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말 미국은퇴자협회(AARP)와 내셔널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은 ‘제2의 인생 연구’에서 미국 고령자를 대상으로 ‘노화’의 개념을 재정립했다. 연구에 참여한 시니어들은 건강, 재무, 관계, 죽음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존의 관념과는 다른 생각을 내놓았다. 그 결과부터 요약하자면, 이전보다 노화를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연재를 통해 담아왔다. 이번 호에서는 그 마지막 순서로 ‘웰다잉’에 대해 알아본다.
AARP 조사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대체로 감소한다. ‘죽음이 얼마나 두려운가?’라는 물음에 ‘극도로 또는 매우 많이’라고 답한 비율은 40대가 22%로 가장 높았고, 80대 이상이 4%로 가장 적었다(50대 17%, 60대 7%, 70대 10%).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고 답한 비율은 나이와 비례해 높아졌다. 80대 이상의 절반가량(47%), 70대의 약 3분의 1이 죽음을 염두에 둔 상태라고 응답했다(60대 22%, 50대 12%, 40대 8%).
오랜 기간 노인복지 현장에서 죽음 준비 교육을 펼쳐온 유경 사회복지사는 “AARP 조사처럼 죽음을 덜 두려워하는 노인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인 경우도 적지 않다”며 “각자의 인생관, 죽음관, 건강 상태, 가족관계, 배우자 유무 등에 영향을 받는다. 살면서 다양한 사별(死別)을 경험하며 죽음을 인식하고 수용했거나, 자기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경우 두려움이 적다. 반면 삶에 대한 애착이나 집착으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라면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마지막 인사나 주변 정리를 하지 않은 채 죽음을 맞는 일도 많다”고 말했다.
‘죽음 준비’라고 했을 때 유서 및 재산분할 서류 작성, 상조회사 가입 등 실질적인 절차를 떠올릴 수 있다. 죽음 준비도가 가장 높게 나타난 미국의 80대 이상 응답자 중 변호사를 통해 자산 관련 문서를 정비해둔 경우는 70%였다. 장례 절차 계획서를 작성한 노인은 절반을 웃돌았다(55%). 최근 관심이 늘어난 DNR(Do Not Resuscitate, 심폐소생술 거부) 문서를 써두었다고 답한 이는 65%에 달했다.
데브라 휘트먼 AARP 부사장은 “최근 노인들은 죽음 자체의 두려움보다는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스스로 상황 통제가 가능할지, 연명의료 등을 선택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크다”며 “과거보다 연명의료 중단에 대한 거부감이 덜하며, DNR을 작성해두는 모습은 평안한 죽음, 존엄한 죽음에 대한 인식과 욕구가 커진 것”이라고 해석했다.
실제 조사에서 이들 세대의 81%는 죽음의 순간 고통 없이 편안한 상태이길 원했으며, 84%는 영적 평화가 깃들길 소망했다. 이러한 바람을 이루기 위해 최근 ‘웰다잉’(Well-dying)을 통해 정신적·심리적 죽음 준비를 실천하는 노인이 늘고 있다.
유 사회복지사는 “죽음 준비는 물리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삶의 자리에서 죽음을 바라보면 슬프고 두렵지만, 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보면 인생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게 된다. 그렇게 죽음을 기억하며(Memento Mori)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해 정성껏 살아가는 것이 곧 죽음 준비”라며 웰다잉을 위한 다음 4가지 방법을 소개했다.
첫째, 내가 원하는 방식의 존엄한 죽음을 위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고, 인체조직기증 의사도 미리 밝혀둔다. 둘째, 죽음을 단순히 치료의 실패가 아닌 인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라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셋째, 법적 효력이 있는 유언과 상속에 대해 알아두고, 장례와 장묘에 대해 고민해둔다. 넷째, 사별의 슬픔을 어루만지고 나눠야 한다. 죽음 준비는 자신에 대한 것으로 끝내지 않고, 죽음을 앞두고 있거나 이로 인해 아픔을 겪는 이들을 헤아리고 위로하는 과정까지 아우른다.
도움말 유경 사회복지사(‘유경의 죽음 준비학교’ 저자)
서울에서 레코드숍을 운영하는 그녀는 작은 체구지만 단단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푸른 자연 속을 뛰놀면서 자란 그녀는 어릴 때부터 간직한 꿈이 있다. 바로 ‘지구별 여행자’가 되는 것. 그녀는 오늘도 레코드숍에서 세계 각국의 음악들을 들으며 음악의 본고장을 여행하는 꿈을 꾼다.
이는 어떤 영화의 스토리가 아닌, 도서 ‘여행을 수놓다’의 저자 신명숙 작가(68)의 이야기다. 신 작가는 ‘늦었다 싶을 때가 이르다’는 생각으로 60대의 나이에도 여행과 모험을 즐기고 있다. ‘오늘이 나의 가장 젊은 날’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신명숙 작가에게 받은 에너지를 시니어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다.
신명숙 작가는 2007년 50대에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해 67개국을 다녀왔지만, 아직도 갈 곳이 많이 남았고 힘닿는 데까지 여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 누군가는 편하게 크루즈, 패키지 여행을 즐겨야 할 나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왜?’라고 반문한다.
신 작가가 문학계에 이름을 올린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녀는 2016년 미래에셋 수필부문 공모에 당선됐고, 2018년 계간지 ‘주변인과 문학’ 수필부문 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2018년 나온 여행 에세이 ‘지구본 위를 거닐다’, 2020년 나온 시집 ‘웅이와 라넌큘러스’가 있다. ‘여행을 수놓다’는 지난 8월 출간됐다. 담백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레코드숍, 그리고 여행
섬세한 글을 쓴 그녀가 여행 작가 이전에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궁금했다. 실제 만난 신명숙 작가는 예상보다 더 호탕하고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역시 평범한 삶은 아니었다. 신 작가는 무려 23년간이나 레코드숍을 운영했고, 그러면서 늘 여행 준비를 해왔다고 밝혔다.
“생각해보면 분명한 것은 레코드숍을 하면서 늘 새로운 세계를 꿈꿀 수 있었고, 새로운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의 본고장에 가보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꾼 것 같아요. 힘들기도 했죠. 하루 종일 일하다 보면 스트레스도 많이 쌓이고, 서울에서 분당을 왔다 갔다 하느라 매일 밤 12시에 집에 들어오곤 했어요.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고 호황도 겪었지만, MP3가 나오고는 사양 산업이 되어 결국 가게를 정리했지요.”
2004년 레코드숍 문을 닫았다. 매일 바쁘게 일하던 사람이었기에 쉼표는 어색했다. 일상이 무료했고, 우울증 비슷한 것도 겪었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가 되는 법. 신 작가는 기분 전환을 위해 성남문학원에 다녔고, 여행자의 삶도 시작됐다. 오랫동안 품었던 꿈에 가까워졌다.
첫 여행은 딸과 함께한 중국 패키지 여행이었다. 이후 몇 차례 패키지 여행을 경험한 뒤 신 작가는 여행의 참맛을 맛보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이에 2007년 패키지가 아닌 배낭여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혼자 타국을 여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배낭여행 동아리에 가입했고, 사람들과 함께 인도 여행을 떠났다. 책 소개에도 적혀 있듯이, 이 인도 여행은 신명숙 작가가 여행자의 삶을 사는 터닝 포인트가 됐다.
“두 명씩 현지 가정에서 숙박 체험을 했어요. 저는 한 총각과 아잔타 석굴 뒤편에 있는 집에 가게 됐어요. 거기가 정말로 더러워요. 화장실 하나 없는 곳이더라고요. 제가 간 집은 애들이 되게 많았어요. 그곳 사람들 주식이 짜파티라고 부침개처럼 생긴 것에 달밧이라는 것을 앙금처럼 부어서 먹거든요. 그런데 세상에 그거를 한 일곱 식구가 7~8장을 놓고 먹는 거예요. 그 사람들한테 모자란 양인데, 거기서 또 한 장을 제게 주는 거예요. 사람이 이렇게도 사는구나, 충격을 많이 받았죠. 그리고 18세 아기 엄마가 있었는데, 내가 아이섀도 바르는 걸 그 큰 눈으로 쳐다보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쓰던 것을 줬더니 좋아하더라고요. 그때 저를 보던 눈빛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사람들이 인도에 갔다 오면 인생관이 바뀐다고 하던데 저도 그랬어요. 한국으로 돌아와서 애들이 반찬을 남기면 ‘너네들은 인도 한 번씩 갔다 와야 해’라고 말했어요.”
이후 2008년부터는 남편과 함께 여행했다. 여행 동반자가 된 부부는 서로에게 ‘고맙다’고 말하며 여전히 금슬 좋은 모습을 보였다. 두 사람은 과거 펜팔로 만난 사이라고. 신명숙 작가는 예전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고, 그 기본에 연애편지와 일기가 있는 것 같다고 웃으며 말한다. 일기는 지금도 매일 쓴다고.
“제가 남편한테 같이 여행 다니자고 꼬셨죠.(웃음) 여행하면서 좋은 것들을 많이 보고 오는데 남편과 공감이 안 되는 거예요. 얼마나 서글퍼요. 그래서 제가 나이 들어 공감하면서 얘기할 수 있게 같이 여행 가자고 했죠. 2008년에 중국 장자제에 갔는데, 남편이 반한 거예요. 2009년에는 북인도에 갔고, 그렇게 주기적으로 1년에 두 번은 여행을 갔어요. 지금은 제가 우리를 ‘2인조 시니어 여행단’이라고 불러요. 저는 바람잡이, 남편은 행동대장이에요. 처음에는 제가 다 리드했거든요. 지금은 역전되어 남편이 어디 가자고 예약도 다 하기 때문에 전 신경도 안 써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웃음)”
발칸, 중동, 시베리아 여행을 수놓다
‘여행을 수놓다’는 2017~2018년의 여행기다. 신명숙 작가는 책에 나온 순서와 반대로 발칸, 중동, 시베리아 순으로 여행을 했다. 책에 실린 여행지는 러시아, 발칸 지역의 루마니아,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코소보,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중동 지역의 이스라엘, 요르단, 이집트, 그리고 그리스, 포르투갈이다.
책을 읽으면 신명숙 작가와 함께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가본 적 없는 곳이지만 설명을 읽다 보면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 이는 신 작가가 태블릿 PC에 여행의 순간순간을 기록했기에 가능했다. 그 메모들이 쌓여서 여행기가 됐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책으로까지 나왔다. 신명숙 작가는 ‘여행을 수놓다’가 천편일률적인 여행책과는 다르기를 바랐다.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느낀 것까지 쓰자면 아마 책 몇 권은 되겠지만, 그런 책들은 시중에 이미 많죠. 저는 그것들을 전부 배제하고 진솔하게 긴장된 부분을 이겨낸 후 제 자신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부각하려고 했고, 의도한 부분을 함께 여행하는 분위기로 공유했으면 했습니다. 그리고 글을 쓰고 문학을 가까이하다 보니 말장난을 하기 싫었어요.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이 아닌 산문식으로 썼고, 차별화하려고 했어요.”
신명숙 작가는 여행지 중에 “발칸 지역의 알바니아, 마케도니아가 좋았다”고 회고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계획을 바꿔서 다른 곳을 가게 될 때가 있는데, 두 국가가 그랬다. 사전지식 없이 갔지만 좋았고 인상에 남는다”고 이유를 덧붙였다.
특히 여행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책을 보면 신 작가도 여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고 도움도 받았다. 그 수많은 인연 중에서 신 작가는 알바니아에서 ‘저주받은 산’으로 통하는 세스산을 같이 트레킹한 사람이 제일 생각난다고 말했다.
