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기가 오른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피아노 선제공격이 먹혔다. 임수정이 바로 옆에서 노래하고 내가 피아노 반주를 했다. 이슬 같은 여자 임수정과 참이슬을 마주하고 흥이 돋는 밤을 보냈다.
“무작정 당신이 좋아요~ 이대로 옆에 있어주세요~” 이 노래가 TV에서 흘러나올 때 나는 가사 그대로 무작정 임수정이 좋아 죽었었다. 이 노래가 하루에도 몇 번씩 라디오로 흘러나오던 그녀의 전성기 시절 피가 끓는 청년 이봉규는 마치 그녀가 나에게 옆에 있어 달라고 애타게 원하고 있는 줄 착각하고 입을 헤~ 벌리고 넋을 놓은 적이 많았다.
중년이 되어서도 “임수정은 어디서 뭘 하고 지낼까?” 궁금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에 배철수가 진행하는 ‘콘서트 7080’에 오랜만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을 보곤 깜짝 놀랐다. “아니 어쩜 나이를 먹어도 아직도 이슬 같은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까?” 오늘 임수정을 만나고는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조그만 선술집에서 만나자마자 그녀에게 대뜸 물었다. “아직도 이슬 같은 비결이 뭡니까?” 그녀는 그런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일까? 담담한 표정으로 “‘참이슬’을 많이 먹어서 그래요”라고 받아치며 소주병을 능숙하게 흔들고 딴다. 정확한 주량은 말하지 않았지만 “남들 마실 만큼은 마신다. 어지간해서 잘 취하지 않는다”고 믿기 힘든 말을 던진다. 의아한 반전에 한량 이봉규도 움찔하고 말았다.
이렇게 시작한 술자리가 2차까지 이어지면서 한바탕 무르익어갈 무렵에서야 눈치를 챘다. 술도 약한 편은 아니지만 정신력이 강해서 절대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질 않는다는 걸. 임수정 같은 아름다운 여인이 술자리에서 흐트러지면 늑대들은 아마 제정신 차리기 힘들 것이다. 어려서부터 약간 틈만 보이면 자신에게 남자들이 달려든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본능적으로 자기방어가 몸에 배어 있다. 특히 술자리에서는 더욱 철저하다. 인터뷰하는 나와의 술자리도 매니저인 그녀의 사촌 동생이 옆자리에 딱 붙어서 경호했다. 매니저가 사촌 동생인 점도 아마 철저한 자기관리의 하나일 것으로 짐작된다.
여전히 매력적인 임수정
이자카야에서 소맥 폭탄주로 한껏 흥이 오른 우리는 2차로 피아노가 있는 라운지로 자리를 옮겼다. 젊은 시절 꿈에 그리던 임수정을 바로 앞에 앉혀놓고 나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취기 때문에 용기를 냈지만 내심 그녀에게 피아노를 치는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평소 TV에서 도발적인 톤으로 윽박지르는 이봉규의 거친 표정을 많이 보아왔던 임수정은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보면서 나의 노래를 경청했다. 내친김에 그녀를 무대로 불러냈다.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른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의 피아노 선제공격이 먹혔다. 그녀가 바로 옆에서 노래하고 내가 피아노 반주를 했다. 네다섯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던 20여 명의 손님들은 환호했다. 나의 손놀림은 평소보다 더 들떴고 힘이 들어갔다.
가슴은 뿌듯했고 온몸의 마디마디는 ‘연인들의 이야기’ 음절에 따라 춤췄다. 노래가 끝난 후 박수가 터져 나오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멀리 떨어진 바텐의자에서 슬며시 웃으며 박수 치는 내 아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인터뷰하면서 나는 임수정에게 내 아내를 소개했고 아내는 인터뷰에 방해되지 않도록 저만치 바텐의자에 앉아 관람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임수정도 무장해제하고 나와 2차까지 상당히 마실 수 있었고 또 노래까지 부른 것이다. 대중가수가 조그만 라운지에서 노래를 한다는 것은 큰 인심을 쓴 것이나 마찬가지. 나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고 거기 오신 손님들에게 엄청난 서비스를 제공한 셈이다. 어쨌거나 그날 밤은 황홀한 밤이었다.
그녀는 왜 갑자기 사라진 걸까?
임수정은 여고 재학 중 미인대회에서 포토제닉상을 수상하면서 모델로 먼저 데뷔했다. 모델 활동을 하면서도 그녀는 가수와 배우를 하고 싶은 꿈이 있었다. 그러던 중 작곡가 계동균을 만나면서 그녀의 인생이 달라졌다. 계동균과 작사가 박건호 두 사람은 임수정의 외모와 음색에 딱 어울리게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노래를 만드는 데 의기투합했다.
1982년 서라벌레코드에서 발매된 앨범의 타이틀곡 ‘연인들의 이야기’ 연주곡이 그해 방영된 KBS2 드라마 ‘아내’의 OST로 삽입되었는데 발칵 뒤집혔다. 드라마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자 방송국에 이 노래에 대한 전화와 편지 문의가 빗발쳤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와 두 명의 여성이 엮어가는 기구한 스토리가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데 ‘연인들의 이야기’ OST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앨범은 발매 몇 달 만에 30만 장이 넘는,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음반 판매 기록을 세웠다. 뒤돌아보면 미처 준비도 안 된 임수정에게 벼락스타의 자리는 쉽지 않았다. 그녀는 이와 관련해서 “한번은 탤런트 강부자 씨가 슬픈 노래인데 왜 웃으면서 노래를 하느냐고 핀잔을 줄 정도로 준비가 안 됐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이제 나이를 먹고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니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런 시절을 겪고 난 후 임수정은 노래나 삶의 철학이 원숙해졌다. “최근에 강부자 씨를 만났더니 노래가 확 달라졌다고 칭찬을 해줬다”며 자신을 스스로 평가했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당시에는 별의별 소문이 난무했다. 배우 정윤희와 맞먹는 외모의 소유자이고 한창 인기를 누리던 임수정이 갑자기 사라졌기에 호사가들은 소설을 쓰면서 입방아에 올렸다.
그녀가 사라진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당시 임수정에게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이 한꺼번에 밀어닥쳐서 젊은 나이에 감당할 수 없었다. 일종의 현실세계로부터의 도피였다. 30만 장의 앨범이 팔려나간 ‘연인들의 이야기’에 이어 1985년 ‘사슴 여인’이란 곡을 내놓았는데 그 가사가 문제가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나는 밤거리에서 사랑을 먹고 사는 사슴 여인”이라는 가사가 직업여성을 뜻한다며 방송사 심의에 걸려 노래가 전파를 탈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무렵 임수정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레코드사 이적 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힌 것이 결정타였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닥치면서 여린 성격의 임수정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모든 걸 다 던지고 198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성에 대한 비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견디기 힘들었다. “너무 비주얼만 강하고 오디오가 약하지 않느냐?”는 말을 감당하기엔 어린 나이였고 마음의 상처가 깊었다. “고생 끝에 정상의 자리에 올라간 분들은 소중하게 그 자리를 지켜내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정상에 올라가다 보니까 소중함을 잘 몰라서 공백기를 갖게 된 것 같아요”라고 그녀는 나이를 먹은 지금 뒤늦게 밝히고 있다.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사실 임수정은 뛰어난 가창력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청순한 목소리와 그녀만의 독특한 비브라토(vibrato)는 상당한 음악적 가치가 있었다.
