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마음속의 감정이 메말라가는 과정이 아닌가 한다. 젊은 날 책을 붙들고 밤을 새우며 때로는 눈물짓던 감동의 기억이 세월에 바래 아스라한 것도 가을 낙엽처럼 건조해진 감정 탓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갈수록 감동을 자아내는 일이 가물에 콩 나듯 한다. 어쩌면 설레는 미래보다 색 바랜 과거가 늘어나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느끼는 또 하나는 나를 둘러싼 환경과 세상에 대한 대응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사람 만나는 일도 줄고 되도록 관계가 복잡해지는 것을 피한다. 그것은 어쩌면 세상의 주인공 자리를 넘겨준 자의 공허함 때문인지 모른다. 문제는 그 이후다. 익숙한 삶에서 점차 멀어지고 경험해 보지 못한 안갯속 삶 앞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때 만난 책이 김정운의 이다. 코믹한 외모에 해학적인 강의로 재미있는 사람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책으로 접한 그의 내면과 지식은 매우 단단했다. 보통 사회학이나 경제학 쪽으로 고령화와 노년의 삶을 분석한 글은 많지만, 그 긴(?) 기간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심리학적으로 풀어 안내한 책은 이 책이 처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읽기 힘든 학술 이론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므로 읽기 편하다. 게다가 타고난 입심으로 매 장마다 웃음을 참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다. 그러면서 우리 생각의 의표를 찌른다. 그는 우리의 삶이 성공이라는 허상을 좇으며 심신이 망가져 있다고 진단한다. 돈과 권력이 많을수록 그걸 감추다가 “한 방에 훅 간다”고 경고한다.
“격하게 외로운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외로움이 ‘존재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바쁘고 정신없을수록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도 좀 적게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바쁘게들 삽니다. 그렇게 사는 게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꾸 모임을 만듭니다. 착각입니다. 절대 그런 거 아닙니다. 바쁠수록 마음은 공허해집니다.” 위로가 되는 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독자를 계몽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그는 50세가 되는 2012년 1월 1일 일기장 첫머리에 ‘난 이제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라고 적었고, 그 즉시 교수직을 버리고 일본으로 떠나 자신이 하고 싶었던 그림 공부에 나선다. 그리고 이 책은 그가 일본 생활을 하면서 보고, 느끼고, 깨달은 이야기를 쓴 것이다.
인상 깊은 그의 고백은 “방구석에 앉아 결심은 원대하게 세웠지만, 정작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스스로에게 크게 절망했습니다. 주체적으로 살라고 떠들고 다녔지만, 정작 자신은 그런 삶을 위한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던 겁니다.” 그의 선택도 그리 영웅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우리 모두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는 요즘 그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며 부러워하는 사람에게 꼭 묻는단다. “그대는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다들 당황한다.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모르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세계여행이란다. 이 대목에서 잠깐 움찔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자문 때문이었다. 고령화의 기나긴 시간을 채워줄 ‘내가 하고 싶은 일’은 과연 무엇인가.
이 책은 ‘불안하면 숲이 안 보인다.’ ‘남에 의해 바뀌면 참 힘들다.’ ‘금지를 금지하라.’ ‘의미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등 네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글은 분야와 장르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한다. 그나 그릴 수 있는 외설적인 그림과 함께 재미나는 글을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어느새 우리가 모르고 있던 우리의 심리를 알게 되고 자신의 미래가 보이기 시작한다.
올해 8월은 참 무더웠습니다. 낮에는 ‘하늘의 불타는 해가 쇠를 녹인다’는 글귀가 실감될 만큼 폭염이 혹심했고, 밤에는 기록적인 열대야가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리우올림픽까지 열려 12시간 차이 나는 지구 반대편의 경기를 시청하느라 밤잠을 설쳐야 했습니다. 잠의 중요성을 알게 해준 계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9월, 글 읽기 좋고 잠자기 좋은 계절입니다. 원래 글과 잠은 상극인데, 이 둘을 함께 생각하게 하는 자연질서와 그 변화가 오묘합니다. 졸지 않으려고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묶고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며 글을 읽었다는 현량자고(懸梁刺股)의 고사가 있습니다. 중국 전국시대의 종횡가(縱橫家) 소진(蘇秦)은 ‘송곳으로 넓적다리를 찔러 피가 발까지 흐르도록’ 열심히 글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뭔가를 성취하려 하거나 남보다 앞서고 싶은 사람은 잠을 줄여야 합니다. 어떤 분야든 최고 수준의 실력자가 되려면 1만 시간의 연습이 필요하다는 ‘1만 시간의 법칙’에도 잠을 줄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하루 3~4시간밖에 자지 않았다거나 발명왕 에디슨은 친구와 점심을 먹으면서도 잤다는 이야기는 효율적인 잠의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경우는 남들보다 덜 자고 남들보다 더 일한 아침형 인간의 성공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핀란드에는 ‘잠꾸러기의 날’인 7월 27일, 가족 중 가장 늦게 일어나는 사람에게 물을 끼얹거나 바다나 호수에 빠뜨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17세기부터 내려오는 이 풍습은 잠과 게으름을 경계하면서 하루를 함께 시작하자는 독려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숙면(熟眠) 안면(安眠) 정면(靜眠) 쾌면(快眠)이며 게으르게 잠만 자는 타면(惰眠), 노곤해서 잠을 많이 자거나 계속 조는 기면(嗜眠), 잠이 잘 오지 않는 실면(失眠), 잠을 자지 못하는 불면(不眠)을 조심해야 합니다. 술꾼들이 헤어나지 못하는 취면(醉眠) 습관도 경계해야겠지요. 흔히 “잠이 보약”이라거나 “잠이 약보다 낫다”(Sleep is better than medicine.)고 말합니다. 건강 장수에 중요한 것 세 가지로 쾌식 쾌변과 함께 쾌면을 꼽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인 박희진(朴喜璡·1931~2015)의 ‘잠을 기리는 노래’는 5개 연으로 이루어진 제법 긴 시입니다. 마지막 연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오라 잠이여, 목숨의 자양이여, 한껏 부드러이/씨거운 살의 목마름을 풀어주곤 어둠과 함께 사라지는 감로수./너를 마셔야 피가 잘 돌아/슬픈 연인들이 얼싸안은 팔다리엔/진한 모란의 향기가 흐르고,/아기들은 자라나니 너의 품 속에서,/밤에 자라나는 식물들처럼./또 새우등의 늙은이에겐/백발을 하나 더 늘게도 하나,/미래를 점치는 슬기의 꿈을 베풀기도 하는 너,/잠이여 오라.’
잠은 휴식이면서 평화입니다.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작품 ‘잠자는 집시’(1897)에는 사막에 누워 잠든 집시여인과, 여인이 죽었는지 자는지 살피는 사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루소는 작품의 부제에 ‘아무리 사나운 육식동물이라도 지쳐 잠든 먹이를 덮치는 것은 망설인다.’고 썼습니다.
