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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안읍성과 민박집 할머니
- 10월 1, 2, 3일은 연휴였다. 9월 말까지 끝내야 할 프로젝트들이 있었다. 다 끝내지는 못했지만 쉬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여름휴가도 못 가고 매진하다 보니 에너지가 고갈되는 느낌이었다.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진 머릿속도 풀어야 했다. 그래서 9월 중순 추석 전에 휴가 계획을 잡았다. 탁 트인 순천만을 보며 가슴을 펴고 싶었다. 시간이 되면 담양 대나무 숲도 보러 가고 싶었다. 이렇게 아무 준비 없이 여행을 떠난 것은 처음이었다. 젊었을 때는 사전조사도 하고 숙소도 미리 예약하는 등 유난을 떨었는데 이제는 다 피곤하기만 했다. 순천으로 떠나는 날, 연휴가 중국 연휴와 겹쳐 관광객들로 붐비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순천시까지는 무난하게 도착했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얼핏 본 전통 초가 민박집에서 하룻밤 묵으려고 순천시에서 순천만 쪽으로 출발했는데 도착해서 전화하니 엉뚱하게도 반대 방향이라는 것이었다. 무려 22km나 더 가야 했다. 순천만 쪽에는 민박, 펜션 등이 이미 다 차버려서 난감한 상황이었다. 초가집 연락처는 집 전화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전화를 받았는데 귀가 안 들리는지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순 전라도 사투리라서 알아듣기도 어려웠다. 낙안읍성으로 오라는데 낙안읍성은 처음 듣는 지명이었다. 게다가 주차장으로 오라며 주차장을 ‘주치장’이라고 발음했다. 상황을 보니 할머니는 ‘펜션’, ‘내비(게이션)’이라는 말은 아예 못 알아듣는 것 같았다. 상호도 없고 세 번째 집이라는데 정말 막막했다. 일단 낙안읍성을 찾아갔다. 정문 옆에 넓은 주차장이 보이길래 도착하자마자 전화를 했다. 그랬더니 주차장에서 한 시간이나 비 맞고 기다리다가 방금 집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으로 초가집 사진을 보여줬더니 그곳에는 초가집이 수십 채나 된다고 했다. 할머니에게 겨우 전해들은 ‘박물관’, ‘교회’ 등을 물어봐도 모른다고 했다. 날은 어두워지고 비까지 내리는 데 암담했다. 이리저리 헤매다 보니 파출소 불빛이 보였다. 다시 전화를 걸어 이번에는 경찰관과 직접 통화하게 했다. 그제야 경찰관이 직접 데려다 주겠다며 차 시동을 걸었다. 경찰차는 낙안읍성을 향해 갔다. 교회를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고 논길을 지나니 낙안읍성 남문(쌍정루)이 보였다. 그리고 옆에 ‘남문주차장’이라는 작은 주차장이 있었다. 주차장이라기보다는 성벽 밑 공터였다. 그렇게 해서 겨우 할머니를 만났다. 얼굴이 검게 타고 주름이 가득한 80대 중반의 전형적인 농촌 할머니였다. 할머니를 따라 낙안읍성 안으로 들어가니 여러 채의 초가집이 밀집되어 있었다. 할머니 집은 과연 남문에서 세 번째 초가집이었다. 민박집이 성 안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할머니가 싸리나무로 만든 대문을 열 때 시설이 너무 열악하지 않을까 순간 걱정이 되었다. 전형적인 시골집 구조로, 마당이 있는 ‘ㄴ'자 집이었다. 방문을 여는데 도배는 새로 했지만 창문 하나 없는 작은 방이었다. 화장실도 따로 떨어져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다른 곳으로 갈까봐 몸이 달아 있었다. 주차장에서 한 시간이나 나를 기다리는 동안 전화를 못 받아 다른 손님을 놓쳤다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방이 4개나 되는데 손님이라고는 나밖에 없었다. 숙박료는 5만원이라고 했다. 아침에 돈을 줘도 되지만 미리 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흔쾌히 5만원을 줬더니 요즘 가짜 돈이 많다며 의심을 했다. 눈도 어둡고 할머니라 피해 사례가 있었던 모양이다. 칼라 복사기로 정교하게 복사한 위조지폐라면 속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설도 열악한데 5만원이나 받는 게 비싼 느낌이었지만 그냥 짐을 풀기로 했다. 그리고 서둘러 근처 음식점으로 나가 늦은 저녁식사를 했다. 비가 와서 날씨가 좀 쌀쌀하다고 했더니 보일러를 틀어줬다. 아침에 일어나니 할머니의 표정이 훨씬 편안해 보였다. 아침 간식을 좀 나눠줬더니 고마워했다. 전날 저녁의 경계심은 다 풀어지고 어머니 같은 따뜻한 표정이 보였다. 잘 자고 간다니까 마당 감나무에서 감을 따더니 가면서 먹으라며 건넸다. 바로 전라도 인심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주변을 돌아보니 여러 채의 초가집들이 민박집으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나름대로 예쁘게 꾸며 놓고 있었다. 마당에 잔디가 깔린 집도 있고 방안에 화장실욕실이 있다는 민박집들도 있었다. 일률적으로 숙박료는 5만원인데 가장 열악한 집을 골랐던 것이다. 할머니에게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왜구의 노략질에 방어하기 위해 만든 읍성으로 읍성 내에 주민이 직접 살고 있다는 점이 다른 읍성과 다르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잠정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 볼거리도 많은 편이다. 바로 옆 근처에 70년대 유명 잡지였던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이 있다. 잡지와 다른 유물들도 깔끔하게 전시되어 있다.
