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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티나무 은빛극단, 무대에 오르면 우리는 당당한 여배우!
- 나이가 들어도 여배우는 여배우다. 자신감 가득한 눈빛과 표정은 기본, 자기관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대사 연습은 또 얼마나 많이 했을까. 대본에 빼곡하게 적어놓은 메모를 보니 지금까지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였을지 짐작이 간다. 배우들의 평균 나이가 70대인 ‘느티나무 은빛극단’을 만났다. 설렘과 벅찬 감동. 무대는 그들에게 언제나 꿈이다. 구로구를 대표하는 시니어 극단 구로문화재단 아트벨리 지하 소강당, 매주 화요일은 정기적으로 구로 시니어 연극 동아리 ‘느티나무 은빛극단’이 모이는 날이다. 지금까지 함께 작품을 해온 세월도 11년째. 2007년 구로문화재단이 설립되고 1년 뒤 시니어 연극 동아리가 생겨난 것이 느티나무 은빛극단의 시초다. 시니어 세대를 위한 프로그램도 있으면 좋겠다는 재단의 뜻이 컸다. 마침 설립 당시 구로구민회관에서는 서울시와 서울문화재단이 주관하는 시니어 교육 프로그램 ‘꿈꾸는 청춘예술대학’이 운영되고 있었다고. 그곳에서 교육받던 시니어를 대상으로 단원을 모집해 창단 당시 20여 명으로 시작했다. 지금은 작년 입단한 신입 배우 우성연(66) 씨를 포함해 현재 13명이 정식 단원으로 활동한다. 배우들의 평균 나이가 70대라지만 시민극단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다. 2018년 제1회 영동생활시민연극제 초청 공연과 함께 성미산동네연극축제, 서울시민연극제에서 2016년과 2017년 각각 무대에 올린 ‘어미’와 ‘우당탕탕, 이사 왔어요!’로 2회 연속 시상대에 오른 바 있다. 느티나무 은빛극단이 아마추어 연극계에서 나름의 성과를 내는 데에는 구로문화재단의 뒷받침이 있다. 단원의 능력 향상을 위해 연극에 필요한 전문 강사를 초빙해주고, 연극 연습이 있는 날이면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소강당도 빌려준다. 육십 넘어 찾은 재능 느티나무 은빛극단 단원들이 자랑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출석률. 정기적인 만남은 당연하고 연극 공연을 앞두고 거의 매일 일정이 잡혀도 밤이고 낮이고 제시간에 맞춰 연습 장소에 전원이 모인다. 이유는 단 하나, 무대에 서는 것이 너무 행복하기 때문이란다. 초등학교 학예회 때 연극을 해본 경험이 있다는 신정례(73) 씨는 느티나무 은빛극단에서 연극을 하면서 우울증이 싹 나았다며 밝게 웃었다. 구로구 토박이이자 극단 최고 연장자인 안영분(81) 씨는 어릴 적 못다 이룬 꿈을 이뤘다고 했다. “구로구청 뒤가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세 자매 중 막낸데 언니들이 마차 4개를 붙여놓고 학예회를 하는 것처럼 공터에서 뭔가를 하는 거예요. 언니들이 노래를 부르면 저는 그 옆에서 엉덩이를 막 흔들고 춤을 췄습니다. 공부는 잘 못해도 남들 앞에 서서 하는 건 잘했어요. 동네 아이들한테 무용도 가르치고 나름 공연도 했고요. 중학교 때는 청춘극단 단원이었던 동네 오빠를 따라다녔어요. 당시 유명했던 영화 ‘별들의 고향’을 연극으로 만들어 지금 고려대학교 구로병원 자리에 있었던 제5보충대에서 공연도 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15세였는데 아버지가 그만두라고 해서 배우의 꿈을 포기했습니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얌전하게 지내다가 스무 살에 결혼해서 살던 그녀가 바깥 활동을 시작한 건 환갑이 넘어서였다. “처음에는 구로구민회관에서 노래를 배웠고요. 그 인연으로 연극까지 하게 됐어요. 1년에 한 작품씩은 꼭 하니까 너무 좋아요. 그래서 늙지 않나봐요.(웃음)” 창단 멤버인 이필연 씨는 구내 복지관에서 연극을 하다가 창단 소식을 듣고 입단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이곳에서 활동하며 배우로서의 재능을 새롭게 발견한 이도 있다. 2012년에 입단한 강정자(75) 씨는 지금까지 연극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생각도 못했는데 우연히 알게 되었고 용기를 냈습니다. 와서 보니까 이렇게 좋은 인연들도 만나고 행복하더라고요. 제가 참 내성적인데 몰랐던 재능을 발견했어요. 대사 외우는 게 치매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가족들도 좋아합니다.” 양양례(72) 씨도 이렇게 뒤늦은 나이에 연극을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안 해봤다고 말한다. “안영분 씨가 어느 날 같이 가자고 했어요. 한 번도 연극을 해본 경험이 없다 했더니 공부하면 다 할 수 있다 하더라고요. 그렇게 인연이 된 지가 벌써 10년입니다. 살면서 슬프고 힘든 시간도 있었는데 연극 때문에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여기 오면 마냥 즐거워요.” 서막동(78) 씨는 식당 운영을 잠시 쉬고 있을 때 느티나무 은빛극단 공연을 보러 왔다가 배우가 됐다. 벌써 11년 차 베테랑이다. “경남 하동 화개장터 쪽이 제 고향인데 연극을 한 번이라도 봤겠어요? 처음에는 떨렸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다른 복지관에서도 연극을 합니다. 가끔 연기 잘한다는 소리도 들어요.” 다양한 사연이 연극으로 모여들다 이곳에서 배운 실력을 봉사활동에 연계하는 단원도 있다. 성모병원 과 마포요양원 등에서 봉사를 해온 임절자(77) 씨다. “봉사활동한 지는 21년 됐어요. 처음 배울 때는 인형극을 했는데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더라고요. 어떤 날은 연극하듯 어르신들과 얘기해요. 우리 아이들이 그러더군요. 엄마는 정말 열정적으로 산다고요. 연극은 인생 같아요. 굴곡지고 희로애락도 있잖아요.” 젊은 시절 교편을 잡았다는 안옥희(73) 씨는 직장에 다니는 막내딸의 육아를 책임져줄 생각에 한국방송통신대학 교육학과에 편입한 것이 계기가 돼 연극을 하게 됐다. “손주 육아와 함께 공부하며 사람들을 만나다 여기까지 오게 됐네요. 그동안 극단 작품 ‘산불’과 ‘어미’에도 출연했습니다. 제가 원래 남자 전문 배우인데 요즘은 연출도 겸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느티나무 은빛극단에는 남자 배우가 없다. 주로 안옥희, 안영분 씨가 남자 역을 맡는다. 한봉애(66) 씨와 임절자 씨도 남자 역으로 무대에 선 적이 있다고. 처음에는 남자 배우도 있었지만 남자 단원의 출석률이 점점 떨어져 여배우 극단이 됐다. 극훈도 있다. “우아하고, 멋있고, 겸손하자”이다. 죽을 때까지 멋진 모습으로 무대에 설 것이라는 느티나무 은빛극단. 2월까지는 휴식시간을 갖고 3~4월 중으로 올해 무대에 올릴 작품을 고를 예정이다. 느티나무 은빛극단을 기억하시라. 한 명, 한 명 연륜에서 우러나온 귀한 열정을 조명 불빛 아래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mini interview◆ ‘여성 리더십’으로 우아하게 극단을 이끌다, 느티나무 은빛극단 대표 이정란 목소리에서 강한 힘이 느껴지는 느티나무 은빛극단의 이정란(78) 대표는 소녀 시절부터 품어왔던 꿈 이야기부터 꺼냈다. “어려서부터 무용을 했죠. 굉장히 잘했어요. 배우도 해볼까 생각해본 적 있는데 집안 반대로 못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생활을 하다 결혼을 했다. 남편은 살림하면서 아이 잘 키우는 아내를 원했다. 아이들 다 키우고 맞이한 여유로운 시니어의 삶. 부부가 함께 노후를 잘 보내는가 싶었는데 남편이 10여 년 전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우리 집 양반 돌아가시고 나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 지역 신문을 들춰보다가 인형극 학교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첫 번째 등록자였어요. 그때부터 연극하고 인연이 됐습니다.” 구로문화재단이 시니어 연극 동아리를 만들어보자며 이정란 대표에게 제안을 했다. “재단에서 시니어 극단을 만들자고 했을 때 너무 좋았어요. 제가 하고 싶어 했던 거였거든요. 여기저기 다니며 새로 생길 극단을 홍보했어요.” 느티나무 은빛극단을 알릴 수 있는 곳은 다 찾아다녔고 관심 있는 이들과 얼굴을 맞대면서 열정을 불태웠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나이 들면 다들 한 고집하잖아요. 지금까지 모르던 사람들이 연극을 통해 만났으니 무조건 감싸고 서로를 보듬자고 생각했어요. 공연 연습을 할 때 혹시 따라오지 못하는 분에게는 따로 시간을 내서 함께 공부도 하고요.” 극단을 이끌던 지난 11년 동안 지각, 결석, 조퇴를 한 번도 안 해봤다는 이정란 대표. 독하고 무섭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있다. “우리 극단 단원은 한 번 나가면 다시 못 들어와요. 나간 사람들이 다시 들어오고 싶다고 해도 냉정하게 잘랐어요. 너무한가요?(웃음)” 대본 외울 때가 제일 즐겁다는 이정란 대표. 대사를 다 외우고 난 다음에는 단원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지금은 다들 너무 잘하셔서 보람을 느껴요. 강사들도 다 딸 같은 사람들이지만 깍듯하게 대우합니다. 단원들 출석률은 칭찬받을 만큼 좋고요. 참 2011년도에 극단 이름을 공모했는데 제가 응모한 아이디어가 채택됐어요. 느티나무는 구로를 상징하고 은빛은 시니어를 의미합니다.” 이 대표는 최근 또 새로운 도전을 했다. 바로 복화술이다. “연극과 구연동화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배우는 겁니다. 나는 나이 먹어서 못한다는 소리를 안 해요. 자존심 상해서요. 우리 며느리가 그러더라고요. 내가 롤 모델이라고. 나처럼 늙고 싶대요. 항상 도전하는 정신으로요. 연기는 ‘80세까지만 하자!’ 했는데 벌써 팔십이 다 되어가네요. 대본 외울 수 있을 때까지는 무대에 설 겁니다.”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2019-02-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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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전거 타면서 얻은 인생의 진리
