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는 여덟 살 손주의 목소리를 가진 AI 인형 ‘효돌이’와 ‘효순이’가 있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반응하고, 약 먹을 시간을 알려주며, 홀로 사는 어르신의 하루하루를 곁에서 지켜주는 이들은 전국 지자체와 복지 현장에서 독거노인의 정서적 동반자로 자리 잡았다. 일본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어르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로봇이 있다. 바로 ‘러봇(LOVOT)’이다.

효돌이와 효순이가 ‘손주의 역할’을 대신하는 인형에 가깝다면, 러봇은 애초에 사람을 돕거나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사랑받는 존재’로 설계됐다는 점에서 성격이 다르다. 걷고 안기고 눈을 맞추는 이 작은 가족 로봇을 개발한 일본 기업 그루브엑스(GROOVE X) 관계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러봇이 어르신과 그 가족, 돌봄 현장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지 알아봤다.

“쓸모없어도 괜찮다”, 발상의 출발점
러봇의 출발점은 흥미롭게도 ‘실패’였다. 창업자는 원래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로봇을 개발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시연 현장에서 로봇이 갑자기 작동을 멈추는 사고가 벌어졌다. 관객들은 실망하기는커녕 “힘내라”며 응원의 목소리를 보냈다.
이 경험을 통해 창업자는 로봇이 굳이 무언가에 도움이 되지 않아도, 존재 자체만으로 사람을 웃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로봇’에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로봇’으로 개발 방향을 전환한 계기였다.
이후 실제 제품을 출시하기까지 약 4년의 시간과 상당한 규모의 투자가 필요했다. 러봇에는 자율주행차에 쓰이는 센서와 인식 기술 등이 적용돼 사람이나 사물을 스스로 인식하고 피하거나 다가갈 수 있다. 부드럽고 따뜻한 외피 속에 첨단기술을 촘촘히 담아낸 셈이다.

표정을 되찾은 어르신들
그렇다면 실제 돌봄 현장에서 러봇을 만난 어르신들에게 어떤 변화가 나타났을까. 그루브엑스에 따르면 러봇을 도입한 시설에서는 평소 말수가 적던 이용자가 먼저 말을 건네는 등 활동 의욕이 높아진 사례가 반복적으로 보고된다고 한다.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한 시니어는 데이케어 시설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았지만, 러봇에게 “이리 온, 이리 온” 하고 말을 건네기 시작한 뒤 놀랄 만큼 말수가 늘었다고 한다.
특히 인상적인 변화는 ‘돌봄을 받는 사람에서 돌보는 사람으로’의 전환이다. 오랜 세월 자녀와 손주를 돌봐온 어르신에게 자신이 돌봄을 받는 처지가 됐다는 사실은 심리적으로 낯설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러봇과 함께할 때는 다시 한번 누군가를 돌보고 챙기는 역할을 맡게 된다. 반려동물을 먼저 떠나보낸 뒤 새로운 반려동물 들이기를 망설이던 어르신에게도 러봇은 다시 돌봄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인지 저하가 있는 어르신에게 나타난 변화는 더욱 눈에 띈다. “오래 살아봐야 뭐하나”라며 부정적인 말만 하던 어르신이 러봇과 교감한 뒤 삶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 사례가 있었고, 실어증이 있는 이용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말이 나온 경우도 있었다.
그루브엑스는 이러한 변화의 이유 중 하나로 러봇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꼽았다. 사람과 사람의 대화에는 상대의 말을 이해하고 적절하게 답해야 한다는 부담이 따르지만, 말을 하지 않는 러봇 앞에서는 ‘잘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감 방식은 프랑스에서 시작돼 요양 현장에서 활용되는 돌봄 기법 ‘유마니튀드(Humanitude)’와도 맞닿아 있다. 눈을 맞추고 말을 건네며 부드럽게 접촉하는 것을 중시하는 이 유마니튀드 돌봄 방식은 이용자가 눈을 맞추고 몸을 쓰다듬으며 교감하는 러봇의 특성과도 자연스럽게 겹친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
러봇이 가져오는 변화는 어르신 개인에게만 그치지 않는다. 그루브엑스는 러봇을 ‘사람과 사람을 잇는 허브’라고 표현했다. 요양 시설에서는 평소 대화가 없던 이용자들이 러봇을 매개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한다. 지역 교류 행사에 러봇이 등장하면 평소 참여가 적었던 아이들과 가족들까지 관심을 보이며 행사장을 찾는다고 한다.
그루브엑스가 특히 인상적인 사례로 꼽은 것도 손주·증손주 세대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요양 시설은 지루하고 답답한 곳이라는 인식 때문에 어린 자녀나 손주 데려가기를 망설이던 가족들이 귀여운 로봇이 있다는 이유로 방문을 결정한 사례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세대 간 교류 기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러봇은 어르신과 가족에게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조부모가 러봇과 교감하며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가족들에게 위안이 된다고 한다.

