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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싱글 PART2] 혼자라도 잘 입고(衣), 잘 먹고(食), 잘 사는(住) 방법
- 혼자라서 힘들고, 불편하고, 못 살 것이라는 생각은 이제 그만. 사는 건 혼자이지만, 싱글라이프를 도와주는 다양한 서비스가 당신의 생활에 든든한 지원군이 될 것이다. ◇ CHAPTER 1. 의(衣) 생활 아재 패션 탈피하는 맞춤형 스타일링 서비스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은 화려한 싱글라이프를 더욱 빛나게 해주는 요소다. 홀아비와 중년신사는 셔츠 한 장 차이로도 갈릴 수 있다. 누군가의 손길이 절실하다고 느낀다면, 패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는 건 어떨까? 1) 직접 디자인하는 나만의 옷 ‘스트라입스(stripes.co.kr)’ 패션 컨설턴트가 체형, 상황, 피부톤, 얼굴형, 라이프스타일에 적합한 스타일을 제안하는 맞춤형 서비스다. 기성복이 아닌, 자기 몸에 맞춰 결점은 보완하고 매력은 살리는 최적의 핏으로 디자인한 옷을 제작할 수 있다. 넥타이 연출법, 트렌드 컬러, 직업별 코디 등 유익한 패션 정보도 있어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싱글족을 위한 추천 셔츠 7종도 판매한다. 2) 쇼핑 걱정 덜어주는 코디박스 ‘유어스타일리스트(yourstylist.co.kr)’ 패션으로 젊은 감각을 뽐내고 싶다면 유어스타일리스트를 이용해보자. 일대일 상담(카카오톡 이용)을 통해 기본 상·하의를 비롯해 신발, 양말, 재킷 등 원하는 스타일을 완성할 수 있다. 제품을 먼저 받아보고 결제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코디 상품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부담이 없고, 반송이나 교환도 무료로 가능하다. “귀찮은 빨래, 스마트폰만 있으면 괜찮아요!” 세탁물이 많지 않은 1인가구용 미니드럼세탁기와 스타일러(살균·먼지제거·탈취 등 의류관리기)를 찾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이런 제품들은 적은 양의 세탁물을 관리하기엔 실용적이지만 이불이나 커튼 등을 세탁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단점. 셔츠 한 장에서부터 침구까지 세탁을 해결주고, 직접 세탁소를 찾는 번거로움을 덜어주는 ‘세탁 서비스 앱’이 주목받고 있다. 세탁물의 종류와 수량을 입력하고 수거 장소와 시간을 정하면 편리하고 빠르게 빨래를 해결할 수 있다. ◇ CHAPTER 2. 식(食) 생활 장보기 걱정 뚝! 서브스크립션 서비스 생수, 쌀, 야채, 과일 등 주기적으로 장을 봐야 하는 식재료가 있다. 혼자 지내다 보니 사려 했다가도 잊어버릴 때도 있고, 자주 장을 보는 것도 번거로운 일이다. 잡지나 우유처럼 주기별로, 원하는 만큼 받아볼 수 있는 서브스크립션(정기배송) 서비스를 이용하면 일일이 챙기지 않아도 냉장고가 텅텅 비는 날은 없을 것이다. 1) 쿠팡 정기배송(www.coupang.com) 라면, 통조림, 반조리·냉동식품, 조미료, 소스 등 즉석·가공식품을 비롯해 생수, 우유, 커피, 탄산음료 등 마실 거리와 시리얼, 과자, 사탕 등 간식 등을 주기적으로 받아볼 수 있다. 건강보조식품이나 다이어트 제품, 잡곡, 견과류, 애완 사료도 주문 가능하다. 월 1회부터, 4개월에 1회까지 주기를 고를 수 있고, 제품 수량도 원하는 만큼 선택할 수 있다. 2) 돌리버리(www.doleivery.co.kr) 수입과일 전문브랜드(Dole)에서 판매하는 과일을 정기적으로 배달해주는 서비스다. 1주에서 4주까지 기간을 설정하고 화~금요일 중 하루를 고르면 된다. 1인가구를 위한 바나나 1송이, 파인애플 1개, 코코넛 1개, 패션프루츠 1팩, 용과 1개 등으로 구성된 싱글박스(1~2인용, 1만9800원)가 있다. 간편하고 맛있게 삼시 세끼 챙기기 배달음식 하면 짜장면, 치킨, 피자 등을 떠올리겠지만 요즘은 1인가구를 위한 건강하고 실속 있는 배달음식 서비스가 늘고 있다. 요리 솜씨가 없는 이들의 걱정을 덜어주고, 매일 같은 반찬이 지겨운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기특한 서비스다. 1) 에이엠푸드(www.amfood.co.kr) 매일 새벽 우유를 배달해주듯 아침을 배달해주는 곳이다. 우유처럼 새벽에 서비스가 이뤄지기 때문에 현관문 배송주머니를 통해 전달받는다. 핑거푸드, 다이어트식단, 덮앤밥, 모닝죽 등으로 분류해 미리 짜놓은 한 달 식단대로 제공한다. 원하는 콘셉트를 고르면 신선한 재료로 정성껏 만든 건강 도시락으로 아침을 해결할 수 있다. (월 12만원) 2) 배민프레시(www.baeminfresh.com) 도시락뿐만 아니라 반찬, 국, 빵, 커피, 신선주스까지 정기적으로 배송한다. 저염·친환경·유기농·프리미엄 메뉴가 있어 건강을 염려하는 싱글족의 걱정을 덜어준다. ‘아내의 식탁’ 카테고리를 이용하면 원하는 요리를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레시피와 정량의 재료가 함께 배달돼 요리가 쉽고 편리해진다. 3) 식스레시피(www.6recipe.co.kr) 양을 사더라도 1인분씩 조리하다 보면 재료가 남기 마련. 그렇다고 오래두고 먹기엔 신선도가 떨어지니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다. 식스레시피는 필요한 재료를 1인분에 맞춰 소분해 배달해주는 서비스로 자투리 재료가 생기지 않게 요리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매일 새벽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서 들여오는 신선한 재료를 사용하고, 화학조미료와 설탕을 사용하지 않는 레시피를 제공한다. ◇ CHAPTER 3. 주(住) 생활 집안일 미루지 말고, 가사도우미 앱을 활용하자 주거 공간이 깨끗하게 정돈돼 있어야 기분도 쾌적하고 생활도 건강해진다. 그러나 혼자 살다 보면 청소하고 정리하는 일이 귀찮아질 때도 있고, 가끔은 혼자 청소하기 버거울 때도 있다. 그럴 땐 가사도우미 앱을 사용해 청소를 부탁하는 것도 방법이다. 안전한 우리 집 지킴이 ‘케이티 홈캠&홈매니저 서비스’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을 이용해 집을 관리하고 지킬 수 있는 시스템이다. ‘홈캠’ 서비스를 이용하면 상하좌우로 움직이는 카메라로 집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고, 위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 케이티텔레캅 직원이 출동하도록 연계돼 있다. ‘홈매니저’는 가스안전기(밸브 자동 잠금 기능), 도어락(실시간 문 열림 상태 확인), 열림 감지기(외부 침입 감지), 플러그(에너지 절감 및 전력량 확인)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 extra :: 생활+ 의식주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편리하고 즐거운 싱글라이프에 도움이 될 만한 서비스와 콘텐츠를 소개한다. 1) 뷰티 큐레이션 커머스 ‘글로시데이즈(www.glossydays.kr)’ 자신의 피부 타입에 맞춰 뷰티 전문가가 고른 화장품을 정기적으로 받아볼 수 있는 서비스다. 한 달에 한 번씩 받아볼 수 있는 정기배송 박스와 한정된 시즌에 맞춰 구매할 수 있는 스페셜 박스가 있다. 평균 6만원 상당의 화장품 5종을 월 1만6500원에 구입할 수 있다. 매월 15일 옵션을 선택하면 박스가 배달되는데, 이 절차가 번거롭다면 3~12개월 선불권을 이용하면 된다. 2) 싱글라이프 트렌드와 정보를 한눈에 ‘1집(1hows.com)’ 이미 혼자 살고 있거나 혼자 살고 싶은 사람, 또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사이트다. 플레이스(PLACE), 푸드(FOOD), 리빙(LIVING), 러브(LOVE) 등 싱글에게 유용한 콘텐츠를 살펴볼 수 있다. 3) 생활 심부름 서비스 앱 ‘띵똥’ 배달하지 않는 맛집 음식 배달뿐만 아니라, 마트 또는 편의점 장보기, 퀵서비스, A/S, 각종 관공서 업무, 약국 방문, 선물 배달 등 다양한 생활 심부름을 1만원 내외의 금액으로 대행한다. 365일 24시간 내내 이용 가능하고, 서비스 진행 과정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 2016-10-31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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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이건만 AnF' 이건만 대표, 인생 2막에 펼친 한글 패션 디자인 ‘제1장’
- 이번 한글날은 훈민정음 반포 570주년을 맞는 해라는 데 더욱 의미가 있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기 때문에 특별한 날이 아니면 한글을 인식하며 지내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매일같이 한글을 떠올리고 그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해 고민하는 이가 있다. 세계 최초로 한글 디자인 패션브랜드를 세상에 내놓았던 ‘이건만 에이엔에프(LEE GEON MAAN AnF)’의 이건만(李健滿·54) 대표다. 읽고 쓰기 쉬운 우리 한글이지만, 디자인에 접목하는 것에는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글이기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다는 그의 다부진 말투에는 남다른 사명감이 스며 있었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한글 디자인 패션브랜드를 세울 수 있었던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유학 생활을 하며 샘솟았던 애국심이 심지 역할을 했다. “해외 나가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고 하잖아요.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 갔는데 일본어로 된 책은 많고 한국어로 된 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방학 때면 한국에 나와 우리 책을 사서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죠. 또, 외국 작가들에게 한국적인 것을 찾으라고 하면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 것을 고르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한국의 문화를 디자인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었죠.” 다양한 한국 전통 문양들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이 역시 중국 문명의 영향 때문에 차별화하기가 어려웠다. 그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닌,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언어나 사상 등이 반영돼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맺혔다. 그리고 그 생각의 종착점에 ‘한글’이 있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아티스트로서 화려한 삶을 살 수도 있던 그였다. 그러나 교수로 활동하던 시절, 결국 심지에 불이 붙고야 말았다. “친구가 어느 날 ‘너 1야드에 실이 몇 개 들어가고 넥타이가 몇 개 나오는지 알아?’라고 묻더라고요. 모른다고 했죠. 미국에서 공부할 땐 그런 걸 배운 적도 없고, 특히 유럽은 브랜드를 중심으로 디자이너가 어떤 창의적인 디자인을 하느냐가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한국 섬유 시장은 OEM형태로 움직이다 보니 그런 것도 가르쳐야 했던 거예요. 