-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던 촌놈은 모진 고생을 감내하면서 학업을 이어갔다. 고향에서 14년을 살고 타향인 서울에서는 무려 50여 년 이상을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은 늘 정년퇴직 후의 귀향 생각으로 가득했다. 혼탁한 환경과 인심 사납고 삭막한 서울 생활을 접고 공기 맑고 인심 좋은 귀촌이나 귀향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적어도 자전거를 즐겨 타기 전까지의 일이다. 나는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하면서 서울의 구석구석을 달렸다. 특히 한강의 사계절은 정말 아름다웠다. 황혼에 물든 한강 가를 달리면서 본, 강물에 떠 있는 낙조는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이전에는 몰랐던 서울의 아름다움에 빠지면서 귀향, 귀촌 생각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기회가 되면 장거리 라이딩을 해보리라 생각하던 중 어느 날 벼르고 별러 강화도 왕복 라이딩을 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여름 소나기를 만나 다리 밑에서 하염없이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대원 중 한 사람은 타이어 펑크로 1시간 이상 자전거를 끌고 가야 했다. 그렇게 무려 17시간을 자전거를 타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오락가락하는 소나기는 일행을 더 힘들게 했다. 그리고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 나는 물먹은 솜이 되어 탄천 다리 밑을 지나다가 나무의자에서 잠시 쉬어가자 하고 누웠다. 피로 탓으로 그대로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깐이라 생각했는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더 이상 잠들면 안 되겠다 싶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눈을 떠보니, 어느덧 맑게 갠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수만 개의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서울 하늘에서도 이렇게 많은 별이 쏟아지다니… 아름다웠다. 뻐근한 몸을 일으켜 마지막 힘을 냈다. 자전거에 올라타니 사타구니 양쪽에서 불이 난 듯 화끈화끈거리며 아파왔다. 장장 17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자전거에 의지한 채, 최악의 상황을 극복한 자전거 라이딩. 초인적인 체력의 한계를 시험한 날임에 틀림없었다. 그 후 출퇴근 때에도 자전거를 이용했다. 한 시간 정도의 출퇴근 거리는 아침 운동으로 제격이었다. 자전거 도로에서 바라보는 한강은 정말 아름다웠다. 계절에 따라 꽃도 피고 새도 울고, 함박눈도 펑펑 내렸다. 그 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자전거는 내 인생의 동반자였다. 2014년 말, 정년퇴직을 한 나는 본격적으로 라이딩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동기 모임에서 활동하며 장거리 라이딩도 마다하지 않았다. 동해안 최북단 통일전망대에서 정동진까지 2박 3일간의 라이딩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코스였다. 검푸른 동해 바다를 조망하면서 시원하게 내달리던 그 시원함, 감히 뭐라고 표현할까? 그다음 해에는 큰맘 먹고 낙동강 700리 길에 도전했다. 쉽지 않은 코스였지만 모두가 인내하면서 4박 5일을 달리고 달려 부산 을숙도 종착지에 도착했을 때 동기들은 두 손을 번쩍 들고 일제히 환성을 지르며 입성했다. 정년퇴직을 가리켜 혹자는 인생 겨울이라고도 표현하지만 생각하기 나름이다.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하게 살아야 건강할 수 있다는 사실. 자전거를 타면서 실감한 진리다. 자전거 라이딩이 쉽지는 않지만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시니어가 즐길 수 있는 좋은 운동임에 틀림없다.
- 2019-01-24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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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용실 기계가 멈추면 나도 멈춥니다, 장성미용실 신삼순 씨
- 엄청난 반전 혹은 거대한 진실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수도 없이 오가던 길목이었지만 분명 미용실은 없었다. 옷가게, 카페, 떡볶이집, 구둣가게가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곳. 스마트폰이 가리키는 장소에 당도했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은 외국 나가서도 하지 않는 일을 끝내 하고 말았다. “혹시 장성미용실이…?” 길을 물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외국인 관광객 물결 속에서도 45년 한자리를 고목처럼 지키고 앉아 옛 손님을 기다리는 신삼순(64) 미용사를 만났다. 북적대는 핫 플레이스 옆 작은 미용실 사람 눈길 단번에 끄는 화려한 가게 숲 사이에 그 흔한 간판 하나 없는 미용실. 문을 열면 손님을 반기듯 석상과 화분이 놓인 좁은 복도가 펼쳐진다. 엘리스의 토끼 굴을 지나듯 그 길을 걸어 들어가면 과거로 이동한 듯 기분 묘한 미용실 안으로 인도된다. “저는 벌교 출신이에요. 간판만 없지 이름은 장성미용실입니다. 1960년대에 여기서 미용실 했던 분이 장성 분이셨어요. 제가 뭘 그렇게 쉽게 바꾸는 성격이 아니라 그 이름 그대로 썼습니다. 지금은 오실 분만 미용실에 오세요. 그러니 간판은 사실 필요가 없어요.(웃음)” 손님은 하루 한 명, 두 명 정도가 딱 적당하다고 했다. “지금도 멀리서도 손님들이 오시는데 친구들이랑 같이 오시는 분이 더러 있어요. 근데 여기가 자리도 좁고. 딱 한 사람만 하고 가면 그거로 끝이에요. 그래서 한번은 ‘댁만 오세요. 뭐 친구까지 모시고 오고 그래요’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머리카락 자르고, 파마 말고, 중화제 발라서, 파마 풀고 머리카락 감기는 전 과정을 혼자 하니 힘도 제법 든다. 파마, 커트, 고데 세 가지만 고집하는 이유다. 파마도 구불구불, 바글바글 말아주면 제대로 고객이 만족하는 파마가 된단다. 단골들만 알아서 미용실을 찾아오니 손님 맞춤 머리 스타일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가격도 꽤 저렴하다. 파마 3만 원, 고데 2만 원. 서울 중심지 파마 가격이 싸도 너무 싸다. “따님들이 다른 미용실 가자고 해서 따라가 보면 가격만 비싸다고 하세요. 나이 잡수신 분들 그냥 빠글빠글 해드리면 되거든요.(웃음) 요즘 미용사들은 그걸 잘 못하잖아요. 또 파마가 오래가는 것도 싫어하고요. 다른 미용실 다녀온 손님들은 파마한 것 같지 않다고들 말씀하세요.” 가끔은 젊은 손님이 파마를 해달라고 전화를 걸어오기도 한다. 그런데 젊은 사람은 정중히 거절한다. 머리숱도 많고 키도 크고 게다가 뭘 해달라는 요구사항이 많기도 많다. 벌교 처녀 서울 입성과 고마운 인연 어린 시절 신삼순 씨가 미용 기능사 자격증을 따게 된 데는 양복기술자였던 아버지의영향이 컸다. 앞으로는 기술 있는 사람이 대우받는 세상이라며 기술을 강조하신 덕분에 지금까지도 미용사 고수 소리 들으며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자격증은 고향에서 땄어요. 초창기 몇 달은 벌교에서 일하다가 1974년도 열아홉 됐을 때 서울로 올라왔어요. 당시 중앙동에서 먼 친척 언니가 미용실을 하고 있었어요. 거기서 한 3개월 있다가 여기 왔어요.” 직업 소개를 미용 재료상이 하던 때였다. 마침 친척 언니 미용실을 오가던 상인이 지금의 장성미용실을 소개해줬고 길고 긴 인연으로 이어졌다. “여기 와서 굉장히 좋은 분을 만난 거죠. 