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하고 조용했던 송파구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의 옥상 텃밭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작은 상자 텃밭에 심어놓은 배추가 제대로 크기가 무섭게 배추벌레에 점령당해버렸다. 어찌나 많은지 걷어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초보 도시농부는 애벌레를 잡는다고 열성을 다하지만 꿈틀거리는 생명체 앞에서 담대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도시농부는 낭만이 아니라 현실임을 몸소 느끼고 있는 그녀 이미숙(53) 씨를 만났다.
구멍은 뻥뻥 잘도 뚫려 있었다. 초록색, 검은색 애벌레가 배춧잎을 신나게 포식한 현장. 흙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였다.
“원래 이곳에서 저희가 재배한 농작물로 팜파티를 열기로 했거든요. 노사발전재단에서 함께 공부했던 팀들도 불러서 뭔가 맛보이려고 했어요. 가락시장에서 사서 할 수도 없고 이거 참 걱정입니다.”
한창 벌레를 잡다가도 이미숙 씨의 손을 피하지 않고 풀 위에 그대로 앉아 있는 방아깨비를 보자마자 화색이 돈다.
“너무 사랑스러워요. 도망가지도 않아요. 색깔도 예뻐요. 그렇죠? 생명은 정말 좋은 거야.”
전라북도 순창 출신 농부의 딸이라 소개한 이미숙 씨는 정작 어린 시절 농사일은 안 해봤다고 했다. 송충이도 최근에야 보고 알았다.
“노사발전재단에서 ‘신중년 1일 직업체험과정’으로 도시농부 교육을 한다는 공고를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사이트에서 보고 신청했습니다. 올해 5월 초 토요일에 모여서 7시간 정도 교육을 받았어요. 농사에 필요한 기후 조건이나 유기농법 등에 대해 배웠죠. 식물도 심어보고요. 재밌더라고요.”
하루 체험한 도시농부 교육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교육을 같이 받은 사람들은 모두 다 학번은 다르지만, 방통대 동문이다.
“저는 간호학과 출신이고 지금도 간호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같이 교육받았던 사람들 10명이 모여서 공동체를 만들었어요. 마침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옥상 텃밭에 사회적기업 ‘에코11’에서 운영하는 텃밭이 쉬고 있어서 그 자리를 저희가 쓰기로 했죠.”
좀 더 체계적이고 정기적으로 운영하고 싶은 마음에 ‘송파도시농업공동체’를 만들고 송파구의 지원을 받기 위해 기안서를 구청에 냈다.
“제가 송파구민이에요. 아무래도 텃밭이 송파구에 있으니 구민이 대표가 되면 좋겠다고 의견을 모으다 보니 제가 대표가 됐습니다. 모두의 공통 주제는 ‘농사짓고 싶다’였습니다. 구청 지원을 받게 되면 개인이 아닌 사회환원사업으로 운영하려고요. 우리가 만든 공동체의 취지예요. 에코11 안철환 대표님이 가이드와 코치를 해주셨고, 노사발전재단에서 도시농부 강의를 해주신 서울시농수산식품유통공사 백혜숙 전문위원도 대가 없이 저희를 도와주셨어요.”
백혜숙 자문위원이 어떤 작물을 심으라고 말하면 종묘상에 가서 씨를 사 와서 심었다. 처음에는 열무, 부추, 비트 등 아주 다양했다.
“텃밭을 가꾸는 게 너무 좋아요. 아마도 어렸을 때 농사를 짓던 부모님의 정서가 몸에 남아 있는 거 같아요. 어머니는 독자이셨던 아버지를 대신해 농사일하며 자식들을 키워내셨어요. 아버지가 간경화로 마흔아홉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셔서 홀로 그 힘든 농사일 다 해내셨거든요. 87세이신데 손과 무릎과 허리 쪽이 안 좋아 장애 3급이세요. 허리 교정도 하시고 무릎 인공관절도 하셨어요. 제가 도시농부를 한다니까 펄쩍 뛰셨어요. 그런데 저는 행복해요. 농사일 시작한 건 얼마 안 됐지만 내내 동경하던 거예요.”
8월에 심었던 열무를 뽑고 나니 아쉽고 허전해서 상추 모종을 가져다가 심었다. 비를 맞으면서 밭에 상추를 심는데 감동이었다는 이미숙 씨.
“제가 올해 농사를 시작하면서 목표가 있었는데 ‘벌레와 친해지자’였어요. 그런데 그게 아직 잘 안 되네요.(웃음) 그래도 기뻐요. 식물이 커가는 걸 보는 건 너무 행복한 일입니다. 예전에는 땡볕에서 일해서 팔이 벌게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저는 힘들다는 말은 안 해요.”
“텃밭에 물 좀 주소, 목마르오!”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옥상 텃밭은 추워지기 시작해서인지 오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점심식사 후 산책을 하는 사람들과 몇몇 이름이 적혀 있는 개인 텃밭에 물을 주기 위해 한 커플이 온 정도였다. 송파도시농업공동체의 밭에는 상추가 건강하게 잘 자라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곳에 물을 정기적으로 주러 오는 사람이 이미숙 씨 한 명뿐이라고. 그나마 한 주에 한 번 혹은 두 주에 한 번 남자 회원이 오는 정도다.
“8월에 본격적으로 텃밭 농사를 시작했는데 한 달 뒤에 물을 주겠다는 분들이 없더라고요. 다들 도시 텃밭에 대한 생각은 있는데 제대로 흥미를 못 느낀 걸 수도 있습니다. 단체 카톡방에 좀 와달라는 얘기를 하면 답장하는 분이 거의 없어요. 어떤 분이 한동안 안 나오시다가 텃밭에 오시더니 ‘왜 작물들이 잘 안 자라냐’고 하더군요. 사실 누구의 탓도 아니죠. 우리가 함께 가꾸는 곳이니까요.”
내년부터는 회칙과 스케줄을 만들어 매일매일 오는 당번을 정할까도 싶다. 처음 공동체를 결성했을 때만큼 회원들이 따라주지 않아 속상하지만 조금씩 자라나는 작물들은 보면 기분이 남다르단다.
