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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가에 부는 '시니어 스타' 열풍
- 최근 방송가에서 시니어 세대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배우 김수미, 모델 김칠두, 유튜브 스타 박막례, 밀라논나 채널의 장명숙까지. 시니어 세대가 방송 전면에 서서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배우 김수미는 특유의 예능감으로 방송가를 휘어잡았다. tvN ‘수미네 반찬’과 SBS플러스 ‘밥은 먹고 다니냐?’ 프로그램 MC로 나서 속 시원한 입담과 유쾌함, 따뜻한 감동까지 시청자에게 전하고 있다. 백발이 돋보이는 강렬한 비주얼과 카리스마로 시니어 모델의 대명사가 된 김칠두는 각종 CF는 물론, 서울패션위크 등 유명 패션쇼에서 활약하고 있다. 여기에 JTBC ‘정산회담’, MBC에브리원 ‘비디오스타’ 등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며 대중에게 다가서고 있다. 유튜브 스타 박막례도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구수하면서도 촌철살인의 입담으로 ‘옆집 할머니’ 같은 매력을 선사하는 박막례는 현재 약 132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셀러브리티다. 최근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 리뷰, 그룹 2PM의 ‘우리집’ 뮤직비디오 리액션 영상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또 다른 시니어 유튜버 ‘밀라논나’의 장명숙도 인기다. 그는 최초의 한국인 이탈리아 유학생이자, 1990년대 국내에 유명 명품 브랜드를 선보인 화려한 이력으로 패션 아이템 및 스타일링을 제안하는 콘텐츠를 선보인다. 최근엔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해 인기를 입증했다. 좀 독특한 시니어 스타도 있다. 트로트계 ‘괴물 신인’이자 빠른 1945년생이라는 설정의 김다비는 지난 5월 트로트 ‘주라주라’로 데뷔했다. 이후 그룹 방탄소년단 뷔, 가수 이찬원도 언급하는 등 화제의 중심에 서며 ‘본체’ 김신영에게 새로운 전성기를 선물하고 있다. 여기에 다음달 2일 첫 방송되는 티캐스트 계열 E채널 신규 예능 프로그램 ‘찐어른 미팅: 사랑의 재개발’도 중장년 싱글의 ‘어른 미팅’이라는 신선한 콘텐츠로 주목 받고 있다. 기존 연애 예능 프로그램과 차별화된 모습에 중장년층 출연진의 예측불가 매력이 더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 2020-06-0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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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가을처럼 물들어가고…
- 첫 만남 내가 처음 뵈었을 때 하영(가명) 어르신의 연세는 팔십이었다. 100세 시대라는 요즘 세상에 팔십은 인생의 황금기를 지나 비로소 자신만의 꽃을 피울 나이 아닌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이 닥쳐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것이다. 어눌한 말투, 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수시로 넘어지는 파킨슨병의 고통은 인생의 가을을 너무 빨리 맞이하게 했다. 어르신의 몸은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 인지능력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라 자꾸 아련해져가는 기억을 붙들려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평생 원만한 성격에 모범생처럼 살아온 인생, 새파랗게 젊었던 시절의 군대 생활 얘기를 할 때면 눈가에 생기가 넘쳤다. 광주 기갑 학교에서 특기병 교육을 받을 때는 전체 교육생 중 1등을 해서 학교 조교로 차출될 정도로 총기가 있었다. 돈과 권력을 탐하지 않으면서도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직장에 취직되어 딸 둘에 아들 하나 낳아 대학까지 보냈다. 은퇴 후 자신만의 삶을 꿈꾸었는데, 그렇게 어르신에게 갑자기 닥친 병마는 한꺼번에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어르신에게 ‘희망’이라는 단어가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일까? 소통 나는 요양 보호차 만난 그분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 애썼다. 그러나 어눌한 발음 때문에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며 듣다 보면 가끔은 피로감이 몰려와 퇴근한 후 쓰러지듯 누워버리는 날도 있었다. 그래도 듣고 또 들으려 애썼다.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들어 대화를 포기해버린 아내와 자녀들 때문에 말수가 많이 줄었지만 나를 만난 후부터는 활발하게 이야기꽃을 피우신다. 그분의 지나간 인생에 대해 듣고 현재의 삶을 함께 관조하면서 이심전심의 공감으로 물들어갈 즈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분의 말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음을 살피다 보니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의중까지 살피게 됐고, 그렇게 노력하다 보니 이제는 70~80%를 알아듣게 됐다. 