- 2016-10-11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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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직도 러브레터를 쓴다
- 내게는 두 딸이 있다. 첫째 딸은 현재 LA에 살고 있고 딸만 한 명이다. 둘째 딸은 쌍둥이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모 그룹의 호주 지사장으로 발령이 나서 가족 모두가 호주에서 4년 동안 살다 얼마 전에 귀국했다. 유치원에 다닐 무렵 호주로 떠난 손주들은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지금은 귀국해서 서초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귀국하기 전 4년 동안 나는 전화와 카톡으로 손주들과 거의 매일 대화를 나눴다. 세상이 참 좋아져 무료통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손주들을 향한 내 사랑 휴가 때면 한 달씩 서로 오가며 만나기도 했지만 손주들에 대한 그리움은 나를 우울하게 했다. 그래서일까. 내가 세상에 태어나 사랑한다는 말을 제일 많이 한 것은 그때였다. 내 사랑의 대상은 당연히 손주들이다. 내 자식 키울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랑이 솟는다. 내 자식 키울 때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부담이 커서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손주들하고 대화할 때 꼭 안아주며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또 손주들이 내 집을 방문할 때는 옛말로 표현해서, 버선발로 뛰어나가 반긴다. 손주들이 네댓 살쯤 되었을 때는 손주들 키에 맞춰 앉아 신발도 직접 벗겨줬다. 올망졸망한 발을 보고 있으면 너무 사랑스럽고 행복했다. 나는 손주들이 집에 오는 날이면 좋아할 만한 간식을 직접 만들어 준비해놓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연휴를 맞아 함께 임진강 근처로 놀러갔다. 오가는 시간이 서너 시간 걸리는 거리여서 둘째 딸이 간식을 준비해 왔지만 나도 차 안에서 손주들에게 먹일 수 있는 간식거리를 준비했다. 내가 늘 먹을거리를 준비해 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손주들은 교외로 나갈 때마다 ‘이번에는 할머니가 무엇을 싸오셨을까?’ 하고 소풍 도시락 열어보듯 설레어한다. 내가 힘들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손주들에게 건강한 음식을 먹이려는 마음에서다. 그래서 땀 뻘뻘 흘리며 과일 잼도 직접 만들어 먹인다. 아이들은 보는 대로 배운다 얼마 전에 손주들한테 용돈을 줘야 할 일이 생겼다. 나는 용돈을 줄 때마다 새 지폐를 마련해 반드시 짧은 글이라도 써서 깨끗한 봉투에 넣어서 준다. 헌 돈과 새 돈의 가치는 똑같지만 시장에서 거스름돈으로 더럽혀지고 심하게 구겨진 돈을 받았을 때는 새 돈을 받았을 때와 기분이 다르다. 은행이 막 찍어낸 듯한 빳빳한 새 돈을 받으면 마치 나를 위해 준비된 돈처럼 귀중한 느낌이 든다. 이렇게 용돈을 줄 때도 정성을 다하는 것은 손주들이 어려서부터 돈을 귀하게 여기도록 하려는 교육적인 의미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손주들이 용돈 봉투를 열고는 “와~ 새 돈이다!” 하며 기뻐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다. 그래서인지 손주들도 내게 줄 선물을 준비할 때는 정성을 다하고 예의를 갖춘다.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이 맞다. 시간이 흘러도 남아 있는 사랑의 흔적들 사랑하는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것과 글로 표현하는 것은 그 느낌과 강도가 다르다. 손주들도 그것을 아는 것 같다. 말은 그 순간에 제 역할을 다하고 사라지지만 편지로 정성스럽게 표현한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손주들 책갈피에서 종종 다시 발견되기도 하니 말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해주고 내가 써준 편지들을 보고 자란 탓인지 아이들도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참 행복하다. LA에 사는 손녀는 멀리 있어 행여 할머니 사랑이 부족하면 어쩌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서울에 올 때마다 내가 사용하는 붓과 책 등의 물건들에 “할머니 사랑해요!”라는 글을 몰래 남기고 가는 것을 보면 기우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돌아간 후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 손녀의 흔적을 볼 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생각을 하는 것 아닌가 해서 짠해진다. 그리고 LA로 돌아가 정성을 다해 쓴 ‘할머니의 Love Letter’를 보고 까르르 웃으며 곧 답장을 보내올 손녀가 그때부터 그리워진다. 손주를 예뻐하느니 홍두깨를 예뻐하라는 옛말이 있다.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믿으면 그 순간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다. 사랑은 그저 순간순간 느끼면 되고 그 순간이 쌓이면 한 권의 아름다운 책만큼 풍성한 이야기들이 남겨질 것이다. 그리고 훗날 추억을 더듬듯 그 책을 살며시 펼쳐보면 얼마나 행복할까. 내 사랑하는 정민, 지민, 성수, 멀리 바다 건너에 살아 자주 볼 수 없는 솔라야 예쁘고 바르고 씩씩하게 성장해줘서 참 고맙다!!!
- 2016-10-05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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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과 사람 PART2] '우리에게 책은 무엇인가?' 책의 집, 여백서원(如白書院) 주인 전영애 서울대 교수
- 여백서원(如白書院)의 주인장 전영애(全英愛·65) 서울대 교수에게 “정말 나이가 안 들어 보이신다”라고 말하자 “철이 안 들어서”라는 대답이 웃음과 함께 돌아온다. 어쩌면 이 각박하게만 보이는 세상에, 서원이라는 고풍스러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철이 안 든 일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철이 안 든 게 아니라 자신이 올바른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에 실천할 수 있는 일일 수도 있다. 서원에서 확인한 책과 책의 가치에 관한 문답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 사진 이신화 여행작가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의 여백서원(如白書院)은 말 그대로 책의 집이다.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가 아버지의 호 여백(如白)을 빌려 와 ‘맑은 사람들’을 위해 만든 이 공간에는 전원의 한적함과 생명력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었다. 인터뷰는 늦은 매미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지고 있는 가운데 소장한 책이 몇 권이냐는 질문부터 이뤄졌다. “우와, 책이 얼마나 되나요?” “몰라요. 그런 거 알아 뭐해요.(웃음)” 서원을 통해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다 전 교수는 올해 모교인 서울대에서 20년 동안의 교수 생활을 마치고 은퇴했다. 2009년에 국내 최초로 괴테 시 전집을 번역하고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로부터 괴테 금메달을 받는 등 독일문학 분야에서 학문적인 업적을 탄탄히 쌓은 그녀에게 아쉬운게 있는지 궁금했다. “늘 그렇죠. 절대적인 낙원이 어디 있겠어요. 이곳도 사람들 보고 숨 좀 쉬라고 만들었지만, 언제나 위협이 있죠. 예를 들면 여기에 조경을 잘 해놓으니까 주변에서는 농사도 못 짓는 땅인데 비싸게 내놓고. 갑자기 수영장 딸린 별장을 짓는다는 등 뭐 그런 얘기들도 있고. 도리 없죠.” 못다 한 걸 물으니 개인이 아니라 서원을 먼저 생각한다. 