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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흔이라는 나이가 주는 의미
- 서울 어느 단체에서 어르신 무료취업 상담실을 운영한다고 광고를 이곳저곳에 내 걸었다. 모집직종을 보니 경비,청소,주차관리,요양보호사,식당보조,지하철택배,치과기공배달,기타직종이라고 적혀있는데 노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직종이 총 망라되어있다. 더 추가한다면 농어촌 일손 돕기 외에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어르신을 모신다고 하면서 나이제한으로 70세까지만 뽑는다고 한다. 70세 초과는 명함도 내밀지 말라고 미리 공고문에 못을 박았다. 다른 말로 하면 70세가 넘으면 받아주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아침에 테니스장에 나갔더니 여기저기서 수근 거린다. 무슨 말인가 들어봤더니 올해나이 70세인분이 우리 동호회 테니스모임에 가입해서 함께 운동을 하겠다고 어제 찾아왔단다. 일차적으로 회장이 면담을 해보고 반승낙을 한 상태인데 며칠 후 코트에 나와서 실력이나 인품 등 이런저런 것을 검증받기로 한 모양이다. 너무 나이 많은 분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 회원들이 수군대는 요지다. 여기가 무슨 양로원이냐! 왜 그렇게 나이 많은 분을 받느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테니스장도 그냥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가꾸어야 한다. 눈이 오면 눈도 치워야 하고 테니스코트를 평탄하기 위한 솔질도 하루 두 번은 해야 하고 라인기로 줄도 수시로 그어야 한다. 소금도 뿌리고 석회석도 들고 와서 라인기(line機)에 채우는 등 잡다한 일도 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아직까지는 나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번잡한 일을 아무리 신입회원이라 하더라도 나이 많은 분에게 막 시키기는 어렵다. 또한 테니스는 과격한 운동이고 순발력을 필요로 하는데 마음은 앞서고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다칠 우려도 있다. 과거 아무리 운동을 했다하여도 젊은 애들을 실력으로 당하기 어려울 텐데 누가 한편이 되어서 게임을 해 줄 것인가도 현실적인 고민이다. 자칫 동호회 분위기를 잡칠 우려도 있다는 걱정이다. 젊은 회원들이 우려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요즘 70대의 나이에 펄펄 나는 사람도 있다. 나이로 군림하려는 생각을 이미 버리고 젊은이와 대등한 입장에서 함께 달릴 각오가 된 ‘액티브시니어’도 많다. ‘나이로 그럴 것이다’ 하고 미리 예단하는 것은 편견이고 잘못이다. 사람이 70세가 넘으면 정신적 신체적 변화가 정말 어떻게 오는가. 주위에 있는 분들에게 물어봤다. 우선 81세의 우리 동네 호텔 대표님에게 물어봤다. 이분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기도 하지만 매일 두 시간씩 헬스클럽에서 건강관리를 하는 분이고 지금도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신체적 변화를 물어보니 돌아오는 대답이 “이 사람아 다른 것은 다 먹더라도 나이만은 먹지 말게”하시면서 80이 넘으니 식욕이 좀 떨어지는 것 말고는 잘 모르겠다고 하신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나이가 들면 신체적 정신적 노화는 어쩔 수 없는 필연이다. 이를 나이라는 칼날로 두부 자르듯 자르지 말고 21세기 의료과학의 힘으로 개별 맞춤으로 검증하여 건강한 사람은 건강상태를 인정해줘야 한다. 고령운전자라고 무조건 운전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성검사기간을 단축하여 검증된 사람은 계속운전을 허락하는 것이 좋은 예다. 스스로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는 사람에게 인센티브를 주어서 계속 일을 하도록 해주는 세상이 정의로운 나라다, 당연히 그렇게 바뀌도록 해야 한다.
- 2018-01-17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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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화단이 주목하는 작가, 이세현
- 매혹적이다. 그러나 불편하다. 이 찰나의 간극 속에 그의 ‘붉은 산수’가 있다. 하고많은 색깔 다 놔두고 하필 붉은 풍경이라니… 어디서도 마주친 적 없는 역설이다. 사람들은 그의 ‘산수’에서 유토피아를 찾고 디스토피아를 본다. 그가 장치한 은유와 비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탐을 내는 작가 이세현(李世賢·51).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 페라가모가 러브콜을 보내고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 울리 지그가 그를 만나러 영국까지 날아갔다. 붉은색을 화두로 삼은 뒤의 이야기다. 그는 파주 출판단지에 자리한 로우 갤러리(Raw Gallery)에서 보자 했다.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작업실 한쪽에 마련한 비영리 문화공간.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냥 놀이터다. 오후의 햇살을 잔뜩 빨아들이고 있는 ‘RAW’라는 글자가 문패처럼 달려 있었으므로 헤맬 일은 없었다. 저 ‘날것(raw)’의 의미는 그의 ‘붉은색(red)’과 또 어떤 방식으로 한바탕 내통하는 걸까. 느닷없는 상상을 하며 갤러리 안으로 들어섰다. ‘붉은 산수’와 맞닥트렸을 때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지 꼼짝없이 포위당한 느낌이었다. 매혹적이었지만 속수무책의 버거움도 몰려왔다. 그것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이었다. 잠시라도 놓여나기를 바라는 사이 이세현 작가가 나타났다. 그를 따라 작업실로 들어갔다. 화가들이 붓질하는 공간이 대개 그러하듯 캔버스와 수백 장의 밑그림, 물감, 붓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가 데려온 자연이 ‘붉은 산수’로 다시 태어나는 방이었다. ‘비트윈 레드(Between Red)’라는 제목으로 ‘붉은 산수’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영국 유학 시절이다. 2004년, 서른아홉에 유학을 떠났다. 꽤 늦은 나이였다. 무엇이 그를 충동질했을까. “20대에는 학원 강사로 지냈고, 30대에는 계원예술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작업도 하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요. 회화, 설치미술, 조각 등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실험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작품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한 무명작가였죠. 