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기 젊은 나이, 50+’ 캠페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중장년 세대의 창업을 통한 도약을 지원하기 위해, ‘뛰기 젊은 나이, 50+’ 캠페인을 펼칩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함께 한 점프업5060 프로젝트를 통해 창업에 성공해 새 인생을 펼치고 있는 중장년들을 지면을 통해 소개합니다.
디지털 시대라지만 디지털이 아닌 것들이 남아 있었으면 했다. 캘리그래피 손글씨 카드를 만드는 이유다. 주변에서는 “요즘 누가 손편지를 쓰느냐”고 했지만, 6년째 캘리엠 카드를 찾는 이들은 줄지 않았다. 박서영 대표는 ‘진심’이 담긴 감성 디자인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믿는다.
오랫동안 캘리그래피 작가로 활동한 박서영 대표는 2016년 ‘캘리엠’을 창업했다. ‘캘리그래피 모놀로그’라는 이름으로 운영한 개인 블로그에서 이름을 따왔다. 박 대표는 캘리그래피 작가라는 자신의 장점을 살려 문구가 적힌 카드를 만들었다.
“카드 사업이 들이는 품에 비해 수익은 크지 않아요. 재고 관리도 어렵고요. 처음 창업했을 때 주변에서 조금 하다 말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요즘 누가 종이를 쓰느냐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디지털 시대에 디지털이 아닌 것들도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카드 한 장으로 사람들이 소통하는 거잖아요. 읽고 버릴 순 있겠지만, 적어도 그 순간에는 진심을 읽는 거니까요. 그래서 취미생활처럼 묵묵히 꾸준히 했어요. 신기하게도 수요는 늘면 늘었지 줄지 않더라고요.”
코로나19로 인해 비대면 상황이 늘어나자 오히려 카드를 찾는 사람이 늘었다. 마음을 전하는 수단으로 디지털이 아닌 것들의 가치가 높아질 거라고 생각한 박 대표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물론 어떤 메시지를 카드로 전할까 매번 고민한 결과이기도 하다. 토끼해, 호랑이해처럼 시기에 맞는 문구를 매년 새로 만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어버이날 문구다. ‘부모님 감사합니다’라는 문구를 ‘우리 엄마여서 고마워요’, ‘우리 아빠여서 고마워요’로 나누었는데 정말 많은 인기를 끌었다. 여전히 캘리엠의 베스트셀러 카드이기도 하다.
공공디자인에 눈을 뜨다
박 대표는 2018년 ‘교보생명 광화문 글판 여름편 캘리그래피’ 작가로 선정돼 처음 공공 글판 작업을 했고, 이를 계기로 공공디자인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저 도시에 문구 하나가 걸렸을 뿐인데 지나가던 사람이 발걸음을 멈추기도 하고, 그 글을 보러 일부러 누군가 찾아오기도 하고, 누군가는 위로를 받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시가 조금 더 따뜻해질 수 있다고 느꼈다.
“무언가를 고친 게 아니라 늘 지나가던 길에 문구 하나 더 있을 뿐이잖아요. 그런데 그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도시에 사는 지역 주민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더라고요. 오래됐다는 이유로 뭐든지 갈아엎는 건 재건축에 가깝겠죠? 제가 하고 싶은 도시재생은 오래된 것에 감성을 입혀서 활성화하는 일이에요. 약간은 손봐야 하겠지만, 사람이 모이도록 해서 그 지역 안에서 자부심을 갖고 뭔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일이랄까요? 도시재생의 중심이 ‘사람’이 되는 거죠.”
공공디자인이 갖는 힘을 경험한 박 대표는 2019년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실시하는 ‘점프업5060’ 프로젝트에 신청했다. 항상 지나다니던 일산시장에 글판처럼 변화를 주고 싶었다. 간판에 가게 이름만 적는 게 아니라, 가게에서 전하고자 하는 가치를 메시지로 전달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순댓국 한 그릇으로 오늘 하루가 따뜻하기를’이라는 문구로 감성도 의미도 전달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간판 사업은 지자체, 협의체, 상인, 주민 등 다양한 사람의 의견이 하나로 모여야 했다. 또 도시계획이라는 프로젝트 안에서 움직여야 할 일이라 개인이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박 대표는 간판이 아니라 제품 패키징에 그 가치를 담아보기로 했다. 지역에서 소신을 가지고 일하는 가게의 상품에 브랜드 가치를 녹여 예쁜 패키지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번에는 강원도 고성군의 로컬 상품들을 패키징하는 일을 했다. 앞으로도 로컬 상품에 담긴 이야기를 패키징으로 잘 풀어내는 것이 목표다.
감성 우체국 ‘엽서가게’
박 대표가 생각하는 도시재생은 사람을 중심으로 지역에 활기를 불러오는 일이다. 예를 들면 동네 책방이지만 그곳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뜨개질도 하고 대화도 하는, 책을 판매하는 서점 역할뿐 아니라 사랑방 역할도 하는 것. 그래서 ‘점프업5060 재도약 과정’을 통해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엽서가게’를 열었다.
“감성 우체국이에요. 저희 캘리엠 문구 카드가 있고요. 지역 작가님들이 그린 그림으로 카드를 만들었어요. 지역에 판로가 없는 디자이너들의 플랫폼으로 만들고 싶어요. 동네에 그림 잘 그리시는 분이 오시면 저희가 엽서로 만들어드리고 판매 수수료를 드릴 수 있겠죠. 엽서가게에 오는 손님들은 이곳에서 엽서를 사서 편지를 쓸 수 있고요. 카드를 우체통에 넣으면 저희가 보내드리는 서비스를 하려고 해요. 또 해외 작가의 카드들도 가져와서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엽서들을 판매할 예정이에요.”
이제 막 문을 열었기에 어떻게 소문을 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지만, 일단 시작했으니 무엇이라도 되리라 생각한다. 동네 책방과의 협업도 생각하고 있다. 도시재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소통’의 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디딤돌 만들어 올라서기
점프업5060과 같은 정부 지원을 받으면 좋은 점은 디딤돌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를 때 기초를 닦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더 좋은 점은 같은 프로그램에 지원한 대표들과 네트워크가 생긴다는 것. 도시재생이란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며 소통이 중요한 만큼, 서로 다른 일을 하는 대표들과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무척 소중한 자산이 된다.