그때도 종업원들이 적당히 일하면 나가게 하고 그랬는데 여기 사장님은 우리들을 끝까지 책임지던 그런 분이셨습니다. 제가 언니라고 부를 정도로 막역했고요. 저희 부모님과는 19년 살았지만 그분과는 26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쉰아홉 한창 나이에 돌아가셨어요. 저에게 이 미용실을 거의 주다시피 했습니다. 굉장히 귀중한 인연이에요. 저는 늘 언니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언니가 1996년도에 돌아가시면서도 저더러 일 많이 하지 말라고, 몸 챙기며 살라고 유언하시고 떠났어요. 언니가 나를 너무 반듯하게 잘 키워줬어요. 이곳에서 줄곧 일할 수 있는 힘을 주셨고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 분, 한 분, 손님 친구 모십니다 긴 세월 같은 자리에서 스타일과 기분 한껏 살리는 머리 만지는 작업에 매진하다 보니 어느덧 60대 중반이 됐다. 손님들 또한 긴 세월 함께 길을 걸어준 고마운 동반자다. 취재 갔던 날에는 30년 단골이라는 이준자 씨가 와서 파마를 하고 있었다. 머리 모양이 마음에 쏙 들어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맡기는 일 없이 장성미용실을 찾는다. 짧은 머리카락이라 한 달에 한 번은 찾는다는 이준자 씨는 함께 밥도 먹고 절에도 같이 가는 친구 사이다. “제일 나이 어린 손님이 50대, 주로 70대, 80대, 나이 많은 분은 내일모레 90. 우리 집에서 97세, 98세 어르신도 파마를 하셨죠. 두 분 다 작년, 재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새로운 손님을 만나기보다는 지금까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손님들 머리를 마지막까지 만져드릴 수만 있으면 하는 마음이다. “여기 오시는 분들이 돈이 없어서 이곳에 오는 거 아닙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 가는 미용실에 가면 불편하잖아요.” 신삼순 씨는 파마를 할 때 맨손으로 머리카락을 로드에 마는 일이 많다. 그만큼 순하고 좋은 파마 약을 쓴다고. 매무새도 흐트러짐 없다. 단정하게 빗은 올림머리에 봉선화 꽃으로 물들인 손톱. 미장원 대표의 포스를 한껏 자랑한다. 이 모든 것이 오랫동안 손님을 맞이하는 자세이자 배려다. “하루에 한 분이 오시더라도 손님을 맞이할 때 긴장감이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된 손님이라도 말입니다. 파마를 해드릴 때는 정성이 들어가야죠. 오며 가며, 내가 여기 있으니까 지나다가 마음 편하게 들르십니다. 여기 이곳에서만 45년 세월인걸요.”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편안함을 유지하다니. 고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일 듯싶다. 우정으로 쌓여간 파마 시간 원래는 지금보다 꽤 공간이 넓은 미용실이었다. 10여 년 전 50세가 넘더니 몸에 이곳저곳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미용실을 접을 생각으로 매장을 세 줘버렸다. 일종의 정년퇴직이었다. “환갑 지나면 손을 놓아야지 했어요. 형제들도 못하게 했고요. 뭣 하러 그렇게 이 좁은 데서 일하느냐 해서 안 하려고 했더니 손님들이 자꾸 오고 또 지금 이 공간이 놀고 있으니까 주변에서 미용실을 다시 열라고 했어요. 그렇게 10년을 또 했네요.” 돈을 많이 벌 생각은 전혀 없다. 몇 안 되는 단골손님 머리를 책임지는 것이 1순위다. 겨울에는 가스비, 여름에는 에어컨 사용료만 좀 벌면 그걸로 끝이란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해야 돼. 왜냐하면 앞이 창창하니까. 50대까지는, 55세까지는 나도 열심히 했으니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는 열심히 살아야죠. 60대쯤 되면 욕심은 좀 내려놓고 그저 남한테 돈 안 빌리고 밥만 잘 먹고 살면 되잖아요.” 이 골동품상회 같은 미용실에는 지금도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는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구식 고데기에 파마 잘 나오게 도와주는 열 기계 장치, 파마 로드 등은 다른 미용실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옛것이다. 40여 년 전 물건 그대로이지만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다. “저거 고장 나면 나도 끝이여.(웃음)” 기계가 망가지면 그 무거운 것을 들고 전파상 즐비한 세운상가에 가서 고쳐오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오래된 기계를 수리해주던 기술자를 찾는 게 예전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웃으면서도 애잔함이 전해진다. “칠십이 될 때까지도 파마를 계속 말고 있을 거 같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때까지 이걸 붙들고 있겄어?(웃음) 아직 4년 남았네요. 손님도 많지 않고 그때 가봐서 생각해야지 않을까요?” 그때도 고운 모습 그대로 웃음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미용 고수 신삼순 씨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 2019-01-21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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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란수도 부산의 추억을 더듬는 길 ‘초량이바구길’
- 수도권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 날, 부산역에 도착했다. 위쪽 지방보다 상대적으로 기온이 높은 부산은 아직 초겨울 같았다. 평소대로라면 부산역 옆 돼지국밥 골목에서 국밥 한 그릇 말아먹고 여행을 시작했을 것이다. 오늘은 초량이바구길에서 시래깃국을 먹기로 했다. 구수한 시래깃국을 호호 불어가며 먹을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걷기 코스 부산역 ▶ 옛 백제병원(브라운핸즈백제) ▶ 남선창고 터 ▶ 동구 인물사 담장 (초량초등학교) ▶ 이바구정거장 ▶ 168도시락국 ▶ 168계단과 168모노레일 ▶ 전망대 ▶ 이바구놀이터와 6·25막걸리 ▶ 이바구충전소 ▶ 당산 ▶ 이바구공작소 ▶ 장기려더나눔센터 ▶ 스카이웨이전망대 ▶ 유치환의 우체통 부산의 산동네와 산복도로 한국전쟁 발발 두 달 뒤, 최후 방어선이었던 부산이 피란수도가 되었다. 전국의 피란민이 부산으로 몰려왔다. 전쟁 전 40여 만 명이었던 부산 인구는 100만 명으로 늘었다. 전체 면적의 절반이 산지인 부산은 폭증한 인구를 수용할 만한 땅이 부족했다. 피란민들은 부산항과 부산역에서 가까운 산동네로 몰려들었다. 산비탈을 깎아 판잣집을 짓고 부두 노동자로, 자갈치 시장 일꾼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은 산동네에 정착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동네가 지금의 감천문화마을, 아미동 비석마을, 영도 흰여울마을, 초량동 산복도로 마을 등이다. 부산에 산동네가 많다 보니 자연스레 산중턱을 지나는 산복도로(山腹道路)가 생겼다. 실핏줄처럼 산동네를 연결하며 부산의 상징이 되었다. 부산 동구에서 산복도로가 처음 개통된 초량동에 부산의 근대 역사를 담은 ‘초량이바구길’을 조성했다. ‘이바구’는 이야기를 뜻하는 경상도 방언이다. ‘까꼬막이 천지삐까리’ 초량이바구길 초량이바구길은 부산역에서 산복도로까지 걷는 길이다. 짧은 코스이지만, 부산말로 “까꼬막(오르막길)이 천지삐까리다(아주 많다).” 급경사 계단에는 모노레일이 있으니 앞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부산역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첫 목적지인 옛 백제병원에 도착한다. 백제병원은 1927년에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 종합병원이었다. 폐원된 이후 여러 용도로 사용되다가 현재 1층에 카페 브라운핸즈백제가 입점했다. 근대 건축물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 덕분에 인기를 끌고 있다. 1900년에 지은 부산 최초의 창고인 남선창고 터와 부산 동구의 근현대사와 인물을 소개한 초량초등학교(1937년 개교) 담장을 지나면, 이내 이바구정거장이 나타난다. 이바구정거장은 초량이바구길의 안내소로서 캐리어 보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바구정거장 옆에 있는 바람개비로 장식한 계단에서 본격적인 까꼬막 여행이 시작된다. 초량이바구길의 명물 168모노레일 바람개비계단 끝에서 분식집처럼 생긴 168도시락국 식당이 반긴다. 추억의 도시락을 주문하면, 달걀부침을 얹은 양철 도시락과 진한 멸치 육수 맛이 일품인 시래깃국을 맛볼 수 있다. 시래깃국을 들이마시다시피 하니, 주방을 지키던 할머니가 빈 국그릇을 가득 채워준다. 배불리 먹은 밥값은 단돈 5000원. 감사 인사가 절로 나온다. 168도시락국 식당을 비롯해, 이바구놀이터(영진어묵&공감카페), 6·25막걸리, 게스트하우스인 이바구충전소, 커뮤니티 센터인 이바구공작소 등에는 동구 지역 시니어가 근무한다. 168도시락국에서 조금 올라가면 경사 45˚의 168계단이 기다린다. 