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TV 속은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의 전성시대다. 한국어를 잘하면 나라를 대표해 발언권을 얻거나 친구까지 초청해 한국을 소개하기도 한다. 한국어에 능숙한 외국인이 늘면서 달라진 풍속도다. 이렇게 시대가 변하면서 한국어 강사에 대한 수요도 늘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와 다문화가족의 증가도 이러한 수요 폭발을 유발했다. 한국어 강사는 언어와 함께 문화를 전한다는 면에서 시니어에게 적합한 직종 중 하나로 꼽힌다. 전 세계 학생들과의 교류에 관심이 있다면 한국어 강사의 문을 두드려보는 것은 어떨까.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외국인의 한국어능력시험(TOPIK) 응시 추세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시험을 주관하는 교육부 산하 국립국제교육원은 지난 1월, TOPIK의 응시자가 1회부터 지난해 11월 제55회까지 212만168명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20년 만에 무려 108배나 늘어난 것이다.
한국어 강사에 대한 관심도 마찬가지다. 대표적 자격제도인 국립국어원 한국어교원 자격취득 현황을 보면 2007년 790명이었던 심사 신청자는 2016년 6304명을 기록했다. 10년 만에 698% 증가한 셈이다.
강사의 시작은 한국어교원 자격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려면 한국어교원 자격은 필수로 꼽힌다. 문화체육부장관이 부여하는 한국어 교육에 관한 자격제도로 심사와 발급 등의 실무적인 부분은 국립국어원이 맡고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한국어교원에 대해 “국어를 모어(母語)로 사용하지 않는 외국인,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어교원은 1, 2, 3급으로 나뉜다. 2급은 학위과정으로 한국어학을 전공하거나 관련 과목을 이수한 사람에게 부여되며, 3급은 양성과정으로 학위가 없어도 100시간의 이론과 20시간의 실습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지원이 가능하다. 때문에 학위와 자격증이 동시에 필요하거나 학사학위 소지자의 경우는 비교적 쉽게 2급 지원이 가능하다.
대학이나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을 통해 16과목(48학점)을 이수해 학위를 받으면 별도의 한국어교육능력검정시험을 보지 않고 한국어교원 2급 신청이 가능하다. 이럴 경우 자격 취득까지 1년 6개월 정도의 기간이 걸린다. 학위가 없는 경우에도 사이버대학이나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을 통해 학위 취득과 함께 한국어교원에 도전할 수 있지만 3년 내외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단점이다. 사이버대학 한국어학과의 경우 시간과 비용 면에서 불리한 대신 졸업장, 학위와 함께 독서논술지도사나 다문화사회전문가 등 관련 자격에도 지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3급은 조금 더 간단하다. 학위가 없는 사람도 120시간의 교육을 받으면 된다. 하지만 한국어교육능력검정시험에 합격해야 하기 때문에 경험자들은 “난이도가 만만치 않다”고 말한다.
교육비에도 차이가 있다. 시중 교육기관에서 3급 과정을 위한 교육비는 총 50만~90만 원 선. 이에 반해 2급 획득을 위한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의 비용은 일반적으로 과목당 15만 원 이상이 필요하다. 기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모든 과목을 수료하려면 250만~450만 원가량 든다.
3급은 자격 취득 5년 후 경력 1200시간이 지나면 2급으로 승급 가능하며, 2급은 다시 5년 후 경력 2000시간이 지나면 1급으로 승급할 수 있다. 교육기관을 고르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은 자격 과정을 관장하는 국립국어원의 한국어교원 홈페이지(kteacher.korean.go.kr)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대학부설기관이나 학점은행제, 양성과정 등 기관 성격에 따라, 지역에 따라 공인된 교육기관을 찾을 수 있다.
세계 각국에서도 수요 많아
한국어교원 자격을 획득하면 활동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생각보다 많다. 국내외에 설치된 대학 한국어학당 같은 부설기관이 대표적. 한국에 유학 온 외국인 학생을 위한 정부기관 한국유학종합시스템(www.studyinkorea.go.kr)에 등록된 대학부설 한국어 교육원 수는 192개에 달한다. 또 사설 한국어학원도 한국어 강사로 일할 수 있는 주요 기관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한 화상교육이 발달하면서 이를 전문으로 한 교육기관도 증가하는 추세다.
이외에도 최근 급증한 다문화가족을 위해 설치되고 있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다. 각 지자체에서 운영 중인 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대부분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온 이주민이나 자녀를 위한 한국어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또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이민자통합센터, 사회통합프로그램 운영기관 등에서도 각각의 설립 목적에 따라 국내에서 거주 중인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어, 강사에 대한 수요가 있다.
한국어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주요 기관들은 강사를 선발할 때 경력을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경험삼아 한국어 강사를 하고 싶거나 경력을 쌓고 싶다면 무료 한국어 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에 자원봉사를 신청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국내에 있는 대표적 무료 한국어 교육기관은 서울글로벌센터, 한국이주노동자복지회, 한국외국인력지원센터,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가 꼽힌다.
해외에서 일하고 싶을 때도 방법은 있다.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가 대표적이다. 코이카에서는 해외봉사단을 통해 한국어 강사를 세계 여러 곳에 파견하고 있다. 50세 이상의 시니어 단원의 파견도 진행 중이다. 코이카의 해외봉사단 중 한국어 강사 부문은 인기가 매우 높아 1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 적도 있다.
한국어 강사 선발이 가장 많은 기관으로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세종학당재단이 꼽힌다. 세종학당재단은 한국어 교육기관인 세종학당을 지난해 8월 기준으로 전 세계 54개국에서 171개소를 운영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한국어 수요가 늘면서 세종학당도 매년 증가 추세에 있다. 지난해 국감에서 보고된 자료에 따르면, 세종학당재단의 한국어교원 파견 인원은 2013년 24명에서 2017년 110명으로 매년 증가해왔다.
이밖에도 일부 대학이 해외에 설립한 한국어 학당이나 해외에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 선교기관 등도 한국어 강사의 수요가 있는 곳으로 꼽힌다. 일부 국가의 경우 국가 차원에서 문화교류를 위해 한국어 강사를 선발하기도 한다. 일본의 JET프로그램(The Japan Exchange and Teaching Programme: 어학 지도 등을 행하는 외국 청년 유치 사업)이 대표적이다. 일본 정부는 매년 각 국가에서 국제 교류를 위한 인원을 선발하고 있는데, 선발된 한국어 강사는 각 학교의 외국어 수업 보조나 특별활동, 지역 교류활동 등을 돕게 된다.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기 위해 갖춰야 할 또 하나의 덕목은 ‘외국어 능력’이다. 아무래도 교육 대상이 한국어가 서툰 학생이라 다른 언어로 소통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 그래서 일부 기관에서는 자격증 유무, 경력시간과 함께 영어, 중국어, 일본어 회화 능력을 선발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국내외 한국어 강사 구인 정보를 알고 싶다면 국립국어원 한국어교원 홈페이지의 구인정보 게시판을 활용하면 된다.
청년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그렇다면 실제 시니어 한국어 강사의 취업 시장 상황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만만치 않다. 수요는 계속 늘고 있지만 청년층의 유입도 점점 많아지면서 취업 시장이 좁은 문이 됐기 때문이다.
한국어교원 자격을 취득 후 활동 중인 중년의 한 한국어 강사는 “한국어 강사를 찾는 교육기관 중 나이제한을 두는 곳도 적지 않고, 학위 소지자나 경력자를 중심으로 뽑기 때문에 양질의 일자리는 시니어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수입 대신 보람을 우선시하고 눈높이를 낮추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진 않다”고 설명했다.
특히 해외에 있는 한국어 교육기관의 경우는 청년층 선호 현상이 뚜렷하다고 한다. 업계 관계자는 “시니어 세대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체력이나 질환 등에 대한 염려가 있어 장기간 해외에 체류해야 하는 교육기관은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젊은 강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한국어 강사에 대한 인적 수요는 해외에서의 한국어 인기, 온라인 교육 시스템의 대중화로 인해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세이글로벌 조연정 대표는 “한국어에 대한 인기는 계속 높아질 것”이라고 단언한다. 세이글로벌은 2014년 용산노인복지관,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와의 봉사활동 교류가 계기가 돼 설립된 스타트업 기업으로서 한국어 학습을 원하는 전 세계 외국인들과 한국어 강사를 온라인으로 매칭시키는 사업을 지난해 4월 부터 시작했다. 서울시 50플러스 서부캠퍼스와 함께 한국어튜터되기 과정 수업을 운영 중이며, 수료생 중 일부를 선발해 한국어 강사로 취업 기회를 제공한다.
조 대표는 “10대에서 60대까지 수업을 희망하는 학생층도 넓어지고, 한국 문화에 대한 단순한 애정에서 취업을 위한 것까지 배우고자 하는 목적도 다양해지고 있어 한국어 교육시장도 점차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하며 “삶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이 많고 은퇴 후 시간 활용이 쉬운 시니어에게 한국어 강사는 적합한 직업”이라고 설명했다.
북한 핵 개발을 소재로 한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1993)로 밀리언셀러에 이름을 올린 김진명(金辰明·60). 그 후 ‘한반도’, ‘제3의 시나리오’, ‘킹 메이커’, ‘사드’ 등을 펴내며 한국의 정치·외교·안보 문제에 촉각을 내세웠던 그가 이번엔 ‘미중전쟁’으로 돌아왔다.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에 올랐지만, 묵직한 주제인 만큼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고. 그는 정말 두려운 건 북핵도, 트럼프의 불가측성도, 중국의 경제 보복도 아닌,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않고 눈치만 살피는 우리의 모습이라 강조하며 용기와 결단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난제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KAL 007기 피격사건을 다룬 소설 ‘예언’ 이후 5개월 만에 ‘미중전쟁’이 나왔다. 1·2권으로 나뉘어 총 600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을 발 빠르게 내놓은 데에는 김진명 작가의 급급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미중전쟁’이라는 단도직입적인 제목까지 달고, 그가 독자들에게 서둘러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미국은 원산 앞바다까지 가공할 위력의 B-1B 전략폭격기를 들이대고 북한은 워싱턴까지 날아가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북핵을 둘러싸고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데도 우리는 그저 눈치만 보고 있어요. 분명한 입장 없이 그들의 비위만 맞추다가는 구한말 때와 다름없는 상황이 벌어질 거라 예상해요. 그럼 현재의 문제를 어떻게 타개할 것이냐, 이에 대한 솔루션을 하루빨리 이야기하려고 급히 쓰게 됐어요. ‘미중전쟁’이라는 제목은 단순히 남북의 문제만이 아니라 시야를 더 넓히자는 뜻에서 붙인 거고요.”