“은퇴 이후의 삶은 무능력하다고 느낄 수 있어요. 현재 트렌드도 잘 못 따라갈 것 같죠. 어쩌면 그간의 경험이 현재 바뀌는 시류를 따라가는 데 별 도움이 안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한다는 마음으로 열정을 낼 수 있어요. 그럼 더 애착이 가요. 저는 은퇴하고 의기소침해 있는 제 친구들에게도 늘 말해요. ‘그냥 창업해!’라고요.(웃음)”
박 대표는 2016년 캘리엠 창업, 2019년 주식회사 캘리엠 법인 전환, 2021년 예비사회적기업 지정 등을 밟으며 성과를 냈다. 그 배경에는 정부 지원사업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초를 닦았다면 이제 스스로 디딤돌을 밟고 일어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원사업에 신청하고 선정되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지원을 받았으니 결과보고서를 내야 하잖아요. 그러면 어느 순간 숙제하듯 일을 하게 될 때가 있어요. 어느 정도 기초를 닦았다면, 지원사업을 벗어나 자신의 것을 해보는 용기를 꼭 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노인복지센터(관장 희유스님)는 기부·나눔 문화 확산과 함께 어르신 복지기금 마련을 위해 4월 20일 수요일부터 5월 11일 수요일까지 2022 나눔축제 ‘함께라, 좋아’를 진행하고 있다.
서울노인복지센터는 2002년부터 우리나라 전통문화인 등을 매개로 한 ‘등 축제’라는 이름 아래 어르신, 지역사회가 함께 나눔과 기부 문화를 확산하고 의미를 되새기는 후원 축제를 진행해왔다.
올해는 가정의 달을 맞이해 어르신의 지혜와 덕을 나눔 문화와 접목했다. 더 좋은 일상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소원 등 달기, 어버이날 행사, 봄꽃 나들이, 온라인 걷기 대회 등을 통해 함께 할 것이다. 자세한 소개내용은 유튜브 ‘탑골 TV’에 게시된 온라인 개막식 영상을 통해 나눔축제의 의미, 참여 방법 등을 시청할 수 있다.
나눔축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소원 등 달기’는 4월 20일부터 5월 11일까지 등 장엄이 이루어진다. 건강, 사랑, 장수, 성공, 행운 등 7가지 소원에 따라 색깔을 담아 등표 제작 및 접수가 진행되고 있다. 더불어 참여자 중 자신이 선택한 색깔을 주제로 인증 사진을 찍고 SNS에 ‘#서울노인복지센터 #나눔축제’ 해시태그와 함께 업로드하면 추첨을 통한 영화제 초대권 및 굿즈 교환권이 증정될 예정이다.
4월을 맞이해 봄꽃 나들이도 진행되고 있다. 이는 센터회원 어르신을 위해 갑갑했던 마음을 덜어드리고자 기획된 행사로 6일간 태안 세계튤립박람회로 떠난다. 참여했던 한 어르신은 “그간 친구들도 만나기 어려웠는데 오랜만의 나들이에 함께 하며 공기도 쐬고 매우 좋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번 나눔축제에는 조금 특별한 모금 행사가 진행된다. 후원자, 봉사자, 직원들의 기증 물품을 수급해 지역사회와 함께 나누고자 4월 27일에는 경매, 4월 28일~29일은 바자회가 진행된다. 소소한 간식, 먹거리 부스도 함께 운영되며 작은 이벤트도 더해질 예정이다.
5월 2일부터 5월 10일까지는 “나의 걸음은 OO을 응원합니다.”라는 의미를 담은 온라인 걷기대회가 열린다. 이는 센터 어르신과 지역주민이 코스별 걷기를 통해 나의 걸음이 누군가를 응원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다가오는 어버이날을 맞이해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5월 4일에는 ‘다시 만나 기뻐孝’ 행사를 개최한다. 센터에 방문하는 어르신들을 위해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실 수 있도록 무대 공연과 함께 직원들의 손편지가 준비될 예정이다. 또한, 원데이클래스를 열어 그간 만나 뵙기 어려웠던 어르신들에게 일상 속 작은 기쁨을 드리고자 한다.
5월 11일 폐막식으로 나눔축제는 끝이 나지만, 활동 모습과 모금 결과를 공유하는 자리가 있으며 행운의 선물 추첨 이벤트, 축하 공연도 진행될 예정이다.
서울노인복지센터 관장 희유스님은 “직원과 어르신 그리고 봉사자, 후원자, 지역사회가 함께하는 행사이기에 ‘나눔’이라는 말의 의미가 더욱 뜻 깊게 여겨집니다. 이번 나눔 축제를 통해 세대와 문화, 사람이 연결되는 소중한 인연들이 앞으로도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자세한 사항은 서울노인복지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이경란 작가가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너는, 글쎄, 이제 나를 잊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함께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얼마 동안이었는지도. 이제는 너와 내가 함께한 시간의 몇 배를 더해야 너와 나의 지금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주였다. 불현듯 네가 보고 싶었다. 나는 조금의 불안도 없이 네게로 갔다. 너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거친 세월 같은 간판의 불꽃들을 지나고 구불거리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뾰족한 모서리를 돌고 돌면 네가 있을 터였다.
골목 초입에서 안전모를 쓴 사내가 나를 제지했다.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와 날선 목소리로 물었다. 왜, 라고. 왜, 라니. 나는 왜 너에게 가려고 했나. 그에게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말았다. 나는 무어라 답을 했던가. 무더위에 묻힌 나의 대답은 내게도 그에게도 가닿지 못했건만 발걸음은 어느새 네게 닿아 있었다.
너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그러나 여전하지 않기도 했으므로 나는 만남의 기쁨을 모조리 빼앗겨버렸다. 마침내 어떤 구실도 할 수 없게 된 삭은 문짝 너머로 너의 처참한 몸을 보았을 때 내 입에서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래, 네게 어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분명 탄식뿐이었을 것이다. 폐허가 된 너를 앞에 두고 나는 어쩌자고 몇 년 전의 노파를 떠올렸을까. 그때도 이미 제 빛깔을 잃은 문짝은 열려 있었고, 좁은 시멘트 마당을 사이에 둔 방 안에는 잘못 세탁한 스웨터처럼 쪼그라든 노파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노파는 말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옛집에 와보고 싶었다는 내 말이 아마도 노파에게는 퍽 가소로웠던 걸까. 혹은 그런 마음이란 창틀의 들뜬 페인트 조각보다도 쓸모없음을 웅변하는 중이었을까. 그러니 나는 아직 철없이 젊은 사람이었을까.
라일락이 있던 꽃밭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봄이면 한껏 명랑했던 개나리의 흔적도 없었다. 나는 우리의 꽃밭이 거기 존재했다는 증거조차 찾지 못했다. 할머니, 여기 있던 라일락과 개나리는 어떻게 되었나요?
노파는 라일락과 개나리가 무언지 모르는 사람인 양 내 물음을 흘렸다.
할머니, 여기 작은 꽃밭에 분꽃이 있었어요. 분꽃 아시죠? 귀고리를 만들어 걸곤 했어요. 씨앗이 익으면 쪼개서 하얗게 분칠을 하기도 했고요.
