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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태평양 자연 머금은 진주… 사이판 라오라오베이 골프장
- 사이판 라오라오베이 골프장은 사시사철 아름다운 남태평양의 낙원 같은 풍경을 자랑하는 최고의 골프 명소다. 사이판에는 18홀 골프장이 두 개, 라오라오베이 36홀 등 총 세 개의 골프장이 있는데, 그중 한 곳은 일본 기업, 다른 한 곳은 한국의 이랜드가 운영하고 있다. 라오라오베이 골프장의 모기업은 종합 로봇 기업 휴림로봇이며, 2023년 9월에 인수를 마치고 하이엔드 골프 리조트로의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2024년 초에는 세계적인 골프 관리 업체 트룬(TROON)과 협력해 골프장 관리와 마케팅 분야에 선진 기법을 도입했다. 라오라오베이 골프 리조트는 1994년 일본 기업에 의해 개장했고, 2010년 대우건설이 인수하여 리모델링을 거친 뒤 2013년에 다시 개장했다. 이후 금호그룹이 운영하다가 2023년 현재 휴림로봇㈜이 인수하면서 개장 30주년을 맞았다. 라오라오베이는 사이판에서 유일한 36홀 규모 골프장으로, 동 코스와 서 코스 각각 18홀로 구성되어 있다. 골프장 내에는 더 오션베이(The Ocean Bay) 46객실과 더 스위트(The Suite) 7객실이 있으며, 특히 더 스위트는 넓은 공간을 자랑한다. 더 그릴(The Grill) 레스토랑은 2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으며, 한식·일식·양식 등 다양한 음식을 제공한다. 또한 소규모 모임에 적합한 칼라듐(Caladium) 공간도 갖추고 있어 특별한 행사를 위한 장소로 인기가 높다. 사우나, 야외 수영장, 유아풀, 자쿠지도 완비돼 편안한 휴식을 제공한다. 사이판은 인천국제공항에서 약 4시간 40분 소요되며, 시차는 한국보다 1시간 빠르다. 라오라오베이 골프 리조트는 사이판 시내에서 10분, 국제공항에서는 20분 거리에 위치해 접근성이 좋다. 골프장 시설도 훌륭하다. 24개 타석을 갖춘 400야드 길이의 드라이빙 레인지가 있으며, 연습 그린과 벙커도 구비되어 있어 라운드 전에 충분한 연습이 가능하다. 8월의 사이판은 낮에는 햇살이 빛나고, 밤에는 비가 자주 내린다. 36홀 라운드 중에도 스콜을 만날 수 있는데, 오히려 더위를 식히며 골프를 즐기기에 이상적이다. 사이판의 토질 덕분에 배수가 잘 되어 라운드에 어려움이 없으며, 페어웨이로 카트 진입이 가능해 체력 소모도 줄일 수 있다. 이스트 코스(East Course, 파72, 6355야드 / 5848야드) 이스트 코스는 사이판에서 1위에 랭크된 코스로, 라오라오만(LaoLao Bay)의 절경과 남태평양의 드넓은 바다 전망을 자랑한다. 4번 홀부터 7번 홀까지 절벽 풍경이 펼쳐져 라운드 내내 대자연의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4번 홀(파3, 167야드)과 6번 홀(파3, 136야드)은 사이판 골프에서 가장 아름다운 홀로 꼽히며, 에메랄드빛 바다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배경으로 한 라운드는 일생에 한 번은 꼭 해봐야 할 경험이다. 웨스트 코스(West Course, 파72, 7025야드 / 6413야드) 웨스트 코스에서는 타포차우산(Mount Tapochau)의 신비로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13번 홀(파3, 190야드)은 그린 앞에 큰 호수가 자리 잡고 있어 티 샷이 부담스럽지만, 왼쪽을 공략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18번 홀(파5, 512야드)에서는 그린 뒤로 펼쳐지는 태평양과 잊지 못할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여행 중 음식도 중요한 요소다. 라오라오베이는 한국에서 공수해온 김치와 각종 한식을 제공해, 남태평양에서도 익숙한 맛을 즐길 수 있다. 특히 현지에서 갓 잡아 올린 참치는 신선함이 뛰어나며 입안에서 녹아드는 맛이 일품이다. 라오라오베이에서의 라운드뿐 아니라 사이판의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한다. 타포차우산과 예수 그리스도상, 아메리칸 메모리얼 파크, 반자이 절벽, 자살 절벽 등 사이판의 역사적 장소들은 깊은 감동을 남긴다. 사이판의 여름 골프는 예상 외로 쾌적하며, 자연이 주는 다양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스콜 덕분에 더위를 식히고 남태평양의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며 라운드를 이어가는 경험은 골프 여행의 새로운 기준이 될 것이다.
- 2024-10-18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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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군수 시설 속 강제동원 생생한 흔적, 인천 ‘조병창’
- 이럴 줄 몰랐다. 인천시 부평구에 일제가 만든 대규모 군수 병창 시설이 생생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는 걸. 1941년에 완공해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각종 무기를 생산했던 일본육군조병창(이하 ‘조병창’) 유적이다. 조병창의 터는 광활했다. 2023년 인천시에 반환된 미군기지(캠프마켓)와 부영공원 일대의 부지 115만여 평에 갖가지 시설물을 지었다. 건립 당시의 원형을 유지한 건물 30여 동이 현존한다. 허공으로 높이 치솟은 굴뚝과 대형 건물들의 규모에서 일제가 조병창에 쏟아부은 공력과 품은 야욕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가 부평에 거대한 무기 생산 공장을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1년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해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촉발했다. 이렇게 전쟁의 규모가 확산되면서 무기의 대량생산과 보급이 필요했던 것이다. 조병창에서 생산한 병기는 다양했다. 소총과 탄환을 주로 만들었지만 자동차, 잠항정, 항공기 부품까지 생산했다. 이곳에서 생산된 무기는 부평을 가로지르는 철길을 통해 인천항으로 운송됐다. 전국 각지에서 수탈한 놋그릇, 제기, 엽전 등 무기 제작의 재료도 철길을 통해 날랐다. 이 철길은 풀덤불에 묻혀 현존한다. 일제의 수탈 정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며 알 수 있는 국내 유적은 오늘날 대부분 철거돼 사라졌다. 부평 조병창은 다르다. 다수의 건물이 원래대로 남아 참혹했던 옛일을 웅변하는 게 아닌가. 침탈의 역사 한 자락이 이렇듯 증거물과 함께 숨을 쉰다. 이는 일본이 패전 뒤 달아나면서 버린 조병창을 미군이 접수해 80여 년 동안 사용했기에 가능했다. 개발 바람이 침투할 수 없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한편 조병창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는 극비문서까지 발견됐다. 경향신문은 2021년 8월 7일자 보도에서 ‘일제는 한반도를 총알받이로 쓰려 했다’는 제하의 기사를 썼다. 조건 동북아역사문화재단 연구위원이 일본 방위성 문서철 속에서 찾아낸 조병창 관련 극비문서에 관한 기사였다. 극비문서의 제목은 ‘1945년 3월 예하 부대장 회동 시 상황 보고, 인천육군조병창’이다. 120쪽에 달하는 이 비밀문서를 분석한 경향신문은 두 가지 사안에 주목했다. 하나는 ‘조선인을 강제동원해 조병창을 지하화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일본 도쿄 조병창을 부평으로 옮긴다’는 것. 일본엔 여러 개의 조병창이 있었다. 극비문서는 그중 도쿄의 조병창을 부평으로 이전하고 지하화함으로써 거둘 수 있는 전략상의 이점에 착안했음을 보여준다. 일제는 도쿄가 미군의 폭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도를 모색했던 것이다. 즉 전쟁은 이어가되 위험은 한반도에 전가하려 했다. 조병창이 운영되면서 부평은 사실상 전쟁 한복판으로 끌려들어갔다. 만약 일제가 항복하지 않고 전쟁을 지속했다면? 거대한 병참기지였던 부평은 미국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을지도 모른다. 극비문서에서 조선인 강제동원을 명시한 대목도 참담한 감정을 야기한다. 조병창을 지하화하고 도쿄의 조병창을 수용하는 데에는 방대한 공사와 노동력 투입이 필연적이었다. 일제는 이를 강제동원한 조선 노동자들을 통해 해결해나갔다. 극비문서는 ‘1945년 3월 1일, 부평 조병창에 소속된 노동자 중 9000명이 조선인’이라고 기록했다. 이후 1만 5000명을 추가로 동원할 계획도 수립했다. 강제동원은 전방위적으로 감행되었다. 인천과 경성은 물론, 경상도와 전라도 등 각지의 조선인을 강제동원했다. 주목할 것은 학도 동원이 많았는데 초등학생까지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더 있다. 조병창에서 있었던 독립투사의 행적이 그것이다. 조병창에서 무기 조작 기술을 익혀 독립운동을 하고자 잠입했다가 붙잡힌 오순환, 조병창에서 고려재건당을 만들고 무기를 입수해 임시정부에 넘기려다 체포된 황장연 등이 조병창의 어두운 역사에 한줄기 빛을 뿌렸다. 어린 학생들까지 강제동원돼 발길은 이제 부평구 산곡동 함봉산 자락에 닿는다. 이곳엔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만든 인공동굴들이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동굴만 27개로 통틀어 부평 지하호라 부른다. 이 지하호들은 일제가 획책한 조병창의 지하화 작업에 따라 만들어진 것들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침략전쟁에 광분한 나머지 남의 나라 지하까지 마구잡이로 파고들어 무기 생산을 도모한 만행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또렷한 증거니까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동굴들이 조병창에 딸린 군사시설인 걸 알지 못했다. 독립군들이 판 굴이라는 풍문이 나돌았지만, 흔히 새우젓 저장 창고로 알았을 뿐이다. 비로소 굴의 정체를 확인해낸 사람은 김규혁 부평문화원 과장이다. 굴의 정확한 내력을 알고 싶어 조사활동에 나선 그는 2016년, 이곳에 강제동원돼 굴 파기 노역을 했던 증언자들을 찾아내 실체를 규명했다. 이후 조병창 지하화를 계획한 극비문서가 발견되었고, 이로써 굴의 실체가 확연하게 밝혀졌다. 그는 중학생 신분으로 굴착 작업에 강제동원됐던 이로부터 노무자 대부분이 어린 학생이었다는 증언을 듣기도 했다. 부평동에 있는 ‘미쓰비시 줄사택’도 희귀한 역사 현장이다. 줄사택은 일제가 강제동원한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쥐어짜 무기를 제작, 이를 조병창에 납품했던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운영한 노무자 합숙소였다. 애초 143개 동에 1000여 명의 노무자들이 살았으나 광복 이후 점진적으로 줄어 현재는 4개 동만 남아 있다. 상처의 전시장이라 할까. 줄사택의 형상은 낡고 찌들어 간신히 버티어 선 고목등걸처럼 처연하다. 하지만 이 역시 일제강점기의 비극을 내장한 유적이다. 인근 주민들은 줄사택을 도시 경관을 해치는 흉물로 간주했다. 동네 집값을 떨어뜨리는 애물단지로 여겼다. 철거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이에 따라 부평구는 모두 뜯어내고 공영주차장을 설치할 계획을 수립했으나 사회단체들의 보존 요구에 떠밀려 추진을 중단했다. 문화재청 역시 줄사택을 보존할 가치가 있는 근대문화유산으로 판단했다. 이에 따라 부평구는 2021년 지역사회 각계 인사들을 구성원으로 포함한 ‘미쓰비시 줄사택 민관협의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아직 문화재 등록도 되지 않았으며, 보존과 활용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지 못한 상황이다. 조병창, 지하호, 줄사택, 이 모두 일제가 획책한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을 증명하는 역사유적이다.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일본 수구세력,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 장단을 맞춰주는 일부 국내 세력은 물론 모든 사람에게, 나아가 세계인에게 알려야 할 가치와 당위가 충분한 역사 현장이다. 그럼에도 먼지를 뒤집어쓰고 골방에 방치된 형국이니 아쉽다. 