그러다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고 싶은 건 그림인데, 그래서 하기 싫은 일도 하는데,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가혹하게 물었습니다. 예술가 흉내나 내면서 적당히 살고 있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결기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타성에 젖은 나날이었다고 표현했지만 그는 자신과 끊임없이 불화한 듯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청산하듯 전세금 뺀 돈 6000만 원을 쥐고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친 듯 그림만 그려보고 싶어서였다.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는 그림 영국에 도착해 런던 첼시디자인아트컬리지에 입학했다.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그만큼 간절했을 유학생활. 하지만 처음부터 녹록지 않았다. “입학하자마자 영국 학생들 앞에서 내 작품을 슬라이드로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눌한 영어로 들뢰즈의 철학을 들먹이고 라캉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내 모습에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부끄러웠어요. 반대로 생각해봐요. 서양 학생이 동양 학생들 앞에서 공자 왈, 맹자 왈 하면 제대로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릴 하는 건지 우습지 않겠어요? 순간 식은땀이 났고 더 이상 아무 말 못하겠더라고요. 그날을 계기로 제 그림들을 다시 들여다봤어요. 서양의 저 거대하고 찬란한 현대미술은 그동안 내 것이 아니었구나, 뼈저리게 느꼈죠.” 낯선 땅에서 사고방식이 다른 서양인들을 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들의 아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쭙잖게 흉내나 내지 말고 내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이후 작업 방식도 바뀌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그때만큼 고민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매일 묻고 또 물었죠. 결국 동서양의 차이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과 문화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그리고 내 뿌리가 되어준 것들을 새로운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잠자고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작업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우리의 전통음식, 제사상, 돼지머리 등을 소재로 삼아 변화를 모색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군 복무 시절 야간 투시경으로 바라본 비무장 지대의 풍경이 불현듯 떠올랐다. 충격적일 만큼 아름다웠지만 온통 붉어 두려움과 공포감마저 들게 했던 우리의 산하. 야간 투시경 속 산하는 그렇게 ‘비트윈 레드’ 시리즈로 재탄생했다. ‘붉은 산수’를 본 사람들은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런던에서 졸업을 앞두고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려대던 날. 하루는 스위스에서 온 여자가 우연히 그가 그리고 있던 붉은 산수를 보고 마음에 든다며 작품이 완성되면 자기가 꼭 구입하고 싶다 했다. ‘붉은 산수’ 첫 번째 작품을 손에 넣은 사람은 버거 컬렉션 대표 모니카 버거였다. 그 뒤 그의 이름은 유럽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졸업전시회 때 내놓은 작품도 평론가와 수집가들에게 모두 팔려나갔고 여기저기서 전시 제의도 들어왔다. 이후 미국 페이스 갤러리, 프랑스 페로탱 갤러리 등에서 손을 내밀었고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유명 기업들도 그의 작품을 사갔다.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 울리 지그는 런던으로 직접 찾아와 그림을 사갔다. 외국에서 인기가 더 많은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붉은색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요. 이데올로기적 트라우마도 있고요. 또 집에 걸어두고 감상하기 편한 그림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외국 사람들은 취향이 다양해요. 작품에서 드러나는 철학과 시대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객도 많아요. 울리 지그가 제게 그러더군요. ‘당신 그림은 분단과 같은 한국 문제를 다루고 있어 참 좋다, 메시지가 분명하다, 묵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름답다, 물론 다른 훌륭한 한국 작가들도 많지만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당신 작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림이다’라고요. 그의 말에서 큰 답을 얻었습니다.” 어머니, 다비화실, 12색 모나미물감 전통 산수화의 다시점과 서양화의 묘사 방식을 통해 그가 재해석해낸 자연의 풍경은 겸재 정선과 같은 진경산수화 대가들의 정신을 더듬으며 다양한 변주의 과정을 거친 듯 보인다. 자연은 눈에 보이는 풍경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의 체험과 만나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이세현 작가에게 자연은 삼라만상이다. 인간사, 세계사와 분리될 수 없는 풍경이다. 자연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한 사람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군 복무 시절 돌아가신 어머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짧은 생이었다. “어머니를 화장하는 동안 벌판에 앉아 있는데 들꽃 향기가 났어요. 그만 슬퍼하라고 어머니가 주시는 마지막 선물 같았어요. 순간, 지나온 시간들이 아득해지면서 자연이 다르게 보였어요. 아름다운 풍경 뒤로 삶과 죽음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더군요. 어머니의 유해는 원하신 대로 처녀 적 살았던 통영의 작은 마을 해안에 뿌려드렸어요. 그런데 유학을 떠나기 전 그곳을 다시 찾았다가 깜짝 놀랐어요. 제2거제대교가 생기면서 마을이 통째로 없어졌더라고요. 어머니를 한 번 더 잃은 것처럼 슬펐습니다.” 온 나라가 개발의 신열에 들떠 있던 시대였다. 통영에도 관광지 개발 바람이 불면서 어머니에게로 가는 길은 끊겨버리고 말았다. 어린 시절이 몽땅 추방당한 듯했다. 