누구든지 잠자는 모습은 평화롭고 성스럽기까지 합니다.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소파 방정환은 잠자는 어린이의 얼굴에서 사랑스러운 하느님의 얼굴을 만납니다. 그의 ‘어린이 예찬’을 읽어 봅니다. “어린이가 잠을 잔다. 내 무릎 앞에 편안히 누워서 낮잠을 달게 자고 있다. (중략) 고요하다는 고요한 것을 모두 모아서, 그중 고요한 것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평화라는 평화 중에 그중 훌륭한 평화만을 골라 가진 것이 어린이의 자는 얼굴이다. (중략) 어린이의 잠자는 얼굴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고운 나비의 날개, 비단결 같은 꽃잎, 이 세상에 곱고 부드럽다는 아무것으로도 형용할 수 없이 보드랍고 고운, 이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아라.”
잠은 망각이기도 합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제2부는 해 질 무렵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잠이 든 파우스트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파우스트는 이 잠을 통해 제1부에서 저지른 잘못과 양심의 가책을 망각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으로 되살아납니다. 그 잠은 망각을 통한 치유와 갱생의 잠입니다. 괴테는 파우스트가 신생을 맞는 계기로 잠과 망각이라는 중요한 장치를 설정했습니다. 치유와 갱생을 얻지 못하고 깨어나지 못하는 영면(永眠)은 곧 죽음입니다.
미국작가 워싱턴 어빙의 단편소설 ‘립 반 윙클’은 20년 동안 잠을 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영국의 조지 3세가 통치하던 시절 사냥하러 산에 갔던 사람이 이상한 경험을 한 후 낮잠을 한숨 자고 마을에 내려와 보니 모든 것이 변해 있었습니다. 아내는 이미 죽었고, 세상은 조지 워싱턴이라는 대통령의 시대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은 제국주의 영국의 몰락을 뜻한다는데, 어쨌든 립 반 윙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크게 뒤떨어진 사람을 일컫는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글을 쓰면서 알았지만, 우리 속담에 “소대성이처럼 잠만 잔다”는 게 있습니다. 18세기 후반에 등장한 영웅소설 <소대성전(蘇大成傳)>에 자신을 알아주던 승상이 죽자 실의에 잠긴 소대성이 모든 일을 폐하고 잠만 자는 데서 파생된 말입니다. 소대성은 시련을 딛고 도술을 익혀 나라에 큰 공을 세우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인물입니다. 그의 잠은 립 반 윙클의 잠과 다릅니다. 무엇인가를 예비하면서 재능이나 명성을 드러내지 않고 참고 기다리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수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고초려를 통해 제갈량을 모신 유비가 세 번째 찾아갔을 때 제갈량은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 낮잠은 유비의 인물 됨됨이와 자신에 대한 성의를 재보기 위해 미리 계획된 행위라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어떻게 잠을 자고 무슨 꿈을 꿀 것인가. 청년에게는 청년의 왕성한 잠과 화려한 꿈이 있고 시니어들에게는 또 그들과 다른 잠과 꿈이 있습니다. 시니어들의 잠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건강과 휴식입니다. 중요한 만큼 더욱 더 잘 계획되고 정리돼야 합니다. 짧고 깊게, 혹시 길더라도 깊게 자야 합니다.
청마 유치환의 시 ‘바위’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로 시작해서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두 쪽으로 깨뜨려져도/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로 끝납니다. 불의에 항거하면서 위선 앞에서 당당하고 진리와 진실을 덮는 권력에 떳떳한 인간의 절대의지를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겸손과 절제를 강조하는 수사(修辭)로 읽고자 합니다. 유치환의 ‘바위’는 시니어들의 삶에 중요한 메시지가 아닌가 합니다. 짧고 깊게, 꿈꾸더라도 노래하지 않고 평안하게 새로운 계절 가을을 맞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임철순(任喆淳)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 이사장.
필자가 중간관리자 시절 상관이 회사 보다 교회 일에 더 열정적인 장로였다. 그러다 보니 주말에 주일에 종종 봉사활동에 직원들을 동원합니다. 물론 봉사가 좋은 일이지만 신자가 아닌 경우도 있고, 주말에 개인 사정이 있는 사람도 있는데 차마 말은 못하고 불만이 높다. 모두들 저한테 총대를 메고 상관에게 얘기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자 여러분이 필자라면 어떻게 하겠나?
상황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이처럼 총대를 메야하는 입장에 서면 가장 먼저 이 총대를 꼭 '자신이 메야 하는가'라는 갈등이 생긴다. 총대를 메야 하는 일은 조직을 위해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승패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직장인은 되도록 총대를 매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총대 메는 것을 피하기만 해서는 결코 큰 자리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빅리스크 빅리턴 이라는 말이 있듯이 위험을 감수 하는 베짱과 조직을 대변하는 용기가 있어야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쓸데없는 만용이 아니라면 경우에 따라서는 과감하게 총대를 멜 필요가 있다. 물론 아주 신중해야 한다.
그러면 총대는 어떻게 메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신으로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남들이 등을 떠민다고 해서 확신도 없으면서 상사한테 들어가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상사의 입장과 다른 이야기를 해야 되기 때문에 상사가 화를 내면서 완강하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라고 했을 때 소신이 부족해서 '저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로 나가 버리면 총대를 메고자 한 목적은 날아가 버린다.
어떤 상황에서도 확실하게 내 말로 해야 되고 이때 중요한 건 가급적 일대 일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상사들은 부하의 말이 아무리 옳아도 여럿 앞에서 자신의 권위가 무너지는 건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 보는 앞에서 굳이 총대를 메는 것은 자신의 명을 재촉하는 길이란걸 잊지 말길 바란다.
그리고 항의와 건의를 구분해야 한다. 항의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어떤 결정사항을 비판하는 것이고, 건의는 좋은 것을 실행하기 위해 제안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총대를 멜 때 상사 자체를 나쁜 사람으로 모는 것은 좋지 않다. 상사가 어떤 결정을 할 때는 본인도 나름대로 조직을 위해 그런 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건의하는 식으로 총대를 메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스 벗” 화법을 쓰는 것이다.
"저희한데 봉사활동 기회를 주시려고 하는 좋은 취지는 잘 알고있습니다. 하지만 일요일에 동원되다보니 월요일에 회사 일에 지장이 많습니다. 봉사도 중요하지만 저희들은 그 보다 회사 일을 더 잘하고 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건의 하는 것이다. 회사 일을 더 잘하겠다는데 싫어하는 상관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을 감당할 각오가 없다면 총대를 메지 말라는 거다. 조직에서 누군가 총대를 메야할 때 나머지 사람들은 "당신이 나서면 우리가 받쳐주겠다. 만일 잘못되어도 같이 죽겠다"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막상 총대를 메고 상사의 방으로 들어가면 그뿐이다. 행여나 일이 잘못 되 좌천된다거나 최악의 경우 사직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상황이 온다면 동료들은 같이 술 한잔 마셔주고 위로를 해줄 뿐이다. 함께 거사할 용기 있는 직원이 없다면 총대를 메라고 다른 사람을 떠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총대를 메고 나설 때는 일이 잘못될 경우에 혼자 책임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지 동료들이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말만 믿고 섣불리 총대를 메서는 안 된다. 우리는 조직에서 총대를 멘다는 말을 흔히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죽음을 무릎 쓰고 나가서 싸우겠다는 의미다. 잘 싸우면 영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웅은 아주 희박하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란다.
