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재 허백련은 남농 허건과 쌍벽을 이루며 현대까지 남종화를 계승해온 인물이다. 그림으로 이미 빼어났지만 처신에도 올곧아 명쾌했다. 무엇보다 의재는 사람 앞에서 겸손했다. 경계를 두지 않았다. 그러니 따르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그가 30여 년을 기거했던 춘설헌은 언제나 찾아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이선옥 관장의 얘기는 이렇다.
“이념의 좌우도, 신분의 고하도 가리지 않았다. 이를테면 좌익 독립운동가였던 서예가 김철수 선생과도 각별한 교류를 한 분이다. 심지어 친일파에게마저 거리를 두지 않았다. 모두를 인간적으로 대했다. 이런 의재에게 사람들은 무슨 문제가 있으면 의논을 청했다. 한마디로 그는 광주의 ‘큰 어른’이었다.”
의재미술관은 사립미술관이지만 광주시가 나서서 건립을 지원했다지? 인상적인 대목이다.
“유족의 의지보다 시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개관에 이르렀다고 보면 된다. 어디에 어떻게 지을 것인가부터 시민공청회를 열어 여론을 모았다. 결국 의재의 선한 영향력이 미술관을 탄생시킨 셈이다.”
사립미술관마다 운영난을 겪는다. 의재미술관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닐 텐데?
“재정 문제, 쉽지 않다. 의재가 그림을 팔아 농업학교를 운영했듯이 유족이 선생의 작품을 팔아 미술관을 운영하는 실정이니까. 의재 선생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소했을까, 늘 그걸 생각한다.”
미술관 초입에서 차량을 통제하더라. 등산로를 한참 걸어 올라야 미술관에 닿는다. 이게 오히려 호감을 살 수도 있지만 약점일 수 있다.
“원래 차량 출입이 자유로웠지만 무등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통제하게 됐다. 그런데 통제소에서 미술관 방문 용무를 밝히면 출입이 가능하다는 걸 알리고 싶다. 한참 걸어야만 하는 미술관으로 알려진 건 사실과 다르다.”
당신이 생각하는 의재는 어떤 인물인가?
“참다운 선비 정신의 소유자이자 실천가였다. 화가이기 이전에 사람이면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한 분이니까. 세상을 보라.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의재처럼 실천에 투철했던 이가 몇이나 되겠나?”
의재의 실천력은 어디서 나왔다고 보나?
“어려서부터 심취한 동양철학의 힘이 컸다고 본다. 일찌감치 사람의 도리에 눈을 떠 선비 정신을 육화해나간 분이다. 독학으로 입문해 평생을 매진한 그림 역시 선비 정신을 기르는 데 쓰였다.”
의재의 그림 그리기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기보다 수신의 방편이었던 것 같다.
“의재를 추동한 건 두 개의 수레바퀴였다. 수기(修己)와 실천, 그 둘.”
춘설헌에서 뭉클했다. 의재의 정신이 담긴 집이라서.
“숱한 교제가 춘설헌에서 이루어졌다. 최남선, 함석헌, 루이제 린저, 게오르규 같은 이들이 춘설헌에서 의재와 마주 앉았다.”
춘설헌은 의재미술관 지척에 있다. 춘설헌에 서린 의재의 뜻과 형적. 이건 미술관에서보다 더 짙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