임수정이 가창력이 없다는 비판은 일종의 어깃장이다. 음악에 정석이 어디 있을까? 어떤 목소리와 창법이 노래를 잘하는 것일까? 수치로 계량화된 것도 없고 그저 당시의 유행과 통론에 치우쳐 마음에 안 든다고 비판하는 군중심리의 일종이다.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가 대중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으니 그녀의 실력을 인정해줘야 한다. 대중이 선택한 음악이고, 대중이 사랑한 가수다. 거기에다 이슬 같은 청초한 외모는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임수정의 매력이다. 음악의 선진국이라는 미국과 유럽에서도 가수의 외모는 아주 중요한 자산으로 여긴다. 심지어 스포츠인과 정치인의 외모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임수정은 제2의 전성기를 꿈꾸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추억을 무너트리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20대 때 제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들에게 실망을 안겨드릴까봐 많이 망설였지만, 팬들이 ‘감성가수’ 하면 ‘임수정’ 하고 바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꿈이에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노래를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고 예쁜 얼굴은 더 상기되었다.
100세 시대다. 팬들도 나이를 먹고 가수도 함께 나이를 먹는다. 70세에 아직도 전 세계 무대에서 매력을 발산하는 ‘올리비아 뉴튼 존’보다 임수정은 열다섯 살이나 어리다. 그녀의 전성기는 이제부터다.
시골에 내려가 살기를 원하는가? 그러나 시골에 거처를 마련할 실력이 여의치 않은가? 빈손인가? 걱정 마시라. 찾다 보면 뾰족한 수가 생긴다. 일테면, 재각(齋閣)지기로 들어앉으면 된다. 전국 도처에 산재하는 재실, 재각, 고택의 대부분이 비어 있다. 임대료도 의무적 노역도 거의 없는 조건으로 입주할 수 있다. 물론 소정의 면접은 치러야겠지만 당신이 남파된 간첩이 아닌 한 딱지맞을 일은 없다. 폐교를 빌려 쓰는 방법도 고려할 만하다.
서양화가 원덕식(46)씨는 산골 폐교를 빌려 살고 있다. 귀촌한 지 어언 6년이 지났다. 그녀 곁엔 동화작가 노정옥(49)씨가 그림자처럼 동행한다. 이들은 서울에서 뜨거운 연애를 하다 부부 사이로 발전했다. 결혼식은 이곳 폐교 운동장에서 치렀다지. 귀촌의 첫 장을 혼례로 기록한 셈이다.
원씨 내외는 별반 손에 쥔 것이 없는 채로 산골에 들어왔다. 맨몸으로 신접을 차렸다. 온몸을 다해 귀촌 초기를 개척했다. 수천 평 부지에 들어앉은 낡은 폐교를 부부 단둘이 덤벼들어 단장을 하길 날마다 반복했다. 첫해 엄동엔 난방이 안 돼 냉장고보다 찬 사택에서 덜덜 떨며 밤잠을 자야 했다. 살을 에는 추위를 덜기 위해 방 안에 텐트를 치고 선잠을 잤다는 게 아닌가. 도깨비 나올 듯 뒤숭숭한 교사를 고치고 때우고 꾸미고 칠하는 일도 고스란히 부부의 몫이었다. 강철 같은 기세로 운동장을 뒤덮고 우르르 들솟는 풀들을 뽑는 일은 신역이 자심한 반면 좀체 표가 나질 않더란다. 이래저래 고역에 고난에 고심이 첩첩 겹쳤겠지. 신혼의 달콤한 훈김이 시련을 덜어줬을 법하지만, 제주도로 유배를 당한 추사도 아닌 것을, 어쩌자고 으스스한 폐교에 둥지를 틀었단 말인가? 원씨의 얘길 들어볼까.
“시골생활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처음엔 많이 염려했어요. 과연 잘 살 수 있을지, 견뎌낼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이 많았죠. 하지만 그런 근심에 사로잡힐 겨를조차 없이 온갖 일에 매달려야 했어요.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시설을 고치거나 운동장의 풀을 뽑아내는 일들이 화급했으니까. 몸으로 부닥쳐야만 하는 그런 일들은 예상보다 훨씬 힘들었어요. 그러나 잘 견디며 지내왔어요. 남들이 보기엔 무모하거나 철없는 귀촌일 수 있겠지만 저희에겐 뚜렷한 목적이 있었으니까요. 폐교의 너른 교실 공간을 손질해 미술 작업실로 쓰자, 그것으로 작품에만 매진할 여건을 조성하자는 게 귀촌 동기였거든요.”
글쟁이에겐 골방에 컴퓨터 하나면 그만이지만, 화업(畫業)엔 널찍한 공간 확보가 필수다. 서울의 임대료는 비싸다. 화가들이 그래서 흔히들 교외나 시골에 작업실을 마련한다. 폐교를 임대해 활용하는 이들도 많지만, 수년 안짝에 철수하는 사례도 흔하다. 원씨 내외도 초기 한때엔 서울로 되돌아가는 문제를 놓고 갈등을 했더란다. 주거 환경이 너무도 열악하고, 덩치 큰 폐교의 안팎을 보수하는 일이 버거워서였다. 그러나 서서히 자리가 잡혀 이젠 정착에 이르렀다.
부부는 미친 듯이 창작에 진력할 작정이었다. 남편은 글을 쓰고, 아내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치열하게 하자는 게 귀촌의 목적이자 초야에 건 약속이었던 것. 그러나 다소 길이 달라졌다. 마을 주민들을 끌어들인 ‘생활문화공동체사업’을 펼쳤다. 관이 행하는 마을 사업 공모전에 응모,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면서부터였다. 부부는 마을 안길에 미술 조형물을 설치했다. 교사 안에 소규모의 농업박물관도 개설했다. 주력 사업은 주민들에게 그림 그리기나 시 쓰기, 도자기 만들기 같은 걸 가르쳐 전시회를 여는 일이다. 반응도 성과도 좋았다지.
소외된 촌로들을 공방으로 끌어들이다
주민의 대다수는 노인들. 평생을 두더지처럼 땅을 파며 살아온 농부들. 그들에게 글과 그림이란 생판 생소한 딴 세상의 물건이기 십상이다. 실상이 그렇지만 노인들은 손수 만든 작품으로 전시회까지 여러 차례 흐뭇하게 치렀다. 도시에 번성한 문화 예술은 좀체 시골에 손을 내밀지 않는다. 원씨 부부의 행장은 이 점에서 가상하다. 소외된 촌로들의 고즈넉한 삶을, 파묻힌 기층문화를 수면 위로 돋우는 역할을 했으니 말이다. 눈여길 건 노인들을 모아들인 원씨 부부의 출중한 사교 능력. 그들은 배타적이거나 고독한 노인들을 폐교의 공방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였다.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
“시골 어머니들의 삶은 참 고달파요. 겨울 한철을 빼곤 늘 농사일에 매여 살죠. 새벽에 들에 나갔다가 저물어서야 귀가하는 일상을 지켜보면 안쓰러워요. 얼굴엔 주름투성이이고, 손발은 갈퀴처럼 거칠고, 벌레에 물린 자국으로 온몸이 얼룩지고, 그러면서도 강인하고 씩씩하고요, 가슴 찡해지는 모습이죠. 그런 어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자주 접촉하고 수시로 스킨십을 하고 그랬어요. 애교도 부리고, 장난도 치고, 옥희씨! 순자씨! 그렇게 이름도 불러드렸고요. 스스럼없이 다가가 다정한 관계를 맺었어요.”
“예술을 한다고 외돌아 앉아 오불관언식 처세를 했다면 미운털이 박혀도 야무지게 박혔겠죠? 이웃을 마주칠 때마다 인사만 참하게 잘해도 기특하다는 평이 돌아오는 게 시골이죠. 툭하면 벌어지는 마을 술판에서의 호출에도 가급적 득달같이 달려가는 게 현명한 처신이고 말이죠.”
