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폰카’로 사진을 찍는 세상이다. 별다른 스킬과 강박이 없는 채로 스마트폰을 들이대 일상에 널린 사진 소재와 디자인 요소를 포획한다. 사진으로 유희하고 자랑하고 소통한다. 사진으로 이렇게 나를 표현한다. 낡은 빈티지 카메라를 탐닉하는 이들까지 출현했다. 사진은 이제 일부 애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대중과 사진의 사이가 이토록 긴밀한 시대가 있었던가. 그러나 국내에 사진 전문 미술관은 뜻밖에도 별로 없다. 서울 삼청동에 있는 ‘뮤지엄한미’가 그래서 반갑다. 삼청공원 들머리 한적한 고샅에 있다.
삼청동에는 미술관이 많다. 경복궁 동남쪽 모서리에 있는 동십자각에서 삼청동까지 걸어보라. 저마다 독특한 외관을 가진 미술관 10여 곳이 눈에 띈다. 갤러리현대, 금호미술관, 아트큐브, 아트선재센터, 국제갤러리 등등…. 미술 작품을 즐기며 한나절 소요하기 좋은 동네다. 미술관들이 펼치는 예술적 레이스로 개성과 정취가 묻어나는 곳이다. 이제 뮤지엄한미가 가세했다. 큰길에서 벗어나 한갓진 느낌을 주는 야트막한 언덕길 옆에 있다. 도회 복판이지만 소음과 소란을 따돌린 입지다. 심지어 고즈넉한 분위기까지 풍겨 첫눈에 호감이 간다.
뮤지엄한미는 송파구 방이동 한미약품 사옥에 있던 한미사진미술관 본관을 삼청동으로 옮기면서 거듭난 미술관이다. 즉 한미사진미술관을 기반으로 재탄생한 뮤지엄이다. 2년여에 걸친 이전 작업을 통해 2022년 12월에 문을 열었다. 2003년에 개관한 한미사진미술관은 한국 최초의 사진 전문 미술관으로 20여 년간 사진 전시는 물론 소장품 수집, 작가 지원 사업, 출판과 교육 사업을 펼쳤다. 학술 연구기관인 한국사진문화연구소와 대중을 대상으로 한 한미사진아카데미를 설치해 사진예술 연구와 보급을 위한 갖가지 콘텐츠를 가동하기도 했다. 사진 전문 미술관이 전무했던 시절에 발군의 역량을 가지고 탕탕 행진했던 셈이다. 뮤지엄한미는 그 20여 년간 축적한 성과와 실력을 돛으로 삼아 더 광활한 사진의 바다로 나아가고자 개관했다.
뮤지엄한미의 건물 외관이 야기하는 인상은 뭐랄까, 허세 없는 말쑥한 패션을 입어 단정하다. 또는 단아하다. 담백하지만 싱겁지 않고, 세련됐지만 요란하지 않다. 따뜻한 손을 조용히 뻗어 사람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기운? 은근한 내향적 기풍이 느껴진다. 건축가 민현식(건축연구소 기오헌 대표)이 설계했다. 그는 파주출판도시 설계, 수원화성역사문화도시 기본계획 등의 작업을 통해 특유의 건축적 이론을 실천한 인물로, 자주 건축적 논쟁의 중심에 선 원로다. 전통 건축의 중요 요소인 마당의 의미를 근간으로 한 ‘비움의 구축’을 키워드로 삼은 설계로 독자적인 건축 언어를 발신해왔다.
로비로 들어서자 공간 한 면의 통유리창으로 햇살이 들이친다. 2층 건물 내부 벽면 곳곳에 유리창을 설치했다. 따라서 곳곳이 밝고 투명하고 유려하다. 창으로 들어오는 건 햇살만이 아니다. 북악산에서 흘러내린 푸른 능선과 능선 갈피에 산재한 집들, 그리고 하늘과 구름까지 따라 들어온다. 이렇게 외부 경관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건물이다. 내부 구조는 치레와 꾸밈을 자제했다. 외부 경관에 더 많은 자리를 내주기 위해 살짝 뒤로 물러나 앉은 양 간명한 품새다. 그러나 간명하기만 하다면 허전할 터. 건물 디자인의 백미에 해당하는 공간이 하나 있는데 바로 ‘물의 정원’이다. 건물 복판에 중정 역할을 하는 작은 연못을 조성해 물의 양상과 묵상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잠잠한 수면을 희롱하는 햇살의 동향을 읽을 수 있는 ‘물의 정원’의 이채에 즐겁다.
국내 최초로 저온 수장고 설치
‘물의 정원’은 이 뮤지엄을 이룬 세 개의 건물을 하나로 엮는 고리 역할도 한다. ‘물의 정원’을 중심으로 규모와 형상이 저마다 다른 공간들이 3차원으로 교직하는 것이다. 관람 동선 구성에서도 민현식의 건축적 의도와 지향이 완연하게 드러난다. 그는 관습적인 순환 동선을 구사하는 대신, 매트릭스 형태를 구성해 동선을 다양화했다. 심지어 다리까지 만들었다. 관객에게 동선의 선택 폭을 넓혀줌으로써 미술관에서의 한때를 한결 즐겁게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한 셈이다. 공간의 용도를 미리 규정하지 않고, 전시 작품에 따라 변용할 수 있는 중성적 공간으로 만든 데에도 설계자의 의도가 숨어 있다. 어떤 작품이 들어오더라도 수용할 수 있도록 공간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난 형국이다. 이모저모 ‘비움’의 은유를 가시적으로 구현했다.
뮤지움한미의 구성원들이 야심과 포부를 가지고 각별히 공들인 공간도 주목할 만하다. 고도의 테크놀로지로 구축한 수장고가 바로 그렇다. 이 미술관의 심장부다. 지난 20여 년간 수집한 2만여 점의 사진 소장품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저온 수장고와 냉장 수장고를 만들었다. 보관 여건이 좋지 않으면 손상되기 쉬운 게 사진이다. 곰팡이가 슬거나 열화(劣化)가 발생한다. 이를 방비하기 위해 완벽한 성능을 갖춘 전문 수장고를 설치했다. 이는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고성능 수장고로 꼽힌다. 첨단 항온·항습 시스템이 가동되는 이 수장고에 보관된 사진 소장품들은 500년의 수명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하니 놀랍다.
19세기 귀한 사진도 보관
물론 일반인은 수장고에 출입할 수 없다. 이를 아쉽게 여긴 미술관 측은 수장고 입구에 자그만 전시실로 꾸민 개방 수장고를 만들어 관람객들에게 역사적인 사진 중 일부를 보여준다. 어디서도 만나기 어려운 이 저온 수장고 전시실엔 1929년 이전에 촬영한 사진 작품 12점이 걸려 있다. 모두 진귀한 사진들이다. 카메라를 귀신 붙은 괴물체쯤으로 여겼던 1883년에 국내 최초의 사진관을 차린 사진가 황철이 찍은 1880년대 사진을 비롯해, 대한제국 황실 사진가 김규진이 운영한 천연당 사진 작품, 최초의 여성 사진가로 알려진 경성사진관 이홍경이 찍은 사진 등 희귀한 원본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고종황제와 흥선대원군의 초상 사진도 전시돼 흥미롭다. 누렇게 빛바랜, 무상한 세월의 잔영처럼 남은 손바닥 크기의 옛 흑백사진들이 스산하지만 뜻밖에도 평화롭다. 영영 지나간 풍경들,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이 사진으로 남아 한 줌의 온기를 전하는 듯하다.
전시장에선 뮤지엄한미 신축 개관전이 성황리에 펼쳐지고 있다.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전이다. ‘한국 사진이 어떤 제도적 조건과 역사적 문맥 속에서 역사를 일궈왔는지 밝히고자 기획한 전시’란다. 1929년에 열렸던 정해창의 ‘예술사진 전람회’부터, 1982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있었던 ‘임응식 회고전’까지, 한국 사진사에 한 획을 그은 전람회들을 재조명하는 대형 기획전이다. 관람을 마치고 미술관을 나오는 중에 여운처럼 아른거리는 게 있다. 흑백사진들의 검은빛과 흰빛이다. 단순한 흑백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음영과 농담(濃淡)과 여백을 통해 피사체를 부각한 흑백사진의 묵직한 호소력이라니. 컬러로 존재하는 세상을 흑백으로 번역하자, 외려 깊은 맛을 풍기는 게 아닌가.
김선영 뮤지엄한미 학예연구관
“꼼꼼히 감상하는 관람객 많아 놀라워”
뮤지엄한미는 사진을 즐기는 이들이 반색할 만한 공간이다. 흔히 습관처럼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일상의 오락으로 삼는 풍속을 고려하면, 대중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 수 있는 시대적 환경을 맞이한 뮤지엄이기도 하다. 김선영 학예연구관의 얘기는 이렇다.
“사진은 여느 예술 언어에 비해 큰 강점을 지닌 매체다. 가령 회화나 조각과 달리 이미 대중에게 익숙해진 매체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문자보다 사진 영상을 소통의 도구로 사용할 정도이지 않은가. 사진이 보편적인 시각 언어로 부상한 셈이다. 이런 경향을 포괄해서 사진과 타 매체의 접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주는 전시 기획에 주력할 계획이다.”
대중에게 더 다가가겠다는 얘기인가?
“우리 뮤지엄의 목표는 20여 년간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진예술을 확장하는 데 있다.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 전문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했지만 더 새로운 전시 기획으로 대중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소장품들을 수장고에 유폐하기보다 개방 수장고를 통해 전시하는 이유는, 대중과의 긴밀한 소통을 추구하는 뮤지엄한미의 상징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2만여 점의 소장품 가운데 가장 진귀한 사진을 꼽는다면?
“특정 작품을 꼽기는 어렵다. 소중한 가치를 지닌 진품 원본 사진이 너무 많아서다.”
전시실에 관람객이 많더라.
“진지한 관심과 궁금증을 가지고 작품을 꼼꼼히 관람하는 이들이 많다. 놀라울 정도로. 사진에 관한 대중의 친밀도를 반증하는 현상으로 보인다.”
사진 작품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준다면?
“공부가 좀 필요할 것 같다. 이를테면 한국 사진이, 또는 서양 사진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흘러왔는지, 한국 사진과 서양 사진은 어떤 접점을 갖고 있는지 알려주는 개론서를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그렇게 하면 안목이 생기고, 안목이 생기면 더 흥미로워진다.”
요즘의 사진예술은 추상회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파격적인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흥미로운 반면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융복합이 매우 활발하다. 현대미술이 사진을 차용하기도 하고, 사진작가들이 외연을 확장해 미술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한편 외연 확장적인 작품이 복잡하고 개념적인 것 같지만, 작가들이 그 레퍼런스를 주로 일상에서 찾아내 작업하기 때문에 어렵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20세기 사진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 철학 ‘결정적인 순간’의 영향력은 이 시대에도 유효한 것일까?
“한 장의 이미지에 많은 것이 응축된 절대적 순간을 집어넣는다는 게 ‘결정적인 순간’의 개념으로, 사진가들에겐 바이블과 같은 규범이었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 훨씬 자유로운 사진들이 이미 1950년대 이후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진가가 윌리엄 클라인이다. 뮤지엄한미에서 올 5월 말에 그의 전시회가 열린다.”
1인 가구 시대, 노후 주거의 대안으로 ‘공동체주택’이 떠오르고 있다. ‘코리빙’(Co-living)이라고 불리는 공동체주택은 각자의 주거 공간을 갖고 있지만, 공동으로 이용하는 커뮤니티 공간을 설치해 입주자들이 소통하는 새로운 형태의 주택을 말한다. 실제 입주자들은 ‘따로 또 같이’ 살아간다. 공동체주택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자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공동체주택 ‘여백’을 직접 찾아가 봤다. 그곳에서 살고 있는 ‘공동체 주거 전도사’ 김수동 작가와도 이야기를 나눴다.
북한산의 정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공동체주택 여백이 있다. 외관부터 남다른 자태를 뽐내는 여백. 내부 구조는 더욱 독특하다.
여백은 4층짜리 주택 2개 동, 파란 여백과 하얀 여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동에 5세대, 총 10세대 27명이 산다. 세대주는 30대부터 60대까지이며, 그들의 자녀 혹은 부모가 같이 살기 때문에 초등학생부터 9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살고 있다. 집 내부 인테리어도 다 다르다.
파란 여백에는 비교적 연령대가 높은 가족들이 살기로 했고, 그에 따라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하얀 여백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어야 한다. 신발을 벗고 계단을 오르내리니 집이 다 연결되어 있는 기분이 든다.
하얀 여백 4층에는 커뮤니티 공간이 있다. 큰 원형 테이블이 있어 입주자들이 모여 식사를 하거나 티타임을 즐길 수 있다. 컴퓨터는 물론 빔프로젝트도 있어 같이 영화 관람도 가능하다.
코로나19 이전에는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 함께 모여 식사를 했다. 텃밭도 함께 가꾼다. 단체 카톡방이 있어서 매일매일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나눔을 하면서 정을 나눈다.
10세대 중 여백을 가장 열심히 알리는 입주자는 김수동 작가(터무늬제작소 소장, 60)가 아닐까. 그는 파란 여백 2층에 산다. 여백 입주를 결정하기까지 자신의 고민과 함께 공동체주택이 노후의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공동체주택에서 살아가는 법 등을 담은 ‘쫌 앞서가는 가족’이라는 책을 펴낸 바 있다.
“이웃 있는 삶 원했다”
김수동 작가는 90대 노모를 모시고 산다. 그의 집은 3대가 함께 살며, 여백의 최고령자가 사는 집이기도 하다. 여백에 입주하기 전, 김 작가는 어머니와 함께 자신도 나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느꼈다. 이에 노후에는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공동체 생활을 하는 코하우징에 관심을 갖게 됐다.