나라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소설을 썼다는 김진명의 말에 작가로서의 남다른 사명감이 느껴졌다. 소설가이지만 작품에 대한 문학적 해석보다는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그의 모습이 대중에겐 더욱 익숙할 것이다. 혹시 그런 자신의 이미지로 인해 작품활동에 불편함은 없는지 묻자 “전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해외에서는 나라의 정치학을 세우거나 정책을 마련할 때 톰 클랜시 같은 전문 작가들의 작품을 참고하잖아요. 그만큼 글로써 사회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작가는 어떤 전문가나 정치인보다 더 해박하고, 예지력이 있어야 해요. 웬만한 식견 가지고는 어림없죠. 그런데 한국 사회는 소설의 영역을 너무 좁혀놨고, 작가들은 그 좁은 세계에 갇혀 있어요. 작가는 자기만의 영역을 벗어나 사회 문제에 대해 방향성을 제시할 정도의 세계관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에는 그런 작가가 얼마 없기 때문에 내가 좀 특별하고 이상해 보이는 거죠.”
허용된 거짓이 요구하는 소명
김진명의 소설 속 캐릭터는 대부분 실존 인물이며 실명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그가 창조한 주인공은 대개 비범하고 전지전능한 인물이라는 것. ‘미중전쟁’의 주인공 김인철 역시 세계은행 법무팀 조사요원으로 문재인, 블라디미르 푸틴, 시진핑 등 국가 정상들과의 접촉이 가능할 정도로 특출한 면모를 지녔다. 때론 비현실적인 인물 설정에 대해 비평하는 독자들이 있는데, 그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덧붙였다.
“작품마다 주인공이 한결같이 천재적이고 전지전능하다는 것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죠. 그러나 소설 속에서 그들은 세계 최고 권력자를 상대로 아주 내밀한 비밀과 약점을 캐내는데 그걸 보통 사람이 해낸다면 더 비현실적이지 않을까요? 사실 내가 쓰는 소설은 일반 소설과 다르게 주인공이 큰 의미는 없어요. 주인공은 숨겨져 있는 무서운 비밀을 밝히는 한 도구일 뿐이지, 그의 내면이나 감정에 의해 어떤 일이 벌어지지는 않거든요.”
소설 속 주인공들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동시에 김 작가의 주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혹시 소설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기 생각을 펼치고 싶지 않은지 묻자 그는 “소설이 가장 편하다”고 대답했다.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이해가 부딪치기 때문에 법으로 엄격히 규제를 하죠. 조금만 이상하면 정보보호법이나 명예훼손에 걸려 법의 영역을 뚫고 진실을 파헤치는 건 굉장히 어려워요. 그러니 대중은 민감하고 중요한 정보에 접촉할 방법이 없죠. 언론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지만, 진실을 드러내려 하면 그들 내부에서 굉장히 겁을 내고, 역시 법으로 제재를 받을 테니 알맹이는 감춰진다고 봐요. 그런데 소설은 거짓말을 허용하잖아요. 단순한 사실의 나열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진실을 드러낼 수 있죠. 물론 거짓말을 허용하는 대신 소설가에게는 그만큼 소명의식이 요구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방식으로 이야기하잖아요. 나는 작가이고, 그런 측면에서 허구를 통해 진실을 끌어내는 인류 최고의 장치는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고구려 정신의 회복이 필요한 때
‘미중전쟁’의 또 다른 주인공 최이지는 북핵 문제, 중소기업 인재난 등에 대해 잡지에 글을 쓰고 대통령에게 제언하는 등 김진명의 생각을 일목요연하게 전달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이번 소설을 통해 북핵 문제 외에도 한국 경제난, 미래 먹거리, 인구절벽 등의 고민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울러 한국 사회의 큰 문제 중 하나로 경제 지표는 좋은 데 반해 그 돈이 소수에게 몰리는 현상을 꼽았다. 대기업이나 부자들이 돈을 내놓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이에 관해 중장년층의 인식 전환도 필요한 시점이라 역설했다.
“우리 세대는 학교에서 저축을 장려했어요. 어렸을 때 배운 사고에서 멈춰 돈을 쌓아두고 쓸 줄 모르죠. 그게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굉장히 장애가 돼요. 자본주의는 수요만 있으면 잘 돌아가는데 이 수요를 막고 있는 거죠. 저축으로 부자가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부동산 투기예요. 나눠야 할 자본을 나만 잘살자고 쥐고 있으면 젊은이들은 어떡해요. 취직이 안 되면 장사나 사업을 해야 하는데 비싼 땅값에 임대료에 집도 마련 못하니 결혼, 육아는 엄두를 못 내죠. 우리 세대는 노력해서 벌은 거고 애들은 노력을 안 해서 못 벌었다는 인식도 문제예요. 과거야 한창 경제가 성장할 때니까 가능했죠. 현 상황을 인식하고 젊은이들 처지에서 생각해봤으면 해요. 얘들아, 안심하고 결혼해서 애 낳아라, 우리가 키워주마, 이런 마음의 유대가 없으면 아무리 지원금을 쏟아 부어도 우리에게 오는 인구절벽을 피할 수 없다고 봐요.”
김진명은 세대뿐만 아니라 친미와 친중, 보수와 진보 등 한국 사회 면면이 다 갈라져 있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를 대표할 가치관이 없다는 것에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며 그는 고구려 정신을 강조했다.
“옳다 그르다는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생각해요. 옳고 그름은 시시각각 바뀌기 때문에 자기가 맞다고 끝까지 주장하는 사람은 한심한 거예요. 예를 들어 택시가 교통질서를 흐린다는 이유로 택시 정류장을 만든다고 합시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한편으로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편히 탈 수 있는 택시의 장점이 사라지는 거잖아요. 이런 간단한 문제에도 입장이 나뉘고, 정반대 의견도 다 일리가 있는데, 하물며 나라의 정책이나 외교, 안보 문제는 얼마나 생각이 많이 갈리겠어요. 우리 사회는 나는 옳다, 너는 틀리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너무 많아요. 고구려는 아무리 파가 갈려서 죽기 살기로 싸우다가도 외적이 침입하면 완전히 대동단결했거든요. 고구려 700년 역사가 가능했던 이유죠.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가 고구려 정신을 회복하길 바랍니다.”
국내 최고의 유대인 전문가인 홍익희 세종대학교 대우교수(65). 그와의 3시간여 ‘인생 2막’ 인터뷰는 한마디로 선입관의 전복이었다. 수치에 밝은 냉철한 전문가일 것 같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인문학자에 가까웠다. 직선의 경력을 쾌속으로 걸어왔을 것 같지만 굽이굽이 곡선의 지각인생, 갈지(之) 자 이력이었다. 경력과 브랜드를 보고서 지레 짐작한 선입관은 무너졌다. 홍익희 교수의 인생은 반전과 역전 그리고 결전의 파노라마였다.
첫째 반전, 홍익희 세종대 대우교수는 32년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생활을 한 뼛속까지 코트라(KOTRA)맨이다. 중남미, 뉴욕, 유럽 각지에서 해외근무를 했지만 정작 중동 근무를 한 적은 없다. 둘째 역전, 베스트셀러 작가이지만 정작 글쓰기와 관련한 일을 본격적으로 해본 적이 없다. 정년퇴직 후 58세에 본격 글쓰기를 시작한 게 전부다. 셋째 결전, 코트라 무역관장을 거쳐 대학교수로 연착륙한 그의 인생은 겉으로 보기엔 꽃길이다. 정작 본인은 “내 인생의 8할은 열등감과 실패로 가시밭길이었다”고 술회하는 것 아닌가. 노력, 노오력을 넘은 사력으로 역경을 경력으로 전복시켜왔다는 고백이다. 자, 그의 인생 2막의 반전, 역전, 결전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자.
국내 최고의 유대인 전문가로 꼽히시는데요. 코트라 재직 중 정작 중동 지역이나 관련 문화권에서 근무한 적은 없으십니다. 인생 2막에서 유대인이란 주제를 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32년간의 코트라 생활을 마무리하면서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금융산업을 포함한 서비스산업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내가 서비스산업이 중요하다고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을 것 같지 않더군요. 그래서 고대로부터 서비스산업을 창안하고 주도했던 유대인 이야기에 당의정을 입히면 공감대를 넓히는 데 효과적이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32년간 수출전선에서 근무지가 늘어날수록 유대인의 힘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전 세계에서 금융업뿐 아니라 서비스산업을 창안하고 주도하고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게 배경이 되었지요.”
그가 맨 처음 유대인들의 힘을 느낀 것은 1983년에 파견된 콜롬비아의 보고타 무역관에서다. 유대인 대형 바이어들과 거래하고, 유대인 군수품 에이전트와 같이 입찰에 응찰하는 것을 비롯, 금융도시 뉴욕에서 근무하면서 유대인의 실체에 대해 보다 깊이 알게 됐다. 세계 각국에 투자된 외국인 자본의 3분의 2는 미국 자본이고 그 태반이 유대계 자본이더란 것. 한 줌밖에 안 되는 유대인들이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것을 지켜보며 유대인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근무지 곳곳에서 경험한 유대인의 힘의 근원을 천착, ‘유대인 이야기’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유대인 전문가란 브랜드를 구축, 작가-교수로서 인생 2막을 성공적으로 시작한다.
책이 작가로서 인생 2막의 터닝포인트가 되었군요. 뼛속까지 무역맨인 분이 전문작가로 전업하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퇴직 후 투자에 크게 실패했어요. 경제적 손실이 컸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퇴직 후 모 중견기업의 경영자로 가기로 돼 있었는데 틀어졌어요. 알고 보니 의례적 인사말을 착각, 김칫국을 마신 것이었어요. 정말 깜깜절벽에 출구가 보이지 않더군요. 경제적 손실만이 아니고 미래의 대책마저 보이지 않으니 살아 있지만 산 것 같지 않은 우울증이 찾아왔어요. 나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더군요. 현실을 잊기 위해선 무언가에 몰입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글쓰기는 도피처였다고나 할까요. 온종일 글쓰기에 매달렸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습니다. 자는 시간 외에는 글만 치열하게 썼습니다. 이때 탄생한 게 50여 권의 전자책들입니다.”
비록 100여 페이지에 불과한 전자책이지만 거의 이틀에 책 한 권 분량을 쓴 꼴이었다. 퇴직 후 출판사에 원고를 가져갔더니 자그마치 10권 분량이었다. 이때 쓴 ‘유대인 경제사’ 10권을 한 권으로 축약해서 출판한 게 2013년 초에 발간된 ‘유대인 이야기’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썼던 전자책 원고들이 지금은 아이디어의 보물창고가 되고 있다.
글로벌 경제 전문가도 투자에 실패하는군요. 퇴직 후 투자 실패였으면 더 타격이 크셨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하느님의 계획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 인생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되었더라면 강의와 저술을 하는 오늘날의 내가 되지 못했겠지요.(웃음) 외형적 성공은 몰라도 지금처럼 행복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글쓰기는 배부르고 등 따시면 하기 힘들거든요. 절박하고 절실해야 글이 써져요. 돌아보면 내 인생의 8할은 실패와 열등감이에요.”
