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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실의 시대, 빈곤한 마음 치유하려면
- 노인의 마음을 빈곤하게 만드는 요인은 상실이다. 가정과 사회에서 역할을 잃은 노인은 약해진다. 가까운 이의 죽음, 자녀와의 단절로 입은 상처를 쉽사리 치유하지 못한다. 건강을 잃을까 염려하고, 죽음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에 허무감을 느낀다. 상실을 앓는 시대, 노인을 진정 빈곤하게 하는 것은 텅 빈 잔고가 아닐지도 모른다. 故 오근재 전 홍익대 교수는 책 ‘퇴적 공간’에서 건강한 신체와 지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 해도 노동시장에서 퇴출되면 한순간에 노인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고 설명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력을 내다 팔 수 없는 노인은 사회에서 ‘쓸모없는’ 취급을 받고 있다. 더 이상 사회와 가정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노인은 갈 곳을 잃는다. 교류할 이를 찾기 위해 매일 탑골공원에 출근도장을 찍지만 해소가 쉽지 않다. 농촌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정석철 노인심리상담사는 “고령화가 극심해지는 농촌에서는 특히나 외로움을 느끼는 노인이 많다”고 귀띔했다. 마을 사람 열 명 중 아홉 명은 노인이고, 60대가 ‘젊은 네가 마을을 위해서 힘써달라’는 부탁과 함께 청년회장이나 이장직을 맡는 실정이다. 그가 직접 방문해 상담하는 가정 중에는 일자리 찾아 도시로 떠난 자식들이 코로나19다 뭐다 바쁘다며 핑계를 대곤 연락조차 뜸한 집이 많다. 거동이 불편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고, 사회적 교류가 감소하는 시기. 노인의 텅 빈 마음에는 불안감 혹은 우울감이 쉽게 들어찬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도 아무 이상이 없는데 두통이나 소화불량 등을 호소한다. 치매가 아닌데도 기억력이나 집중력이 크게 저하되는 모습을 보인다. ‘가성치매’라 불리는 노인 우울증의 발현이다. 임현국 가톨릭대 여의도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어르신들이 소화가 안 되거나 변비가 생기는 등 이유 없이 몸에 크고 작은 이상 증상이 생겨 병원을 찾는데, 알고 보면 우울증 때문에 나타난 증상인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 감정을 억제하는 데 익숙해지지만, 우울증으로 생기는 감정까지 억제하면서 몸에서 이상 증상이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질병을 일으키는 원리와 유사하다. 노인 우울증, 빠른 대처 필요해 노인 우울증의 무서운 점은 노인 스스로를 옥죄어올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이현숙 국립공주대학교 보건행정학과 교수팀이 한국노년학회지에 기고한 논문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은 우울증 같은 정신적 문제로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가족 구성원과의 갈등, 재정적 문제, 육체적 질병이 그 뒤를 이었다. 60대 이상의 경우 신체적·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거나, 경제적·심리적 불안정 상태에 있고 가족 및 사회로부터 고립된 노인일수록 극단적 선택을 시도할 위험이 높았다. 그러므로 적절한 대처는 빠를수록 좋다. 노년기 마음 빈곤을 대할 때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하지 않는 자세다. 치부로 여겨 숨기거나, ‘늙으면 다 우울하지’ 하며 노화의 당연한 결과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다수의 연구 결과가 노인 우울증을 제때 치료해야 노년기 삶의 질이 향상되며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신의학과 전문의를 찾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사회적 고립으로 고독한 노인들에게는 사람들과의 지속적인 교류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회와 섞일 수 있는 일자리가 필요하다. 세대 불문 교류할 수 있는 주거지가 필요하다. 집 밖으로 노인이 나갈 수 없다면 사회복지사가 찾아 나서야 한다. 돌고 돌아 다시 노인 일자리, 부동산과 노인 복지 서비스다. 상실의 시대, 올겨울이 노인에게 더 혹독하지 않도록 심도 있는 고민을 해야 할 때다.
- 2022-12-2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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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 관계를 살리는 말과 죽이는 말
- #장면 1 자동차 안 : 그러니까 남편이지 모처럼 교외 드라이브에 나선 어느 부부. 조수석에 앉은 아내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며칠 전 OOO 교수가 쓴 글 봤어요? 그동안 참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번 글은 좀 실망이네요. 균형감을 잃었고,너무 부분적으로 알고 섣불리 판단한 것 같아요. 팔로어 많다고 자랑하는 것도 좀 그렇고….” “그래? 나도 그 글 잠깐 봤는데 전혀 그렇게 생각되지 않던데. 그리고 한 번 정도 갖고 실망하고 성급해 보이네, 당신. 그분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데.” 이렇게 시작된 논쟁에 점점 불이 붙습니다. 말을 할수록 아니꼬워진 아내는 그 사람 안 좋은 점만 들추어내려 애씁니다. 상대가 여자 교수라 더 기분이 나빠진 건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입니다. “아니, 당신은 그 여자 책 한 권도 안 읽고 일면식도 없으면서 평생 같이 산 나보다 그 여자 편을 들어요? 그렇게 잘 알아요?” 급기야 감정 싸움으로 번지고 맙니다. 외출을 망치고 집에 돌아와 생각할수록 분이 풀리지 않는 아내. 왜 내 편을 안 드느냐고 실컷 따지고 싶은데 치사해서 참으려니 속이 말이 아닙니다. 흥! 그러니까 남의 편, 남편이라 그러는 거지! #장면 2 형광등을 가는 참 딱한 내 편 화장실 등이 나가자 평소와 달리 자기가 갈아주겠다고 큰소리 치는 남편. 요즘 전등은 가는 방식이 까다로워 해보지 않으면 헤매기 십상입니다. 이렇게 해봐도 저렇게 해봐도 뚜껑조차 열리지 않아 땀을 뻘뻘 흘리는 남편. 팔짱을 끼고 옆에서 얼마나 잘하나 지켜보던 아내가 참다못해 “이리 주고 그만 의자에서 내려와요!” 명령을 합니다. 희한하게도 쌔가 빠지게 돈 벌어다주는 남편은 밉고, 허구한 날 돈 갖다 쓰는 자식새끼는 예쁜 법입니다. 퇴직한 남편이 은행 일, 살림살이 물을라 치면 ‘그것도 못 하냐, 그것도 모르냐’며 통박에 구박을 얹어 핀잔하기 일쑤입니다. 반면 자식이 세상 물정, 시시콜콜 온갖 문제 물어보면 세상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답하는 우리 아내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장면 3 부부 동반 모임 “닥쳐.” 앞자리에 마주 앉은 부부 중 아내가 남편한테 큰소리를 냅니다. 순간 좌중이 고요해지고, 나머지 부부들은 그 말을 제대로 들었는지 놀라서 서로 얼굴을 쳐다봅니다. 남편이 한 얘기가 가당치 않다고 그랬다는데, 남들 앞에서 그 정도로 남편을 모욕하는 아내가 집에서는 얼마나 남편을 잡을지 안 봐도 뻔합니다. 심지어 70대 부부로 이뤄진 친목 모임에서 그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입니다. 