‘세월은 인생을 주름지게 하고, 포기는 영혼을 주름지게 한다.’는 맥아더 장군의 말이 가슴을 진하게 울린다. 필자는 수많은 혹평 속에서도 상영되는 영화, 나라의 역사를 좀 더 알기 위한 이 작전을 보기 위하여 영화관을 찾았다. 우리나라 아픈 역사를 바탕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 실질적인 정부가 없었던 한반도는 38선 이북, 북한군의 기습 아래 남북 전쟁이 발발한다. 불과 사흘 만에 남한의 서울은 북한군에게 함락이 되고, 한 달 만에 낙동강 지역을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이 모두 점령을 당한다.
국제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 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한반도의 허리인 인천과 서울을 점령하고, 그 기세로 강원도까지 남한에서 북한군을 몰아내기 위한 엄청난 작전을 시도한다. 일명 'OPERATION CHROMITE' 라고 한다. 이름하여 ‘인천 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더글러스 맥아더는 대한민국의 대 영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인천 상륙작전은 대략 5000:1이라는 성공 희박의 전투 앞에, 맥아더가 이끄는 국제 연합군이 인천을 통해 한반도에 상륙, 험난한 전세를 대 역전시킨 아주 기념비적인 군사 작전이다. 첫 번째로 맥아더의 지시 아래 대북 첩보 작전, 일명 X- RAY 작전에 투입되는 해군 첩보부대의 임무가 주어진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인천 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하는 작전으로, 인천으로 가는 길, 즉 서해를 뚫고 가는 기뢰를 확보하는 일이다.
영화는 X-RAY 작전에 투입되는 숨은 영웅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1950년 9월 15일 8인의 첩보원들은 장학수 대장(이정재) 주도 아래 북한군 스파이로 잠입한다. 그들은 인천의 수문을 뚫어야 하는 임무로 일촉즉발의 상황을 연출한다. 북한군은 인천 앞바다 수로 주위에 주둔하며 수많은 포대가 바다를 향해 포진하고 있다. 이 삼엄한 부대에 첩보원들은 북한군으로 위장하고 잠입하여 스파이로 활동을 시작한다.
8명의 첩보원들은 모두가 오로지 조국을 위해서 가족, 자식을 등지고 몸 바친 장병들이다. 특히 장학수 대장에게 왜 이 전투에 지원을 했느냐고 맥아더는 묻는다. 장학수는 ‘어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어서 지원했다.’라고 대답한다. 그 말에 맥아더는 감동을 받는다.
맥아더(리암 니슨)의 특명을 받고 인천으로 떠나는 장학수는 대원들에게 말한다. ‘단 한 명이 남더라도 인천의 길을 열어줄 작전을 꼭 실행하자’라고 모두에게 당부한다. 이에 맞서는 잔인 무도한 북한군 사령관 림계진(이범수), 그는 스탈린 사상과 김정일 1인 독재체재의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다. 북한의 인천 교두 보를 지키기 위해 주둔한 극악무도한 북한군 사령관이다.
장학수가 이끄는 팀이 스파이임을 알게 되며 두 사람의 싸움은 치열하게 전개되며 흥미진진하다. 림계진의 잔혹한 연기와 대위 장학수(이정재)의 멋진 순발력은 과히 탑 배우의 이름값을 한다.
끝내, 장학수는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히며 조명탄 신호를 쏘아 올려 보내고, 이것을 본 맥아더는 드디어 인천으로 향한다. 긴장과 소름이 끼치며 스릴이 넘치는 장면들이다.
보급로가 끊긴, 남한 주둔 북한군과 국제 연합군의 치열한 전쟁은 시작되고 장학수는 임무를 마치고 림계 진과 처절하게 싸우다 결국, 함께 목숨을 거둔다. 인천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끈 실질적 주역들, 8인의 숨은 영웅들의 애달픈 이야기가 이 영화의 줄거리였다. 우리나라 과거를 비추는 거울 역할의 아픈 사연들이다.
이 영화는 결코 단순한 첩보영화가 아니었다. 유엔군의 참여로 9.28수복까지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애써온 우리 영웅들의 이야기를 인간적으로 재구성한 참으로 의미 있는 대 역사극이었다. 마지막으로 승리의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장병들 속에서 장학수의 어머니가 아들을 찾는 장면이 눈시울을 적시며 감동으로 다가왔다.
X-RAY 작전으로 사라져간, 실제적 모든 부대원들에게 깊은 애도와 박수를 보내며 이 역사적 슬픈 사건을 필자는 후세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다.
‘세월은 인생을 주름지게 하고, 포기는 영혼을 주름지게 한다.’는 명언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미국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인구는 6500만 명. 이 가운데 10%가 좀 넘는 700만 명의 조부모가 손주와 함께 산다. 1992년에는 7% 정도였던 것이 경제여건 악화 등으로 함께 사는 비율이 높아졌다. 하지만 절대 다수인 90%의 조부모는 손주와 떨어져 지내고 있다. 우리나라(남한)의 거의 100배나 되는 넓은 나라이다 보니 멀리 떨어져 사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어 손주에 대한 애틋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자주 보지 못해 안타깝고 가끔 만나면 손주가 서먹해 하니 더 안타까운 것이 조부모의 마음이다. 이런 조부모들을 위해 미국의 ‘A&E 가족출판사(www.fambooks.com)’가 제시한 ‘떨어져 사는 손주와 가까워지는 기법 20가지’를 소개한다.
손주가 다음 만날 날짜를 되새길 수 있도록 선물을 한다. 약속한 다음 방문 때까지의 일수를 계산해서 그 수만큼의 초콜릿을 예쁜 통에 담아 선물하고 매일 하나씩 꺼내 먹도록 하면 효과가 있다.
손주가 아플 때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담은 상자를 보낸다. 아플 때 가지고 놀 수 있는 인형이나 게임 기구, 맛있는 죽 같은 것을 담은 선물 상자를 받은 손주는 조부모의 사랑을 새삼 느끼게 된다.
예쁜 종이를 하트 모양으로 오린 후 그 위에 손주에게 고마움을 담은 글을 쓴다. 이 종이를 봉투에 담아 우송을 하면 받아 본 손주는 조부모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보물찾기 놀이는 재미있고 친근감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다. 아들(딸)이나 며느리(사위)가 미리 약속한 곳에 보물을 숨기도록 한 후 조부모는 온라인으로 손주에게 숨긴 곳에 대한 힌트를 주는 방식이다.
뽀뽀나 키스를 의미하는 상표가 붙은 과자(또는 초콜릿)를 아들(딸)이나 며느리(사위)에게 보내 손주에게 매일 하나씩 주도록 한다. 할머니·할아버지가 그 과자를 통해 손주에게 매일 뽀뽀를 한다는 말도 전달토록 한다.
이메일(또는 편지)로 이야기 이어가기를 한다. 조부모가 먼저 이야기의 서두를 적어 보내면 손주가 이야기를 뒤이어 가는 방식으로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함께 완성해 나간다.
