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 번개가 몰아치며 비가 몹시 오는 날. 빈민가 골목길에 커다란 쇠망치를 든 사내가 나타났다. 천둥이 칠 때마다 사내는 쇠망치를 내려친다. 위층에는 이를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다. 스릴러를 연상케 하는 이 장면이 지나자 빈민가 골목길 상가에 깡패들이 나타나 행패를 부린다. 상가를 사들인 재건축 업자들이 보낸 조폭들이다. 임차인들이 나가 주어야 손쉽게 재건축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연히 주인공과 상가 임차인 그리고 주민들이 재건축사업자와 한 팀인 조폭을 상대로 한판 승부를 벌일 것이다. 그러나 예단은 금물이다. 영화를 보는 누구의 예상도 여지없이 빗나간다.
영화 에서 나옥분 역의 나문희는 빈민상가의 임차인으로 수선집 사장이다. 그녀는 영어를 배우는 것이 꿈이다. 그녀는 왜 그토록 영어를 배워야 했을까. 재건축사업구역 내 수선집 사장에게 영어는 무슨 의미일까. 김현석 감독은 베이비부머들의 끊임없는 학구열을 보여주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오래 전에 미국으로 입양을 가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남동생과 통화를 하기 위해 영어를 배워야 했을까. 옥분(나문희)의 친구인 정임(손숙)은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 왜 그녀들은 그 나이에 영어에 집착을 하는 것일까. 영화의 전반부는 이렇게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게 하고 감독은 관객을 아무도 예상치 못하는 곳으로 몰아가는 데 성공한다.
부모와 자식도 없고 형제라고는 오래 전에 미국으로 입양 간 남동생밖에 없는 옥분(나문희)과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셔서 동생과 단둘이 사는 민재(이제훈)의 만남은 우연이다. 그들은 민원인과 공무원으로 우연히 만났지만 두 가지 매개로 인해 급속히 가까워진다. 하나는 민제의 유창한 영어실력이고 또 하나는 둘의 외로움이다. 옥분은 민제로부터 영어를 배워야 했고 민제는 동생과 함께 옥분에게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느낀다. 스릴러인가 하면 조폭영화로 바뀌어 있고, 조폭영화인가 하면 어느새 사회 고발 영화로 바뀌어 있다. 곳곳의 장면에서 웃음을 자아내게 하여 코미디 장르인가 라고 생각하면 다시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대목이 나타난다. 약간 무리한 설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옥분과 민제 그리고 주민의 갈등을 통해 감독은 관객을 영화에 몰입하게 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다. 관객은 감독의 의도 안에 갇혀 있다. 반전은 영화 중반 옥분(나문희)의 친구 정임(손숙)이 치매로 요양원에 입원하면서 나타난다. 반전은 그들이 그토록 영어를 배워야 했던 이유 그 자체였다. 가히 충격이다.
탄탄한 연기력이 돋보이는 나문희를 보며 얼마 전 상영했던 영화 가 생각났다. 작은 아이디어 하나로 대박을 터뜨렸던 영화. 얼마든지 가벼운 발상으로도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준 건 나문희의 탄탄한 연기력 때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내내 작은 가슴으로 영화를 보다 커다란 반전을 마주하니 더 큰 충격과 울분 그리고 눈물이 솟는다. 옥분의 쭈글쭈글한 배에 선명히 남아 펄럭이는 욱일승천기는 잠시였지만 실로 오랫동안 관객을 공감하게 했다. 진정한 사과 없는 일제의 값싼 대가와 지원금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라가 약해서 일어난 일이니 국가가 나서 책임져야 한다. 정부는 빨리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돈 몇 푼 받아 지원이랍시고 생존 할머니들에게 나누어 주려는 알량한 생각일랑 버려야 한다. 한일위안부 협상 처음부터 다시 하라. We must speak.
거친 역사와 함께 살아온 작가 채만식의 후기작 이 무대에 오른다. 남편을 잃고 아들의 생사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최씨’. 그를 연기한 배우 강애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작품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연출을 맡은 최용훈씨와는 오래된 친구이자 신뢰하는 동료인데 같이 하자고 해서 무조건 승낙했어요. 사실 작품도 안 보고 결정했죠. 너무 솔직했나요?(하하). 이후에 작품을 읽어보니 1930년대 작품 같지 않게 깔끔하더라고요. 다만 무대 위에서 구현할 때 단순한 구조로 나오면 어쩌나 걱정이었죠. 다행히 수준 높은 감각과 내공 있는 연출이 더해져 입체적인 작품으로 탄생했어요. 깊이 있는 작품이 될 것 같아 즐겁게 작업하는 중이에요.
‘최씨’는 어떤 인물인가요?
1930년대의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70세 할머니예요. 동학농민운동을 하던 남편을 총칼에 잃고 하나뿐인 아들은 독립운동을 하다 피신해 생사도 모르고 살아가죠. 그 와중에도 굳건히 손자들을 키우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대지와 같은 여인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70세의 연륜, 그 시대의 말투를 자연스럽게 녹여내며 관객과 공감할 수 있도록 ‘최씨’라는 인물에 신경 썼어요.
‘최씨’의 말 중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나요?
