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 최고령 국가대표’ 임현, 은퇴 계획은 없다

기사입력 2024-01-25 10:21 기사수정 2024-01-25 10:21

죄의식 속 시작한 취미에서 태극마크까지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1950년 10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났다. 그 시절 사회는 남편 내조 잘하고 아이 잘 키우는 현모양처가 되라고 했다. 꿈은 아득히 먼 단어였다. 안온한 가정 속, 소소한 재미를 ‘마인드 스포츠’ 브리지에서 찾았다. 매일 52장의 카드를 들여다보며 가정에 충실하지 않은 것 같다는 은근한 죄의식에 시달렸다. 그렇게 4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임현(73) 씨에게 깜짝 선물이 도착했다.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다.

“선생님, 예쁘게 하고 오셔야 해요. 아셨죠?”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결단식을 앞두고 임현 씨는 대내외적인 주목을 받았다. 브리지라는 이색 종목에 출전하는 최고령 선수여서다. 최연소로 승선한 김사랑(11) 양과는 62세 차. 일생일대의 선물은 꽤나 요란했다. 종목별 경기단체 임원, 지도자, 선수단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결단식에서 고령의 도전자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하도 예쁘게 하고 오라고 하기에 의식을 하긴 했는데 그렇게까지 주목받을 줄은 몰랐어요.(웃음) 가장 어린 선수와 둘이 카메라 인터뷰를 하기도 했어요. 국제 대회가 처음은 아니었는데, 확실히 아시안게임이 다르긴 다르더라고요.”

폐막 후 2개월여. 임현 씨가 카메라 앞에 서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대회 내내 최연장자로 화제였지만 인터뷰를 고사해왔다. 그러다 긴 휴가를 앞두고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만났다. “사실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쓸 만한 게 있을지 모르겠어요. 다만 브리지가 더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하니까… 내 이야기 한번 들어주겠어요?”

공부하는 엄마, 노는 엄마

한국에서 브리지는 생소하게 여겨지지만, 해외에서는 다르다. 지적 카드 게임인 브리지는 130여 개 국가에서 4000만 명 정도가 즐기고 있다. 중국 정치 지도자 덩샤오핑, 영국 작가 서머싯 몸 등이 대표적인 애호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와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파트너를 이뤄 2007 북미 브리지 챔피언십에 출전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임현 씨도 해외 적응을 위해 브리지에 입문한 케이스다. “남편이 외국을 많이 다니는 직업이었어요. 브리지를 알고 있으면 해외 나가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길래 국제부인회에서 배웠어요. 그게 1982년이에요.”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 속 정확한 연도나 기록은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생생한 기억이 있다. 엄마의 취미를 편견 없이 바라봐 준 두 딸의 응원이다. “미국에 1984년 건너갔어요. 거기서 맞는 첫 생일에 브리지 매거진 1년 구독권을 선물로 받았어요. 딸들이 중학생 정도 됐을 거예요. 둘이 자꾸 속닥거리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내 생일에 맞춰서 첫 번째 매거진이 도착하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했다고 해요.(웃음) 그때부터 브리지 관련 책을 접하게 됐어요.”

임현 씨는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전히 재미였다. ‘선수’가 된 계기는 영국 대사 부인이 건넨 한마디였다. “브리지는 두 사람이 짝(페어)을 맞춰 다른 두 사람과 겨루는 게임이에요. 그렇게 잘하지 않았을 때인데 영국 대사 부인이 파트너를 제안하더라고요. 그렇게 나선 경기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신문에 우승 소식도 실렸어요.”

누구보다 좋아한 건 아이들이었다. 그 후로 브리지를 하고 온 날이면 “몇 등 했어요?”, “잘했어요?” 하며 종알댔다. 임현 씨는 그 관심이 즐거워 더 브리지를 파고들었다. 브리지 매거진과 관련 책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고 틈만 나면 브리지를 생각했다. 그럴수록 마음 한편에선 집안일을 더 살뜰히 돌볼 수 있는 시간을 허비하는 것 같아 불편했고, 그 모습을 두 딸이 공부하는 것으로 여겨 어쩐지 죄스러웠다. 복잡한 마음과 함께 임현 씨의 브리지 사랑은 깊어갔다.

“요즘엔 이런 말을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시절엔 대학 졸업장이 거의 결혼 자격증 같았어요. ‘내가 뭐가 되겠다’는 생각을 못 했어요. 사회 분위기가 그랬어요. 결혼하고서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충실하는 것이 내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러니 브리지 책 보는 것도 마음에 걸릴 수밖에요. 브리지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곤 했어요. ‘이렇게 시간을 많이 쓰는 게 맞나?’ 하고요. 그렇게 해왔어요.”