나는 노파가 듣건 말건 이제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건 네게 하는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너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그러고 보면 노파는 이미 듣지 못하는 귀를 가진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분꽃 아래에 채송화가 있었어요. 그 애들은 키가 너무 작잖아요. 햇볕을 제대로 못 쬐었어요. 그래도 잘 살아남던걸요. 그런데도 빛깔이 고왔어요. 기특하기도 하죠. 잘 먹지 못하면서도 예쁜 아기 같았거든요. 여기는 연탄을 재놓는 광이었는데…. 광 속 아궁이에 장작을 때면 반대편 목욕탕의 물이 뜨거워졌어요. 아버지가 시멘트와 타일로 만들어준 욕탕이, 세상에, 아직도 있네요. 저 작은 욕탕에 우리 자매들이 어떻게 몽땅 들어갈 수 있었을까요.
혼잣말을 한참 중얼거리다 노파 쪽을 돌아보았을 때, 나는 너도 기억할 나의 할머니를 보았다.
나의 할머니는 저 자리에서 장죽을 물고 무심하게 연기를 빨아들이곤 했다. 그때마다 할머니의 얇은 뺨 안쪽이 맞닿을 것만 같아 무서웠다.
너를 두고 돌아선 내가 몇 번이나 살 곳을 옮겨 다녔는지 네가 알까. 아니지. 그건 너와 헤어지고 한참 후의 일이다. 나는 도대체 몇 번을 달아나고 쫓겨났는지. 그러나 언제나 꿈속에서 돌아온 곳은 너의 품이었다. 돌아와 안긴 너의 품은 따스하고 시원했으며 포근하고 넉넉했다.
어떤 새벽, 너는 꽃잔디를 깔고 나를 맞았고, 또 어떤 밤에는 장독대 위에 붉은 노을을 융단처럼 펼쳐두기도 했다. 단지 꿈일 뿐이었지만, 너는 국자 하나 들고 쪼그리고 앉은 골목 어귀의 달고나 같았다.
이 계절의 나는 머물 곳을 찾아 또다시 거리를 방황한다. 이것은 나의 유구한 직업이 되었다.
너를 떠난 후 내게 예비되었던 어느 곳 하나 다정하지 않아서, 네가 있는 도시에서 북쪽으로 달아난 나는 오랫동안 거대 도시의 비정에 시달리는 벌을 받았다. 탐욕이 능력이 되는 걸 몰랐던 나는 어느 사이 주기적으로 떠밀리는 사람이 되어 있다. 분꽃인 줄 알았던 내가 채송화처럼 낮은 곳으로 떠밀리는 동안, 너는 나의 비밀스런 기쁨이었고 꺼내놓지 않아도 자랑스러운 보물이었다. 너를 품을 수 있어서 나는 그늘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꽃잎이었다.
네가 있던 자리에는 번쩍이는 빌딩이 들어서리라 한다. 이제 너는 가뭇없이 사라지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나의 할머니는, 그 노파는 어디로 갔는지 너는 아니?
이경란 작가
대구에서 태어나 스무 살에 상경. 서울에선 아직 다정한 곳을 만나지 못했다. 201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오늘의 루프 탑’이 당선되어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부희령 작가가 친구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너와 만나기로 했던 곳은 종로 2가의, 지금은 문을 닫은 어느 서점 앞이었다. 19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종로 2가는 지금의 홍대 입구나 망원동처럼 젊음으로 북적이는 거리였다. 스무 살 안팎의 청년들이 한 번쯤 겪고 넘어가는, 빈둥거림, 반항 혹은 방황, 무엇을 하든지 남보다 도드라지고 싶은 치기, 그런 기색들로 넘쳐나는 곳이었다.
나는 이제 막, 대학 입시를 치른 예비 대학생이었다. 딱히 만날 이유가 없어도 실내 장식이 멋진 카페의 통유리창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며 커피 한 잔을 마시고자 친구와 약속을 잡고 종로로 나가곤 했다. 이제는 없는 종로 2가의 서점 앞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여럿이 늘 서성이고 있었다. 나도 그 앞에서 우연히 아는 얼굴을 만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그런 우연을 기대할 수도 있는 때였다.
문득 네가 떠올랐던 건 왜일까. 너는 중학 시절 단짝이었으나,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오랜 세월 연락이 끊긴 친구였다. 그 시절 나는 숫기 없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친구 사귀는 일이 참 어려워, 학교 다니면서 가장 괴로운 순간은 소풍날 점심시간이었다. 그런 나에게 네가 먼저 다가왔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봄소풍 때 함께 도시락을 먹으며 너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너는 키가 크고 마른 몸매에 갸름한 얼굴, 외꺼풀 눈이 크고 콧날이 또렷한 아이였다. 가무잡잡하고 윤기가 흐르는 살결이라 너를 볼 때마다 잘 볶은 땅콩을 떠올리곤 했다.
친해지기 전부터 나는 네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처럼 예쁘다고 생각하면서 멀리서 훔쳐보곤 했다. 너는 그걸 알지 못했겠지. 함께 이야기할 기회가 많아지자, 나는 너의 독특한 성격도 좋아하게 되었다.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던 네가 어른스럽고 영리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나는 놀라웠다. 공부 같은 건 너에게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나보다. 그러니까 너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감정의 변화도 거의 없는, 중2 여학생으로서는 보기 드문 성품의 아이였다. 내가 너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만큼 너는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아 섭섭한 마음이 들 때가 있곤 했다.
그런 네가 나를 집으로 데려간 적이 있었다. 세검정에 있던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종로 2가에 내려 어디론가 한참 걸어갔다. 을지로 3가쯤이었던 것 같다. 유리의 성처럼 휘황찬란한 높은 빌딩이 즐비한 지금의 을지로가 아니라, 아래층에는 철공소와 인쇄소, 허름한 식당 같은 가게들이 있고 그 위로 성냥갑 같은 잿빛 콘크리트 건물이 있는 남루한 거리를 떠올린다. 살림집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복잡한 거리, 나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풍경 속을 걸었다. 너는 어느 건물 앞에 멈춰 섰고, 그리고 우리는 좁고 어두운 계단을 올라갔다. 무뚝뚝한 철제 책상들이 놓인 사무실을 가로질러서 빗장이 달린 견고한 철문을 열자 비로소 가구가 몇 개 놓인 살림집 비슷한 공간이 나타났다. 너와 네 가족의 거처였다. 그 무렵 읽은 ‘안네의 일기’에 나오는 숨겨진 공간 같았다.
평소처럼 너는 무덤덤하게, 별일 아니라는 듯, 어떻게 그런 집에서 살게 되었는지 말해주었다. 조금은 딱한, 그리고 서글픈 사연이었으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네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너는 위로 두 언니가 있는 막내딸이라 했다. 가족 앨범을 가져와 보여주면서, 둘째 언니가 가장 예쁘다, 어느 날 길에서 둘째 언니를 보고 따라온 남자가 저 철문을 쾅쾅 두드리며 행패를 부렸다…고 했다. 아직도 기억하는, 그날 너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그해 겨울, 종로 2가 서점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싶었던 사람은 너였을까? 나는 낡은 수첩을 뒤져 네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여전히 그 집에 살고 있었던 걸까? 너는 전화를 받았다. 몇 월 며칠 몇 시에 서점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어느 대학에 진학했을까? 취직을 한 건 아닐까? 궁금한 게 참 많았다. 그런데 약속한 날이 다가올수록 왠지 너를 만나기가 꺼려졌다. 마침 그날 눈이 엄청 많이 내렸다. 서울 시내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나는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엉금엉금 기어가는 형색이었으나 버스는 다녔으므로, 못 나간 게 아니라 안 나간 것이었다. 너는 약속을 지켰을까. 그 뒤 나는 너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너도 나에게 전화 한 통 없었다. 우리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났다.