쳐다보기만 해도 아찔하다. 다행히도 2016년, 계단 옆에 무료 모노레일이 생겼다. 운행거리는 약 60m. 모노레일에 함께 탄 아주머니가 168계단을 가리키더니 “이 계단이 부두 노동자들이 일하러 갈 때 다녔던 지름길이라. 계단 밑에 있는 우물도 봤지요? 할매들이 이 계단으로 물 뜨러 다녔는데, 한 계단 오르고 한 번 쉬고, 고생이 말도 몬했다꼬. 모노레일이 생겨서 얼매나 좋은지 몰라요. 여름에도 시원코. 저짝 아래 함 보소. 갱치가 울매나 좋은지”라며 추억 속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바구길 최고 전망은 이곳 모노레일에서 내리면 바로 전망대로 이어진다. 비탈에 층층이 자리 잡은 초량동 주택가와 멀리로는 황령산, 해운대 마린시티, 부산항과 부산항대교, 영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모노레일 승강장 옆에 있는 이바구놀이터도 전망대만큼 훌륭한 뷰를 자랑한다. 이곳은 야경 감상에 최적화된 장소다. 통통하고 쫄깃한 부산어묵으로 끓인 어묵탕을 먹으며 야경을 감상하노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인정 넘치는 시니어 직원들이 동네 이야기를 들려주는가 하면, 음식이 식을세라 살뜰히 살피기도 한다. 이바구놀이터 맞은편 6·25막걸리에서는 막걸리와 해물파전을 맛볼 수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갈 때는 모노레일 대신 계단을 추천한다. 걸어 내려가면서 빵집, 아트숍, 카페, 갤러리, 추억의 물건을 파는 다락방장난감BOX, 김민부 전망대에 들를 수 있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로 시작하는 가곡 ‘기다리는 마음’을 작사한 이가 바로 시인 김민부다. 전망대와 마주보고 있는 이바구충전소를 지나 마을 수호신을 모신 당산 쪽으로 올라가면 산복도로와 만난다. 부산에서만 가능한 산복도로 투어 산복도로 턱밑에 자리한 이바구공작소는 방문객 안내센터 겸 주민커뮤니티센터다. 이곳에 근무하는 시니어 문화해설사에게 초량의 근현대사를 들을 수 있다. 이바구공작소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는 장기려더나눔센터도 들러볼 만하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칭송받는 장기려 박사는 가난한 환자를 돌보는 데 일생을 헌신한 의사이며, 의료보험 창시자로도 유명하다. 장기려더나눔센터에서 유치환의 우체통으로 가는 길에 산복도로를 지나다 보면, 독특한 풍경이 눈에 띈다. 도로 폭이 좁아 건물 옥상을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한쪽 차바퀴를 들어 주차하는 ‘개구리 주차’를 볼 수 있다. 산복도로 가에 위치한 유치환의 우체통은 부산에서 세상을 떠난 시인 유치환을 기리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2층 시인의 방에서 엽서를 써 3층 전망대에 설치한 우체통에 넣으면 1년 뒤에 배달된다. 다음 목적지로 가려면 유치환의 우체통 앞에서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면 된다. 주변 명소 & 맛집 초량차이나타운 1884년 초량에 청국 영사관이 설치된 뒤, 중국 상인들이 점포를 겸한 주택가를 형성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993년 중국 상해시와 부산시가 자매결연을 해 상해문을 건립하는 등 상해 거리를 조성했다. 고기만둣집인 신발원이 유명하다. 차이나타운 일부 구역에는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주둔하면서 들어선 텍사스 거리가 있다. 두 곳이 한길로 이어져 있는데,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동구 중앙대로 196번길 8. 밀면과 돼지국밥 부산에 여행 와서 밀면과 돼지국밥을 먹지 않으면 서운하다. 부산역 근처에 있는 초량밀면과 본전돼지국밥이 소문난 식당이다. 밀면은 피란 온 이북 사람들이 원조 물자로 공급된 밀가루로 냉면을 대체할 음식을 만든 것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돼지국밥도 피란민들이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돼지 뼈를 이용해 국을 끓인 것이 시초라 한다. 밀면과 돼지국밥은 싼 재료로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을 수 있게 만든 피란 음식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초량밀면 동구 중앙대로 225, 본전돼지국밥 동구 중앙대로214번길 3-8. 돼지갈비와 돼지불백거리 초량은 돼지갈비로 유명하다. 한국전쟁 직후 먼지를 뒤집어쓰고 일하는 부두 노동자들이 작업을 마친 뒤 초량시장에서 돼지갈비를 즐겨 먹었다고 한다. 1980년대에는 초량 육거리 부산고등학교 앞에 돼지불고기백반 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검정 프라이팬에 달달 볶은 매콤한 돼지불고기가 없던 입맛도 살아나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싼값에 푸짐한 한 상이 차려진다. 초량돼지갈비골목 은하갈비 동구 초량중로 86, 초량불백거리 원조불백 동구 초량로 36. 초량1941 초량1941은 초량동 산복도로 위에 자리한 우유 전문 카페다. 1941년 지어진 일본 적산가옥을 개조했다. 이색적인 분위기와 아기자기한 인테리어 소품이 눈길을 끈다. 커피와 말차우유, 홍차우유, 커피바닐라우유, 동백우유 등 다양한 병우유를 판다. 고소하고 진한 우유와 쫀쫀한 생크림 속에 과일을 콕콕 박아 만든 과일 샌드위치를 함께 먹으면 한끼 식사로도 충분하다. 동구 망양로. 여행 정보 ➊ 찾아가는 길 전철 1호선 부산역 7번 출구에서 ‘백제병원(브라운핸즈백제)’ 또는 ‘이바구길모노레일’ 방면으로 이동 ➋ 이바구자전거 시니어 도슨트(문화재 해설사)가 운전하는 전동 자전거에 타고 초량이바구길을 편하게 둘러볼 수 있다. 도슨트가 이바구길의 명소 소개와 숨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산역 분수대 옆에서 출발/ 10시, 11시, 12시, 13시, 14시, 15시 출발. 예약 070-8224-0122/요금 어른 1만 원. 초등학생 7000원(미취학 아동 무료) 우천 시 운행하지 않음 ➌ 이바구버스투어 가이드와 동행하는 이바구버스 투어 상품도 있다. 요금 어른 1만6000원, 초등학생 9000원
- 2019-01-21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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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 숙인 연밥을 보며
- 얼어버린 호수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의연하게 서 있는 연밥 하나가 시선을 끈다. 마지막 꽃잎을 떨어뜨리고 벌집 같은 얼굴을 내밀고 소곤소곤 이야기하던 연밥이다. 마른 줄기 하나에 의지한 채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사색에 잠겨 있다. 한 점 조각품이다. 카메라 뷰파인더에 들어온 연밥의 모습을 보며 일흔 살에 접어든 내 얼굴을 떠올려본다. 40세 이후에는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던가. 꽃다운 나이에는 누구나 아름답다. 꿈도 많고 청순함과 젊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둘 늘어나는 욕심에 청순함은 때묻고 팽팽하던 살결은 어느 사이 굴곡진 주름으로 변해간다. 맑았던 눈동자도 흐려지고, 작은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50대 중반쯤, 고향 ‘청학동’을 다녀오다가 만난 너무도 고운 자태의 칠순 할머니를 보고 나도 저렇게 늙어야지 다짐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그 연배의 길목에 서 있다. 이후에도 편안한 얼굴을 만나면 그 각오를 다지곤 했다. 미소 머금은 얼굴,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얼굴은 보기만 해도 평화로워진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일이면 다 보시(布施)라 할 수 있다. 불교 경전에서는 무재칠시(無財七施), 즉 재물이 없어도 누구나 보시할 수 있는 일곱 가지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친다. 밝은 미소로 상대를 대하는 것도 그중 하나로 들고 있다. 나도 그런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다. 굵은 주름살이 삶의 지혜로 보이면 좋겠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는 은신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말을 느리게 해도 은근히 힘이 실려 있는 목소리를 갖고 싶다. 젊은 날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일들에도 남모르는 사정이 있을 거라며 한 번 더 생각하는 여유를 지니고 싶다. 겨울 호수에서 본 연밥 한 송이에서도 인생의 지혜를 배우고 생각하는 날이다.