맞장구를 쳐드리면 더욱 신이 나서 말씀하시는 어르신! 불과 10년 후의 내 모습을 그 어르신에게서 본다. 그래서 1분 1초라도 더 성심성의껏 보살펴드린다. 어느새 10개월을 함께했고 이젠 정도 많이 들었다. 아내인 할머니 건강도 몹시 안 좋다. 어르신과 함께 딸네 집에 어린 손주를 돌봐주러 갔다가 아파트 계단에서 넘어지는 사고를 당해 워커를 의지해야 겨우 바깥출입을 하신다. 집 안에서 할머니의 역할은 2~3일에 한 번 세탁기 돌리고 식사 준비를 하는 게 전부다. 물론 매주 한 번씩 가까이 사는 딸이 반찬을 해 나르고 있긴 하지만 식사는 맨눈으로 봐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 점심은 우유 한 잔으로 때우기 일쑤다. 게다가 두 분 모두 치아가 좋지 않아 음식을 제대로 못 씹는다. 어르신의 소망은 틀니가 아닌 임플란트를 하는 것이다. “틀니를 왜 사용하지 않으셨어요?” 하고 여쭈었더니 “파킨슨병으로 가뜩이나 발음이 어눌한데, 틀니까지 끼면 상대방이 내 말을 아예 못 알아들을까봐…”라며 말꼬리를 흐리신다. 어르신 대답에 콧날이 시큰해졌다. 할머니는 남편이 원래 달변가였다고 말씀하신다. “달콤한 말로 날 꼬드기는 바람에 홀딱 넘어갔지 뭐야 참나.”, “우리 어머니가 저 양반한테 시집가면 고생할 거라고 두 손 들어 만류했는데 안 듣고 달콤한 꼬드김에 넘어가 시집왔더니 지금 이 꼴이 되었네.” 할머니의 말투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사사건건 젊은 날의 남편을 책망했지만, 어르신은 그럴 때마다 피식 웃거나 고개를 돌렸다. 동네 공원으로 산책 겸 나와 잠시 쉴 때 “어르신, 젊은 시절에 할머니한테 좀 잘하시지 그러셨어요?” 하고 묻자 정색을 하며 “아니에요, 그건 그 사람 얘기지. 난 참으로 열심히 살았어. 3남매 모두 대학 보내고 내 집 거느리고 살았으면 됐지 뭐” 하신다. 어르신의 말씀에 무언의 믿음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파킨슨병으로 몸은 다소 불편하지만, 할머니보다 인지능력이 좋은 어르신은 나의 적극적인 케어를 받으며 바깥일을 모두 처리하신다. 공과금 납부와 생활비 입출금 등의 은행 업무, 시장보기도 직접 하신다. 약방에서 약을 사 나르는 일도 물론 어르신의 몫이다. 할머니는 병원에 갈 때마다 필요한 비용을 보채듯 청구하신다. 애틋한 노부부의 사랑 2020년 초 어느 날 아침, 갑자기 혼수상태가 되신 어르신을 119 구급차에 태워 병원으로 모시고 갔다. 눈을 감고 축 늘어진 채 누워 계신 어르신은 계속 잠만 주무셨다. 그 옆을 지키고 있던 나는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걱정을 많이 했다. 센터 복지사 도움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뒤따라오신 할머니는 남편 머리맡에 앉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영감, 나 죽는 거 보고 따라온다고 해놓고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고? 얼능 일나라!” 비통하게 울부짖듯 소리치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남편을 원망하던 할머니의 평소 모습이 아니었다. 그제야 나는 할머니의 속마음을 알고 속울음을 울었다. 만 하루가 지나서 겨우 정신이 돌아온 어르신은 할머니의 손을 마주 잡고 통곡했다. ‘아! 노부부의 사랑이 이토록 지고지순하다니….’ 할머니의 울부짖음을 듣기라도 한 듯 기적같이 눈을 뜬 어르신은 요양병원에서 1개월간의 재활치료 후 다시 할머니 곁으로 돌아오셨다. 경자년 구정을 병원에서 보내고 돌아오신 어르신은 예전보다 더 힘든 상태로 일상을 맞이했다. 병원에 있을 때는 내가 케어를 해드릴 수 없었기에 퇴원 후 다시 만났는데, 어르신은 내 손을 붙잡고 눈물을 꾹꾹 눌러 삼키셨다. 그 모습을 보며 가슴속에서 불덩이 같은 것이 올라왔지만 먼 데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인생 선배의 삶을 거울삼아 건강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게 되는 요즘이다.
- 2020-06-08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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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클럽 확진자 외할머니 이어 아버지도 감염
- 서울 이태원 클럽을 방문한 30대 남성 확진자 A 씨의 외할머니가 감염된데 이어 아버지도 확진 판정을 받았다. 인천시는 이태원 클럽을 방문한 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A 씨의 아버지 B(63) 씨의 검사 결과 양성 판정을 받았다고 15일 밝혔다. A씨는 지난 2일 이태원의 한 클럽을 방문했다가 10일 오전 양성 판정을 받았다. B씨는 아들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뒤 10일 인천시 부평구 보건소 선별진료소를 찾아 검체 검사를 받았으나 음성이 나왔다. 하지만 지난 12일 발열 증상이 나타나 14일 다시 부평구 보건소 선별진료소에서 검사를 했고 확진 판정을 받았다. 앞서 A씨의 외할머니인 C(84) 씨도 양성 판정을 받은 바 있다. B씨 등은 A씨가 확진 판정을 받기 전인 지난 7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함께 식사를 했다.