“스물네 살의 프랑스 아가씨인데, 처음에는 배낭 큰 거 메고 당당했거든요. 그런데 한산한 산장에 내리니까 기가 확 죽는 거예요. 혼자 무서우니 계속 우리한테 따라붙는 거죠. 그래서 트레킹을 같이 했는데, 그녀의 가방이 너무 크고 무거우니까 계속 가다 쉬고 가다 쉬고를 반복했죠. 겨울 산행은 빨리 올라가고 빨리 내려와야 위험하지 않아요. 그런데 놓고 갈 수도 없고, 정말 책에 표현한 대로 내버리고 싶더라고요. 그 아가씨 부모님이 의사예요. 우리나라 정서를 생각하면 돈이 많겠다 싶은데, 두 분이 공공기관 의사라서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고요. 그녀는 자립심을 키우고자 혼자 6개월 동안 여행을 하는 건데, 1달러에도 벌벌 떨고 그러더라고요. 제가 책에서 ‘깍쟁이’라고 표현했죠.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배운 게 많아요.”
반대로 시베리아 여행은 예상보다 잔잔했다고 기억되는 듯하다. 시베리아 여행 후기는 횡단 열차 탑승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바이칼호를 보기 위해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72시간을 내리 기차 안에 있어야 한다. 때문에 책 내용 또한 기차 안과 밖의 풍경,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주를 이룬다. 신명숙 작가는 기차처럼 달리고 싶었나 보다. 역시 에너지가 넘치는 신 작가다.
코로나19, 다시 열린 여행길
“1년에 두 번은 여행을 나가야 견딜 수 있었다”는 신명숙 작가.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막혀 답답했을 터. 그래도 남편과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캠핑을 즐기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단다. 또한 언젠가 다시 여행을 떠난다는 마음으로, 건강 유지를 위해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매일 등산을 포함한 운동을 1시간 이상 한 지도 30년이 됐다고 한다. 외국에서도 등산을 많이 해본 신 작가는 안나푸르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여행을 다녀온 67개국 중에서 가장 좋았던 나라를 묻자 어떻게 한 나라만 꼽을 수 있겠냐고 고심하더니 칠레라고 답한다. “칠레를 바람의 땅이라고 하는데, 호수가 정말 많다. 그런데 호수 빛이 다 다르고, 라마들이 능선에서 돌아다니는데 정말 아름답다.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제 해외여행길이 다시 열리고 있기에, 그녀는 다음 목적지로 중앙아시아를 생각하고 있다.
“내년에는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상반기에 안 되면 또 6개월을 기다려야겠죠. 중앙아시아, 그러니까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아제르바이잔 등을 가보고 싶어요. 아직 안 가보기도 했고요. 비행기로 5시간 내로 갈 수 있는 곳은 다 남겨뒀어요. 일부러 먼 곳만 갔죠. 중남미 쪽은 비행기만 20시간 넘게 걸려요. 하루라도 어릴 때 멀리 다녀온 거죠. 아, 유럽도 나중에 가도 될 것 같아서 일부러 남겨뒀어요. 노후에도 심심하면 여행을 가야 하잖아요. 지금까지 늘 해왔던 것처럼 건강 관리하고 여행을 가야죠.”
신명숙 작가는 여행 외에 글쟁이, 그리고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목표도 있다. 그것은 신 작가에게 ‘제2의 인생’ 희열을 느끼게 해준 손주들과 관련 있다. 손주들, 그러니까 두 딸의 자녀들은 각각 열 살, 일곱 살, 다섯 살이다. 신명숙 작가는 손주들이 태어날 때부터 기억에 남는 순간을 모두 기록해뒀다. 나중에 손주들에게 단 하나밖에 없는 책을 만들어서 선물해줄 계획이다. 과거 바쁘게 사느라 엄마로서는 부족했을 수도 있지만, 할머니로서는 다르고 싶은 마음이다.
“저는 손주들을 정말 사랑하고, 그애들을 잘 데리고 다녀요. 이번 여름에도 제가 자진해서 수영장, 해수욕장에 데리고 다녔어요. 요즘 애들은 정서적으로 시골 이런 것에 너무 고갈되어 있어요. 우리 애들도 호텔이나 가려고 하니까, 그거를 제가 대신 해주는 거죠. 내가 시골에서 자라서 심성도 악하지 않고 순수함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손주들에 대해 쓰고 있는 것도 나중에 내가 이 세상에 없을 때 할머니의 흔적을 볼 수 있으니까요. 우리 애들이 안 하니까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고요. 그리고 두 딸에게 속죄하는 마음도 있어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내 빈자리를 매정하게 다그치는 것이 바르게 세우는 것이라 믿었고, 엄마의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엄마가 곁에 없어 어릴 적 학교 수업이 끝난 후 ‘비가 온다’고 전화하면 ‘조금 더 기다렸다가 그래도 멈추지 않으면 뛰어서 가라’고 했던 말이 그렇게나 서운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지요. 그래도 그런 흔들리는 날들이 쌓여 지금에 이르렀음을 두 딸에게 고백하는 마음도 전하고 싶어요.”
신명숙 작가 인생의 좌우명은 ‘리드하는 삶을 살자’다. 누군가한테 끌려가거나,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내 삶은 내가 키를 잡고 살자는 생각이다. 평생 활기차게 진취적으로 살아온 신 작가는 늦은 나이에 꿈 또한 실현하고 있다. 그녀는 인생에서 늦은 것은 없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자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도 배낭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많은 시니어분들이 배낭여행을 못 떠나는 이유는 안정적인 현시점에서 탈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인 거예요. 굳이 배낭 메고 힘들게 가야 여행이냐, 패키지로 얼마든지 편하게 갈 수 있는데…. 그거에 갇혀서 못 나가는 거예요. 내 주위 사람들만 봐도 나를 부러워하면서도 오히려 패키지만 열심히 찾아다니더라고요. 제가 만든 말이 있어요. ‘삼잘’이라고.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고라는 뜻이에요. 너무 ‘삼잘’에 연연하지 말고, 여행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많은 시니어분들이 내 책을 보고 도전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정직한 길을 걸어온 사람은 진실하고 솔직하다. 소박하고 따뜻하다. 무엇보다 겸손하다. 우선 내 진로를 모색하고, 그 도상에서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사회로 시선을 확장하며 꾸준히 쉼 없이 걸음을 뗀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성실하고, 사람답고, 정의롭다고 말한다. 고영회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은 하나도 갖기 어려운 전문 자격증을 셋이나 갖고 있다. 변리사이자 이공계의 꽃이라 불리는 2개 기술 분야의 전문가다. 시쳇말로 꽃길만 걸어온 것일까. 함께 그가 걸어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서울대 합격한 알밤, 몸 팔러 중동으로
“보리밭에서 김을 매고 있다가 서울대 합격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 고향이 진주 동편의 진양군 금산면 시골인데 서울에 사시던 6촌 형님이 전화 연락을 주셨고, 그 전화를 받은 동네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와 알려주신 거죠. 학교 다니는 틈틈이 농사를 돕고 지게를 지고 땔감을 구하러 다녀야 했던 곤궁한 시절이었죠. 중학교 1학년 때 폐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밀린 병원비, 그 후 형제들 학비, 생활고로 인한 이런저런 빚에 눌려 집안 형편이 상당히 어려웠지요. 아버지의 폐암은 젊은 시절 7, 8년간 일본에서 광부 생활을 하셨던 게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빈곤의 대물림을 끊어보려고 돈 벌러 갔던 것이 오히려 병환을 불러왔으니 가난은 더 험상궂은 얼굴로 우리 가족을 덮쳤던 거지요.”
어릴 적 그의 별명은 알밤. 머리가 크고 영특해서 그렇게 불렸다. “알밤, 이리 와봐라.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든 대학까지 보내주마.”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이 받아든 합격 통지서에 여울졌다.
1977년, 서울대 자연계열로 들어간 후 건축학과를 택했다. 학비와 생활비 마련이라는 생존의 꼬리표가 늘 붙어 다녔던 고달픈 대학 시절이었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버텨나갔지만 간혹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다. 건축과를 나오면 100% 취업이 되던 때라 국내 경기 호재와 함께 중동 건설 붐을 타보자 결심했다. 1982년, 미륭건설(현 동부건설)을 통해 공사 현장 기사로 파견됐다.
“그 당시 중동에 가는 걸 ‘몸 팔러 간다’고 했어요. 국내에서 30만 원 월급쟁이가 거기 가면 80만 원 이상 받을 수 있었어요. 2.5배나 많았던 거죠.”
그는 4남 2녀 중 넷째 아들이지만 선친이 집안 살리려고 일본 광산에 돈 벌러 갔듯 그도 사우디아라비아로 향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빚에 눌려 고 씨 가족이 야반도주할 거라는 소문까지 동네에 돌던 때였다. 바람이 불었다 하면 모래가 비처럼 내리고 모래밭에 달걀을 묻으면 익어서 나오던, 말 그대로 열사의 땅이었다. 그렇게 3년 3개월을 모래 섞인 밥을 먹으며 돈을 벌어 집안의 빚을 얼추 갚고 나니 20대가 저물고 있었다. 중동의 모래 열기처럼 식을 줄 몰랐던 건축 경기가 1980년대 중후반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
“경기 좋을 때는 고용했다가 일이 없으면 그냥 잘라버리거나 가차 없이 책상을 빼버리는 현실을 보면서 제 미래도 암울하게 느껴졌습니다. 말로는 기술 강국을 지향한다 하면서도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대우와 처우는 실망스러웠지요.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소모품 다루듯 했으니까요.”
기술사란 별을 두 개나 땄으나
그에게 도전은 일상이다. 길이 아니다 싶은데도 뭉개고 있을 이유가 없다. 미래를 다지기 위해 엔지니어로 전문성을 갖추기로 마음을 다잡고 퇴근 후 독서실로 직행해 자정까지 공부했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의 노력으로 1991년 기술계의 최고봉이라 할 기술사 자격증을 땄다. 건축시공 기술사와 건축기계설비 기술사, 기술 분야 최고의 타이틀을 두 개나 갖게 되었다. 합격률은 5% 미만, 이공계에서 기술사는 그만큼 영예로운 이름이다. 그렇게 엔지니어로서 자긍심을 갖는가 싶었으나 제도적 구멍과 허점은 여전했고 깊숙이 들어갈수록 실망스러웠다.
이렇게 하늘의 별을 두 개나 땄지만 제대로 빛이 나지 않은 대신 그의 근성이 빛을 발했다. 모순과 불합리에 정면으로 맞서는 그의 근성 말이다. 단합된 목소리와 응집된 힘을 내기 위해 2002년 대한기술사회를 발족, 초대 회장이 되어 기술사 제도 개선 운동을 펼쳤다. 문제가 있는데도 덮어두면 구성원들이 고통을 받고, 그 신음에 무심하면 사회 전체가 병들기 마련이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기술사에 대한 처우가 제대로 되어 있었다면 변리사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기술사의 제 위치 찾기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다시금 회의가 일면서 이대로 고여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방향 전환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수험생 가장, 37세 늦깎이 변리사로
엔지니어로 소위 잔뼈가 굵어가던 때, 인생을 전환하기엔 늦었다면 늦은 나이라 할 수 있는 30대 중반에 그는 변리사 시험에 도전한다. ‘그간 무수한 시험을 치렀고 따지고 보면 인생 자체가 도전과 통과의 시험 치르기가 아닌가. 최선을 다해보고 안 되면 그때 포기하면 된다. 세상을 살면서 할걸, 하지 말걸 하는 후회는 남기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6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두 딸을 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진로 변경에 대해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겪어왔지만 고생 중에 돈 고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수험생 가장’이 된 후 새삼 절감했다. 기술사 준비할 때와는 또 다른 압박감 탓인지 연거푸 두 번을 낙방했다. 첫 시험에서 1.1점 차로 떨어졌기 때문에 두 번째 시험에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막상 성적을 받아보니 결과는 더 나빴다. 또 한 번 고배를 마시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지막이란 각오로 세 번째 도전에서는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공부에만 매달리느라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설상가상, 하루는 독서실에서 돌아와 보니 네 살 딸애가 피를 쏟고 있는 거예요. 병원에서 진단 내린 ‘특발성 혈소판 감소증’이란 병명조차 무서웠지요. 원인 모를 피를 쏟고, 쏟았다 하면 좀체 멈추질 않는 거예요. 한방 치료를 통해 체질을 완전히 바꾸고 나서야 근 5년간 지속된 병세가 잡혔지요. 아내는 당시 둘째 아이를 가졌던 터라 만삭인 상태에서 큰애를 데리고 병원을 다녔는데 출산을 앞두고는 어쩔 수 없이 시골 어머니께 도움을 청했지요. 그런데 얼마 안 지나 이번엔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셨어요. 아내는 둘째를 이집 저집에 맡긴 채 입원 중인 큰아이와 어머니를 간병해야 했고, 저는 퇴근과 동시에 작은애를 찾아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갔지요. 심청이 젖동냥하듯 작은애가 고생했지요.”