- 2019-01-1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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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보다 당신의 시선이 더 힘들어요'
- 얼마 전 장애체험을 하기 위해 강남구 율현동에 있는 성모자애복지관으로 향했다. 20여 년간 매월 한 번씩 봉사활동을 갔던 곳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부터 장애인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장애인 활동 보조인’으로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러던 중 장애체험을 흔쾌히 신청했다. 신청 예약을 하였기에 해당 사무실에 들러서 간단한 확인 절차를 마치고 장애체험에 들어갔다. ‘장애’와 ‘장애인’이라는 용어는 일상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다. 시대마다 사회마다 장애의 원인에 대한 생각과 대처 방식 등은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한때 일부에서 장애는 전생 또는 현생에서의 잘못에 대한 형벌이라는 근거 없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 탓에 장애인 또는 장애인 부모는 장애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았다. 시각장애 체험 시각장애인들이 얼마나 불편하게 일상을 살아가는지 그동안은 관심 밖이었다. 이날의 체험은 눈을 가리고 3층 교실에서 2층 교실까지 이동하는 것이었다. 일단 눈을 가리고 보니 불안하기 시작했다. 눈이 안 보이는 대신 최대한 청각을 곤두세우며 한 걸음 한 걸음 이동했다. 촉감을 이용해 계단의 방향과 높낮이를 가늠해야 하니 걸음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더듬더듬, 그렇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등에서는 진땀이 났다. 불과 1분이면 내려올 한 층의 계단을 내려왔을 때는 20분 이상이 걸렸다. 2충까지 겨우 내려왔을 때에는 물소리를 따라 걸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물소리의 방향과 크기에 따라 한 걸음씩 옮기는 동안 긴장되고 신경이 곤두섰다. 시각장애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곳이 바로 지하철역이라고 한다. 자칫 잘못하면 철로 쪽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해 눈가리개를 벗으니 신천지가 도래한 듯했다. 이렇게 편리한 세상인데, 그동안 시각 장애인들은 어둠 속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여태 그들을 무심하게 보고 넘겼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지체장애인의 휠체어 체험 다음에는 휠체어 체험에 도전했다. 수동 휠체어를 타고 경사진 곳을 오르내리는 체험이었다. 물론 나는 육체가 멀쩡하지만 이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은 지체가 부자유스러운 장애인이다. 주로 선천성 소아마비 환자나 뇌혈관 질환으로 편마비 또는 전신마비 등이 있는 이들이 이용한다. 평지에서의 휠체어 작동은 그나마 수월할지 모르지만 경사로를 오르거나 내릴 때는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았다. 장애인을 위한 경사로를 만들어 놓은 건물이나 시설들이 요즘은 많이 늘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이 잘되어있지 않았다. 무심하게 지나쳐버린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이 사회 곳곳에 있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 시절의 기억 어릴 적 고향에도 장애인이 마을마다 한두 사람씩 있었다. 그 시절에는 장애아를 둔 부모들은 자식의 장애를 숨기기에 바빴다. 학교에도 잘 보내지 않았는데, 아마 특수학교가 많지 않던 시절이라 그냥 집에서만 데리고 살았던 것 같다. 가끔 얼굴을 내미는 그 아이들을 신기하다고 따라 다니면서 놀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 아이가 앞장서서 놀려대기 시작하면 이구동성으로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놀려댔다. 무슨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장난삼아 하던 행동에 그 아이는 얼마나 놀라고 힘들었을까? 장애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장애인을 향한 비장애인들의 인식이나 시선이 다소 차별적일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장애인들은 상처를 받기 쉽다. 장애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우리가 장애인을 대할 때, 장애의 특성에 매몰되지 말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대하듯 하면 된다는 것이다. 장애체험을 통해서 더욱 그들의 삶 속으로 다가간 덕분에 그나마 장애인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장애인 활동 보조인으로 봉사하는 시간을 가져볼 계획이다.
