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종 공해에 시달리고 있다. 어느 곳이든 한번 모임에 참여하면 어김없이 밴드나 단톡방이 생기고 그 후로 스마트폰에서는 끊임없이 비명처럼 카톡이 울어댄다. 서로 소리를 구별하려고 다양한 알림음으로 무장하는 바람에 여럿이 있을 때면 가지각색의 카톡이 합창을 하는 때도 있다. 심지어 한밤중이나 새벽에도 울어대 단잠을 깨울 때는 난감하다.
뻔히 알면서도 무시하고 잠을 청하려면 또 왠지 궁금해 스마트폰을 열고야 만다. 그러나 매번 그렇듯이 내용을 보면 중요한 정보나 공지사항은 거의 없고 시시콜콜한 개인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또 속았군. 하기야 어느 모임이 한밤중에 공지사항을 올리랴! 그중에도 제일 약 오르는 글은 위급하지도 않은 자기 자랑이다. 한밤중에 도대체 왜 자기 여행 간 이야기를 올리느냐 말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안쓰러운 느낌도 든다. 나이 들어 잠은 줄고 누구 이야기할 상대가 없으니 그저 대화에 목말라 그러려니 싶어 댓글을 달아준다. “어머 좋은데 다녀오셨네요. 축하합니다.” 보내고 나니 다시 회의가 든다.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진정한 소통일까? 확 깨버린 잠을 다시 청하려니 부아가 치밀어 결국 알림음 모드를 무음으로 전환하고야 만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두드러진 점 중 하나가 ‘초연결사회’라고 한다. 하긴 이젠 나이를 불문하고 손마다 전화기가 한 대씩 들려 있으니 어디 도망할 구석도 없다. 게다가 위치 정보를 켜야 할 앱이 많아 다른 사람이 나의 위치까지 손금 보듯 아는 세상이다. 그뿐 아니라 이젠 생명 없는 냉장고까지도 나에게 연락해 오는 정도이니 그야말로 울트라 초연결사회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렇게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면 인간들은 더욱 가까워지고 친밀해져야 할 텐데 실상은 정반대로 흘러가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요즘 시장의 트렌드로 급부상하고 있는 것이 ‘혼밥’, ‘혼술’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데 거기서 끝이 아니다. 나 홀로 문화는 계속 진화하여 ’혼영‘(나 홀로 영화), ’혼행‘(나 홀로 여행) 등 여러 가지 버전이 속속 등장하는 중이다.
미국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독 비즈니스’가 뜨는 중이란다.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배우 척 매카시는 사람들과 산책을 함께해 주고 돈을 버는 ‘친구 대여(Rent-a-Friend) 서비스를 시작했다. 집 근처 공원이나 거리를 고객과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대가로 1마일(1.6km)당 7달러를 받는데 이 사업이 번창하여 어느새 조수들을 고용할 지경이란다.
예전 우리는 고독을 금기시했다. 학교에서도 사회성을 중요한 인성으로 가르치고 장려했다. 그래서 함께 어울리는 프로그램도 만들고 보이스카우트니 걸스카우트니 하는 단체에 소속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초연결사회라는 현대에 와서 남과 어울리지 못하는 고독이 자연스러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고독 산업’까지 생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경제성장의 쇠퇴로 사회가 해체되어 1인 가정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현실은 오늘날의 고독이 다분히 사회적 현상임을 암시한다. 싱글 증가, 저출산, 황혼이혼, 가정 해체 등 지금의 문제들이 다양한 현상처럼 보이지만, 실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한밤중 카톡이 울려대는 것도 알고 보면 늦여름 처연한 매미울음처럼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일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며 심호흡을 하고 슬며시 스마트폰의 알림 모드를 무음에서 소리로 전환했다.
“오늘 당신 딸은 더없이 아름다운 오월의 신부였다오”
‘2017년 5월 28일 오후 5시 더 라움 4층’
전달 중순쯤 날아온 카톡 메시지다. 놀라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겹친다.
벌써 일년! 세상사가 무상하다지만 생사의 갈림길은 언제여도 쉽지 않다. 성여사는 20년 지기 필자의 지인이다. 초등 1학년 아이의 학부모로 아파트 이웃에서 시작 된 인연이 결혼식을 알리는 사이로 이어 온거다.
작년 이맘쯤! 필자 여식의 혼례를 무사히 마치고 기분 좋은 피곤함을 즐기고 있었다. 신혼여행을 떠난 신참 부부에게 축하와 당부를 전하며, 축하해 준 지인과 친인척들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느라 분주한 며칠을 보냈다. 그 와중에 받은 부고 소식에 순간 감전되었다.
병고에 투병 중이던 지인이 생을 달리했다는 소식은 몇 번을 들어도 믿기지가 않았다. 결혼 전에 찾아가서 인사를 시킬까 했다. 아니 신혼 여행 다녀와서 시간을 내봐야겠다고 미루어 두었던 자신을 탓하였다. 삼오제 후에도 한동안 충격이였다. 자기 탓이라며 격하게 슬퍼하는 지인의 둘째 딸아이 고백에도 위로의 말을 찾을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보낸 지인과의 마지막 대화가 좋은 사윗감을 찾아봐달라는 것이였음을 늘 부채처럼 지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일 년이 흐르고 지인의 큰딸아이 혼례에 참석하게 되었다. 단아하게 꾸민 신부대기실에 앉아있는 아이를 보니 급 마음이 내려앉는다. 그 친구가 그립다. 어디선가 분명 보고 있으리라 믿지만 아쉽고 아쉽다. 많이 좋아라 했을텐데...