- 2020-05-1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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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노래의 길을 잇는 국악인 김영임
- 1972년 선소리 산타령 예능 보유자인 이창배를 사사하면서 국악을 시작해 1974년에 발표한 ‘회심곡’으로 전국적인 히트를 기록한 경기민요와 12잡가의 대가 김영임(67). 이후 48년 동안 소리의 길을 걸어온 그녀는 수많은 공연 경험과 자신만의 브랜드 콘서트인 ‘김영임의 소리 孝’를 갖고 있으며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전수교육 보조자로서 우리의 소리를 전수하는 데도 열중하고 있다. 케이팝의 세계적 성공과 세대를 뛰어넘은 트로트 붐 등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현재, 우리 음악의 대표 주자 국악의 아이콘 중 하나인 김영임을 만나 국악인으로서의 삶, 소리의 존재 이유를 들어봤다. 김영임은 자신만의 브랜드 콘서트를 갖고 있는 드문 국악인이다. 그녀는 매년 5월이 되면 국내 최초의 국악 뮤지컬인 ‘김영임의 소리 孝’ 공연을 한다. 그러나 벌써 20여 년을 훌쩍 넘겨 계속되며 그녀의 브랜드가 된 ‘김영임의 소리 孝’이지만 올해는 볼 수 없다. 코로나19 때문이다. “50여 년 동안 국악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공백 기간이 긴 건 처음이에요. 5월을 준비하고 시작하다 보면 1년이 금방 가곤 했는데…. 그런데 반대로 보면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됐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저를 뒤돌아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니 공허함이 좀 사그라지더라고요. 넘어진 김에 쉬었다가 간다고 하잖아요.” 트로트에 이어 국악 대세도 오지 않을까 여전히 그녀의 일상을 지켜주는 것은 다름 아닌 소리다. “전라도 쪽에 ‘편’ 소리가 있듯 경기 소리에는 경기 잡가가 있어요. 장구 하나를 두고 6박 장단으로 부르는 소리인데, 열두 개를 다 하려면 네 시간 정도 걸려요.” 소리를 하고 싶어지면 혼자 방석을 깔고 앉아서 장구를 치며 경기 잡가 열두 바탕의 소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면 행복해진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최근 화제인 TV의 트로트 프로그램들이 있다. “요즘 트로트가 대세인데 제가 트로트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잖아요. 이미자, 은방울 자매, 문주란 씨 등등…. 학교 다닐 때 남진 씨 좋아했던 기억도 나고. ‘미스터 트롯’ 보면서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저렇게 트로트를 잘할 수 있나 싶기도 하고. 옛날에 KBS1 음악 프로그램 ‘빅 쇼’ 무대에서 이미자 씨의 ‘모정’과 조용필의 ‘일편단심 민들레’를 불렀던 기억도 나고요.” 그녀는 “트로트가 대세이니 앞으로 국악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라며 그런 시간이 조만간에 만들어져서 젊은이들에게 국악도 각광받았으면 하는 바람을 밝혔다. 소리는 운명적으로 다가왔다 김영임과 소리가 만난 것은 꽃다운 나이, 열아홉 살 때였다. “처음에는 가족들의 만류로 못하다가 일 년 후 다시 했죠. 많이 반대했어요. 미국에 있는 오빠가 ‘노래는 조금만 하고 미국으로 돌아와서 공부해라. 내가 지원해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어머니에게 ‘내가 내 인생을 사는 것이기에 구렁텅이로 들어가도 헤쳐 나오겠다’고 말하고 소리를 하게 됐죠. 국악이 너무 좋았으니까요.” 민속경연대회에서 장원을 하고, 스케줄 펑크를 낸 선배 대신 나간 방송 프로그램 PD에게 섭외된 그녀는 국악 드라마 주인공으로도 출연했다. 카메라맨들의 사랑을 받는 미녀 국악인으로서, 지금 시대로 보면 아이돌로서 활동을 하던 그녀는 레코드 회사 섭외를 받아 ‘회심곡’ 음반을 내면서 마침내 대박을 쳤다. 그녀는 그때의 자신을 “행운의 열쇠를 거머쥔 거나 다름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게 무조건 좋은 일만 생기는 게 아니라 했던가. 그런 삶 속에서 그녀의 상처는 점점 쌓여갔다. “동료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마음의 상처가 컸어요. 그런 것도 내 인생의 잊지 못할 일들이죠. 지금은 그런 것들을 다 배움으로 생각해요. 너무 빨리 이름을 얻어서 고개를 들고 다니는 게 좋은 일만은 아닐진대….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배운 거죠.” 소리꾼의 삶과 한 소리꾼과 한(恨)을 떼고 생각하기란 어렵다. 한은 우리 소리의 절절함과 곡절을 그대로 설명해주는 단어이며, 소리꾼이 가진 한이 소리에 담김으로써 그 소리는 완성된다고도 한다. 어린 나이의 성공, 그로 인한 인간관계에서의 상처, 그리고 오랜 시집살이를 해야 했던 전통 사회 여성으로서의 한이 김영임에게는 있는 게 아닐까. 그녀의 남편은 1970년대를 풍미했던 코미디언 이상해 씨. 1979년 우여곡절 끝에 결혼한 그들은 어느새 41년을 부부로 살아가고 있다. “친정에서 일 년 살다가 큰딸이 두 살일 때 시집과 합쳤어요. 그때부터 시어른들과 지냈죠. 저는 장손의 큰며느리였어요. 그런데다 시집 분위기가 가부장적이어서 어른들은 장손이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집안 경조사가 있으면 일을 나누지 않았어요. 무조건 큰아들 몫이었어요. 그런 분위기로 인해 우리 부부는 가족들한테 기대지 않고 한 계단 한 계단 열심히 개미같이 일해서 자수성가한 케이스가 됐어요.” 아직 가야 할 길이 많다 한은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김영임 또한 그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저는 하루에도 두세 번씩 울컥해요. 왠지 모르게 가슴이 텅 빈 것 같아요. 남편과 자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럴까, 내 마음을 내가 잘 다스리고 추슬러야겠죠. 저에겐 가야 할 길이 아직 있으니까요.” 그녀가 가야 할 길이란 물론 소리꾼의 길이다. 그녀는 진심을 담아 자신에 대해 ‘아직까지도 도전하며 뛰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전수교육 보조자인 그녀가 생각하는 다음 단계는 무형문화재로서의 길이다. “윗세대 선생님들을 보면 여든이 넘어가면 기력이 안 돼서 노래를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걸 미리 생각하면 너무 두렵잖아요. 그래서 그런 생각 안 하기로 했어요. 오늘도 내일도 사람들이 원하는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싶어요. 그리고 내일을 준비하며 너무 초조해하지 말고 나이 먹는 걸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만들어야겠죠. 