- 2018-12-21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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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위에 쓴 편지
- 어머니와 회초리 “지워, 다시 써”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잘못이 고쳐지지 않자 등짝에 회초리가 날아든다. 아무리 새 공책이라도 같은 곳을 3~4회 지우기를 반복하면 찢어지기 마련이다. 눈물이 공책에 떨어지니 지울 수도 없었다. 타고난 미운 글씨체는 회초리도 못 고쳤다. 미운 글씨체는 나를 쫓아다니며 망신을 줬다. 평생을 살면서 어머니에게 세 번 편지를 썼다. 첫 번째 편지는 초등학교 국어시간. 작성한 편지를 편지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인 뒤 선생님에게 제출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 편지가 진짜로 집으로 올 거라고 생각지도 않았는데 배달이 되었다. 첫 번째 쓴 편지가 문제였다. 글씨체가 너무 좋지 않으니 집에서 부모님이 연습 좀 시키라는 선생님의 작은 메모지가 동봉되어온 것이다. 그 덕분에 나는 특별 훈련을 받느라 무척 고생했다. 그리고 군대에 있을 때 포대장의 지시로 쓴 편지와 이번에 눈 위에 쓴 편지가 전부다. 눈은 그리움이다 “얘야, 이북은 날씨가 매우 춥고 눈이 많이 와. 한 길도 넘게 오면 치우지도 못해.” “그럼 화장실은 어떻게 가?” “화장실하고 안채 사이에 새끼줄을 매서 많이 쌓이기 전에 줄을 돌려. 그러면 굴이 생기지.” “와! 멋있겠다. 그 굴에서 한번 놀아봤으면 좋겠다. 지붕에서 뛰어내려도 푹신해서 안 아프겠네. 엄마, 우리 언제 이북 가요?” 눈 굴을 상상하며 어머니에게 물었다. “남북통일 돼야지. 할머니께서 너희 보시면 무척 반가워하실 텐데.” 눈이 오면 어머니는 늘 우리를 앉혀놓고 떠나온 고향 이북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렇게 흰 눈 덮인 고향 땅을 몹시도 그리워하셨지만 “나는 이제 어렵다. 통일되면 내 대신 너희들이나 가봐라” 하시며 이산가족 상봉장에 못 가는 아쉬움을 표현하셨다. 오월의 어느 꽃피던 봄날, 어머니는 새색시처럼 예쁘게 화장하고 면사포 달린 새 옷 입으시고 아버지 곁으로 가셨다. 흰 잉크로 전한 소식 간밤에 눈이 내렸다. 하얀 편지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어머니 제가 편지를 안 쓰니 편지지를 보내셨군요. 어머니가 잘 보실 수 있도록 잘 가시던 장독대 위에 써놨어요. 글씨 밉다고 야단치지 마세요. 어머니 이젠 손이 떨려서 글씨를 예쁘게 못 써요. 파킨슨병이 왔어요. 그렇지만 염려 마세요. 컴퓨터가 있으니까요. 연필로 쓰는 것보다 글쓰기가 훨씬 편해요. 정말 오랜만에 어머니께 손편지를 쓰네요.” 편지를 써놓고 어머니가 읽으셨을까, 안 읽으셨을까 궁금해서 장독대가 있는 옥상으로 올라가 봤다. 보아하니 어머니는 내 편지를 읽으신 것 같다. 편지가 군데군데 눈물에 젖어 있었다. 밤새 읽으시면서 우셨을까. 어머니 눈물은 밤새 얼어 고드름이 되었고 지금 녹아서 또다시 편지지를 적신다. “어머니! 할 이야기가 너무 많지만 하고 싶은 말 다 할 수가 없어서 ‘엄마, 사랑해!’라고만 썼어요. 얼마 안 있으면 나도 엄마 곁으로 갈 것 같아. 그날이 언제인지 몰라도 살다 보면 오겠지. 이다음에 만나면 못 다 쓴 이야기 말로 다 할게. 편지는 그대로 놔둘게. 오늘 밤에도 와서 또 읽어. 녹아서 없어지기 전에 많이 읽어.” 편지지를 녹일까봐 한낮의 햇볕이 원망스러웠다. “엄마, 제가 유치원 다닐 때 가르쳐주신 노래 불러볼 테니 들어보세요.” 나는 장독대 옆에서 노래를 불렀다. 고무신 신고 아장 아장 느린 거북이 기어가듯이 나도 엄마를 따라갈 테야
- 2018-12-10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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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선수 공익에이전트 이창명 씨 “인생의 마지막 승부, 프로선수 에이전트에 걸었죠”
- 늘 그랬던 일과였다. 저녁 종합뉴스가 끝나고 10분 남짓한 짧은 시간. 그날의 경기들을 정리해주는 스포츠 뉴스. 수십 년간 그랬듯이 그날도 놓치지 않고 TV 앞에 있었다. 무심코 바라보던 화면에서 머릿속을 번쩍이게 한 소식이 한 줄 지나갔다. 그는 그때 “인생의 마지막 승부를 걸어보자”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푸른 잔디 위 다이아몬드에서 땀흘리는 선수들과 함께하는 일. 어쩌면 평생 기다려왔던 일인지도 모르겠다. 바로 국내 1세대 프로선수 공익에이전트 이창명(李昌明·55) 씨의 이야기다. “프로야구가 없던 시절, 군산상고, 선린상고 같은 야구 명문 고교들이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부터 야구에 푹 빠져 있었죠. 낮 경기가 있는 날이면 수업 중에도 리시버(이어폰)를 한쪽 귀에 꽂고 라디오 중계방송을 들을 정도였으니까요. 고향과 모교가 경기가 열리던 서울 동대문운동장이나 부산 구덕야구장과는 멀어서 저의 유일한 낙은 중계방송을 듣는 것뿐이었죠.” 그렇게 야구에 빠져 있던 까까머리 소년. 하지만 야구와 관련한 일은 할 수 없었다. 운동도 곧잘 했고, 하고 싶은 열망은 컸지만 당장 먹고사는 일이 먼저였다. 다른 아이들처럼 대학에 진학하고 평범한 회사원이 되는 길을 걸었다. 그가 LG금속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야구와의 인연은 멀어지는 듯했다. 그래도 그는 야구를 향한 시선을 놓치 않았다. 마음은 늘 그라운드에 있었다. “야구 중계는 가능한 한 놓치지 않고 봤어요. TV와 라디오 속 야구에 푹 빠져 살았죠. 생활이 바쁜 탓도 있었지만 리플레이를 통해 자세히 볼 수 있는 중계가 더 좋았어요. 신문도 3대 스포츠 신문으로 꼽히는 매체의 모든 기사를 봐야 직성이 풀렸죠.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관련 기록이나 경기장 소식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신문에만 의존했던 시절도 있었으니까요.” 다시 시작된 야구와의 인연 시즌의 모든 경기를 이길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인생에도 고비는 있었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그렇듯 새 직장을 구해야 하는 상황은 위기가 된다. 마지막 직장을 그만두고 그는 다른 퇴직자들처럼 자영업을 꿈꿨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았고, 취직을 하기도, 창업을 하기도 마땅치 않았다. “그러다 스포츠 뉴스를 보는데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의 공인선수대리인을 최초로 모집한다는 기사가 떴어요. 이거다 싶었죠. 야구에 대한 상식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을 자신도 있었고, 늘 동경했던 그라운드 주변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더라고요.” 공인선수대리인은 말 그대로 선수에게 필요한 여러 일들을 공인된 자격을 갖춰 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연봉계약이나 이적협상 등 주요 계약뿐만 아니라 훈련이나 출전 등 구단 내 생활까지 도움을 주기도 한다. 또 미디어 노출이나 광고계약 등 경기 외 활동에 대한 관리도 맡는다. “늦깎이 공부가 쉽지 않았죠. KBO의 규약과 리그 규정 등을 달달 외어야 했고, 민법과 도핑 관련 규정까지 숙지해야 했으니까요. 왜 나이 들어 하는 공부를 물 위에 글씨를 쓰는 것에 비유하는지 알겠더라고요.” 자신이 어려울 때 노사발전재단 서울 서부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가 도움이 됐다고 이 씨는 덧붙인다. 이전 직장에 취직이 될 때도, 어엿한 에이전트로 거듭나는 과정에서도 자기소개서나 명함을 준비하는 소소한 일까지 컨설턴트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저연봉 프로선수 위한 대리인 되고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바로 한국프로스포츠협회 공익에이전트 자격 획득에 도전한 것. KBO 공인선수대리인과 한국프로스포츠협회의 공익에이전트 관계를 쉽게 설명하면 국선 변호사를 떠올리면 된다. KBO의 공인선수대리인 자격이 ‘변호사 자격’과 유사하게 선수 대리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식적인 자격 증명이라면, 한국프로스포츠협회의 공익에이전트는 변호사 비용을 부담할 수 없는 이들이 선임하는 ‘국선 변호사’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 에이전트 선임 비용이 부담스러운 저연봉 프로선수를 대리하면, 그 수임료는 한국프로스포츠협회에서 부담한다. 비용은 계약을 직접 대리했을 때와 컨설팅만 제공하는 경우에 따라 차등을 둔다. 연봉 5000만 원 미만의 선수가 대상이다. 최근 선발된 공익에이전트는 총 10명. 이 중 KBO의 공인선수대리인 자격을 보유한 이는 이 씨를 포함해 5명에 불과하다. 이제 제도가 시작되는 시점이어서 이들은 이번 겨울 선수 확보에 나서게 된다. “문제는 선수 출신이 아니다 보니 선수를 만날 기회가 적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사회생활 경험이 많은 시니어라는 게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해요. 회사에서 바이어를 만나거나, 하청 업체와의 관계도 겪어봤고, 직원들 연봉계약도 해봤으니까요. 협상능력만큼은 오히려 낫다고 생각해요.” 올겨울 그는 누구보다도 바쁜 스토브리그를 치를 것 같다. 뜨거운 동계훈련을 겪을 선수 중 그의 도움이 필요한 인연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어린 선수들은 아무래도 에이전트 선임에 부담이 있을 수 있죠. 구단 눈치를 보는 입장에서 누군가를 내세운다면 자칫 미운털이 박힐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에이전트의 역할은 분명히 있습니다. 선수 대신 구단에 전하고픈 이야기를 하고, 반대로 차마 선수에게 말 못하는 문제들은 대신 접할 수 있으니까요. 이 과정을 통해 선수를 성장시키고 보람을 찾아가려 합니다. 언젠가는 꼭 미국 메이저리그에 선수를 진출시키는 에이전트가 되고 싶습니다.”
