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서른 바퀴 넘는 길을 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여행가 김찬삼은 ‘동양의 마르코 폴로’라 불릴 만큼 한국 해외여행의 선구자라고 일컫는다. 1958년부터 시작한 세계여행으로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160여 개국 1000여 개 도시에 이른다. 당시는 해외에 나가는 것이 어려웠던 때일 뿐 아니라 세계여행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인 걸 생각하면 가히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예나 지금이나 두말이 필요 없는 독보적인 여행의 아이콘이다. 하늘도시 영종에 그가 있다.
여신(旅神)이 내게 있어 내게 무슨 특혜를 베풀어준 것은 아니지만 매양 새로운 것을 보는 기쁨이 둘도 없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수난은 인간 수업에 있어서 고귀한 경험들이었습니다. -김찬삼의 ‘끝없는 여로’ 18쪽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을 기억하다
여행가 김찬삼 교수(1926~2003)는 인천인이며 세계인이다. 황해도에서 태어났지만 본적인 인천시 중구에서 성장하고 생을 마쳤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후 고등학교 지리 교사와 대학에서 지리학과 교수를 지내면서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죽은 지식”이라며 세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웠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김찬삼 교수의 여행 이야기를 인천의 하늘도시 영종에서 만날 수 있다.
바다와 공원이 어우러진 영종역사관은 봄을 코앞에 둔 계절에 여행가의 기획전시를 보여주는 중이다. 영종역사관 3층에서 열리는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특별기획전’은 3부로 나뉘어 전시된다.
1부는 ‘세계를 꿈꾸다’ 편으로 김찬삼 교수가 세계인의 꿈을 키웠던 인천에서의 성장 과정을 담았다. 학자와 저술가로서의 면모와 여행가로서 세계를 향한 도전 정신이 피부로 느껴진다. 2부는 ‘한국 최초의 세계여행가’ 편. 세계여행의 경로와 여정이 담긴 기록들을 귀한 자료들과 함께 소개했다. 세계일주의 첫 여행지 알래스카를 시작으로 40여 년 동안의 여행 이야기가 펼쳐진다. 3부는 ‘만인의 스승 김찬삼’으로 세계의 현장을 바탕으로 교육자로서 직접 보고 느낀 여정을 보여준다. 또한 그가 성장해온 인천과 후반기의 안식처였던 영종과 영종인으로서의 인연을 조명했다.
전시품 중 김 교수와 늘 함께했던 낡은 배낭과 모자와 신발은 특히 보는 이들에게 여행을 향한 강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마르코 폴로와 슈바이처를 사랑한 그는 여정 중에 슈바이처 박사도 만났다. 여행 중 굶주리다시피 해도 무한한 힘이 솟구치는 것은 매양 새로운 나라 사람들과 자연을 보는 기쁨이 둘도 없는 영양제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출간되었던 책과 포스터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하다. 카메라와 낡은 지도, 꼼꼼히 기록한 여행일지와 수만 장의 슬라이드 필름. 그중에 세계를 돌아다니며 몰았던 빨간색 딱정벌레차도 인상적이다. 1970년 독일 여행 중 독일인 친구에게 선물받았다는 폭스바겐이다. 또한 지도가방은 지도를 고정하는 형태의 캔버스 가방으로, 아크릴 덮개가 있어 비나 눈이 오는 경우에도 지도를 확인할 수 있다. 여행가에게 지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1960년대 중남미와 아프리카 여행 전에 친구에게 맡긴 유서는 여행가로서, 가장으로서 진중하다. “내 목적을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도 기쁘게 받으련다. 설령 내가 무슨 사고로 죽더라도 서러워 말고, 운명이라고 체념하고 부모에게 위로하여 줄 것이며 애들의 교육을 잘 부탁한다.”
그는 말한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인간 수업에 있어 여행처럼 좋은 것은 없다고 보인다. 세계 언어는 2000여 종, 이를 다 배우는 것보다는 소박하고 어진 미소가 무엇보다도 고귀한 것이 아닐까.” 전시장의 모든 사진마다 밝은 얼굴로 환하게 웃는 김찬삼 교수는 진정 세계의 나그네였다. (전시 기간 5월 31일까지)
하늘도시 영종과 김찬삼
우리에게 영종도는 듣기만 해도 먼 곳을 향한 그리움으로 짜릿해지는 곳이다. 그곳 어디쯤에서든 머리 위로 비행기가 날고 여행의 열망이 솟구친다. 그 옛날부터 영종도는 공항터가 될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이야기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영종도의 옛 이름은 자연도(紫燕島)였다. 섬에 제비가 많이 날아 붙여진, 문자 그대로 자줏빛 제비섬이다. 제비는 그렇다 치고 자줏빛은 해 저무는 영종섬의 붉다 못해 자줏빛이었던 하늘을 말함이라. 일몰에 물든 자줏빛 제비의 모습으로 명명된 자연도라 하니, 옛사람들의 지명 정하기의 기지와 운치는 멋스럽기 그지없다. 영종 또한 긴 마루를 가진 섬이란 뜻으로, 오늘날 활주로가 펼쳐진 공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현재 그곳엔 몇 분 간격으로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영종도는 김찬삼 교수에게 특별한 곳이다. 세계여행가 김찬삼 교수의 여행 책은 당시 손꼽히는 베스트셀러였다. 그 시절 웬만한 집의 책꽂이에는 김찬삼의 세계여행 전집이 있었다. 인천인인 그는 책의 인세로 영종도 구읍나루터 인근 바다 언덕에 공간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휴식을 하고 여행 원고 집필에 몰두했다. 또한 여행문화원과 여행도서관을 개관하기에 이른다. 더 많은 이들에게 세계여행의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픈 마음이었다. 하지만 영종국제도시가 생기면서 터를 잃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부근에 세계로 통하는 첫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이 자리 잡았고 이곳에 영종역사관이 들어섰다.
영종역사관 밖으로
영종역사관은 영종도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알리기 위한 공간이다. 실내는 물론이고 외부에서 유적과 유물을 만나볼 수 있는 전통정원이 앞마당이다. 정원을 몇 걸음 거닐다 보면 숲을 이룬 메타세쿼이아가 빽빽하다. 영종진공원은 운요호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일본의 급습으로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던 아픔의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에 역사적 상징물인 전몰영령추모비와 태평루라는 누각을 설치해서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메모리얼 정원으로 조성했다.
바다 옆으로 난 영종둘레길을 따라 건강백년길, 치유하늘길, 힐링바닷길의 산책 코스 또한 자연스럽다. 영종역사관을 둘러싼 시사이드파크는 영종하늘도시 인근의 공원으로 8㎞의 해변공원이 일품이다. 해변길을 따라 조성된 왕복 5.6㎞의 레일바이크도 신나고, 캠핑장과 하늘구름광장, 스카이데크 등을 두루 갖추고 있어 남녀노소 누구나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저녁 무렵이면 갯벌 풍경과 어우러지는 일몰이 신비롭다.
인천의 작은 올레길 예단포둘레길
영종도의 예단포항 둘레길은 작은 올레길이라 할 만큼 예쁘다. 기왕 영종도에 갔다면 한 번쯤 가볍게 걸어보는 것도 좋다. 선착장에 주차하고 출발하면 입구의 대나무숲과 잠깐 쉴 수 있는 정자를 만난다. 언덕을 오르면 눈앞에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물이 빠졌을 때는 갯벌이 진득하다. 길 옆으로 손톱만 한 야생화가 반짝이고, 오래된 나무가 여름이면 울창한 숲을 이룬다. 바다와 산이 공존하는 시원한 풍경으로 가슴이 탁 트인다. 왕복 30분 정도 길이어서 가뿐히 걸어보기를 추천한다.
영종도의 해변과 공항전망대
서해에 왔으면 바다를 따라 한 바퀴 달려보자. 마시안해변과 선녀바위해수욕장, 을왕리해수욕장과 왕산해변이 멀지 않은 간격으로 이어져 있으니 시원하게 돌아보면 된다. 해변가 주변으로 출렁다리와 숲도 있어서 시간이 여유롭다면 차분히 숲길을 걸어보는 맛도 운치 있다.
영종도 나들이길에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다면 좋을 듯하다. 공항 서쪽 오성산 자락에 인천공항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의 해발고도는 172m지만 막상 올라보면 높은 느낌은 아니다. 오성산과 공항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고, 활주로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들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 발아래로 공항철도가 지나가는 풍경은 덤이다.
1970~80년대 유년 시절을 보낸 남자라면, 학교 앞 문방구를 가득 채운 프라모델 키트와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즐긴 미니카 트랙을 기억할 것이다. 어느덧 중년이 된 이들이 어린 시절 추억을 취미로 바꾸고 있다.
누군가는 장난감 취급하고, 누군가는 마니악하다고 평가하지만, 프라모델을 취미로 즐기는 이들은 누구보다 몰입하며 행복을 느끼고 있다. 프라모델은 스케일 모델과 로봇으로 나뉜다. 타미야와 반다이남코가 대표적인 제조사다. 스케일 모델은 네 가지로 나뉜다. 밀리터리, 항공, 자동차와 오토바이, 함선이다. 타미야가 제조하는 스케일 모델 중에는 미니카의 인기가 가장 높고, 로봇 프라모델은 반다이남코의 건담이 시장의 90%를 차지한다.
어린 시절 미니카와 프라모델을 접해보지 않은 중장년이 없을 정도로 1970~80년대에는 대중적인 놀이였지만,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를 즐기기에는 ‘장난감’ 취급을 받는 데다 심지어 ‘비싸기까지’ 한 취미로 오해받기 일쑤여서 포기하는 이들이 많다. 한번 만들기 시작하면 하루 두세 시간은 기본이고, 키트 하나를 만드는 데 서너 달은 매달려야 하기에 기혼자라면 시간, 돈, 아내의 허락 세 가지가 있어야만 즐길 수 있는 취미로 꼽힌다. 만든 작품들을 집에 두려면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한다’는 가족들의 ‘핍박’(?)도 견뎌내야 한다.
장난감 시장을 주름잡았던 1980년대에 비하면 프라모델은 사양산업으로 꼽히지만, 어린 시절 품었던 프라모델에 대한 로망은 경제적 여유가 생긴 중장년의 지갑을 열고 있다.
“건전하잖아요!” 미니카, 밀리터리, 건담 프라모델을 즐기는 사람들을 만나 매력에 대해 묻자 한 명도 빠짐없이 한 말이다. 돈이 많이 드는 취미라는 것도 오해라고 입을 모은다. 직장인이 키트 하나를 사서 완성하는 데 평균 석 달이 걸리는데, 20만 원짜리 키트를 샀다면 한 달에 약 6만 7000원꼴이라며 꽤나 건전하지 않냐는 반론이다. 어찌 보면 구석에 몇 시간이고 앉아 꼬물거리는 게 ‘다 큰 어른이 장난감 하나 붙잡고 뭐하는 거지?’ 싶겠지만, 이들의 세계는 무척이나 심오하면서도 유쾌하다.
달려라 미니카!