5월의 신부답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울컥한다. 드레스, 신혼집, 가전제품, 만만치 않은 혼례준비를 혼자하느라 애썻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리다. 활짝 웃으며 인사를 전하는 신부의 옆모습에서 제법 어른스러움이 보인다. 화촉점화를 생략했다는 신부아버지의 멘트에 또 한번 빈자리를 떠올리며 안녕을 빌어본다.
아침고요 수목원, 남이섬, 수많은 맛집들.....아이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무탈무고하게 잘 자라 인생의 반려자를 맞이한 우리 모두의 아이들에게 축복을 빈다.
“성여사! 장모됨을 축하해요!”
아내는 집을 7일씩 비운 적이 거의 없다. 장남인 필자에게 시집와서 아이 둘을 키우고 시어머니를 모시는 와중에도 필자의 네 동생들 학업을 지원하느라 적잖은 고생을 했다. 그뿐인가? 명절 때는 처가가 멀리 있는데다 시집간 동생들이 시차를 두고 인사를 와서 친정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누가 처갓집이 멀수록 좋다고 했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요즘에는 아들 둘이 다 결혼해서 우리 부부는 젊어서 제대로 누리지 못한 인생 2막의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다. 게다가 아내는 무려 15일간 친하게 지내던 동네 주부들과 동유럽 여행을 함께 다녀왔다. 아내에게 그런 여유가 생긴 건 좋았지만 아내의 빈자리는 너무 공허했다. 아내는 혼자 있을 필자를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미리 준비해놓고 떠나 숙식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아내가 없는 침실은 쓸쓸했다. 특히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필자를 기다리는 아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허전했다. 마치 아내가 멀리 떠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필자가 직장생활을 할 때 1개월 이상 해외 장기출장도 했고, 1년 이상 파견근무도 했는데 그때 아내와 우리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바쁘게 직장생활을 하느라 아무 생각 없이 지냈는데 시니어의 삶을 사는 지금은 아내가 없는 보름간의 시간이 너무 공허하고 힘들었다.
아내가 없는 보름이라는 시간은 마치 먼 훗날 우리 내외 중 한 명이 저세상으로 갔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예행연습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내의 빈 공간이 그렇게 크고 넓을 것이라고는 이전에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내가 돌아오면 그동안 고생한 세월에 대해 고맙다는 표현을 하고 그만큼 더 잘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내가 동유럽 여행 중에 보내주는 문자와 카톡으로 보내오는 사진은 마치 천국에서 보내주는 선물 같았다. 그렇게 반갑고 기쁠 수가 없었다. 필자도 과거에 회사 다닐 때 아내와 함께 다녀온 북한의 겨울 개골산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아직 건강해서 하고 싶은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필자가 직장 다닐 때 퇴직하면 함께 세계여행을 다니자고 아내에게 약속한 적이 있는데 아직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아내는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다 도저히 현실성이 없다고 보고 동네 친구들과 유럽행을 결심한 것이다.
아내가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후 혼자서 생활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아내가 여행 중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행복했다. 여행을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 혹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미안함도 들었다. 앞으로 우리 부부는 이행해야 할 숙제가 남아있다. 아내가 친구들과 서유럽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필자와 함께 간다고 빠진 적이 있기 때문에 서유럽 여행은 꼭 함께 해야 한다.
나이가 들다 보니 시간과 돈이 문제가 아니고 건강이 제일 걱정이다. 요즘 아내는 과거에 비해 몸이 많이 안 좋아졌다. 지난 2개월간 허리 통증으로 힘들어하더니 요즘은 다리가 아파 계속 병원과 한의원에 다니고 있다. 쉽게 낫을 것 같지 않아 걱정이다. 여행 약속은 건강이 허락할 때 빨리 이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필자는 간곡한 화살기도를 하고 있다. 아내가 하루빨리 회복해 옛날처럼 산행도 하고 여행도 함께할 수 있도록 건강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번에 건강을 회복하면 더 나이 들기 전에 서유럽 여행 약속부터 지켜야 할 것 같다.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주변에서 모두 부러워한다. 시니어들의 버킷리스트에 예외 없이 들어 있는 항목도 여행이다. 여행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치부하는 분위기인 것이다. 여행 가방을 꾸리면서 과연 여행은 무조건 좋은 것인지 생각해봤다. 물론 마주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 등은 좋다.
필자는 여행 가방이 간단하다. 늘 메고 다니던 배낭 속에 세면도구만 더 넣는다. 해외여행을 할 때는 여권과 약간의 외화가 추가된다. 여행을 많이 다녀본 결과 얻은 노하우다. 처음에는 책도 여러 권 넣어 갔고 옷도 속옷에서부터 겉옷까지 여러 벌 가지고 갔다. 그러나 막상 힘들게 지고 간 배낭 속 물건들을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책도 어쩌다 시간이 나면 몇 페이지 펼쳐보지만 대부분 그럴 시간이 없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가까워지면 같이 대화라도 나누는 게 자연스럽지 혼자 책을 볼 분위기는 아닌 것이다. 장시간 타고 가는 비행기 안에서도 가져간 책보다는 공짜 영화나 기내 서적을 보는 편이 더 낫다.
발트 3국으로 떠나는 이번 여행은 조건이 많았다. 인솔자가 필자에게 댄스 강습 준비를 해오라는 것이었다. 무도장에도 갈 계획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 일단 드레스코드를 갖춰야 한다. 정장에서부터 구두까지 제대로 갖춰 입어야 입장도 가능하고 춤을 출 때 모양도 난다. 수영복도 가져오란다. 수영장에서 할 이벤트가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짐이 늘어났다.