그렇게 생각하니 의욕이 사그라지지 않더군요.” 그녀가 지키는 부부의 세계 변치 않는 도전의식을 가지기로 결심한 김영임의 나이는 올해 예순일곱 살, 여덟 살 연상인 남편은 칠순 중반이다. 이제 부부 사이에 알콩달콩한 무언가가 있을 나이는 아니다. “우리는 어른들과 함께 살아서 스킨십도 못하며 살았어요. 표현도 못하다 보니 그게 굳어졌죠. 기본적으로 남편은 나를 정말 끔찍이 생각하는 거 같아요. 하지만 마음으로 들어와서 편안하게 위로해주는 게 없어요. 나이 먹어서 그런 걸 바라는 것도 우습고요.” 그래도 생활의 한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며 부드러워진 걸까. 그녀에게 이혼과 졸혼을 선택하는 황혼 부부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물어봤다. “사실 우리 부부도 이혼할 뻔했어요. 그런데 이혼해서 나아질 게 뭐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남자도 여자도 초라해지고…. 그건 아닌 거 같더라고요. 그런 결정을 내리기 전에 서로가 좀 절충을 해야 하고, 깨지도록 싸워도 끝까지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남편이 아주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에요. 그래도 한 가정을 이루고 산 세월이 있잖아요. 해답은 대화에 있다고 봐요. 상대를 존중하는 언행도 굉장히 중요해요. 아 다르고 어 다르니까요. 행복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하죠. 행복하려면 건강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도 아침 식사는 꼭 내 손으로 만들어서 가족들과 함께 먹고 있어요.” 세월이 흘러가며 더해진 깊이 김영임이 특히 건강에 신경 쓰게 된 계기가 있다. 암이었다. “우리 애들이 초등학교 때였으니 40대 후반쯤의 일이었죠. 안면마비가 왔고 갑상선암 진단을 받아 수술을 하고 자궁을 들어내는 대수술을 일 년에 두 번이나 했어요. 특히 갑상선은 성대 가까이 있어 수술이 여덟 시간이나 걸렸죠.” 어쩌면 소리꾼으로서의 삶을 통째로 잃을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시기였다. 그러나 다행히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그녀는 되려 수술 후에 너무 감사했다고 말한다. 목소리가 수술 전보다 더 잘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 역경, 그리고 굽이굽이 흘려보낸 세월이 그녀의 목소리에 깊이를 더했다. “20대 때 제가 부른 노래를 들으면 깜짝 놀랄 정도로 꾀꼬리 같은 목소리예요. 서른 조금 지나면서 무게가 실리기 시작했고… 지금도 20대 시절의 키는 살아 있어요. 그때 불렀던 ‘정선 아리랑’을 그대로 부르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젊은 시절에 대명창들의 노래를 들으면 이해가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들의 목소리는 곰삭아서 따라갈 수 없는 소리였다. “예전에는 못했던 단락 단락 노래의 꾸밈새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되더군요. 이제야 (명창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리는 운명, 노래는 그녀의 멘토 김영임은 살면서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에 첫 번째로 지금까지 놓지 않은 소리를 꼽았다. “소리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어요. 주변 사람들이 나를 너무 힘들게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다 내 할 탓이다 싶고요. 인간관계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나쁜 사람도 좋게 만들 수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두 번째는 가정을 잘 지킨 거죠.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엄마로서, 할머니로서, ‘뼈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내 새끼들은 먹인다’는 생각으로 살았어요.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내가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한 거죠.” 그녀는 살면서 친정어머니의 말씀을 두 번이나 어겼다. 소리를 하겠다는 것과 반대한 남편과 결혼을 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두 가지 일에서 어머니와 한 약속을 아직도 지키고 있다. “노래하면서 잘못 사는 인생은 안 살겠다고 했죠. 그리고 이 남자와 결혼한 뒤 친정에 보따리 싸서 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어요. 둘 다 지켰죠.” 그녀가 어머니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것은 소리의 힘이기도 했다. 50여 년 가까이 만들어진 김영임의 소리는 그녀의 인생과 일맥상통하는 멜로디와 가사가 함께해왔다. 노래는 그녀의 멘토였고 그녀가 잘못 가려 할 때 붙잡아주는 버팀목이었다. 특히 김영임을 대표하는 노래 ‘회심곡’에 담긴 효에 관한 애절한 가사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려는 그녀를 느끼게 해준다. 금을 주면 너를 사랴 애지중지 기른 정을 사람마다 부모 은공 생각하면 태산이라도 무겁지 않겠습니다. -‘회심곡’ 가사 중에서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와 내가 마음 쓰는 행동이 틀리면 노래를 버려야 하지 않나 싶었어요. 그럴 수만은 없었죠. 부모한테 후회 없이 효도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거든요. 저도 그중 한 사람이에요.” 김영임의 소리, 존재의 이유는 바로 어머니가 아닌가 싶다. 대한민국이 원하는 소리가 될 것 앞으로의 일에 대해 큰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다는 김영임은 공연을 준비하고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결실을 계속 보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티 내고 과시하는 게 싫다는 그녀다운 대답이었다. “김영임답게 살아가면서 ‘저 여자 지혜롭게 잘 맞춰서 사는 여자다’라는 얘기를 듣고 싶어요. 그리고 노래를 하는 사람이기에 ‘대한민국에서 이 사람 소리는 인정할 소리다’라는 말을 듣고 싶죠. 최고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원하는 소리’라고 말할 수 있는 걸 남기고 싶어요. 이 소망이 마음 한쪽에 남아 있는 건 아직 제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죠.”