“농민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작물이 자라난대요. 적어도 매일 한 명이 와서 물 주고 풀도 뽑아주고 하면 좋을 텐데 답이 없어요. 송파구청에 들어가서 그 얘기했어요. 지원금을 오히려 안 받고 싶다고요. 사익이 될 것 같더라고요. 제가 좀 쓰더라도 올해 시작했으니까 시범적으로 해볼까도 싶어요. 분명히 성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자고 얘기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5년 후에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현재 이미숙 씨는 화상 전문 베스티안부천병원에서 간호사이자 이사로 재직 중이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오랫동안 자기 일을 유지하면서 농부생활을 하고 싶다고 했다.
“전적으로 농부가 되겠다는 생각은 아니에요. 결혼 초기에 남편과 했던 얘기가 60세까지만 일하고 봉사하며 사는 거였어요. 그런데 요즘 60도 너무 젊잖아요. 특히 간호 쪽은 건강만 허락하면 80세까지도 일할 수 있어요. 이제 60이 돼도 또 어디선가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퇴직이 6년 남았습니다. 농사를 지을 거예요. 노하우가 생겨서 연간 농부 계획서를 짤 수 있을 거 같아요. 중구난방이기는 하지만 농부 일기를 쓰고 있어요. 옥수수는 언제 심고, 재배에 필요한 영양분은 무엇이고 이런 걸 기록해 보려고요. 남양주 텃밭이 기대됩니다. 마침 남양주에 텃밭을 마련했는데 내년부터 저도 농사지을 거예요. 남편이랑 아들에게 말해놓았습니다. 바로 뽑아서 신선한 야채들을 조금씩 주위 분들에게 나눠줄 계획을 하고 있어요. 5년 뒤에는 좀 체계적인 농부가 되어 있을 거 같아요.”
갑자기 친구와 약속이 생겨 부리나케 준비하고 외출을 했다. 서둘러 나가면서 무언가 빠트리고 나온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는데 버스에 타고 나서야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아놓고 그냥 나온 게 생각났다. 아차 싶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휴대폰을 들고 나올까 잠시 망설였지만, 약속시간을 맞출 수가 없어 포기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어디서 전화가 오지는 않을까, 문자나 카톡으로 누가 나를 찾지는 않을까 궁금해지면 급기야 초조함까지 밀려왔다. 휴대폰을 들고 나왔다면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에도 벌써 서너 번은 열어봤을 것이다. 시간을 보거나 문자나 카톡 확인 등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들여다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일단 마음을 진정시키기로 하고 휴대폰 없는 동안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몇 년 전만 해도 휴대폰 없이 다들 잘 지냈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나 어른이나 휴대폰 없는 세상은 용납이 안 되는 듯하다. 연락을 주고받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정보 등을 즉각 얻을 수 있는 편리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친구들끼리 옛날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생각이 안 나 이런저런 이름을 대보다가 스마트폰으로 영화 내용을 검색하면 영화 제목과 감독, 주인공까지 자세하게 나오니 정말 기특한 존재임은 확실하다.
아이가 중학교 시절 들고 다니던 휴대폰을 처음 접했을 때, 대학 동창이 휴대폰이라며 가방 속에서 꺼냈던 전화기를 봤을 때 무척 신기했다. 당시는 삐삐라는 기기로 연락을 받으면 공중전화를 찾아 전화를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집 밖에 나와서도 안방 전화를 쓰는 것처럼 통화가 되는 걸 보고 참으로 놀라웠다.
친구의 첫 휴대폰은 모토로라에서 나온 제품이었는데 집 전화만큼이나 컸다. 흡사 무전기처럼 보이는 큰 휴대폰을 꺼내 통화를 하던 친구가 신기해서 너도나도 그 물건을 만져봤던 추억이 있다. 그 후로 폴더형, 슬라이드형 등으로 진화를 거듭하더니 이제는 스마트폰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멈추지 않고 계속 진화하는 중이다.
나도 스마트폰의 장점을 톡톡히 누리는 사람이다.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접속해야 할 수 있었던 블로그 활동을 언제 어디서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이전에는 메모지를 꺼내 적어두었다가 집에 와서 글을 작성하곤 했다. 메모지가 없을 때는 그 생각들을 다 잊어버려 안타까울 때도 많았다. 그런데 이제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 자리에서 바로 스마트폰에 저장한다. 가입한 카페에 글을 올리는 것도 출석 체크도 집이 아니라도 가능해졌으니 스마트폰은 정말 편리한 기구임에 틀림없다.
외출해 있는 동안 무척 불안했다. 집으로 달려가자마자 충전기에 꽂혀 있는 스마트폰을 열어봤다. 그런데 참으로 무심하게도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내가 불안해하는 동안 스마트폰은 편안한 휴식을 한 셈이다. 왠지 배신당한 느낌마저 들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렇다. 잠깐 헤어져 있어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어쩌다 인연
근무가 끝나면 아무도 없는 숙소로 돌아가기를 싫어한 일본인 아가씨가 있었다. 그녀는 외로움을 달래줄 애완동물을 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드디어 외로움만 있던 방에 새 식구가 생겼다. 업무 특성상 출장이 잦아 개나 고양이는 기를 수 없었던 그녀는 작은 플라스틱 박스에 관상용 열대어인 거피를 길렀다.
작은 어항 속에서 헤엄치는 거피가 싱크로나이즈 선수보다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아가씨는 우리 아들과 국제결혼을 했다. 며느리는 한국에서 의무 복무기간이 끝났고 아들은 도쿄 나리타공항에 취업해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삿짐을 컨테이너에 다 싣고 문을 닫는데 며느리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거피가 담긴 어항을 컨테이너에 실을 수도 없고 그냥 두고 갈 수도 없었던 것이다.
아들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항은 아버지가 기르시든지 다른 사람 주세요.”
아무리 말 못하는 미물이라지만 뜻하지 않는 이별이었다. 아들의 마지막 말에 어려운 시절을 거피와 함께했던 며느리의 눈은 눈물로 가득 찼다.
“염려하지 마라. 내가 잘 돌볼게.”
내 말에 며느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항의 물을 최소한만 남기고 승용차 뒷좌석에 실었다. 거피는 이제 나와 인연이 되어 우리 집으로 왔다. 거피가 게으른 주인을 만나 굶주리며 더러운 물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 안 들으려고 깔끔하게 손질해 놨다.