여행, 특히 해외여행은 익숙한 것들과의 잠시 이별이다. 늘 먹던 한식, 늘 보던 정다운 사람들, 몇 분 단위로 점검하던 카톡이나 메시지, 늘 하던 일들을 잠시 중단해야 한다. 물론 새로운 음식, 새로운 사람들, 관광 등 신나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다. 집에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다. 입고 싶은 옷도 편하게 골라 입을 수 있다. 먹고 싶은 것도 늘 가까이에 있다. 그 외에도 자질구레하게 필요한 것들이 손만 뻗으면 다 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면 이런 익숙한 것들을 다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지인 중에 장기 계획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는데 짐을 분실해서 그냥 귀국해버릴까 하다가 스케줄대로 여행을 다 끝마치고 온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필요한 것들이 없으니 상당히 불편했는데 적응하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하더라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면 여행 경비도 만만치 않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느끼는 부담감, 출입국에 따르는 불편함과 지루함,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부담감, 한국을 떠나 있을 동안 못하게 될 일이나 미뤄야 할 일 등이 여행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그래서 여행은 이 모든 불편함과 금전적, 시간적 소비를 기꺼이 감수할 만한 것이어야 가치가 있다. 올해부터 기회만 되면 여행을 떠나겠노라 마음먹었다. 과연 여행은 좋기만 한 것인지 이번 기회에 곰곰이 생각해볼 것이다.
필자는 슬하에 아들만 둘을 두었다. 딸 하나를 더 갖고 싶었지만 관상쟁이로부터 사주팔자에 아들만 셋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 딸 갖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니 남의 집 딸들만 봐도 사랑스러웠다. 딸 갖기를 포기한 이유 중 하나는 아들 둘이 너무 활발한 삶을 살았던 탓도 있다. 결혼 전 자식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지만 세월이 흘러 시대가 바뀌니 자식 양육도 옛날 같지 않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이 가끔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들들이 성장해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마친 차남은 울산에서, 육군 학사장교 출신인 장남은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그 뒤 혼자 가족이 살던 집을 지키고 있던 둘째가 마침 혼기가 찬 여자 친구가 있어 먼저 결혼을 허락했고, 현재 아들을 놓고 잘 살고 있다. 울산에서 가족과 함께 살던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튼 둘째 내외는 집 사기 힘든 시대에 어쩜 복이 많은 아이들인 것도 같다.
작은 며느리는 손자가 커가는 사진을 수시로 카톡으로 올리거나 한 주가 멀다 하고 화상통화를 해서 우리 부부를 즐겁게 해준다. 필자의 아버님은 효자였다. 그 핏줄이 이어졌는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손자들이 일찍 작고하신 아버님의 효심을 그대로 빼닮아 참 고맙기도 하고 장하기도 하다. 물론 가끔 필자의 투박한 말투를 닮은 둘째가 눈에 벗어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작은 며느리는 결혼 전 필자를 처음 만나 인사하는 자리에서 남편이 될 우리 둘째를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당돌한 이야기를 해서인지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실제로 집안일이나 무슨 일을 할 때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할 정도로 아주 일을 잘하는 며느리다.
첫째는 결혼 결심을 늦게 해서 둘째보다는 좀 늦게 결혼을 했다. 아직도 신혼의 꿈을 즐기고 있는 큰아들이 몇 주 전에 우리를 초대해 퓨전음식을 대접했는데 요리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레시피를 보고 했다는데도 마치 프로가 만들어낸 요리를 먹는 듯 맛있었다. 특히 정성을 들여 만든 하트 모양의 전은 너무 예뻐서 먹기가 망설여 질 정도였다. 두부와 함께만든 고기 요리 또한 일품이었다. 맛과 모양이 함께 뛰어나니 어느 유명 레스토랑에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은 것 같아 며느리에게 금일봉을 주면서 칭찬을 해줬다. 음식솜씨가 남다른 큰며느리임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큰며느리의 100세 시대 행복한 삶을 위해 필자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당장 생각이 나질 않는다.
서울 사는 큰며느리는 제사와 명절 때 빠지지 않고 일찍 와서 시어머니와 제사 음식을 준비한다. 그 모습이 참으로 든든하고 좋다.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필자 아내가 늘 혼자 고생하면서 준비를 했는데 며느리가 손을 보태니 너무나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물론 둘째 며느리도 차례에 참석할 때는 손위 형님을 깍듯이 대하며 우애 있게 잘 지내는 것 같다.
어느 날 우리 부부는 큰아들 부부가 좋아한다는 간장게장을 담아주기 위해 함께 노량진 수산시장을 찾아가 봄에 가장 맛이 좋다는 암꽃게를 샀다. 아내는 처음 만들어본다는 꽃게 간장게장을 정성들여 만들어 아들들에게 보냈다. 아들과 며느리들은 맛이 환상적인 게장이라며 감사인사를 했고 그날 아내는 내내 행복해했다. 요리솜씨가 좋은 필자의 아내는 둘째 아들 내외가 명절에 올라올 때마다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잔뜩 챙겨준다. 둘째는 명절 귀갓길에 짐꾼 노릇을 하느라 힘들었을 것 같다.
우리 며느리들은 박사도 아니고 절세미인도 아닌 평범한 며느리들이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소중한 며느리들이다. 두 아들 내외 모두 화목하고 서로 위하면서 살고 있으니 이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이웃에 사는 어느 집 며느리는 얼굴도 예쁘고 똑똑하다고 소문이 났지만 남편과 신혼 때부터 불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 한 번은 육탄전을 벌이며 대판 싸워 이혼 직전 상태까지 갔단다. 아내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그 집 시어머니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우리 집 며느리들은 남편을 위하고 동서간의 우애도 좋으니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운지 모르겠다. 내년 새해 며느리들에게 주는 절값은 금년의 배로 올려줘야 할 것 같다.