김수동 작가는 “정작 문제는 우리 세대라고 생각했다. 어르신들은 우리 세대가 부양하지만, 우리 세대는 자녀들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자녀들에게 부양을 기대하기도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저희 할아버지의 칠순 잔치 때 찍은 사진이 있는데, 직계 자손까지 26명이 모여서 가족사진을 찍었더라고요. 저는 아내하고 딸이 하나 있는데 딸은 언제 결혼할지 모르겠고, 10년이 지나서 가족사진을 찍을 때는 셋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거죠. 게다가 남성이 여성보다 먼저 떠나는 경우가 많은데 아내가 혼자 남을 것 같고, 이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함께 살아보니 장점 많아
이런 고민 끝에 김수동 작가는 2014년 공동체주택 입주자 모집에 참여했다. 나이, 직업, 취향, 종교 등이 모두 다르지만 공동체 주거라는 단 하나의 공통 관심사로 금세 마음이 모였다. 집을 짓는 데는 1년 반의 시간이 걸렸고, 2016년 8월 여백에 입주했다. 입주자 모임에는 7세대가 모였지만, 3세대는 금방 모아 10세대가 채워졌다.
일반적으로 공동체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친할까라는 궁금증이 든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 이웃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김수동 작가는 “그렇게 가깝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어 “물론 마음이 맞아서 가까이 지내는 이웃들은 있지만, 그냥 좀 편한 이웃 정도 같다. 요즘 시대에 이렇게 마음 편한 이웃이 흔치 않다”고 말했다.
독립된 가족이기 때문에 사생활 노출 문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앞서 말한 대로 한 달에 한 번 식사라든지 물건 나눔 등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이웃 간에 싹튼 정은 남다르다. 고독사 문제에서도 자유롭다.
“우리는 고독사가 불가능한 구조예요. 한번은 혼자 있는 이웃이 너무 아팠을 때, 다른 이웃이 119를 불러서 조치를 해준 적도 있어요. 지금도 코로나19에 확진돼 자가격리 중인 이웃분이 계신데,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보고 반찬도 챙겨주고 그래요. 정말 이웃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죠.”
김수동 작가는 아직도 공동체주택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많은 것도 알고 있고, 꼭 노후 주거의 대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자신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보니 장점이 훨씬 많다고 느껴 추천하는 바다. 집값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큰 장점도 있다. 즉 공동체주택은 나의 주거 공간이 있는 노후, 외롭지 않은 노후를 가능하게 해주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70대, 80대가 됐을 때도 현재 살고 있는 집이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개인마다 주거에 대한 취향과 욕구가 다르지만, 자신이 관계 지향적인 사람이라면 공동체주택을 고려해볼 만하다고 생각해요. 공동체주택이 아니더라도 지역사회에서 관계망을 만든다든지 커뮤니티 이웃을 만드는 것은 가능하거든요. 은퇴 후 10억은 있어야 노후 걱정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하잖아요. 저는 재무적 자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자산도 같이 조화를 이뤄야 노후가 풍성해진다고 생각합니다.”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밀리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강진과 해남을 ‘남도 답사 1번지’로 꼽았다. 그 여파는 컸다. 답사 신드롬을 불러일으켰으니까. 그런데 진도를 젖혀두고 남도 문화의 끌텅과 태깔을 논하는 건 좀 어폐가 있다. 진도야말로 노른자다. 시(詩)·서(書)·화(畵)·창(唱)·무속의 곡간이기 때문이다. 2013년 정부에 의해 전국 최초의 ‘민속문화예술특구’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렇게 알고 보면 돌올하고 뜯어보면 찬연한 문화지구 진도에서도 운림산방(雲林山房)은 빼어나다.
운림산방은 전통회화의 한 본산이다. 조선 후기 남종화의 거장 소치(小痴) 허련(許鍊, 1808~1893)의 창작 산실이며, 5대에 걸친 그의 직계 화맥(畵脈)이 박힌 곳이다. 진도의 진산 점찰산 아래 둥지를 튼 품새는 또 어떻고? 널찍한 터는 호방한 맛을 준다. 하늘이 드넓게 펼쳐져 안온하다. 산의 푸른 치맛자락을 거머쥐어 수려하고 청신하다. 겨울이 좋다고 혹한에도 얼싸절싸 피어나는 동백꽃 무리는 꾹 눌러 점점이 칠한 붉은 물감처럼 흥건해 기발하다.
원래 이곳엔 소치의 화실과 침식을 위한 초가 하나, 그리고 소치가 만든 연못이 있을 뿐이었다. 단출해서 오히려 그윽했으리라. 꾸밈없이 적막해 한갓졌으리라. 이후 현대에 이르러 보탠 구조물이 많아졌다. 그래도 본색이 어디 가겠나. 진도의 어떤 이들은 운림산방 일원을 ‘몽유진도’(夢遊珍島)라 부른다. 이곳에서 안견의 ‘몽유도원도’와 맞먹을 실경산수를 연상하는 거다.
소치가 뉘신가? 이름을 좀 날린 화가에 그치지 않는다. ‘소치는 묵신(墨神)이다’는 얘기가 전해오는 걸 보면, 그림으로 달통한 게 많은 기재(奇才)였다. 오원 장승업과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을 주름잡았던 걸사(傑士)다. 헌종의 호감을 사 어연(御筵)에 먹을 풀어놓는 영예를 누리고, 함께 서화를 논하기도 했다. 임금을 패트론으로 삼았던 셈이다. 소치의 집안은 변변치 않았다. 허균의 후손으로 한때는 양반 가문이었지만 여러 대에 걸쳐 거듭된 영락으로 어디다 명함을 내밀 건더기가 없었다. 그러나 소치에겐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자청해 그리는 버릇이 있었으니까.
낮잠과 끽다(喫茶)로 충분해
그렇다고 일취월장이 절로 가능했으랴. 화가의 창의적 상상력은 기초가 부실한 채로는 터져 나올 리 없다. 그리고 기초라는 건 확장과 성숙에 대한 본능이 추동한 탐구심으로 다져진다. 소치에겐 이 탐구 정신이 내장돼 있었다. 과연 좋은 그림이란 무엇인가? 궁구가 깊었던 청년기에 고산 윤선도의 녹우당에 갔다가 본 공재 윤두서의 ‘공재화첩’을 통해 소치의 눈이 번쩍 열렸다. 그는 기록했다. ‘비로소 나는 그림 그리기에 법(法)이 있음을 알았다.’
복 가운데 최고는 인연 복이라 한다. 난데없이 떠올랐다 간데없이 사라진 그림쟁이들이 숱했지만, 소치는 인연 복이 많아 비상을 거듭했다. 해남 두륜산 일지암의 초의선사와 맺은 선연은 돛을 밀어주는 순풍이었다. 초의는 구도(求道)라는 이름의 양탄자를 타고 세사의 모든 영역을 비행한 인물이다. 일지암은 그 비범한 이착륙의 베이스캠프였다. 28세 때 초의의 문하에 들어간 소치는 이 작은 암자에 머물며 세상을 건너는 법을 배웠다. 소치는 자서(自敍)에 이렇게 썼다. ‘초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 어찌 고고하고 담백하게 살 수 있었겠는가?’ 소치의 생애에 녹아든 개결한 풍정은 초의에게서 얻은 지성과 화엄정신의 발현이었던 셈이다.
초의가 소치의 정신적 아비였다면, 추사 김정희는 예술적 푯대였다. 소치에게 추사를 소개한 건 초의였으니 인연이 인연을 낳았다. 천재는 준재를 척 알아보는 법. 소치의 작품을 본 추사는 “압록강 동쪽에 소치만 한 그림을 그리는 이가 없다”고 탄복했다는 게 아닌가. 그러나 찬사만 능사로 삼을 추사가 아니다. 소치여! 그대가 서격(書格)을 터득했는가? 신운(神韻)을 익혀 구사하는가? 그쯤의 깐깐한 일갈로 갈 길 먼 예술 항로를 통찰하게 했다. 이른바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으로 예술혼을 돋우길 주문했다. 추사의 지향은 대상의 형상화보다 정신세계를 끄집어낼 수 있는 관조의 깊이를 중시하는 데 있었다. 소치는 추사의 이 고고한 예술철학에 감명을 받아 길을 교정하거나 노정했을 테다. 그러니 스승을 선망하는 마음이 오죽했겠나. 그는 제주도로 유배 간 추사를 번번이 찾아갔다. 버들잎처럼 작은 배를 타고 사나운 바닷길을 건너가 배움을 청했다. 소치가 제주에서 그린 ‘완당선생 해천일립상’은 추사의 지엄한 풍모를 오마주한 초상화다.
이제 소치의 그림을 볼까. 운림산방에는 소치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는 소치기념관이 있다. 그저 풍경을 즐기려 운림산방을 찾는 관광객이 즐비하지만 알짜배기는 소치의 그림들에 있다. 소치기념관은 한옥 건물 하나로 꾸린 미술관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의 기념관치고는 자그마하고 치레 없이 조촐하다 못해 밋밋하다. 소치의 담박한 성정을 고려한 구조라 봐야 할까? 전시실엔 산수화, 병풍 그림, 묵죽도, 모란, 괴석 등 다양한 유형의 그림들이 걸렸다. 물기를 배제하기 위해 붓에 먹을 살짝 찍어 바르는 붓질로, 마치 긁힌 자국 같은 필선을 연출하는 갈필(渴筆)에 능했던 소치의 개성을 직감할 수 있는 작품도 많다. 소치 허련은 ‘허모란’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모란 그림을 즐겨 그려서다. 전시실에서도 모란이 흔하게 눈에 띈다.
걸작이란 평판을 얻은 작품은 운림산방의 전경을 부채에 그린 ‘운림각도’(영인본. 원본은 서울대 소장)다. 소치 만년의 작품이다. 근골이 거칠게 드러난 점찰산과 억실억실한 노송들, 푸른 연못과 소박한 산방 두 채가 어울려 써늘한 정취를 자아낸다. 눈길을 붙잡는 건 지팡이를 짚고 연못가를 거니는 노인이다. 속세에서 벗어나 산야의 은자로 사는 이의 고독한 심회를 풀어냈을까? 늙어서는 산천이 스승이다. 말 없는 산야에서 음양의 조화를 읽는다. 여백에 쓴 화제엔 다음의 내용이 담겨 있다.
‘깊은 산골에 있는 나의 집에 여름이 오면 뜰에 푸른 이끼가 깔린다. 소로엔 떨어진 꽃잎들이 가득하다. 찾아오는 손님이 없으니 솔 그늘에 누워 새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즐긴다. 단잠에서 깨어나면 솔가지 모아 차를 달여 마신다.’
산림에 사는 이의 영일(迎日)이 완연하다. 인간사에 대한 관심일랑 안으로 거둬들였나? 낙화와 낮잠과 끽다(喫茶)면 그만이었다. 숫제 선풍(仙風)이 비친다. 그래도 긴가민가 늘 궁금한 건 그림이었을 테다. 말년까지 붓을 내려놓지 않았으니. 후손에게 남긴 유지에도 그림 소식이 난무해 두고두고 새길 만하다. ‘붓 재주 하나로 성가(成家)할 생각을 마라! 먹을 항상 입에 물고 다녀라! 나를 밟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 서린 뜻이 여러 겹이다. 그림을 밥 먹듯이 그리되 통 크게 밀어붙이라는 독촉이다. 웅장한 메시지다.
소치 허련이 남긴 저작과 화맥의 아우라
소치실록
자서전 성격의 문집으로 소치의 생애와 사유를 만날 수 있는 정밀한 자료다. 소치 연구의 핵심 텍스트이기도. 1867년에 쓴 ‘몽연록’(夢緣錄)과 1879년에 집필한 ‘속연록’(續緣錄)을 합본해 ‘소치실록’(小痴實錄)이라 이름 붙였다. ‘몽연록’은 운림산방에서 완성했다. 소치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황량한 곳에서 홀로 슬퍼하며 서책은 물론 모든 것을 버렸다. 뜻밖에 손님이 찾아와 며칠을 쉬는 동안 문답한 것이 있는데 이걸 엮어 책을 만들었다.’
문답식의 다소 특이한 유형의 자서전을 쓴 정황을 밝히고 있다. 대화체 문집이라 쉽고 흥미롭게 읽힌다. 조선의 화가 중 소치 외에 자신의 화필 생애를 세세한 기록으로 남긴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도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소치실록’이 현대의 대중에게 알려진 건 1974년 한 매체를 통해 한글 번역 연재물이 게재되면서였다. 당연하게도 소치 연구자와 애호가들의 환영을 받았다.
소치는 스스로 밝혔듯 ‘조실부모해 의지할 곳이 없었고 견문도 넓히지 못한 채로’ 성장기를 통과했다. 이 불우한 과거를 보상받고 싶었을까? 남종화의 거두로 부상하면서 그는 당대 명망가들과 적극적인 교유를 했는데, 사교 일화와 의미심장한 예술적 교감의 내용을 낱낱이 책에 담았다.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군주 헌종, 고명한 선사 초의, 광활한 예술 세계를 구현한 추사와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술회한 대목들이 특히 재미있다. 소치의 생애는 물론 등장인물들의 진면목과 삶의 방식을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5대로 이어진 소치 화맥
진도에는 이런 얘기가 돌아다닌다. “양천 허씨들은 빗자루 몽둥이만 들어도 걸작이 나온다.” 소치 가문에서 화가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생긴 우스갯소리다. 소치의 화맥(畵脈)은 직계 후손 5대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전무후무한 화업의 행진이다.
소치의 화업 2대를 전수한 이는 넷째 아들 미산 허형이다. 소치는 원래 큰아들 허은의 재능을 높이 쳤다. 그러나 허은이 요절하는 바람에 허형이 맥을 이었다. 허형이 그린 묵모란과 묵매는 부친을 능가한다는 평판이 있다. 3대를 이은 건 허형의 두 아들 남농 허건과 임인 허림이다. 허건은 갈필로 그린 필선의 생동감으로 호평을 받았다. 동상 걸린 다리를 절단하는 비운을 겪었지만, 장애를 오히려 창작의 화톳불로 삼는 강골의 근성을 과시했다. 소치의 운림산방을 복원하기도 했다. 허림은 사물을 점으로 표현하는 ‘토점화’로 명성을 얻었으나 안타깝게도 요절하고 말았다.
4대 맥은 임전 허문에게 이어졌다. 그는 수묵의 농담(濃淡)을 활용한 독창적 화법인 ‘운무산수화’에 능하다. 임전 이후 현재의 5대째 화맥은 허건의 손자 허재와 허전, 허건의 조카 허청규와 허은에게 이어지고 있다. 물보다 진한 피가 5대째 그림으로 이어져 가문을 통째 수묵의 바다로 밀어 넣었다. 그 바다의 아우라가 휘황하다.
