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사막을 사나이가 홀로 걷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아득한 수평선엔 끝없는 모래와 하늘이 가느다랗게 맞닿아 실눈을 뜨고 있었다. 머리 위의 뜨거운 태양도 간혹 부는 모래바람도 그를 달래주지는 못했다. 발에 푹푹 파이는 모래를 바라보며 걷던 사나이는 돌아섰다. 그리고 비로소 안도했다. 모래 위로 난 자신의 발자국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너무 외로워서 뒷걸음질 치며 자신의 발자국과 같이 걸었다.
사막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르텅스 블루 -
파리 지하철 공사에서 공모한 시 콩쿠르에서 8천편의 응모작 중 1등 당선된 시다. 오래전에 이 시를 읽으며 울었다. 지독한 외로움을 겪어 본 사람은 이 시에 공감할 것 같다. 모든 사람이 외롭다. 둘이 있어도 더 많이 함께 있어도 결국은 외롭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지 않는가.
그런데 왜 그런 걸까?
인간관계가 부드러운 사람은 외로움을 느끼는 강도가 약하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자의식이 높은 사람,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더 외로움을 탄다고 한다. 종종 자기만의 세계에 갇히기 때문이다. 이기심, 욕심, 자만심이 일정 수위를 넘으면 이웃이 안 보이게 된다. 자기 입장만 주장하게 되며 다른 사람의 처지를 들여다보는 마음의 창을 닫아버리게 된다. 물론 자신을 들여다 볼 수도 없어진다. 밖을 내다 볼 수도 없어 눈 뜬 장님이 되어 버린다. 사방이 막힌 스스로의 감옥에 자진해서 유폐되는 것이다. 주변에서 불편한 사람으로 남게 된다. 아무도 그의 곁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으니 외로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외로운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바보들로부터 벗어난 ‘천재의 외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주는 방법을 한 번도 학습해 보지 못한 것 같은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것이 오히려 ‘남자답다’ 거나 ‘순진하다’는 것으로 미화되던 시대는 지났다. 모자란 건 모자란 것이다. 자연스런 감정의 교류가 있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것은 신선한 물에서 나는 향기와 같고 끊임없이 흐르며 종알대는 계곡의 물처럼 건강하다.
외로움을 극복하고 줄이는 방법으로 ‘수다’를 권한다. 카톡도 좋고 전화도 좋다. 말하기 쑥스러우면 한 마디만 해도 좋다.
“보고 싶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혀가 굳어 버리기라도 하듯 망설이는 사람도, 한 번 해보면 미안한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것 보다는 그것이 훨씬 편안하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결국은 소통인데 말만큼 쉽지는 않다.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자연스런 소통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가끔 어떤 사람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불의한 일을 보고도 공동체에서 쫓겨날까 두려워 입을 다문다. 말이 꼭 필요한 순간에도 입을 다무는 비굴한 모습을 본다. 피곤한 일에 끼어들기 싫은 것이다. 냉정하고 이기적인 모습이다. 점점 사람들이 떠난다. 신뢰할 수 없음으로. 큰 나무는 자라며 큰 그늘을 키운다.
이제 지독한 외로움에서 벗어날 우리들의 차례다.
우리 자신을 비추는 거울을 닦는다. 또 세상을 바르게 바라보는 거울을 빛나게 닦는다. 이제 밝은 눈으로 왜곡 없이 바라 볼 차례다.
어느 날 꿈속에서 남편이 어떤 여인이 불쌍해서 도와줬다면서 지속적으로 생활비를 준 것을 알고 지금까지 힘든 세월 살아온 필자가 불쌍하고 분하고 억울해서 울다가 잠에서 깼다. 꿈이어서 다행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꿈속의 그 불쌍한 여인이 필자였다면 내 남편이 얼마나 의지가 되고 힘이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누군가를 몰래 흠모하며 설레고 기분 좋았던 기억이 있다. 지금 이 나이에도 그런 감정이 생긴다면 그 또한 소중한 감정일 텐데 이미 결혼한 사람이라는 입장 때문에 그런 감정조차 갖지 말아야 하고 카톡도 문자도 전화도 만남도 안 되는 사이가 되어야 하나? 감정을 꽉꽉 누르고 연락처도 삭제하는 그런 마음으로 죽을 때까지 지내야 하나?
결론은 그래야한다. 학창 시절 누군가를 좋아해본 경험이 있기에 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멀리서 얼굴만 봐도 기분 좋고, 목소리만 들어도 설레고, 여럿이 만나더라도 함께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그 사람만 보인다. 마주 앉아 있으면 더 기분 좋고, 그러다가 더 가까이 나란히 앉아 있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살짝 손이라도 스치기만 해도 짜릿하다. 이런 감정을 알기에 차 한 잔조차 어떤 만남조차 아예 허락하면 안 된다고, 미리 방어막을 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면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철없이 신세대 젊은이들처럼 연애하며 살고 싶다.
성경 말씀에 술 먹지 마라 하지 않고 술 취하지 마라 했다. 아무리 친한 부부 동반 모임이라 해도 술 취한 상태로 남녀 모임을 오래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술 취하면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학창 시절부터 이런 고루한 말을 많이 해서 친구들이 오죽하면 필자를 빼놓고 모임을 가졌다고 고백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런 말을 하며 산다. 그래도 필자는 끝까지 그렇게 말하고 싶다. 중년의 외도로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상상해보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자식이다. 자식에게 부끄러운 부모가 되면 안 되지 않는가.
