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마다 오랜 시간 품은 옛이야기를 듣는다. 깊은 산중에 난 흙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때 묻지 않은 숲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는다. 느긋한 마음으로 호젓하게 걷는 그 길 위에선 작은 것에도 너그러워질 수밖에 없다. 연풍새재 옛길, 걷다 보면 흔적마다 생생한 이야기가 묻혀 있다. 새들도 쉬어 간다는 험준한 조령(鳥嶺)을 넘어 걸었던 민초들의 그 길 위에 내 발걸음도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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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으로 역사를 읽다
연풍, 이름만 들으면 누군가는 오래전의 영화 ‘연풍연가’를 떠올릴 수도 있다. 배우 장동건과 고소영의 청춘스타 시절 로맨스 멜로 영화 제목이다. 알고 보니 솔솔 부는 바람 연풍(戀風)이 아니고, 예부터 흉년이 들지 않고 풍년이 이어지라는 뜻의 충북 괴산군 연풍(延豊)이다.
산과 계곡이 발달하여 그 옛날 과거길을 걷던 선비들이 사랑했던 수려한 경관의 연풍새재는 겨울 풍경도 빠뜨릴 수 없다. 연풍새재 옛길은 괴산군 연풍면 조령산 자연휴양림에서 시작된다. 조령산은 해발 1025m로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경계로 숲속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는 아름다운 산이다.
초입부터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산허리를 따라 이어지는 연풍새재 옛길은 조령 3 관문까지 1.5km다. 오르는 길은 두세 명이 나란히 걸어도 될 너비로 완만한 편이다. 그 옛날의 양반처럼 뒷짐 지고 느릿하게 걸어도 한 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걷다 보면 시종일관 오르막이어서 숨찰 때도 있지만 적당한 힘듦은 걷기의 즐거움을 더한다. 새로운 한 해를 이어갈 힘을 길 위에서 전해 받는다.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 응시를 위해 큰 꿈을 안고 한양으로 향했던 그 길, 이들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조령길을 흔히들 문경새재로만 알고 있다. 충북 괴산 쪽 새재길이 연풍새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마 문경이라는 지명이 ‘기쁜 소식(慶)을 듣는다(聞)’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일 거라 말하기도 한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에 남쪽의 추풍령과 북쪽의 죽령, 그리고 가운데 새재가 있다. 영남의 유생들은 문경새재를 넘었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선비들의 금기가 있었다 하니, 지명의 뜻을 헤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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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문경 조령 관문으로 통했던 길이 제3관문에서 시작되는 구간을 이제는 연풍새재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름을 되찾은 연풍새재길은 조령산 자연휴양림에서 조령관으로 이어진다. 지역에서는 이 구간의 콘크리트 포장을 걷어내고 황톳길을 깔았다. 자연과 역사를 느끼기에 적합한 흙길은 쉬엄쉬엄 맨발로도 걸을 수 있다. 특히 연풍새재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될 정도로 자연풍광과 어우러지는 완만한 경사의 부드러운 흙길이다.
연풍새재길 초입 안내판은 꽃길, 물길, 단풍길, 눈길로 계절별 풍경을 알려준다. 예부터 국가적 중요 통로였던 새재길을 통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네 가지 주제로 연풍 옛길에 의미를 두고 다스림의 길, 살림의 길, 정의 길, 멋의 길로 뜻을 전하고 있었다.
겨울 산길을 걷노라면 힐링이 따로 없다. 새재길 오른편으로는 숲속의 집 휴양림이 계곡을 끼고 있다. 걸으면서 계곡과 겨울 숲이 뿜어내는 기운을 듬뿍 받는다. 쨍하니 얼어붙은 찬 공기가 얼굴에 닿을 때마다 상쾌함은 최고조다. 간간이 날리는 눈발을 맞으며 호젓하게 걷다 보면 가슴속 깊이 순하고 맑아진다. 어쩌다 마주치는 이들과도 저절로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게 된다. 앞서서 걸어가는 젊은 커플의 도란도란한 풍경 속에 그 옛날 창창했던 옛 선비들 청운의 푸른 꿈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30분쯤 지나면 백두대간 조령비와 성곽이 길게 이어진 조령 3관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충북 쪽의 현판에는 조령관이라 쓰여 있고, 경북 방향에서는 영남 제3관이라 쓰여 있다. 연풍새재비와 괴나리봇짐을 맨 선비의 석상이 맞아준다. 백두대간 조령공원이 조성된 공간의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쉼터 군데군데에선 당시 학문의 출발이었을 ‘목민심서’, ‘성호사설’, ‘열하일기’, ‘동몽선습’ 등을 소개하고 있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나뭇가지에 마패를 걸어놓고 쉬어 갔다는 전설의 흔적도 들여다보며 600년 전으로 잠깐 시간여행을 해본다.