- 2020-05-15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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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누리’를 알려준 석싱 씨
-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지게 목발 두드리며 노래 부르고 다니던 1960년대 공주 시골의 청년들 중에 석싱이라는 이가 있었다. 이름이 김석성인데, 어른들은 대충 석싱이라고 불렀다. 기남이도 기냄이라고 부르는 게 충청도 사람들인데 뭐. 내 또래인 석싱이의 동생은 석윤이었지만 서균이가 아니라 성뉸이라고 불렀다. 나보다 8~9세 많은 석싱 씨는 동네 새마을지도자였다. 아니, 그때는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4H운동이었지. 4H는 1902년 미국에서 처음 조직된, 두뇌(Head)·마음(Heart)·손(Hand)·건강(Health)의 이념을 지향하는 청소년 단체다. 국내에서는 4H가 지덕노체(知德勞體)로 번역돼 농업구조와 농촌생활 개선을 위해 활동하는 협동조합 형태로 전개됐다. 조합원들이 행사 때마다 부르던 노래는 “씩씩한 흙의 용사 송정4H”로 끝난다. 동네마다 지명만 바꿔 부르던 4H 주제가다. 우리 동네 이름은 되찬이인데, 목숨을 되찾고 장수하는 마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게 한자로는 전혀 뜻이 다른 송정(松亭)이 돼버렸다. 석싱 씨는 농사든 무슨 일이든 다 잘했다. 지도력도 있고 조직력도 있는 우두머리 청년인 데다 얼굴도 잘생겨 동네 처녀들이 애를 태웠다. 어느 집에선가 열리던 4H회의엔 나 같은 초등학생 조무래기들도 갔는데, 밤마실 나오듯 거기 참석하는 처녀들한테서는 석싱 씨를 의식한 분 냄새와 교태를 쉽게 맡을 수 있었다. 우스운 것은 석싱 씨의 할머니였다. 평소 며느리와 사이가 좋다가도 수틀리면 “연애 걸어 시집온 년”이라고 흉보며 욕했다. 그 당시 남녀 간에 연애를 거는 건 품행이 방정치 못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자기 아들과 연애를 해서 며느리가 됐는데도 그걸 흉을 잡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하여간 동네 처녀들은 석싱 씨와 연애를 걸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어린 내 눈에도 다 보였다. 그런 석싱 씨가 스타일 구긴 일이 한 번 있다. 어느 가을밤에 석싱 씨네 집에서 송정4H 주최 연극 공연이 열렸다. 무대는 마루, 객석은 마당. 동네 사람 다 모인 가운데 화톳불을 피우고 한바탕 판이 잘 벌어졌다. 일제 순사인지 북한 괴뢰군인지가 양민들을 괴롭히는 내용인 건 생각나는데, 연극 제목은 잊어버렸다. 웬일인지 석싱 씨는 주연이 아니라 일제 순사인지 북한 괴뢰군인지 악역을 맡았다. 일제 순사라고 해두자. 한 순사가 숨은 독립군을 찾아내라며 주인공 처녀를 마구 닦달했다. 처녀가 울부짖으면서 끌려가지 않으려고 반항할 때 그 순사의 상급자인 우리의 석싱 씨가 등장했다. 등장이랬자 방 안에서 마루로 나오는 건데, 목총을 든 석싱 씨는 방문을 거세게 열고 대차게 마루로 내려서면서 “에누리 없어 이년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소리를 지를 때 몸의 균형을 잃고 엎어져 사람들이 와 웃어버렸다. 울던 처녀까지 웃었다. 석싱 씨는 바로 멋쩍게 일어났지만 그다음 대사를 까먹어 연극이 영 거시기해졌다. 나는 그때 에누리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 다만 각본에도 없는 말을 석싱 씨가 즉석에서 애드립(물론 이 말은 나중에 안 것)으로 외쳤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확 왔다. 에누리라는 말을 정확하게 안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서다. 주로 물건을 깎는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었다. 그러나 석싱 씨가 쓴 에누리는 ‘용서하거나 사정을 봐주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에누리는 1) 받을 값보다 더 많이 물건 값을 부르는 일, 또는 그 물건 값, 2) 값을 깎는 일, 3) 실제보다 더 보태거나 깎아서 말하는 일, 이렇게 세 가지 뜻이 있고 네 번째로 석싱 씨의 에누리가 있었다. “일 년 열두 달도 다 사람이 만든 거고 노래도 다 사람이 만든 건데 에누리 없이 사는 사람 있던가?”(박경리 ‘토지’), “토지는 극히 비옥하여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은 상해와는 딴판으로 순후하여 상점에 에누리가 없고 고객이 물건을 잊고 가면 잘 두었다가 주었다.”(김구 ‘백범일지’) 이런 문장이 예로 제시돼 있다. 그런데 요즘은 에누리가 물건 값을 깎는 의미로만 쓰이는 것 같다. 에누리가 유명해진 건 코미디언 살살이 서영춘(1928~1986)의 ‘시골영감 서울 가는 기차놀이’라는 노래 덕분이다. “시골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라, 차표 파는 아가씨와 실갱이하네.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어? 깎아달라고 졸라대니 원 이런 질색. 기차는 삑 하고 떠나갑니다. 영감님이 깜짝 놀라 돈을 다 내며 깎지 않고 돈 다 낼 테니 나 좀 태워주. 저 열차 좀 붙들어요. 돈 다 낼 테니. 삼등차는 만 원이라 자리가 없어 옆의 칸을 슬쩍 보니 자리가 비었네. 옳다구나 땡이로구나 집어탔더니 삼등차에 이등칸이라 돈을 더 물어….” 이런 내용이다. 가사도 재미있지만 중간 중간의 웃음이 걸판지다. 에누리는 얼핏 일본 말 같지만 우리말이다. 세일이나 할인 이런 말보다 ‘에누리 몇 %’ 식으로 쓰면 참 좋을 것 같다. 값을 부풀리든 깎든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는 없겠지만 값을 더 부르는 에누리를 대놓고 광고하는 상인들은 없겠지. 석싱 씨는 그 뒤 어떻게 됐을까? 농사를 버리고 정든 고향을 떠나 대전인가 어디에선가 노동을 하며 산다는 말까지는 들었지만 그다음은 모르겠다. 하지만 에누리라는 말을 알려준 것 하나만으로도 석싱 씨는 내 삶에 의미가 있는 분이다. 선한 사람이니 어디에서든 부디 건강 평안하고 에누리 없는 복을 받으시기를.