첫사랑을 찾아도 그냥 마음속으로 그 사람의 건강과 행복만을 평생 기원하다 끝낼 것이다. 누가 그런 필자를 보고 바보라 해도 그래야 한다.
2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 에는 중량감 있는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65세 사진작가 킨케이드 역으로 출연했고, 메릴 스트립은 가정주부 프란체스카 역을 맡았다. 남편과 아이들이 4일간 집을 비운 사이 킨케이드가 프란체스카의 집에 우연히 들렀다가 사랑에 빠져 정사를 나누고 갈등한다는 줄거리다. 중년의 외도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명화라며 칭찬하는 분위기다. 남녀 구분 없지만 특히 여성들이 더 열광한다. 언젠가 EBS에서 주말의 명화로 이 영화를 방영한다고 하자 주변 여성들이 꼭 보라며 단체 카톡방에 글을 올렸다. 안 본 사람은 꼭 봐야 하고 이미 본 사람도 다시 볼 만한 영화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시큰둥해했다. 서부영화에서 카리스마를 보이며 멋진 총잡이로 나왔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너무 늙어 주름이 자글자글한 것도 보기 안쓰러웠고, 그런 나이의 남자에게 프란체스카의 마음이 움직여 정사까지 나누게 되는 전개도 큰 공감이 되질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며 같이 도망가서 살자는 킨케이드의 유혹도 도덕적으로 용서하기 어려웠다. 프란체스카는 남편과 별 불만 없이 살고 있었고 아이들까지 있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카가 가정을 버리고 킨케이드를 따라나섰다면 돌팔매를 당할 만한 줄거리였다.
여성들이 남편의 외도에 대해서는 ‘절대 불가’의 입장을 밝히면서도 이 영화에 대한 평가에 관대한 것을 보면 대리만족이 아닐까 한다. 영화에서는 되고 현실에서는 안 된다는 이중 잣대인 셈이다. 우리나라 성인 남녀의 외도에 대한 조사 자료는 많다. 남자들의 외도율은 매우 높다. 여성들도 남성들보다는 낮지만 꽤 높은 수준이다. 통계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신뢰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 주변의 남자들이 예외 없이 외도 경험이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들은 성 경험이 있어야 비로소 성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군대에 입대한, 성 경험이 없는 졸병들에게 부대 인근의 매춘부를 붙여줄 정도로 남자들은 ‘숫총각 딱지’를 떼도록 강요받는다. 요즘은 성매매를 강력히 단속하고 있어서 분위기가 좀 달라지기는 했지만, 남성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여자들과 섹스할 수 있는 기회는 널려 있는 편이다.
외도의 기준이 어디까지인지는 애매하다. 배우자 이외의 이성과 데이트 정도 한 것을 외도로 보는 사람도 있고, 정사를 나눈 것만 외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남자들은 외도 기준을 상당히 깊은 관계에 둔다. 매춘부와의 섹스 정도는 외도로 보지 않는 사람도 많다. 남자의 본능 차원에서 이해돼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도 섹스를 할 수 있으므로 마음을 주지 않으면 외도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종종 여성들도 마음을 주지 않은 섹스 정도는 눈감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자들은 남편의 외도를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니 외도를 하더라도 들키지 말아야 한다.
여성들은 폐경이 되면 성욕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남성들은 여전히 성욕을 주체하지 못한다. 섹스리스 부부 중 남편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여러 가지 병이 생길 수 있다며 불만을 터뜨리지만 성욕이 떨어져버린 아내는 꿈쩍도 안 한다. 신혼부부라면 이혼 사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50대가 넘으면 애걸해봤자 “나이 들어 주책”이라는 소리만 들을 뿐이다.
가수 조영남씨가 쓴 책에 보면 5년마다 배우자를 바꾸는 공약을 내세우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개그가 있다. 남녀 모두 열렬히 동의하는데 특히 여자들이 더 뜨겁게 호응하더라는 얘기다. 생물학적으로 3년이 지나면 호르몬 작용에 의해 사랑하는 감정이 식는다고 한다. 그 무렵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가 가교 역할을 하게 되면서 부부의 정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미국 영화에는 정상적으로 부부생활을 하는 커플보다 이혼을 하거나 별거인 커플이 더 많이 등장한다. 전 남편과 현 남편이 같이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갖는 장면도 있다. 우리나라도 이혼율이 높아지면서 이혼에 대한 시각이 상당히 관대해졌다. 이제 혼인빙자간음죄에 이어 간통죄까지 폐지되었다. 개인의 사생활을 국가가 개입해 제재를 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섹스는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종족보존의 본능을 벗어나 섹스라는 쾌락을 즐길 줄 아는 동물이다. 그런 선물을 도덕적 잣대 때문에 억제하고 살아야 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각자가 알아서 처신할 일이지만, 외도는 ‘적당한 간식’이며 ‘삶의 활력소’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많다. 단, 배우자에게 들키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카톡이나 문자로 모임 공지를 하면서 약도를 올린다. 그런데 당일이 되면 약도를 물어 오는 사람들이 꼭 있게 마련이다. 약도를 그전에 보냈다고 해도 다시 보내 달란다. 약도만 보내서는 안 되고 전철역기준으로 출구번호부터 말하듯이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그렇게 해주면 좋다.
