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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단 1기 워크숍] '다리 걸고 파이팅'
- 2016-06-10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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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단 1기 워크숍] '열공' 중인 기자단들
- 2016-06-1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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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단 1기 워크숍] 장영희 동년기자 자서전 작성법 강의
- 2016-06-10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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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단 1기 워크숍] 임철순 주필 강의
- 2016-06-10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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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단 1기 워크숍] '다리 걸고 파이팅'
- 2016-06-10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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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용서는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인가?’
- 용서란 단념이나 무관심과는 다르다. 단념은 다만 현실도피일 뿐이다. 결국, 용서는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시간이 지나며 잠시 잊을 수는 있어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닥치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고 하니 이 얼마나 혼란스러운가?. 필자에게도 누군가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마음을 진정하려 해도 날마다 우울했다. 멀리 있는 산사를 찾아다니며 법회에 참석했다. 눈을 반쯤 감고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는데 말씀 가운데 “용감한 사람만이 용서할 줄 압니다. 비겁한 사람은 절대로 남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즉 용서란 남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한 것이죠. 용서를 안 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향한 마음의 칼날이 결국은 자신을 해치게 됩니다.”라고. 법회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마음이 너무 복잡해졌다. 수백 명의 신도가 있었지만 마치 필자한테 하신 말씀 같았다. 몇 달이 지나도록 큰스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돌았지만,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마음의 날카로움을 행여 남에게 들킬세라 전전긍긍했다. 오랫동안 아팠다. 시간이 한참 걸렸지만 결국은 용서가 아닌, 포기라는 둘러댐으로 마음을 내려놓기로 하였다. 절반의 용서를 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다. 결국은 자신을 살리기 위한 결단이었다. 이제 큰일을 겪고 나니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이 아니라면 웬만한 일은 넘겨버린다. 사람이 살다 보면 고통도 인생의 한 부분이며 그것이 때로는 자신을 깨우치게도 한다. 지나간 시간은 기쁨이나 혹은 슬픔으로 채워졌어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이다. 그러니 용서를 했건 포기를 했건 이 또한 지나간 시간일 뿐이다. 내가 즐겨 읊조리는 시구가 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다. 우리의 일상은 늘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상이 살아갈 만한 이유는 사랑과 용서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뭔가 이루려면 마중물이 필요하다. 한 바가지의 물을 붓기 전에는 절대로 펌프 물을 끌어 올릴 수 없듯이 사랑도 용서도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 앞에서는 망설임의 시간이 길지 않지만, 용서 앞에서 망설임의 시간은 매우 길고 힘들다. 때로는 억울한 생각에 몸과 마음을 상하기도 하지만 살다 보면 억지로라도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나는 용서를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승리는 더더욱 아니다. 결국은 자신의 마음에 평안을 주기 위한 행위라 할 수 있다. ‘용서, 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 2016-06-07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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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19살 청년의 죽음