얼마 후 아들 내외가 전화를 했다. 이사를 무사히 잘했다는 안부 전화였다. 그런데 한참을 통화했는데도 며느리는 전화를 안 끊었다. 무언가 할 말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거피의 안부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깨끗이 손질된 어항에서 거피들이 잘 놀고 있는 모습을 찍어 ‘카톡’으로 보내줬다. 정이 많고 심성이 착한 며느리는 거피가 새로 태어난 아기들과 잘 지내고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을 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특별한 아침
“철퍼덕 철퍼덕.”
‘이게 무슨 소리지? 어항이 깨졌나?’
거피가 이사 온 첫날, 자다 말고 일어나서 어항을 살펴봤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창문 밖은 여명으로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거피들이 아침밥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소리였다. “그래 알았어, 이 녀석들아. 밥 줄게.”
시계가 없던 시절에는 “꼬끼오~” 하며 닭 울음소리가 아침을 알렸다. 나는 요즘 거피들이 지느러미로 수면을 노크하는 소리에 잠을 깬다. 오늘 아침도 거피가 지느러미로 노크한 수면에는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그 동그라미 속으로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른다. 아들 얼굴, 며느리 얼굴, 그리고 예쁜 손녀 얼굴.
싫은 사람이 있으면 안 보면 된다. 부득이 마주치게 되면 피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마주치게 되는 관계가 고등학교 동창생들 모임이다. 비슷한 환경에서 만나 50년을 지내왔으니 친한 관계이다. 그런데 그 중에도 친소관계는 있게 마련이다.
A는 동창회 모임에 좀 늦게 도착했다. 한정식집이었다. 인기 있는 반찬은 먼저 바닥난다. 간장게장이 인기 품목이었다. A가 종업원을 불러 간장게장을 더 갖다 달라고 하자 B가 “늦게 온 주제에 네 돈 내고 사 먹어라”라고 한 것이다. 이 말에 다른 친구들도 같이 웃어 넘겼다. 간장게장은 추가로 주문하면 2만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A는 늦게 온 죄로 간장 게장 맛도 못보고 다른 반찬으로 대충 식사를 한 후 자리를 끝냈다. 그러나 B에 대한 원망이 가슴 속 깊이 박혔다.
며칠 후 A와 B는 같이 골프 라운딩을 할 일이 있었다. 4명을 채운다고 후배 2명도 불렀다. 그런데 B가 지나가는 말로 A의 골프바지가 노인네처럼 헐렁하다며 핀잔을 줬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바지 폭이 좁다며 후배들의 날씬한 바지를 가리켰다. 그날 밤 A로부터 단톡방에 “B와 절교한다”는 내용이 올라 왔다. B에게 보낸 카톡도 복사해 붙였다. “후배들 앞에서 망신을 줬다”는 이유였다. 앞으로 모임에 안 나갈 수는 없겠지만, B와 엮는 일은 피해달라는 뜻이다.
고등학교 동창 관계는 가장 스스럼없는 관계이다. 그래서 서로 간에 비속어도 쓰고 못할 말 없이 다한다. 그러다 보니 도를 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이제까지는 그래도 문제가 없었는데 슬슬 문제가 발생한다.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의 분비가 적어진 탓인지 그동안 쌓였던 미움이 한꺼번에 터지는 것인지 분란이 생긴다. 건강이 안 좋아지면 쉽게 짜증이 나기도 한다.
동창들은 A를 설득했다. 50년 친구와 절교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요지부동이었다. 그전에는 나이 70세가 되면 남자 노인은 ‘옹(翁)’을 붙였다. ‘드물다’는 뜻으로 ‘고희(古稀)’라고도 했다. 지금은 수명이 길어지다 보니 70세라도 그 용어를 안 쓴다. ‘옹고집(壅固執)’도 있다. 한번 고집 부리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꺾는다. 다른 동창들이 B에게도 사과하라며 설득했다. 그러나 역시 요지부동이었다. “못할 말 했느냐?”며 오히려 당당했다.
동석했던 친구들이 중간에 화해를 시키려고 했다가 A와 B 모두에게 원망을 들었다. “왜 내편을 들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누구 편을 들고 말고 할 일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둘은 친구들의 중재로 악수하면서 화해하는 것으로 했다. 그러나 악수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악수를 했더라도 속마음은 안 풀어지는 사람도 있다. 여자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는 남자들처럼 행동만 사과하는 척 악수를 쉽게 하는 사람도 있다.
필자가 속한 대학원 동창생들 사이에도 비슷한 일이 종종 벌어진다. 한 친구가 말투가 좀 시비조이고 전투적이다. 항상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상처 받는다. 그 때문에 설전을 벌이거나 화가 나서 뛰쳐나가는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그 버릇을 못 고친다.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마음도 그런 편이다. 지기 싫어하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한다. 당구를 쳐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 친구는 당구를 칠 때 지나치게 승부욕이 강하고 억지를 잘 부린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도전한다고 해서 누구랑 같이 갈 것이냐고 물으니 혼자 간단다. 트레킹이 힘들기 때문에 자기 성격으로는 같이 간 사람과 다툴 가능성이 많다는 이유였다. 자기 성격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필자도 이 친구와 다툴 일이 많이 있었지만, 그냥 넘어갔다. 그런 사람은 피하면 된다. 당구도 다른 핑계 대고 같이 안 친다. 모임에 나가도 그냥 얼굴만 보는 것이다. 굳이 절교 선언까지는 필요 없다. 그래 봤자 여생이 살아온 날보다 길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며 성격은 고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삼총사와 자유여행 도전!
11월 마지막 주에 삼총사 친구들과 일본여행을 떠났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도 하지만 비행시간이 두 시간 남짓으로 여행 가기엔 적당한 곳이다. 특히 두 친구는 꾸준히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어서 웬만한 의사소통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고 좋았다. 이번에 우리는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 자유여행을 떠나보려고 했다.