손주에게 ‘세계 최고의 손주’라는 문구를 새긴 트로피를 보낸다. 트로피를 보낼 때 세계 최고인 이유를 설명하는 편지를 동봉한다.
세상을 살면서 체득한 교훈을 담은 소책자를 만든다. 매주 혹은 매달 몇 가지 교훈을 적어 소책자를 완성한 후 손주에게 보낸다. 인생을 시작하는 손주에게는 의미 있는 인생 안내서가 될 수 있다.
껴안을 수 있는 봉제완구를 보낸다. 이 봉제완구를 통해 조부모가 포옹해 주는 듯한 느낌을 손주가 받도록 해 유대감을 높인다.
부드럽고 얇은 작은 종이에 편지를 써 목걸이 펜던트로도 이용할 수 있는 작고 예쁜 곽에 넣어 손주에게 보낸다. 손주는 편지를 꺼내 재미있게 읽고 그 곽을 몸에 지니면서 조부모를 생각하게 된다.
고급스럽게 포장된 과자(또는 초콜릿)에 덕담을 적은 메모를 첨부한 후 상자에 듬뿍 담아 손주에게 보낸다. 손주는 과자를 먹을 때마다 조부모의 뜻이 담긴 덕담을 읽게 된다.
손주를 만난 후 집으로 돌아오면 손주가 고맙게 한 일이나 즐거웠던 일을 소상히 적어 편지로 보낸다.
가족사를 함께 만든다. 손주가 특별히 관심을 보이는 조상이나 친척에 대한 자료를 같이 수집하고 관련된 이야기도 들려주면서 가족사 만들기에 동참하도록 유도한다.
봉사활동 하는 날을 서로 같은 날짜로 정한다. 봉사활동을 한 날 저녁에는 손주에게 전화를 하여 어떤 봉사활동을 했는지, 어떤 보람을 느꼈는지 서로 이야기 나눈다.
손주만을 위한 크로스워드 퍼즐을 만든다. 인터넷 크로스워드 퍼즐을 이용하되 함께 한 활동이나 책 읽기 등에서 힌트를 얻어 풀 수 있도록 퍼즐을 재구성한다.
이름 없는 별을 하나 고른 후 손주의 이름을 따 별 이름을 짓고 공식적으로 등록(www.starregistry.com) 한다. 그 별을 볼 때마다 서로를 생각하게 된다.
서로의 영웅을 공유한다. 먼저 조부모가 존경하는 영웅이 누구며, 왜 존경하는지 손주에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손주에게 존경하는 영웅과 그 이유를 물어보고 의견을 나눈다.
손주와 만난 후 떠나기 전에 작은 카드를 작성하여 집안 곳곳에 숨겨 둔다. 그러면 조부모가 떠나고 난 뒤에 손주가 그 카드를 찾아보면서 재미도 느끼고 추억도 되새기게 된다.
손주와 함께하고 싶은 신나는 모험을 주제로 한 공상소설을 같이 쓴다. 공상소설을 시리즈로 만들 수 있으면 더 좋다.
인터넷 게임을 함께 한다. 떨어져 있어도 인터넷을 통해 골프, 카드, 체스 등 각종 게임을 함께 할 수 있다. 손주에게 스포츠, 미술, 음악 등을 직접 가르쳐 주면 조손 관계는 더욱 돈독해진다. 스포츠나 미술, 음악 활동을 하는 조부모의 모습을 비디오에 담아 놓으면 손주가 그 비디오를 보면서 배울 수 있어 더욱 좋다.
필자는 중학교를 시험을 치고 입학하는 세대에 속한다. 지방도시에서도 알려진 중학교는 경쟁이 치열하였고, 치열한 경쟁을 통과한 학우들 간에도 출신 초등학교에 따라 서로 지지 않으려는 전쟁이 이어졌다. 필자가 들어간 중학교도 상황은 비슷했다.
중학교에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출신 초등학교가 다른 짝과 심하게 다투다가 수업이 끝나고 교단 앞에 나가 결투를 벌인 적이 있다. 결국 결투는 필자의 승리로 끝났으나 지켜보던 학우들이 초등학교 간 패로 나뉘어 갑자기 싸움을 벌일 기세였다. 이 순간 빨리 행동하지 않으면 큰 패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다. 필자는 살기 위해 초등학교 출신자들과 함께 교문을 재빨리 빠져나왔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보복이 있을지 모르니 당분간 등교와 하교 때 모두 같이 움직이자고 약속하였다.
초등학교 때 친하지 않은 친구들도 모두가 이렇게 똘똘 뭉쳐 본 적은 처음이었고 갑자기 영웅이나 된 듯 어깨가 으쓱해 졌다. 사나이가 승리하면 이런 기분으로 살아간 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3 ~4개월이 흐르고 서로의 문화 차이를 이해해 가면서 우리 중학교란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북한에는 핵무기가 있지만 남한에는 중2가 있다는 말이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다. 맞는 말 같다. 지나간 중학교 생활을 보면 철부지였지만 자기들만의 세계에 도치되어 세상에서 무엇이든 무서움을 모르고 행동하는 것 같다.
이렇게 중학교 생활을 마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달라진다.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고방식을 가지는 것이다. 공부에 지쳐 있는 그룹, 여학생과 돌아다니는 날라리 그룹, 왕자병 그룹 등으로 나누어 졌으나 중학교 시절만큼 세력 다틈은 없었고, 저마다 미래의 자기개발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개중에는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하는 학우도 있었다.
친한 친구가 어느 날 질문을 하는데 너는 사회에 나가면 술과 담배를 가까이 할 거냐고 묻는다. 다른 질문은 답이 빨리 나왔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다. 잠시 침묵과 함께 대뇌가 복잡하게 덜커덩 거리기 시작했다. 왜 이 친구가 이런 질문을 했을까? 예스, 노 둘 중 하나가 답인데 왜 이렇게 말하기가 어려운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사회생활하다 보면 필요하다면 술은 마실 수 있다. 담배는 연기가 싫고, 주머니에 두툼하게 넣고 다니는 것들이 싫어서 안 하겠지만 술은 상대의 마음을 알고자 하거나 서로의 우정을 위해서, 그리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친구 왈 친구의 우정은 술 또는 담배를 하는 순간부터 끝이라고 한다.
결국 사회생활을 하면서 필자는 담배는 피지 않지만 소량의 술은 마시게 되면서부터 친구와의 우정은 끊어져서 아직까지 연락 두절 상태이고 가끔 다른 친구를 통해서 그 친구의 생활에 대해서 듣고 있지만 너무 고지식하게 살아가는 친구가 어떨 땐 불쌍하게 여겨질 때도 있다. 그렇게 행동해서 잘 나가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우리의 미래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친구야 이글 읽으면 연락이라도 해라. 난 언제든지 반갑게 맞아줄 자세는 되어 있단다.