내가 공부하고 온 걸 그대로 가르치는 것은 소용이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들에겐 ‘21세기엔 디자이너가 브랜드가 되는 시대가 온다. 너희들의 몸값이 달라지고 디자이너가 경영자가 돼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근데 그 말을 들은 의대, 공대 다니던 학생들이 전과를 한 거예요. 덜컥 책임감이 생기고 겁이 나더라고요.” 그의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은 자신이 이야기했던 것들은 그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디자이너는 직급이 올라가도 차장 정도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한마디로 디자인만 해서는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인데, 멀쩡한 전공을 박차고 나온 학생들을 보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과연 그렇게 되느냐, 내 이야기가 맞느냐 틀리느냐를 증명해 내기 위해 그는 교수직을 뒤로하고 현장에 뛰어들게 된다. 그렇게 제자들과 합심해 만든 것이 지금의 ‘이건만’ 브랜드다. 한글과 패션, 트래디션과 트렌드를 접목하다 2000년, 처음 회사를 설립했을 때도 그랬고 현재까지 가장 힘든 점은 한글을 패션에 접목하는 일이라고 한다. 알파벳처럼 나열문자가 아닌 자음과 모음이 어우러지는 입체문자인 한글을 제품에 효과적으로 입히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특히 한국인에게는 한글이 언어이기 때문에 디자인 요소가 아닌 글자로 읽힌다는 게 문제였어요. 그래서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는 과정을 거쳤죠. 한글의 형태적 분석도 하지만, 그보다는 한글이 가진 의미에 대해 공부했어요. ‘한글이 대체 우리에게 뭐지?’라는 물음을 던지고 그런 고민을 디자인에 담으려고 했죠. 디자이너들도 고충이 있죠. 지금까지 디자인한 작업물만 3000개가 넘는데 또 새로운 것을 창작해야 하니까요. 우린 다른 곳처럼 카피할 수 있는 디자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쟁업체도 없으니 오히려 더 힘들죠.” 그렇다고 그들만 한글 디자인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오래 버티지 못하거나 단기적인 작업에 그쳤다고 한다. 이 대표는 그만큼 한글을 패션에 접목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 설명했다. “한글과 패션, 한마디로 트래디션(tradition)과 트렌드(trend)라 할 수 있죠. 어찌 보면 그 두 가지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차라리 한글 디자인으로 패션이 아닌 자개함 같은 소품을 만드는 게 훨씬 쉬울 거예요. 그렇게 하면 그저 인사동에서 사는 관광 상품에 지나지 않거든요. 한국 사람이라면 그런 기념품을 더욱 살 이유가 없죠. 그래서 역설적으로 스카프, 넥타이, 핸드백 제품을 디자인하게 됐어요.” 차별화된 전략 덕분에 이건만 브랜드의 제품은 국내외 인사와 패션 마니아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건만 한글 넥타이는 청와대·정부부처·공공기관의 귀빈 의전용 명품으로 납품됐고, 한국 브랜드 최초로 일본 대형 백화점에 입점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우여곡절도 많고 힘든 점이 많았지만, 이만하면 성공반열에 올랐다 할 수 있지 않은가? 그에게 ‘성공’이란 조금 다른 의미였다. “아마 실패한 것들을 이야기하자면 무척 많을 거예요. 아무래도 추진하던 일이 실패하면 그만큼 금전적으로 손해가 생기거든요. 저는 그걸 수업료라고 해요. 수업료 굉장히 많이 냈습니다(웃음). 그런데 성공의 기준이 뭐냐. 성공과 출세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출세는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건데, 그렇게 따지면 아직 출세는 못 한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일을 시작하고 대학에 관련 커리큘럼이 생기고, 많은 유통라인에 개인 디자이너 브랜드의 입점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것에 제가 작은 역할을 했다고 봐요. 돈 벌고 유명해지는 출세보다는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는 성공을 하고 싶어요. 출세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 바로 낫씽(nothing)이지만, 성공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도 역사에 남고 하나의 장르를 열고 패러다임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성공입니다.” 디자이너 경영자가 이어갈 ‘이건만 에이엔에프’ 그는 후배 디자이너들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러한 점은 ‘이건만 에이엔에프’만의 경영방침에서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열정을 발휘하는 이 대표는 경력자보다는 신진 디자이너 채용을 우선시하고, 매출의 20%가량을 디자인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사업을 시작할 때에도 목표로 삼은 것 중 가장 첫 번째가 ‘동종 업계 디자이너 월급의 2배를 주는 회사’였다고 한다. 디자이너 출신 경영자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회사와 후배들을 향한 애정으로 에너지가 가득한 그에게도 요즘 걱정거리가 생겼다. 나이가 드니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실감한다고. 열심히 운동하며 자기 관리에 힘쓰면서도 디자이너들의 역량 강화에 더욱 힘을 쏟게 된다는 이 대표다. “요샌 나이 드는 게 무섭더라고요. 아,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그냥 이대로 끝나버리는 거 아냐? 그런데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쥐고 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외만 봐도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명품 브랜드가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하고 있죠. 코코 샤넬이 죽었다고 그 브랜드가 힘을 잃은 것은 아니잖아요. 브랜드를 이끌어갈 디자이너를 키웠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우리 직원들에게도 디자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영, 마케팅, 유통, 소비자 심리 등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어요. 제 욕심에 그런 거지만, 아마 다들 엄청 피곤할 거예요. 그래도 우리 브랜드를 물려줄 인재를 만들려면 어쩔 수 없죠.” 그는 한글이 담긴 디자인 브랜드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또 더 많은 이들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힘들고 더디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명감도 있었다. “일이 힘들수록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해요. 내가 이 일을 왜 하는가? 돈을 위해서? 돈을 벌려고 했으면 다른 일이 얼마든지 있겠죠. 명예를 위해서? 그럼 대학교수로 남아 있었겠죠. 브랜드를 하나 육성하려면 굉장히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해요. 애초에 요행을 바라고 시작한 일은 아니니까 서두르지 않죠. 남들보다 큰 솥을 만들었기 때문에 밥은 늦게 짓더라도 그만큼 더 많이 지으면 되잖아요. 이미 이만큼 달려왔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요. 끝도 보이지 않지만 그 시작도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와버렸죠.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돌아가나요? 일단 달리고 보는 거죠.” 인생 2막, 얻는 게 없어도 일단 달리고 본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 속에 어쩐지 순탄치만은 않았을 지난 일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10여 년, 한글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혹시 후회하는 마음은 없는지 물었다. “아마 대학에서 교수생활도 하고, 굉장히 유명한 아티스트가 됐을 것 같아요. 하지만 결코 후회는 안 해요. 그 삶은 지금이라도 다 벗어던지고 할 수 있는 것들이거든요. 오히려 공부를 많이 한 건 후회해요. 대학교, 대학원, 그리고 유학까지. 지금 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겠다 싶어요. 똑똑하고 아는 게 많다고 사업을 잘하고 세상사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러한 후회 역시 이만큼 살아봐서 알게 된 것이라고. 그는 공부하던 30대 중반까지를 인생 1막, 그 이후로부터 현재의 삶을 인생 2막이라고 설명했다. “인생 1막은 어느 정도 계획대로 됐어요. 공부는 열심히 하고 노력하면 점수 잘 받아서 좋은 대학 가고 그것에 만족할 수 있거든요. 근데 인생 2막은 노력한다고 다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왜냐하면 공부는 정량이 있고 그 조건에 맞추면 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들 머리 굴리고 있거든요. 변수가 생기죠. 내비게이션이 안 막히는 길을 알려 주면 그대로 가나요? 머리 써서 다른 길로 가는데 또 막히잖아요. 그러니 게임이 안 되죠. 근데 아직은 다 내 것만 같아서 욕심도 내고 그렇기 때문에 실패하더라도 달릴 수 있는 것 같아요. 2막까지는 노력한 만큼 얻는 게 없더라도 일단 해보려고요.” 그는 노력하는 만큼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인생 3막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때가 되면 얼마만큼을 노력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혜안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간의 수명이 1000년 정도 되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거예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 인생의 룰을 깨닫게 되는 거죠. 아마 인생 3막은 그런 룰을 깨달았을 때 찾아오는 게 아닐까 해요.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알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구분하는 시기인 거죠. 그러면 자연히 무리한 계획을 세우거나 욕심을 부리지도 않을 거고요. 그렇게 욕심을 덜고 농부의 마음으로 늙어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끝으로, 그에게 인생 3막은 언제쯤 오리라 예상하는지 물었다. “글쎄요. 철들면 죽는다잖아요. 아마 저도 그냥 이렇게 살다가 눈 감는 순간에 ‘아휴,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한마디 하고 깨닫지 않을까요?”