기억만으로 간직한 역사는 연약하다. 오독되고 편집되고 훼손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장의 생생한 단서로 존재하는 역사는 강철처럼 굳건하다. 신동욱 부평문화원 원장 조병창 유적, 어떻게든 보존해야 인천시 부평구는 예로부터 곡창지대였다. ‘수확이 많은 넓은 들’이라는 뜻을 지닌 부평(富平)의 지명을 통해 전통적인 농업지대였음을 알 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산업지구로, 베드타운으로 급속히 전환됐다. 외지인 유입도 매우 활발하다. 신동욱 원장은 이러한 부평의 특색을 문화에 접목하고자 한다. “전라도나 경상도의 도시들과 달리 부평엔 토박이가 드물다. 겨우 8%에 불과하다. 전국 각지에서 온 주민들이 혼재됐다는 특색을 지닌 것인데, 이와 같은 다양성을 문화로 융합해 조화로운 도시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 부평의 역사 가운데 주목할 만한 대목은 어떤 것일까?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사회상에 큰 변동이 있었다. 일제가 만든 대규모 군수공장이 미친 영향, 광복 후 설치된 미군기지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조성된 부평산업단지가 불러들인 경제 효과 등도 부평에서 펼쳐진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부평엔 일제에 의한 조선인 강제동원의 수탈사를 볼 수 있는 조병창 유적이 있다. 조병창이 부평에 들어선 배경은? “육로나 해양 수송로가 발달한 한편, 전시에 식량 조달이 용이한 곡창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 같다. 공습 차단을 위한 지형이나 기후 여건도 고려한 걸로 본다. 일본인들은 부평을 숫제 경성시로 만들 장기적인 플랜도 구상했다.” 신 원장은 조병창을 비롯한 강제동원 관련 유적들의 보존과 활용 필요성을 처음으로 지역사회에 제기했다. 현재의 진척 상황은 어떤가? “보존 가치를 인식한 이들이 많지만 아직 진척된 게 없다. 보존 쪽으로 가자는 결정조차 완전하게 나지 않은 상황이니까. 이는 주도권을 가진 인천시장의 의지에 달린 문제다.” 유적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가능성은? “가능성은 높지 않다. 원형이 훼손된 부분이 있어서.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국가등록문화재로 등재되는 일이다. 이는 어렵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문제는 예산이 여의치 않다며 보존사업에 박차를 가하지 않는 지자체의 태도다. 그들은 역사유적을 문화공간으로 재생해 거둘 수 있는 경제 효과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줄사택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이보다 나은 역사 교육장이 드물겠다. “철거 위기에 몰리기도 했다. 어떻게든 보존해야 한다. 너무 퇴락해 보존이 어렵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단견이다. 현대의 기술로 재생하지 못할 리가 있겠나.” 반환된 미군기지의 활용 방안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대형 식물원이 있는 공원을 만든다고 하지만 안일한 방향이다. 조병창 재생과 고품격 공연장 건립을 첨가한다면 유수의 관광지구로 부상할 수 있다. 특히 강제동원의 역사를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조병창을 역사문화공간으로 살린다면 세계적인 명소가 될 것이다.” 문화원의 역점 사업 하나를 소개한다면? “부평에선 매년 풍물축제가 열린다. 이 축제를 주민 화합의 매개로 삼고 싶다. 주민들 각자 출신 고향의 고유한 풍물을 축제에서 자랑 삼아 경합할 수 있는 공연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 2024-05-03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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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노멀의 백년가약⑥ 허니문 변천사
- 허니문 트렌드가 레트로를 맞이했다. 해외여행이 어려워지면서 국내로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혼주인 시니어들은 젊은 시절 울릉도와 제주도, 지리산 등 내륙과 섬을 가리지 않고 국내로 신혼여행을 많이 떠났다.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국내 허니문의 변천사를 돌아보고, 자녀에게 추천할 수 있는 이색 허니문과 여행지를 소개한다. 20세기 초반까지 혼인은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지 발전을 위한 공동의 행사였다. 당시 신혼부부를 ‘가문’이란 공동체로부터 일시적으로 분리하는 신혼여행은 상당히 낯선 개념이었다. 일부 상류층이나 개화한 지식인들이 하는 낯선 선택으로 받아들였다. 기록에 따르면 1920년에 결혼식을 올린 신여성 화가 나혜석이 신혼여행 도중 자신의 첫사랑 무덤 앞에 가서 비석을 함께 세워주었다고 전해진다. 본격적인 신혼여행은 1960년대부터 시작됐다. 1960~70년대에는 결혼식을 마친 후 승용차를 타고 주변 관광지를 둘러보거나 호텔에서 1박을 하는 신혼여행 형태가 등장했다. 이 무렵부터 서울의 남산은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 사진을 찍는 대표적 명소였다. 당시 인기 있던 신혼여행은 아산 온양, 대전 유성 등의 온천에서 휴양을 즐기거나 지리산 같은 산에 머물다 오는 것이었다. 1970년대까지 제주도 신혼여행의 항공료와 호텔 숙박비는 일반적인 신혼부부가 감당하기 어려운 고가였다. 1980~90년대는 신혼여행의 르네상스였다. 1983년 제주공항이 지금의 모습을 갖췄고, 당시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제주도 왕복 항공료 및 호텔 가격 인하 등 혜택이 많아서 신혼여행으로 제주도를 많이 갔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시작되면서 1990년대부터 해외로 신혼여행을 많이 갔다. 초기에는 우리나라와 근접한 대표적 휴양지인 태국, 필리핀, 괌, 사이판 등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이 인기 지역이었다. IMF 이후 환율이 급등하면서 한동안은 국내로 신혼여행을 많이 갔다. 이후 경기가 좋아지면서 다시 해외로 많이 나갔다. 박부진 명지대학교 아동학과 명예교수는 “신혼여행 문화는 각 시대의 결혼관과 남녀에 대한 인식 등 관념적 차원의 조건과 삶의 물리적 환경을 형성하는 사회경제적 조건 등이 반영된다”라고 말했다. 국내 관광지로 회귀…이색 허니문 등장 코로나19 이후 국내 여행지가 허니문 장소로 떠오르고 있다. 울릉도와 제주도 등 전국의 관광 명소가 신혼여행지 후보로 부상했다. 특히 제주도 신혼여행이 많았다. 호텔신라에 따르면 제주신라호텔의 경우 지난해 6월 스위트 허니문 패키지 예약 건은 같은 해 3월 판매량의 5배에 달했다. 이 중 3박 이상의 투숙객이 전체의 45%를 차지했다. 호텔신라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해외여행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예비 신혼부부들이 제주도로 본격적인 허니문을 떠나며 3박 이상의 장기 숙박 고객이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허니문과 웨딩을 함께 하는 곳도 생겨났다. 올해 3월 파라다이스시티는 ‘트립 투 웨딩’(Trip to Wedding) 프로모션을 선보였다. 파라다이스시티는 웨딩 스냅 장소와 예식 당일 숙박이 가능한 객실을 함께 제공했다. 지난 3월 예약 고객 선착순 일곱 커플을 대상으로 2박 3일간 이용 가능한 130만 원 상당의 ‘마이 스위트 허니문’ 패키지를 선보였다. 결혼식을 마친 커플은 디럭스 스위트 객실에서 최상의 휴식을 누리며 호텔 셰프가 준비한 스페셜 메뉴와 필리조 앤 필스(Philizot&Fils) 샴페인 파라다이스 에디션을 ‘인 룸 다이닝’ 서비스로 즐기는 패키지였다. 이색 허니문도 등장했다. 대표적인 예가 캠핑카 허니문이다. 야놀자의 자료에 따르면 올해 1, 2월 기준 야놀자의 글램핑 및 카라반 거래액은 지난해 동기와 비교해 300% 신장세를 보였다. 캠핑카가 워낙 고가라서 구매보다는 대여가 낫다. 실제로 캠핑카 공유업체 ‘캠핑쉐어’는 허니문 캠핑카를 선보였다. 대여료는 4박 5일간 120만 원이며, 집 앞으로 차를 보내준다. 추가 요금을 내면 웨딩카 장식을 해준다. 다른 도시에서 반납해도 된다. 코로나 시대의 이색 허니문으로 무착륙 관광 비행도 괜찮다. 최근 아시아나항공은 새로운 형태의 ‘A380 무착륙 관광 비행’을 선보였다. 해외로 떠난다는 여행 느낌을 살리기 위해 각국 관광청과 협력해 스페인, 호주 등 국제 여행 콘셉트를 살린 관광 비행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국제선 운항인 만큼 탑승객은 여권을 지참해야 하며, 아시아나항공 기내 면세점을 비롯해 인천공항 면세점과 시내 면세점 이용이 가능하다. 아시나아항공 관계자는 “땅을 밟을 수는 없지만 잠깐의 비행을 통해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기를 바라며 만든 프로젝트다”라고 설명했다. 허니문 추천 국내 여행지 거제도 ▶ 드넓은 남해를 끼고 잘 정비된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그리스 산토리니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학동에서 와현 해안도로까지 이어지는 17.3km 구간은 수려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외도 보타니아는 이국적인 모습을 한 해상식물공원으로 둘만의 인생 사진을 남기기에 좋다. 삼척 ▶ 바닷가 언덕에 자리한 ‘나릿골’ 마을은 낡고 허름한 옛날 건물에 알록달록한 색을 입히고, 전망대, 미술관 등을 마련해 작은 테마파크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서핑을 좋아하는 신혼부부라면 서프키키해변을 추천한다. 맑은 바닷물은 물론이고 샤워장, 강습 프로그램 등이 잘 갖춰져 있어 서핑족의 사랑을 받고 있다. 여수 ▶ 가볍게 산책하며 야경을 감상하는 것은 놓치지 말아야 할 경험이다. 이순신광장부터 종포해양공원, 하멜등대까지 이어진 코스는 반짝반짝 빛나는 도시와 바다가 연출하는 낭만적인 야경을 선사한다. 낮에는 돌산공원과 돌산대교에서 해상 케이블카를 타고 여수의 아름다운 풍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 2021-07-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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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의 인생, 모험으로 답하다