서원의 완성을 떠올린다. 전 교수에게 여백서원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좋은 사람들이 많이 오세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더 바랄 게 없어요. 조경하시는 분도 오고, 을 읽으시고 암 치료 받는 분도 오시고. 그분들 중에 놀라운 분들이 많아요. 세상에 이상한 사람들이 난리 쳐도 귀한 분들이 숨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 처음 만난 사람들이 여기서 밤새도록 얘기하고 그래요.” 전 교수는 만난 사람들에 대해 연신 예쁘고 아름답다는 표현을 거듭했다. 마치 세상을 다시금 발견하게 된 사람처럼. 그녀는 자신이 운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머니와 할머니가 참 좋은 분이어서 순전히 조상 덕에 잘 사는 게 아니냐며 웃음 짓기도 했다. 귀하게 여긴 책에서 느낀 힘 전 교수는 오래된 보자기에 싸 놓은 책들을 조심스레 꺼내 보였다. 먼저 어머니(김한섭)의 책. 1990년에 작고한 어머니는 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다. 평생 고생만 한 그 어머니가 필사한 책이 있다. 배움에 대한 욕망이 컸던 어머니는 책이 귀했던 시절, 한지에 책을 베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보고 외웠다. 소설본, 조선시대 가사를 적은 두루마리들이 전 교수의 손에 남았다. 그리고 아버지(전우순)의 책.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으로 사업을 했던 아버지는 60대 후반에 등산을 시작해 90세까지 매년 에베레스트를 올랐다. 그의 조부는 소수·도산서원장을 지낸 유학자인데, 250년 전 괴테의 글은 줄줄 읽는 딸이 증조부의 글을 못 읽는 게 안타까워 조부의 문집을 한글로 번역해 1000장의 종이에 붓으로 썼다. ‘91세 우순이 피로 번역하고 쓰다’라고 서명한 번역 작업을 2011년 6시간 반에 걸친 담도암 수술을 받은 뒤 마무리하고 6개월 만에 별세했다. 여백서원에는 괴테의 초간본(1819), 희귀본(1853)을 비롯한 200여 권의 독일문학 관련 서적이 있다. 바이마르 괴테학회 재정 감사였던 홀레씨는 별세하기 직전 다시 전 교수를 식사에 초대했고, 며칠 후 “당신이 갖고 있는 게 가장 좋겠다”면서 항공편으로 자신의 장서를 부쳐 왔다. 홀레씨가 임종을 앞두고 정리를 해서 보낸 것이다. 다들 훌륭한 사회인들인 당신 자녀들도 있는데 홀레씨는 가장 귀중한 책들을 전 교수한테 보냈던 것이다. “그 책들을 누구에게 보내야 가장 귀하게 읽히고 잘 보관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신 것 같았어요. 11일 동안 그 집에 쌓인 수많은 편지를 보고 여러 일화를 들으면서 그의 생애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던지요.” 여백서원에는 이 책들과 함께 전 교수가 시의 스승으로 모시는 동독 출신 시인 라이너 쿤체의 책, 학문의 스승으로 모시는 헨드릭 비루스 교수의 책, 자신이 쓰고 번역한 책, 교양수업 ‘독일 명작의 이해’를 수강한 제자들이 종강 때 각자 한 권씩 만든 책, 서원에 다녀간 사람들의 책까지 소중하게 간직돼 있다. 전 교수는 여백서원의 존재 이유로 이처럼 좋은 책의 보관과 함께 좋은 사람들의 보존을 든다. 책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 한국에 대해 알고 싶은 외국 시인 누구에게나 여백서원은 열려 있다. 책이 있는 집, 서원에서 삶의 여백을 찾도록 해주고 싶다고. 힘들면 책을 읽어요 전 교수는 몸이 힘들면 책을 읽고 책을 읽다 머리가 아프면 몸을 움직인다. 그녀는 글을 알면 세계가 열린다고 말한다. 그래서 시험을 보려고 배우거나 출세하려고 배우는 건 너무 불쌍하다고도 했다. “차 한 잔을 마셔도 사람이 가까워지는데 누군가가 온 힘을 기울여 쓴 책을 읽는다는 건 상당히 많이 받는 거예요. 그러면서 남들을 이해하게 되고 그러는 거지. 그래서 나이 먹어서 책을 읽는 것은, 아무 거나 읽어도 좋은 거예요.” 그녀와 괴테의 인연은 남다르다. 어떻게 괴테를 접하게 됐는지 물어봤다. “중학교 때 어디선가 시를 하나 봤어요. 그때는 괴테도 모르고 시 제목도 몰랐어요. 그런데 괴테가 쓴 이라는 만년의 시집이 굉장히 중요하고 정말 어렵거든요. 그 책 한 권을 다 읽으니 끝에 괴테가 그 시집에 넣지 않고 버린 것을 편집자가 넣은 시가 몇 편이 붙어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에 제가 중학교 때 봤던 시가 들어 있는 거예요. 하도 놀라서 중학교 때 읽은 그 시가 어떻게 아직까지 잊히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 있었을까, 그 이유가 뭘까 고민하며 그 시를 분석하는 게 제가 독일의 출판사에서 낸 괴테 연구의 첫 페이지입니다.” 40여 년 만에 다시 만난 괴테의 시 중학교 때 본 시를 다시 보게 되기까지 어언 40여 년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남아 있는 괴테 시의 힘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괴테 본인이 많은 힘을 거기에 쏟은 거예요. 그게 읽는 사람에게 다가온 거죠. 놀라운 체험이었어요. 괴테는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건 하나도 안 썼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평생 연시를 썼어요. 그렇다면 평생 연애 경험이 있다는 건데, 그게 뭘 저지른 게 아니고 아름다운 글을 남김으로써 그 단계를 넘어선 거예요.” 전 교수는 자연스럽게 예술의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선 숭고한 단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괴테가 전 교수에게 어떤 롤모델로 작용한 부분이 있을지 궁금했다. “괴테에게서 탐나는 점이라면 자만이 아닌 자긍심이었어요. 예를 들어 저는 계단을 꼭 뛰어다녀요. 그런 제 모습을 보면 어떤 사람은 스포티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바쁘다고 해요. 그런데 제가 계단을 뛰어다니는 건 계단을 걷는 게 힘들어서예요. 물론 괴테가 계단을 뛰어다니고 그러진 않았어요. 그런데 그 사람의 생활 태도가 그랬어요. 힘든 게 있을 때 그렇게 극복하더군요. 그게 자긍심이죠. 눌리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극복하는 것. 세상을 대하는 훨씬 더 적극적인 태도죠.” 우리 의젓하게 살자 그녀가 인터뷰 내내 강조한 말이 있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모두가 다 힘드니까, 힘든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말이었다. “자기 분야에서 잘하시는 분에게는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박수를 치고 싶어요. 힘 안 드는 일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의젓하게 살아야 해요. 옆도 좀 돌아보고. 애들이에요? 울기만 하면 돼요?” 최근에 흔히 쓰이는 헬조선이라는 말에 대해서, 그녀는 매섭게 비판했다.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 치고, 우리를 누가 여기에 넣은 건가요? 우리가 만든 건데. 금수저, 흙수저… 뭐 어쩌라고요. 형편이 어려운 건 다 알지만 누구나 어려워요. 그런데 승복이라는 게 없고 ‘넌 운이 좋아서 그런 거고 난 재수 없어서 이러고 있어서 너 미워’, 이거 아니에요? 나보다 힘들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을 돌아보면 나도 힘을 얻고 그러는 건데 애들처럼 찡찡거려서 되겠어요? 부딪혀서 아프면 자기가 부딪힌 거지 그게 기둥이 때렸어요, 땅바닥이 때렸어요? 자꾸 남 탓하고 여건 탓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정서가 그렇게 가는 것 같아서…. 남 탓하는 건 어마어마하게 잘 하고 자기를 돌아보는 건 못 하는 것 같아서 걱정돼요. 우리 좀 의젓하게 살자고요.” 책이 즐거우면 계속 하고 싶어진다 서원 본관을 둘러보니 그녀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이 만든 책들이 보였다. 한 학기 교양 수업을 듣고 만든 책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책들이었다. 그녀의 수업은 교재가 없고 시험이 없는 대신, 각자 학기말에 교재를 만들어 내게 한다. 그녀가 갖고 있는 공부 철학이다. “공부는 자기가 스스로 해야죠.