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늦은 여름, 갑자기 달라진 주변 상황에 안절부절못하고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서둘러 떠나보내고 나면 후련할 것만 같았는데 영 그렇지 않았다. 바람이 실컷 들어간 풍선 같은 마음을 다잡고 차를 돌려 근사한 간판이 눈에 띄는 곳으로 향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는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분위기 있는 카페가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모처럼 혼자가 된 것을 자축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묘한 기분은 발걸음을 그냥 집으로 향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날, 새벽부터 일어나 커다란 가방 속에 이것저것 주섬주섬 집어넣었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의 사자성어는 “전분세락(轉糞世樂)”이다. 생로병사로 이어지는 인생살이가 어려움이 많아도 살만한 구석이 많음을 강조한 말이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최고령 생존자였던 헤르츠 좀머 할머니는 110세로 생애를 마쳤다. 숨을 거두기 전에 “살면서 많은 전쟁을 겪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지만, 삶은 배울 것과 즐길 것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선물”이라는 말을 남겼다. 유대인 학살의 현장을 지켜보며 처절한 아픔을 겪었어도 인생은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여겼다. 전분세락을 웅변한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사람이 사는 동네
전라북도 전주시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바로 비빔밥, 콩나물국밥, 한옥마을이다. 옛것을 중심으로 도시가 이어지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른바 ‘핫’한 도시로 거듭난 지도 오래. 살 뽀얀 아가씨들의 화려한 한복 차림을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전주만의 매력이다. 떠들썩, 사람 넘쳐나는 한옥마을을 지나 ‘도란도란 시나브로길’이란 표지판이 서 있는 구름다리 앞에 다다른다. 그 건너에는 따뜻한 햇살 아래 예술가들의 온기와 사람 사는 향기 그윽한 자만벽화마을이 있다. 젊은 작가들의 꿈같은 작업 현장 전주한옥마을
먹을 것이 넘치는 세상에 산다. 우리 시니어들이 모두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서 먹을 것이 넘쳐, 덜 먹으려고 고민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저녁 모임은 으레 술을 겸한 자리다. 술을 마시려면 저녁 식사 겸 안주를 푸짐하게 주문한다. 처음엔 배가 고프니 허겁지겁 먹지만, 이내 주문한 안주들이 남아돌기 시작한다. 그래도 더 이상 먹지 않고 자리를 옮긴다. 남은 안주는 어떻게 될까?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지든지 다른 손님에게 재사용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다 먹어 치우든
영등포에 있는 당중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오목동에 있는 화산목장으로 봄 소풍을 가던 길이었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간밤에 내린 비가 논둑을 넘쳐서 도로 위로 흐르고 있었다. 난감했다. 우리들이 주저주저하며 선뜻 건너지 못하고 있자 구두 또는 운동화를 벗고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남자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당신들 등을 내미셨다. 당신의 구두와 양말은 등에 업힌 아이에게 들리고. 아이들의 신이 젖을 것을 염려하신 선생님들은 하나하나 업어서 그 길을 건네주신 것이다. 그때 말간 봄햇살에 드러난 선생님들의 다리는 유난히도
필자는 슬하에 아들만 둘을 두었다. 딸 하나를 더 갖고 싶었지만 관상쟁이로부터 사주팔자에 아들만 셋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 딸 갖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니 남의 집 딸들만 봐도 사랑스러웠다. 딸 갖기를 포기한 이유 중 하나는 아들 둘이 너무 활발한 삶을 살았던 탓도 있다. 결혼 전 자식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지만 세월이 흘러 시대가 바뀌니 자식 양육도 옛날 같지 않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이 가끔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들들이 성장해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마친 차남은 울산
근 30년을 알고 지내는 미국인 친구가 있다. 직장생활을 할 때 그는 바이어였고 필자는 스포츠 장갑 수출을 담당하는 임원이었다. 미국 시장을 처음으로 개척하기 위해 관련 업체 디렉토리를 보고 팩스를 보냈다. 몇 군데서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미국 출장을 떠났다. 미국 동부부터 바이어들을 만났으나 정보만 빼내려는 바이어도 있었고, 처음이라 아직 미심쩍어하는 바이어도 있었다. 심지어 바이어라고 식사비용을 필자에게 전가하는 등 갑질을 사람도 있었다. 마지막 일정으로 서부에서 그를 만났다.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뜻밖으로 환대를 해주