깜짝 놀라셨나요? 아니 우리 부부 얘기를 어떻게 알았냐고요? 이 세 장면은 주변에서 직접 겪거나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열두 번째 마음 미장공은 부부 싸움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댁의 남편은, 댁의 아내는 안녕하십니까? 님 놈 남 : 님이 남이 되는 순간 1992년 세상에 나온 이 노래, 가사부터 살펴볼까요? 도로남 남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를 지우고 님이 되어 만난 사람도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 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 가슴 아픈 사연에 울고 있는 사람도 복에 겨워 웃는 사람도 점 하나에 울고 웃는다 점 하나에 울고 웃는다 아 인생 돈이라는 글자에 받침 하나 바꾸면 돌이 되어버린 인생사 정을 주던 사람도 그 마음이 변해서 멍을 주고 가는 장난 같은 인생사 가슴 아픈 사연에 울고 있는 사람도 복에 겨워 웃는 사람도 정 때문에 울고 웃는다 돈 때문에 울고 웃는다 아 인생 정곡을 찌르는 노랫말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도로남’이 되려면 그 사이에 ‘놈’이 되는 과정을 거칠 때가 많습니다. 최근 일반인 부부들이 겪는 실제 갈등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화제입니다. 출연한 사람들 연령대에 관계없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바로 말입니다. 서로를 부르는 말, 특히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말에 화들짝 놀랍니다. ‘야’, ‘너’는 다반사고 말끝마다 ‘X새끼’, ‘XX새끼’ 소리가 따라다닙니다. 심지어 자녀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말합니다. 말이 짧아지면 마음도 짧아지고, 그러다 몸도 상처로 골병들게 마련입니다. 살리는 말, 죽이는 말 우리는 말로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서로 나눕니다. 말이 없는 부부도 문자메시지는 주고받습니다. 말, 글, 언어를 떠나서 소통하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가족과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일수록 말이 가진 힘은 큽니다. ‘체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말이 씨가 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등 말에 대한 속담이 참 많습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법정에서 증언 한마디가 무죄 판결을 끌어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를 내 마음 밭에 뿌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이 던진 말을 그냥 흘려보냈으면 큰 사달이 나지 않을 텐데, 그 말을 내 마음 밭에 툭 떨어뜨려 씨를 뿌리는 순간 그 말에 뿌리가 생기고 줄기가 뻗어나가고 잎이 생기고 결국 열매를 맺어 그 말대로 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요? 누가 나쁜 말을 하더라도 우리 마음 밭에 뿌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쁜 말이 자란 가시덩굴에 긁히고 찔리지 않도록 아예 마음 밭에 들이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남도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남의 편을 진실한 내 편으로 만들어 서로 지키고 살리는 지름길은 없을까요? 말 한마디, 언덕 나를 살리고 남도 살리는 비법은 바로 말에 덕(德)을 붙이는 것입니다. 덕 중에서 가장 큰 덕이 바로 ‘언덕’(言德)입니다. 덕을 베풀려면 보통 물질이나 자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돈 한 푼 안 드는 게 이 언덕입니다. 또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습니다. 말에 덕을 붙이면 그 사람도 잘되고, 그 말을 하는 나도 덩달아 잘됩니다. 덕과 득이 되는 말이 있고 독이 되는 말이 있습니다. 덕(德)이라는 글자는 누군가를 도와 혜택을 받게 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득(得)도 마찬가지로 화폐를 손에 쥐고 있는 모습, 즉 재물을 획득한 모습을 뜻합니다. 덕과 득은 비슷한 의미를 지닙니다. 말에 덕을 붙이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을 잘되게 하는 것, 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언덕(言德)은 덕담(德談)과 일맥상통합니다. 남 잘되기를 비는 것이 덕담이니까요. 생판 남을 만나서 님이 될지, 놈이 될지, 또 무심결에 던진 한마디 말이 덕과 득이 될지 아니면 독이 될지는 오로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말의 주인이 바로 자신이니까요. 내 삶의 기준은 하희라 씨입니다! 남편 얘기가 나올 때마다 번번이 소환되는 연기자 최수종 씨. 우주 최강 ‘아내바라기’ 일등 남편으로 등극한 뒤 한 번도 왕좌를 내주지 않는 그 남자. 아내 하희라 씨가 14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자, “지금까지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거고, 마지막 그 순간까지 정말 잘해낼 겁니다”라며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항상 옆에서 지켜보며 함께할 거라고 사랑을 다짐하며 약속합니다. 예전에는 그런 표현이 방송용 가식이나 위선이 아닐까 삐딱한 시선도 없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진심이 사무치도록 감동을 줍니다. 무조건 내 편, 있습니까? 친정에 갈 때면 아버지는 식사 뒤 커피 한잔 해야지 하시며 믹스커피 봉지를 따십니다. 그걸로 부족한지 달디단 커피에 꿀을 듬뿍 넣어주십니다. 꿀 같은 아버지 사랑에 온몸과 맘이 따뜻해집니다. 무조건 언제나 든든한 내 편 1호입니다. 그렇다면 남편은 내 편 몇 호일까요? 내가 혹 잘못된 판단을 해도, 내가 한쪽 얘기만 듣고 흥분해 길길이 뛸 때도, 내가 어처구니없는 고집을 피워도, ‘당신 말이 맞아! 당신이 잘했어! 누가 감히 우리 여보를 화나게 했어? 다 죽었어!’라고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꼭 필요합니다. 만약 없다면 당신이 먼저 무조건 그의 편이 되어주면 어떨까요. 마음 미장공 열두 번째 이야기이자 2022년 마지막 인사로, 남편을 떠올리며 썼던 제 글 한 편을 대신 올립니다. 한 해 동안 제 편에서 마음 다해 응원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도 무조건 당신 편입니다. 내 편 무조건 나를 믿어주는 사람 헤맬 때도 기다려주는 사람 때로 속여도 넘어가는 사람 미워도 예쁘다 해주는 사람 야속해도 허허 넘기는 사람 실수조차도 묻지 않는 사람 허물 모른 척 덮어주는 사람 종종 가슴 아픈 말 하는 사람 최고라고 추켜세우는 사람 훌륭하다고 말해주는 사람 귀신같이 우울함 아는 사람 딱 그때 술 한잔 권하는 사람 난 그런 사람이 좋더라
- 2022-12-22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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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건강 행사주간’, 건강한 노년 위해 ‘눈 건강’ 챙겨요