아치형 조령 3관문을 통과하면 문경새재로 접어드는 길이 이어진다. 걸어왔던 산세를 굽어보며 고즈넉한 신비로움에 젖는다. 눈길을 따라 트레킹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그 옛날 먼 길을 가느라 넘나들던 선비와 민초들의 마음을 공유해본다. 성문 밖 조령산 정상에서 이가 시리게 찬 조령 약수 한 모금 마시고, 새재를 노래한 당대 문사들의 시비 앞에 멈춰 시 한 수 읽고 하산길에 나섰다. 조령산 길은 험한데/ 그대는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추운 날씨에 나그네가 되니/ 달이 차면 고향을 바라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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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 숲속의 수옥폭포
연풍새재 옛길을 내려오면 바로 부근의 수옥폭포를 만난다. 수량이 많을 때면 20m 절벽을 타고 흘러내리는 3단의 수옥폭포는 보기 드문 절경을 이룬다.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이곳으로 피신해 폭포 아래에 절과 정자를 짓고 비통함을 잊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삼면을 깎아지른 석벽으로 둘렀다. 폭포 아래 넓은 암반에 앉으면 숲이 마치 천연 요새처럼 하늘이 빼꼼히 보인다. 이런 은밀한 풍경 덕에 ‘다모’, ‘여인천하’ 등 사극 드라마 단골 촬영지가 되기도 했다. 한겨울 한파주의보가 내릴 때는 폭포가 만들어내는 물줄기가 빙벽을 이루어 최고의 겨울 풍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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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역, 연풍성지 외 가볼 만한 곳
이제 수옥폭포에서 1km 남짓 거리의 연풍역으로 간다. 지난해 11월 30일 충주-문경 구간 중부내륙선이 개통되었다. 기존 판교와 충주 간 준고속철도 KTX-이음이 살미역, 수안보온천역, 연풍역을 거쳐 문경역까지 하루 8회 연장 왕복 운행한다. 판교에서 괴산의 연풍역까지 87분 소요된다. 서울·경기권 사람들의 접근성이 크게 좋아졌다. 조령산을 배경으로 조령관문을 연상시키는 한옥 역사(驛舍)가 인상적인 연풍역은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에 소재한다. 단, 개통 초반이어서 연풍역 하차 후 연계 교통망이 부족하다.
연풍역 맞은편에 한지체험박물관이 보인다. 폐교된 신풍분교 운동장이었던 너른 마당을 지나 박물관 내부를 꼼꼼히 둘러보면, 한지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란 생각에 이른다. 종이부터 예술 작품과 의류까지 신비로운 재료다. 과거와 전통을 잇는 매력적인 한지공예품들을 보며 눈 호강을 한다. 한지 장인이 운영하는, 한지의 진정한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다. 여기선 한지공예를 특화한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으며, 앞으로 연풍면을 한지공예 및 체험의 메카로 키워나갈 야심 찬 계획도 엿볼 수 있다.
한지체험박물관과 연결된 골목길을 따라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연풍성지가 나타난다. 드라마 ‘눈물의 여왕’ 이후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어도, 드라마 촬영지가 아니라도 연풍성지는 250년 역사 여행지로 돌아볼 만하다. 1801년 순조 1년 순교한 사형장을 중심으로 순례길 따라 평화로운 여정이 이어진다. 성당 마당에 서면 뒤편의 조령산 능선이 아늑하다.
연풍성지 긴 담벼락으로 야외 갤러리를 이루었다. 조선 정조 시절 연풍 현감으로 재직했던 풍속화가 김홍도를 기리는 대표적인 작품들이 전시된 ‘단원 김홍도가 걷던 길’이다. 고요하고 한적한 풍경 속에서 연풍과 인연 깊은 예술가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 거리 끝 연풍초등학교 담 너머로 팔작지붕의 풍락헌(豊樂軒)이 눈길을 끈다. 시골 마을 작은 교정의 노란 교사동 옆에 자리 잡은 풍락헌은 조선시대 연풍현의 청사였다. 김홍도가 연풍 현감으로 근무했던 곳으로, 300년 수령의 느티나무와 함께 위대한 화가와의 인연을 보존 중이다. 그 앞에서 한참 동안 서성이던 젊은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부근에 하마비를 앞에 둔 연풍향교도 멋스러운 풍광을 지녔다.
참고로 연풍 여행 중 숙소를 찾는다면 칠성면 미루마을 ‘숲속 작은 책방’의 북스테이를 추천할 만하다. 외진 시골 마을에 독특한 서고와 엄청난 양의 장서를 구비한 따스한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