쉰 중반을 넘으면서, 이따금 내가 놓친 인연들이 슬그머니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를 때가 있다. 아름다운 인연이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때는 부끄럽기만 해서 빨리 잊고자 했던 기억도 이즈음은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너를 무척 좋아했고, 그래서 그날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변명해본다. 미안하다, 여전히 열다섯 소녀인 나의 친구 은숙아.
부희령 작가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글 쓰는 일을 시작했다. 소설과 산문을 쓰면서, 영어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는 ‘꽃’, ‘고양이 소녀’, ‘무정에세이’ 등이 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김이정 소설가가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별거 아닌 거 같았는데 눈물이 나네. 당신의 전화가 온 것은 마침 의정부지방법원에서 온 채무면책 결정서를 받은 직후였어. 그래,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겠어. 당신은 잠시 아무 말 없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했지. 내 덕에 안 해도 좋을 경험 많이 했네. 전화를 끊기 전 당신은 미안하단 말을 그렇게 했어. 그러자
5년 전 전철을 타고 찾아간 의정부지방법원의 법정 안이 떠올랐어. 줄지어 선 사람들이 한 명씩 호명될 때마다 판사 앞에 잠시 서서 확인을 하고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던 신용회생 판결의 날. 자서전 대필 고객을 만나야 해서 입고 간 내 실크 블라우스가 참 무색했지. 언제 5년이나 기다리나 암담했는데 이토록 잠깐일 줄 몰랐어. 하긴 그 지난한 파산의 시작으로부터 올해가 12년째가 됐다는 건 더 놀라운 일이야.
체질에 맞지 않는 사업으로 마지막 숨을 헐떡이다 마침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진 당신이 파산을 인정한 것은 2008년 가을이었지. 제일 먼저 내 차를 팔았어. 2년 동안 전국의 길들을 달렸던, 생전 처음 내 이름으로 산 그 승용차를 팔기 전날, 나는 파주의 한 절에 가서 눈물의 작별식을 하고 돌아왔어. 사물도 때론 생명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지. 그 후 매일 우편함을 가득 채우던 신용보증기금과 은행 그리고 카드회사의 연체고지서들, 카드 대환론까지 생전 처음 알게 된 일들은 끝도 없었어.
어느 날엔 새벽 2시에 빚쟁이가 벨을 누르기도 했지. 마침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믿고 있던 집값마저 급락해 경매 직전에야 최저가로 집을 팔고 월세 아파트로 짐을 옮기던 날은 차라리 담담했어. 내 것이 아니었던 거지 뭐, 단념이 쉬웠지. 그러나 거기까지였어. 내게 파산이란 갖고 있던 것을 버리는 것. 그런데 파산을 겪으면서 그것이 얼마나 낭만적인 생각인가를 곧 알게 되었지. 내가 죽기보다 싫어하던, 빚을 질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찾아왔어. 죽을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었어. 나는 고마운 벗들과 형제들이 기꺼이 빌려주는 돈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 아니 거기까지도 나의 자존감은 겨우 유지할 수 있었지.
그러나 벼랑 끝으로 몰린 당신이 곧 드러날 일들을 감추며 무책임한 거짓말을 할 때 나는 더 이상 자존감 따위를 유지할 수 없었어. 언젠가 친구들을 만나러 가던 종로의 골목길에서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 울며 소리를 질렀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아니 어떻게 인간이 이래? 그날 나는 그 낯선 골목을 오가며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신랄한 저주의 말들을 내뱉었지. 거기까지가 내 한계였던 거야. 인간이 얼마나 더 참혹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 그때까지도 난 몰랐던 거야. 아니 어쩌면 당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몰라. 당신이 공황장애란 병으로 도피하듯이 나 역시 끊임없이 인간에 대한 신뢰라는, 관념과 추상으로 도망치고 있었던 거야.
딸 고생시키는 사위에 대한 미움을 감추지 못하는 장모와 함께 사는 집이 불편하기 짝이 없던 당신은 고시원의 관짝만 한 방으로 숨어들었고, 그 좁은 방에서 관 뚜껑이 닫히는 것만 같은 공황장애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지. 공황장애로 죽지는 않는대. 그것만 명심해. 공황장애에 시달리다 못한 당신이 전화를 걸어오면 난 인터넷에서 검색한 정보를 근거로 냉정하게 말하곤 했지. 당신의 고통을 헤아리기엔 내 앞에 쌓인 빚과 생활비를 버는 일, 그리고 나이 들어가는 내 몸을 감당하기에도 벅찼으니.
아니 사실은 진작 멈추라던 내 경고를 듣지 않은 당신이 초래한 일이니 당신이 아프고 힘든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어. 당신 몫을 책임져야 한다고 요구한 거지. 혹시 당신이 자살이라도 하면 어쩌나, 친구에게 호소하던 내 마음속엔 사실 이토록 냉정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어. 적어도 나는 책임론에선 벗어날 수 있는, 상대적 우위에 있었던 거야.
누이가 하는 펜션에 딸린 레스토랑에서 돈가스를 굽겠다며 당신이 남쪽의 바닷가로 떠난 것도 벌써 4년째에 접어들었어. 왜 진작 몸을 써서 살 생각을 안 했는지 몰라. 공기 좋은 그곳에서 당신은 공황장애도 많이 좋아졌다며 나를 안심시키곤 하지. 물론 나이 들어 시작한 노동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지금 당신은 파산 이후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고 당당해 보여.
그사이 출간된 내 소설에 생각지도 않았던 행운이 찾아오고, 푼돈이라도 벌기 위해 애쓴 덕에 얼마 전엔 남아 있던 빚을 모두 갚았고, 신용회생이란 이름으로 5년간 매달 일정액을 입금하던 프로그램도 모두 끝났어. 그 마지막 허가장을 받은 오늘, 12년에 걸친 파산이 마침내 마무리된 거야. 나도 모르지 않아.
이 정도는 정말 운이 좋은 경우라는 걸. 그사이 우리는 60대에 접어들었고 몸도 몇 군데 고장이 났지만 다행히 생명이 위험한 건 아닌 채 이렇게 사회적 금치산에서도 풀려났으니. 아니 무엇보다 인간이란 더없이 비천하고도 연약하지만 한편으론 놀랍도록 고귀하고 강한 존재라는 걸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으니 이만하면 파산의 대가론 제법 값진 걸 얻은 게 아닐까.