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것 정도로 제가 잘 가르칠 자신이 없어요. 내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였고. 요즘 부모님들은 어떻게 그렇게 자신이 넘치는지 모르겠어요.” 가끔씩 독자들이 물어보는 말, 손주가 책을 안 읽는데 어떻게 읽게 하느냐는 고민에 대해 전 교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말했다. “세상에! 아이가 책을 읽지 않으려 하면 읽지 말아야죠. 왜 읽어라 마라 해요. 아이는 책 읽는 시간이 즐거우면 나중에도 즐겁게 책을 읽게 돼요. 전 아무리 바빠도 잘 때가 되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줬어요. 아이들도 그 시간이 너무 즐겁기 때문에 책에 익숙해졌어요. 아이들에게 피아노 배우라고 들들 볶으면 아이들은 피아노를 배우는 게 아니라 들들 볶는 걸 배우게 돼서 대대로 들볶게 돼요. 그러나 엄마가 즐겁게 피아노를 치면 애들도 피아노를 치죠. 그걸 왜 억지로 시켜요? 책을 같이 재미있게 읽으세요. 즐거우면 즐거운 시간의 기억을 되풀이하고 싶어지죠. 그런데 즐거운 시간이 안 만들어지니 책과 멀어지는 거죠.” 고서의 향기를 품고 즐거움과 보람은 전 교수가 지향하는 공부법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로 행해졌다. “사람들이 운동이 중요하다는 거 다 알잖아요? 그런데 돈을 내고도 안 하기도 하고. 하지만 운동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건 노동이에요. 노동을 하면 보람이 있으니까. 그래서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는 게 제 주장입니다. 일을 안 시키면 약해져요. 제 아이들이 걷기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시킨 일은 현관에서 냉장고까지 우유를 배달하는 거였어요. 자기가 우유 배달을 안 하면 온 식구가 우유를 못 먹게 되죠. 얼마나 보람 있어요?” 전 교수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을 ‘말도 아닌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대신 ‘올바른 목적이 있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도 바르다’는 말을 믿고 있었다. 그러한 마음이 그녀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고 지금 여백서원의 주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어가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도 그녀다웠다. “나이 들면 얼마나 좋은데요. 저는 젊었을 때도 나이 들기를 소망했어요. 언제나 지금이 좋은 때여서, 두려움 등의 온갖 생각이 하나도 없어요.” 고서(古書)의 기품이 나는 전 교수 같은 분들이 세상에 온전히 남아 있으면 그게 바로 세상이 나아지는 길이 아닐는지. 여주에서 올라오는 차 안에서 내내 ‘말이 서야 나라가 선다’던 함석헌 선생의 문구가 맴돌았다.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서울대를 졸업하고, 1996년부터 모교인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지내다 올해 은퇴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수석연구원, 뮌헨 대학과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의 초빙교원을 겸임했다. 2011년 바이마르에서 ‘괴테금메달’을 수상했다. , , (공저), , , , , , 등 60여 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 2016-09-30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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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세상에 걸인 아가씨가 있다니
- 경의선 전철 안 입니다. 작은 키에 통통한 30대 초반의 젊은 여인이 구걸 전단지를 돌립니다. 한 눈에 봐도 병색이 있습니다. 우선 예감에 아이가 큰 병이 들어 병원비를 구걸하나보다 했습니다. 젊은 여자가 구걸을 한다는 것은 본인 스스로도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자칫 위험에 빠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나도 이렇게 구걸하는 젊은 여자는 처음 봅니다. 내 무릎에도 전단지를 놓습니다. 대부분 승객들은 전단지를 무슨 전염병 병균인양 기피 합니다. 그래도 사람이 그건 아니지 무슨 사연인지 들어는 봐야지 하는 심정으로 찬찬히 읽어봤습니다. 어려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불행하게도 머리를 다쳐 지적장애 3급 판정을 받은 장애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취업을 해보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녀도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아무도 써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저기 도움을 청해 봐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고 사랑으로 저에게 동정을 해 달라는 글입니다. 글 내용으로 보아 결혼도 안한 아가씨입니다. 전단지를 돌리고 나서는 연신 고개를 크게 숙여 절을 하는데 참 마음이 아픕니다. 예전에도 어른들이 늙거나 병신인 거지가 오면 불쌍하다고 밥을 주지만 젊은 거지가 오면 사지가 멀쩡한 놈이 일은 하지 않고 얻어먹으러 다닌다고 배척했습니다. 지금은 사지가 멀쩡해도 취업을 못하면 굶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정상인도 취업이 어려운 판에 장애인이 취업을 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는 걸 누구나 공감합니다. 누가 걸인 아가씨에 동전이라도 던져주나 하고 눈여겨보니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각박해서야 쓰나 하는 심정에서 5천원 지폐를 줬습니다. 걸인 아가씨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않은 큰돈을 받는 눈치입니다. 순간 짧게 기쁜 표정을 짓습니다. 어느 분이 가난한 집 아이를 데리고 슈퍼마켓으로 가서 바구니를 쥐어주며 돈은 걱정 말고 갖고 싶은 것을 다 담아 오라고 했답니다. 한참을 마켓을 돌면서 이것 들었다 놓고 저것 들었다 놓더니 겨우 500원짜리 과자 두 봉지를 담아오더랍니다. 아이가 자기가 갖고 싶은 속마음보다 그 돈을 지불해줄 사람의 주머니 걱정을 하는 것이라고 여겨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합니다. 다시 아이들을 내 몰며 돈은 걱정 말고 맘껏 담아오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속으로 한마디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단 하루 만이라도 행복을 맞보고 죽어야지’ 사람이라면 단 하루만이라도 걱정근심 없이 행복하기만 한 날이 있어야지요. 너무 큰 걸 바라는 것은 아니잖아요. 사람들은 가짜 걸인도 많다고 합니다. 걸인 아가씨가 용돈이 궁해서 쇼를 한 것이라면 정말 다행입니다.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가 너무 어려운 현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강화도의 장애인들이 키우는 콩나물 공장과 전기제품 나사 조이는 공장을 견학 한 적이 있습니다. 불과 몇 십 만원의 봉급을 주는데도 취업 희망자가 줄을 선다고 합니다. 콩나물만 키우지 말고 두부공장도 함께하면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제조 공정이 어려워 장애인은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볼트 조이는 곳도 두세 곳은 가능하지만 그 이상 되면 어려워합니다. 지적장애가 그렇게 무섭습니다. 세상에 거지 없는 나라가 없고 가난은 나라임금도 어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옛날이야기고 사회복지국가를 표방하는 현대사회에서 가난하지만 사람답게 살게는 해 줘야 복지국가입니다. 걸인에게도 아주 가끔은 소시민도 따뜻한 손을 내밀어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 2016-09-22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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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 들면 친구도 소용없다