- 갈림길에 섰을 때 사람은 세 가지로 나뉜다. 남들이 지나간 길을 가는 사람, 방향의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서 있는 사람, 남들이 꺼리는 길을 기꺼이 가는 사람. 어느 것이 더 맞고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택하는 걸 ‘용기’라 읽고 ‘모험’이라 쓴다. 이번 호에서는 전형적인 길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는, 타투이스트 조명신(56)을 만났다. 의사와 타투이스트. 이 두 단어를 보고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졌다. 수술실처럼 어두운 곳에서 일한다는 것 외에는 딱히 접점이 없어 보였다. 선입견일 수도 있지만, 한쪽은 엘리트에 가깝고, 다른 쪽은 고독한 예술가 같다. 바둑으로 치면 흰 가운을 입은 의사는 백돌이고, 타투를 새기는 타투이스트는 흑돌처럼 보인다. 물론 의미의 경중을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이미지의 대조는 확실하다. 이 거리감을 증명하듯 수술복을 입은 채 타투 시술을 하는 그의 모습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두 번째는 궁금했다. 메스를 들던 의사가 왜 수술복을 입고 몸에 타투를 새기는 걸까? 의사로서 남극에도 다녀오고,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전공하며 매머드를 공부한 이유는 뭘까? 특이한 이력에 관한 물음표를 마침표로 바꾸기 위해서 그를 만나 지나온 시간 속 사연을 들어봤다. 성형외과 의사 시절 타투와 관련된 일을 하셨나요? 당시 의사로서 타투 제거 시술을 많이 했다. 진짜 다양한 타투를 많이 지웠다. ‘착하게 살자’, ‘영숙아! 사랑해’와 같이 다소 유치한 문장부터 화려한 꽃이나 화살표가 꽂힌 하트 등을 지웠다. 일종의 낙서라고 보면 된다. 10대 때는 이렇게 하고 다닐 수 있지만, 커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조금 민망하고 부끄러운 상황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예전에 했던 타투를 지우는 분이 많았다. 타투이스트가 된 계기가 있었나요? 어느 날 병원에 장미가 그려진 타투를 지우러 온 분이 있었다. 이전까지는 그려진 문양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그 장미를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마음에 무척 들어서 시술한 분을 찾아갔다. 그분은 송탄 미군 부대 앞에서 ‘키미’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를 경계하셔서, 제자가 되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그분 덕분에 타투이스트로서 첫걸음을 잘 뗐다. 당시 타투는 법적으로 의료 행위였으나 전문적으로 하는 의사가 없었다. 나는 성격상 남들이 다 하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 의사 교육 과정에 타투가 있었다면 안 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타투 시술을 시작했고, 실력을 더 쌓기 위해 미국에 가서 배우기도 했다. 메스를 들지 않는 의사, 아쉬움은 없나요? 솔직하게 말하면 처음부터 의사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의사가 된 건 순전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성적은 좋았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위에 있는 형과 누나들이 다 재수, 삼수를 해서 대학에 들어갔다.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니다 보니, 집에 부담이 컸다. 알다시피 등록금부터 생활비, 월세 등등 들어가는 돈이 많지 않나? 우리 집 형편으론 그게 빠듯했다.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직업을 찾다가 의사를 선택했다. 학력고사 성적도 잘 나와서 의대에 충분히 갈 수 있었다. 다만 경제적 부담 없이 다니고 싶어서 여러 의대를 알아봤는데, 마침 한 대학에서 장학금과 함께 매달 용돈을 지원했다. 그렇게 들어간 의대였지만, 내가 원래 가고 싶었던 길과 달라서 방황했다. 원래의 꿈은 고고학자 가고 싶었던 길은 무엇이었나요? 어릴 때 고고학자나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다. 영화 속 주인공 ‘인디아나 존스’처럼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떠돌며 별을 관찰하거나 고대의 유물을 발견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가치 있는 직업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됐다.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 성격이지만, 그때는 잠시 보류했다. 의사가 된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 이런 마음으로 잠시 그 꿈들을 내려놓았다. 매머드 연구가 그 연장선일까요? 연구까지는 아니고 매머드와 관련된 공부를 잠깐 했다. 끝내 못 이룬 고고학자의 꿈에 조금이라도 닿기 위해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전공했다. 지도 교수님이 사하 공화국으로 매머드 연구를 하러 가자고 제안하셔서 함께 다녀왔다. 사하 공화국에는 냉동 상태로 발견되는 매머드가 많아서 관련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는 곳이다. 의사로서 미생물학을 공부한 적도 있고, 인류학이나 고고학에 관심이 많아서 흔쾌히 다녀왔다. 예전에는 남극에도 잠깐 있었다. 남극에는 어떤 일로 다녀오셨나요? 월동의사로 다녀왔다. 알다시피 남극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공간이 아니다. 아무나 갈 수 없다. 의사라고 해서 남극 기지의 월동의사로 무조건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만큼 특수성이 있어, 남들이 안 하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큰 기회였다. 한 명을 뽑았는데 여덟 명이 지원했다. 정말 간절하게 가고 싶어서, 전략적 승부수를 띄웠다. 그때 관장 부서가 복지부였는데, 복지부 장관에게 내가 가야 하는 이유 7가지를 적어서 편지를 보냈다. 장관 대신 실무자가 편지를 읽고, 나의 적극성을 높이 샀다고 나중에 전해 들었다. 결국 8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공중보건의 시절 중 1년을 남극에서 보내고 돌아왔다. 의사로서 본분을 잊은 적 없다 주위의 반응은 어땠나요? 어디에서든 환영받지 못했다. 밑에 있는 직원도 와서 만류하고, 동료 의사도 반대하고, 타투이스트도 찾아와서 하지 말라고 했다. 처음에는 동료 의사로부터 질타를 많이 받았다. “왜 그런 걸 하냐”는 식이었다. 홈페이지에는 “이게 그림이냐? 학원이라도 다녀라” 같은 댓글도 달렸다. 아무 맥락 없이 “밤길 조심하세요” 하며 험악한 글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타투이스트는 직접 찾아와서 자중하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꾸준하게 활동하고 교류하면서 이제는 그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고 있다. 주로 어떤 타투를 하시나요? 정해진 틀은 없고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해준다. 다만 의사이다 보니 메디컬 타투에 신경 쓰고 있다. 의료 문신 혹은 재건 문신이라고 부르는데, 일반적인 타투가 미(美)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타투는 복원에 목적이 있다. 예를 들어 백반증 환자의 경우 하얗게 된 부위를 타투를 이용해 보통의 살처럼 만들어준다. 의사로서 가진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다. 타투를 하면서 내 신분을 한 번도 망각한 적은 없다. 타투를 하면서 보람을 느낀 적이 있나요? 성형외과를 하면서 3만 건 정도의 쌍꺼풀 시술을 했는데 얼굴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타투는 시술한 사람의 얼굴이 모두 기억난다. 특히 한 부자(父子)의 사연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유대가 없던 부자였는데, 타투가 하나의 매개체가 됐다. 아버지는 타투를 한다는 아들을 한사코 말리셨는데, 직접 병원에 와서 보시고 생각을 바꾸셨다. 나중에는 등판에 타투를 새기고 가셨다. 마지막 시술을 받고 가시면서 고맙다고 했다. 타투 때문에 평소 대화가 없던 아들과 말문을 열게 됐다고 하시면서. 그 기억이 참 오랫동안 맴돌았다. 타투는 구속할 수 없는 자유 20년 동안 타투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요? 타투는 늘 새롭다. 코와 쌍커풀은 정형화된 방법으로 시술한다. 하지만 타투 세계에서는 그런것이 없다. 사람마다 옷을 입는 방법이나, 귀걸이를 고르는 취향도 다 다르지 않나? 타투도 마찬가지다. 같은 독수리 도안이라도 취향에 따라서 달라진다. 고객의 요구에 맞춰서 늘 새로운 걸 시도했고, 그러면서 실력이 쌓였고, 재미도 있었다. 이런 새로움이 없었다면 지루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못했을 것이다. 기본적인 소양을 알려준 건 키미이지만, 실제로 나를 키운 건 고객이다. 늘 배운다는 자세로 임한다. 기자나 포토그래퍼도 그렇지 않나? 나도 똑같다. 타투도 같은 형식 속에서 계속해서 다른 내용을 담는 일이다. 끊임없는 새로움이 내 원동력이다. 삶의 롤모델이 있나요? 앙드레 김 선생님과 반 고흐를 존경한다. 둘 다 전형성에서 벗어난 인물이다. 고흐의 해바라기 작품을 좋아한다. 같은 해바라기이지만 고흐는 전부 다 다르게 표현했다. 안정을 추구하지 않고, 언제나 변화를 추구하는 자세는 나의 가치관과 맞닿아 있다. 앙드레 김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남성 패션 디자이너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는데, 쉽지 않은 길을 선택했고, 그것도 모자라 패션에 자신만의 가치를 불어넣었다. 남들과 다른 길을 가면서도 자신만의 가치를 찾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존경할 수밖에 없다.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큰 목표는 없다. 그냥 타투를 오랫동안 하고 싶다. 지금 하는 걸 잘하고 싶다. 2년째 소방관에게 무료로 타투를 시술해주고 있다. 앞으로는 경찰관과 응급실 의사를 대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사소하지만 나의 무료 시술이 그들의 노고를 인정하는 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 프로젝트를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9·11 테러와 관련이 있다. 테러가 발생할 당시 태평양 상공을 지나는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그때의 상황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그 후에 미국 여행 중 만난 분이 인상적이었다. 팔에 영어가 빼곡하게 타투로 새겨져 있었다. 알고 보니 9·11 테러로 희생당한 소방관들의 이름이었다. 미안과 존경의 표시로 말이다. 그분을 만난 이후 나도 나중에 소방관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때의 결심을 이제야 실행하게 됐다. 타투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구속할 수 없는 자유다. 하는 것도, 지우는 것도 본인의 자유다. 독수리를 새기고 싶으면 새기면 된다. 20대에 할지, 나이 들어서 할 것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 있다. 누구도 구속할 수 없는 자유로운 것이다. 바둑 용어 중에 미생(未生)이란 말이 있다. 몇 년 전 유행한 드라마의 제목과 같다. 미생은 가능성을 품은 순간을 뜻한다. 어떤 수를 두느냐에 따라서 상대를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다. 삶도 마찬가지다. 순간의 선택에 따라 삶의 경로가 달라진다. 하지만 선택의 순간이 왔을 때 헷갈린다.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를 때가 많다. 선택의 결과가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진짜 용기는 두렵지 않은 게 아니라 두려움을 알고도 기꺼이 뛰어드는 것이다. 조명신 원장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비록 그가 선망하던 인디아나 존스처럼 고고학자는 되지 못했지만, 공중보건의 시절 남극 월동 의사에 도전했다. 의사로서 안정적인 길을 갈 수 있었지만, 수술실에서 메스를 드는 대신 몸에 타투를 새겼다. 유년 시절 못다 이룬 꿈에 다가가기 위해 대학원에서 인류학을 전공하며 매머드를 탐구했다. 현재도 타투이스트로서 안주하지 않고, 메디컬 타투를 시술하고 여러 가지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바둑판 안에 갇힌 돌로 남기를 거부하고 늘 새로운 길을 찾으며 도전하고 있다. 그는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했다. 안락한 안정이 아닌 구속할 수 없는 자유를 좇았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철학적이지만 해볼 필요가 있는 질문이다. 그 역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삶에서 ‘안정’ 대신 ‘모험’으로 답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말년에 소박하게 타투와 관련된 책을 쓰고 싶다는 조명신 원장의 또 다른 모험을 응원한다.