- 보건복지부는 한국실명예방재단과 함께 ‘눈의 날’을 맞이해 13일(목) 서울 송파여성문화회관에서 ‘제52회 눈의 날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또한 21일(금)까지 ‘눈 건강 행사주간’ 기간 동안 충청남도 태안, 인천시 눈 건강검진, 교육과 홍보에 나선다. ‘눈의 날’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전 세계에 눈의 소중함, 실명과 안질환 예방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매년 10월 둘째주 목요일로 지정한 기념일이다. 우리나라도 이날을 기념해 행사를 열고 있는데, 올해 기념행사 주제는 ‘다 함께 밝게 보는 세상 ♥YOUR EYES’로 세상을 밝고 맑게 보기 위해서는 눈 건강과 안질환 예방에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이날 행사에서 복지부는 지난 한 해 눈 건강 증진 및 실명 예방사업에 힘쓴 기관과 개인을 선정,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 20점(기관 5점, 개인 15점)을 수여했다. 표창을 받은 화천군 보건의료원은 교통 여건이 열악한 의료취약지역의 취약계층 노인과 아동의 무료 안검진 사업에 참여해 안질환 치료가 필요한 대상자를 발굴하고, 적기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지역 주민의 눈 건강 증진에 기여했다. 표창을 수여받은 김형준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는 2010년부터 현재까지 노인안검진 등 국내 의료취약계층의 실명 예방에 기여했다. 캄보디아 무료수술 지원 사업에 참여해 열악한 의료환경과 빈곤으로 실명 위기의 캄보디아 지역민의 수술 및 진료를 지원해 해외 저개발국가의 실명예방사업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어 12일(수)부터 10월 21일(금)까지 10일간 ‘눈 건강 행사주간’이 진행된다. 국민들이 생활 속 눈 건강관리 방법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지역별 눈 건강검진, 교육과 홍보 등이 있을 예정이다. 한국실명예방재단에서는 노인과 취학 전 어린이를 주 대상으로 충청남도 태안군 등 8개 지역에서 눈 건강검진을, 인천광역시 동구 등 23개 지역에서는 ‘노인 저시력 예방교육’ 등 눈 건강 교육을 실시한다. 또한, 전래동화 심청전을 모티브로 한 눈 건강 인식 개선 만화도 온라인을 통해 제작‧배포할 예정이다. 김혜영 보건복지부 치매정책과장은 “노년기 건강한 생활을 위해서는 노화 속도가 빠른 눈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정부와 지자체, 한국실명예방재단 등 민간 기관이 협력하여 눈 건강 증진 및 실명예방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나가겠다”고 말했다. 강윤구 한국실명예방재단 이사장은 “눈은 한 번 나빠지면 회복이 어려운 신체기관”이라며 “‘다 함께 밝게 보는 세상’을 위해 앞으로도 실명 예방을 위한 ‘눈 의료비 지원 사업’ 및 ‘찾아가는 눈 검진 사업’, ‘노인 저시력 예방교육 사업’을 확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전했다. 한편 대한안과학회와 대한안과의사회 역시 눈의 날을 기념해 10일(월)부터 16일(일)까지 ‘눈 사랑 주간’으로 지정했다. 올해는 ‘3대 실명질환, 안저검사로 한번에 빠르고 쉽게!’라는 슬로건 아래 녹내장‧당뇨망막병증‧황반변성을 쉽고 빠르게 진단할 수 있는 ‘안저검사’를 장려하는 캠페인을 시행하고 있다.
- 2022-10-1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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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장년 여성 어업인, 1만 원대로 특화 검강검진 받는다
- 해양수산부가 중장년 여성 어업인을 대상으로 특화건강검진 시범 사업을 실시한다. 대상지는 강원도 강릉시, 충청남도 보령시, 전라북도 군산시 등 15개 기초지자체로,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50세 이상 70세 미만 여성어업인을 대상으로 한다. 대상자는 해당 지자체에 미리 신청한 후 지역별 특화 건강검진 기관에서 2만 원 이하의 자부담만 내면 된다(검진비의 90% 지원). 54~69세는 일반 건강검진에 일부 항목이 포함돼 있어 특화 건강검진 자부담 비용은 1만6200원 정도다. 특히 강원도 강릉시, 동해시, 삼척시, 양양군, 속초시, 고성군, 인제군과 충청남도 보령시, 삼척시, 양양군, 속초시, 고성군, 인제군과 충청남도 보령시, 홍성군, 경상남도 사천시에 거주하는 여성어업인은 지자체의 지원으로 무료 검진이 가능하다. 2019년 해양수산부 소득복지과의 ‘여성어업인 질환 현황 조사 및 여성어업인 특화 건강검진 도입 방안 연구’에 따르면 여성 어업인의 유병률이 남성어업인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 어업인의 경우 주로 맨손어업이나 나잠어업에 종사해 남성 어입인에 비해 관절염, 요통 등 근골격계 질환을 갖는 경우가 많다. 작업상 위험 노출도는 남성이 더 높았지만, 여성이 상대적으로 손상, 질병 등에 취약해 유병률이 더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어업 관련 질병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근골격계 질환 역시 여성의 질병률이 남성보다 높은 수준(남성 3.1%
- 2022-10-1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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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조 아나테이너’ 윤영미 “60대 인생도 무모하게!”
-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윤영미(60). 그녀의 제주도 집 이름은 ‘무모한 집’이다. 직접 작명했다는 윤영미는 “제 인생을 돌이켜보니 저는 굉장히 무모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무모하다’는 꼭 부정적인 말은 아니다. 누군가의 무모한 도전과 열정이 그를 성공으로 이끌기도 한다. 윤영미 역시 무모한 성격 덕에 아나운서가 됐고, 더 나아가 ‘여성 최초’라는 이름 아래 여러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윤영미의 무모하지만 아름다운 도전은 60대에 접어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윤영미에게 아나운서는 오랜 꿈이었다. 초등학생 때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우연히 방송반 아나운서를 맡은 그녀는 진행의 매력에 푹 빠졌고, 아나운서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아예 아나운서 명찰을 달고 다니던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윤영미 아나운서’라고 불렀다. 윤영미는 반드시 아나운서가 되어야만 했다. 목표를 정한 그녀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었다. 방법이 없다면 찾아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윤영미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청량리역 역장을 찾아가 “왜 여자는 방송을 안 하냐”고 물으며 방송을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에 한 달여 동안 안내 방송을 한 그녀는 ‘최초의 지하철 방송 여자 아나운서’라는 타이틀을 얻게 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윤영미는 대학 졸업 후 춘천MBC 사장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당시 춘천MBC에는 공채 제도가 없었는데, 아나운서 시험을 볼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패기 덕에 윤영미는 1985년 춘천MBC 아나운서가 되면서 꿈을 이뤘다. 