남편이 동학농민운동을 하느라 재산을 반이나 날렸는데도 “뭐, 그까짓 재산이야 있으나 마나 하지만…”이라고 말하는 부분과 아들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나머지 재산을 탕진한 와중에도 “다 제가 객지에서 요긴하게 쓰느라 팔아 없앤 것이니까 원통할 것은 없지만…”이라고 말하는 부분이에요. 물질 만능 시대를 살면서 돈에 연연해하지 않고 호탕하게 “그까짓 돈…”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멋집니다.
함께한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요?
무대 위에서의 작업은 팀과의 호흡이 매우 중요하죠. 관계 속에서 찾아지는 수많은 디테일과 풍부한 감정들, 그리고 배려를 느끼고 알게 하는 게 무대 위의 삶이니까요. 극의 구조상 감정을 나누는 배우는 두 명뿐이어서 호흡도 잘 맞고 별 어려움 없이 즐겁게 연습했어요. 저뿐만 아니라 최선을 다하고 있는 나머지 배우들도 서로 즐겁게 조언해가며 호흡을 맞추고 있어요.
어떤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연극인가요?
연령층과 상관없이 이 땅에 사는 모두에게 권하고 싶어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게 하고, 중년층과 노년층에게는 슬픈 역사 속 희생양이 되어서도 자식들을 위해 꿋꿋하게 살아가신 부모님 생각을 불러일으킬 거예요. 더불어 근대문학의 말맛도 맛깔스럽게 녹아 있어 수준 높은 문학을 접하는 기회가 될 거라 생각해요.
장소 백성희장민호 극장
일정 10월 12일~11월 5일
연출 최용훈
출연 강애심, 김용선, 박윤희, 최광일, 백익남, 김정환 등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이라고 알고 있는 수의(壽衣)는 우리 전통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단어다. 엄밀히 따지면 장례 과정에서 염과 습을 할 때 입히는 옷이라고 해서 습의(襲衣)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수의라는 단어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의례준칙을 통해 임의로 뜯어고친 예법을 우리 민족에게 강요하는 과정에서 변질된 단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변질된 것은 또 있다. 바로 삼베수의의 등장이다. 현재 우리 장례문화에서 삼베수의는 표준이 된 상태. 일부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삼베수의는 가격이 1000만원을 넘기도 한다. 대통령 중 가장 최근에 사망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도 황금색 삼베수의를 입고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그런데 왜 삼베수의가 문제라는 걸까?
최근 한 편의 논문이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최연우 교수의 ‘현행 삼베수의의 등장배경 및 확산과정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일제가 죄수복을 상징하는 삼베로 짠 수의를 어떻게 우리나라에 확산시켰는지 확인하도록 해주는 연구였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연구 과정에서 한 권의 책 에 주목했다.
“삼베수의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25년 발간된 이 책을 통해서예요. 김숙당이 쓴 최초의 전문 재봉 서적인데 그동안 김숙당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러다 조사를 통해 식민통치 기관이었던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했던 사실을 확인했죠.”
김숙당은 당시 우리의 전통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삼베수의를 이 책을 통해 강조한다. 최 교수는 일제가 우리 민족의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철저한 사전 준비를 했고, 삼베수의가 등장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 아니겠냐고 추측한다.
“결국 그 후 의례준칙을 통해 삼베수의는 명문화돼요. 기록을 살펴보면 1934년에 의례준칙이 제정됐고, 삼베와 무명을 수의로 사용한다고 규정했죠. 일제는 이렇게 규칙을 정해놓는 것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의례준칙시행서를 통해 지방별로 이 규칙을 실행하도록 강제했어요. 각종 단체와 기관도 동원됐습니다. 당시 이렇게 절약된 비단이 일본 신사에 바쳐졌다는 기록도 있어요.”
일제가 준 영향은 우리의 장례문화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영좌(靈座) 주변이 국화로 장식되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국화는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꽃이다. 우리 조상들은 장례에서 생화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다. 대신 종이꽃을 사용했다.
유가족이 팔 완장과 가슴에 리본을 착용하는 것도 일제의 잔재 중 하나다. 학계에선 일제가 군중이 모이고 군중의 활동이 만세운동으로 변질되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 장례를 가족 중심으로 간소화하고 구분을 위해 가족에게 완장을 차게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최 교수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피해를 입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장례에서도 고인이 마지막으로 삼베수의를 입고, 국화꽃으로 조문을 받는 것이 답답했고, 완장과 리본을 찬 상주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삼베는 죄인을 위한 옷감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수의로 어떤 옷을 입었을까. 을지대학교 장례지도학과 이철영 교수는 가장 좋은 옷을 생각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삼베수의가 잘못 전해지고 있는 전통이라는 것이 학계에선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일반적으로 평상복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수의로 지어 입었습니다. 당연히 비단과 같은 재료가 많이 쓰였고요. 평소에 옷감으로 사용되지도 않는 삼베를 수의로 입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죠.”