- 2021-01-11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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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디슨 카운티 다리로 본 '부부의 세계'
- 요즘 여자들이 모였다 하면 빠지지 않고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 이야기를 나눈다. ‘내 남자의 여자’에서부터 시작돼 ‘밀회’를 거쳐 폭발한 김희애의 불륜 연기는 의사, 음악가 등 고스펙 불륜녀의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됐다. 이번 ‘부부의 세계’에서는 너무 완벽한 삶의 조건으로 균열 하나 있을 것 같지 않던 부부 사이가 어느 한순간 갑자기 남편의 오래된 불륜으로 급격하게 돌기 해 부부의 삶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인생까지 소용돌이치게 되는 부부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사실 간통죄까지 폐지된 마당이라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전대미문의 불륜들이 우리 주위에 넘실댄다. 드라마나 영화가 현실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거침없고 솔직한 불륜들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내로남불'은 이제 정치적인 은유는 물론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허물만 나무란다'라는 뜻으로 청소년들까지도 사용하는 대중적 언어가 된 지 오래다. 가만 생각해보면 한국의 중년 여성들에게 '불륜'이라는 단어가 은밀하게 회자하기 시작했던 건 아마 이 영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 단아해 불륜이란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여배우 메릴 스트리프가 조용조용 속삭이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개봉된 지 벌써 25년이 흘렀다. 아일랜드 시인인 예이츠의 시를 읽고 이탈리아 가곡을 듣는 지적이고 단아한 가정주부, 메릴 스트리프(프란체스카)는 아내의 취향은 전혀 모른 채 큰 소리로 떠들고 문을 쾅쾅 닫아 프란체스카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그런 남편과 살고 있다. 엄마가 이탈리아 가곡을 듣고 있으면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자녀들은 요즘 유행하는 팝송으로 재빨리 바꿔버려 집안에서 프란체스카의 자리는 없다. 가족이 모여 밥을 먹는 시간은 서로 나눌 이야기도 없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도 없는 침묵의 시간으로 변한 지 오래. 가족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한 채 그저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부속품처럼 그렇게 하루하루 생활에 찌들어가던 프란체스카에게 어느 날 남편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바깥세상의 살아 숨 쉬는 인생을 동경하게 해주는 그런 남자가 불현듯 나타난다. 배경은 1965년, 미국 중부 아이오와주 매디슨 카운티의 조용한 시골 마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조만간 철거될 이 마을의 명물인 로즈먼 다리를 찍기 위해 이곳으로 트럭을 몰고 온다. 낡은 청바지에 셔츠, 니콘 카메라를 메고 프란체스카가 동경하는 세상의 냄새를 풍기며 조근거리는 목소리로 ‘로즈먼 다리가 어디 있냐?’고 물어온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었다. 마침 남편과 두 아이는 나흘 동안 일리노이주에서 열리는 박람회에 참가하기 위해 길을 떠나 집안은 텅 비어 있었다. 결혼 이후 처음 가족과 떨어져 자신만의 시간을 갖게 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가 길을 묻는 그 순간에도 가족들의 빨래를 널고 있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지구를 사랑하는 패션 브랜드로 알고 있지만 이 잡지는 지구의 자연을 보호하고 현대화로 사라지고 있는 옛것들을 찾아 기록으로 남겨놓는 전통의 잡지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격조 높은 잡지다. 그러니 전 세계를 다니며 오지와 천혜의 자연을 촬영하는 로버트라는 사진작가의 영혼이 얼마나 깊고 넓을지 쉽게 상상하고도 남는다. 결혼한 지 15년이 넘어 자신의 꿈을 접은 채 한 남자와 자식만을 위해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던 프란체스카에게 세계의 풍물과 삶의 모습들을 렌즈에 담는 로버트의 인생은 동경 그 자체였다. 프란체스카는 자신이 원했던 삶을 사는 로버트가 부럽기만 했다. 게다가 그와의 대화는 익숙하다 못해 더 이상은 나눌 이야기가 없는 남편과 나누는 대화와는 차원이 달랐다. 문학과 여행, 음악과 미술… 그 자체로서 너무나 환상적인 감정이입의 순간들을 공유한다. 두 사람의 섬세한 감정이 떨릴 듯 화면에 전해지던 장면이 있다. 프란체스카가 로버트를 저녁에 초대해서 함께 부엌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에게 감자 스튜를 만들어주기 위해 부산스럽기만 하다. 감자는 미국 중부를 상징하는 아이오와주의 대표적인 농산물. 프란체스카의 부산스러움을 느낀 로버트는 “제가 도와드릴까요?” 란 말로 그녀의 맘을 빼앗아 버린다. 너무나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과의 생활에 익숙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가 요리를 도와주겠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요리를요?” “예… 요리를” “당근을 깎아주세요” “이거 말인가요” “예… 끝은 이렇게 다듬어야 해요” 짧은 단답식의 대화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낯선 두 남녀가 한 발짝 한 발짝 자신의 세계를 향해 들어오는 타인에게, 문을 열어주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고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을 부엌에서 함께 채소를 손질하고 감자 스튜를 저으며 그렇게 완성해갔다. 서로에게 배우자가 있다고 해도 어느 날 운명 같은 사랑이 나타날 수 있다. 뒤늦게 사랑의 열병을 앓다 제자리에 도로 주저앉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운명적인 사랑을 따라 지금까지 가꿔왔던 자신의 세상을 박차고 떠나 새로운 삶을 꾸리기도 한다. 대부분 우리는 순서가 잘못돼 '만났어야 할 운명의 파트너'를 만나 인생을 살고 있기보다 '스치고 지나갔어야 할 그 누군가'를 만나 그것을 '사랑'이라 생각하며 산다. 착각은 이뿐만이 아니다. '사랑'의 완성은 '결혼'이라 믿으며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된다. 이렇게 착각으로 쌓아 올린 결혼이라는 견고한 성안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일상을 쌓고 그 일상이 다시 모여져 삶의 결로 퇴적된다. 퇴적된 내 인생의 결이 어느새 작은 봉우리가 되고 제법 봉긋한 작은 산 하나 만들어질 때쯤 우리네 인생은 노년의 삶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오래전 이 영화를 보면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버린 중년 남성과 중년 여성의 사랑이란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당시는 아직 중년의 감성은 아니었기에 100% 감정이입을 못했지만, 육체적 관계의 선을 넘는 것이 아닌 '정신적 교감'을 나누고 ‘시선을 맞추며 안타까워하는 그런 '선'을 나름대로 느낄 수 있었다. 호떡집에 불 난 것처럼 그렇게 부산스럽게 타오르지 않는 사랑, 스튜처럼 오래 끓이며 뭉근히 재료의 맛을 우려내고 깊어지는 사랑. 하지만 ‘불륜’은 그러하지 못할 경우가 많으므로 호떡집에 불 난 것처럼 속전속결로 잡아먹을 듯이 집안을 화염에 휩싸이게 한다. 로버트와 프란체스카는 며칠간의 만남을 통해 서로를 알아가고 대화하며 깊은 울림을 동시에 느낀다. 하지만 자신들의 사랑을 흔히 남녀들이 하는 것처럼 세속에서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 함께 떠나자는 로버트의 간절함을 뒤로하고 프란체스카는 이 작은 마을에 남아 가정을 지키고 자녀에게 헌신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로버트의 유품이 프란체스카에게 도착한다. 로버트가 로즈먼 다리를 찍은 사진이 표지로 담긴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와 니콘 카메라, 그리고 프란체스카가 로버트에게 남긴 다리 위의 쪽지. 프란체스카는 이 유품을 간직해오고 있다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유서를 남긴다. “살아온 인생은 가족을 위해 살아왔으니 죽은 뒤에는 가족묘지 대신 화장을 해서 다리에 뿌려 달라.”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로버트에 대한 숨겨왔던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다. 영화도 연령대에 따라 감상했을 때 차이가 크게 난다. 예전에는 이 부분이 전혀 가슴에 와 닿지 않았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프란체스카가 자신이 죽은 후, 가족묘지 대신 화장을 해서 다리 위에 유골을 뿌려달라는 말의 뜻이 이제 정확하게 이해된다. 프란체스카는 죽어서까지 가부장적인 가족의 굴레에 매여있기 싫었던 것이다. 그녀처럼 나도 죽으면 화장해서 유골을 태평양에 뿌려달라고 딸아이에게 말했더니 눈을 살짝 흘긴다. 바다를 떠다니며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서 비롯됐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딸아이가 엄마가 보고 싶을 때 갈 곳이 없어서 곤란하겠다. 이런 생각이 드니 ‘난 또 어쩔 수 없이 엄마구나’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난 연휴 주말 방영된 ‘부부의 세계’에서 김희애가 자신의 아들에게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게 할 수 없다며 아무도 도우려 하지 않는 전 남편의 알리바이를 증언한다. 뒤를 이어 와인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가운데 이미 헤어진 부부가 뜨겁게 키스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고 옷이 흐드러진 침대를 보여주면서 끝나 전국의 여성들이 갑론을박 난리가 났다. 한번 갈라진 부부의 길은 다시 합쳐지지 않는다. 잠깐 합쳐지는 듯하다가도 이미 다시 파국을 맞는다. 사랑의 유효 기간이 있기 때문이다. 최고 스펙의 의사도 자신의 감정 다스리기는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다. ‘부부의 세계’를 시청하면서 ‘사회적 거리두기’는 코로나 19의 극복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부 혹은 가족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다 알아야 하고 간섭해야 하고 내 뜻대로 콘트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내들이 의외로 많다. 내 눈앞에서 안보일 때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내 가시권 안에 있을 때는 완벽한 평강공주가 온달에게 시혜를 베푸는 모양새다. 흔히 똑똑하고 성공했다는 고스펙 여성들의 결혼생활은 평강공주 신드롬에 빠져 온달들을 관리하느라 부산스럽기 그지없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부부 사이의 적정한 거리 두기는 결국 나에 대한 객관화로 이어져 보다 성숙한 자아의 실현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제발, 몰빵 하지 말 것이다. 사랑은 다 가질 수 없어 안타깝고 그래서 귀한 것이다. 오늘을 사는 시니어들은 감자 스튜 같은 뭉근한 사랑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프라이팬에 와인을 부으면 불같이 일어났다가 금세 스러지는 그런 불꽃 같은 사랑을 꿈꾸나? 곰곰이 우리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 2020-05-06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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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욕 딛고 일어선 거장 '비제이 싱'