- 2020-05-13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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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원 클럽 집단감염, '젊은층→고령층' 확산 주의
-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중앙대난안전대책본부가 서울 이태원발 집단감염이 고령층에게 확산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태호 중앙사고수습본부 방역총괄반장은 지난 12일 “이번 이태원 클럽 집단감염은 20~30대 젊은 연령이 많다. 이들은 증상이 없거나 경미해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 대외활동을 하고 있어 추가적인 감염확산의 위험이 높은 상황”이라며 이 같이 밝혔다. 앞서 이태원 클럽을 방문한 손자가 할머니를 감염시키는 사례가 있는 만큼, 고령층으로 전염이 확산되지 않도록 주의가 필요하다는 게 골자다. 코로나19는 가장 활발한 사람이 감염돼 가장 약한 사람에게 전파시키는 치명적인 속성을 가졌다. 특히 80대 치명률이 20%가 넘는 등 고령자와 기저질환자에게는 더욱 위험하다. 윤 방역총괄반장은 “나로 인해 주변의 고령자와 기저질환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건강하고 증상이 없더라도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일반 국민도 거리 두기, 마스크 쓰기 등 생활 속 거리 두기 기본수칙 준수해야 한다”며 “밀집, 밀폐시설의 방문을 자제해 감염, 확산 속도를 늦추는데 같이 참여해달라”고 당부했다.
- 2020-05-13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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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층 방심에 노년층 위험" 코로나 불감증이 문제
- 서울 이태원발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이 우려되면서 노년층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 실제로 20~30대 젊은층은 자신의 감염이 불러올 피해의 심각성에 상대적으로 둔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젊은층은 왕성한 활동력과 건강하다는 인식으로 국내 코로나19 확진자 중 20대 비율은 28%로 가장 높았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이 전국 18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다중이용시설 이용을 자제하느냐’는 질문에 ‘항상 자제한다’는 응답은 60대가 75%로 가장 많았다. 하지만 20대는 48%에 불과했다. 특히 서울지역 20대는 24%만 자제한다고 답했다. 20~30대의 경우 ‘나는 건강하다’는 자신감이 다른 세대보다 강해서 나타난 결과로 분석된다. 문제는 무증상의 젊은 감염자가 주변 70~80대에게 위협적이라는 것이다. 지난 2일 이태원 클럽에 다녀온 뒤 확진된 손자에게 84살 할머니가 감염돼 양성판정을 받았다. 이들은 어버이날 함께 식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기수 고려대학교 환경의학연구소 교수는 “젊은층은 증상도 약하고 면역력이 세기 때문에 본인이 확인이 안 되지만, 노년층 중에 기저질환, 호흡기질환 등이 있는 사람에겐 치명적”이라고 강조했다.
- 2020-05-12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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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가정의 달에 읽는 훈훈한 신간
- #나의 할머니에게 (윤성희 외 공저 · 다산책방) 소외되고 주목받지 못했지만, 어려운 시절을 충실히 살아낸 우리 시대 ‘할머니’의 존재성을 부각한다. 2019 김승옥문학상 대상 수상자 윤성희 외 5명의 작가가 쓴 여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 가족의 세계 (조영은 저 · 메이트북스) 가족에게 받은 상처를 알고 마주하는 건 자기 사랑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을 통해 가족이 준 상처의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스스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과정에 이르게 된다. # 엄마는 괜찮아 (김도윤 저 · 아르테) 형의 우울증과 조현병, 아버지의 실패로 우울증을 얻은 어머니가 끝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그날’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어머니의 삶을 더듬으며 애도하는 동시에 자신의 우울감도 극복해간다. # 디어 가브리엘 (할프단 프레이호브 저 · 문학동네) 첫 책으로 노르웨이 브라게 문학상 후보에 오른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할프단 프레이호브의 가족 에세이. 자폐증 아들에게 쓴 10통의 편지와 더불어 아들과 섬마을에서 보냈던 나날을 그린다. # 염증에 걸린 마음 (에드워드 불모어 저 · 심심) 인간의 뇌 지도를 그리는 데 공헌한 세계적인 신경면역학자인 저자는 “염증이 우울증의 원인”이라 단언한다. 염증이 뇌에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을 밝히며 우울증 치료의 혁명적 변화를 예고한다. # 좋은 말씀 (법정 저 · 시공사) 법정 스님의 열반 10주기를 맞아, 1994년부터 2008년까지 법회와 대중 강연을 통해 나눈 31편의 미출간 법문을 엮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자 했던 스님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 우리 각자의 미술관 (최혜진 저 · 휴머니스트) 지식 없이도 그림과 깊이 만나도록 안내하는 그림 감상 실용서. 미술 애호가인 최혜진 작가가 수년간 실천해온 ‘그림에게 묻고 답하기’를 통해 작품과 순수하게 교감하며 즐기는 법을 일러준다.