실제로 조선시대 때 삼베로 만든 옷은 범죄자들이 입는 죄수복으로 쓰였다. 조상들이 삼베옷을 ‘상복’으로 사용한 것은 상주나 가족은 ‘부모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인이자 불효자’라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자식된 도리로 스스로 고행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의미의 상복을 우리는 고인에게 입히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베수의 관습이 지속된 것은 일제의 의례준칙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가정의례준칙 때문이라는 의견도 많다. 1969년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는데 ‘식물성 의복 또는 수의를 갈아입히고 입관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삼베수의가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삼베수의가 정착된 배경 중 하나로는 삼베가 대마라는 특수한 작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대마는 환각제인 대마초의 재료가 되는 식물이기에 1977년 국가에서는 대마관리법을 제정하고 대마 재배를 허가제로 변경한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는 늘어나는 삼베수의의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제한되는 결과를 낳았고, 이를 좌지우지하는 유통상들에게는 커다란 이권이 됐다.
영원히 입는 옷, 수의
그렇다면 수의는 조상들에게는 어떤 옷이었을까. 최연우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보통 수의를 인생에서 마지막에 입는 옷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영원히 입는 옷이라는 개념도 가지고 있었죠. 육체가 있는 상태에서 마지막까지 입고 있다가 제사나 차례와 같은 강신(降神) 과정에서 입고 나타나는 옷도 마지막에 입었던 수의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당시 예서를 살펴보면 환갑이나 진갑이 되면 수의를 미리 준비하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어요.”
가장 좋은 옷을 입기 위해 관리는 관복을, 유학자들은 하얀 심의를 입었다. 여성은 혼례복으로 입던 원삼을 입기도 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한 종가집 종부는 혼례식에 입었던 옷을 수의로 다시 준비하면서 “땅으로 시집간다”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실제로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출토되는 전통복식들을 살펴보면 우리 조상들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색상의 옷들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 수의를 지키려는 노력은 연구로 끝나지 않았다. 출토복식 전시회를 통해 일반인에게 우리의 전통 수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고, 또 전통 수의의 복원이 이뤄지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입었던 곤룡포 수의다. 김 전 대통령 생전에 단국대학교 측이 이희호 여사에게 제안해 미리 준비해놨던 전통 수의가 장례식에서 사용됐다. 곤룡포는 조선시대 때 국상에서 망자(임금)가 입었던 수의다. 단국대 측은 아예 전통복식을 따르는 수의를 보급하기 위해 ‘단국상의원’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전통 예복을 판매하고 있다.
세상 모든 길에 사람이 지나다닌다. 이들 중에는 길과의 추억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다. 추억이란 살아온 시간, 함께했던 사람, 그날의 날씨와 감정이 잘 섞이고 버무려져 예쁘게 포장된 것이다. 박미령 동년기자와 함께 오래전 기억과 감정을 더듬으며 종로 길을 걸었다. 흑백사진 속 전차가 살아나고 서울시민회관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행복한 발견. 감동이 잔잔히 밀려왔다.
경복궁에서 스케이트 타던 시절이 있었어요!
서울시 종로구 당주동에서 태어난 박미령 동년기자는 대학 시절을 넘어 결혼 전까지 종로에서 산 토박이다. 세종문화회관 전신인 서울시민회관 계단이 놀이터였고, 중학생이 돼서는 경복궁과 인왕산 활터가 주 무대였다.
“인왕산에 활터가 있어요. 활터 아저씨들이랑 얘기하고 맛있는 것을 주시면 먹기도 했어요. 경복궁은 젊었을 때 너무 많이 왔어요. 경회루 연못이 얼면 그곳에서 스케이트를 탔어요. 그때는 뭣도 모르고 탔죠. 스케이트 날을 가는 아저씨와 스케이트 빌려주는 아저씨가 저기 경회루 계단 아래 앉아 있었어요.”
현재를 사는 젊은이에게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경복궁은 문화재청이 엄격하게 관리하는 문화재다. 취재 당일에도 문화재청에 경회루 사진촬영허가신청서를 냈다. 스케이트를 탔다는 말이 그저 충격이었다.
“창경원에서 보트도 탔는걸요. 밤벚꽃놀이도 하고요.”
이 부분에 있어 옛 추억으로 그냥 넘어가기에 씁쓸함이 앞선다. 일제강점기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불렸다. 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등 놀이시설이 들어섰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 수천 그루를 심어 놓고 밤벚꽃놀이를 즐겼다. 왕이 사는 궁궐의 의미를 상실한 시대를 지나야만 했다. 경복궁 내에 세워졌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1996년 철거됐고, 창경원으로 불리던 창경궁은 1983년 원래 명칭으로 환원하였다. 시니어의 추억은 안타깝게도 일제강점기 잔인한 역사와 함께한다는 생각이 들어 꼭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아버지와 아침식사, 금천교시장 기름떡볶이
1960년대, 박미령 동년기자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서울시민회관 옆 길가에는 중국인이 직접 운영하는 중화요리집이 있었다. 아침잠이 없는 아버지는 아침잠이 많은 어머니를 깨우지 않고 박미령 동년기자를 데리고 그곳으로 아침식사를 하러 가곤 했다.
“중국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먹고 부인 먹을 것을 싸들고 온답니다. 아버지가 그러셨어요. 근데 거기서 먹었던 콩국이 정말 맛있었어요. 콩국에 찹쌀튀김을 잘라 넣은 것인데 시리얼 같다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나서 중국여행 가면 찾아는 보는데 딱 그 음식 맛이 나는 걸 아직은 못 먹어봤어요.”