왕궁리 유적지로 들어가면서 ‘여유롭다’란 말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유적지든 공원이든 시설물로 가득가득 채워지고 볼거리가 많음을 보여주려는 듯한 복잡한 풍경이 늘 아쉬웠던 터다. 널찍한 익산의 왕궁리 옛터엔 휑한 여백의 미가 팍팍, 신선한 바람 맞으며 헐렁한 여유감으로 벅차기까지 하다. 물씬한 황량함이 어쩐지 더욱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그 넓은 터에 혼자 온 듯한 여행자 두 사람만이 각자 이쪽저쪽에서 뚝 떨어져 호젓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유난스러운 유적지의 시스템이 있을 법한데 여긴 그렇지도 않다. 딱히 꾸며진 모습 없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널널한 풍경이 된 역사 속을 걷는다. 관람 동선 안내문이 있지만 이 넓은 공간을 그냥 발걸음 닿는 대로 자유롭게 오가면 된다. 입구에서 호위하듯 고목이 숲을 이룬 길을 산책하듯 홀린 듯 걸으며 유적지를 돌아보는 맛,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멀리서도 홀로 오롯한 왕궁리 오층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포토존 프레임 안으로 바라보는 석탑 또한 기품 있다. 오랜 세월 너른 터에 우뚝 서서 품격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왕궁터를 돌아보건대 세련되고 웅장했을 백제 옛터다. 끊임없는 보존 노력으로 이제는 풍경이 된 역사 속에 서본다.
주변으로 몇 개의 건물터, 금당터가 자리를 지키고, 왕궁 둘레를 감아 도는 길에 단을 높인 대형 배수로의 흔적도 보인다. 왕이 휴식하던 후원과 공방, 화장실까지 옛사람들이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도록 조성했다는 설명서를 읽으니 그 시절 장인들의 디테일한 기술이 놀랍다. 이런 길을 따라 궁궐과 정원의 멋을 누렸을 백제 시대의 영화를 마음의 눈으로 그려보고 상상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공주, 부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 백제역사지구로 당당히 자리 잡은 후에도 여전히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천년 넘는 역사 속의 백제 문화유산은 무궁무진할 터.
왕궁리 유적 옛터에 내리는 노을을 보러 저녁 시간에 다시 와볼 생각이었는데 딴전 피우다 결국 그러지 못했다. 일몰이든 일출이든 천년이 훨씬 넘는 왕궁터가 배경이 되어준다면 그 풍경은 더 말할 게 없을 듯하다. 푸른 하늘과 늦가을 왕궁리의 조화가 이렇게나 멋진데, 날씨 따라 변화하는 백제 옛터 왕궁리의 사계는 또 어떨까.
미륵사지 석탑이 품은 이야기
왕궁리 유적지에서 미륵사지 석탑까지는 자동차로 10여 분 거리다. 정문에 들기 전에 ‘미륵사지 미디어아트 쇼’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게 뭐지’ 하면서 보고 있는데 이 지역 주민인 듯한 분이 지나다가 얼마 전에 진행된 행사라면서 참 볼 만한 쇼였다고 말해준다. 미륵사지 석탑 동·서쪽에 프로젝션 매핑 및 드론을 이용해서 다양한 빛과 형상을 표현하고 음악을 활용한 종합 미디어 쇼로 구현된 행사였다는 말이었다. 이렇게 익산 지역의 문화유산일 뿐 아니라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인 미륵사지 석탑의 가치 확산과 관광 활성화를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입구에 들면서부터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다. 이렇게 너른 대지에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모습이 있다. 어릴 적 교과서에서 보았던 미륵사지 석탑, 백제 시대 최대 사찰이던 미륵사지는 국보 제11호다. 원래는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니 절반 이상이 붕괴된 모습이다. 그동안 꾸준히 보강하고 섬세한 복원 작업을 해온 결과, 지금은 미완의 6층 석탑으로 우뚝 서 있다. 복원 작업 중 해체 수리하면서 내부에서 사리장엄구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현재 내부는 입장할 수 없다.
우리의 기술로 거의 완벽하게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 옛 석탑을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개방해 들어가 보았더니 시원하다. 그 서늘함이 그 옛날의 기운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길 양옆의 연못이 차분하다. 연못 속으로 비치는 석탑의 반영이 오랜 세월 속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거길 지나 미륵사지 앞마당에는 동·서 방향으로 당간지주 두 기가 서 있다. 다가가 보니 생각보다 매우 크다.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었다. 당간은 절에서 행사가 있을 때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놓는 돌기둥이다.
미륵사지 주변으로는 큼직한 돌이나 파편들이 몇 군데 자리 잡고 있는데 석탑의 노반 덮기 돌이라고 한다. 동원 금당터가 있고 몇 군데 터마다 목탑이나 석탑이 있었지만 화재로 사라지기도 하고 지금은 이렇게 기단만 남아 있는 상태다.
집에 와서 사진을 정리하다 유적지를 돌아보는 젊은 커플이 내 사진 속에 몇 번씩 담긴 걸 보았다. 널찍널찍한 터에 스며 있는 역사적 사실을 꼼꼼히 살피며 다니는 모습을 보며 참 예쁘구나 했다. 한적한 미륵사지 터를 돌며 데이트하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그저 그림이다. 백제 유적지의 풍경 속에서 그들만의 하루는 참 멋진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그뿐일까. 도란도란 이야기하면서 지나가는 가족의 모습 또한 아름답다. 이렇게 가족과 나들이하며 우리의 문화유산을 접해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즐거움일 것이다. 특히 백제 무왕의 흔적이 가득한 익산의 모습을 보려면 이곳 미륵사지를 빠뜨릴 수 없다.
한옥마을에서 호젓하게 하루
익산으로 떠나면서 그곳의 숙소를 검색했지만 마땅한 게 없었다. 어찌된 게 이 시기에 빈방이 없다고 나오는 곳도 제법 있다. 시내를 벗어난 곳의 숙소를 클릭해보았더니 한옥 숙소가 있다. 이름도 낯선 ‘함라’라는 곳에 위치했다. 일단 통화를 해보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예약을 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익산시에서 20~30분 정도 달려 해질 무렵에 도착한 ‘함라마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통 보이지 않는다. 한적하고 조용하다. 체크인하고 밖으로 나와해 저무는마을 골목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농촌 지형을 그대로 살린 울퉁불퉁 돌담길의 자연스러움, 토담에 매달린 주먹만 한 호박과 노란 호박꽃, 가을을 알리는 담쟁이들의 뒤엉킴…. 알고 보니 토석담이 주를 이루는 함라마을의 이런 토담, 돌담, 화초담 등의 전통 담장이 등록문화재 제263호라고 한다.
그리고 시·도문화재로 지정된 함라 삼부자집의 조해영 고가, 김안규 가옥, 이배원 가옥 사랑채는 오래된 전통 가옥으로, 토석 담장과 한옥 기와지붕이 어우러진 전통적 경관이 볼 만한 곳이다.
함라 삼부자가 베푼 인심은 호남을 대표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서는 숟가락 하나만 있으면 배고픔을 면할 수 있고 노잣돈까지 얻어 갔다는데, 당시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들이었다고 전한다.
이른 아침에 눈을 떠 아무도 없는 마당에 서니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정원의 꽃들이 선명하다. 풀잎에 아침 이슬이 송송송… 잔디 마당을 걸으니 운동화가 촉촉해진다. 관리동 어르신이 지나가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시며 이 먼 데까지 뭐하러왔냐신다.이렇게 조용한 거 처음이라니까, “조용하기로야 예가 절간이지 뭐” 하신다. 더러 시끄러울 수도 있을 테지만 하루 있는 동안 정말이지 한 점 소음이 없었다.
마을 바로 위쪽으로 함라향교가 마을을 품듯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조선 세종 19년에 세워진 함라향교는 겉으로 보기에도 아주 오래된 느낌이다.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쌓였지만 여전히 실용적인 향교로 건재한 채 지금껏 이어져오는 듯했다. 어르신도 말하신다. “이게 우리 아버지 때도 있었던 향교지요. 그때도 지내던 제를 지금까지 빠짐없이 이렇게 지냅니다.” 점잖고 선한 인상으로 꼭 존대어를 하신다.
한옥 숙소엔 도문대작이라는 식당이 있다. 허균(許筠)이 함열 유배 시절인 광해군 3년, 전국 팔도의 식품과 명산지에 관해 정리한 ‘도문대작’(屠門大嚼)을 저술했다고 한다. 함열관아 객사터 가까운 곳이 허균 선생의 유배 생활공간이었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바탕으로 이곳 함라 숙소의 식당 이름이 ‘도문대작’이다. 정이 넘치는 마을분들이 차려주신 수수한 한 상으로 흐믓했던 아침 시간이다.
그냥 시내의 흔한 숙소에서 묵었다면, 따끈한 온돌의 맛도 모르고 덜컹거리는이중 창호문여닫이도 못 해봤을 것이다. 아침 이슬 촉촉한 담장이 이어진 멋진 아침 산책도, 새벽 정원의 이슬도, 정다운 아침밥상도, 점잖으신 향교 어르신도 못 뵈었을 텐데. 교외로 조금 더 달려가서 묵은 조용한 한옥마을의 하루가 기억 속에 이렇게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호젓해보기의 진수, 익산 여행은 확실한 힐링이었다.
MBC FM 개국 때부터 라디오를 들었던 조정선(62) PD는 37년간 라디오 PD로 활약했다. ‘이종환의 디스크쇼’,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 ‘배철수의 음악캠프’ 등 MBC 대표 라디오 프로그램을 도맡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일터이자 놀이터였던 라디오 부스에서 빠져나와, 지난해 퇴직을 맞이하며 해파랑길 트레킹을 다녀왔다. 신간 ‘퇴직, 일단 걸었습니다’는 그 여정의 기록인 동시에 37년간의 삶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 책은 그의 단짝이자 고등학교 동창 해정 군과 함께 오른 해파랑길의 여정을 기록한 에세이다. 첫 책의 주제로 ‘음악’이 아니라 ‘여행’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틈틈이 써왔던 음악에 관한 원고를 바탕으로 음악 에세이를 내려고 했는데, 해파랑길 트레킹을 다녀온 후 출간 계획을 미뤘다. 매일 원고를 쓰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여행하는 동안 기록을 하고 싶더라. 보통 아침 여섯시에 시작하면 오후 세시나 네시쯤 하루 일정이 끝난다. 이른 저녁을 먹고 잠들면 새벽 한시나 두시에 깨더라. 옆 친구한테 방해될까 봐 말도 못 하고, 조용히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꾹꾹 눌러가며 그날의 감상을 SNS에 올렸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고, 음악 관련 책 대신 이 기록을 먼저 출간하기로 했다.”
은퇴 기념 첫 번째 프로젝트로 ‘해파랑길 트레킹’을 선택했다. 부산에서 고성까지 770km 거리에 달하는 해파랑길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리셋 버튼을 누르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과거에 대한 끝내 못 이룬 아쉬움이나 미련을 털어버리고, 앞으로의 길을 위해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원래는 해파랑길이 아니라 산티아고 순례길 코스 중 하나인 프랑스길에 가려고 했다. 사전 교육도 다 받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려고 했지만, 팬데믹이 심해지면서 결국엔 못 갔다. 차선책으로 비슷한 길이의 코스인 해파랑길이 눈에 들어왔다. 갔다 온 친구의 추천도 한몫했다. 차선(次善)으로 택했지만, 돌아오고 나서 보니 오히려 그 선택이 최선(最善)이었던 것 같다.”
나서기 PD의 도전
라디오 PD의 DNA는 사라지지 않는 법. 여행 에세이지만 음악이 빠지지 않았다. 물론 37년간 함께 달려왔던 스태프와 곁에서 지켜봤던 뮤지션에 관한 얘기도 담겼다.
“라디오는 삶의 동반자였다. MBC FM 개국부터 라디오를 듣던 꼬마가 실제로 듣던 그 라디오 부스에서 일했다. 음악과 라디오는 내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코드였다. 라디오 PD로 일하면서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많았지만, 그중 하나를 꼽자면 숨은 명곡의 발견이 아닐까? 라디오 PD는 결국 소리로 말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가령 김수희의 ‘애모’가 그런 경우다. 본인은 ‘서울 여자’를 더 밀었는데, 난 ‘애모’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당시 라디오에서 ‘애모’가 소개된 이후 큰 인기를 끌었다. PD로서 참 뿌듯했다.”
그는 ‘PD’라는 역할에 갇히지 않았다. 주로 작가들이 쓰는 원고를 본인이 직접 쓰고, 게스트로 출연하거나 라디오 DJ로도 활동했다.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일하고 싶었다. DJ에 도전한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다. 하나의 라디오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나만의 생각과 진심을 오롯이 청취자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반사체로서 마음을 전달하는 것보다 스스로 발광체가 되어 다가가고 싶었다. 물론 첨엔 대본 읽는 게 서툴렀는데 점점 나아지더라. 게스트로 출연하거나 DJ로 활동하는 나더러 한 후배는 ‘나서기 PD’란 별명을 붙여줬다.(웃음)”
그가 변신을 시도하는 동안 라디오란 매체도 숱한 변화를 겪었다. 한때 문화의 전령사로 통했던 라디오의 영향력은 예전보다 줄었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매체다. 그 사이 ‘배철수의 음악 캠프’는 지난해 30주년을 맞이했다.
“배캠은 일하는 스태프의 노고를 비롯해 배철수 선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가진 팝에 대한 전문성과 해박함은 이미 해외 아티스트에게도 정평이 났다. 또한 선배에게 일하는 마음가짐을 많이 배웠다. 매일 2시간 전부터 와서 원고도 읽고, 노래도 직접 들어본다. 프로그램에 지장이 있는 스케줄을 애초에 잡지 않는다. 30년간 꾸준히 그랬다. 배캠이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선배의 성실함과 책임감 덕분인지도 모른다.”
두 번째 꿈은 히트곡 작곡가
37년간 몸담았던 일터를 떠나, 그간의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기 위해 떠난 해파랑길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 그 전과 무엇이 달라졌을지 궁금했다.
“여행 도중에 가방의 무게를 줄이려고 필요 없는 짐을 택배로 보내는 것이 일이었다. 문득 이제껏 아등바등 살았던 것이 부질없는 욕심처럼 느껴지더라. 또한 좋은 아빠, 좋은 남편, 좋은 상사라는 답안지에 후한 점수를 줄 자신이 없었다. 유명한 소설가는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는데, 모두에게 친절하지 못한 사람으로 기억에 남은 것 같아 못내 아쉽다. 이제는 욕심을 내려놓고 더 베푸는 삶을 지향하고 싶다.”