- 2018-12-06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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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의 나라 ‘쿠바’
-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 - 체 게바라 집을 아름답게 하는 건 그 안에 사는 사람이듯, 한 나라를 아름답게 하는 것 또한 사람이다. 아름다운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 아름다운 사람이 만든 역사. 살사, 시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캐리비언 바다…. 쿠바를 수식하는 단어는 무수히 많지만 누가 뭐라 해도 쿠바는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의 나라다. 아바나, 산타클라라, 바라데로, 트리니다드에 이르기까지, 쿠바 전역을 덮고 있는 순수한 열정과 문학적 향기를 찾아 떠나보자. 낡은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빈티지 도시, 아바나!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비슷한 모습이 되어가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195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 있으니 바로 쿠바, 그중에서도 아바나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낡은 건물들과 빨래가 나풀대는 발코니, 혁명가들의 얼굴이 그려진 벽화들과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거리를 누비는 클래식 카가 어우러진 아바나는 세상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빈티지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사진작가들로부터 열렬한 러브콜을 받고 있는 쿠바는 아이러니하게도 미국과의 화해 무드가 일면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가봐야겠다는 숙제를 안겨준 나라이기도 하다. 주름진 세월이 그대로 내려앉은 올드 아바나 거리와 카리브 해안을 따라 가슴이 탁 트일 듯 시원하게 뻗어 있는 말레콘 방파제는 오늘도 변함없이 자유와 풍요를 꿈꾸는 쿠바인의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쿠바의 상징, 체 게바라 본명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훗날 체 게바라(Che Guevara)로 불린 그가 고향 아르헨티나가 아닌 쿠바에서 더 유명해진 것은 11년 동안 쿠바혁명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혁명이 성공한 후 카스트로에게 명예시민권을 받은 그는 한동안 각종 요직을 수행하며 세계를 향해 제국주의의 문제점과 자유에 대한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영화로움도 잠시, 편안함에 결코 안주할 수 없었던 진정한 혁명가는 모든 영예를 뒤로 하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고난의 길을 택했고, 결국 이국땅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39년의 짧고 굵었던 그의 생애는 많은 사람에게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체 게바라 묘지가 있는 산타클라라 혁명의 도시 산타클라라로 가는 길. 끝없이 넓은 사탕수수밭과 길게 뻗은 길 위로 마차와 쿠바를 상징하는 올드 카, 현대 차, 그리고 모터사이클이 뒤섞여 달린다. 젊은 시절, 체 게바라의 삶을 바꿔버린 여행을 그린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오버랩된다. 그는 이 길을 달리며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꿈을 꾸었을까. “고대 전사와 같은 품위 있는 죽음”을 맞기를 원했던 그는 소망대로 산타클라라에 있는 묘지에 묻혔다. 묘지 앞의 흰 꽃다발은 오늘도 생생하게 그를 기리고 있다. 진정한 혁명은 자신을 위한 혁명이며, 어떠한 물질적 보상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쿠바를 가장 쿠바답게 해주는 시가와 커피 전 세계가 지탄해마지 않는 담배도 쿠바에서는 매력 덩어리다. 체 게바라의 상징과도 같은 시가. 화보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시가를 입에 문 쿠바인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쿠바 산 에스프레소의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에스프레소 마니아라면 1달러(현지 화폐로 1CUC)로 네다섯 잔의 에스프레소를 마실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쿠바엔 관광객들이 가는 카페와 쿠바인들이 가는 카페가 따로 있다. 관광객들이 가는 카페는 깔끔하지만 아무런 풍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역시 허름하지만 진한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현지인 카페다. 의자도, 커피머신도 없는 작은 공간에서 주인장이 막걸리 주전자처럼 생긴 용기에 커피가루를 넣고 끓인 뒤 평범한 유리잔에 주르륵 따라주면 끝이다. 묘지에서 돌아와 체 게바라의 진한 삶을 되새기며 쿠바인들과 섞여 마신 에스프레소의 맛을 잊을 수 없다. 무례한 카메라 세례에도 친절로 응대해준 묵묵한 쿠바인들에게 1쿡으로 다섯 잔의 커피를 선물했다. 문학도 미술도 혁명 쿠바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한 명의 인물은 바로 헤밍웨이다. 아르헨티나 태생이지만 쿠바에서 더 많은 계기를 맞았던 체 게바라처럼, 미국 태생인 헤밍웨이도 쿠바에서 삶의 전환을 맞는다. 그는 군사독재자 프랑코를 반대하며,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가한 행동파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도 적극 참여했고,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등 주옥같은 작품을 썼다. 그 때문일까. 헤밍웨이도 쿠바를 좋아했다. 문학도, 미술도 혁명과 다름 아니니까. 태어난 나라에 국한되기엔 너무나 자유롭고 광대한 영혼들이었다.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비굴하게 뒤로 숨지 않고, 초라한 삶에 연연해하지 않고, 열정을 다해 생명을 불태우는 것. 이것이 바로 혁명가들의 공통점이니까 말이다. 아바나에서 한 시간 거리, 헤밍웨이가 만난 코히마르 헤밍웨이는 키 웨스트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들른 쿠바의 한 바닷가 마을에 매혹된다. 그 후 무려 20년을 그곳에서 살며 낚시를 하고, 어부들과 친구가 되고, 친구를 모델 삼아 ‘노인과 바다’를 썼다. 이 작품으로 노벨상을 받은 그는 어부들에게 상을 바쳤다. 어부들은 그를 기리며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그의 동상을 세워줬다.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는 라 테라사(La Terraza)에 들러 모히토 한 잔을 마셔본다. 1928년 헤밍웨이가 머물며 ‘노인과 바다’를 썼다고 전해지는 ‘핀카 라 비히아(Finca La Vigía)’는 현재 헤밍웨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바나 시내도 헤밍웨이의 자취로 가득하다. 그가 머물며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를 썼다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Hotel Ambos Mundos) 551호실과 라 플로리디타(La Floridita) 칵테일 바,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까지 보고 나면, 당신의 삶에도 혁명 같은 바람이 불어올지 모르겠다. 파스텔 톤의 동화마을에서 배우는 춤 ‘살사’ 17세기 스페인 통치 시절의 풍경이 가장 잘 남아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도시 트리니다드.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교회와 건물, 돌로 포장된 길이 고풍스런 멋을 더하는 트리니다드는 쿠바에서도 살사의 본고장으로 불린다. 전기를 아껴야 하기에 해가 지면 쿠바의 도시들은 온통 깜깜해진다. 특별히 할 일도 없어 잠이나 청하려던 차에 갑자기 온 동네가 떠나갈듯 살사음악이 울려퍼진다. 시간을 보니 밤 11시 무렵. 도저히 그냥 잠들기에는 아까운 장면이라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역사박물관과 산티시마 교회가 있는 중앙 광장엔 하바나 클럽이 있다. 밤마다 현지인과 여행자가 어우러져 한바탕 살사 파티가 벌어지는 곳이다. 프로 뺨치는 쿠바인도, 태어나 처음 리듬에 몸을 맡긴 여행자도 흥겨움에 가득 취하는 밤이다. 스페인어로 ‘소스’라는 뜻의 살사는 맛깔스런 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소스처럼 격렬하고 화끈하며 율동감이 넘치는 춤이다. 동네 여기저기 붙어 있는 살사 레슨 안내지는 지금 아니면 언제 살사를 배워보겠냐고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망설이던 끝에 결국 살사를 배워보기로 했다. 레슨 장소인 카사 데 라 무시카(Casa de la Musica)로 가서 근사한 춤 선생을 기다렸다. 그러나 탄탄한 구릿빛 몸매의 섹시남을 기다리던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그렇지! 