홍 교수님의 이력에서 인생의 8할이 실패와 열등감이란 이야기는 의외입니다.
“열등감이 과도한 인정욕구로 이어지면서 자충수를 둔 경우가 많았어요. 지그재그 인생을 돌아가게 만들고요. 지각인생이고 뒤처진 삶이었어요. 대학 시절, 3학년 1학기까지 다닌 건축공학을 접고 대학과 전공을 바꿔 재입학한 것도 그렇지요. 외무고시 공부 죽어라 매달려 거의 붙었나 했더니 시위 경력으로 막판에 징집당해 군대를 갔다 오느라 동기들보다 사회 진출이 늦었지요. 코트라 다니면서도 또 사업 한답시고, 가구사업 벌였다가 부도났어요. 당시 채무자에게 전화로 재촉받은 트라우마가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전화를 늘 진동으로 해놓는답니다. 그런데 퇴직 무렵에 또 투자를 해서 재산을 날렸으니….”
그는 하느님의 계획이란 말을 자주 했다. 돌아보면 당시엔 역경이고 힘들었던 일들이 나중엔 경력이고, 혜택으로 작용하는 일이 많더란 것이다. 상사의 신문칼럼 대필을 하느라 애면글면하는 게 부당하게 느껴졌지만, 그것이 글쓰기의 힘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해외의 경제상황 보고서 격무로 연일 야근을 하면서 몸무게가 10kg 이상 줄 정도였지만, 그것이 오늘날 경제사 집필의 원천 자료가 되고, 사업 실패가 경영자들에 대한 이해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됐으니 말이다. 가깝게는 책 출판이 예정 시기보다 지체된 것도 불만이었다. 하지만 대기(待機)하는 동안 자료를 보충하며 ‘대기(大器)’로 숙성시킬 수 있었다. 홍 교수가 되새기는 말이 ‘현재에 충실해라’다. “과거의 불완전성, 미래의 불확실성에 불평하고 고민하느니 현재에 몰입한다.” 그가 인생 수업료를 비싸게 치르고 얻은 교훈이다.
말씀 들으니 참 곡절도 많으셨는데 잘 넘기셨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3초도 안 돼 그는 즉답했다). 제가 청소년기에 비뚤어지지 않은 것은 어머니의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어머니를 너무너무 사랑했거든요.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 돈을 어머니께 갖다 드릴 때 웃는 얼굴을 보는 게 참 좋았어요. 만인의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사랑이에요. 저는 그 점에서 운이 좋지요. 늘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까요. 집사람도 내가 사업 부도내고 힘들었을 때 만났어요. ‘학벌도, 얼굴도, 돈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을 나 아니면 누가 구제해줄까’ 하는 모성본능을 발동시켰다고 말하더라고요.(웃음) 많은 사람이 경제적인 문제로 괴로워합니다. 돌아보면 돈으로 인한 고난이 제일 약하더군요. 생활수준을 낮추거나 참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건강, 사랑을 잃으면 회복 불능입니다.”
그는 인생엔 ‘동심 총량의 법칙’이 있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어려서 애늙은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애어른’으로 중심을 잡다 보니 지금 오히려 ‘철부지 어른애’로 허당기를 발동한다는 것.
남보다 훨씬 세게 좌충우돌하셨군요. 그러면서도 늘 티핑포인트와 터닝포인트를 마련해 헤어나오셨습니다.
“내가 뭐든 한 번 빠지면 깊이 빠져 잘 헤어나오질 못해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 역시 장점이 약점이고, 약점이 장점입니다. 무언가에 필이 꽂히면 무섭게 빠지는 것, 좋게 말하면 몰입이고 나쁘게 말하면 중독인데요. 식음을 전폐하고 2박 3일 바둑을 둔 적도 있습니다. 인생 반전은 결국 결단력입니다. 뒤늦게나마 정신 차리고 결심을 무섭게 하고 바람직한 것에 몰입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요.”
그는 ‘인생의 3대 결단’으로 “첫째는 어려운 가정형편인데도 3년 반이나 다닌 대학을 그만두고 재입학 결정을 내린 것, 둘째는 중년기에 바둑을 끊고 그 시간을 독서 등 건설적으로 사용한 것, 셋째는 정년퇴직 후 투자 실패로 힘들었던 시기에 글쓰기에 올인했던 것”을 꼽았다.
아드님만 셋이시지요. SNS를 보면 아드님이 아버지와 이야기도 나누고 가족을 위해 양갈비 요리도 하는 등 살갑더군요.
“(얼굴이 환해지며)요즘 세대는 우리와 근본부터 달라요. 나는 전쟁 치르듯 치열하게 살았지만, 얘네는 즐겁게 누리고자 하니까요. 공학을 전공했는데 모 방송 주최 랩 오디션에 나가 본선에 진출하기도 하고… 인생을 재미있게 살아요. 내가 애들에게 오히려 배웁니다.”
그는 아들 이야기를 꺼내자 영락없는 아들 바보가 됐다. 아들과 와인 관련 공동칼럼을 쓴 적이 있었단다. 소비자가 앱을 통해 와인 품질을 즉각 분석, 판단할 수 있게 한 와인평가 앱이 출현, 전문가 위주의 와인평가 2.0시대에서 소비자 중심의 와인평가 3.0시대로 넘어간다는 트렌드 기사였다. 기성세대인 홍 교수는 이 기사를 쓰는 데 그쳤지만 신세대 아들은 와인 검색 비비노 앱 창업자인 하이니 자카리아슨(Heine Zachariassen)에게 기사를 번역, 복사해 이메일로 보내 교신까지 하더란다. 그는 현재 아들과 ‘실리콘밸리 이야기’와 ‘유대 금융자본과 비트코인 세력 간의 세계대전’ 두 권을 공동집필하고 있다.
유대인 하면 교육열이 떠오릅니다. 자제분들께 적용한 유대인 교육이 있으십니까.
“웬걸요. 애들 어릴 때 저는 유대인에 대한 관심이 없었지요. 손주들한테는 유아 때부터 적용해보고 싶어요. 특히 베갯머리 교육과 밥상머리 교육은 꼭 해보고 싶어요. 잠자기 전 동화를 읽어주고, 밥상에서 인생의 산 교훈을 자연스럽게 접하게 하는 것이죠. 유대인이나 한국인이나 교육열이 높지만 큰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혼자 잘나길 원하지만, 이들은 철저히 협업을 강조합니다.”
그는 유대인과 한국인 교육의 가장 큰 차이를 두 가지로 요약했다. 달란트 vs 베스트, 학업 vs 인성이 그것이다. 우리는 공부의 목적을 역량강화, 즉 성공력에 둔다. 반면에 유대인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재능개발에 둔다.
또 우리는 경쟁에서 승리, 최고가 될 것을 주문하지만 유대인은 단결력에 둔다. 어려서부터 합숙교육을 통해 협동력을 체화해 유대인끼리 서로 형제처럼 돕는다. 상대의 단점을 보며 시기, 경쟁하기보다는 강점을 보며 협력한다. 이들에게 협상능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협동능력이다. ‘남을 비난하는 자’뿐 아니라 그것을 말리지 않고 들은 사람까지 ‘공공의 적’으로 금기시한다. 또 실력보다 매력, 즉 인성과 협동심을 우선시한다.
인생 2막을 앞둔 분들께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하늘은 일단 들이대는 사람을 좋아한다”입니다. 당장의 일자리를 찾기보다 오랫동안 할 일거리를 찾으시길 바랍니다. 들이대고 저지르고, 그다음엔 밀어붙여라. ‘하늘은 열정에 반해 마법을 일으키게 한다.’ 힘들 때 내가 스스로에게 한 주문이기도 합니다.”
인터뷰 후, 홍 교수가 자작시를 문자로 보내왔다. 이 시를 읽으며 ‘절대 절대 절대’란 말에 목울대가 울컥해졌다. 지금 2막의 새 신발끈을 묶고 있을 당신, 거센 풍랑에 맞부딪히더라도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라. 제목은 ‘거센 풍랑을 만나거든’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간구하고
박차고 일어나 맞서라.
일생에 한 번은 독해져라.
처절하리만큼 치열하게 맞붙어라.
길고 긴 힘들고 지루한 싸움이 될 것이다.
출구 없는 절망 속에 갇혀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마라.
절대 포기하지 마라.
절대. 절대. 절대.
그 거대한 고난을 이겨내면 은혜는
슬며시 다가온다.
고난에 좌절하면 은혜 역시 고개 돌린다.
은혜는 항상 고난을 앞세우고 다가온다.
거저 오는 법이 없다. 얄미운 은혜다.
접하는 순간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곧 칠순을 앞두고 있는 최백호(崔白虎·68) 가 부르는 노래에는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을. 그 소리는 흐르는 세월 속에서 수만 가지 감각들이 응축되어 만들어진 예술품에 가까운 인상을 준다. 그렇게 자신만의 독보적인 세계를 만들어낸 흔치 않은 예술가의 자리를 갖게 된 그가 이제 영화감독이라는 오랜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않고 종합적인 예술인으로서의 자신을 완성해가고 있는 최백호를 만나 미래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을 확인해봤다.
청년 최백호는 친구 매형의 라이브 카페에서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1977년에 첫 앨범을 낸 이후 어언 40년, 이제 그의 목소리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두터운 세월의 결이 느껴진다. 그러나 1950년에 태어나서 전후 베이비붐 세대와 함께 살아오면서 많은 히트곡을 만들어낸 그는 지금 ‘은퇴’라는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가수 중 한 명일 것이다. 이적, 아이유, 박주원 등 젊은 실력파 후배들과의 협업과 월드 뮤직 요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도전 등 최백호는 새로운 피로 자신의 감수성을 뜨겁게 채우고 있는 중이다.
계획하며 살지 않는 사람
그뿐만이 아니다. 최백호의 예술적 취향은 일찌감치 화가 쪽으로도 뻗어서 다수의 작품 전시회를 가졌다. 그리고 2018년 4월에 열릴 다섯 번째 전시회도 준비 중이다.
“스무 점 정도 올릴 예정이에요. 테마는 나무고요. 제가 나무밖에 못 그리기도 하고.(웃음)”
그는 자신이 계획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런데 그의 ‘그때그때 대충대충 살아왔다’는 말은 ‘먼 계획을 세우기 어려울 정도로 그때그때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의미도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주변 사람만 피곤하죠.(웃음) 41주년이 되는 올해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영화감독에 도전하고자 합니다. 갑작스런 일이 아니고 사실 오래 준비해왔어요. 시나리오를 썼고 홍보 계획도 세웠고. 그런데 남자 주인공이 없어서 못 만들고 있었죠. 마음에 딱 맞는 사람이 없었어요.”