주말 퇴근길 혼자 터벅터벅 걸어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다,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텁텁한 공기만 꽉 차 있는 실내, 순간 엄습해오는 불안감. 거실은 물론 방마다 불이란 불은 죄다 켜본다. 또 양쪽 화장실에, 베란다까지 구석구석 다 훑은 뒤에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오늘은 창문을 모두 닫아걸자. 왜? 나 홀로 집이기 때문이다.
“썰렁하니 음악이라도 좀 틀어볼까? 아니다, 그냥 TV나 틀어놓자.” 고교 시절 를 무척 즐겨 들었던 시절이 있었지. 이후 대학에 진학하면서, 또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선 라디오 프로그램은 아예 딴 세상 이야기가 되고 말았지. 배경음악과 함께 녹아내리는 목소리로 들려주던 ‘심쿵’ 사연, 까닭 모를 아련함에 밤을 새우며 써내려간 부치지 못한 편지들. 기다리던 노래는 때마침 흘러나오는데 “오 마이 갓! 그 많던 공테이프는 다 어디로 갔나?”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자취를 감춘, 내다 버린 기억은 분명 없는데 집구석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아! 젊은 날의 흔적들이여~ 정녕 다시 돌아올 수 없단 말인가?
불청객은 바로 그즈음에 등장했다. 적막을 깨는 휴대폰 벨소리. 달콤 쌉싸름했던 잠시나마의 시간여행에서 냉큼 현실로 돌아온다. “아빠 저희 잘 도착했고요. 지금 저녁 먹고 있는데 아빠는요?” 살뜰한 큰 녀석이 카톡으로 인증샷을 보내줬다. 마당에서 고기를 굽는 장인, 주방에서 밥하고 계신 장모, 모처럼 방문한 친정집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는 아내, 그리고 나란히 앉아 휴대폰 삼매경에 빠진 사춘기 두 아들의 모습에 가만히 미소를 지어본다.
긴장이 풀리고 연휴도 한몫했을 터다. 오전 10시경 부스스 눈을 떠보니 베란다 창을 뚫고 들어온 태양이 눈을 위아래로 흘기고 있다. 머리맡의 빈 맥주 캔은 보초를 서고 있다. 늦게까지 멀뚱거리다 기어코 한 편의 영화를 챙겨보느라 늦잠을 자고 말았기 때문이다. 라는 영화는 도대체 제목이 생뚱맞다. 악한을 연기한 주연배우의 동전 게임과 산소통 장면만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 좀 더 잘까나?” 그 순간 노란 포스트잇을 발견한다. 목이 말라 냉장고 문을 열려던 순간이었는데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지 않는 걸까.
깨알 같은 글씨로 써내려간 쪽지엔 숙제가 가득하다. 청소기 돌리기, 쓰레기 버리기, 화분에 물주기, 빨래 널기 등은 그래도 괜찮다. 락스 뿌려 화장실 청소하기(뿌리고 난 후 약 1시간 뒤에 솔로 잘 문질러야 타일 틈새의 곰팡이를 제거할 수 있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였다)는 좀 심하지 않나? ‘가정의 달 특집’이라나 뭐라나!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나 않지.
순전히 필자의 착각이었다. 연휴에 혼자 집에 있으면 시간도 아주 천천히 갈 테고, 미뤄왔던 소소한 버킷리스트를 완전 달성할 줄 알았는데 웬걸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너무 여유를 부린 걸까? 일주일이 슝~ 지나가버리고 다시 금요일 오후, 지하주차장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경적소리에 필자만의 시간은 그대로 정지되고 만다.
뭘 또 저리도 잔뜩 챙겨온 걸까? 칠순을 훌쩍 넘긴 장인장모께선 또 얼마나 바리바리 싸주셨을까? 출가한 아들이 둘씩이나 있지만 여태 친손자를 보지 못한 두 분은 그래서인지 필자의 아들들을 무척이나 챙겨주신다. 오이소박이, 겉절이물김치, 부추무침, 참기름, 들기름에 소백산 자락에서 직접 캔 쑥으로 만든 쑥떡까지 보내주셨다. 참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 저녁엔 밥도둑이 따로 없으리.
5월 연휴에 맞이한 일주일간의 나 홀로 집에! 그러나 혼자는 없었고 참 따뜻한 가족이 있었다.
드디어 인생의 버킷리스트 하나이던 헌혈 50회를 하고 적십자사 총재로부터 금장을 받는 일을 이루었다. 한마디로 기쁘다. 무엇보다 필자를 건강하게 낳아주시고 별 탈 없이 길러주신 부모님이 제일 고맙고 부모님 생각이 간절했다. 필자는 선천적(?)으로 적혈구인 헤모글로빈이 적게 생성되어 헌혈 50회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피를 만드는 것은 신의 영역이다. 현대 의료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피는 인공적으로 만들지 못한다. 동물의 피를 사람의 몸에 대신 넣어다가는 큰일이 난다. 천년을 산다는 거북이나 학의 피도 사람에게는 소용없다. 오직 사람에게는 사람의 피만 필요하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피라하여 다 같은 피도 아니다. A형도 있고 B형도 있다. 사람의 피는 사람에 의해 사람만을 위해 사람의 몸에서만 만들어야 한다. 인체에서 피의 제조는 드라마틱한 종합 예술이고 피를 만드는 것은 인체 창조의 영역이다. 결과적으로 헌혈은 사람에 의해 사람 만을 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람 사랑이다.