“술자리 참석은 남편의 전공 분야입니다(웃음). 마을의 갖가지 경조사에도 부지런히 찾아다녔어요. 내 부모 대하듯 어르신들의 얘기를 경청하고 존중하는 버릇도 남편의 처신에 배었죠. 괜한 참견이나 잔소리에도 토를 달기는커녕 고맙게 받아들였어요. 덕분에 소통이 쉬웠던 것 같아요. 음, 복된 관계랄까, 일찌감치 저희는 자식처럼 따뜻한 대접을 받으며 살아왔어요. 이런 정황 하에 마을공동체사업을 원활하게 전개할 수 있었습니다. 흔히들 시골의 부당한 텃세를 운운하지만 저희는 그런 조짐조차 느끼질 못하고 지냈어요. 텃세란 귀촌자의 처신 여하에 달린 문제이지 않겠어요?”
“세태란 야박해서 내 안의 이기적 유전자를 발동하지 않고선 남에게 당하거나 밀리기 십상이죠. 날이면 날마나 피 튀기는 복싱이 벌어지는 게 서울이라는 사각 링일 뿐일까? 시골의 풍정은 안도해도 좋을 만큼 평온한 거예요?”
“도시의 인간관계란 대체로 메마른 계산 중심으로 흘러요. 시골은 좀 달랐어요. 그 머릿속에 계산이 전혀 없는 건 아니겠지만, 시골 할머니들의 태도엔 순응이랄까, 순수랄까, 그런 기본 정서가 농후하게 서려 있어요. 그러나 내면엔 아픔, 슬픔, 상처가 가득 고여 있죠. 개인의 꿈은 접고, 고단한 시골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억지로 살아온 한평생에 관한 한(恨)! 할머니들의 이 억압된 꿈과 깊은 한을 주제로 한 그림 작업, 요즘 저는 거기에 몰두하고 있어요.”
원씨는 알아주는 눈들이 많은 화가는 아니다. 주변의 촉망을 한 몸에 받는 일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죽을 여자도 아니렷다. 그림을 평생의 본분사로 삼았으니 말이다. 그녀가 진정 남김없이 열정과 깡을 다해 작업에 임하는지는 그녀 자신만이 알 일이겠지만, 미술을 위해 귀촌을 결행했으니 그녀 내부엔 나름 큼직한 사이즈의 포부가 들어 있을 테지. 최근엔 해외 아트페어에서 할머니들의 고달픈 노년에 서럽게 잔존하는 여성성을 주제로 한 작품 몇 점이 팔려나가기도 했다. 그녀는 이를 의미심장한 신호로 읽는다. 비로소 작풍의 방향을 찾았다는 안도감에서다. 아울러 이를 귀촌의 선물로 간주한다. 마을 할머니들과의 애정에 찬 교제의 산물로 여긴다.
상처에서도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자연으로부터도 많은 걸 얻었다. 다채로운 걸 느끼고 배우고 담았다. 자연이란 흔연한 사랑을 닮아 조건 없이 준다. 수업료를 받지 않고 강좌를 펼치며 음성을 내지 않고도 메시지를 전달한다. 산봉우리에 오르면 그 높음을 배울 수 있으며, 물길을 만나면 그 맑음을 배울 수 있다. 소나무에서는 그 푸름을, 달에서는 그 밝음을 배울 수 있다. 한적한 시골의 삶에도 남모를 부침이 있고 일희일비가 교차하는 법. 갈등과 괴로움 없이 삶을 건널 수 있던가. 마음이 쑥대밭처럼 뒤엉킬 때면 원씨는 자연 풍경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게 자연의 품에 안겨 살아가는 귀촌 생활자의 특권이라는 것.
“사람을 보듬어주는 자연을 느끼며 살아가는 게 만족스러워요. 도시에선 좀체 만나기 어려운 새소리, 물소리, 달과 별, 숲과 적막, 이런 것들이 들끓던 고민들을 순식간에 잊게 해주는 거예요. 작업이나 일로 힘들었던 하루가 저문 깜깜한 밤에 운동장에 나가면 허공에 모인 별들이 빛을 뿜어요. 초롱초롱 빛나는 그 별들을 바라보면 저절로 피로가 가시고 근심이 달아나요. 남편과 다투고 난 뒤의 상심도 씻겨나가죠.”
“자주 다투세요? 이는 우문이리. 밑바닥까지 드러난 감정 충돌이 잦은 게 부부 사이라서. 결혼 자체가 짐이나 멍에일 수도 있고요. 그럼에도 왜들 결혼을 할까(웃음).”
“소소한 다툼이 생기곤 해요. 이건 어쩌면 긍정할 만한 기회이기도 해요. 서로 간에 미처 몰랐던 상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오해에서 벗어나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찬스이기도 하고요.”
고적한 시골에서 날마다 24시간 부부가 붙어 사는 삶엔 창작만큼이나 각별한 재능이나 내공이 요구될 수도 있겠지. 사람이란 천성적으로 ‘삐딱이’가 아니던가. 본능의 밑뿌리인 에고이즘과 ‘귀차니즘’이 불러들이는 불협화음으로 소소한 상처를 주고받는 게 부부 사이 아니던가. 그러나 상처도 인간 내부의 자연이다. 상처에서 애틋한 싹이 돋고 잎이 나오고 꽃이 핀다.
“허황한 욕망과 소비 중심으로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에서 살았다면 부부 관계가 한결 단조로웠을 것 같아요. 귀촌 덕분에 남편의 내면을 더욱 깊이 있게, 또는 성숙한 눈길로 바라보게 되었죠. 남편은 섬세하고 다정해요. 욱하는 성질은 좀 있지만 독한 게 없어요. 요리도 잘하고, 늘 내 편이라는 게 고맙고 좋아요. 자연이 주는 안정감 같은 걸 남편에게서 느낍니다.”
“두 분, 가진 것 없이 귀촌을 해 온몸을 쓰는 노역으로 폐교를 가꿔 활달하게 살아가고 있어요. 소박하고 간소한 살림, 수굿한 태도, 긍정심, 이런 것들이 보기에 좋아요. 소유에 대한 예찬과 경쟁이 극에 달한 이 세속에서 그렇게 순하게 살기란 쉬운 게 아니라서.”
“틀에 박히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삶,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게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걸 귀촌을 통해 확인하고 있지요. 점점 더 미니멀한 삶으로 가고 있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줄어들고 있어요. 훗날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여러모로 여전히 불편하고 어려운 점들이 많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이행하는 이 과정엔 회의가 없습니다.”
원씨의 언어는 정밀하거나 기민한 맛을 결여한 대신 유연하고 온순해 평화롭다. 아둔한 나의 머리엔 잡념이 술렁인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과연 실현 가능할까, 불가능할까.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이기나 할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찬 공기 가르며 새벽부터 서둘러 약속장소로 향한다.
액티브 시니어 과정 동기들의 평창동계올림픽 성공개최를 위한 응원 차 미리 탐방해 보는 방문길이다.
집합 시간 오전 7시.
집행부의 마지막 3시에 전해진 버스 2대에 분승하고 가는 인원명단과 좌석 배치도, 현지 날씨 영하라는 세심한 정보가 속속 들어온다.
날씨에 맞춰 내복, 모자, 장갑, 복장부터 시작해 간식까지 스케쥴 적어놓은 종이에 하나씩 체크하며 사방에서 꼭두새벽부터 서둘렀을 동기들의 부산함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곁에서 지켜보는 옆 지기에게 이것저것 부탁하고 확인 받는 2중 체크가 있었을 텐데 그분들은 외출하는 사람 새벽부터 기분 상하지 않게 하려 꽤나 긴장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조심해 다녀와요.”