영화 제목은 ‘미사리’. 그는 남자 주인공으로 가수를 생각하고 있다 했다. 영상과 음악 위주의 영화가 될 것이기에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해선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영화감독으로의 새로운 도전
기왕 미사리 얘기가 나왔으니 미사리와 음악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시니어에게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는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미사리에서는 4~5년 정도 공연을 한 적 있어요. 지금은 미사리 카페가 두세 군데 남았나.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조금 있어야 했는데, 우리나라는 뭐든 잘된다고 하면 다 달려들어서 하려다가 힘이 더 드는 지경이 되고 말아요.”
미사리가 쇠퇴한 이유는 가수 출연료 때문이었다고 한다. 인기를 끌자 라이브 카페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출연 가수들 출연료가 치솟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가수 출연료가 오르면 음식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노래가 좋다고 해도 음식 맛이 없으면 누가 찾겠는가.
“그래서 가수들이 모여서 출연료를 올리지 말자고 얘기했어요. 출연료 기준은 송창식 선배에게 두자고 했죠. 그런데 그게 안 지켜지더군요. 그래서 시장이 흐려졌고…. 우리나라는 참 낭떠러지가 있는데도 밀려가요.”
혹시 미사리 같은 음악의 대안공간을 다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러한 궁금증에 선유도가 좋은 공간이 될 수 있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선유도 안에 공연장이나 레코딩 스튜디오를 만들고, 코너마다 버스킹을 할 수 있게 한 다음 입장료는 3000~5000원 정도 받으면 좋은 이벤트 공간이 되겠다는 생각을 해요. 홍대와도 연결돼서 다리에서 버스킹도 가능할 테고, 좋은 관광코스로도 활용할 수 있죠.”
과거에는 자연주의적인 느낌이 있었지만 요즘은 도로가 나고 식당이 난립해서 이제 변해버린 미사리의 운명에 대하여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씁쓸함이 배어나왔다. 그러한 느낌이 그가 만들 영화에도 담기게 될까 궁금했다.
“영화감독은 어릴 때부터의 꿈이었어요. 원래는 미대를 가고 싶어 그림 공부를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대학을 포기하고 군대를 갔죠. 그런데 군대에서 몸이 안 좋아서 나오게 됐고, 생활 때문에 노래를 시작했죠. 영화는 머릿속에 계속 갖고 있던 생각인데, 아마 이번 영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예요.(웃음)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로 만들고 싶어요.”
최백호의 고민
사단법인 한국음악발전소 대표, 그리고 문화관광부와 마포구가 협약해 만든 음악 창작공간인 뮤지스땅스 대장으로도 일하고 있는 최백호는 어찌 생각하면 가수 일 이상으로 행정적인 영역들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런 입장에서 나오는 목소리에는 현장에서 부딪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현실감이 있었다.
그가 이끄는 한국음악발전소는 무소속 프로젝트라 하여 소속사 없는 실력 있는 뮤지션들을 모아서 경연대회를 하고 있다. 413개 팀들 중 8팀을 뽑아서 앨범을 만들었고 지난 연말 12월 15일에 홍대 상상마당에서 공연을 했다. 연령, 장르 제한은 없다. 덕분에 힙합부터 국악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독립음악가들을 발굴하는 콘테스트로 참여율이 높은 편이다. 그런데 올해가 4회째인데, 예산이 없어서 문제가 되고 있단다. 지원해주던 단체에서 지원을 끊은 것이다. 다행히 3회는 CJ에서 지원해 무사히 프로젝트를 마칠 수 있었다. 그에게 행정가로서 겪어야 하는 이러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음악창작소 프로젝트가 있는데 정부에서 전체 운영자금으로 10억 원 규모를 책정했어요. 원래 시작은 전국 세 군데에서 했어요. 그래서 세 곳으로 자금이 나뉘어 지원됐죠. 그런데 지방에서도 참여하기 시작해서 지원해야 할 곳이 여덟 군데로 늘어난 거예요. 문제는 인디밴드가 없을 것 같은 지역에도 지원금이 들어간다는 거죠. 인디밴드를 한다는 사람들은 다 서울로 오는 게 현실인데, 여덟 곳으로 늘어났어도 세 군데일 때의 예산으로 계속 쓰고 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면 말도 안 되잖아요? 그래서 15억 원으로 늘려달라고 요청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죠.”
뮤지스땅스 대장으로서 속 터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도 자체 운영이 잘되고 있으며 후배들이 좋아한다는 게 보람이다.
한마디 잘못하면 삶이 무효가 되는 세상
단체의 장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 만나는 일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음악 작업 차원에서도 인디밴드부터 아이돌 등 10대부터 노년까지 남녀노소를 다 만나며 사는 것이 최백호의 요즘 삶이다. 그렇게 많이 만나다 보면 사람 보는 눈이 생기지 않을까.
“특별히 사람을 평가해서 만나는 건 아니에요. 거리를 어떻게 두느냐의 차이죠. 그런데 오랜 경험으로 처음 보고 대화를 한 번 해보면 대충 그 사람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나이 들면서 더 멋있어 보인다고 하자 그는 너털웃음을 날렸다.
“젊었을 적에 워낙 별로여서 나이 드니 조금 나아진 거지.(웃음) 나이 들수록 조심해야 될 게 많아요. 사람을 사귈 때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래요. 가장 중요한 게 말이죠.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해요. 우리말이 거칠고 극단적이어서 잘 써야 하거든요. 아주 품위 있는 말도 가능하고 정말 천박한 말도 가능하고. 외국어에 비해 그 폭이 훨씬 크니 상처를 주게 되는 게 우리 말이죠.”
그러고 보니 그는 SBS 라디오에서 ‘최백호의 낭만시대’ 진행을 맡고 있다. 대중과 소통하는 중심에 있으니 당연히 말에 대해 더욱 민감한 경험을 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올해 10년이 되죠. 라디오를 하고 있어서 그런 경험을 많이 했어요. 요즘은 한마디 잘못하면 삶이 리셋되는 세상이에요. 그래서 말을 조심하려면 되도록 사람 만나는 걸 줄여야 해요.(웃음)”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것처럼, 그도 사람들이 SNS를 하는 것을 이해 못한다고 말했다.
“특히 연예인들이 SNS에서 서로 모여 왜 자기 생각을 그리 밝혀야 하는가 싶죠. 책임을 지려면 사회적 활동을 하든지…. 저는 모르겠어요. 자기 일만 열심히 해도 될 텐데.”
최백호의 희로애락
최백호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라고 회고했다.
“재수할 때였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노래를 한다고 3~4년 고생했죠. 결핵을 앓았어요. 생활은 안 되고. 그 시절 너무 심한 고생을 했기 때문에 지금도 어지간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의 아버지는 고 최원봉 국회의원. 제2대 국회의원이었으며 스물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당선됐지만 최백호가 태어난 지 5개월 되던 때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아버지에 대해선 무한한 존경심이 있어요. 비록 일찍 돌아가셨지만 그 존재는 계속 제 곁에 있었고, 제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딸이 태어났을 때, 그리고 그녀가 시집갔을 때를 꼽았다.
“딸아이는 사정 때문에 다섯 살 때 미국으로 갔어요. 처가가 미국에 있거든요. 그때부터 딸을 일 년에 두 번 정도 보면서 살았죠. 딸이 사춘기를 겪었을 때 아내는 옆에 있었지만 나는 없었어요. 그 아이가 스무 살에 한국으로 잠시 왔는데, 그때만 해도 저와 거리가 있었고 자주 싸웠죠.”
그 시기 이후 딸은 다시 공부를 하러 외국을 가게 됐고 나이를 먹으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아버지가 왜 자신을 그렇게 멀리했나를 이해하면서 굉장히 친해졌어요. 이젠 뭐 친구처럼 모든 걸 알고 지내요. 결혼식도 예식장에서 하지 말고 바닷가에서 하라고 했더니 정말 바닷가에서 했고. 저도 딸을 이해하게 됐죠. 딸아이도 저에 대해선 이제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구나 싶어요. 정말 큰 행복이죠.”
가진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얻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능력에 비해 많이 성공했다 싶죠. 공부를 잘한 것도 아니고, 그림도, 음악도 따로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가진 것보다 훨씬 많은 걸 얻었어요.”
시간은 그를 성장시켰고 변화하게 만들었다. 그는 옛날에는 곡을 써도 남을 안 줬다고 한다. 자신이 불러야 하는 노래다 싶어서 욕심이 나서 계속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 탐이 나는 곡이라도 주변 후배들에게 준다. 히트곡을 더 만들고 싶은 욕심은 없기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생긴 또 다른 변화, 그는 좀 더 세심해졌다. 그가 현재 부산에서 진행하고 있는 ‘깡깡이 마을 프로젝트’도 과거 같으면 벌써 끝났어야 할 일이다. 깡깡이 마을 프로젝트는 과거 조선소가 있었던 마을을 문화마을로 키우려는 공공예술 프로젝트다. 이 작업에 그는 두 달간 매달려 있는 상태다. 그러나 시간이 늦어져도 그만큼 결과물이 좋아지니까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젊을 때 성격이 급했고 지금도 급한 편이라고 말하는 그는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변화된 모습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있다.
“새해 소망은 올가을부터 만들기 시작할 영화를 잘 완성하는 거예요. 그러려면 돈이 있어야 하니까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큰일이 되겠죠.”
원로임에도 고고하지 않고 일가를 이뤘음에도 계속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다. 그가 가진 그러한 소탈함이 단단한 철학으로 다듬어져 있는 것이야말로 그는 영원히 예술가이며 계속 우리 곁에 있으리라는 안정감을 주는 것 아닐까. 최백호의 새로운 도전인 영화가 어떤 미학을 보여줄지 기대되는 이유다.
요즘 젊은 애들이 다 그런지는 모르지만 우리 아들도 결혼 이후 10년이 되어가도록 저축을 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물론 외벌이이긴 하지만 지출이 월급보다 많은 그야말로 마통 인생인 것이다. 처음에 마통 액수가 많아졌다는 소리를 듣고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마이너스 통장이라는 걸 알았다. 아들 말에 의하면 요즘 젊은 애들은 자녀는 없어도 마통 없이는 못 산다고 한다. 우리 젊을 때는 많지 않은 월급이지만 조금씩 저축을 해서 집도 늘리고 그랬는데 요즘 젊은 애들은 저축은 꿈도 못 꾸고 거의 매달 마통으로 지낸다는 것이다.
결혼한 젋은 사람들이 어쩌다 부모와 함께 식사를 해도 식사비도 제대로 내려고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할 수 없이 부모들이 식사비를 거의 지출하는데 처음에는 서운했지만 이제는 으레 그러려니 하고 또 그것을 하나의 즐거움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도 아들, 손주와 먹는 식사 값을 우리가 지불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지낸다.