본격적인 미니카 붐은 1987년 만화 ‘달려라 부메랑’의 연재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이후 서킷과 트랙이 만들어지고, 대회가 열리고, 룰과 규정이 생겼다. 트랙의 모든 레일을 세 번 돌아 출발 지점까지 먼저 완주한 사람이 승리하는데, 코스를 이탈하면 탈락이기 때문에 스피드와 안정성 두 가지를 다 잡아야 한다. 또한 공인 대회에 나가려면 반드시 본인이 직접 조립한 차로 참가해야 해, 미니카를 취미로 삼았다면 튜닝은 필수다.
‘웨에엥~~~~’ 트랙 세 바퀴를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초 남짓. 잘 달리는가 싶던 미니카가 점프 혹은 코너 구간에서 튕겨나갔다. “아, 생각처럼 잘 안 되네”라며 강두일(46) 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 씨의 작업대 위에는 각종 도구와 미니카 부품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트랙에 따라 미니카 튜닝이 달라져야 하니까, 하다 보면 성취감이 엄청 커요.” 강 씨의 미니카 사랑은 어느덧 5년 차가 됐다.
수원 미니카 경기장 ‘브이엑스알’에는 강 씨를 비롯해 미니카에 진심인 ‘아저씨들’이 매일 삼삼오오 모인다. 브이엑스알은 이성원(35) 씨와 최지수(33) 씨 부부가 운영하고 있다. 미니카와 프라모델로 유명한 타미야가 공식 경기장으로 지정한 세 곳(인천, 수원, 부산) 중 한 곳이다. 이 씨는 이전에 VR 체험장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이 대기하는 동안 심심하지 않도록 미니카 트랙을 작게 만들어뒀다. 그런데 오히려 아빠들이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심지어 트랙을 보러 방문하는 손님까지 생겼다. 부부가 미니카 경기장을 열게 된 계기다. 수원 브이엑스알의 매력은 개인 지정석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주로 40대 초반~50대 초반 고객이 많은데, 대부분 대표님이나 사장님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좋아해서’라는 핑계가 필요해 자녀와 함께 오는 아빠들도 많다고.
매장 내에는 회원들이 받아온 상패 80여 개가 진열돼 있었다. 그중에서도 2023년 국내 타미야 미니카 왕중왕전 1위 트로피가 눈에 띄었다. 트로피의 주인공은 김진오(40) 씨. 미니카를 만들기 시작한 지 2년도 안 됐지만 승리를 차지했다. “저희 어릴 땐 문방구마다 미니카 트랙이 있었어요. 또 그때는 뭐든지 고쳐 쓰던 시절이거든요. 아버지 어깨너머로 고쳐 쓰는 걸 봤으니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게 익숙했죠. 지인 추천으로 시작한 취미인데, 다른 취미들의 특징과 매력을 총집합해놓은 게 미니카더라고요.” 김 씨는 미니카의 매력으로 ‘창의적인 일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걸 꼽았다.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만나 형 동생 하는 사이가 되는 게 마치 초등학교 시절 미니카 트랙 앞에 모여 친해진 친구들 같아 재미있다고 했다.
즐기는 사람만 즐기는 취미라지만, 미니카 인기가 높아져서인지 올해 7월에는 인천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타미야 미니카 아시아 챌린지’가 열린다. 국내에서 국제 대회가 열리는 건 처음이다. 강두일 씨도, 김진오 씨도 예선을 통과해 챌린지에 국가대표로 나가는 게 목표다.
기동전사 건담
중장년에게 미니카 외에 또 하나의 로망은 ‘로봇’이다. 건담을 모르는 이는 없을 테다. 반다이남코에서 제작하는 건담 프라모델(이하 건프라)은 요즘에야 인기가 식었다지만, 중장년에게는 로망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취미다.
공덕수(54) 씨는 건프라 ‘해치 오픈’ 작가다. 어린 시절 문방구에서 로봇 키트를 몇 번 사다가 만들어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그러다 30대에 건프라 키트를 처음 구매했는데, 다섯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보고 ‘신세계’라고 느꼈단다. 2009년 여름, 건담을 더 정교하게 만들고 싶어 공방을 찾아간 게 본격적인 취미의 시작이었다. 취미는 이제 직업이 됐다. 공 씨가 만든 해치 오픈 작품들이 입소문을 타 작업 의뢰를 받기 시작하면서다. 지금은 작품을 만들어 판매도 하고 수업도 한다. 해치 오픈 설명 이미지를 판매하고 완성품 제작 주문을 받는 사이트 ‘만들자 닷컴’과 유튜브 채널 ‘FHO STUDIO’도 운영하고 있다.
건프라 조립은 방식에 따라 분야가 나뉜다. 설명서대로 만들면 스트레이트, 겉면을 손상시켜 낡게 만드는 웨더링, 건담과 멋진 배경을 만드는 디오라마, 외면에 금속 등 새로운 재료를 붙여 현실감을 높이는 디테일 업 등이 있다. 해치 오픈은 자동차 보닛을 열어 속을 보여주듯, 건프라의 갑옷을 열어 뼈대를 중심으로 2차 창작을 하는 걸 말한다. 공 씨는 해치 오픈이라는 장르를 국내에 널리 알리고 다듬어 정립한 장인이다. 공방에 다닐 때만 해도 2차 창작을 즐기는 사람들이 20여 명 있었지만,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
공 씨의 작업실에는 건프라 완성품이 거의 없다. 만드는 족족 판매됐기 때문이다. 2014년 처음 디자인한 이족 보행 로봇 ‘네피림’은 만들자마자 팔렸다. 주로 의뢰를 받아 작품을 만드는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로봇인 ‘크샤트리아’는 최고 1200만 원에 팔린 적도 있다. 공 씨처럼 로봇을 분해하고 조립해 하나의 작품을 만들려면 로봇의 구조와 메커니즘을 100% 이해해야 한다. 그는 건프라의 매력으로 ‘커스텀’을 꼽았다. 내가 원하는 대로, 상상하는 대로 로봇을 설계할 수 있다는 것. 그는 이제 자신만의 로봇을 만들고자 세계관을 정립하고 로봇 디자인을 하고 있다. “이전에는 건프라 키트를 모아서 다른 로봇을 만드는 데 부품으로 사용하거나 직접 재료를 자르고 다듬어 만들었는데, 이제는 3D 프린터를 활용하고 있어요. 1~2년 정도 프로그램을 배우고 1년 정도는 프린터로 재료들을 만들어 작업하고 있죠. 머릿속에 상상만 하던 로봇을 이제 직접 만들 수 있게 된 거예요. 건담처럼 저만의 로봇 IP를 만드는 게 꿈입니다.”
밀리터리 프라모델
2023년 11월 영화 ‘탑건:매버릭’이 재개봉하면서 중장년 남성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탑건’은 1986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로,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소련의 지원을 받는 어느 국가와 교전을 벌여 이기는 내용의 액션이다. 스토리는 뻔하지만 요즘처럼 CG(컴퓨터 그래픽스)가 보편화된 시절이 아니기에, 미 해군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실제 항공모함과 F-14 전투기가 등장해 흥행했다. 당시 이 영화로 스타덤에 오른 톰 크루즈가 후속작 ‘탑건:매버릭’으로 36년 만에 돌아오면서 중장년의 향수를 제대로 자극했다.
“‘탑건’이라는 영화 아세요? 이게 바로 그 영화에 나온 실제 전투기예요. 이 오토바이는 톰 크루즈가 탄 거고요.” 유승식(61) 씨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영화 속에 등장한 실제 전투기와 오토바이를 얼마나 정교하게 만드느냐가 스케일 모델의 매력이다. 회계사를 본업으로 하고 있는 유 씨는 스케일 모델 중에서도 밀리터리 덕후다. 어린 시절 프라모델을 구하러 다녔고, 일본에 사는 외할아버지가 보내주신 프라모델을 즐겨 만들었다. 일본어를 할 줄 알았던 아버지에게 일본어로 적힌 타미야 키트 설명서를 읽어달라고 하다가 직접 일본어를 배우기까지 했다. 스케일 모델의 매력은 ‘스토리’다. 실제 존재하는 것들을 크기를 줄여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각 제품마다 역사와 이야기가 있다. 유승식 씨는 탱크나 전투기에 얽힌 역사적 배경과 이야기를 알아가는 게 가장 큰 재미라고 했다. 그의 작업실에는 천장까지 밀리터리 키트가 쌓여 있고, 한편에는 일본어 프라모델 책이 가득 찬 책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더 많은 사람이 스케일 모델을 더 재미있게 즐기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그는 1991년 초 국내 최초의 모형 잡지 ‘모델러 2000’을 창간했다. 이후에는 군사 잡지 ‘컴뱃암즈’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은 유튜브 채널 ‘디오라마TV’를 운영하는데, 구독자가 약 1만 2000명에 이른다. 댓글에는 ‘작품으로 만난 분을 보니 반갑다’거나 ‘잡지에서 봤던 분’이라며 알아보는 구독자들도 있었다. 실제로 타미야 프라모델 팩토리 양재 본점에는 유승식 씨 외 세 명이 함께 만든 밀리터리 작품 ‘Lumbering Back to the Base to Refit’가 전시돼 있다.
유 씨는 어떻게 하면 제품에 얽힌 이야기를 더 재미있게 해줄 수 있을까 고민한다. 실제 탱크나 비행기가 어떤 식으로 작동하며, 어떤 특징이 있고, 언제 어디에서 쓰였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준다. 언젠가는 다시 군사 관련 책을 만들고 싶단다. “이야기를 알면 이 키트가 갖고 싶어지거든요. 저도 창고에 제품이 1500개 정도 더 있습니다. 같이 해야 재미있잖아요. 더 많은 분이 밀리터리 프라모델을 즐기면 좋겠어요.”
연기, 축구, 결혼. 안혜경(45)의 사랑을 읽는 세 가지 키워드다. 배우로서 연기에 대한 열정,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의 멤버로 축구에 대한 진심은 최고조다. 지난해 결혼으로 편안함과 안정감 또한 얻었다. 일과 가정의 균형 속 충만해진 사랑은 인생의 봄날을 깨웠다.
일반적으로 20대는 찬란한 청춘, 30대는 성숙해지는 시기, 40대는 안정기에 접어든다고 말한다. 안혜경 역시 이런 생각을 가졌는지, 자신의 인생에 ‘40’이라는 숫자가 성큼 다가오자 생각에 잠겼다. 상상 속과는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우울감에 사로잡혔다.
“어렸을 때는 40대가 되면 직업적으로 성공하고, 비싼 차를 몰고, 큰 집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남편과 애들이 있고, 저녁에는 다 같이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상상도 했죠. 그런데 실상은 내가 꿈꿔왔던 모습이 아니고,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39세에서 40세로 넘어가는 12월 31일 제야의 종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죠. 그래서 12월 말에 해외여행을 가서 일주일 정도 있었어요. 마흔이 되기 싫어서 일종의 도피를 했어요.”
그렇게 두려움에 떨었는데, 막상 40대의 삶을 산 안혜경은 왠지 모르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우울한 40대를 만들지 않기 위해 부단히 움직였고, 마침내 안정을 찾았다. “뭔가에 도전하는 것도 재밌고, 매년 조금씩이라도 성장하는 저를 발견하면 행복하고 기뻐요. 인생의 모토가 ‘어제보다 나은 오늘’입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나은 한 해를 보내야죠.”