그래도 비행기 표나 숙소는 역시 여행사 패키지를 따라가는 게 나을 것 같아 2박3일 일정에 하루 정도 자유 시간을 갖는 상품을 택했다. 갑자기 결정해서인지 저가 항공에 작은 호텔이라는 데도 가격이 꽤 비쌌다. 그래도 더 고를 여지가 없었다. 삼총사 중 한 친구가 돌보는 손자가 때 마침 부모와 여행을 하게 되어 좋든 싫든 우리도 그날에 맞추어 떠나야만 했다. 그래도 여행 일정은 알차게 짜였다. 한국에서 오전 8시 출발해서 돌아오는 날은 오후 8시 비행기였다. 6시 10분까지 공항에 가야 했는데 정작 비행기의 연착으로 9시로 출발이 늦춰졌다. 우리가 탄 항공은 저가라서 기내식은 제공되지 않는다더니 정말 주스 한잔이 없었다. 그저 생수 한 컵만 나와서 우리는 기내식 없는 여행은 처음이라면서 서로 웃었다. 도쿄에 도착하면 츠키지 시장에 가서 참치초밥과 맛있는 와규를 많이 사먹자며 입맛을 다셨다.
여행은 즐거웠다. 특히 가이드 없이 도쿄, 긴자거리를 누비고 다녔던 건 신나는 일이었다. 지하철도 900엔짜리 1일권을 사서 본전 뽑고 남을 만큼 돌아다녔다. 길 가다 일본사람에게 장소도 물어가며 재미있게 돌아다녔다. 유명한 츠키지 시장에선 참치 해체 식도 보았고 맛있는 참치초밥과 성게초밥 등 이번 먹방 여행의 진수를 맛보았다. 마음을 초조하게 만든 건 돌아오는 날이었다.
험난했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일본 속의 아기자기한 차이나타운 관광을 마지막으로 8시 비행기를 타려고 공항에 왔는데 출발 때처럼 또 연착이라고 한다. 도쿄는 맑았는데 우리나라에 전날 폭설 수준의 눈이 내려서 공항 사정으로 좀 늦게 되었다는 안내가 있었다. 연착되는 시간을 계산해보니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거의 10시 반이 넘을 것 같았다. 그러면 짐을 찾고 입국수속하고 나오면 11시가 훌쩍 넘어 공항버스가 다 끊어졌을 시간이다. 마침 공항철도가 11시 50분까지 있다는데 그것도 서울역까지다. 그래도 서울역까지만 가면 집까지 택시를 탈 수도 있을 테니 기대를 했다. 만일 공항버스나 공항철도가 끝날 때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어떻게 할지 고민하며 우리는 머리를 맞대었다. 최악의 경우 택시를 타는 것인데 친구 하나는 작년에 이런 일이 있어 집인 상암동까지 택시비로 8만 원이 나왔다는 말을 했다. 우리 집은 상암동보다 더 멀어서 택시비가 얼마 나올지 걱정이 앞서면서 제발 공항버스가 있기를 바랐다. 요즘은 공항 근처에 찜질방도 있으니 하룻밤 자고 가야 할 지도 모르겠다며 웃기도 했다.
미리 걱정하기 않기
그러면서도 마음은 몹시 초조하고 조바심이 났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30분이 막 지난 시각이었다. 같이 돌아온 젊은 아가씨가 스마트폰으로 찾아보더니 이미 공항버스는 다 끝났다고 말해 주었다. 우리는 마지막 공항철도는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각자 자식들에게 전화를 했다. 나도 아들에게 전화해서 사정이 이러하니 서울역으로 엄마를 데리러 오라고 했더니 흔쾌히 그러겠다고 한다. 공항철도 쪽으로 가다가 안내하는 아저씨가 있어 우리 동네 버스는 끝났냐고 했더니 5분 후에 떠나는 막차가 있다고 했다.
와, 그때의 반가움이란... 대중교통이 그렇게 고마운 존재인지 처음 느꼈다. 드디어 공항리무진에 탔다. 아들이 동네 입구로 나와 주었다. 버스가 어떻게 달렸는지 30분 만에 우리 동네에 내려주었고 아들의 차로 집에 무사히 들어왔다. 비행기 안에서 고민하던 걸 생각하니 이제야 웃음이 난다. 12시가 넘은 시간 잘 들어갔는지 묻는 친구들의 카톡이 울렸다. 다들 무사히 제 무대로 돌아왔다. 항상 어떤 일이든 방법은 있는 것이다. 아까의 고민은 부질없었다. 너무 미리 걱정은 하지 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 친구 집 대문을 열다
7월의 뜨거운 열기조차 서늘하게 느껴질 만큼 사무친 그리움을 안고 고향 순창으로 갔다. 얼마 전 뇌졸중이 재발되어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나서였다. 한적한 골목길을 거닐다 어느 집 앞에 멈춰 섰다. 엄마의 오랜 친구 정봉애(89) 씨가 사는 집 앞. 한참을 서성이다가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네 엄마가 왼손은 마비됐어도 삶의 의지가 강해 몇 년은 더 살 줄 알았더니, 너무 갑자기 가버렸구나.” 등을 토닥이며 아픈 내 마음을 위로해주셨다. 50년 지기인 두 분은 젊은 시절 학부모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친구가 되어서 보니 어릴 적 가정 환경이 신기하게 비슷했다. 소학교 시절 정봉애 씨는 남원에서, 엄마는 순창에서 우등생이었던 것도 비슷했는데, 같은 상급학교에 지원했다 세월 탓에 좌절한 경험은 아예 똑같았다. 이런 인연으로 두 분은 우정을 돈독히 쌓아왔다. 나이 들어서는 각자 자신이 사는 동네 노인회관 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게이트볼 선수로 여러 대회에 출전도 했다. 또 게이트볼 심판 자격증을 따서 심판을 본 것 등등 두 분은 닮은 점이 정말 많았다. 그런데 이번 만남으로 엄마 친구였던 그녀가 시인으로 등단을 한 사실을 알게 됐다. 엄마가 편찮으신 동안 소식을 잘 듣지 못했는데 이런 축하할 일이 생겼다.
독서를 좋아하던 소녀의 꿈
2014년 월간 ‘문학공간’을 통해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학계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했다. 엄마와 원불교 교당을 같이 다니고, 동갑계모임을 하는 등 그저 평범한 우리네 어머니로만 알았는데 이토록 멋진 시인이 되어 있을 줄이야!