- 6월을 여는 아침, 또 한 청년의 어이없는 죽음소식이 전해졌다. 그 청년의 허름한 가방 속에 남겨진 끼니를 때우기 위한 컵라면 한 통이 온 세상 사람 가슴을 울린다. 그 어린 나이에 삶이 고달파서, 아니 너무 열심히 살아서 일찍 데려간 걸까? 남겨진 가족은 어쩌란 말인가. 또 추모가 일상이 되어 버린 현실이 슬프기 만하다. 언젠가 읽었던 책의 내용이 생각났다. 어느 목사님이 가난한 홈 리스(노숙자)들에게 그날도 컵라면을 주었더니 “목사님! 또 라면이에요? 그~래, 우리 삶은 라면이다.”라고 해서 목사님은 주먹으로 홈리스 머리를 쥐어 박았단다. “왜요? 삶은, 이거 물에 푹 삶은 라면이잖아요.” 목사님은 어이가 없어 한참을 바라보다 웃을 수도 울을 수도 없었다고 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필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던 그 라면이 오늘 또 마음을 울린다. 세상의 독한 위험성들은 비정한 것일까? 그것들은 하필이면 가장 빈약한 사람들에게만 먼저 찾아 오는 것 같다. 가장 부려 먹기 좋은 존재, “십대 밑바닥 노동”이라는 기막힌 말 앞에 통탄을 금할 길이 없다. 가난한 생계를 위해 작은 돈이라도 벌어보려고 더 큰 위험을 감수하며 험난한 곳에서 일 해야만 하는 근로 빈곤의 시대가 그 시대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지금은 노동의 시대라는 단어가 청소년을 덮치고 기업들은 불법 편법적으로 상식을 넘어 과도한 압박으로 힘없고 생활고로 허기진 어린 자들을 쓸모의 대상으로만 삼아 인격적 모독과 함께 춥고 소외된 현장으로 내 몰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정규직이 아닌 비 정규직으로 더럽고 힘든 일은 도맡아야만 하는 사회적 불 안정속에 현실은 비정규 사회가 된지 오래인 듯 하다. 터져버린 사고 때마다 즉흥적 재발 방지 조치가 이루어 지기는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고 그 관리 소홀에 반복되는 판박이 사건들은 과연 누구의 잘못이며 어디의 책임이라는 걸까? 안전 불감증의 동일한 사고 반복 속에 오늘도 물레방아는 여전히 돌고 있다. 그 책임자들은 큰 문제라고 입술로만 되 뇌일뿐 뒤늦게 현장을 찾아 분주한 권력의 모자로 머리를 포장하고 또 허세를 부린다. 이나라에 태어나 19나이에 먹고 살겠다고 생계를 책임지며 동생 용돈까지 챙긴 고인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더구나 생일을 앞두고 앞만 보고 일하며 살아온 젊은이에게 어떤 삶의 미숙함이 있었단 말 인가. 책임을 돌리는 힘있는 자들이 뒤늦게 애써서 보내는 형식적 애도의 표시가 과연 어떤 의미로 남아질 것인지 담담하기만 할 뿐이다.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성인으로, 부모로써 쓰린 마음에 성찰과 안타까움만이 울부짖을 뿐이다.
- 2016-06-03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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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고독력 키우기 조 왕 래
- 퇴직하고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지면 세상을 잘못 산 것처럼 자기비하에 빠져든다. 아내의 눈치도 보이고 아내도 친구들로부터 ‘요즘 너 남편 뭘 해?’ 하는 소리에 답변이 궁해진다. 아파트 경비도 나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이 시간에 이 사람이 왜?’ 하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불러서 함께 놀러 다닐 만만한 친구도 없다. 노인정이나 경로당에 가기는 죽기보다 싫다. 이것이 5,6십 세 퇴직자의 현실이다. 등산이나 낚시로 소일 해보려하지만 주말에 어렵게 시간 내서 가는 것이 취미생활이지 매일 직업처럼 등산이나 낚시 다니는 것은 낭만이 아니다. 어느 산에 가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고 아무리 큰 물고기를 잡아도 어디 자랑할 곳도 없다 이내 이런 취미가 시들해진다. 무엇보다 나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퇴직이라는 형벌로 시베리아 벌판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다. 투명인간처럼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는 것이 서러움이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대다수 직장 은퇴자들은 직장에서 누구와 더불어 사는 것에 익숙해져 왔다. 어려서는 가족의 관심과 사랑 속에 커왔고 학교, 직장생활도 사람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다. 그러나 50이 넘어 퇴직의 대열에 휩쓸리면 더 이상 나는 어디가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가족이 모이는 초대받는 자리에도 어른으로써 반짝 관심만 받다가 이내 손자손녀에게 주인공 자리를 물려줘야한다. 남자들이 가족을 부양하기위해서 곁눈질하지 않고 너무 직장에만 올인 해서 변변한 취미하나 만들지 못한 잘못이다. 이런 변화에 익숙하지 않아 견디기 어렵도록 외로워하고 속으로 눈물을 삼킨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비관하거나 신세 한탄을 하면서 술이나 도박에 빠져들고 외도나 낭비벽으로 심신이 타락의 늪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고독이 나를 강하게 키운다는 신념을 갖고 고독에 맞서야 한다. 