휴~ 보내놓고 다시 꿈나라 가셔도 한참을 더 주무셨겠지.
환승 3번해야 하는 전철이 필자가 도착하면 바로 눈앞에서 출발하고를 계속한다. 머피의 법칙.
약속시간을 맞추려면 여유 있게 전철 간격시간도 챙겨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걸 보면 아직도 멀었단 생각을 해 본다.
그래도 지각한 적 한 번도 없는 걸 보면 습관 된 여유 덕을 보는 거겠지.
어렸을 때 덕과 예의 세상을 꿈꾸라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약속시간은 반드시 지키고, 말은 줄여 경청하고, 역지사지를 생활화 하라고 배운 그때 습관으로 굳은 때문일 것이다.
도착하니 10분 전.
인사 마치고 앉았는데 아침으로 제공될 김밥이 오질 않아 시간이 지체되어도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의 히히덕 수다로 어수선하다.
20분 늦게 출발 했더니 와~ 고속도로가 주차장처럼 행락객으로 꽉 차 만원이다.
맛있는 김밥과 생수를 배정받고 먹기 시작하니 좀 조용해지긴 했지만 거의 서 있다시피 하며 동서울 톨게이트까지 오는데 시간 다 잡아먹은 듯하다.
그래도 새로 뚫린 제2영동고속도로를 들어서니 뻥 뚫려 밥도 먹었겠다 생리도 해결하고 기지개라도 펴라 양평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다시출발 평창동계올림픽장 까지는 일사천리 단숨에 왔다.
시설 돌아보려는데 아직 마무리 안 된 곳은 볼 수 없어 대신 대관령 트레킹하기로 결정하고 난이도에 따라 A, B, C조로 나뉘어 3시간 후에 점심 장소에서 만나기로 하고 A, B조가 먼저 C조는 나중에 출발했다.
왼쪽 무릎이 안 좋은 필자는 대관령 고랭지 배추와 유기농 재료로 실습하는 김치체험장 내에 있는 쌍화탕 다리는 향이 가득 찬 카페에서 가져간 책을 읽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약 2시간 반 지나 C조가 내려와 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가질 않고 함께 먹으려 A, B조가 내려오는 지점으로 마중을 갔지만 좀체 내려오질 않아 1시간여를 더 기다려 합류했다.
대관령의 특식인 오징어와 돼지고기를 같이 만든 오삼불고기로 점심을 했다. 이곳이 오삼불고기로 탄생된 배경은 냉장시설이 안 좋을 때 동해안에서 잡은 오징어를 육지로 판매하러 가는 상인들이 대관령을 넘다가 맛이 간 오징어를 불고기에 섞어 끓여보니 맛이 괜찮아 시작하면서 부터라 한다.
오후 3시 반이 넘다보니 배들이 허해져 조용하지만 허겁지겁 끝냈고 바리스타인 분이 드립커피를 잔뜩 가져오셔 함께 음미하며 즐겼다
애초 시간보다 한참 늦은 시간에 출발하다보니 엄청난 정체를 뚫고 왔기에 서울에 늦게 도착했지만 오랜만에 동기들과의 여행은 추억으로 남기기에 손색없는 하루였다.
세상에는 수많은 문이 있다. 쪽문, 창문, 대문, 성문, 자동차문.....
이러한 문들은 살아가는데 있어서 아주 유용하다. 밖이 시끄러울 때는 창문을 닫으면 되고, 날씨가 더울 때는 베란다 문을 활짝 열면 시원한 바람이 방안에 들어온다. 또 도둑이 들어오지 않게 하기위해서는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면 된다. 이러한 문들은 손잡이나 문고리가 있어서 쉽게 여닫을 수 있고 밖에서도 남이 열 수 있어서 편리하다.
19세기 영국의 윌리암 홀먼 헌트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 중에 ‘등불을 든 예수’라는 그림이 있다. 한밤중에 정원에서 그리스도가 한 손에 등불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문을 두드리는 그림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두드리는 이문에는 다른 문과는 달리 문고리가 없다. 어떤 사람은 문을 잘못 그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이 그림은 ‘마음의 문’을 그린 유명한 그림이다.
사람의 마음에도 문이 있다. 그러나 ‘마음의 문’은 보통의 문들과 달라서 손잡이나 문고리가 없기 때문에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열 수가 없다. 마음의 문은 사람마다 각양각색이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아예 열어젖힌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꼭 닫힌 상태로 아무리 노크를 해도 열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 즉 마음의 문은 마음먹고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마음먹고 닫으면 열자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가지고 있는 특권 중에는 의사표현이나 전달 방법이 아주 다양하다는데 있다. 커뮤니케이션에서 경청이 중요하다는 것은 대부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막상 잘 실천되지 않는 것이 경청이다. 어느 교수가 대학생들한테 ‘대화’하자고 하니까 모두 자리를 피해버렸다고 한다. 그 교수는 항상 일방통행이었기 때문에 대화가 아니라 ‘대놓고 화딱지 내기’로 유명한 교수였기 때문이었다.
경청에서는 귀담아 듣는 자세가 중요하다. 조물주께서는 자신의 말 보다는 타인의 말을 잘 들으라고 '입'은 한개로 만드셨고, '귀'는 두개로 만드셨지만, 타인의 말 보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애들이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면 되지만, 듣는 것은 공자가 이야기한 이순(耳順)은 60년이 걸린다고 하였다. 경청은 리더나 위 사람의 덕목중의 하나다. 경청은 지위가 높아질수록, 나이가 들수록 꼭 필요한 습관이요, 밑으로부터 존경과 믿음을 줄 수 있는 마음가짐이다.
결국 내 마음의 문을 내가 먼저 열어야만 상대방도 이를 확인하고 안심하고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다. 마음의 문이 어느 정도 열려있느냐에 따라서 개인은 물론 가정과 직장, 사회 전체가 달라지고 세상은 많은 변화가 가능하다. 뒤엉클어진 사회적 갈등 문제나, 무한궤도처럼 서로를 마주만 보고 달리는 정치, 이분법(二分法)적 접근에 의한 사회의 많은 이슈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마음의 문을 자신은 굳게 닫아놓고 상대방에게 먼저 열라는 욕심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어느 날 인생 이모작을 잘 준비했다는 지인을 만나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의견의 일치를 본 부분이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엔 하고 싶었던 것을 하고, 좋은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또 죽을 때까지 공부를 멈추면 안 된다는 것. 하기 싫은 일이나 시험을 위해 하던 공부에서 해방되었으니 허락된 시간을 누리자는 생각이었다.
인문학 책을 함께 읽고 나눌 그룹을 찾다가 독서클럽은 아니지만, 글 쓰는 훈련을 하는 그룹이 있어 탐색 겸 백화점 문화센터에 갔다. 보통은 말 잘하는 사람이 글도 잘 쓰지만, 글을 잘 쓰는 사람 모두가 말을 잘하는 것 같지는 않다. 가끔 글은 좋은데 강의는 엉망인, 작가 반열에 오른 분을 만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잠깐 들어본 강의가 맘에 척 달라붙어서 계속 듣게 되었다. 입을 벌릴 때마다 주옥같은 박식함이 무슨 보석처럼 인생의 경험에 녹아 나오면 수업 내내 행복한 마음으로 강의를 경청하곤 했다. 3개월 12만원 정도의 비용으로 주 1회 1시간 30분씩 듣는 강의였다.