모임 공지를 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바쁘다. 여러 사람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그런 일을 잘 하기 때문에 연락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짜증을 내는 것을 보았다. 다시 며칠 전 카톡에서 약도를 찾으면 되고 간단히 인터넷 검색을 하면 바로 약도를 찾을 수 있는데 자꾸 물으니 그럴 것이다.
전철역도 귀에 익숙하지 않은 전철역은 거기가 어디냐며 묻는 사람이 있다. 전철 노선이 복잡하고 역 이름도 워낙 많다. 가보지 않은 동네에 이름도 생소하면 그럴 것이다. 개인적으로 지하철 앱이나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면 될 것인데 일단 묻고 보는 것이다. 여러 사람을 그런 식으로 상대해야 하니 연락하는 사람은 짜증이 날 만 하다.
물어 본 사람도 이유는 있다. 처음 들어 보는 역 이름이니 모임 공지를 한 사람은 그 지역을 잘 아는 사람이므로 빠른 답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연락 받은 사람은 바쁜 중에도 답을 해주어야 하는 입장이므로 짜증을 낸 것이다.
찾기 어려운 장소를 정하면 다른 사람들은 군말 없이 제 시간에 오는데 느즈막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 오는 사람들도 있다. 찾기 어려운 곳을 정해 찾는데 애 먹었다며 불평을 하는 것이다. 역시 인터넷 검색이나 지도 앱으로 길찾기 해서 찾아오면 되는데 그런 요령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봐야 본인만 바보 되는 것이다.
성질 급한 사람은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가는 길을 먼저 알리는 경우도 있다. 그 길이 맞으면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아무 소용이 없다. 안 가본 길이고 오히려 그런 지형을 찾는 것이 더 어렵다.
습관적으로 모임 시간에 늦게 오는 사람도 있다. 보통 약속시간 15분 전쯤 도착하면 가장 좋다. 초행길이므로 못 찾는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일찍 도착했으면 여유 있게 동네도 한 바퀴 돌아보면 동네와 익숙해진다. 늦게 오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올 것인지, 온다면 얼마나 늦을 건지 궁금해진다. 왔을 때에도 자리를 다시 정리해야 하고 음식이 이미 먹기 시작한 때이거나 다 먹었을 때이므로 회비 정리도 애매해진다. 자리를 옮길 때에는 더 복잡해진다. 늦으면 얼마나 늦을 것 같은지 카톡으로 상황을 알려주면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나이 들으면 무난하게 어울려야 한다. 뒤처지거나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귀찮은 존재가 된다. 본인도 불편하다.
시니어들의 모임에 나가보면 나이 들어서도 얼리어답터임을 내세우며 스마트폰을 잘 다루는 것을 대단한 자랑으로 여기고 이 대열에 끼지 못하는 다수의 노인들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꼭 있다. 무엇이든 잘하는 것은 젊으나 늙으나 좋다. 하지만 나이 들어서 스마트폰에 중독되다시피 푹 빠져 있는 분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다.
맛 집에 초대되면 진짜 이집이 맛 집이 맞는지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는 실례를 범하면서 ‘나 이런 사람이야’ 하고 자랑스러워하면 스마트폰 중독자다. 이건 초대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모욕을 주는 것임에도 본인은 눈치조차 채지 못한다. 누구도 이런 행동에 제재를 가하는 것이 아니라 능수능란한 스마트폰 사용에 부러움을 보내는 모습이 못 마땅하다. 한번만 물어보면 제대로 찾아갈 길도 사람에게 묻기보다 스마트폰에 물어본다. 도심에서도 길을 묻는 사람 보기가 점점 드문 것은 잘 정비된 건물주소 덕이 아니라 스마트폰 덕이다. 반면 스마트폰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사람과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어 사람 사는 냄새가 없어진다.
스마트폰이 잠을 잘 때도 머리맡에 있어야하고 길을 걸을 때도 주머니 속에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 회의 중이거나 대화 중에도 수시로 스마트폰을 열어서 카톡이나 문자왔는지를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앞에서 강사가 열심히 강의 하는데 죄책감 없이 스마트폰을 검색하는 스마트폰 중독자가 점점 늘어난다. 특별히 할 일 없는 노년이 될수록 이런 스마트폰에 대한 몰입도가 강해지고 심지어 취미로까지 발전시켜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걸 경계한다.
스마트폰 중독은 정신적 육체적 황폐를 불러오고 나이 들수록 그 피해는 더욱 심각하다. 첫 번째가 정신적 황폐다. 가족들의 즐거운 외식자리에서도 식구들끼리 대화에 집중하기보다는 스마트폰으로 남들과 문자 대화를 한다. 몸은 가족과 같이 있지만 마음은 딴대가 있다. 생일 같은 기념일에 축하 말을 보낸다고 인터넷이나 카톡방에 좋은 말들을 복사하여 죄의식 없이 날린다.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글로 표현해서 보내주면 좋으련만 남의 글을 내가 쓴 것처럼 도용하고도 시치미를 뚝 뗀다. 스마트폰의 전자파 위험도 있지만 인간과의 진솔한 감정 소통 부족으로 치매의 싹을 키운다.