- 2016-10-0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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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여행 갈 때 뭐 입고 가지?
- 얼마 전 한 여행사에서 유럽 단체 여행객에게 ‘등산복은 피해 주세요’ 라는 문자를 보내서 큰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 기사를 보고 여행사가 왜 여행자의 복장까지 제한하는지 의아 했다. 관광객 개인적 취향까지 여행사에서 간섭하는 것은 지나친 관섭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문자의 대상이 대충 필자와 비슷한 세대의 유럽관광객이라고 하니 연대감에 살짝 발끈하기까지 했다. 여행 갈 때 편리성, 간편성 등 기능적 면에서 등산복만 한 옷이 있을까? 특히 금방 비가 왔다 그쳤다 를 반복하는 유럽의 변덕스런 날씨에 방수, 방풍, 투습 기능이 있는 고어텍스 등산 재킷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적절한 여행 차림새 일지도 모른다고 격하게 자기변호를 했었다. 새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져서 기사의 달린 댓글을 모두 읽어 보았다. 댓글을 단 대부분의 사람이 젊은이들로 어머니 아버지 제발 등산복 좀 입지 말아요, 성당이나 왕궁 등이 산이냐 왜 등산복을 입는가? 예의가 아니다. 우리나라 아줌마 아저씨들 만나면 너무 창피하다고 까지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이런 젊은이들의 생각을 엿보며 씁쓸하면서 5년 전에 이집트 여행을 갔을 때가 떠올랐다. 카이로를 제외한 도시는 나일 강을 따라 크루즈를 한 적이 있다. 초호화 크루즈가 아니라 도시 간 이동수단 정도의 소박한 크루즈였다. 이용자 중 동양인은 필자와 친구 그리고 서너 명의 일본인 뿐 이고 대부분이 유럽의 시니어 들이었다. 낮 시간에는 볼륨 감 넘치는 유럽의 시니어 들은 거의 반나체의 모습으로 수영을 하거나 선탠을 즐기곤 하였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모두 리셉션 장에 모였을 때 예상치 못한 모습에 깜짝 놀랐다. 유럽 시니어 들은 모두 화려한 성장으로 갈아입고 내려온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짧은 바지에 티셔츠 차림인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냥 한 끼 식사를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우아하게 차려입고 만찬을 즐겼다. 구두 색깔 까지 완벽하게 맞춰 입고 온 유럽 시니어 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다. 해외여행 갈 때 등산복이 좋으면 등산복 입자. 현지인이 비웃으면 비웃으라. 해라. 그리고 당당하게 말하라. ‘우리나라에서 등산복은 등산할 때만 입지 않고 평상복 여행복으로 다 입는다’ 라고. 다행히 요즘은 등산복이 기능성은 살리고 디자인도 멋진 일상복과 등산복의 경계가 모호한 것들이 많이 나왔다. 아웃도어 브랜드 들이 등산복을 좀 변형한 여행복도 많이 내놓고 있다. 그러니 여행갈 때 편한 등산복이 좋으면 당당하게 취향대로 입고 가자. 그리고 조금 여유가 있다면 예쁜 원피스나, 멋진 나비넥타이에 정장 재킷 정도는 한 벌씩 만 준비해 보는 건 어떨까? 낮에 관광할 때는 편하게 등산복 입고 저녁에 근사한 레스토랑에 갈 때, 미술관이나 성당 갈 때 한번 정도는 멋지게 차려 입고 간다면 더 근사한 여행이 되지 않을까? 젊은 사람들이나 현지인 시선 때문이 아니라 나의 멋진 여행을 위해서 T. P. O(시간, 장소, 상황)에 맞는 여행복을 준비하여 적절하게 즐길 수 있다면 여행의 추억에 더 근사하게 남을 것이다.
- 2016-09-30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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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데스크의 ‘독자 전상서’] '패션 테러리스트' 탈피 선언
- 저는 옷 입는 데는 잠방이입니다. 무신경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걸치고 나왔다가 푸른색 양복 하의에 노란색 스포츠 양말 차림이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한심한 것은 이 차림이 괴상망측하단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온종일 돌아다녔다는 겁니다. 저녁에 집에 들어가서 아내로부터 “패션 테러리스트”란 핀잔도 듣고서야 문제의 본질을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저보다 연배가 위인 시니어들도 옷에 신경을 쓰시는 분들이 많다는 걸 기획기사 ‘내가 패셔니스트, 패셔니스타- 나만의 코디법’ 데스크를 보면서 알게 됐습니다. 다음은 박혜경 동년기자님이 쓰신 ‘나는 아직 패셔니스타일까’ 내용입니다. “필자도 좀 튀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어 유행은 다 따라 해 보았다. 그래서 젊은 시절 미니를 화끈하게 입고 명동에 갔다가 명동파출소에 잡혀간 적이 있다. (중략) 아직 딱딱한 정장보다는 자유롭고 예쁜 옷이 좋다. 끈만 달려 어깨가 드러나는 원피스도 필자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박 동년기자님처럼 사실 패셔니스트, 패셔티니타가 되고 싶다는 결연한 의지가 있다면 활용할 수 있는 아이템은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강신영 동년기자님의 기사 ‘댄스가 패셔니스트로 만들어주다’를 보면 기자님은 나비넥타이로 변신을 시도하신다고 합니다. “남자가 ‘패셔니스트’ 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다. (중략) 그러나 필자는 댄스스포츠를 일찍이 시작한 덕에 옷도 그렇게 맞춰 입다 보니 종종 ‘패셔니스트’ 소리를 듣는다. (중략) 20여 년 전 댄스스포츠를 처음 시작할 때 호텔에서 파티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지도 강사는 남자들에게 나비넥타이를 매게 했다. (중략) 연말 파티 등 특별히 드레스 코드가 정해지지 않은 모임에서도 나비넥타이는 위력을 발휘한다.” 외국 시니어들 보면 참 부럽습니다. 대담한 스타일의 옷을 아주 자연스럽게 입습니다. 그런데 그게 참 때깔 납니다. 육미승 동년기자님의 ‘외국처럼 우리 시니어도 화끈한 코디를’은 이런 의미에서 한국 시니어들에 걸쭉한 된장 국물 같은 진한 여운을 줍니다. “1970년대에 영국에 갔다가 알아낸 것은 호호 할머니가 돼도 매니큐어 짙게 칠하고,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다이애나비처럼 하늘하늘한 꽃무늬 원피스에 예쁜 꽃 모자를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중략) (시니어도) 아주 눈에 나지 않는 한 인형처럼 곱상하게 차려입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시니어인 동년기자님들이 패션에 쏟는 열정을 보면서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푸른색 양복 하의에 노란색 스포츠 양말 차림으로 ’패션 테러리스트’가 됐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이에 못지않습니다. 파란색 티셔츠에 파란색 면바지의 깔 맞춤입니다. 오늘도 집에 가면 아내한테 “깔 맞춤 테러리스트”란 핀잔을 듣지 싶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하나 약속드립니다. 이제는 더는 ‘패션 테러리스트’가 되지 않겠습니다. 아침에 거울 한 번 보고 나오겠습니다. 동년기자들처럼 패셔니스트, 패셔니스타는 못될망정 이 약속은 꼭 지키겠습니다.
