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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기석 세일ENS 사장, "재미, 의미를 함께 나누면 인생도, 비즈니스도 즐거워집니다"
- 심기석 세일ENS 사장은 별명 ‘ 다이소 누님’과 ‘건달’로 유명하다. 2007년 최고경영자로 승진, 현재 장수경영자로 10년째 성가와 성과를 함께 올리고 있다. 인터뷰 당일, 그녀는 살구색 재킷에 인어 스타일의 샤방샤방한 스커트 차림으로 나타났다. 심기석 세일ENS 사장(63)의 별명은 ‘다이소 누님’이다. 등산을 갈 때면 자신의 155cm의 가냘픈 체구보다도 더 큰 집채만 한 배낭을 지고 나타난다. 가파른 산을 올라가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짐을 넘기는 법이 없다. 1착으로 올라가 산마루에서 자리 펴놓고 일행들에게 바리바리 싸온 것을 풀어 먹인다. 짧은 일정의 여행에도 그는 거의 이민 갈 태세의 큰 가방을 밀며 나타나기 일쑤다. 그 커다란 산타자루 아니 트렁크에선 구호품(?)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과일, 홍삼액, 심지어는 플라스틱 소주 컵, 야외 주방도구 일습에서 이쑤시개까지…. 사랑을 퍼주고 나눠주는 선샤인, 아니 문샤인 리더십 덕분에 그의 주변에는 남녀노소가 늘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심 사장이 전통적 의미의 퍼주고 헌신하는 100% 모성형 리더만은 아니다. 그녀의 또 다른 별명은 ‘건달’이다. 바로 건배사의 달인이란 뜻이다. 술자리에선 능숙하게 소맥을 제조하고, 멋진 모습으로 술을 따르는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씩씩한 건배사로 분위기를 선도하는 그녀는 일자리에선 쓴소리를 피해가지 않으며 군기를 세게 잡는다. 심 사장에 대한 조직 내외의 공통된 평가의 핵심은 양수겸장 리더십이다. 호탕한 형님과 따뜻한 누님의 장점을 다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남자 같지는 않지만 남자처럼 일하고, 여성성을 내세우진 않지만 여성성을 최대한 살린다는 평이다. 심 사장의 양극단 별명 조합처럼 건달 누님 리더십이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어중간한 중성의 평균 타협이 아니다. 상황별로 각각의 장점을 살려 평형을 맞추는 게 심 사장 리더십의 특성이다. 아낌없이 베풀며 모범을 보이되, 돌직구 직언도 아끼지 않는 ‘어른의 품격’을 보여준다. 지인들은 심 사장을 가리켜 요즘 시대에 흔치 않는 ‘어른의 롤모델’이라고 입을 모은다. ‘건달 누님 리더십’은 그녀가 전문건설 설비업계 세일ENS에서 뼈가 굵어 최고경영자에 올랐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건설업은 일반적으로 남성 주도의 업종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 공조업이란 ‘여름엔 얼마나 시원한가, 겨울엔 얼마나 따뜻한가와 관련한 냉난방 배관설비를 건축물 내에 시공하는 사업’을 뜻한다. 거대한 건물 속의 모세혈관을 유지하는 일로서 세심한 손길과 관리가 필요하다. 초창기(1970년대 초반)에 책상 두 개와 직원 세 명밖에 없었던 작은 규모의 회사는 이제 직원 100여 명, 일용근로자 2300명 내외의 튼실한 전문건설 설비업계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재수하던 중 전화나 받는 자리로 잠깐 취직한 회사에서 ‘불독 신세’로 사무실만 지킨다며 찔찔 울던 10대 소녀는 그 사이 60대 초반의 통 크고 손 큰 ‘건달 누님’이 됐다. 원래부터 성격이 담대하고 씩씩했나요? “아니에요. 환경 탓이 큽니다(하하). 살아남기 위해 변화한 겁니다. 건설업계가 남성 주도 업종이다 보니 여자 관리자는 고사하고 직원조차 드물었습니다. 어느 자리이고 참석하면, 홍일점이란 이유만으로 눈에 띄는 겁니다. 회사 안에서나 밖에서나 직급과 상관없이 ‘한 말씀’을 요청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다못해 자기소개 인사말이라도 하라고요. 이때 ‘준비 안 해 못 한다’고 하거나 ‘시킬 줄 몰랐다’고 수줍은 척 뒤로 빼면 ‘능력 부족’으로 못나 보이잖아요.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자, 기억에 남도록 하자는 생각에 늘 공들여 준비했어요. 저는 여자 후배들 교육시킬 때도 ‘건배사 제대로 하는 법’부터 가르칩니다. 차례가 돌아오기보다 자원하라고 말해줍니다. 또 두루 쓸 수 있는 범용 건배사와 자신만의 특성을 살린 필살기 건배사 두 가지를 준비해두라고 강조하지요. 각자 맡은 분야에서 실력은 노력하면 되지만 네트워킹, 사회적응 훈련은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은 선배로부터 배우는 게 효과적이니까요.” 입에 척척, 귀에 쏙쏙 감기는 건배사가 허투루 즉흥적으로 튀어나온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심 사장은 책, 신문을 읽다가도 응용할 것이 있으면 메모하고, 변형하고, 외우고 연습한다. 사자성어로 신조어 건배사를 만들기도 한다. 최근의 히트 건배사는 인사불성(인간을 사랑하라는 말은 불경에도 나와 있고 성경에도 나와 있다), 적반하장(적당한 반주는 하느님도 장려하신다) 등이다. 술을 따르더라도 진기명기의 방법을 개발해 한편의 그럴듯한 퍼포먼스로 승화시킨다. 지방출장을 가든, 해외여행을 가든 사람들의 사는 모습, 먹는 모습, 마시는 모습은 관찰의 대상이고, 그것은 여러 가지 퍼포먼스와 아이디어에 스파크를 일으킨다. 관찰과 사고, 연습의 조합에서 의미와 재미와 흥미의 창조적 아이디어가 탄생한다. 고교 졸업하고 1973년에 취직해 44년간 한 직장에서 근무했습니다. 사원에서 사장까지 오른 성공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내 일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비결이라고 말할 것도 없이 평범하지만 진실입니다. ‘시간이든 돈이든 비용을 덜 들이고, 더 효과적으로, 더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사원, 정확하게는 전화 받는 사환으로 온갖 궂은일을 할 땐데요. 세금계산서가 들어 있는 편지봉투를 그대로 버리는 게 아까운 거예요. 글자가 쓰인 부분만 자르고 봉투 뒷면을 사무실 내에서 메모지로 썼지요. 내 것이란 생각으로…. 구매 일을 할 땐 견적을 뽑아보고 어떻게 협상해야 보다 좋은 제품을 싸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어요. 예전보다, 항상, 남보다 최고 2% 싸게 사는 작전과 목표를 세워 실천했습니다.” 구매 일을 하면서 사람 보는 법도 부가적으로 배웠다고 말한다. ‘저 사람은 곧 그만두게 될 사람, 독립할 사람, 독립해서 공장까지 지을 사람’ 등 나름대로 사람 보는 눈이 생기더라는 것. 10명 중 7명은 심 사장의 예상대로 운이 풀렸다. 족집게 적중률의 근거는 바로 주인의식이란다. ‘내 일처럼’ 진실, 성실, 창조적으로 하는 사람이 독립해서 사업도 잘하더라는 게 나름의 경험상 얻은 결론이다. 회사와 함께 개인적으로도 성장하셨는데요. 회사가 급성장하면 창업공신의 성장속도가 그에 미치지 못해 도태되는 경우도 있더군요. “중간관리자 시절, 선행학습을 충분히 한 게 도움이 됐습니다. 중간관리자는 말하자면 조직의 관절이에요. 윗사람, 아랫사람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학습하게 되지요. 그러면서 각 입장을 고루 관찰하고 이해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선행학습할 수 있었습니다. 또 마흔 넘어 영업을 하며 고객의 외부적 시각, 내부의 시각을 다 고려해보게 되더군요. 결국은 단계별로 자기의 그릇을 키울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릇이 작으면 상을 차려줘도 밥을 못 챙겨먹습니다. 그릇을 키우는 게 먼저입니다.” 먼저 베풀고, 내 일처럼 하는 회사일, 좋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신세대들은 헌신하다 소진하고 탈진돼 헌신짝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일을 통해 기쁨을 얻는 것 그 자체가 아닐까요. 남의 보상이나 인정을 갈구할수록 실망할 일이 많아집니다. 오히려 남에게 의존적이 되고요. 내가 열심히 하고, 배우는 것을 우선순위로 놓으면 활용당하거나 보상이 적다고 실망하는 일이 적어집니다. 