돌이켜보면 그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였다. 재정적·가정적 위기를 딛고 고진감래하여 1995년 변리사가 된 기쁨은 그래서 더욱 컸다. 그해 응시자는 5000여 명, 이 가운데 30명이 합격했으니 약 150대1의 경쟁을 뚫은 것이다. 그는 1958년생 동갑 응시생과 함께 최고령 합격자로 37세에 늦깎이 변리사가 되었다.
변호사의 변리사 자동 자격 금지 법제화 이루다
변리사 자격 취득 후 성창특허법률사무소를 내고 한숨 돌리나 했더니 기술사 세계에서 보아온 불합리한 관행이 변리사 세계에도 고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발견했다. 변호사에게 변리사 자격을 자동으로 부여하는 제도가 그중 하나.
이 관행을 뜯어고쳐 법에 명시된 변리사 고유 권한을 되찾고자 그는 37대 대한변리사회 회장(2014~2016년)에 취임했다. 관성적으로 주어지던 변호사의 변리사 자격 자동 취득 금지를 법제화하기 위해 4000여 변리사회 회원의 수장이 되어 임기 2년 동안 총력전을 펼쳤다. 2015년 12월 31일, 회장 임기 만료 2개월을 앞두고 마침내 변리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변호사가 변리사 업무를 병행하기 위해서는 6개월의 실무교육을 받도록 한 것이다. 이후 매년 300~400명이 받던 자동 자격이 30~40명 선으로 줄었으니 법 효율은 90%에 달한 셈이다.
변호사에게 자동으로 주어지던 변리사 자격이 고 회장에 의해 75년 만에 사실상 폐지된 것이다. 변리사회 출범 이래 전례 없던 법 개정이자 고 회장의 승리였다. 그 일이 실제로 성사될 것이라 믿은 사람은 없었다. 4만 회원이 등록된 변호사회는 덩치만 해도 변리사회보다 10배나 크고 국회 상임위, 법사위 등의 80~90%를 변호사가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자기 집단에 불이익이 되는 법안을 통과시켜줄 성싶냐는 게 상식이었고 또한 지배적 견해였기에.
“저라고 그걸 몰랐겠습니까. 하지만 직접 뛰어들어보니 본질과 이치가 들어옵디다. 입으로만 떠들지 말고 몸으로 뛰어보면 답이 나옵니다. 골리앗을 이기는 다윗이 종종 나오는 게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는 여세를 몰아 연임에 도전했다. 변리사회 회장의 연임 금지 규정이 폐지된 점 또한 도전을 부추겼다. 한 번 더 회장이 되면 변호사의 변리사 자동 자격 금지 제도 법제화에 이어 이번에는 법에 규정된 특허침해소송 대리권을 변호사로부터 오롯이 되찾아올 기회였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불거졌다. 변리사회 회원 중 변리사 자격을 가진 변호사 50여 명이 조직적으로 투표를 한 것이다. (변리사회는 변리사 시험에 합격한 회원, 변호사로서 변리사 업무를 병행하는 회원, 특허청 출신 회원, 이렇게 한 지붕 세 가족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자동 자격 제도 폐지로 불이익을 당하자 대한변호사협회에서 고 회장의 재선을 저지하고 나선 것.
‘눈엣가시이자 미운털 고영회’를 떨어뜨리기 위해 상대 후보를 적극 지지, 상대 후보와의 표 차는 투표한 변호사 수만큼 벌어져 465대415로 고 회장이 낙선했다. 이른바 역선택을 당한 것이다. 이후 시험 출신 젊은 변리사들의 선거 복기로 부정선거 정황이 드러나면서 신임 회장의 탄핵안이 통과되었다. 37대 고영회 회장에 이은 38대 회장이 두 달 만에 해임되어 변리사회 초유의 불명예를 안게 됐다. 사필귀정이었다.
물오른 인생 3막, 다시 쓰는 통합이력서
변리사 업계에 전대미문의 업적을 남기며 20여 년 혼신으로 일했던 변리사에서 최근 그는 기술사 업무로 다시금 방향을 전환했다.
“인생은 돌고 도는 거라더니 싫어서 나갔던 집을 30년 만에 돌아왔다고 할지, 환갑 즈음부터 처음 배운 도둑질인 기술사 업무에 나중 배운 변리사 업무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변리사로서는 경쟁력이 점점 떨어지는 점도 작용했고요.”
현장 경력, 전문 기술사 경력, 법률 문제에 정통한 변리사 경력 등 제각기 핀 꽃이 연륜으로 버무려져 건설 분쟁 해결 전문가로 독보적 지위에 올랐다. 40년 경륜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이력서로 인생 3막을 연 것이다. 속된 말로 변리사로서는 한물갔지만 기술사로서는 한창 물이 오르고 있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곧장 그 길을 가는 사람도 있지만, 돌아간다 싶었던 길을 지금 와서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30년 전 일이 다시 본업이 된 저처럼 말이지요. 현실이 고통스럽다 해도 그 고통이 미래의 기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고통 자체도 지나고 보면 경험이란 측면에서 삶을 풍요롭게 하지요. 당장은 죽을 맛 같아도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태어났으니 고생도 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긍정적 마음이 긍정적 결과를 낳는다는 보편적 진리를 믿고 한세상 살아내야지요.”
이런 인생관을 가진 그에게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조차도 ‘참 좋은 시절’이 보장된 셈이 아닌가!
문장옥 수필가의 호는 효재(效在)다. 효재란 ‘누군가 본받을 수 있는 삶을 살아보자’라는 뜻이다. 자신은 아직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해서 부끄럽게 여긴다고 말한다. 그녀는 교사였다. 그러나 마흔여덟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교직을 내려놓아야 했던 개인적인 아픔이 있었다. 그 아픔을 딛고 수필가로 새로운 인생을 연 그녀의 삶을 한 편의 담담한 수필을 읽듯 들어보았다.
문장옥 수필가가 마흔여덟 살에 교직을 내려놓게 된 것은 그즈음 두 아들이 사춘기를 맞아 방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가정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탓이 아닐까 싶어 지난 삶이 후회되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독립해 나갈 때까지만이라도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막상 그만두고 나니 교직에 대한 아쉬움이 컸고, 내 인생의 후반기를 어찌 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엄습했습니다.”
고민 끝에 시작한 것이 수필 쓰기였다.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살아온 20여 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작가라는 호칭을 갖고 보니, 독자에게 감동을 줄 만한 작품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다. 그러나 작품을 통해 ‘나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내게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자신을 설득한 다음부터는 수필가로서의 생활에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다. 제2의 인생이 마침내 그녀에게 다가온 것이다.
몸짓으로 써내려가는 새로운 인생
수필가로서 문장옥은 두 권의 수필집을 냈다. 첫 번째가 ‘행복정원에 들다’, 두 번째가 ‘내 안에 불꽃’이다. 그녀는 지난 8월에 낸 ‘내 안에 불꽃’을 통해 독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진심 어리게 전달하고 싶다고 말했다.
“에세이란 문학의 특징은 다른 문학 장르와 달리 작가의 진솔한 삶이 그대로 녹아내려 인품의 향기를 뿜어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저의 아픔과 회한, 그리고 부끄러운 모습까지 솔직히 드러내어 독자에게 공감을 주고자 했고, 작은 위안과 교훈이라도 함께 나누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독자에게 죽음과 맞닿게 되더라도 삶의 열정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그 열정을 잃어버리는 순간, 삶의 이유도 보람도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잘것없는 작품일지 모르지만 제가 작가로 살아가도록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원동력이라 생각합니다.”
삶의 열정을 잃지 않고 온몸으로 쓰다
자신의 모든 것을 진솔하게 전달하고 싶다는 문 작가의 말처럼 ‘내 안에 불꽃’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본인의 암 수술 경험까지, 그녀의 삶에서 죽음은 잔인하게 왔다 사라졌다 다시금 나타나는 실제적 위협이었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 그녀는 죽음 자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님을 보내면서, 저 자신이 네 번의 큰 수술을 하면서 삶의 옆에는 죽음이 항상 함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웰다잉이란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을 때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가까운 체험은 자연스레 인생에 대한 담담한 관조를 갖게 했다. 그럼에도 인생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나이가 칠십이나 되었는데도 인생이란 단어를 논하는 것은 자신이 없어요. 아직도 어린애 같은 천진함과 호기심이 남아 있어, 남편에게 가끔 핀잔을 듣곤 합니다. 저는 ‘이 나이에 뭘 한다고?’란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삶의 열정을 잃지 않고 무엇이든 도전해보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뒷방 늙은이’로 전락하는 신세는 면하지 않을까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참다운 나
자신의 말처럼 문 작가는 지금의 삶을 하나의 도전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죽음에 대한 담담한 수용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도전으로서의 작가 인생은 생활적인 면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자신의 서재에 이름을 붙였다. ‘진아당’으로 ‘참 내가 있는 집’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참다운 나’란 어떤 사람일까.
“자신에게 정직하고 거짓이 없으며, 진실하고 참되며, 타고난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삶의 근원이자 행복의 근원이 아닐까요? 윤동주 시인이 자신의 인생관을 보여준 ‘서시’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처럼 저 역시 그런 삶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녀는 삶이 좋은 수필의 재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나날이 누군가를 기쁘게 하고, 도움이 되고, 작으나마 행복을 줄 수 있을 때, 소박하지만 감동 있는 삶이 될 때, 그것이 글이 되었을 때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삶은 어떤 사람들의 삶에 남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녀가 교사 생활을 하던 시절의 두 제자가 바로 그들이다.
“한 사람은 제가 초등학교 교사 시절 1학년 학생으로 만난 제자인데, 지금은 서울의 모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있습니다. 제가 은퇴한 후 20년 넘도록 스승의 날은 물론 가끔씩 저를 찾아와 식사도 하고 수다도 떠는 친구 같은 제자예요. 또 한 사람은 제가 중등교사 시절에 만난 문제 학생이었는데, 이젠 어엿하고 반듯한 건축회사 중견 간부가 되었습니다. 헤어진 후 25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어렵게 나를 찾아내 보은하는 고맙고도 잊을 수 없는 제자들이랍니다. 정말 제 인생에서 ‘삶의 보람과 의미’를 알게 해준 귀하고 귀한 사람들입니다.”
남편은 행복을 공유하는 소중한 존재
그녀는 나이가 들어도 절대로 잃고 싶지 않은 것으로 ‘자유로운 삶’을 들었다. 어떻게 보면 작가로서 엄격한 법칙에 속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속박이다. 더 자유로운 삶을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주부로서 가족에게 봉사해야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이고 사랑을 품은 가운데 능동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부부는 오래전부터 각방을 쓰고 있지만 누구보다 잉꼬부부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해요. 가급적 서로 간섭을 줄이고, 한밤중 잠이 깨면 언제든지 일어나 독서와 글쓰기, 사색을 즐기며 살아가니,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처럼 그녀에게 남편은 행복을 공유하는 소중한 상대다. 노후의 행복을 꼽을 때 그녀는 무엇보다 먼저 남편을 떠올릴 정도였다.
“자녀들이 독립해 집을 떠난 지금은 남편과 한 방향을 바라보며 서로 배려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저희는 동네 공원을 매일 저녁 한두 시간씩 산책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매월 한 번씩 함께 여행을 갑니다. 젊은 시절에 누렸던 낭만적인 느낌은 약해지긴 했지만, 이젠 서로가 익숙한 처지라 같이하는 시간이 편안해요.”