두 번째는 육체적 황폐다. 머리나 손톱은 잘라도 다시 자라지만 인체의 오감을 느끼는 세포들은 한번 망가지면 재생이 어렵다. 스마트폰의 작은 글씨를 보려고 눈을 혹사한다. 죽을 때까지 함께 해야 할 시력이 점점 떨어진다. DMB를 통해 연속극을 보면서 귀에 꽃은 이어폰이 얼마나 청력세포를 망가지게 하는지 통 관심이 없다. 머지않아 보청기가 노인의 필수품이 될 것이다.
세번째는 사고력의 저하다. 스마트폰의 즉문즉답에 익숙하다보니 사고력이 줄어든다. 대학을 나왔어도 계산기 없으면 여럿이 먹은 밥값을 합산과 분배를 못해 쩔쩔맨다. 곱셈나눗셈은 구구단이 가물거려 붓셈으로 언제 풀어봤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린다. 남의 말을 믿지 못하고 이게 아니다 싶으면 면전에서 스마트폰의 인터넷기능으로 즉각 검색하여 상대를 머쓱하게 한다. 모든 정보는 내 손안에 있다고 인터넷 정보를 맹신하지만 다 맞는 것은 아니다. 오프라인의 공부를 하지 않으면 거짓정보와 참 정보의 변별능력이 부족하여 헛똑똑이가 될 가능성도 많다.
네 번째는 마음의 안정을 못 찾는 불안증세가 걱정된다. ‘카톡’하는 소리만 들어도 무슨 내용인가 궁금해서 참지 못한다. 수시로 스마트폰을 열어보지 않으면 안달이 난다. 혼자 스마트폰의 인터넷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혼자 고립화된다. 스마트폰과 친하다보니 사람과 사귀면서 지켜야 할 예의범절이 점점 부담스러워져 외톨이가 양산된다.
나이든 사람들은 젊을 때 하지 않던 스마트폰에 덜 익숙한 것이 당연하다 노년에 새로운 정보에 좀 어둡고 뒤 처져도 큰일 날 일이 별로 없다. 스마트폰을 들고 혼자서 길을 찾을 것이 아니라 출발전에 PC로 갈 곳을 대충 검색하고 목표지점에서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는 옛날 방식을 쓰면 된다. 남들이 맛 집이라 하면 그렇다고 믿어주고 남의 말에 검색까지 하면서 일비일희를 하지말자. 나이 들수록 느리게 살고 더듬거리며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다.
교통사고 무서워 자동차를 타지 않는다면 바보다, 조심해서 운전하고 적당히 자동차를 이용해야 한다. 스마트폰도 마찬가지로 적절하게 사용만 한다면 문명의 이기임에 틀림없다. 과유불급이라고 지나치면 좋지 않다. 특히 나이 들어 지나친 사용을 경계해야 한다.
유장휴(디지털습관경영연구소 소장/전략명함 코디네이터)
삶이 복잡해졌다면 재정비가 필요하다
새해가 밝았다. 새해에는 계획을 세우거나 재정비하는 시기다. 시간이 지나면 무엇이든 쌓이기 마련이다. 물건도 쌓이고, 추억도 쌓이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쌓이면서 생활이 복잡해진다. 단순히 정리만 하면 가벼워지는 것도 있지만, 정리보다는 리셋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리셋은 초기화라는 의미다. 처음으로 돌린다는 뜻이다. 컴퓨터가 고장 났을 때 리셋이란 용어가 종종 쓰인다. 컴퓨터가 오래되고 느려지면 파일 몇 개 지우는 걸로 해결되지 않는다. 가장 좋은 방법은 컴퓨터를 처음 산 상태로 초기화, 즉 리셋하는 것이다. 그러면 원래 성능을 어느 정도 살려낼 수 있다. 그런데 컴퓨터만 리셋이 필요한 게 아니다. 우리 생활에서도 재정비가 필요하다. 생활 속에서 도구가 너무 많아서 복잡하거나 매시간 울리는 의미 없는 단체 톡이나 밴드 알람에 짜증이 난다면, 생활은 물론 인간관계에서도 리셋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카톡, 밴드 단체방 홍수 시대! 단체톡 늪에서 빠져나오자!
카톡 단체 방이나 네이버밴드 모임 리스트를 보면서 모임 좀 줄여야지 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대부분 단체 방을 만들기는 잘하는데 단체 방에서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단체 방 숫자만 늘어나고 대화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고 눈으로 보는 눈팅만 하게 된다. 불필요한 단체 방을 나오는 것이 관계 정리의 시작이다. 중요한 모임은 활발히 교류하고 방치된 방에서는 바로 나와야 한다. 모임 공지나 빠른 답변을 할 때는 이런 단체 방이 좋은데 깊이 있는 소통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필요 없는 모임은 과감히 정리하고 정말 중요한 모임에만 집중하는 게 관계 리셋의 시작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활동하지 않는 밴드와 카톡방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나오는 순간 상대방이 알기 때문에 용기가 필요하다. 밴드에는 탈퇴 대신 밴드 숨기기 기능이 있다. 탈퇴는 안 하지만 내 눈에는 안 보여서 정리하는 효과를 준다. 티 안 나게 탈퇴하면서 방치된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이다.