결국은 자기 실력으로 쌓이는 것이거든요. 자신의 시간에, 삶에 충실하지 않고 대충 일하는 것이야말로 책임, 인생 유기이니까요. 성실히 일하면 단기적으로 손해 같지만, 장기적으론 투자입니다. 비유하면 농사와도 같습니다. 씨앗을 많이 뿌린다고 해서 모두 싹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씨앗을 많이 뿌리지 않으면 싹이 날 확률이 줄어듭니다. 일단 노력과 열정을 기울이는 것이 먼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 젊은이를 만나면 ‘잘나가는 것만 부러워하지 말고 어렵고 힘든 부서에 가서 몇 년만 버텨보라’고 말합니다. 나만의 노하우를 쌓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다른 회사, 다른 부서, 어디에서든 잘할 수 있거든요.” 쓴소리 잘해서 ‘비즈니스계의 윤여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들 ‘밥은 사고 말은 참는 것’이 어른의 의무라고들 하는데요.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해서 올바른 소리를 피하는 것은 진정한 어른이 아니지요. 그저 뒤에서 혀만 쯧쯧 차기보다는 뭇매를 맞더라도 옳은 말을 해주는 게 어른의 역할입니다. 당장은 듣기 싫더라도 행동에 도움이 된다면 해야지요. 열 명에게 얘기해서 한 명이라도 받아들여 변화되고, 사회를 밝게 한다면 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나서서 쓴소리를 하는 이유입니다.” ‘사원에서 사장까지’ 성공신화 뒤에 숨은 콤플렉스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왜 없었겠습니까. 지금이야 예순을 넘었으니까 조금 자유로워지긴 했지요. 한창때엔 고루고루 콤플렉스투성이였습니다. 보다시피 제가 인물이 좋습니까, 키가 큽니까, 가방끈이 깁니까. 지금 이 나이니까 어느 정도 풍화됐지만 그때는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영업을 할 때는 ‘내가 팔등신 미모에 좋은 학벌, 돈 많은 사람’이라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됐을까 많이 아쉬웠지요. 또 내가 처음에는 술을 잘 못했거든요. ‘소주 두 병만 마실 수 있으면 업계 판도를 바꿨을 텐데’ 등등 별의별 생각을 다 했어요(웃음). 돌이켜보니 콤플렉스, 결핍이 오히려 다행이었어요. 부족하고 모자라서 더 노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수수하게 낳아주신 것에 감사하고요. 실력과 학력이 부족한 걸 알기에 더 노력했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건배사 개발도 술을 많이 못 먹어 술자리나 재미있게 만들자는 궁여지책에서 시작됐다. 그가 국내든, 국외든 자주 들르는 곳이 있는데 바로 전통시장이다. 이곳에서 컵 홀더 등 특이하고 스토리가 있는 소품들을 사와 지인, 고객들에게 마음을 담아 선물한다. 골프를 치고 오면 같이 간 일행들의 골프 폼과 대화 등 후일담을 메일로 전하기도 한다. 심 사장에겐 마음을 나누고,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기쁨의 선순환이 사업가로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의미요, 재미다. 이야기가 인맥 쪽으로 좀 흐른 것 같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개척 못지않게 중요한 게 유지관리 아닙니까. “맞습니다. 잘나갈 때는 누구나 잘해줄 수 있습니다. 위기 때의 태도가 신뢰의 증표입니다. 진정한 신뢰는 못나갈 때도 한결같이 잘해주는 것입니다. 직원들에게 늘 말하는 게 있습니다. ‘우리 세일은 이익이 날 때뿐 아니라 밑지더라도 잘하자!’ 도장을 찍었으면 이유 불문 책임을 지고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자 합니다. 돈을 잃을망정 사람까지는 잃지 말자는 것입니다. 품질이든, 원가든 당초 약속을 반드시 지키자는 것이지요. 평판은 얻기는 힘들지만 잃기는 쉬운 법이거든요. 우선 나부터 충실하고 튼실해져야 합니다. 내가 급급해하면 남을 챙기고 지켜줄 여유를 갖기 힘듭니다. 개인이나 회사나 다 똑같습니다.” 심 사장은 밑질 때의 마음 다스리기 법을 들려주었다. 가령 5억이 남을 줄 알았는데 5억이 밑지면 일반적인 셈법으로 ‘10억을 손해봤다’며 억울해한다. 그는 신용을 지켰으니 3억만 밑진 것으로 나름의 가감승제법을 적용한단다. 당장의 손해가 앞으로 어떤 이익을 가져올지 모른다고 ‘투자’라 생각하며 위로를 한다는 내공 어린 고백이다. 경영자 등산모임 ‘시애라’의 회장도 맡고 계시지요. 최근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봉 트레킹을 열흘간 다녀오시기도 했는데요. “여행은 가슴 떨릴 때 가야지, 다리 떨릴 때 가면 안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더 나이 들기 전에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육체적 자신감은 물론이고 심리적 에너지를 많이 얻었습니다. 웅장한 자연도 좋았지만 그보다 의미 있는 것은 절대고독의 시간이었습니다. 몸을 뒤척이기조차 힘든 옹색한 싱글 방에서 휑뎅그렁하게 있으며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일에 대한 욕심까지도 포함해서 세속의 먼지를 떨어내고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성공한 경영자들이 의외로 가정 경영은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여성 경영자로서 애환이 더 많았을 것 같은데요. “‘아침밥은 얻어먹고 다니십니까?’가 내조 점수 체크 질문이지요. 저는 남편이 아침밥을 차려준답니다. 행복하고도 감사한 일이지요. 저는 계란 프라이가 있어야 아침을 먹는데요. 한번은 출장을 갔는데 지인에게 그 사실을 알려줬어요. 밖에서도 계란프라이를 먹도록 챙겨줄 정도예요(하하). 어차피 집안일, 회사일을 다 잘하긴 힘들어요. 솔직히 말해 사장 되고선 주방 들어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잘하는 일을 선택해, 집중하는 게 효과적이에요. ‘집에선 당신 부인이지만, 밖에선 남의 부인으로 생각하라’고 말할 정도로 전투적으로 산 게 우리 시대, 여성 리더의 생존전략이었어요. 기본적으로 서로 소통하고 이해를 구하고 신뢰를 쌓는 것, 그것 이상의 방법은 없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은퇴 계획을 묻고 싶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자’는 게 제 신조입니다. 외부 평가보다 내부 평가가 더 좋은 리더로 기억되고 싶고요. 우선 3년 후에 있을 회사 50주년 행사 준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퇴 후에는 제 장점을 살려 나만의 재미나는 놀이터를 만들고 싶어요. 가깝고 편한 사람들끼리의 작은 공간, 행복살롱을 만들고 싶습니다.” 3시간여 격정적인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심기석 사장이 필자의 명함을 다시 꺼내들었다. 건달 누님 리더십의 직설본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긴장하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조언이 쏟아졌다. “명함의 글자가 너무 작아요. 글자 배치도 조금 앞으로 와야겠군요.” 어른이 내리치는 죽비소리는 아프기보다는 시원한 법이다. 요즘 신세대들이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탓하는 것은 ‘발언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발언 자격’의 문제가 아닐까. 어른의 품격은 바른 소리가 아니라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자격에서 우러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07-25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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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장년 연예인, 예능 프로그램 통해 화려하게 부활!