거제도에서 태어난 이세현 작가는 부모를 따라 부산, 통영, 울산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아버지의 나전칠기 사업이 망해 도시빈민이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는 허약한 몸이었지만 닥치는 대로 일했다. 결국 건강이 더 나빠진 어머니는 통영 이모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됐고 어린 그는 어머니를 만나러 갈 때마다 자신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어쩌다 용돈이 생기면 문제집을 사서 공부했어요. 대학을 가야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나봐요. 미대를 가고 싶어 고등학교는 전통공예학교로 들어갔어요. 회화반이 있었거든요. 학교에 가보니 미술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태반이었어요. 나는 그런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본 적도 없고, 그때까지 12색 모나미물감이 최고인 줄 알았어요. 어느 날 학교에 가져가 자랑스럽게 펼쳐놓았는데 다른 애들은 전문가용 물감을 내놓더라고요. 기가 팍 죽었죠.(웃음)” 그래도 그림 그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고1 때부터 운 좋게 미술반 청소를 담당하게 되어 선배들 그림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면서 매일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려댄 그림은 100장이 되고 수백 장이 되었다. 그만큼 실력도 늘었다. 고3이 되면서 대학 진학을 결정해야 했다. 집안 형편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무턱대고 학력고사를 봤다. 성적이 괜찮게 나왔지만 철없다는 소리나 들을 게 뻔해 몰래 홍대 미대에 입학원서를 내고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다른 학생들은 학원에서 특강을 받는 등 분주해 보였다. 학원은 꿈도 못 꾸는 상황에서 그들과 경쟁할 생각을 하니 초조했다. 가난한 아버지가 밉기도 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문득 후배가 다니던 다비화실이 생각났다. “어머니 몰래 쌀을 훔쳐 학원으로 들고 갔어요. 돈이 없으니 쌀이라도 받고 그림을 좀 봐달라고 했더니 학원 선생님이 어처구니없어 하더라고요. 기특하면서도 맹랑한 놈이라 생각했겠죠.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그래, 한번 해보자!’ 하더군요. 옛날이니까 그게 가능했지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죠. 당장 그날부터 차가운 평상에 스티로폼을 깔고 함께 먹고 자면서 실기시험 준비를 했어요.” 결과는 합격. 게다가 장학생으로 붙었다고 하니 집에서도 서울 유학(?)을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계속 이어질 캔버스 속 이야기 이스라엘의 유명 아트딜러인 세르주 티로시는 이세현 작가의 작품에 대해 “매우 독특하면서도 세계 미술시장에서 주목받을 만한 무언가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국내외에서 핫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동안 국내는 물론 스위스, 미국,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중국 등지의 유명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갖는 등 빡빡한 일정을 보냈고, 2015년에는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 페라가모가 협업을 요청해와 스카프, 머플러, 블랭킷 등을 제작해 선보이기도 했다. 1월에는 홍콩문화원 개관전 기획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 하루가 48시간이어도 모자란 듯 보인다. 지금까지 그린 대부분의 ‘붉은 산수’를 해외 컬렉터들이 구입해갔다니 놀랍다. 캔버스 속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나이 듦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술가는 뭔가 다르게 대답할 줄 알았다. “나이 드는 게 좋아요. 이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용기가 생겼어요. 오해받는 것도 불편하지 않고요. 아, 또 하나 있네요. 포기할 줄 아는 것.” 얼마나 명료한가. 아무런 기교도 필요치 않은 저 투명한 각성은.
- 2018-01-17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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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적인 로봇’, 외로운 노후에 동반자 될까?
- 이른 나이에 아내와 사별한 A 씨(67). 그는 요즘 새로운 동반자가 생겨 일상이 외롭지 않다. 동반자의 이름은 ‘그녀’. A 씨는 오늘 아침도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그녀에게 날씨를 물어본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A 씨는 그녀로부터 오늘의 뉴스를 들으며 아침을 먹는다. 식사 후 약 복용도 그녀가 챙겨주는 덕분에 깜빡할 일이 없다. 외출에서 돌아온 A 씨를 반갑게 맞아주는 것도 그녀다. 저녁엔 책을 읽어주고 대화도 나눠준다. A 씨는 이제 남은 인생을 수명이 40년인 그녀와 동행하기로 했다. 아내와 사별하고 로봇과 일상을 함께하는 A 씨의 사례다. 그동안 로봇은 인간의 존재를 위협하는 차가운 금속, ‘로보트 태권V’ 같은 추억 속의 만화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멀게만 느껴졌던 로봇이 최근 우리 주변으로 성큼 다가왔다. 로봇은 크게 산업용 로봇과 서비스 로봇으로 나뉜다. ‘산업용 로봇’은 주로 제조업에서 물리적인 작업을 수행한다. 반면 ‘서비스 로봇’은 청소에서 간병까지 일상에서 쉽게 활용된다. 과거에는 산업용 로봇이 로봇 시장을 주도했다면, 최근에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서비스 로봇 시장이 급팽창하고 있다. 사람과 대화하고 교감하는 ‘소셜 로봇’ 특히 서비스 로봇 분야에서 시니어에게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되는 소셜 로봇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소셜 로봇’은 인간과 대화도 나누고 교감하는 감성 로봇이다. 지능형 로봇이라 인간과 상호작용이 가능한 데다 모습이나 체형도 사람 또는 동물과 비슷하다. 이처럼 산업 현장에서 일하던 로봇이 어떻게 인간과 감정을 소통하는 수준까지 진화한 것일까. 그 중심에는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클라우드 기술 등이 있다. 특히 소셜 로봇의 경우 이러한 신기술을 융합한 음성 인식과 감정 표현 기능을 함께 갖추고 있다. 이러한 기술을 통해 로봇은 인간의 심리상태를 인공지능 기술로 분석하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다. 