수필을 쓰고 퇴고를 거치며 글쓰기를 연마하는데 인간이 살아가며 경험하는 솔직한 표현들이 좋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이 따스함으로 가만가만 스밀 때는 저절로 눈이 감긴다. 게다가 마음에 드는 수필을 외워서 문학회의 ‘연간 행사’로 무대에 올라 낭송하게 되었다. 원하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처음엔 외운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요령은 그냥 반복해서 읽는 수밖에 없다. 어느 단계가 되면 저절로 외워진다. 외우다 보면 작품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고 또 독자에게 그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데 이 과정은 좀 힘들어도 얻는 것은 그 이상이다. 좋은 작품을 외우게 되면 글쓰기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부수적으로 발성, 호흡에 대해서도 기본 훈련을 하게 되어 발음이 정확해진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느낌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고, 무대 울렁증이 있는 사람도 있어서 열심히 외웠어도 보통 7분 정도 소요되는 중간에 잊어버리거나 어색해져서 진땀을 흘리기도 하지만 곧 익숙해진다. 한번은 남여 듀엣으로 아포리즘 고전 수필 낭송을 했었다. 조선 인조 때 문신으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한문 4대가의 한 사람인 ‘신흠’의 아름다운 수필이었다. ‘숨어 사는 선비의 즐거움’으로 한가로움과 풍류를 전하는 내용이었다.
필자와 남자는 함께 호흡과 감정을 조절하며 연습을 여러 번 했다. 작은 몸짓까지도 맞추며 우린 무대 위 완벽한 커플로 탄생할 참이었다. 그는 감청색 양복을, 필자는 양반가의 여인답게 하늘색 모시 저고리와 연청색 모시 치마를 기품 있게 받쳐 입고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무대에 섰다. 인사도 맵시 나게 연습한 대로 잘했다.
이제 마이크를 숨소리 같은 부담스러운 잡음이 나지 않도록 조절하며 낭창거리는 소리로 낭송을 시작했다. 그와 필자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선비의 멋스러움과 풍류를 살려가며 한껏 분위기를 고조시켜나갔다. 필자의 대사가 끝나고 그가 할 차례가 되었다. 시작을 잘하는가 싶었는데 아뿔싸! 이상하게 같은 대사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두 번쯤 그러더니 소리가 끊겼다. 난감했다. 필자는 그의 대사까지 외우지 못했다. 스토리가 연결되는 글은 잊어먹어도 비슷한 내용으로 이어나갈 수 있지만 이런 수필은 단락이 끊어져 있어 외우기도 어렵고 중간에 잊어버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 20개 정도의 단락을 각자 외우고 있었는데 단락의 시작을 찾아야 꼬이지 않고 술술 나오게 되어 있다. 그는 순간 당황했는지 단락의 처음부터 다시 낭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을 맺었지만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혹시 잊었으면 자연스럽게 다시 시작해도 사람들은 반복이겠거니 생각하기도 한다. 당황하지만 않으면 그럴 일은 별로 없다.
묵독이 아닌 낭독의 문화 즐기기
시는 글이 짧고 은유가 많아 청취자에게 전달이 쉽지 않을 때도 있지만 수필은 작가의 체험에서 나온 글이라 이해가 쉽고 공감이 잘된다. 그 대신 시보다는 외워야 할 분량이 많다는 어려움이 있다. 시와 비교해서 감정을 잘 살리면 즐거운 시간이지만 아니면 지루한 시간이 되기도 쉽다.
작품에 따라 무대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효과음악을 고르고 표정과 작은 몸짓도 연구하고 무대에 오른다. 작품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와 마치 새로운 연인을 만나듯 가슴이 뛰고 활기가 넘친다.
필자는 4년째 기획, 연출, 낭송을 즐겁게 하고 있다. 함께하는 회원(10명)과 1년에 두 번씩 공식무대를 만들고 외부 초청 낭송에도 응한다. 작가의 강연 때 그의 작품을 낭송해 강의를 풍요롭게 하기도 한다.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는 효과가 있다.
꼭 문학단체가 아니라도 격조 있는 모임에서 옛 선비들이 시조를 읊듯 시나 수필 낭송을 원할 때도 있다. 종종 감동한 관객이 끝나도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보람이다. 얼마 전 어떤 문학회 출판기념회에서 초청, 낭송을 했는데 70명 정도 모이는 조촐한 모임이었다. 그 모임 지도교수님의 대표작 낭송이 끝나자 교수님은 벌떡 일어나 젖은 눈으로 다가와 필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고맙다, 잘했다, 문우들은 그 작품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 작품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고 말했다. 낭송하는 시간은 마치 앞에 앉은 사람이 필자에게 눈을 맞추고 자신의 얘기를 진솔하게 털어놓는 듯하다. 그래서 몰입하면 깊은 내면을 함께 여행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수입은 낭송 작품당 보통 20~30만원을 받는다. 외우는 데 걸리는 시간이나 노력을 생각해서 그리 주시는 것 같다. 필자는 현재 두 개의 작품이 예약되어 있다. 하나는 피천득 기념 강좌에서 선생님의 작품 ‘보스턴 심포니’를 낭송하고, 또 하나는 일현수필문학회 송년회에서 손광성 선생님의 ‘누나의 붓꽃’을 낭송하기로 되어 있다.
작년 초, 딸아이의 남자 친구가 인사를 오겠다고 해서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2주 후 현대미술관 그릴에서 마주 앉았다. 어색하고 기분이 묘했다. 노트북을 펼쳐 몇 컷으로 정리한 자신의 풀 스토리를 전하는 예비사위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래도 비교적 차분하고 진솔하게 35년의 이야기를 전하는 표정이 진지했다.
만나서 심문하듯 묻고 답하는 자리보다는 온전하게 자신을 알리는 시간을 주는 게 좋겠다 싶어 필자가 주문한 것이 ‘나를 말한다’ 브리핑 PPT였다. 우리 아이와 결혼을 원한다면 예비 장인, 장모를 설득해보라는 일종의 작은 미션이었다고나 할까.
이후 까탈스러운 장모라는 주위의 비난이 있었다고 사위에게 전하니 나름 재미있었던 이벤트였다며 집안의 가풍으로 하잔다.
양가 부모 상견례가 걱정이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막막한 마음에 경험자들에게 물으니 형식적인 자리이니 인사 정도나 나누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 생각은 달랐다. 그동안 아들을 어떤 심정으로 키웠는지, 어떤 아이로 자라기를 소원했는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지 등등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자 모두들 극구 말렸다. 그러려면 너는 아예 상견례 자리에 나가지 말라는 충정 어린 겁박(?)까지 했다.
문득 ‘사돈끼리 그렇게 어려워해야 할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귀한 자식이고 사돈끼리 사이가 좋으면 아이들도 편할 텐데 왜 형식적으로 만나라고 하는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상견례 자리에서는 남편이 주로 이야기하고 필자는 경청만 하기로 했다. 그러나 두 시간의 상견례 만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딸아이에게 “입을 꼭 다물고 싸늘하게 앉아 계시니 시베리아가 따로 없었다. 겨울 왕국 지으시느라 애쓰셨다”는 원망 섞인 비난을 들어야 했다.
상견례를 마치고 나니 혼례가 실감이 났다. 남편도 딸아이가 시집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지 한동안 잠을 뒤척였다. 장인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 이해하겠다는 고백을 시작으로 35년 전 우리의 결혼식을 떠올리며 새벽까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결혼이 통과의례나 속물적인 거래가 되지 않으려면 정직하고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최소한 자신이 납득할 만한! 결혼 당사자는 내게 결혼은 무엇인지, 왜 그 사람이어야 하는지, 나는 상대에게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둘이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등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부모 역시 새 식구를 받아들이는 기준이 무엇인지, 자녀가 어떤 가정을 꾸리기를 원하는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인지, 그럼에도 결정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욕심을 내려놓고 다양한 경우들에 대해 고민해봐야 한다.