김이정 소설가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해 소설집 ‘도둑게’, ‘그 남자의 방’과 장편소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물속의 사막’, ‘유령의 시간’을 출간했다. ‘유령의 시간’으로 제24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윤석산 시인이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제 문갑 맨 위 칸에는 아주 오래전에 시로 쓴 편지 한 통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재작년에 딸내미한테 끌려 나가 이스탄불을 여행하면서 그 사람에게 줄까 하고 사온 나자르 본주우를 몰딩한 열쇠고리가 있고요.
편지를 시로 쓴 건 시인이라서가 아니라 구구절절 말하기가 뭐해 제 뜻만 전하려고 그리했습니다.
제가 처음 그녀를 만난 건 9년 전 정년퇴임을 앞두고 제주문화원에서 개설한 시 창작 강좌에서입니다.
마침 이웃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강의가 있는 날엔 그녀 차를 타고 다녔지요.
우선 편지 내용부터 소개해볼까요?
오늘 저녁엔 당신 창가에 흰 달빛을 걸어주세요.
내가 기를 쓰고 아흔아홉 강을 건너 되돌아온 건
다시 어쩌자는 게 아니라
용서하시겠다는 그 한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평생 그런 적이 없는데 어쩌다 당신께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편지를 쓴 건 다시 만나 뭘 어쩌자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못 보낸 건 또 외면당하면 어쩌나 하는 ‘거절 콤플렉스’ 때문만이 아닙니다. 변명 같지만 평생 사랑이 뭔가 생각하고 사랑의 시만 써왔으면서 ‘완벽한 사랑’을 못해보고 떠날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를 쓰고 ‘아흔아홉 강’을 건너왔다는 건 과장이 아닙니다. 그녀와 헤어진 다음 해 후두암에 걸려 성대를 잘라내고, 다시 3년 뒤 만성 백혈병에 걸려 지금도 병원을 들락거리는 벙어리 인생이니까요.
두 아이 엄마인 그녀가 제 마음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작품도 잘 쓸 뿐만 아니라, 자기 집도 어려운데 빵을 만들어 무인 카페에 갖다 놓고 팔아 장애인 복지단체에 헌금하고, 밑반찬을 만들어 독거노인들 현관 앞에 놔두는….
아니, 정년퇴임을 앞두고 미칠 듯이 밀려드는 쓸쓸함을 보듬어줬기 때문입니다.
퇴임을 앞둔 사람들이 흔히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정부보다 3년 먼저 ‘한국문학도서관’을 구축하기 시작해 전송권傳送權)을 위탁한 문인이 1만5000여 명을 넘어서면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관계 기관을 쫓아다니며 지원해 달라고 매달리다가 거절당하고, 회원들에게 연회비 1만 원씩만 내서 우리 손으로 완성해보자고 애원했지만 몇백 명만 응해오고, 부채를 감당할 수 없어 ‘회생(回生) 신청’을 해야 할 처지라서….
미치겠데요.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식으로 말하면, 내 가치는 타자와 ‘맺은 관계의 질(質)’에 의해 결정된다며 모든 것을 다 바쳐 살아왔는데 정부도, 같이 글을 쓰는 문인들도, 제자들도 외면한다는 생각을 하니까….
제 상황을 눈치 챈 그녀는 받아줄 수 있는 건 다 받아주데요. 절망을 은폐하기 위하여 그 동안 쓴 책들을 다시 고쳐 쓰기 시작하자 원고 교정을 자청하고, “뭐해요?” 하고 카톡을 보내면 “드라이브 가실까요?” 하고 끌어내고, 지는 해를 바라보는 제 눈빛이 흔들리면 “한잔하실래요?” 하면서 술집으로 안내하고….
사이다만 마시며 안주를 찢어 밀어놓고, 그러다가 간혹 새드르 웃는 그녀가 점점 제 마음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하더군요. 어떤 때는 술잔 밑에 그녀의 입술이 얼비치고, 어떤 때는 꿈속으로 들어와 팔베개를 해주면서 토닥여줬습니다.
그러던 우리에게 이별이라는 낯선 얼굴이 불쑥 고개를 드민 건 이의로 ‘회생 신청’이 부결되던 2013년 7월 초입니다. 카톡을 받고 나온 그녀는 엊저녁 제 원고 교정을 보다가 남편하고 다퉜다는 겁니다.
“왜요?”
“‘언제 교정이 끝나나. 우리 교수님이 기다리시겠다’고 했더니, 이젠 ‘우리 교수님’이냐고 트집을 잡아서요….”
저도 얼핏 뵌 적이 있지만 그럴 분이 아니었습니다.
순간 중학교 때 처음 쓴 연애편지를 보고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떠오르더군요. “사랑은 책임지는 거고, 그럴 수 있을 때까지는 사랑해서도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고 하신.
그날 저녁 그녀 차 속에 핸드폰을 놓고 내렸지요 아니, 흘리고 내렸으면서도 그렇게 기억할 겁니다.
하지만 예상한 대로 그녀는 그 이튿날 우리 집 우편함에 핸드폰을 갖다 놓고는 전화도 안 받고 카톡도
안 받데요. 그리고 우연이겠지만 6개월 뒤에 이웃 마을로 이사를 가고.
지금은 어디에 사는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에 그녀가 교정을 봐줘 펴낸 ‘자서전을 덧붙여 고쳐 쓴 윤석산(尹石山) 시전집’ 첫 질이 나와 보내려고 카톡을 보내도 안 받아 못 부치고 있습니다.
왜 갑자기 그렇게 바뀌었느냐고요? 그리고 뭐가 ‘완벽한 사랑’의 추구냐고요? 이 글의 제목으로 붙인 ‘동 쥐앙’의 의미를 생각해보세요….
윤석산 시인
1946년 충남 공주 출생. 제주대학교 명예교수(문학박사, 시인). 한국문학도서관(www.kll.co.kr) 대표. 최근 저서로 ‘자서전을 덧붙여 고쳐 쓴 윤석산(尹石山) 시전집’이 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박형숙 소설가가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당신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년 전 봄날의 어느 오후입니다. 그전까지는, 미안하지만, 당신을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요즘에 당신 같은 손님은 희귀하지도 않아서 쉬이 오간다는 소식도 건성으로 들었을 뿐입니다.