이어 그녀는 1991년 SBS 개국 당시 경력직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SBS 입사 후에도 ‘최초의 여성 프로야구 캐스터’, ‘최초의 아나테이너’(아나운서+엔터테이너)라는 수식어를 갖게 됐다. “제가 워낙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는데 방법을 알지 못했어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요. 저는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걸 직접 해보고, 뭐라도 시도해보려는 편이에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이기도 했고요. 저희 어머니도 늘 ‘안 되면 끝까지 해봐라. 분명히 길이 보인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만들어라’는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그런 말들이 많은 힘이 된 것 같아요.” 이런 아나운서 처음이라고? 춘천을 벗어나 SBS라는 큰물로 옮겨가니 고충이 따랐다. 윤영미는 “SBS에 들어가서 한 3년 동안은 TV 방송을 못 했다. 제 자리가 없었던 거다”라면서 “당시 아나운서 중에 순위를 매기자면 저는 거의 꼴찌였다”라고 말했다. 쟁쟁한 아나운서들 사이에서 위기의식을 크게 느낀 윤영미. 그녀의 성격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윤영미가 찾은 돌파구는 ‘야구’였다. 당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여자 캐스터가 없던 시절이었다. 윤영미는 자신이 길을 개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야구를 좋아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야구의 ‘야’자도 몰랐기에 그녀는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당시에는 야구에 미쳐 살았던 것 같아요. 매일 근무 끝나면 야구장에 가서 야구를 봤어요. 당시에는 신문밖에 없으니까 스포츠신문을 탐독하고, 야구 중계를 켜놓고 따라 하면서 중계 연습을 했죠. 1년 동안 고시 공부하듯 공부했더니 야구가 조금씩 보이더라고요.” 당시 아나운서 국장이었던 이계진은 윤영미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 캐스터 오디션 기회를 줬다. 윤영미는 당당히 합격하며 마침내 ‘여성 최초 야구 캐스터’가 됐다. 그렇게 그녀는 1994년부터 2000년까지 야구 캐스터로 활약하며 이름도 널리 알렸다. 지금도 그녀는 1994년 4월 7일 광주 첫 중계부터 한국시리즈 중계 등 영광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이후 2000년대 윤영미는 또 한 번 주목받았다. 추석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한 그녀는 신신애의 ‘세상은 요지경’ 무대를 선보였다. 아나운서라는 고정관념을 깬 혼신의 무대는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이후 윤영미는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손님이 됐다. 신신애와 이박사 성대모사는 물론 시원한 입담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최초의 아나테이너 탄생이었다. “당시 ‘엽기 아나운서’라고 주목받았는데, 요즘 같았으면 짤이 엄청 돌아다녔을 거예요.(웃음) 그런데 사실 아나운서실에서는 품위가 떨어진다면서 별로 안 좋아했어요. 저는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도, 인지도가 높은 아나운서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미지 실추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고, 이왕 할 거면 어설프게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즐겼을 뿐이에요. 시청자분들도 처음에는 제 모습을 낯설게 느끼다가 아나운서도 저렇게 할 수 있구나라고 받아들이신 것 같아요. 그러면서 그때 아나테이너라는 말이 처음 나온 거죠.” 윤영미는 50대 진입을 앞두고 또 한 번의 도전을 했다. 2010년 12월 SBS를 퇴사하고 프리랜서를 선언한 것. 그 이유에 대해 그녀는 “방송국에서는 50세가 되면 방송 진행보다 교육 등 다른 것을 하기를 원한다. 활동에 제약이 생긴다는 것이다. 저는 필드에 계속 있기를 원했다”고 설명했다. 여전히 아나운서로 빛나는 윤영미. 그녀가 생각하는 아나운서로서 자신의 강점은 무엇일까. “저는 특별히 비주얼적으로 뛰어난 것도, 대단한 특기를 가진 것도 아니에요. 제가 남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건 성실성밖에 없는 것 같아요. 누구나 다 성실하겠지만 저는 굉장히 프로의식이 강해서 평생 지각, 결석을 해본 적이 없어요. 천재지변이 있을 때는 아침 방송에 늦을까봐 전날 출근해 책상에서 잔 적도 있고요. 항상 미리 가서 준비하니까 같이 일하는 사람들한테 믿음을 준 것 같아요.” 제주도, 그리고 가족 윤영미는 프리랜서가 된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종편 채널은 물론 홈쇼핑 채널에도 출연하고, 강연도 하고, 책도 쓴다. 연기에 대한 열정은 늘 가슴에 품고 있다. 현재 그녀는 제주도를 오가면서 살고 있다. 책을 쓰기 위해 제주도를 찾았다가 제주도의 매력에 이끌려 정착하게 됐다. 제주도 살이를 한 지 벌써 3년째. 윤영미는 올해 종달리로 이사했다. 그 집이 바로 ‘무모한 집’이다. 그녀는 유튜브 채널 ‘윤영미의 무모한 집’도 운영한다. 이사를 하고 수리·인테리어 과정을 거쳐 집이 재탄생하는 전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제주도의 전통 양식을 살리면서 모던함을 가미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다. 돌 부엌과 돌 인덕션, 찻장 등 윤영미의 감각이 녹아들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저는 방송이 있기 때문에 서울을 왔다 갔다 해요. 그래도 한 달에 반은 제주도에서 사는 것 같아요. 남편은 제주도에 계속 있고요. 제주도 집에 있다 보면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많이 행복해요. 평생 생각만 하고 못 해봤던 일을 짧게나마 실현한 것 같아서 또 다른 꿈을 이룬 듯한 느낌이 들고 뿌듯해요.” 그런데 무모한 집은 정확히 말하면 윤영미가 산 집이 아니다. 6년 반 동안 장기 렌털한 집이다. 그러다 보니 자기 집도 아닌데 대대적인 수리를 하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윤영미 역시 생각보다 많은 돈을 썼지만 후회는 없다. 그녀는 “저는 남들과 다르다. 내가 행복한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에 살던 제주도 집은 ‘체리집’이었어요. 벚꽃(체리 블러섬)이 굉장히 아름다운 집이었거든요. 이번 집은 감나무가 있어 ‘감나무집’이라고 하려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왜 남의 집에 그렇게 억대의 돈을 투자하느냐, 무모한 짓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저도 돈이 그렇게 많이 들 줄 몰랐는데, 무모한 짓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제 인생 자체를 돌이켜보니 저는 굉장히 무모한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무모한 집’이라고 이름 지었죠.” 