- 오욕(汚辱)을 뒤집어쓰면 삶이 어떻게 될까? 그것도 외길 인생을 걷다가 앞길이 창창한 젊은 나이에 그랬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오늘은 그런 오욕을 딛고 일어서 마침내 거장이 된 사람 얘기를 해보려 한다. 누구 얘기냐고? 자주 그랬듯이 문제 나간다. 미국 프로골프투어(PGA투어)에서 역대 누적 상금이 가장 많은 선수는 누구일까? 에이, 너무 쉬운 문제라고? 타이거 우즈 아니냐고? 맞다. 상금 랭킹 누적 2위가 누군지도 맞힐 수 있을 것이다. 타이거의 라이벌이다. 그렇다. 필 미켈슨이다. 그렇다면 상금 랭킹 누적 3위는 누굴까? 통 짐작이 가지 않는다고? 마찬가지로 힌트를 주겠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꺽다리 선수다. 늘 선캡을 눌러쓰고 경기하는 선수 말이다.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고? 남태평양 작은 섬나라 피지 출신이라면 알겠는가? 그렇다. 바로 비제이 싱(Vijay Singh)이다. 비제이 싱은 지금까지 PGA투어에서 상금으로 7100만 달러 넘게 벌었다. 타이거 우즈 누적 상금 1억2000만 달러와 비교하면 어떤가? 대단하지 않은가? 나는 그의 한없이 부드러운 스윙에서 영감을 얻어 스윙을 많이 고쳤다. 에이! 뱁새 김 프로 스윙 보니 거칠게 휘두르는 모양새가 프로 아닌 것 같던데 무슨 소리냐고? 흠흠. 기껏 고친 게 그 모양이다. 아차, 얘기가 딴 데로 샜다. 다시 비제이 싱 얘기로 돌아가자. 그가 PGA투어에서만 34승을 올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썰미가 틀리지 않았다고 흡족해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의 얘기를 조금 더 찾아보다가 그에게 기가 막힌 사연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가 말로 할 수 없는 오욕을 딛고 일어서 인간승리를 거둔 사실을 말이다. 칼리만탄(흔히 보르네오라고 알고 있는 큰 섬) 북쪽 바닷가에 ‘미리’라는 도시가 있다. ‘미리’는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한자 ‘미리’(美理)를 그대로 읽은 것이다. 화교가 유전을 개발하면서 모여든 곳으로 중국 문화가 물씬 풍기는 도시다. 지명도 중국어 그대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말레이시아 사라왁 주에 속하는 미리 바닷가에는 ‘미리 골프 클럽’이 있다. 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이곳에 비제이 싱 눈물이 깃들어 있다. 1985년 인도네시아 오픈 2라운가 끝나고 나서다. 비제이 싱은 컷을 통과하고 주말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기절초풍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제출한 스코어 카드가 실제보다 한 타 적다는 내용이었다. 그건 점수를 실제보다 좋게 써서 스코어 카드를 냈다는 얘기다. 조사 결과 사실로 드러났다. 그가 그 대회에서 실격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아시안투어는 비제이 싱을 영구 제명했다. 그는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극구 부정했다. 말레이시아 VIP의 아들인 마커(같은 조 선수로서 해당 선수를 감시하는 역할)가 잘못 써서 넘겨준 스코어 카드에 무심코 사인을 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골프 규칙상 제출한 스코어에 대한 최종 책임은 선수 자신이 져야 하니까. 나는 그가 마커가 건넨 스코어 카드가 틀린 것을 알고도 ‘덥석’ 사인하고 제출했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당시 그는 겨우 스물두 살이었으니까 말이다. 바로 한 해 전인 1984년 프로 데뷔 2년 만에 말레이시아 PGA 챔피언십에서 첫 승을 올린 그였다. 첫 승을 하고 청운을 꿈꿨을 청년이 투어 참가를 영구 금지한다는 결정을 통보받고 얼마나 참담했을까? 유혹을 참지 못하고 미래를 망친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눈앞이 깜깜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낙담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처지였다. 어떻게든 생계를 꾸려야 했다. 부양해야 할 가족까지 막 생긴 터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스코어를 속이는 부정행위를 했다는 불명예 꼬리표가 붙은 그를 반기는 곳이 있었겠는가? 이리저리 떠돌다가 겨우 자리를 잡은 곳이 바로 ‘미리 골프 클럽’이다. 그곳에서 그는 수년간 헤드 프로로 일했다. 골프 인구가 많지 않은 곳이다 보니 수입도 넉넉지 않았다. 곤궁이 주는 비참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비제이 싱은 그곳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칼을 갈았다. 빼어난 실력 덕분이었을까? 후원자가 나타난 것은 기적이었다. 그는 후원을 받아 아프리카에서 열리는 시합에 나갔다. 흔히 ‘사파리 투어’라고 부르는 투어의 원조격인 대회들이었다. 그러다 1988년 나이지리아 오픈에서 우승한다. 이듬해에는 유러피언 투어 퀄리파잉 스쿨을 통과해 유럽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건너가자마자 그는 볼보 오픈 챔피언십에서 첫 승을 거뒀다. 유럽에서 몇 년간 경험을 쌓은 그가 PGA투어로 건너간 것은 1993년이었다. 그해 뷰익 클래식에서 연장전 접전 끝에 우승을 하면서 화려하게 루키로 데뷔했다. 2000년에는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즈에서도 우승한다. 이때부터 그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마흔 살이 넘어서 말이다. 이어 2004년에는 마침내 세계 랭킹 1위에 오른다. 그해 비제이 싱은 메이저 대회인 PGA 챔피언십을 포함해 무려 9승을 거둔다. 9승, 절정 기량을 뽐내던 타이거 우즈도 그를 말릴 수 없었던 해였다. PGA투어 최초로 한 해 상금 1000만 달러를 넘기는 기록까지 세웠다. 1963년생인 비제이 싱은 요즘 PGA투어 챔피언스에서 뛰고 있다. 명예를 잃고 좌절하고 있는 독자가 있다면 그를 보고 용기를 얻기 바란다. 물 흐르듯 하는 그의 스윙도 함께 마음에 담으면서 말이다.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
- 2020-05-0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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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붙잡혀간 사람들
-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게재하기로 한다. 정유재란은 ‘노예 전쟁’이었다. 조선인 노예가 큰돈이 된다는 말에 혹한 일본인 중개상과 외국인 노예 상인들이 일찍이 노예사냥에 나섰다. 왜장들도 되도록 많은 포로를 붙잡아 돌아가서 노비로 종으로 부릴 욕심에 눈이 멀었다. 징병, 징용으로 일손을 잃어 피폐해진 농어촌이 제대로 돌아가게 할 보충 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정유재란은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린다. 우수한 조선 도공들을 납치해 꽃을 피운 도자기 문명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쓰마 야키(薩摩燒) 같은 일본의 세계적 도자기 브랜드들은 예외 없이 조선에서 붙잡혀간 도공들을 시조로 하고 있지 않은가. 기술자 쟁탈전이기도 했다. 문화적으로 조선에 뒤졌던 일본은 각종 기술자와 의원, 제약사, 목공, 기와공, 미장공, 직조공, 철장, 야장 등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 해당 분야에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서울의 주자소에 있던 활자와 인쇄 기계를 약탈하고, 인쇄공을 납치해 인쇄 문화에 첫걸음을 뗀 일이 대표적 사례다. 그때 약탈해간 주자소 활자는 지금 도쿄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정유재란은 또한 ‘각시 전쟁’이기도 했다. 아름다운 여성을 일컬은 ‘가쿠세이’를 찾으려고 왜장들이 눈에 불을 켰다. 당시 야마구치 지방에 유통되었던 일조회화사전에 “고분 가쿠세이 더불어 오라”는 조선말이 미녀를 데리고 오라는 말이라고 해석돼 있다. 이 말은 출진장병을 보내는 인사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잡혀간 규수 중 영주의 첩이 된 사람도 있다. 최고 권력자 수청 들기를 거부하다가 태평양 외딴섬에 유폐되어 죽은 오타 줄리아도 피해자의 한 사람이었다. 도망쳐 갈 때 빈 배로 항해하기가 위험하다고 선창을 채울 목적으로 양민을 닥치는 대로 잡아가기도 했다. 임진·정유 양란(兩亂) 7년간 조선에 붙잡혀간 사람은 대체 얼마나 될까? 왜군이 오래 농성했던 경남 해안 지방과 호남 지방에 피해가 극심했지만, 그 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길이 없다. 전쟁 수행이 급했던 피해국 조선은 관심을 가질 겨를이 없었고, 일본은 각 지방 영주와 그 휘하 장수들의 개별적인 행위여서 조사도 통계도 불가능했다. 일본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2만~3만 명 또는 5만 명까지 보는 학자가 있다. 국내에서는 적게는 5만 명, 많게는 10만 명으로 보는데 최근에는 10만 명이 넘으리라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그 근거의 하나는 사쓰마(薩摩·가고시마) 지역에만 3만700여 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는 증언 등, 귀환자들이 남긴 글과 단편적인 일본 측 기록들이다. 경상도 사복(司僕·궁중 수레와 말을 관장하는 관직) 정신도(鄭信道)는 귀환포로 출신 전이생(全以生)의 증언을 인용해 가고시마 3만700명 조선인 거주설을 상소문에 인용했다. 광해군 9년 4월 계축일 ‘광해군일기’에 인용된 이 상소문은 광해군 시대가 되도록 피랍인 수조차 파악되지 않고 미귀환자가 많았던 실상을 보여주는 실록이다. 17세기 초 나가사키(長崎) 히라도(平戶) 지역 조선인 분포를 보여주는 자료(平戶町人數改帳)에는 당시 호수(戶數)로 27%, 인원수로는 11%의 조선인이 히라도에 거주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때 나가사키 지역에는 2300명의 기독교인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규슈의 한 지역에만 그렇게 많은 조선인 포로가 있었다면 일본 전국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끌려갔을까 하는 짐작이 가능하다. 일본 유학의 스승으로 불리는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에는 “전후(정유재란 이후) 이요슈(伊豫州) 오쓰(大津) 지방에 잡혀온 사람이 무려 1000여 명인데, 이들은 밤낮으로 마을 거리에서 떼 지어 울고 있으며, 먼저 잡혀온 사람들은 반쯤 왜인에 귀화하여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는 견문기록이 있다. 귀환포로 정희득(鄭希得)은 포로생활수기 ‘월봉해상록(月峯海上錄)’에서 “신이 이르러 보니 우리나라 남녀로서 전후에 잡혀간 자가 아와슈(阿波州) 이야마(猪山)에만 무려 1000여 명인데, 모두 왜졸 하인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유재란 포로가 임란 초기 포로의 10배가 넘는다는 견문도 기록으로 남겼다.