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세대’, ‘비혼’, ‘1인 가구’ 등의 유행어는 전통적 가족 형태의 붕괴가 급속하게 진행됨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는 말조차 시대와 트렌드에 뒤처진 박제된 구호로 전락한 지 오래다. 취업난과 치솟는 집값 등으로 초래된 경제적 어려움이 고조되고 사람과의 관계 맺기를 꺼리는 ‘관태기(인간관계와 권태기의 합성어)’의 사람들이 늘면서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조차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요즘 TV 화면은 이 같은 현실과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남녀 만남을 전면에 내세운 다양한 포맷의 짝짓기 프로그램들이 쏟아지고 있다. 젊은 남녀의 만남을 내세운 채널A의 <하트시그널>, Mnet의 <내 사람친구의 연애>, E채널의 <내 딸의 남자들>부터 이혼이나 사별로 혼자된 중년의 짝 찾기를 다루는 KBS Drama의 <엄마의 소개팅>까지 남녀 만남 프로그램이 시청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이전의 남녀 만남 프로그램보다 진화된 채널A의 <하트시그널>은 폭넓은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9월 1일 막을 내린 <하트시그널>. 남녀 각각 4명의 출연자가 한 달 동안 정해진 숙소에서 동거하며 자신에게 맞는 상대를 선택한다.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 퇴근 후나 휴일에 숙소에 머물며 관심이 가거나 호감을 느끼는 상대를 찾는다. 매일 상황과 감정 변화에 따라 전개되는 밀당과 탐색전으로 달라지는 남녀 만남의 판도가 매우 흥미롭다. 여기에 윤종신, 이상민 등 판정단은 연애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출연자의 감정 변화의 원인을 분석하며 성격, 취향, 심리, 직업, 외모 등 출연자의 상황에 따른 만남을 전망한다.
Mnet의 <내 사람친구의 연애> 역시 <하트시그널>과 기본 포맷이 비슷하다. 서로 ‘남사친(남자사람 친구)’, ‘여사친(여자사람 친구)’이라고 생각하는 네 쌍의 남녀들이 일상을 공유하며 만남에 이르는 과정을 관찰 카메라로 보여준다. 또한 <내 딸의 남자들>은 최양락, 김태원 등 4명의 연예인 딸들이 남자 친구를 소개받고 만나는 과정을 보며 아버지의 입장에서 코멘트하는 포맷의 남녀 만남 프로그램이다. <엄마의 소개팅>은 황혼 로맨스 심폐소생 프로젝트를 표방한 프로그램으로 사별, 이혼 등으로 혼자된 연예인 어머니에게 데이트 상대를 찾아주는 과정을 담았다.
<하트시그널>, <내 사람친구의 연애>를 비롯한 요즘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은 취업난과 경제적 고통, 인간관계 맺기의 어려움, 가족 해체 등 사회경제적인 상황에 따른 남녀 만남 풍속도의 변화를 반영해 눈길을 끌고 있다. 결혼은 아득하고 연애조차도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서로 좋아하고 자주 연락하며 데이트는 하지만 정식으로 교제하지 않는 ‘썸’과 사랑이 아닌 우정 관계인 이성 친구를 의미하는 ‘남사친’, ‘여사친’처럼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남녀관계를 흥미롭게 드러내 인기가 높다.
<하트시그널> 같은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의 역사는 오래됐다. 남녀의 만남만큼 대중의 관심을 끄는 것은 없기에 방송사들은 오래전부터 남녀 만남 프로그램을 제작해왔다. 이들 프로그램에서는 남녀 만남의 트렌드와 문화를 엿볼 수 있고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관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연애와 결혼에서 사랑, 외모, 성격, 성적 매력, 직업, 재산, 학력, 지위 등의 영향과 비중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무엇보다 사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남녀의 만남 과정과 행태를 공적 공간인 방송으로 드러내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주고 엿보는 즐거움을 제공한다.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은 그 시대의 남녀 만남 풍속도나 트렌드를 반영하거나 선도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남녀 만남 프로그램을 방송하기 시작했을까. 남녀 만남 프로그램은 크게 일회성 이벤트로 보여주는 연예인 만남 프로그램과 일반인 남녀가 출연하는 일반인 만남 프로그램으로 나뉜다. 시청자와 대중의 관심을 이끈 것은 일반인 남녀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이다.