또한 경험치 데이터를 상호 공유하면서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최근의 고령화사회는 소셜 로봇의 등장을 더욱 반기는 분위기다. 특히 고령화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대안으로까지 주목받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 2017년 8월 기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를 넘어 ‘고령사회’에 진입했다. 노화로 기능이 저하된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다. 하지만 고령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이들을 간병할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또 혼자 사는 인구도 증가 추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보다 훨씬 먼저 고령화를 경험한 유럽과 일본 등은 일찌감치 다양한 케어 로봇을 개발해왔다. ‘케어 로봇’은 쉽게 설명하면 돌봄 서비스를 지원하는 로봇이다. 중소기업청의 로봇 기술 로드맵에 따르면, 케어 로봇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신체 지원 로봇’이 대표적이다.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이동하거나 목욕할 때 도움을 준다. 다음으로 ‘생활 지원 로봇’이 있다. 생활 패턴을 파악해 상황에 따라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정보를 검색해주거나 물건을 찾아주는 일 등이다. 마지막으로 외롭거나 우울하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정서 지원 로봇’이 있다. 로봇으로 레크리에이션에 치매 예방까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의 경우 4명 중 1명이 노인이다. 일본 정부는 고령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로 의료와 간병 수요가 급증하자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간호 인력을 수입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5년에는 38만 명의 인력 부족이 예상된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로봇 보급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 분야에서 이미 활용되고 있는 소셜 로봇으로 ‘페퍼(Pepper)’가 대표적이다. 세계 최초 소셜 로봇인 페퍼는 일본의 소프트뱅크가 2015년 출시했다. 키가 120cm로 작지만, 인간과 모습이 비슷하며 감정도 공유한다. 또 IBM의 인공지능 ‘왓슨(Watson)’을 통해 지능이 업그레이드된다. 페퍼는 하나의 커다란 스마트폰처럼 목적에 맞는 다양한 페퍼용 앱을 설치해 사용한다. 소프트뱅크는 로봇도 애플의 앱 스토어처럼 플랫폼을 선점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페퍼는 요양시설에서 레크리에이션을 담당하고 노인들의 말벗 역할도 거뜬하게 수행한다. 또 체성분과 건강검진 결과를 분석해 건강상태를 알려주는 카운슬러로도 활동할 계획이다. 일본 후지소프트는 페퍼의 대항마로 40cm짜리 케어 로봇 ‘팔로(Parlo)’를 출시했다. 팔로에 내장된 카메라는 사람의 얼굴을 인식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또 요양시설 등에서 혼자 30분간 체조를 진행할 정도로 실무형 로봇 역할을 거뜬히 해내고 있다. 한편 대중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케어 로봇으로 ‘파로(Paro)’가 있다. 파로는 일본의 산업기술종합연구소(AIST)가 개발한 아기 하프물범 모양의 간호용 로봇이다. 귀여운 모습의 파로는 인조 항균 섬유로 덮인 피부에 센서가 있어 손으로 만지면 반응하고, 간단한 단어도 이해한다. 연구 결과 파로는 심리치료는 물론 치매치료에도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미국 FDA로부터 신경치료용 의료기기로 승인받기도 했다. 장·단점 꼼꼼히 파악해야 일본 정부는 요양시설에서 사용하는 로봇 구입 자금을 보조해왔다. 20만 엔(약 190만 원) 이상의 로봇을 구입하면 전액을 지원하고, 1개 시설당 총 300만 엔(약 2890만 원)까지 한도를 두고 보조금을 지급해왔다. 더 나아가 2018년부터는 간병 로봇에 개호보험을 적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개호보험은 우리나라 노인장기요양보험에 해당하는 보험을 말한다. 간병 로봇에 보험이 적용되면, 이용료의 80~90%를 보조받을 수 있어 간병 로봇 시장은 더 활성화할 전망이다. 야노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016년 일본 간병 로봇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약 316%나 성장한 34억 엔(약 328억 원)에 이른다. 반면 산업용 로봇 중심으로 시장이 발달한 우리나라는 서비스용 로봇 개발이 유럽, 일본에 많이 뒤처져 있다. 우리나라도 급격한 고령화로 로봇에 대한 수요가 갈수록 커질 전망이다. 현재 상용화한 대표 로봇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개발한 치매 예방 로봇 ‘실벗(Silbot)’이다. 현재 노인복지관, 치매지원센터에서 인지게임을 통해 치매 예방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기계적인 느낌 때문에 로봇에 대한 거부감이 있지만, 로봇이 인간에게 주는 장점도 많다. 로봇이 간병 업무를 보조하면 간병인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또 로봇은 24시간 근무가 가능해서 위급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기 쉽다. 게다가 여러 번 같은 말을 반복하더라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 현재 케어 로봇은 보행을 보조하거나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배설 문제에 도움을 주고, 침대에서 휠체어로 이동시켜주는 등 세분화된 실무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다. 모바일 트렌드를 교체할 다음 패러다임이 ‘로봇’이라는 예측은 이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일상에서 필수품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은 로봇이 간호를 한다는 비판에 “기계적인 인간과 인간적인 로봇 중 어느 것이 치유에 도움이 되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1가구 1로봇 시대가 고령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시점이다. >>이나영 시니어 전문 칼럼니스트 한국외국어대학교 졸업. 차의과학대학교에서 고령친화산업학을 전공했다. 한화그룹과 신한은행에서 근무했다. 현재 경향신문에서 고령사회 담당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며, ‘이나영의 고령사회 리포트’를 연재하고 있다.