- 동네 공원에서 할 일없이 벤치에 앉아있는 노인 분들을 보면 마음이 짠합니다. 나도 저 나이되면 저렇게 될까? 스스로에게 반문도 해 봅니다. 어제의 조국근대화이 역군들이 나날이 변하는 새로운 IT신기술에 적응하지 못하고 나이라는 덫에 걸려 젖은 낙엽처럼 공원 벤치에 조각상처럼 붙어 있습니다. 날지 못하는 날개 부러진 새와 같습니다. 이런 분들을 일으켜 세워 노동현장으로 또는 산업 역군이란 새로운 명찰을 다시 달아줄 일은 진정 없는 것인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풍부한 영양공급과 보건위생환경의 개선으로 노인의 건강도 좋아졌습니다. 지금의 70대는 과거의 40대와 맞먹는 체력과 지남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제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바로코앞에 다가 왔다고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고령화 시대입니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고령 사회에 노인을 위한 사회복지도 문제지만 집안에서도 갈 곳 없는 노인의 문제가 새롭게 부상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고령자의 일손도 필요했지만 산업사회에서는 고령자의 역할이 거의 필요 없습니다. 달나라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달나라에 가서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릅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노후를 보내던 방식으로 노후를 준비해서는 막상 우리가 노인이 되면 준비 부족으로 당황할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지금의 8~90대의 노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나는 관심을 갖고 지켜봅니다. 노년을 살아보지 않은 젊은 노인문제 전문가 보다 지금의 노년을 살고 있는 분들의 체험이 더욱 값지다고 생각합니다. 60세 정년퇴직하고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 건강을 가진 사람이 무었을 어떻게 하면 팔팔하게 100세 까지 행복하고 즐겁게 살다가 웃으며 저세상으로 갈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오늘 나랑 산책로에서 만난 분은 37년생으로 올해 79세라고 합니다. 스스로 건강관리를 잘 해서인지 젊게 보이고 건강해 보입니다. 엎드려 팔굽혀 펴기를 30개나 너끈히 해냅니다. 조심스럽게 하루의 일과를 물어봤습니다. 아침은 할머니가 더 주무시도록 6시에 집을 나와 3천 원짜리 해장국을 사 먹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전거를 친구삼아 자전거 전용도로를 2시간 정도 느리게 달리고 공원에 설치된 운동기구룰 이용하여 운동을 하다가 10쯤 도서관에 가서 신문이나 잡지 또는 책들을 두시간정도 뒤적이다 보면 점심때가 된다고 합니다. 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 시간은 어린이 대공원이나 잠실 올림픽 공원에 가서 산책도 하고 과천 경마장에 가서 마권은 사지 않고 달리는 말들을 구경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내게 내미는 수첩에는 매일 어디 갈 곳이 적혀있습니다. 오라는 곳은 없지만 체력에 맞춰 갈 곳을 미리 알아서 준비한다고 합니다. 친구들하고 같이 어울리면 좋지 않으냐고 내가 물어봤습니다. ‘친구 그거 나이 들면 아무 소용없어 태반은 죽고 요양원에 있기도 하지만 비교적 건강한 친구하고 만나지 않아, 나이가 드니 서로 말 하려해도 발음이 어눌하고 귀도 어두워 서로 잘 알아듣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말하다가 단어가 생각이 않나 서로 거시기, 거시기 하다가 말아, 이제는 만나지 않아.’ 하십니다. 노후 준비로 혼자 지내는 법을 미리 알아두고 연습하라고 충고 합니다. 식사도 혼자 챙겨 먹어야 하고 운동도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고 친구도 필요 없으니 혼자 놀러 다닐 곳도 미리 알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뇌 훈련으로 영어알파벳 ABCD를 외우고 한글 가나다라를 소리 내어 외우면 아주 좋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랬더니 귀에 소리가 들리는 이명현상도 줄어들고 눈도 많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알파벳 차례를 잊지 않으려고 정신 바짝 차린 덕분이랍니다. 나이든 분들의 오늘은 우리의 내일의 모습입니다. 오늘을 어떻게 지내는지 잘 살펴보면 선행학습의 효과가 있습니다.
- 2016-09-22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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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잊어버리기
- 치매가 아니어도 점점 기억력이 깜박깜박할 때가 많아 실수 하지 말아야한다. 가족이 여러 명 살 경우 서로 서로 챙기지만 필자의 경우에도 두 아이가 모두 결혼하여 출가한 상태이니 모든 생활에서 신혼 때와 마찬가지로 단출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둘만 혹은 혼자만 사시는 어르신들은 마음은 청년이라고 해도 실제 생활에서는 난감한 부분들이 많으니 모든 생활 속에 유비무환정신을 적용해야 할 일이 많다. 조심해야할 부분, 기억해야할 부분이 많다. 필자가 처음 아파트 분양받아 이사했을 때 불이 났을 때처럼 온 아파트에 경계의 사이렌이 울리는 경우가 있었다. 연세 드신 분이 외출하시면서 가스불위에 뭔가를 올려놓고 나가셔서 자욱한 연기와 냄새로 주변이웃에서 119에 신고하고 사이렌을 관리실에서 울리고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지켜보는 가운데 소방관이 문을 따고 들어가서 가스차단하고 난감한 불나기 직전의 상황 종료시킬 때 할머니께서 어딘가에서 아무생각없이 귀가하다 당신의 댁에서 문제가 생긴 것을 알고 고개도 못들고 댁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적이 있다. 바라보던 여러 명의 이웃들의 혀를 차는 장면 지금도 기억난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매월 해야 할 일/매일 해야할 일을 적어서 부착해 눈에 띄는 곳에 해놓는다. 매월별 작성할 일 생일이나 미리 연락받은 결혼식에 깜빡 잊고 못가거나 꼭 해야 할 일을 잊지 않도록 적어놓는다. 매달 나가야할 비용은 자동으로 이체하여 가산금을 물지 않도록 한다. 매일 해야 할일 가전제품 특히 타이머가 부착 안된 가전제품이나 가스사용제품을 점검한다. 외출할 경우 공교롭게 배터리가 방전되기 전에 꼭 충전을 충분히 해놓는다. 외출후 귀가할 때는 모든 주머니내용물을 일정한 곳에 꺼내놓아 꼭 챙긴다. 일기예보 확인하여 날씨에 맞추어 우산 등을 챙기도록 한다. 당뇨환자의 경우 외출 시는 물론 가정에서도 주스나 캔디등을 준비해둔다. 대중교통이동시 차량의 손잡이 잡고 하차하고 계단도 언제나 가장자리 손잡이를 잡을 수 있는 위치에서 오르내려 자신의 몸을 스스로 보호한다. (계단몇개 건너뛰어 무릎이나 발목 다치면 아주 기동력 떨어진다.) 기타 해야 할이나 기억할일 도장 잘 잃어버리는 사람의 경우 인감 아무나 못 떼도록 본인외 발급중지를 해놔야한다. 주방 옆에는 부착형 소화기를 부착해놓는다. (만일에 사태를 대비하여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시니어 분들 단출하게 자동문의 경우 배터리를 준비해둔다. 휴대전화를 긴급통화버튼을 급히 연락해도 될 곳으로 우선적으로 저장해둔다. 와인따개등 어쩌다 사용하지만 꼭 필요한 제품의 경우 따로 서랍 속에 챙긴다. 집안 인테리어를 안전한 스타일로 하도록 한다. (젊은 취향으로 아일랜드식탁의 의자를 들여놓았다가 허리를 다친 분을 봤다.) 밤은 물론 낮에도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날 때 조심해서 이동한다. (갑자기 서두르다가 다친 분들 자녀들도 게속 입원하니 짜증내는 것도 목격했다.)