산업 성장기 초입에 돌입했지만, 여전히 가난한 서민이 많았고 가부장적 분위기가 엄존했고, 남녀의 공개적인 만남이 자유스럽지 않았던 1970년대에 남녀 만남 프로그램이 등장해 신선한 충격을 줬다. 바로 1977년에 방송된 MBC의 <청춘만만세>다. 코미디언 구봉서와 곽규석이 진행한 <청춘만만세>는 각각 3명의 남녀가 나와 대화를 나누며 데이트 상대를 찾는 TV 맞선 프로그램이었다. 공개적인 만남이 많지 않았던 시절의 <청춘만만세>는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며 큰 인기를 누렸다. 그 관심은 22 대 1이라는 출연자 경쟁률에서도 잘 드러났다.
고도성장과 가부장적 분위기가 감소하면서 남녀의 만남이 자유롭게 이뤄졌던 1980년대의 대표적인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은 1989년 MBC의 <청춘데이트>다. 1명의 여성과 4명의 남성이 출연해 만남 상대를 찾는 포맷이었다. <청춘데이트>는 당시 사회문제로까지 떠오른 농촌 총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촌 총각과 도시 처녀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다.
경제가 발전하고 가족 해체가 본격화하며 남녀의 만남이 매우 자유스러웠던 1990년대에는 남녀 만남을 주선하는 프로그램들이 쏟아졌다. KBS, MBC, SBS 등 지상파와 케이블 방송사들은 한두 개의 남녀 만남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지금까지 남녀 만남 프로그램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MBC의 <사랑의 스튜디오>다.
1994년부터 2001년까지 방송되며 높은 인기를 얻은 <사랑의 스튜디오>는 남녀가 각각 4명씩 출연해 게임과 대화를 하며 마음에 드는 상대를 선택하는 일명 ‘사랑의 작대기’가 일치하는 남녀 커플이 데이트를 하는 포맷의 프로그램이었다. 1990년대 대학생들의 미팅 문화를 보여준 <사랑의 스튜디오>는 7년 동안 1432쌍이 출연했고 이 중 47쌍의 커플이 탄생해 화제가 됐다.
학벌, 재산, 직업, 외모에 의한 서열화가 본격화하면서 결혼이 재산, 외모, 학벌 등 외형적 조건의 교환시장 성격을 띠기 시작한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남녀 만남 프로그램도 물화된 조건이 중시되는 풍속도를 보여줬다. KBS2의 <좋은 사람 소개시켜줘>, Mnet의 <더 아찔한 소개팅>, JTBC의 <솔로워즈> 등 진화된 형태의 다양한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들이 시청자와 만났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방송된 SBS의 <짝>은 이전과 전혀 다른 포맷의 남녀 만남 프로그램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논란도 컸다. 남녀 9~16명이 ‘애정촌’이라는 공간에서 합숙 생활을 하며 짝을 찾는 과정을 리얼리티 쇼 방식으로 보여준 <짝>은 연애와 섹스에 대한 개방적 자세, 외모, 재산, 직업 등 외형적 조건 중시 등 2000년대 남녀 만남의 현실을 반영했다. 여기에 관찰 기법, 사회자의 이야기 등 사실성과 일상성을 높이는 다양한 장치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남녀 만남의 극단적 상품화라는 논란 속에서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짝>은 한 여성 출연자가 촬영 도중 자살하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해 막을 내렸다.
이처럼 남녀 만남 프로그램은 시대와 현실, 그리고 남녀 만남의 풍속도를 반영하고 선도하며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남녀 짝짓기 프로그램은 많은 사람에게 남녀 만남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트렌드를 제공하는 등 긍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들 프로그램은 남녀 만남을 외형적 조건의 교환시장으로 전락시키거나 극단적으로 상품화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