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취미’라는 심혜경 번역가. 그가 정의하는 공부는 밤낮으로 정진하고, 빠르게 연소시켜야 할 젊은이들의 것과는 다르다. 나이가 몇 살이든 괜찮다. 직업과 관련되지 않아도 무방하다. 결과 역시 중요하지 않다. 은퇴 후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엄두를 내지 못하거나,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오래 해보고 싶다면 그를 통해 영감을 얻어보자.
심혜경 번역가는 27년 동안 정독도서관과 남산도서관 등 서울시 공공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했다. 오십이 넘어갈 즈음 자신이 여전히 건강하고 활력 넘친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남은 긴 삶을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친구들과 그저 수다 떨거나, 아이들이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싶지는 않았다. 직장과 한국방송통신대학교를 함께 다니며 영어영문학, 중어중문학, 일본학, 프랑스언어문화학을 공부했다. 뜨개질, 수채화, 태극권, 클래식 기타 등도 배웠다. 어느덧 14년 차 번역가가 된 그는 은퇴 후 더욱 본격적으로 ‘다양한 분야를 맛보는 삶’을 실현하고 있다.
“사실은 배우다 그만둔 종목이 더 많아요. 피아노는 ‘어린이 바이엘’ 상권 중간쯤에 그만뒀어요. 클래식 기타는 ‘로망스’의 첫 번째 테마를 연주할 수 있게 되고 하산했죠. 물처럼 부드럽고 느릿느릿한 움직임에 반해 시작한 태극권은 나무토막 같은 몸으론 너무 어려웠어요. 그래도 바이올린 수업은 삐걱대는 소리를 내면서도 매회 빠지지 않았어요. 저는 ‘학구파’가 아니라 ‘학교파’거든요. 공부보다 수업을 들으러 다니는 걸 더 즐긴다는 의미예요. 그래서 속도는 좀 더뎠지만, 수업 넉 달째에는 바이올린 현 네 줄 중에서 세 줄을 정복했습니다.”
‘지속 가능한’ 외국어 공부
그에게 ‘공부’는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에 따르는 모든 행위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쉬엄쉬엄 하더라도 끝을 볼 때까지 계속한다. 지속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일로 오래 성취감을 얻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다. 외국어 공부를 시작한 것도 좋아하는 책을 읽고 싶어서였다. 평소 독서를 워낙 좋아하는 터라 읽을거리가 없으면 정신이 혼미해지는데, 한국어 책이 없으면 영어 서적이라도 읽어야 한단다. 읽고 싶은 외국 작가의 책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접해도 번역서가 나오려면 적어도 몇 달은 기다려야 하는데, 그럴 땐 결국 원서를 주문해서 읽는다.
“영어 실력이 출중하다고는 말할 수 없어요. 중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공부하고 시험 기간에 복습한 게 전부니까요. 하지만 원서를 끝까지 읽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성격이 급해서 후루룩 읽는 데다, 관심이 가지 않거나 흥미 없는 부분은 듬성듬성 건너뛰며 읽거든요.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사전을 찾지 않아요. 흐름이 끊겨 독서에 집중하기 힘들기 때문이죠. 더 다양하게, 잘 읽고 싶어 한겨레문화센터 번역가 과정을 수강했고, 우연히 에이전시 직원을 만나 번역 일을 시작했어요.”
가랑비에 옷 적시는 기분으로
그에게 ‘친구들과의 협업’은 공부를 오래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마음 맞는 사람과 근황을 이야기하며 배우는 곳에 가거나, 편한 장소에서 약속을 잡고 함께 책을 읽는다. 팀 프로젝트를 진행하듯 말이다. 어느새 친구들끼리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을 모두 ‘윤독 모임’으로 치환했다. 두께가 목침 같거나 무게는 가벼워도 내용이 버거운 원서를 여럿이 돌려가며 낭독하는 방식이다. 윤독할 때는 사전을 찾지 않는다. 꾹 참고 읽다 보면 앞뒤 맥락에 맞춰 이야기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즐거운 강제성이랄까요. 놀이 삼아 친구와 함께 배우기 시작한 일은 꾸준히 하게 됐어요. 요즘은 영어,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로 된 책 읽는 모임을 10개 가까이 하고 있어요. 영어는 어떻게든 읽을 수는 있지만 일본어는 한자 단어의 독음을, 중국어는 모르는 단어의 성조와 병음을 미리 찾아 표시해두고 모임에 나가요. 현지에서 오래 살았던 친구, 한국어가 유창한 외국인 친구 등에게 발음하는 방법을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그는 막연히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다거나, 여유가 있지만 그냥 놀고 싶지는 않은 사람들에게 취미로 외국어 공부를 권한다. 외국어 공부는 다른 일과 병행이 가능하고, 본인에게 맞춰 충분히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 무엇보다 누구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인생 중·후반기에 들어 공부한다고 하면 “그 나이에 그런 걸 배워서 어디다 쓰려고 그래?”라는 말을 듣기 일쑤인데, 외국어는 오랜 시간을 투자해도 계획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는다. 아마추어 단계에 머물러도 덜 부끄럽다는 뜻이다. 엉성한 실력일지라도 해외여행을 떠나 새로 배운 언어를 사용해보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당장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좌절하기엔 이르다. 외국어 공부는 인공위성이 궤도에 안착하는 과정과 같다. 꾸준한 시도와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음을 급히 먹으면 체하는 법. 오늘 못 배우면 다음 주에 또 배우면 된다는 느긋한 마음으로 임하는 게 좋다. 싫증 내지 않고 마음 붙일 분야를 찾았다면, 행운으로 생각하고 꾸준히 해보는 거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일주일에 한 방울씩 가랑비를 맞다 보면 시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가고, 실력은 저 먼발치에 차곡차곡 쌓이기 마련이다. 이래서 무슨 공부가 되겠냐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성의 없어 보이게 공부해도 마냥 지지부진한 결과만 나오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단다. 공부는 필요할 때,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배우다 말다, 배운 것도 아니고 안 배운 것도 아닌 듯한 시간을 지나왔을 누군가에게는 ‘당신만 그런 게 아니에요’라는 응원을 보내고 싶어요. 한편으로는 공부를 이렇게 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네요. 세상엔 탐구할 분야가 너무 많은데, 매 순간 깊이 파고들면 지쳐버리잖아요. 공부의 목적을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둔다면, 바친 시간과 노력은 빛이 바래지 않을 거예요. 그 기억과 경험이 언젠가는 도움이 되죠. 서두르거나 무리해서 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해내고 있다면 언젠간 이룰 수 있으니까요. 순간의 작은 성취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을 온전히 누려보는 건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