기상캐스터에서 배우로
배우로 활동한 지 20년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안혜경에게는 지금도 종종 ‘기상캐스터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그는 “지금도 제가 연기를 하는지 모르는 분들이 많다. 속상할 때도 있지만 더 열심히 해서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안혜경은 2001년 MBC 기상캐스터로 데뷔했다. 그는 기상캐스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날씨에 맞는 의상을 입고 예보를 전해 생동감을 더했고, 결과적으로 날씨 예보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았다.
“날씨를 소개하면서 시청자들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가 내 옷차림만 보고도 시청자들이 날씨를 알 수 있게 하자는 생각이 들었죠. 기상캐스터는 보도국 소속이에요. 당시에는 무조건 단발머리에 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는데, 그걸 깨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국장님한테 혼나면서도 아침 뉴스 생방송 때 도전 해봤죠. 정말 더운 날에는 민소매 옷을 입었고,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썼어요. 바람 불면 스카프를 두르고 ‘오늘 추워요’라고 알려드렸죠. 날씨 예보가 재밌으니까 시청률이 정말 많이 올랐다고 하더라고요. 기분이 좋아져서 더욱 즐겁게 일했습니다.”
기상캐스터로서의 삶은 천직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러나 결혼과 출산으로 경력단절이 되는 선배들을 보면서 오래 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마침 당시 드라마 카메오 출연으로 연기의 맛을 알아가던 참이었던 그는 제일 잘나가던 순간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배우 데뷔작은 2006년 MBC 드라마 ‘진짜 진짜 좋아해’다. 이후로도 연기 활동을 꾸준히 했지만 배우로서 온전히 인정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도 했다.
“기상캐스터를 그만두니까 저의 타이틀이 되게 애매해지더라고요. 2010년쯤이었을 거예요. 비행기 탈 때 입국신고서에 직업을 쓰잖아요. 뭐라고 써야 할 지 모르겠어서 고민했죠. 배우로서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한 것 같지 않고, 스스로 당당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날도 그냥 ‘스튜던트’(Student, 학생)라고 써냈어요. 그리고 (이)효리한테 고민을 털어놓았죠. ‘입국신고서에 직업을 뭐라고 쓰냐’고 물어보니, 단번에 ‘나? 슈퍼스타’라는 답이 돌아오더라고요. 그때부터 저도 당당하게 배우라고 쓰게 됐습니다.”
친구의 조언과 함께 안혜경은 연극 무대에 서면서 배우로서 자신감을 찾았다. 그는 2014년 극단 ‘웃어’를 창립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다. 지난 연말부터 3월 3일까지는 연극 ‘정동진’으로 무대에 올랐다. 그의 무대와 연극에 대한 사랑은 실로 대단하다. 실제로 안혜경의 연기를 본 관객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고. 이렇게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그는 자신의 시간을 쌓아가고 있다.
“아무도 저를 불러주지 않을 때, 스스로 ‘왜 이렇게 쓸모없지’라고 느낄 때도 많았어요. 그럴 때 친구들과 뭉쳐서 극단을 만들게 됐고, 연기를 펼칠 수 있는 무대가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너무 좋았어요. 제가 삶에서 놓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연극이에요. 무대에 서면 매번 치유를 받아요. 연극은 매번 같은 연기가 나올 수 없다는 게 매력이에요. 그래서 배우로서 감정의 완급 조절 방법을 터득하게 됐고, 관객과 소통하면서 희열을 많이 느꼈습니다.”
‘골 때리는 그녀들’로 커진 축구애(愛)
2019년 안혜경이 보여준 행보는 다소 의외였다. SBS 예능 프로그램 ‘불타는 청춘’(이하 ‘불청’)에 최연소 새 친구로 합류한 것. ‘불청’은 중년 싱글들의 친구 찾기 예능 프로인데, 당시 마흔을 갓 넘긴 그의 출연은 신선했다. 안혜경 스스로도 ‘벌써 중년이 됐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테지만, 결과적으로 ‘불청’ 출연은 40대가 되고 제일 잘한 결정이 됐다.
“방송 활동을 원활하게 하지 못하던 때에 출연 제의가 들어왔어요. 학창 시절 열광했던 연예인들을 만날 수 있다니 재밌을 것 같더라고요. 솔직히 프로그램 성격상 너무 어린게 아닌가 싶어 출연을 잠시 고민하기는 했어요. 결국 편한 마음으로 놀다 오자는 생각에 촬영하러 갔는데, 언니 오빠들과 노는 게 너무 재밌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제가 고정이 되어 있었던 거죠. 하하.”
‘불청’ 촬영이 진행되고 있던 어느 날, ‘심심한데 축구나 해볼까?’라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박선영을 촬영장으로 긴급 호출한 여성 출연자들은 제작진과 5:5 축구 대결을 펼쳤다. 당시 지어진 축구팀 이름이 바로 ‘불나방’이다. ‘골 때리는 그녀들’(이하 ‘골때녀’)은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 ‘불나방’의 멤버였던 안혜경은 ‘골때녀’의 원년 멤버로 하차나 출전정지 없이 현재까지 3년 넘게 출연하고 있다. 그야말로 역사의 산증인이다. 팀에서는 골키퍼를 맡고 있으며, 온몸을 내던지는 철벽 수비를 펼친다.
“파일럿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PD님께서 성장과정을 보여주는 예능이기 때문에, 절대 연습해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그래서 정말 연습을 하나도 안 하고, 그야말로 예능을 찍었죠. 그게 시청률이 대박나면서 정규 프로그램이 된 거예요. 지금은 더 이상 예능이 아니죠. 과거에는 축구를 아무것도 모른 채 즐겼는데, 지금은 축구에 대한 마음이 커져서 더 진심을 쏟고 있습니다. 요즘은 개인 훈련 포함해서 축구 연습을 일주일에 3~4번 하는데, 그게 최소일 때 스케줄이에요. 시즌 때는 오전에 축구 연습하고, 공연하고, 다시 축구하고, 그렇게 매일 축구에 매진해 삽니다. 축구는 선수 모두가 잘해야 하거든요. 함께 연습하면서 호흡을 맞추는 게 중요합니다.”
안혜경은 ‘골때녀’를 ‘전환점이 된 프로그램’이라고 표현했다. 그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바뀐 계기가 됐다. 축구하는 모습을 보면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 인기를 실감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알아보는 분들도 많아졌고, 인스타그램 팔로어도 늘었다”면서도 “저는 ‘골때녀’에 출연하는 66명의 여성 중 한 명일 뿐이다. 프로그램 자체를 좋게 봐주시는 것 같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골때녀’는 40~50대 남성들이 많이 보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저를 연예인이 아니라 정말 ‘골때녀’의 선수로 알아보시더라고요. 처음에는 의아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선수로 안 불러주시면 ‘내가 실력이 좀 떨어졌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리고 ‘골때녀’를 통해 여성 축구가 활성화되고 저변이 확대되어서 굉장히 기분 좋아요. 남성들이 초등학생 때부터 축구를 하고 커서는 조기 축구를 하는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여성들도 어릴 때부터 축구를 쉽게 접하고 배울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됐으면 좋겠어요.”
결혼 후 느끼는 사랑의 안정감
안혜경은 지난해 9월 송요훈 촬영감독과 결혼해 화제를 모았다. tvN ‘빈센조’, 넷플릭스 ‘경성크리처’ 등을 촬영한 감독이다. 40대 중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웨딩마치를 울린 안혜경은 송요훈 감독을 만나기 전까지는 결혼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에 대해 적령기란 없으며, 좋은 사람이 있다면 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불청’ 언니 오빠들이 싱글로 살면서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고 느낀 점이 많았어요. 결혼을 굳이 해야 할까? 꼭 필요할까? 생각했어요. 결혼은 그냥 사람의 인연인 거죠. 그 전에는 연애하면서 결혼 생각이 든 적이 없었는데, 남편을 만나면서는 같이 살면 어떨지, 무엇을 함께하면 좋을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처음으로 미래를 꿈꿔본 사람입니다.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면 현재의 저는 솔로일 수도 있겠죠.”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는 지금도 안혜경은 지인들에게 무조건 결혼을 추천하진 않는다. 결혼은 자신의 선택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삶의 중심이 되어 행복한 방법을 선택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다 보니, 스스로를 좀 더 가꾸고 남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까지 생긴 것 같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제 주변에도 싱글인 친구들이 많아요. 돌아온 친구들도 있고, 일이 먼저여서 결혼을 미룬 친구들도 있죠. 결혼을 안 했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어요. 자기 자신한테 마이너스인 것 같아요. 자신을 예뻐해주고, 자신감을 가지는 게 중요해요. 결혼하니 좋은 점도 많지만, 현실적인 단점도 있어요. 저는 싱글 친구들에게 솔직하게 말해주는 편이에요. 연애를 많이 해보라고도 말해요. 그중에 자신한테 맞는 사람이 있다면 결혼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는 거죠.”
안혜경이 느끼는 결혼 후 가장 큰 장점은 일상에서 안정감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이제 혼밥을 안 해도 되고, 더욱이 남편이 요리도 잘하고 건강에 신경을 많이 써서 양질의 식사를 하게 되어 좋다고 덧붙이며 웃었다.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감과 만족도가 높아지니 일도 더 열심히 하게 된다는 안혜경. 인생의 시간을 함께 쓸 동반자가 생기니 시너지가 난다고 느낀다.
“남편이 최근 저한테 ‘나야? 축구야?’라고 장난스레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럼 당신은 나야? 촬영이야?’라고 받아쳤죠. 이렇게 장난도 치고 유머 코드가 맞는 상대가 생겼다는 게 참 좋아요. 제가 강아지와 고양이를 키우거든요. 동물하고만 소통하는 삶을 살았어요. 내 울타리 안에 사람이 들어왔는데 기존부터 함께 있었던 것처럼 내 삶에 흡수되어 살아가는 게 믿기지 않아요. 사랑은 형태도 다양하고 느껴지는 감정도 다양하잖아요. 저는 사랑의 설렘보다도 사랑을 하면 평온하고 안정된 느낌이 든다는 게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저보다 많이 실패해본 사람이 있을까요?” 25년 동안 300채의 한옥을 지은 김장권 북촌HRC 대표는 우리나라에서 한옥을 제일 많이 지었다는 이야길 듣는다. 그럼에도 그는 지은 집의 수보다 실패해본 횟수를 자랑하고 싶다고 했다.
“물론 부끄럽고 미안하다”며 겸손하게 말했지만, 김장권 대표는 ‘퍼스트 펭귄’으로 불린다. 실패의 위험을 감수하고 누구보다 먼저 도전해 다른 이들을 뒤따르게 하는 개척자다. 각종 상을 받은 ‘채효당’, ‘#200’, ‘관훈재’, ‘가회동 L주택’에는 그의 도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한옥은 우리를 떠난 적이 없다
2000년대 초반 그는 ‘한옥으로 들어가자’고 주장했다. “한옥은 우리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가 버리고 방치했을 뿐. 그러니 한옥으로 들어가자”는 게 그의 뜻이었다. 김장권 대표는 한옥이라는 공간을 다루면서 ‘변화를 주어야 할 것과 변화를 주지 말아야 할 것’을 늘 고민하고 강조한다. 본질과 흔적에 대한 이야기다. 요즘 지어진 한옥을 보면 형태나 구조는 한옥이지만 비례나 모양이 한옥이 아닌 변형된 집이 너무 많다고 했다. 복습과 답습만 해서 그렇단다. “카피를 하더라도 제대로 하면 좋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그래서 김 대표는 ‘포스트 클래식’한 한옥을 주장한다. 본질을 지키되 현대에 필요한 것들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한옥에서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현대인이 살기에 불편한 점을 하나씩 고쳐나갔다.
