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앞세우지 마라”

입력 2025-09-23 07:00

[손주에게 한마디] 아버지의 역할…"단계마다 틈틈이 가르치고 점검해줘야"

▲챗GPT 생성 이미지.
▲챗GPT 생성 이미지.


결혼한 그해 12월 31일에 태어난 아들이 말이 늦었다. 3~4개월 지나며 목에서 엄마·아빠가 내는 소리를 따라 하려고 노력하는 시기인 옹알이도 적기에 했다. 돌 지날 무렵엔 엄마와 아빠를 말하는 단계를 잘 거쳤는데 두 돌이 지나도 언어 발달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늦은 편이었다. ‘엄마 물’처럼 단어를 이어야 할 단계일 텐데 여전히 단어 하나에 머물렀다. 특히 발음이 분명치 않았다.

손자를 보러 온 아버지가 아이를 안고 손가락으로 입을 벌려 확인했다. 아이는 무서운 할아버지 기세에 눌려 울음을 삼켰다. 안쓰러워하는 며느리를 대신해 어머니가 나서서야 아버지는 소위 검사를 마쳤다. 저녁을 함께한 뒤 길을 나서던 아버지가 길거리에서 길게 말씀했다. “애 구강 검사를 해보니 문제없다. 아이마다 발달 속도가 다르다. 말할 기회가 적거나 대화를 자주 하지 않는 환경에서는 언어능력이 뒤처질 수 있다. 언어 자극 부족이다. 말은 잘하게 생겼다. 목소리도 좋을 테고”라면서 “애하고 시간을 많이 보내는 어미가 좀 수다스러워야 한다. 자꾸 말을 시키고 잘 들어줘야 한다”라며 처방까지 내렸다.

얼마쯤 지나 손주들을 보러 온 아버지가 “언어 지연이 있긴 했지만 아주 좋아졌다. 애썼다”라고 며느리를 칭찬했다. 기분 좋아진 내게 “인간은 자기 현시욕이 크기 때문에 아이가 앞으로 말은 잘할 거다. 말이 많아질 것 같다.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면 말을 잘하는 게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살면서 언어생활의 가장 큰 문제는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할 언어기술은 이 한마디다. 결코 말을 앞세우지 마라”라고 강조했다.

말끝에 평소처럼 인용한 고사성어가 ‘담박명지 영정치원(澹泊明志 寧靜致遠)’이다. ‘담박해야 뜻을 밝힐 수 있고, 편안하고 정숙해야 원대함을 이룬다’는 말이다. ‘담박’은 욕심이 없고 마음이 깨끗한 상태를 뜻하고, ‘영정’은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를 뜻한다. 아버지는 “마음에 선입견을 두지 않아 평온함을 유지하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라고 전제하고 “맑고 깨끗하고 안정된 마음이 있어야만 미래를 내다보고 큰일을 이루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라고 이 성어를 소개했다.

중국 청나라 황제들의 이궁인 피서산장(避暑山莊)의 정전(正殿)이 ‘담박경성전(澹泊敬誠殿)’이다. 즉 담백하고 검소하고 백성을 공경하며 통치한다는 뜻으로, 강희제가 친히 써서 걸어둔 편액 명이다.

아버지는 “선현들의 교자서(敎子書)가 전해오는 것을 보면 자식 사랑도 지극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쌓은 경험과 지식을 후대에 제대로 전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많은 문인과 관료, 심지어 황제까지도 자식에게 좋은 가르침을 전하려 정훈을 남겼다”며 “공자도 그의 아들 공리를 가르치는 데 쏟은 정성이 대단하다. 아들 교육을 정훈(庭訓)이라 하고, 과정지훈(過庭之訓)이라고도 한다. 뜰을 지날 때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순국 한 달 전에 세로로 써서 남긴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성어는 원래 ‘회남자(淮南子)’ 주술훈(主術訓)에 나온다. 이 성어가 유명해진 것은 중국 촉한(蜀漢) 승상 제갈량의 유언 같은 글 ‘계자서(戒子書)’에 인용되면서다. 제갈량은 47세에 낳은 외동아들을 두고 오장원 전장에서 234년 8월에 죽기 반년 전인 2월에 자기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들 바보의 모습을 보인다. 편지는 “첨(瞻)은 올해로 여덟 살인데 총명하고 사랑스럽습니다. 저는 이 아이가 너무 일찍 숙성하여 큰 인물이 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로 시작해 86자로 된 ‘계자서’다. 아버지는 “이 또한 어린 아들의 장래를 염려한 아버지의 애틋한 사랑과 수신(修身), 학문에 관한 생각이 담겨 있다. ‘출사표’와 더불어 제갈량의 명문으로 꼽히는 ‘계자서’는 중국의 자녀 교육서로도 널리 쓰인다”라고 일러줬다.

첨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재능도 학습도 뛰어났다. 하지만 문제는 잘난 아버지 덕분에 가슴 깊이 채움은 가득 있었지만 스스로 비움을 몰랐다. 불쑥불쑥 교만함이 대인관계에서 장애로 드러나곤 했다. 아버지 제갈량이 지어준 이름 첨(瞻)은 ‘보다, 관찰하다’라는 뜻이다. 세상을 잘 보고 잘 관찰하라는 의미에서 지었고, 자(字)는 사원(思遠)이다. 사원은 ‘멀리 생각하라’는 의미다. 촉한의 2대 황제 유선으로부터 아버지가 누렸던 모든 작위를 고스란히 이어받은 첨은 아쉽게도 교만했다고 한다.

설명을 마치면서 아버지는 “손주에게도 물려줘야 할 최고의 인성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이다. 자기주장을 앞세우지 않고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태도”라고 정의했다. “아버지가 중요하다. 말보다 본보기를 보여줘라. 그게 큰 가르침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번에 그치지 말고 아이가 성장해나가는 단계마다 틈틈이 가르치고 점검해줘야 한다는 점이다”라고 구체적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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