고독에 당당히 맞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 한다. 퇴직 후 젖은 낙엽처럼 아내에게 딱 달라붙어서 아내의 숨통을 조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혼자 무엇을 할 것인가를 키우는 것이 고독력이다. 고독력은 숨 오래참기처럼 가만히 오래 견디는 것이 아니다. 고독력은 혼자 잘 지내는 법이고 연습이 필요하다. 내 친구 한사람은 퇴직 후 자신의 적성은 고려하지 않고 막연히 사진을 찍겠다고 100만원이 훌쩍 넘는 카메라를 사고 동네 사진 강좌도 등록하여 열심히 배웠다. 찍은 사진을 편집도 하여 컴퓨터에 정리하는 실력까지는 도달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진을 보자는 사람이 없다. 보여줄 사람도 없고 당연히 평을 해주는 사람도 없다. 시간에 비례하여 열정이 식어버리고 카메라는 먼지만 덮어쓰고 있다. 친구는 사진을 이용하여 뭘 해보겠다는 청사진이 미흡했다. 중학교에서 공부를 잘 하려면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생활에 필요한 기초 공부를 잘 해두어야 한다, 필연코 오는 퇴직이나 은퇴 후의 무었을 할 것인가 미리 준비해야한다. 고독력을 키우고 혼자 일하고 노는 법을 터득해야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과 같이 혼자여서 장점도 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공부하면 집중하기 어렵다. 남들과 대화하면서 사색에 빠져들지 못한다. 고독은 우리 자신이 집중해서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성철스님은 생전에 파계사에서 철조망을 치고 8년의 세월을 장좌불와(長坐不臥) 생활을 했다. 피아니스트는 화려한 무대를 위해 혼자서 수 만 번의 건반을 두드린다. 사진작가 변용도 선생은 4년간 무려 30만장의 사진을 혼자서 찍으면서 사진작가로 우뚝 섰다. 영어를 잘 하려면 수 백 번의 혼자 하는 반복 훈련이 필요하다. 이름난 선수는 남들이 모르는 혼자만의 피눈물 나는 고독한 연습이 있었다. 무엇이든 적성에 맞는 목표를 세우고 지속적으로 한다면 성공의 축배까지는 들지 못한다 하더라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는 있다. 새 출발을 하기위한 고독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마인드 컨트롤이 중요하다. 첫째로 나는 법을 준수하고 평범하게 살아온 보통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늘 주문한다. 과거 회사 대표를 했고 대학 수석 입학 따위는 다 흘러간 일이다.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내가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과시하면 할수록 주위에서 멀어질 뿐이고 자신의 지금 처지에 비관만 든다. 두 번째로 나는 건강해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수명100세 시대에 5,6십대는 이제 겨우 반환점을 돌았을 뿐이다. 현대는 근육질의 노동력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다. 아직은 싱싱한 내 육체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셋째로 내 두뇌는 새로운 것을 받아드릴 여유가 있고 누구와도 대화가 가능한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다. 배우는데 나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좀 더 노력하면 뒤처질 이유가 없다는 자신감이있어야 한다. 넷째로 나는 남의 시선에 별로 개의치 않고 마이웨이를 외친다. 그렇다하여 남으로 부터 지탄을 받을 일을 할 사람은 아니다. 나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다. 원칙대로 양심껏 사는 것이 행복이다. 은퇴 전에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살기위해 자신의 처지와 적성을 잘 알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빨리 찾아야 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열 가지를 적고 가능한 것부터 실천에 옮긴다. 필자는 육체적인 활동이 좋다. 테니스도하고 마라톤도 한다. 일하는 젊은이들과 부딪히는 것이 좋아서 틈틈이 건설현장에서도 일한다. 현장은 언제나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여기서 나를 지키기 위한 긴장이 즐겁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내가 좋아 한다는 것도 발견했다. 독서마라톤 대회에도 출전하면서 일 년에 200여권의 책을 읽는 것이 즐거움이다. 읽고 느끼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글로서 재탄생을 시킨다. 남편의 밥 때문에 아내의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도 싫다. 혼자서 밥하고 빨래해야 할 때는 직접가 하면 된다. 고독이 사람을 강하게 키운다는 신념을 가지면 인생이 더 자유롭고 여유로워 진다. 하루라도 빨리 자신의 적성을 발견하고 고독력으로 즐기며 발전시켜야 노후가 보람된다.
- 2016-06-03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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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자작나무 사랑(?)