김 대표는 일제강점기 이전, 조선 말 정도에 지어진 집들이 우리가 이어나가야 할 한옥의 본질이라고 본다. 본질은 꼭 지키되 몇 가지는 현대에 맞게 바꿀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에어컨, 냉장고, TV, 전화기 등의 가전제품이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또 과거에는 사랑채, 안채 등 대지를 넓게 활용했지만, 요즘 시대에는 불가능한 얘기다. 단열도 중요하다. 과거 조상들은 효율성이 떨어지는 흙을 소재로 집을 지었지만, 요즘에는 단열도 잘 되면서 대체할 수 있는 친환경 재료가 많다.
“저는 한옥이 가지고 있는 ‘가구결구식’이라는 양식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짜맞춤이죠. 그런 이야기 들어보셨어요? 한옥 지을 때 ‘못 하나 안 쓴다’는 말이요. 주먹장이라고 해서 한번 끼우면 빠지지 않고 서로 맞물리도록 설계된 게 한옥입니다. 이런 가구결구식이 한옥의 본질이라고 봐요. 원형은 존중하되, 현대 한옥에 맞는 작법을 담을 수 있겠죠. 요즘은 빗물 재활용이나 태양에너지를 덧대는 요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그의 생각을 담은 작품이 ‘관훈재’다. 21세기 한옥 트렌드를 고민했던 김 대표는 수직적 확장성이 다음 한옥의 트렌드로 변화의 기점이 될 것이라 봤다.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시에서는 한옥을 2층으로 지을 수 있도록 허가해주지 않았다. 그의 설득에 서울시 지원을 받아 처음 2층으로 지은 한옥이 관훈재다. 그는 다음으로 3층 한옥을 만들자고 건축주를 열심히 설득하고 있단다.
한옥이 가진 ‘공간의 힘’
그는 왜 25년 동안 한옥만 지었을까? 왜 한옥이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게을러서 그렇다”며 겸손한 답을 내놨다. 당시만 하더라도 30~40층짜리 건물 하나를 지으려면 엄청난 비용과 책임을 감당해야 했다. 김 대표는 사람이 사는 일반 주택을 짓고 싶었다. 요즘은 또 다르다지만 그때는 낭만도 있었다고.
“비 오면 건축주가 술 먹자고 했던 때죠.(웃음) 이사 들어올 집이 아니라 정주의 공간이기 때문에 서두르지도 않았고요. 어음이나 수표로 집 짓는 사람도 없었으니 도산 걱정도 없었죠. 목숨 걸고 하지 않는 일이라 좋았어요.”
일반 건축에 비해 한옥은 진입 장벽이 높은 건축물이었다. 당시에는 궁이나 사찰을 짓는 사람들이 주거용 한옥을 지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사람이 실제 거주하지 않는 궁이나 사찰보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담긴 집을 짓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건축주에게 ‘살고 싶은 집’에 대해 묻는다. 한옥은 ‘맞춤형’ 집이기 때문이다.
일반 주택과 아파트를 비교하자면 아파트가 담보대출이 더 많이 나온다. 김 대표는 ‘집’이 또 다른 ‘화폐’ 역할을 하는 거라고 설명했다. 같은 평수의 같은 형태의 아파트는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에 재화로서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주택은 집집마다 다르게 생겨 비교하기 어렵다. 건축주에게 물어보면 집이 아니라 터만 보고 샀다는 사람이 많았다. 지을 때는 아파트 리모델링보다 더 비싸게 드는 게 주택인데, 잘 팔리지도 않고 대출 담보력도 크지 않다. 그렇다면 한옥 주택이 아파트와 다르게 가질 수 있는 가치는 뭘까. ‘공간의 힘’이다.
“한옥에는 행태적인 요소가 들어갈 행간이 많아요. 행태라고 하면 문을 열 때 사람이 문고리를 잡는 방식에 따른 문고리 모양, 아이들이 사용하는 방에 필요한 난간 모양 등을 고려하는 거죠. 굉장히 중요한 요소예요.”
지인이 영국에서 공부하다 한국에 들어왔는데, 재래시장에 갔다가 울었다고 한다. 물건을 살 때 아주머니가 얹어준 ‘덤’을 보고 ‘아 그래, 이곳이 한국이구나’ 느꼈단다. 서양의 건축은 나무가 휘고 변형되지 않도록 집성을 한다. 하지만 한옥에는 굵은 나무도 있고, 균열이 간 나무도 있고, 문이 딱 맞지 않아 바람도 들어온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무의 속성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김 대표는 이런 덤과 여백의 문화가 우리 민족성이라고 본다.
“한옥에는 쪽마루나 툇마루가 있어요. 밖도 아니고 안도 아니에요. 우체부 아저씨가 오면 잠시 앉아서 물 한잔 마시고 가라고 합니다. 덤 문화처럼 딱 부러지게 이야기할 수 없는 우리만의 요소가 휘어진 석가래, 비뚤어진 문, 마당에 담겨 있습니다.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생활 영역에 흔들림도 파장도 주지 않으면서 방문객을 대하는 유연함이랄까요. 한옥에는 그런 것들을 아우르는 공간이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살고 싶은 집을 물어요. 주거 공간은 건축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건축주를 위한 건물이 되어야 합니다. 건축은 생활의 손때 묻은 시간과 삶의 흔적이 완성시키는 것이거든요.”
설계는 감각이 아니라 미학이다
김 대표는 어릴 때 문학 소년이었다. 지금도 소설가를 꿈꾼다. 그는 한옥에서 소설과 같은 매력을 느꼈다. 직유가 아닌 은유가 많은 공간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바람이 분다’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봤는데요. 거기서 비행기 설계에 관한 이야길 하면서 카프로니 백작이 주인공 호리코시 지로에게 ‘설계는 감각이네. 감각은 시대를 앞서가지. 기술은 그다음에 따라오는 거야’라고 했어요. 너무 멋진 말이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여기에 본질을 더하고 싶어요. 저는 ‘설계는 미학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아름다움의 본질이 미학이잖아요.”
많은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살아간다. 주택이 익숙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인구도 줄어드는 마당에 아파트에서만 살아본 사람들이, 먼 미래에 과연 한옥을 찾을까? 한옥의 ‘쓸모’는 미래에도 유효한가 물었다.
“건축은 시간 앞에 거짓이 없다고 말합니다. 지금 남아 있는 건축들을 볼까요? 필요해서 남았나요? 버리고 싶은 건축물이라면 지워졌을 겁니다. 보존된 건물들은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봐요. 그게 사회적 가치가 아니어도, 어느 개인에게 가치 있는 건물일 수 있죠. 그러니 건축이야말로 시간 앞에 가장 정직한 작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사무실에서 바로 보이는 인촌 고택이 100년 된 한옥인데, 이를 현대에 와서 똑같은 한옥으로 지었다고 봅시다. 어떤 집이 더 가치 있을까요? 100년 전에 지은 한옥입니다. 그 이유는 시간의 영속성, 그러니까 그 집에 담긴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말합니다.”
그러니 오래된 한옥은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할 거라고 본다. 김 대표는 또 다른 이유로 도시재생을 예로 들었다. 도시재생을 할 때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없앨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 주를 이룬다. 여기서 다시 ‘본질과 흔적’으로 돌아온다. 도시재생을 하는 방법으로 ‘멸실형’과 ‘수복형’이 있다. 멸실형은 기존 건물을 없애고 새로 짓는 방식이다. 수복형은 야금야금 본채를 수복하면서 고쳐나가는 방법이다. 아파트는 대개 멸실된다. 그래서 서울이 고향인 사람 중에 어릴 적 살았던 아파트가 사라지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이들이 많다. 고향이 있지만 고향이 없는 셈이랄까. 그래서 그는 조금씩 수복하며 자리하는 한옥이야말로 회복탄력성이 높은 도시재생이라고 본다.
“설계는 미학이라고 했죠. 그런데 문화가 변하잖아요. 당시에 미학이라고 본 것이 나중에 보면 아닐 수 있거든요. 그런 것을 다시 고쳐나갈 수 있는 게 우리스러운 것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한옥이 가장 완벽한 본질에 접근성을 가지고 있는 건축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한옥스럽다’, ‘우리스럽다’고 하는 요소는, 역사와 문화 베이스를 담은 공간이라는 점입니다.”
회한을 소급받는 공간, 한옥
김장권 대표는 여백이 있는 공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요소를 담아줄 것이라 믿는다. 현대인은 너무 바쁘게 사느라 자신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한옥에는 나를 돌볼 공간이 있다. 아파트에는 장을 담글 공간이 없다. 햇빛과 바람이 자연스럽게 드나드는 한옥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아파트에는 엄마나 아빠를 위한 공간도 없다. 아이들에게 방을 내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동묘지 들어가는 것도 경쟁하는 세대라고 했어요. 저도 이제 60이 넘었는데, 우린 여전히 활동해야 하잖아요. 미래에도 유효한 삶, 가치 있는 삶, 건강한 삶을 살아가야 하죠. 마치 오래된 미래의 한옥처럼요. 우리는 지난 회한을 소급받고 싶어 하는 나이입니다. 그 회한이란 추억일 수도 있고, 향수일 수도 있겠죠. 그런 마음을 담을 수 있는 공간적 요소가 한옥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곳에서만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시간이 느리게 가는 한옥을 짓고 싶다고 했다. 비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고, 눈 내리는 것도 볼 수 있는, 건축이 공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새와 구름이 공간을 채워주는, 그 안에서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집 말이다.
“흔히 살아온 이야기만 해도 책 한 권은 쓸 거라고 그러죠.(웃음) 굳은살투성이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노후를 앞둔 우리의 경험이 존중받지 못하는 시대지만, 거기에는 우리의 책임도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자존감 높은 삶을 살아가는 시니어가 되면 좋겠습니다. 누구와도 견주지 않는 멋있는 삶을 위해, 내 지난 회한을 소급받고 싶은 마음을 받아주는 곳이 바로 한옥이지 않을까요? 치유하는 공간으로서 오래도록 한옥과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뮤지컬계 여왕’이 오랜만에 귀환했다. 세계 최초의 여성 노벨상 수상자 마리 퀴리의 삶을 다룬 뮤지컬 ‘마리 퀴리’로. ‘엘리자벳’, ‘명성황후’, ‘마리 앙투아네트’ 등을 통해 공주ㆍ황후 역할 전문 배우로 장기 집권하고 있는 김소현(49). 마리 퀴리는 그동안 맡아온 캐릭터와 결이 조금 달라 보인다. 전문적인 직업을 가졌고, 피ㆍ땀ㆍ눈물 어린 노력으로 성공을 이룬 주체적인 캐릭터다. “마리 퀴리는 평생 라듐(방사성 원소)을 찾고자 노력했어요. 모두에게 그 라듐이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한테는 그게 ‘뮤지컬’일 테고요.”