내조의 여왕에서 브리지 국가대표로

두 딸의 결혼 그리고 남편의 은퇴. ‘제 할 일’ 다한 임현 씨는 브리지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2008 제1회 월드 마인드 스포츠 게임, 2014 제14회 레드불 월드 브리지 시리즈 등 굵직한 국제 대회 경험도 쌓았다. 40페어 넘게 출전한 레드불 월드 브리지 시리즈에서는 전체 2위라는 성적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도 항저우 아시안게임 출전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동안 줄곧 시니어 카테고리에 출전했는데, 아시안게임은 남성부, 여성부, 혼합부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큰 기대 없이 참여한 경선에서 임현 씨는 이변을 썼다. 경선이 당초 예상보다 일찍 종료될 정도로 그 기세는 대단했다. “아시안게임 출전이 확정되고서 축제 분위기였어요. 어휴, 내가 선발될 줄 몰랐지요. ‘연령에 따른 기타 카테고리가 없으니 여성부로 한번 해보자’ 한 것뿐이에요. 경선은 2주 정도 치렀어요. 많이 해서 승률 높은 팀을 선발하자는 거였죠. 굉장히 피곤했어요. 대회보다 경선이 더 힘들었는지도 몰라요.(웃음) 성적은 아주 좋았어요. 마지막에는 ‘더 이상 할 필요 없겠다’ 할 정도로요. 남은 경기를 다 지더라도 우리 점수가 더 나은 상황을 만들었거든요.”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임현 씨는 태극기가 수놓이고 TEAM KOREA (팀 코리아)가 적힌 선수단 물품을 꺼내 보이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 최고령 국가대표에게선 한동안 소녀 같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무릎을 삐끗해 의료진을 찾았다가 선수들만 오는 곳이라고 제지받은 ‘웃픈’ 사연부터 교통경찰이 콜택시를 불러주고 요금도 슬쩍 내준 깜짝 에피소드까지, 임현 씨는 이야기보따리를 풀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웃게 한 건 젊은 국가대표 선수들의 꿈과 열정을 가까이서 목격했다는 사실이다. “아시안게임은 상상 이상이었어요. 막연히 ‘조금 큰 국제 대회겠거니’ 생각했는데 대회 치르는 동안 정말 감격한 게 많아요. 처음엔 브리지 선수단끼리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였는데, 나중엔 아주 전우가 됐어요. 시간이 더 지나니까 선수촌 안에서 만나는 한국 선수들 다 그렇게 보이더라고요. 어찌나 반갑던지요. 내가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 선수들 다 대견하고 예뻐 보여요. 그 생동감! 한 장소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젊어지는 것 같았어요. 대회도 대회지만 그 경험은 말로 표현 못 해요. 정말 좋았어요.”

두뇌 게임 하기 딱 좋은 나이

현실로 돌아온 임현 씨는 대한브리지협회에서 오프라인으로 주 1회가량 브리지를 즐기고 있다. 온라인으로는 전 세계 브리지 애호가를 더 자주 만난다. 여전히 저녁거리보다 브리지 관련 생각에 시간을 들이고 있다. 고령에도 두뇌 게임을 하고 여전히 선수로 경쟁력을 보이고 있다는 건 그 스스로도 오랜 세월 천착해온 주제. 임현 씨는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이 브리지를 즐겨야 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주민욱 프리랜서)
(주민욱 프리랜서)
“다른 두뇌 게임도 여럿 해봤는데 브리지를 단연 추천해요. 브리지는 암기력, 순발력, 사고력, 판단력, 집중력, 문제해결 능력, 유추 능력 등 요구되는 능력이 정말 다양하거든요.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나이 들어서도 브리지를 잘할 수 있는 이유인 것 같아요. 암기력과 순발력이 노화에 따라 떨어진다 해도 경험과 연륜이 쌓이면서 올라가는 능력이 있어요. 평균 점수로 보면 뒤처지지 않는 거죠. 나이 든 사람에게 정말 좋은 스포츠예요. 어린 학생들에게도 추천해요. 브리지를 통해 소통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울 수 있어요. 도전 정신도요. 브리지에는 130억 개의 경우의 수가 있어요. 룰이 있지만 언제나 룰이 정답은 아니에요. 승부를 걸어야 할 때도 있죠.”

오랜 시간 브리지와 한시도 떨어진 적 없다는 임현 씨는 당분간 휴식을 취할 예정이다. 미국에 건너가 든든한 지원군인 딸과 함께 ‘방학’을 즐기려 한다. 브리지 금단현상이 걱정되지만 잠시 머리 비우는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방학 뒤엔 다시 브리지와 함께할 생각이다. 언젠가는 최고령 선수가 아닌 성적 우수 선수로 다시 대중 앞에 서고 싶다는 꿈도 가지고 있다. 맞은편 파트너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라면 더할 나위 없다. “시간이 지나니 보이는 것 같아요. 엄마에게 열중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아이들에게도 좋았다는 것을요. 언젠가 아이들 짐을 정리하는데 신문 스크립트부터 상장까지 다 모아뒀더라고요.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것을 그때 느꼈어요. 이제 브리지를 더 즐기고 싶어요. 지금도 브리지 매거진을 보고 있는데요. 얼마 전 104세 할아버지가 나오더라고요. 그분처럼 팔팔하게 브리지를 하고 싶어요. 손자가 열아홉 살인데, 함께 페어도 하고 싶어요. 농담 아니에요. 진짜로요!”

(그래픽=브라보 마이 라이프)
(그래픽=브라보 마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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