함경도 출신인 박미령 동년기자의 아버지는 혈혈단신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북 사람들은 의식주 중에 먹는 것을 가장 최고로 친다고 한다. 그래서 음식 솜씨가 좋은 외할머니와 아버지가 여느 모자 못지않게 친했다. 그리고 기름떡볶이에 대한 추억도 나눠주었다.
“어렸을 때 먹었던 기름떡볶이에 대한 기억이 많아요. 떡볶이가 먹고 싶어서 엄마 따라 시장에 갔습니다. 제 기억에 떡볶이는 빨간 떡볶이가 아니고 기름에 바짝 구운 떡볶이예요.”
박미령 동년기자의 말에 곧장 기름떡볶이를 파는 통인시장으로 향했다. 사실 박미령 동년기자가 말한 기름떡볶이는 통인시장에서 파는 것이 아니다. 경복궁역 2번 출구, 금천교시장에서 기름떡볶이를 팔던 故 김정연 할머니(향년 98세)의 떡볶이다. 북에서 홀로 남한으로 내려온 김 할머니는 평생 모은 재산을 기부하고 돌아가셨다.
“김 할머니는 간장으로 간을 한 기름떡볶이만 했어요. 금천교시장 할머니가 원조죠. 할머니는 곤로에다 무쇠솥 하나 올리고는 낚시의자에 앉아 떡볶이를 만드셨어요. 할머니 앞에 손님들이 빙 둘러앉으면 ‘몇 개 줄까?’ 하고 물어보셨어요. 겉을 바삭하게 무쇠솥에 지져서 구워주셨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어렸을 때 그 기름떡볶이를 굉장히 좋아했어요.”
정신여고 회화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통인시장에서 택시를 타고 박미령 동년기자의 모교인 정신여고가 있던 종로구 연지동 옛터를 찾아갔다. 명성왕후의 주치의이자 선교사였던 애니 엘러스 벙커(Annie Ellers Bunker)가 1887년 중구 정동에 설립한 정신여고는 1895년 종로구 연지동으로 교정을 옮겼다. 1978년 지금의 교정인 잠실로 이전하기 전까지 깊은 역사의 흔적이 쌓인 곳이 연지동 교정 터다. 이곳에서 박미령 동년기자는 여중·여고 시절을 보냈다.
“버스를 타고 지나는 다녀봤지만 내려서 학교 쪽을 가본 적은 없어요. 종로5가 뒤쪽 대학로로 가는 중간에 있어요. 종로통을 잇는 전차를 이용해 통학했는데 종로4가에 내려서 학교로 걸어갔어요.”
지금 생각해도 학교 시설이 너무 좋았다고 회고했다. 수세식 화장실에 라디에이터 난방을 했다. 기숙사에는 침대가 설치돼 있는 등 당시에는 최고 시설을 갖춘 서양식 학교였다. 예쁜 교정이 그립지만 정신여고 옛터에는 본관과 기숙사로 사용됐던 세브란스관만 남아 있다. 현재는 다양한 기업체들이 상주해 과거 교실을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옛 모습 그대로 사용하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하다.
“우리 저기 뒤쪽으로 가보면 안 될까요? 교정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과거 정신여고 부지를 사들였다는 보험회사 건물과 남아 있는 정신여고 본관 건물 사이에 조성된 녹지공원이 보였다. 그곳에 가보니 정신여교의 교목인 회화나무가 그대로 서 있었다.
“우리 학교 교목이에요. 옆에 건물도 보니 우리 학교 건물이 맞아요. 건물 사이를 이어주는 구름 다리도 기억나고요. 제가 찾아올 줄 알았겠어요? 나무를 찾아서 너무 좋아요.”
정신여고의 교목인 회화나무는 독립운동을 함께한 고마운 나무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애국부인회의 출발점인 정신여고가 일본 관헌의 수색을 받았을 때 비밀문서와 태극기, 국사책 등을 고목의 구멍에 숨겨 보존할 수 있었다.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날에 만나 시원한 바람으로 마무리한 멋진 데이트였다. 한 사람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이야기였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종로의 작은 틈, 작은 돌 하나에도 우리의 역사와 추억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만화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예술이지만, 만화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이나 대우는 지금과 달랐다. 대표적 사례로 1972년에 있었던 정병섭 군 사망사건이 있다. 만화 주인공의 부활을 따라 하다 12세 소년이 숨진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사회가 발칵 뒤집혀 517개 만화대본 업소가 쑥대밭이 됐고 2만 권이 넘는 만화책이 잿더미로 변했다. 이렇게 격동기 속 낮았던 만화에 대한 인식으로 당시 주옥같던 작품들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예전 작품을 즐기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 운영 중인 몇몇 박물관들은 우리가 추억으로 다시 돌아가기에 충분할 만큼 다양한 작품들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 만화의 모든 것 한국만화박물관
국내에 만화 관련 시설 중 가장 손꼽히는 곳이다. 1998년 설립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산하기관으로서 경기도 부천에 자리 잡고 있다. 한국만화박물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손주와 조부모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 실제로 취재가 이뤄진 날에도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을 잡고 박물관을 찾은 아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총 4개 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에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상설전시관은 3층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근대 만화와 광복 이후의 만화 등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만화 사료의 전시가 이뤄지고 있는데 추억의 만화방을 재현한 ‘땡이네 만화가게’와 4D 영화관 등이 인기가 많다. 전시품 중 현존하는 최고(最古) 만화 단행본 , 최장 연재 시사만화 , 당대 베스트셀러였던 , 등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또 젊은 만화가들의 작품을 발굴해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기획 전시도 이어지고 있다.