윤영미는 자신의 무모한 삶에 관해 얘기하면서 ‘결혼’을 언급했다. 결혼 또한 무모했다는 생각이다. 그녀는 서른다섯 살에 출판사 직원이었던 황능준 씨와 결혼했다. 화려한 아나운서였던 윤영미의 선택은 다소 의외였다. 결혼 전 소개팅, 선을 많이 봤는데, 황능준 씨만큼 자신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없었단다. 즉 사랑 하나만 보고 결혼한 것인데, 결혼 생활은 예상보다 힘들었다. 윤영미는 가장의 무게까지 짊어져야 했다. 황능준 씨가 결혼 후 3년 만에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전업주부가 됐기 때문. 졸지에 가장이 된 그녀는 악착같이 일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윤영미는 지난해 한 방송을 통해 그동안 쌓였던 가장의 스트레스를 털어놓았다. 늘 밝고 당당한 그녀의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더욱이 윤영미는 남편과 ‘졸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냐고 묻자 그녀는 “지금 남편과 거의 떨어져서 살고 있기 때문에 졸혼이나 마찬가지다. 30년 정도 같이 살았으면 많이 산 거다”라고 말했다. “남편의 장점은 밝고 긍정적이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점이에요. 결혼할 당시 ‘돈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만 좋으면 됐지’라고 생각했는데, 살아보니 그건 아니더라고요. 내가 너무 순진했던 것 같아요. 가장으로서 많이 힘들었지만, 그래도 아이들을 보면 결혼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윤영미가 오랜 시간을 버티면서 산 이유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들 때문이었다. 현재 20대인 두 아들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다. 특히 첫째 아들은 미국 아이비리그에 편입한 바 있다. “첫째는 경영을 전공해서 월스트리트 쪽으로 진출하고 싶어 하고, 둘째는 건축가가 되고 싶어 해요. 나중에 정말 우리 집을 지어줄지도 모르죠.(웃음) 저는 아이들이 무엇이 됐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애들을 속박하며 공부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그렇게 하니까 오히려 애들이 알아서 공부를 열심히 한 것 같아요.” 윤영미는 어느덧 60대 시니어가 됐다. 동안 소리도, 젊게 산다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정작 자신은 잘 모르겠단다. 그냥 자신의 방식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을 뿐이라고. 윤영미는 나이를 먹을수록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해야겠다고 느낀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방송과 여행을 죽을 때까지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그 과정에서 무모한 도전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뛰어들 그녀다. “앞으로 2년 동안은 우리 애들 학비를 대는 것이 목표예요. 그리고 제주도 집을 6년 반 계약했으니 잘 살아야죠. 또 욕심이 있다면 강원도나 전라남도에 새집을 얻어 제주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살고 싶어요. 인생의 목표는 오늘을 재밌게 살고, 하고 싶은 대로 살자예요. 독자 여러분도 마음에 어떤 갈망이 있다면 앞뒤 보지 말고 무조건 행하면서 즐기며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 2022-09-02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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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이 자연을 넘어설 수 있겠나?” 강종권 자하미술관 관장
- 강종권(67) 관장은 미술을 좋아하는 취향에 추동돼 자하미술관을 만들었다. 처음엔 그저 경치 좋은 인왕산 기슭에 살림집 한 채 짓고 싶었단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꿔 미술관을 지었다. 그의 전직은 회사원. 기업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니 미리 길러둔 미술에의 조예와 경륜이 깊었을 리 없다. 뒤늦게야 미술과 미술관의 물정을 파고들었을 텐데, 평소의 공부 습성을 기반으로 실력을 키웠던 것 같다. 즉 출발은 다소 무모했지만, 이후의 행보는 견고해 뜻을 이루었다. “회사 다닐 때 즐겨 찾기 시작한 곳이 미술관이었다. 지친 마음을 위로받을 수 있는 곳으로 미술관보다 나은 게 없다는 걸 알고 더 자주 미술관을 다녔다. 이게 미술관을 개관하게 된 동인이다. 남들도 나처럼 위안받기를 바라며. 그게 매우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미술관을 만든 것이다.” 건물 설계시 모델로 삼은 곳이 있나? “건축을 구상하기 전에 100여 권의 건축 관련 책부터 읽었다. 그러고 내린 결론이 안도 다다오(노출콘크리트와 자연 채광을 건축에 끌어들인 일본 건축가)의 기법을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특히 안도 다다오가 나오시마 섬에 지은 지중미술관을 보고 착상한 게 좀 있었다.” 입지의 자연 풍광이 빼어나다. 서울 도심이 지척인데 깊은 맛을 주고. “미술 작품과 산 풍경을 동시에 즐길 수 있어 다들 강렬한 인상을 받는 것 같더라. ‘높고 외진 곳에 관람객이 오기나 하겠어?’ 처음에 숱하게 들었던 얘기가 그랬다. 그러나 기우에 가까운 소리였다. 적다고만 할 수 없는 관람객들이 찾아오니까.” 명산 인왕산 기슭인 데다 북한산과 북악산이 전면에 펼쳐져 수려하다. 덕분에 전시 작품은 뒷전이고 풍광에 더 관심 갖는 이들이 많을지도. “작품으로 다 채우지 못한 갈증을 자연경관으로 보충할 수 있어 양수겸장이라 봐야 하겠지. 재미있는 건 이곳의 풍수 여건이다. 절묘한 터라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실제 인왕산은 애니미즘의 센터였다. 이에 착안해 샤머니즘을 주제로 기획전을 펼친 적도 있다. 그러나 샤머니즘에 깊은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자연의 물상을 신앙으로 바라보는 건 성향에 맞지 않아서.” 그럼 당신에게 자연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 “위대한 예술 작품으로 느껴진다. 사람이 만든 미술 작품이 제아무리 걸작이라도 자연을 넘어설 수 있겠나? 인간의 예술이냐 자연이냐, 그 우월성을 논하는 경우도 있지만 난 웃고 만다.” 전시 작가 선정엔 어떤 기준을 두나? “개성적인 자기 세계를, 실험적 표현 기법과 형식을 구현하는 작가를 우선시한다. 콜라주 작가나 여성주의 작가, 퍼포먼스를 하는 작가들도 선호한다. 일단 배제하는 건 상업주의에 물든 작가다.” 배고픈 작가가 태반이다. 사립미술관들도 형편이 열악하다. 영혼까지 팔아서야 안 되겠지만, 예술도 장사가 돼야 지속 가능한 게 아닐까? “사립미술관만 말하자면, 영리를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실엔 딜레마가 있다. 사립미술관이야말로 ‘적자 창고’니까. 기부 문화의 확산으로 문제를 푸는 게 가장 정당한 해법이다. 요원하지만.” 그는 요즘 한국 최초의 여성 화가 나혜석 연구에 한창이다. 나혜석 기획전을 준비하는 것. 남도의 섬에 미술관을 꾸릴 구상도 하고 있다.
