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집 마당 매실나무 아래 영원히 잠들었다. 며칠 전 내가 사는 마을의 한 젊은 부인이 오밤중에 갑작스러운 지병의 악화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시도했으나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마흔다섯의 정말 꽃다운 나이었다. 가족도 가족이지만 마을 주민들은 슬픔에 빠졌다. 화장으로 장례절차를 마친 그 여인의 유골은 주민들의 생각을 넘어 살던 집안 마당의 작은 매실나무 아래 묻혔다. 남편의 지고한 아내 사랑이지 싶다. 너무 짧은 나이로 멀리 보내기에 안타까움이었는지 남편은 아내와 함께 심었던 마당 한쪽의 매실나무 아래를 아내의 안식처로 정
지금은 창의적 시대가 대세이다. 누구나 창조적인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면 성공을 기대할 수도 있다. 그것은 피나는 노력의 대가이고 사람들을 감동시켜주기도 한다. 사람들의 문화 수준이 놀라울 정도로 변화되어간다. 먹고살기 위한 의식주를 넘어 이제는 여가와 각종 기념일들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다. 없던 날들도 만들어 별별 축하 날들이 생겨났다. 젊은이들의 톡톡 튀는 생동감의 일상은 현재에 머무를 줄을 모르고 고공 행진을 한다. 필자의 작은 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가족 모임이 있었다. 결혼을 한 후 처음으로
◇학교 소개를 부탁하였다. “학생 수는 800 명 정도이며 600여 명이 독서에 참여하고 있다. 도서는 2만 5000여 권을 보유하고 있는데 매월 1만 여 권의 책이 대출되고 있다.” 서울 관악구 서울미성초등학교는 ‘학교도서관 활성화상, 독서교육대상’ 등 서울시 교육감 단체상과 개인상을 수상하였다. 도서관 활동을 매우 잘하고 있다는 주위의 평가다. ◇특별히 독서권장 방법이 있는가? “책 읽기가 즐거워야 한다. 책 일기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한 달에 몇 권에 해당하는 목표를 정하였다. 학년에 따라서 1년에 30~60권의 책
소 다케유키는 1908년에 도쿄에서 태어났다. 1920년, 소 가문의 당주인 사촌형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15세의 나이로 대마도 번주인 소 가문의 37대 당주자리와 백작 작위를 계승하게 된다. 일본의 음모 일본정부는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를 결혼시켜 일본의 화족에 편입시켜, 조선 왕족으로서의 영향력을 지워 없애려고 했다. 덕혜옹주를 조선인들의 기억에서 지워 저항의 구심점을 없애려고 일찍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이방자여사는 그녀의 회고록에서 ‘조선의 피를 무리하게 억지로 일본의 피 속으로 동화시켜 버리려하는 일본정부의 의도에 대하
필자가 어린 시절 자주 찾던 절이 있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에 있는 칠장사 절이다. 소풍을 늘 이곳으로 갔었다. 칠현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에 있다. 역사도 오래되고 제법 큰 절이다. 혜소국사와 일곱 명의 도적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일곱 명의 도적 중 한 명이 표주박으로 물을 먹으려 하자 황금표주박이 놓여 있었다. 몰래 표주박을 가져와 동료들 있는 곳으로 와서 보니 황금표주박은 온데간데 없고 일반 표주박만 남았다. 일곱 명의 도적이 차례로 가서 황금표주박을 가져와도 여전히 돌아오면 일반 표주박으로 변해 있었다. 도적들은
시원한 새벽이다. 소나기 한방에 제일 무더웠던 여름도 막을 내리고 있다. 눈 깜작할 사이에 사회은퇴생활 너덧 해가 되었다. 사회활동을 시작하면서 프로필을 제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직업기재하기가 제일 곤혹스러웠다. ‘무직’으로 통용되던 직업란에 몇 년 전부터 ‘은퇴자’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은퇴자는 현역시절 직업을 바꿨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은퇴자에게도 ‘수습단계’가 필요한 대목이다. ◇‘자기명함’이 필요할 때 서랍 속에 빼곡히 쌓여있던 남의 명함을 정리하고, 남아있는 자기명함까지 다 버리면서 사회은퇴는 시작되었다. 방
남과 북이 갈라진 대한민국에 방위 훈련이 있었다. 제402차 민방위의 날이다. 정부가 전쟁이라는 가상의 상황을 조성하여 그 위험성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지난 8월 24일, 정확하게 오후 2시 귀가 터질듯한 데시벨로 사이렌이 울렸다. 정부는 조직적인 방호 태세를 구성하여 실제적인 훈련으로 체험을 하면서 민간적인 방위 활동 연습을 실시했다. 적의 침공이나 비상상황에서도 나라의 안녕질서를 지키기 위한 일환으로,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제일 먼저 공습경보에 따른 발령으로 주민이동 및 차량 이동