남은 여생 동안 더 많이 사랑하고 베풀 것
문 작가는 회갑이 된 기념으로 첫 번째 수필집 ‘행복정원에 들다’를 냈고, 칠순 기념으로 두 번째 수필집 ‘내 안에 불꽃’을 냈다. 두 권의 책을 냈지만 쓰면 쓸수록 걷고 있는 이 길이 결코 쉽지 않은 여로임을 절감한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다. 독자에게 큰 감동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아쉬움이며 동시에 다시 펜을 잡게 만드는 동력이기도 하다.
“만약 세 번째 책을 낸다면, 남은 여생 동안 더 많이 사랑을 나누고, 베풀며, 도전하고, 독서와 글쓰기에도 게으르지 않음으로써 푸근한 감동으로 다가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문장옥이라는 수필가 안에 숨길 수 없는 벅찬 감흥이 밀려 왔다. 그녀의 진솔한 민낯이 사랑스럽다.
예능과 무대를 종횡무진하는 다재다능한 종합예술인 홍서범이 오랜만에 본업인 음악으로 돌아왔다. 지난 3월에 그가 발표한 신곡은 ‘월든에 놀러간 니체’라는 다소 프로그래시브한 제목이다. 노래 내용도 제목 그대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자연 속 삶을 통해 물질주의를 비판한 명저 ‘월든’을 쓴 월든 호수에 ‘신의 죽음’과 실존의 중요성을 외친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찾아간다는 내용의 노래. 누가 봐도 보통 사람이 생각할 발상은 아니다. 그러나 홍서범에게 평범한 것을 기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철학을 그대로 반영한 신곡을 통해 다시금 세상의 문을 두드리는 그를 만나 독특한 인생관을 들어봤다.
“대중음악은 다양해야 하고 본인 생각이 담겨야죠. 인기만 쫓는 건 창작자로서 할 일이 아닌 거 같아요. 제가 아이돌처럼 대 히트를 할 것도 아니고…. 가요계에 데뷔한 지 40년이 넘었는데 예전 록 스피릿으로 돌아가서 음악도 옥슨답게 하자 싶었죠. 가사도 나이 들어서 사랑 타령 하기도, 이별 노래 하기도 그렇고…. 대신 내가 삶에서 느꼈던 거, 내 생각의 중심이 뭔지 정리해서 발표해보고 싶었어요. 그게 ‘월든에 놀러간 니체’예요.”
홍서범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책 ‘월든’과 니체의 철학이 자신의 중심을 잡아줬다고 말한다.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서 삶의 본질에 대해 묻고자 출세를 접고 스스로 자연으로 들어갔다. 니체 또한 스위스 질스마리아의 호숫가에서 요양을 하며 저 유명한 영원회귀 사상을 정리했다. 두 사람의 우연한 공통점은 호수에서 자신의 대표적인 사상을 만들어냈다는 것. 홍서범은 그 두 장면이 스쳐 지나가면서 ‘니체가 월든 호수에 갔으면 어땠을까’ 상상하게 됐다. 그리고 그 상상을 오롯이 노래로 만든 것이다.
홍서범을 통해 월든 호수를 만난 니체
노래의 비하인드를 들으니 과연 홍서범다웠다. 노래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도 딱 두 가지로 나뉘었다고 한다.
“‘넌 왜 이렇게 안 되는 음악만 하냐’와 ‘이런 노래가 세상에 나왔다는 게 반갑다’였죠. SBS PD 했던 분은 ‘서범아 넌 이제 대중성 있는 것 좀 해라, 실험적인 음악 그만하고’라고 하시고, 저를 아는 분들은 ‘뭐 어차피 네가 할 음악 하는구나’라고 말하더군요.(웃음)”
자신의 음악을 누가 뭐라고 하든 관철한다는 게 그의 완고함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보는 요즘 아이돌은 어떨까? 혹시 그의 기준에 벗어나는 거슬림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예상외로 그는 요즘 아이돌에 대해 무한한 긍정을 표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은 일제강점기를 벗어나고 미국 팝 음악이 들어오면서 미8군 출신 가수들을 통해 급격히 발전했거든요. 일본은 처음에는 영미 팝을 따라가다가 자기들 특유의 제이팝을 만들었어요. 물론 일본은 워낙 인구도 많고 다양해서 수준이 있어요. 반면 우리나라는 혼란기가 있었던 게, 1980년대 중후반부터 제이팝을 많이 베꼈어요. 일본 음악이 금지였을 때 양심 없는 작곡가들이 많이 표절했죠. 그러다 일본 문화가 개방되면서 그쪽으론 못 간 거지. 그래서 다시 미국 팝을 추구한 거죠. 그런데 거기에 우리 민족 특유의 음악성, 표현력, 특유의 한이 블랙 뮤직 이상인데, 그게 더해져서 성공했다고 봐요. 이 짧은 시간에 빌보드를 점령할 정도니 우리나라 대중문화의 우수성은 저도 감탄하고 있어요.”
그는 주변을 봐도 노래와 악기 연주를 너무 잘하는 젊은 세대가 많다고 감탄했다. 더구나 디지털 문화가 보급되면서 과거보다 쉽게 원하는 걸 접하고 얻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우리 때는 소위 음반을 구해도 ‘빽판’이었고 악보도 없이 귀로 들어서 코드를 땄어요. 그러다 보니 이 팀 저 팀 코드가 다 다르고.(웃음) 지금은 발전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됐죠.”
가장 싫은 것은 주변에 민폐 끼치는 것
최근 음악 트렌드에 대한 홍서범의 평가를 들으니 자연스레 후배 양성에 대한 얘기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손사래를 쳤다.
“게을러서 사업 쪽으론 관심이 없어요. 주변에선 그 정도 노하우 있으면 해도 되지 않느냐 하는데, 사업 재능이 없어요. 유혹은 많았죠. 하지만 그런 거에 혹해서 나도 해볼까 했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 줄까봐, 스스로 판단해보니 그건 아니더라고요. 나도 할 일이 많고, 아직도 하고 싶은 것도 있고. 수만이 형 대단하고 박진영도 대단해요. 음악도 잘하지만 사업도 잘하니까요.”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남에게 민폐 끼치는 일이다. 지금 시대에 아이돌 같은 후배를 대중가요 시장에 맞게 체계적으로 양성하려면 기본 자산이 천문학적으로 든다. 그렇다면 투자를 받아야 하는데, 혹시 사업이 잘 안 되면 투자자에게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다. 그가 사업은 도저히 못 하겠다고 말한 것은 자신의 기준과는 너무나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뮤지컬 통해 7080 문화를 새롭게 바꾸고 싶어
그럼에도 홍서범은 하고 싶은 게 있다고 말했다. 자유롭게 살길 바라는 그가 그리는 미래는 무엇일까?
“예전에는 7080 문화로 전국 투어 하고 해외 투어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그게 막혔죠. 이제 새롭게 해야 할 것 같아요. 7080 문화의 새 콘텐츠로 뮤지컬 같은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그런데 작가도 있어야 하고 투자자도 있어야 해서 보통 일은 아니더라고요. 하지만 공연할 때 나열식으로 차례대로 노래 부르고 내려오는 건 이제 끝났고, 그때 음악과 그때 사건으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건 그 단계예요.”
7080을 위한 장기 공연 문화이면서 기존과는 다른, 뮤지션도 좋고 관객도 즐거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판단은 비슷한 시대를 산 가수들이 공감하는 부분이다. 조용필조차 자신의 노래들을 바탕으로 뮤지컬을 만들려고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는 현재 7080 뮤지션들의 공연 문화가 너무 일방적이라 답답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맞아요. 제가 시놉시스를 짠 후 작가를 불러서 이런 내용으로 써보라고 한 적 있어요. 그랬더니 ‘형, 이거 하려면 투자 많이 받아야 하고 언제 코로나가 끝날지도 모르는데’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일단 써놔야지!’(웃음)라고 타박했죠. 앞으로 7080이 가야 할 길은 그쪽이에요. 새로운 문화를 자꾸 만들어서 방향을 바꿔야죠.”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들의 고충 이해돼
홍서범이 활동했던 7080으로부터 세월이 흐르면서 가요계도 가수들도 바뀌었다. 완제품으로 시장에 나와야 하는 요즘 세대 가수들과 달리 그의 세대 가수들은 데뷔 후에 연습도 겸하면서 성장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도 그는 노래에 대한 관점이 다른 가수들과 달랐다.
“저는 노래를 어떻게 해야 잘할까가 아니라 전체적인 음악의 완성도를 중요시했어요. 솔직히 노래를 만든 후에 녹음할 때가 되어서야 처음 불러본 노래도 있었죠. 노래는 신경 안 썼던 거지. 그래서 초창기에는 노래를 불렀다기보다는 샤우트를 했어요. 감성 표현 같은 게 약했죠.”
음악을 종합적으로 보는 그의 관점은 가창자로서의 가수보다는 프로듀서와 흡사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에 대한 비판에도 한편으론 이해가 가는 면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어떨 때는 나보다 노래 잘하는데 어떻게 평가를 하지?(웃음) 이런 경우도 생길 테고. 그렇다고 ‘정말 잘하시네요’라고만 말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방송이라 뭔가를 해야 하니까. 어려워요, 남을 평가한다는 건. 해본 사람만 알지. 저는 못 할 거 같아요. 그리고 프로들이 무대에 올라도 스트레스가 큰데 아마추어면 더 심하겠죠. 오래 준비했는데 실수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도 있으니 평소의 70%만 해도 성공이라고 봐요. 그것도 멘탈 싸움인 거 같아요. 웬만하면 칭찬도 많이 해줘야 좋은 결과가 나오겠죠.”
잘 노는 게 잘 사는 것
홍서범은 한국식 나이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가 강조하는 자신의 나이는 만 62세다. 환갑을 넘긴 그에게는 잘 노는 게 잘 사는 거라는 확고한 기준이 있었다.
“잘 먹고 잘 놀고 유쾌하게 살다 가자, 나에게 주어진 대로 즐길 수 있는 최대한 즐기자는 생각이에요. 물론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고민한다고 풀리지도 않잖아요. 그래서 저는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 아니면 내 능력 밖인가’ 판단하는 게 중요해요. 능력 밖인 고민은 접는 거예요. 그런데 해결할 수 있다면? 그럼 해보는 거죠.”
한마디로 그는 스트레스를 받는 성향이 아니다. 그 덕분인지 유독 피부가 좋아 보였고, 살도 안 찌는 듯했다.
“체질도 그렇지만 가만히 한자리에 있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운동도 많이 하고. 옛날에는 축구를 많이 했고 지금은 배드민턴을 일주일에 한 번 쳐요. 틈날 때마다 자전거를 타거나 산에 가며 이것저것 하다 보니 살이 찔 수가 없지. 피부도 땀을 많이 흘리니까 좋은 거 같네요. 등산처럼 혼자 하는 게 가장 운동이 많이 돼요. 즐겨 찾는 산은 북한산입니다. 코스도 많고 아무 생각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거죠.”
무한긍정과 힘찬 에너지, 자유로움
홍서범의 성격을 지금까지 들여다봤으면, 그가 소위 관계 정리에 대해 이해 못 하겠다는 반응을 보인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을 정리한다?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자연스럽게 만날 사람은 만나고 안 만날 사람은 안 만나게 되는 거죠.”
그가 참여하고 있는 연예인 모임이 꽤 많다. 공놀이야(축구), 콕놀이야(배드민턴), 산놀이야(등산), 큐놀이야(당구), 휠놀이야(자전거), 술놀이야(음주)까지 총 6개. 그중 공놀이야에만 쉰 명 이상 가입되어 있다. 그런데 활동할 때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안 나오는 사람도 있기 마련. 그래서 관리를 맡고 있는 후배가 안 나오는 회원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냐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홍서범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참여할 상황이 못 되니까 못 하는 거지. 만약 걔네를 내치면 내쳐지는 사람 기분이 어떻겠냐. 놔두면 적당한 때 돌아온다. 언제든지 문을 열어놔야 들어올 게 아니냐. 한번 인연 맺었는데. 그리고 참여 안 한다고 우리한테 해 되는 거 있어?”