그러나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리 입장이고 아들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돈을 많이 벌고 또 월급이 많아 엄마 아빠한테 식사는 물론 비싼 선물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당당하고 기쁘겠는가? 요즘 젊은이들의 심리상태가 우울하고 행복도가 낮다는 것이 이런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흔히 알고 있는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의 월급은 좀 많을지는 몰라도 그밖의 기업 월급은 그저 자기네 생활비로나 겨우 쓸 수 있는 정도에 그치는 걸로 알고 있다. 그 차이가 생각보다 크고 더 자세한 것을 알면 알수록 부모는 힘들어진다. 물론 취직하지 못한 취준생을 생각하면 더 가슴이 아프다.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에 따라 월급의 차이가 너무 심하니 당사자들이 느끼는 불만이나 박탈감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된다.
필자는 젊어서 30년 넘게 직장생활을 했다. 자녀 세대는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편안한 직장생활을 하면서 인생을 즐길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아들하고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아들을 통해 요즘 많은 젊은이가 자기들이 사는 인생에 대해 굉장히 절망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부모 세대로서 너무 가슴이 아팠다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 두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해. 하나는 인생에서 기쁨을 찾았는가. 또 다른 하나는 당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었는가.” 영화 ‘버킷리스트’ 속 대사다. 인생의 기쁨과 타인을 기쁘게 하는 지점이 같은 사람을 찾자면, 그이가 바로 배우 박인환(朴仁煥·73) 아닐까? 평생 연기를 통해 삶의 즐거움을 찾고, 대중에게 웃음을 선사하니 말이다. 데뷔 후 53년 동안 100편에 달하는 작품에 출연하며 숱한 기쁨을 공유해온 그가 이번엔 버킷리스트 달성을 꿈꾸는 시니어들의 유쾌한 행보를 그린 영화 ‘비밥바룰라’로 노년의 즐거움을 나누고자 한다.
“그래 맞아, 브라보!”
2016년 연극 ‘아버지의 선물’ 출연 당시 짤막한 인터뷰를 통해 인연을 맺은 박인환은 1년여가 흐른 뒤에도 기자의 명함에 적힌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사이 드라마, 영화, 연극 등 7개 작품에 주·조연으로 활약하며 바쁜 나날을 보낸 그의 미소는 여전히 편안하고 건강해 보였다. 1945년 1월 닭띠 태생인지라 2017 정유년 한 해의 감회가 남다르리라 예상했지만, 그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이를 의식하는 순간 우울해지기 때문에 오히려 언제부턴가 잊고 지내게 됐다는 것이다.
“내가 벌써 70대야? 옛날 같으면 그냥 늙은이도 아니고 곧 떠날 사람인데, 이렇게 활동해도 되나? 그런데 요즘은 100세 시대잖아요. 내가 인식하는 숫자대로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예 나이를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다행히 배우는 정년퇴직이 없으니,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활동하려 해요. 흔한 말이지만, 정말이지 무대 위에서 쓰러질 때까지 연기하고 싶습니다.”
삶이 다하는 날까지 연기자로 남고 싶다는 박인환은 그야말로 오로지 연기뿐인 인생을 살아왔다.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전공, 연기 인생 53년 차, 한눈팔지 않고 묵묵히 배우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그는 ‘연기만 해온 것’이 아닌 ‘연기밖에 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제가 장남인데 군대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연기를 그만두고 취직하려고 성균관대 경영학과 편입 지원서까지 받아놨는데, 때마침 ‘나병(한센병)은 전염병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파하는 공연에 참여할 수 있게 됐어요. 지방 순회공연이라 3개월 돌았더니 제법 돈을 주더라고요. 배우를 해도 괜찮겠다고 다시 마음을 바꿨죠. 그런데 그 뒤로 한 10년간 돈을 못 만졌어요. 친구들은 생계를 위해 다른 길로 전향하기 시작했죠. 그땐 소위 빽만 있으면 취직은 문제없던 시절인데 나는 연줄도 없고, 장사를 하려 해도 밑천이 없으니 다른 일은 꿈도 못 꿨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연기뿐이었고, 계속하다 보니 지금까지 질기게 살아남은 거죠.”
생계와 생존을 위한 유일한 수단 ‘연기’
스스로 별다른 재능이 없어 연기밖에 못 했다는 그는 연극무대를 떠나 TV 드라마로 적을 옮기면서도 고초를 겪었다. 당시만 해도 연극배우는 예술가, 방송 연기자는 딴따라라는 인식이 강했고 드라마를 찍는다고 하면 돈에 눈이 멀어 무대를 버렸다는 비난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세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야 했기에, 예술가의 사명보다는 가장의 책임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고상한 말로 포장하고 싶지는 않아요. 사실 밥벌이였어요. 돈을 벌어야 했고, 직업이 배우였고, 일이 곧 연기였죠. 공사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짐을 들 때도 있고 삽질할 때도 있지만 어쨌든 뭐든 해야 돈이 나오잖아요. 연극이든 드라마든 역할이 도둑이든 경찰이든 가리지 않고 다 해야 했어요. 이런저런 역할을 많이 하다 보니 누군가는 나를 보고 ‘천의 얼굴을 가졌다’며 좋게 이야기하는데, 내겐 생계와 생존을 위한 유일한 선택이었죠. 아마 아내와 둘만 살았다면 견딜만했을 거예요. 그런데 자식이 생기니 도무지 타협이 안 되더라고요. 어른들은 배고파도 참을 수 있지만, 아이들은 당장 우유 먹이고 학교도 보내야 하는데 언제까지 예술 타령하며 작품을 따져 고를 수는 없었어요.”
그동안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을 준비했지만 이미 답을 들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하니 이제는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자녀들도 어엿한 성인이 됐고, 우리 시대 아버지 연기의 대표주자로 다양한 작품에서 러브콜을 받을 텐데 말이다. 앞으로는 원하는 작품을 골라 출연해도 되지 않을까? 질문을 바꿔 물어 보기로 했다.
“배우는 선택받는 직업이에요. 누가 찾아줘야 연기를 하지,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동년배 중에 역할이 없어 노는 사람들이 있어요. 돈을 안 받는다고 해도 써주질 않는다고 하더군요. 우리 직업이 겉보기엔 부러울 수 있지만, 그 속에서는 아주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거든요. 운동선수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더 능력 있는 후배들이 계속 나오니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죠. 그 와중에 내 나이에 들어오는 역할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고요. 여전히 선택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스케줄만 맞으면 웬만한 역할은 다 하려고 합니다.(웃음)”
연기 경력 합계 203년, 시니어벤져스의 열정
한때는 농담 삼아 사이코드라마의 괴짜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지만, 이제는 욕심 없이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미 연기 베테랑인 그이지만 젊은 시절보다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체면치레는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촬영장에 가면 대개 최고참이죠. 후배들이 많으니 더 조심해야 해요. 어른인데 실수하면 안 되잖아요. 괜히 모범을 보인답시고 뭔가 했다가 주책없어질지 모르니 가급적 조용히 있으려 해요. 작년에 드라마를 하면서 대사를 잘 못 외운 적이 있어요. 한 번 NG를 냈는데, 당황하니까 계속 틀리는 거예요. 후배들이 다 쳐다보는데 망신스럽기도 하고, ‘아, 이제 내가 그만할 때가 됐나?’ 싶은데, 한편으론 다들 속으로 ‘선생님 이제 좀 쉬시지’라는 생각을 할 것 같았어요. 그러니 더더욱 이 난관을 딛고 넘어서야겠더라고요. 1시간 연습할 거 2시간 연습하고, 세 번 볼 거 네 번, 다섯 번씩 봐가면서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대사 외웠습니다.”
후배들이 주를 이루는 현장이 아닌 신구, 임현식, 윤덕용과 함께한 ‘비밥바룰라’ 촬영장은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발걸음할 수 있었다. 척하면 척, 연기 경력 합만 무려 203년인 네 배우의 앙상블은 두말할 것 없이 완벽했고, 촬영을 마치고 곁들이는 소주 한 잔은 소소한 즐거움이 됐다. 특별히 시니어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인 만큼 네 배우가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대본에 변화를 주는 등 중장년 관객과의 공감대 형성을 위해 연기 그 이상의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나이 든 사람들도 젊은이가 있을 때나 격식 차리려고 하지, 우리끼리는 서로 별명도 막 부르고 애들처럼 장난도 치고 그래요. 몸은 늙었어도 감성은 어린 시절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요. ‘노인은 이럴 것이다’라는 상상보다는 중장년 세대가 공감하는 현실적인 상황과 대사를 표현하고 싶어서 이성재 감독과 미팅을 자주 했어요. 또 우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시니어를 만나 의견을 들어보라고 조언했죠. 그 덕분에 젊은 관객이라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그들만의 웃음과 감동 포인트를 잘 살려낸 것 같아요. 아마 우리 세대가 본다면 가슴을 툭 하고 건드리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하나이자 전부인 나의 버킷리스트
박인환이 연기한 영환은 ‘비밥바룰라’의 다른 세 주인공을 이끌며 ‘친구들과 한집에 살기’, ‘영정사진 같이 찍기’, ‘미팅하기’ 등 그들만의 버킷리스트를 이뤄가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새해도 밝았고, 이번 작품을 계기로 그도 자신만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해보지 않았을까 궁금했다.
“딱히 생각해보지는 않았어요. 아내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죽을 준비를 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은 천지 차이라고요.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날 수 있지만, 어떻게 죽을 것이고, 죽고 나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미리 생각하라는 거죠. 반대로 죽기 전에 무엇을 해야겠다고 하는 게 버킷리스트인데, 글쎄요. 떠오르는 게 없네요.(웃음) 그저 내년에 ‘비밥바룰라’가 잘되면 희망찬 한 해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버킷리스트가 없다는 말이 어쩐지 아쉬워 함께 머리를 맞대고 그가 원하는 일과 바라는 것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고민 끝에 완성한 버킷리스트 첫 번째 항목은 바로 ‘‘비밥바룰라’가 흥행해 더 많은 작품에 출연하기’다. 배우로서 특별할 것 없는 진부한 바람일지 모르지만, 인터뷰 내내 가식 없는 정공법을 택했던 그를 보았기에 얼마나 간절하고 묵직한 소망일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토록 그가 쉼 없이 많은 작품을 하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역시 막힘없이 솔직한 답변을 들려줬다.
“이제는 돈 때문이 아니라 불편한 인사치레를 받기 싫어서 작품을 해요. 식당을 가거나 택시를 타면 꼭 사람들이 ‘요새 안 보이시네요?’, ‘어디 아프세요?’ 이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드라마도 나오고 영화도 개봉하는데 내가 안 보인다니… 그런데 정말 쉬고 있으면 아니라는 말도 못 할 거 아녜요. 작년 11월에도 아주 바빴어요.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는데, 사람이 간사해서 며칠 쉬니까 지겹더라고요. 일을 해야 진정한 휴식의 즐거움을 아는 거지, 매일 쉬는 사람에겐 지루한 일상인 거죠. 연기를 할 때 비로소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껴요.”
이제는 아낌없이 즐길 때
결국 버킷리스트 추가 항목은 들을 수 없었지만, 연기를 향한 열정은 단 하나의 바람이 아닌 그의 전부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차차 새로운 항목들을 만들어나가길 바라며, 끝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와 ‘비밥바룰라’ 관객들에게 새해 인사를 부탁했다.