“공주 역할 전문 배우요? 하하. 다른 역할도 많이 했는데, 아무래도 주목받은 작품이 그랬던 것 같아요. ‘마리 퀴리’도 새롭죠. 사실 스케줄 때문에 출연을 몇 번 거절했어요. 캐릭터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도 많았고요. 그런데 연출진이 배우들 상견례 전날 밤 또 연락을 주신 거죠. 완전 변신할 수 있는 작품을 시도도 안 해보면 후회할 것 같더라고요. 김준수(가수ㆍ뮤지컬 배우) 소속사 대표님에게도 의견을 물어봤죠. 그랬더니 고민하지 말고 바로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가까스로 ‘마리 퀴리’를 하게 됐습니다.”
김소현은 2021년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 이후 작품 활동이 없었다. 임신과 출산 때보다 더 길었던 2년의 작품 공백기. 배우 생활이 끝날까 봐 불안했고, 복귀작에 대한 고민도 컸다. 그렇게 고심을 거듭한 끝에 결정된 복귀작이 바로 ‘마리 퀴리’다. 더 늦기 전에 새로운 도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 퀴리’는 왜 새로운 도전이었을까. 먼저 김소현은 과학 용어가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져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유튜브에서 과학 관련 정보를 샅샅이 찾아보면서 대사가 입에 붙도록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또한 ‘명성황후’같이 강단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그동안 써보지 않았던 목소리와 연기 톤을 써야 했다. 이에 따른 어려움과 부담감이 있었던 것. 그런데 연기를 할수록 마리의 인간적인 지점을 찾게 되었고, 그 매력에 매료된 상태다.
“‘마리 퀴리’는 단순히 과학자 얘기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한 얘기예요. 나의 목표, 우정, 사랑 등 많은 것들이 뮤지컬 안에 녹아 있어요. 공연을 보면서 눈물 흘리는 관객들이 많은데, 저도 매번 울어요. 특히 친구 안느가 마리에게 마지막으로 ‘애썼어 마리, 참 충분한 삶이었어’라는 대사를 할 때 눈물 콧물 다 뺀답니다.(웃음) 연기를 할수록 라듐을 향한 마리의 집념과 포기를 모르는 모습이 대단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냉철하면서도 열정적인 면모를 닮고 싶어요.”
서울대 집안 엄친딸
“돌이켜보면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2001년 봄 김소현의 인생은 단 하루 만에 180도 바뀌었다. 당시 오페라 가수를 꿈꾸던 서울대 대학원생이었던 그는 친한 선배의 추천으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주인공 크리스틴 다에 역으로 오디션을 봤다. 사실 뮤지컬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고, 며칠 뒤에는 이탈리아 유학을 위한 출국이 예정되어 있었던 터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소현의 생각과 달리 ‘오페라의 유령’ 연출진은 그를 보자마자 반해버렸다. 당시 소프라노 발성을 할 줄 아는 배우가 필요했는데, 거짓말처럼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소현은 ‘오페라의 유령’에 출연했고 이후 2009년 재연, 그리고 ‘팬텀’까지 무려 20년간 크리스틴 역을 연기하게 된다. ‘김크리’(김소현+크리스틴), ‘한국의 크리스틴’ 등의 수식어가 그의 존재감을 입증해준다.
“‘오페라의 유령’은 저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작품이죠. 인생을 바꿔준 작품이기도 하고, 남편 손준호 씨를 만나기도 했으니까요. 만약 그날 오디션을 안 봤다면, 아마도 오페라 가수가 되지 않았을까요? 사실 그때도 가족들은 물론 주변에서는 제가 ‘오페라의 유령’만 하고 본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뮤지컬의 매력에 빠져 지금까지 하고 있네요. 무대에 오를 때마다 늘 행복합니다. 한 역할을 계속 연기해도 지겹지가 않아요. 매번 그 역할을 사랑하면서 연기하기 때문이죠.”
혜성처럼 등장한 김소현은 뮤지컬 업계의 판도를 바꾸었다. 정통 성악으로 노래를 불러 뮤지컬의 품격을 높였다는 평을 자아냈다. 여기에 가족 모두 서울대학교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엘리트’ 꼬리표가 더욱 선명하게 따라붙었다. 김소현은 “좋게 봐주시니 감사하지만, 방송이나 인터뷰에서 꼭 얘기가 나오니까 마치 내가 자랑하고 다니는 것같이 보일까봐 민망하기도 하다”고 털어놓았다.
김소현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서울대 성악과 출신이고, 아버지와 남동생은 서울대 의대 출신 의사다. 특히 아버지 김성권 씨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신장내과 명예교수다. ‘싱겁게 먹기 실천 연구회’ 설립자이기도 하다. 김소현은 종종 아버지와 TV 프로그램에 동반 출연하며 서로의 행보를 응원하고 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건강하게 먹는 게 습관이 된 것 같아요. 집에 라면이 없었고, 과자도 잘 안 사주셨어요. 과장을 좀 보태서 말하자면, 결혼하고 먹은 라면이 평생 먹은 것보다 많았어요. 저는 세상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제일 존경합니다. 결혼해서 아이를 키워보니 부모님이 어떤 마음으로 삼남매를 키우셨는지 알게 됐고, 감사한 마음이 더 커졌어요. 제가 부모님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면, 남편이 섭섭하다고 할 정도예요.(웃음)”
같이 활동하는 유일무이 뮤지컬 부부
김소현은 남편 손준호를 ‘오페라의 유령’ 재연 때 만났다. 라울 역을 맡은 손준호는 극에서 크리스틴을 사랑하듯이 실제로 김소현에게 푹 빠져버렸다. 그러나 김소현은 여덟 살 연하 후배의 구애가 조금은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당시 준호 씨는 데뷔작이었고, 제가 첫 상대역이었어요. 극중 캐릭터를 사랑하는 건데, 저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 있잖아요.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다시 잘 생각해보라면서 마음을 거절했죠. 그런데도 계속 아니라고 하면서 다가오더라고요.”
두 사람은 결국 2011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 뒤로도 ‘팬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명성황후’ 등의 작품에서 함께 연기하며 유일무이 뮤지컬 부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김소현은 “‘명성황후’의 고종과 명성황후처럼 작품에서 부부 연기를 할 때가 있다. 공감도 잘되고, 실제로 도움이 되는 부분도 많다”고 전했다.
“배우로서 준호 씨를 높이 사는 부분은 흔들림 없는 단단한 사람이라는 점이에요. 그러니까 늘 노래나 연기를 안정적으로 할 수 있는 거죠. 준호 씨가 처음 데뷔하던 날 모습이 지금도 기억나요. 제가 첫 공연 첫 상대역이었는데 하나도 떨지 않고 잘하는 거예요. 또 그 단단함에서 오는 여유가 있고 긍정적인 사람이라 친구도 많답니다.”
부부가 같은 직업을 가진 것의 최대 장점은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부분이 아닐까. 김소현은 아들 주안 군을 임신했을 때 남편에게 특히 고마움을 느꼈다. 배우로서 느끼는 불안함을 십분 이해한 손준호는 아내가 빨리 복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결혼을 하면 아내가 되고 며느리가 되고 엄마가 되고…. 역할이 되게 많아지잖아요. 진짜 나로서 살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죠. 나의 시간과 일의 소중함이 느껴지더라고요. 임신했을 때 경력 단절이 되어 다시는 일을 할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힘들었어요. 그때 준호 씨가 ‘내가 아이를 잘 키울 테니까 먼저 복귀해라’면서 배려해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덕분에 주안이를 낳고 1년도 안 돼서 무대로 돌아올 수 있었죠.”
그때 태어난 아이, 주안 군은 SBS ‘오! 마이 베이비’에서 사랑스럽고 똑 부러지는 모습을 보여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벌써 열한 살로 폭풍 성장했는데 혹시 부모를 따라 뮤지컬 배우를 꿈꾸지는 않을까. 김소현은 “주안이가 ‘절대 싫다’고 한다. 그리고 비행기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더불어 “공부 잘하고 좋은 직업을 가지면 물론 좋겠지만, 예의 바르고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엄마의 마음을 전했다.
22년 넘은 커튼콜의 감동
김소현은 매년 12월 4일 팬들과 함께 데뷔일을 기념한다. 크리스틴으로 무대에 오르던 첫날, 그 역사적인 날이다. 최근에 22주년을 맞았다. 시간이 쌓이면서 호평도 늘어갔고 명성도 높아졌다. 그는 2008년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로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2016년에는 ‘명성황후’로 예그린뮤지컬어워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2020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특별했던 날도 있지만, 김소현은 무대에 선 모든 순간이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저는 무대에서 특히 관객에게 인사하는 ‘커튼콜’ 때가 그렇게 좋더라고요. 사실 뮤지컬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것도, 지금까지 계속 하고 있는 것도 커튼콜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오페라의 유령’ 첫 공연 때 커튼콜을 처음 경험해봤는데, 너무 벅찬 감동을 느낀 거죠. 매번 커튼콜 때마다 감동이 새롭게 오는 것 같아요. 커튼콜은 관객분들의 답을 얻는 시간이잖아요. 꼭 환호성과 기립박수가 터지지 않더라도 관객분들과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마음이 전달된다고 느껴요.”
새해를 맞아 계획을 묻자 김소현은 “계획이나 목표를 세우지 않으려고 한다”고 답했다. 목표를 두면 너무 힘이 들어가고, 계획대로 잘 안 되면 과정이 너무 고통스럽다는 생각에서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 보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소현은 ‘내일이 없을 정도로’ 작품을 위해 노력하고 연습하기로 유명하다. 그렇게 변치 않는 노력을 기울이기에 커튼콜의 감동이 20년 넘게 지속됐다는 생각이 든다.
“제가 연기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연기에 스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족한 게 되게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관객분들의 공감을 얻고 마음을 얻으려면 최선을 다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특히 진심이 중요하죠. 진정성이 없으면 나는 그냥 없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노래하고 연기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그때는 스스로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요? 언제까지 일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앞으로도 오랫동안 무대에서 연기하고 싶습니다.”
일본인 히로시 이케다(Hiroshi Ikeda)가 설계하고 1993년 개장한 마카오 골프&컨트리클럽(Macau Golf and Country Club)은 중국 남부에서 가장 오래된 골프클럽에 속한다. 리조트 분위기와 18홀의 챔피언십 골프 코스, 최상의 편의시설과 관리, 세심한 서비스, 훌륭한 음식, 골프 토너먼트에 특별히 초점을 맞춰 다양한 활동을 결합해 세심하게 운영해왔다. 남중국해의 멋진 전망과 조용하고 평화로운 환경을 가진 이 지역에서 아름다운 코스로 명성을 떨치는 곳이다.
마카오에는 두 개의 18홀 코스가 있다. 마카오 골프&컨트리클럽과 시저스 골프 마카오(Caesars Golf Macau)다. 두 골프 코스는 3km 남짓 떨어진 가까운 곳에 위치하지만, 완전히 다른 타입의 코스 레이아웃을 갖고 있다. 마카오 골프&컨트리클럽은 전형적인 마운틴 타입이고, 시저스 골프 마카오는 파크랜드의 링크스 타입이다.