6월에는 첫 시집인 ‘잊지 못하리’가 출간됐다. 더욱이 전북관광문화재단에서 지원금을 받아 시집을 출간했다고. 이 말은 작가로 인정받아 당당하게 낸 소중한 시집이란 뜻이다. 같은 달 말에는 순창문인협회 주최로 시집 출판기념회도 열렸다. 우리 나이로 구순. 100세를 10년 앞둔 정봉애 시인의 새로운 인생에 모두들 박수를 보냈다.
정봉애 씨, 아니 정봉애 시인은 어쩌다 시를 쓰게 됐을까? 문득 시를 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 여쭸다. 1929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정 시인은 비교적 부유한 집 막내딸로 귀하게 자랐고, 아홉 살에 사립 소학교에 들어가 열다섯 살에 졸업했다. 전교 1, 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를 잘했고, 희망하던 공주사범학교 서류전형 합격도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렇게 똑똑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칼바람 불던 세월 탓에 학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한학자였던 부친이 딸의 상급학교 진학을 완강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혹여 딸아이가 위안부로 징집될까 부친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 간절한 꿈을 접고 정 시인은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전북 순창군 유등면 8남매가 사는 작은 농가의 맏며느리로 들어갔다. 슬하에 7남매를 낳아 기르는 동안에도 틈틈이 책 읽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시동생 친구인 동네 청년들한테 부탁해서 소설, 시, 월간지 가릴 것 없이 책이란 책은 모조리 구해다 읽었지. 시어머니가 호롱불 기름 닳는다고 불 끄고 자라 하면 치마로 문을 가리고 읽었어. 그렇게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지다 보면 시집살이의 고단함도 저만치 날아가곤 했어.(웃음)”
정 시인의 문학적 기질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 시절에도 그렇게 책을 읽었다니 새삼 참 멋져 보인다.
“많이 배우지도 못한 사람이 시 쓸 생각이나 했겠나. 2006년에 평생을 같이했던 남편과 사별하고 나서 적적한 마음에 그저 끄적끄적 메모를 해댔지. 그런 습관이 나중에 시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
맘에 드는 것은 행동에 옮긴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적극적인 성격의 정 시인. 어느 날 순창에서 발행하는 지역신문 ‘열린순창’을 꼼꼼하게 읽다가 무척 마음에 드는 필진을 발견하고 곧바로 신문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 머시냐 저기… 박모 씨 글이 하도 좋아서 그 필진과 인사를 한번 나누고 싶은디. 연락처 좀 알려줄라요?’ 내가 그랬어!”
그 일을 계기로 이 재밌는 할머니(?)의 이모저모를 살피던 신문사 직원이 시 창작 공부를 한번 해보라며, 순창여성회관에서 진행하는 ‘시 창작 교실’을 소개해주었다. 글 읽는 것은 좋아했지만 스스로 써보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던 정 시인은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시 창작 교실을 노크했다.
“첫 시간에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가니 40, 50대 젊은 친구들이 모여 있더만. 속으로 깜짝 놀랐어. 퇴직하고 나이 지긋한 심심한 양반들이나 있겠거니 생각했거든.”
그래도 기죽지 않았다는 정 시인. 젊은이들 틈에 용감하게 자리 잡고 앉았단다. 자그마한 체구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을까. 도전정신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로 공공도서관 등을 찾아다니며 각종 인문학 강좌는 모두 섭렵하다시피 했다고. 특히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시 창작’ 수업을 좋아해 매주 무척 기다렸다고 한다.
“시 창작 강의가 너무 재밌어서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어. 선생님이 내준 숙제 꼬박꼬박 하고, 꾸준히 다니다 보니 이런 좋은 결실을 보게 된 것 같아.”
시인 정봉애로 살다
정 시인의 하루는 규칙적이다. 오전 4시에 일어나 요가와 스트레칭을 하고 7시에 아침식사를 마치면 외출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가 서예, 시창작, 시낭송, 게이트볼 등 그날그날 정해진 일정을 소화한다. 오후 5시 반쯤에는 귀가해서 신문 보고, 시 다듬고, TV 뉴스 잠깐 시청한 뒤, 9시 조금 넘어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든다. 이런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도 정 시인에게는 단 하나 예외적인 것이 있는데, 자다가도 시상이 떠오르면 새벽 1시가 됐든 2시가 됐든 벌떡 일어나 곧바로 메모하는 것이다. 시에 대한 그녀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다. 솟구치는 그녀의 시심은 아주 중요한 순간에 빛을 발하기도 했다. 작년 11월, 순창읍 일품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할 때 정 시인은 순창평화의소녀상건립군민추진위원회로부터 자작시 낭송 요청을 받았다. 당황스러워 “다른 훌륭한 시인도 많은데 왜 나에게 하라는 거냐”며 한사코 거절했다.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과 동시대를 살아온 정 시인이 적임자라며 거듭 요청을 해왔다.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결국 시인이라는 사명감 하나로 밤을 새워 작품을 완성했다. 정 시인은 같은 또래의 위안부 할머니들을 ‘친구’라 부르며 ‘친구여 편히 쉬시라’는 제목의 자작시를 작년 12월 ’평화의 소녀상‘ 건립 행사 때 낭송해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내 사랑, 잊지 못하리
여담으로, 시집 제목을 왜 ‘잊지 못하리’로 했나 여쭸다.
“나는 그냥 ‘노인네 넋두리’로 하자 했는데, 내가 쓴 시가 그런 제목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하더만.(웃음)”
할 수 없이 주변에서 권유하는 대로 ‘잊지 못하리’로 제목을 막상 붙여놓고 보니 아주 마음에 든다며 천진스레 웃으신다. 123편의 서정시를 모아 엮은 정 시인의 첫 시집 ‘잊지 못하리’는 정 시인의 요청을 받아 노인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큼지막한 글씨로 인쇄돼 정감을 준다.
“내 소소한 일상을 보고 느낀 대로 적어 다듬었을 뿐인데, 노인네 넋두리로 치부하지 않고 주변에서들 공감해주니 어찌 이리 고마울 수 있을까.”