어느덧 딸아이의 결혼 1주년이 지났다. 여전히 재미있고 좋단다. 살아가면서 몇 가지 잘한 일 중 하나가 딸아이를 결혼시킨 것이다. 새 식구도 얻었지만 남편과도 변화가 생겼다. 부모이자 인생 선배로서 바람직한 부부의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기 시작한 거다. 조금은 성숙하고 의젓한 장인, 장모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다. 딸아이의 결혼으로 우리 부부를 비춰주는 거울이 생긴 것 같다. 사위가 아직도 낯설지만 결혼시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딸아이가 원하는 사람을 흔쾌히 맞아들인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어른다웠다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설레는 가슴으로 함께 꿈꿔나가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 아름답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알아도 모르는 척해야 할 때가 있다. 하얀 거짓말을 하는 경우와 같다. 인간관계는 대화가 주요 수단이다. 상대방이 신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는 마음 씀씀이가 필요하다. 분위기를 돋우기 위하여 어떤 유머를 하면 개중엔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이 나온다. “그거 알고 있는 이야기야!” 말을 한 사람은 맥이 풀리고 만다. 필자는 스마트폰 카메라 사진 강의를 한다. 어느 분이 쉽게 사진 편집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래서 상대방이 알아주면 좋은 유용한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 듣지도 않은 채로 유사한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하여 자기도 할 줄 안다며 시큰둥해하는 눈치였다. 더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앞의 예와 같은 사례다.
요즘은 유머가 세상을 이끌어가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재미있는 총각이 인기 있는 신랑감이듯 일상 대화에서도 웃음을 주는 내용이 곁들여져야 한다. 유머 두서너 개는 외우고 있으면서 순발력 있게 쓸 수 있으면 좋다. 작은 수첩에 빼곡히 적어 다니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유머를 잘 구사한다. 때로는 오래된 것이나 다른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을 이용할 때도 있다. 어지간한 우스개는 거의 알고 있기 마련이어서 상대방은 재미없어한다. 지나간 유머를 사용하면 당연히 관심을 두지 못한다. 이미 알고 있는 유머는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큰둥하며 팔짱을 끼기 마련이다. 그것을 때때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사는 것 자체가 노력이듯 삶의 모든 분야에서 향상이 요구된다. 인생 2막을 위해서 끊임없이 학습하며 2차 성장을 하듯 대화의 소재도 새로움으로 충전시켜야 한다. 자신의 내부 저장소에 쌓인 경험과 지혜의 활용도 있어야 하지만, 새로움으로 채워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즐겨보는 코미디 프로그램 방송을 시청해두면 도움이 된다.
반면에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는 적극적 자세도 필요하다. 자기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기를 바라듯 다른 사람의 말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자세가 절실하다. 나이가 들면 대체로 자기의 이야기에 더 열을 올리기 십상이다. 가끔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처음 듣는 얘기야, 재미있네!””라며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모르는 척하기도 한다. 좋은 반응인 맞장구를 치는 일이고 영어 표현으로 “리액션”이다. 이야기한 상대방을 배려해서다. 대화를 잘하는 기법의 하나가 상대방의 얘기를 잘 듣는 것이고 적극적으로 반응을 더하면 금상첨화다. 어느 유명한 분을 모실 기회가 있었다. 그분의 말씀을 열심히 경청만 하였다. 가끔 맞장구를 쳐 드린 것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당신은 참 대화를 잘하십니다.”라고 칭찬을 남겨주고 자리를 일어났다. 잘 듣는 것이 첫 번째의 대화기술이고 내용을 설사 알고 있다손 치더라도 처음 듣는 것처럼 시늉할 필요도 있다. 시니어에 꼭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꾸미는 것보다는 자연스러운 걸 좋아하는 편이다. TV 드라마도 너무 만든 이야기가 들어 있어나 판타지물보다는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즉 작가 김수현식 드라마를 좋아한다.
글도 단순하고 꾸밈없는 글을 좋아한다. 흔히들 기가 막힌 경치를 보면 한 장의 그림엽서 같다고들 하는데, 필자는 이런 표현도 별로다. 엽서 한 장으로 어찌 광대한 풍경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냥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정도가 좋다.
사람도 자연스런 사람을 좋아하는데 예를 들면 조영남씨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반대로 남편은 그런 나를 보고 미친 ×만 좋아한다고 흉을 본다. 또 솔직하고 담백한 말을 좋아해서 솔직하지 않은 사람과는 대화를 즐기지 않는다. 뭔가 감추고 있는 듯한 사람과의 대화는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아들이 어렸을 때 잠깐 알고 지내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돈을 많이 벌고 아들은 미국에 남기고 부부만 역이민을 온 아들 친구 부모가 있다. 그 부부는 가끔 우리에게 전화해서 식사나 하자고 하는데 몇 번 만나보니 자기네 이야기를 솔직하게 하지 않고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때운다. 도대체 우릴 왜 만나자고 했는지 모를 정도다. 그러면서도 우리 이야기엔 경청을 한다.
지난번에도 만나자고 전화를 해와 아들 체면을 봐서 웬만하면 나가자고 했지만 남편은 칼같이 끊고 거절을 했다. 우리 나이에 싫은 사람 만날 일 없다며…. 보수적이면서 반듯한 남편은 자신과 성향이 같은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 남편이 필자를 이야기할 때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표현한다.
필자는 숫자에 대한 기억력이 좋아 아직까지도 아들네를 포함한 온가족의 주민번호, 통장번호도 등 별의별 것들을 다 기억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깜빡깜빡하는 병이 있어 돌아서면 잘 잊는다. 물 먹으러 가다가 안경 벗어놓고 못 찾고, 신발 신다가 꼭 쓰고 나가야 할 선글라스는 잊어버리고 나가는 등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런 건망증이 늙어서 생긴 게 아니라 초년 시절부터 그랬다. 이 병 때문에 평생 동안 잃어버린 물건도 많다.
어릴 때부터 구박도 많이 받았다. 신은 하나를 주면서 다른 하나는 빼앗아가는 것 같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맞나보다. 깜빡병 때문에 남편한테 잔소리도 많이 듣고 구박도 많이 받는다. 우스갯소리로 우리 집 도우미 이모가 “아저씨, 언니 너무 구박하면 내가 장애인센터에 ‘장애인 학대’로 신고할 거예요”라고 말할 정도다(나는 10여 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 후유증으로 장애인이 되었다).
혹시라도 애인이 그랬다면 다~ 용서가 될 텐데 말이다. 세상의 모든 애인은 애처롭고, 모든 아내는 억척스럽다는 말이 있는데 난 애인이 아니고 아내다. 그렇게 심한 구박(?)을 받고도 건재하니 말이다.
하짓날 새벽 곁에서 자고 있는 아내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언제 저렇게 잔주름이 있었던가.
매일 매 시간 다른 어느 누구보다 많이 자주 본다고 자부하며 곁을 지켜왔어도 몰랐는데 갑자기 눈에 띄다니
서 있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바뀐다는데 혹시나 하고 발치로 옆구리로 옮겨 가며 바라봐도 보려고 해서 그런지 역시나 보인다.
가시덤불로 막아도 지름길로 온다는 흰 머리칼이 이겼구나.
오랜 연애 끝에 문서에 도장 찍고 맏며느리로 들어와 아이 셋 낳고 지지리 고생하는 자체를 아이 키우는 즐거움으로 퉁 치며 살았던 아내.