- 2016-08-22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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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패셔니스트- 나만의 코디법] 펑퍼짐한 바지는 가라!
- 필자는 ‘펑퍼짐한 바지’는 거부한다. 바지통이 타이트해 몸에 짝 달라붙고 길이도 조금 짧아 구두 뒷굽을 가리지 않는 디자인을 입는다. 색깔 역시 노색이 아닌 밝은 계통을 선택한다. 윗도리도 붙는 형태의 것으로 입어 타이트한 바지와 궁합을 맞춘다. 예전엔 위아래 옷이 모두 헐렁한 것을 선호했다. 활동에 편함을 주어서였다. 나이가 들 대로 든 사람이 몸에 끼이는 옷을 입을 경우 보는 사람들이 점잖지 못하다고 여길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었고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을 바꾸기 싫은 점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스타일에서 벗어났다. 자주 옷을 사지는 않아도 한마디로 젊은 티가 푹푹 나는 옷을 즐겨 입는다. 규율적 교복, 직장인 양복에서 진정한 패션으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혼사에 갈 때도 넥타이를 맨 정장을 고집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자주 청년 같다고 말한다. ◇점잖은 옷을 고집했던 인생일막 필자의 패션(패션이라는 말을 쓰기 뭣한 구석이 없진 않지만)은 젊을 때부터 ‘‘젊음’과는 거리가 있었다. 우선 옷이 우장 같이 커 펑퍼짐한 것을 입었다. 활동에 더 편한 옷을 선택한 결과다. 색감도 칙칙한 걸 좋아했다. 특히 검은색을 좋아했다. 그래서 필자가 입은 꼬락서니를 보면서 사람들이 우울해 할 정도였다. 그런데 시니어가 되면서 젊고 멋스러운 옷에 자꾸 눈이 갔다. 아마 오래된 펑퍼짐함과 칙칙함에 대한 싫증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시니어’라는 존재적 본질 때문에 스스로 이런저런 한계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계속 노티 풀풀 나게 입고 다녔다. 그리고 그게 무엇보다 익숙하고 편했다. ◇의류업계에 취업한 아들에게 옷가지 선사 받고선… 큰아들이 부산에 본사를 둔 의류업체에 취업했다. 간혹 필자에게 옷가지를 선물이라며 주었는데 모두 그 회사의 최신 패션 브랜드였다. 받은 옷이니 버릴 수도 없어 할 수 없이 꽉 끼고 색깔이 튀는 옷을 입게 되었다. 처음 입을 땐 엉덩이가 끼어 못 입겠더니 자꾸 입으니 생각보다 편했다. 필자는 사진작가여서 야외활동을 많이 하는데 이제는 야외에서 입어도 별로 불편하지 않다. 색깔도 처음엔 다른 사람 보기에 민망했지만 이 역시 익숙해지니 괜찮았다. 옷도 술과 마찬가지로 중독이다. 아들 회사 브랜드를 자꾸 걸치니 이제는 종전의 스타일인 펑퍼짐하고 칙칙한 바지는 오히려 이상한 느낌이 든다. 신발도 예전의 직장인 티 풀풀 나는 스타일에서 신세대 형태로 바뀌었다. 양말 역시 목이 짧은 것을 신는다. 예전에는 양말과 구두를 옷장과 신발장 제일 위에 있는 거부터 신었는데 이젠 바지 색깔에 따라 변화를 주기도 한다. 더구나 반가운 것은 이런 차림으로 나서면 실제 나이(67세)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때로 10살 어리게 나이를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다른 사람 얘기 다 믿을 순 없지만. 남들의 시선도 시선이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젊게 옷을 입다 보니 마음과 행동도 젊어진다는 것이다. 또 젊은 감각의 옷은 이웃에게 즐거움을 준다. 불교에서 무재칠시(無財七施ㆍ돈 없이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를 중요하게 여기듯 필자의 경쾌한 스타일이 이웃의 눈에 즐거움을 주면 그 자체로 공덕 아니겠는가.
- 2016-08-09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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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패셔니스트- 나만의 코디법] 아내에게 권한 위임
- 요즘에는 상식을 파괴하는 옷 스타일이 많은 것 같다. 겨울에 반소매 티셔츠 하나 달랑 걸치고 다니는 대담무쌍한 젊은이들도 있고 아무리 자세히 봐도 반바지라고 인정할 수 없는 짧고 얇은 팬티를 당당히 입고 다니는 젊은 여성들도 많다. ◇아내는 최고의 코디 이렇게 상식파괴의 패션이 일반화된 지 오래되었지만 사람마다 자기에게 어울리는 옷은 있는 것 같다. 체형과 얼굴이 한국적이어서 개량한복이 특별히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엉덩이가 위로 착 달라붙고 얼굴 윤곽이 짙어 청바지에 남방 차림이 멋지게 어울리는 사람도 있다. 또 평소에도 정장 스타일이 제격인 사람이 있고 캐쥬얼이 맞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자기에게 맞는 스타일을 찾아 입는 것도 중요하나 자리마다 어울리는 옷을 적절하게 맞춰 입는 것도 패셔니스트의 기본 조건이다. 가령 격식을 잔뜩 갖추어야 할 자리에 입는 옷과 자유로운 모임에 입고 가야 할 옷이 다른 건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러한 상식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언젠가 사람마다 잘 어울리는 옷 색깔을 찾아주는 컬러리스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 강의 중에 마침 필자가 모델케이스로 앞에 나가게 되었는데 강사는 몇 가지 색깔의 천을 필자 몸에 걸쳐 보였다. 그리고는 수강생들과 함께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을 고르는 작업을 진행하였는데 필자에게는 창피스럽게도 밝은 핑크색이 잘 어울린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보게 되었다. 그 강사는 왜 핑크색이 잘 어울리는지 이론적으로도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강의가 계기가 되어 화사한 핑크색 넥타이를 하나 장만했다. 그러나 평소 무난한 색의 넥타이를 주로 선택하다가 파격을 추구하려니 영 신경이 쓰여 한두 번 매 보고는 옷장에 넣어 두었다. ◇헤어 스타일은 내맘 대로 필자의 경우 평소 옷이 ‘잘 어울린다’든지 ‘멋이 있다’는 말을 가끔 듣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비법이 있다. 아내가 시키는 대로 입는 것이다. 모든 옷을 아내가 골라주고 사 준다. 양복이 필요하다고 하면 백화점에 따라가서 가만히 서 있으면 적당한 것을 골라 준다. 안경에서부터 와이셔츠, 넥타이, 속옷, 잠옷, 등산복, 운동복, 구두나 운동화까지 필자가 선택해서 사 입고 다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헤어스타일만은 필자 마음대로 하고 다닌다. 약간 곱슬머리라서 좀 길게 하고 다니는 게 어울린다. 이렇게 헤어스타일 외에 모든 선택을 아내에게 맡기는 데는 확실한 논거가 있다. 아내의 패션 감각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아내는 주로 동대문 시장에서 몇천 원, 몇만 원짜리 옷을 사 입는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은 그 옷을 어느 백화점에서 구입했는지, 가격은 어떻게 되는지 무척 궁금해한다. 잘 어울리기도 하지만 매우 비싼 옷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받는 것이다. 아주 저렴하지만 잘 어울리는 옷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는 실패가 없는 아내의 예리한 감각을 인정하기에 필자는 옷에서 모든 선택을 아내에게 일임할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아파트지만 가족 넷이 사는 데 별문제 없고, 주는 대로 먹으니 속이 편하고, 골라주는 대로 입고 다니면 되므로 옷 걱정도 없다. 이정도면 의식주가 완벽하게 해결되었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 거기다가 주위에서 패션도 좋다고 하니 기분도 좋다.