- 2016-09-22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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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을 부탁해 PART11] 우리들의 숙면 비결 공개
- [동년기자들이 전해주는 비결 ①]발가락 박수까지 총동원 박미령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쟤는 잠들면 업어 가도 몰라. 여자애가 그래서 쓰겠니? 쯧쯧.” 어려서 외할머니에게서 귀가 닳도록 듣던 질책이다. 그 뜻도 모르는 채 잠드는 것이 부도덕한 일로 여겨져 ‘너무 깊이 잠들면 안 되는 거구나. 어떻게 하면 잠귀가 밝을 수 있을까’ 같은 얼토당토않은 고민에 휩싸인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 늙으니 꿀잠을 자던 시절은 훅 가고 오히려 잠이 안 와 고통 받을 때가 많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업혀 가도 좋으니 푹 좀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코를 기관차 지나가는 소리처럼 화끈하게 고는 남편과 사는 친구가 있다. 언젠가 그가 친정에 가서 자던 날 친정 식구는 모두 날밤을 새웠다. 물론 모두 각자의 방에서 잤지만 기관차 소리는 밤새 쉴 새 없이 달려 각 방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베개만 대면 잠을 자서 남편 바로 옆에서 30년 동안 자도 그가 코 고는 줄은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야말로 천생연분이다. 평생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게 자는 그 친구가 부럽다. 불면의 밤엔 시계 소리도 고통 어쩌다 ‘불면의 군단’에게 공격이라도 받은 날엔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하며 양을 수없이 세도 효과가 없다. 그리고 시계 소리는 갈수록 더 크게 들린다. ‘묵음 시계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요즘은 좋아하는 커피도 오후에는 겁이 나서 못 마신다. 물론 오후에 커피를 삼가도 잠 안 오는 날은 여전히 있다. 궁리 끝에 어디선가 주워들은 불면증을 없애는 몇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우선 자기 전에 따뜻한 우유를 한 컵씩 마셔 보았다. 약간 효과가 있는 듯했으나 그 방법은 필자에게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다. 빼도 시원치 않은 살이 푹푹 찌는 것이었다. 바로 중단하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았다. 다음은 머리맡에 양파 반쪽을 놓고 잠을 청하는 방법이다. 이것도 효과가 있는 듯했지만 또 다른 부작용이 있었다. 온몸에서 양파 냄새가 진동했다. 향수는 뿌리지 못할망정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찾아보니 술을 약간 마시는 방법도 있다. ‘아하! 그럼 이왕이면 몸에 좋다는 적포도주를 마셔 봐야겠다. 이건 일거양득이네! 바로 이거였어’ 했다. 이것은 효과가 꽤 있었다. 그러나 잠드는 술의 양이 처음에는 3분의 1잔이었으나 점차 2분의 1잔, 1잔 이런 식으로 점점 늘어가니 원하지 않은 술고래가 되기 십상이었다. 술고래는 한 집에 남편 한 명으로 족하지 않은가. 양쪽 발가락 부딪치면 특효 다음 시도한 것은 우연히 요즘 유행하는 1인 방송 ‘팟방’에서 들은 어느 명상전문가 여박사의 불면증 해소법이었다. “양쪽 엄지발가락 부딪치기를 1000번 하면 잠이 와요.” 필자는 ‘아니 1000번을 어떻게 해. 앓느니 죽겠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똑딱이는 시계 소리 들으며 새벽 3시까지 있다 보니 슬그머니 두 발가락을 맞대고 부딪치기 시작했다. 1000번이 되기 전 언제 잤는지 모르게 스르르 잠들고 말았다. 그래서 요즘은 이 방법을 쓴다. 또 한 가지가 있다. 이것도 지나가다 방송에서 들은 것 같은데 검지와 중지 사이 손바닥 부분을 양손 모두 지압하는 방법이다. 이 두 가지가 필자가 잠이 안 올 때 100% 효험을 보는 방법이다. [동년기자들이 전해주는 비결 ②]미루었던 일 하는 날 최갑숙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필자에게 불면의 밤은 드물다. 태생적으로 잠꾸러기이다. 초저녁 일찍 잠들면 이른 아침에 기상한다. 잠버릇으로는 올림픽 금메달감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초등학교 시절 우연히 마셔 본 첫 커피로 밤잠을 자지 못한 적은 있다. 그 밤이 보름밤이라 마당 가득히 내려앉아 있는 월광이 마치 북극권 백야같이 비치는 신비한 세상을 만들었는데 커피와의 상승효과로 불면의 밤을 보낸 적이 있다. 잠 때문에 부부싸움 불면 대처법을 두고 필자 부부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어 다툼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남편이 피로가 쌓이거나 감기몸살을 앓아 개고생할 때면 필자는 수면이 치유의 첩경이란 판단으로 편안한 잠자리 제공한다. 그러나 남편은 언제나 아플 때는 잘 먹어야 병을 쉽게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보다는 입맛을 잃어 식욕이 감퇴한 상태에서 먹지 못하면 병을 빨리 털고 일어날 수 없다는 강박증으로 필자를 들볶으며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달라고 요구한다. 필자는 이왕 입맛도 없으니 잠이나 푹 자자는 주장이다. 자고 일어나서 병기가 꺾인 후엔 입맛이 살아날 것이고 그때 잘 먹으면 된다는 것이다. 먹는 것은 평소에 잘 먹어 면역력을 강화해 놓아야지 병이 든 후에는 장기 투병하여야 하는 병이 아닌 바에야 임시로 먹는 것이 면역력을 더 강하게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우선 병을 이기기 위하여 에너지를 만들어야 하는데 에너지 생산의 원천은 수면이 아니겠는가. 아프면 필자는 무조건 수면부터 취한다. 수면은 쌓인 피로도 해소해 주면서 힘을 주어 병을 쉽게 털어 버리게 한다. 아이들이 어려서 아플 때도 필자는 업어 재우는 데 치중했다. 반면 남편은 아이에게 먹이려고 하지 않고 업어서 재우려고만 한다고 성화가 대단하였다. 늘 필자 판단과 방법이 훨씬 효과가 있는데도 어떻게 된 일인지 남편은 자기의 주장을 끝까지 고집한다. 장롱 정리는 잠의 보약 아무리 잠꾸러기이고 불면은 문제 되지 않는 사람이라도 가끔 불편스럽고 고통스러운 불면의 밤은 있다. 갑자기 심한 일을 하였다거나 잠자는 시간을 놓쳤거나 무거운 고민거리가 머리를 짓누르면 잠은 멀리멀리 달아나 버린다. 필자가 정서적으로 컨트롤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해도 마찬가지다. 이럴 경우 잠드는 시간이 길게 늘어지면서 머리가 띵하고, 몸은 나른해지며, 삶의 무게도 천근만근이 되어 버린다. 이런 날 필자는 그 시간이 오밤중이든 새벽이든 가리지 않고 미루어 두었던 하기 싫은 일을 시작한다. 일단 벌떡 일어나 커피부터 진하게 블랙으로 한 잔 마신다. 그리곤 미뤄 두었던 장롱 정리를 한다. 때로는 주위를 소란하게 하는 소음을 만드는 일을 할 때도 있다. 가령 덜커덕덜커덕 시끄럽게 가구를 옮기고, 책장 정리를 하며, 물소리 시끄럽게 내면서 손빨래를 한다. 일부러 필자 자신이 몸과 소리에서 피로감이 들도록 몸을 움직인다. 필자가 사는 집은 차곡차곡 아래, 위, 옆이 이어져 소리의 이동이 쉬운 집단 주거단지가 아니라 소음을 불평할 사람이 없다. 잠을 자기 위해 책을 읽거나 조용히 사색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잠이 오지 않으면 첫 증상이 머리가 맑지 못하고 정신 집중이 되지 않으니 그런 일들은 할 수가 없다. 팔다리를 움직여 하는 일이 몸을 피로하게 만들어 달아난 잠을 불러온다. [동년기자들이 전해주는 비결 ③]막걸리 한 사발이면 업어 가도 몰라 백외섭 동년기자 bravopress@etoday.co.kr 이른 새벽 마을 체육공원에서 운동하는 시니어가 많다. 이들에게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잠을 잘 자지 못해 운동하는 것”이라고 한다. 