게 아니라 표정이 중요하다. 표정이야말로 인간의 감정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과묵하고 어두운 표정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의견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많이 웃고 상대에게 긍정 에너지가 전달될 수 있도록 밝은 표정을 지어야 한다. 이런 태도가 습관화되고 일상화되면 어디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사람이 될 것이다. 외모와 인상은 스스로 노력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평소에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특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따뜻한 미소와 부드러운 표정을 잃지 말자. 무엇보다 큰 경쟁력이 될 수 있다.
신명철 스포티비뉴스 편집국장 전 스포츠서울 편집국장
서울 강남의 한 복싱 체육관이 건장한 중년 신사의 감격적인 포옹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복싱 올드 팬들이 추억의 일기장에서 꺼내들 만한, 그러나 얼굴은 많이 변한 두 복서가 또다시 만남의 기쁨을 함께했다. 주인공은 ‘4전 5기’ 신화 홍수환(66) 한국권투위원회 회장과 엑토르 카라스키야(56) 파나마 국회의원이다. 딱 10세 차이인 두 사람은 39년 전 링에서 맺은 인연을 여전히 이어오고 있다.
한국인 첫 프로 복싱 세계 챔피언의 영광은 김기수가 차지했지만 그의 경기 장면을 TV로 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당시 대부분의 스포츠 팬들은 김기수가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감는 장면을 ‘대한뉴스’ 화면으로만 봐야 했다. 1960년대에는 TV 보급률이 매우 낮았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흑백 TV 시절, 최고의 프로 복싱 스타는 단연 홍수환이다. 그의 복싱은 한마디로 스마트하면서 호쾌했다. 복싱 팬을 끌어들이는 마력도 있었다.
먼저 홍수환과 카라스키야의 인연부터 살펴보자. 두 사람은 1977년 11월 27일 WBA(세계복싱협회) 슈퍼 밴텀급 초대 챔피언 결정전에서 맞붙었다. 경기 장소가 파나마여서 홍수환으로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경기였다. 당시 홍수환은 27세의 베테랑 복서였고 카라스키야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11전 11KO승을 자랑하는 샛별 복서였다. 별명이 ‘지옥에서 온 악마’였으니 파나마 복싱 팬들이 그에게 건 기대는 미뤄 짐작할 만하다.
홍수환은 2라운드에서 네 번이나 다운되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섰고 마침내 3라운드에서 카라스키야를 KO로 눕히고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마침 이 무렵에는 1라운드 3회 다운이면 자동 KO가 되는 규칙이 아니고, 무제한 다운제가 시행되었다. ‘4전 5기’의 신화가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후 카라스키야는 1978년 황복수와의 경기를 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뒤 38년 만에 다시 한국을 찾았다. 당시에는 현역 복서였지만 이번에는 국회의원으로 한국에 왔다. 파나마 국회의 교통·통신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초청으로 방한했다. 그 사이 두 사람은 1999년 한 방송사의 프로그램 출연을 계기로 파나마에서 만났고 17년 만에 한국에서 재회했다.
“어머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일화와 관련된 내용도 재미있다.
홍수환은 1950년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스포츠인으로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서울 토박이다. 어렸을 때부터 골목대장 노릇을 도맡아 했지만 주먹이 세서 그랬던 건 아니다. 복싱에는 큰 관심도 없었다. 복싱은 아버지가 좋아했는데 홍수환이 중학교 2학년 때 갑자기 타계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복싱경기장을 다녔던 홍수환은 그때부터 복싱 경기 포스터만 봐도 아버지 생각이 났다고 한다. 특별한 홍보 수단이 없던 시절, 서울 시내 동네 담벼락에는 영화, 프로 레슬링, 프로 복싱 광고 포스터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어머니의 반대가 있었지만 홍수환은 어렵게 글러브를 끼게 된다. 그러나 아마추어 대회에서도 이렇다 할 성적을 올리지 못한 그는 곧바로 프로로 전향했고 이 결정은 그의 복싱 인생에서 ‘신의 한 수’가 됐다. 그리고 홍수환이라는 이름 석 자를 복싱 팬은 물론 거의 모든 국민이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74년 7월 3일, 당시에는 멀고 먼 나라였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라디오로 중계방송된 홍수환의 승전보는 많은 복싱 팬의 귀를 의심하게 했다. 홍수환이 그곳에서 타이틀매치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골수 복싱 팬을 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홍수환은 그날 더반에서 열린 WBA 밴텀급 타이틀매치에서 챔피언 아놀드 테일러를 전원 일치 판정으로 누르고 한국인 복서로는 김기수에 이어 두 번째로 프로 복싱 챔피언이 됐다.
프로 복싱에서 원정 온 도전자가 판정승을 한다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홍수환은 그럴 만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경기 초반 아놀드 테일러를 3차례나 링에 쓰러뜨렸고 14회에서 승리에 쐐기를 박는 네 번째 다운을 빼앗았다. 세계 프로 복싱 관계자들은 아놀드 테일러가 마치 다른 복서처럼 경기를 했다고 평가했다. 거꾸로 보면 그만큼 홍수환이 뛰어난 복싱을 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당시 홍수환은 현역 사병이었다. 그 무렵 서울 주변의 주요 부대에는 프로 복서 몇 명이 군 복무를 하면서 기량을 연마하고 있었다. 특별한 신분이 아니면 여권은 꿈도 못 꿨고 여권을 받아도 단수였던 시절 현역 군인이 외국에 가서 타이틀매치를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기수의 타이틀매치가 열린 장충체육관으로 직접 갔을 정도로 복싱을 좋아했다. 챔피언에게 줄 개런티(달러) 문제까지 해결한 박정희 대통령은 그 시절 프로 복서들에게는 최고의 후원자였다.
1974년 청년 홍수환이 ‘약속의 땅’인 더반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서울 김포국제공항을 출발해 도쿄, 홍콩, 스리랑카, 요하네스버그 등을 거치는 험난한 여정이었다. 비행기를 여섯 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그러나 홍수환은 이기겠다는 일념뿐이었고 결국 승리했다.
어떻게 경기를 치렀는지 제대로 되돌아볼 겨를도 없이 중계팀이 홍수환의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방송국 스튜디오에 나와 있던 어머니가 “수환아!”라고 부르는 소리가 이어폰 너머로 들려왔다. 이때 홍수환의 한마디가 오랜 기간 회자됐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그런데 홍수환 말보다 더 유명해진 말이 있다. “그래 수환아, 대한 국민 만세다!” 홍수환의 어머니는 ‘대한민국’이 아닌 ‘대한 국민’이라고 외쳤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