정기건강검진 후 여의사가 내민 진료의뢰서에는 당신을 암시하는 문구가 있었지요. 담담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수술대에 올라섰을 때도, 수술 후 조직검사 판정에서 8개월에 걸친 치료에 대한 안내를 받으면서도 흔히 이런 경우 떠올린다는 “내게 왜 이런 일이?” 같은 물음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그렇지, 그럴 거야.” 마치 언젠가 약속을 해둔 것처럼, 그렇게 약속한 사람이 날 찾아온 것처럼, 당신이 친밀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그동안 당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어떤 기미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반가웠던 것은 아닙니다. 결국엔 만날 수밖에 없으리라는 체념 같은 수긍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쩌면 당신이 남길 변화에 묘한 설렘마저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2cm의 작은 덩어리. 가슴 오른쪽과 왼쪽에 자리 잡은 당신은 고작해야 새끼손가락 마디보다 작은 크기였어요. 한 번 밟으면 단박에 으스러질 것처럼요. 하지만 당신의 생명력은 강인해서 날카로운 메스로 도려내도 온전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당신이 남긴 흔적들이 온몸에 퍼져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가슴이나 생식기, 내장 어느 뒤편 구석이나 뇌수, 뼛속 사이, 혈액 어디든 머물러 반란을 일으킨다고요. 반란 끝에 생사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게 한다고요. 온몸 가득 퍼져 있을지도 모를 당신을 생각하니, 참, 아득하네요. 도대체 당신은 언제부터 내 안에 머물러 있었나요?
젊은 시절, 안하무인의 그 시절이 생각나네요.
그때는 가진 것이 없는 자의 당당함으로 거칠 것이 없었지요. 제도에, 관습에, 이해관계에, 심지어는 생존에 구속된 사람들마저 마음껏 비웃었습니다. 세상은 즐겨 읽던 책 크기로 축소되어 보였고 단번에 뒤집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치기를 용기로, 만용을 자유의 행사로, 과로와 무절제를 열정으로 여겼습니다. 사회 변화에 가장 앞서가는 이의 곁에 있다고 생각했고,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자들을 증오했습니다. 가난했지만 부끄럽지 않았지요. 이따금, 언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때부터 당신이 내 주변에 어슬렁거렸을까요?
차츰 소유물이 생겼습니다. 아파트, 자동차, 사회적 지위, 가족관계, 철마다 바뀌는 구두들, 가방들, 최신형 TV, 오디오 세트, 맛집 카탈로그, 항공예약권….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만족은 점점 줄어들었지요. 이제 누군가의 용기는 치기로, 자유의 행사는 만용으로, 열정은 무절제로 여겨집니다. 사회의 변화를 바란다고 믿고 있지만, 급격한 변화 앞에서 한발 뒤로 물러서며 움츠립니다. 이제 가난하지는 않지만 부끄러움 대신 불쾌감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이따금, 예상보다 빨리 죽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욕구불만이 목까지 차오르던 그때였을까요? 당신이 내 곁에 머물렀던 것은?
언젠가 “죽도록 달린다”라는 제목의 연극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연극 내용은 어렴풋한데 배우들이 원형의 무대 위에서 죽도록 달리던 모습은 지금껏 생생합니다. 그래요. 나 자신이 종종 죽도록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지하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할인기간을 지나치지 않기 위해, 접수마감을 넘기지 않기 위해, 인기를 위해, 인정을 위해, 세상의 정보를 발밑에 두고 있다는 자만심을 유지하기 위해 죽도록 달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요.
그토록 달리는 순간, 당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어느 틈에 내 어깨에 올라탔겠죠. 그러고는 누군가의 성공을 부러워할 때 방심한 듯 열려 있던 빈 구멍들로 들어왔겠죠. 질투와 시기심으로 쿵쾅거리는 가슴 언저리에 자리를 잡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자양분으로 쑥쑥 자랐을 테죠.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은 힘겨웠습니다. 한 번 맞으면 혼절해서는 자신이 아주 작고 작은 벌레처럼 힘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여덟 번의 독한 주사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 안의 탐욕과 아집과 독선이 어느새 당신과 한몸이 되어 떨어질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당신이 머물다 간 그 자리에서 신호가 옵니다. 찌르르르. 가슴 언저리에서 오는 그 신호로 당신의 존재를 실감합니다. 당신이 내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요. 어쩌면 당신은 아주 떠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홀로 있는 법, 한 발씩 내딛는 법,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법, 오래 들여다보는 법. 이런 것들은 당신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입니다. 내 발밑의 작은 꽃들과 벌레들, 코끝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흙냄새에 다시 눈뜨게 해준 것도 당신인걸요.
찌르르르.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몸의 감각이 서서히 깨어납니다.
박형숙 소설가
인생의 갖가지 터널을 통과해보고 싶은 사람, 인간의 갖가지 개성에 부딪쳐보고 싶은 사람. 소설집으로 ‘부치지 않은 편지’와 ‘아홉 번째 고독’이 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이후경 소설가가 먼저 세상을 떠난 선배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순현 형, 하필이면 형을 보기로 했던 날, 만나서 형의 아내이자 내 친구인 J의 명예퇴직을 축하해주기로 한 날, 형은 쓰러졌지요. 바로 전날까지 테니스를 쳤던 건강한 형이 그길로 뇌사상태가 되어 열흘 뒤 간과 신장을 나눠주고 훌쩍 저세상으로 가버린 일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어요. 우리는 모두 불시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한 상태로 형의 장례를 치렀지요. 그런 자리에 빠지는 일이 결코 없는 형이 안 보이자 누군가, 순현 형이 왜 안 오지? 하는 실언을 했을 정도로.
코로나19 사태로 텅 빈 다른 빈소들과 달리, 슬픔에 겨워 달려온 조문객들로 북적였던 것만 뺀다면 사실 형의 장례도 평범했어요. 시장통처럼 번잡한 화장장에서 스산한 마음으로 대기하던 우리 모습도 유별날 건 없었지요. 그런데 그때 생각도 못한 사고가 생긴 거예요. 화장 예약이 실수로 취소되었다는!
장례지도사는 사색이 되어 ‘상조회사 15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며 어쩔 줄 몰라 했고, 우리는 우리대로 날벼락 같은 소식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죠. 급히 다른 곳을 알아봤지만 가능한 곳은 두 시간이나 가야 하는 S시의 화장장, 그것도 다음 날 아침 7시 자리 하나뿐이었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요. 너무 이른 시각이니 유족들은 S시로 내려가 자기로 했고, 조문객들은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갔지요. 나는 유족들을 따라 버스에 올랐어요. 날씨도 음울했고, 버스 안 분위기도 침울했지요. S시의 숙소가 코로나 때문에 그날부터 영업을 중지한다는 소식까지 들려오자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어요. 누구한테도 폐 끼치는 걸 싫어했던 형, 형처럼 선량한 사람의 마지막 가는 길이 왜 이래야 하는지, 나는 또 납득이 가지 않았지요.