잠 잘 자는 필자에겐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렇다고 항상 잠을 잘 잤던 것은 아니다. 잠을 그르친 날도 있었다. 그때마다 이런저런 시도도 해봤지만 허사였다. 그런데 막걸리 한 사발이 만병통치약임을 알게 됐다. 그것은 필자에겐 지리상 대발견에 버금가는 역사적 발견이었다. 전전반측 불면 극복작전 불면증은 대입 준비에 바빴던 고교 시절에 시작되었다. 문제 하나를 해결하기 위하여 생각을 깊게 할수록 잠은 저 멀리 도망갔다. 그렇게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잠이 들면 그날은 공부나 컨디션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서도 불면증은 개선의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필자는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체질에 맞는 잠 잘 자는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마인드컨트롤, 따뜻한 물로 목욕하기, 책 읽기, 땀 흘려 운동하기 등 좋다는 방법을 총동원하였으나 신통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막걸리 한 잔에 잠이 잘 든다는 것을 터득하였다. 막걸리 한 사발이 확실한 수면제! 강원 원주시의 모 부대에서 3년 복무하였는데 황당하게도 막걸리 한 잔 마실 수 없는 금주 부대였다.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은 법. 사회에서 막 배우기 시작한 막걸리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지휘관 눈을 피해 그 맛난 술을 마실 방법을 찾고 찾았다. 그런데 한 방법이 있었다. 농가 가게와의 내통이었다. 부대 철조망 가까운 곳에 조그만 농가 가게가 있었는데 돌멩이를 슬레이트 지붕에 던지면 가게주인이 얼굴을 내밀어 소주를 건네는 것이었다. 물론 소리를 내면 걸리기 때문에 주문은 수신호로 이뤄졌다. 큰 원을 그리면 큰 병, 두 팔을 높이 들면 중간 병, 한쪽 팔만 들면 작은 병을 의미했다. 필자와 동기 서너 명도 이 방법에 따라 소주 한 병을 획득했다. 갖은 노력끝에 얻은 소주는 입에 착착 감겼다. 하지만 별 안주도 없이 마시니 몇 잔 들이켜지도 못하고 눈이 감겼다. 이런 필자를 고참이 아니라 항우장사도 깨울 재주가 없었다. 아내와 40년 넘게 사는 동안 투정을 딱 한 번 들었었다. 술 마시고 집에 안 들어온 것이 화근이었다. 신혼 시절 가까운 친구 모임을 이 집 저 집 돌아가면서 했다. 그러던 중 한 친구가 큼직한 식당을 열었다. 당연히 일당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고, 방 하나는 철야 놀이터로 사용됐다. 우리는 그 방에서 잔을 연신 비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당시 있었던 ‘통행금지’가 막 해제될 때였다. 부랴부랴 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상황 끝이었다. 연년생 아이들을 도닥거리면서 뜬눈으로 기다리던 아내가 “전화라도 해주면 걱정이라도 않지”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전화할 정신이 있었으면 집에 오지”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것으로 상황을 종료했지만 잘못한 것은 필자가 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후엔 술은 매우 조심스럽게 마신다. 하지만 불면증이 깊어져 도무지 안 되겠다 싶으면 막걸리 한 사발 정도 마신다. 이렇게 하면 눈이 감기고 잠이 들어 아침까지 세상 모르게 잔다.
- 2016-09-2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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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추장 3kg가 공짜?
- 길을 지나다 보면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양손 가득 똑같은 화장지나 꾸러미를 들고 가는 걸 볼 수 있다. 처음엔 이상했지만, 실상을 알고부터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재미있게 해 준다며 불러 모으고는 값싼 물건을 비싸게 팔아먹는 사기꾼 모임에 다녀오는 길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노인 대상의 사기가 넘쳐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남자들보다는 대부분 아주머니나 할머니가 대상이다. 며칠 전 TV에서 할머니들을 모아놓고 재미있게 해주다가 값싼 물건을 고가로 팔아먹은 사기꾼 일당 이야기를 보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 자리에 계시던 할머니들이 우리를 재미있게 해주고 마음씨도 착한 사람들을 왜 못살게 구느냐면서 항의를 했다 한다.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재미있게 해주었다는 이유로 사기꾼들을 두둔까지 하셨을지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몇 해 전의 일이 생각난다.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우리 동네 사는 수영이 엄마가 필자를 붙잡았다. 지금 안 바쁘면 어디 좀 같이 가자고 한다. 별일은 없었지만 나갔다 오는 길이라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는데, 그래도 잡아끄는 대로 이끌려서 동네 입구의 어떤 건물 지하에 가게 되었다. 지하로 내려가 보니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꽤 넓은 공간이 있었고 그 안에 아줌마들이 바글바글 모여 앉아있었다. 필자가 여기 왜 따라왔나 생각해 봤더니 수영이 엄마가 같이 오면 고추장 3kg을 공짜로 준다고 해서였나 보다. 그런데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뉴스에서 본 대로 젊은 남자와 중년 남자 몇 명이 앞에서 아줌마들을 선동하며 게임도 시키고 노래도 부르며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아무것도 안 사도 된다고 수영이 엄마는 말했지만, 그 남자들은 이런저런 물건을 소개하며 구매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쪽 팀 저쪽 팀 나누어서 경쟁을 시키니 아줌마들이 비싼 냄비며 건강식품들을 마구 주문하는 것이었다. 결국, 수영이 엄마도 냄비세트를 구매했다. 필자는 정말 민망했다. 사고 싶은 물건도 없었고 필요한 물건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살 생각이 없었다. 직원은 그래도 괜찮다며 참가했으니 선물을 준다면서 고추장 3kg 들은 플라스틱 통을 주며 출석카드 한 장을 건네주었다. 내일 또 오시라며 웃는 앳된 청년이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자기에게 맞는 직장을 찾지 못하고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 안타깝고 걱정스럽다.그 후로도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는데 거기 모인 아줌마들 대부분이 매일 출석을 한다고 했다. 그렇게 재미있다고들 말하고 있었는데 필자는 그곳에 있는 시간이 재미있지도 않았으며 유치한데다 사기성이 농후해 보였는데도 다들 즐거워하고 있었다. 할머니도 아닌 아줌마들도 외로워서 그런 행사에 참여를 하는 걸까? 직원인 그 남자들이 내일도 또 오라고 하는데 나는 마음속으로 빨리 벗어나고만 싶었지 또 갈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물건을 사지 않는 민망한 시간을 버틴 대가로 고추장 3kg을 받아서 잘 먹긴 했다. 너무나 민망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다음엔 아무리 잡아끌어도 다시는 따라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또 했다.