세종문화회관 세종 M 씨어터에서 한 특별한 무대를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원래 문화 마케팅 전문 ‘엔터엠’이라는 공연기획사에서 주최하여 세계 각국의 문화 도시를 돌아가며 문화를 소개하는 방식이다. 이번에 코앞에 닥친 브라질 리우올림픽에 대비하여 리우데자네이로 편으로 기획하여 브라질의 문화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공연의 형식은 세 명의 토크 출연진이 나와서 문화를 설명하고 주자와 가수가 나와 노래를 하는 형식이었다. 1, 2부 공히 같은 형식이다. 토크 출연진으로는 피아니스트 박현주, 아나운서 황인용, KBS 축구 해설위원 한준희씨가 나왔다. 연주는 피아노에 조윤성, 퍼커션에 파코 데 진, 보컬에 써니킴이 나왔다.
1부는 ‘리듬의 보고, 삼바에서 보사노바’라는 테마로 ‘Triste’, ‘Brazil’, ‘Maro mar’, ‘No more Blues & If you never come to me' 곡을 들려주었다.
브라질 춤인 삼바와 보사노바를 이해하려면 흑인들의 춤과 음악인 ‘캉동블레’를 알아야 한다. 1440년 경부터 노예제도가 사라진 19세기 중반까지 아프리카에서 라틴아메리카로 끌려온 노예의 숫자는 1,500만 명~3,00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라틴 아메리카란 라틴 민족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로 북쪽은 멕시코에서부터 남쪽 아르헨티나까지 중남미 모든 나라를 말한다. 스페인, 포르투갈 어를 사용한다. 브라질이 유일하게 포르투갈 어를 사용하는 나라이다.
리우데자네이로는 브라질의 유명한 도시이다. ‘1월의 강’이라는 뜻이란다. 수도는 브라질리아로 옮겼지만, 여전히 브라질을 대표하는 도시이다. 시드니, 나폴리 항과 함께 세계 3대 미항으로 꼽힌다. 코파카바나와 이파네마 해변으로 아름다운 해변으로 이름 높다. 포르투갈 어로 Rio의 R은 ‘ㄹ’이 아니라 ‘ㅎ'으로 발음되어 ’히우데자네이로‘로 발음되는데 유명한 축구 선수 'Ronaldo'를 ’호나우도‘로 발음하는 것과 같다.
노예들은 힘든 노동에 동원되면서도 아프리카의 춤과 음악을 잊지 않았다. ‘캉동블레’는 온갖 신을 불러 모으는 종교 의식이었다. 거기에 아프리카 전통의 춤과 음악이 동원된 것이다. 여기서 발전 된 것이 삼바이다. 리우의 삼바 카니발은 원래는 포르투갈 군대의 퍼레이드에서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세계적인 춤 축제로 발전했다.
브라질은 백인인구의 90%가 카톨릭 계로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는 40일간 즉 사순절 동안은 고기도 안 먹고 단식을 하기도 한다. 이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4일 동안에 실컷 먹고 놀자는 것이 카니발이다. 여기에 삼바를 도입해 삼바 카니발이 된 것이다. 삼바는 다른 음악 장르에서 사용하는 123, Quick & Slow, 등 카운트가 거의 다 동원되는 복잡한 음악이다.
그러나 노예문화에서 출발한 삼바는 ‘배꼽 춤’이라 하여 백인들 정서에는 저속하고 경박스러워 보여 경시되었다. 그래서 발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보사노바이다. ‘노바’는 ‘누에보’에서 ‘New'라는 뜻이다. 보사노바는 이파네마 해변을 사뿐사뿐 걷는 예쁜 아가씨의 발걸음을 보고 시인이자 작사자인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가 그 자리에서 시를 만들고 안토니우 카를로스 조빔이라는 사람이 물 잔을 두드리며 처음 ‘이파네마의 아가씨’라는 노래를 처음으로 보사노바로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현재 브라질의 영웅으로 불린다. 조빔은 리우데자네이로 공항 이름으로 사용될 정도로 영웅이다. 삼바 리듬에 모던재즈의 감각을 얹은 새로운 음악 장르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 노래에도 조덕배의 ‘그대 내맘에 들어오면’, 장필순의 ‘어느 새’처럼 박자 사이에 잔잔하면서도 가볍게 동동 뛰는 리듬이 특징이다.
2부에서는 삼바 축구 얘기가 주제였다. 브라질 축구가 어떻게 발전했고 지금 쇠퇴한 이유에 대해 한준희 해설위원의 토크가 있었다. 브라질은 펠레라는 걸출한 스타가 활동했을 때 공격축구가 세계적인 추세에 맞춰 실리적인 축구로 변했고 다시 공격 축구로 변모하면서 영욕을 겪는다. 5번이나 월드컵에서 우승한 나라라서 축구는 곧 종교인 나라이다. 어릴 때부터 축구를 하던 과거와 달리 브라질도 축구 외에 여러 가지로 관심이 분산되면서 축구 실력이나 인프라가 그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의 뜻과 삶이 달라도 그 인생을 행복하다 할 수 있을까? 대개는 자신의 높은 뜻을 현실이 받쳐주지 못할 때 좌절하고 자신의 불운을 탓한다. 일부는 자신의 숭고한 뜻을 위해 열악한 현실을 기꺼이 감수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들을 영웅이라 부른다. 그러나 자신의 옳은 뜻을 이루기 위해 생전에 인격적 모멸과 비난을 자초한다면 그런 삶을 우리는 무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식민지 시절을 살아낸 김용환은 모든 재산을 평생 노름판에 탕진한 파락호다. 주위 사람들의 질시를 받고 가족까지 고개를 돌리게 한 사람. 그는 매일 밤 도박으로 밤을 새웠고 잃은 날은 새벽녘 ‘새벽 몽둥이야!’를 외쳐 미리 잠복해 두었던 방망이 든 무리를 시켜 투전판을 싹쓸이하기도 했던 부도덕한 인물이었다.
그가 더욱 멸시를 받았던 것은 번듯한 가문의 종갓집 자식이라는 점이다. 바로 학봉 김성일 선생의 13대손이다. 학봉은 퇴계 이황을 승계한 영남학파의 거두였다. 가만히 있어도 명문가의 자제로서 평탄한 삶이 눈앞에 놓였는데 그는 왜 노름꾼의 삶을 살았을까? 그것이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안전하게 보내려는 방편이었음이 알려진 것은 그가 죽은 뒤다.
아무리 독립이란 높은 뜻이 있더라도 이렇게 치명적인 삶을 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처음 일본에 대해 반감을 품은 것은 어린 시절의 충격적인 경험 때문이다. 할아버지 김흥락이 죄 없이 왜경에게 무릎을 꿇는 모습을 코앞에서 본 것이다. 그것은 김흥락이 사촌인 의병대장 김희락을 숨겨준 것에 대한 대가였다. 어린 그에게 이 기억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픈 상처로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이 진창 같은 현실을 보고 그는 항일을 결심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독립운동 가담 때문에 죄 없는 가족이 해를 당하게 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결심으로 그는 가족까지도 감쪽같이 속이며 만신창이의 삶을 산 것이다. 김용환은 많은 평범한 이들이 ‘비루한 뜻’을 감추기 위해 ‘위선’의 삶을 사는 것과는 반대로 ‘위악’의 삶을 통해 고매한 뜻을 성취하려 한 것이다.