마카오 골프&컨트리클럽은 1998년부터 메이저 우승자인 어니 엘스, 닉 팔도, 대런 클라크, 존 델리, 파드리그 해링턴, 닉 프라이스와 함께 명망 있는 마카오오픈(Macau Open) 골프 대회를 개최해왔다. 또한 이 오픈 대회에는 미겔 앙헬 히메네스, 브랜든 그레이스, 이언 폴터, 통차이 짜이디, 리 웨스트우드, 콜린 몽고메리와 이 대회에서 두 번 우승한 중국의 량원총과 장롄웨이 같은 유명한 선수들도 참가한 바 있다.
2023년 10월에 열린 마카오오픈에서는 호주의 한국계 선수인 이민우가 처음 출전하여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LPGA투어 프로골퍼 이민지의 남동생이다. 마카오오픈은 1998년 처음 개최되었으며, 2018년부터 2022년까지 중단되었다가 2023년에 다시 시작되었다.
풀 바에서 제공하는 클럽 수영장은 햇볕에 그을린 피부를 보충하기에 이상적인 장소다. 이탈리아산 파라솔로 그늘진 편안한 선베드는 회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독서를 할 수 있는 우거진 열대 환경에 놓여 있다.
마카오 골프&컨트리클럽(파71, 6292/6032야드)은 마운틴 타입의 업앤드다운이 심하고 몇 개 홀에서는 멋진 남중국해를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운 코스로, 아시아 100대에 올라 있다. 그린의 언듈레이션도 많고 그린 스피드는 9피트가 충분히 넘었으며, 그린은 매우 잘 정리되고 관리되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프라이빗 골프클럽이며, 현재 1100여 명의 회원이 있다. 주말에는 많은 회원들로 인해 비회원은 부킹이 불가하며, 골프 여행을 원하는 골퍼들은 회원과 동반할 때만 라운드가 가능하다.
라운드 비용도 평일은 60만 원 내외, 주말에는 80만 원 내외로 매우 비싸다. 라운드 비용은 그린피, 캐디피, 카트비 등이 있으며, 라운드 후 캐디 팁 5만~7만 원을 추가로 현금 지불한다. 회원들은 캐디와 카트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지만 비회원은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 1인 1캐디가 원칙이지만 골프장 상황에 따라 2인 1캐디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2023년 10월 말 기준 캐디는 40명이 있으며 남녀 비율은 같다. 30명은 중국 캐디, 10명은 필리핀 캐디다. 한국인 골퍼는 거의 없다고 한다. 특히 한국에서 오는 경우는 전무하다. 대부분 현지 마카오인과 중국인이다.
6번 홀(파3, 138/128야드) 17번 홀과 더불어 이 코스의 시그니처 홀이다. 멋진 내리막 파3 홀로 완벽한 아일랜드 그린을 보여준다. 화려한 아일랜드 그린에서 도전적인 티 샷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린 왼쪽으로 들어가는 멋진 다리도 인상적이다. 그린 앞과 오른쪽에 전략적으로 배치된 세 개의 벙커는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약간 잘못된 방향의 티 샷이 워터 해저드에서 마무리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도록 잘 배치되어 있다. 클럽을 선택할 때는 바람의 방향도 미묘하게 기만적일 수 있다.
10번 홀 티 박스에서는 오른쪽으로 거대한 남중국해가 펼쳐지며, 13번 홀부터 18번 홀까지는 남중국해를 볼 수 있다.
14번 홀(파3, 207/196야드) 매우 길고 어려운 파3 홀이다. 오른쪽 아래의 깊은 내리막, 왼쪽 벙커, 그리고 작은 경사진 그린이 이 코스에서 가장 어려운 홀을 만든다. 페어웨이 중간부터 오른쪽으로 보이는 공항에서 비행기들의 이착륙을 볼 수 있다.
17번 홀(파3, 186/168야드) 이 멋진 파3 홀은 절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그린 위로 140피트(43미터)의 높은 티 샷이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관목지(Scrub Land, 잡목으로 덮인 땅), 왼쪽으로는 남중국해가 끝없이 펼쳐진다. 필자는 골프장의 도움으로 프로 대회에만 개방하는 챔피언 티(238야드)에서 스펙터클한 광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 홀이 아시아에서 가장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멋진 파3 홀로 기억될 것 같았다.
18번 홀(파5, 564/544야드) 왼쪽으로 펼쳐지는 거대한 남중국해가 장관이다. 바다, 호수, 깊은 그린 사이드 벙커가 환상적인 파이널 홀을 만들어낸다. 그린 앞 200야드 지점의 큰 호수는 그린 50야드까지 이어져 쉽사리 스리 온을 시도하는 골퍼들에게 방해가 된다. 아무리 장타자라도 투 온은 언감생심이다. 그린 왼쪽의 큰 벙커들도 만만치 않다. 그린 뒤로 MGCC 이니셜 로고가 잔디 위에 키 작은 관목으로 만들어져 멋진 마무리를 완성한다. 18번 홀을 마치면 뒤로 연습장이 있는데, 수중 연습장으로 대회 기간에만 개방한다고 한다.
멋진 코스다. 골퍼라면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마카오의 시그니처일 것이다. 높은 가격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평생 한 번 정도는 라운드해봐도 되지 않을까?
●Exhibition
◇생명의 기념비
일정 12월 2일까지 장소 성북구립 최만린미술관
“‘이브’는 나의 생명에 대한 기념비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부서진 생명, 죽음에 임박했던 생명을 다시 한번 쌓아 올리고 싶었어요.” - 최만린
‘생명의 기념비’에서는 조각가 최만린(1935~2020)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자, 그의 대표작인 ‘이브’ 시리즈를 한자리에 모았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복원을 마치고 돌아온 ‘이브 58-1’이 3년 만에 공개됐다. ‘이브’라는 표제가 붙은 작품들은 한국전쟁을 겪은 예술가의 생명을 향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드로잉 작품은 조각 작품과 함께 전시되어, ‘이브’ 시리즈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폐허 속에서도 생명을 찾아내고자 하는 최만린의 의지가 드로잉 작품 곳곳에 묻어난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최만린의 작업을 연결하여 만든 한승훈의 영상 작품 ‘선명한 꿈’(2023)을 비롯해 ‘이브’와 관련된 아카이브 전시도 함께 진행된다. 최만린의 작품 외에도 김창렬의 ‘물방울’, 임응식의 ‘나목’ 등 한국전쟁을 겪은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문학도 소개되어 당시의 상황을 함께 증언해준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운명이다-멸종위기동물 예술로 HUG
일정 12월 3일까지 장소 부산민주공원 민주항쟁기념관
미디어, 입체, 사진 등 다양한 매체의 예술가들이 협력해 인간에 의한 환경재해 심각성을 일깨우는 동시에 인간과 공존해야 하는 동물, 생태환경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전시다. 현대미술가 고상우, 금중기, 김창겸, 플로라 보르시의 작품 21점이 전시됐다. 고상우는 디지털 회화로 야생 동물을 표현했고, 금중기는 동물 조각품을 통해 인간 활동과 기술 문명의 발전이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김창겸은 전통 문양의 꽃과 동물 형상을 활용한 3D 애니메이션 영상, 오브젝트를 결합해 만다라 우주를 창조한다. 사람과 동물의 특징을 하나의 자화상에 결합한 플로라 브로시의 작품은 두 생명체 사이의 유대감을 강조한다.
●Stage
◇몬테크리스토
일정 11월 21일 ~ 2024년 2월 25일
장소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권은아
출연 이규형, 서인국, 고은성, 김성철, 선민, 이지혜, 허혜진 등
여섯 번째 시즌을 맞은 뮤지컬 ‘몬테크리스토’는 특히 알렉상드르 뒤마 원작의 소설을 더욱 충실하게 구현하는 방향으로 스토리를 다듬어 완성도를 높였다. 극의 주인공 에드몬드 단테스/몬테크리스토 백작 역은 이규형, 서인국, 고은성, 김성철이 맡아 연기한다. 촉망받는 젊은 선원
‘에드몬드 단테스’는 그의 지위와 약혼녀를 노린 주변 인물들의 음모로 14년간 옥살이를 한 끝에 탈출한다. 그리고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이름을 바꾸고 복수를 꾀하는데, 스스로 빠진 파멸의 길에서 용서와 화해, 사랑의 가치를 알게 된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느끼게 한다.
◇컴 프롬 어웨이
일정 11월 28일 ~ 2024년 2월 18일
장소 광림아트센터 BBCH홀
연출 박소영
출연 남경주, 서현철, 고창석, 최정원, 최현주, 정영주, 장예원 등
2017년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린 뮤지컬 ‘컴 프롬 어웨이’가 국내 초연된다. 2001년 9.11 테러 당시 캐나다의 작은 마을 갠더에서 일어난 실화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한 작품이다. 테러로 인해 비행기 수십 대가 갠더에 불시착하고 주민들이 7000명가량의 승객과 협력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인류애와 공동체의 힘을 통한 치유의 이야기는 감동을 전해줄 전망이다. 경력 40여 년의 1세대 스타부터 젊은 대세까지 총출동하는데, 모든 배우가 1인 2역 이상 소화하는 것은 물론, 각종 음향 효과까지 직접 구두로 해낸다.
◇렌트
일정 11월 11일 ~ 2024년 2월 25일
장소 코엑스 신한카드 아트리움
연출 앤디 세뇨르 주니어
출연 백형훈, 장지후, 정원영, 배두훈, 김환희, 이지연, 김수연, 김호영, 조권 등
브로드웨이 극작가 겸 작곡가 조너선 라슨의 뮤지컬 ‘렌트’가 3년 만에 돌아온다.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사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2000년 한국에서 초연된 이후 수많은 스타를 배출하며 2011년까지 공연됐다. 9년의 시간이 흐른 후 2020년에 공연을 재개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조기 폐막되는 일을 겪었다. 당시 ‘역대 최고 공연’이라는 호평을 받은 터라 아쉬움을 더했다. 이에 지난 시즌 멤버와 더불어 새로운 멤버까지 총 24명의 배우가 다시 감동의 무대를 펼친다.
김경오(89) 명예총재의 영웅담은 끝이 없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던 시절, 군대에서 끝끝내 대한민국 여성 최초로 단독비행을 성공했다. 이후 유학을 떠나 기죽지 않고 나라를 알렸고, 자전거 한 대 갖기 어려운 시절에 비행기 한 대와 함께 귀국했다. ‘마담 킴’의 비행 아래, 우리나라는 괄시받는 가난한 국가에서 국제기구 총회 유치에 성공하는 항공 선진국이 됐다. 그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주고 전후(戰後)의 어둠을 걷어내는 새벽별과도 같았다.