- 2016-09-19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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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금이 뭐길래
- 살면서 참 잘한 일이구나 생각되는 일이 있다. 10여 년 전 어느 날 국민연금 가입하라는 안내장을 받았다. 연금의 개념도 잘 몰랐고 돈을 버는 사람도 아닌 주부의 입장에서 관심이 가지 않았다. 쓰기에도 바쁜데 매달 일정한 금액을 10년간 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워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위층 사는 선배 언니가 가입해 놓으라고 권했다. 직장인으로 수입이 있는 사람만 가입할 수 있는 줄 알았지만, 경제생활 하지 않는 사람도 들을 수 있으니 가입해 놓으면 언젠가 도움이 될 거라는 조언이었다. 필자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런데도 참 경제 활동엔 무심해서 별로 달갑게 들리진 않았어도 언니의 조언대로 가입신청을 했다. 처음엔 5~6만 원대로 시작했었지만 해가 갈수록 금액이 늘어나 마지막 몇 년간은 매달 10만 원가량을 내야 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10년이 지나 더는 돈을 내지 않게 되었는데 필자가 60세 되는 해부터 연금이 나왔다. 얼떨떨하기도 하고 공돈이 생긴 것 같아 매우 기분이 좋았다. 적은 금액을 냈었기 때문에 많이 나오진 않지만 30만 원 정도를 받고 있다. 필자가 죽을 때까지 받을 수 있다니 연금이란 제도가 참으로 고맙다. 그런 만큼 연금에 얽힌 이야기도 많이 있고 연금 사기라는 말도 들어 보았다. 필자는 미드(미국 드라마) 마니아다. 예전에 TV라면 KBS, MBC, SBS, 그리고 EBS밖에 몰랐는데 위성방송을 설치하고부터는 몇백 개나 되는 채널이 방송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한 번도 안 본 채널이 대다수이고 선호하는 채널이 몇 개 생겼다. 그때부터 손쉽게 미드를 보기 시작했는데 CSI 범죄 수사 시리즈물부터 인기 있다고 소문 난 미국 드라마를 열심히 찾아보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드라마가 위기의 주부들이다. 미국 부시 대통령 시절 영부인이 인터뷰하다가 위기의 주부 할 시간이라며 자리를 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기 있는 드라마이다. 게브리얼, 브리, 수잔, 르넷 등 매력적인 4명의 주부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우리 정서와는 다소 맞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지만 한 편 한 편의 에피소드가 나를 사로잡았다. 위기의 주부들은 시즌 8로 종영되었으니 내가 다 본 에피소드는 100여 편이 넘는다. 다 통쾌하고 재미있지만, 그 중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동네 아이들이 숨바꼭질하다가 이웃의 매클러스키 할머니 집의 지하실로 숨어들었다. 아이스크림이라도 꺼내먹으려고 냉동기를 열어보니 그 속에 할아버지 시체가 냉동되어 있었다. 살인자인 줄 알았는데 경찰에 잡혀간 할머니에 의해 밝혀진 진실은 20년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혼인신고를 못 하고 살아온 할머니는 연금을 받을 수 없는 게 두려워 남편이 죽은 사실을 숨기고 20년간을 냉동된 남편과 살며 연금을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때는 그 할머니가 살인자가 아닌 것에 안심했고 불쌍하다고 생각되어 이해를 해주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있다고 한다. 신문에 보니 유령과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부산의 한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13년 가까이 남편의 사망신고를 안 하고 연금을 받아 왔다는 것이다. 드라마에만 있는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실제로 이런 일이 있다니 놀라웠다. 그런데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새 나가는 세금의 액수가 엄청나서 각종 복지비를 지급하는 기관이 유령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부정으로 받은 돈은 환수한다고 한다. 마음이 혼란스럽고 심란하다. 안됐다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법을 어겼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할지...물론 잘못한 일이니 바로 잡아야 하고,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제도를 튼튼히 해서 미리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드라마로는 재미있었지만 참으로 씁쓸한 연금에 대한 이야기다.
- 2016-09-19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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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욕탕에서 일어난 일
- 추석 전날이다 가족이 있는 제주도 도민이라면 이런 날은 제사준비다 음식 장만이다 집 떠난 가족들이 올 것이니 그 준비다 하여 바쁠 것을 예상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조용하리라 생각하고 이 날을 택하여 목욕탕을 이용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목욕탕이 평소보다 사람들이 더 많다 많은 사람들 중에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보였다. 자식들에게 잘 보이려는 어르신들 미용일거다. 추석이 가까워 오면 시골의 미용실은 엄마들 파마하는 손님으로 언제나 성시를 이루곤 했다 필자와는 좀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몸 겨누기도 힘 드는 연세가 지긋이 드신 분이 스르르 탕의 바닥으로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엇~ 하면서 일어서려고 하는데 그 옆의 중년의 부인이 얼른 할머니를 안았다 워낙 부축한 중년여인의 동작이 재빨라 할머니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봉사가 몸에 배였는지 할머니를 잘 가누어 잠시 쉬게 했다. 쉰 후에는 우유도 드리고 전신 맛사지를 하여 정신이 금방 드셨다. 그리고는 친절한 부인은 할머니를 깨끗하게 씻겨 드렸다 다른 친절한 부인도 거들어 머리를 감겨 드리고……. 사고 뒤의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었다. 필자가 목욕을 마치고 옷장이 있는 방으로 나오니 그 할머니도 나오셨는데 옷장을 찾을 수 없는지 우왕좌왕했다. 옷장의 키도 잃어버렸고 어디쯤인지도 모르고 난감한 사태다. 누군가 먼저 탕에서 나와 준비가 된 아주머니 한 분이 친절하게 집전화 번호를 묻고 집이 어니냐고 물어보아도 아는 것은 전무……. 다행이라면 춥지 않은 기온이다. 목욕탕의 손님들 중 친절한 마음씨의 손님들이 이리저리 뛰면서 할머니를 도우려는 동안 카운터의 주인을 대표하는 사람은 남의 불 보듯 구경만 한다. 친절한 손님이 탕에 까지 들어가 목욕하고 있는 사람 중에 이 할머니를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큰소리로 도움을 구한다. 할머니에게는 목욕탕에 달린 미용실에서 가운을 얻어다가 입혀드리고 난리 통이 한동안 지속되었건만 여전히 주인 쪽에서는 아무 조치가 없다. 아직은 제주도 특유의 인정사회가 완전히 메말라 버리지 않았다 추리력이 있는 사람들이 머리 합하여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할머니 옷은 찾았다 옷을 입고 나니 그 때 들어온 손님이 할머니 집이 어디라고 일러준다. 목욕탕에서 일어난 일은 손님들의 손에서 종결이다. 단순한 이웃의 일일까? 필자는 이런 상황을 이번까지 세 번 보았다. 재미있는 것은 세 번 모두 상황의 마무리가 주인의 손이 아닌 손님들의 협동이란 것이다. 그 가게에서 일어난 사고인데 1차 해결의 책임자가 가게주인이니 가게 주인이 부재라면 주인을 대행할 종업원이어야 한다. 책임의 주체는 남의 일처럼 소극적인 협조정도이고 할머니를 직접 적극적으로 도운 사람들은 같은 손님이다. 가게 측에서는 도와준 손님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말도 없다 이웃에서 일어 난 불상사이니 이웃끼리 도우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인가? 대중목욕탕에는 노약자에 대한 어떤 경고문도 없고 제한도 없다 뜨거운 찜질방에는 경고문이 붙었으나 일반 탕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경고문도 없고 사고 후의 처리도 오로지 손님들의 호의로만 이루어지는 사고대처다. 지금은 글로벌 시대다. 이 태도가 미풍양속이라고 안일하게만 생각 할 수 있는 것인가.
- 2016-09-19 1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