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를 통해 일본의 순박한 매력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던 저자(조경자)가 20여 년의 국내 여행담을 으로 엮었다. 사진은 를 통해 찰떡궁합을 선보였던 황승희가 맡았다. 여행 병에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여행에 심취한 그들이 기꺼이 꺼내놓은 은밀한 여행지, 보고 또 봐도 대단한 명불허전 여행지, 앞으로 뜰 여행지 등이 알찬 정보와 근사한 사진으로 맛깔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그곳, 밥과 잠, 그리고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슬로 트래블’에는 울릉도와 정선, 하동, 통영, 경주, 해남, 강진, 부산, 청산도 등을 한층 더 매력적으로 여행하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만 풍경을 내어준다는 곰배령 야생화 트레킹, ‘한국관광지 100선’에서 1위로 꼽힌 문경새재 옛길 걷기, 차를 버리고 동해 바다를 품고 걸어야 제맛인 영덕 블루로드 등 그곳에 닿기만 해도 마음이 푸릇푸릇해지는 힐링 스폿도 함께 확인해 볼 수 있다. 오랜 시간 음식잡지 기자로 일하며 ‘지방 출장 전문 기자’란 별명을 갖고 있었던 저자가 현지인들의 귀띔으로 찾아낸 단골 식당 리스트와 숙소도 ‘밥과 잠’에서 아낌없이 공개했다. 애국의 달 6월,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담아낸 우리 땅의 정직한 풍경들을 보면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겨 보는 것도 좋겠다.
김산환 저·꿈의지도
2010년 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던 책의 개정판이다. 캠핑여행의 달인으로 불리는 저자가 강원도 인제에서 해남 땅끝을 거쳐 제주도까지, 그리고 시베리아 바이칼 호수와 알래스카, 미 서부, 캐나다 로키 등 세계의 여행지에서 20여 년간 캠핑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감동을 잔잔하게 풀어낸 에세이다.
이선재, 이연재, 최영원, 이영건 저·한국여성문예원
수필가이며 사업가인 아버지 이영건, 어머니 최영원, 미국에서 학업을 하는 두 딸 이선재·이연재, 이렇게 한 가족이 15일 동안 미국을 횡단하면서 행복과 가족이라는 주제로 사진을 담고 정리한 여행도서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미국 LA를 시작으로 뉴욕에 도착하기까지 자연과 도시 그리고 화목한 가족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화득 저·자동차 여행
지리 전문가이자 여행 마니아로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여행한 저자가 가족, 연인과 함께한 자동차 여행 경험들을 모아 엮어냈다. 저자는 1991년 펴낸 국내 첫 자동차여행서 에 이어 에서도 유럽 자동차 여행자들과 주고받은 최신 정보와 실속 있는 노하우를 아낌없이 소개한다.
김혜남 저·갤리온
30년간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15년간 파킨슨병을 앓으며 깨달은 저자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자는 2001년 마흔세 살의 나이에 파킨슨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정신과 의사로 할 일이 많은 나이였다.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마음도 잠시, 침대를 박차고 나온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아서인지 사는 게 재미있다”며 끊임없이 꿈꾸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즐기며 재미있게 살고 있다.
이정미 저·라온북
‘현모양처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자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에서 아이와 남편만 바라보는 ‘경단녀(경력단절녀)’가 된 저자의 스토리를 담았다. 경단녀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낀 저자는 끊임없는 학습과 자기계발을 통해 새로운 직업을 얻고, 제2의 인생을 당당하게 살고 있다. 대한민국 에서 아줌마로, 경단녀로 고민하는 이들에게 남편과 아이들에게 자랑스런 엄마로 행복한 나를 완성하기 위한 방법들을 제시한다.
한유석 저·달
양조장의 맏딸로 태어났지만 술을 못하는 어머니는 애주가 남편과 결혼하여 술을 잘 마시는 딸(저자)을 낳았다. 책에는 소주, 맥주, 막걸리, 탁주, 위스키, 칵테일, 와인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처음처럼, 화요, 삿포로맥주, 금정산성 막걸리와 같이 비교적 친숙한 술과 히타치노 네스트, 필스너우르켈 등의 다양한 세계맥주, 클론 5, 부르고뉴 알리고떼 등 생소한 와인까지. 그야말로 주종을 가리지 않는다.
아직 ‘우리 것의 가치’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시절, 우리 고유의 문화나 전통은 물론 심지어 자연자원까지도 있는 그대로 내세우지 못하고 이미 세계에 널리 알려진 것들을 어떻게든 끌어들여 비교하거나 대비해 소개하곤 했지요. 이때 쓰이던 표현 중의 하나가 바로 ‘한국의 XXX’입니다. 우리 고유의 꽃 이름을 부르는 것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냥 산솜다리라고 하면 될 것을 ‘한국의 에델바이스’라고 부르다 보니 지금까지도 아예 진짜 ‘에델바이스’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거나, 우리의 식물국명을 제대로 모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리 있는 지적이긴 하나, 1960 ~1970년대 전 세계를 강타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노래 이름의 하나가 바로 에델바이스였으니, 우리나라에도 그에 못지않은 고유 식물이 있음을 알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한국의 에델바이스’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게다가 요즘도 청소년 축구 선수인 이승우에 대해 ‘한국의 메시’라는 말을 하는 걸 보면, ‘한국의 XXX’가 열등감이나 무지의 소치라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표현 방식이 아닐까 가볍게 넘겨봅니다.
물론 ‘한국의 에델바이스’는 식물명의 차원을 넘어, 산솜다리의 생존 자체에 심대한 위협을 초래했습니다. 수없이 듣고 불렀던 ‘눈처럼 빛나는, 마음속의 꽃’, 바로 그 에델바이스를 말려서 만들었다는 말에 1970년대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온 중고생들이 너나없이 에델바이스 압화 액자에 아끼고 아꼈던 용돈을 기꺼이 상납했으니 얼마나 많은 산솜다리가 그 당시 사라졌을지 짐작이 됩니다. 지금은 소공원이 된 설악동의 여관과 가게마다 산솜다리로 만든 기념품이 즐비했었으니,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설악산의 웬만한 능선과 봉우리에서 산솜다리를 무더기로 채취할 수 있었다는 뜻이 되겠지요. 그러다 보니 “자생지가 매우 협소하며, 개체 수도 극소수이다”라는 설명이 현재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식물정보 웹사이트에 올라 있는 실정입니다.
암튼 경위야 어찌되었든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에델바이스와 우리나라의 산솜다리는 식물분류학상 같은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국화과 솜다리속의 식물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학명(속명+종소명)이 에델바이스는 레온토포디움 알피눔(Leontopodium alpinum), 산솜다리는 레온토포디움 레이오레피스(Leontopodium leiolepis)로 마지막 종소명에서 달라지는 데서 알 수 있듯, 유사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다른 종의 식물입니다.
“히말라야의 나라 네팔에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가기 위해 닐기리 산을 에돌아 내려서는 고원 길은 천상 화원이었습니다. … 한국에서는 설악산 깊은 곳에서나 어쩌다 만날 수 있는 산악인의 꽃. 에델바이스는 이곳에선 너무 흔합니다. 아예 꽃밭을 이룰 정도이니까요.” 몇 해 전 유명 산악인 오은선 씨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등정에 앞서 한·일 간 신문에 보내온 편지의 한 대목입니다. 오씨 역시 에델바이스와 산솜다리를 같은 식물로 착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에델바이스가 꽃밭을 이룰 정도로 핀다는 말이 오래 기억됩니다.
수많은 인명피해를 낸 지진 참사에도 불구하고 히말라야의 나라 네팔 고산지대에 전 세계 산악인들의 꽃 에델바이스가 눈처럼 환하게 무더기무더기 피어나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고 했던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처럼 네팔인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Where is it?
현재 국내에 자생하는 솜다리속 식물은 대략 4종. 솜다리와 산솜다리, 한라솜다리, 왜솜다리(사진)가 그 주인공들로, 꽃잎처럼 보이는 5~10장의 포엽이 흰 솜털을 뒤집어쓴 듯 보이는 데서 ‘솜다리’란 공통의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포엽의 형태와 크기 등의 차이에서 머리 이름이 갈리는데, 식물학적 특성보다 자생지의 차이가 구별 요소로 훨씬 알기 쉽다. 즉 솜다리는 금강산을 비롯해 평안도와 함경도 등 지금의 북한 지역이, 산솜다리는 강원도 설악산이, 한라솜다리는 한라산이, 그리고 왜솜다리는 강원도 고성, 양양, 평창과 충북 단양, 경북 봉화 등이 주 자생지다. 이 중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산솜다리는 우리나라 모든 산악인의 마음의 고향 설악산 해발 1000m 이상 산등성이 바위 절벽 곳곳에 두루 분포한다. 물론 많은 설악산 등반 코스 중 공룡능선과 서북능선 등의 높고 험준한 암벽에 가장 많이 자생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권금성은 물론, 비교적 쉽게 오를 수 있는 흘림골 코스에서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바위 절벽에 피어 있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장수대탐방소 ~ 대승령 ~ 안산 능선 곳곳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나른한 봄볕 아래 어머니를 생각하는 조창화(趙昌化·78) 대한언론인회 고문을 만나 담소를 나눴다. 그는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어머니의 값진 추억을 생생하게 그렸다. 흡사 계절마다 살아 돌아오는 장미꽃의 슬픈 아름다움처럼, 어머니의 모습은 그렇게 조 고문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오직 1남 2녀 세 자식을 위해 헌신하셨죠. 그중에서도 아들인 제게 몰두하셨어요. 그래서 저에게 어머니는 늘 애틋하고 각별한 존재죠. 이렇게 다시 회고하니 늘 혼자였던 어머니 모습에 목이 멥니다.”