김경오 명예총재는 ‘대한민국 최초 여성 비행사’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스무 살의 나이에 6·25전쟁에 공군 조종사로 참전해 비밀문서를 전달하는 업무를 전개했다. 예편 후 후학 양성을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생활고를 버텨낸 끝에 ‘조국과 후배들을 위해 비행기 한 대를 가지고 돌아오겠다’는 꿈을 이뤘다. 또한 자신의 뒤를 이을 여성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여성항공협회를 창설하고,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여성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는 최고의 비행사이기도 하다. 공군 창군 50주년이던 1999년, 최고의 조종사에게 주어지는 훈장(Command Pilot Wings)을 받았다.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비행사인 그는 국제항공연맹에서 항공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비행사에게 시상하는 ‘에어골드메달’ 훈장을 수여받았다. 미국 오클라호마 세계여성파일럿박물관에는 한국 여성으로 유일하게 개인 전시관인 ‘김경오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여자라는 이유로 조종을 못 하고 있습니다”
비행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시작됐다. 그는 교장선생님의 호출에 무작정 연필과 지우개를 들고 시험을 치렀다. 이북데기(이북 출신을 낮잡아 부르던 말)라고 놀림받던 것을 설욕하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했던지라, 시험에 이은 면접과 신체검사까지 통과했다. 최종 합격통지서를 받은 날에야 알았다. 제1기 공군 여성 조종사 후보생을 모집하는 시험에서 몇 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었다는 사실을. 이승만 전 대통령이 공군사관 생도를 뽑으면서 여성 항공병도 따로 뽑도록 지시했기 때문인데, 김경오 명예총재는 실질적 목적은 따로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젊을 때 미국 유학을 떠났었죠. ‘하늘의 퍼스트 레이디’로 불리던 아밀리아 에어하트를 비롯해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성 조종사들을 보면서 생각했을 거예요. ‘우리나라가 독립해 자주국가가 되었음을 알려야 하는데 이를 위한 홍보 수단으로 여성 조종사만큼 좋은 아이콘이 없겠다’고요.”
하지만 비행사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멀고도 험난했다. 전쟁이 터졌고, 여성 생도들은 소위로 임관되어 비행기를, 전투기를 타며 참전하기만을 꿈꿨지만 유야무야 시간만 흘렀다.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동기들은 하나둘 떠났고, 김 명예총재만이 군에 남게 됐다. 홀로 남은 여성 소위를 향한 회유와 협박은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됐다. 그는 ‘이대로 가다간 비행기를 몰아볼 기회조차 얻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승만 전 대통령이 공군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며 정복을 정갈하게 다려 입었다. 행사 당일, 이대로 대통령을 보내면 다신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대통령 앞으로 튀어나가 보고했다. 헌병들도 다 얼어붙어서 말릴 틈도 없었단다.
“‘경례! 공군 소위 김경오입니다. 각하, 저는 1949년 대통령의 뜻에 따라 공군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제가 여자라는 이유로 조종을 안 시켜줘서 못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딱 두 마디 했죠. ‘아, 기억나요. 잘하고 있습니까?’ 막사로 돌아왔는데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헌병들이 날 잡으러 오겠구나 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는데, 그 다음 날 명령을 받았어요. ‘공군 소위 김경오 명(命) 비행 훈련, 사천 훈련장.’ 공군참모총장의 특명 제1호였죠.”
우여곡절 끝에 그는 1952년 대구에서 최초의 단독비행에 성공했다. 단독비행을 하던 날 아침, 그는 손톱·발톱과 머리카락을 깨끗한 종이에 싸서 유서와 함께 어머니에게 건넸다고 한다. 전쟁 중이어서 위험했거니와 비행 사고가 나면 시신을 수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서다. 전쟁에 참전하여 비밀문서를 전달하거나, 결혼하고 큰딸을 낳은 뒤 6개월 만에 일본과의 친선비행에 나설 때 그는 유서를 남겼다. 무사히 비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유서를 태워버렸고, 다음 비행에 나서기 전에 새로운 유서를 썼다.
타잔처럼 멋지게, 마음먹은 대로 사는 인생
‘누가 뭐래도 네 인생은 네가 컨트롤해야 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타인에게 기대지 않는 것이며, 모든 것은 너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김경오 본인이 그런 삶을 살았다. 두 딸이 결혼하기 전까지 적었다 태우기를 반복한 유서처럼, 남에게 기대지 않고 목표한 바를 이룰 때까지 노력을 멈추지 않는 삶. 그는 남다른 투지와 인내심으로 계속해서 기적을 일궈냈다. 다치거나 죽는 이들도 많았던 단독비행을 성공해냈고, 민간항공을 공부하고 후학을 양성하라는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영어 한마디 할 줄 몰랐고, 동양인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자행되는 차별에 생활고까지 감내하며 버틴 나날은 고통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훈련용 경비행기 한 대를 고국에 가져가는 것. 당시 우리나라에는 훈련용 비행기가 없어 공군 생도들이 실전 훈련을 받아보지 못한 채 졸업해야 했다. 김 명예총재는 후배들을, 우리나라 항공의 미래를 위해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는 사이 그가 한국전 참전 용사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조종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매스컴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타임’, ‘뉴스위크’, ‘라이프매거진’ 등 유수의 매체에 그의 인터뷰가 실렸고 6·25전쟁의 참상을 알리러 강연을 다녔다.
“초대받은 자리에는 빠짐없이 나서서 열정적으로 임했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모든 활동이 민간 외교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어요. 비행기를 가지고 돌아가겠다는 제 목표를 들은 기자들은 고개를 저었지만 결국은 해냈죠. 당시 미국의 여성 비행사 1만 명이 저를 돕기 위해 ‘We Help Captain Kim’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모금을 진행했어요. 모금이 유명해지면서 한 경비행기 회사에서 경비행기 ‘파이퍼 콜드’ 한 대를 기증해줬거든요. 덕분에 목표한 대로 비행기 한 대와 함께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어렵던 시절 한국군 유일한 여성 비행사는 희망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체득한 군인 정신으로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임했다고 말하지만, 호방한 성정도 한몫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일화가 있다.
“초등학생 때는 장래 희망으로 ‘밀림의 왕 타잔’을 적어냈어요. 동화책을 보는데, 호령 소리만 들리면 작은 동물부터 맹수까지 한 번에 달려오는 게 너무 멋있게 느껴졌거든요. 나도 말 한마디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담임선생님한테 혼났어요. 여자애가 무슨 타잔이냐 교사나 하지 하면서 머리를 쥐어박혔죠.”
밀림의 왕처럼 하늘을 누비던 그는 2009년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20분간 마지막 비행을 했다. 그림처럼 예뻤던 하늘에서 내려온 그는 세계여성파일럿박물관의 김경오 전시관을 둘러본 뒤, 한국으로 돌아오는 여객기를 탔다. 그는 주문한 샴페인을 마시고, 남은 한 모금을 머리에 부으며 하늘에 인사를 건넸다. ‘Good bye, dear my blue sky.’ 성격만큼 호쾌한 인사였다.
한계 대신 지금에 집중하는 삶
이후 직접 조종석에 앉는 일은 없었지만 그의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국제항공연맹, 국제여류비행사협회 등의 국제회의에 꾸준히 참석하며 우리나라 민간항공의 성장을 도모했다. 미래는 하늘에 있으리라는 것을 일찍이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수석대표로서 회의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은 물론,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선진국 대표들과 안면을 트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빴다. 모두 그만의 ‘민간외교’ 연장선상에 있는 일이었다. 그의 공로는 높아진 한국의 위상으로 인정받았다. 2009년 인천의 제103차 국제항공연맹총회 유치에 성공하기까지 김 명예총재의 기여한 바가 컸다.
아흔을 앞둔 지금도 삶을 대하는 자세는 군인 시절과 다르지 않다. 일찍 전역했지만 어릴 적부터 군대 제식 교육을 받아서인지 아직까지 그렇게 생활하게 되더란다. 오전 3시 30분이면 눈을 뜨고, 천천히 일어나 기지개를 켠 뒤 침대에서 내려온다.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꼭 화장을 하고 나선다. ‘나이 들어 화장해서 뭐하느냐’고 말하는 친구에게는 따끔하게 한 소리 한단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자연히 몸에 배어 있다.
“매일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해요. 나는 ‘백세시대’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백세시대라고 말해버리면 내 나이를 백세까지로 한정 지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나는 이 나이에도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공상하기를 즐깁니다. 이를테면 내가 연애를 한다면 어떤 남성이 어울릴까, 즐겨 보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보면 재밌겠다, 이렇게 지내면 매일이 즐겁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비행을 할 수 있다면 어디로 떠날 것인지 물었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답이 정해진 질문이네요. 평안북도 강계요.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이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 하늘에서라도 빙 둘러보고 싶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또다시 공군이, 비행사가 되어 하늘을 날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갈고닦겠다는 김경오 명예총재. 미국의 시인 새뮤얼 울먼이 말했듯,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그가 늘 푸른 청춘이 아닐 리 없다.
돌아온 대면 명절에도 2030세대는 귀향을 거부하고 돈을 벌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러 뿔뿔이 흩어진다. 선물 들고 지인을 찾아가기보다 ‘집콕’하며 미리 찜해둔 물건을 ‘셀프 선물’한다. 회사에서 받은 선물을 ‘당근’하기도 한다. MZ세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명절 문화의 새로운 인식을 들춰본다.
3년 만의 대면 설 연휴지만 젊은 세대는 각자의 이유를 대며 집을 찾지 않는다. 한국갤럽이 지난해 추석 연휴를 앞두고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국 만 18세 이상 1000명 중 추석 연휴 동안 ‘집을 떠날 계획이 없다’고 답한 이가 60.0%에 달했다. 이제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비대면은 하나의 트렌드로 남았다. 여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으니, 이해를 돕기 위해 ‘요즘 것들’이 그리는 신(新)명절풍속도 네 가지를 준비했다.
시간
고향 방문보다 값진 ‘알바’
“굳이 고향을 가야 하나요? 그 시간에 알바를 하면 돈이 얼마인데!”
경기는 계속 악화되고, 물가는 끝을 모른 채 치솟는다. 경제적 부담을 느낀 젊은 세대는 연휴 기간 가족을 찾는 대신 조금이라도 더 돈을 벌기로 마음먹었다. 생활비에 보탬이 되고, 지역과 지역을 오가는 교통비나 선물 비용 등의 지출을 줄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지난해 추석 연휴를 기준, 서울에서 부산까지 비행기로 왕복하려면 20만 원은 족히 내야 한다. 비교적 저렴한 KTX 기차표를 구하려면 연휴 한 달 전부터 피 튀기는 예매 전쟁을 뚫어야 한다. 한 푼이 아쉬운 사회 초년생의 입장에서는 귀향을 망설일 수밖에 없다. 서울에서 자취하는 직장인 A(27) 씨는 “집에 가는 데 돈도 많이 들고 여러모로 부담이라 이번에도 명절 연휴를 피해 집에 미리 다녀오려 한다”고 말했다.
구인·구직 플랫폼 ‘알바천국’은 지난해 추석 연휴를 앞두고 성인 158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응답자의 51.1%가 “추석 연휴에 알바 계획이 있다”며, 아르바이트로 번 돈은 생활비(56.8%), 저축(42.2%)에 쓰겠다고 답했다. 명절 연휴 동안 반짝 모집하는 아르바이트는 직장이나 학교를 다니는 데 영향을 주지 않고도 용돈을 벌 수 있어 인기가 많다. 평소보다 시급을 높게 쳐주는 점도 선호도를 높인다. 지난해 12월 20일 기준 설맞이 단기 알바 시급은 현재 최저시급인 9180원보다 7~30%가량 높게 형성돼 있다.