- 2018-01-1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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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필요한 종이 건강보험증
-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수준의 국민건강보험을 운용한다. 모든 국민이 가입하여 복지의 꽃을 피우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내년도 장기요양보험료율을 건강보험료의 올해 6.55%에서 12.7% 증가한 7.38%로 8년 만에 인상한다고 발표하였다. 인구 고령화에 따라 장기요양급여를 받는 노인이 증가하고 있고, 최저임금 인상에 따라 장기요양기관 종사자의 임금이 올라간 것을 반영한 것이다. 개정안은 또 장기요양 서비스 대상자를 선정하는 등급에 '인지지원등급'을 신설해 경증치매 노인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국민의 건강을 위하여 서비스를 확대하려고 보험료 인상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는 노력을 먼저 서둘러야 한다. 세상이 발전하면서 종이문서가 소용없는 세상이 되었다. 국민건강보험 시행 후 수십 년 동안 신분확인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종이건강보험증이 그렇다. 모든 국민은 건강보험증이 없어도 보험가입자다. 건강보험증은 병원ㆍ약국 요양기관 어디에서도 소용없다. 묻는 사람도 없고, 제시를 요구 받은 일도 없다. 배달 받은 즉시 쓰레기로 변한다. 자원낭비의 현장이다. 2017년 9월 19일 정보공개서에 보면 국민건강보험공단은 2012년부터 2016년까지 5년 동안, 건강보험증 9천8백여만 건을 발급하였다. 용지대와 우편비용만 293억여 원이다. 장당 평균 300원 정도다. 정보공개조차 못하는 관리자 인건비와 수선비 기타비용을 제대로 계산하면 그 액수도 이보다 훨씬 많으리라 추정된다. 수십 년 동안 되풀이 된 아무 소용없는 종이 건강보험증 발급의 폐해다. 발급개선을 검토하겠다는 의례적인 답변일 뿐, 업무개선계획이나 예산낭비 절감계획은 정보부재를 이유로 답변을 내 놓지 못한다. 소용없는 종이건강보험증을 폐지하자고 제안하였다. 국민건강보험법 규정에 따라 건강보험증 발급이 꼭 필요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법 제12조 제1항에 건강보험증을 발급하도록 하였다. 신분확인을 위해서다. 하지만 제3항에서 주민등록증 등으로 대체가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사진이 없는 건강보험증은 병원ㆍ약국 어디에서도 필요하지 않다. 모든 국민의 정보는 이미 컴퓨터에 내장되어 있어 확인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신분확인용으로는 사진이 부착된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이 필요할 뿐이다. 건강보험증을 폐지하여야 할 이유다. 신분증이 없는 어린이는 필요할 경우에 동행한 보호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가족관계증명원으로 ‘관계’를 살핀다. 외국인일 경우 여권, 외국인등록증으로 확인한다. 현장에서 아무 소용없는 건강보험증이 사라진지 수십 년이 되었다. 발상의 전환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법을 개정하지 않고도 충분히 폐지할 수 있다. 필요하면 법 개정을 서둘러야 하지 않겠는가. 국민건강보험 시행 후 40년 가까운 세월 이를 변함없이 발급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국민건강보험료 인상을 서두를 때가 아니다. 불필요한 종이 건강보험증을 폐지하여 막대한 예산낭비부터 먼저 줄이는 노력을 하여야 하겠다.
- 2017-12-20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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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보는 가족도 환자로 만드는 가족병
- 1994년 11월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국민 앞에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는 “나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있습니다. 앞으로 나는 나의 친구, 내 가족을 몰라볼지도 모릅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인생의 황혼(黃昏)으로 가는 여행을 떠난다”는 말과 함께 10여 년간 치매와 싸우다 2004년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옆을 지켰던 부인 낸시 레이건은 치매 환자 가족의 고통을 “사랑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천천히 분해되어 무너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괴로움”이라고 표현했다. 병이 깊어졌을 때 레이건 대통령은 낸시 여사를 알아보지 못했고 자신이 미국 대통령이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며칠 전 필자는 초등학교 가을 체육대회에 참석했다. 열두 살 꼬맹이였던 친구들은 60대 환갑이 넘은 초로의 모습이었다. 주름진 얼굴, 서릿발 내린 흰머리 등 세월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학창 시절을 추억하고 웃고 떠들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부모님 안부로 이어졌다. 우리 나이가 육십이 넘었으니 이미 돌아가신 부모님도 많고 살아 계신다 해도 90세 전후라서 어르신들 건강이 좋지 않다. 집에서 치매로 고생하시거나 요양원에 계신 분도 꽤 있다. 자연스러운 치매 얘기에 경험담이 하나둘 터져 나왔다. 치매 환자가 있으면 가족은 비상이다.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주방에 가스레인지를 켜놓는 등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치매 치료제는 없고 지연시키는 약만 있으나 그 효능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한다. 최선책은 조기진단과 예방법 실천이다. 알려져 있는 예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햇볕을 많이 쬔다. 오메가-3 지방산과 비타민D 섭취량을 높인다. 둘째, 오메가-3가 풍부한 등 푸른 생선을 많이 먹는다. 셋째, 숫자나 퍼즐 게임, 낱말 맞히기, 산·강 이름 암기 등 두뇌를 쓰는 게임을 한다. 넷째, 당분 섭취를 줄인다. 다섯째, 잠을 7시간 이상 충분히 잔다. 여섯째, 항산화제가 풍부한 커피를 하루 3~5잔 마신다. 일곱째, 스트레스를 낮추고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는 명상을 생활화한다. 끝으로 취미, 모임 등에 자주 나가 사회활동을 한다. 이미 치매가 시작되었다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신청해 등급 판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구체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지원 내용에는 방문 간호, 주간 보호, 단기 보호, 복지 용구 지원 등이 있다. 경증 환자를 위한 주간 보호 시설도 어린이집처럼 운영된다. 중증 환자는 24시간 방문 요양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요양원 입주가 가능하다. 현재 중증 환자의 경우 본인 부담금이 20%인데 ‘치매 국가 책임제’로 정책이 전환되면서 10%만 부담하면 된다. 필자의 장모님도 등급을 받아 주간 보호센터에 다니신다. 요양원이 싫은 사람은 간병인을 구하면 되지만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된다. 요양원이라고 해서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각종 프로그램과 전문가들의 도움이 있어 집에서 갇혀 있거나 누워만 있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 치매는 본인뿐 아니라 돌보는 가족도 환자로 만드는 가족병이라 한다. 평소 예방법 등을 실천해 치매가 오지 않도록 하고, 주기적인 검진으로 치매 진행 속도를 늦추고, 치매 관련 제도를 활용해 경제적인 부담을 줄여야 한다. 또한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도 환자가 한 생애를 끝내고 황혼 여행을 잘 떠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갖고 돌봐야 한다.