조창화 대한언론인회 고문은 어머니 박신행(朴信行) 씨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이 없다며 가슴 아파했다. 어머니와 가족의 삶을 풀어내는 그의 목소리에는 그리움과 아쉬움이 보태졌다.
그는 자신이 일곱살이었을 때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 나이 마흔을 훌쩍 넘어 낳은 아들이었던 그는 1945년 초, 어머니의 손에 끌려 서른 시간이 넘는 기차 여행 끝에 평안남도 평원군 한천이라는 작은 포구에 닿았다. 그곳은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그 좋은 재산 다 놔두고 몸만 나왔으니 어떻게 하나”라는 어머니의 푸념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는 그곳에서 한천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일제 치하였던지라 다마고(계란) 잇고(1개), 니고(2개)를 먼저 배워야 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일본 학교를 다니다 온 두 누이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곤 했다.
해방이 된 그 해 8월 하순의 어느 날, 그는 아버지 조이선(趙利善) 씨와 함께 100여 리 떨어진 평양에 간 적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갔는데 연단에서 키 큰 남자 한 명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저 사람이 바로 김일성이다”라고 했다. 마치 불길한 전조 같은 기억이었다.
함경도로, 서울로, 그리고 부산으로
소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그의 가족은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함경남도 신고산이란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 땅과 과수원, 광산 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고산 인민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아침마다 소년단 행진곡을 부르며 대열을 갖추어 등교할 때는 신바람이 났다. 그러나 역사의 비극이 그에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상한 사람들에게 끌려 나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안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전갈이 왔다. 죄목은 ‘유산 계급’. 공산당의 ‘숙청’ 작업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 사건이 있고 나서 소년 조창화는 학급 위원 자리에서 내쫓기고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게 됐다. 부당한 처사들 속에서 학교에 나가는 둥 마는 둥 집에서 지내야 했던 그에게 아버지 소식을 갖고 왔다는 한 남자가 “어머니, 아버지는 안변 감옥을 탈출해 이미 월남을 했고, 나는 너희 3남매를 남쪽으로 데려가기 위해 왔다”면서 아버지의 편지를 내밀었다.
3남매는 1948년 8월의 어느 날, 부모님을 만나기 위한 2박 3일 동안의 월남 행군을 시작했다. 행군은 주로 밤에 이루어졌다. 고생 끝에 도착한 동두천에서 오랜만에 부모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서울에서 아버지의 권유로 공옥소학교라는 사립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남대문시장 근처, 지금의 상동교회 뒤에 자리 잡은 이 학교는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 반씩밖에 없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소학교였다. 고된 경험 끝에 부모님과 함께하게 됐다는 것에서 그는 겨우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2주 남짓 지났을 시점인 1950년 7월 13일, 그의 나이 12세 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서울이 온통 인민군으로 뒤덮인 날, 그는 아버지를 모신 영구차에 탄 채 무악재를 넘어 꾸역꾸역 밀려오는 인민군을 헤치고 홍제동으로 향했다. 묘지였던 그곳에서 5일장으로 장사를 치렀다. 그리고 그 후 석 달 동안 방공호에서 살아야 했다.
얼마나 지난 다음일까? 어느 날 국군이 서울로 들어왔고, 그해 12월 하순에 그의 가족들은 다시 짐을 꾸려 부산으로 가는 피난 열차를 탔다. 무려 6일 동안의 거북걸음 끝에 부산역에 도착한 것이 12월 26일 즈음, 어머니와 2녀 1남의 3남매는 사고무친(四顧無親)한 부산역 한 귀퉁이에서 고달픈 피난살이를 시작했다.
홀어머니 슬픔 헤아리지 못한 불효자
“그때 어머니는 겨울 털모자를 팔고, 그 돈으로 쌀을 사고…. 그런데 뭔가를 팔려고 해도 살 사람은 별로 없고…. 그 와중에 아버지를 잃은 어머니의 슬픔이나 아버지의 빈자리를 제가 헤아려 본 적이 있는가 하면…. 그런 기억들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엄청 울 수밖에 없었죠.”
부산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건 상상조차 못했다. 학교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동네 아이들과 사귀던 그는 미군 부대에 들어가 미군의 구두를 닦아주는 ‘슈샤인 보이’를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요즘의 우리들은 꽁트에서나 볼 수 있는 ‘기브 미 쪼꼬렛’이라는 어설픈 영어 뒤에 숨어 있는 건 시대가 만들어낸 고통이고 절박한 생존의 기술이었다. 조 고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슈샤인 보이’를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어머니는 “이대로 뒀다가는 애가 큰일나겠다” 싶었다. 더군다나 애지중지 키운 집안의 단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그를 미군 부대 대신 데려간 곳은 문래동 대선소주공장의 한 귀퉁이였다. 그곳은 미국인들에게 학교를 빼앗긴 성남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노천 수업을 받는 곳이었다. 이리하여 그의 인생에서 네 번째 초등학교가 시작된다. 졸업이 예정된 6학년 말까지는 한 달 정도 남았을 뿐이었고 다른 아이들은 연합고사를 준비한다고 야단법석인 가운데 그는 친구들의 노트와 책을 빌려 보기에 바빴다. 비록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달포 뒤에 성남초등학교 졸업증명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로써 초등학교 4개를 거친 그의 남행만리(南行萬里)는 부산을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의대에 안 가 죄송합니다”
1953년, 이제 여드름꽃이 피는 나이가 되는 조 고문은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대열에 끼여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고등학교 3학년으로 입학한 그는 당장 다가온 대학 입시 준비로 24시간이 모자랐다.
“제가 있던 3학년 4반 담임인 육인수(故육영수 여사의 오라버니) 선생님을 만난 어머니는 ‘창화는 무조건 서울대학교 의대에 가야 하니까 그리 지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의과가 싫어 정치학과에 서류를 제출했고 어머니와 육 선생은 제가 당연히 의대에 넣은 것으로 알고 있었죠.”
서울대 정치학과에 합격한 그는 마치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서울 등지의 대표 준재들이 모인 형세를 이루는 정치학과 내에 함경도 대표로 자리 잡았다. 1961년에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 대한일보 기자로 들어가 국회, 청와대 출입을 시작했다. 1973년, KBS 정치부 차장으로 이직하면서 언론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보다 탄탄해진다.
“제가 KBS 부산방송 총국장이었던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나이 53세일 때 아버지와 사별하고, 이후 35년이란 세월을 우리 남매 세 명을 위해 개가하지 않고 홀로 살다가 88세에 세상을 떠나셨죠. 어머니는 아버지와 삶을 같이한 시간보다 홀로 산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카리스마 있는 여장부로 기억했다. 그의 기억 속의 어머니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막일도 거르지 않았고 늘 당당했다. 나이 들어 출석하는 노인회관에서는 화투도 잘 치고 보스 노릇도 곧잘 했다. 그는 어머니를 인정이 많고 시대를 앞서 갔다고 평했다. 지고는 못사는 성격에 일본어와 중국어도 유창했던 것도 어머니다운 점이었다.
어머니 묘지에 대동강 모래를 뿌리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는 언제일까.
“다들 비슷하겠지만,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는 어려울 때, 힘들 때죠. 어머니는 언제나 제 편이셨으니까요. 어떤 일이 있어도, 영원한 제 편이니까요.”
어머니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땠을지는 미뤄 짐작이 간다. 어머니는 그에게 무한한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하지만 그 사랑에 그는 변변하게 보답 못한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저는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 집에서 전화가 왔는데,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못 뜨더군요. 그래서 비행기로 못 움직이고, 새마을호를 겨우 타서 6시간 걸려서 집에 도착했죠. 그날 아침에 어머니가 ‘애비는 어디 있냐’고 물으시며 ‘화장실에 좀 가자, 씻고 싶다’고 하셨답니다. 가시면서 저를 찾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삶을 묵묵히 보여준 것뿐이지만, 그 모습 자체가 그에게는 80세가 다 된 지금까지 ‘정신적 울림’으로 남아 있었다.