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가 예수회 총장 신부에게 보낸 글에도 나온다. “이곳 나가사키에는 남자뿐 아니라 많은 여자와 어린아이도 포함된 조선인 포로들이 (기독교)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수는 1300여 명입니다.” 이들이 잡혀가는 모습도 생생한 기록으로 남았다. 마치 개돼지처럼 끌려가는 참상이 저들의 손으로 기록되었다. “일본에서 수많은 (노예)상인이 왔는데, 그중에는 인신 매매자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포로를 사들여 새끼줄로 목을 줄줄이 엮어 묶은 후 빨리 걸으라고 몰아쳤다. 혹 꾸물대거나 발을 절면 몽둥이로 내리치며 몰아댔다. 그 모습이 마치 지옥의 무서운 귀신이 죄인을 다루는 것이 저럴까 싶었다. 마치 원숭이를 엮어 묶듯 해서는 우마를 끌고 짐을 지고 가도록 볶아대는 것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정유재란 종군 왜승 게이넨(慶念)의 ‘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 11월 9일자 일기 내용이다. 급거 귀국하려고 부산에 모여든 여러 부대 무장들에게서 조선인 양민 포로를 노예로 사들여 끌고 가는 정황이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그렇게 끌려간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궁금증에는 기록으로 전해져오는 성공 스토리 말고는 대개가 고난과 순응으로 한평생을 마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통탄할 일은 그들 중 일부 젊은이가 왜병이 되어 정유재란 때 조국에 총을 쏜 일이다. “임진 계사년에 어린아이로 잡혀가 장성하여 정용하고 강하기가 왜놈보다 나은 젊은이들이 정유년 재침 때 적을 따라간 자가 무척 많지만 본국으로 도망쳐온 자는 적고 적국으로 돌아간 자가 많았습니다. 신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미 고국에 돌아갔으면 도망쳐 숨기가 쉬운데 다시 적국에 돌아왔으니 이것이 차마 할 짓인가?’ 했더니 ‘우리들이 약속을 맺고 빠져 달아나면 우리나라 복병들이 보고 쫓아오는데 우리는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온 사람들이다, 하고 큰 소리로 외쳐도 더욱 빨리 달려오니 부득이 왜진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우리 군사들이 수급을 바쳐 공을 세우려는 생각 때문이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오.” 정희득의 ‘월봉해상록’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전쟁의 비극만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애달프다. 그의 가족사는 애달픔을 넘어 비극의 중첩이었다. 남원성이 떨어진 뒤 왜적이 함평으로 들이닥치자 정희득 일가는 급히 배를 구해 바다로 나갔다. 영광 칠산도 바다에서 적선과 조우하자 어머니는 “왜적에게 더러운 꼴을 당하느니 깨끗한 몸으로 죽겠다”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내와 형수, 누이동생도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졌다. 남자들은 결박당하여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방도가 없었다. 함께 묶였던 일가 정절은 그렇지 않았다. 큰 소리로 왜적의 무도함을 꾸짖었다. 왜적이 그의 오른팔을 잘랐다. 그래도 멈추지 않아 왼팔마저 잘렸다. 저항하지 않은 정희득 형제는 일본으로 끌려갔다. 강항의 가족사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시기 같은 해역에서 왜적을 만난 강항 일가 여인들도 바다로 투신했다. 그러나 썰물 때라서 왜적의 갈고리에 건져 올려졌지만 두 아이는 물결에 휩쓸려가고 말았다. 눈앞에서 어린 자식이 죽는 것을 뻔히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족과 헤어진 강항의 한이 조용필의 노래 ‘간양록’이 되었다.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 서리로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 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허야 허야 허야 허야 어허허 허야 허야 허야 허야 어허허 노랫말과 곡조, 그리고 조용필의 목소리가 아무리 애달파도 어찌 그 한과 고통을 다 담으리! 이 노랫말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포로로 잡혀 끌려갔던 전라좌병영 우후 이엽(李曄)이 탈출을 시도할 때 썼다는 시에서 애절한 대목만 발췌한 것이다. 이엽의 시는 “삼한의 피를 받아 굵어진 이 뼈, 어찌타 짐승 놈들과 섞일 수 있으리(盡是三韓候閥骨 安能略城混牛羊)”로 끝난다. 그는 탈출에 실패하게 되자 “또 잡히느니 차라리 죽으리라” 하고 배에서 칼을 물고 바닷물에 뛰어들어 자진했다. 강항의 기개도 이에 못지않았다. 히데요시가 죽어 묘에 만금전이 세워지고 그 문루에 일세의 호걸로 떠받드는 글이 오르자 구경 갔던 그는 붓으로 그 글귀를 쭉쭉 그어버리고, 그 옆에 이렇게 써놓았다고 ‘간양록’에 썼다. “반생 동안 한 일이 흙 한 줌인데 십층금전은 울룩불룩 누구를 속이자는 거냐! 총알이 또한 남의 손에 쥐어지는 날 푸른 언덕 뒤엎고 내닫는 것쯤이야!(半生經營土一盃 十層金殿謾崔 彈丸亦落他人手 河事靑丘捲土來)” 굽히지 않는 절의와 의지를 가졌던 강항이나 정희득은 우여곡절 끝에 환국의 행운을 누렸지만 거개의 포로들은 이름 모를 땅에서 불귀의 고혼이 되고 말았다. 이탈리아 사제 카를레티(Carleti)가 남긴 ‘나의 세계일주기’에 외국인 노예상들에게 팔아넘겨지는 정경이 다음과 같이 기록됐다. “이 나라(Corea)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녀노소가 노예로 잡혀왔다. 그중에는 보기 딱할 만큼 불쌍한 어린이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주 헐값에 매매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도 12큐스티를 내고 5명을 샀다. 그리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어 인도 고야에 데려가 자유의 몸으로 놓아주었다. 그중 한 사람만은 플로렌스로 데려갔는데, 그는 지금 로마에 살고 있다. 그는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일보 김성우 특파원은 1979년 로마 현지 취재를 통해 안토니오의 선조가 한국인이었음을 밝혀냈었다. 노예로 팔린 사람들은 대개 마닐라, 홍콩, 마카오, 고야 등지를 경유해 아시아 지역의 유럽제국 식민지로 팔려가 사탕수수밭 바나나농장 등에서 혹독한 중노동에 시달렸다. 유럽으로 팔려가기도 했다. 외국인 노예 상인 거개가 포르투갈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규슈 곳곳에 지금도 당인정(唐人町) 또는 고려정(高麗町)이라는 마을 이름이 남아 있는 것도 조선인 포로가 그만큼 많았다는 반증이다. 당인정이란 글자 뜻으로는 중국인 거주 지역으로 이해되기 쉽지만, 그런 곳은 소수이고 거개는 조선 포로 집단 거주지였다. 일본 사람들은 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대륙을 동경한 나머지, 한반도나 중국을 ‘가라’라고 했다. 한(韓)도 가라요, 당(唐)도 가라로 읽는 것이 그 증거다. 당인정 또는 고려정이 있는 곳은 규슈의 크고 작은 도시 대다수로 보아도 좋다. 한반도와의 교통이 편리한 혼슈의 야마구치(山口) 현과 오카야마(岡山) 현, 시코쿠(四國) 등 서일본 지역 여러 도시에도 분포돼 있다. 그렇게 많이 붙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려는 조정의 노력은 한없이 굼뜨고 무책임하기만 했다. 포로쇄환은 정유재란이 끝나고도 7년이 지난 1605년이었다. 강화사로 갔던 사명대사 유정(惟政)은 새 권력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를 만나 3000명의 쇄환 약속을 받아냈지만 실제로 데리고 돌아온 이는 훨씬 적었다. 1607년 회답사 겸 쇄환사로 갔던 여우길(呂祐吉)과 경섬(慶暹)이 그중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인원은 남녀 합쳐 1418명에 불과했다. 그 뒤로는 점차 감소해 1643년 쇄환사((刷還使) 때는 겨우 14명에 그쳤고, 그 뒤로는 흐지부지되었다. 수십 년 노력의 성과는 7000명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토록 성과가 부진한 이유는 첫째 일본이 빼돌리고 감춘 탓이고, 둘째는 일본 사회에 녹아든 사람들이 돌아가기를 망설인 탓이었다. 경섬의 보고서에는 “우리 일행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일본 지방관들이 피로인(被虜人)을 모조리 숨겨놓고 거짓으로 찾아내는 체만 하니, 장부에 있는 조선인 수와 실제 수가 달라 통분했다”고 썼다.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단념시키려는 심리전도 있었다. 이경직(李景稷)의 ‘부상록(扶桑錄)’에는 “쇄환된 자는 죽이거나 절해고도에 보내며, 또 사신이 각자 불러 모았다가 바다를 건너가서는 자신의 종으로 만들어 부려먹는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 소문에 현혹된 사람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어렵게 이룬 안정의 보금자리를 떠나기 싫은 사람이 다수였다. 일본인의 종이 되었거나 가정을 이룬 사람들은 나름대로 노력의 대가를 받는 생활에 그런대로 적응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어려서 잡혀간 사람들이 동화가 빨랐다. 지금 일본에서 조선 포로들의 자취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월봉해상록’에 “지나치는 사람의 반이 조선 포로들”이라던 나고야 성터 거리는 너무 조용하기만 했다. 그 많던 영주들의 진영 건물과 상업시설 주거시설 등은 간데없고, 찾는 이조차 뜸한 어촌마을이 되었다. 가라쓰(唐津) 시에서 버스로 40분을 달려 찾아간 요부코(呼子) 항에는 출어하는 배도 귀항하는 배도 안 보였다. 아침 일찍 귀항해 어획물을 부리고 출어를 준비하는 시간인 모양이었다. 부두 옆에 선 아침시장[朝市]만이 오전 10시인데도 손님을 부르고 있었다. 후쿠오카 당인정은 시내 한가운데 있다. 지하철 오호리(大濠) 공원역에서 세 번째가 도진마치(唐人町)역이다. 역사를 빠져나오면 바로 도진마치 시장. 제법 큰 규모의 시장이라서 낮 시간에도 손님들로 붐볐다. 사가(佐賀) 시 당인정도 시내 중심가에 있다. 사가역을 빠져나와 일직선으로 뻗은 큰길에 도진마치 버스 정류장 팻말이 붙었고, 큰길가에 ‘도진마치 유래’ 안내판이 서 있다. “1591년 사가에 정착한 이종환(李宗歡)이 히데요시 조선 출병 당시 통사원(통역원)으로 종군, 도공들 ‘초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99년 영주 나베시마가 데려온 고려인들을 이곳에 모여 살게 한 것이 그 유래가 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가 왜에 협력해 귀국하지 못했다는 내용도 적혀 있어 입맛이 더욱 개운치 않았다.
- 2017-12-28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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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타키나발루, 따뜻한 곳에서 겨울나기