- 2017-11-14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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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치매
- 어디선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발원지를 찾으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20대 초반쯤 아버지가 살고 계시던 사택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담 너머로 무심코 눈길을 돌리던 필자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무 막대기로 얼기설기 엮은 짐승우리 같은 곳에 발가벗은 사람이 갇혀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그 사람이 오물을 벽에 칠한다는 치매 환자임을 알게 됐다. 가족은 농사를 지으러 논밭으로 나가야 했기에 환자를 집 안에 둘 수 없었다고 한다. 치매와 관련해 필자가 기억하는 첫 장면이다. 필자의 친구 부부는 둘 다 6·25 전쟁 때 아버지를 잃은 유복자다. 그래서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함께 모신다. 그런데 어느 날 친정어머니가 덜컥 치매에 걸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시어머니는 사돈은 왜 우리 집에서만 사냐고, 다른 자식은 없냐며 타박하기 시작했다. 친구는 아들 옆에 붙어 잔소리를 해대는 시어머니가 서운하고 미워서 저녁이면 친정어머니와 놀이터로 가서 도리도리 짝짜꿍 놀이를 하고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러면 친정어머니는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런 어머니를 차마 요양원에 보낼 수는 없었다. 가족들에게도 마음의 병을 주는 게 바로 치매다. 도봉구에서 만난 한 수강생은 자기 어머니가 예쁜 치매에 걸렸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새벽같이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대문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아침 인사를 하기 때문이다. 사극치매에 걸린 노인도 있다고 한다. 며느리가 외출 후 집에 들어오면 공손하게 “마마,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하고 공손하게 묻는단다.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네 이년!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하며 며느리를 당황하게 만든다는 사극치매. 한 노인은 돼지고기를 볶아 맛있게 저녁을 먹고는 아들이 퇴근하자 며느리가 밥을 안 줘 배가 고파 죽겠다며 악을 썼다고 한다. 치매는 어느 날 그렇게 시작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모든 층의 버튼을 누르고 모르는 집 문을 두드리는 일은 예삿일이다. 90세의 한 노인은 자서전을 출판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필자와 대화를 나누다가도 아내가 치매 환자인데 돌봐야 할 시간이라며 서둘러 집으로 갔다. 아내를 요양원에 보내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당신 곁에 있게 해달라고 애원을 한단다. 자서전이 내일이면 나올 날이었는데 노인이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리고 3일 후 그의 아내는 자식들에 의해 요양원으로 보내졌다. 치매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환갑이 지나고 보니 남의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필자의 지인은 어머니를 요양원에 입원시키려 모시고 갔는데 그곳 직원들을 공손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단다. 기억을 잃어가도 생존 본능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다. 84세의 친정어머니는 아직 맑은 정신을 간직하고 계시지만 치매를 떠올리면 불안감이 밀려온다. 사회적 고립감이 치매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에 전화를 자주 드린다. 어머니를 만날 때는 앨범, 빨간 내복, 반짇고리, 어머니께 사다 드린 옷과 목도리, 형제와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이벤트를 한다. 가족의 사랑만이 치매를 예방하고 진행 속도를 늦출 수 있다. 만약 필자가 치매에 걸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기도 싫다. 우선 고혈압과 당뇨에서 풀려나야겠다. 그리고 살도 좀 빼야겠다.
- 2017-11-14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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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회 없이 살았으니 어떠한 미련도 없다
- 필자의 일가친척 중에는 치매 환자가 한 명도 없다.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분도 계시지만, 90세 이상 사신 분들도 꽤 있다. 그래서 치매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가끔 깜빡깜빡할 때가 있는 것을 보면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최근에도 사무실에 왔다가 휴대폰을 집에 두고 나온 것을 알고 다시 집으로 갔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서 보니 이번에는 열쇠를 사무실에 벗어둔 재킷 주머니에 넣어두고 왔다. 다시 사무실로 가서 열쇠를 꺼내 집으로 갔다. 두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휴대폰을 겨우 손에 쥐었지만 사실은 열쇠 가지러 다시 사무실에 갔을 때 집에 가져다 둬야지 하며 내놨던 짐 보따리를 또 잊고 나왔다. 이런 필자가 과연 치매에 안 걸리고 여생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 슬쩍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필자는 매우 꼼꼼한 성격이다. 여간해서는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읽고 나면 책 내용을 까맣게 잊는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다 보고 나왔는데 금세 스토리가 가물가물하다. 알코올성 치매도 염려된다. 평소에 술자리가 많기 때문이다. 과음한 날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1, 2차는 기억이 나는데 3차는 어디로 갔었는지 희미할 때가 있다. 위험 신호다. 그래서 되도록 독주보다는 막걸리를 고집한다. 지인들은 기억력 퇴화와 치매는 다르다며 필자의 경우를 기억력 쇠퇴로 정의해준다. 건망증 정도이지 치매 걱정은 아직 안 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머리를 자주 쓰라고 조언한다. 필자의 블로그 활동은 그런 면에서 아주 바람직한 것 같다. 글을 쓰는 한 머리도 쓰게 되어 있다. 노래를 배우거나 춤을 추는 것도 뇌 활동 중 하나다. 당구도 그렇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기술을 익히고 구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매가 온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본격적으로 대책을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관련 보험은 오래전에 들어놨다. 보험 모집원이 하도 집요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귀찮아서 든 보험이다. 새 대통령이 치매는 국가가 관리하겠다는 공약을 했으니 치료비 걱정은 안 한다. 그러나 치매에 걸리면 인생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우선 재산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동산, 부동산 관리를 아들에게 맡길 작정이다. 다행히 재원은 충분하니 경제적으로 아들딸 신세를 질 필요는 없다. 매년 연말이면 재산 목록을 컴퓨터에 업데이트해 한눈에 알 수 있게 해놓는다. 금융거래도 한 장짜리 종이에 정리해놓았다. 여차하면 컴퓨터 비공개 자료실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만 가르쳐주면 된다. 요양병원 입원비를 충분히 떼어놓고 남은 재산은 아들딸이 반분해 나눠 갖도록 할 것이다. 필자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을 만한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을 찾는 일이다. 요양병원, 요양원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면서 부실한 시설로 종종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시설이 가장 좋다고 하지만 대기자가 많다. 수요가 늘어나면 공급도 늘어날 것이다. 치매로 가족들을 괴롭게 하고 싶지 않다. 믿을 만하고 시설 좋은 요양병원에 있다가 조용히 눈감으면 될 일이다. 치매를 앓게 되면 온전한 정신이 아니므로 병원에서 요구하는 잡다한 수술이나 연명치료는 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 어떤 형태로 장례를 치를 것인지, 장지는 어디로 할 것인지 생각해보고 아들에게 부탁할 것이다. 한평생 해볼 것 다 해보고 후회 없이 살았으니 어떠한 미련도 없이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지낼 것이다. 미뤄뒀던 종교는 그때쯤 가져볼 생각이다.