'가온'은 '가운데'를 뜻하는 우리말인데, 새문안로 3길이 한글 이야기의 중심거리이기 때문에, 이 길을 ‘한글 가온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한글 가온 길에 가면, 한글학회와 주시경선생의 집터, 그리고 주시경선생과 헐버트선생의 부조가 새겨진 조형물이 설치되어있다. 또, 이야기꾼 전기수 할아버지와 각종 한글 조형물,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있다. 그리고, 이런 한글 가온길을 해설하는 한글학자 김슬옹 박사가 있다. ◇ 한글학회 한글학회는 주시경선생이 운영하던 국어강습소의 졸업생과 동지들하고 뜻을 같이하여, 우리말과 글을 연구하고
라오스는 인도차이나반도에 있는 국가 중 가장 낙후된 나라지만 자연이 가장 아름다운 나라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 표정엔 순수함이 가득하다. 역사적 유적과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라오스는 2009년 뉴욕타임즈가 꼭 가봐야할 여행지 1위로 라오스를 꼽으면서 세계인들에게 여행자의 천국으로 불리게 됐고, 우리나라는 인기 tv 프로그램 ‘꽃보다청춘’에서 라오스 여행기를 보여줌으로써 커다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요즘은 여행자들이 많아지면서 외국문물이 급속히 유입되고 관광지 개발이 활발해
우린 가끔 영화를 본다. 서둘러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집근처에 있는 영화관을 찾는다. 조조영화는 거의 반값이다. 한 사람 표값이면 둘이 볼 수있다. 영화를 보고 커피를 한 잔 하며 이리저리 쇼핑도 하고 여유를 즐긴다. 평소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여 TV 채널 돌려가며 좀 보다보면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된다. 아내와 제대로 시간을 갖기도 어려워 언젠가 약속을 했다. 한 달에 두 세 번 정도는 영화를 보고, 1년에 한 번은 멀든 가깝든 여행을 하기로... 그래서 지금도 실천중이다. 이번에 본 영화는 덕혜옹주다. ‘역사가 잊
사람이 살다 보면 별일이 다 있다. 이런저런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 마음을 괴롭힌다. 어쩌면 그것들이 삶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이제, 나이를 먹고 세월을 품어보니 더 이상 못 견딜 일도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시간이 약’이라는 명언도 있는가 보다. 한해 두 해 살다 보니, 어른들의 옛 말씀들이 하나도 틀림이 없다. 지나고 나서야 경험을 해보니 이제야 터득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아마도 사람의 마음이 나약해지기 때문인가 보다. 젊은 날의 고집스러운 생각에서 벗어나고 어느덧 세상의 이치를 실감하기도 한다.
‘KDB시니어브리지’는 KDB나눔재단의 후원으로 설립한 센터인데, 이는 민간 최초의 시니어 지원기관이다. '시니어, 재능 나누고 행복 더하기' 라는 목표를 세우고, 시니어가 그동안 쌓아온 경험과 전문성을, 지역사회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사회공헌활동을 통해서 사회참여를 함과 동시에, 남은 삶을 잘 설계하고, 교육을 해서, 시니어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설립목적이다. 필자는, 시니어가 되고 부터 ‘노인 한사람을 잃으면 도서관 하나를 잃는 것과 같다’는 말을 자주 들어 봤는데, 그것은 시니어가 쌓아온 경험과 재능,
우리 이웃에는 일흔이 지난 할머니 한 분이 아들과 함께 산다. 주변에 밭을 가지고 있다. 김장배추며 무, 파, 고추, 들깨, 상추, 시금치 등을 가꾸어 먹고 이웃에 나눠준다. 요즘엔 들깨가 초등학생 키만치 자랐고 김장할 무씨를 파종하여 꽤 긴 이랑에 싹이 터서 귀엽기조차 하다. 이른 아침 산책길을 나서면 밭에서 아침 먹거리를 위해 파를 뽑거나 오이를 따기도 하고 밭을 둘러본다. 아침 인사에 기뻐하며 화답을 빼놓지 않는다. “늙은이에게 늘 인사를 건네주는 것만으로 고맙다.” 밝게 웃는다. 내 사진 속의 등장인물이 될 때도 있다. 간혹
저출산으로 인한 문제는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코흘리개 어린 시절 다니던 초등학교가 문을 닫는다. 언제나 찾아가면 어릴 때 왁자지껄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릴 듯한데 잡초만 무성하다. 마음의 안식처를 잃은 듯 한참이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전국 시골 어디를 가봐도 이러한 폐교의 모습을 보는 건 어렵지 않다. 저출산은 생산의 동력을 잃어 경제발전에 막대한 손실을 주기도 한다. 지난 몇십 년 동안 한국의 발전을 이끌어 왔던 것도 높은 수준의 교육열과 풍부한 인적자원에 의해서였다. 1970년대까지 대학의 문은 좁고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