피는 인체정보의 보고이며 건강의 상징이다. 혈액형은 유전이 되므로 부모 자식을 알아본다. 피 속에는 50여 가지가 넘는 건강정보가 들어있다. 당뇨, 고지혈증은 물론 간 기능 상태나 각종 암의 생성 여부도 알아낸다. 건강을 평가하는데 깨끗하고 영양소 있는 건강한 피가 온몸을 구석구석까지 잘 순환하면 건강한 사람이다. 피가 몸을 돌지 않으면 살이 썩는다. 피는 혈관을 통해서만 이동해야 한다. 혈관이 터지면 죽거나 병신이 된다. 장수의 바탕은 건강한 피와 혈관이다.
헌혈하기 위해 헌혈의 집에 가면 헌혈자의 건강상태( 체중, 혈압은 물론 헌혈 주기를 적정하게 지키고 있는가? 위험지역(외국과 국내지역 모두 포함)을 방문(숙박)을 하였는가? 를 확인한다. 수 십 개 항목의 문진을 통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의 헌혈은 받아주지 않는다. 건강한 피 인지 전혈비중을 체크하는데 그 수치가 기준치인 1.052에 미달하면 또 불합격이다. 필자는 이 기준치에 미달되어 불합격을 많이 받았고 헌혈하러가서 못하고 돌아올 때의 그 씁쓸함은 송충이 씹은 맛이었다. 불합격된 날은 혈액속의 철분을 보충한다고 시장 통에 가서 동물의 피인 선지를 듬뿍 넣은 선지 순댓국이나 순대를 사먹기도 했다. 병원에 가서 빈혈 원인을 분석한다고 종합 진찰도 받고 철분제도 사먹어 봤지만 효과는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체질문제로 생각한다. 다만 지나친 운동이 빈혈을 불러온다고 믿고 있다.
필자가 헌혈하는데 부적합한 몸이기 때문에 헌혈 금장을 받으려고 더 안달을 하였다. 남들처럼 쉽게 쑥쑥 피를 뽑아서 헌혈이 가능했다면 결코 헌혈을 버킷리스트에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헌혈하기 적당한 몸을 만들기 위해 운동(지나치면 헤모글로빈이 감소한다.)과 균형 잡힌 식사를 하여 건강한 혈액을 만들기 위해 늘 신경써왔다. 먹은 것이 피를 만든다. 남들에게 건강하고 신선한 피를 제공하기위해 좋은 것을 먹으려고 노력했다.
헌혈 금장을 받고 집에 와서 부모님 산소 쪽으로 큰절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족 단체 카톡방에 기쁜 소식을 알렸다. 건강하게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부모님께 고맙다는 말을 의식적으로 함께 올렸다. 자식들이 내 본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옛 성인의 말에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불감훼상이 효지시야라》했다. 머리카락 하나라도 자신의 몸이지만 부모로부터 받았으므로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스스로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 효도의 근본이다.
카톡을 보고 눈치 빠른 자식들의 반응이 온다. 손자, 손녀들이 할아버지가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 사진 모습을 보내왔다, 아이들도 아버지처럼 건강관리를 잘 하고 싶다는 부러움을 카톡에 올리면 영웅이 된 듯 어깨가 으쓱해진다. 세상을 살아보면 남을 도울 일도 너무 많고 어른으로서 모범을 보일 것도 많은데 그중 하나가 헌혈이다. 헌혈 금장을 받는 아비의 모습을 자식들이 본받길 희망한다.
미술을 애호하는 의사? 의료활동을 가끔 하는 미술 전문가? 이성낙 가천의과대 명예총장(79)을 지칭할 때 헷갈리는 이름표다. 베체트병 최고의 권위자인 그는 가천의과대 총장 퇴임 이후 일흔의 나이에 미술사 공부를 본격 시작했다. 의학 박사이자 미술사학 박사로서 그는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는 한편, 다양한 매체에 문화 관련 칼럼을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젠 문화인으로서의 명성과 활동이 의료인의 경력을 압도할 정도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인터뷰를 약속한 날, 그는 최근 한 달여 유럽 미술관 전시회를 혼자 순례하고 왔다며 문화의 향취에 젖은 표정이 역력했다. 사진 촬영을 생각지 못하고 평상복(?) 차림으로 와 어쩌냐고 걱정을 했지만 중절모에 세련된 비즈니스 캐주얼, 적당히 손때 묻은 가죽가방을 멘 차림은 단아한 문화인 그 자체였다.
퇴임 후 미술사 공부를 시작,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취미로 즐기셔도 될 텐데 굳이(?) 박사학위에 도전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한국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연구, 이것은 한국에서 저 말고는 할 수 없는 분야란 절박감과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간 모은 자료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가 된다. 내가 책임지고 반듯한 논문으로 남겨야 국내외로 인용될 것 아닌가’라는 사명감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2008년 총장직을 사임하고, 사석에서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관련 자료가 많은데 어떻게 넘겨줄지 고민 중’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때 좌중에 있던 유홍준, 이태호 교수가 ‘대학원에 들어와 연구’를 하라는 조언을 하더군요. 그 말이 제가 평소에 갖고 있던 사명감을 부추겼다고나 할까요.”
그가 피부과 교수로서 초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4년 뮌헨의과대학 졸업 종강강의 ‘예술작품에 나타난 피부병’을 듣고부터다. 당시 청년 의사 이성낙은 ‘예술을 의학적 시각에서도 접근할 수 있겠구나’ 하고 비로소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이후 유럽 미술관을 다니며 자료 수집을 하고 틈틈이 공부도 해왔다. 그 열매가 50여 년 만에 맺어진 셈이다.