반드시 들러야 할 시설 중 하나는 건물 내에 자리 잡고 있는 만화도서관이다. 26만 권의 국내외 만화 도서와 자료가 소장된 국내 최대 규모의 열람 공간으로 누구나 만화책을 읽고 즐길 수 있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박물관운영팀 백수진 팀장은 “중장년 세대에게 한국만화박물관은 어린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며, 자녀 세대 혹은 손주 세대와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며 “한국만화박물관은 만화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역사를 담고 있는 장소로, 과거의 추억과 현재, 미래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특별한 박물관”이라고 설명했다.
주소 경기도 부천시 길주로 1 관람시간 10:00~17: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당일 및 그 전날 관람료 5000원 (생후 36개월 미만, 65세 이상 무료)
희귀 자료를 한곳에서 청강만화역사박물관
청강만화역사박물관은 2002년 12월 10일 개관한 박물관으로 출판물과 육필 원고 등 국내외 희귀만화 자료 2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국내 만화 관련 학과 중 최고로 손꼽히는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창작과는 학교 박물관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남다르다. 박물관 설립을 위해 7년간 관련 자료 수집이 이뤄졌고, 만화의 역사를 개별 작가와 작품 중심으로 전시한 것도 특징이다. 1998년에는 국내 최초의 만화 애니메이션 전문도서관인 만화영상도서관도 개관했다.
청강만화역사박물관의 한혜원 학예사는 “중장년 세대가 처음 접했던 시기의 만화는 단순 오락을 넘어 자신만의 문화를 표현하고 향유할 수 있었던 유일한 창구였기에 어떤 세대보다도 만화에 대해 강한 향수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청강만화역사박물관은 중장년 세대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우리 만화의 잊힌 고리를 발굴하고 전시함으로써 과거의 만화에서 오늘날의 웹툰까지 살아 숨 쉬는 만화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라고 소개했다.
주소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청강로 162 청강문화산업대학교 3층 관람시간 09:00~17:00 휴관일 토요일, 일요일, 법정공휴일 관람료 무료
‘춘천’하면 이 곳! 춘천애니메이션박물관
tvN의 에서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가 “춘천하면 애니메이션박물관이죠”라고 강조해서 유명세를 탄 장소. 춘천에 자리 잡고 있는 애니메이션박물관은 만화 중에서도 움직이는 만화, 즉 애니메이션만을 중심으로 꾸며진 시설이다. 만화가 동적인 생명력을 갖기 위해 필요한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놓았고, 홍길동으로 대표되는 국내 애니메이션의 역사와 발전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준비해놓았다. 바로 옆에 위치한 토이로봇관은 손주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주소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박사로 854 관람시간 10:00~18: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정기 휴관) 관람료 성인 5000원, 청소년 4000원, 어린이 3000원 (토이로봇관은 별도 관람권 필요)
100주년 맞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일본의 애니메이션, 즉 아니메((アニメ)가 올해 100주년을 맞이했다. 역사가 깊은 만큼 그들의 만화 역사와 만화 관련 자료는 우리보다 훨씬 방대하고 관련 시설도 다양하다. 만화 관련 시설 또한 만화를 미술이나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하고 만화 시설을 갤러리 혹은 미술관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것도 이들의 만화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일본 도심에선 만화를 즐기고 있는 시니어들을 쉽게 볼 수 있고, 서점보다 규모가 큰 만화 대여소나 중고만화서점도 눈에 많이 띈다. 일본의 만화박물관은 만화가 자연스럽게 애니메이션화하는 일본 만화산업의 특성상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경계가 모호해 일부러 구분 지으려 하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 정부 차원의 만화 시설도 있지만 지브리 미술관이나 토에이 애니메이션 갤러리 같은 특정 만화제작사에서 자체적으로 설립한 박물관도 활성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본 내 주요 만화박물관
지브리 미술관 www.ghibli-museum.jp, 교토 국제만화박물관 www.kyotomm.jp, 스기나미 애니메이션 박물관 sam.or.jp, 도쿄 애니메이션 센터 www.animecenter.jp, 토에이 애니메이션 갤러리 www.toei-anim.co.jp, 기타큐슈시 만화 뮤지엄 www.ktqmm.jp
근래 들어 사라지는 말이 더러 있다. ‘환갑잔치’라는 말도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환경의 변화에 따라 없어진 전화교환원, 버스안내원, 물장수, 은행에서 돈을 세던 정사원, 굴뚝 청소부 등의 직업 이름처럼 말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란 말도 최근에 거의 쓰지 않고 있다.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조금씩 쌓으면 나중에 큰 덩어리가 된다. 돈이나 재산을 불리는 지혜로 삼았던 말이다. 적은 금액의 돈을 귀중히 여겼다. 비슷한 말로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도 있다.