어느덧 3년 전 일이다. 그해에 작은 딸이 마침내 취업을 했는데 그동안 애쓴 엄마에게 보답을 한다며 함께 홍콩 여행을 가자고 했다. 필자도 내심 따라나서고 싶었지만 직장에 얽매어 있던 터라 오붓하게 모녀간의 여행을 즐기라며 응원했다. 걱정하는 아내에게는 자신만만하게 "괜찮아, 염려 말고 잘 다녀와"라고 했다. 하지만 아내와 딸이 여행을 떠난 날 당장 저녁밥과 국 끓일 일이 걱정이었다. 세탁기와 난방기 작동법, 화초에 물주기 등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들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필자가 가사 무능력자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딸내미와
는 7년 반 동안 전 세계 87개국 95,000km를 자전가로 달린 일본의 이시다 유스케가 쓴 책이다. 1969년 생으로 대기업에 잘 다니다가 뜻한 바 있어 1995년 회사를 퇴사하고 자전거 여행길에 나섰다. 원래 3년 계획으로 여행길에 나섰는데 여행의 재미에 빠져 2배 이상의 기간이 걸린 것이라고 했다. 걷는 것보다야 나았겠지만, 자전거로 세계 일주를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혼자였다. 때로는 삭막한 사막 길을 혼자 자전거로 달려야 했고 주로 텐트를 치고 잤다. 강도를 만나 돈을
늘 함께하려고 남편과 혼인서약을 했고 언제까지나 함께하는 줄 알고 살았던 적이 있다. 신혼 무렵엔 남편이 출장만 가도 허전했고 하루만 지나도 보고 싶었다. 요즘처럼 봄꽃이 눈부실 때는 같이 봐야 하는데, 집안 모임에 같이 가야 하는데 하며 남편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창밖으로 아스라이 한 점 비행기가 날아갈 때면 그가 보고 싶어져 가슴이 저릿해지기도 했으니 내게도 분명 풋풋한 시절은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든 한가할 틈 없도록 희로애락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예기치 않은 변화무쌍한 일상들이 이어지고, 인간은 도전하듯 주어진
한 해 후배인 명희는 눈은 샛별같이 빛났고 코가 오똑한 예쁜 소녀였다. 그러나 그 애는 골수염으로 다리를 절었다. 노래를 끝낸 그 애에게 선생님들과 우리들은 가엾어서, 동정심으로 ‘잘했다’고 칭찬해주며 손바닥이 따갑도록 박수를 쳐주었다. 그러자 그 애는 눈치 없게도 정말 자기가 잘해서 칭찬해주는 줄 알고 거푸거푸 자기만 계속 노래를 부른다고 하여 그 애를 보기가 참으로 딱했고 선생님들 뵙기도 민망했다. 그날, 명희가 소풍을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조용민 선생님 덕이었다. 가장 어린 나이에 속하면서도 병마와 싸우느라고 가엾
"멀리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못 와?" “네, 늘 건강하시길 기도할게요. 방구 어르신은 술 즐기실 만큼만 드시구요. 쌕쌕이 어르신 우리 경로당 위해 공원청소 건강 위해서라도 계속해주시구요. 녱녱이 할머니 우는 소리 그만하시고 그동안 맛있는 점심 고마웠어요. 욕쟁이 할머니 언제 다시 와도 그 욕 들려주셔야 해요. 타짜 할머니 고스톱 바닥 쓸어가기 기술 재미있었어요.” "우린 어떡해~" 한사코 섭섭해하시는 투박한 손을 뿌리치고 나오는 필자 마음 역시 무너진다. 화요일: 구룡마을 물품 배분 목요일: 경로당 두 곳 배분
싫증을 잘 내는 사람들이 유행을 만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참 변화무쌍하다. 요사이 스키니와 통바지가 다시 유행이다. 필자가 대학 1, 2학년 때 꽉 끼는 바지와 통바지가 유행했었다. 외출할 때면 가끔 듣는 소리가 있었다. 스키니를 입으면 “그 바지는 입고 꿰맸니?”라는 말을 들었고, 통바지를 입으면 “동네 다 쓸고 다니겠다”라는 말을 들었다. 일정한 주기로 유행은 되풀이된다. 이에 따라 화장법도 진화해가고 있다. 미의 관점이 바뀌는 것이다. 겉에 걸치는 옷뿐만 아니라 몸매의 기준도 바뀌었다. 필자가 어렸을 때는 통통하고 배가
아내는 뭐든지 ‘모아두는 습관’이 있다. ‘모아두는 습관’은 ‘버리지 못하는 습관’과 동의어다. 우리 집은 현관 신발장에서 거실, 그리고 안방에서 아이들 방까지 온통 짐이다. 거실 책꽂이와 장식장에는 책과 서류, 장식품, 각종 필기구, 골동품, 술 등이 빼곡하다. 방에 있는 옷장을 열면 숨이 막힐 정도로 옷이 빽빽하게 걸려 있다. 서랍에도 더 이상 뭐를 넣어둘 공간이 없다. 압권은 냉장고다. 김치냉장고와 두 대나 있는 냉장고 안은 빈틈이 없다. 냉동실에 꽝꽝 얼어 있는 것들은 고기인지 해물인지 구별도 잘 안 된다. 돌덩이처럼 생긴
신접살림을 따로 차려 살던 맞벌이 아들 내외가 아기가 태어나자 혼자 사는 시어머니 집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손자 보는 일은 시어머니 몫이 되었다. 손주가 자라서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눈판 사이에 손자가 의자에 부딪쳐 작은 멍울이 생겼다. 시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며느리가 퇴근하자 손자가 의자에 부딪쳤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 순간 며느리의 손바닥이 시어머니의 뺨을 후려쳤다. 갑작스럽고 황당한 일에 시어머니는 어이없어하며 꾹 참았다. 화를 속으로 삭이고 있던 시어머니는 밤늦게 아들이 집에 오자 자초지종을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