끝으로 계획하고 있는 두 번째 프로젝트에 관해 물었다.
“라디오는 여백을 채우는 상상력의 상자다. 내 삶도 비슷했다. 라디오 부스란 한정된 공간 안에서 늘 새로운 시도와 방향을 고민했다. 동시에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듣고, 재미난 일을 많이 했다. 정말로 행운아였다. 이제는 부스 밖 넓은 세상에서 새롭고 재미난 일을 해보고 싶다. 가령 작곡가로 데뷔해서 히트곡을 만들고 싶다. 두 번째 꿈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고, 변주는 밋밋한 반주를 다채롭게 한다. 그의 37년은 알을 깨는 변주였다.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길로 나섰다. 그는 반경 안에 갇히지 않았다. 주도적인 PD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했다. 나서기 PD란 별명은 그 노력의 결과다. 한 시인은 “길은 걷는 자의 것”이라고 했다. 결국 길은 나서는 자에게 열린다. 또 다른 도전을 앞둔 그의 새로운 여정을 응원하며 마친다.
나직이 숨을 고르고는 붓에 힘을 주었다. 오늘은 왠지 붓끝이 가볍다. 이제 한 획만 쓰면 된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마지막 획을 길게 내리긋는다. 미세한 흔들림도 없이 붓끝이 전서체의 획을 마무리했다. 나는 황색 부적지에서 붓을 떼고 지긋이 글씨를 바라보았다. 집안에 두 마리의 용이 화목하게 깃들어 있는 모양새다. 마주 보는 획이 기울지 않고 균형을 잘 이루고 있다. 게다가 단아한 글씨와 잡귀를 물리치는 담백한 운필로 금방이라도 집안 가득 화평한 꽃 기운이 생동할 것만 같다. 나는 매우 흡족해하며 붓을 옆에 나란히 놓았다.
보통 부적符籍이라 함은 대개 한 해의 액厄을 피하거나 벽사壁邪와 기복祈福의 민간 신앙을 담고 있는 데서 유래한다. 요즘에는 현대적이며 새로운 글씨체를 통해 무병장수의 삶과 소망을 담긴 부적을 주로 찾는다. 적당한 먹의 농담과 담백한 운필. 그리고 기운 생동한 붓질과 여백 등이 조화롭게 그려진 부적을 높이 쳐 준다. 가게 진열대에 인쇄소에서 찍어낸 부적이 다발로 있지만 단골 손님들은 내가 직접 쓴 부적을 원한다. 내가 직접 써서 파는 것은 한 장에 십만 원 정도를 받는다. 부적은 누가 쓰느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비싼 것은 한 장에 백만 원까지 받는다는 소문도 있다. 그런 경지의 부적은 가로세로 획마다 금석기金石氣가 있으며 글씨는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과 다양한 서체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조형미까지 갖추고 있다. 실로 대단한 경지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게다가 그보다 한술 더 뜬 최고 경지에 이른 부적은 완연한 획의 흐름에서 삶의 희로애락이 감지되며 파격적인 데다 변화무쌍하고 괴기스러움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나는 부적을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쓴다. 부적을 쓰는 날은 보통 손 없는 날을 잡는다. 부적을 쓸 때는 신령한 공력이 배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날은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 동쪽을 향하여 정화수를 올린다. 그리고 향을 사른 후 무릎을 꿇고 주문한 손님들의 소망을 염원하며 기도를 올린 뒤 경건하게 붓을 든다.
나는 진열장 겸 책상으로 쓰는 계산대에 앉아 방금 쓴 부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황색종이 위에 마르지 않는 붉은 글씨가 물기로 번들거렸다. 부적지로 사용하는 종이는 홰나무로 만든 괴황지다. 크기는 가로 10센티 세로 15센티 정도다. 붉은 먹물은 흔한 물감이 아니라 경면주사鏡面朱砂라고 하는 특별한 안료이다. 그것의 원료는 붉은색을 띠는 광석에서 채굴한다. 원료를 작은 용기에 넣고 절구공이로 곱게 빻아서 미세한 가루로 만든다. 그리고 부적유符籍油로는 참기름이나 백설탕을 녹인 액체를 가루와 섞으면 부적 특유의 붉은 색깔과 특유의 향을 풍기는데 이것을 경면주사라 한다.
나는 고개를 들고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벽시계는 한겨울의 나른한 오후를 가리키고 있다. 가게 중앙에는 활활 타는 전기난로가 썰렁한 가게 안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다. 아담한 공간에는 무속인들에게 필요한 각종 제의 용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맞은편 붙박이 진열장에는 망자들의 넋을 달래줄 영가 옷이 촘촘히 쌓여있고 그 옆에는 무속인들이 굿할 때 쓰는 무신도 대신방울 오방기 장군칼 향로 장구 꽹과리 북 등 무구가 가지런히 놓여 있으며 등 뒤로는 기도할 때 쓰는 등초 무지개초와 목향 금난향 궁연향 등 각종 향과 초가 칸칸마다 들어있다.
다시 고개를 들고 실내에 놓인 간이 탁자 위로 시선을 옮긴다. 그것은 장판을 씌운 자그마한 작업용 탁자다. 무속인들이 필요한 물건들을 골라 탁자에 놓으면 그것들을 큰 보자기로 싸서 묶는 곳이다. 그들이 한 번씩 가게에 들러 굿판에 쓸 제의 용품을 고르면 보통 서너 보따리가 넘을 때도 있다. 흔히 사람들은 무속인, 하면 무당이라 하여 천시하는데 정작 그들의 신심은 대단하다. 그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어 보는 신령님을 섬긴다. 신령님을 무가에서는 보통 몸주라 부르는데, 그들은 몸주와 교감하는 능력을 지닌 영매자靈媒者이기 때문이다.
잠시 창밖으로 눈길을 부렸다. 하늘이 점차 흐려지는가 싶더니 진눈깨비가 풀풀 날리기 시작했다. 저만치서 팔짱을 낀 연인이 까르르 웃으며 정답게 걸어왔다. 세련된 차림에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두 사람의 어깨엔 얼음 가루가 묻은 스케이트화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어디 스케이트장에라도 다녀오는 모양이었다. 언뜻 부러운 생각도 들었다.
눈길을 당겨 부적을 봤다. 부적이 거의 다 말라 있었다. 부적을 조심히 집어서 서랍장에 넣었다. 지금은 명절 전이어서 손님이 뜸한 편이다. 설이 지나면 한해의 액땜이나 복을 바라는 부적 주문이 들어오고 굿판도 자주 열릴 것이다. 내가 부적을 쓰게 된 것은 손님들 때문이다. 부적을 찾는 손님마다 직접 손으로 쓴 걸 원하기에 오빠를 통해 부적 쓰는 법을 배웠다. 처음엔 한 장 두 장 팔리던 것이 지금은 소문이 좋게 돌아 단골로 내 부적을 사가는 손님들이 제법 있다. 유리문에 매달린 종소리가 쨍그렁, 하고 울렸다. 출입문 쪽을 보았다. 조금 전에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걸어가던 연인이다. 나는 방긋 웃으며 손님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언니, 우리가요, 만난 지 꼭 백 일째거든요. 그래서 부적처럼 간직할 수 있는 기념품을 찾는데, 어떤 게 있어요?”
“그러세요? 축하드려요.”
나는 현대적으로 고안된 액세서리 부적 용품이 걸려 있는 매대로 그들을 안내한다. 진열대에는 갖가지 액세서리 부적 용품들이 걸려 있다. 그들은 이것저것 가늠해보다 그중 하나를 고른다.
“언니, 이걸로 할게요.”
그들이 고른 것은 나비 문양의 매듭 핸드폰 줄이다. 날개 사이에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옴(범어)자가 새겨져 있다. 옴이란 길상의 뜻을 지닌다. 전통 문양인 나비 그림에 상감기법을 적용한 앙증맞은 부적이다.
“나비 문양이네요. 나비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아름다움을 상징한대요. 게다가 사이좋은 연인이나 금실 좋은 부부를 상징하기도 하구요.”
“그래요? 그럼 우리가 잘 고른 거네요, 호호.”
풋풋한 연인들이 싱그러운 웃음을 떨어뜨려 놓고 나가자 마음 한곳이 공허해졌다. 나는 콤팩디스크를 켰다. 오카리나의 잔잔한 소리가 가게 안을 흘렀다. 혼자 있을 때면 자주 듣는 음악이다. 나는 눈을 감고 향기로운 소리에 잠겨 들었다. 짙고 푸른 숲이 보이고 맑은 계곡물 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가난한 저녁을 먹고 달빛 맑은 산중에서 도란도란 자연과 대화하는 소리. 때로는 별빛 아래에 앉은 외로운 목동의 피리 소리 마냥 멜로디가 귓가에 들려왔다.
주전자에 물을 끓여서 찻잔에 부었다. 계산대에 앉아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창밖을 내다봤다. 눈발이 제법 굵어져서 분분히 날리고 있었다. 집안일 외엔 다른 일이라곤 전혀 해 본 적 없던 내가 10년 전에 불교용품점을 차리게 된 까닭은 불의의 화재 때문이다. 그 화재로 인해 남편은 세상을 떴다. 남편을 빼앗아간 그 화마의 기억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악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내 마음 어느 한켠에는 여전히 남편과의 마지막 순간이 스냅사진처럼 뚜렷하게 찍혀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남편이 내 곁에 존재하는 듯 그의 부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환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남편을 빼앗아가 버린 그 악몽의 기억이 스르르 떠올랐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자동차 딜러였던 남편은 여느 날처럼 출근 준비를 했다. 새로 다려놓은 하얀 와이셔츠에 내가 생일 선물로 사 준 넥타이를 맸다. 그리고는 셋집 빌라 이 층 계단을 바쁘게 내려갔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남편은 남보다 항상 먼저 출근을 했다. 또한 가장의 책임감 때문인지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성실함 때문인지 남편은 동기들보다도 먼저 승진하는 기쁨도 누리기도 했다.
잠시 뒤 남편이 투덜거리며 다시 계단을 올라왔다. 자가용 바퀴가 펑크 났다고 했다. 아무래도 전철역까지는 버스를 타고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날씨가 풀렸다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날씨여서 나는 남편에게 외투를 한 겹 더 입혀주며 잘 다녀와요, 라고 하며 생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잘 다녀와요, 라고. 그리고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킨 후에 청소를 하며 TV를 켜는데, 뉴스 속보가 자막으로 떴다. 오전 9시 경 ㅇㅇ역 전철 내에서 50대 남성이 플라스틱 통에 든 휘발유에 불을 붙인 뒤 객실 내에 던져 차량 내부를 완전히 전소시켰다는 뉴스였다.
뉴스 자막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ㅇㅇ역은 남편이 종종 전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할 때 이용하는 전철역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범인의 방화시간과 남편의 출근 시간을 되짚어보았다. 9시 경이면 남편은 이미 회사에 출근해서 근무를 하고 있을 시간이다. 남편은 보통 회사에 한 시간 정도 일찍 출근하기 때문에 화마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남편의 직업상 외근이 잦은 업무여서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그의 휴대폰에 전화를 해 보았다. 그런데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음성만 줄곧 들려왔다.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계속 통화 중이더니 겨우 연결이 되었다. 저쪽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사모님,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김과장님이 9시 경에 ㅇㅇ역 방향으로 외근을 나갔다고 합니다. 저희도 지금 연락이 안 돼...‘ 나는 저쪽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전철 화재는 내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남편의 시신은 화염 속으로 사라져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너무나 큰 충격에 오열과 통곡을 하며 까무러치기를 반복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빙의 상태로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수없이 오가며 넋을 놓고 살았다. 살아도 산 게 아닌 그저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남편은 꿈속이든 현실이든 가릴 것 없이 언제든지 내 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우리가 연애할 때 서로 손을 꼭 부여잡고 마음 졸이며 봤던 이라는 영화가 문득 떠올랐다. 예기치 못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 사랑하는 남자를 잃고 슬픔에 잠긴 한 여자와 그런 여자를 두고 이승을 떠나지 못한 한 남자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감동적인 영화였다. 우린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눈물을 글썽이며 가슴 저릿하게 관람했었다.
그런데 그 영화가 몇 년 후 내 얘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편을 잃은 그 도시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내가 어느 정도 사고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고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을 무렵. 친오빠의 도움으로 수원으로 이사한 뒤 ’종로불교사‘라는 가게를 열었다. 친오빠는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불교용품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가게를 연 후로 나는 남편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살아왔다. 행여 힘든 일이 생기면 나 자신이 나약해질까 두려워서 일부러 강해지려고 노력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리고 있었다. 가게 앞에 서 있는 남천나무에도 조용히 눈이 쌓여갔다. 붉게 물든 채로 말라버린 남천나무 이파리들은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어도 떨어지지 않고 나무에 꼭 붙어있다. 나는 시선을 당겨 계산대 끝에 놓인 모래시계를 발견했다. 유리로 된 호리병 모양의 입구가 위아래로 마주 보게 붙어있다. 그 안에는 보라색 모래 알갱이가 들어있다. 모래시계를 거꾸로 세우자 보라색 모래 알갱이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듯 모래 알갱이들이 시간을 거슬러 쌓인다. 모래시계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보니 남편을 떠나보낸 지 5년쯤 후에 문득 내 앞에 나타난 한 남자가 떠올랐다. 평소 친한 언니의 소개로 알게 된 남자다. 언젠가 그 남자와 애들이랑 커다란 모래시계가 있는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사 온 기념품이다. 피차 서로 미워해서 헤어진 게 아니어서 추억이 깃든 모래시계를 굳이 버리지 않고 남겨두었다.
초혼일 때는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더 크고, 재혼일 경우에는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더 크다,라고 어느 심리학자가 말했던가. 만약 다시 그때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한 남자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될까. 아니면 아이들의 의견을 따라 지금처럼 혼자의 삶을 선택하게 될까. 지혜롭게 사랑하고 냉정하게 판단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행복이다, 라는 명제를 어느 책에선가 읽었지만, 나는 여전히 내 운명에 대해서 확신이 서지 않는다. 운명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일까. 아니면 바꾸기 나름일까. 여전히 나는 홀로서기라는 무거운 숙제 앞에 주눅이 들곤 한다.