“우리 세대 사람들이 뭐든 낭비하는 법이 없어요. 절약 정신이 배어 있죠. 늘 이걸 꼭 사야 해? 저걸 꼭 먹어야 해? 그러면서 돈이 있어도 ‘됐어, 됐어’ 하고, 때론 자식들의 효도도 마다하며 살죠. 그런데 이제는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여유가 있으니 문화생활을 즐겼으면 해요. 그래도 괜찮잖아요. ‘비밥바룰라’ 같은 영화를 보면서 그들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 유쾌하고 긍정적으로 그려나가면 좋겠어요. 새해에는 우리 세대가 더욱 즐겁게 잘 살길 바랍니다.”
58개띠들이 하면 유행이 된다. 폭발적인 우리 사회 인구증가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58년생들은 사회 변화와 유행을 주도한, 지금으로 치면 ‘완판남’·‘완판녀’로 부를 수 있는 세대다. 그들의 문화적 파괴력은 굉장했다. 여러 분야 중 특히 여행과 관련한 58개띠들의 문화주도도 눈여겨볼 만하다. 빈궁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의 혜택을 보기 시작한 이들은 다양한 여행을 경험해나갔다.
1978년. 58개띠들이 만 스무 살이 되던 해. 당시 8월 17일자 경향신문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린다. ‘바캉스 파장 … ‘고요’ 되찾는 산하, 연인원 5천만 기록’이라는 제하의 기사는 당시 여름휴가를 위해 산과 계곡, 바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렸는지를 증언한다. 재미있는 내용 중 하나는 작년 대비 피서객이 40% 늘었다는 대목이다. 예년보다 높은 기온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성인이 된 58개띠들이 피서객 증가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당시에도 제주도는 관광지로 인기가 좋았다. 평소 600석 내외로 운영되던 서울-제주 간 항공편은 피서기간에는 1000석 이상으로 증편돼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인지 다음 해인 1979년, 철도청은 고급여행을 원하는 관광객을 위해 새마을호 객차 확충을 서둘러 진행했다.
물론 58개띠들이 여행 보따리를 맘껏 싸기 시작한 원인에 경제성장의 수혜도 빼놓을 수 없다. 1977년은 우리 경제의 상징적인 시기였다. 1인당 GDP가 처음으로 1000달러를 돌파해 1034달러를 기록했고, 수출 역시 최초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배고픔은 점차 잊히고 있었다.
가장 원하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
그렇다면 58개띠들의 신혼여행은 어땠을까. 통계청이 2011년 발표한 ‘최근 30년간 초혼자료 분석’에 따르면, 1981년의 남성 초혼 연령은 26.4세, 여성은 23세로 나타났다. 이를 바탕으로 유추해보면 58개띠들의 결혼이 이뤄진 시기는 이들이 23세에서 26세를 지낸 1981년에서 1984년 사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1982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당시 젊은이들의 신혼여행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등장한다. 한국갤럽이 18세 이상의 남녀 121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가장 많이 다녀온 신혼여행지는 부산(21.6%), 경주(12.6%) 순이었다. 아무래도 비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제주도는 3위(12.2%)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재미있는 것은 순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서울’의 존재다. 당시 지방 거주민들에게 서울은 충분히 매력 있는 여행지였다. 신혼여행으로 서울을 선택한 이들은 5.4%나 됐다.
가고 싶은 신혼여행지로는 역시 제주도(46.5%)가 가장 많이 꼽혔고, 당시 왕래가 여의치 않았던 외국을 꼽은 이들도 13.1%나 됐다. 3위는 설악산(11.8%)이 꼽혔는데, 다녀온 여행지에서 7위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높은 수치다. 설악산이 관광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1978년 진갑을 맞은 박정희 대통령이 선택한 관광지도 개발이 막 시작된 설악산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로 ‘천지개벽’
58개띠가 해외 땅을 밟은 것은 ‘여행’보다 ‘일’이었다. 물론 해외 출장이라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1980년대 고위직 공무원이나 주요 기업의 임원이 해외 출장이라도 나가면 모두 기삿거리가 됐다. 그만큼 해외 방문은 쉽지 않았다. 출장이 목적이어도 회사의 매출 규모가 낮은 기업은 여권을 받기도 어려웠던 시절.
중동에서 일어난 건설 붐은 58개띠들의 해외 구경의 좋은 구실이 됐다. 굳이 따지자면 58년생은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말까지 일었던 중동 붐의 막차를 탄 세대다.
1985년 해외로 나간 한국인은 약 48만 명이었다.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 이가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사우디아라비아가 많았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결과다.
서울올림픽 개최 다음 해인 1989년이 되면서 전 국민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졌다. 1983년만 하더라도 50세 이상인 사람이 관광예치금을 200만 원 이상 맡겨야 관광여권을 받을 수 있었지만 매년 대상 연령이 낮아지다가 1989년에 완전 자유화가 이뤄졌다.
해외여행 자유화는 우리 사회의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1990년부터 신문 지면에는 ‘배낭여행족’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고, 즐겨 찾는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에서 태국이나 필리핀으로 바뀌었다.
세운상가 외제장사 아시나요?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해외 출장 근로자들의 부업 중 하나는 바로 소니와 산요로 대표되는 일본 가전제품을 내다 파는 일이었다. 이들이 면세점 등에서 구매해 들여온 카메라, 오디오, 전기밥솥 등은 세운상가 상인들에게 늘 환영받았다.
그러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뤄지면서 소비자들이 해외에서 직접 물건을 사갖고 들여오는 문화가 확산됐다. 이런 문화의 아이콘으로 ‘코끼리 밥통’이 있다. 일본 조지루시 전기밥솥은 밥맛이 좋다고 입소문을 타면서 고소득층 사이에서 필수품 대접을 받았고, 점차 대중화되어갔다.
매일경제신문은 1992년 광복절 ‘일제선호 불치병인가’란 기사를 통해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일본 버블경제의 거품이 꺼져가면서 가전제품 상점가가 몰려 있는 아키하바라역 인근 가게들은 불황을 겪고 있지만, 한국 관광객들이 너도나도 밥통 등 가전제품을 사주는 덕에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최근 중국 관광객 유커들이 백화점에서 한국산 밥통을 사재기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당시 58개띠들의 나이는 34세였다. 김포공항 입국 수속 행렬에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 않았을까.
당시 신문에 게재된 해외여행 광고를 보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도 일본, 미국, 동남아로 지금과 차이가 나지 않았고, 도쿄 4일 여행상품이 70만 원 선, 필리핀 4일 여행 상품이 48만 원 선으로 가격도 비슷하다. 다만 다른 부분이 있다면 중국 관광의 유무다. 58개띠들이 중국 관광지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1994년 중국여행 전면자유화 이후부터다.
[추억 한토막] 대전역 가락국수 맞먹는 앵커리지공항 우동의 추억
경부선과 호남선이 지났던 대전역. 선로가 붐비고, 대기시간이 길었던 탓에 대전역 승강장의 가락국숫집은 승객들이 꼭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됐다. 비행기 여행과 관련해서도 대전역 가락국수와 비슷한 추억의 공항이 있다. 다소 엉뚱하게도 미국 알라스카 앵커리지공항이 그곳이다.
대한항공이 1975년 서울-파리 여객노선을 개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유럽 노선이 늘기 시작하면서 앵커리지 공항은 상당수 여객기가 들러야 할 경유지였다. 당시 여객기들의 비행거리가 짧았고, 냉전으로 인해 소련 영공을 지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인 절차였다. 이런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 버블시대 해외 여행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던 일본의 항공사들도 이곳을 들러야 했다.
환승보다는 급유의 목적이 컸기 때문에 앵커리지에서 머무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해외 출장이 잦았던 상사맨들이나 항공사 관계자들은 당시 앵커리지의 추억을 기억한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근무했던 안영희 동년기자는 “한 시간은 있어야 했는데 승객들이 딱히 할 만한 것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서 면세점들이 장사가 잘됐죠”라고 설명한다.
이 공항에서 인기가 가장 높았던 매장은 바로 ‘우동’. 해외 왕래가 잦았던 한국과 일본의 ‘밀리언 마일러’ 사이에선 반드시 거쳐야 할 일종의 성지였다. 일본의 몇몇 사이트에 남아 있는 기록의 편린을 맞춰보면, 앵커리지 우동은 주인이 두 번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주인은 미국계 일본인으로 육수 제작과 제면을 직접 하는 정통파여서, 본토 일본인들도 인정할 정도였다고. 가격은 10달러 내외로 비싼 편이었다. 지금도 일본에선 ‘앵커리지 우동’이란 단어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수준 높은 우동집을 칭하는 대명사처럼 통용되고 있다.
장사가 잘되자 한 항공사 자회사가 주인을 밀어낸다. 일종의 젠트리피케이션. 물론 우동은 인스턴트로 바뀌었다. 냉전의 종말과 항공기 성능의 향상으로 앵커리지 경유 노선이 줄자 이 우동집은 한국인 사업가에게 넘어간다. 맛도 한국식으로 변했고, 단무지는 별매여서 원성을 사기도 했다.
대한항공에서 정년퇴직한 정용진 기장은 “당시 조종사들 사이에서 앵커리지공항의 우동은 자주 언급될 정도로 유명했어요. 우동과 함께 팔았던 연어 고기도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물건이어서 인기가 많았죠”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브라보 앙코르 라이프
우리는 잘 늙고 잘 죽기 위해 잘 살려고 한다. 그래서 인생 후반기 여러 필수교양 지침 가운데서도 비우기, 내려놓기, 나누기를 배우고 훈련하고 싶어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시니어 세대는 일밖에 모르고 살았다고들 이야기한다. 돈을 벌어야 하고 모아야 하고 자녀들에게 해주어야 하는 강박 속에서 성실하게 노력하고 희생하며 살았다고 하는 그 공로를 돌이켜보면 사실 나와 가족을 위한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다. 다른 사람 또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재능이나 금전을 기부하고 자원봉사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기부’문화에 익숙지 않았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배운 적이 없다. 미국의 워런 버핏,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같은 사람들은 미국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치고, 삼성 같은 대기업도 사회공헌 차원에서 기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개인이 기부를 하는 일은 아주 드믄 일이다. 기부 DNA가 아예 없는 사람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보통의 사람들도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기부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여기기 쉽다.
퇴직을 하고 일정한 가처분소득 없이 사는 마당에 기부하고 싶어도 형편이 그렇다. 대부분 이런 생각일 것이다. 퇴직 후 지속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든지, 연금이나 일정 자산소득이 있든지 간에 어느 정도의 기간이 될지 불투명한 자신의 노후를 생각하면 불안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향후 30~40년을 위한 준비를 충분히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보통의 시니어라면 말이다. 얼마가 있어야 안심이 될까? 준비가 되어 있다 해도 소유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행복하지 않다. 단언컨대.
