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은퇴는 환상이다.” 2019년 니혼게이자이 신문의 보도다. 일본의 시니어 비즈니스 시장 규모는 100조 엔을 넘어섰다. 한국의 10배다. 하지만 일본은 지난 30년을 ‘시행착오의 시간’이었다 평하며 이제야 시장이 ‘본격화’되었다 말한다.
1988년 일본 어학연수를 시작으로 대학 연구원, 언론사 특파원, 국제부장을 거쳐 ‘초고령사회 일본에서 길을 찾다’, ‘초고령사회 일본이 사는 법’을 집필하며 30년 넘게 일본의 고령자 시장을 분석해온 김웅철 지방자치TV 대표를 만나 우리나라 시니어 비즈니스 시장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시니어 비즈니스 모색 끝에 보인 답-지난 30년 고령화 선진국’이라는 기사에서 기업들의 시도가 ‘헛스윙’이었다고 자평했다. 김웅철 대표는 “당시 언론에서는 고령자를 복지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소비자로서의 고령자 심리를 읽지 못했다는 점을 ‘시행착오’의 원인으로 꼽았다”고 설명했다.
고령 소비자를 재정의하다
“약 680만 명에 달하는 단카이 세대(일본의 베이비부머)가 60세에 들어서는 시기를 ‘2007년 문제’라고 하며 일본에서도 관심이 뜨거웠어요. 은퇴하면 여행도 많이 가고 관련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거란 기대가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계속 일을 해 수입이 있거나 연금이 뒷받침되는 고령자가 아니면 자산이 많아도 그들의 지갑은 쉽게 열리지 않았죠.”
고령자의 현금흐름이 시장의 성장과 이어진다는 말이다. 자산이 많고 연금도 우리나라보다 먼저 도입된 일본의 고령자조차 은퇴 후 약 5년간은 시장을 관망하며 허리띠를 졸라맸다. 연금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부동산 자산이 압도적으로 많은 우리나라 고령자는 더욱 지갑을 여밀 거라 추측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고령자들이 반드시 소비하는 것이 있다. 고령자는 나의 불편함을 해결해주고, 사는 데 필수적으로 필요한 곳에 먼저 지갑을 연다. 김웅철 대표는 “시니어 시장에서 견고하게 성장세를 유지한 것이 의료・요양・돌봄 시장”이라면서 “다만 일본의 100조 엔에 달하는 시니어 시장의 절반은 대부분 공적 자금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봐야 한다”고 짚었다.
“고령 소비자를 덩어리로 묶어 ‘매스 마켓’으로 본 것이 패착의 원인이었다고도 해요. 고령자 개개인의 니즈가 다르기 때문에 시니어 시장의 소비자를 ‘미크로(micro)’ 집단의 집합체로 보고 맞춤형 서비스를 내놔야 한다고 반성 했죠.”
그래서 일본은 고령 소비자를 75세 기준으로 전기 고령자, 후기 고령자로 나눈다. 나이를 기준으로 했지만 ‘건강’이 키워드다. 건강한 75세와 건강하지 않은 75세는 관심사도, 필요한 것도 다르다. 우리나라 장기요양보험의 모델이었던 개호보험도 후기 고령자 의료보험제도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경제・건강・고독 문제에 답 있어
김 대표는 “결국 노후 3대 자본으로 꼽히는 돈, 건강,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분야에서 수요가 발생한다”면서 “평생 현역으로 살기 위한 배움 욕구,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 관계를 이어가고자 하는 욕구에서 우선 소비가 일어날 것”이라 봤다. 또한 자녀가 아니라 고령자 스스로 지갑을 열 수 있는 ‘불편함을 해소해주는 서비스’에 기회가 있을 거라고 분석했다.
“일본의 노인 복지시설인 ‘유료 노인홈’은 대부분 고령자가 가지고 있던 자산을 보증금으로 내고, 연금으로 월세를 충당하는 방식으로 굴러가요. 일본의 유료 노인홈 시장이 성장한 것은 정부의 지원 정책도 있었지만, 개인이 그만큼 지불할 능력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시설을 이용하지 않는 고령자에게는 생활을 돕는 서비스가 인기죠. 보안 서비스 업체 세콤은 전문 스태프가 24시간 상주하며 고령자의 가사 대행, 건강 상담, 쇼핑 지원 등 일상에 관한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는 ‘세콤 마이 홈 콘세르주’라는 새로운 서비스를 출시해 주목받았어요.”
고령자의 현금흐름 확보가 가능한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도 중요하다. 소비를 일으키는 재원이 되기 때문. 따라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하고자 하는 고령자의 욕구는 지속될 것이다. 일본의 릿쿄대학교는 이런 수요를 파악해 50세 이상을 위한 1년제 ‘릿쿄 세컨드 스테이지 대학’ 과정을 만들었다.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관계 비즈니스’ 영역도 필요하다. 김 대표는 “일본의 고령자들은 ‘혼활’에 관심이 많아요. 결혼 활동을 뜻하는 말이죠. 고령자들이 연금 수령하는 날이 러브호텔 대목이라고 해요. 노년기에 마지막 이벤트가 될 ‘죽음’에 관한 시장도 활발하죠. 일본에서도 죽음을 언급하는 건 터부시했지만, 이제는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종활’도 문화가 됐죠. 우리나라도 그런 흐름을 따라가리라 봅니다.”
마지막으로 김 대표는 고령화를 대하는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시니어들은 시니어들끼리 분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일본에서 대학생이 고령자의 불편을 해소해주는 ‘못토메이트’라는 서비스가 등장한 배경이기도 하죠. 고령화에 따르는 불편함을 전 세대가 공유하는 문화가 생겨야 시장도 더 커지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