그 남자는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했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은혜 씨를 향한 사랑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정적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자신도 몇 년 전 이혼이라는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수수하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그의 첫인상에 호감이 갔다. 그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아니,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나도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우리는 결혼을 전제로 종종 만남을 가졌다. 남자가 모 문예공모전에서 상을 받았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기뻐했고 축하를 건넸다. 그날 밤 우리는 수상의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격렬하고도 뜨거운 사랑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사랑의 증표로 남자에게 새 자동차를 선물했다. 자동차 키를 받아든 남자는 감격하며 자신은 여태까지 한 번도 자동차를 소유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한다고 다 결혼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신은 인간에게 그렇게 호락호락 않다는 걸 알았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은 그 남자에게 매우 호의적인 데 반해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은 은근히 적의를 품고 있는 듯했다. 아마도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 어쩌면 낯선 남자에게 엄마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심리가 깔려있는 것 같았다. 그런 심리가 은연중에 나타난 날이 있었다. 한번은 다 같이 어느 공원에 나들이 가는 중이었다. 그날따라 비를 뿌렸는데 자꾸 앞 유리창에 성에가 끼면서 뿌예졌다. 아직 새 차에 적응하지 못한 남자는 어떻게 성에를 제거하는지를 몰라서 무척 당황해했다. 그 와중에 뒷좌석에 탔던 아들이 괜히 심통을 부렸다. 남자는 차량 조작법을 몰라 당황하던 터라 아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풀이를 했다. 그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과연 내가 저 남자를 선택한 것이 잘한 일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들기도 했다.
내가 가끔씩 남자를 만나는 동안 유독 예민해진 아들이 은근히 속을 끓였다. 어느 날은 밥을 먹지도 않고 짜증을 부리는가 하면 예전에 안 하던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그런 아들이 한편으로는 안 되어서 하루는 잠들기 전 나란히 누워서 대화를 나눴다.
“엄마, 그 아저씨랑 함께 사는 거야?”
“왜? 그러면 안 돼?”
“나, 그 아저씨 싫어. 나는 엄마랑 오래오래 살 거야. 엄마, 그 아저씨랑 살지 마. 알았지?”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며 뭔가 설움 같은 게 울컥 치밀어서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엄마는, 아무하고도 안 살아. 우리 아들하고만 살 거야.”
나는 아들을 꼭 껴안아 주었다. 아들은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지 내 품에서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기어코 사단이 나고 말았다. 한날은 잠시 놀러왔던 남자는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거실에서 깜박 낮잠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밖에서 들어온 아들이 그걸 보고는 안 그래도 꼴보기 싫었던 터라 마침 잠자고 있던 남자의 머리통을 냅다 발로 밟아버렸다. 남자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듯 너무 황당하고 화가났다고 했다. 어찌 생각하면 순수한 아이로서는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사랑하는 엄마를 빼앗아가는 남자가 오죽 미웠으면 그랬겠는가, 싶기도 했다. 남자는 어린아이의 돌발적인 행동에 무척이나 당황하기도 하고 실망해서는 그날 이후로 발길도 뜸하다가 자동차를 돌려주는 것으로 관계를 정리했다.
그렇게 그 남자와 사이가 멀어지고 나니 다시 예전처럼 되돌리기는 쉽지가 않았다. 아마도 남자도 자신의 혈육이 아닌 두 아이를 감당하며 어찌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 후로 그 남자와는 가끔씩 안부를 묻는 친구 사이로 남기로 했다. 최근에 그 남자로부터 시집이 배달되었다. 등단 후 출간한 첫 시집이라고 했다. 나는 가만히 그의 시집을 펼쳐들었다.
모래시계의 모래 알갱이들이 거의 다 흘러내릴쯤 유리문에 달린 방울 소리를 짤랑거리며 누군가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고개를 돌려보니 천궁 보살이다. 보살은 올해 쉰 줄로 머리가 벌써 반백이다. 생머리를 뒤로 빗어 넘겨 쪽을 쪘다. 굿이 있는 날이면 가게에는 가끔씩 들렀다. 그는 늘 피곤한 기색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다. 가격을 흥정할 때도 고갯짓으로 거의 다 하곤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쉽게 속내를 보인 적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말해야 될 때도 필요한 말이 끝나면 도로 입이 닫힌다. 나는 예의 밝은 표정으로 인사말을 건넸다.
“보살님, 오랜만에 오셨네요.”
“…….”
“차 한 잔 드릴까요?”
보살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탁자에 앉았다. 그날따라 보살은 더욱 초췌하고 피곤해 보였다. 나는 차를 타서 보살에게 건네고 곁에 앉았다. 볼륨을 줄인 오카리나 소리가 가게 안을 잔잔히 흐르고 있다. 보살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입에 댔다가 뗐다.
“부적이나 한 장 받을까 하고….”
“부적이라면 보살님도 쓸 수 있지 않아요?”
사실 웬만한 무속인들에게 부적은 필수여서 대개가 다 직접 써서 판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저 어깨너머로 배운 내게 부적을 써 달라니. 나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부적이라면 신통력이 있는 무속인들의 부적을 더 높이 치기 때문이다. 무속인 중에도 세습무인 숙무와 신내림을 받은 강신무가 있는데, 특히 강신무의 부적이 더 영험하다 하여 부르는 게 값이다. 천궁보살도 내 짐작으론 강신무降神巫임에 틀림없다. 일전에 어느 손님이 천궁보살한테 부적을 받은 거라면서 쓴 지 오래된 부적을 보여 준 적이 있었다. 흔히 보는 부적이 아니라 자동 기술된 검은색 글씨였다.
“나, 부적 안 쓰네.”
“아니, 부적을 안 쓰다니요?”
“…….”
“아무렴, 제가 쓴 부적보다야 보살님이 쓴 부적이 훨씬 더 영험하지 않아요.”
“영험은 무슨...우리 집 영감이 엊그제 죽었네. 그래서 저승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부적 보시나 하려고.”
“그렇다면 영감님을 위해서 더욱 부적을 쓰셔야죠.”
“급살 맞을 냥반….”
보살은 퀭하게 들어간 눈언저리를 비비며 물기를 닦았다.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 보인다. 그동안 마음고생도 어지간히 한 것 같아서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다. 남편과 살아오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었을 보살의 심정을 어느 정도 헤아릴 것 같다. 어쩌면 보살의 마음이 시린 하늘에 떠 있는 조각달처럼 한없이 쓸쓸하리라. 남편이 떠난 이후에 내게 하늘을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길을 걷다가도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면 마치 남편이 손짓하는 듯한 환영. 꿈속을 찾아온 남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눈을 뜨면 문득 혼자란 생각에 하염없이 베개를 적시던 눈물. 내 안에 간직된 남편이라는 슬픈 단어. 신의 시샘을 받은 것일까. 남편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려고 내게 많은 사랑을 안겨주었는지도. 부모의 반대에 부딪혀 힘들게 결혼한 만큼 남편은 나를 더욱 아껴주었지. 그런 남편의 따뜻한 품에서 나는 온실 식물처럼 살았다. 쉬는 날이면 나를 데리고 드라이브하는 게 취미인 듯, 바다로 가서 개펄을 파헤치거나 산을 오르기도 했다. 한 번은 산을 오르다 토끼풀이 수북이 우거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네잎크로버를 찾기로 했다. 먼저 내가 한 잎을 찾자 남편도 곧이어 찾았다. 그리고는 네잎크로버가 잇따라 발견되었다. 남편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행운이 줄줄이 오려나 보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행복했던 시간들. 남편은 발견한 네잎크로버를 행운의 부적이라며 책갈피에 소중히 끼워 두었다.
실내를 흐르던 오카리나 멜로디가 다음 곡으로 이어지고 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보살을 향해 조심히 입을 열었다.
“영감님이 생전에 보살님한테 잘못한 게 많으신가 보네요?”
“웬수도 그런 웬수가 없지. 불쌍하기도 하고….”
목이 타는 듯 보살은 손에 든 찻잔을 입에 가져가 길게 들이키고 한숨을 내쉬었다. 윤기를 잃은 반백의 머리가 빗질을 자주 하지 않아서 부스스 일어나 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보살이 부적을 쓰지 않을까. 보통 무속인들은 굿이 없을 때는 사주를 봐주거나 부적을 써서 생업을 이어간다. 더러는 식당이나 상점을 하기도 하지만. 보살은 찻잔에서 입을 떼고 헛기침을 한 뒤에 목청을 다듬었다.
“우리 집 냥반이 젊었을 적부터 내 속께나 썩였지. 아들을 하나 낳고 둘째를 가지려는데 어떤 영문인지 들어서지가 않더구먼. 그래서 외아들을 금쪽같이 여기며 키웠네. 그런데 원래 난봉기질이 있던 냥반이 슬슬 바람을 피우더란 말일세. 그래서 바람기를 잡으려고 점쟁이 집에 가서 부부금슬이 좋아지는 애정 부적을 샀네. 부적은 양과 음이 조화를 이루어야 효험이 있잖은가. 그래서 두 장을 받아서는 한 장은 꼭 접어서 영감 바지춤에 몰래 숨겨놓고 또 한 장은 베개 속에 넣었지. 그런데 부적이 효험이 없는지 이 냥반의 바람기는 갈수록 심해지더구먼. 그래서 다음번엔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서 비방을 물어봤네. 남편 바람기를 잠재우는 데는 여우자궁 만큼 좋은 부적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요새 살아있는 여우도 보기 힘든데 어디서 여우자궁을 구하냐니까. 다 구하는 수가 있다며 알려주데. 중국을 드나드는 보따리 상인들이 몰래 사가지고 들어온다는구먼. 그래서 얻기 힘든 여우자궁을 하나 얻지 않았겠나. 그리고는 그것을 내 속옷에 몰래 숨기고 있었지. 그러고 한 며칠 지나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 냥반의 바람기가 수그러들더란 말일세. 집에도 곧장 들어오고 사업차 출장 간다는 핑계도 줄어들고 말이지. 그게 정말 효험이 있어서 그런 건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바람기는 없어졌네.”
“아휴, 보살님. 사내들은 젊을 적에 한 번씩 다 바람을 피운다잖아요.”
남편에게도 그와 비슷한 일이 한 번 있었다. 한번은 빨래를 하려고 남편 바지주머니를 뒤지는데 쪽지가 하나 나왔다. 업무적인 메모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아닌 것도 같고. 암튼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건 메모 내용이 아니라 글이 적힌 메모지였다. 그것은 일상적인 메모지가 아니고 하트 그림이 그려진 종이였다. 저녁에 퇴근하자 대뜸 당신, 어디 숨겨놓은 여자 있어요? 하고 물었다. 남편은 뜨악한 눈빛을 하다가 이내 웃으며, 당연히 있지. 여기 당신, 하고는 얼버무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남편이 뭔가 숨긴다 싶어 감추고 있던 메모지를 얼굴에 디밀었다. 메모지를 본 남편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아, 그거! 하면서 고백을 했다. 며칠 전 출장길에 우연히 결혼 전 사귀었던 여자를 만났다고. 그리고 함께 차를 마시고 헤어질 때 여자가 남편에게 메모지를 건네준 거라고. 나는 남편에게 이딴 메모지를 받지 말라며 못을 박고는 씩씩댔던 기억이 났다.
보살은 눈이 약간 침침한 듯 눈을 한번 비비고는 창밖으로 시선을 일별했다. 어젯밤에 잠을 옳게 못 잤는지 눈동자도 붉게 번져있었다. 찻잔에 남은 차를 마저 입에 붓고는,
“그것뿐이면 말을 안 하지. 이 냥반의 바람기도 좀 잠잠해지고 사업에 열심이다, 싶었는데 덜컥 부도가 나버렸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집 앞으로 열차가 지나다니는데, 철로에서 놀고 있던 외아들이 열차에 치여 죽었어. 부도난 이후로 이 냥반은 도망다니느라 기별도 없고, 외아들은 죽고. 나는 실성하다시피 해서 사는 걸 작파했지. 그러다가 종종 부적을 받으러 드나들던 무당을 찾아가서 죽은 아들 넋이나 달래주려고 굿을 부탁했어. 그리고 굿판이 한창 열리고 연신 비나리를 하는데 천궁에서 온 신령神靈이 그예 턱 하니 내 몸주로 들어와 버렸다네. 그때가 아마 20여 년 전이었지.”
물끄러미 얘기를 듣고 있는 내 마음도 덩달아 숙연해졌다. 늘 입을 닫고 살아가는 보살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게다가 가게에 올 때마다 늘 추레한 옷차림. 영감님의 행방불명과 외동 아들의 불의의 사고. 아마 보살은 죄인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소중한 자식을 잃고 녹록지 않은 세월을 살아온 저 앙상한 가슴에는 얼마나 깊은 한을 담고 있을까.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데, 생떼 같은 아들을 잃은 어미의 슬픔을 그 무엇에 비할 수 있겠는가. 살아있는 날이 어쩌면 죽는 일보다 못한 형벌의 삶이리라. 내 삶이란 것도. 남편이 남기고 간 흔적을 매일 마주쳐야 하는 슬픈 날들. 아침이면 눈물로 흥건히 젖어있는 베개를 안고 또 흐느껴야 하는 텅 빈 시간. 남편이 여느 날처럼 일찍 일어나는 습관처럼, 불쑥 화장실에서 나올 것만 같은 착각에 물끄러미 화장실 문을 응시하기도 했다. 다른 남편들은 반찬 타박도 잘한다는데, 어떻게 된 건지 음식솜씨도 별로인 내가 밥상을 차려주면 꾸역꾸역 군소리 없이 잘도 먹었다. 한번은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때는 정말 남편이 귀엽게 보여서, 일부러 맵고 짜게 국을 끓였더니 내 입맛이 변했나,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남편이다. 남편과 사내 결혼한 내가 잠깐 직장 생활한 것 말고는 결혼한 이후 줄곧 살림만 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서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남편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하며 문득문득 며칠 전의 아침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침울한 아이들을 달래 학교에 보내 놓고 힘없이 앉아 남편의 체취가 밴 가구들을 만져보다 울컥 슬픔이 복받쳐오기도 했다.