그 말을 들은 후배는 할 말이 없었다. 홍서범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는 사례였다.
뭐든지 푹 빠져 사는 남자
홍서범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부러워한다. 인터뷰를 하다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에게는 어떤 사람은 평생 갖지 못할 후회 없는 자유에 대한 확신이 이미 있었다.
“니체 형님이 하신 말씀 중에 정말 좋은 말씀이 ‘다시 살고 싶도록 그렇게 살아라’예요. 그럴 정도로 살아야죠. 어제도 고등학교 친구들이랑 북한산에 갔어요. 다들 대기업 사장 하다 명퇴했는데 삶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우리가 건강하게 잘 살 날이 70대 중반까지면 이제 10년밖에 안 남았어요. 원 없이 살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고 보면 시간이 너무 짧더라고요. 그러면 여행도 많이 다니고 노는 게 남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말하니 걔네들이 ‘야, 난 매일 놀아’라고 대꾸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야, 그렇게 놀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하라고. 빈둥빈둥 노는 건 진짜 무료해’라고 답해줬죠. 무료함이 인생 최대의 적이에요.”
그가 심심하고 지루해하는 모습은 상상되지 않았다. 아마 10년 후에도 그는 니체를 월든 호수로 불러들인 것처럼, 또 다른 독보적이고 독특한 노래를 만들고 있지 않을까. 유쾌한 종합예술인 홍서범의 인생이 보여줄 무료하지 않은 미래를 기대해본다.
남원 하면 추어탕부터 떠오르나? 그럴 사람이 많겠다. 널리 이름난 향토음식이니까. 소리의 본향으로도 유명한 게 남원이다. 동편제 판소리 가왕 송흥록과 명창 박초월을 길러낸 민속국악의 옥토이자 산실이다. 광한루와 지리산도 남원의 얼굴이다. 이래저래 여간한 고장이 아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즐길 게 많다. 여행자들의 기쁜 순례지다. 최근 새로운 명소로 떠올라 사람들을 줄줄이 끌어들이는 똘똘한 공간이 하나 있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하 ‘김병종미술관’)이 바로 그렇다. 요천강변 춘향테마파크 안에 있다.
8월의 땡볕이 가혹하다. 게다가 마스크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 돌아다녀야 하니 이거 참 ‘병맛’이다. 세상은 알고 보면 아름다워 희망과 긍정을 노래할 가치가 충분하지만, 요즘은 뭐 좀 그렇다. 물심양면의 불황으로 모두 시난고난, 실의에 빠진 도스토옙스키의 표정처럼 우울하다. 의연한 건 자연이다. 사위로 펼쳐지는 자연 풍광이 싱그러운 김병종미술관으로 들어서자 생기가 돋는다. 야산 언덕배기에 있는 미술관 저 멀리로 지리산 연봉이 보인다. 천하제일 방랑 나그네인 구름이 살랑살랑 산을 넘는다. 흰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새파란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처럼 순수하다. 미술관 인근에서도 푸른 숲이 술렁거린다. 자리 한번 옳게 잡았다. 이 미술관은 전원형 미술관이다.
김병종미술관은 2018년 3월에 개관했다. 한국화가 김병종이 기증한 작품 400여 점을 기반으로 설립됐다. 이후 길차게 자라는 대나무처럼 성장했다. 별로 주목받지 못해 서러운 게 소도시에 있는 미술관이다. 김병종미술관은? 다르다. 개관 이래 다녀간 관람객이 17만여 명에 이른다. 유별나게 화려하거나 거대한 미술관이 아님을 감안하면 이변에 가깝다. 내실과 매력을 갖추면 지방 미술관에도 근사한 피드백이 돌아온다는 걸 입증했다. 작가의 예술과 대중의 일상이 겉도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명소로 떠오른 까닭이 이렇게 완연하다. 미술관을 통해 남원을 홍보하고, 지역 발전의 동력 하나를 보태고자 한 설립 주체 남원시의 의도가 빗나가지 않은 셈이다.
올봄 이 미술관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주관하는 ‘2021~2022년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국내 명소들의 탐방객 숫자 등 빅데이터를 근거로 고른 이 ‘100선’에 든 미술관은 세 개다. 김병종미술관 외에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원주의 뮤지엄 산이 뽑혔다. 한국의 열악한 문화적 풍토를 병증으로 진단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다. 미술관에도 관광지처럼 일쑤 인파가 몰려드는 게 아닌가. 억눌린 일상의 출구를 예술작품에서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이다. 아무려나 김병종미술관은 탕탕 기세 좋게 행진한다.
그렇다면 이 미술관은 무엇을 연료로 항진하나? 우선 김병종의 작가적 무게가 헤비급이다. 그는 자기만의 날개를 휘저어 미술의 창공을 비상하는 화가다. 재미와 재치로 터진 실밥 없이 잘 바느질한 스테디셀러 ‘화첩기행’으로도 지명도가 높다. 호젓하고 청명한 분위기에 감싸인 미술관의 입지와 미니멀한 노출콘크리트 건축물의 미감도 감성을 자극해 호감을 산다.
무엇보다 물 정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나무와 잔디로 채운 정원의 일부는 평범하지만 조경의 축을 이룬 물 정원은 기발하다. 사각형 수조 형태의 얕은 못 다수를 계단식으로 배열해 만들었다. 그 절묘한 물 공간 복판으로 난 동선을 따라 건물로 진입하게 돼 있는데, 관람객들은 이 대목에서 가벼운 설렘 이상의 매혹을 느끼게 마련이다. 잔잔한 수면엔 햇살이 아롱지며 연신 신비한 무늬를 그린다. 물에 드리워진 나무와 구름과 하늘의 그림자는 유령처럼 미묘해서 아름답다. 굴레가 없어 자유롭고 무방비 상태로 완전한 게 물이다. 그래서 상선약수(上善若水)다. 목줄 매단 강아지처럼 끌려다니는 삶일지라도 내면에 물의 정신을 담고 살면 견딜 수 있다. 이렇게 물의 정원은 물을 명상하고 삶을 돌아보게 한다. 낭만과 추억을 길어 올리게 한다. 그러라고 만든 공간이겠지.
동화책처럼 쉽게 읽히는 작품들
2층으로 지은 건물 안에는 전시장 세 개가 있다. 당연하게도 김병종미술관에서는 김병종 외에 다른 작가들의 기획전도 빈번하게 열린다. 지금은 김병종의 기증 작품 특별전 3차 시리즈 ‘생명의 숲과 바다’전(10월 17일까지)이 펼쳐진다. 기증 작품 중 90여 점이 나왔다. 대다수가 미공개작이라 애호가들의 구미에 맞을 전시회다.
화가란 다르게 보는 눈과 다르게 생각하는 머리를 장착한 존재다. 현상의 외피를 걷어내고 본질을 발굴해 캔버스에 옮긴다. 자신만의 인생관과 심미안으로 세상의 행간을 읽는 것인데, 김병종의 초기 작품 ‘바보 예수’ 시리즈는 흑인 예수를 그리는 등 사회의식을 드러냈다. 사뭇 독자적인 수묵 기법을 구사해 국내 화단은 물론 유럽 일각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는 ‘생명’을 화두 삼아 자연을 그리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경을 헤맸던 경험이 야기한 전환이었다. 이번 특별전에 걸린 작품 대부분이 이 시기에 그려졌다. ‘생명 작가’라 불리기 시작한 시절의 그림들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김병종의 그림을 보자면 그건 환희이자 순수이며, 존엄이자 행복이다. 신이 고안해 삼라만상에 고루 주입한 사랑의 발현이며, 비루하거나 고통스러울 일이 없는 화평의 지속 상태다. 흥미로운 건 술술 읽히는 동화책처럼 쉽게 다가오는 그림이라 감정이입이 쉽다는 사실. 아이들, 꽃, 학, 토끼, 닭, 물고기, 산, 물, 구름 등이 등장하는 화폭마다 소박하고 밝고 따뜻하다. 심지어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휘갈긴 그림처럼 천진하다.
딱한 건 그림을 보는 사람 쪽이다. 그림은 생명의 생명다운 힘으로 저토록 아름다운데 나의 삶은 왜 피폐하지? 그런 상념, 문득 들솟기 십상이다. 우리는 모두 오욕칠정의 탁류를 헤엄치는 가여운 존재이지 않던가. 그러나 그쯤에서 멈추면 멍청이의 잡념일 뿐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성격이 좋아진다. 김병종의 그림을 바라보면 막힌 가슴이 어느덧 열린다. 잃어버린 동심과 행복을 돌아보는 사이에 삶의 쇠사슬 같은 게 풀려나가는 기분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김병종의 환한 그림이 주는 자극과 감흥의 약발이 이렇게 세다. 가슴속에 고인 불만과 불안을 털고 돌아가게 한다.
서류전형이라는 큰 산을 넘었다면 이제 남은 것은 면접이다. 면접은 시간이 정해져 있는 만큼 단 몇 마디로 자신의 강점을 말할 수 있어야 하며, 돌발 질문에 능숙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트렌드에 발맞춰 ‘줌’(ZOOM) 등을 활용한 비대면 면접 방식도 알아둬야 한다. 재취업의 길로 향하는 최종 관문, 면접관의 시선을 끄는 면접 노하우를 소개한다.
도움 중장년 재취업 전문기업 상상우리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나이와 관계없이 두근거리고 긴장되는 일이다. 말 몇 마디로 합격·불합격 여부가 결정되는 면접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어느 대중가요의 노래 가사처럼 면접관 앞에서는 머릿속이 백지장으로 변하고, 동공이 흔들리며, 잘만 나오던 목소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린다.
하지만 고생 끝에 면접장에 들어선 이상 허무하게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중장년 일자리 시장은 모집 경력이 10년 이상만 넘어가도 30대 후반~40대 초반 지원자들까지 몰리기 때문에 면접보다 서류전형이 더욱 치열하다. 그 말은 서류만 통과해도 합격률이 크게 높아진다는 뜻이다. 특히 중장년은 면접관과의 직접적인 소통으로 나이에 따른 편견을 해소하고, 지혜가 돋보이는 발언으로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먼저 기업의 입장에서 지원자에게 궁금한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질문의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기만 하면 횡설수설하지 않고 면접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재취업 전문가가 알려준 면접 팁을 알아두었다가 실전에서 멋지게 활용해보자.
[1] 1분 자기소개는 두괄식으로 명료하게
모든 지원자가 피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단연 1분 자기소개다. 1분 자기소개는 주어진 시간 안에 자신의 강점을 압축해서 보여줘야 하는 초고난도 미션이다. 첫 질문이라는 점에서 부담감도 크다. 하지만 다른 질문과 달리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 있다. 또한 흥미를 유발할 경우 추가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꼼꼼하게 연습하면 꽤 유리한 무기가 된다.
일부 중장년은 ‘자기소개’라는 단어 때문에 말 그대로 인생관이나 취미, 생활 방식 등을 소개하는 질문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1분 자기소개는 지원자가 회사에 적합한 인재인지 여부를 빠르게 파악하기 위한 질문이므로 직무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지양해야 한다. 대신 자신이 지원한 직무에 적합한 이유를 한 줄로 정리하고, 두괄식으로 이야기를 이끄는 것이 좋다.
▶ 기출 질문 자신을 1분 동안 소개해보세요.
▶ 합격 노트 실제 재취업 성공 사례 (공공시장 영업 관리직)
저는 누군가를 제 편으로 만드는 남다른 재주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공공시장 영업에 특화된 사람입니다. 최근 2년간 공공시장 영업 관리와 마케팅으로 연 ○○억의 매출을 올린 경험이 있습니다. 저도 중장년이기 때문에 매년 늘고 있는 노령 인구와 장애인 이동권 확보에 관심이 많은데요. 보장구 충전기 분야는 아직 지자체와 공공기관에서 법제화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자체 및 관련 공공기관 등을 대상으로 영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년간의 공공시장 영업 경험을 보장구 분야에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 한 줄 정리 강점, 지원 동기, 직무 경험(1~2가지), 입사 후 포부를 매끄럽게 연관 짓는 것이 핵심!
