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사원 때였다. 직속상관으로는 주임, 계장, 과장, 지점장이 있었다. 체력단련일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야유회를 갔던 날, 족구도 하고 배드민턴도 하면서 오전 시간을 보낸 뒤 오후에는 부서별 술판이 벌어졌다. 술은 친목을 도모하는 윤활유 역할도 하지만 지나치면 싸움판이 되기도 한다.
그날도 삼삼오오 나뉘어 술을 먹다가 다른 곳에서 온 행락객과 시비가 붙어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선생님이 한 분쯤은 있다. 필자에게도 그런 선생님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던 이인기 선생님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의 필자도 없을 것이다.
필자는 충남 태안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의 또래가 모두 겪었듯 필자도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지 못했다. 필자는 소위 보릿고개를 체험한 마지막 세
영하 15℃의 강한 한파가 몰려올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던 어느 겨울날 저녁, 대학로로 연극 한 편을 보러 갔다. ‘앙리 할아버지와 나’라는 제목의 연극으로 꽃할배로 유명한 이순재, 신구 선생이 더블 캐스팅된 작품이다.
필자가 보러 간 날은 신구 선생이 열연을 했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라는 호통을 치는 광고로 매력을 발산하던 신구 선생. 고집불통
사진 촬영을 명령받을 때가 있다. 내 스스로 정한 곳이 아니라, 소속된 조직으로부터 다녀와야 하는 지역과 대상이 정해질 때다. 프놈펜에서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보트 길이 주어졌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보호해줄 수 없습니다.”
그동안 함께 지냈던 유엔 요원들이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채 나를 떠나보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필자는 서울에서 55년 넘게 살고 있지만, 고향은 대전이다.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이사를 왔으니 대전에 살았던 기간은 어린 시절 10년 정도인데 그런데도 대전의 곳곳을 잘 알고 있고 대전에 대한 향수로 항상 그리워하고 있는 이유는 서울로 이사를 온 이후에도 초등학교 6학년부터 대학생이 되었을 때까지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각 한 달간을 꼭 대전으로
국내 최고의 유대인 전문가인 홍익희 세종대학교 대우교수(65). 그와의 3시간여 ‘인생 2막’ 인터뷰는 한마디로 선입관의 전복이었다. 수치에 밝은 냉철한 전문가일 것 같았지만 인간미 넘치는 인문학자에 가까웠다. 직선의 경력을 쾌속으로 걸어왔을 것 같지만 굽이굽이 곡선의 지각인생, 갈지(之) 자 이력이었다. 경력과 브랜드를 보고서 지레 짐작한 선입관은 무너졌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만나자고 전화를 할 경우, 이 전화를 '콜드 콜(Cold Call)'이라고 한다. 사전에 만나자는 약속을 한 일도 없고 만날 필요가 있는 사람인지 조차 모른다. 누군지도 모르고 왜 만나자는 건지도 모르니 반가울 리 없다. 그래서 높은 사람들은 직접 전화를 받지 않고 비서를 통하게 한다.
사람이 살다 보면 매번 사전 약속을 하고 사람
필자도 너무나 차가운 체감에 외출할 엄두를 못 내고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겨울이면 이만한 추위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고 우리 어릴 땐 한겨울에 영하 10도, 15도는 다반사였었다.
물론 삼한사온으로 며칠간 추운 후에는 또 얼마간은 기온이 올라 따뜻함을 느끼며 겨울을 지냈다.
요즘은 삼한사온도 없고 봄, 가을의 구분도 애매한 게 그냥
축 늘어진 젖, 엉덩이는 뒤로 쑥 빠지고, 빠진 만큼 허리는 굽었다. 층층시하에 열 자식을 낳아 여덟을 건졌지만 그 많은 식솔들을 건사하느라 무명 저고리와 치마에 물 마를 날이 없었던 어머니.
마흔둘에 낳은 막냇동생이 불쌍하다고 늘 품에 끼고 고된 농사일과 집안 허드렛일을 했다. 단아하고 작은 체구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을까? 막내의 특권인 어리광은 어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