“청와대 출입 시절 잊지 못할 일이 한 가지 있지요. 1972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적십자회담 취재단으로 들어가 대동강을 산보하고 그 강변에서 모래를 채취할 수 있는 큰 행운을 얻었어요. 그래서 1985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고향 대동강의 모래를 뿌려드릴 수 있었죠.”
여기까지 말한 그는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아버지 묘가 없어진 기억이 나서다.
“사실 아버지 묘지를 잃어버렸어요. 부산 피난살이에서 돌아와보니까 홍제동의 묘지 자리를 불도저로 확 밀어버렸더군요. 그래서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아버지 영정만 가지고 합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어머니 유골을 파서 화장을 했어요. 그리고 용인공원묘지에 가로 60cm, 세로 40cm 사이즈의 와합, 즉 눕히는 비석으로 바꿨어요.”
비석에는 배천(白川) 조 씨 가족묘라고 쓰여 있고 뒤에는 사용 수칙을 적었다. ‘여기는 배천 조씨 묘지다, 화장을 해서 묻는다, 직계비속들은 만약 꽉 차면 맨 위부터 그대로 파서 거기에 다시 사용해라.’ 용인공원묘지가 상당히 큰데 그렇게 한 건 그가 처음이다.
“한 40구는 들어갈 것 같아요. 내가 죽고, 한 5대까지는 걱정하지 않을 것 같네요.(웃음)”
그는 어렵게 묘지개혁을 했다며 어머니 같은 여장부라면 좋아하실 일이라고 평했다.
그가 요즘 즐겨 말하는 ‘첫째는 남한테 피해 주지 말자이고, 둘째는 정리정돈’이란 말 또한 어머니에게서 배운 습관이다.
“요즘 이제 일곱살인 우리 손녀에게 할아버지가 뭐라 말했냐고 집적대면 ‘남 폐 끼치지 마라, 정리정돈이요’하고 냉큼 대답하죠. 그 재미에 삽니다.”
조 고문은 인터뷰 내내 진중하고 묵직하게 어머니 이야기를 하다 손녀 얘기가 나오자 금방 함박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를 향한 추모의 정은 이제 유일한 손녀에 대한 짝사랑이 되어 삶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에게 손녀는 그의 어머니가 주신 축복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울퉁불퉁한 비포장과 포장 길이 4㎞ 정도. 하늘 향해 쑥쑥 뻗어나간 소나무 숲길을 지나고 몇 개의 개울을 잇는 다리를 건너고 시원한 계곡 길을 따라 지루할 정도로 한참을 가야만 민가 한 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띄엄띄엄 텃밭 주변으로 민가가 둥지를 틀고 있는 모습에서야 겨우 사람 사는 곳이라는 곳을 알게 되는 곳. 바로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응곡마을(일명 통바람골)이다.
글 이신화 여행작가
마을 사람들은 뒷산에 매가 사는 골짜기라는 뜻을 지닌 ‘응곡산(鷹谷山)’이 있어서 ‘응곡마을’이라고 하는데, 지도상에는 응복산(1359.6m)으로 표기되어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10~11가구가 있다. 토박이들은 아니고, 10~20여 년 전부터 이곳에 둥지를 튼 사람들이다. 대부분 겨울에는 마을을 떠나 있다가 봄철 산나물이 나올 즈음에 모여든다. 4월 말에서 5월 초순경이면 얼레지 나물로 초문을 연다. 얼레지는 일명 ‘가제 무릇’이라 불리기도 하며 고산지대의 숲속 음지에 자라는 백합과의 다년생 초본이다. 높이가 25㎝ 정도 자라고 4월에서 6월에 자주색(흰색 변이도 있다) 꽃이 핀다. 잎이 얼룩덜룩하여 얼레지라 이름 붙였다고 하며 꽃말은 ‘질투’ 또는 ‘바람난 여인’이라고 한다. 얼레지는 씨앗이 발아하여 꽃을 피우기까지 7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산나물을 뜯으러 산으로 오르는 동네사람들을 따라 함께 나서본다. 임도가 끝나는 지점에서 1시간 정도는 걸어야 한다. 나무들은 아직도 썰렁한 겨울 분위기를 내지만 산행 길에 간간이 피어난 야생화가 반갑다. 노랗게 피어난 ‘괭이눈’과 ‘꿩의 바람꽃’, ‘댓잎 현호색’ 노랗게 종 모양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백두대간 능선이 아니면 볼 수 없는 ‘한계령 풀’이 눈 속에 들어온다.
특히 한계령 풀은 무지 희귀한 꽃으로, 지리산 모데미골에서 처음 발견된 모데미풀처럼 한계령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죽 길을 지나고 능선 참나무 군락지 밑으로 귀하디귀한 야생화가 눈에 띄더니만 능선을 넘어 고갯길에 이를 즈음에는 완전히 야생화 화원이 펼쳐진다. 일부러 누가 이렇게 아름다운 화원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노란 꽃 사이로 이미 나물꾼들이 뜯어가 버린 얼레지의 보랏빛 꽃까지 합세해 더욱 빛이 난다. 생계가 아니라면 그냥 피고 지는 얼레지꽃 군락지까지 합세했다면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야생화 화원이었을 것이다. 주민들은 나물이나 뜯어가라고 하지만 보랏빛 꽃이 너무나 처연해, 가늘게 봄바람 한 줌에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꽃잎이 가련해서 차마 뜯어버릴 수가 없다.
◇약수산에서 만난 신비한 철분 약수, 명계 약수터
그렇게 한참이나 야생화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새싹 움트는 몸짓을 느끼면서 돌아오기 싫은 길을 되돌아 나온다. 나물꾼들이 얼레지를 채취해 내려와 나물 삶는 데까지는 몇 시간의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을을 비켜 임도길 중간 즈음에서 계곡 물을 건너가면 소로가 나온다. 계곡 옆길로 난 길이라 산책하기에 아주 좋다. 가래나물, 팥고비, 풀고비, 당귀싹, 화살나물, 골담초 등 나물 새순이 뾰족하게 올라오고 애기 괭이눈과 꽃잎에 점이 박혀 보기 쉽지 않다는 ‘긴 개별꽃’도 눈에 띈다. 산나물과 야생화를 관찰하면서 10분 남짓 올랐을까? 자그마한 폭포를 앞두고 약초꾼이 지어놓은 천막이 나선다. 켜켜이 장작을 싸놓고 부엌과 방을 들여놓고 뒤편에는 연통도 있다. 분명히 사람이 살았음직한 나물꾼의 천막은 당시에도 이곳에 있었는데, 여전히 사람은 만날 수 없다. 자그마한 폭포를 끼고 계곡을 건너면 암반 주변이 철분 빛으로 벌겋게 변해 있다. 누군가 계곡물과 섞이지 말라고 돌을 쌓아 막아 두었다.
자연은 참으로 신비한 일이다. 계곡 옆에 어떻게 이런 철분 약수터가 생겼는지 생각할수록 오묘하다. 붉은 물 사이로 뽀르르 기포가 올라온다. 물위에 떨어진 낙엽을 걷어내고 손으로 물을 마신다. 강한 철분 맛보다 톡 쏘는 탄산 맛이 느껴져 설탕만 넣으면 사이다와 같다. 이 약수를 통상 명계약수라고 하는데 통바람 약수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산 이름도 약수산이다. 약수산을 둘러싸고 남으로는 명계약수, 서쪽으로는 삼봉약수, 북으로는 갈천약수, 동으로는 불바라기약수가 있다. 약수가 여러 곳에서 나온다고 하여 부른 듯하다.
◇직접 만든 아궁지에 산나물 삶아 말리고, 지친 몸에 술 한잔
두어 시간이 지난 후, 필자가 이 마을에서 맨 처음 만났던 노부부가 사는 집을 찾는다. 자루에 나물이 가득 차면 집으로 와서 곧바로 나물을 삶는다.
시멘트로 네모진 통을 만들고 뒤에 연통을 단 아궁이가 있다. 장작불을 지피고 다듬지 않은 얼레지를 넣고 뚜껑을 닿고 5분 정도 삶아주고 양철통 위에 꺼내 말리면 되는 일이다. 할아버지가 나물을 삶는 동안 할머니는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한다.
커다란 무쇠솥이 두 개, 고기도 구워 먹고 화로로 쓰는 널찍한 양철통이 한편에 놓여 있다. 깊은 산 물을 끌어다 쓰기 때문에 수도꼭지는 잠그지 않은 채로 졸졸 물이 흘러내린다. 무쇠솥에 물을 한가득 넣고 군불을 지핀다. 자그마한 풀무를 돌려가면서. 가스렌지 위에서는 구수한 된장국이 부글부글 끓는다. 하루 종일 나물 뜯느라 지친 몸을 얼레지 된장국에 찬밥을 넣고 김치 한 가지로 때우는 것이다.