- 70세의 중견 배우 윤여정이 인기 고공비행을 하고 있다. 바로 젊은 연예인과 신세대 스타들의 전쟁터로 변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예능 프로그램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윤여정은 인도네시아 발리 인근 섬에서 작은 한식당을 열고 운영하는 과정을 관찰 예능으로 담아낸 tvN 에서 사장 겸 요리사로 나섰다. 윤여정은 에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젊은이들에게 꼰대 짓을 하지 않는 바람직한 어른 이미지를 보여주며 시청자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상승한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맹활약하고 있다. 에서 특유의 소탈함과 함께 현명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 81세의 신구 역시 에서 아르바이트 점원으로 열심히 일하면서도 젊은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고 KBS 에 출연해 기상천외한 입담을 과시하며 장·노년 연예인 예능 스타 붐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70세의 여배우, 81세의 원로 남자 연기자. 한국 대중문화와 연예계에서 이들은 어떤 의미일까. 이 나이쯤 되면 일반적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은커녕 비중 있는 조연 맡기도 힘들다. 가족이 밥 먹는 장면에만 출연하는 ‘식탁용 배우’로의 전락을 감수해야만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중견 연예인들의 의미 있는 반란과 도전이 시작됐다. 그 반란과 도전의 진원지는 바로 젊은 연예인의 전유물이자 10~30대 젊은 시청자들이 주로 시청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중장년 연예인들이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와 끼, 면모를 보여주고 친근감을 배가시키며 시청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한 이미지의 확장과 인기 상승을 바탕으로 드라마와 영화의 주연으로 나서는 선순환이 이뤄지면서 중장년 연예인의 재스타화가 속속 이뤄지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중장년 연예인의 재발견 창구로 부상시킨 것은 바로 2013년 방송된 tvN 다. 황혼의 해외 배낭여행 포맷으로 진행된 는 파격적으로 노년(老年) 예능을 표방하며 당시 78세였던 이순재, 77세 신구, 73세 박근형, 69세 백일섭을 출연시켰다. 를 연출한 나영석 PD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많은 우려를 했다. 중장년 예능 프로그램이 전무한데다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자는 주로 젊은 층이었기 때문이다. 촬영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원로 연기자 이순재·신구·박근형·백일섭씨의 모습을 보면서 성공을 예감했다”고 말했다.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은 에서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하고 의외의 재미있는 모습을 드러낸데다 연륜이 주는 현명함까지 전달돼 할배 신드롬이 일었고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장·노년 출연자가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의 성공 이후 방송사들은 경쟁적으로 중장년 연예인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쏟아냈다. 또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젊은 연예인들과 함께 고정 멤버로 출연하는 중장년 연예인도 많아졌다. 결혼을 졸업했다는 고백으로 우리 사회에 ‘졸혼(卒婚)’을 화두로 던지며 공론화했던 백일섭(73)과 이혼 이후 혼자 살며 다양한 취미생활과 여행을 하며 활기차게 장년의 삶을 사는 김용건(71)은 각각 KBS 과 MBC 를 통해 살림살이에서 여가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들은 혼자 사는 장·노년 사람들의 생활 트렌드를 이끌 뿐만 아니라 유익한 삶의 정보까지 제공해 사랑을 받고 있다. 김국진(52), 강수지(50) 등이 출연하는 SBS 과 김건모(50)가 나오는 SBS 는 중년 연예인의 이미지 확장과 인기 부활 예능 프로그램 역할을 하고 있다. 혼자 사는 중년 연예인들이 여행을 하거나 미션, 놀이를 하면서 싱글 중년의 삶과 문화, 그리고 사랑에 대한 실태와 인식을 보여주는 에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로맨틱한 김국진의 모습, 소탈한 김완선의 이미지 등을 엿보면서 많은 사람이 중년 연예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의 출연을 통해 천진무구한 모습과 충격적인 행태를 보인 김건모에게 대중은 더욱더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 에서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이순재·윤여정, 백일섭·신구·김용건·이한위·김구라를 비롯한 중년 및 장·노년 연예인들이 이미지를 확장하고 새로운 모습과 끼를 선보이며 예능 스타 반열에 오르고 있다. 김용건은 “를 통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줄 수 없는 사적인 부분을 편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부분이 많았다고 하더라.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이 드라마나 영화의 캐릭터 확장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며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중년, 장·노년 연예인의 재발견과 인기 부활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젊은 시청자들에게 중장년, 노년층에 대한 이해의 접점을 확장하는 계기도 마련해준다. 에서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노년 예능 프로그램을 선보인 나영석 PD는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장·노년 연예인의 모습을 보면서 젊은 시청자들이 이들 세대에 대해 더 많은 부분을 알게 되고 이해의 범위도 넓어져 세대갈등 해소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백일섭은 “드라마와 영화를 할 때는 중장년 사람들이 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와 등 예능 프로그램을 하면서 10~30대 젊은 팬이 많이 생겼다. 거리에서 젊은이들이 사인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 2017-07-1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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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라이프] 중장년 연예인, 예능 프로그램 통해 화려하게 부활!