90세 넘은 나이에 시 쓰기를 시작해 일본 열도를 감동시킨 100세 시인 ‘시바타 도요’가 롤 모델이라고 했다. 정 시인은 ‘시바타 도요’처럼 100세가 되기 전에 두 번째 시집을 내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 한다.
“시는 이제 영원한 내 친구, 시 쓰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앞으로도 쉬지 않고 끈기 있게 계속 쓸 참이여.”
정 시인의 하루는 요즘 더 바빠졌다. 시집 발간 후 여기저기서, 심지어 멀리 미국에서도 축하인사를 보내와 정신없을 정도라고.
“내가 요즘 심심할 겨를도 없이 호강을 많이 한다우. 여기저기 크고 작은 행사에서 모셔가지, 젊은 동호회 회원들이 수시로 전화해 드라이브시켜주고 맛있는 밥 먹으러 다니지, 아주 행복혀.”
90세 인생이 이리도 즐거울 수 있을까. 정 시인은 문자는 물론 컴퓨터와 카카오톡까지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안다. 카톡 프로필 란에 ‘매일매일 싱그럽고 화려하게ㅋㅋ’라는 멘트가 놀랍다. 열정은 사람을 늙지 않게 만드나보다. 이 나이에 뭘 하나, 세상 다 산 듯 정신줄 놓고 있던 게으른 내 영혼에 90세 시니어 시인은 섬광처럼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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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하리 - 정봉애
이토록 보고픔 어찌하오리까
고요 속에 아른아른 아린 그리움
어찌하오리까
가슴 깊이 젖어드는 끈끈한 정
어찌하오리까
마디마디 묻어나는 님의 향기
어찌하오리까
이왕에 가버린 사랑
어찌하오리까
정봉애 시인은, 어린 나이에 결혼해 60년 넘게 금슬 좋은 부부로 살아온 남편이 병환으로 세상을 뜨자 하늘이 무너진 듯 온 세상 슬픔이 다 몰려왔다고. 6·25동란 때 오빠들과 부모님을 모두 잃은 정 시인에게 남편은 오빠 같고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내 나이 78세 때 82세 남편이 가버렸지. 다들 살 만큼 살았다고 말들을 하더라만, 남편만 의지하고 살았던 나는 그 허전한 마음을 어디에도 둘 데가 없더라고.”
저녁이면 남편과 오순도순 술 한 잔씩 반주로 나누며 밥 먹던 소소한 행복. 첫 잔을 꼭 먼저 따라주던 다정했던 그 사람. 이 시 ‘잊지 못하리’는 사별한 남편을 그리워하는 정 시인의 애틋한 심정이 아리게 담겨 있다.
전철을 타면 자리에 앉았거나 선 사람을 가리지 않고 승객 대부분이 스마트폰에 몰입해 있다. 길을 걸으면서도 상황은 같다. 친목이나 가족 모임에서도 다르지 않다.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페 등 온라인 네트워크가 확대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더욱 외로워지는 듯하다. 우울증 환자가 늘어난 배경이다. 페이스북에 수백 명, 수천 명의 ‘친구’나 팔로워를 가진 사람들도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시대의 흐름과 변화 속에 함께 하려는 마음이 이해되지 않음은 아니다. 필자의 고등학교 동창 한 사람도 수천 명에 이르는 페이스북 친구를 두고 있으나 늘 외로워 보인다. 때로는 셀 수 없을 정도로 위로와 격려의 댓글이 달려도 가슴 속에 쌓인 외로움을 해소하지는 못하는가 보다.
SNS의 관계망이 크게 넓어지고 친구가 늘어날수록 깊이는 더 얕아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초등학교 시절부터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정작 참된 친구를 꼽으라면 열 손가락을 넘지 못한다. 수천의 온라인 친구들과 여유롭게 소통하기가 쉽지 않아서 형식적으로 흐르기 쉬운 점도 있다. 다시 말해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늘수록 직접적인 교류의 기회가 줄어든다는 점은 엄연한 사실이다. 가끔은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싶으나 문자가 대신해가고 있다. 편지도 사라진 지 오래다. 결혼 청첩장도 정성 들여 쓴 봉투 대신에 온라인 청첩장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편리하기 때문이다.
서로 얼굴 보며 부대끼는 관계에서 진정한 친구가 만들어진다. 서로 다른 성격의 사람들과 부대끼며 교류하는 과정에서 관계가 두터워지고 관계를 풀어가는 역량이 자연스럽게 훈련되기 마련이다. 요즘의 상황은 그 반대이다. 기계화를 우려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기계화를 좇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상대방은 얼굴도 모르는 수백 명의 온라인’친구’가 아닐 터이다. 가정과 직장, 사회생활에서 직접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다. 직장의 상사와 부하, 동료와 고객 등은 SNS로 진실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그런 경우가 전혀 없지는 않아도 직장 상사를 친구로 대하기는 거북스러울 수밖에 없는 현상과 같다.
사물 인터넷을 비롯한 SNS 기술이 발달하여 사이버 네트워크는 확대되었으나 직접 접촉의 욕구는 오히려 줄어들지 않는다. 일부 젊은 층은 다른 사람과 직접 접촉과 대화를 꺼리는 현장을 손쉽게 본다. 부부 싸움도 카톡으로 한다. 이어폰으로 귀를 막아 상대방의 말 듣기를 거부한다. 젊은이들이 이어폰을 끼고 있음은 음악이나 방송을 듣기보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는 방편의 하나라 실토함을 들은 적이 있다. 근래에 ‘하이테크, 하이터치(High Tech, High Touch)’라는 말이 부상하고 있다. 하이테크 시대에 하이터치, 즉 직접적인 대화와 만남을 요구하는 물결이 일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많은 직장인이 장래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인간은 과소평가 되었다’의 저자, 포천지의 제프 콜빈이 그 저서에서 답을 주고 있다. “앞으로 기계가 대체 불가능한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상대를 진심으로 이해하며 위로해주고 같이 기뻐하는 공감 능력은 인간만이 갖고 있다. 이러한 능력은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결코 따라갈 수 없다. 이러한 공감과 관계의 능력을 갖추기만 하면 인공지능의 등장에 겁먹을 필요는 없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인간을 위로하는 도라에몽이 등장했어도 상대방과의 공감 능력은 인간을 넘어설 대안이 있을 수 있을까? 진심 어린 인간관계망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대가 다가온다. 행복한 삶은 직장, 가정 등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대면적 관계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 역량은 인공지능이 퍼질수록 더욱 중요해진다.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할 과제다.