“하루 정도만 우려내면 돼. 미역국처럼 맛이 좋아서 꼭꼭 얼려 두었다가 자식들에게 주지.” 겨울이면 춘천에 살다가 봄철 나물 뜯으러 온다는 할머니는 인심 좋게 된장국 한 그릇을 퍼준다. 그 맛이 얼레지 묵나물보다 훨씬 좋아서, 슬그머니 욕심이 생긴다. 뜯어오지 못한 것을 후회할 판이다.
그때 이웃 할아버지가 됫병을 들고 나타나 술잔을 돌린다. 자그마한 부엌에 옹기종기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화기애애하다. “얼레지는 귀한 나물이라서 호텔이 아니고서는 먹기가 힘들지. 말려 팔면 제법 비싸게 팔리는 산나물이야. 얼레지는 1주일 정도 후면 끝이 나고 그 다음에도 참나물, 곰취, 전우치 등 두 달 반 정도는 나물 작업을 해야 해.”
힘겨운 산나물 뜯기 작업 후에, 푸성귀로 배를 채우면 얼마나 허기질까 할 즈음 아랫집에서 전화를 한다. 이 집은 더 풍성하다. 고기에 직접 재배했다는 표고버섯과 막 뜯어 낸 곰취와 참나물, 산마늘 쌈이 차려져 있고, 여름까지 먹는다는 묵은 김치와 된장, 굵은 소금장이 있다. 막 지은 밥과 꽁치조림까지 곁들여지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계속 찾아든다. 할일 없는 겨우내 모여 술잔치를 벌였다는 사람들.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면서 밤이 이슥할 때까지 술판을 벌인다.
이 지역에서 나물은 이들의 생계수단이고, 나물 철이 끝날 때까지 산길 오르락내리락 하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사람은 이제 지긋지긋한 작업이 되지만 어쩌다 한 번 들르는 여행객의 눈에는 행복하기만 하다. 아직까지 이런 곳이 남아 있다니. 이것을 관광상품화한다면 덜 힘겹게 살 텐데 말이다. 돌아오는 길, 유난히 하늘에 떠 있는 달빛이 환하다.
주소 홍천군 내면 통바람길
찾아가는 방법 영동고속도로 → 속사IC → 운두령 넘어 창촌 방면으로 난 56번국도 이용 → 창촌 → 구룡령 가는 길에 우측 명계리로 들어가는 446번 지방도로 우회전. 다리 앞에서 왼편 비포장 길로 좌회전 → 응곡마을
맛집과 숙박정보 응곡마을 통바람 산장(011~9795~1684)에서는 식사와 민박이 가능하다. 또 가는 길목인, 이승복 기념관 주변에 운두령횟집(033~332~1943, 송어회, 용평면 운두령로 825), 장수촌(033~332~7419, 토종닭, 용평면 운두령로 286)이 괜찮다. 삼봉 자연휴양림(033~435~8535~6, 홍천군 내면 삼봉휴양길 276)이나 자연속으로(033~334~0770, www.naturalpension.com, 용평면 운두령로 109-49)와 같은 펜션에서는 와인을 시음할 수 있다.
여행포인트 얼레지 채취는 올해 끝이 났고 계절에 맞는, 또 다른 산나물이 싹을 틔울 것이다. 여행객들은 필요하다면
주민들에게서 사오면 될 일이다.
△글ㆍ사진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
2012년 18대 대통령선거에서 가장 큰 화두는 복지 문제였다. 당시 대선 후보들이 나왔던 TV토론에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고 말했었고, 박근혜 대통령은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하다고 반박했었다.
그때만 해도 이후 3년여의 세월이 흘러 ‘증세 없는 복지’가 한국에서 가장 뜨거운 말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난무했던 ‘증세 없는 복지’라는 말이 가진 허점을 일찌감치 꿰뚫은 이가 이미 있었다. 전 건설교통부 장관이며 건전재정포럼을 만들어 이끌어 가고 있는 최종찬(崔鍾璨·65) 대표가 바로 그 사람이다. 건전재정포럼 주간회의를 하고 있는 그의 아침을 들여다봤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이태인기자 teinny@etoday.co.kr
최종찬 대표가 건전재정포럼 설립에 참여한 것은 대선을 코앞에 둔 2012년 가을이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가 양쪽이 서로 복지 공약 많이 하면서 경쟁하는 모양새였어요. 그래서 그 양상을 본 재정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아니 대체 나라를 어디로 가게 만들려고 복지 얘기만 하는가’ 해서 경종을 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건전재정포럼이 만들어질 수 있었어요. 그때 발기인을 보면 아무래도 재정 쪽에 몸담았던 공무원 출신들이나 장,차관들, 그리고 언론계 출신들이 많았죠.”
최 대표를 인터뷰한 건전재정포럼 회의 장소에서는 안병우 전 국무조정실장,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장준봉 전 경향신문 사장, 고광철 전 한국경제 편집국장, 허승호 신문협회 사무총장, 이계민 전 한국경제신문 사장, KDI 박진 교수, 김원식 한국재정학회장 등등 쟁쟁한 사람들이 참석하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실무 경제에 있어 LG경제연구원, 현대경제연구원에서조차도 정보를 참고한다는 건전재정포럼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박근혜 정부 지난 2년간 재정정책 평가 및 향후 대응방향에 대한 주제 회의 안건이었다.
“나라 걱정하는 열정이 남들 못지 않잖아요. 새벽에 나와서 이러는데, 이게 무슨 대통령 앞에서 국무회의하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말하자면 국무회의 못지않게 진지하잖아요. 그런데 이분들이 무슨 내가 재정정책 만든다고 누가 물어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자진해서 걱정하는 이런 분들이 많거든요. 누가 귀담아 듣지도 않는데, 이걸 어떻게 제대로 전달할까, 말귀를 알아듣게 할까, 어떻게 보면 이런 분들이 많고, 어떻게 보면 이게 국가의 자원이고 힘이죠. 이런 분들이 있어서 이 사회가 지탱이 되는 거지요.”
한국 사회를 향한 거침없는 쓴소리를 모으니 ‘부족한 복지재원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라는 발제였다. 토론을 통해 박 대통령 공약 검증과 복지 어떤 모양으로 갈 것 인지, 법인세 ·부가가치세 ·소득세 등 증세를 어떻게 해야 하나를 짚어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나라 걱정에 쓴소리 쏟아내는 건전재정포럼의 현장
이처럼 운영위원들의 의견을 아울러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를 고심하는 최 대표는 서울대를 나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1971년 행정고시에 합격하면서 공직에 발을 들인 그는 이후 경제기획원, 제1대 기획예산처 차관 등을 거치며 경제통으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국민의 정부에서 건설교통부 차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맡은 후 참여정부에서 초대 건설교통부 장관으로 지내면서 참여정부의 각종 부동산 정책을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이후 2008년에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낙선한 그는 같은 해 저서 을 펴냈다.
“평생 공직생활을 하다 보니까 ‘어떻게 해야 우리 사회가 골고루 잘 살 수 있느냐’는 생각이 계속 있습니다. 그래서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골고루 잘 살 수 있는 시스템 개혁을 하는 데 일조를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공허한 것보다 구체적인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날 하는 총론이나 ‘막연히 열심히 일해라’라는 말이 아니라 열심히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정치가들은 말로만 대의를 찾는가?
최 대표는 우리 사회를 보면 시스템이나 현실과 안 맞는 것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사회를 향한 최 대표의 시선은 정치에 대한 관심을 지울 수 없게 만들었고, 수많은 문제점들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정치가들은 지역 균형도 말만 할 게 아니라, 중대선거구 같은 제도를 도입하면 지금보다는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만날 지역균형 하자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구체적으로 제도를 개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호남에서도 새누리당이 당선될 수 있고 대구에서도 민주당 국회의원이 나올 수 있고….”
‘국회의원들이 왜 자기 지역에 다리 놓는 문제에만 신경 쓰고 있을까’에 대해, 최 대표는 현재의 소선거구제도가 문제라고 설명했다. 만약에 전국 비례 대표로 한다면 우리 동네 다리 놓는 문제는 국회의원들이 안 할 거 아니냐는 반문이다. 정치가들이 말로는 대의를 생각한다고 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늘 어물쩍 비켜가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논리가 없는 현재의 교육감 제도, 고쳐야 한다
국민들이 골고루 인간답게 사는 길을 찾는 데 작은 힘이 되고 싶다는 그의 인생 후반부에서 불합리한 것들이 눈에 들어와 사회시스템 전반적인 공부를 하고 있다. 그중에 최 대표의 직설은 교육 부분도 건드리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교육자치와 지방자치를 엄격하게 분리해놨단 말이죠. 여기에도 상당히 많은 문제가 있어요. 지자체장은 무상급식에 대해 ‘내가 공약한 것도 아니고 내가 왜 돈을 대느냐’라며 관심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들여다보니까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같은 교육자치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어요.”