피부병변을 통해 밝힌 한국 초상화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우리 선비문화의 정직성입니다. 죽기 전 영정에 해당하는 초상화들을 보면 중국, 일본과는 큰 차이가 있는데 바로 정직성입니다. 자료를 본격 수집하기 전엔 우리나라 초상화에는 피부병이 나타나 있지 않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관찰해보니 우리나라 초상화의 83%에서 피부병이 확인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단지 17%만이 정상적인 피부란 이야기인데요. 예컨대 서예가 추사 김정희 선생님은 살짝 곰보였습니다. 이는 전기 등엔 안 나오는 사실이지요. 초상화들을 보면 곰보 자국, 여드름 자국, 다모증 등 실물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시의 초상화는 수염을 그리지 않았지요. 다시 말해 그리는 사람이나 초상화를 요청한 사람이나 담담하게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고 그리게 한 것이지요. 피사체가 장바닥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상위층 양반 그룹이라 지시를 통해 그리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담담하게 다 드러내 그리도록 한 것이지요. 조선 선비정신의 진수를 보는 것 같아 희열을 느꼈습니다.”
일흔의 나이에 전혀 다른 분야, 늦깎이 공부에 도전하셨습니다. 취미로 하셨다 해도 녹록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대학원생이나 교수진이 부담스러워하진 않던가요?
“퇴직하고, 2009년에 명지대에서 미술사 석·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지요. 공부도 힘들고, 주위의 눈길도 신경 쓰이긴 했지요. 또 뭘 읽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그렇다고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는 한 번 읽었다면 지금은 두세 번 반복해 읽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지요(하하). 입학 전부터 전직(前職) 명함의 권위에 기대지 않겠다고, 그런 뒷소리를 듣지 않겠다고 단단히 각오했어요. 내 전직이 무엇인지 다 아는데,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했답니다. 설렁설렁 한다고 할까봐 강의 15분 전에 출석하고, 강의가 끝나면 맨 마지막에 나오는 등 성실한 학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100퍼센트 출석은 물론이고요. 무엇보다 큰 기쁨은 강의를 통해 그간의 부분적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구슬이 한 줄로 꿰어지는 기쁨에 비유할 수 있어요. 늘 가르치던 입장에서 배우는 입장으로 돌아가 젊은 30대들과 동료가 된 재미도 적지 않았습니다.”
아주대 의대 학장과 가천의과대 총장으로 지내던 시절, 예술·인문·문화학을 정규 강좌로 개설해놓고 의학도들에게 의무적으로 듣도록 하셨습니다. 인문학을 이처럼 앞장서 강조해온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인문학은 공감학입니다.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고 성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요. 공연, 전시회, 책을 보며 우린 사람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돌아보고 경계하게 됩니다. 영국에선 유명 연극배우에게 ‘Sir’라는 칭호를 줍니다. 정치가, 기업인보다 높이 평가하는 거지요. 배우는 황제, 살인자, 거지 등 인간의 다양한 삶을 펼쳐 보이며 다양한 인격을 구현해냅니다. 또 문학 서적을 읽으며 그 안에서 비겁한 사람도 보고, 정의로운 사람도 보고, 용감한 사람도 봅니다. 그들의 갈등을 제3자의 눈으로 보며 경계하고 배울 것이 무엇인지 의식을 갖게 하는 것, 그것 때문에 예술과 인문학이 중요하지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 의료인에게도 특히 필요한 학문입니다.”
실제로 총장님 삶에서 인문학과 예술이 문제해결의 마스터키로 작용한 적이 있는지요?
“(하하) 네, 제가 독일 유학을 갔을 때입니다. 1950년대 말이니 한국인 유학생이 흔치 않을 때였지요. 기숙사 룸메이트가 저를 노골적으로 무시했습니다. 늦은 가을 기숙사로 들어가는데 룸메이트가 베토벤의 을 듣고 있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베토벤!’ 하고 탄성을 질렀지요. 그날 그 말을 들은 친구와 밤새도록 베토벤 얘기를 했어요. 그 전까지는 한 달 동안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사이였는데 말이죠. 문화 예술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한 덕분이지요.”
인문학은 세대, 국가, 민족을 넘어 소통과 공감의 가교로 자리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진정한 교육은 잘난 사람, 있는 사람이 아니라 못난 사람, 없는 사람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명문대 진학률을 평가의 잣대로 삼는 현행 입시체제는 잘못됐다, 사람의 아픔에 연민을 느끼고,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인문학적 교육 인식이 필요하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흔히 십년지기(十年知己)라는 말도 있듯이 십 년 이상 알고 지낸 사이를 오래된 인연이라 표현합니다. 총장님을 안 지 저도 십 년 이상 됐는데요. 뵈면 ‘70년지기’ 유치원 친구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며 친하게 지내시는 모습이 참 정겹습니다. 인연을 오래 유지하시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살아보니 사람에게 복 중의 최고 복은 인복(人福)이더군요. 돌이켜보면 친구, 학교 은사 등 제 주위엔 늘 인간적으로 훌륭하신 분이 많았습니다. 천운이라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분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떨리고 행복해져요. 이들과의 귀한 인연을 돌이켜보니 공통점은 지속성입니다. 인간관계를 오래 유지하려면 지속적으로 가꿔나가야 합니다. ‘이 사람이 유용하다, 아니다’라는 계산에서 탈피해 순수하게요.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용건이 없어도 안부를 묻고 꾸준히 관심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나의 우정 유지 방법입니다.”
그는 마르부르크대 의예과에 들어가 처음 만난 독일 친구와 아직까지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전화를 하고 2014년 박사학위를 받을 때는 부부가 함께 한국까지 일부러 와서 축하를 해주었다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는 신록의 연둣빛에 감탄해 “문득 네가 생각났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진을 보내니 바로 “어디에서든 우리에겐 봄소식이 들려온다”고 답장이 왔단다. 삶의 진정한 행복은 큰 행운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의 소소한 일상 나눔에 있다는 고백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에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른들은 신세대에게 자신들의 풍부한 경험을 나눠주고 싶어 합니다. 신세대는 ‘꼰대의 잔소리’로 거부감부터 표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총장님의 세대 간 소통의 지혜는 어떤 것인지요?