인생 후반기 시니어의 차이 나는 경영 노하우는 빼기와 나누기다. 인생 후반기야말로 기부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다. ‘소득의 일정 부분을 기부한다’는 말 대신 소비하는 금액의 일정 부분을 줄이고 빼서 기부금 명목으로 지출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해 얼마큼씩 빼기를 할 것인가. 물질적으로 나를 비워가는 과정 또한 나를 내려놓는 일 이상으로 중요하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 매달 생활비에서 10퍼센트 혹은 13퍼센트는 떼어서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나 공익을 위해 애쓰는 단체에 기꺼이 기부하고 나누어 쓰겠다고 마음을 먹고 행동에 옮기는 순간 삶의 가치는 고양된다.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긍심은 물론, 줌으로써 누리는 행복감은 나만을 위한 소비가 주는 행복감보다 훨씬 큰 의미를 준다. 신기하게도 기부는 투자의 효과로 내게 어떤 형태로든 돌아온다는 것이다.
기부하는 일에 어린이, 어른, 노인을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에게 기부문화가 그리 친숙하지 않다는 점에서 각 세대에 맞는 기부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공감할 만한 동기부여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몇 달 전에 지인들 몇몇과 다음과 같은 궁리를 해봤다.
당신이 누구이든 기부할 돈도 재능도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시라. 우리나라 국민은 만 65세가 되면 지하철 무임승차 혜택을 받는다. 필자도 2년 내에 소위 지공족에 편입된다. 웃음도 나고 머쓱한 기분도 드는 게 사실이다. 이런저런 대화 중에 지하철 무임승차로 한 달에 적어도 4만여 원의 지하철 교통비가 절약된다는 점에 주목하게 되었다. 외출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도 2만원 정도는 절약될 것으로 짐작된다. 이거야말로 공돈인데 이럴 때 과감하게 월 2만원을 기부해보라. 이름하여 지공펀딩 캠페인을 벌여보자고 5명의 예비 지공족이 모여 논의했다. 지하철이 공짜라는 희화적 의미의 ‘지공’을 ‘지공(至公)’이라 표기하고 공익을 위해 기금조성을 하기로 한 것이다. 열 명, 스무 명, 백 명, 천 명, 그 이상으로 지공족이 참여한다면 그야말로 지공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될 것이고 시니어 문화가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는 시금석이 될 만하다.
성실하게 일하고 절약하며 살아온 세월은 어디로 가고 무임승차족, 사회비용부담 세대로 비하되고 있는 지금의 시니어에게 비타민 같은 기회로서 기꺼이 동참하고 싶은 제안으로 받아들여지길 기대하고 있다. 공개하기도 전에 벌써 동참의 뜻을 보내온 사람이 30여 명이다. ‘기부한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지만 기부해 달라고 요청하는 이도 없는데 누구한테 기부하라는 거냐’ 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감할 만한 명분이 있고 믿을 만한 단체라면 나도 기꺼이 지공 멤버가 되어 기부자가 되겠다는 의미다. 본격적으로 이런 운동을 전개하면 ‘나도 기부를 한다’는 자부심과 즐거움에 행복해하는 시니어가 많아지리라 본다. 이 운동의 목적이나 목표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기에는 적합한 지면이 아니어서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다. 단, 기부의 마음만 있으면 기부할 돈과 재능이 없어서 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설사 기부를 하고자 해도 누굴 믿고 기부를 하겠는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작금의 사회 분위기가 기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만든 것도 사실이다. 어금니아빠 사건, 새희망의 씨앗 전화사기 사건, 미르재단에 이르기까지 최근 1년 사이에 부패한 재단, 기부금 횡령사건이 줄을 이어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래서 진정 목적에 잘 쓰이고 있는지 믿을 수 없어 더 이상 기부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부정적 대응이 해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세먼지가 가득하고 탄소 배출이 증가해도 우리는 숨을 쉰다. 숨쉬기에 필요한 산소는 여전히 공기 중에 존재한다. 기부는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사회를 더 좋게 변화시키는 데 기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기부문화가 성숙해가면서 스스로 사회의 자정 장치까지도 만들어낼 것으로 믿는다.
후반기, 다시 시작하되 자장격지(自將擊之)의 자세로 한다. 과식하지 않을 줄도 알고 내 몸의 상태에 맞춰 행동을 조심할 줄도 안다. 그러지 않으면 탈이 나니까 어쩔 수 없기도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이 과히 나쁘지 않다. ‘스스로 가지려고만 하지 않고 주려고 한다. 더하기, 곱하기보다 빼기, 나누기를 좋아한다.’ 이런 현상은 연륜의 지혜가 주는 자정기능이고 자기균형 효과라 생각한다. 나이에 걸맞게 노쇠해가는 것이 노익장을 과시하고 노욕을 부리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보기에 자연스럽다. 몸도 마음도 물질도 스스로 비워야 하고 빼야 하는 줄 알게 되니 기쁘다. 나와 내 자녀에게만 주는 것보다 이 사회의 더 많은 사람, 더 필요로 하는 곳에 주면 내가 실제로 준 것보다 더 큰 몫으로 가치가 증대된다. 기부는 소비가 아니라 투자이고 생산이다. 기부하는 사람은 투자자이고 보람과 기쁨이라는 배당을 받는다. 우리 사회의 명예로운 주주가 되는 것이다. 사회를 더 좋게 변화시키는 일에 시니어가 동참하는 것이다.
평범한 당신이 죽기 전에 기부의 즐거움을 누리고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으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에 있을까.
미주 한인 사회에서 지식인의 멘토로 불렸던 노부부가 있었다. 정신과 전문의로 UC데이비스 의과대학에서 35년간 교수로 근무했던 故 김익창 박사와,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25년간 교사로 일했던 그레이스 김(한국명 전경자·86)씨다.
부부는 평생 소외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힘썼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 53년을 함께하는 동안 그들은 최고의 동지이자 친구였으며 연인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아내는 여전히 열심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 “You should keep going.” 당신은 계속 그렇게 살아 달라는 것이 남편의 바람이었다.
사랑스러운 사회운동가
“동호회에서 주최하는 클래식 음악회 준비로 정신이 없어요. 오후에는 신문사에 음악회 기사를 전달하러 가야 해요. 오늘도 너무 바쁘네요!”
그녀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친다.
3년 전, 애너하임의 한 노인병원에서 김익창 박사와 그레이스 김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김익창 박사는 파킨슨병으로 상당히 힘들어하면서도 아내와의 인터뷰를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당시 인터뷰 주제는 ‘부부’였는데 김 박사는 “부부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젓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남편은 나를 커뮤니티 액티비스트(사회운동가)라고 별명처럼 불렀어요. 조용하고 신중했던 그와 달리 나는 말도 많았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곤 했는데 남편은 그런 내 모습을 사랑해줬지요. 우리는 6·25전쟁을 눈앞에서 겪은 세대입니다. 모두가 못 배우고 가난한 시절에 그래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우리는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소외받는 곳,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늘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1931년 중국 상해에서 나고 자란 김씨는 해방이 되던 해 부친의 고향이었던 평안북도로 돌아왔고, 남북으로 갈리게 되자 다시 38선을 넘어 왔다. 이 과정에서 막내 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은 그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상해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은 임시정부에 돈을 보내며 독립운동을 도왔고, 주위에 고학을 하는 한국 유학생이 있으면 장학금을 내놓기도 했다. 어머니 역시 그 시대에 평양신학교를 나온 신여성으로서 이웃과 나누는 것을 평생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고.
“여고 시절 내 꿈은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가서 슈바이처 박사와 함께 일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화여대 의대로 진학했지요. 그런데 입학한 그해 6·25전쟁이 터졌어요. 산속으로 피난을 갔다가 와 보니 집이며 모든 것이 폭격으로 사라져버렸더라고요. 너무 화가 나서 당장 군에 입대해 총 들고 싸우겠다고 고집을 부렸죠. 어린 아가씨가 얼마나 맹랑했겠어요. 그때 영락교회를 다녔는데 목사님이 하루는 보여줄 곳이 있다면서 저를 데리고 가신 곳이 있어요. 바로 고아원이었죠.”
폭격을 맞고 부서진 학교 건물에 임시로 마련된 고아원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밤낮으로 울부짖었고 아프고 굶주린 아이들을 돌봐줄 손길은 없었다. 그렇게 김씨는 여군 대신 고아원 선생님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김씨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재입학한다.
“등록금을 댈 형편이 아니었어요. 서울대 사범대가 등록금도 싸기도 하고 모자라는 교사를 길러내기 위해 장학금도 많이 준다고 하니 좋았지요. 또 고아원 선생을 하면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도 알게 되었고요. 무엇보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으니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요?”
서울대학교 캠퍼스에서 그녀는 남학생들이 데이트 신청이 쇄도할 만큼 인기가 있었지만 모두 퇴짜를 놓아 별명이 ‘NO’였을 정도로 콧대가 높았다고 한다. 그중 유일하게 ‘YES’를 한 것이 남편 김익창 박사의 오페라 데이트 신청이었다고. 생전 김익창 박사는 인터뷰 때마다 첫눈에 반할 정도로 ‘탁월한 미모의 소유자’였다고 아내를 향한 무한 애정을 드러내곤 했다.
1956년, 김익창 박사가 미국 유학을 떠난 이후 6년 동안, 두 사람은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다. 그 사이 김씨는 숭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후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용산직업학교를 세워 불우한 형편의 아이들을 지도했다.
“6년 동안 우리는 떨어져 있으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그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받았는지 몰라요. 삶에 대한 가치관, 철학, 문학, 음악, 예술, 종교에 대한 생각을 나누면서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닮아 있는지 알게 되었죠. 그 시간 동안 다져진 신뢰는 남녀의 사랑 그 이상이었어요.”
‘Dear, Grace’
1962년, 마침내 두 사람은 미국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김익창 박사가 샌프란시스코 마운트 자이언(Mt. Zion) 병원에서 인턴십을 하는 동안 두 아들 데이비드와 다니엘이 태어났고, 남편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병원 응급실에서 일해야 했다. 잠을 잊고 살아야 했던 고된 시절이었다.
“대단한 정신력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3년 만에 박사과정을 끝내더라고요. 레지던트를 마칠 무렵 남편이 내게 공부를 해보라고 제안했어요. 너무 기뻤죠. 내가 너무나 원하던 거였으니까요.” 김씨는 그 길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원에 진학, 1969년 상담학과 아동발달학으로 교육 석사학위를 받는다.
캘리포니아의 진취적인 교육 도시 데이비스에 정착하면서 부부는 본격적으로 소수민족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게 된다. 김익창 박사는 임상정신과 의사로서 평생 소수민족의 정신의학에 관심을 두었다. UC데이비스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문화가 다른 환자들에 대한 의료진들의 이해’를 강조하며 대학에 강좌를 만들고 끊임없이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다문화 정신의학 분야의 권위자로 자리 잡았고 그의 노력으로 현재 미국 정신의학협회에는 ‘화병’이 정식 병명으로 등록되어 있다.