- 70세의 중견 배우 윤여정이 인기 고공비행을 하고 있다. 바로 젊은 연예인과 신세대 스타들의 전쟁터로 변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예능 프로그램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윤여정은 인도네시아 발리 인근 섬에서 작은 한식당을 열고 운영하는 과정을 관찰 예능으로 담아낸 tvN 에서 사장 겸 요리사로 나섰다. 윤여정은 에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젊은이들에게 꼰대 짓을 하지 않는 바람직한 어른 이미지를 보여주며 시청자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상승한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맹활약하고 있다. 에서 특유의 소탈함과 함께 현명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 81세의 신구 역시 에서 아르바이트 점원으로 열심히 일하면서도 젊은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고 KBS 에 출연해 기상천외한 입담을 과시하며 장·노년 연예인 예능 스타 붐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70세의 여배우, 81세의 원로 남자 연기자. 한국 대중문화와 연예계에서 이들은 어떤 의미일까. 이 나이쯤 되면 일반적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은커녕 비중 있는 조연 맡기도 힘들다. 가족이 밥 먹는 장면에만 출연하는 ‘식탁용 배우’로의 전락을 감수해야만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중견 연예인들의 의미 있는 반란과 도전이 시작됐다. 그 반란과 도전의 진원지는 바로 젊은 연예인의 전유물이자 10~30대 젊은 시청자들이 주로 시청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중장년 연예인들이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와 끼, 면모를 보여주고 친근감을 배가시키며 시청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한 이미지의 확장과 인기 상승을 바탕으로 드라마와 영화의 주연으로 나서는 선순환이 이뤄지면서 중장년 연예인의 재스타화가 속속 이뤄지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중장년 연예인의 재발견 창구로 부상시킨 것은 바로 2013년 방송된 tvN 다. 황혼의 해외 배낭여행 포맷으로 진행된 는 파격적으로 노년(老年) 예능을 표방하며 당시 78세였던 이순재, 77세 신구, 73세 박근형, 69세 백일섭을 출연시켰다. 를 연출한 나영석 PD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많은 우려를 했다. 중장년 예능 프로그램이 전무한데다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자는 주로 젊은 층이었기 때문이다. 촬영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원로 연기자 이순재·신구·박근형·백일섭씨의 모습을 보면서 성공을 예감했다”고 말했다.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은 에서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하고 의외의 재미있는 모습을 드러낸데다 연륜이 주는 현명함까지 전달돼 할배 신드롬이 일었고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장·노년 출연자가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의 성공 이후 방송사들은 경쟁적으로 중장년 연예인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쏟아냈다. 또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젊은 연예인들과 함께 고정 멤버로 출연하는 중장년 연예인도 많아졌다. 결혼을 졸업했다는 고백으로 우리 사회에 ‘졸혼(卒婚)’을 화두로 던지며 공론화했던 백일섭(73)과 이혼 이후 혼자 살며 다양한 취미생활과 여행을 하며 활기차게 장년의 삶을 사는 김용건(71)은 각각 KBS 과 MBC 를 통해 살림살이에서 여가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들은 혼자 사는 장·노년 사람들의 생활 트렌드를 이끌 뿐만 아니라 유익한 삶의 정보까지 제공해 사랑을 받고 있다. 김국진(52), 강수지(50) 등이 출연하는 SBS 과 김건모(50)가 나오는 SBS 는 중년 연예인의 이미지 확장과 인기 부활 예능 프로그램 역할을 하고 있다. 혼자 사는 중년 연예인들이 여행을 하거나 미션, 놀이를 하면서 싱글 중년의 삶과 문화, 그리고 사랑에 대한 실태와 인식을 보여주는 에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로맨틱한 김국진의 모습, 소탈한 김완선의 이미지 등을 엿보면서 많은 사람이 중년 연예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의 출연을 통해 천진무구한 모습과 충격적인 행태를 보인 김건모에게 대중은 더욱더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 에서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이순재·윤여정, 백일섭·신구·김용건·이한위·김구라를 비롯한 중년 및 장·노년 연예인들이 이미지를 확장하고 새로운 모습과 끼를 선보이며 예능 스타 반열에 오르고 있다. 김용건은 “를 통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줄 수 없는 사적인 부분을 편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부분이 많았다고 하더라.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이 드라마나 영화의 캐릭터 확장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며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중년, 장·노년 연예인의 재발견과 인기 부활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젊은 시청자들에게 중장년, 노년층에 대한 이해의 접점을 확장하는 계기도 마련해준다. 에서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노년 예능 프로그램을 선보인 나영석 PD는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장·노년 연예인의 모습을 보면서 젊은 시청자들이 이들 세대에 대해 더 많은 부분을 알게 되고 이해의 범위도 넓어져 세대갈등 해소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백일섭은 “드라마와 영화를 할 때는 중장년 사람들이 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와 등 예능 프로그램을 하면서 10~30대 젊은 팬이 많이 생겼다. 거리에서 젊은이들이 사인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 2017-07-13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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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랜차이즈 가맹점 창업을 생각하시나요?
- 창업은 독립적으로 할 수도 있고 인지도가 있는 브랜드를 선택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맹점 창업이 편리하다고 해서 잘 알아보지 않고 계약을 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연일 무더위가 계속되는 날 한국 공정거래조정원 주최로 상공회의소 공정원 강의장에서 창업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설명회가 열렸다. 많은 정책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새 정부가 중점 추진할 예정인 ‘골목상권 활성화’ 정책 관련 ‘가맹거래’를 주제로 이야기가 펼쳐졌다. 사실 골목상권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기도 하다. 필자의 경우만 해도 집과 가까운 곳에 마트가 있지만 두세 정거장 아래 대형 마트가 생겨 걷기 운동도 할 겸 걸어가 그곳에서 장을 볼 때가 있다. 아무래도 동네 마트보다 물건도 많고 싱싱한 상품을 보다 저렴하게 살 수 있으니 이용은 하지만 동네 마트의 상권을 위해서는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다는 생각도 한다. 이렇게 다들 대형 마트만 찾는다면 동네 골목의 영세한 가게들은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웬만한 건 동네 마트를 이용하려고 한다. 오늘의 주제는 가맹점 창업을 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다. 창업할 때 장소나 재료 등 본사가 가진 노하우를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브랜드를 통해 사업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고 계약을 한 뒤 문제가 생기면 난감한 일이 발생한다. 그래서 계약서부터 신경을 써야 한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가맹점의 갑과 을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최근 호식이 두 마리치킨의 경우처럼 본사의 잘못으로 불매운동이 일어나 가맹점이 피해를 보게 되었을 때, 본사의 횡포로 영업을 더 유지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중간에서 협상해주는 곳이 공정거래조정원이라고 한다. 공정위 산하 공정거래조정원은 소비자 간 분쟁이 아닌 사업자 간 분쟁을 해결해주는 곳이다. 조정을 통해 해결하며 90% 정도 성립률을 보인다고 한다. 분쟁 조정이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소송을 통하지 않고도 분쟁 당사자들끼리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할 수 있도록 중간에서 도움을 주는 제도다. 이러한 해결 방법으로 공정거래조정원은 연간 2000건 이상의 분쟁을 해결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가맹 본부는 4200곳이 넘는다고 한다. 본사 하나가 업종별로 여러 브랜드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 이 숫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가맹본부가 있으니 문제도 그만큼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공정거래조정원은 을의 처지인 가맹점주의 입장에 서서 분쟁을 해결 조절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가맹점 계약을 할 때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사례도 들었다.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엉겁결에 가맹 계약을 한 후 마음이 바뀌어 해약하려 할 때 해지를 해줄 수 없다며 점포 입점을 위해 들인 비용까지 손해배상청구를 하겠다고 엄포를 놓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가맹 본부는 가맹 희망자에게 공정거래위원회에 등록한 정보공개서를 계약 체결 또는 가맹금 수령 14일 전까지 제공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이는 서로의 정보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단다. 위의 사례의 경우 도장을 찍기까지 충분한 설명과 자료 제공이 없었으므로 ‘정보공개서 미제공시’ 해약할 수 있다는 조항에 따라 공정거래조정원의 도움으로 무사히 해약을 할 수 있었다. 가맹점 계약을 체결시키기 위해 본사가 거짓말을 하는 사례도 있었다. 커피 프랜차이즈 가맹 본부의 말대로 한 달 매출 1200만원을 기대하며 커피 전문점을 차렸는데 첫 달만 반짝 호응이 있었을 뿐 이후 기대 매출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항의하자 사업안내서의 예상 수익표 아래 상권 매장 입지나 매장 환경에 따라 실제 매출액이 다를 수 있다는 문구가 있다며 본사에서 책임질 수 없다고 했단다. 속았다는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어느 날 공정거래조정원의 분쟁조정제도를 알게 되어 상담을 한 후 ‘허위, 과장 정보 제공 시’ 보상해야 한다는 조항 아래 조정을 받았다. 도시락 매장 가맹점 사례도 소개되었는데 본사에서만 받아야 하는 재료를 친구를 통해 고기를 따로 납품받아 사용한 것이 적발되어 가맹 해지를 당하게 된 경우다. 계속 사업을 하고 싶었던 사장은 실수를 인정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는데도 강제로 해지를 권해 공정거래조정원에 조정을 신청했고, 해지는 무효처리되었다. 2개월 동안 시정 명령이 나고도 이행하지 않으면 강제 해지가 되지만 이 사례의 경우 ‘잘못을 인정했으므로’ 해지 통보가 부당하다는 조정 판단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가맹점주들의 사정을 들어주고 조정 중재해주는 기관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필자가 창업을 하게 된다면 오늘 배운 대로 꼼꼼한 체크를 하겠지만 그래도 억울한 일이 생기면 중재해줄 공정거래조정원이 있어 마음이 놓인다.