화장장이 속한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넓은 공원에 세워진 깨끗한 건물이 텅 빈 채 기다리고 있었어요. 새 빈소에 영정을 옮겨놓고 형의 셋째 형님이 소주를 올리자 형의 얼굴이 단박에 환해진 듯싶었지요. 친구들과 조곤조곤 얘기하며 술 마시는 자리를 얼마나 좋아했던 형인가요. 방도 따뜻하고 아늑해서 형의 시골집에라도 놀러간 것 같았어요. 따로 숙소 구하지 말고 거기서 그냥 자자고 모두들 마음을 바꿨는데, 알고 보니 그날 밤 당직이 형의 처가 쪽 청년이었어요. 얼마나 신기했는지! 거기다 바람이나 쐬자고 건물 밖으로 나가니 이 3월에, 갑자기 함박눈이 쏟아지더군요. 우리는 한숨처럼 탄성을 뱉었지요. 말로는 전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형이 간절하게 보내는 것만 같았어요. 마음이 서서히 풀려갔지요. 저녁 식사 자리도 참 좋았어요. 우리는 인사도 나누고, 형에 대한 추억도 나누었어요. 따뜻한 작별 파티에 초대된 느낌이었지요. 어릴 때 형 별명이 제비였다면서요? 8남매가 모여 얘기할 때면 일곱째였던 어린 형은 제비처럼 마루 끝에 앉아 듣기만 해서요. 어떤 선행도, 배려도 드러나지 않게 은은히 하던 사람, 그런 형이 맏형님 댁에 얹혀살던 몸으로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 때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요? 형수님의 얘기를 들으며 미루어 짐작만 해봤지요. 그런가 하면 여섯이나 되는 형의 처제들은 형이 아버지 같고, 오빠 같은 큰 형부였다고 그리워하더군요.
다시 빈소로 돌아와서도 작별 파티는 이어졌어요. 영정 속의 형은 여전히 제비처럼 가만히 듣기만 했지요. 얘기하다 형한테 술 한 잔 따르고, 술 마시다 형을 한 번씩 바라보고, 형과 함께 하룻밤 엠티를 온 것만 같았어요. 이 밤이 없었다면 너무 쓸쓸했을 거라고 누군가 말했지요. 알고 보니 예약 취소 버튼을 누른 건 순현 형이었나봐. 또 누군가 말하자 우리는 맞아, 맞아, 하며 웃음을 터뜨렸고요. 형의 몸이 머무른 마지막 밤은 그렇게도 기이하고, 아름답고, 정겨웠지요. 형의 죽은 몸은 아래층에 있다는데, 그 위의 절절 끓는 온돌방에 누워 자면서 나는 문득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지는 느낌에 아득해졌어요.
다음 날 아침, 새벽부터 출발해 내려온 조문객들의 얼굴엔 어제의 비통함이 그대로인데, 장례식장에서 담요 한 장 깔고 잔 우리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환했지요. 하지만 그 신비한 하룻밤을 전할 길은 없었어요.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얻어진 그 하룻밤은 어쩌면 형이 우리에게 보내는 형다운 작별 인사, 작별 편지였던가요? 그렇다면 이 편지는 그 답장인지도 모르겠네요.
하루가 밀린 덕분에 형의 몸이 불타 가루가 되는 그 아침은 개구리가 깨어난다는 경칩이었고, 하늘 또한 티 없이 맑았지요. 나는 비로소 조금씩 납득이 가기 시작했어요. 고마워요, 형. 이번 생에 만나서 정말 기뻤어요. 어디서, 무엇이 되어 태어나든 다시 만나면 더 반가울 거예요. 형은 그런 사람이었어요. 아무도 우러러 떠받들지는 않았지만 우리 모두가 조용히 사랑했던 사람, 잘 가요, 순현 형.
이후경 소설가
바다를 포함한 모든 물, 산신령을 포함한 모든 신, 만년필을 포함한 모든 문구류를 좋아하는 글 쓰는 사람. ‘저녁은 어떻게 오는가’, ‘달의 항구’, ‘저녁의 편도나무’ 3권의 소설책을 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최연 한국도자재단 대표가 후배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1979년 늦가을부터 1980년 늦봄까지 궁정동에서, 한남동에서 그리고 광주에서 세 번의 총질로 한국의 현대사는 암흑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갔고 그 긴 터널을 빠져나오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여러 사람의 희생이 따랐습니다.
제가 부치지 못한 편지를 쓰는 상대는 그 암울했던 시기에 어둠을 뚫고 이 땅에 새로운 대동세상을 만들려고 몸부림치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어 저세상으로 먼저 간 후배 여상민(가명)입니다. 해서 미처 ‘부치지 못한 편지’가 아니라 받을 사람이 없는 수취인 불명의 ‘쓰지 못한 편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에 와서 굳이 이 세상에 없는 후배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리고자 했던’ 엄혹한 시절에 목적의 당위가 과정의 비인간적인 폭력성을 일정 부분 당연시했던 분위기에 편승해 좀 더 따뜻하게 보듬어주지 못하고 강하게 몰아칠 수밖에 없었던 회한의 끝자락을 붙잡고 쓰는 참회록이기 때문입니다.
상민아!
네가 먼저 가 있는 하늘나라는 고통이 없느냐? 무엇이 그리 급해 꽃다운 젊음을 버리고 황망히 가버렸단 말이냐! 네가 우리들 곁을 떠난 날이 무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는 긴 세월이 지났구나. “우리가 이렇게 살 수가 없다”고 비분강개하며 돌아선 너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날 이후 한동안 너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고 마침내 나타난 너는 어느 낯선 동네 골목 깊숙이 있는 자그마한 병원 영안실 냉동고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누워 있었단다.
그해 겨울로부터 봄으로 가는 길목에서 아마 우리는 만났을 게다. 12·12 사태로 군대를 완전히 장악한 신군부가 더 나아가 국민들로부터 정권까지 탈취하려는 엄청난 음모를 꾸미던 그 시기였을 게다. 학내 시위를 주도하다 집시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너와, 군대에서 제대한 내가 뜻을 같이하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자취방과 여관 등지를 돌며 신군부의 동향과 향후 정세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고 열띤 토론으로 많은 밤을 하얗게 지새우지 않았더냐.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 같았던 군사독재 정권이 내분으로 18년 만에 끝장나고 우리는 그렇게도 갈망하던 민주화를 이루려는 바람과 열정으로 학내에서 투쟁 구호를 외치며 서울 시내 구석구석을 돌다가 마침내 서울역 앞 광장에 모이질 않았더냐.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즈음에 그날도 여느 때와 같이 서울역 앞에 모인 시위대에게 신군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기에 일단 각 대학으로 돌아가 상황을 지켜보자는 결정에 따라 이른바 ‘서울역 앞 회군’이 감행되었고 이는 신군부에 새로운 빌미를 주어 우리가 그렇게도 우려했던 예상 시나리오가 남도의 빛고을에서 자행되었고 또다시 세상은 꽁꽁 얼어붙어 동토의 겨울공화국이 되어버렸었지.
살벌한 시기임에도 우리들은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고 더욱 가열한 투쟁으로 끝없는 미로를 헤매면서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지. 그렇게 젊음이 피폐해질 무렵 너와 나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방법론에서 의견이 갈려 고성이 오가고 나는 이성이 마비된 듯 너를 윽박지르고 우리의 관계는 결국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야 말았구나.