- 2017-11-13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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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나는 어제 먹은 음식
- 1998년 무렵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법조인 이태영 변호사가 치매를 앓는다는 사실을 알고 필자는 탄식했다. ‘여성들의 권익을 찾아주기 위해 평생 헌신하신 분에게 이런 병이 오다니… 누구보다 두뇌활동을 열심히 한 분도 피해갈 수 없는 질환이란 말인가….’ 머리를 잘 안 쓰는 사람들이 치매에 걸리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필자는 큰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치매는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오는 병 같다. 필자가 평택에 살았을 때 아래층 70대 할머니가 그랬다. 자녀들이 분가한 후 홀로 지내던 분이었는데 젊은 시절 한 미모 했을 것같이 고왔고 말도 자분자분 조용히 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하고 어울린다거나 대화를 나누는 일이 거의 없었고 집 안에서 혼자 폐쇄적인 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아들이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시고 갔다. 필자와 인연이 있는 서울농대 농화학과 P교수님도 치매를 피하지 못했다. 40대 후반 무렵 교수님 댁에 놀러갔을 때의 일이다. 사모님은 P교수님이 퇴직한 후 유럽 여행을 하며 찍은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사진 속에서 교수님과 사모님은 다정하게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와우! 사모님 부러워요. 완전 잉꼬부부시네요!” 물색 모르는 필자가 감탄하자 사모님은 웃으면서 P교수님이 알츠하이머병이 와서 손을 꼭 붙잡고 다닌 거라면서 설명을 해주셨다. “손을 놓으면 아무데나 막 가버리셔서 잠시라도 손을 놓을 수 없었어요. 앞날을 기약할 수 없었던 날들이라서 서둘러 유럽여행을 떠났지요. 즐거워야 할 여행이 얼마나 쓸쓸하던지….”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1970년대 필자가 농대 학과장실에 근무할 때 학생지도위원이었던 P교수님이 가끔씩 들리셨다. 방문 여는 소리만으로도 P교수님이라는 걸 단박에 알았다. 문을 유난히도 씩씩하게 열어젖히셨기 때문이다. 그토록 건강하시던 분이 치매에 걸리다니… 인생무상이 이런 것인가 했다. 고령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치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점에서 최악의 질병이다. 치매는 진행 속도를 줄일 수는 있어도 완치는 되지 않는다고 한다. 병이 오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다. 치매가 올까 걱정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필자에게는 있다. 뇌가 여러 번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18세 때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며 심각한 생각에 빠져 걷다가 전봇대에 엄청 세게 부딪혔었다. 55세 때는 바위에 부딪혀 정신을 잃었었다. 요즘은 잠의 질이 형편없다. 꿈을 꾸다 깨어나는 일이 많아 머리와 몸이 무겁다. 이 노릇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심히 걱정스러웠는데 때마침 치매예방 교육 프로그램이 있어 강남시니어 플라자에서 치매 테스트를 받아봤다. 그 결과는? 필자도 놀라웠다. 30점 만점에 30점이 나왔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 먹은 음식.’ 이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아침마다 디톡스 주스 한 잔에 사과 한 알, 현미 잡곡밥에 굴 미역국이나 시금치 된장국 등을 먹으며 건강한 밥상을 차리려 노력한다. 먹거리에서 오는 리스크만이라도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모델워킹을 하고, 왈츠를 추고, 서울 둘레길 걷기를 한다. 오늘도 필자는 많은 사람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치매가 가까이 올까봐 경계하며 살고 있다.