- 2017-07-0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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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 여행전문가 한비야씨의 7번째 책이다. 58년 개띠 여자이다. 그저 여행이 좋아 평범한 삶을 포기하고 여행에 인생을 건 여자로 봤었다. 멀쩡하게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타 대학 언론대학원에서 국제 홍보학 석사학위까지 받은 재원이다. 여행 책이 최근 관심 있게 손에 잡히는 이유가 필자도 앞으로는 여행을 제대로 해보고자 하는 버킷리스트 때문이다. 가 본 나라도 많지만, 아직은 안 가본 나라가 훨씬 더 많다. 그렇다고 안 가본 나라들을 꼭 가보고 싶은 것도 아니다. 세계지도를 놓고 볼 때 가보고 싶은 나라들이 아직 즐비하다. 그러나 직접 가 보고 싶은 나라는 아니지만, 관심은 많다. 그래서 책을 통해서 간접 경험을 얻고 싶은 것이다. 지도를 보면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가 있다. 잘 사는 나라를 먼저 보고 싶은 것이다. 못 사는 나라는 시간과 돈을 들여가서 볼 것도 없고 불편하고 위험하다면 후회할 것 같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그런 위험하고 가난한 나라들이 더 많다. 한비야씨의 이 책은 직접 가보기도 어렵고 위험한 나라들이다. 국제 긴급 구호 요원으로 아프리카의 말라위, 잠비아,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중동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아시아의 네팔,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북한을 다녀와서 쓴 글들이다. 현재 전쟁이나 내전 중이기도 하고 각종 전염병 등으로 위험한 지역들이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이스라엘의 만행도 참고할 만 하다. 단순한 여행으로는 다녀오기 어려운 나라들인데 긴급 구호요원으로 활동 한 덕분에 한비야씨의 생생한 현지 경험담을 들어 볼 수 있다. 시에라리온은 ‘사자의 산’이라는 뜻이고 평균 수명이 25세~35세로 인구 대비 난민이 절반, 신체장애자 수도 가장 많은 나라란다. 내전 중에 전 인구 5백만 명 중 1/5이 죽었단다. 이웃나라 라이베리아는 ‘자유의 땅’이라는 뜻이란다. 미국의 식민지였다가 해방된 나라로 다이아몬드 자원 때문에 내전을 겪은 나라들이다. 반군들이 양민들의 팔다리를 잘라 장애자 수가 많다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들은 말만 들어도 가슴이 아프다. 전 세계 60억 인구 중 절반이 끼니 걱정을 하고 산단다. 한 달에 2만원만 있어도 먹고 살 수가 있는데 그 돈이 없어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는 아이들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던 오드리 헵번 같은 사람들이 아프리카에 가서 봉사하고 왜 존경받는지 알 것 같다. ‘한국의 자립은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보다 불가능한 일’이라던 우리가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외국 원조를 1990년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때까지 무려 130억 달러의 원조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원조하는 나라가 되었는데 아직 그 액수가 22억 달러로 은혜의 빚이 많다는 것이다. 국민 총소득의 0.06%, 일인당 한 달에 400원 정도를 원조금으로 내고 있어 나라의 경제 규모에 비해 크게 못 미치는 모양이다. 원조 1위국 덴마크는 국민 총소득의 0.91%, 유엔 권장이 0.7%이며, 국민총소득이 우리보다 못한 그리스도 0.17%, 포르투갈도 0.25%나 된다는 것이다. OECD 평균치도 0.23%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부분은 앞으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흔히 듣는 얘기로 우리나라도 불쌍한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멀리 외국에 까지 원조를 할 필요가 있느냐, 그런다고 무슨 큰 도움이 되겠느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우리가 원조를 받을 때도 원조를 주는 나라의 국민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또한 한 사람의 힘은 약하지만, 이 운동이 활발해진다면 상당히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 2017-07-05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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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랍 속 어머니 사진
- 어머니가 생전에 당신의 사진 중 괜찮은 포즈의 사진을 몇 장 인화해 서랍에 넣어두었다. 식구들이 자주 열어보는 서랍이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어느 날 어머니가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 하신다. “엄마 보고 싶다고 사진 달라는 놈들이 있을까봐 몇 장 뽑아놨는데도 아무도 달라는 놈이 없다,” 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영화 포스터 문구가 참 그럴듯했다. ‘세상에서 슬픈 여자는 버림받은 여자, 버림받은 여자보다 더 슬픈 여자는 죽은 여자, 죽은 여자보다 더 슬픈 여자는 잊혀진 여자’ 라고 했다. 죽음보다 더 비참하고 슬픈 일은 목숨처럼 소중했던 자식들로부터 잊혀지는 것임을 어머니 돌아가시고 한참이 지난 후 이해를 했다. “죽으면 내가 살던 흔적이 하나도 없으면 좋겠다. 사진 다 태우고 영원히 잊혀지기를 원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진심일까? 옛날에 할아버지가 맏손자에게 “내 제사를 지내줄 놈” 하며 애지중지한 것은 귀신이 되어 제삿밥을 얻어먹겠다는 욕구보다는 자신이 죽은 날을 후손들이 잊어버릴까 두려워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분은 어머니가 이제 저승길 갈 때가 됐다고 그동안 보관하던 앨범 사진을 불에 태우며 눈물 흘리신 내용을 글로 썼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속으로만 안타까워했다고 했다. 이럴 때 필자라면 “엄마! 엄마 사진 태우지 말고 그냥 두세요, 엄마 보고 싶을 때 꺼내봐야지요” 했을 것이다. 그러면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실까! 젊은 세대들은 컴퓨터를 잘 다룬다. 컴퓨터 안에 앨범 사진을 일목요연하게 정리정돈해둔다. 어떤 분이 아들 집에 가서 컴퓨터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고 한다. 손자와 손녀가 출생할 때부터 지금까지 성장하는 동안 수백 장의 사진이 글과 함께 잘 정리돼 있었는데 부모인 자기 사진은 없더라는 것이다. 손자 손녀와 같이 찍은 사진 속에서만 어쩌다 모습이 보이더란다. 그렇게 자식은 눈으로는 부모를 보면서 마음으로는 잊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나 부부 사진은 자동차에도 걸고 거실에도 걸면서 부모님 사진은 한 장 없는 집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깔끔한 성품인 분들은 저승길 들기 전에 자신이 쓰던 물건을 버리고 태우고 정리하면서 감정에 격해져 우시는 분들이 많다. 법륜 스님은 돌아가신 분의 유품 정리는 자손의 몫이라고 했다. 자손이 선친이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간직할 것은 간직하면 되는 것이지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의 물건을 마치 죽은 사람 물건인 양 정리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언제 다가올지도 모르는 죽음을 예상하고 눈물을 흘리며 궁상을 떨 필요는 없다. 살아 있는 동안은 즐겁고 신나게 살면 된다.