이상과 현실은 다르기 마련이니까. travel info. 항공한국에서 쿠바까지의 직항은 없으므로, 토론토나 멕시코시티를 경유해야 한다. 여행코스 수도인 아바나에서 시작해서→바라데로→산타클라라→트리니다드→산티아고데쿠바가 일반적이다. 언어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여행적기11월부터 2월까지로 낮에도 무덥지 않으며 밤엔 선선하기까지 해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때이다. 치안 사회주의국가라 위험하냐고 묻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나라일수록 관광수익이 중요하므로 관광객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중대범죄로 취급되어 오히려 매우 안전하다. 화폐 CUC과 CUP이라는 이중화폐를 사용하고 있어 좀 불편한 점이 있다. 1CUC(쎄우쎄)=1USD, 1CUC(쎄우쎄)=24CUP(쎄우뻬)이며, 외국인이 주로 가는 곳에서는 CUC을, 현지인이 가는 곳은 CUP을 사용한다. 외국인이 CUC으로 계산해도 거스름돈은 CUP(혹은 모네다라고도 함)으로 주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 무선인터넷망이 깔려있는 공원/호텔/건물등에서 접속가능하며, 인터넷카드비용은 1시간에 1달러정도이다. 숙소호텔도 좋지만 민박집 까사에 머물기를 권한다. 인심좋은 아침상을 받으며 때묻지 않은 현지인들을 만나는 일은 쿠바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여행전 보고가면 좋은 영화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치코와 리타,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여행전 보고가면 좋은 책 체게바라 평전, 쿠바의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 2018-12-06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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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아날로그 투어
- 유행이 돌고 돌아 올가을에 호피무늬가 대유행이라고 한다.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치타 여사(라미란 역)가 즐겨 입던 호피무늬 옷을 거리에서 종종 보게 될 줄이야. 몇 해 전부터 불기 시작한 복고 열풍은 스치는 바람이 아니라 문화로 자리 잡아가는 것 같다. 학자들은 이 현상을 ‘삶이 고달파서’라고 해석한다. 사람들이 옛것을 통해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는다는 것이다. 세월은 고생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미화시키는 힘이 있으니. 세월을 비껴간 곳을 찾아 추억 여행을 떠나보자. 빈티지의 끝판왕, 을지로 인쇄소 골목 한국전쟁 이후 도시 재건에 필요한 모든 업종이 서울 을지로3가와 4가 일대에 자리 잡았다. 공구 골목, 도기·타일 골목, 재봉틀 골목, 조명 골목, 인쇄 골목 등이 거미줄 치듯 모여 거대한 산업단지를 이뤘다. 주변으로 고층 빌딩이 우후죽순 들어서도 을지로는 여전히 예전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일과를 마친 노동자들이 ‘동원집’의 감잣국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1000원짜리 노가리 안주에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회포를 풀던 노가리 골목도 여전하다. 노가리 골목은 오히려 지금이 더 전성기인 것 같다. 후미진 인쇄소 골목에는 임대료가 저렴한 건물을 찾아 들어온 예술가와 젊은 창업자들이 정착하고 있다. 카페, 술집, 음식점도 많이 생겼다. 대부분 을지로 특유의 허름한 분위기를 부각해 건물을 꾸몄다. 카페 ‘커피한약방’과 양과자점 ‘혜민당’이 대표적이다. 이곳은 개화기 때 차림으로 입장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촌스러운 색유리 창문, 100년 된 자개장, 페인트칠이 벗겨진 나무 문, 전깃줄이 뒤엉켜 있는 골목 풍경이 내다보이는 2층 테라스마저 멋스럽게 보이니, 내 눈이 ‘복고깍지’를 쓴 것이 틀림없다. Tip 을지로 일대에 오구반점, 을지면옥, 통일집, 안성집, 양미옥, 을지다방 등 개점한 지 최소 30년 이상 된 노포들이 즐비하다. 노포 순례를 하며 추억을 곱씹어보는 것도 좋겠다. 세월의 사각지대 익선동 한옥마을 북촌과 서촌에 이어 익선동 한옥마을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익선동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성된 이후 재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한옥이 잘 보존돼왔다. 전철 1·3·5호선이 교차하는 종로3가역과 인사동, 운현궁, 창덕궁, 종묘 등 서울 명소가 코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이 동네 시간만 1970~80년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미로처럼 좁고 복잡한 골목 안에 오래된 식당과 한복집, 점집, 가정집 등 한옥 100여 채가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요즘 익선동에 가보면, 상전벽해를 실감한다. 주택이 대부분 트렌디한 상가로 바뀌었다. 다행히 한옥 형태를 유지하고 내부만 개조해 익선동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한옥인 ‘열두달’, ‘이태리총각’, ‘익선디미방’ 등에서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먹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수플레팬케이크를 파는 복고풍 카페 ‘동백양과자점’이다. 평일에도 가게 앞으로 늘어선 줄이 엄청나다. 신생 가게들이 속속 들어서는 중에도 익선동에서 가장 처음 문을 연 전통찻집 ‘뜰안’, 익선동이 인기를 끄는 데 일조한 빈티지 카페 ‘식물’, 착한 맛집 ‘익선동121’, 담장 허문 가맥(가게 맥주)집 ‘거북이슈퍼’ 등이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Tip 익선동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이 가깝다. 운현궁을 둘러보고, 고즈넉한 서순라길(종묘의 서쪽 담장길)을 산책한 뒤 종묘까지 둘러보면 알찬 도보 코스가 완성된다. 서울의 사교육 일번지였던 돈의문박물관마을 돈의문(서대문) 터 근처에 있던 새문안 동네는 몇 해 전 돈의문 뉴타운을 조성할 때 근린공원이 될 뻔한 동네였다. 서울시에서 헐지 않고, 도시 재생해 동네를 통째로 박물관으로 조성했다. 조선시대 한옥, 1930년대 일본식 주택, 1960년대 도시 한옥, 1970~80년대 슬래브집 등 각 시대상을 반영한 건축물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보존 가치가 있었던 것. 동네 역사도 흥미롭다. 1960년대에는 명문 중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집마다 과외방이 있었다. 1980년 과외 금지법이 시행된 뒤로는 동네의 90%가 식당으로 바뀌기도 했는데 당시 ‘문화칼국수’, ‘풍미추어탕’집이 유명했다. 돈의문박물관마을에는 당시의 가옥 구조를 복원한 집 40채가 있으며 전시관, 연구실, 공예작가의 작업실 및 체험 공방으로 활용 중이다. 방문객은 그림 그리기, 와인 강좌, 쿠킹 클래스 등 40여 가지 프로그램을 선택해 체험해볼 수 있다. 이 중 마을 투어 프로그램을 강력 추천하고 싶다. 도슨트와 마을 골목길을 함께 돌면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건축 양식의 변화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하루 두 차례, 무료로 30분 동안 진행되며, 신청은 돈의문박물관마을 홈페이지(www.dmvillage.info)에서 하면 된다. Tip 돈의문박물관마을 맞은편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였던 경교장이 있다. 서울 성곽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홍난파 가옥, 권율 장군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와 3·1운동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미국 특파원 앨버트 테일러가 살았던 딜쿠샤를 만날 수 있다. ‘그땐 그랬지’ 국립민속박물관 추억의 거리 국립민속박물관 야외에 ‘추억의 거리’가 조성돼 있다. 1960~70년대 거리 풍경을 실감나게 재현해놓았다. 마치 촬영장 같은 분위기다. 창신사장(사진관), 근대화연쇄점, 장미의상실, 고향식당, 약속다방, 화개이발관, 고바우만화방, 인쇄소, 좋은소리사(레코드점) 등을 실물 크기로 짓고, 소품을 구색 맞춰 비치했다. 구멍가게 안에 진열된 과자, 음료수, 과일, 달걀, 아이스크림을 보며 아련한 기억을 떠올린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부모님이 구멍가게를 하는 친구를 가장 부러워했다. 화개이발관에는 종로구 소격동에서 2007년까지 약 50년 동안 영업한 이발관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창신사장, 약속다방, 북촌국민학교는 내부 입장이 가능한 체험 공간으로 꾸몄다. 창신사장에서는 옛날 교복을 빌려 입고 옛날 사진관에서 사진 찍듯 기념 촬영을 할 수 있다. 추억의 거리가 기성세대에게는 추억을 소환하는 공간으로, 젊은 세대에게는 이색 체험 공간으로, 재미를 선사한다. Tip 국립민속박물관과 경복궁은 연결돼 있다. 단풍 고운 날, 고궁 산책과 더불어 추억의 거리를 거닐어보자.
- 2018-11-18 1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