[2] 개방적인 태도로 유연성 어필하기
직무 역량이나 경험 못지않게 중장년에게는 ‘소통 능력’에 대한 질문이 단골로 등장한다. 업무 도중 나이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의견 차를 우려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질문에 당황하지 않으려면 관계 개선에 관한 커뮤니케이션 스킬을 생각해두는 것이 좋다. 이는 실제 조직 생활에 적응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예컨대 혼자 결론짓지 않고 다 같이 문제를 살펴보며 장단점을 분석하는 수평적인 의사결정에 익숙해져야 하고, ‘내가 옛날에 해봐서 안다’는 뉘앙스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보다 다양한 시각을 포용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적절한 답변으로 유연성을 어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위 말해 ‘꼰대’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면접 태도 또한 신경 써야 한다. 자세와 표정 등 비언어적 표현은 언어적 표현만큼 인상에 영향을 미친다. 질문을 끝까지 듣지 않고 면접관의 말을 가로채며 답변을 하거나 팔짱을 끼고 상체를 뒤로 젖혀 앉는 등 ‘언행불일치’의 태도를 보인다면 답변에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면접도 기업과 개인 간 소통의 일부라는 점을 기억하며 진지하게 임해야 한다.
▶ 기출 질문 젊은 동료와의 갈등을 해소하는 자신만의 노하우가 있습니까?
▶ 합격 노트 실제 재취업 성공 사례 (서울50+ 인턴십)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자기 말만 한다는 편견이 있습니다. 저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는 청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맞장구를 치며 대화에 활기를 더하려 노력합니다. 다만 친밀감을 표현할 목적으로 사적인 부분을 언급하는 것은 지양하는 편입니다. 또 상대방이 했던 말을 요약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보내는 것도 저만의 노하우입니다.
[3] 회사의 지향점을 개인의 목표와 연관 짓기
면접이 끝날 무렵에는 입사 후 목표나 계획, 포부 등을 묻는 경우가 많다. 이는 회사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지원자의 목표와 일치하는지, 혹은 구체적인 업무 추진 계획이 있는지 확인하는 질문이다. 즉 ‘조직에서’ 이루고 싶은 포부를 의미한다. 따라서 장대한 노후 계획이 있더라도 개인적인 목표보다는 지원 직무와 연관 지어 대답하는 것이 좋다. 특히 직무 관련 최신 동향이나 트렌드를 언급하며 향후 회사가 나아갈 방향을 분석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해낼 역할을 구체적으로 짚는다면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직무 관련 자기계발 계획을 언급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지속적인 발전을 원하는 기업은 주어진 일만 하려는 사람보다 성장을 도모하는 사람과 일하길 희망한다. 자신의 능력을 갈고닦아 회사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면, 기업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용을 고려하게 된다. 관리직을 지원하는 경우 기업의 비전을 역으로 질문해도 좋다. 마지막으로 질문을 받는 시간에 기업의 5년 후 비전을 물어보는 것이다. 중장년의 관록과 경험으로 회사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기업은 지원자의 진취적인 태도를 긍정적으로 여길 수 있다.
▶ 기출 질문 입사 후 (조직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나 계획이 있습니까?
▶ 합격 노트
· 모아둔 돈으로 전원주택을 지어 아내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X)
· 최근 ‘라이브 커머스’ 등 비대면 유통 채널이 코로나19 시대에 새로운 돌파구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30년 경력을 보유한 유통 전문가로서 해당 채널의 판로를 뚫고 실질적인 매출 상승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O)
· 그동안 마케팅을 진행했던 사례를 책으로 만들어 젊은 마케터들에게 지식을 전파하고 싶습니다. (O)
◇ 코로나19 시대, 비대면 면접 TIP
장비 점검 후 접속 환경 확인하기 ▶ 화상회의 시스템에 참여하려면 노트북, 태블릿PC, 스마트폰, 데스크톱 중 하나가 필요하다. 이 중 노트북이 제일 이상적이다. 노트북은 대부분 화상캠과 마이크가 기본적으로 탑재돼 있는 반면, 데스크톱은 별도의 설치가 필요하다. 스마트폰으로도 접속이 가능하지만, 연결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어 가급적 지양하는 것이 좋다. 준비가 끝났다면 끊김을 방지하기 위해 와이파이가 안정적인 환경에서 접속한다.
배경은 깔끔하게, 조명은 밝게 ▶ 비대면 면접은 주변 배경도 인상에 큰 영향을 준다. 단정하게 차려 입어도 주변이 산만하면 효과가 없다. 가급적 흰 벽 등 깔끔한 배경 앞에서 면접을 보는 것이 좋다. 스터디룸이나 세미나룸을 빌려도 된다. 주변을 미처 정리하지 못했어도 가상 배경은 넣지 않는다. 진지해 보이지 못할뿐더러 인물이 왜곡되어 나타날 수 있다. 집 안이 어두울 경우 LED 스탠드나 화상회의용 조명을 활용해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것도 좋다.
카메라 렌즈 보고 말하기 ▶ 간혹 화면 속 면접관의 얼굴을 보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노트북은 화면 위에 카메라가 달려 있어 화면을 보고 말할 경우 시선이 아래로 향하고, 내려다보는 느낌을 줄 수 있다. 노트북에 받침을 대서 높이를 올리고 렌즈를 응시하며 말해야 한다. 또 노트북과 50cm 내외의 거리를 유지해 화면에 상반신 3분의 2 정도가 드러나게 하는 것이 안정적이다.
이어폰으로 음질 보완하기 ▶ 음질은 비대면 면접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실제로 면접 중에는 목소리가 울리거나 끊기는 등 음질로 인한 다양한 애로 사항이 생긴다. 청력이 좋지 않아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듣고 대답하는 경우도 있다. 이 같은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는 소음이 없는 공간을 찾고, 노트북 내장 마이크 대신 무·유선 이어폰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이어폰 착용 후 사전 테스트는 필수!
음소거 기능 활용하기 ▶ 1:1 면접이 아닌 그룹 면접의 경우 대면 면접과 마찬가지로 다른 지원자의 답변에 경청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하지만 비대면 면접은 그 특성상 주변의 잡음이 섞일 수 있어 면접관이나 다른 지원자가 말할 때 ‘음소거’ 기능을 눌러놓는 것이 좋다. 단, 자신의 차례가 오면 해제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성공적인 재취업을 위한 마음가짐
모든 도전이 언제나 달콤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최선을 다해도 탈락의 고배를 마실 수 있고,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장년 일자리 공급 과잉 현상은 베이비붐 세대의 고령화와 맞물린 사회적 과제이므로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 전에 일자리 시장에 뛰어들려는 이유와 목적을 진단하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정확하게 분석해야 한다. 가령 생계를 위한 소득이 필요한지, 사회 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끼고자 하는지, 혹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지역사회에 환원하길 원하는지 분명히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혼자 판단하기 어렵다면 공공기관에서 시행하는 진로 적성검사 등을 받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다음 이에 걸맞은 자기계발을 꾸준히 하다 보면 기회는 자연스레 다가오고, 인생 후반전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PLUS+] 다시 출발점에 서 있는 중장년을 위한 TO-DO LIST
· 희망 기업 목록 작성 후 관련 정보 업데이트하기
·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서 경력 상담 및 자가진단 하기
· 국민내일배움카드 등 정부 지원 서비스로 취업 연계 자격증 준비하기
· 서울시50플러스재단 등 또래 집단 커뮤니티 활동으로 인맥 넓히기
· 희망 직무 및 관심 분야 관련 자원봉사 프로그램 참여하기
오랜 시간 죽음을 공부했던 김이경(56) 작가는 가족과 지인들의 생사기를 목도하며 관념 속에 있던 죽음의 실체를 경험하게 된다. 평생의 스승과도 같았던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자기 생의 일부를 떠나보내는 슬픔과 성찰로 긴 애도기를 거친 그녀. 자신을 위무했던 죽음의 통찰을 담은 글귀를 모아 ‘애도의 문장들’(서해문집)을 펴내며, 애도의 시간을 보낼 이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자 한다.
Q. ‘애도의 문장들’을 펴내게 된 계기와 소감이 궁금합니다.
책을 내려고 글을 쓰기 시작한 건 한 5년 전부터였어요. 중간에 몇 번 포기도 했고, 출판사랑 계약을 파기한 적도 있었죠. 그러다 20년가량 고민해온 죽음에 대한 문제나 그사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는 한 번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싶어 매듭짓게 됐습니다. 그야말로 숙제를 한다는 생각으로 마친 거죠. 사실 책이 나오고 큰 만족감은 없었어요. 해냈다는 건 뿌듯하지만, 잘했다는 건 잘 모르겠더라고요. 죽음에 대한 공부는 끝이 없기 때문에, 이 책은 끝이 아닌 시작이고, 잠시 마침표를 찍은 거라 생각해요.
Q. 공부를 통해 관념적으로 알던 죽음과 실제 가족과의 이별을 통해 경험한 죽음은 어떻게 다르던가요?
젊었을 때는 죽음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갖고 있었던 것도 같아요. 가령 천재들은 요절한다거나 이런 얘기를 들으면, 죽음이 두렵거나 무서운 게 아니라 ‘짧고 굵게 사는 거지 뭐’라는 식으로 쉽게 생각했던 거죠. 그러다가 가족이 병에 걸리고 생사를 달리하는 과정 등을 보면서 ‘아, 죽음이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구나’라는 걸 깨달았죠.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면 그 죽음은 주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그들의 삶까지 크게 좌우할 수 있다는 걸 느꼈어요. 삶과 죽음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삶과 죽음은 늘 함께 있는 거였죠. 어쩌면 죽음에 대해 막연히 두려움을 갖는 건 인생을 잘 모르기 때문일지 몰라요. 그래서 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Q. 제목처럼 책에는 애도에 관한 문장들이 나오는데, 그중 자신에게 가장 위안이 됐던 문장은 무엇이었나요?
책에 언급한 문장 하나하나 제게 위안이 된 셈이죠. 그래도 가장 마음에 남는 걸 꼽으라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발견한 문장이에요. 아버지의 묘비명에도 쓰였는데, 아마 일종의 인생 후반기 좌우명처럼 생각하신 것 같아요. ‘모든 상대는 흐르는 물과 같다’는 거죠. 그 상대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죽음이 될 수도 있고, 어떤 감정이 될 수도 있어요. 어쨌든 이 모든 것은 계속 흘러간다는 거죠. 그러니 내가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느끼는 이 슬픔이나 절망도 언젠가는 다 흘러간다는 거잖아요. 그 문장에 많이 기대고 위로받았습니다.
Q. 아버지는 인생의 멘토와도 같은 분이라고 하셨죠. 삶의 끝자락에서 아버지가 남긴 죽음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인가요?
언젠가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죽음이 오면 저런 노을빛 같이 올까?’라고 하시더군요. 사실 아버지는 ‘죽음은 이런 거야’라는 식으로 단정 지어 말씀하신 적은 없어요. 사후세계나 이런 부분도 제가 여러 번 물어야 조금 이야기하신 정도였죠. 아마 그런 고민들에 대한 답은 ‘네 몫이다’라고 여기신 것 같아요. 다만 그건 확실히 말씀해주셨어요. ‘두려워할 건 없다’는 거죠. 제가 아버지께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겁이 난다고 하면, 그럴 필요 없다고 다독여주셨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착하게 살라’는 당부도 하셨습니다. 오히려 어려서는 그런 말씀을 안 하셨는데, 저도 나이 들고, 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에 그렇게 이야기하시니 남다르게 와 닿더라고요.
Q. 웰다잉이 곧 웰빙이라는 이야기도 합니다. 20년 가까이 죽음을 공부하면서, 달라진 일상의 변화나 태도가 있다면요?
섣불리 죽고 싶다는 말을 안 하게 됐다는 것과 타인의 상황에 대해 쉽게 얘기하지 않게 된 거죠. 특히 누군가의 죽음이나 고통에 대해서는, 그게 당사자에겐 얼마나 큰 아픔인지 알기에 더욱 조심하려 해요. 혹시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더라도 어쩌면 그에게 말 못 할 두려움이 있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고요. 아, 파리나 모기도 잘 못 죽여요.(웃음) 그만큼 생명을 지닌 모든 존재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고 진지해진 것 같습니다.