“한마디로 역지사지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입장을 바꿔 미리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되도록 가르치려 들지 않아요. 지나가는 말처럼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지요.”
이외에도 이 총장이 잘 쓰는 세대 간 소통 방법은 시사 현안을 갖고 그때그때 간단한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그는 미술을 전공하는 손녀와도 현안에 관한 미니토론을 카톡으로 소소하게 나누곤 한다. 얼마 전 마네의 그림 를 패러디한 을 국회의원회관에 전시한 것이 문제됐을 때도 “예술에 있어서 역지사지란 무엇인가, 예술가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등을 생각해보면 좋겠구나” 하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간단히 코멘트를 해주며 손녀와 대화를 했다. 일방적인 주입보다는 사고의 확장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도하는 식의 대화 방식이다.
자제, 제자분들에게 평소 강조하시는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지요.
“첫째도 둘째도 정직입니다. 제가 의미하는 정직은 자기관리를 솔선수범해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퇴직할 때 ‘대과(大過) 없이 마쳤다’란 말을 관용어처럼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혼탁한 현실에서 막상 이를 실천하려면 쉽지 않습니다. 부정이 만연한 사회에서 대과 없이 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소극적으로 들리지만 적극적 행동강령이에요. 운도 정직에서 비롯되고, 불운도 정직하지 못한 데서 온 것입니다. 예전에 선현들은 무첨(無添), 즉 선조에게 죄를 더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욕되게 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고리타분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살수록 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조, 가족, 자식 앞에 부끄럽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당당한 삶을 사는 것, 그것 이상이 있을까요. 담담해야 당당할 수 있고 욕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의 아들이 회사에 갓 입사했을 때 제일 먼저 강조한 것도 돈에 대한 정직이었다. 그것의 구체적 행동강령으로 ‘현금을 수금할 때 당일 보고, 당일 입금’을 실행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이 총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혹시라도 먼저 입사했다고 친구들에게 밥 살 일 있으면 쩨쩨하게 굴지 말고 아버지 이름 대고 밥 사라’고 자신의 단골식당을 아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일일이 인사시켰다고.
마지막으로 현역 프리랜서로서 ‘인생의 브라보’를 외칠 수 있는 조언을 들려주시겠습니까?
“호기심과 활력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꾸 힘들다, 어렵다, 귀찮다 생각하면 도태되고 배제돼요. 행동반경이 좁아지면 사고반경, 사람반경도 좁아집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는 지인들이 부르면 불원천리, 산 넘고 물 건너 달려가고요. 지하철에선 되도록 자리를 양보받지 않아요.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서 있으면 오히려 균형력 강화에 좋습니다. 휴대폰은 신제품 출시 소식이 나오면 즉시 바꾸는 얼리어답터입니다. 지금 편한 것에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해요.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힙니다. 이런저런 핑계 대지 말고 새로운 공부, 도구, 환경에 도전하세요.”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부모님이 이 세상을 떠나 저세상으로 가시게 되면 우리는 어떤 옷을 입혀드려야 할까? 물론 수의를 입고 가시지만 때가 되면 갈아입으실 다른 옷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버지께서 당시에 공부만 하던 5남매를 이 세상에 남겨두시고 1976년 엄동설한에 하늘나라로 돌아가셨으니 올해로 만 41년이 된다. 중국의 천자가 쉬어갔다는 천자봉 아래 명당자리에 아버지를 모셨지만 그동안 산소의 봉분이 무너져 내려앉아 땜질하듯 손을 봐도 소용이 없어 전문업체에 의뢰해 지난 주말에 봉분을 새로 만들기로 했다.
처음에는 잔디만 사서 3형제가 새로 단장을 해보려 했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막내 여동생에게 전문업체에 견적을 의뢰해보라고 했더니 60만원이나 견적이 나와 내심 깜짝 놀랐다. 견적을 받은 막내아우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아무튼 그런 일을 해보지 않아 전문 업체에 의뢰하기로 하고 계약금 10만원을 먼저 보냈다.
그런데 막상 함께 일을 하다 보니 전문업체가 아니면 힘든 일이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새로 단장된 봉분을 보면서 60만원이 결코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셋째 아우와 서울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 점심도 먹지 못하고 함께 작업을 했다. 새로 만들어진 봉분이 너무 예뻐서 배도 고프지 않았다. 돌아가신 아버지께 새로 옷 한 벌 사서 입혀드리는 기분이 들어 마냥 좋았다. 한편으로는 너무 늦게 해드리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도 있었다.
오전 8시 반부터 경상도에 사는 여동생 둘(넷째와 막내 동생)도 달려와 함께 작업을 했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아내가 준비해준 간단한 음식을 차려놓고 인사를 드렸다. 새로운 봉분 앞에서 인사를 드리니 너무 감계가 무량했다. 몸이 안 좋아서 이 기쁨을 함께 나누지 못한 둘째 아우와 아내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카톡으로 사진을 찍어보냈더니 다리가 아파 집에서 안타깝게 지켜보던 아내와 아우는 기분이 참 좋단다.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이 울컥 샘솟듯 솟았다. 울산에서 직장을 다닐 때 필자와 아내는 20년 가까이 성묘를 함께 다녔다. 그때마다 필자가 낫질을 잘 못했는데 시골 일을 좀 해본 아내가 대신 낫질을 해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내가 고마웠다. 그랬던 아내가 다리가 아파 거동이 불편하니 그 고왔던 색시가 집안일을 너무 해서 건강이 나빠진 것 같아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다.