공간을 리셋하는 새로운 방법, 한달살이
관계 리셋 다음에 필요한 게 공간 리셋이다. 요즘은 심플라이프를 추구하면서 집에 있는 물건을 정리하고 공간을 비우는 사람이 늘고 있다. 그런데 집 안에 있는 물건을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물건을 버리고 정리한다 해도 또다시 원상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물건을 좀 줄인다고 삶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이럴 때는 물건을 정리하는 대신 공간을 바꿔 삶의 변화를 주는 방법도 있다. 그래서 요즘 뜨고 있는 트렌드가 새로운 공간에서 살아보는 ‘한달살이’다. 한달살이는 여행지에서 한 달 동안 집을 빌려 사는 방식을 말한다. 낯선 곳에 살면서 색다른 일상을 만들어보는 한달살이는 지금 제주도에서 붐이 일고 있다고 한다. 한달살이를 하려면 한 달 동안 써야 할 물건만 챙겨가야 하므로 많이는 못 챙겨간다. 꼭 필요한 물건만 선별해서 가져가야 한다. 공간이 바뀌면 사용하는 물건도 달라진다. 어떤 사람은 설거짓거리가 가장 줄었다고 한다. 집에 있을 때는 무심결에 이런저런 그릇이나 요리 도구들을 펼쳐놓고 썼는데 새 공간에서는 꼭 필요한 그릇만 꺼내서 쓰고 음식도 간단하게 먹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설거짓거리가 줄어드는 것이다. 덕분에 여유시간이 늘어나면 책을 읽거나 취미생활에 집중할 수 있다. 한달살이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그제야 불필요한 물건들이 눈에 띄고 정리를 하게 된다. 삶에 변화를 주려면 생활 패턴을 조금씩 바꿀 필요가 있다. 연초에는 과감하게 인간관계와 공간을 리셋해보자.
◇ ‘밴드모임 숨김’으로 관계 정리하기
1. 밴드 어플을 실행시킨다.
2. 밴드 모임 리스트 중에 숨기고 싶은 모임을 선택한다.
•모임 이름을 확인한다.
•모임 이름에 있는 점 세 개 모양의 메뉴를 누른다.
3. 메뉴 중에 ‘이 밴드 숨김’ 기능을 선택한다.
•해당 밴드가 모임 리스트에서 숨겨진다.
4. 밴드가 숨겨지면 완료 메시지가 나온다.
•다시 보려면 내 밴드 편집 메뉴의 ‘숨김 밴드 관리’에서 변경 가능하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돼서 마음만 동동 구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의 부치지 못한 편지가 지난해 연말 편집부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열어보니 가슴이 먹먹합니다.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
인간의 끝이 없는 탐욕의 수렁으로 인해 빚어지는 이승의 혼탁함 속에서도, 평생 맑게 살다 얼마 전 저 세상으로 떠난 대학 과동기인 제 친구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 친구는 어느 지방대학 교수이면서 북한학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국제정치학 교수였는데, 그간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오퍼를 받았지만 끝까지 강단과 연구실을 지켜온 천생 학자였습니다. 친구는 그의 어머니께서 노산으로 낳은 막내아들로 몸이 약했는데 평생 담배를 염소같이 많이 피더니 결국 60대 중반에 폐암을 얻었고, 힘들게 치료를 해 몇 년 지나 완치가 되었나 했더니 다른 장기로 전이가 되어서 병원에서 몇 달 있다가 한 열흘 전에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저와 몇 명 안 되는 과동기들은 천안의 공원묘지에 가서 그 친구를 전별했고 공원 입구에서 산 자들은 맛대가리 없는 육개장을 한 그릇씩 훌훌 먹고 그를 남겨둔 채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카톡을 통해 그 친구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가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친우들에게
먼저 갑니다.
아직 책을 더 써야 하고 그 밖에도 못다 한 일들이 남은 것 같아 아쉬움도 있지만
게으른 천성에 지금까지 살아온 것으로 자족해야 하겠습니다.
새는 죽음을 앞두고 우는 소리가 더욱 아름답고,
사람은 죽음을 맞이함에 그 마음씨가 선해진다고 합니다.
저 또한 보다 조용하고 겸허해지고 싶습니다.
귀거래혜(歸去來兮·도연명)에서 도연명은 국화꽃 피고 술 익는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갔다지요.
저는 아지랑이 피는 봄날,
장다리꽃 위로 노랑나비, 흰나비 날아드는
어릴 때 뛰어놀던 서울 근교의 밭길을 걷습니다.
그 옆으로 이어지는 숲길도 보입니다.
그 너머로 모든 미련이나 원망, 죄의식도 훌훌 털어버리고
가을처럼 높고 푸른 하늘을 지나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곳으로 표표히 떠납니다.
인생이 한 조각 뜬구름이라 했거니와, 제게는 또한
한 가닥 미풍과 같습니다.
- ○○○ 드림
날짜는 없었습니다. 사후 발송 같습니다. 아마 떠나기 며칠 전 혼수상태 이전에 혼신의 힘을 다해 썼든지 또는 혼미한 상태에서 구술한 것을 가족이 적어놓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간 후에 발송해달라고 가족에게 부탁한 것 같습니다.