가난한 우리는 소박한 결혼식을 하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신혼여행을 설악산으로 갔다. 마침 눈이 내려 산길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등산로에 사람들이 아무도 없을 때 나를 덜렁 업고 가면서 내 와이프가 보기보다 무겁네, 하며 놀려댔었지. 엊그제 남편의 쉰 번째 생일날, 생일상에 밥과 미역국을 떠 놓고 그의 부재에 난 또 얼마나 흐느꼈던가. 남편은 결혼하고 십 년간 내 곁에 머무르다 떠났다. 그리고 홀로 견뎌온 십 년의 시간. 그 시간 동안 가끔씩 모든 게 허무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살아있으면서 이렇듯 무감각하게 세상을 응시하는 지금의 나. 어떤 날은 일이 손에 안 잡혀 매사에 흐느적거리다 하루해를 넘기기도. 그럴 때면 거울을 들고 또 다른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치 깨진 거울 조각 속에 내 얼굴이 들어 있는 것처럼. 그 안에 조각난 얼굴이 슬픈 눈으로 나를 지그시 건너보았다.
언젠가 남편과 함께 동해 바닷가로 드라이브 갔던 날, 처연한 장면을 봤다. 국도 한복판에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차량들이 쌩쌩 달리며 일으키는 바람에 하얀 털이 날리고 있었다. 만지면 아직은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을 것 같은 들개의 주검. 나는 문득 죽어있는 들개의 몸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순간 내 손끝을 타고 끔찍한 소름과 시체의 온기가 동시에 전해져 온 것 같아 몸을 가늘게 떨며 움츠렸다. 사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차량들이 들개의 몸을 타고 넘어갔다. 그럴 때마다 죽은 들개의 머리가 들썩거렸다. 죽기 전까지도 한 발만 더 뛰면 바퀴에 치여 죽는다는 것을 모른 채 앞으로만 달렸을 미련한 짐승. 어쩌면 내 삶도 길 위에 죽어있는 그 미련한 짐승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미욱한 존재. 어느 순간 내 앞에 깊은 슬픔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달려오지 않았던가. 남편이 책갈피에 끼워놓은 네잎크로버의 행운이 늘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여기듯. 슬픔과 행복은 야누스의 얼굴처럼 둘이 아님을, 남편을 잃고서야 가슴이 저리도록 와 닿았다. 전철 화재사건 뒤 처참한 내 심정은 길에서 죽은 개의 사체 같았다. 개의 몸뚱이 위로 차바퀴가 수없이 지나다 보면 나중에는 털가죽만 남듯, 남편을 잃고 한동안 방황한 내 삶은 생명을 잃은 털가죽이나 다름없었다. 남편이 바닷가 큰바위에 서서, 우리도 여기 온 기념으로 글을 새겨두자고 했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싫어할 텐데, 하며 말렸다. 그러나 남편은, 옛날 선사시대에 바위에 그렸던 암각화라는 것도 일종의 행운을 비는 부적이래. 그때 사람들도 바위에 그림을 새기며 풍요를 빌었을 거야. 그리고 바위에 새긴 동물마다 상징하는 그들의 소망도 깃들어 있는 거래, 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마침 색깔이 나는 작은 돌멩이를 찾아서는 글을 새기기 시작했다. 우리 가정에 사랑과 행복이 가득 넘치기를. 현우와 은혜 다녀감. 글을 다 쓰고 난 남편의 환하게 웃는 표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아이들과 함께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하는 많은 시간. 어느 순간 남편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아이들과 나를 지켜보리라는 느낌이 불현듯 들 때도 있다. 언뜻 등 뒤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시선. 얼핏 뒤돌아보면 무료한 정물 풍경만이 헛헛한 가슴으로 밀려들던 상실감에 몸을 떨기도.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유독 아빠를 잘 따랐다. 퇴근한 남편과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장난을 치거나 할 때면 은근히 질투가 생길 정도였으니까. 짧은 시간 동안 남편은 나와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안겨주고 떠난 것 같다. 평생 나누어 줄 사랑을 한꺼번에 다 주고 가려는 것처럼.
시난고난한 삶을 살아 온 보살은 나이에 비해 주름도 많이 잡혀 있었다. 그 모진 세월을 저 보살은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을까. 보살은 눈언저리로 흘러내린 몇 올의 머리카락을 갈퀴 같은 손으로 쓸어 올리더니,
“그렇게 집안 폭삭 망하고 팔자에도 없는 무당이 되었지. 사는 게 힘들 때는 한 많은 이 세상과 연을 끊으려고 골백번도 마음먹었지. 그래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났다고, 모진 게 목숨인가 벼. 이를 악물었지. 죽을 때 죽더라도 이 냥반이 집에 돌아오는 것 보고 죽겠다고. 그래서 내가 배운 짓이라고는 푸닥거리밖에 없으니 굿판을 열거나 부적을 쓰면서 연명했네. 시난고난 갖은 고생하며 사는데 한날은 파출소에서 깜깜무소식이던 그 냥반 소식이 들려오더란 말이여. 웬 부랑인이 나를 찾더라고 하면서. 한달음에 가보니 허, 이 냥반이 거지꼴을 하고 쭈그려 앉아있는데, 우리 집 영감이 맞는가 싶더구먼. 가만히 보니 눈도 좀 이상해 보이는 게 정신도 온전치 않더라니. 옛날에 그 번지르르하던 행색은 어디 가고 꼭 비렁뱅이 짝이었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조금 전까지 사락사락 날리던 눈발이 어느새 멎었다. 그 눈발은 보살의 앙상한 가슴속에서 여전히 날리는 것 같다. 황량한 들판 위로 가뭇없이 날리는 눈보라처럼. 보살의 눈동자가 텅 비어 보인다. 생기라곤 한 가닥도 없어 보이는 그런 눈빛. 예전에 내 눈빛이 그랬었지. 멍한 눈으로 앉아있는 날들이 많았다. 공원에서 낯선 이가 앉았다 간 빈자리도 쓸쓸해 보이는데, 하물며 가장 사랑하는 남편의 빈자리임에랴. 혼자인 시간에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면 햇빛 쨍쨍한 대낮이 걸려 있고, 눈을 감으면 내 안에는 굵은 눈발이 날렸다. 하루하루가 혼돈과 혼란스러움의 연속이었다.
행여 시장이라도 다녀오다 아는 이를 마주치면 왠지 미워지기도 했다. 얼마 전까지도 저이와 나는 행복의 저울질을 하지 않았던가. 우리 형편과 비슷한 집이나 조금 잘 사는 집의 행복을 저울질하며 그렇게.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 오면 일부러 돌아가기도 하며 내 처지에 대해 원망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나는 작은 일에도 신경질을 내거나 분노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한없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전에는 간혹 싱크대 밑에 서식하던 바퀴벌레라도 스멀스멀 기어 다니면 징그러워 비명을 질렀는데, 언젠가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꾹꾹 눌러 죽이는 내 모습에 스스로도 놀랐다. 남편을 잃은 내 마음은 늘 공허했다. 부적 쓰는 법을 배운 뒤 처음으로 남편의 넋을 위해 붓을 잡던 날. 나는 한 획도 쓰지 못하고 펼쳐진 부적 종이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종이 위에 남편의 얼굴이 어른거려 눈물만 떨어뜨렸다. 나는 붉어진 눈언저리를 닦고 모질게 마음먹었다. 아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남편을 위해서 악착같이 한번 살아보리라. 만약 신의 시샘이라면 멋지게 살아서 초라해진 내 삶을 복수하리라고. 그리고는 다시 붓을 잡고 온 기력을 쏟아 부적을 썼다.
나는 고즈넉이 난로를 바라봤다. 여전히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열기로 가게 안이 따뜻해졌다. 혼자가 된 이후 나는 한동안 불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불을 보면 자꾸만 남편이 떠올랐다. 저 뜨거운 불 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남편의 모습. 그 악몽 같은 환상에 사로잡혀 꿈속에서도 남편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나타나곤 했다. 뜨거운 불길 속에서 남편과 내가, 그리고 단란했던 우리 가정이 송두리째 불길에 휩싸였던 그날의 악몽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어느덧 오카리나 소리도 멎어있었다. 보살은 회한이 밀려오는 듯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 다시금 눈에서 물기가 나오는지 손등으로 살짝 훔치더니,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 집에 돌아온 냥반이 그래도 핏줄은 보고 싶었는지 아들을 찾더라니. 벌써 저 세상으로 간 아들이 살아올 리는 없고. 아들이 열차에 치여 죽은 걸 알고는 점점 더 정신이 오락가락했지. 그래서 굿판도 열어 푸닥거리도 해보고 부적을 써서 집안 곳곳에 붙여도 봤지만 효험이 없더구먼. 나중에는 병이 깊어져 할 수 없이 병원에 입원을 시켰네. 그런데 며칠 후에 이 냥반이 병원에서 사라져 버렸다네. 다시 찾고 보니 이 양반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큰 사고를 내지 않았겠나. 그 사고로 온몸에 중화상을 입고 여태까지 식물인간과 다름없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네. 그러다가 결국 저승사자가 불러서 엊그제 저 세상으로 갔네.”
“참 안 되셨네요. 그런데 영감님이 무슨 사고를 냈는데요?”
“급살 맞을 냥반이 글쎄, 귀신에 홀렸는지 전철 안에다 불을….”
“전철요? 아니, 영감님이 전철에다 불을 냈다구요?”
“…….”
나는 너무 놀라 동공이 저절로 크게 열렸다. 혹시 보살의 말을 잘 못 들었나 싶었다. 그날의 악몽을 잊기 위해 그곳에서 이사를 왔는데, 설마 그 사건의 방화범이 지금 내 앞에 있는 보살의 영감님이라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내 볼이라도 꼬집어보고 싶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엉키어버린 듯 복잡해졌다. 나는 보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살의 얼굴이 많이 일그러져 있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지 입매가 씰룩이고 눈썹이 파르르 떠는 것 같았다.
“그 냥반이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뒤로 부적을 끊었네. 천벌을 받아도 시원치 않을 여편네가 무슨 낯으로 부적을 쓰겠나. 죽는 날까지 그저 죄인의 몸으로 살아야지….”
고개를 세우고는 남편의 부적을 떠올렸다. 처음으로 쓴 남편의 부적을 들고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으로 갔다. 화재 현장에는 여러 유해가 뒤엉켜있어 그 일부를 유골함에 담아 납골당에 안치했다. 유골함에 부적을 붙이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무리의 새 떼가 황혼의 서편 하늘가를 나는 게 보였다. 나는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새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산과 하늘의 경계선이 흐릿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하늘 한편에서는 노을이 스러져 가고, 아래로는 완만한 능선이 아름답게 보일 무렵이었다. 새들은 황혼을 날면서도 서두름 없이 날고 있었다. 뒤 쳐진 새 한 마리가 바삐 무리를 쫓고 있었다. 나는 새들이 서편 하늘로 가뭇없이 사라질 때까지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들이 사라지고 난 후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편안해진 것도 같았다.
천궁 보살이 가게를 나간 뒤 시계를 보니 정오를 막 지나고 있었다. 나는 멍해진 기분으로 줄곧 앉아있다가 창밖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멎었던 눈발이 다시 내리고 있었다. 나는 깨끗한 부적지를 꺼내어 조심히 유리판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복잡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남편 얼굴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희미하게 웃는 것도 같았다.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신 뒤 망자의 부적을 정성껏 써 내려갔다.
•수상소감 - 최우수상 단편소설 박도열
“닐 암스트롱처럼 아무도 밟지 못한 미지의 땅에 소설가로서 첫발자국을 남기고 싶어”
코로나 19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저에게 뜻밖에 소설 당선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게는 올 한해 최고의 선물이 되겠습니다.
제가 소설에 관심을 가진 지는 오래됐습니다. 하지만 경제적 여건과 생업 때문에 소설 쓰기에 집중적으로 매달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최근 오랫동안 하던 일을 접고 비로소 소설 쓰기에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소식을 접하고는 응모를 하게 됐습니다.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했으며 다방면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십 대에는 감동적인 소설을 읽고 나면 볼펜으로 필사를 해 보는 등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저의 경험을 토대로 여러 편의 소설 습작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시에도 관심이 많아서 초기에는 한동안 시에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모임에 종종 참석하게 됐는데, 그곳에서 유명한 소설가를 만나게 됐습니다. 그분이 평소 저의 시를 보셨는지 하루는 시보다는 소설 쪽에 더 어울린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분 말씀을 듣고 나서 소설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소설가라면 으레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작가로 남는 게 가장 큰 소망이겠습니다. 저 또한 그런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겠습니다.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처럼 아무도 밟지 못한 미지의 땅에 소설가로서 첫발자국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제게는 아픈 손가락들이 있습니다. 늘 무거운 짐으로 제 가슴에 내려앉아 있습니다. 그 아픈 손가락들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부록
늦가을 나무에서 떨어진
모과 한 알
대책 없는 레드카드
향도 빛깔도 잃은
나이테와 검버섯만 남았다
흙에 다는 댓글 진물
어느 날
보충 설명도 없이
등 떠민
세월이 괘씸하다
유턴이 불가한 길 알아서 가야 하는
지도에도 없는 길
노년
내가 닦달한
급물살의 얕은 길
몇 개의 산허리 휘둘러 오며
나는 어두워졌다
이제 속도를 내려놓고
뒤척이며 깊어지는
녹두 빛 바다를 배운다
나의 시간은
백일홍 꽃의 하루 분량도 읽지 못했다
사랑 이야기 반의반도
읽지 못했다
이제
천천히 흐르며 깊어지고 싶다
수초의 손등을 만져주며
물방개 막춤도 추며
바람의 노래도 듣고 싶다
잔치도 끝나고 설거지도 끝난
육십 즈음에
명주 옷고름 문양 같은
파란 시간이 돌아온다
부록은
굳게 내린 셔터를 올리고
낙과 진물 찍어 시를 빚는다
나를 깎아 빚은 시
모과 향이 깊은
행간
걸음걸음 풀꽃 들여놓고
나를 피운다
반세기 너머
별을 채집하던 그 하늘로 회귀
내 여백에
별이 쏟아진다
부록이 더 아름답다
ㆍ수상소감 - 최우수상 시 김귀순
“세상의 작은 이름 비켜선 것들의 신음이 꽃으로 피는 시를 쓰고파”
기쁨의 쓰나미였습니다. 한동안 감동의 여진이 계속될 것 같습니다. 유통기한 지난 식품처럼 비켜선 지 오래, 하마터면 주저앉았을 일상의 무기력한 안주. 어떤 경우이든 포기했다면 얼마나 큰 낭비일 수 있는가를 깨닫게 한 수상의 기쁨이었습니다.