자신들이 좋다는 배필 토하나 달지 않고 승낙 해 아직 잡음 없이 무난한 삶 갖게 해줘 며느리 사위들에게 사랑 받으며 자주 찾아오는 휴일을 기다리는 엄마.
중학생 셋 초등학생 하나인 손자 손녀들에게 늘 공부하고 열심히 배우는 자세를 몸소 본이 되어주는 정신적 지주면서 절대 멘토인 스승 할머니.
두 식구 살면서 꼰대가 될 것이냐 어르신이 될 것이냐 물어보는 동반자.
친구들 연락에 순서 지켜 골고루 만나주고 함께 울어주는 듬직한 친구.
무엇하나 소홀한데 없이 묵묵히 중심 지키며 세상에 순응하고 철저히 준비하는 삶의 표본인 아내.
모든 게 부족하고 팍팍한 생활 속에서도 잠시 누가 무얼 하면 좋다는 말에 귀가 팔랑대 한눈팔려는 기미만 보이면 아이들 다 키워 보낼 때까지만 참으면 그 다음은 마음대로 하라며 오로지 아이들 건사하기에 올인 한 엄마.
이제 모든 걸 다 해 줬으나 단 둘이 남아 정작 기운도 없고 우리 몫은 없지 않느냐는 물음에 나를 못 찾은 것은 후회되지만 다시 그 일을 한다 해도 또 후회할 줄 뻔히 알아도 나는 다시 그 일을 하고 이렇게 후회하겠다는 아내.
인생의 정답이라는 게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잘 키웠지 않느냐
그거면 됐다 이 세상에 태어난 소명 중 내 일은 다 한 듯하다.
내 짧은 생각에 내게 또 다른 욕망은 욕심이니 가자 부르시면 기쁜 마음으로 가겠다는 아내.
내게는 아재나 꼰대가 아닌 어르신으로 사는 첫 걸음은 얼굴과 매무새가 정갈해야한다며 늘 양복과 넥타이를 추천한다.
시대를 리드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말수는 적게, 잔잔한 미소로 불치하문의 겸손을 갖추는 태도와 행동이 어르신일 것이란 확고한 개인소견.
상대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경청해 주고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잘 감지해 젊은이들 보다 한참 떨어지지 않도록 공부하며 어느 누구도 내가 아는 분야를 제외하곤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나서지 말라.
아재 꼰대 어르신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나에 대해 느끼는 것이니 답답하고 안타까워도 상대가 물을 때만 대답해 주도록 하라.
주름지고 쳐진 얼굴이야 흐르는 세월에 어쩔 수 없지만 그나마 가꿔야한다
나를 대신하는 게 내 얼굴이고 누구에게나 보여 지는 내 자신이다.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의외로 나를 모르는 경우가 대단히 많으니 거울 앞에서 얼굴을 자주 봐라.
한번 보고 두 번 세 번 볼 때마다 다른데 자주 볼수록 내 자존감이 커지고 보는 시간도 짧아진다.
찡그린 얼굴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밝고 맑은 얼굴을 만들자 한다.
아내 얼굴에 잔주름이 생겼다.
거울을 자주 보니 본인이 먼저 알 텐데 그 흔한 주사 한 방 안 맞았다.
더 자주 바라봐야겠다.
100세 시대의 행복경영 비결은 무엇일까. 단거리 경주가 아닌 마라톤 인생을 살아낼 새로운 설계와 순서는 어떻게 세워야 할까. 유필화(63) 성균관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는 마케팅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쌓아온 경영학계의 구루다. 뿐만 아니라 를 비롯해 , 그리고 최근작 에 이르기까지 인문학 고전을 경영학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해왔다. ‘100세 시대, 고전에서 배우는 인생 경영 지혜’를 듣고 싶은 생각에 인터뷰를 청했다.
대방동에 위치한 유 교수 서재의 섬돌엔 검정고무신 두 켤레가 정겹게 놓여 있었다. 유 교수는 부인(이기향 한성대 의류학과 교수)이 아침에 인터뷰 복장 코디는 물론 간식을 손수 준비해놓고 갔다며 미소를 지었다. 신혼 때부터 지금껏 수십 년간 변함없이 싸준 부인의 도시락 내조력을 들려주는 그의 얼굴에 일순 사랑과 감사가 환하게 번졌다.
인생은 60부터란 말도 있는데요. 교수님께선 예순을 기점으로 달라진 것이 있는지요.
“나눔과 베풂의 봉사활동이 내 삶의 비중에서 늘어났습니다. 60이 넘고부터는 경력과 일에 관련되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일에 에너지, 시간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이게 사실은 두 여인의 영향 덕분입니다. 어머님도 생전에 ‘늘 베풀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아내도 같은 말을 하는 겁니다. 덕분에 전혀 만나볼 수 없는 사람을 알게 되고, 접하지 않았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기업과 경영 문제에만 쏟던 관심을 기업 바깥의 세계로 돌리게 돼 좀 더 크고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 계층의 다양한 사람을 알게 돼 세상을 보는 균형감각이 키워지는 부수효과도 있더군요.”
사회봉사가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것은 개인의 단순한 느낌이나 추정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근거가 있다. 코넬대학의 행복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남을 돕는 사람은 자긍심을 고양시키고 자신의 삶을 통제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 간에는 정신이 노쇠해가는 속도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봉사활동은 더욱 건강한 정신자세를 지니게 하고, 이는 다시 건강과 삶의 만족을 증진시키는 ‘행복의 선순환’을 일으킨다는 게 연구의 골자다. 봉사는 이타적 행위일 뿐 아니라 이기적 행동이기도 하다.
인생 2막에선 성공보다는 행복이란 단어가 한결 실감 있게 다가온다고 다들 말씀하시더군요. 교수님께서는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요.
“‘행복이란 마음이 편한 것, 마음의 평정과 평온을 찾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사회에서 부러워하는 기업인을 만나보면 ‘성공하면 뭐해’ 하며 자조하는 경우도 많고요. 어쩌면 남이 부러워하는 정상에 오르는 것은 울 일이 많다는 것과 동의어라고나 할까요. ‘살아 있는 게 축복이고 숨 쉴 수 있는 게 기적’이라는 마음을 갖고, 일상을 감사히 받아들일 줄 아는 삶의 태도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조건의 충족이 아니라 그 수행 과정에 행복이 존재하지요.”
매일 참선과 명상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서재에 명상실까지 두고 있으시지요.
“마음의 평화를 위한 제 수행 방법은 참선과 300배입니다. 1997년부터 해왔으니, 20년 가까이 해온 셈이네요. 가끔 40~50분씩 참선하고 300번 절하고 나면 마음과 몸이 깨끗해집니다. 현재에 몰입하고 집중함으로써 잡념을 없애버리는 것이지요. 명상을 하면 집중력, 몰입력이 높아져요. 건강한 긴장력이 생산된다고나 할까요. 삶을 객관적으로 제3자화, 관찰하는 것을 습관으로 하면 자기에 대한 지독한 애착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지도 않고요. 참선을 하다 보면 나를 특별한 존재로 보기보다는 수많은 중생 중 하나로 담담히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대부분의 불행과 불만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대우받으려고 하는 집착 때문에 생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유 교수에게 이순(耳順)(공자가 60을 가리켜 한 말)의 나이에 문자 그대로 이순(생각하는 것이 원만하여 어떤 말을 들어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칭찬, 아부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은 있는데 비난, 싫은 말에는 그리 편하지 않고 신경이 쓰인다. 아직 이순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고 고백한다.