비석에는 3형제 이름과 손자 재흥이의 이름만 새겨져 있다. 두 누이동생이 그것을 보더니 왜 자신들의 이름이 빠졌냐고 물어와 난처했다. 좀 서운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왜 빠졌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지만 오래전 일이고 경황이 없었던 때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손자들도 많이 태어났으니 이제 비석도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다음번에는 두 여동생의 이름과 매제들 이름까지 반드시 명기를 해야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고마운 마음에 산을 내려오면서 아우들에게 남녘 바다가 조망되는 멋진 찻집에서 차를 샀다. 산소 가까이에서 살고 있는 막내는 매제와 함께 우리 형제들을 맛있는 횟집으로 초대해 저녁식사를 푸짐하게 대접했다. 좋은 동생들을 두어 필자는 정말 행복했다. 특히 예쁘고 착한 두 여동생을 우리에게 곁에 두고 가신 부모님께 새삼스럽게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귀갓길에 아내가 좋아하는 머위 대와 향내 나는 나물과 막내 여동생 농장에서 생산한 대추까지 한아름 선물로 받았다. 필자도 두 여동생들에게 앞으로 더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셋째 아우와 필자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족의 행복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족의 행복은 서로를 존중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자기 탓으로 돌려야 얻어진다는 이야기였다. 서울은 먼 길이었지만 도란도란 대화를 하면서 오니 지루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분에게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옷은 봉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봉분이 예쁘고 아름다우면 후손들 기분도 좋아지기 때문일까? 60만원 투자로 아버진 새 옷도 입혀드리고 우리 형제들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시간은 새 옷을 지어 입으신 아버지께서 고마워서 우리 형제들에게 보내주신 감사의 표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에서도 데이터 포기 말자, 저렴하게 쓰는 무선 와이파이
국내여행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해외여행 갈 때는 특히 정보가 많이 필요하다.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검색하기 위해서는 데이터가 필요한데, 해외에서는 데이터 설정을 따로 해야 한다. 아무 준비도 하지 않고 해외여행지에서 데이터를 마구 쓰면 요금폭탄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외에서는 데이터 요금이 많이 부과된다는 이야기를 주위에서 듣고 데이터 기능을 아예 꺼버리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데이터 기능을 꺼버리면 우리가 사용하는 카톡은 물론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다. 패키지여행을 하더라도 가이드가 설명해주는 내용 중 궁금한 것이 있으면 검색해서 찾아볼 때가 있는데 데이터를 아예 꺼놓으면 접속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사용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각 통신사의 데이터 로밍 서비스다. 그런데 데이터 로밍 서비스는 혼자서만 사용해야 하고 여행기간이 길어지면 비용이 조금 부담스럽다. 이럴 때 최근에 많이 애용되는 도구인 무선 인터넷을 쓸 수 있다. 바로 ‘포켓와이파이’라는 이름을 가진 디지털 도구다.
단체여행 갈 때 여럿이 함께 쓸 수 있는 ‘포켓와이파이’
포켓와이파이는 현지 통신망을 잡아 무선 와이파이로 바꿔주는 통신 기기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인터넷 사용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상이 됐기 때문에 해외여행 때도 꼭 챙겨야 할 도구가 되었다. 포켓와이파이는 스마트폰처럼 작게 만들어져서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가장 중요한 건 요금이다. 여행지에 따라 요금이 달라지며 아시아에서는 하루 사용 요금이 5000원 정도다. 앞서 이야기한 서비스인 데이터 로밍에 비하면 반값 정도밖에 안 돼 사용자에게 부담이 적다. 요금 외 포켓와이파이의 장점은 기계 하나에 여러 사람이 연결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최대 10명까지 사용할 수 있으므로 20명이 단체여행을 갈 경우 포켓와이파이 두세 개만 있으면 충분하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다. 대여하는 방법도 간단하다. 포털 검색창에서 포켓와이파이를 검색한 뒤 해당 업체에 여행지, 여행기간, 연락처를 작성하고 금액을 결제하면 여행 가는 날 공항에서 받을 수 있다.
국내에서 길 찾듯 목적지를 알려주는 ‘구글지도’
해외여행을 할 때 무선 인터넷을 쓸 수 있으면 스마트폰에 있는 지도로 여행 목적지를 찾을 수 있다. 지금 위치해 있는 곳이 어딘지, 근처에 약국이나 은행이 있는지, 쇼핑센터는 어디에 있는지 지도로 모두 검색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다음지도나 네이버지도는 국내에 특화된 지도라서 해외에서는 각 나라에 맞는 지도를 선택해야 한다. 그중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지도가 바로 구글지도다. 해외 어디에서든 사용이 가능한 구글지도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일본 여행을 갔을 때 아침에 공원을 걷고 싶으면 근처 공원을 구글지도로 검색할 수 있다. 이때 위치해 있는 곳이 일본이므로 일본어나 영어로 검색해야 할 것 같지만 구글지도는 한글로도 검색이 가능하며 검색 결과도 한글로 나온다.
예들 들어 삿포로에 있는 공원을 가고 싶으면 검색창에 ‘삿포로 공원’이라고 입력하면 된다. 삿포로에 있는 가까운 공원들이 검색되면서 현재 자신이 위치해 있는 곳에서 자동차로 얼마나 걸리는지, 도보로는 얼마나 걸리는지 시간까지 나온다. 혼자 여행을 떠날 때 좀 더 편하고 자유로운 여행을 하고 싶다면 이러한 디지털 필수품을 꼭 챙겨 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