늘 죽음을 묵상합니다. 그 무거운 주제가 삶을 치료하고 가볍게 합니다. 치열하게 살게 합니다.
삶을 곱씹으니 시가 되었습니다. 가을 늦게 핀 민들레 노란 윤기를 다 피워내고 하얗게 바래 듬성한 흰 머리칼도 눈물 나는 시가 되었습니다.
부족한 글 최우수상으로 낙점하신 심사위원님들, 수고하신 모든 관계자님들 엎드려 감사드립니다.
깔아주신 시니어 문학 전용 멍석 위에서 시의 막춤을 추었습니다. 위축되고 주눅 들었던 씁쓸함은 벗어던지고요.
제 삶의 시간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셔 행복하고, 시가 있어 행복하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당신 님들이 계셔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당신 님들이 계셔 어둑한 노년을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신상품처럼 반짝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작은 이름 비켜선 것들의 신음이 꽃으로 피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시의 보폭을 넓히며 치열하게 걸어온 길을 쭈욱 걸어갈 것입니다. 브라보. 다시 시작하는 우리 백금 같은 만년을 위하여.
1985년 MBC 강변가요제에서 발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끈 노래가 있다. 그 시절을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었을 ‘그대 먼 곳에’가 바로 그 노래다. 당시 건국대학교를 다니던 임석범(58)과 김복희가 마음과 마음이라는 듀엣으로 부른 이 노래는 752개 팀 중에서 대상을 차지했을 정도로 부드러운 포크 발라드로서 완성도가 단단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지금도 아내 채유정(57)과 함께 마음과 마음을 이끌며 음악과 라이브 카페, 유튜브에 이르는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가는 임석범을 만나 노래의 숨결, 그리고 삶에 대한 그의 굳은 의지를 들었다.
마음과 마음의 리더, 중학생 때부터 가수가 꿈이었던 임석범의 본격적인 음악 생활은 홍서범이 몸담았던 걸로 유명한 건국대 밴드 옥슨에서부터였다.
“그런데 단체 생활이 저는 도저히 안 맞더라고요. 그리고 ‘불놀이야’를 부르면 홍서범 스타일을 따라 해야 하는 것도 스트레스였죠. 저는 내 스타일로 부르고 싶어서 갈등이 많았어요. 그래서 나왔죠.”
그러나 옥슨을 나온 이후는 좌절의 연속이었다. 프로덕션에 가서 오디션을 보고 대학교 노래 좀 한다는 사람들은 다 참가하는 대학가요제, 강변가요제에도 도전했다. 그러나 모두 떨어졌다. 훗날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하는 ‘그대 먼 곳에’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러나 당시에는 ‘하다 하다 안 되니까 군대나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군대 가기 전에 김복희 씨와 강변가요제에 나갔는데 운 좋게 대상을 받은 거예요. 1985년 7월 말 남이섬에서의 일인데, 11월에 영장이 나와서 3일 만에 군대에 가야 했죠. 그때 아내가 강변가요제에 나간다니까 명동에서 써지오바렌테 청바지 사주고 그랬죠.(웃음)”
37년 동안 연인처럼 함께하다
평생을 같이하고 있는 임석범과 채유정의 첫 만남은 1984년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음악으로 인해 만난 게 아니었다. 물론 그들의 주요 데이트 코스는 당시 대표적인 포크 가수들이 모이는 라이브 카페로 유명했던 무교동의 코스모스 코러스였지만, 채유정 입장에서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 거였지 정작 본인이 가수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군대를 제대한 후 솔로와 듀엣 사이에서 고민하던 임석범은 결국 ‘마음과 마음의 프리미엄을 살리기로 하고, 다른 여자랑 노래를 하는 것보다는 여자친구를 꼬여서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아내에게 가수 훈련을 시키느라 전지훈련도 갔었어요.(웃음) 얼떨결에 가수가 된 거예요. 1987년에 소집 해제되자마자 첫 음반을 서울음반에서 냈죠.”
‘노래를 연습한 날은 울면서 집에 갈 때도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임석범의 혹독한 ‘훈련’을 받아 가수로 거듭난 채유정은 이후 CM 가수 활동도 하고 교육방송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프로그램도 진행하는 등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그 과정에서 잘 따르던 후배가 조갑경이었는데 지금은 학교 선배의 형수님이 됐으니 세상모를 일이다.
유독 좌절이 많았던 음악 활동
분량상 본 기사에 수록하지 못한 이야기들까지 듣다 보니 좌충우돌 즐거운 에피소드가 많은 부부였다. 그러나 음악 활동은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이 합작한 마음과 마음 1집은 활동 시기를 잘못 맞췄다. 하필 88올림픽이 열릴 때 나온 것이다. 아무리 히트곡이 있다지만 이제 막 1집을 완성한 신인이 낄 자리는 없었다. 2집은 1993년에 나왔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좌절은 끝나지 않았다. 하필 서태지와 아이들이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같은 시기에 데뷔한 것이다. 당시 가요계는 장르가 뭐든 간에 무조건 서태지로 마무리되던 시절. 그 때문에 ‘웃픈’ 일도 있었다.
“제작자 선배님이 가만 보니 서태지와 아이들 같은 팀을 하나 만들면 돈을 빨리 벌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6인조 팀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팀 이름을 잘못 지었어요. 이름이 ‘쇼크’였거든요.(웃음)”
지금이나 그때나 아이돌 그룹치고는 꽤 충격(Shock)적인 이름이긴 했다. 그리고 아이돌 그룹을 처음 만든 제작자에게 닥친 시련도 ‘쇼크’였다. 의상이며 먹는 거며 자동차, 춤 선생까지 그렇게 돈이 많이 들어갈 줄 몰랐던 것이다.
“매일 세 끼 식사만 해도 그게 얼마예요. 결국 회사가 부도났어요. 일이 그렇게 되니 누구 탓을 하기도 어려웠죠.”
시대를 앞선 스트리밍 사업을 하기도
가요계가 아이돌 그룹 위주로 체질이 변화하면서 포크는 침체되었다. 마음과 마음도 주 무대를 미사리로 옮겼다.
“제가 처음 미사리에서 노래할 때는 라이브하는 데가 두 군데 있었어요. 그러다 점점 늘어난 거죠. 한때는 라이브 카페가 70개였고 가수는 200명에 이를 정도였어요. 미사리에 당구장 하나 차리면 장사가 될 거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올 정도였죠. 그러나 미사리가 점점 호객이 되는 가수들 위주가 되고 싸움이 나다 보니까 잘 안 되게 되었죠.”
그는 인터넷 사업도 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시대를 앞선 사업, 이제는 모두의 일상이 된 음악 스트리밍 사업이었다.
“‘앞으로 음악은 디지털화되어 파일로 노래를 살 것이다’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미사리나 공연장을 다니면서 가수들 동영상을 찍었어요. 그걸 데이터로 만들어 유니텔에 서비스했죠. 그런데 사실 돈이 될 거란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5분짜리 노래를 다운받는 데 15분 걸리던 시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데이터가 쌓이다 보면 회사가 어떤 길로 갈 것인지 확실하게 방향을 잡을 수 있거든요. 너무 빨리 시작한 거예요.”
유튜브에서 부활한 마음과 마음
그 실패의 경험이 약이 된 것일까. 마음과 마음은 요즘 유튜브와 잘 맞는 편이다. 코로나19가 본격화되면서 가수들의 무대가 사라지자, 아내 채유정이 유튜브에 뛰어들 것을 적극적으로 ‘독촉’한 덕분이기도 하다. 그녀는 남편이 시대를 앞선 인터넷 사업 경험도 있는 만큼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아내에게 설득된 남편은 7명이 들어오든 8명이 들어오든 유튜브에 마음과 마음의 자리를 만들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든 채널 ‘마음과마음7080TV’의 현재 구독자는 3600명 정도. 2시간 넘는 실시간 라이브 공연과 토크를 하고, 공연이 끝나면 영상을 올리고 있다.
마음과 마음은 그 외에도 ‘은혜로운찬송가’라는 찬송가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기독교인인 부부는 요즘 교회에서 그들이 어렸을 적 불렀던 찬송가 대신 매번 새로운 가스펠을 부르는 걸 보고 찬송가를 제대로 불러보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곡씩 올리기로 했다. 그런데 오로지 사명감으로 시작한 이 실험이 성공한 것이다.
“집에서 컴퓨터로 반주와 코러스를 다 만들어요. 그리고 영상도 만드는 거죠. 한 곡 만드는 데 이틀 정도 걸리더군요. 3월 3일에 구독자가 120명이었는데, 지금은 9200명이에요. 하루에 200명씩 늘어난 거죠. 구독자가 늘어나자 조회 수 30만 회 넘는 영상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이거였구나 싶었죠.”
여백의 음악을 추구하다
그는 현재 강남 도산공원 앞에 자리한 라이브 카페 마음과마음을 운영하고 있다. 벌써 11년째 운영 중인 라이브 카페로,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명소다. 라이브 카페 운영, 유튜브 채널 운영, 그리고 새롭게 발표할 계획인 싱글 곡까지, 요즘 임석범의 하루하루는 바쁠 수밖에 없다. 어찌되었든 그의 본분은 가수. 음악 얘기를 할 때 그는 가장 활기찬 목소리를 냈다. 그가 하고 싶은 음악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여백이 많은 음악’이다. 그가 말하는 여백의 음악이란 듣는 사람이 들어갈 자리가 있는 음악을 뜻한다.
“어떤 가수는 슬픈 노래를 부를 때 본인도 슬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듣는 사람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여백이 많은 음악은 듣는 사람이 들어갈 자리를 만들어놓죠. 그래서 아주 슬픈 노래는 슬프지 않게 불러야 진짜 슬플 수 있는 거라고 봐요. 진짜 슬픈 노래는 마이너가 아니라 메이저 코드라는 거죠. 담담하게 여백을 주며 부르면 가사가 들리고, 그러면 듣는 사람이 자기 감정을 넣어 아픔을 간직할 수 있거든요.”
정말 좋은 노래를 만드는 사람 되고파
임석범의 음악적 롤모델은 언더그라운드 포크의 대부라고 불렸던 조동진과 정태춘이다. 조동진의 ‘작은 배’, ‘어떤 날’ 같은 노래는 임석범의 여전한 애창곡이다.
“부끄러운 기억이 있어요. 데뷔하기 전에 방송 활동을 많이 했거든요. MBC 라디오에 정태춘 선배와 함께 출연한 적이 있어요. 사회자가 한 곡을 쓰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고 질문하더군요. 저는 곡 쓰는 데 오래 걸리지 않고 한 방에 끝내는 타입이어서 하루면 다 만든다고 대답했어요. 그런데 정태춘 선배는 일 년 걸린대요. 써놓고 다시 보고 다시 보고 하다 보니 곡을 쓰는 게 너무 어렵다는 거예요. 저는 너무 쉬웠거든요. 그게 너무 창피했어요. 그렇게 노래 하나도 정성 들여서 만드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대중적인 인기가 없어도 동료 선후배 가수들이 ‘정말 좋은 노래를 만든다’고 말하는 가수가 되고 싶다는 게 그가 지금도 뜨겁게 품고 있는 꿈이다. 그의 끈질긴 꿈이 어떤 결실을 맺게 될지, 새롭게 나올 노래들을 들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명곡 ‘마음에 쓰는 편지’를 부른 가수, 그리고 1990년대를 휘어잡은 최고의 MC. 임백천(63)은 지금도 매일 낮 12시부터 KBS2 라디오 해피FM ‘임백천의 백뮤직’을 통해 사람들과 만난다. 1978년 MBC ‘대학가요제’로 연예계에 입문했으니, 어느덧 43년 동안 현역 방송인으로 생활하고 있는 셈. 아날로그 시대에 시작해서 디지털 시대에까지 이르렀기에 ‘디지로그’를 지향한다고 밝힌 그는, 느릿하면서도 편안한 목소리로 자신이 지나온 세월과 현재의 시간을 차분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어떤 정점에 도달했던 사람이 들려주는, 자신이 관조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①편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내 인생 단 하나의 영화 같은 순간
임백천에 대해 얘기하면서 아내 김연주 씨를 빼놓기는 어렵다. 성공한 가수이자 MC였던 노총각과 서울대 출신 재원이자 역시 떠오르는 MC였던 두 사람의 결혼은 1993년을 장식한 큰 화제였다. 올해 결혼 생활 28년째, 1남 1녀를 둔 부부의 생활은 어떤지 물어봤다.
“(웃음) 아주 나이스한 친구예요. 제가 서른다섯 살에 아내에게 구제받았어요. 지금이야 서른다섯은 결혼 적령기지만 그때는 노총각이었고, 여자 마음을 사는 데 소질 있는 사람이 아니었거든요. 그런데다 프러포즈를 받아준 사람이 나보다 여덟 살이나 아래고, 여러 가지 면에서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결혼하겠다고 하자 ‘신부가 너무 아깝다’는 말이 나왔죠. 심지어 저의 엄마까지도 아내가 아깝다고 했을 정도니까요.”
결혼식에서 그는 장인어른에게 양해를 구하고, 신랑 신부가 동시에 식장에 입장했다. 부부가 동등하게, 잘 살겠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입장을 해서 주례에게 가는 그 시간이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았어요. 지금도 그분의 보살핌에 힘입어 잘 살고 있고…. 한 집에서 식구들과 복작대며 살 맞대고 살아간다는 게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잘 사는 건 아내가 현명한 답을 갖고 참아주고 희생해서 유지되는 거예요. 안 그러면 힘들겠죠.”
유튜버 제안받았지만 ‘거부’한 이유
임백천과 시니어로서 제2의 인생 얘기를 하다 보니, 방송인인 만큼 자연스레 유튜브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그 또한 유튜브 채널을 제안받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그의 방송 철학과는 정반대였다.
“유튜브에서 방송계 비하인드 스토리를 푸는 걸 하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나는 그런 걸 싫어해요. 후배, 선배, 동료들 뒷담화는 해서는 안 될 짓이라고 생각하니까.”
물론 그도 유튜브를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유튜브 방송 중 하나로 ‘주현미TV’를 꼽았다.