- 2017-11-09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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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로그를 하는 이유
- 늦은 시간 가끔 현관 키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여러 조합의 숫자를 몇 번 입력해도 문이 열리지 않을 때는 정말 난감하다. 문을 두드리자니 주변에서 시끄러워할 것 같고 전화를 하자니 늦은 시간 잠든 가족을 깨우게 될까봐 망설여진다. 이런 일이 발생한 뒤 휴대하고 다니는 작은 수첩에 현관 비밀번호를 적어뒀다. 그런데 현관 비밀번호만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기억해야 할 숫자가 너무 많다. 그래서 휴대폰이나 컴퓨터에 숫자를 저장해두는 습관이 생겼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가족과 지인들의 전화번호 수십 개를 외우고 다녔다. 심지어는 노래방 애창곡 번호까지 외우고 다닐 정도였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숫자는 단순화되고 기호화되었다. 이를테면 남편에게 전화를 걸 때 휴대폰 번호를 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라든가 단축번호 ‘1’을 누르면 자동으로 전화 연결이 되는 식이다. 이렇게 환경이 바뀌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아날로그식으로 숫자를 기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그 결과 기억력이 점점 더 쇠퇴하는 부작용이 생기는 것 같다. 언젠가는 현금영수증을 발급받으려다 전화번호가 기억나지 않아 포기한 적도 있다. 필자는 기억력이 자꾸 떨어지는 것 같아 여러 정보들을 컴퓨터에 저장해두었다. 물론 컴퓨터 드라이브도 믿지 못해 블로그에 저장해둔 정보도 있다. 타인이 검색하지 못하도록 차단해놓은 블로그 방에는 지인들의 전화번호가 저장돼 있다. 휴대폰을 분실했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가족과 친지의 축일도 저장해뒀다. 각종 사이트 아이디와 패스워드, 신용카드의 번호, 은행계좌 비밀번호도 모아두었다. 그런데 아주 가끔 컴퓨터 앞에서 난감한 일이 벌어진다. 사이트의 패스워드를 잊어버리는 경우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다. 사이트에 접속하지 못하면 저장해둔 정보들이 무용지물이 된다. 치매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정보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사이트 접근이 차단된 상태가 치매와 같은 상황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두려움이 엄습해온다. 치매 환자가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가족에 대한 정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병이 깊어지면 자신에 대한 정보도 다 잃어버린다. 어느 요양원 원장은 치매가 환자 자신에게는 그리 나쁜 일 같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동안 많은 치매 환자를 봐왔는데 정작 환자 자신은 참 행복해 보이더라는 것이다. 관점을 달리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현관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는 것은 건망증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반복되면 치매가 올 수도 있다. 만약 치매가 발병한다면 가족과 지인들에게 인생 정보를 알려줄 필요가 있다. 필자는 그 수단 중 하나로 블로그 활동을 열심히 한다. 블로그에는 몇 개의 방이 있다. 가족 이야기, 친구 이야기, 여행 이야기, 사진 등 이런저런 자료가 거기 다 들어 있다. 자서전에는 다 담을 수 없는 정보들이다. 그동안 올린 포스트가 2000여 개다. 개인의 인생 정보가 담긴 거대한 저장소인 셈이다. 치매가 의심될 때 필자는 아내에게 이 저장소의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넘겨줄 작정이다.
- 2017-11-0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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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심해라, 조심해”
-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로 받았다. 라는 책이다. 이 책에는 65세 아들이 10년째 치매에 걸린 92세 노모를 위해 매일 밥상을 차리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요즘 나는 하루하루가 너무 벅차고 힘들다. 하지만 젊고 건강했던 엄마가 늘 하시는 말씀처럼 ‘자물쇠가 있으면 반드시 열쇠가 있는 법’이니 힘든 면만 보지 말고 열쇠를 찾아보려 한다. 친구 몇 놈처럼 퇴직하고 ‘삼식이’ 소리나 들어가며 살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삼시 세끼 요리사가 되었다. 덕분에 운동도 열심히 하게 되었고, 이렇게 책도 내게 되었다. 감사한 일이라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책을 읽는 동안 필자는 7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어머니와 지낸 60여 년의 긴 세월이 매일 그립지만 마지막 5년만큼은 떠올리기가 싫다. 애처로운 기억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는 대전으로 근무지 발령이 나서 주중엔 대전에서 지내고 주말엔 어머니가 계시는 집으로 오곤 했다. 그렇게 주말 모녀로 몇 년을 살았다. 그런데 집에서 혼자 지내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던 어머니는 한동안 불면의 밤을 보내셨고 급기야는 우울증을 앓게 되면서 치매 초기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입원시키기 전에는 조선족 아주머니를 간병인으로 채용해 하루 24시간 케어도 해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는 점점 더 안 좋아지셨다. 여전히 잠도 잘 못 주무시고 식사량도 갈수록 줄었다. 아주 오래된 일은 기억하지만 며칠 전 일과 몇 시간 전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치매 증상도 심해져갔다. 결국 죽전의 한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2~3일에 한 번씩 침대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만나러 가면 어머니는 늘 “조심해라, 조심해” 하시며 한마디를 잊지 않으셨다. “뭘 조심해요?”라고 물으면 “모든 걸 다 조심해야지” 하셨다. 그 나지막한 목소리가 좀처럼 잊히지 않는다. 정상적일 때나 치매를 앓으실 때나 어머니는 그저 자식 걱정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상하시고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주저함이 없었던 어머니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일상생활이 가능한 치매 환자가 되시다니…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 가누기가 힘들다. 이별 앞에서는 누구나 다 아쉬움뿐이겠지만 세상 떠나기 전 몇 년간 우울증과 치매로 고생하셨던 어머니를 좀 더 다정하게 대해드리지 못했던 것이 회한으로 남았다. 건강에 좋지 않은데 하루 종일 TV만 본다며 퉁명스럽게 말했던 일, 도우미 아주머니 옷주머니에 시도 때도 없이 만원짜릴 집어넣어주시던 어머니를 눈 부릅뜨고 힐책했던 일, 혼자 미장원에 갔다가 길 잃고 헤매다 늦게 귀가한 어머니를 큰 소리로 야단쳤던 일, 병문안 오신 외삼촌 얼굴도 못 알아보시는 어머니에게 툴툴거렸던 일 등등. 치매 환자로 누워 있어도 어머니가 곁에 있을 때는 든든했다. 오늘도 필자는 혼자 쓸쓸히 저녁밥을 먹는다. 의 저자처럼 하루 세끼 함께 밥 먹어주던 어머니가 필자에게도 있었음을 기억하며….
- 2017-11-08 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