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에어비앤비가 내세우는 여행 방법이다. 친구, 가족이 아닌 현지 주민과 하루 정도 살아보는 건 어떨까? 여름휴가 시즌을 맞아 외국을 가보고 싶었으나, 강원도 영월의 한 에어비앤비를 찾아가 숙박했다. 혼자 떠난 여행. 역시 그곳에는 기분 좋은 만남이 있었다는 사실! 웃음 가득했던 시간이 벌써 그리울 따름이다.
서울에서 고속버
필자는 한국전쟁이 나던 해 자식 많은 가난한 농사꾼의 9남매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의 풍요로움을 느낄 때마다 돌아가신 부모 생각에 마음 한구석 애잔함이 밀려든다. 한국전쟁 이후 폐허로 변한 농촌에서는 극심한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한 13명의 대가족이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가마솥에 밥을 해야 할 만큼 식량이 필요했
도시 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모두 한 번 쯤 꿈꾸는 것 중 하나가 전원생활이다. 아침이면 지저귀는 새 소리에 눈 뜨고, 지나는 바람이 건네는 나뭇잎 스치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말하지 않아도 찾아오는 계절이 그린 그림에 취하고 ….
그래서 필자도 경치가 좋은 양평에 깨 밭을 사서 깨가 쏟아지게 농가주택을 지었다. 집을 설계하며 어디에 무엇을 둘까, 신바람
필자의 이민 시기는 1980년대 초반. 이민 가기 전에 이민1세가 살아야 할 삶의 행로가 불보 듯했다. 이미 필자보다 먼저 이민한 언니로부터 기능도 익혀오지 말고 노동력이나 강화하여 오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래서 필자가 한 이민 준비는 연고도 없는 시골에서 밭매기 봉사 두어 달 한 것이었다. 흙과 함께 잔뼈가 굵은 농군의 아내와 함께 이른 아침부터 땅거미
밤새 내리던 비가 개었다. 잠에서 깨어 밖을 보니 하늘은 맑고 해가 중천에 떠 있다. 부모님은 일찍부터 들에 나가셨는지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학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책 보자기를 들고 학교로 냅다. 동 뛰었다. 동네 입구를 막 빠져나가는데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범아! 어디 가니?” 논에서 줄을 지어 모내기하던 사람 중에 아버지와 어머
필자는 1944년 2월 16일 태어났다. 당시는 각박한 삶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여명이 바로 문밖인 시기이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로 일제가 최악의 모습을 보였던 시기라 민간의 식량이 부족할 대로 부족했기 때문에 산모가 영양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했다. 애를 낳았는데 자라지 못하여 큰 쥐만 하더라”는 말을 곧잘 했다. 좋은 점이라면 출산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 만 3년1개월의 종지부를 찍고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되었으나 전쟁의 후유증으로 피폐해진 농촌은 더욱 먹고살기가 어려워졌다. 필자는 휴전이 끝난 직후인 53년 8월 14일 경기 부천시 영종면 중산리 1385(현 인천 중구 중산동)에서 5남 3녀의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이 전쟁에 패한 가장 큰 요인으로 곽재우 장군의 민병으로 꼽았다고 한다. 어느날 갑자기 생각도 않던 의병이 나타나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다.
곽재우 장군이 휘두르는 게릴라전술은 어느 병법이나 전술에도 없는 신출귀몰한 전술을 구사하므로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었다고 한다.
곽재우는 의병대장으로, 무인으로
방송이나 잡지들이 꿈의 도시 제주에 자리 잡은 일반인과 연예인을 앞다투어 취재하고 있다. 제주 올레길을 수시로 걷는 사람, 특수과일농사로 일하면서 비용 창출하는 사람, 제주에 놀러 온 지인과 맛있는 제주특산물로 식사하며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도 든다. 특히 제주의 예쁜 바다 색깔을 보면 마음이 상당히 흔들릴 때도 있다. 사는 도시에서 뻔질나게 쏘
필자 가족이 놀러 간 적이 딱 한 번 있다. 5남2녀로 나는 맏딸이다. 엄청난 식구가 놀러 갈 수 있는 차가 있던 것도 아니고, 버스를 타야만 했다. 그 버스도 하루 다섯 차례 다녔다.
필자의 고향은 괴산이다. 그곳에는 쌍곡, 화양동이 있는 휴가지다. 필자 집은 그 곳에서 십 여리 떨어진 곳에 살았다. 사람이 붐비는 휴가철이 되면, 버스에 사람이 꽉 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