명절 연휴를 앞두고 단기 아르바이트를 찾는 움직임이 많은 것은 여러 지표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이 운영하는 ‘당근알바’에서는 지난해 설 연휴 직전 2주 동안(2022년 1월 11~24일) 구인 게시글과 구직 지원자 수가 전달 같은 기간 대비 각각 13.9%, 19.9% 증가했다. 아르바이트 구인·구직 플랫폼은 이러한 흐름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알바몬’, ‘알바천국’ 등 대표적인 플랫폼은 명절마다 채용관을 따로 열고 연휴 시즌에 특화된 인기 업·직종 공고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명절 특수 아르바이트의 형태는 갈수록 다양해지는 모양새다. 일반적으로 꼽히는 명절 연휴 특화 업·직종은 백화점·마트, 도소매·전통시장, 매장 관리·판매, 포장·분류, 택배·배달 등이다. 최근에는 집을 비우는 동안 반려동물을 돌봐주는 펫시터, 전 대신 부치기 등 동네 소일거리에 가까운 알바를 구하는 이들도 많다. 지난 추석 연휴에는 맛집 ‘웨이팅 알바’(입장을 위해 대신 줄을 서주는 알바)를 구하는 사람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장소
다시 대면 명절, 고속도로만큼 붐비는 ‘명절 대피소’
“명절도 그저 연휴일 뿐, 쉬는 동안 토익 공부나 할래요”
국립국어원에서 만든 개방형 한국어 지식 대사전 ‘우리말샘’에 등재된 명절 대피소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명절에 모인 친척들의 잔소리를 피하여 쉬거나 공부 따위를 할 만한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불편한 질문 공세에 시달리다 못해 스터디카페, 학원 등으로 피신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취업 준비생들이 대다수였으나 최근에는 미·비혼 직장인들도 합세하는 모양새다.
지난해 온라인 아르바이트 플랫폼 ‘알바천국’이 성인 1530명을 대상으로 명절에 고향 방문을 피하는 이유를 묻자 ‘취업 준비, 시험공부 등 자기계발에 집중’(24.1%, 복수 응답)하거나 ‘명절 잔소리,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22.6%) 등이 꼽혔다. 2019년 추석 연휴를 앞두고 온라인 취업 플랫폼 ‘잡코리아’가 성인 3192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33.3%가 ‘결혼(자녀) 언제쯤?’을 가장 듣기 싫은 말로 꼽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에 ‘명절 대목’을 맞아 명절 대피소를 운영하는 교육 업체가 등장하고 있다. 파고다어학원은 2015년부터 명절마다 전국 캠퍼스에서 피난처를 운영해왔다. 학원 내 스터디룸을 개방하고, 간식과 음료를 무료로 제공했다. 대면 모임이 어려울 때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을 통해 온라인 명절 대피소를 운영했다. 가볍게 어학 공부를 할 수 있는 퀴즈를 풀거나, ‘임인년맞이 호랑이 그리기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다른 교육 업체들 역시 명절 연휴에만 제공하는 한정 ‘프리패스’(자유이용권)를 통해 기간 내 무제한으로 인터넷 강의를 이용할 수 있게 했다.
한 업체는 스터디카페의 명절 정체 예상도를 발표했다. 스터디카페의 키오스크를 운영하는 전문 업체 ‘오래’가 지난 3년 설날과 추석 등 명절 연휴에 집계된 300만 건의 이용 건수를 분석한 결과로 만들어낸 것. 나흘의 연휴 기간에 전국 스터디카페를 대략 250만 명이 찾을 것이라는 예상치를 내놓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스터디카페 이용객의 연령대는 10대 30%, 20대 50%로 비교적 고른 분포를 보인다. 그러나 분석에 따르면 명절 연휴에는 20대 이용자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명절 연휴 마지막 날 10대와 20대 이용객 비율이 20%와 60%로 가장 큰 차이를 보였는데, 오래 측은 도피를 위한 스터디카페행의 영향일 것으로 풀이했다.
재테크
자취촌에 꽃피는 명절 선물 재테크
“되팔고 교환하고, 나는 아니라도 누군가는 필요하겠죠”
나를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는 플렉스(FLEX)·욜로(YOLO) 문화에 반기를 드는 이들이 있다. 불필요한 지출 활동을 줄이고 온라인 쇼핑 플랫폼의 적립금을 모으거나 할인 혜택을 꼼꼼히 챙기는 ‘짠테크’ 역시 2030세대의 소비 성향을 설명하는 단어 중 하나다. 일을 해서 얻는 수입만 가지고는 돈을 모으기 어려우니 허리띠를 최대한 졸라매는 것이다.
애당초 제품을 되파는 ‘리셀 문화’는 고가 명품 브랜드를 중심으로 시작됐다. 코로나19로 인해 틀어막힌 해외여행 수요가 명품 구매로 폭발한 것. 물건을 구하기 어려워 중고 거래까지 불사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중고 거래 플랫폼이 함께 성장했지만, 리셀 문화는 이제 생필품 영역까지 확장됐다.
실용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MZ세대는 ‘리셀’이라는 개념을 명품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내게 필요 없는 물건을 싼값에 되팔고, 필요한 물건 역시 저렴하게 사고 싶을 뿐이다. 전문가들은 실용성을 중시하는 성향에 고물가에 대한 부담이 맞물리면서 ‘명절 선물 재테크’ 현상이 나타났다고 분석한다. 이는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 등이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 설명한 ‘체리슈머’에 부합하는 면모다. 체리슈머는 ‘한정된 자원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양한 알뜰 소비 전략을 펼치는 소비자’를 뜻하는 신조어다.
선물을 되파는 건 성의를 무시하는 게 아니냐며 눈살 찌푸리는 사람들이 물론 있다. 그러나 향후 몇 년은 경기가 좋지 않고 물가가 지속적으로 오를 것으로 점쳐지는 상황. 명절 전후로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 햄, 참치, 홍삼, 샴푸·린스 등 흔한 명절 선물세트를 자주 접하게 될 전망이다.
선물
명절 선물, 대상은 좁되 돈은 많이
“내 월급만 빼고 다 오르는데, 친한 사람만 챙길래요”
명절 선물 구매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2021년 이베이코리아가 오픈마켓 G마켓과 옥션의 설 선물 판매 데이터 2년치를 비교 분석한 결과, 2030세대는 프리미엄 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고 4050세대는 선물 구매량이 많았다. 김태수 이베이코리아 영업본부장은 분석 결과에 대해 “미혼이 많은 2030세대는 부모님과 직계 가족에 집중하고, 4050세대는 주변 친척까지 두루 챙기는 경향이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흐름에는 젊은 세대의 ‘미코노미’(Meconomy) 성향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미코노미란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소비 성향을 뜻한다. 그런데다 코로나19 장기화로 비대면 명절이 익숙해지면서, 돈이나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 것.
남에게 쓸 돈을 줄여 나에게 집중하는 소비 행태는 데이터 분석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추석 연휴, 사람들은 지인에게 건강식품(18%)이나 커피·음료(15%), 생필품(14%)을 주로 선물했다. 반면 스스로를 위한 선물로는 생활·미용가전(14%), 골프용품(12%), 노트북/PC(9%) 등을 구매했다.
지난해와 2021년 추석 선물의 판매 데이터를 비교해보면 피부관리기(130%), 명품 잡화(85%), 노트북(29%) 등의 제품 판매량이 크게 증가했다. 주로 남에게 선물하기보다 스스로를 위해 구매하는 프리미엄 제품이다. 특히 2030세대 구매가 가장 크게 증가한 상품군은 노트북과 컴퓨터였다. 반면 4050세대는 일반적으로 구매하던 명절 선물 제품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선택을 했다. 건강식품이 17% 증가해 구매신장률이 가장 높았고, 생필품 11%, 커피·음료 10% 순서로 이어졌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2023년을 코로나 위기를 극복하고 항공산업이 다시 정상궤도에 들어서는 한 해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또한 이에 대비해 경쟁력을 갖추는 한편, 아시아나항공 인수라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모든 임직원들이 힘을 모아줄 것을 당부했다.
조원태 회장은 1월 2일(월) 오전 사내 인트라넷에 등재한 신년사를 통해 “한산했던 공항이 여행 수요가 늘며 다시 북적이는 모습, 드문드문 자리를 비웠던 우리 동료들이 다시 제 자리를 채우는 반가움, 그 속에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면서도 “고객에게 안전한 항공사라는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신뢰가 무너지는 건 한 순간이며 회복하기도 정말 어렵다”며 안전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조원태 회장은 2023년 원가부담, 불안정한 글로벌 네트워크,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항공여행 방식 변화 등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조원태 회장은 “반세기 이상 차곡차곡 축적되어 온 경험은 우리만의 훌륭한 데이터베이스로, 많은 정보들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고 체계화해야 한다”며 “데이터를 활용해 많은 변수들 속에서 효과적인 대응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며 난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도 함께 제시했다.
조원태 회장은 해외 여행 리오프닝과 동시에 벌어질 치열한 시장경쟁에 대비해 수요 선점을 위한 면밀한 검토도 주문했다. 조원태 회장은 “고객의 니즈(Needs) 분석을 통해 원하는 목적지, 항공여행 재개 시점, 선호하는 서비스 등을 미리 파악해야 한다”며 “이를 토대로 언제 어떤 노선에 공급을 늘릴지, 어떠한 서비스를 개발해 적용할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조금이라도 뒤처진다면 시장은 회복되는데 우리의 실적과 수익성은 오히려 저조해지는 이른바 ‘수요 회복의 역설’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와 함께 조원태 회장은 대한항공의 이름이 갖는 위상에 걸맞는 ESG 가치 실현도 강조했다. 조원태 회장은 “ESG 경영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함께 살아나가는 미래를 위한 필수”라며 “대한항공은 최근에도 연료 효율이 높은 신형 비행기 도입, 기내 용품 재활용,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ESG 위원회 운영 등 ESG 경영 관련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사회적 가치를 실현할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조원태 회장은 2023년이 아시아나항공 인수라는 큰 과제를 완수하는 해가 될 것이라며, 모든 임직원들이 흔들림없이 소임을 다해줄 것을 당부했다. 특히 조원태 회장은 “아시아나항공의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이를 외면한다면 대한민국 항공업계 전체가 위축되고 우리의 활동 입지 또한 타격을 받는다”며 “대한민국 경제가 인체라면 항공업은 온 몸에 산소를 실어 보내는 동맥 역할을 하는 기간산업”이라고 대한항공 일원으로서의 자부심과 역할을 강조했다.
조원태 회장은 신년사를 마치면서 “우리 스스로 지혜를 발견하기 위한 길을 나서야 하며, 그 과정이 때로 힘에 부치더라도 동료들과 의지해 길을 찾다 보면 반드시 빛나는 지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우리는 고객에게 안전하고 감동적인 여행을 선사하기 위해 하늘길에 비행기를 띄우는 대한민국 최고의 전문가들”이라고 임직원들을 격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