- 2017-07-03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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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의 역사를 써나가는 칼럼니스트
- 한 분야의 장인을 만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 이번에 만난 이도 마찬가지였다. 철강 산업 분야에 반평생을 몸담은 만큼 국내 철강 역사와 관련한 에피소드들이 끝없이 쏟아진다. 묻지도 않은 이야깃거리도 저절로 나온다. 평범한 사람은 물을 수도 없는 스토리다. 평생을 철강 업계에서 보내던 그가 이제는 다소 독특한 철강 칼럼니스트란 직종을 창직(創職)해 활동 중이다. 바로 전 동국제강 상무 김종대(金鍾大·63)씨다. “함께 일하던 작가가 그러더라고요 책 한번 내볼 생각이 없냐고.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그동안 회사와 업계의 대표선수 중 한 명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살았는데, 생각해보니 내 이름으로 출간한 제대로 된 책 한 권 없었던 것이죠.” 그가 칼럼니스트로 변신하게 된 결정적 순간의 이야기다. 동국제강 창립 50주년 사사(社史)를 준비하던 당시, 함께 일하던 작가에게 받았던 그 질문은 그의 두 번째 인생에 큰 영향을 줬다. 아직 회사에 몸담고 있던 시절이었다. 퇴직 전까지 그는 동국제강 홍보를 담당하는 상무로 활약했다. 새로운 직업을 찾다 철강 칼럼니스트. 한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칼럼을 전문적으로 쓰는 작가는 많다. 최근에 각광받는 음식 칼럼니스트들은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이들도 꽤 많고 정치나 음악, 대중문화에 대한 칼럼니스트들도 있다. 하지만 철강이라니 다소 생소하다. “처음부터 철강 칼럼니스트를 생각한 것은 아니에요. 30년 가까운 인생을 보낸 철강 분야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보자고 마음먹고 조금씩 준비를 해왔죠. 먼저 주변에서 칼럼 청탁이 들어오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아예 연재를 하면서 글을 하나하나 모아가면 하나의 책으로 완성하는 데 수월할 거라 생각했죠.” 그에게 글쓰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회생활을 기자로 시작했고, 홍보 일을 하면서 각종 연설문이나 축사 등을 자주 썼고 매체에 기고하는 일은 업무의 일부이기도 했다. 지금 그는 ‘철이 미래다’라는 주제와 부정 철강제품 추방에 대한 글을 1년 동안 쓸 계획에 있다. 현재 쓰고 있는 글들은 한국철강협회 간행물과 동국제강 블로그, 그리고 업계 전문지에 게재되고 있다. 원고 청탁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철강 칼럼니스트가 됐다. 그리고 은퇴 후 그는 자연인이 된 자신을 소개할 때 철강 칼럼니스트라고 말한다. 정권에 의해 운명이 바뀐 두 번의 변곡점 그가 철강업계에 몸담게 된 사연은 좀 기구하다. 1954년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경희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에서 홍보를 전공했다. 첫 직업은 신문사 편집기자였다. 현장을 뛰는 기자는 아니었지만 꽤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고 기억한다. “일을 빨리 배우고 싶어 꾀를 부렸죠. 선배들이 신문의 면을 구성하는 것을 어깨너머 배우기 위해 소조(小組)들을 집에 챙겨왔어요. 소조는 면 구성을 메모해놓은 종이인데, 기사의 분량이나 제목, 속보 등에 따라 최종결정이 나기까지 여러 차례 바뀌기 마련이거든요. 선배들이 버린 소조들을 사환을 시켜 확보해놨다가 하숙집 천장에 잔뜩 붙여놓고 편집 공부를 했죠. 선배들이 가르쳐주지 않아 몰래 모으느라 애먹었어요(웃음).” 하지만 그런 노력은 얼마 가지 못했다. 그가 일했던 신문사는 1980년 언론통폐합을 통해 경향신문에 흡수 합병된 신아일보였다. 갓 입사한 신입기자였던 그는 결국 회사를 나와야 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익혀뒀던 기술은 후에 빛을 발했다. 당시는 인쇄, 편집기술이 대중화되지 않아 수요가 많았는데, 그는 직접 회사를 차려 대학교 학보나 회사 사보 편집을 대행해주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의 실력을 알아본 관계자의 추천으로 국제상사 홍보실에 입사하게 된다. 그곳에서 사보 의 편집장이 되면서 홍보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워낙 정치적으로 어수선했던 시기니까요. 그래도 언론통폐합 한 번으로 변곡점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아시다시피 국제상사는 1985년 신군부에 의해 해체되는 고초를 겪죠. 저 역시 그 과정에서 국제상사에서 연합철강으로 적을 옮기게 됐고, 연합철강은 동국제강으로 경영권이 넘어갔어요. 그때부터 동국제강 사람이 됐죠.” 편집기자에서 철강 홍보맨으로 ‘철강맨’이 된 그는 동국제강이라는 회사의 소식을 외부에 전하는 ‘입’이 되었다. “사실 철강회사 홍보팀을 대단치 않게 여길 수 있어요. 철강산업 자체가 대중을 소비자로 상대하는 곳이 아니고, 철강 소비자들은 모두 기업이니까요. 게다가 초창기 철강산업은 제품만 만들면 팔리는 잘나가던 사업이었어요. 경제성장기에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주지 못해 너도나도 먼저 제품을 사가겠다고 줄을 서던 시절이니까요. 그런데 무슨 홍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어요.” 그래도 그는 때로는 회사를 상대로 때로는 언론을 상대로 때로는 경쟁업체와 기관을 상대로 치열한 길을 걸었다. 한때는 ‘물을 먹였다(특종을 놓치게 했다)’는 이유로 한 매체가 부정적 기사를 연이어 게재하는 바람에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기자를 찾아가 단판을 짓기도 했다. 기업 홍보실 책임자의 비애였다. 철강업계에 그가 남긴 족적은 또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6월 9일 ‘철의 날’이다. “협회에서 홍보 담당자들끼리 회의를 하는데 우리도 기념일을 하나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업계가 다 함께 기념할 수 있도록 말이죠. 처음엔 다들 시큰둥해하더라고요. 하지만 꾸준히 제안해 6년 만에 철의 날이 제정되었어요. 그게 2000년 6월의 일이에요.” 한국철강협회의 철의 날이 6월 9일로 지정된 것은, 국내 철강 역사상 처음으로 고로가 가동된 날짜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포항제철소 1고로에서 국내 최초로 쇳물을 생산한 날짜는 1973년 6월 9일이었다. 또 국내 사진계에서 손꼽히는 행사로 인정받는 철강사진전과 마라톤대회의 창설 역시 그의 작품이다. 은퇴 후 직업을 위한 일상의 원칙들 은퇴 후의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 다행스러웠던 점은 남들과 다르게 은퇴를 미리 경험해볼 수 있었던 것. 그는 2012년 말 첫 번째 은퇴를 한다. 사규에 따른 것으로서 정상적이었다면 회사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야 했다. 하지만 회사에 오너리스크가 발생하자 그만 한 적임자가 없다는 경영진의 판단에 회사로 다시 되돌아올 기회를 얻는다. “제겐 행운이나 다름없었죠. 2년 6개월의 은퇴를 미리 경험할 수 있었으니까요. 예상했던 퇴직과 실제로 경험했던 삶은 완전히 달랐어요.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는 주변 선배들의 얘기가 실감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엔 단단히 준비해야겠다 맘먹었죠.” 그가 은퇴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마련한 것은 서재다. 은퇴 후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으려면 은퇴 전과 다름없이 ‘출근’하는 기분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추천 때문이었다. 그 역시 짧은 은퇴 경험을 하면서 그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다행히 장가 간 아들 방이 비어 있어 그 방을 서재로 쓰겠다고 했죠. 아내도 제 설명을 듣고 이해해줬어요. 덕분에 매일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아침에 강아지와 산책하며 글의 윤곽을 대강 구상하고, 낮에는 글로 구체화하는 작업을 해요. 그렇게 초고를 써놓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밤을 새서 다듬기를 반복하면서 탈고 과정을 거쳐요. 처음에는 글이 제대로 써지질 않아 애를 먹었어요. 책상 앞에 앉았는데 도통 진도가 나가질 않더라고요. 몸이 아직 적응하지 못했던 모양이에요.” 완성된 원고는 반드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평가를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글의 완성도를 높여갔고, 또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리는 계기로도 삼았다. 자신에게는 자극이 되는 과정이었다. “은퇴 후 제대로 글을 써보겠다 생각하고 공부한 철강 분야에 대한 학습량은 30년 회사생활 동안 한 공부보다 더 많을 거예요. 막상 글을 쓰려니까 모르는 것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서 국가기록원 등 철강산업의 발전과 관련한 곳들을 모두 찾아다녔어요. 다행히 오래 접했던 분야라 그런지 흥미로웠어요.” 그가 회사생활을 하며 꾸준하게 모았던 다이어리, 스크랩들도 집필에 도움이 되고 있다. 최고경영진과의 대화와 메모, 그리고 경영상의 위기나 불황을 겪으면서 상황 타개를 위해 노력했던 순간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는 이 자료를 보다 편하게 볼 수 있도록 디지털 파일로 전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돌아보면 ‘鐵’이 보인다 김종대씨는 이제 여행을 다닐 때도 ‘鐵’이 보인다고 이야기한다. 직업병 때문인지 독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철강문화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남들은 관광 명소로 생각하는 에펠탑도 그에게는 철의 문화이자 역사의 상징으로 보였다. 그가 철강 칼럼니스트로서 앞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지금 남아 있는 철강산업의 역사는 포항제철(현 포스코)에만 집중되어 있어요. 물론 포항제철이 국내 철강산업에 큰 획을 그은 것은 맞지만, 일제 강점기 때부터 우리의 철강산업 역사는 이어져왔어요. 이 시기에 대한 자료나 학문적 연구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에요. 이런 현실이 조금이라도 개선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그의 또 다른 바람은 철강산업에 대한 인식 개선이다. “철강산업은 굴뚝산업이라는 대중의 인식을 바꾸고 싶어요. 최근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데 철강산업도 예외는 아니에요. 최첨단 제품을 개발하는 데 있어 소재 개발은 기본 중에 기본이죠. 국내 철강산업은 미래에도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어요. 이런 부분들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종사자들이 좀 더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은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 2017-06-2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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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축성 질염, 발병 원인과 치료 방법은?