김씨는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언어와 문화 차이로 어려움을 겪는 소수인종 학부모들과 학교를 잇는 가교 역할을 자청했다. 특히 인종차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차별도 받지 않도록 앞장섰다.
특히 1980년부터 시작했던 미주 한국일보의 질문과 응답 형식의 칼럼 ‘Dear, Grace (그레이스에게)’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날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부모들이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려움이 많다고요. 흔쾌히 하겠다고 했죠. 궁금한 것을 편지로 보내면 답을 주겠다고 했는데… 세상에, 편지가 어마어마하게 와서 너무 놀랐어요. 궁금한 것은 많은데 어디에 물을 곳이 없었던 거예요. 한국말을 하는 선생님이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부모와 자녀 간의 갈등, 학교와의 마찰, 인종문제를 비롯해 마약, 섹스, 가출 문제까지. 그레이스 김은 한인 학부모와 청소년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고 칼럼은 1990년까지 계속됐다.
나눔, 그 위대한 유산
이들 부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부’에 대한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입양아 단체, 아시안 청소년 장학재단 등에 적지 않은 기부를 하고, 무료 진료와 상담 등의 봉사활동을 해왔던 부부가 은퇴하면서 제대로 일을 치른 것이다.
2006년 김익창 박사가 35년간 몸담았던 UC데이비스 대학에서 나왔을 때, 이들은 캘리포니아 실비치의 한 은퇴촌에 작은 집을 마련한 뒤 나머지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20여 개 단체에 전달한 기부금은 적게는 5만 달러, 많게는 25만 달러에 이르렀다. 모두 익명으로 한 기부였다. 이 놀라운 기부는 당시 UC데이비스대학에서 이들이 내놓은 기부금 25만 달러로 ‘다문화정신의학센터’를 만들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사실 그만한 목돈이 생긴 데는 숨은 사연이 있어요(웃음). 젊은 시절 내가 하도 많이 기부를 하고 다니니까 남편이 매달 월급의 반만 받고 나머지는 은퇴연금으로 저축을 하자고 한 거예요. 은퇴할 때 그렇게 돈이 쌓인 줄 몰랐어요. 평소 돕고 싶었던 단체 리스트를 적어 내려가는데 얼마나 신이 나던지. 남편과 아주 펑펑 잘 썼어요!”
고마운 것은 부모의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여준 두 아들이었다.
“그때 아이들이 한 말이 잊히지 않아요. 돈이 필요하면 지금 이야기하라고 했죠. 두 아이 모두 자신들을 키워준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다며 원하는 곳에 다 쓰라고 하더라고요. 아, 우리가 아이들을 잘 키웠구나. 갑절로 행복해지더라고요. 두 아들 내외 역시 어려운 곳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기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2009년 데이비드 김씨가 지난 오바마 정부의 교통부 차관보에 임명됐을 때, 그가 남긴 말이 있다.
부모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마음만 있다면 언제나 남을 도울 힘이 있다고요.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또 다른 방식으로 도울 수 있다는 거죠. 바로 그 나눔의 정신이 우리 가족을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고개 들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아시아인은 돈을 많이 벌어도 미국 주류 사회에 들어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의 삶은 제 미래를 위한 최고의 투자였습니다. 부모님의 기부가 저를 성공적으로 키운 셈입니다.
상해에서 독립운동가와 유학생을 돕던 부모에게서 김씨에게로, 이것이 다시 김씨의 아들들에게로 이어진, 참으로 위대한 유산이다.
To my forever love…
‘김 여사의 해피 에너지’는 은퇴촌에서도 빛을 발했다. 김씨는 입주한 은퇴촌 실비치 레저월드의 한인회 회장이 되어 커뮤니티 간 화합에 앞장섰다. 한인 노인들을 위해 각종 세미나와 교양 프로그램을 속속 만들어내는가 하면 지역구 선거에 한인 후보자가 나오면 발벗고 나서서 선거운동을 도왔다. 물론 그 뒤에서 묵묵히 김씨를 돕는 사람은 남편 김익창 박사였다.
이 무렵 김익창 박사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면서 부부에게는 예상치 못한 슬픔이 찾아왔지만 이 또한 차분히 받아들였다.
“한동안 멍했지요. 왜 이런 병에 걸리게 됐을까. 젊었을 때 잠을 너무 못 자고 힘들어서였을까…. 하지만 남편은 곧 받아들이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어요. 파킨슨병은 관리만 잘하면 당장 어떻게 되는 병이 아니라면서요. 그렇게 8년을 투병했지요. 그 사이 자신의 인생을 덤덤히 돌아보며 두 권의 자서전도 집필했고요.”
병세가 악화되어 노인병원에 입원하고 2년 동안, 부부는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기분이었다고. 아내는 매일 아침 예쁘게 화장을 하고 직접 구운 쿠키를 만들어 남편을 만나러 갔고, 남편도 눈을 뜨면 아내를 기다렸다. 전립선암이 발병했을 때는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김 박사는 항상 웃는 얼굴로 아내를 맞아주었다. 병원 스태프에게 ‘She is my forever love’라고 소개해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편지 한 장을 건네더라고요. ‘결혼해줘서 고맙고 행복했다. 아파서 미안했고 먼저 가서 또 미안하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까지처럼 계속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슬픈 삶을 살까봐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어요. 끝에는 늘 하던 말, ‘my forever love’라고 적어놓았더군요. 마지막 러브레터였어요(웃음).”
김익창 박사가 떠난 후, 그녀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며칠을 먹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문득 자신이 이렇게 될까봐 걱정하며 병실에서 간신히 손을 움직여 편지를 썼을 남편이 떠올랐다.
“아니다. 남편이 가장 좋아했던 내 모습으로 끝까지 열심히, 즐겁게 살자. 그렇게 결심했어요. 나는 지금 아주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은퇴촌에서 음악회도 열고 노래도 부르고 세미나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어요. 그러다 남편이 너무 그리울 때는 조용히 말합니다. ‘하나님 나는 준비되었으니 이제 데려가셔도 됩니다. 루크를 만나게 해주세요…’ 라고요(웃음).”
오랜 대화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열심히 포즈를 취해주는 그녀의 미소가 캘리포니아 햇살만큼이나 화사하다. 누구에게나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이런 모습을 남편은 사랑했으리라.
“Good to see you!”
쿨하게 인사를 남기며 보무당당히 사라지는 ‘유쾌한 그레이스씨’. 그녀와의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철 지난 바닷가를 혼자 걷는다
달빛은 모래 위에 가득 고이고
불어오는 바람은 싱그러운데
어깨 위에 쌓이는 당신의 손길~~
― 송창식의 ‘철 지난 바닷가’ 중
당신이 정녕 ‘브라보 마이 라이프 세대’(이후 ‘브라보 세대’)가 맞는다면 찬바람 휑하니 부는 늦가을 저도 모르게 ‘소리 없는 사랑의 노래’를 주절주절할 겁니다. 송창식, 1960년대 말 통기타 하나 들고 불쑥 나타나 1970~1980년대 대중가요계의 한 봉우리를 차지했던 가수.
개인적인 선호의 차이는 다소 있겠지만 당신이 50대에서 70~80대 사이 ‘브라보 세대’에 속한다면 누구든 그의 노래 한두 곡쯤은 부지불식간에 웅얼거리곤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많이 입가에 맴도는 그의 노래 하나가 바로 ‘철 지난 바닷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40여 년이 지난 현재의 감각에 비춰 봐도 세련됐으면서도 서정적이며, 더없이 예쁜 노랫말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스러지고 이지러진 가을의 바닷가를 함축적으로 담아낸 첫 세 음절 ‘철 지난’은 이 노랫말의 백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원색 비키니 차림의 젊은 아가씨들과 터질 듯 검게 그을린 근육질의 사내들이 뒤엉킨 한여름의 뜨거운 바닷가가 아닌, 가버린 청춘과 사랑의 쓸쓸함과 애잔함, 애수만이 남아 있을 법한 철 지난, 늦가을의 바닷가에는 그러나 상상 외의 극적인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으레 “산에 가봤는데 도통 꽃이 없던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만 살펴보면 텅 빈 숲 마른 나무 사이로 의외로 여러 꽃이 남아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개망초, 개쑥부쟁이, 서덜취, 이고들빼기, 마타리, 미역취, 달맞이꽃 등등. 그런데 이들은 새로 핀 게 아니라 봄여름부터 피고 지고 했건만 너무 흔하거나 평범해서 주목받지 못했을 뿐입니다. 못생긴 소나무가 뒷동산을 지킨다 하듯, 장삼이사 꽃들이 가장 늦게까지 산과 들을 빛낸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철 지난 바닷가에는 가을에 비로소 피는 꽃이 있습니다. 대개 10월부터 피지만, 곳에 따라선 11월은 물론 12월 초에도 새로 꽃대를 밀어 올려 싱싱한 꽃송이를 펼쳐 보이기도 합니다. ‘철 지난 바닷가의 수호신’이란 찬사가 절대 과하지 않은 둥근바위솔이 주인공입니다.
저 멀리 수평선부터 달려온 파도가 갯바위에 부딪혀 스러지는 바닷가 절벽 위. 그 위 기나긴 오솔길을 거닐며 지나간 옛사랑을 그리워하며 흐느끼지만 말고, 척박한 바위 겉에 뿌리를 내리고 기운찬 생명력을 보여주는 둥근바위솔을 찾아볼 일입니다. ‘한 송이의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던 18세기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처럼, 스산했던 마음에 작은 위안이 찾아들 것입니다. 큰 것은 30cm까지 솟아오른, 촛대에 꽂힌 초 모양의 길쭉하고 뾰족한 꽃차례에 자잘한 꽃송이를 다닥다닥 단 채, 짙푸른 바다와 을씨년스런 하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둥근바위솔.
옷깃을 파고드는 찬 바닷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추선 둥근바위솔에선 그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을 듯한 굳건함과 의연함, 당당함이 엿보입니다.
Where is it?
둥근바위솔은 오래된 기와지붕 위에서도 자란다 하여 와송(瓦松) 또는 순수한 우리말인 지붕지기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도 불리는 바위솔을 필두로 정선바위솔·연화바위솔·포천바위솔·가지바위솔·울릉연화바위솔·난쟁이바위솔·좀바위솔 등 국내에 자생하는 10여 종의 바위솔 속(屬) 식물의 하나다. 북으로 강원도 고성에서 삼척을 거쳐 부산, 거제 등 남해 도서까지 동·남쪽 바닷가에 폭넓게 자생한다. 잎이 가늘고 뾰족한 바위솔에 비해 넓고 둥글어서 둥근바위솔이란 이름을 얻었다. 주로 바닷가 바위 겉이나 모래 더미 사이에서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