- 2022-08-30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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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자 교육, 내용만큼 방법도 중요해” 문해교육지도사 송경숙 씨
- 송경숙(63) 씨는 충청남도 대전광역시에서 문해교육지도사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녀 덕분에 평생 모르고 살았던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사람들이 많다. 송경숙 씨는 NGO 단체인 대전시 인성예절협회의 장을 맡고 있다. 원래 한문 학원을 열었던 그녀는 그 공간을 인성예절협회로 발전시켰고, 한글을 모르는 어르신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송 씨는 한국어문해교육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한국어교육 봉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벌써 10년이 넘었다. 인성예절협회에는 약 80명의 선생님이 있다. 송경숙 씨는 “대전시 초‧중‧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분들도 계시고, 저처럼 교원이 아니었던 분들은 한국어문해교육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교육을 하고 있다”라면서 체계적인 시스템에 관해 설명했다. 이곳에서 한국어문해교육은 1:1로 진행된다. 현재 직접 강의실을 찾아와 수업을 듣는 학생은 22명이다. 80명의 선생님들은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을 하므로 한 학생에게 일주일에 다섯명의 선생님이 배치된다. 이동이 편치 않은 학생에게는 선생님이 직접 자택을 찾아가 수업을 한다. "현재 수업을 듣고 계신 어르신분이 계시는데 잘 걷지를 못하시고 지팡이를 짚으세요. 그래서 저희 사무실에 택시를 타고 오가시고 점심을 사드시다 보니 한 번 왔다 갔다 하면 3만 원이 든다고 하시는 거죠. 그래서 선생님들을 댁으로 보내드린다고 했더니 거절하시더라고요. 여기 오면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도 하고 차도 마실 수 있어서 그게 좋다고 하셨어요.“ 학생들의 평균 연령은 75~83세의 어르신들이다. 50대 초반의 젊은 학생도 종종 있다고 한다. 한글은 알아도 학교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찾는 사람들도 많다. 인성예절협회에서는 초·중·고등학교 검정고시 준비도 돕는다. 여기서 초·중·고를 검정고시로 졸업하고 대학교 교육학과에 진학한 뒤, 선생님으로 봉사활동을 하겠다며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70대에 한국어 깨우치기를 시작해서 대학교까지 졸업하며 학구열을 불태우는 학생도 많다고 한다. 송경숙 씨는 문해교육지도사는 한국어 능력보다 선생님으로서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송 씨는 “자격증 시험을 볼 때 발표 수업을 하는 것도 교사로서의 자질을 평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주입식으로 수업을 하면 ‘내가 이러려고 공부하는 게 아닌데’ 하면서 우는 어르신들도 있다. 그래서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수업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선생님으로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는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됐다는 어르신들의 말을 들을 때죠. 간판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고 하시는 분도 계시고, 은행에서 이제 업무를 보실 수 있다고 자랑하시는 분도 계시고요. 올해는 인구 조사 설문을 직접 했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셨어요. 특히 선생님으로 돌아오는 학생분들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굉장히 뿌듯하죠.” 송경숙 씨는 문해교육지도사로서 어르신들을 가르치면서 자신도 배우는 것이 많다고 말했다. 평소에 공문을 쓰거나 일상생활에서 잘못된 맞춤법을 쓸 때가 있는데 문해교육을 하면서 자신도 공부가 되고, 배워가는 것이 많다는 것. 무엇보다 늦은 나이에 열정을 불태우는 학생들에게서 받는 에너지는 값진 선물이다. “저는 돈을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문해교육지도사의 벌이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 해 봤어요. 그러나 그보다 배워가고 얻어가는 것이 많은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은퇴 후라든지 시간적 여유가 있으신 분들에게 문해교육지도사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자격증을 취득해서 일하면 많은 보람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일주일에 한 번은 화장하고 외출할 수 있으니 일상이 무료하지 않다는 장점도 있답니다.”
- 2022-08-12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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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촌 성공의 열쇠, “정부 지원에서 찾아야”
- 귀농·귀촌을 꿈꾸지만 막막함을 느끼는 이들이 많다. 특히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왔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에 정부는 다양한 지원 정책을 마련, 귀농·귀촌 인구 증진에 힘쓰고 있다. 다만, 정부의 지원을 받으려면 정부 지정 교육기관에서 관련 교육을 100시간 이상 이수해야 한다. 이와 관련해 귀농, 귀산촌, 귀어로 세분화해서 자세히 살펴봤다. 정부는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인구가 농가에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귀농·영농 교육 100시간 이수’를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교육을 통해 농지와 농가주택 마련 방법, 작물 재배 방법, 판매와 홍보 방법 등을 배운다. 귀농·귀촌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고,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귀농과 귀촌, 뭐가 달라? 귀농 농어촌으로 이주해 농·어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것. 귀촌 농·어업을 직업으로 삼지 않고 전원생활 등을 이유로 농어촌으로 이주하는 것. 귀농·영농 교육 100시간 채우기 농림축산식품부(농정원 포함), 농촌진흥청, 산림청 및 지자체가 주관 또는 위탁하는 귀농·영농 교육을 100시간 이상 이수하면 된다. 단,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에서 주관하는 농업교육포털(www.agriedu.net)에 등록된 교육 이수와 수료증만 인정받을 수 있다. 때문에 귀농·귀촌을 희망한다면 농업교육포털 가입과 이용은 필수다. 온·오프라인 교육 정보를 모두 얻을 수 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온라인 교육은 참여 시간의 50% 범위만 인정해주며, 최대 40시간만 인정된다는 점이다. 즉 온라인 교육으로 최대 40시간을 인정받으려면 80시간 이상 수업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오프라인 교육을 60시간 이상 들어야 100시간을 채울 수 있다. 정부의 자금 지원은? 각 지자체에서는 100시간 이상 교육을 이수했는지, 농지원부·농업경영체에 등록된 주 경작자인지, 생산물에 대한 증빙자료를 갖췄는지, 경작 규모가 기준 이상인지 등의 조건을 충족한 경우 자금을 지급한다. 대표적인 혜택은 농업 창업자금과 주택 구입자금 지원이다. 농업 창업자금은 대출 한도 3억 원 이내에서, 주택 구입자금은 7500만 원 이내에서 가능하다. 대출 금리는 연 2% 고정 또는 변동금리이며, 대출 기간은 15년 만기다. 농업 창업자금은 농지 구입, 온실·하우스·저장 시설 설치 및 구입, 농기계 구입, 농식품 가공시설 설치, 축사 구입 등을 지원한다. 주택 구입자금은 주거 전용면적 150㎡ 이하 주택을 대상으로 한다. 