- 2020-05-08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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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님 건강 위협하는 ‘척추관협착증’, 수술 해야 하나?
- 척추는 우리 몸을 지탱하는 기둥과 같다.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척추가 노화하면 각종 문제가 생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척추관협착증이다. 척추관협착증 환자들은 수술에 대한 부담으로 치료를 미루는 경우가 많다. 우리 부모님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척추관협착증, 과연 수술만이 정답일까. 건강한 노년의 삶을 방해하는 복병, 일명 ‘꼬부랑 할머니병’으로 불리는 척추관협착증은 노년층에서 흔히 발생하는 질환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 2018년 척추관협착증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는 약 165만 명으로 전년(154만 명) 대비 약 11만 명 늘었다. 척추관협착증은 대부분 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머리부터 팔, 다리까지 신경이 지나는 통로인 척추관의 노화로 주변의 인대와 관절이 두꺼워지면서 신경을 압박해 통증을 유발한다. 나이가 들면 척추뼈와 뼈 사이에 있는 탄력 조직인 디스크에서 퇴행성 변화가 시작되는데 더 진행되면 척추관협착증으로 악화된다. 김종태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척추관협착증은 눕거나 쉴 때는 증상이 없어지지만 일어서거나 걸으면 엉덩이와 다리 부근에 시리고 저린 느낌이 들거나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나타난다”며 “이때 걸음을 멈추고 앉아서 쉬거나 허리를 앞으로 숙이면 순간적으로 척추관이 넓어져 통증이 줄어들기 때문에 허리를 구부리게 된다”고 했다. 척추관협착증을 ‘꼬부랑 할머니병’으로 부르는 이유다. 척추관협착증이 심해지면 통증 없이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점점 짧아지고 심한 경우 몇 발자국만 걸어도 쉬었다 걸어야 한다. 척추관협착증은 여성의 발병률이 남성보다 높은 편이다. 여성이 전체 환자의 약 65%를 차지한다. 특히 여성 환자의 80%는 폐경기가 시작되는 50대 이후 호르몬 변화의 영향으로 척추 주변 조직이 약해지면서 발생한다. 증상 서서히 나타나 … 초기 적절한 치료 중요 척추관협착증의 증상은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허리디스크는 급성 통증을 유발해 적극적인 치료를 받는 경우가 많다. 반면 오랜 시간 서서히 나타나는 척추관협착증은 자연적인 현상으로 치부하거나 ‘곧 치유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병이 상당히 진행된 후에야 병원을 찾는다. 그러나 척추관협착증을 조기에 치료하지 않고 방치할 경우 하지 근력 약화는 물론 다리 감각까지 떨어져 걷기가 힘들어지고 낙상 위험 역시 높아진다. 김종태 인천성모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특히 골다공증이 있는 노년층 여성은 뼈가 약하기 때문에 낙상할 경우 뼈가 부러지기 쉽고, 이로 인해 활동이 제한되면 체중이 증가하고 비타민 D 부족으로 뼈가 더욱 약해지면서 다양한 합병증을 야기해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며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질환 초기에 병원을 찾아 적절한 치료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대부분 수술 아닌 약물치료 등 보존적 치료로 증상 조절 척추관협착증 치료는 환자 상태에 따른 단계적 치료를 원칙으로 자세보정, 운동요법, 약물치료, 물리치료, 신경근 차단술 같은 주사 시술 등 보존적 치료를 우선적으로 시행한다. 김종태 교수는 “척추관협착증 환자들은 수술에 대한 부담 때문에 병원을 찾지 않고 치료를 미루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적절한 진단 검사를 통해 협착증의 부위나 정도 등을 정확히 확인하고 그 정도에 따른 맞춤형 비수술적 치료를 시행하면 많은 경우에서 효과적인 증상 호전과 중증으로의 악화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수술은 적절하고 충분한 기간의 일차적인 보존적 치료에도 심한 통증이나 보행 제한이 지속 또는 악화하는 경우, 수술로 기대되는 이점이 수술 위험보다 훨씬 많다고 예상될 때 받는 것이 좋다”고 강조했다. 물론 빠른 수술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 질환이 상당히 진행돼 급격히 하지의 운동 마비 증상이 발생하고 진행하는 경우나 대소변 장애가 나타날 땐 빨리 수술 치료를 시행해 영구적인 장애가 남는 것을 예방해야 한다. 김종태 교수는 “최근 의학기술이 발달하면서 통증 기전에 따른 다양한 약물이 연구 개발됐고 다양한 물리 치료, 주사 요법 등으로 대부분의 경증이나 중등도 협착증의 경우 상당한 치료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됐다”며 “수술적 방법은 이러한 보존 치료 후 통증, 보행 제한 등의 증상이 심하게 지속하거나 운동 마비, 대소변 장애가 생기는 경우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Tip. 척추관협착증 의심 증상 6가지] 1. 허리,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발끝이 저리거나 시리며 당기고 아프다. 2. 걸으면 심하게 다리가 저리고 아파서 쉬어야 하며, 앉아서 쉬면 통증이 줄어든다. 3. 통증 때문에 점차 걸을 수 있는 거리가 점점 줄어든다. 4. 운동이나 일을 하면 통증이 악화된다. 5. 허리를 앞으로 구부리면 통증이 줄어든다. 6. 등과 허리가 점점 굽는다.