필자가 결혼하여 신접살림을 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아파트를 살 때 주택채권을 사야 했고 대체로 채권은 보관하지 않고 바로 되팔아 아파트를 사는데 보탰다. 필자 역시 채권을 팔았다. 채권을 사려던 할머니 한 분은 한 주당 5백 원을 더 주겠다 했다. 5백 원 정도에 시큰둥했는데 그 할머니는 “5백 원이면 얼마나 큰 데”라 하였다. 재산을 많이 키운 할머니였다. 적은 돈을 귀중하게 여기는 모습이다. 주위엔 큰돈을 번 사람들이 많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부유하게 살기도 하지만, 자수성가한 사람도 많다. 그들은 적은 금액의 돈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힘들여 돈을 모았기에 신중하게 사용한다. 남다른 고생을 하면서 이룬 재산이어서 헛되게 쓰지 않는다. 공돈처럼 쉽게 얻은 재물은 그 쓰임새도 헤퍼져 오래가지 않는다. 로또복권에 당첨된 대부분 사람의 생활이 결국 더 궁핍해지는 것을 본다. 같은 이유다.
손주에게 쥐여주던 돈도 1,000원 한 장이면 환영받았으나 지금은 최저 5,000원에서 1만 원짜리를 주어야 한다. 특히 아파트 가격이 높아져 신입 직장인이 월급을 모아서는 아파트 구매를 엄두 내지 못한다. 그런 환경에 놓이다 보니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환경이 됐다. 이런 현상이 또 다른 삶의 피폐를 가져오지 않았나 싶다. 어떻게 보면 물가 오름의 요인으로 작용해 인건비를 끌어 올렸지 싶다. 일확천금, 한탕주의를 부추겼다. 정상적 방법보다는 비정상적 방법을 동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부 공직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서 쟁점으로 반복되는 일도 같다. 사회지도층이라 자처하는 그들도 태연하게 위장전입, 매매가격 낮춰 적기(속칭 ‘다운계약서’ 작성), 세금 안 내기, 논문 표절 등을 예사롭게 생각했다. 사회 전반에서 또 필자를 포함한 국민 대다수가 같은 문제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최근 뉴스에 따르면 부동산 투자로 웃돈을 챙기기 위해 위장전입은 물론이고 위장 결혼도 서슴지 않았다. 밝혀진 건수도 엄청나다. 반면에 자녀의 대학등록금 마련이 되지 않아 모녀가 동반자살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사회의 어두운 일면이다. 기업체 회장뿐만 아니라 대학재단 이사장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뉴스거리로 불거져 나오는 “갑질 논란”의 바탕에도 작은 것을 우습게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가 아닐까? 티끌 모아 태산을 이루려는 생활 태도가 다시 뿌리를 내려야 한다. 아주 작은 일지만, 사회를 정상으로 돌리는 소중한 대책이지 싶다.
아침에 잠에서 깼는데 뭔가 허전함이 느껴졌다.
뭐지? 생각해 보니 그동안 눈만 뜨면 여기저기서 지천으로 들렸던 매미의 노랫소리가 뚝 끊겨 들리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 집은 북한산 자락에 있어 매년 여름이면 시끄럽다고 생각될 정도로 매미가 노래를 했다.
이웃집 할머니께선 "아이구, 시끄럽다."고 불평도 하시지만, 필자는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매미 소리가 참 반갑고 듣기에 좋았다.
아직 여름의 한가운데에 있는데 오늘 그 많던 매미가 다 어디 가고 노랫소리가 이렇게 한꺼번에 사라졌단 말인가? 매우 서운함이 느껴진다.
여름 내내 가깝고 먼 곳에서 합창하는 매미 소리를 매우 좋아했다.
올해도 필자는 필자만을 위한 매미의 세레나데를 즐겼다.
어느 날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바로 필자 귓가에 앉은 듯 온 집안을 울리는 커다란 매미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스테레오로 웅장한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처럼 깜짝 놀랄 만큼 컸는데 베란다 문을 보니 방충망에 매미 한 마리가 붙어 소리를 내고 있다.
단지 딱 한 마리일 뿐인데 작은 우리 집이 쾅쾅 울리고 있다.
멀리서 들리던 것과 다르게 귓전에서 울리는 우렁찬 매미 소리에 필자는 즐거워졌다.
다가가면 날아갈까 봐 조용히 의자를 끌어당겨 사이를 두고 마주 앉았다.
매미는 필자가 보이지 않는지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건 꼭 필자만을 위한 세레나데인 것 같아 자꾸만 미소가 떠오르고 기분이 좋아졌다.
가깝고 먼 나무와 숲에서 들리던 소리와 또 다른 기쁨을 매미가 선사해주었다.
꽤 오랜 시간을 지치지도 않고 "맴맴~" 노래하다가 필자의 기척에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에이, 좀 더 조용히 있을 걸 후회가 되어 베란다 문을 열고 날아간 매미 쪽을 내다보았다.
이렇게 우리 집 방충망에 날아와 필자만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간 매미가 고마웠고 다시 와주기를 바랐다.