- 2016-08-02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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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패셔니스트- 나만의 코디법 공개] 댄스가 패셔니스트로 만들어주다
- 남자가 ‘패셔니스트’ 소리를 듣기는 쉽지 않다. 부지런한 발발이 아내 덕분에 유난히 여러 가지 옷을 바꿔 입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거기서 거기이다. 그러나 필자는 댄스스포츠를 일찍이 시작한 덕에 옷도 그렇게 맞춰 입다 보니 종종 ‘패셔니스트’ 소리를 듣는다. ◇나비넥타이가 익숙해지다 20여 년 전 댄스스포츠를 처음 시작할 때 호텔에서 파티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지도 강사는 남자들에게 나비넥타이를 매게 했다. 일반 넥타이는 안 된다고 했다. 나비넥타이가 없는 사람들은 아예 입장을 안 시키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나비넥타이를 파는 곳이 많지 않아서 사놓고 입구에서 팔기도 했다. 그렇게 나비넥타이를 매고 돌아다니면 호텔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우리가 호텔 직원인 줄 알고 이것저것 묻기도 해서 더 어색해했다. 그러나 일단 나비넥타이를 매니 점차 이런 불편함이 가셨다. 해외에 출장을 다녀올 때는 나비넥타이를 일부러 사 오는 수고도 마다치 않았다. 사실 나비넥타이는 남자 댄서의 패션 아이템 중 다양한 변화를 줄 수 있는 오묘한 물건이다. 검은색 턱시도와 흰색 드레스 셔츠는 남들과 다를 것이 없는 반면 나비넥타이는 칼라도 다르게 맬 수 있고 모양도 독특하게 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댄스스포츠 강의를 여러 군데 다니는데 강의 갈 때는 항상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강단에 선다. 수강생과 강사가 패션에서 차이가 나야 수강생의 존경심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댄스스포츠 강사는 특히 춤꾼의 냄새가 나야 한다. 일반 넥타이로는 그런 야릇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없다. 연말 파티 등 특별히 드레스 코드가 정해지지 않은 모임에서도 나비넥타이는 위력을 발휘한다. 남들은 일반 넥타이나 캐주얼 복장을 하고 오지만 나비넥타이를 매면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 보인다. 부피도 작고 여간해서는 구겨지지 않으므로 휴대도 간편해서 좋다. 나비넥타이는 드레스 셔츠 가게에서 사면 5만 원 내외로 비싼 편이다. 그러나 서울 동대문 두타빌딩 뒤 동화 상가에 가면 하나에 2000~3000원이면 장만할 수 있다. ◇머플러를 두른다. 머플러는 여자들에게는 흔한 패션 아이템이지만 남자들이 패션용으로 활용하는 경우는 없다. 물론 겨울철에는 당연히 남자들도 머플러를 두르고 다니지만 보온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겉옷과 함께 대충 두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머플러는 목에 휘감아야 멋있다. 남자용 머플러는 색깔이 다양하지 않으므로 여자들 머플러 중에서 화려하지 않은 타입의 머플러를 고르면 된다. ◇조끼 패션도 좋다 어디 나갈 때 양복 상의를 갖춰 입자니 직장인 같고 티셔츠 차림으로 가자니 패션에 개념 없는 사람으로 보일까 걱정될 때가 있다. 이럴 때 훌륭한 패션 아이템이 조끼다. 조끼엔 마력이 있다. 입으면 단박에 세련됨으로 가득한 사람으로 바뀐다. 다만 망사 형태의 조끼는 낚시하러 다니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패션으로 입는 조끼라면 여러 형태의 조끼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필자 경우는 정장에 받쳐 입는 조끼도 많지만 캐주얼로 입을 수 있는 조끼도 많다. 주로 이월상품이나 중고 의류를 파는 곳에 가면 다양한 조끼를 살 수 있다.
- 2016-07-29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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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자서전] 60살에 배운 사진, 도랑치고 가재잡다
- 1, 지리산 청학동서 세상을 만나다 필자는 촌놈이다. 지리산 삼신봉 아래 청학동 계곡에서 세상을 만나서다. 청학동은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 일원을 이른다. 삼신봉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기암괴석으로 둘러쳐진 계곡을 돌고 돌아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하동읍까지 40리(약 15.7㎞), 진주시까지 100리(약 39.3㎞)다. 지금은 관광지로 많은 사람이 찾지만, 앞산 토끼와 뒷산 토끼가 서로 발맞출 수 있는 두메산골이었다. ‘정감록’을 비롯한 몇몇 옛 문헌에 신선들이 사는 이상향으로 등장한다. 청학이 노닐고 흉년, 질병, 난리가 없는 지상 낙원으로 신라 말기부터 전해오는 마을이다. 할아버지도 거창군 가조면 율리에서 그 이상향을 찾아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유불선합일경정유도교"의 신자들도 196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댕기 머리를 땋고 결혼 후에는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성은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는 풍습의 도인촌이다. 이곳으로 이주한 조부모와 부모는 화전을 일구어 밭농사를 지었다. 계곡 주위의 다소 반반한 터를 잡아 다랑논을 만들었다. 어느 가을날 그 밭에서 일하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빨치산에게 붙잡혔다. 부역을 시키거나 총살을 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소나무 둥치에 포박하여 둔 채로 그들은 떠나갔다. 어둠이 깔리자 두 분은 묶인 손의 밧줄을 간신히 풀고 일궈놓았던 논밭과 익어가던 곡식을 팽개친 채 빈 몸으로 10리(약 3.9㎞) 떨어진 대밭 몰이라는 아랫마을로 소개하여 삶의 터전을 새로 마련했다. 필자는 청학동서 배태하여 이곳에서 삼 형제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1950년 2월 초나흘 새벽닭이 울 무렵이었다. 배냇저고리에 쌓여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곳에서 유소년시절을 보냈다. 끼니를 챙기는 어머니 곁에서 딸처럼 아궁이에 불을 지피어 드리기도 하고 들녘에서 나물을 캐기도 하였다. 닳고 닳은 놋쇠 숟갈로 감자 껍질을 벗겨드리기도 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하동읍에 있는 하동중앙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밤에 공부하고 나면 콧구멍이 까맣게 그을렸다. 등잔불에 넣을 기름도 40~ 50분 걸어가야 하는 면사무소 근처의 가게에서 기름때 진득하게 낀 됫병에 짚으로 꼰 새끼줄을 묶어 조심스레 들고 와야 했다. 어머니 나이 33세에 필자를 낳았다. 큰 형님과는 10세, 둘째 형님과도 6세 터울이다. 할아버지의 만류로 9세에 초등학교에 입학(1958)했다. 징검다리가 있는 개울을 건너 신작로 고갯길을 돌고 도는 1시간 거리에 있는 청암초등학교였다. 공부 잘하고 달리기, 웅변, 그림 그리기 등 모든 부분에서 두각을 보였고 전교 학생회장도 했다. 중학교 역시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3년 동안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로 지역주민의 기대를 받고 자랐다. 중학교 때는 같은 학년의 친구 집에 입주하여 공부를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한 적도 있다. 중학생이 가정교사로 일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초등학교 모교 졸업식에서 축사한 특별한 경험이 있다. 동네 결혼식의 축사도 도맡아 했다. 2. “당신은 중책을 맡게 될 거야!” 거창대성고등학교를 졸업(71)한 후 72년 곧바로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1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자원입대하여 관제병으로 3년 만기 전역했다. 이후 77년 10월, 대학 졸업 직전에 쌍용그룹 고려화재해상보험㈜에 공채로 입사했다. 특종보험 언더라이팅 업무를 하다 기획조사부로 발령되어 신상품 개발 업무를 하여 국내 최초 골프보험, 낚시보험 등의 레저보험을 개발하였다. 79년 4월 15일, 다섯 살 아래인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다. 보험감독원 등 외부기관 연수에서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재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83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스위스보험연수소(SITC)를 수료(사진)했다. 중견 사원이 되었을 때는 운영상 문제가 있었던 제주지점, 대전지점, 동대문지점장으로 부임하여 업적을 크게 올렸다. 그런 덕으로 96년 초 직장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해 부산, 경남, 제주를 관장하는 본부장(부산 주재)을 지냈다. 3, 47세에 용도폐기 호사다마라 했던가? 임원으로 승진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던 1997년 12월 말 갑작스럽게 해임되었다. 충격이었다. 나이 47세 때다.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으며 회사 일에 매달려온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한창 일할 나이였고 두 아들도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필자에게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넥타이를 매고 정상 출근하듯 집을 나서 공원에서 배회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필자가 바로 그 처지가 되었다. 4. “당신 제 명에 살게 하려고” 해임된 그 날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떻게 아내에게 알려야 하나를 고민했다. 믿고 있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망설여지기도 하였으나 그날로 아내에게 사실을 알렸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가? 서로를 알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용기를 내어 알렸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일이어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 시간을 보낸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참 잘 됐어요. 당신 제 명에 가게 하려고 하늘이 도왔나 봐요! 그동안 애 많이 쓰셨어요. 어디 산 입에 거미줄 치겠어요.” 우리 세대들이 다 그러했듯 나 역시 목표달성을 위하여 몸을 사리지 않고 밤낮으로 일했다. 거래처 접대와 직원 격려를 위한 회식 자리로 자정 무렵에야 겨우 혼자 살던 사택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가 제 명에 갈 수 없겠다 싶은 생각을 수차례 하였을 것이다. 5. “설상가상”, 이런 때 쓰는 말이구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한 다음 해 IMF 위기가 닥쳤다. 먹고 사는 일이 걱정거리로 등장했다. 재취업하려 발버둥 쳐봤지만, 필자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단계 모집 광고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현실은 분노를 부추겼고 속이 더 상했다. 분노를 일간신문 독자 투고란에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필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마음을 비워가기 시작했다. 체면이나 자존심을 조금씩 버렸다. 그런 과정에서 마음을 가장 잘 가라앉혔던 생각은 “나의 직장 운이 거기까진 데 어이하겠어”라고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기 시작했다. 6, 마당쇠가 되다 생계유지를 위한 일을 찾아야 했다. 퇴직 6개월이 지나서야 고용노동부 고양시고용센터에 들러 실업급여를 청구했다. 