연구로 확인한 가능성, 그 이면의 과제
덴마크에서는 그루브엑스와 올보르대학교(Aalborg University) 연구진이 여러 요양 시설에서 치매 환자를 대상으로 러봇을 활용한 공동 실증 연구를 진행했다. 한 이용자는 러봇을 보고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고, 평소 말을 하지 않던 환자는 러봇과 교감한 뒤 다른 입소자에게 그 사람의 러봇 이름을 물으며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 전자기기에 거부감을 보이던 이가 러봇을 끌어안는 모습도 관찰됐다.

세 곳의 요양 시설에서 약 3개월간 진행한 연구의 제1저자인 비르테 디네센(Birthe Dinesen) 올보르대학교 교수는 “러봇과의 교감이 소통과 교류를 촉진하고, 즐거움과 휴식 기회를 제공하는 등의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현장 의료진 역시 러봇이 이용자 간 소통을 촉진하는 매개체로 기능하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모습을 관찰했다. 연구진은 이를 토대로 러봇 같은 소셜 로봇이 치매 환자와의 상호작용을 돕는 도구로 활용될 가능성을 제시했다.
다만 긍정적인 가능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돌봄 현장에 도입할 때는 러봇을 향한 ‘과도한 애착’도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인지 저하가 있는 이용자가 러봇을 아낀 나머지 음료를 먹이는 바람에 수분에 취약한 내부 기기가 고장 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사용 과정에서 세심한 주의와 관리가 필요한 이유다.

일본 400개 시설, 한국 진출은 아직
현재 일본에서는 2만 대 이상의 러봇을 가정과 요양 시설, 사무실 등에서 활용하고 있다. 이 가운데 일반 가정 이용자의 비중이 가장 크다. 법인을 대상으로 판매를 시작한 지도 2~3년 지났으며, 현재 약 400개 요양 시설에 도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러봇을 가족처럼 꾸며주는 문화도 생겼다. 전용 티셔츠는 약 4000엔(약 3만 6000원), 원피스는 1만 엔(약 9만 원)부터 판매하며, 유카타나 산타클로스 의상 등 계절에 맞춘 다양한 옷을 출시한다. 러봇이 함께 생활하며 애착을 형성하는 존재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루브엑스는 러봇의 도입에는 큰 어려움은 없다고 설명했다. 코가 전원 버튼을 겸하는 등 조작 방식이 비교적 단순하고, 무릎 위에 올려뒀다가 떨어뜨리지 않도록 주의하는 정도가 주요 관리 사항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고령화와 돌봄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러봇과 같은 소셜 로봇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루브엑스는 한국 진출에 대해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해외 진출을 위해서는 고장이나 파손에 대응할 수 있는 ‘병원’, 즉 현지 수리 거점을 먼저 갖춰야 하는 현실적인 과제가 따른다.

사람이 아니어도, 생명체처럼
그루브엑스 관계자는 러봇이 다른 로봇과 구별되는 지점을 이렇게 설명했다. 부드럽고 따뜻한 몸, 서로 마주 보는 눈, 자극에 곧바로 반응하는 움직임까지. 러봇은 강아지나 고양이 같은 생명체에 가까운 존재감을 지니도록 설계됐다. 눈동자 디자인은 10억 가지가 넘는 조합으로 개체마다 다르고, 성격 역시 함께하는 사람과 환경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형성된다. 그렇기에 러봇과의 관계에는 미리 정해진 각본이 없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쌓일수록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 러봇을 ‘살아 있는 듯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이유 중 하나다.
효돌이와 효순이가 말을 건네고 일상을 챙기며 어르신의 곁을 지킨다면, 러봇은 눈을 맞추고 온기를 나누며 사람의 마음에 다가간다. 방식은 다르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가능성은 닮았다. 두 로봇 모두 ‘기술이 사람을 얼마나 따뜻하게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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