교수님은 위기의 시대를 이기는 단 하나의 질문으로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꼽으신 바 있지요. 인생 경영에서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자만심입니다. ‘왕년에’와 ‘내가 누군데’가 자만심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장군은 은퇴 후 모임에도 군복 입고 훈장 달고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를 알아달라는 의미이지요. 그래봤자 남들은 ‘그래서(so what)?’예요. 버려야 채울 수 있고, 낮춰야 올라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자신감이요. 우리 세대는 산업혁명, 민주화를 달성한 세대 아닙니까. 열심히 살아온 것이지, 결코 헛산 것이 아니지요. 사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살아왔다는 자부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젊은이에는 부족한 경륜이나 직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갖고 당당하고 늠름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자만심과 자부심,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다. 유 교수는 “나만 옳고 다른 사람은 시원치 않다고 깔아뭉개는 마음이 자만심이라면, 스스로는 물론이고 상대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은 자부심”이라고 구분했다. 자만심은 남을 무시하지만 자부심은 남을 포용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버드대학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으시고, 독일 빌레펠트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서양통이신데 동양고전에 심취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지요.
“동양이 서양보다 한결 깊고 차원이 높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병법서를 예로 들어볼까요. 과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을 비교해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에서 전쟁은 정치의 수단이고, 어떻게 이기느냐 거기에만 관심을 둡니다. 반면 동양은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 무력으로 싸우지 않고 지략으로 이길 방법을 모색하지요. 서양에선 지략이나 책략보다 전략, 전술에 관심을 두고요. 서양의 병서가 단지 전략서인 데 반해 동양의 병서를 정치사상서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시대를 이끈 리더들의 공통점은 뭘까요.
“공부력입니다. 위기의 순간에도 평생 학습의 끈을 놓지 않은 것입니다. 독서이든, 대화를 통해서든 늘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살아 있는 한 멈추지 않고 끈질기게 배우려고 하는 학습력이 이들의 공통점입니다. 이는 동서양의 리더가 다르지 않습니다.”
리더들의 경쟁력이 공부력이란 사실은 인생 경영 지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린다 그래튼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저서 에서 공부력을 변형자산이라 명명해 강조한다. 변형자산이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래튼 교수는 “돈 등 유형자산 못지않게 필요한 무형자산이 공부력”이라며 “학교 졸업, 취업, 은퇴라는 3단계 벽이 무너진 오늘날, 100년 인생의 풍요로움은 평생공부에 달려 있다”고 단언한다. 요컨대 100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선 미분의 인생관에서 적분의 인생관으로 발상전환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인생 전반기의 실력과 경력에 얹혀 후반전을 영위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전반전에 종언을 고하고 유연성과 개방성을 갖고 부단히 노력하라, 그렇게 공부력을 쌓는 것이 100세 시대의 생존비결이라는 진단과 처방이었다.
역사는 리더십의 스승이란 말을 강조하십니다. 역사적 인물 중 평생학습의 롤 모델로 누구를 꼽으시는지요.
“중국의 황제 당태종을 꼽고 싶습니다. 평생학습은 자기경영이 바탕인데요. 당태종은 죽는 날까지도 겸허한 태도를 잃지 않았지요. 그의 자기경영원칙은 경청, 자기경계, 자기절제, 긴장감 지속, 겸허한 태도 및 신중한 언어 구사 등 다섯 가지로 정리됩니다. 다만 집권 말년에 고구려 원정 등 쓸데없는 전쟁을 만류하는 신하들의 충언을 듣지 않은 것이 결정적 실수였지요. 아무리 뛰어난 군주라도 최초의 긴장감을 20년 이상 지속시키기는 어려웠다고나 할까요.”
당태종의 자기경영 비결 중 겸허한 태도 및 신중한 언어구사가 눈에 띄는군요. 이는 오늘날 기성세대와 신세대 간의 소통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나서고자 하는 마음, 참견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본인은 경륜이지만, 상대에겐 편견이고, 본인은 조언이지만 상대에겐 잔소리일 수 있습니다. 저는 어떤 말을 하기 전에 세 가지 기준을 돌아봅니다. 먼저 내 의도입니다. 상대를 위하는 것인가, 내 능력 자랑을 위해서인가 성찰해봅니다. 즉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 능력을 드러내 잘난 척하려고 하는 것인가를 검토해봅니다. 다른 사람이 다 보는 상황이어서 불편하거나 부끄럽게 느끼지는 않을지를 살핍니다. 끝으로 내가 말하는 방식이 그 사람이 받아들이기 쉬운 것인지를 고려해봅니다.”
그는 “나이는 말 그대로 숫자에 불과할 뿐인데 연장자라고 말을 다짜고짜 낮추며 하대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며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떻게 말하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같은 겸양의 태도를 평생친구인 헤르만 지몬 교수를 통해 체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헤르만 지몬 교수는 ‘유럽의 피터 드러커’로 불리는 독일의 경영학자다. “일국의 대통령에서부터 차 나르는 직원에 이르기까지 차별 없이 존중하고, 즐겁게 대화를 하는 지몬 교수에게서 학문적 열정뿐 아니라 리더의 소양까지 배울 수 있었다”는 술회다.
행복한 인생 2막을 위한 교수님의 ‘인생 경영 비법’을 듣고 싶습니다.
“가족, 친구,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이지요. 가족, 친구와 잘 지내려면 있는 모습 그대로를 수용하고 포용하는 게 필요해요. 또 나이 들수록 중요한 게 자신과 잘 지내는 것인데요. 저는 최고의 방법으로 독서를 꼽고 싶습니다. 인생에 독서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접할 때의 호기심, 혼자서 경험할 수 없거나 알 수 없는 내용을 알게 됐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그러기 위해선 지치지 않는 호기심과 건강이 필수이지요.”
그에게는 독특한 독서 버릇이 있다. 책 앞날개에 독서를 시작한 날짜, 독서를 마친 날짜, 책 구입 장소 등을 메모해놓는 일이다. 나중에 이 메모를 보면 책 내용은 물론 책을 읽게 된 동기, 시공간의 배경에 대한 추억까지 함께 떠올라 즐겁다고 한다. 또 세 종류의 책을 동시다발로 읽어나가는 독서 습관도 있다.
인생의 버킷 리스트가 있으신지요.
“없습니다(답변의 속도는 30초도 안 될 정도로 빨랐다). 평소에 열심히 살고 아무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게 제 신조라고나 할까요. 안 되면 그만이지요. 무엇인가를 바라고, 해야 된다고 마음먹는 순간 괴로워요. 그것을 해야 한다고 마음먹는 순간 족쇄가 되기 때문이죠. 저는 그저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그렇게 자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유 교수와 인터뷰를 하며 ‘인생 경영의 최고 비법은 공부력’이고 “궁극적 공부력은 마음 경영과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00세 인생 시대, 무한성장 시대인 오늘날이야말로 자기성찰력이 최고의 인생 덕목이자 경쟁력이 아닐까.
‘유필화’란 이름 석 자의 문패가 달린 파란 대문 집을 나와 돌아오는 길에 그의 시집 를 다시 펼쳐보았다. 그는 ‘나의 묘비명’이라는 시에서 ‘인간 유필화’를 이렇게 관조한다.
‘그는 입버릇처럼 자주 수행을 얘기했고 꾸준히 좌선도 하였지만, 생각만큼 행동이 안 따르는 자신의 한계를 늘 절감했다. 그는 물욕과 애욕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으며 자만심도 결코 떨쳐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장년 이후 눈에 띄게 화를 내는 일이 적어진 것에 대해서는 은근히 흐뭇해했다. (중략) 그는 자신의 숱한 약점, 단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수시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태도였다. 그의 이름은 유필화였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