처음엔 쑥스럽고 창피하여 신청을 미루고 있었다. 국민연금을 해지하여 생활비로 사용했다. 다른 보험도 모두 해지하였다. 그 후 별별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만화방을 창업했다. 누워서도, 엎드려서도 만화책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도입으로 좋은 호응을 얻어 사업이 잘됐다. 수입을 조금이라도 늘리기 위하여 라면을 직접 끓여 팔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대조류였던 PC방이 성업하면서 이 업종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래서 이 사업을 접고 경기 부천시 상동에서 부대찌개 음식점을 창업해 운영했다. 90% 이상이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계를 누누이 들으면서도 많은 퇴직자가 덤벼드는 것이 요식업이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사 다닐 때 몸에 익힌 고객서비스 정신이 도움되어 친절한 음식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괜찮아졌다. ‘이런 맛에 음식점을 하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몸이었다. 계속 아팠다. 특히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계기를 맞았다. 때마침 가게를 욕심내는 사람이 나타나 적정한 가격 협상 끝에 가게를 넘겼다. 그 후에도 먹고 살기 위해서 다양한 일을 이어갔다. 월 40만 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의 조경관리사로 취업하여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쓰레기봉투를 치우는 일도 하였다. 마당쇠가 된 셈이다. 대형 고깃집 일산한우마을 점장도 하였고 일당을 받기 위하여 MBC 드라마 ‘주몽’ 엑스트라 출연도 해보았다. 마음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경험이 되었다. 강의 콘텐츠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7, 친구의 비명횡사, 인생의 전환점 되다 57세 때 가까운 친구를 비명횡사로 잃었다. 두 살 아래의 직장 친구였다. 평소 술은 하지 않았고 담배도 수년 전에 끊어 건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전날 다른 친구들과 남한산성에 올랐다. 산행 중 가슴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구급 차량을 불렀으나 고향 가는 차량 행렬에 막혀 늦게 도착한 119차량에 실려 가까운 성남시의 한 병원으로 가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정말 황당했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퇴직 후 보낸 10년의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열심히 산다고는 했지만, 내로라할만한 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필자도 친구와 같이 무의미한 생을 마감하겠구나 싶었다. ‘100세 장수시대를 맞아 보람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이제부터는 필자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다. 8, 60살에 사진 배우다 직장생활과 생업으로 잊고 있었지만, 은퇴하면 햇살 좋은 언덕에 캔버스를 세우고 수채화를 그리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필자가 사는 고양시에서 무료로 하는 사진강좌를 알게 되었다. 당시에 필자는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를 운영하면서 사진을 곁들인 글을 쓰고 있었다. 좀 더 좋은 사진을 생각하고 있던 때여서 강좌에 참여했다. 화필 대신에 카메라를 잡은 셈이다. 2010년 7월부터 한 달에 3회 6개월 강좌를 들었다. 필자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사진에 특별한 재능이나 솜씨를 갖고 있지 않은 초보자였다. 카메라도 소형 디지털카메라 한 대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리산 청학동 계곡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감성과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그렸던 경험, 전 직장에서 맡았던 홍보 관련 일과 사보편찬 업무가 도움돼 일취월장했다. 사진 취미활동은 여가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면서 건강도 챙기고 여러 사람이나 자연과 함께함으로써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게 했다. 때로는 작품으로 부가적 소득과 재능기부도 하면서 평생을 현역처럼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 했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뒤인 2010년 10월부터 공인 사진작가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일반인이 사진작가가 되는 길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에서 입선 이상을 하여 획득한 점수가 50점을 넘겨야 했다. 입선하면 2점을 받는다. 일 년 동안에 28회 출품해 절반 이상 낙선하였으나 어쨌든 15회의 수상으로 사진작가 명함을 달았다. 첫 번째로 출품했던 제1회 너브내전국감성사진공모전에 ‘형상II’이 동상의 영예를 안겨주어 출발이 순조로웠으나 다른 공모전에선 잘 뽑히지 않아 포기할 생각도 수차례 하였다. 그러나 사진 자체가 재미있었다. 꾸준하게 찍으며 관련 서적을 사서 공부하고 기회가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재능기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년 만인 2013년 7월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 질주’라는 작품이 입선했다. 2013년 10월에는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에서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공모전’의 사진 부문에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1월에는 부산일보 주최 제21회 ‘부일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닭장’이 1,166점 중에서 좋은 심사평으로 2위인 우수상 영예를 안았다. 부산일보는 2013년 12월 26일 자 기사에서 이렇게 전했다. "변용도 씨의 우수상 '닭장'은 울타리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닭의 붉은 머리 부분을 어두운 배경에서 강렬하게 보여 주어, 닭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 사회의 한 단면을 풍자하는 듯한 표현이 출중했다는 평을 받으며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9. 사진취미,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다 필자는 사진을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로 정의하고 ‘포토스토리텔러’라 자칭한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가 37만 장이다. 카메라는 가장 아끼는 친구다. 늘 함께한다.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됐다. 사진 활동이 바탕이 되어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다용도(多用途)로 후반생을 바쁘고도 보람 있게 산다. 사진이 인생이막의 텃밭이 되었다. 필자는 그 텃밭에 글솜씨, 강의 솜씨를 추가로 뿌렸다. 그런 씨앗에서 싹이 돋고,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미역국’ 외 다수의 작품으로 ‘순수문학지’ 신인상에 당선되어 수필가 명함을 달았다. 2012년에는 필자의 블로그 ‘촌놈의 세상보기’가 대한민국 100대 우수블로그로 선정됐다. 사진작가, 사진 칼럼니스트, 수필가, 저자, 강사(은퇴준비, 생애 재설계, 변화관리, 사진), 방송인(KBS 1TV ‘아침마당’, SBS라디오 ‘유영미 마음은 언제나 청춘’ 시니어리포터, 머니투데이 행복특강, 토마토TV 강연, 아리랑TV, CBS라디오, 한국직업방송), 기자(시니어조선 사진명예기자, 사회연대은행 KDB시니어브리지센터 두드림기자), 유어스테이지 시니어리더 겸 시니어리포터, ‘디카와 놀자’와 세화포토클럽 운영자다. 최근엔 경제신문 이투데이 자매지 브라보 마이라이프의 동년기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2013년 11월 ‘아름답게 보니 아름다워’, 2016년 1월 ‘카메라로 쓴 아름다운 이야기’를 출간하여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판매 중이다. 대우조선해양㈜와 미래창조과학부 산하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고려대 평생교육원 액티브시니어전문가과정 전임강사다.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우면청춘대학의 사진강좌를 2년째 맡아오고 있다. 사진이 근간이 되어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0. 도랑 치고 가재 잡다 대학을 입학하면서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고 지금은 경기 고양시 외곽의 한적한 전원 마을에서 자그마한 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아니하여도 현실을 인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일상을 즐긴다.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라고 한 어느 노부부 여행가의 생활 철학을 닮아가려 한다. 젊은 시절에 느끼지 못하였던 보람을 느끼며 산다. 전반생보다 후반생을 더 바쁘고 활기차게 보낸다. 그 바탕에 사진이 있다. 많지는 않아도 용돈도 번다.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는 형국의 삶을 산다. 2차 성장을 한 셈이다. 하버드대 성인발달연구소 윌리엄 새들러 교수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 인생의 2차 성장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제2의 절정기를 만들기 위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변함없는 도전이다. 필자의 이름을 ‘변함없는 용기로 도전하는 남자’로 풀이해본다. 그런 덕분에 누구나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은 KBS 1TV의 ‘아침마당’(2014, 11, 24)에 섭외를 받아 출연했다. ‘다시 시작하는 인생- 나의 두 번째 직업을 소개합니다’란 주제였다. 사진작가로, 은퇴준비강사로 안사람과 함께 출연해 삶의 정점을 새로 찍었다. 11,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세계적 사진작가 프랑스의 마크 리부가 있다. ‘에펠탑의 페인트공’, ‘꽃을 든 여인’ 등 유명한 작품을 만든 현존하는 사진작가다.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 리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 찍을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세계 최고의 경지에 이른 작가이지만, 더 나은 작품을 얻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겠다는 꿈을 꾼다. 희망으로 산다. 진정한 대 작가의 마음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새로운 경지로의 작품세계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발전을 거듭하려는 삶의 철학이, 남이 넘볼 수 없고 흉낼 수 없는 작품 세계를 만드는 것이라 여겨진다. 미래를 향해 또 다른 꿈을 꾼다. 필자 또한 늘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아직 오지 않은 생애 최고의 순간을 찾아 도전의 발길을 멈추지 않으련다. 또한 하늘이 인생의 구석구석에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경험과 지혜를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아낌없이 다 쓰고 가리라.