최 대표는 교육감이 정치적으로 무소속이라는 것이 논리가 없는 제도라고 질타했다.
“교육감은 당적을 갖는 것이 안 좋다, 이거잖아요. 그런데 어느 나라고 교육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대통령 아니에요? 대통령은 정치인이죠. 그리고 교육부 장관은 현직 국회의원이잖아요. 교육감은 교육부에서 정한 것의 일부를 집행하는 입장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위에 있는 두 사람이 다 정치인이에요.
서울시 교육은 서울시 교육감이 다 하는 게 아니라 예산은 서울시 교육위원회, 조례는 서울시 의회 교육 분과에서 정해요. 다 정치인들로 구성됩니다. 아, 그럼 정책을 결정하는 이들이 온통 정치인인데, 정작 교육감은 당적이 있으면 안 된다니 이게 무슨 논리예요.”
예를 들어 현재 강원도는 교육감은 전교조 출신 야당 성향이고 도의회 교육위원들은 다 새누리당 계열이다. 교육감은 혼자 야권 출신인데, 대통령, 교육부 장관, 강원도의회, 전부 다 여권인 상황에서 어떻게 당해내느냐는 반문이다. 교육 시스템에 가장 밀접한 영향을 받는 학부모들조차도 자식들 교육은 중요하다면서 이러한 모순적인 교육감 시스템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는 상황에 분노한 최 대표는 그에 관한 칼럼을 쓰고 난생 처음으로 지난해 1월에 가두시위도 했었다.
시니어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사회를 바꾼다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의미있는 일을 찾아 거침없이 피력하던 최 대표는 그래도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부분을 높이 평가했다.
“뭐 요란스럽게 신문, 언론에 안 나서 그렇지 요즘 제가 볼 때는 우리 사회와 나라를 걱정하고 봉사하는 게 과거에 비해 많아졌어요. 제가 여러 군데 참여도 해봤는데, 우리 건전재정포험, 또 시니어 어치브먼트(Senior Achievement : SA)라든지 제가 공동대표로 있는 선진사회만들기연대, 돌아가신 남덕우 총리, 지금은 이승윤 총리가 하시는 선진화포럼 등, 그런 곳들을 보면 오시는 분들이 다 옛날에 상당한 사회적 역할을 하던 분들이에요. 그런 분들이 뭘 바라고 아침부터 토론하고 그러겠어요. 우리 사회에 나름대로 기여하려는 의지가 참 많아요.”
최 대표는 건강한 시니어들이 과거에 비해서 많아졌고, 경제적으로도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이뤄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파악했다. 요즘은 60대 전후로 은퇴해도 향후 20~30년은 더 사회적으로 활동하게 된 세상이다. 시니어의 힘이 강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공익을 위해 애쓰는 대한민국 멘토가 많아지는 현상에 긍정적 의견이다.
의미 찾는 일에 미래를 만들며 살고 싶다
성공적인 포럼 운영과 인생 후반전을 드라이빙하고 있는 최 대표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최 대표는 생애설계를 하면서, 하고 싶었는데 아쉬운 일이 있었을까?
“딱히 없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를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보람 있는 일을 해야겠다 싶어요. 옛날처럼 밤새워 일할 순 없지만 만날 놀 수도 없으니까. 그 의미 있는 일이라면, 역시 우리 국민들이 골고루 잘 살 수 있게 만드는 쪽에 내 경험이나 능력을 살려서 재능기부 비슷한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2월 중순 저 멀리 여수 금오산에 변산바람꽃이 피면서 꽃바람이 일기 시작하더니 복수초와 너도바람꽃·노루귀·꿩의바람꽃이 꼬리를 물고 꽃봉오리를 활짝 터뜨리며 전국을 뒤덮고 있습니다. 급기야 산이 산을 껴안고 강이 강을 휘감아 도는 강원도 정선 백운산 정상 아래 깎아지른 바위 절벽에도 봄바람·꽃바람이 불어 화창한 봄날이 무르익고 있음을 알립니다.
특히 영월·정선·평창 지역 사람들이 ‘뼝대’라 부르는 석회암 바위절벽 틈새 곳곳에 우리나라 특산식물인 동강할미꽃이 도도하게 피어나 첩첩산중 강원도 자연생태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냅니다.
앞서 고고성을 터뜨린 변산바람꽃이나 너도바람꽃·노루귀 등 손톱 크기의 자잘한 풀꽃에 비해 크기도 훨씬 클 뿐더러 많게는 10여 송이가 무리지어 피고, 꽃색도 자주·보라·분홍·흰색 등 형형색색이어서 가히 봄 야생화의 우두머리라 이를 만합니다. 헌데 그 이름이 동강할미꽃이니, 이른바 ‘5060세대’가 한창 피어나는 ‘아이돌’을 향해 “나 아직 안 죽었어. 어디 한번 붙어볼 테야?” 하며 황혼의 비장미를 불태우는 듯합니다.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 꼬부랑~ 걸어가고 있네” 노랫말에서 알 수 있듯, 허리 숙여 땅을 보고 피는 다른 할미꽃과 달리 동강할미꽃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곧추세우고 꽃망울을 활짝 터뜨립니다.
1997년 생태사진가 김정명씨에 의해 처음 일반에 알려졌고, 3년 뒤 이영로 박사에 의해 동강할미꽃(Pulsatilla tongkangensis Y.N.Lee & T.C.Lee.)이라는 이름의 한국 특산식물로 공인되었습니다. 동강할미꽃의 발견, 그리고 세계 식물학계의 한국 특산식물 인정은 결국 1990년대 논란이 되어온 동강댐 건설 백지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 사이 석회암과 맑은 물이 만나 환상적인 에메랄드빛을 만들어내는 동강과 그 상류 조양강을 따라 걸으며 형형색색의 동강할미꽃을 만나보기 위해 해마다 전국에서 수백, 수천의 야생화 애호가들이 줄지어 찾아옵니다. 그 행렬을 보면서 동강댐이 건설돼 동강할미꽃 등 자연생태계가 파괴됐을 상황을 상상하기만 해도 참으로 끔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Where is it?
강원도 영월·정선·평창 일대 조양강과 동강변, 정선 백운산, 그리고 삼척 덕항산이 동강할미꽃의 주요 자생지이자 탐사지이다. 특히 동강과 그 상류인 조양강 유역 어디에서나 한두 송이 동강할미꽃을 만날 수 있지만, 정선군 정선읍 귤암리, 정선군 신동읍 점재마을,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 문희마을, 영월군 영월읍 문산리 등이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집단 자생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정선 백운산 정상 부근 칠족령에 올라 조양강이 굽이치며 만들어낸 ‘한반도지형’을 내려다보며 천애절벽에 핀 꽃(사진)을 만나는 것은 동강할미꽃 탐사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첫눈이 온다며, 함박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며 겨울 찬가를 부른지 얼마나 됐다고 너나없이 봄 타령을 합니다. 2015년 새해 첫 해돋이를 보겠다며 새해맞이 축제에 환호작약한 지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꽃피는 봄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사람들의 이런 간사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꽃이 바로 변산바람꽃입니다. 해서 아직 엄동설한인 2월에 누구보다 먼저 꽃망울을 터뜨리며 꽁꽁 언 얼음장 밑에서 봄이 이미 저만큼 오고 있음을 전합니다.
“급하기도 하셔라/누가 그리 재촉했나요,/ 반겨줄 임도 없고/차가운 눈, 비, 바람 저리 거세거늘/행여/그 고운 자태 상하시면 어쩌시려고요/살가운 봄바람은, 아직/저만큼 비켜서서 눈치만 보고 있는데//어쩌자고 이리 불쑥 오셨는지요./언 땅 녹여오느라/손 시리지 않으셨나요./잔설 밟고 오시느라/발 시리지 않으셨나요…”(이승철의 ‘변산바람꽃’ 중에서) 복수초와 함께 봄의 전령사로 꼽히는 변산바람꽃의 발 빠른 개화에 대해 이승철 시인은 “남들은 아직 봄 꿈 꾸고 있는 시절 첫 계절을 열어 고운 모습으로” 서둘러 온다며 “누가 이름이나 기억하고 불러줄까”하고 반색하면서도 안쓰러워하는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변산바람꽃이 학술적으로 알려진 것은 1993년. 전북대 선병윤 교수가 변산반도 내변산에서 채집된 표본을 근거로 한국특산종으로 발표하면서부터입니다. 이에 따라 학명에 첫 발견지인 변산(byunsanensis)이 속명으로 들어갔고, 선 교수(B.Y.Sun)도 발견자로 그 이름이 표기됐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자생지가 변산반도 등 특정 지역에 국한된 것은 아니어서 누구나 조금만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면 손쉽게 만나볼 수 있습니다. 멀리 바다 건너 제주는 물론 전남 여수에서부터 북으로 강원도까지 거의 전국에서 자생지가 확인되고 있는 것이지요.