저는 발송 경위를 알아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 친구가 하늘에서 보낸 것이라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 편지를 보고 울컥 먹먹해지며, 그 친구가 떠나면서 봤을 것 같은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습니다.
영화 의 주인공 막시무스 장군(러셀 크로우 배역)이 로마의 사악한 왕에게 비겁한 공격을 받고 죽어가면서 그가 보는 장면입니다. 어떤 좁은 문을 지나 고향의 들판과 아름다운 꽃, 그리고 가족들을 파노라마처럼 보는 것이지요. 아마 동양이나 서양이나 하늘로 떠나는 사람은 고향, 특히 어릴 적 놀던 그곳을 찾아가 보는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답장을 했습니다.
자네 말마따나 게으르고 느려터진 친구가 갈 때는 왜 그렇게 성미 급하게 떠났나?
지난 5월 어느 날인가 나도 암수술 후 6개월 정기검진 때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
자네가 마침 이런 문자를 보낸 것 기억하나?
“조 사장! 수술 후 회복 잘되고 있으리라 믿소.
나는 지난달에 신우암이 또 생겨 좌측 신장 절제를 했는데
3년 전 수술한 폐암과는 다른 종류인데 모두 담배가 유력한 원인이라네.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하면서 한 번쯤 평생 담배 핀 것을 후회해볼까 생각하네.
우리 중고차 잘 유지 보수하며 삽시다.”
이런 내용을 보냈어. 내게 말이야….
그 후 9월까지 몇 번 문자를 주고받았는데 9월 이후 그렇게 급격히 악화될 줄 몰랐네.
그 성미에 아픈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결국 나는 자네 병문안도 못 가지 않았나? 어차피 우리들도 하나둘 자네 뒤를 따라갈 것이니 자리 잘 잡아놓게.
그때 가서 너무 고참 행세 하지 말고.
그는 천재였습니다. 제가 1969년에 서울대 문리대(지금은 사회대, 인문대, 이과대를 합친 단과대)를 차석으로 입학했는데
이 친구가 하필이면 같은 과에서 전체 단과대 수석 합격을 해서 나는 결국 수석도 못했고 등록금 면제 대상도 안 되게 만든 악연(?)이 있습니다.
그 당시 민주화 세대였던 우리는 극렬한 학생운동 대열에 들어가거나 일찌감치 고시공부를 해서 정부로 들어가는 두 부류가 있었습니다. 민간기업에 취직할 기회도 적었지만 말썽꾸러기 데모꾼 정치학도를 받아줄 회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제3의 길, 즉 드물게 학문을 하는 먼 길이 있었는데 그 천재는 그 먼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운이 없어서 박사학위도 매우 늦었습니다.
그는 그래도 늘 유쾌했고 잡학박사였고 잡담(농아리)의 대가로 이상파와 현실파가 다 좋아하는 뼈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그 친구의 집은 늘 우리의 아지트였지요. 밥도 제일 많이 얻어먹었는데 어머니는 늦둥이 아들 친구라고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려주었지요. 많은 추억거리가 있지만 그는 어떤 허세나 재주도 부리지 않고 올곧게 학자로만 일생을 살았고, 도대체 건강을 위한 운동이라고는 전혀 안 했고 담배만 열심히 피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던 인간입니다.
언젠가 그가 속한 학회의 회장으로서 국제학술대회를 한국에서 주최하는데 한전에서 조금만 협찬을 해달랬는데, 명분이 약하다고 못 해준 것이 지금 저는 마음에 많이 걸립니다.
요즘 많은 사람이 비슷하겠지만, 저는 매우 우울합니다. 어차피 티끌 같고 미풍 같은 짧은 인생인데, 왜 그렇게 절제 없는 욕망의 화차를 맹목적으로 몰다 온 나라의 전복을 걱정할 정도로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어야 할 신뢰가 더욱 아쉬운 이때에, 쓸쓸한 만추의 어느 날 오후에, 주변머리 없이 제 가치를 지키다 맑고 아름답게 간
친구 이야기를 두서없이 적어봤습니다.
부디 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아직도 담배 피시는 분들, 이 글 읽고 한 번쯤 금연 시도해보시지요.
지난 5년간 사용하던 스마트폰이 한 달 전부터 몇 가지 기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카메라 기능이 안 되고, 갤러리가 안 열리니 사진 전송이 안 되는 것이었다. 자주 쓰던 전철 노선도와 사전 기능도 누르면 ‘저장 용량이 모자라니 SD 카드를 장착하라’고 떴다.
이 기회에 새 기종으로 바꿀까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SD카드만 장착하면 그냥 또 쓸 수 있는데 굳이 새 기종으로 바꾼다는 것은 낭비 같았다. 그래서 여기저기 물어 보니 SD카드만 사면 간단히 해결된다는 것이었다.
우선 SD카드를 사는 것이 문제였다. 신천 역 부근에 갈 일이 있어 몇 군데 대리점에 물어 봤더니 SD카드가 없다는 것이었다. 들어갈 때는 환한 미소로 맞아주더니 SD카드 얘기를 하니 퉁명스러워졌다. SD카드를 사려면 제조사에 가야 한다고 해서 어디냐고 물었으나 불친절하게 대충 어디쯤이라고만 했다. 여기저기 지인들에게 물어 보니 ‘삼성 디지털 플라자’에 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강동 역 근처 등 몇 군데 아는 곳은 있으나 일부러 가기도 어려워 미루고 있었다.