- 갱년기와 폐경기를 거치면 난소가 점차 기능을 상실하고, 난소에서 분비되는 호르몬도 기능이 떨어져서 질 점막이 점차 얇아진다. 위축성 질염이란 폐경을 전후해 질 점막이 얇아지고 분비물이 적어져서 생기는 질환이다. 주로 50~60세 이상의 여성에게 나타나며 비특이성 질염 또는 노인성 질염이라고도 한다. 폐경을 전후해 에스트로겐 양이 감소하면서 질 안의 호르몬 양이 변화해 나타나는 염증이지만 세균과 꼭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위축성 질염을 중심으로, 노화에 따른 여성질환에 대해 알아보자. 위축성 질염은 무엇이고, 주로 어떤 사람들에게 발병하나요? 폐경이 되면 여성호르몬 중 에스트로겐이 점점 줄어들어요. 그리고 폐경이 되고 2년 정도 지나면 질이 점점 위축돼요. 여성의 외음부는 젊었을 때는 탄탄한데 노화가 되면서 건조해지고 색깔도 창백하게 변합니다. 이것을 ‘위축’이라고 하는데 이로 인해 통증이 있거나 심하게 헐거나 피가 나는 증상이 바로 ‘위축성 질염’입니다. 위축성 질염은 심하게 앓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지만, 노화가 되면 여성들에게 흔히 보이는 아주 흔한 증상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이가 들면 얼굴에 생기는 주름처럼 당연한 변화입니다. 위축성 질염은 청결하지 못해서 생기는 질환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여성에게 발병하는 질염은 몇 가지 종류가 있어요. 세균성 질염은 불쾌한 냄새와 끈적한 분비물이 나오는 것이 특징인데, 질 내 주된 균의 수가 줄어들고 혐기성 세균이 증식하면 발생해요. 칸디다성 질염은 곰팡이균이 증식하면서 발병하고 하얀 치즈 같은 분비물이 나오면서 외음부가 가렵거나 붓고 따끔거리는 증상을 보입니다. 위축성 질염은 에스트로겐 양이 감소해서 질 안의 호르몬 양이 변화하면서 나타나는 염증입니다. 오히려 비누로 너무 자주 씻어서 질 내부가 알칼리화가 되는 게 문제입니다. 환자들은 주로 어떤 증상을 호소하나요? 질이 헐어 있고 위축되어 있어 성관계를 하기 힘들죠. 성생활을 지옥에 갔다 왔다고 표현하는 여성도 있습니다. 어르신들은 병원에 와서 ‘자궁이 아프다’ 혹은 ‘아래가 아프다’고 말하기도 해요. 그러면 의사들은 ‘배가 아프다는 건가?’ 하고 못 알아듣기도 합니다. 에스트로겐이 없으면 방광도 얇아지고, 소변도 자주 마렵고, 소변을 봐도 시원하지 않고 통증이 느껴집니다. 어떻게 치료해야 하나요? 염증은 근본적인 치료를 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여성호르몬 부족에 의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서 에스트로겐 정제나 크림제를 질에 투여하는 등 부족한 호르몬을 보충해주는 치료를 병용하면 증상은 호전됩니다. 그런데 크림제를 사용할 때 정상적인 분도 약이 따갑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어요. 유방암 환자들은 이른 나이에 폐경이 된 분들이 간혹 있는데, 이런 분들은 여성청결제 등으로 윤활기능을 강화하는 방법을 권하기도 해요. 여성청결제가 예방에 도움이 되나요? 여성청결제에는 종류가 많아요. 건조해지는 것을 막아주는 것도 있고 세균 감염을 막아주는 것도 있어요. 노화가 되어 떨어진 PH 밸런스를 유지해주는 청결제도 있어요. 여성청결제는 증상을 완화시키는 데 도움을 줄 뿐이지 치료 방법은 아닙니다. 알칼리성 비누나 바디워시가 안 좋다고도 하던데요? 여성의 질 내부 환경은 약산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샤워를 많이 하면 피부 표면에 있는 지질이 녹아버려요. 특히 알칼리성 비누를 많이 쓰면 항산성이 깨져 외음부가 가렵기도 하죠. 질 내부의 약산성이 깨지고 알칼리성으로 변하면 몸에 살아야 할 세균이 죽고 다른 세균이 들어와요. 이로 인해 박테리아성 질증이 생기기도 하고요. 예상치 못한 세균이나 곰팡이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잦은 목욕은 오히려 안 좋을 수도 있어요. 여름철 자주 샤워를 해야 할 경우에는 천연비누나 약산성비누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노화가 되면서 자주 일어나는 골반장기 탈출증은 뭔가요? 노화로 여성의 골반근육이 약화되면 골반 안에 있어야 할 것들이 제 위치를 지키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제가 한 달에 여러 명의 환자를 진료할 정도로 적지 않은 노인성 질환입니다. 나이가 들어 복부비만이 생기면 근육이 이완되면서 장기가 느슨해져 골반근육을 통해 질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것인데, 노인 여성 중 비율이 적지 않아요. 만성기침 환자, 내과적 문제가 있는 분, 쪼그려 앉아 생활하는 게 습관이 되신 분들에게 많이 일어납니다. 어떤 증상을 호소하나요? 대부분은 말하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아요. 탈출 정도에 따라 다양한 증상을 보이는데 흔히 ‘밑이 빠질 거 같다’, ‘덩어리가 아래로 내려오는 느낌이다’라는 말로 증상을 표현합니다. 주로 기침을 하거나 무거운 것을 들 때 더 심해진다고 호소해요. 처음에는 조금 불편할 정도였다가 방광이 꺾이면 소변을 못 보거나 방광염으로 이어지기도 해요. 장이 같이 끌려 나오면 변비로 고생도 합니다. 이런 상태를 방치하면 요실금, 만성질염이 동반되어 노년의 삶을 더욱 우울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합니다. 골반장기 탈출증은 어떻게 치료하나요? 처음부터 수술을 하지는 않고 케겔운동 같은 보전적 치료를 먼저 합니다. 장기가 질 안쪽에 있을 경우에는 질 안에 링을 껴서 안쪽의 장기를 떠받치는 시술을 하기도 해요. 자궁이나 방광이 너무 밀려나와 있을 때는 질을 올려붙이는 수술을 합니다.