“지금은 트로트 전성시대잖아요. 옛날에는 ‘굳세어라 금순아’ 같은 전통 트로트 시대였는데 지금은 세미 트로트, 댄스 트로트 시대예요. 대중가요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겁니다. 전통 트로트를 공부하고 세미 트로트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차이가 있어요. 들어보면 알아요. 주현미 씨는 지금 시대에도 전통 트로트를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죠. 본인이 그걸 본보기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주현미TV’를 보면 전통 트로트를 쭉 하고 있어요. 굉장히 잘하는 거죠. 돈이 막 벌리는 일도 아니고, 사명감으로 하시는 거죠.”
SNS 좀 안 하면 안 될까?
임백천 또한 유튜브를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있다고 한다. 만약 하게 되면 ‘주현미TV’처럼 자신만의 소울이 있는 것을 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전에, 인터넷 방송이 자신에게 맞긴 한 건지부터가 고민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 망설임에는 매일같이 인터넷 방송과 SNS를 통해 여론몰이가 일어나는 세태에 대한 그의 예리한 시선이 있었다.
“SNS 계정은 있지만 사용은 안 해요. 첫 번째 이유는, 게을러요. 글을 올리고 반응을 보고 댓글을 남기고 하는 걸 챙기는 빠릿빠릿한 사람이 아니에요. 두 번째는 지금 복잡한 사회가 됐잖아요. 서로서로 잘난 사람들뿐이에요. 서로 말하고 있어요.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이름 좀 알려진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하면 언론에서 확대 재생산하고…. 그러니까 너무 시끄러운 거예요. 제발 사람들이 ‘낄끼빠빠’ 좀 했으면, SNS 좀 안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책임지지 못할 얘기를 고견인 양 올리면 시끄럽고 적이 생기고 싸우게 되고…. 그게 싫어서 안 합니다. 제가 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신경을 쓰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런 게 싫어요. 조용한 사회를 원합니다.”
가수로서의 숙명, 다시 시작됐다
사실 임백천은 이틀에 영화를 세 편씩 보는 영화광이기도 하다. 다시 태어나면 배우를 하고 싶다는 소망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런 열망을 지금 생에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가끔씩 드라마나 영화에 카메오로 나오는데, 본인 말마따나 커리어가 꽤 된다. 가장 유명한 것은 영화 ‘라디오스타’에서의 카메오 출연. 그 외에도 드라마에서 조연을 여러 번 맡았다. 최근에는 드라마 ‘결혼작사 이혼작곡’ 시즌2에 카메오로 나오는 촬영을 끝냈다.
그렇게 이제 곧 배우로서의 임백천을 보는 것과 더불어 가수로서의 임백천도 보게 될지 모르겠다. 그의 목소리로 불리는 새 노래들이 준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앨범인 3집이 1991년에 나왔으니 어언 30년 만의 일이다.
“마지막 앨범이 될 것 같아요. 가수를 했던 사람들이나 배우를 했던 사람들은 죽기 전날까지도 좋은 노래를 불렀으면, 좋은 연기를 했으면, 그러고 살아요. 어떻게 보면 숙명 같은 거예요.”
이번에 만드는 앨범은 젊은 감각의 프로듀서와 함께하는데, 프로듀서 말을 ‘백 프로’ 듣는 중이라고 한다. 안 그러면 한풀이지 가수로서 옳은 태도가 아니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중장년층에 맞추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요즘 중장년층도 디지털 세대에 맞춰졌기 때문에 젊은 세대에 적응해야 해요. 요즘 중장년층은 살기가 힘들어요. 꼰대가 돼서는 살 수가 없으니까.(웃음)”
젊은 세대와 아무런 만남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인터넷을 하고 쇼핑도 해야 하니 요즘 세대에 적응하며 살 수밖에 없다. ‘야, 내가 사는 세상은 따로 있어. 네가 사는 세상은 찰나적인 거야’라고 생각하면 ‘꼰대’가 된다는 것이다. 시니어로서 요즘 세상과 마주치는 법을 선선히 받아들인 그의 모습은, 자신이 추구하는 디지로그적 인간에 한층 가까워 보였다. 가수 임백천의 잔잔하고 자연스럽고 가식 없는 목소리와 만나게 될 새로운 노래가 기대될 수밖에 없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이야기를 노래할 거예요. 올가을까지 완성하는 게 목표입니다. 노래 연습과 기타 연습은 꾸준히 하고 있고요. 그런데 기대하지 마세요.(웃음)”
늘 이렇게 여운이 있다. 그래서 여백이 있는 임백천인가 보다.
지난 2018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국내 미술평론가 37인에게 한국근현대미술의 대표 작가를 물었다. 1위는 한국추상미술의 개척자인 김환기(1913~1974)가 차지했다. 2위는 백남준, 3위는 박수근이었다. 대중의 갈채를 받는 화가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미친 듯한 집중력과 놀라운 다산성을 특징으로 지닌다. 김환기, 그는 창작 에너지를 이미 과도하게 소비하고도 허기로 괴로워 여분의 에너지까지 또 소모하기 위해 광분한(?) 화가이지 않았을까.
김환기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는 수필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김용준(1904∼1967)은 이렇게 썼다. “그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김환기의 모든 일상과 모든 생각, 모든 시공간이 예술이었다는 얘기?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환기미술관은, 우리가 눈먼 지지를 보내도 무방할 게 틀림없는 김환기의 작품을 숱하게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의 유화, 드로잉, 구아슈, 오브제 등 2000여 점의 작품과 유품, 저서, 편지, 다큐멘터리 사진 등속을 소장한 미술관이니까. 명망에 걸맞은 걸작들, 그리고 유품들에 서린 일상의 흔적과 사유를 만날 수 있어 즐겁고 값진 공간이다.
북악산과 인왕산이 겹으로 품을 벌려 사람들을 보듬는 곳. 봄이면 산벚꽃, 개나리, 진달래 등 온갖 어여쁜 꽃순이들이 맨발로 우르르 달려올 듯 반색하는 산동네. 자연 풍치로 낙원을 꾸려 서울에서 드문 이색 지대인 부암동이다. 환기미술관이 이 부암동에 있어 찾아가는 발길이 가뿐하다. 짙푸른 산자락 갈피에 그림엽서처럼 곱상하게 꽂힌 작은 집들과, 저 너머가 문득 궁금해지는 언덕길, 그리고 골목골목에 감도는 의외의 적막감이라니. 이렇게 슬슬 걷기에 좋은 길의 안통, 주택가 고즈넉한 곳에 환기미술관이 있다.
대문을 들어서자 흙 마당이다.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흙내가 훅 끼치려나. 서울에서 토속적인 시골 마당을 보게 되다니. 요란한 이방에서 구수한 고향 원주민을 만난 듯 반갑다. 김환기의 정신을 담은 미술관의 마당답게 자연스런 서정이 깃들어 정겹다.
부정형(不定形)의 경사진 터에 들어앉은 건물은 석 동이다. 본관과 별관, 그리고 달관이 저마다 상이한 형상을 가지고 공간을 분할한다. 넓지 않은 터전에 건물 셋이 있으니 여백이 부족해 옹색할 만도 하지만 층계로 유도되는 동선의 다변성으로 활달하다. 나무 정원의 푸름이 주는 생동감으로 헌칠하다. 건물들의 외양은 언뜻 보면 상자처럼 단순하다.
그러나 일단 기능성을 극대화한 건실한 풍모이며 섬세한 미학이 입혀져 당당하다. 본관의 구성과 디자인은 특히나 옹골차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풍색이다.
환기미술관 설립을 주도한 건 김환기의 아내 고 김향안 여사. 돌아보면 모든 게 사랑이자 백년동맹이었나? “한 사람이 사라졌을 뿐인데 온 우주가 텅 빈 것 같다.” 김향안은 사별의 허탈한 심경을 그렇게 토로했다. 그리고 홀로 남은 생애 중에 해야 할 오직 유일한 일은 남편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에 있다는 양 집념과 뚝심을 다해 미술관을 건립, 1992년에 개관했다. 미국에서 살았던 김향안은 소장하고 있던 남편의 모든 작품을 유럽의 이름난 미술관에 줄 계획이었단다. 그러다 생각을 바꿔 한국에다 아예 미술관을 지어 기증하기로 하고 ‘환기재단’을 만들어 일을 추진했다. 이렇다 할 독지가 하나 없는 상황에서 틈틈이 김환기의 작품을 팔아 자금을 조달했다.
“사람을 울릴 수 있는 미술이어야 한다”
설계자는 재미 건축가 우규승. 콜롬비아대학 유학생 시절부터 김환기 내외를 부모처럼 섬겼던 인물로 김환기의 일기에도 나온다. 과연 어떤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길 것인가. 김향안은 숙고했으리라. 김환기의 분신에 해당할 미술관이니 무엇보다 김환기의 삶과 예술을 잘 이해하는 사람을 찾았으리라. 기술의 집적이면서 예술까지 발현되는 건축물, 김환기의 작품과 혈연처럼 상통하는 미술관. 김향안이 지향하고 우규승이 추구한 건축은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 테다. 이 미술관은 1994년 ‘김수근 건축상’을 받았다. 주변 자연에 순응하고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 건축의 품새, 내부 전시공간의 변화감과 탁월한 전시기능 등을 높이 평가받았던 거다.
김환기는 어떤 화가였나. 밥 먹고 잠을 자는 시간 외엔 온통 그림과 맞붙어 산 인물이었다고 한다. 미술 작업으로 삶을 실감하는 감관의 소유자? 주로 작업실에 붙박이 장롱처럼 붙어살았으니 창작의 충일감이 그의 붓을 노래하게 하고 춤추게 했으리라. 열정, 또는 탐욕스러울 지경의 창작 욕구 자체가 그의 재능이었을지도. 인간사의 모든 경향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예술가는 남다른 노력으로 고귀한 종(種)의 반열에 오르며, 고귀한 영혼은 매너리즘에 사로잡히지 않아 진취적이다. 지금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혜안과 용기. 이것이 김환기라는 예술이 보유한 특별 자산이지 않을까.
르네상스적 지성인이었던 그는 면밀한 성찰과 민감한 촉으로 자신을 읽고 미술을 해부했다. 그러면서 시대의 지도를 읽어 가야 할 좌표를 스스로 찍었으니 그를 일러 ‘한국 현대추상미술의 선구자’라 한다. 독자적인 추상미술의 완숙한 경지에 도달하기 이전에 그가 섭렵한 구상과 반추상의 여정 역시 탁발한 것이었다. 초기의 구상 작품은 다분히 서정적이고 감각적이어서 빼어났다. 이후 달항아리, 학, 매화 등 한국의 민족 정조를 표상하는 소재들을 통해 한결 현대적인 작풍을 시도했고, 마침내 무수히 많은 점을 찍어 그린, 이른바 전면점화(全面點畵)로 순수추상의 극점에 도착하면서 세계적인 작가의 대열에 들어섰다. 조형적 변신을 관습으로, 신세계적 회화 언어의 개발을 본분으로 삼아 거둔 결과물이었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객관에서 주관으로, 현상에서 본질로, 해석에서 관조로, 김환기는 그런 관점 이동을 통해 세상을 더 깊고 넓게 보고자 했나보다. 순수추상으로의 질주 경위를 알게 하는 그의 진술이 여기에 있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라는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보라.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환기미술관은 해마다 두 차례 김환기 기획전을 펼친다. 올 하반기 타이틀은 ‘수화시학’(樹話詩學)전이다. ‘수화’는 김환기의 호. 영리한 애호가들이여, 시에도 조예가 깊어 시적 상상력으로도 그림을 그렸을 김환기의 기재(奇才)와 문재(文才)를 그림에서 명민하게 찾아보시라! 미술관의 기획 취지는 그런 것일 게다. 사실 김환기는 상당한 분량의 시와 산문을 남겼다. 시로써 먼지와 소음에 미만한 세상을 관조했고, 시어의 유희와 조탁으로 예술정신을 표출했다. 그는 “미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사람을 울릴 수 있다”는 거였다. 김환기의 글쓰기와 시학은, 자신의 그림에 최루성(催淚性) 감흥 요소를 어떤 방법으로 주입할 것인가에 관한 모색의 과정에서 나온 게 아니었을까.
김환기의 눈은 망원경이나 현미경이 장착된 눈? 그는 세심하게 멀리, 혹은 깊숙이 바라보았다. 비 내리는 날의 전차 내부 풍경을 쓴 다음 글을 보면, 그의 유심한 관찰엔 허비가 없고, 그의 회화정신은 일상에서 무르익은 내공의 산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전차를 탄 승객들이) 짚고 앉은 우산에선, 빗물이 흐르던 정거장까지의 거리 여하에 따라서 가늘게, 굵게, 짧게, 길게, 강하게, 약하게, 리듬 있는 속력을 가지고 물이 흐른다. 선(線)이 가고 오고, 멈추고 흐르고, 곧게 혹은 휘어지고, 서로 뭉치었다 헤어졌다. 인간의 무연(憮然)한 이 합작에서 나는 놀라운 구성미를 알았고, 회화정신으로 돌아가 보기도 한다.”
겉볼안이라고, 겉만 보고도 속을 알 수 있다는 얘기가 있지만 환기미술관 본관의 속은 겉보다 웅숭깊다. 군더더기 없이 명증한 구조로 아름답다. 모든 구성이 김환기를 향한 일종의 헌화인가? 설계자는 위대한 화가의 작품에다 건축의 궁합을 맞추기 위해 진땀깨나 쏟았겠다. 이번 기획전엔 대형 전면점화 10여 점을 비롯해 모두 200여 점을 내걸었다. 김환기 작품의 심원한 숲에선 새가 날고 달이 뜬다. 자연의 숨결이 스멀거리고, 안도할 만한 적막감이 선(禪)처럼 광활한 뉘앙스를 풍긴다. 불멸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시리즈’를 보라. 강력한 자장을 발산한다. 화가는 점점이 찍은 무수한 점으로 삶과 사랑을, 자연과 순리를, 해탈과 우주를 이야기했나? 어떻게 보든 무방할 테다. 점 하나하나를 세포 입자로, 그리움을 기록한 엽서로, 도통한 나한(羅漢)의 눈알로, 혹은 우리가 끝내 돌아갈 저 밤하늘의 별로, 그저 이렇게 저렇게 보더라도 답일 거다. 분명한 건, 어떤 거대한 질서가 응축된 하나의 소우주로 다가오는 그림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