해방 이듬해 죽음의 순간에 독립군에 군자금 전달을 맡았던 친구가 진실을 밝힐 것을 권하자 이런 말을 남겼다. “선비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이런 담담한 모습은 어디에서 나오는 힘일까. 그는 뜻을 위해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현실과 뒤엉켜 싸우기보다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을 택한 것은 아닐까?
그는 뜻을 다 이루었으니 자신의 삶이 어떻게 평가되든 아무 상관이 없다는 진정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미루어 짐작건대 삶을 제물로 바쳐 광복을 얻은 그는 마지막 순간 어느 누구보다 행복하지 않았을까? 용기없어 지리멸렬한 삶을 살아가는 필자에게 ‘반영웅’ 김용환은 색다른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소녀가 어렸을 때 살던 곳은 대구시 삼덕동이었다. 그곳 삼덕동의 중앙초등학교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가 어머니,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를 와서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교동초등학교로 전학하던 그때가 소녀에게는 서울 사람의 시작이었다.
어린 시절 삼덕동 소녀의 집에는 동네에서 제일 큰 마당이 있었고 여름에는 그 마당 한가득 형형색색의 이름 모를 꽃이 피고 졌던 기억들이 어렴풋하다. 밤중에 화장실 가는 일이 큰일 중 큰일이었던 기억, 화장실에 가기 위해 누군가를 깨워서 같이 대청마루를 지나칠 때 발바닥에 닿았던 얼음장 같았던 마루 촉감의 기억도 아직 남아 있다.
또 겨울 어느 날 밤 소녀의 집에서 그리 가깝지 않다고 생각했던 성당의 뾰족지붕이 겨울밤 투명한 마루 유리창을 통해 한눈에 들어왔던 기억도 뚜렸하다. 뾰족지붕에 돌려져 있는 색등 때문에 선명한 삼각형이 된 성당 지붕은 심지어 반짝이기까지 하면서 어린 소녀의 눈에 요지경처럼 들어왔다. 소녀의 집과 성당 사이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던 시절 반짝이는 삼각형 지붕은 소녀에게는 까만 밤하늘의 디즈니월드 이상이었다. 발이 시린 줄도 모르고 오래오래 서서 바라본 반짝이던 성당 지붕 크리스마스 불빛의 황홀했던 환상도 뇌리에 깊이 박힌 추억이다. 싸인지라고 불렀던 파스텔톤 빛의 색 도화지를 두 살 위 언니를 졸라 겨우 얻어냈을 때의 기억. 아마 소녀는 죽을 때까지 이 보잘 것없는 기억들의 불씨를 마음속 깊이 살려 둘 예정이다.
소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께서 하시던 일을 서울로 옮기면서 소녀의 어머니, 아버지는 1년 이상의 원조 주말 부부를 하시다가 아버지의 인솔 하에 대식구 모두가 소녀가 4학년이 되던 해 서울로 이사 왔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하여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기를 원하신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을 소녀는 나중에야 해본다.
아버지가 서울에 가셨던 어느 여름날 삼덕동 시절. 소녀는 할머니, 고모, 어머니가 대청마루에서 대수롭지 않게 하는 지나간 얘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소녀가 우연히 들은 그 얘기는 이랬다. 엄마가 소녀의 언니를 막 뱃속에 가질 때 한국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났다. 당시 군대 사정은 잘 모르지만 소녀의 아버지는 3대 독자여서 전쟁터로 나가는데 면제를 받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1.4후퇴 이후 인민군이 부산까지 내려오면서 전황이 매우 급해졌다. 장소 불문하고 아무 준비 안 된 사람이라도 눈에 띄는 민간인 남자는 군복도 없이 삼엄한 감시하에 무조건 전쟁터로 차출됐다는 것. 그런데 그즈음 외출 중이던 소녀의 아버지도 영문을 모르는 채 그 대열에 끼게 된다.
군인도 아닌 오합지졸 민간인 행렬은 전쟁터로 향하는 첫발을 떼면서 삼덕동 집 앞을 지나가게 된다. 그곳을 지나가다 소녀의 아버지는 윗옷 호주머니에 단단히 꽂아뒀던 ‘보물 1호’ 파카 만년필을 집 담장 안으로 던져 넣었다. 담장 밑에 던져진 소녀 아버지의 만년필을 발견하고 사태를 짐작한 남은 식구들은 모두 패닉에 빠진다.
낮에 붙들려 걷기 시작한 행렬은 만 하루 이상을 걷다가 자정이 되어갈 무렵 이름 모를 곳에서 잠시 쉬게 된다. 잠시 후 곧장 전쟁터로 가서 군복도 없이 인민군의 총알받이가 되든, 잘못되면 국군에게 총살당하더라도 이 대열에서 빠져나와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 선택이 둘뿐인 찰나의 순간 수많은 생각을 했을 소녀의 아버지는 후자를 선택한다. 칠흑 같던 밤 행군을 잠시 멈춘 사이 아버지는 가족이 있는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다 다음날 밤 마침내 불빛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퉁이마다 총을 들고 보초 서고 있는 군인을 만나게 된다. 아무 결정권이 없는 처음 만난 군인은 소녀의 아버지를 미군에게 데리고 간다. 모든 각오를 하고 있던 아버지는 있는 그대로 얘기하게 된다. 당시 영어가 신통치 않았을 아버지와 미국 사람이 어떻게 대화가 통했는지 알 수 없으나 아버지는 자신의 민간인 신분과 산달이 가까운 아내 얘기를 미군에게 하였다. 아버지와 뜻이 통한 미군은 아버지를 통과 시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곳곳에서 만나게 될 보초를 통과할 수 있는 메모까지 써준다.
군인이 아니었던 아버지는 난생처음 만난 외국 군인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소녀의 가족은 건재할 수 있었으며, 소녀도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갓 여고를 졸업했던 20세 남짓 된 소녀의 고모는 어느 날 외출에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뜬금없이 붉은 완장을 두르고 집으로 들어와 식구들을 기겁시켰던 얘기도 소녀는 곁들여 듣게 된다.
생각해보면 당시 사람들은 모두 2년 전에 상영했던 영화 ‘국제극장’의 주인공인 것만 같다.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몰랐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몰랐을 시대의 사람들이 겪었던 역사의 환란.
초등학교 시절 ‘상기하자 한국전쟁'의 달을 맞아 글짓기, 포스트 그리기 시간이 돌아오면 호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듣는다. 그러나 겪어보지도 못한 소녀 가족 환란의 이야기는 소녀에게 혼자만의 비밀이 되어 시시때때로 그 비밀과 싸워야 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사회의 규칙에 조금씩 눈 떠가며 민간인이었던 아버지의 상황이 이해된 소녀는 비로소 혼자의 비밀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이제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지금 루마니아 작가 콘스탄틴 게오르규가 쓴 장편 소설 ‘25시’를 생각해낸다. 소녀는 중학생 어린 나이에 명동성당 앞 중앙극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이 영화를 보았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었을 때 읽어본 소설 ‘25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었다.
