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필자 반으로 전학온 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 아이는 필자가 동경해마지 않는 서울에서 왔다. 필자 집으로 놀러온 그 아이와 뒷산에서 장수하늘소를 잡으면서 놀다가 “야, 이건 ‘상수리’라는 거다”고 동굴동굴한 참나무 열매를 정체를 알려주었다. “아니야, 도토리야!” 그 친구가 악착같이 ‘도토리’라고 우겼다. 그 친구를 떠올리면 ‘도토리’와 ‘상
필자에게 신의 은총과 의를 가르쳐준 두 친구가 있다. A는 원수처럼 좋지 않은 관계에서 필자에게 용서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고 B는 절친한 친구였는데 의를 가르쳐준 은인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 둘은 직장 친구이다.
A는 앙숙이었다. 필자와 그는 회사에서 업무 시간이면 사사건건 논쟁을 벌여 상종을 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미웠다. 그런 그가 정년퇴직하고나서
‘부모 팔아 친구 산다’는 말이 있다, 친구가 중요하다는 말로, 노력을 해야 친구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다. 과연 어디까지를 친구라고 해야 하나. 50대가 되어 만나야 진짜 친구다. 필저와 그는 50대에 만났다. 그래서 친구로 잘 지내고 싶었다.
서로 도움이 되어야 친구가 된다. 말이 통해야 친구다. 그러러면 친구와 내가 열심히 노력만큼 얻어진다. 술집에
결혼한 지 3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사소한 문제로 부딪힌다. 부부 간에 항상 마음이 일치가 되기는 쉽지 않다. 살아온 환경, 습관, 성격, 남녀 간의 사고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일까. 어떻게 조화시켜 원만한 가정을 만들어 갈까 고민해도 매번 크고 작은 소란이 계속된다. 부부 간의 의견다툼이 심해진 것이 최근에 이혼율이 높아진 원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서
친구는 사전적인 정의로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이다. 친구는 옛 친구가 좋고 옷은 새 옷이 좋다는 속담이 있듯이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고 한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므로 친구가 필요하다. 사회관계가 끊어진 은퇴 이후에 친구의 가치가 더 커진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그러러면 허물없이 친밀하게 지내되 피할 것은 피해
필자가 갖고 있는 ‘어설픈 친구론’이란 게 있다. 친구는 만나면 즉시 울타리 없는 평화로움에 춤추듯 흐뭇해지는 사이다. 얼마나 오래 못 만나고 지냈는지, 그동안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가 전연 문제가 되지 않는 사이 말이다. 어느 시점부터랄 것 없이 성큼 다가오는 옛정과 추억들이 되살아나면서 얘기의 바다가 출렁거리는 마냥 즐거워지는 관계다. 얘기 줄거리가 이어
필자는 고등학교 졸업 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등학교 졸업반 반창회 대표를 맡아왔다. 그동안 졸업 10주년, 20주년, 30주년, 35주년 행사를 치렀다. 그 행사 때마다 반 친구들에게서 회비를 걷고 행사 안내 확인 전화를 수차례씩 돌렸다.
그뿐 아니다. 매년 봄에 한 차례 반모임을 가졌고 연말에는 송년회를 했다. 그때마다 날짜와 장소를 잡고 회비
우리 말에 부모 팔아 친구 산다고도 한다. 친구보면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있다. 또 학력은 친구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더구나 요즘은 자라는 아이들이 사람보다 기계를 더 가까이 한다.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이 사람을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현상이 올까봐 신생아 때부터 빠르면 임신 중에도 태아의 친구를 만들어 주는 태교를 하거나 플랜을 만드는
다들 진정한 친구가 몇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생각해 보면 필자도 주위에 친구가 많기는 하다. 대학 졸업 후 몇십 년을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이어오는 동창모임이 있는가 하면 그중에서도 특히 마음 맞는 친구 셋은 삼총사가 되어 맛집 탐방이나 국내, 해외여행도 함께하고 있다. 여행은 역시 친구들하고 떠나야 자유롭고 좋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또
결혼식에서 말한다. '이 결혼을 통하여 이제 몸과 마음이 한 몸이니 머리카락이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하기보다는 싸우며 파뿌리가 되기도 한다. 부부는 한 몸이 되어 자식을 낳고 연대감을 가지며 가족을 보살피고 양육의 의무를 나눈다. 이러는 사이 사랑으로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한 몸 인줄 알고 일을 벌이면 알 듯 모르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