- 2018년 개띠의 해가 열렸다. 올해도 어김없이 지구는 돌고 역사는 기록될 것이고 개개인의 삶은 흘러갈 것이다. 올 새해맞이는 따뜻한 휴양지 코타키나발루에서 ‘지치지 않는’ 여행을 하면서 쉬는 것. 낮에는 바닷가에 나가 물놀이를 하고 배가 고프면 슬렁슬렁 시장통에 나가 애플망고를 실컷 먹고 저녁에는 밤하늘을 보면서 수영을 즐기는 일. 한 해의 초문을 여는 방법으로 이보다 행복한 여정은 없다. 툰구 압둘 라만 해양공원에서 놀고 액티비티 투어도 하고 코타키나발루는 사바 주의 주도(州都)다. 사바 주는 우리 귀에 아주 익숙한 보르네오 섬의 북쪽에 위치한 항구도시다. 여행은 서두를 이유가 없다. 낮에는 툰구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 해양공원의 5개 섬을 골라 다니면서 놀면 된다. 가야(Gaya), 마누칸(Manukan), 사피(Sapi), 술룩(Sulug), 마무틱(Mamutik) 섬이다. 툰구 압둘 라만 해양공원의 이름은 말레이시아 초대 총리인 툰쿠 압둘 라만(1903~1990)의 이름에서 따왔다. 물빛이 아주 맑은 수트라 항구(Sutera Harbour)에서 배를 타고 빠르게 달려 5분도 안 돼 마무틱 섬에 이른다. 5개 섬 중에서 규모가 가장 작고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어 일명 ‘산호섬’으로 불린다. 섬에서 노는 게 지겨운 날에는 시내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키나발루 국립공원(Kinabalu National Park)으로 가서 트레킹을 하면 된다. 골프를 하고 싶다면 탄중아루(Tanjung Aru) 리조트 내의 골프 코스를 찾으면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제셀턴 포인트(Jesselton Point)에서 배를 타고 반딧불 투어, 밀림 투어 등을 해도 좋다. 제셀턴 포인트는 주변 섬으로 갈 수 있는 페리 탑승장이다. 이 도시와 인근 섬들을 연결하는 여객선이 드나든다. 수많은 현지 여행사가 있어 각종 투어와 액티비티 투어 등을 예약할 수 있다. 참고로 제셀턴은 과거 영국의 식민통치 시대에 말레이시아의 물자를 실어 나르던 항구로 1945년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이 내려 거주하던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 끝 무렵 일본군으로부터 코타키나발루(당시 이름 제셀턴)를 탈환하기 위해 진입한 오스트레일리아 군이 야영했던 곳이라서 붙여진 지명. 기념 동판 하나만이 남아 그날을 일러준다. 필리핀 마켓 야시장에서 애플망고 실컷 사 먹기 코타키나발루 여행의 백미는 야시장 구경이다. 이 도시로 이주한 필리피노들이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하나둘씩 내다 팔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시장. 오후 4시경 문을 여는 노천 야시장엔 활력이 넘친다. 상인들 거의가 무슬림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도 어렵지 않다.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에 ‘히잡’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시장에는 망고가 지천이다. 한국에서는 비싸서 사 먹을 엄두를 낼 수 없는 애플망고를 보고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새우튀김도 사고 닭 날개(사테, Satay)도 사 먹는다. 한국인이 많이 오는지, 구운 닭 날개 소스에 대해 능숙하게 말한다. ‘매운 맛’이나 ‘맛있어요’라는 말은 아주 잘한다. 바나나튀김도 맛있고 작은 팬케이크는 보는 재미가 있다. 또 첸돌(Chendol)도 재미있다. 간 얼음 위에 꼬물꼬물한 연두색 첸돌과 코코넛밀크, 흑설탕을 넣어 만든 빙수다. 이와 비슷한 아이스카장(Ice Kajang)도 있다. 잘게 간 얼음 위에 야탑 열매와 옥수수, 팥, 젤리 등과 여러 가지 시럽을 넣은 빙수다. 시장 구경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해가 질 시간. 시장통을 비껴 워터 프런트 쪽으로 걸어가면 바다 너머로 해가 진다. 지는 해의 열기는 생각보다 뜨겁다. 숙소로 피신하는 게 답. 달빛과 별을 보며 수영하면서 맛있는 애플망고와 새우튀김을 안주 삼아 지역 맥주 한잔 곁들이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행자가 된다. 전통 부족민 볼 수 있는 ‘카다잔-두슨 원주민 민속촌’ 사바 지역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싶어 전통가옥을 재현해놓은 사바 카다잔-두슨 문화협회(Kadazans-Dusuns Cultural Association Sabah)를 찾는다. 사바 주의 용맹한 ‘카다잔’ 원주민 전사와 몬소피아드 사냥꾼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민속촌이다. 카다잔족, 두슨족, 룬구스족, 바자우족, 무루트족(Murut) 등은 이 나라 대표적인 전통 부족들. 카다잔족과 두슨족은 사바 주에서 가장 큰 민족 집단으로 전체 인구의 30%나 된다. ‘키나발루’라는 이름도 카다잔족의 언어로 ‘죽은 자들의 안식처’를 뜻하는 ‘이키나발루’에서 유래되었다. 두 부족은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다. 다른 점이라면 카다잔족은 분지에서 쌀농사를 짓고 두슨족은 구릉성 산지에서 산다는 것. 카다잔-두슨 민속촌에 이들이 살던 집과 풍습 등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 마련되어 있다. 또 매년 5월 30~31일에는 추수 축제가 열린다. 벼를 수확한 후 한 달 정도 풍성한 축제가 벌어질 때 훨씬 볼 만하다. 도시 전망은 시그널 힐에서, 낙조 감상은 탄중아루에서 시그널 힐(Signal Hill) 전망대도 오른다. 걸어서 가기에는 가파른 길이다. 낙조를 감상하기 제일 좋은 곳이지만 낮에는 도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의 역할을 한다. 전망대에서는 코타키나발루 시내 전경과 페낭 해변을 둘러볼 수 있다. 근처 시계탑은 랜드마크로 원래 등대 역할을 담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군의 융단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은 건축물이다. 마침 일요일이라서 근처의 선데이 마켓으로 간다. 잘란 가야(Jalan Gaya)에서 열리는 선데이 마켓은 300개 이상의 노점이 생활용품, 식재료, 약초, 의류 등 다양한 품목을 판매한다. 원래는 현지인들을 위한 작은 로컬 마켓이었지만, 관광객이 증가하면서 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판매 품목도 다양해졌다. 필리핀 마켓과 달리 수제품이나 공산품이 많다. 보기 드문 제비집도 있다. 마켓은 생각보다 일찍 파장한다. 다시 가장 번화한 원보르네오(One Borneo)와 와리산 스퀘어(Warisan Square)로 이동해 마사지를 받고 천천히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낙조를 볼 수 있는 탄중아루로 간다. 탄중아루는 석양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 이 도시의 낙조는 그리스 산토리니, 남태평양 피지와 함께 세계 3대 해넘이로 꼽힌다. 아쉽게도 바닷가에는 비가 내린다. 낙조를 보지 못하면 어떠리. 맘껏 휴식했으니 이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Travel Data 항공편 인천에서 코타키나발루까지 직항편은 대한항공이 주 2회, 아시아나와 이스타항공이 주 4회 운항하고 있다. 말레이시아항공 직항편도 있다. 매주 금요일 출발. 기후 1년 내내 덥고 습한 기후다. 평균 기온은 영상 30℃. 계절에 따른 기후변화가 없어서 여행 성수기와 비성수기가 나뉘지 않는다. 날씨는 대체로 맑은 편이지만 하루 한 번 열대지방의 소나기인 스콜이 내린다. 코타키나발루의 1월은 우리나라의 한여름 날씨와 비슷하다. 통풍이 잘되는 얇은 옷 위주로 챙기고, 한 달 평균 일주일 이상 비가 내리기 때문에 우산은 필수다. 고산인 키나발루 산과 쿤다상(Kundasang) 지역은 기온이 서늘한 편이다. 언어 공식 언어는 말레이어다. 하지만 호텔 및 관광지에서는 영어가 널리 사용된다. 통화 정보 자국 통화인 말레이시아 링깃(Ringgit)이 통용된다. 1링깃은 260원대다. 인천 공항에서 환전해서 가면 된다. 사용 전압 200~240V, 50Hz다. 우리나라와 콘센트 모양이 다르니 꼭 어댑터를 준비하자. 음식 정보 해산물이 풍부하다. 그 외 볶음밥인 나시고렝(Nasigoreng)이나 국수 등 메뉴가 다양하다. 한국인이 일부러 찾는 집으로는 ‘웰컴씨푸드’가 있다. 주문하면 수족관에 있는 해산물로 즉석요리를 해준다. 숙박 정보 휴양도시라서 고급 호텔, 리조트, 콘도, 레지던스, 아파트 등 묵을 곳이 많다. 골프를 원한다면 리조트를 선택하는 게 좋다. 한 달 정도 머물 예정이면 아파트를 추천한다. 거실 하나에 방 두 개다. 아파트 객실은 에어컨, 평면 TV를 갖추고 있으며, 일부 객실에는 냉장고 등이 완비된 간이 주방도 마련되어 있다. 1일 7만~10만 원 선이다. 수트라 항구 근처의 이마고(Imago) 쇼핑몰·콘도는 장기투숙자가 많이 이용한다. 또 KK 베케이션 아파트먼트 @ 마리나 코트 리조트 콘도미니엄을 비롯해 여럿 있다. 기타 볼거리 북보르네오 증기기차 투어나 새로 지은 시청사, 석호(潟湖, lagoon) 위에 세워진 시티 모스크, 사바 주 모스크(Sabah State Mosque)가 있다. 건물 돔은 온통 황금으로 뒤덮여 있다. 코타키나발루 여행정보 www.mtpb.co.kr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코타키나발루는 관광지를 찾아다니느라 애쓸 필요 없는 곳이다. 많은 곳을 다니기 싫어하는 시니어에게 좋은 여행지다. 대부분의 숙소에는 수영장, 피트니스 센터, 마사지 숍 등이 갖춰져 있다.
- 2017-12-26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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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좌모와 아메리칸 빌리지에서의 하루
- 그곳으로 가는 길은 분위기가 있다. 안개처럼 비까지 부슬부슬 내려주어 아득한 바다가 마음을 더 흔든다. 그리고 빗방울 송골송골 맺힌 초록의 만좌모 벌판이 눈에 가득 들어와서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바다까지 보여주니 더 말해 무엇하리. 눈 앞의 바다에선 유유자적 뱃놀이도 한다. 멀리 해안선을 따라 멋진 리조트에서 쉬며 제대로 휴식하면 더 좋겠다. 그 드넓은 바닷가 들판에 들꽃과 기암괴석도 함께 한다. 필자의 만좌모 여행은 여기까지가 좋았다. 이런 절벽의 바위 하나 보러 무더위에 예까지 올 일인가 싶었다. 물론 기나긴 세월 속에 침식된 코끼리 형상은 볼만하지만 엄지 척 올려주고 희귀한 비경에 탄성을 지르며 강추할만한 곳일지는 모르겠으나 이름 그대로 만좌모답게 많은 사람들이 가득하다. 일본 오키나와현. 코끼리의 코 모양으로 침식된 류큐 석회암의 단애와 그 위에 넓은 잔디밭이 있는 곳. 류큐왕 쇼케이가 '만 명이 앉아도 충분한 벌판'이라고 하여 만좌모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오키나와의 나하공항에서 만좌모까지는 자동차로 약 1시간여 걸리는 거리다. 나하의 버스터미널에서 운행되는 버스로는 약 1시간 반정도 걸린다.) 그런데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풍경에 신나기도 신기하기도 하고 기분전환도 하면서 가끔 느끼는게 있다. 어딘가 느낌이 비슷하게 연상되고 비교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다. 만좌모의 코끼리 바위를 보면서 몇 년 전 에서 보았던 절벽이 생각났다. 마치 빠삐용이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탈출을 꿈꾸던 곳일 것 같은 절해고도의 그곳. 그곳에서 남태평양을 경관을 바라볼 수 있고 오랜 침식과 퇴적으로 겹겹이 형성된 틈이 많이 생겨서 갭(gap) 바위라고도 한다는 곳. 그 두 곳이 겹쳐져서 생각나는 바위였다. 만좌모를 떠나 아메리칸 빌리지로 가는 길의 파인애플 농장에서 파인애플도 먹고, 파인애플 아이스크림도 먹으며 이것저것 둘러보며 느릿느릿 놀다 쉬다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하에서 직접 아메리칸 빌리지로 가려면 버스터미널에서 30분 간격으로 버스가 있는데 40분 정도 걸린다. 아메리칸 빌리지는 80년대 초 까지 미군시설이 있던 곳이어서인지 이런 특성을 살려 면세점 등의 상권이 형성된 곳이어서 지갑 두둑하신 분이라며 여행가방에 담아올 만한 것들이 좀 있다. 누구라도 눈에 들어오는 아메리칸 빌리지의 상징인 대관람차는 일본 영화에 나와서 유명세를 탔고 멋진 저녁노을을 볼수도 있어서 인기다. 그 옆으로 있는 선셋 해변을 즐길 수도 있고 쇼핑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필자는 이곳에서 다리를 쉬면서 저녁을 먹었다. 예쁜 집들도 많고 미군들이 주둔했던 곳이어서인지 스테이크가 유명하다는데 구미가 당기지 않아 나는 vegetable curry를 먹었다. 구운 가지와 채소가 듬뿍 들어있어서 보기만 해도 먹음직했고 맛도 good~. 파스타에도 아낌없이 해산물이 올라있어서 이 또한 좋았다. 내내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함께했던 여행자의 하루가 간다. 점점 검푸른 밤이 내린다. 머릿속 가볍게 아무 생각 없이 놀았던 하루. 여행이 주는 효과가 이런 게 아닌가. 뒤엉킨 머리를 말끔하게 헹구어서 돌아오는 것.