게르만도, 유대인도 아니고 아무런 이데올로기도 가지지 않은 루마니아 시골의 순박한 농부 요한 모리츠와 그의 가족이 역사 속의 희생물로 바쳐져 버린 슬픈 비극의 운명이 떠오른다. 요한 모리츠는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유대인, 연합군, 다시 미ㆍ소의 소용돌이 속에 끝없이 갇혀버린 어이없이 허무한 인생의 이야기지만 요한 모리츠, 그의 이름은 온갖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고난의 운명에 처하는 약소민족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지금 할머니가 된 그때 그 소녀는 또다시 돌아온 6월에 이제 모두 돌아가시고 안 계신 소녀의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엄마, 철없이 붉은 완장을 차고 들어와 식구를 놀래게 했던 고모, 그들이 60년도 훨씬 전에 걸어왔던 그 길과 혼자 간직했던 비밀들이 아주 오랜만에 생각이 나 아무도 몰래 그 시절 그 소녀의 해맑은 웃음을 다시 한 번 만들어 본다.
흡혈귀로 알려진 드라큘라는 실존 인물이다. 동유럽의 루마니아 중부 아르제슈주 쿠르데아르제슈 시에는 드라큘라 성으로 알려진 ‘브란(Bran) 성’이 있다. 루마니아 여행자들은 ‘브란성’을 빼놓지 않고 찾는다. 루마니아 당국에서도 이미 소설, 영화, 뮤지컬 등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드라큘라’를 이용해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드라큘라는 루마니아에서는 역사에 기록된 공인 영웅이다. 그 영웅은 어떻게 흡혈귀로 변신했을까?
동화 속에 나옴직한 멋진 고성, ‘브란 성’
여느 관광지가 그렇듯이 브란성 입구에는 드라큘라와 관련된 기념품 상점이 줄지어 있고 여행객들로 북적댄다. 매표소를 지나 조금만 걸어 올라가면 가파른 언덕 위에 서 있는 고성을 만난다. 계단 초입에 감시탑이 있고 안쪽으로 들어가서 내부를 관람하게 되어 있다. 뾰족한 성 탑과 지중해풍의 지붕 벽돌이 에워싸고 있는 멋진 성이다. 건물은 시대가 흐르면서 새로운 건축양식이 추가되어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등 다양한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실내는 좁은 계단을 따라 층별로 전시관이 이어진다. 사람들이 사는 듯 물건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드라큘라 사진 대신, 어여쁜 왕비, 공주 사진이 눈길을 잡아끈다. 쇠창살, 철도끼 등 중세시대 고문기구 등도 있지만 몸서리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박물관에 진열된 물건일 뿐이다. 드라큘라라는 선입견을 갖고 ‘으스스’할 준비를 하고 성을 방문하지만 실제로는 동화 속에 나옴직한 멋진 고성이다.
그렇다면 이 성은 실제로 드라큘라와 연관이 있을까? 브란성은 독일 기사단의 요새(1212년)로 만들어졌다. 15~16세기에는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 공국을 잇는 연결지 역할을 하면서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헝가리 왕국을 지키는 관문이 되었다. 그 무렵 드라큘라가 이 성에 잠시 머문 것(1450년대)은 사실이지만 그의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아니다.
이후 이 성은 루마니아 공국들의 통일에 기여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 드 여왕에게 헌정(1920년)되었고, 낭만적인 여름 궁전으로 바뀌었다. 여왕이 죽은 후 일레아나 공주가 성을 물려받았으나 루마니아가 공산권이 되면서 후손들은 성 소유권을 박탈(1948년) 당했다. 그 이후 브란성은 방치돼 파손됐다. 루마니아 정부가 1956년 국가 문화재로 지정, 개보수를 거침에 따라 중세역사미술박물관으로 재탄생했다. 2006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손이 성의 소유권을 되찾았다. 그 후손은 지금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는데 후손들은 흡혈귀 성이라는 좋지 않은 이미지에 기분이 나쁘다고 한다.
드라큘라 백작이 흡혈귀가 된 속사정
그렇다면 루마니아의 실존 인물이자 역사에 기록될 정도로 유명한 영웅이었던 드라큘라가 왜 흡혈귀가 되었을까? 드라큘라가 흡혈귀가 된 것은 아일랜드의 소설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 1847~1912)가 쓴 소설 때문이다. 스토커는 ‘드라큘라의 삶’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괴기소설을 썼고 크게 명성을 떨쳤다.
우리는 역사를 똑바로 들여다봐야 할 이유가 있다. 드라큘라의 일대기를 들여다보자. 드라큘라(1431~1476)의 아버지는 신성 로마 제국의 드래곤 기사단 소속인 왈라키아 공 블라드 드라큘(Vlad Dracul) 2세다. 아버지가 용의 기사단의 단원이었기에 사용된 문장(紋章)이 ‘드라큘’이다. 루마니아어인 드라쿨(Drakulić)은 용(또는 악마)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어머니는 몰다비아 공국의 공녀 크네아지아다.
드라큘라는 트란실바니아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시기쇼아라(Sighişoara)에서 태어났다. 현재 그곳에는 생가가 변형된 채로 남아 있다. 드라큘라가 태어난 시기쇼아라는 그 당시 루마니아인이 아닌 게르만족 후손인 색슨족이 장악하고 있었다. 12세기에 이곳으로 이주한 색슨족은 철옹성 같은 성벽을 쌓고 상권을 장악했다. 루마니아 현지민들은 들어가 살 수 없었지만 당시 드라큘라의 아버지는 이들과 무역 협정을 맺고 도시 내부에 살 수 있었다. 형제는 형(미르체아), 본인(블라드), 남동생(라두) 3남이었다.
드라큘라는 어릴적(11살 경) 오스만 제국에 동생(4살)과 함께 볼모로 보내졌다. 드라큘라는 오스만 제국의 황태자인 메흐메트(훗날 메흐메트 2세가 된다)와 그의 아버지 무라드 2세에게 잔혹한 일을 많이 당했다. 그는 오스만 제국을 탈출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다른 종족에 의해 암살(1447년, 드라큘라 16살 경)되었고 형은 뜨거운 인두에 눈을 잃고 생매장을 당하는 끔찍한 일을 겪었다. 드라큘라는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왈라키아 공국의 영주가 된다. 아버지 블라드 드라큘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았고 왈라키아 타르고비스테(Targoviste)를 수도로 삼는다.