너의 결연한 주장에 나는 그런 모험주의적 방법은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멀어질 수 있다고 강변하였던 것 같구나. 싸움의 방법에 옳고 그름이 있겠냐마는 그때만 해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였구나. 특히나 선배인 내가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이 회한과 자괴감으로 켜켜이 쌓여 오랜 시간 나를 짓눌러 왔는데 모든 것 끝난 지금에 와서야 참회의 말을 전할 수 있게 되었구나.
너는 그렇게 싸늘한 주검으로 우리 곁에 돌아 왔지만 너를 향한 우리들의 사랑은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그해 여름. 우리들의 청춘은 더 내려놓을 것도 없는 벌거숭이가 되어 절박한 심정으로 끝을 향해 내닫고 있었고 마침내 지친 영혼을 달래줄 그 섬에 정박하지 않았더냐.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는 얼마나 굶주리고 무엇이 그리도 헛헛했는지 흉측한 이빨을 허옇게 드러내고 부질없는 삼킴질을 하염없이 해대고, 쉼 없이 몰아치는 바람은 태고의 먼 행성으로부터 마침내 이곳에 와 닿아 그 걸림 없는 자유로움이 오히려 외로움을 더욱 깊게 하지 않았더냐. 통영 언덕배기와 소매물도 억새풀 사이로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영혼을 두드리던 파도와 바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장엄한 장군죽비가 되어 어느 섬 어느 골짜기에서 방황하는 젊은 영혼을 일깨우고 있을 게다.
상민아!
나는 오늘 보내는 참회록을 끝으로 40여 년 동안 마음 한 귀퉁이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던 너에 대한 회한을 해원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너도 이제 모든 것 내려놓고 편히 쉬렴.
최연 한국도자재단 대표
중앙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현재 한국도자재단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다.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청춘을 불살랐고, 한때 막다른 골목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을 때 인문학이 그를 지탱해주었다. 저서로 ‘이야기가 있는 서울 길’, ‘산 이야기’, ‘얕은 물도 깊게 건너라’ 등이 있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유종순 시인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40년 만에 편지라는 것을 써봅니다. 젊은 시절 교도소에서 부모님께 올렸던 불효자의 안부편지 외에는 여태껏 편지라곤 써본 적이 없습니다. 고민 끝에 오늘 그대에게 편지를 쓰기로 하였습니다. 40년 전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부모님이었다면 지금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이 바로 그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편지는 깊은 병마와 싸우고 있는 그대에게, 그래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그대에게 아마 배달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대에게 위로와 격려와 감사의 편지를 쓰겠습니다. 동가숙 서가식하던 가난한 운동권 시인을 지아비로 삼아 수십 년 동안 사랑과 헌신으로 보듬어주어서 고맙다고, 그리고 지난 4년 동안 아픈 몸, 아픈 마음 잘 추스르면서 여기까지 잘 견뎌왔다고 말입니다. 돌이켜보니 그동안 그대가 손놓아버린 집안일,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핑계 삼아 아픈 그대에게 따스한 위로의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넨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끔씩 나는 약에 취해 깊이 잠든 그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떠올립니다. 그대가 마치 마녀가 준 독이 든 사과를 먹고 잠이 든 공주처럼 느껴집니다. 동화 속 공주는 백마 탄 왕자의 입맞춤에 깨어났지만, 나는 아직까지 그대를 잠 속에서 구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백마 탄 왕자를 흉내 내며 입맞춤 대신 그대가 좋아하는 ‘체 게바라 평전’이나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몇 구절을 읽어주거나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이상국 선생의 시 ‘혜화역 4번 출구’를 읊어주곤 합니다. 훌훌 털고 어서 빨리 일어나라고요. 그러나 깊은 잠에 빠진 공주는 왕자의 기대를 저버리고 깨어나지 못합니다. 동화는 동화이고 현실은 현실인가봅니다. 마음이 많이 아프고 그럴 때마다 나는 우리가 만나 서로 사랑한 날들과 우리가 함께 세상을 향해 걸어갔던 날들을 추억하곤 합니다.
그대와 나는 추운 겨울 삼전동 반지하 자취방을 선점한 처제를 피해 골목에 주차된 남의 봉고에 들어가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녹이면서 밤을 지새웠지요. 경기도 수동이었던가요, 단체수련회 때는 새벽에 몰래 둘이 빠져나와 뜨거운 입맞춤을 하기도 했고요. 또 최루탄 가스 뒤덮인 저 80년대의 광화문과 종로 거리를 우리는 손을 잡고 백골단을 피해 내달리기도 했지요. 그리고 우리의 두 아이를 얻은 그날, 정말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그 감동은 절대로 잊을 수 없어요. 추억하다 보면 고마운 사람은 지금 아픈 그대를 돌보고 있는 내가 아니라, 나의 모자람을 채워주고 보듬어준 바로 그대라는 것을 깨닫게 돼요. 그대의 사랑과 헌신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존재할 수 있게 한 힘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참으로 그대에게 감사드려요.
그대와 함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함께 가꾸어야 할 삶에 대한 꿈을 꾸던 그 시절로 말입니다. 돌아보니 그대와 나 참 많이 변했습니다. 나는 세상과의 투쟁을 피해 이리 숨고 저리 피하면서 사는 동안 어느덧 경멸스러운 꼰대가 되어버렸고, 그대는 게으른 병자가 되어 자기 안에 갇힌 채 세상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 초심을 잃은 것이지요. 내가 잠든 그대에게 체 게바라와 조나단 리빙스턴을 읽어주는 것은 다시 좋은 꿈 꾸자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대, 기억하나요?
우리의 꿈과 이상은 무엇이었는지, 꿈과 이상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주었으며, 그것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기억하나요. 꿈을 꾸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었는지 기억하나요. 그래요. 꿈은 우리를 희망으로 이끄는 힘이었지요.
꿈이 있기에 사람들은 어제의 절망과 고단을 이겨내고 내일의 희망을 향해 전진할 수 있지요. 그러나 꿈만으로는 희망을 이룰 수 없어요. 좋은 꿈에 걸맞은 부단한 노력과 실천이 있을 때 꿈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요. 그래서 꿈과 희망을 이루려면 정말로 간절한 염원과 함께 부단한 노력과 실천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요. 그리고 고통스럽더라도 그 꿈과 희망을 꿋꿋하게 사랑해야만 해요. 그래야 열악하고 왜소한 현실 속에서도 꿈과 희망을 지켜낼 수 있어요.
이제 훌훌 털고 일어나요, 그대.
나는 항상 그대 옆에 있을 테니, 어서 일어나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꿈은 다시 꿀 수 있어요.
유종순 시인
시인, 문화평론가. 1987년 무크지 ‘문학과 역사’, 1988년 ‘창작과 비평’ 복간호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한국작가회의 평화통일위원장, 이사, 인터넷저널 대표이사 등 역임. 마로니에시낭송회 회장. 시집 ‘고척동의 밤’, 저항음악평론집 ‘노래, 세상을 바꾸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