- 2016-07-0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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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구의 재발견
- 바야흐로 당구의 시대다. 예전에도 TV에서 간간이 당구 게임을 보여주기는 했었으나 지금은 아예 당구 전문 채널이 생겨 하루 종일 당구에 관한 방송을 내 보낸다. 이 방송을 보면서 당구도 이제 드디어 빛을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당구장에 대한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았다. 할 일 없는 동네 불량배들의 아지트로 인식되거나 담배 연기 자욱한 실내 분위기 때문에 인식이 좋지 않았었다. 필자 학교 다닐 때에는 고등학생은 출입에 제한될 정도로 우범지대 내지는 사행성 오락시설 취급을 받았다. 금방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당구 200 수준이 되려면 당시 소 한 마리는 팔아야 한다는 원성도 들었다. 등록금도 우골탑이라는 원성을 들을 때였으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당구장에 드나든다는 것 자체가 부모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TV에서 중계하는 ‘국토정중앙배 전국당구대회’를 보니, 이젠 당구도 제자리를 잡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초중고학생부와 대학부 등 학교 체육으로도 권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수들도 나비넥타이 등 규정 복장을 제대로 갖추고 경기에 임해 보기 좋았다. 필자가 아는 것은 여자들이 주로 즐기는 포켓볼과 프로들이 경기하는 3 쿠션 정도였는데 그 외에도 예술구, 10볼, 9볼, 스누커, 잉글리쉬 등 여러 종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원 쿠션이라는 종목도 있다. 3구를 놓고 경기하는데 적어도 원 쿠션 이상 쿠션을 거쳐서 맞혀야 하는 경기이다. 얼핏 쉬울 것 같은데 요령이 필요할 것 같다. 볼을 모아 놓으면 다음 공을 치기가 쉽지만, 너무 붙어 있으면 치기가 어려워진다. 쿠션 먼저 맞혀서 나머지 공 2개를 맞히는 뱅크 샷 외에는 방법이 없어진다. 3쿠션 전문 선수들이 결승에 올랐으나 쉬운 공을 굳이 3쿠션으로 어렵게 맞히는 것을 보니 아직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보였다. 가장 어려운 3쿠션으로 가기 전에 기량을 익히고, 일반 4구에 식상한 경우라면 재미도 보기 위해 즐길 만한 종목이다. 파울이 없고 정해 놓은 점수를 채우면 이긴다. 단 후순위로 친 사람까지 다 치고 나서 결과를 봐야 하는데 뒤에 친 사람도 정해 놓은 점수에 도달하면 승부치기한다. 한 이닝의 결과로 승부를 가린다. 여자들의 경기도 중계했다. 3쿠션 경기였는데 여성들의 섬세한 감각이 오히려 남자들을 능가하는 것 같았다. 흔히 당구는 세게 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래서 여성들에게도 적합한 운동이다. 요즘은 동네당구장도 동호회를 환영한다. 당구장이란 곳이 원래 직장인들이 대부분 주고객인데 요즘은 퇴직한 시니어들이 많아 고객층이 넓어졌다. 오전이나 직장인이 퇴근하기 전 시간인 오후6시까지는 손님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므로 빈 시간을 동호인들에게 할애하면 단골 고객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동호인들에게는 게임비를 할인해주거나 공짜 레슨을 해주는 등의 서비스를 한다. 시니어들은 고만고만한 또래들끼리 독학 수준으로 현재의 수준에 올랐지만, 이렇게 레슨을 통하면 금방 같이 즐길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다. 게임비는 보통 한 시간에 1만 원 정도 한다. 4명이 함께 즐겼다면 일인당 2,500원 꼴이다. 보통은 진 사람이 게임비를 내게 되므로 이긴 사람은 공짜로 친 격이 되는 것이다. 오후 5시까지는 10분에 1000원 받는 곳도 많다. 동호회를 만들어 운영하다 보니 여성들이 주로 모이는데 그렇게 되면 운영에 한계를 보이게 마련이다. 배우는 입장이므로 레슨 때 당연히 게임비를 계산해야 한다. 그렇게 한 두시간 즐기고 나면 식사해야 하는데 또 추가 비용이 나간다. 여성들은 지출에 익숙하지 않다. 끝나고 뒤풀이를 하게 되는데 여성들은 먼저 귀가해야 하기 때문에 남자들만 남는다.