포로들을 꼬챙이에 꽂아 죽여
하지만 사회는 불안정했고 영주 자리는 늘 위태로웠다. 툭하면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공작을 죽여 버리는 하극상은 끊이질 않았다. 드라큘라는 왕궁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고 나서 ‘피의 숙청’을 시작했다. 정적인 보야르(boyar, 당시 최상층의 귀족) 계급을 제거하는 게 우선이었다. 부활절 날(1457년), 그들을 왕궁으로 초대, “지난 50년간 몇 명의 군주를 모셨냐‘고 질문했지만 너무 많이 갈아치워 그들의 답변을 못하자 전부 다 죽였다. 대략 500명 정도가 말뚝에 박혀 처형되었다. 그의 처형 방법이 하도 잔혹해 체페시(Ţepeş, 가시, 또는 꼬챙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이후 그들을 다른 방법으로 이용했다. 브란성 근처 산정에 포에나리 요새를 축조할 때 보야르 계급에서 살아남은 귀족들을 인부로 이용했다. 이 포에나리 요새는 아주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이어 드라큘라는 색슨족에게 전면전을 통보한다. 이 길을 상업로로 이용하려면 자신의 지시에 따르라고 명한다. 하지만 색슨족은 자신들의 이권을 위해 블라드의 정적들을 지원했다. 드라큘라는 군대를 이끌고 색슨족의 거점도시였던 브라쇼브(Brasov)로 진격했다.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많은 포로들을 다 꼬챙이에 꽂아 죽였고 그대로 방치했다. 드라큘라가 그곳에서 식사를 해야 할 정도로 너무 많은 숫자였다.
드라큘라의 피의 장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호시탐탐 서방으로 진출을 꾀하고 있는 오스만 제국과도 전쟁을 결심한다. 오스만제국의 사절단이 왔을 때, 터번을 벗지 않자 군주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 그 자리에서 터번 쓴 머리에 못을 박아 죽였다. 1461년, 오스만과 왈라카이는 전면 전쟁에 들어갔다. 이듬해(1462년)에 2000명이 넘는 포로를 잡았다. 그 포로들 전부 코를 잘라버렸다.
그러자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3배 이상의 군대를 끌고 쳐들어 왔고 드라큘라는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전세는 몰리기 시작한다. 포에나리 성으로 숨어 들어갔으나 장기적인 전투에서는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부인은 성벽에서 떨어져 자살했고 수많은 수하 장군들을 잃었다. 드라큘라는 편자(말발굽형의 쇠붙이)를 역 방향으로 이용해 겨우 탈출한다. 하지만 오스만 군과 맞서 싸우다 술탄의 친위부대 예니체리들의 총칼에 무릎을 꿇고 목이 잘렸다. 향년 45세. 서기 1476년의 일이었다.
루마니아의 주요한 여행지들
유럽 발칸 반도에서도 동유럽 쪽에 위치한 루마니아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낯선 여행지다. 루마니아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독재를 반대하는 1989년 시민혁명을 통해 자유를 얻었다. 공산국가라는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지만 실제로 수도 부쿠레슈티(Bucureşti)는 기대 이상으로 볼거리가 많다. ‘루마니아의 작은 파리’라 칭하던 개선문, 세계에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로 알려진 국회의사당(1984년) 등 공산당 정권이 만든 유명 건축물들. 그것 말고도 도심 속에 남아 있는 옛 모습은 여행객들을 충분히 매료시킨다.
또 ‘시나이아(Sinaia)’, 브라쇼브와 시기쇼아라를 구경하는 재미를 놓치면 안 될 것이다. 시나이아는 ‘카르파티아(Carpathian)의 진주’라 불린다. 왕가의 여름 별궁인 펠레쉬(Peles, 루마니아 국보 1호), 펠리쇼르 성이 인기다.
또 시기쇼아라에는 드라큘라가 태어나 4살까지 살았던 생가가 있다. 그것 뿐 아니라 이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시계탑 등, 올드 타운은 마치 중세를 옮겨 놓은 듯하다. 이 도시의 역사지구는 199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좀더 사실적으로 알고 싶다면 다큐멘터리 를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Travel Tip!
항공편 직항은 아직 없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공항으로 이동하면 된다. 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각지를 경유해 가는 방법이 있다. 그 외에 카타르항공을 이용해 도하를 거쳐 부쿠레슈티로 갈 수 있다. 도하까지 약 10시간, 부쿠레슈티까지 약 5시간 걸린다.
현지교통 수도 부큐레슈티에서는 지하철을 이용하면 편리하다. 그 외 시외 이동은 열차, 버스 등으로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면 된다. 브란성을 가려면 부큐레슈티에서 열차를 이용해 브라쇼브로 가야 한다. 브라쇼브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12, 16번 버스를 타고 Stadionul Tineretului에서 하차 후 브란성 가는 버스(40분 소요)를 타면 된다. 시기쇼아라는 브라쇼브에서 버스나 열차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시차 한국보다 7시간 늦다
음식정보 음식이 제법 맛이 좋다. 루마니아식 족발인 치올란(Ciolan)이 있다. 그 외 옥수수를 재료로 이용한 음식, 다진 돼지고기를 포도잎으로 싼 사르말레 등이 있다. 루마니아 전통 도넛인 파파나스(Papanas)도 있다. 특히 부큐레슈티에서는 전통 깊은 건축물에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구시가지 왕궁 옆에 있는 마눅 여인숙(hanul lui manuc, 1808년)은 200년 전통을 자랑한다. 또 1879년에 오픈한 카루 쿠 베레(Caru cu Bere)는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맥주홀이다. 원래는 왕족의 만찬장소였던 이곳은 차우셰스쿠의 큰아들이 자주 파티를 열던 곳이란다. 현재도 레스토랑으로 이용하고 있으며 매우 흥미롭다.
루마니아 문화 루마니아 민속 예술, 전통음악과 춤, 목공예, 도자기 공예, 건축, 뜨개질, 자수, 보석가공 등 여러 문화유산들이 발전을 거듭하면서도 그 원형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예술뿐 아니라 과학과 학문에 있어서도 루마니아는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는다. 스포츠 중에서는 체조를 빼놓을 수 없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당시 15세의 나이로 참가해 체조 요정이라는 별명을 얻은 나디아 코마네치(Nadia Comaneci)가 아직도 유명하다. 루마니아가 체조에 강한 이유는 신 식초 성분이 많은 음식을 즐기는 그들의 식생활도 한몫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미인들이 아주 많다.
화폐정보 레이(LEI)를 쓴다. 1유로가 4.4레이 정도다. 환전할 필요 없이 ATM기를 이용하면 된다.
주류 정보 포도주(VIN), 추이카(TUICA)라는 특유의 과실 증류주가 유명한데 자두가 좋다. 포도주는 아주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품질로 이미 서구에서 크게 사랑받고 있다. 루마니아 포도주 박람회(VIN-EXPO)가 열린다. 그 외 보드카, 위스키, 럼, 다양한 맥주 등이 생산되고 있다. 포도주는 겨울철에는 데워 먹는 특징이 있다. ‘뜨거운 포도주(Vin fiert)’는 겨울 추위나 감기 등을 이기기 위한 민간요법이다.
숙박 정보 가격이 비싸지 않고 시설이 좋은 편이다. 유명한 숙박 사이트를 이용하면 된다.
시니어 포인트 수도는 걸어서 다니거나 지하철을 이용하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도시 간 이동은 시설이 열악한 편이다. 서두르지 말고, 관광도시마다 1~2일 정도 지내면서 천천히 여행을 즐기는 것이 키 포인트다. 물가가 싼 편이라서 원하는 음식과 술은 멋진 레스토랑을 골라 먹도록 하자. 싼값에 기념품을 사오는 것도 방법이다. 관광지는 생각보다 눈요기를 할 곳들이 아주 많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