지자체마다 귀농·귀촌지원센터, 아카데미 등이 있을 정도로 귀농과 관련된 교육 과정은 많고 다양하다. 그중에서 시니어 독자에게 추천할 만한 교육 과정을 꼽아봤다. 귀농·귀촌 맞춤형 교육 전직 창업농 교육은 40·50세대를 대상으로 하며, 농업인으로서 삶과 변화 관리, 농산물 유통 전략, 농촌에서의 가족 생활 등에 대해 배운다. 은퇴 창업농은 60대 이상을 대상으로 하며, 농촌에서의 보건의료, 자산관리와 재테크 등을 배울 수 있다. 농업 일자리 체험 교육 농업·농촌 이론 교육 5일, 농작업 실습 교육 5일로 구성되며, 총 80시간을 인정받을 수 있다. 서울,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등 지자체마다 교육이 진행 중이다. 교육비는 국비 100%로 무료다. 지자체 귀농학교 봉화비나리귀농학교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은 학교다. 봉화의 주요 농산물인 사과, 고추, 수박 등에 대한 농사 기술과 현장실습 위주로 교육이 진행된다. 5박 6일 과정이며, 60시간 인정된다. 현재 8월, 9월, 10월 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창녕생태귀농학교 매년 200명의 수강생이 거쳐가는 곳이다. 8월 26일부터 10월 28일까지 9주 동안 100시간의 교육이 진행된다. 귀농 선배들을 만나 얘기를 듣고 농장 견학과 체험을 할 수 있다. 임업(林業) 관련 일을 하는 귀산촌은 귀농 안에 속하고, 농업교육포털에도 교육 과정이 등록돼 있다. 다만 귀농은 농업진흥청이, 귀산촌은 산림청이 주무 관청이자 지원기관이다. 귀산촌은 행정적으로 산림기본법상 산촌으로 이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산림 자원을 활용하기 위해 산림 관련 커뮤니티 활동이나 생활·생업을 위해 산촌으로 이주하는 행위를 말한다. 보통 전원생활, 나무·열매·버섯류·산나물류·약초류 등의 임산물 재배, 산촌 유학, 체험농장 운영, 농·임산물 유통 등의 일을 한다. 임업후계자 교육 임업후계자 교육은 예비 귀산촌인을 위한 대표적인 교육이다. 임업후계자란 임업의 계승·발전을 위해 임업을 영위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는 요건을 갖춘 사람을 말한다. 산림청 소속 기관인 산림교육원과 전문 교육기관에서 교육받을 수 있다. 한국임업진흥원 산림청과 함께 귀산촌 교육을 기획·운영하는 곳으로, 다양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귀산촌 아카데미는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무료 공개 강좌로 귀산촌에 대한 관심을 유도한다. 더불어 산양삼과 산나물 재배기술 과정도 진행한다. 경남귀산촌학교 퇴직 후 제2의 삶을 찾는 사람, 도시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을 위해 귀산촌 정착에 관련한 교육·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농장디자인 과정, 산림경영 과정 비대면 교육도 있으며, 6월에는 야생화 소득증대 과정 교육이 열린다. 귀어업인은 농어촌 이외의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이 어업인이 되기 위해 농어촌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을 의미한다. 해양수산부 산하 한국어촌어항공단이 귀어귀촌종합센터를 운영하고 있고, 지자체마다 귀어귀촌지원센터가 있다. 어촌에서 어업, 양식업을 희망하는 이들은 3단계 교육을 받아야 한다. 먼저 이론 교육을 받고, 이어 단기 기술 교육을 받아야 한다. 어업, 양식업 분야 현장견학 및 체험 위주의 단기 기술 교육으로 창업 업종을 선택하기 전 다양한 어업 체험 기회를 제공한다. 그 다음에는 장기 실습 교육을 받아야 한다. 어촌에 임시로 거주하며 어업, 양식업 기술 등을 배우는 교육이다. 귀어학교를 통해 교육받을 수 있다. 귀어학교 이론부터 실습, 어업 소득 기반 실현을 위한 컨설팅까지 받을 수 있는 장기 실습 교육기관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귀어학교는 경상남도 귀어학교로, 2018년부터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내년에는 인천시에서 8번째 귀어학교가 개교한다. 인천시 귀어학교 2023년 하반기에 문을 열 예정으로, 연간 80여 명의 수산 전문 인력을 배출할 계획이다. 어업과 양식업을 포함해 어촌 관광·서비스업 등 다양한 교육을 실시한다. 어촌체험휴양마을 본격적으로 귀어업인이 되고자 마음먹기 전, 어촌체험휴양마을을 찾는다면 어촌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다. 어촌체험휴양마을은 어업 체험을 중심으로 어촌 자연환경과 생활문화 등을 연계해 관광 기반시설을 조성한 곳이다. 현재 전국 121곳의 어촌마을이 체험휴양마을로 지정돼 운영 중이다. 남해 문항어촌체험마을 우럭조개잡이, 쏙잡이, 개막이 체험, 자연산 돌굴까기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더불어 직접 잡은 해산물로 요리해 먹을 수 있는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어 재미를 더한다. 울산 주전어촌체험마을 육지에서 유일하게 30년 이상의 베테랑 해녀 선생님들로부터 물질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해녀 밥상 체험도 가능하다. 또한 스킨스쿠버, 투명카누도 즐길 수 있다.
- 2022-08-1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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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위, “입소 노인 인권 위해 요양시설 점검 강화해야”
-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가 노인요양시설 입소 노인의 인권 증진을 위해 노인복지법을 개정하고, 시설 점검 및 관리‧감독을 강화하도록 보건복지부 장관과 지방자치단체장들에게 권고했다. 인권위는 지난해 11월부터 12월까지 전국의 노인요양시설 9개소를 대상으로 방문조사를 실시했다. 노인의료복지시설의 인권침해 요인을 사전에 예방‧개선하고, 종사자들의 인권 의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시설 내 인권보장 체계 △신체구속 실태 △건강권 및 안전권 보장 여부 등을 중심으로 조사가 이뤄졌다. 조사 대상 지역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경기도 광주시‧가평군‧양평군, 강원도 춘천시, 충청남도 보령시‧당진시, 전라남도 구례군, 경상북도 영덕군 등이다. 노인요양시설 입소 노인 대다수가 치매성 질환이나 복합적 기저질환 등으로 인지능력이 저하되어 있어, 시설 종사자에게 전적인 돌봄을 의존하고 있다. 이에 시설 내 인권침해 행위가 발생해도 스스로 신고하기 어려워 ‘노인인권지킴이단’과 같은 외부 모니터링 체계가 필요하다. 조사 결과 노인인권지킴이단을 구성‧운영 중인 시설은 9개소 중 1개소에 불과했다. 노인인권지킴이단을 운영하는 시설마저 시설종사자 위주로 단원을 위촉해 ‘외부’ 모니터링 체계로서의 의미를 갖지 못하거나, 위촉된 단원이 무보수 명예직으로 활동하는 등의 미흡한 점을 보였다. 일부 기초지방자치단체 노인요양시설에서는 노인인권지킴이단을 구성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인권위는 치매환자의 낙상사고 예방을 위한 돌봄인력의 확대 또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방문조사 대상 노인요양시설에서 최근 2년간 발생한 80건의 낙상사고 중 70건은 치매환자 사고였으며, 61건은 요양보호사 돌봄공백 상황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입소 노인의 낙상사고 예방 대책도 미흡한 것으로 조사됐다. 낙상사고 80건 중 골절상으로 이어진 경우 26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욕탕 내 안전 손잡이 등 안전시설을 설치하지 않거나, 낙상사고의 원인 분석 기록을 관리하지 않는 등의 미흡함이 드러났다. 또한 낙상사고 예방을 이유로 ‘시설 내 층간이동 제한’, 과도한 ‘신체 억제대 사용’ 등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는 사례도 확인됐다. 