매미의 노랫소리에는 어떤 규칙 같은 게 있었다. 대체로 '맴맴맴'하고 여섯 번을 울고는 '매에에엠'으로 마무리를 했다.
여러 번 귀 기울여 듣다 보니 일정한 패턴으로 소리를 내고 있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미의 일생에 관한 글을 읽고는 애잔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매미로 태어나기까지 7년이 걸린다는 이야기는 흔히 들어왔다.
수컷 매미가 목청껏 울어 짝짓기에 성공하면 매미의 알은 나무줄기 속에 있다가 다음 해 6~7월에 유충이 되고 땅속으로 들어가 7년 정도 변태를 거듭하며 굼벵이로 지내게 된다고 한다.
그렇게 긴 세월 굼벵이로 잘 버틴 후 땅에서 나와 매미가 되어 노래를 부르게 되지만 결국 7~20일만을 살고 짝짓기를 한 후 생을 마감한다는 비운의 곤충이다.
우리가 여름마다 듣는 매미 소리를 내기 위해 한평생 준비하고 반짝 빛나는 시간을 가진다니 안타깝다.
이제 노래를 멈춘 매미를 아쉬워하며 매미의 노랫소리 하나에도 기뻤던 필자의 감수성이 아직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음이 감사하다.
올여름엔 이제 매미의 노랫소리를 더는 들을 수 없을 것 같아 서운하지만, 열심히 땅속에서 굼벵이로 지내며 아름다운 도약을 할 날을 기다리는 매미의 다음을 기다리기로 한다.
필자만을 위한 세레나데를 불러준 매미야~ 고맙다.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라는 꽃말을 가진 봉선화. 어린 시절, 그 기나긴 여름이면 초가집의 울밑마다 봉선화가 피었다. 그 봉선화를 나라 잃은 슬픔을 비유해 해방 전후에 태어난 우리들은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라고 애처롭게 노래했다. 여성들은 지금의 매니큐어 대신 백반과 섞어 찧은 봉선화 꽃을 손톱에 동여매 곱게 물을 들이곤 했다. 손톱에서 봉선화 꽃물이 첫눈 올 때까지 빠져나가지 않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손톱을 깍지 않고 첫눈이 오기만을 초조히 기다리던 추억 한가닥 씩은 다들 품고 있으리라.
그런데 어느 날 우리 동네에 크나큰 사건이 일어났다. 치렁치렁 머리를 땋고 다니며 여성스런 느낌이 물씬 풍기면 이웃집 학순이 언니가 연애를 하다가 사랑이 엇나가자 자살을 한 것이다. 하필이면 우리 집 선산 아래 있는 조그마한 둠벙물에 빠져 숨을 거두었다. 손톱의 봉숭아물이 너무 일찍 빠져나가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쑤근거리는 입방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물가를 달구어댔다. 그 둠벙 앞을 지날때마다 머리를 풀어헤친 벌건 손톱의 처녀 귀신이 끌어들일 것 같아 그 길로 지나가질 못하고 늘 먼 길로 돌아다니곤 기억이 난다. 흉흉한 소문을 듣고 아직 소녀였던 나도 곱게 물든 손톱이 자라지 않기를 얼마나 빌었던가.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때의 추억이 가끔씩 낭만으로 남아 울컥 그리운 계절이다.
그 시절 슬프게 피던 봉숭아가 화단에서 당당하고 탐스럽게 꽃을 피운다. 동네 할머니한테서 모종 두 개를 얻어다가 옥상 큰 화분에다 심었는데 옆의 금잔화와 나리를 뒤덮을 기세로 가지를 치다 요즘엔 마디마다 꽃을 피워 제법 위용을 뽐내고 있다. 그렇게 당당한 녀석들도 40도가 넘는 한 낮 옥상의 복사열과 싸우다가 오후가 되면 어깨가 축 늘어진다. 그래도 물만 먹으면 다시 일어서서 꽃을 피우는 모습이 대견스럽다. 마치 우리의 딸아이들을 연상케 한다.
나는 아침마다 올라가서 손톱에 물들이던 추억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꽃잎을 따다가 지인들에게 나눠주곤 한다. 주말쯤엔 나도 딸아이와 함께 손톱에 보름달을 띄워 보고 싶다. 그 보름달이 반달이 되고 상현달이 되다가 결국은 첫눈이 올 때쯤 그믐밤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냉정하다. 꿈의 씨앗이 발아하던 소녀시절도, 물오른 한 여름의 청춘도 속절없이 가버리고, 어느새 가을날의 샛길을 서성이고 있으니 봉숭아물이라도 들여 내 손톱에 풍성한 보름달을 띄워보고 싶을 뿐.
해외토픽 뉴스에서 매우 재밌는 화제를 하나 보았다.
무려 53세 차이의 결혼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도 연상연하 커플의 결혼이 보편화 되어 아무도 나이 차 많이 나는 결혼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추세이다.
더구나 프랑스의 최연소 대통령 마크롱은 고교 시절 은사인 24세 연상 선생님과 결혼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예전에는 남자가 두세 살 정도 많은 차이를 적당하게 여겼다.