- 2017-06-27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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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트 3국 여행기(3) 라트비아
- 리투아니아 관광을 마치고 국경을 넘어 발트 3국의 중간에 위치한 라트비아로 들어갔다. 북쪽으로 가는 길이다. 나름대로 국경을 넘을 때 입국 수속이나 검문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싱겁게도 버스가 그냥 지나쳤다. 검문소가 있긴 했지만, 우리나라처럼 국경선 개념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지 않았다. 라트비아의 첫 방문지는 바우스카의 룬달레 궁전이었다.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 따 만들었다는데 규모만 작을 뿐 정말 비슷했다. 아름다운 궁전도 그랬고 뒷마당의 정원도 그랬다. 댄스를 알고 나서 보니 과연 궁전 내부가 그 옛날 귀족들이 춤을 추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그리고 화장실이 없다는 베르사이유 궁전과 같이 오렌지 나무를 심어 놓은 정원에 숨어 볼일을 봤겠다는 실감을 할 수 있었다. 다음 코스는 유르밀라 해변이었다. 발트해가 바로 보이는 휴양지라서 근사한 집들이 많았다. 다만, 큰 기대를 했던 발트해는 모래는 아주 작은 입자라서 좋은데 굴 썩은 냄새가 진동하여 해변을 걷다가 곧바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아직 낮 기온이 22도 정도라서 수영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다음에 가본 곳이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였다. 바다와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이다. 피터 대성당, 상인들이 700년간 사용했다는 검은 머리 전당, 라트비아의 자유와 해방을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 정복자 스웨덴의 문, 돔 성당, 구 시청사 등을 돌아 봤다. ‘한자동맹’이라 하여 학창시절에 얼핏 들었으나 ‘한자’의 뜻이 ‘상인의 친구’라는 뜻이란다. 상공업이 발달한 무역도시라서 무역상인들의 역할이 중요했던 모양이다. 리가에서 유람선을 타고 강 한쪽의 구 시가지, 반대편의 신 시가지를 감상하는 코스도 있었다. 우리 일행 30명만 타고 있어서 아늑한 분위기였다. 라트비아의 스위스라는 시굴다, 라트비아의 허파라는 체시스를 둘러 봤다. 라트비아를 지배했던 독일기사단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독일과 발트 3국 사이에 폴란드가 위치해 있는데도 독일은 틈만 잇으면 폴란드를 침공했으니 발트 3국도 독일의 영향력이 컸다는 얘기이다. 발트 3국의 특산품으로 호박이 있다. 소나무의 송진이 열과 압력을 받아 굳어져 만들어진 천연 보석이란다. 자연산이라 조금씩 색이 달랐다. 싼 것은 10유로 목걸이부터 크기와 모양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그 옛날 소나무가 많던 육지가 바다가 되었는데 그때 가라앉은 소나무들이 호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발트 3국의 호박은 바닷물에 뜨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열이 나도록 문지르면 한약재 냄새가 나는 것도 특징이라고 했다. 이날 밤은 변두리 호텔을 숙소로 잡았다. 방이 넓고 다 같이 사용할 수 있는 넓은 세미나 실이 있었다. 낮의 룬델라 궁전을 떠올리며 귀족들 춤을 춰보자며 모였다. 30명 중 남성들은 피곤하다며 빠졌고 여성들만 모인 자리에서 비엔나 왈츠를 가르쳤다. 전진하며 회전하면서 발 모으고 후진하며 역시 회전하면서 발을 모으면 되는 간단한 춤이다. 전진 스텝은 잘 했다. 그러나 후진 스텝이 조금 어려웠는지 엉덩이가 뒤로 빠지는 것만 빼고는 모두 무난히 소화했다.
- 2017-06-2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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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내리던 슈리성 ( Shuri Castle.首里城 )
- 오키나와에서 돌아오는 날 비행기가 저녁시간이었기 때문에 오전에는 슈리성을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시내를 돌아보며 가벼운 쇼핑을 한 후 호텔에 맡겨둔 여행가방을 찾아 공항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슈리성은 숙소가 있는 국제거리에서 모놀 레일을 타고 6~7 정거장을 지나 내려 택시로 기본요금 거리 정도 되었다. 걸어서 20분쯤으로 알고 왔기에 날씨만 좋으면 여유 있게 산책하듯 걸어가려 했는데 비도 조금씩 뿌리는 데다가 후텁지근해서 택시를 탔다. 슈리성은 2차 대전 때 소실되었으나 다시 복원되어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니 그들의 노력이 가상하다. 건물들이 붉은 계통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중국풍인 듯 느껴진다. 실제로 중국과 일본을 융합시킨 건축물이라고 한다. 사실 슈리성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볼 만한 호기심은 안 생겼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안 볼 수 있겠느냐는 일반적인 생각으로 일단 들어가 본다. 만일 다음에 다시 온다면 굳이 성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주변의 자연스러운 정원이나 작은 숲이 이쁘니까 성 주변을 둘러보거나 산책하는 시간으로 이용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 본즉 역시 예상했던 대로 류큐왕국의 영화(榮華)를 보여주는 생활상과 전시물품들이 있다. 또한 각종 전시실이나 기획전시실, 왕조시대의 공예품 들을 볼 수 있다. 난 그저 쓰윽 들러본다. 군데군데 지키고 있는 안내원들의 밝은 미소가 보기 좋다. 게다가 뭔가 감시하거나 지키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도와주려는 모습으로 거부감 없는 자세로 보인다. 실내에서 바라보는 슈리성의 정원이 촉촉하니 고즈넉하다. 처마 밑에 앉아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노라니 새삼스러운 정취를 느끼게 한다. 대충 훑어보고 나오니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마침 하루에 두 번씩 하는 공연이 곧 시작한다고 해서 보기로 했다.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움직이며 표정 없는 얼굴로 절도 있는 리듬감 표현의 춤이다. 몇 개의 무대를 보았는데 이를테면 우리의 꼭두각시 춤이나 민중들의 노동춤, 또는 민속춤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별 기대 없이 봤는데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일본어를 모르긴 하지만 자막에 한자도 많이 섞여있고 눈치로 대충 짐작이 되는 내용들이었다. 우리의 민속춤도 그렇듯이 손끝과 발끝의 섬세한 놀림이 춤을 보는 묘미를 준다. 그 사이 비가 조금 그쳐서 성곽으로 올라갔다. 천년만년 그 자리를 지킨 이끼 낀 긴 성벽을 보면서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낀다. 얽히고 설킨 나무뿌리들이 그 땅을 단단히 해주었겠다. 일본의 옛 국왕들이 머물던 성곽에 서서 오키나와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내겐 아무런 의미도 되어주지 않지만 이젠 단순히 그들의 역사적 자취가 남겨진 공원에서 적당히 휴식의 시간을 즐길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거길 내려와 시내로 나오는 모노레일에 오르니 또 비가 내린다. 내 기억 속의 오키나와는 두고두고 무덥고 비 내리는 오키나와 일 것이다. 모노레일에 오르니 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창 밖으로 흐른다. 우산을 든 여행자들, 더러는 비 오는 날의 불편한 여행으로 기억하겠지만 훗날 그 또한 즐거운 기억일 것이다. 여행이란 그런 것.
- 2017-06-22 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