- 수필 공부 차 문우들이 10여명 모였다. 유명 수필가의 글을 읽으면서 각자의 의견을 발표하는 형식이었다. 그날 공부할 수필에서 다들 남의 문체나 적절치 못하다는 어휘를 지적하며 제 문학적 예리함을 뽐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필자가 지적한 것은 작가의 문체나 어휘가 아니라 "뒷산의 리기다소나무는 아무 쓸모없는 나무라 베어내고 그 자리에 자작나무를 심는다"는 내용에 대한 반발이었다. 필자 의견은 작가가 리기다소나무를 쓸모없는 나무라며 너무 평가절하 했고 자작나무야 말로 다른 나무와 달리 흰 나무껍질 때문에 문인들이 그냥 막연히 좋아하는 수종이라는 것이었다. 리기다소나무는 우리나라 산이 민둥산일 때 정부가 산림녹화의 일환으로 아카시아와 함께 전국 산에 대대적으로 심은 나무이다. 우리나라 소나무는 대부분 곧게 자라지 못해 쓸모가 없는데 반해 리기다소나무는 곧게 자라는 특성이 있었다. 속성수라서 경제적이기도 하다. 소나무 종류이므로 휘톤치드 방출량도 많다. 그래서 목재의 용도로도 활용가치가 높다는 평가 하에 심은 것이다. 리기다소나무는 과연 곧게 잘 자라 현재 우리나라 산에 중요 수종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자작나무는 나무껍질을 태울 때 자작 소리가 난다하여 자작나무로 이름 지었다. 그렇다면 땔감으로나 쓰는 용도인데 요즘은 나무를 땔감으로 쓰는 집도 별로 없다. 땔감 용도로만 봐도 차라리 리기다소나무가 나무도 단단하고 송진이 있어 자작나무보다 더 좋은 화목이다. 물론 가구 용도로 많이 쓰인다는 얘기는 있다. 동대문 근처에 일봐주는 회사가 있다. 새로 고층 사옥을 지으며 식수할 수종을 고르는데 설계 회사에서 자작나무를 추천하자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필자가 자작나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느냐고 회사 사람들에게 묻자 아무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멋있을 것 같다고 했다. 도심의 고층 건물들 사이에 어떤 수종의 나무를 심든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필자도 나무 전문가도 아니면서 다른 수종을 추천할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결국 건물 사이 틈에 빈약하게 보이는 자작나무가 심어지긴 했다. 촘촘하게라도 심었으면 그나마 그렇게 빈약해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자가 리기다소나무의 혹평에 대해 반발하고 자작나무를 폄하하지 몇 사람들이 해명을 하긴 했다. 리기다소나무는 소나무 재선충이 번져 죽어가는 수종이고 소나무 진액이 독해서 그 밑에는 다른 식물들이 자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작나무는 어떤 점이 좋으냐 물으니 잘 모르겠단다. 원래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로 ‘닥터 지바고’ 같은 시베리아 배경의 러시아 문학 작품에 자주 나오는 수종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러시아 문학 작품들 속에 자주 나오니 친숙하다는 것이다. 자작나무를 굳이 폄하하기보다는 어떻게 생긴 나무인지도 잘 모르면서 그냥 막연히 자작나무를 문학작품 속에 등장시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어느 작가든 글 속에 자작나무 얘기만 나오면 바로 책을 덮는다. 매너리즘에 빠진 작가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귀족 계급 중에 공작, 백작, 남작과 함께 자작이라는 계급도 있다. 한자로는 전혀 다르지만, 혹시 귀족계급에서 들은 귀족적인 이미지 때문에 막연한 호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가 원래 백의 민족이라 흰색을 좋아하긴 한다.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얼굴이 하얗지만, 그래도 더 하얗게 되려고 안달을 한다. 미백크림이 여전히 잘 팔리고 감기도 아닌데 얼굴 탄다며 마스크까지 쓰고 다니는 사람도 많다. 우리는 황인종이다. 농촌에서 자외선을 그대로 받으며 일하는 농부들의 피부색은 영락없는 황인종이다. 황인종이라고 하면 콤플렉스라고 하기에는 지나치지만, 어쨌든 백색에 대한 동경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시베리아의 대표적인 나무인 자작나무가 우리 산야에도 어울리는 나무인지는 모르겠다. 우리 산에는 별로 안 보인다. 나무는 심고 나면 몇십 년 후를 봐야 한다. 우리나라가 점점 아열대화되어 기후가 바뀌는 중인데 한대지방 나무가 몇 십년 후에도 버텨줄지는 또다른 문제이다. 필자가 좋아하는 수종은 느티나무 또는 밤나무 같은 유실수이다. 느티나무는 빨리 크고 병충해 없이 잘 자란다. 지금 현존하는 수백 년 된 보호수는 대부분 느티나무이다. 나무의 기품이나 형세도 보기 좋다. 밤나무는 밤꽃도 좋지만, 해마다 풍성한 밤이 열리니 일석이조이다. 산에 나무를 심는 이유가 뿌리 덕분에 토사가 흘러내리지 않게 하고 풍성한 잎들은 산소를 내뿜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베어냈을 때 나무의 용도는 별도이다. 자작나무보다 느티나무나 밤나무는 토속적이라 문학적인 분위기로는 덜 어울릴지 모른다. 그러나 실용적이다.