제주 한라산과 여수 금오산 등 남부 자생지의 경우 이르면 2월 중순부터 변산바람꽃을 볼 수 있는데, 이른 봄에 피는 야생화가 거의 그렇듯 허리를 숙이고 낙엽 더미나 돌 틈 사이를 세심하게 살펴야 방긋 웃는 ‘변산아씨’의 환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키는 물론 굵기 또한 콩나물 줄기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가냘픈 줄기에 달덩이처럼 희고 둥그런 꽃을 한 송이씩 달고 있는 변산바람꽃은 지역에 따라 2월부터 4월 사이 북풍한설이 주춤하는 사이 잠깐 피었다가 이름 그대로 바람처럼 사라집니다.
꽃잎처럼 보이는 5~7장의 둥근 흰색 이파리는 사실은 꽃받침 잎으로, 깔때기모양의 자잘한 녹황색 꽃잎(4~11개)을 대신해 벌, 나비를 불러들이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변산바람꽃 외에도 너도바람꽃 나도바람꽃 홀아비바람꽃 회리바람꽃 꿩의바람꽃 남바람꽃 만주바람꽃 태백바람꽃 들바람꽃 등 여러 종의 바람꽃이 자생하면서 봄철 산지 계곡 주변이나 숲 가장자리에서 일 주일여 간격으로 흰색의 꽃을 연달아 피웁니다. 다만 ‘원조 바람꽃’이랄 수 있는 바람꽃만은 한여름인 7~8월 홀로 피어나 설악산 정상을 하얗게 물들입니다.
where is it?
신종 발표 표본을 채집했다는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가 가장 널리 알려진 자생지. 특히 부안군 상서면 청림마을은 십수 년 전부터 변산바람꽃의 자생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생태계 파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 전부터는 제주도 절물자연휴양림과 여수 금오산 등이 변산바람꽃의 조기 개화지로 알려져 찾는 발걸음이 많아졌다. 국내 최고의 해돋이 명소로 꼽히는 여수 향일암 1km 전에 차를 세우고 금오산으로 들어서면 무성한 칡넝쿨 아래 돌 틈 사이 곳곳에서 수십, 수백 송이의 변산바람꽃이 ‘여수밤바다’를 환하게 밝히는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 경기도 안양시 수리산의 병목안 계곡은 수도권 인근의 변산바람꽃 자생지로 야생화 애호가들이 많이 찾는 자생지이다. 경남 거제도, 전남 고흥의 봉래산, 울산 무룡산 등 남부 지역은 물론 전북 마이산과 내장산, 경북 주왕산, 그리고 멀리 설악산 신흥사 주변 등 강원도에서도 변산바람꽃을 만날 수 있다. 최근에는 경기도 연천 지장산 원심원사 계곡에서도 자생지가 발견됐다. 접경지역에 가까운 지장산의 경우 3월 중순 이후에나 꽃이 핀다. 경기도 안산의 작은 섬 풍도에서 피는 꽃은 꽃잎이 조금 더 크고 모양이 다소 다르다는 이유로 풍도바람꽃이란 신종으로 등록되었다.
서울신문 기자로 29년 일했다. '김인철의 야생화 산책'(ickim.blog.seoul.co.kr)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야생화 화첩기행'(푸른 행복) 저자.
※영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단종이다. 비운이라는 단어가 늘 따라붙는 어린 임금. 그의 마지막 발자취를 따라 영월을 찾았다. 열일곱 살 소년의 곡절이 녹아든 그곳에서 그의 애달픈 마음을 헤아려 보고자 한다.
글ㆍ사진 김대성 여행 작가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막상 청령포를 마주하고 서니 어쩐지 강을 건너기가 망설여진다. 서강 물줄기가 휘감아 돌아 삼면을 둘러싸고 서쪽으로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마치 섬과도 같은 곳, 청령포.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유배생활을 했다. 558년 전 이 강을 건너야 했던 어린 임금의 심정은 어땠을까. 어쩌면 그 역시 배에 오르기 전 이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영영 영월 땅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체념하면서 말이다. 한 나라의 왕이 어찌 이리 참담한 생애를 살아야 했나 하는 안타까움이 밀려든다.
배에 오르니 채 2분도 안 돼서 청령포에 닿는다. 자갈밭을 지나 울창한 송림 사이로 들어서면 단종어소가 모습을 드러낸다.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복원한 어소에는 밀랍인형으로 단종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고, 마당에는 ‘단묘재본부시유지’라는 영조의 친필 비석이 세워져 그의 한을 위로하고 있다. 담장 밖 소나무 한 그루는 마치 왕을 향해 머리를 조아린 신하처럼 단종의 거처를 향해 굽어 있어 눈길을 끈다.
나이 어린 임금의 유배생활은 하루하루가 원망이자 그리움이요, 두려움이자 눈물이었다. 아마도 할아버지 세종의 인자한 얼굴이 떠올랐을 테고, 왕위에 오른 지 2년 4개월 만에 돌아가신 아버지 문종에 대한 원망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을 낳고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이별한 아내 정순왕후를 향한 그리움이 마음에 사무쳤을 것이다. 당장에라도 한양으로 돌아가고 싶었겠지만, 숙부인 세조의 서슬 퍼런 기운을 어린 그가 어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그저 조용히 숨죽여 눈물로 달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곳 숲에는 특별한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바로 ‘관음송’이다. 수령 600년의 이 노송은 단종의 애달픈 유배생활을 보고, 그 절규와 울음소리를 들었다 하여 관음송이라 불리어 왔다. 두 갈래로 갈라진 이 나무에 소년 왕이 걸터앉아 시름을 달랬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관음송을 지나면 산책로는 자연스레 절벽 위 능선 길로 이어진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하는 수고가 따르지만 그리 높지는 않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 절경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 소박한 망향탑이 있다. 한양에 두고 온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하나 둘 돌을 주워 쌓아올렸다는 돌무더기가 왠지 애처로워 보인다. 다시 산책로를 따라가면 해질 무렵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던 노산대다. 노산대에 올라서니 절벽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한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이렇듯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렸을 단종 생각에 돌아서는 발걸음이 괜스레 무겁게 느껴진다.
◇청령포를 떠나 동을지산에 묻히다
하늘도 단종의 슬픔을 알았을까. 그해 여름 참 많은 비가 내렸다.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길 지경에 이르자 단종의 거처를 동헌의 객사 관풍헌으로 옮겼다고 한다. 청령포에 유배 온 지 두 달여 만의 일이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단종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터지고 만다.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된 것. 이 일로 단종은 노산군에서 다시 서인으로 강봉되고, 결국 사사되었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 제6대 왕에 오른 단종. 돌봐 줄 사람 하나 없는 어린 임금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결국, 3년 만에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457년 10월 24일 그렇게 떠나갔다. 그해 그의 나이 17세였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세조는 “단종을 죽여 강물에 버리고 그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하라”고 했다. 단종의 주검이 청령포 앞 강물에 버려졌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영월 호장 엄흥도가 나섰다. 그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입는 것을 달게 받겠다”면서 아들과 함께 시신을 수습해 영월 ‘동을지산’에 묻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장릉이다. 단종은 승하한 뒤에야 비로소 편안한 자리를 찾은 듯하다. 영월 장릉이 조선왕릉 가운데 3대 명당으로 꼽히고 있으니 말이다.
◇241년 만에 복위되다
어린 임금의 자취를 따라가는 길, 장릉을 빼놓아서는 안 될 일이다. 장릉은 청령포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다. 단종은 사후 241년 만에 왕으로 복위되었고, 노산묘도 장릉이라는 능호를 받아 왕릉으로서의 모양새를 갖췄다. 특히 장릉에는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과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위패를 모셔 놓은 장판옥이 함께 자리한다. 또한, 그들의 영령을 추모하는 제단인 배식단사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단종역사관에는 단종의 생애와 유배생활 그리고 죽음과 복위되기까지의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다.
역사관 뒤 능선을 따라 5분 정도 오르면 능침이 나타난다. 여타 왕릉에 비해 단출한 느낌이다. 담장을 둘렀으나 병풍석과 난간석은 세우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니 가냘픈 소나무 한 그루가 시선을 빼앗는다. 단종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부인 정순왕후의 능인 남양주 사릉에서 옮겨 심은 정령송(精靈松)이다.
이쯤에서 정순왕후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었을 때, 정순왕후도 서인으로 강등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다. 남편과 청계천 영도교에서 생이별한 그녀는 동대문 밖에 초막을 짓고 평생 영월 땅을 바라보며 그 한을 달랬다고 한다. 그렇게 64년을 홀로 지내다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단종과 함께 복위되었고, 남편만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여 사릉(思陵)이라는 능호가 붙여졌다.