Q. 스스로 생각하는 ‘좋은 죽음’과 ‘좋은 애도’는 무엇인가요?
당사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 나는 괜찮아. 잘 살아왔어’라며 본인 스스로 자연스럽게 여긴다면, 아마 주변 사람들도 그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바라볼 수 있겠죠. 물론 요즘은 의학기술이 발달해 애초에 ‘자연스러운 죽음’이라는 경계가 허물어진 편이긴 하지만요.
또 ‘좋은 애도’를 위해서는 충분히 슬퍼하고, 자신이 왜 슬퍼하는지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봐요. 가령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왜 그리 슬픈지 스스로 물어봤어요. 충분히 나이가 드셨고, 당신께서도 만족스러운 인생을 사셨는데, 결국 그분을 잃어 슬픈 건 내 문제잖아요. 애도기 동안 떠난 이가 내게 어떤 존재였는지 묻고, 내 삶에서 그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을 정리하며, 결국 내 인생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누군가의 죽음은, 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를 보내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그런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주변 사람들이 잘 기다려줬으면 좋겠어요. ‘뭘 그리 오래 슬퍼해?’라는 식으로 무심코 던지는 말이나, 마음대로 단정 지어 내뱉는 조언은 애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Q. ‘좋은 죽음’을 위해 스스로 준비하고 노력하는 부분이 있다면요?
사실 지금도 많이 준비가 안 돼 있다고 봐요. 갑자기 아프고 병이 든다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확 줄어들잖아요. 소위 환자가 되면 주체가 아닌 객체가 되는 거죠. 그렇다면 인생이 과연 내 의지대로 흘러갈 수 있을까요? 저는 자신에게 매일 물어봐요. 지금 죽어도 상관없을 만큼 잘살고 있나 하고요. 스스로 조금 두려운 순간이 찾아오면 ‘지금까지 잘하고 있었으니 괜찮아’라고 자신에게 얘기하고요.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제 혼(魂)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지 않도록 늘 그런 말들을 상기해두려 하죠.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공부하려 애쓰는 것도 그러한 노력 중 하나고요.
Q. 중장년 세대는 죽음과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아직 이에 대한 인식이나 준비가 덜 된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나요?
독서회를 오래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가장 읽기 싫어하는 주제가 바로 ‘죽음’입니다. ‘나는 죽어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이들조차 꺼리더군요. 저는 그럴수록 일부러 죽음에 대해 읽게 하고 대화를 나누자고 권해요. ‘죽음을 생각한다’는 건 겸손해지는 거라고 봐요. 내가 한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일깨워주니까요.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갖고 계속 이야기하다 보면 처음엔 관심 없던 분들도 아주 솔직하게 자기 인생관을 털어놓게 되죠. 그런 대화를 통해 관계는 깊어지고, 인생도 더욱 잘 살아낼 수 있어요. 사람은 살던 대로 죽는 거잖아요. 잘 사는 게 곧 잘 죽는 것이죠. 그러니 죽음을 너무 멀리 보고 막연히 두려워 말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가셨으면 좋겠습니다.
△ 김이경 작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대학 강사를 하다 학계를 떠난 뒤 도서관에서 혼자 ‘죽음, 시간, 여성’ 등을 주제로 공부했다. 우연히 인연이 닿은 글두레 독서회에서 26년째 강사를 하고 있다. 뒤늦게 출판사에 취직해 다양한 책을 만들었으며, 책을 주제로 한 소설집 '살아 있는 도서관'을 내면서 작가로 전향했다. 이후 '마녀의 독서처방', '마녀의 연쇄 독서', '책 먹는 법', '시의 문장들', '시 읽는 법' 외 다수를 펴냈다.
라틴어로 가면을 뜻하는 페르소나(persona). 사회적 위치나 역할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는 일생에서, 또 일상에서 여러 페르소나를 갖게 된다. 겨울 옷 하나로 사계절을 보낼 수 없듯, 다양한 가면으로 유연하게 탈바꿈하며 사는 것이 곧 삶에 적응하는 일이다. 김경록(金敬綠·58)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은 특히 퇴직을 앞둔 중장년이 사회적 페르소나를 벗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꽃과 잎을 모두 떨구고 벌거벗은 겨울 나목(裸木)의 단단한 기세처럼, 자신의 민낯을 마주할 용기, 즉 노후의 나력(裸力, 벌거벗을 힘)을 키워나가길 바라는 그다.
경제학자이자 은퇴 연구 전문가로 이름을 알려온 김경록 소장은 최근 중장년을 위한 자기계발서 ‘벌거벗을 용기’를 펴냈다. 재테크나 투자 등 그의 전공 분야와는 다소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제목이다. 내용 역시 ‘성찰, 관계, 자산, 업(일), 건강’ 순으로, 돈 문제에 한한 이야기가 아닌 보다 폭넓은 주제를 아우르고 있다. 김 소장은 스스로 “은퇴에 대한 생각 전부를 담은 책”이라 일컬으며, 은퇴 전후의 중장년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길 바랐다.
“생텍쥐페리는 소설 ‘인간의 대지’에서 삶의 의미를 역할과 책임이라 했어요.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사회에서의 역할과 가정에서의 책임이 줄어드니 그러한 삶의 의미도 점점 퇴색되어가죠. 명함, 직위 등 자신이 갖고 있던 비본질적인 것, 즉 사회적 페르소나를 내려놓는 시기가 찾아오는 겁니다. 흔히 은퇴한 사람들에게 ‘물 빼는 데 3년 걸린다’는 말을 해요. 이는 페르소나를 바꾸는 데 3년이 걸린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쉽지 않고요.”
혹자는 여러 가면을 둔 이들을 기회주의자라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 소장은 오히려 하나의 페르소나만 갖는 것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내다봤다. 여러 가면을 잘 바꿔 쓰는 게 정신 건강에도 좋고, 은퇴 후 삶에 적응하기도 수월하다고.
“어떤 가면도 영원히 쓸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다른 가면으로 바꿔 쓰거나 가면 없는 자신으로 살아가야 하죠. 사회적 페르소나의 경우, 너무 오래 써왔기에 쉬이 벗지 못합니다. 은퇴 후에도 지인의 회사 고문으로 명함을 만드는 등 과거의 흔적을 부여잡기도 하죠. 애써 페르소나를 벗었더라도 자신의 민낯에 당황하곤 합니다. 나의 본질을 받아들이고 후반생의 의미를 찾으려면 성찰이 중요해요. 때문에 ‘성찰’을 책 서두에서 다뤘죠. 또 젊어서는 부모나 직장의 테두리 안에서 통제가 가능했다면, 이제는 나를 제어할 무언가가 없잖아요.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폭주노인’이 되기 십상입니다. 성찰이 필요한 또 다른 이유죠.”
점의 인생관으로 그려낸 인생 그림
자신의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폭발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이를 이른바 ‘폭주노인’이라 말한다. 이러한 경우 대부분 지난날에 대한 후회에 사로잡혀 있거나, 혹은 반대로 찬란했던 한때에 얽매여 현실을 부정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좋든 나쁘든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지나치게 연결 짓다 보면 결국 노후의 만족감은 떨어지기 마련. 이에 김 소장은 ‘점의 인생관’을 통해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길 조언했다.
“나이 듦을 선으로 보는 인생관이 있고, 점의 집합으로 보는 인생관이 있습니다. 가령 연필을 떼지 않고 선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해보죠. 나의 노력과 무관하게 한 번 잘못된 선을 그어버리면 원하는 그림을 얻기 힘들어요. 반면 점을 찍어 그릴 경우, 실수한 점 하나 때문에 그림을 망치지는 않습니다. 찍힌 점들을 어떤 순서로 연결하느냐에 따라 그림이 달라지니까요. 내가 찍은 점들의 집합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 의미를 깨닫거나, 관점에 따라 다른 그림으로 보이기도 하죠. 덕분에 과거보다는 현재에 집중할 수 있고, 어떤 선택에 대한 부담도 덜어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비유한 ‘점’은 인생에 있어 과거의 경험과 사건, 관계, 나의 생각 등을 나타낸다. 우리는 살면서 때때로 잘못된 점을 찍었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점들이 쌓여갈수록 알게 된다. 실수처럼 보였던 점이 때론 새로운 그림을 그리게 해준 터닝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고 ‘오리온자리’, ‘전갈자리’ 등을 찾곤 하죠. 근데 그건 인간이 붙인 이름이지, 각각의 별이 그런 뜻으로 존재했던 건 아니잖아요. 인생에 찍힌 무수한 점들 역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겠죠. 물론 그 점들이 완성하는 최종 그림은 우리가 눈을 감는 그 순간이 돼야 볼 수 있겠지만요. 그러니 과거에 너무 얽매이거나 미래의 일을 두려워 말고, 새로운 제2인생의 점을 과감히 콱콱 찍어나갔으면 해요.”
다시 태어나 진짜 삶을 꽃피우다
물론 과감히 점을 찍어가는 과정에서도 주의할 부분은 있다. 김 소장은 책에서 ‘인생 후반 5대 리스크’로 성인 자녀, 금융 사기, 은퇴 창업, 중대 질병, 황혼 이혼 등을 꼽았다. 그리고 인생을 축구 경기로 묘사하며, 이러한 리스크가 닥치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축구 경기에서 골(goal)이 가장 많이 들어간 시간대는 ‘후반 마지막 15분’이었습니다. 전반에는 열심히 뛰어다니며 부족한 실력도 활동량으로 메울 수 있지만, 후반으로 가면 체력이 바닥나고 진짜 실력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후반전이 끝나갈 때쯤 나오는 골이 무서운 겁니다. 만회가 어렵기 때문이죠. 인생 후반에서도 앞서 말한 5대 리스크로 예상치 않게 골을 먹기도 합니다. 이 경우엔 거의 회복이 어렵다고 봐야 해요. 결국 수비를 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우울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리스크는 현실적으로 경제활동을 재개할 가능성이 적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일 뿐, 절대적인 시간이 적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에 김 소장은 노후 삶의 목표를 ‘prosper’(번성하다)가 아닌 ‘flourish’(만개하다)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인생 전반에는 대개 ‘prosper’를 목표로 하죠. 돈도 벌고 재산도 늘리며 사회적으로 번성하기 위해 사니까요. 그러나 인생 후반에는 지난날 자신이 뿌려놓은 씨앗을 꽃 피우겠다는 ‘flourish’의 관점을 지니는 것이 좋습니다. 가령 노후에 연극배우를 꿈꾼다면 그건 물질적으로 번성하기 위함이 아닌, 잠재돼 있는 나의 달란트(재능)를 만개시켜보겠다는 다짐인 셈이죠. 종종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을 하고 싶다’고 말씀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수명이 길어진 덕분에 우리는 마치 두 번 사는 것과 같은 인생을 살고 있어요. 공부하고, 직장 다니고, 가족을 위해 살았던 전반생, 그리고 오롯이 나만을 위해 사는 후반생. 어쩌면 이 후반의 삶이 더 길다고 볼 수도 있죠. 그러니 다시 태어난 인생이라 여기시고 무엇에든 도전하시며 만개한 삶을 꿈꾸시길 바랍니다.”
산에 미쳐도 단단히 미쳐 살았다. 그러니 일이 터질 수밖에. 주목할 만한 기록이 나왔고 사람들은 갈채를 보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미치지 않고서 도달할 길이 없다. 선무당처럼 대충 미쳐서는 히말라야 고봉을 오를 수 없다. 지구상의 극한적 험지인 세 극지(히말라야, 남극, 북극)를 찾아 누빈 탐험가 허영호(65). 그의 격렬한 모험이 거둔 성과가 경이롭지만, 스스로 선택한 일을 향한 온전한 몰입으로 삶을 만족스럽게 끌어온 성취는 더욱 놀랍다. ‘온전한 몰입’이 있는 인생이라는 게 어디 시중에 흔하던가.