- 2020-05-07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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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아련다 떠나려언다”
-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아이들은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다. 아이들은 여러 가지로 논다. 요즘 아이들은 게임하고 카톡을 하면서 주로 비대면으로 혼자 논다. 하지만 1960년대의 아이들은 또래들과 만나서 놀고, 동물들과 놀고, 말장난 수수께끼에 노래 가사를 바꿔 부르며 놀았다. 장난감이 없던 시대의 아이들에게는 말이 장난감이었다. 그런데 숫자를 차례로 나열하는 말장난이나 끝말을 이어가면서 약간의 멜로디와 리듬을 붙여 소리치고 다니는 유희, 이런 걸 뭐라고 하지? 예를 들면 “애들 모여라, 애들 모여라. 여어자는 필요 없고 남자 모여라.” 또는 어려서 아이들이 날 놀려 먹던 노래(?) “순이 순이 철순이, 장가 장가들었다, 누라 누라 마누라, 개다 개다 두 개다.” 이런 거. 나는 요언(謠言)이라고 쓰려 했는데, 찾아보니 사전엔 뜬소문이라는 풀이밖에 없더라. 그게 맞는 말이기도 하겠다. 나는 마누라가 두 개가 아니니까. (여기서 잠깐~! 이쁘고 요리 잘하고 착한 마누라를 얻으려면? 답은 마누라를 셋 얻는 것이다. 마누라가 하나면 한심한 남자, 둘이면 양심적인 남자, 셋이면 세심한 남자라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신소리 헛소리를 하면서 작전타임을 써 봐도 딱 맞는 말을 찾아내지 못하겠다. 그런데 이런 게 바로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동요가 아닐까.) 나는 어려서 못된 말장난을 많이 하고 다녔다(물론 어른들이 못 듣는 데서). “일, 일본 년이 이,……, 삼, 삼밭으로 들어가 사. 사방을 둘러보니 오, 오는 사람이 없어 육, 육시랄 년이 칠,…… 팔, 팔뚝만한 XX로 구, …… 십,…을 하더라.” 이 칠 구의 말줄임표는 생각나지 않는다는 표시다. 함께 자란 고종사촌형에게 물어봤지만 “난 너무 고상한 사람이라 그런 거 생각 안 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형과 나는 무슨 행진곡인가에 가사를 붙여 “아이고 오줌 마려, 아이고 오줌 마려. 아이고 오줌 마려 마려 아이고 오줌 마려.” 이렇게 발맞추어 노래 부르곤 했다. 그러면 안방에 있던 할머니가 “아, 얼렁 뒷간에 가. 오줌 참으면 병나”라고 소리쳤다(사실은 병이 된다는 말인데, 충청도 말 도+ㅑ가 표기되지 않는 게 유감이다). 그 형과 내가 공통적으로 완전하게 기억하는 건 이거다. “야 야 야마싯대가 담뱃대, 대 대 대꼬바리(담배통)가 홀애비짱, 장 장 장돌뱅이가 시리방구, 구 구 구두 신었다구 재지 마, 마 마 마루 밑에 달기똥(닭똥), 똥 똥 똥 싸놓고 도망갔다네, 내 내 냇가에서 놀다가, 가 가 가아련다 떠나려언다….” 무슨 뜻인지 지금도 모르는 말이 몇 개 있다. 네가 내로 바뀌는 대목이 어색하지만, 이 말장난의 끝은 유행가 ‘유정천리’로 이어진다. 1959년 박재홍이 불러 대히트를 한 그 노래의 1절은 이렇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못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눈물 어린 보따리에 황혼 빛이 젖어드네.” 그런데, 우리 공주 시골동네 청년들은 다르게 불렀다. 가사를 바꾼 노래의 1절과 2절은 다음과 같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는 떠나간다 천리만리 타국 땅에 객사죽음 웬 말이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춘삼월 십오일에 조기 선거 웬 말이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 길은 몇 굽이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눈이 오네 노래가 발표된 1959년은 4·19 한 해 전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독재가 막판으로 치달을 때였다. 1956년 5월 15일의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두고 민주당의 해공 신익희(1894~1956) 후보가 호남선 열차에서 급서했다. 이어 4년 후인 1960년 3·15 대선 때는 민주당 조병옥(1894~1960) 후보가 미국으로 신병 치료하러 갔다가 선거 한 달 전인 2월 15일에 타계했다. 그 상황에서 대중의 절망과 민주화 열망을 담은 노래가 “가련다 떠나련다”의 개사곡이다. 1960년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다. 마을 청년들은 작대기로 지게목발을 두드리며 이 노래를 참 많이도 불렀다. 또 하나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는 노래. 해공 급서 이후 민주당의 당가처럼 불린 가요가 있다. 작사자 손로원, 작곡자 박춘석은 정치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었고, 해공이 타계하기 석 달 전에 나온 노래였는데도 해공을 애도하기 위해 만든 거라는 오해를 받아 경찰에 소환당하며 시달렸다. 5월 5일 어제가 해공의 64주년 기일이었다. 사람은 가고 노래는 남았다. 그러나 가사를 바꾸거나 곡조도 없는 노래로 만든 말장난 동요는 불러본 사람들만의 것이어서 전승되지 않는다. 동시대의 사람들이라도 잘 알지 못한다. 악보상의 노래와 달리 기억 속의 동요는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 스스로 만들어 노래유희를 하는 아이들도 이제는 보기 어렵다.
- 2020-05-06 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