살다 보면 사소한 일로 마음 상하는 일이 있다. 평소 같으면 쉽게 넘어갔을 행동이나 말 한마디도 고깝게 느껴지는 경우가 그렇다. 부부 사이도 그렇고 친구 사이도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가까운 사이에서 발생한다. 지나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왜 그랬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의 심정은 말도 하기 싫을 정도로 미운 생각이 든다. 그래서 부부 사이에도 그런 다툼이 있고 나면 며칠씩 말도 안 하고 침묵의 시위를 하게 된다. 신혼 초 부부싸움 안 해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크고 작은 부부싸움을 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드는 것이니까. 그럴 때 누가 먼저 대화를 시작하는가가 문제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 쉽게 먼저 말을 걸지 못한다. 서로가 힘든 시간을 보낸다.
얼마 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KTX와 버스를 타고 전남 장흥, 강진, 순천을 들러 경상남도 통영,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한려수도와 장사도를 아우르는 남해안 맛 기행을 떠났다. 오랜만에 들뜬 마음으로 떠나는 건 좋았는데 버스를 타고 가면서 문제가 생겼다. 부부끼리 앉아 경치를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머리를 식히고 즐거운 여행을 하는 게 정상인데, 그날따라 와이프는 중앙통로를 두고 옆에 앉은 친구 와이프와 거의 2시간 내내 수다를 떨더니 이내 몇몇 여자들이 버스 뒷자리로 옮겨 계속 수다가 이어졌다. 나중에 물어보니 ‘뒤에 앉아도 되느냐?’고 물어보고 뒤로 갔다는데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상태였다.
은근히 화가 나고 말도 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즐거운 여행길에 화를 낼 수도 없고. 어쨌든 화가 풀리지 않아 거의 형식적으로 사진도 찍는 둥 마는 둥 거의 말도 하지 않고 거의 하루를 보냈다. 그랬더니 평소 상냥하던 아내가 눈치가 다른지 “왜 화났어? 하며 얼마 후 옆자리로 돌아와 화를 풀어주느라 애를 썼다. 평소 같으면 별것도 아니고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는 일이었는데 웬일인지 그날은 화가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나 후회되고 만약 화라도 크게 냈다면 여행을 망치지 않았나 싶다. (여자들의 수다는 좀 문제가 아닌가? 전화로 두 시간 얘기하고 또 만나서 얘기하자는 것이 여자들이니까. 남자들에게는 여전히 상상도 못 할 일)
부부 사이도 가끔 그렇지만 수십 년 친구 사이에서도 다르지 않다. 요즘 고민이 하나 생겼다. 40년 지기 대학 동창 모임에서다. 7명의 대학 동창들이 부부동반으로 거의 40년을 만나왔다. 학창시절을 생각하면 마음은 항상 그 시절에 머물러있어 늘 만나면 편하고 좋았다. 단지 그때는 하나의 캠퍼스에서 만났고 지금은 생활근거지가 달라 그렇게 자주는 만나지 못한다. 그런데 두 친구 사이에서 전화로 한 사소한 말 한마디가 사이가 틀어져 버리게 만들었다. 문제는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이기에 편하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상처를 받게 했다. 특히 그 두 친구는 자주 만나고 전화도 자주 하는 사이였다.
요즘도 초등학교 친구들 만나면 말하는 반은 욕이 아니던가? 그날 친구는 편한 마음에 “뭐하고 자빠졌어? 카톡이나 하고!”라고 말했다는데 이 말 한마디가 그만 콱 걸려버리고 만 것이다.
친구에게서 개인 톡으로 문자가 날아들었다. 그 친구와는 다시 안 만나겠다면서 펄펄 뛰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면서 ‘그 친구 제정신이 아니야, 한 모임에서 활동할 수 없을 것 같다’면서 카톡마저 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니 “자주 왔다 갔다 하고 전화도 자주 하는 사이라서 별 뜻 없이 한 이야기인데 그 날은 그렇게 화를 내더라’ 고 오히려 황당해했다. 아마 내 생각에 그 친구는 직장을 일찍 그만두고 교편을 잡은 아내가 벌어오는 수입으로 내조하며 딸들을 키웠는데 그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 같다. 그러잖아도 자격지심이 있는 터에 아픈 데를 찌른 것이다. 그 후 연락을 취하며 풀어보려 했으나 좀처럼 풀리지를 않아 지금도 고민 중이다.
이렇듯 나이가 들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에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모양이다. 평소 같으면 전혀 마음에 두지 않을 말이나 행동도 그럴 때가 있으니 좀 더 주의해야겠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설령 그러한 경우에도 너그러이 넘어갈 수 있게 마음을 훈련해놔야겠다. 사는 날 좋은 이야기만 해도 다 못하고 죽는다는데…. 지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거나 서운해 하면 자신을 후회하고 부끄럽게 만든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보이스피싱 피해액이 작년 한해에만 2천억 원을 넘어섰다. 또한 피해 건수는 전년도 보다 4027건(8.8%) 증가한 4만9948건으로 나타났다. 깜작 놀랄 통계다. 경찰청이나 금융감독원을 사칭하고 일단 사건에 휘말렸다고 겁을 준 후 은행에 있는 돈을 찾아서 냉장고에 보관하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런 말을 믿고 허술하게 보이스피싱을 당하는 사람도 있을까, 나는 절대 당하지 않으리라 했다. 당하는 사람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가난하고 착한 서민들이 많고 어렵게 한푼 두푼 모은 정말 피 같은 돈이었다.
나는 절대 당하지 않는다고 큰소리 탕탕 쳤는데 이번에 보이스피싱을 당할 뻔했다. 이야기는 처조카로부터 카톡문자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고모부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하면서 이런저런 안부근황을 물은 후 공인인증서에 문제가 있어 송금할 곳에 송금을 못하고 있으니 고모부가 대신 310만원을 보내주면 5시전에 고모부 통장으로 다시 돈을 넣어주겠다는 것이다.