어느 날 집근처에서 혹시나 해서 대리점에 들렀더니 SD 카드가 있다는 것이었다. 16기가짜리 인데 2만 5천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장착해달라고 했더니 가위로 포장을 뜯어 장착했다. 그러나 SD카드만 장착하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작동이 안 되었다. 내 스마트폰은 내부 메모리 장치가 고장 났으니 제조사 A/S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친 김에 물어물어 백제 고분 앞에 있는 삼성디지털센터에 찾아 갔다. 백제 고분 앞이라고 했으면 쉽게 찾았을 텐데, 대리점 마다 ‘방이동’, ‘백제 고분사거리’ 등 애매하게 얘기하는 바람에 찾는데도 힘이 들었다. 접수하고 번호표를 받아 기다리는데 20분 만에 해준 답이 수리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통화와 문자, 카톡은 되니 당분간 그냥 쓰겠다고 했더니 그러다가는 어느 날 기계가 꺼지면서 몽땅 데이터가 다 날아간다는 것이었다. 특히 저장된 전화번호가 날아가면 가장 애를 먹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서둘러 새 스마트폰으로 교체하라고 권고했다. 그 안에서 안내 받아 새 기종으로 교체해 보려고 했는데 담당자도 자리를 비웠고 별로 관심을 안 두는 것 같아 동네 대리점으로 왔다.
동네 대리점에서는 마침 손님이 필자 혼자라 1:1 상담이 가능했다. 새 기종으로 ‘갤럭시 온7’을 권했다. 한 달에 통신비가 4만 5천 원 정도 나오는데 그 가격에 기계값 1만원 포함해서 24개월 할부로 해준다는 것이다. 2년간 분실 훼손 보험료로 3,500원이 추가된다. 그간 사용하던 기계는 메모리를 다 지워 초기화해서 회사에 넘기는 조건이었다. 가장 중요한 전화번호부를 새 스마트폰에 옮겼다. 밴드도 옮겼다. 그러나 카톡은 계정만 살아 있고 그간 주고받았던 내용은 다 없어졌다. 문자도 다 지워졌다. 메모장에 메모해둔 내용도 다 없어졌다. 사진도 다 없어졌다. 앞으로는 중요한 사진은 반드시 다른데 저장을 해두라는 것이었다. 그리 중요한 사진도 없고 새로 만들면 된다. PC를 몇 번 교체하면서 저장된 것이 없어진 것을 경험했었다. 그래서 전자기기는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새 기종이라 몇 가지 손에 익지 않은 것들이 적응되면 그간 속 썩였던 문제들이 다 해결될 것이다.
5년 만에 몇 군데 대리점의 영업 사원들이나 주인들을 대하고 보니 그간 많이 친절해진 것 같았다. 아직 개인 차가 있지만, 우리 사회에 친절이 점차 자리 잡아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3년마다 기계를 바꾸는 것이 좋다는 권고도 들었다. 물론 기계 값이 들지만, 3년이 지나면 여기저기 기능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자동차나 스마트폰을 너무 자주 바꾸는 사람들을 별로 안 좋게 봤었는데 앞으로는 그래야 된다는 것이다. 과연 배터리 성능도 하루 종일 쓸 수 있어 좋고 화면도 밝아 좋았다. 그동안 왜 궁상을 떨며 고생을 감내했나 싶다. 그러나 성격 상 별 일 없으면 또 5년 정도 버틸 것 같다.
연말이 되면서 지인들로부터 수많은 안부인사가 날아들었다. 음성은 없고 문자와 그림만 있는 SNS 안부다. 고등학교나 대학교 동창들의 단체 카톡방이나 사회에서 형성된 몇 개의 커뮤니티, 그리고 몇 개의 밴드... 그 방에서 여러 사람들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연하장을 올리는 소리가 계속 징징 울렸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지는 SNS 그룹 방이 하도 많아서 일일이 답변을 달려면 하루 종일 매달려야 할 지경이다. 그 그룹마다 계속 올라오는 연하장을 보면 비슷한 것도 많고 심지어 같은 것을 그대로 퍼 나르기를 해서 감흥이 없다. 무작위로 무작정 올린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가 엮여있는 그룹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좋은 글’을 여러 개 올리는 인사는 대학교수와 공무원이다. 어디서 그렇게 ‘좋은 글’과 ‘명심해야 할 말’을 찾아내는지 신기할 정도다. ‘좋은 생각’, ‘좋은 친구’, ‘마음에 담아 둘 좋은 것 10가지’, ‘실천해야 할 ...’ 등등. 내용도 엄청 많을 뿐 아니라 글씨도 깨알 같아서 이제는 아예 읽지도 않는다. 좋은 것을 나누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의 병적으로 이런 글을 매일 SNS에 올리는 사람들은 실제 가까이 하기 어려운 성격의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제는 ‘좋은...’이라는 단어 자체가 거부감을 준다. 아마 공자도 이렇게 많은 것을 실천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 여유가 많아서 종일 좋은 글이나 올리고 있는 걸 보니 역시 대학교수나 공무원들 중에는 세상 걱정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은 가 보다. 이렇게 그들이 올리는 수많은 좋은 글 중에 그들이 일부라도 실천 하고 산다면 나라가 좀 더 나아지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연말연시에 이렇게 많은 안부인사가 날아다니는 걸 거부하는 자신을 보면서 어느 날 문득 좋은 것을 좋게 생각하지 못하는 필자의 꼬인 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이 퍼 나르기를 한 연하장이고 무작위로 올린 것이라고 해도 타인에 대한 기원의 마음을 담고 있음은 확실할 텐데 그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하장 하나를 그렸다. 경복궁 어느 처마에 올라서 멀리 서울을 바라보는 정유년 붉은 닭. ‘높이 올라 멀리보라’는 기원의 글도 써 넣었다. 그리고 SNS에 엮인 여러 지인들에게 날려 보냈다. 폭발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손 그림이라는 이유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몇몇 지인들에게는 그이 이름을 넣은 맞춤형 연하장을 그리고 그것을 그림파일로 만들어서 보냈더니 참 좋아했다.