- 2017-06-22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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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렌지카운티의 행정수장, 미셸 박 스틸 대한민국 시니어의 힘을 보여주다
- 199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백인 경찰의 흑인 폭행으로 시작된 흑백 갈등이 엉뚱하게도 코리아타운으로 불똥이 튀었다. LA폭동이었다. 미국 매스컴들의 편파보도는 살림 잘하고 있던 한 한국 아줌마를 ‘욱’하게 만들었다.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그녀는 그 길로 정치판으로 뛰어든다. 이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주인공은 미셸 박 스틸(62). 미주 한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여성 정치인이자, 현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슈퍼바이저 위원장이다. 그녀를 미국 현지, 산타에나 오렌지카운티 청사에서 만났다. 카운티 슈퍼바이저(County Supervisor). 우리에겐 무척 생소하니 단어 정리부터 해보자. 카운티는 미국 주 정부의 하부 행정 구역으로 캘리포니아 주(州) 오렌지카운티 안에는 총 34개의 시(市)가 포함되어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세 번째, 미국 전체에서는 여섯 번째로 크다. 인구 320만 명에 한해 예산만 6조원에 이르는 오렌지카운티는 한국의 광역시와 비슷한 규모의 자치단체다. 카운티는 각 지역구에서 선출된 5명의 슈퍼바이저(슈퍼바이저 위원회)가 이끌어 가는데 박 위원장은 2014년 선거에서 한인 최초의 슈퍼바이저로 당선됐다. 지난 1월에는 만장일치로 위원장에 선출, 그녀는 명실상부 오렌지카운티의 행정 수장이다. “한국뿐 아니라 이곳 한인분들도 낯설어했어요. 당선되고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슈퍼바이저가 뭐하는 자리냐는 거였으니까요. 그만큼 한인 정치인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죠. 저는 한마디로 오렌지카운티의 모든 살림을 맡아서 합니다. 법을 만들고 집행도 하지요. 소방국, 경찰국, 보건국 관리는 물론 교육, 사회복지, 심지어 쓰레기를 수거·처리하는 일까지 모두요.” 얼마나 바쁘냐는 질문에 다이어리를 살핀다. 존웨인공항의 리모델링과 국제선 비행기의 공항 사용료 문제, 야생 코요테의 사체 처리 법안, 등·하교시간 교통 체증에 대한 주민 항의, 노숙자 샤워와 숙박시설 허가…. 박 위원장의 수첩을 꽉 메우고 있는 현안들이다. 오늘 잡힌 미팅만 4개. 자잘한 방문 약속까지 소화하려면 오늘도 칼퇴근은 어렵겠다며 웃는다. 그녀의 기분 좋은 미소 뒤로 성조기가 아닌 태극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가 정치인이 된 이유 한국 이름 박은주. 그녀의 고향은 서울 성북동이다. 어린 시절 뛰놀던 학교 운동장이며 창경원(現 창경궁)에 놀러갔던 일, 경복궁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추억이 그녀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일본 한국교육문화원으로 발령이 나면서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동경여자대학교 영문학과 1학년이던 1975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페퍼다인대학(Pepper dine University)에서 경영학을 전공할 때만 해도 박 위원장의 꿈은 현모양처였다. 예쁜 앞치마를 입고 쿠키를 구우며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고. 1981년 테니스 동호회에서 만난 전도유망한 청년 변호사 션 스틸과 결혼해 예쁜 두 딸도 얻었다. 그렇게 현모양처의 꿈을 이루는 듯했지만 그녀의 길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LA에서 홀로 옷가게를 운영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국세청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어요. 세금을 속였다며 정말 어마어마한 벌금을 부과했더라고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어요. 어머니는 한국과 일본에서 교편을 잡았던 분이세요. 평생 정직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사셨던 분이 탈세라니… 너무나 억울했지만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때 처음으로 소수계가 당하는 부당함과 설움을 알게 됐어요. 거기에 불을 지핀 것이 4·29 폭동이었고요.” LA 4·29 폭동은 박 위원장에게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는다’는 신념과 자신이 ‘한국인’임을 각인시켜준 사건이었다. 1992년 4월 29일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 선고를 받자 흥분한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공권력은 부유한 백인들이 살고 있는 비벌리힐스를 보호하기에 바빴고 결국 폭도들에게 한인 타운으로 가는 길을 내준 꼴이 되었다. 맨손으로 일군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한인들은 직접 총을 들었고 미국 매스컴들은 앞다투어 한·흑 갈등으로 몰고 갔다. 닷새간 이어진 방화와 약탈로 2300여 한인 업소가 피해를 입었고 피해액만 5억달러에 이르렀다. 돈 벌기 위해 너무 앞만 보고 달렸다는 각성의 목소리도 나왔지만 그 대가치고는 너무나 참혹했다. 한인 타운은 그야말로 잿더미로 변했다. “한마디로 미디어의 횡포였어요. 뉴스, TV 쇼에서 잘못된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 누구 하나 정정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뭔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어요. 정치인 친구들이 많았던 남편에게 부당함을 쏟아냈고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말했어요. 정말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았어요. 남들 앞에 나서기를 지독히도 싫어하던 제가 말이죠.” 1993년 LA시장에 출마한 리처든 리오든 선거캠프 자원봉사를 시작으로 그녀는 미국 정치판으로 뛰어들었다. 안 하면 안 했지 적당히 하는 꼴은 못 보는 한국 아줌마의 힘은 어디서나 단연 돋보였다. 시장에 당선된 리오든 시장은 그녀를 LA소방국 커미셔너로 전격 발탁했고 이후 LA공항, LA아동복지국 커미셔너를 역임했다. 커미셔너는 해당 분야의 정책자문 역할을 하면서 시의 전반적인 행정에 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직책이다. 박 위원장은 이어 1999년 한미공화당협회 회장, 2001년 부시 행정부에서는 아시아태평양 자문위원을 거치며 차근차근 정치 이력을 쌓게 된다. 한인 커뮤니티가 사랑하는 선거의 여왕 사실 박 위원장이야말로 ‘선거의 여왕’이라 불릴 만한 전력의 소유자다. 24년 정치인생에서 세 번의 선거에 출마, 모두 승리했다. 특히 2006년 당시 ‘듣보잡’ 후보에 가까웠던 그녀가 도전한 ‘캘리포니아 조세형평국 위원’은 캘리포니아 조세 정책을 총괄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그녀는 이 선거에서 정치 거목이었던 상대 후보를 꺾고 60.5%라는 득표율로 압승했다. 한국 커뮤니티는 물론 그녀가 속한 공화당 내부에서도 놀란 결과였다. 목소리까지 가냘퍼 보이는 그녀의 이런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박 위원장은 서슴없이 ‘한국인의 DNA’ 덕분이라고 말한다. “처음 출마선언을 하고 후보 인준을 받기 위해 연설을 한 날이었어요. 얼마나 무서웠던지 연설을 마치고 나와서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결국 울음이 터졌죠. 옆에 앉은 분이 걱정이 되어 남편에게 전화를 하더라고요. 전화를 끊고 아무 말이 없길래 남편이 뭐라고 하더냐 물었더니 그냥 놔두라고 했대요. 금방 다시 씩씩해질 거라고. 미셸은 한국 여자라고요(웃음)!” 박 위원장은 2010년 재선에서도 거뜬히 승리하면서 8년간 조세형평국 위원으로 재직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녀의 이름 앞에는 ‘가주 내 한인 최고위 선출직 공직자’,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공화당원’ 등의 수식어가 붙게 된다. 미셸 박 스틸의 러닝메이트는 바로 한인 커뮤니티다. 그녀는 한인 커뮤니티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며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것은 모두 한인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선거는 선거자금이 당락을 결정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미국 정치인들에게는 선거자금 캠페인, 모금행사 등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기부금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인들에게는 이것이 낯설기만 하다. 또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유권자 등록이나 투표는 늘 딴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아쉬운 이야기이지만 한인 유권자 등록률과 투표율은 아시안 커뮤니티에서 늘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셸 박 스틸이 출마하는 선거는 유독 한인들의 투표율이 높다. 박 위원장이 슈퍼바이저로 당선된 지난 2014년 선거에서 오렌지카운티의 한인 유권자 투표율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미셸 박 스틸만큼은 밀어줘야 한다는 분위기다. 이렇다 보니 미주 한인사회의 오랜 숙원인 연방하원에 입성할 인물로 박 위원장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박 위원장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시정에서는 한인 커뮤니티를 어떻게든 메인스트림으로 끌고 들어오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카운티에 공식적으로 미주 한인의 날을 만드는가 하면, 한인 단체가 벌이는 행사를 카운티가 공식 후원함으로써 힘을 실어주고 있다. 조세형평국 시절에는 정부 공식 홈페이지에 한글로 된 안내문을 올리기도 했다. 부당한 세금이 청구된 납세자가 있다면 자신에게 연락하라, 혐의가 입증되기 전에는 무혐의로 믿고 끝까지 보호하겠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그녀 어머니가 당했던 억울함을 한인들에게 다시는 없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강철 벽처럼 느껴지는 주 정부 홈페이지에 한글로 된 안내물이라니… 어찌 한인들이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한 일이에요. 메인스트림 안에서 한인을 대변하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으니까요. 임기 동안 하나라도 더 정착시켜놓으려 합니다. 제가 이 자리를 떠나더라도 카운티 차원에서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요. 그만큼 어깨가 무겁기도 하지만 보람도 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 해요. 내가 왜 이 자리에 오려 했는가를 생각하죠. 정치인은 유권자의 선택으로 살아남는 사람들이에요. 유권자가 내려가라 하면 내려가야죠. 다행히 아직까지는 저를 많이 사랑해주고 계세요(웃음).” 박 위원장은 내년 그녀의 네 번째 선거를 치러야 한다. 슈퍼바이저 재임에 도전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시 선거자금을 모으는 일이다. 이제 곧 후보들 간의 모금 현황부터 비교하며 당락 가능성을 점치는 언론들의 보도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다시 전쟁이다. 남편, 그리고 엄마 박 위원장의 정치인생에 없어선 안 될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남편 션 스틸 변호사(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와 어머니 정옥희 여사(2011년 작고)다. 박 위원장이 정치를 시작하면서 함께 살기 시작한 세 사람에게는 소소한 추억들이 많다. LA 문단에서 수필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정옥희 여사의 수필집 곳곳에는 딸과 사위 이야기가 있다. 특히 사위 스틸 변호사에 대한 묘사에는 애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람. 우리나라 함경도 사람처럼 일하며 처자 권속을 확실히 지키는 사람. 내가 여행이라도 가는 날이면 손에 돈과 정을 같이 쥐어줄 줄 아는 사람이 우리 사위다. 집에 돌아오면 조용한 집 안을 장터같이 활기차게 만들고 장모의 김치볶음밥과 순두부찌개가 최고라고 치켜세우는 사위는 가정을 지키는 것이 생애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정옥희 수필집 모음 중에서) 결혼 36년 차의 남편은 박 위원장에게 늘 휴식 같은 존재다. 캘리포니아 공화당협회 의장까지 지냈지만 정치적 조언보다는 시정에 지친 아내를 살피는 일이 우선이다. 타고난 유머감각으로 박 위원장을 늘 웃게 만들어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지난해 큰딸 채안(29)이 결혼하면서 박 위원장은 사위를 봤다. 그래서인지 돌아가신 ‘엄마 생각’(박 위원장은 꼭 엄마라고 불렀다)이 더 잦아졌다고. “참 강하고 현명하셨던 거 같아요. 그때는 엄마로서 이민자로서 살기가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던 시절이었는데 말이에요. 처음 일본에 가서 말도 못하고 친구가 없는 저를 보고 엄마는 늘 웃으라고 했어요. 내가 웃기만 하니 아이들이 ‘아호(바보)’라고 하더군요. 엄마는 그래도 계속 웃으라고 했어요. 정치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미셸은 잘 웃어서 좋다는 말이에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라면 뭐라고 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엄마가 딸을 위해 내어놓는 솔루션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박 위원장은 자신이 엄마를 추억하듯, 훗날 딸들이 자신을 그렇게 추억해주기를 원한다. 그녀의 뒤를 이어 한인 커뮤니티를 대표할 차세대 정치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에 덕이 되고 싶고, 길을 먼저 가는 선배로서 그들이 올 길을 조금은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정치적 야망이요? 그렇게 거창한 표현은 안 어울리고요. 정치인으로서 잃고 싶지 않은 것은 있어요. 민심과의 소통, 발로 뛰는 열정 그리고 정직이요. 어디까지 가든 소통과 열정, 정직 없이 가게 될까봐 겁이 납니다. 연방하원… 가야죠. 제가 아닌 누구라도 가야 합니다. 제가 갈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갈 것이고 혹 나보다 더 좋은 후보가 나타난다면 저는 미련 없이 그를 밀 것입니다.” 인터뷰 말미, 그녀가 고향 성북동의 안부를 묻는다. 두어 차례 한국 지자체의 초청을 받아 남편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지만 정작 추억 어린 곳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서울 시내 곳곳이 너무 많이 바뀌었지만 성북동은 아직 옛 정취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하니 아이처럼 반가워한다. 남편과 함께 꼭 가볼 거라고 코를 찡긋거리며 웃는 그녀.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으며, 열정적이고, 그대로의 자신을 내어 보이는 미셸 박 스틸은 아름다웠다.
- 2017-04-26 1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