이런 돈 부탁을 할 처조카가 아니어서 의심이 되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외출중이어서 당장은 곤란하니 몇 시 까지 보내야 하느냐고 전화를 걸어보니 방금 카톡을 하고 있었는데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약간 의심이 갔다. 처조카의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언니가 이런 카톡을 보내왔는데 진짜인지 네가 확인을 해 보라고 했다. 잠시 뒤 처조카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런 카톡을 보낸 일이 없다며 누가 자신의 전화번호를 도용해서 보이스피싱을 하는 모양이라고 큰일 났다고 펄쩍 뛴다. 알고 보니 처조카의 이름을 사칭해서 여러 사람들에게 비슷한 내용의 카톡을 보내고 적극적으로 보내주겠다고 답을 해오는 사람에게만 통장계좌 번호를 알려주는 모양이다.
한참 뒤 처남댁이 전화를 해왔다. 딸로부터 돈을 보내달라는 문자를 받고 딸이 회사에서 뭔가 잘못을 해서 돈이 필요한 모양이라고 직감하고 한시바삐 보내줘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 한다. 처남은 잔치 집에 다녀와서 술이 취해 잠을 자고 있었다. 처남댁이 통장하고 도장을 챙겨서 면소재지 은행으로 달려갈 참이었다. 면 소재까지는 멀어서 걸어가기가 곤란한 거리다. 누가 차로 태워주길 부탁해보려고 운전이 가능한 이집 저집을 다녔다. 운전해줄 사람을 찾지 못하자 술이 취해 자고 있는 처남을 흔들어 깨웠다. 이러는 과정에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때 다행히 딸에게서 전화가 와서 가짜라는 것을 알았다. 처조카가 내 전화를 받고 엄마에게도 카톡을 보냈을 거라고 예측해서 전화를 한 것이 타이밍상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것이다.
부모로서 자식의 문제니 마음이 급해서 술 먹은 사람을 깨워서 운전하라고 시킬 정도다. 돈도 돈이지만 급히 은행으로 돈 찾겠다고 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사고라도 나면 어쩌겠는가. 보이스피싱이 남의 가정을 풍비박산으로 내기에 충분하다. 특히 가족에 관련된 일이라면 당황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마음이 급해져서 이성이 마비된다. 이런 약점을 범인들은 노린다.
같이 밥 먹으며 정든다. 맛있는 음식을 서로 나눌 때 기분이 좋아진다. 이때 함께 나누는 대화에는 가시가 돋지 않기 때문이다. 우울하거나 무료할 때 부엌에 들어가 냉장고를 열고 요리할 거리를 찾는다. 식재료를 내놓고 어떻게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칼과 도마를 챙기고 냄비를 꺼내면 요리사처럼 기분이 들뜬다. 그 시간은 내게 치유의 시간이며 잡념이 사라지는 행복한 시간이다. 음식이 많다 싶으면 주변의 지인들을 불러 모은다. 반찬이 많아도 좋고 좀 적어도 입담을 대신 섞어 맛있게 먹는다.
얼마 전, 식자재마트 세일 행사 전단이 신문에 끼어져 왔다. 사고 싶은 것을 형광펜 그어가며 표시하고 배달을 시켰다. 취나물 한 박스 5000원. 보통 봉지로 사던 나물 값밖에 안 했다. 두부 한 판 6000원. 만두 만들 때 사던 한 판을 두 모 정도의 값으로 팔고 있었다. 곱슬이콩나물 한 박스 3900원. 이 가격은 보통 한 봉지 값이었다. 그리고 과일 서너 가지.
물건이 도착한 후 이웃을 불러 모았다. 오기 전에 봉지에 하나하나 담아 4등분으로 준비해두고 남는 재료들은 데치고 무쳤다. 너무 싱싱해서 다시 밭으로 갈 것 같았다. 이웃 친구들이 도착한 후 내가 요리해놓은 나물들을 시식시켰다. 약간 심심해서 밥 없이도 집어 먹을 수 있었다. 이웃 친구들은 조리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기꺼이 가르쳐줬다. 다 된 음식을 식탁에 차리며 사람들을 기다리는 기쁨이 좋다.
돌아가는 이웃에게 취나물과 콩나물을 넉넉하게 담은 봉투를 안기며 두부도 함께 넣어줬다. 주는 나도 즐겁고 받는 이웃도 행복해했다. 집으로 돌아간 이웃들은 취나물을 어떻게 요리했는지, 가족들 반응이 어땠는지 수다를 떨었다. 카톡방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남편과 아이들 반응이 다르고, 결혼한 자식에게도 싸다 줬다는 이야기까지…. 나물 몇 가지로 행복한 대화를 나눴다. 이런 게 사는 재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지인이 집에서 딴 살구로 엑기스를 만들어왔다. 너무 달아서 그냥 먹기는 힘들어 요리에 넣고 있다. 살구의 상큼한 향을 더하니 나물 맛이 오묘하다. 때로는 풋사과 분말을 넣기도 한다. 이제까지 먹어본 여러 가지 음식의 다양성이 응용력을 발휘하게 한다.
그렇지만 때로는 망치기도 한다, 버섯이 한창 날 때 넉넉하게 사왔는데 한 번에 다 먹을 수 없어 버섯장아찌를 만들었다. 그러곤 레몬차를 만들어 남은 꼬투리를 몇 개 넣어봤다. 상큼한 맛을 기대했는데 웬걸, 맛을 보니 마치 음식이 쉰 것 같은 맛이 났다. 다 버려야 했다.
며칠 전에는 옥수수 한 자루를 사서 들통을 두 개 꺼내 쪘다. 자주색으로 잘 여문 옥수수였다. 찐 옥수수를 카톡방에 올렸다.
“옥수수 원하는 사람, 아파트 9블럭 놀이터 벤치로 밤 9시.”
얼마 전, 난 마늘을 받았다. 어떤 날은 오이지가 맛있게 익었다며, 텃밭의 상추와 오이, 가지를 나눠준 사람도 있다. 어느 날은 부추 한 줌, 묵 한 덩어리, 파전 한쪽. 서로를 기억하고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이 이렇게 힘 솟는 일인 줄 몰랐다. 마음에 걸림 없이 두려움 없이 사는 소박한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