며칠 있으면 설이다. 양력으로 새해가 되었고 음력으로 또 다시 새해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바빠서 자주 보기 힘들고 안부도 나누기 힘들지만 아직 신년의 기분이 남아있는 요즘 지인들과 서로 안부를 물으면 좋겠다. 올해 경제지표는 더 나빠질 거라는 전망이 많이 나온다. 특히 시니어들은 현실이 불안하고 미래가 불투명하다. 이럴 때 문득 보내는 안부 메시지가 조금의 위안은 되지 않을 까.
직장 후배가 내가 퇴직을 했는데도 해마다 우체국에서 구입하는 새해카드를 보내오는데 해마다 보내오는 정성도 고맙지만 그 귀한 카드를 어디서 구해오나 하고 카드 뒷면을 살펴보니 우정국 카드다. 지금은 IT산업의 발달로 다양한 그림과 문자를 카톡이나 메일로 주고받으며 종이로 된 옛날식 카드는 보기도 귀하다. 세상이 너무 급변한다. 몇 년 전만해도 년 말이면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을 보내는 것이 일상사이던 시절이 있었다. 학생들이 직접 만든 수제카드를 길거리에서 팔기도하고 서예를 배운 사람은 직접 붓으로 연하장을 쓰기도 했다. 문방구에는 형형색색의 다양한 카드가 손님을 기다렸다. 이런 내용이 불과 몇 년 만에 카드를 보기어려울정도로 세상이 변했다.
일 년 내내 전화 한통 하지 않던 사이도 몇 백 원짜리 카드를 보내면 인사치례는 한 것 같은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돈으로 쉽게 사는 카드를 회사의 책임자급은 거래처에 수 백 장의 카드를 인쇄하여 뿌리기도 했다. 평소에 아무런 안부 전화 한번 없다가 년 말에만 카드를 보내는 것이 속보이는 허례허식이라 하여 자제해야한다는 말이 차츰 나오기 시작했지만 카드를 사라지게 한 결정적인 주범은 카톡이다. 아름다운 그림과 멋진 인사말을 거의 공짜로 복사하여 여러 사람에게 보낼 수 있는 편리함이 종이카드를 몰아냈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변해도 손으로 직접 쓴 편지가 전화나 문자보다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처럼 우편함에 넣어져있는 연하 카드를 받아보면 카톡으로 받는 기분하고 또 다르다.
퇴직하여 뒷방 늙은이 처지로 후배에게 도와줄 아무것도 없는 나를 잊지 않고 해마다 카드를 보내주는 후배가 고맙기는 하지만 시류에 따라가지 않고 카드를 고집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후배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넌지시 물어봤다.
후배의 말이 ‘예의란 격식이 있어야하고 격식은 수고가 들어가야 하는데 너무 쉽게 카톡으로 보내는 인사는 왠지 경박스러운 생각이 들어서 종이카드를 고집하고 있다고 한다. 카드 사러 우체국에 직접 가서 고르기도 하고 카드 속지에 짧은 몇 마디 인사말을 쓰면서 받는 사람을 한 번 더 생각하는 수고를 하고 싶다고 한다. 직접 카드를 만들 자신은 없고 앞으로 우정국에서 더 이상 카드를 만들지 않거나 시중에서도 절판되어 카드를 구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계속 구입해서 보내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세 사람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한사람이 하늘을 쳐다보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지만 세 사람이 동시에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길 가던 사람들이 하늘에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모두 쳐다보게 된다는 것이다. 후배가 보내주는 카드를 처음에는 그냥 가볍게 인사치례 카드로만 여겼는데 이제는 달라졌다. 남들이 잘 하지 않는 행동을 해마다 계속해서 우직하게 보내주는 후배로 부터 세 사람의 법칙을 음미하고 카드 속지의 몇 줄의 글에서 후배의 속마음을 캐고 있다.
카드를 해마다 보내주겠다는 약속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세상인심이 카드를 보내는 시대가 아닌데도 계속 실천하기는 아무나 하기 어렵다. 나에게 해가 된다면 지조와 약속을 헌 신짝처럼 버리고 나에게 이익이 있으면 원수와도 동침을 하는 세상에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기 소신으로 사람 묵묵히 실천하는 후배에게 올해는 승진도 하고 행복이 충만한 한해가 되길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