일찍이 소년기 때 동네 산꼭대기에 오르는 쾌감을 맛본 게 등산에 빠진 계기였다지. 군대를 다녀온 뒤엔 인생을 몽땅 산에 걸기 시작했단다. 서막은 그저 그렇게 자연스러웠으나, 이후 산악 역사에 두고두고 마르지 않을 이름을 등기했으니 허영호의 행장은 사실상 비범한 것이었다.
허영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83년, 히말라야 마나슬루를 산소통 없이 단독 등정하면서였다. 마나슬루는 1972년, 돌연한 산사태를 일으켜 한국 산악인 16명의 생때같은 목숨을 앗아간 악명 높은 고봉이다. 1987년 12월, 허영호는 다시 기세를 돋웠다. 세계 등반사상 세 번째로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에 성공했던 것. 이것으로 마침내 세계적 산악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1994년엔 남극점을, 1995년엔 북극점에 도달했다. 진기한 드라마를 연속 상영한 셈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허영호를 ‘7대륙 최고봉과 남극점, 북극점 도보 탐험에 성공한 인류 최초의 탐험가’로 기록하고 있다. 이쯤이면 역사적 인물이다. 역사에 남는다는 것. 허영호는 그게 매우 기쁘다.
“나는 실로 꾸준히 세계적인 것에 도전해왔다. 매번 엄청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모험에 나섰다. 가치 있는 도전이라는 것, 역사를 가치 있게 만든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세계적인 역사를 만들지 못하는 가치 없는 도전이란 말짱 꽝이지 않은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강렬한 집념. 그게 모험에 나서게 했다는 얘기인가?
“극지에 도전하는 모험은 무섭고 고통스러운 과정의 연속이다. 목숨을 걸고 하는 행위다. 그러나 역사에 이름이 남는다는 건 고귀한 일이지 않은가. 세계적인 가치를 지닌 등반을 죽기 전에 완료하겠다는 게 나의 지향이었으며, 그게 모험에 나서게 하는 힘이었지.”
세상의 위업들은 맹렬한 명예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당신에게서도 강한 명예욕이 느껴진다.
“명예, 명망에 대한 기대는 자연스럽게 찾아오더군. 그러나 명예라는 건 결과적으로 오는 것이지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백지상태인 미답의 땅을 섭렵한다는 성취감, 극지의 신기한 자연 풍경에 대한 감동, 이런 요소 역시 나를 모험에 빠지게 했다.”
히말라야에 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오는 산악인들도 있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흔히 탄식한다. 공연히 위험한 등산을 자청, 하나뿐인 아까운 목숨을 허무하게 버리는 게 안타까워서.
“프로 산악인들의 등반은 일반인들의 보편적인 등산과 다르다. 특유의 어떤 정신세계를 가지고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게 아니겠는가.”
아예 죽음을 각오하고 출발하나?
“아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약해진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재앙이 벌어지는 게 인생이지만 여하튼 어디서건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난 산이 좋아 산에서 죽을래! 이런 생각은 그야말로 바보에게나 어울린다. 나는 항상 죽는 일 따위는 내게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등반에 나섰다.”
죽을 뻔했던 무산소 등정
에베레스트는 이 산의 측량 전문가였던 영국인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원래는 ‘초모랑마’라는 티베트 이름으로 불린 산이었다. ‘세계의 어머니 신(神)’이라는 뜻으로 티베트인들은 예로부터 이 산을 숭배해왔다. 산악인들도 정신의 산, 신비의 영산으로 숭상하며 거룩한 사유를 펼치곤 한다. 생사 여부마저 산령(山靈)의 뜻에 달렸다는 식의 감상을 털어놓기도 한다. 허영호에게 이는 어림없는 생각이다. 내 목숨은 오직 내가 간수할 수 있을 뿐 그 무엇도 간섭할 수 없는 거라는 실사구시에 충실할 따름이다. 완벽한 사전 준비,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정신력, 팀을 통제하는 엄격한 규율. 그것들만이 사고를 피할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이라 믿는다.
특히 원정 대원들의 관리에 추상같다. 인상에 쓰여 있듯이 평상시엔 온유하지만 등반할 때는 돌변한단다. 엄격하고 날카로운 독수리로 변하는 모양이다. 눈빛부터 사납게 바뀐다는 게 아닌가. 예측할 수 없는 대자연이 성깔을 부리면 한순간에 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해서, 군기반장처럼 엄한 규율로 대원들을 다그친다. 덕분에 단 한 사람의 대원도 다치지 않았으며, 이는 다른 원정대에선 찾아보기 드문 성과라고 한다. 그러나 위기 상황은 빈발했다. 벼랑에서 추락했고, 크레바스(빙하의 갈라진 틈)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눈사태에 휩쓸려 파묻혔다가 셰르파에 의해 구조되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죽음과 직면하기를 거듭했다.
“1993년 4월, 무산소 등정으로 에베레스트를 횡단하며 비박할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산소 등반과 무산소 등반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다는 걸 절감했다고. 가슴이 터져나갈 듯 고통스러웠는데 심장이 당장 멈출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지. 하늘을 쳐다보며 절규를 했다고. 천신만고 끝에 38시간 만에 캠프에 도착, 비로소 물을 마실 수 있었지. 오열을 하면서.”
지독한 사경을 겪고도 또다시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배짱이라니.(웃음)
“나 이젠 다시는 산에 안 가! 그런 외침이 속에서 터지긴 한다. 아주 잠깐, 현장에서만.(웃음)”
기어이 정상에 오르기 위해 수많은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자연에 도전하는 게 서구적 알피니즘의 전통이지만, 우리 선인들은 산을 그저 욕심 없이 편하게 노닐었다. 이게 더 수준 높은 산행 방식 아니었을까?
“과학의 발달로 일찌감치 산과 바다로 당차게 진출한 서양과 달리 우리는 다분히 정적인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봤다. 어릴 적에 부모님들은 흔히 자식에게 타일렀다. 산에 가지 말라고, 물가에 가지 말라고.”
우리 민족은 누가 말린다고 산수 간에 머물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어쩌면 DNA에 이미 산야의 기질이 상속된 게 아닐까.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양과 사뭇 다른 건 사실이지만, 우리에게도 일찍부터 등산이라 일컬을 만한 장르가 존재했다. 혹자는 승려들의 입산을 등산의 효시로 보며, 혹자는 신라 화랑도의 유산(遊山)을 원조로 간주한다. 조선시대 중엽의 민화 중엔 밧줄을 타고 암벽을 오르는 모습이 있기도 한다. 이 희귀한 사례를 통해 도전적 차원의 등산마저 행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산을 몹시 애호해 산행을 즐겼다. 일테면 남명 조식 선생은 지리산을 16회나 오르내렸다. 사대부들은 등산이라는 개념보다 관산(觀山), 요산(樂山), 유산(遊山)이라는 코드로 산을 누렸던 것 같다. 오늘날 한국의 등산객들이 산을 즐기는 방식도 이와 꽤 유사한 게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한국의 산은 스케일은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정답다. 위험요소가 드물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수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쌓인 불만과 스트레스를 산에서 해소하고 있어 사회가 그나마 덜 시끄럽다고 봐야 하겠지.”
히말라야의 광막한 설산을 묵묵히 오르는 산악인들의 모습은 고행하는 수도승을 연상시킨다.
“고행을 통해 목표를 성취하고자 한다는 점에선 수도승과 다를 게 없겠지. 그러나 산악인은 자연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수도승과 다르다. 도전이란 정복을 겨냥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자연을 정복하나? 잠깐 정상을 딛고 내려올 뿐인데.”
에베레스트 고지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떻던가?
“아름답고 경이롭다. 그러나 너무 춥고 숨이 가빠 사실상 풍경을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텐트 밖으로 머리를 살짝 내밀고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에 놀라기도 하지만, 그게 잠시잠깐의 감상일 뿐이거든.”
등반 중에는 무슨 생각을 하나?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극한 상황에서도 산과 대화를 했던 것 같다. 거짓말하지 않는 자연에서 겸손을 배우고, 인내심을 기르고, 분노를 자제하는 능력을 얻었다. 이건 극지 등반에서의 일만은 아니다. 어디서건 자연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심성이 더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속세의 거친 인간관계에 상처를 받아 자살까지 하는 경우가 있지만, 산을 좋아하게 되면 달라지지. 어떻게든 사람을 자연으로 끌어내는 게 옳다는 거. 특히나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산을 경험하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탐험과 운명적 사랑에 빠진 종(種)
허영호는 지난 2010년, 대학생이었던 아들 재석과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 또 한 번 매스컴의 관심을 샀다. 좌우간 산에서 배우는 게 인생을 잘 사는 비결이라는 생각. 등반에 인간과 인생의 모든 게 담겨 있다는 확신. 그는 그걸 널리 홍보하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왜 아니랴. 인생에도 크레바스가 있고, 추락이 있으며, 눈사태가 있게 마련이지 않던가. 이 모든 요상한 난리블루스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힘과 안목을 산에서 얻을 수 있다는 얘기는 언제 들어도 신선한 뉴스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허영호도 어느덧 늘그막에 접어들었다. 난다 긴다 하는 모험 고수이지만 이젠 체력을 고려해 자제하며 산다. 그러나 탐험을 멈출 방법이 없다. 좀 부풀려 말하자면, 그는 탐험과 운명적 사랑에 빠진 종(種)이니 말이다. 요즘은 경비행기에 빠져 산다지. 경비행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해 또다시 역사적 기록을 남기겠다는 웅장한 포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미 오랫동안 경비행기를 타고 독도를 비롯해 국내 곳곳을 비행 훈련하며 세계로 비상할 날을 대비해왔다. 문제는 자금이란다. 스폰서를 잡아야 하는데 여의치 않다는 것.
남의 신세를 지지 않고 자력으로 탐험하는 방식은 실로 불가능한가? 매우 내성적인 성격으로 보이는 당신은 어디 가서 쉽사리 손을 내밀지도 못할 것 같다.
“원정대를 꾸려 착수하는 극지 탐험에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가는 것을 무슨 수로 개인이 감당하겠나? 원정대 지원이 일방적 수혜도 아니다. 주로 등산 장비업체가 스폰서로 붙는데, 그들은 나의 원정 활동상을 비즈니스 마케팅에 활용하거든.”
직업이 탐험가인 당신에게 누가 월급을 주지? 가족을 어떻게 건사하나?
“가족은 나에게 탐험보다 소중하다. 가족 생계를 등한시하는 산악인은 산악인의 자격조차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난 꽤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강연 초대를 자주 받았으며, 그게 무난한 생활 대책이 돼주었다. 사람들이 내게 가장 흔히 하는 질문이 뭔지 아나? 등반으로 돈이 생기느냐, 반사이익이 있느냐, 라는 것이다. 그러나 등반 자체는 무상(無償)의 행위일 뿐이다. 대신 강연료가 들어와 살 수 있었지.”
우리 사회가 나름 똑똑해지는 모양이다. 허영호를 강연장으로 끌어들여 경청을 하는 걸 보면.
“글쎄다. 난 나를 비롯해 프로 산악인들을 더 활용해달라고 말하고 싶다. 가령 유능한 산악인들을 모아 특공구조대 같은 걸 만들면 자연재난이나 산악조난 구조에 크게 쓰일 수 있지 않겠는가. 119소방대만 고생시킬 게 아니라는 얘기다. 언젠가 국무총리 공관에서의 오찬에서 그런 취지의 제안을 했으나 소용없더라고.”
어디서나 일관하는 인생관이 있겠지?
“노력하며 살자! 그거. 탐험하며 살다 보니 ‘자기 노력’이 인생 성공의 99%를 차지한다는 걸 깨닫겠더라. 행복이라는 것도 노력의 산물이지 않겠는가.”
평생 노력만 하면 무슨 재미? 잘 노는 데에서도 행복의 샘물이 퐁퐁 솟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긴긴 세월 극지와 맞붙었던 사람에겐 실없는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