남자가 나이가 훨씬 많으면 도둑이라는 표현도 하지만 여자가 나이가 많으면 능력 있다고 축하해 준단다.
그래서 신부가 연상인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 세상이 된 것 같다.
친구의 딸 중에도 서너 살 정도 연하의 신랑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모두 잘했다고 축하해 주었으며 아주 잘살고 있다.
이렇게 여자가 연상인 커플을 많은 사람이 오히려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래도 필자 개인적인 생각은 여자가 너무 나이 많으면 거부감이 들것도 같다.
그런데 저 해외토픽의 소식은 좀 유별났다.
신부는 61세의 할머니인데 신랑은 8살 어린이라는 것이다.
무슨 사연 있겠구나 했더니 역시 깊은 뜻이 있는 결혼식이었다.
8살짜리 신랑의 할아버지가 생전에 61세 할머니와 꼭 결혼하고 싶어 하셨는데 갑자기 돌아가시게 됐다고 한다.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해 손자가 대신 나선 것이란다.
흑인인 그들은 조상이 행복하지 못하면 후손도 행복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행복하시라고 손자에게 할머니와 결혼식을 올리게 한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를 것 같은 까만 얼굴의 귀여운 신랑이 면사포를 쓴 할머니에게 뽀뽀하는 것으로 결혼식이 진행되었는데 그 천진난만한 모습이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다행스러운 건 결혼식이 끝나도 혼인신고나, 같이 사는 일은 없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정말 조상을 공경하는 뜻뿐인 이벤트였던 것 같다.
53세 차이 나는 결혼식이라 해서 어떤 가십거리가 있는지 색안경을 끼고 잠시 생각했던 필자는 약간 부끄러웠다.
조상님을 위하는 마음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조상 모시기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훈훈해 지면서 그 꼬마 신랑이 훌륭한 사람으로 잘 자라기를 기도해 주고 싶다.
올해 77세로 미수를 맞는 남편과 필자는 다섯 살 차이다. 남편은 6․25전쟁 때 아버지가 납치된 후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그런 남편이 가끔 아버지가 납치되기 전 자장면을 배달시켜서 먹었다며 그 시절의 이야기를 가끔 즐겁게 하곤 한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자장면을 먹어본 기억이 없는 필자는 남편이 6.25전쟁 전에 자장면을 먹었다고 하니 믿기지 않는다. 그래서 전화도 없고 또 오토바이도 없었던 시절에 어떻게 배달을 시켰으며, 중국집이 있기나 했냐며 거짓말하지 말라고 한다.
지방에서 개인 병원을 하신 필자의 아버지는 주말에나 서울로 올라오셨다. 그래서 어린 시절을 거의 아버지 없는 아이처럼 살았다. 당시에는 순진해서 다른 집 아버지들도 주말에만 집에 오는 걸로 알았을 정도다. 어쨌든 그 당시 음식을 배달시켜 먹은 기억이 전혀 없다.
필자의 외식에 대한 추억은 대학교 입학 후 영어 과외를 해서 번 돈으로 동생들과 사먹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여고 시절에도 빵집이나 광화문 근처 국수집에서 외식을 한 적이 있기는 하다. 대학 시절에는 연애를 했던 남편과 함께 OB`s Cabin’ 같은 명동의 레스토랑에서 햄버그스테이크도 사먹었다. 다진 고기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특별한 맛이었다. 그 당시 남편 사준 메밀국수를 먹다가 고추냉이(와사비)에 혼이 난 기억도 있다.
요즘은 아들네 식구가 주말에 오면 일하기가 싫어 외식을 하곤 한다. 메뉴는 주로 손주 입맛에 따라 결정한다. 손주는 고기를 좋아하는데 주로 숯불에 구운 고기를 된장에 찍어 먹는다. 피자나 자장면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 아이다. 요즘 아이들 같지 않고 순전히 토종 식성이다.
밖에서 식사를 한 후 커피는 집에 와서 마신다. 일요일인 어제는 스파게티 소스가 있어 스파게티를 만들어 먹었다. 손주에게는 햄버그스테이크를 만들어줬다. 겨자를 얹어주었더니 그건 안 먹고 김치만 먹는다. 이 다음에 연애할 때 겨자 못 먹으면 그 옛날 할머니처럼 쑥스러울 거라며 겁을 주며 먹어보라고 해도 손주는 먹어볼 시도도 안 한다. 제 엄마인 며느리의 토종 식성을 그대로 빼어 닮은 것이다.
요즘 식당이나 커피 집은 거의 프랜차이즈다. 외국엔 몇백 년 된 식당이 많다. 몇 대에 걸쳐 음식을 만드는 식당이 인정을 받는데 우리나라는 특별한 브랜드의 음식들을 좋아하고 유행에 민감하다. 그래서 누가 별다방(스타벅스) 커피를 먹으면 따라서 먹는 경우가 많다. 핀란드에는 각 가정마다 마시는 커피 맛이 다르다고 한다. 커피콩도 다르고 커피 내리는 방법도 달라서 당연히 획일화된 맛의 프랜차이즈 커피 집이 잘될 리 없다. 우리나라도 그 도시에 가야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음식을 먹으러 여행도 하고 관광사업으로도 연계되어 지방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