- 2016-06-0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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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년기자 칼럼] 이렇게 바빠도 되나?
- 필자 나이 쯤 되면 세월이 정말 빠르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금방 월요일이었는데 또 벌써 주말이라거나, 달이 바뀐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달이 다 갔다는 식의 얘기이다. 마음은 아직 젊은데 잠깐 사이에 나이도 많이 먹었고 백발이 되어 어느덧 노인이 되었다는 얘기도 한다. 나이에 따라 시속이 빨라진다니 맞는 얘기인 것 같다. 필자 스케줄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원래 정해져 있는 편이다. 월요일, 수요일은 댄스 동호인들끼리 댄스를 즐기고 화요일은 노래 교실에 나간다. 토요일은 장애인 댄스 지도와 연습을 한다. 목요일와 금요일은 비워두고 있으나 대부분 사적인 모임으로 채워진다. 그런데 금년 들어 고정적으로 목요일은 만나서 책 하나를 만드는 작업을 맡았다. 금요일은 내가 가르치는 댄스 동아리에서 회원들에게 댄스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므로 온전히 비어 있는 요일은 일요일뿐이다. 일요일에는 주로 산에 간다. 요즘처럼 계절이 좋으면 꽃과 바람이 유혹하니 집에 눌러 있을 수가 없다. 스케줄대로만 움직이면 바쁠 것도 없는데 문제는 스케줄이 겹치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선순위에 따라 기존 스케줄을 포기하거나 조정해야 한다. 수요일은 별 일 없으면 저녁에 동호인들과 댄스를 하러가는데 오후 시간에 걷기 모임이 생겼다. 서너 시간 걷고 허기졌으니 뒤풀이를 한다. 식사만 하고 일어날 수도 있지만 대부분 막걸리를 곁들이다 보면 댄스하러 가는 일은 포기해야 한다. 막걸리를 안 마시고 댄스를 하러 갈 수도 있지만, 이미 운동량이 충분한데다 땀 냄새 밴 채로 파트너와 춤을 춘다는 것도 무리이다. 그러다 보니 댄스 학원에 결석이 잦다며 원성을 듣는다. 어쩔 수 없다. 그 다음으로 만만한 요일이 월요일이다. 역시 댄스하러 가는 날이다. 다른 요일이 꽉 찼으니 새로 생기는 스케줄은 월요일로 하다 보니 월요일마저 결석하는 일이 잦다. 화요일 노래 교실은 웬만하면 안 빠지려고 노력한다. 결석하면 그날 배우는 새 노래를 못 배우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입 꾹 다물고 살다가 소리 내어 노래를 불러보는 것도 정신건강에 좋다. 새 노래야 안 배워도 그만이지만 여기 뒤풀이도 무시 못 한다. 10년 이상 유지해온 모임이라 우선순위를 높게 둔다. 토요일 장애인 댄스 강습도 결석하기 어렵다. 나를 기다리는 장애인이 있기 때문이다. 금년에도 각종 경기 대회에 나가려면 둘이 연습도 많이 해야 한다. 그날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집에 돌아오면 영화에 빠져 든다. 영화 채널을 10개 정도 계약해서 채널을 돌리다가 시작하는 시간이 우연히 맞으면서 취향에 맞는 영화를 고른다. 좋은 영화가 이어지면 하룻밤에 3편도 본다. 당연히 수면 부족 현상이 생긴다. 건강에 지장을 주기도 하지만 가끔 불면증이 와서 뒤척거리던 생각을 하면 차라리 잘 한 선택인 것 같다. 굉장히 바쁜 것 같지만 댄스, 노래 등은 저녁시간이고 걷기, 책 만들기 작업, 댄스 강의는 오후시간이다. 오전 시간은 온전하기 때문에 그때 글을 쓴다. 늦게 자기도 하지만, 원래 아침잠이 많아 느긋하게 일어나 책상 앞에 앉는다. 커피 한잔 마시고 머리를 맑게 하면, 오전에 글 한편은 쓸 수 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나이가 60대 중반이라고 한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좋은 시기를 만끽하고 살아야 후회 없는 여생이 될 것 같다.
- 2016-05-31 18: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