조선 왕릉의 왕과 왕비 중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단종과 정순왕후. 이렇듯 그들은 조선왕조에서 가장 슬픈 역사로 남았다. 단종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어린 임금의 그리움이 마치 내 것인 양 가슴에 맺힌다. 내일 날이 밝으면 사릉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세상이 메마를수록 순수한 감성에 목이 마른다. 가슴을 적시는 애잔한 사랑이야기에 울컥해보고 싶을 때도 있다. 눈물로 이별을 고했던 나의 지난 사랑도 짠하게 아름답기만 하다. 가 생각나는 까닭도 그러하다. 김하인의 감성멜로에 추억을 떠올리는 이가 있듯, 그에게도 순수하던 그 시절의 책갈피 같은 책 한 권이 있다. 볼프강 보르헤르트(Wolfgang Borchert)의 다.
폐허냄새가 나는 아름다움을 지닌 아이로부터
20대 중후반 쯤 만나던 여자에게서 를 선물 받았다. 문학을 정말 좋아하던 아이였다. 술도 같이 많이 마셨고, 담배도 그 아이에게서 배웠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혼자 담배를 필 적이면 가끔 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는 그녀를 ‘폐허냄새가 나는 아름다움을 지닌 아이’로 기억한다. 그런 그녀를 만나던 시절, 그는 한창 시를 썼다.
“오늘 같은 가을날, 술자리에서 그 애가 ‘오늘 날씨가 쌀쌀해’, ‘단풍잎이 예쁘다’라고 운을 띄우면 나는 술을 먹다가도 즉석에서 시를 썼다. 목소리가 좋았던 그 여자는 내가 쓴 시를 바로 낭송해주곤 했다. 그 아이의 시를 들으면서 술을 마시면 술맛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대학시절 신춘문예 3관왕을 거머쥔 그였지만 막상 문학인의 길은 맹렬한 정글과도 같았다. 사범대를 나온 그의 동기들은 이미 교사가 되어 안정적인 수입과 사회인으로서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꾸준히 글을 썼지만 이렇다 할 수입이 없던 그 시절. 가난의 바닥을 치고 있었다.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아이와는 오래 만나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래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내 자신이 비장하고 멋있기는 하다. 나는 그때 내가 마흔까지 살면 잘 살리라 생각했다.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기 때문에 건장한 형들이 많으니 나 하나쯤은 내가 꽂히는 것(문학)에 의해 멸망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좋게 말하면 독기였고, 형들 표현으로는 ‘너는 병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내걸 수 있는 것이라곤 달랑 목숨 하나뿐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그는 어느 시점엔가 선회를 했다. 더 이상 문학지상주의에 취하지 않고 ‘문학도 직업이고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람, 사랑 이야기 쪽으로 돌아섰다.
“그때를 떠올려 보면 나도 나름 풍부한 연애를 했다. 내가 보낸 여자들을 떠올려보면 그때의 애틋함이 살아나고, 그런 감정과 이미지를 하나씩 가져와 멜로소설을 썼다. 그랬기 때문에 글을 쓰며 인위적으로 짜 맞추려 하지 않아도 감정의 흐름을 표현해 낼 수 있었다.”
이별 없는 세대로부터
그는 를 처음 읽고 ‘문체가 굉장히 좋고 미려하다’ 느꼈다. 책의 저자 볼프강 보르헤르트(1921~1947)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느낀 단상들을 회화적으로 풀어낸다. 존재에 대한 성찰, 외압적인 폭력과 전쟁 등에서 오는 무위와 슬픔에 대해 구어적 표현보다는 미세한 느낌만을 담았다. 그는 글을 읽노라면 ‘금속적인 전쟁의 차가움’, ‘북유럽 날씨의 칙칙함’, ‘담배연기’ 등이 떠오른다 했다.
“저자는 굉장히 서정적인 사람인데 전쟁을 경험한 뒤 상처를 입고 ‘사는 게 뭘까’라는 허무함에 빠지게 된다. 요즘 사람들도 출근전쟁, 취업전쟁 등 일상에 전쟁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며 숨 가쁘게 살아간다. 이 책은 그런 작은 전쟁들 속에서 인간이 ‘왜 사는가’에 대한 그 본질, 자아와 타인의 관계 특히 자기 내면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인간이 통찰력이 있으면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의 연속을 보듬고 살아갈 수 있다. 때문에 당시에도 현대에도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통하는 것이다.”
그는 존재의 성찰을 원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 “‘내가 왜 사는가’, ‘국가와 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인간의 야망과 폭력은 무엇인가’라는 구조적 성찰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물론 책에서 답을 주지 않지만, 한 번쯤 고개를 숙여보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게 시작이다. 여기에 자신의 지식의 총량을 동원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깨달아야 한다. 나에 대해 측은히 생각하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주변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측은지심이 발동하면 그게 인문학으로 가는 본질이다.”
그는 를 ‘아주 순수하고 맑은 청년정신이 느껴지는 책’이라 표현했다. 처음 읽었을 때와 자신의 상황은 달라진 부분은 있지만, 존재의 무의미성, 자기성찰 등에 있어서 주는 메시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내 나이가 쉰을 넘었지만 내 생각의 70~80%는 여전히 20대 중반에 머물러 있다. 그때의 사고와 정신의 힘으로 평생을 산다. 나이가 들어 외향이 변하고 강개함은 늘어났을지 몰라도 내 마음은 늘 20대다. 우리 아버지가 ‘사람 마음은 늘 안 늙는 거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 당시는 이해를 못했다. 어른이 되면 풍채도 우람해지고 빌딩도 짓고 생각도 점점 거대해지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김하인으로부터
그는 최근 ‘김하인 아트홀’을 운영하고 있는 강원도 고성에 국화꽃향기 협동조합을 출범시켰다. “강원도에는 민간협동조합이 262개나 있다는데 고성에서는 ‘국화꽃향기’가 첫 번째 민간 협동조합이다. ‘첫사랑’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렸을 만큼 자연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지역인데 침체되고 움직임이 없어 안타깝다. 문화예술을 기반으로 하는 국화꽃향기 협동조합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고성을 찾아 삶을 재미나고 즐겁게, 또 가능하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문화를 향유하면서 살아갔으면 한다.”
그에게는 또 다른 바람이 있다. 올해 말 를 시작으로 그동안 사랑받았던 그의 소설들을 다시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것이다.
“초창기 때 내가 쓴 글들을 보면 문장력도 어설프고, 치기어린 모습도 보이지만 옹달샘을 발견하듯 아주 깨끗하고 순수한 맛이 살아 있다. 때문에 나는 당시 내 글들에 대해 별로 고칠 생각이 없다. 세상이 흉흉하고 악이 판을 칠수록 그 반대 끄트머리에 있는 이들은 순수로의 회귀를 원한다. 그들에게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맑은 수채화 같은 내 초창기 작품들을 통해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
“(서킷 코너링을 위해) 바이크와 함께 몸을 옆으로 점점 뉘이다가 급기야 뺨이 지면에 닿으려는 느낌이 드는 순간. 바로 그때 느껴지는 짜릿함이란 말로 형언하기 어렵죠.”(웃음)
전국 바이크 족들이 모여 실력을 뽐낸다는 경기도 가평 유명산 정상. “크앙~”하는 거친 굉음과 함께 날렵하면서도 묵직한 기운이 느껴지는 슈퍼 바이크(배기량 1000cc이상) 한 대가 멈춰섰다. 이 바이크에 앉은 라이더가 헬멧을 벗자 마초(남성) 라이더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머리를 단아하게 뒤로 빗어 넘긴 준 연예인급 미모의 여성이 시선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바로 내년 하늘의 뜻을 깨닫는다는 지천명(知天命·50세)의 나이를 바라보는 아마추어 슈퍼 바이크 레이서 겸 주부, 전규정(49)씨였다.
◆우울증 = 그녀의 바이크 인생은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의 한 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그래픽 디자인 등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던 그녀에게 우울증이란 진단이 떨어진 것이 바로 그 즈음이다. 친구들이 하나둘 결혼하고, 직장과 집만 오가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삶이 낳은 결과였던 것. 즐겁게 빠져들 수 있는 것을 찾아보라는 의사의 권유에 사격을 비롯해 승마, 스킨스쿠버, 보드, 심지어 킥복싱까지 영역을 넓혀 갔다. 바이크도 그때 시작했다.
“강원도의 한 리조트 근처에서 할리 데이비슨 바이크 400대가 무리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했죠. 오토바이 하면 택배 배달만 생각했는데 저렇게 타는 사람들도 있구나 했죠. 그길로 서울의 한 바이크 교습소를 찾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교관이 스쿠터 레이스도 나가보라고 해서 레이싱 세계에 입문하게 된 거예요.”