- 2016-06-2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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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화장품을 닮은 남자, 카스인바이오 김진뢰 부사장
- 시니어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일’이다. 샐러리맨 사회로 만들어진 대한민국에서 시니어가 되어 마침내 만나게 되는 ‘은퇴’라는 단어에는 인생의 패배자라는 좌절감과 괴리감을 심어주게 만드는 힘마저 담겨 있다. 수많은 시니어가 은퇴 이후의 삶을 꿈꾸면서 계속해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은퇴 후 다시 일을 하는 어려움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경영의 세계에서 인생 2막을 열어가고 있는 김진뢰(金鎭雷·63) 카스인바이오 부사장을 만나 그 열정을 찾아본다. 화려하고 성공적이었던 과거를 가진 시니어일수록 은퇴 이후의 직업 설정에서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과거를 생각하면 선택폭이 줄어든 지금의 자신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과 함께 두려움도 있다. 주변의 걱정 어린 얘기들이 실제로도 벌어지는 것 아닐까. 이런저런 고민들이 시니어들에게 새로운 인생 2막을 여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있다. 화장품이 2막 인생 여는 전환점 “쉬운 일이 어딨어요. 다 발품 팔아야 되는 일이지.” 20대 청년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 그러나 이 말을 한 사람은 예순두 살의 시니어다. 바로 카스인바이오에서 부사장을 맡고 있는 김진뢰씨.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이 만든 2막 인생에 대해 다분히 생활인적인 감수성을 보여줬다. 그는 과거 삼성생명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상무이사까지 올라갔으며 삼성생명의 자회사였던 인피언컨설팅의 사장을 지내고 퇴직한, 성공적인 대기업형 인재였다. 그랬던 그가 근무하고 있는 카스인바이오는 사원수 20여 명 정도의 작은 회사로, 김 부사장은 화장품인 SRB 제품군을 맡고 있다. 고농도 효소 처리한 미강(현미에서 백미로 정미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쌀겨와 깔눈으로 이루어진 속껍질 가루)을 활용해 피부 자극도를 낮춘 ‘SRB(Stabilized Rice Bran)’는 사용해 본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으며 매니악한 유저층을 확장시키고 있는 중이다. 종전에는 쌀겨 성분자체에서 산화가 쉽게 일어나는 특성 때문에 최근까지 화장품에 적절히 활용되지 못했다. 하지만 SRB 환한 쌀뜨물 효소 세안제는 레티놀과 감마오리자놀, 비타민 B군과 비타민 E, 비오틴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 이에 따라 풍부한 보습과 영양공급, 브라이트닝 효과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잘나가던 삼성그룹 계열사 사장까지 했는데 갑자기 화장품 판매업으로 업종을 바꾸고 새로운 삶을 다지는 이유가 참 궁금했다. 그렇다. 아무리 호평을 받는 제품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근무했던 삼성이라는 거대한 조직과 비교하면 현재 근무하고 있는 곳은 더없이 작은 중소기업이다. 더군다나 그가 과거에 했던 보험과 현재 하는 유통은 하는 일의 양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 많은 격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 그가 자리를 옮길 수 있었는지가 궁금했다. 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엔지니어 연구원 출신인 사장이 굉장히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에요. 차근차근 회사를 키워온 과정을 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품이 좋았어요. 그래서 확신이 들었죠.” 한국에서의 중소기업 경영, 정말 대단한 일 경영자와 제품에 대한 믿음이 그의 선택을 결정하게 만들었다는 우직한 답변. 그러나 조직의 사이즈가 다르고 하는 일의 종류가 다른 일이었다. 어려움이 없었을 리 없다. 김 부사장은 삼성그룹의 이사에서 중소기업의 부사장이 되어 겪은 어려움을 솔직하게 설명했다. “제가 대기업에 오래 있어서 잘 몰랐는데, 요즘은 중소기업을 경영한다는 어려움을 피부로 느낍니다. 중소기업을 경영하시는 분들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우선 대기업의 갑질이 너무 심합니다. 상품 소개를 위해 미팅을 갔을 때 살면서 그렇게 푸대접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어요. 넥타이를 안 매고 갔더니 경비실에서부터 차단하더군요. 그나마 삼성 계열사 같은 데는 제가 전직 임원이다 보니 이름 치면 나와서 괜찮았지만…. 현직에 있다 나오면 눈높이를 최대한 낮추지 않으면 적응하기 어렵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30년간 비즈니스마인드를 가지고 살아왔으니 여기에 다른 아이템을 적용해도 될 것이란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어차피 고객을 끌어들여 상품을 판다는 기본적인 원리는 똑같지 않은가. 후배에게 ‘나 아직 얻어먹을 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 삼성을 떠난 임원들의 친목 모임 ‘성우회’에 가서도 자신있게 화장품 설명을 하거나 기업체 사업 설명회, 공기업 바자회, 골프 모임 등 하물며 생일파티 판촉물에도 화장품이 들어갈 정도니 김 부사장의 수완과 흡인력은 탁월하다. 어느 날에는 50개들이 화장품 박스를 들고 주차장에서부터 올라가야 하는 일도 있었다. 또, 어느 날에는 물건을 싣고 하루에 200km를 이동한 적도 있었다. 김 부사장은 그날을 다시 일하기 시작한 뒤 가장 힘들었던 날로 기억했다. 하루동안 미팅 장소에 도착해서 자료 보여주고, 샘플 주고, 설명을 반복하기를 수 차례. “막노동이 따로 없더군요. 그 외에도 제품 홍보를 위해 안 가본 데가 없습니다. 아파트 부녀회, 관리사무소 등등.” 그는 인터뷰 도중 SRB에 관한 다양한 동영상을 보여줬다. 그가 제품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자료들이다. 그가 얼마나 준비된 상태에서 일을 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힘들지 않으냐고 물어봤다. 그 말에 그는 “너무 즐겁다”라고 말했다. “‘이 제품, 좋은 제품이야’라면서 추천해주고 ‘같이 윈윈해보자’라고 말하는 거예요. 생각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시니어가 갖고 있는 노하우가 얼마나 많아요? 그게 사장되고 있어요. 삼성 출신 임원 모임에 나가보면 일하는 분들 수는 한 10% 남짓 되는 거 같아요. 저는 그건 아니다 싶어요. 연봉 몇 억씩 받다가 여기 와선 반도 못 받고 있지만, 제 용돈은 됩니다. 후배들한테는 ‘나 아직 얻어먹을 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죠. 지금도 후배나 친구를 만나면 제가 밥을 사요.” 그는 “솔직히 우리 세대가 직장을 나와서 요즘 하는 일이 뭐예요?”라고 되물었다. “산에 가는 거, 골프 치는 거, 당구장 가는 거. 요즘 평일에 종로에 있는 당구장에 가면 한 층을 전부 쓰고 당구대는 70개가 넘어요. 손님들을 보면 60대부터 할아버지들까지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사실 그런 건 주말에도 할 수 있는 것들이잖아요. 일을 하려면 대기업에 있었다는 자존심을 내려놔야 하는데, 쉽지 않죠.” 김 부사장은 조금만 둘러보면 ‘정말 할 게 많다’라고 말한다. 일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해당될 수 있는 말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 김 부사장은 말할 자격이 있다. 자신의 집을 손수 지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삼성에 있던 시절 타워팰리스를 분양받아서 살았다. 그런데 아이들이 커서 미국에 유학을 갔고 그러다보니 가족이라곤 아내와 단 둘인데 50평이 넘는 집에 살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타워팰리스는 세를 놓고 용인에 가지고 있던 땅에 전원주택을 지어서 살기로 했다. “집을 짓겠다니 제 아는 친구 열이면 열은 다 반대를 하더군요. 차라리 땅을 팔지 그러냐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땅을 팔려니 세금이 40%나 됐고 그렇게 세금 내고 땅을 팔자니 차라리 그냥 내가 거기에 집을 지어 사는 게 낫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설계, 감리 등등 직접 진행하여 6개월 동안 집을 지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집에 들어간 부품 종류 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1029개. 견적서를 받아본 그가 한 일은 인터넷에서 각 부품의 가격을 조회한 것이었다. 비용을 줄여 실속 있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덕분에 3.3㎡당 330만원으로 집을 지을 수 있었다. 그가 은퇴 후에도 꾸준하게 일할 수 있는 천성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인생 마지막 목표를 걸고 하는 일 “지금도 제가 참석하는 모임은 35개입니다. 거기서 알고 지내는 지인들의 입소문이 굉장히 도움이 되고 있죠. 처음에는 고생도 많이 했지만 점점 판매가 늘어나니까 재밌어요. 주문도 솔솔 들어오고 있고.” 올해 김 부사장이 계획하고 있는 건 제품 퀄리티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중국 시장 개척과 주부 사원 육성이다. “소비자보호원이 충북 음성에서 개원식을 할 때 저희 제품을 세트로 구매해서 손님들에게 방문 선물로 사용했어요. 그 입소문과 함께 제품에 대한 긍정적인 검증이 이뤄져서 공정거래위원회 바자회에서도 활용됐죠. 저희 제품에 대한 확신을 더욱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은퇴한 시니어들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새로운 세상에 맞닥뜨린 이라면 누구나 두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들이 무모한 일이라고 했지만 과감히 개척한 김 부사장이 갖고 있던 남다른 강점은 그런 모험심과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 아닐까. “대형 마트 입점을 거절당했을 때, 과거에 보험을 하면서 거절당하던 게 생각나고…. 하지만 보험은 안 보이는 걸 파는 일이잖아요. 지금 하는 건 눈에 보이는 물건이니 자신감이 있죠. 그래서 30년 동안 한 보험 세일즈보다 3년 동안 한 이 일이 더 맘에 들어요.” 낯선 사람과의 인터뷰는 항상 곤욕이다. 사람 만나는게 일인 기자도 이런 사람을 만나기는 흔치 않다. 의도한 것 같지는 않은데 이상하게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인터뷰 말미에 “저도 화장품 바꿔볼게요”라고 이실직고할 뻔했다. 겹겹이 쌓인 사람만남 만큼 농익은 열정으로 2막을 펼치는 그에게 꼭 이루고 싶은 소원이 하나 있다. 그의 나머지 시간을 모두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소원이다. “‘우리가 죽기 전에 가볼 만한 여행지 100곳’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는 그곳들 중 30곳을 여행해 봤어요. 그 100곳에 저희 ‘SRB’ 매장을 내는 게 생의 마지막 목표입니다.” 길은 어디에나 있다. “나는 아주 작은 것에도 다른 사람보다 매우 행복해하는 사람”이라 말하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한순간 반짝이는 별이 비친다.
- 2016-03-25 1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