◆와인딩 = 슈퍼 바이크는 최고속도가 300㎞를 넘나든다. 전씨 역시 경주용 서킷에서 시속 200㎞를 훌쩍 넘겨 내달릴 정도 스피드에도 자신있다. 남성에 비해 체력적으로 떨어지는 여성인 데다 아마추어 라이더라는 점을 감안하면 준 선수급이라는 것이 주변의 얘기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즐기는 플레이는 따로 있다. 바로 와인딩(굽이길)이 그것. 서킷에서 바이크와 몸을 뉘어 업-다운을반복하며 코너링할 때 느껴지는 스릴감이 그녀가 바이크에 앉는 가장 큰 이유라고. 특히 코너를 돌 때 바이크가 기울어져 얼굴이 땅에 부딪칠듯한 느낌이 들 때가 가장 희열감이 느껴진단다. 이때 속도가 무려 시속 140㎞에 이른다. 그런 스피드가 무섭긴 하다고. 하지만 바이크를 서서히 세우며 코너를 탈출할 때 느껴지는 ‘해냈다’는 해방감은 그녀에게 가장 큰 성취감을 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녀는 바이크 투어링에 나설때 굽잇길을 골라서 다닌다. 도로가 뱀처럼 꼬불꼬불 꼬이면 금상첨화다.
강원도 느랏재, 태기산, 구룡령, 대관령, 한계령 등이 그녀가 주말이면 즐겨 찾는 투어링 코스라고. 특히 굽잇길이 심한 지리산 뱀사골이 라이딩 재미에는 그만인데 너무 멀어 자주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차량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평화의 댐도 그녀의 단골 투어링 코스다.
“업-다운으로 이어지는 와인딩은 바이크 타기의 백미예요. 내년에는 BMW원메이커 레이스 대회에 출전할 계획이에요. 더 늙기 전에 나가서 남성들과 당당히 실력으로 겨뤄보고 싶어요.”
◆남편보다 좋은 것 = 전씨의 바이크에 대한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름 절약을 아는 주부 9단 그녀도 바이크 앞에선 한없이 무너진다. 이런 이력은 미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이크를 만난 이후
로 돈을 버는 족족 바이크에 투자했던 것. 그래서 지금 소유하고 있는 바이크만 3대다.
가장 아끼는 애마는 BMW S1000RR. 가격이 무려 4000만원에 이른다. 나머지도 예사롭지 않다. MV아구스타 브루탈레675는 대당 2000만 원을 호가한다. 베스파 이태리 스쿠터도 전씨가 즐겨타는 바이크다. 레이싱용 장비까지 합하면 금액은 더 올라간다. 레이싱용 슈트를 비롯해 헬멧, 부츠, 라이딩 자켓, 라이딩 바지, 글로브 등을 합치면 2000만 원을 훌쩍 넘는다고. 여기에 2년 전부터 바이크 세계에 입문한 남편 바이크(할리데이비슨)와 장비를 합치면 추가로 수천만 원이 더해진다. 바이크 라이딩 취미생활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주부다. 바이크에 투자하는 돈 이외에는 지독할 만큼 아낀다. 일단 자신을 치장하거나 꾸미는 데 돈을 들이지 않는다. 성형은 물론이고, 그 흔한 피부 마사지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다. 심지어 양말 살 돈을 아끼기 위해 남편 양말을 신기도 한다고. 그녀의 털털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렇다 보니 여자들이 다들 좋다고 한다는 명품 가방하고도 거리가 멀다.
“피부관리요? 일단 저를 누가 만지는 것 자체가 싫어요. 그래서 팩도 안 하고 미용 같은 것에 관심이 별로 없어요. 제 유일한 취미는 바이크죠. 바이크에 들인 돈이 엄청나긴 하지만 아깝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남편보다 바이크가 더 좋으니까요.”(웃음)
◆스턴트 우먼 = 바이크는 그녀의 직업도 바꿔버린다. 다니던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스턴트우먼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 것. 교습소에서 바이크 레이싱 교육을 받는 동안 알게 된 영화제작자에게서 “운동신경이 남다르다. 스턴트 전문 교육을 받아보는 게 어떤가”라는 말을 듣고, 그 길로액션 스쿨에 등록한 것. 각종 무술과 액션 기술을 두루 섭렵한 시기가 바로 이때다.
지난 2005년 반올림 드라마에서 배우 고아라 대역(여자 경찰)으로 나왔고, 드라마 막상막하에선 배우 성유리 대역(군인)으로 바이크를 탔다. 특히 MBC 베스트 극장에선 건물 3층에서 트럭으로 뛰어내려는 스턴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요즘도 대역배우 요청이 들어오면 선별해서 방송출연하기도 한다고. 내년 지천명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지만 여전히 현직으로 활동하고 있을 정도로 건강에 자신이 있다. 이외에도 오토 바이크 로드매니저로도 활동하고 있다.
“강해지고 싶은 욕구가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린 시절부터 남자 형제들하고 자라다 보니 여기저기 치이면서 자랐거든요. 특히 남존여비라는 개념이 너무 싫었죠. 내가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스턴트가) 저도 무섭긴 한데 그런 두려움과 긴장감이 저를 더 즐겁게 해요. 바이크를 타는 것도 일맥상통하는 셈이지요.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사는 게 즐거워요.”
◆국제 여성라이더 협회 = 그녀의 바이크 사랑은 해외로도 이어졌다. 지난 2012년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국제 여성라이더 협회 행사에 한국 대표(4명)로 참가하게 된 것. 총 300명 정도 참여하는 국제 행사에 당당히 그녀가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녀는 국제적인 행사에 태극기가 찍힌 레이싱복을 입고 한국여성 라이더의 위상을 알리는 기회를 얻게 돼 영광스런 자리였다고 했다. 게다가 투어형 바이크를 현지에서 렌트해 약 12일 동안 오스트리아 곳곳을 누비며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 금상첨화였다고.
그렇지만 전씨는 바이크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없어졌으면 한다고 했다. 바이크 타는 사람들 전체를 폭주족이나 불량배로 매도하고 배척하는 세태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는 얘기다. 오토 바이크 타는 사람들의 취향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의미다. 바이크 설 자리가 좁아지는 것도 불만이다. 자동차 전용도로는아예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는 데다 일반도로에서도 사륜차들의 텃세에 치여 배척당하기 일쑤라는 것. 외국에서는 바이크를 출퇴근용으로 더 권장하기도 하고 사륜차들이 오토바이에 길을 비켜주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는데 한국은 선진국과 대조적인 모습만 연출되고 있다고. 그녀는 여성 라이더에 대한 편견도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실제 금녀의 구역이다 보니 처음에는 미친 여자 취급까지 받았다고. 특히 자신을 여성이 아닌 똑같은 라이더라 봐달라는 것이 그녀의 부탁이다.
“체계적인 라이더 훈련을 받고 경험을 쌓은 후 자기 실력껏 바이크를 타면 그리 위험하지 않아요. 조금 빠른 자전거를 탄다고 생각할 수 있지요. 우리나라는 오토바이를 타면 안 좋게 보는 이유가 유교적인 사상에 기인한 것 같아요. 오토바이 타면 주렁주렁 치장하고 문신하고 하다 보니 더 곱지 않은 시선을 주는 것도 있고요. 자기 취향일 수 있는데 말이지요.”
◆바이크 미술 전시회 = 그녀는 아직도 도전하고 싶은 일들이 남아 있다고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대학에서 전공했던 미술(서양화)이다. 전씨는 본인의 천직은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미술만으로는 먹고 살기 어려워 직장생활에 파묻혔고 바이크를 타면서 더 등한시하게 됐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얘기다.
더 나이를 먹기 전에 놓았던 붓을 다시 쥐고 짬짬이 작품활동을 해서 미술 전시회도 연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다. 여기서도바이크는 빠지지 않는다. 바이크를 조형화하거나 형상화한 이미지를 모티브로 그림을 그리겠다는 구상이다. 그래서 전시회 이름도 ‘바이크 미술 전시회’로 벌써 지어놨다.
“바이크는 나의 심장이고, 삶의 원동력이에요. 바이크가 없으면 삶의 의미가 없어지는 셈이지요. 체력이 닿는 때까지 바이크를 탈 생각이에요. 특히 나이를 먹으면서 좀 더 진지한 자세로 바이크를 생각하고 즐기고 있어요. 젊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있어 좋기도 하구요. 단순히 멋있어 보인다거나 스피드만 즐기기 위해 타는 이들도 많은데 저는 이제 (그런 것은) 초월했어요. 바이크는 제 인생을 바꿔준 대상이고, 삶의 가치를 높여 풍성하게 해준 최고의 친구예요. 이젠 누구보다 진지하게 바라보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바이크를 탈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