요양보호사 대비 입소 노인이 많아 돌봄공백이 빚어지는 상황 역시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방문조사 대상 노인요양시설 9개소 모두 ‘노인복지법 시행규칙’상 입소자 2.5명당 요양보호사 1명이 근무해야 한다는 기준을 충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전체 입소자 대비 노인요양시설에 근무하고 있는 요양보호사 수를 보장하는 기준으로, 일부 시설에서는 야간 시간대에 요양보호사 1명이 돌봐야 하는 입소 노인이 최대 23명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외에도 당뇨‧고혈압‧고지혈 등 노인성 질환을 고려한 식단을 별도로 제공하는 시설은 3곳에 불과했으며, CCTV를 과다하게 설치해 입소 노인의 사생활 침해가 이뤄지는 등의 요소가 이번 조사 결과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이에 인권위는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노인인권지킴이단 구성‧운영 의무화를 위한 법령 개정 △시설 내 낙상사고 예방 대책‧관리 체계 마련 △요양보호사 배치기준을 상향 조정 △CCTV 설치‧운영에 대한 세부기준과 절차 규정 △신체억제대 사용 관련 근거 명시 및 사용 최소화를 위한 대안 마련 △국민건강보험공단 ‘노인요양시설 내 전문요양실 시범사업’ 대상 확대‧발전 등 의료서비스 개선방안 강구를 주문했다. 관할 지자체장들에게는 △노인인권지킴이단의 독립성 보장 및 예산 지원 △노인성 질환자를 위한 맞춤형 식단 제공 △CCTV 설치 및 운영 실태 관리‧감독 강화를 권고했다. 한편 인권위는 지난 6월 15일, 노인학대 예방의 날이자 세계 노인학대 인식의 날을 맞이해 발표한 성명에서 인권위는 성명에서 “우리 사회는 인권의 눈과 감수성으로, 노인을 ‘시혜의 대상’으로 여겼던 시각에서 벗어나 ‘권리의 주체’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 2022-08-0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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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만들고 지역 오가는 ‘관계인구’된 사람들
- 귀촌(歸村), 촌으로 돌아가거나 돌아오는 것. 보통은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지방으로 이주하는 현상을 ‘귀촌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역에 살지 않고도 귀촌한 것처럼 그 지역에 참여하는 새로운 인구가 나타났다. ◆마을 만드는 디렉터형 관계인구 1. 루치아의 뜰 석미경 대표는 서울에서 출판사 편집자로 11년을 일하다가, 남편이 공주에 있는 대학 교수가 되면서 1995년 공주로 귀촌했다. 차에 관심이 많았던 석 대표는 차 문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2012년 버려진 한옥을 발견하고 뼈대를 살려 지금의 ‘루치아의 뜰’을 열었다. 공주에 살며 동네 산책을 하다 보니 골목에 관심을 갖게 됐다. 2014년에는 주민참여 프로젝트로 ‘잠자리가 놀다 간 골목’이라는 도시재생 활동을 제안해 선정됐다. 현재는 공주풀꽃문학관 운영위원, 공주문화도시 정책위원 활동도 하면서 청년들의 공주 정착을 돕고 있다. 먼저 귀촌한 사람으로서 누군가 공주로 와 무언가를 도전할 때, 묵묵히 지켜보며 그의 시도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리라 믿고 있다. 2. 사회문화예술연구소 오늘 여러 지역에서 도시재생이나 문화기획 일을 하던 임재일 소장은 유독 공주에서 일할 기회가 많았다. 10년 가까이 공주에서 공공미술을 하던 그는 2018년 자연스레 공주로 귀촌했다. 30년 동안 하숙집으로 사용되다 버려진 3층짜리 폐가를 사들여 연구소를 옮겼다. 공주의 과거와 현재를 잇고, 공주 사람과 이웃 사람을 잇는 장소를 만들고 싶어 ‘대안카페 잇다’도 열었다. 그는 공주 근대문화거리, 하숙테마거리, 제일감리교회 기독교박물관 조성, 국고개 문화예술거리 조성사업 등 공주 원도심 도시재생 사업을 기획·실행했다. “주민 300여 명을 인터뷰하고 기록한 내용으로 ‘하숙집의 세 딸’이라는 연극도 기획하고, 문화의 날도 만들었어요. 연구소 내에 ‘공주 정보 자료관’을 만들어 도시재생 과정에서 기록하고 모은 공주의 모든 자료를 전시하고 있죠. 공주로 귀촌을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공주에 대해 알기 위해 조사차 우리 연구실을 한 번은 들러요. 저는 그들에게 공주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죠.” 문화를 통해 공주의 관계인구로 지내다 귀촌한 그는 이제 다른 관계인구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ㆍ임재일 소장과의 인터뷰 Q 공주에 유독 귀촌 하는 사람이 많은 듯 하다. A 충청남도에서 대학이 가장 먼저 생긴 곳이 공주다.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이 있다 보니 선생님이나 전문 분야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많다. 교직에 있었거나 직장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은퇴를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꽤 있는 듯 하다. 그저 공주가 살기 좋아 오는 사람도 있고. 공주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꽤 다양하다. Q 고향은 세종시(구 연기군)인데, 공주에 자리 잡은 이유가 있나? A 거리를 조성하거나 환경을 개선하는 공공미술 일을 오래 했다. 특히 지역의 역사 문화를 활용한 프로젝트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자원이 많은 공주에 우연히 초대를 많이 받았다. 공주대학교에서 9~10년 정도 겸임교수 생활도 했고. 지역을 살리는 프로젝트를 하면 건축, 인문학, 미술, 행정 등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모인다. 자연스럽게 문화 기획을 하게 됐는데, 이제 나이가 어느 정도 드니까 마지막으로 정착할 곳을 찾게 됐다. 연기군이 고향이긴 하지만 학창시절을 공주에서 보냈기에 친구들도 다 이곳에 있다.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다. 지금은 문화 소프트웨어, 문화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젊은 친구들과 공주를 연결하는 일을 한다. Q 공주에 이주하려는 이라면 이곳 연구소를 한 번은 꼭 들른다는 데, 그들을 돕는 이유가 있나? A 재미있으니까.(웃음) 그동안 공주에서 했던 모든 작업물들을 이곳에 모아두었다. 공주 문화 투어를 하면 가이드가 가장 마지막으로 연구소에 들른다. 그럼 나는 작업 기록집들을 펼쳐 공주의 지난 시간을 보여준다. 이주를 하려면 집이 가장 중요한데, 빈집 조사도 했어서 어디에 가면 빈집이 많은지도 알려준다.(웃음) 하던 일이 그렇다 보니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많이 알아서 자연스럽게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게 됐다. 나도 공주가 발전되어가는 걸 기대하고 지켜본 것처럼,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도 그들의 기대만큼 성취를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다. Q 기록을 통해 공주와 사람들이 이어지는 듯 하다. A 과거를 상기하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다. 당시의 기억을 이야기 하고 싶은 거다. 지금은 현재만 남아있으니 과거 그 자리가 무엇이었는지 모르지 않나. 노인 한 사람이 박물관이라고 하는 것처럼, 누구나 이야기를 가지고 산다. 공주는 백제시대 수도였다 보니 그만큼 이야기가 더 많은 셈이고. 일종의 오픈 뮤지엄처럼. 3. 이미정갤러리 이미정 관장은 공주 토박이다. 귀촌을 한 건 아니지만, 그를 통해 공주와 관계 맺는 사람이 늘었다. 이 관장은 2016년 3월, 그림이 팔리기는커녕 그림 보러 오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여겨지던 공주 원도심에 갤러리를 열었다. 이 소식을 듣고 지역을 떠나 있던 작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윤상원, 정영진 등 원로 작가들이 이미정갤러리에서 전시를 하고 그림이 팔리면서 작가로 입지를 다졌다. 정영진 작가는 U턴 했고, 윤상원 작가는 이주를 준비 중이다. 이 관장은 이들을 ‘1986년도 공주의 미래였던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최근에는 ‘월전 귀향’이라는 주제로 공주가 직장이거나, 공주가 고향이지만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작가들을 모았다. “공주의 인구는 줄고 있지만, 공주로 유입되는 인구는 늘고 있어요. 화가일 수도, 감상자일 수도, 소장자일 수도 있겠죠. 열 명이 오면 여덟 명은 공주를 돌아보고 가요. 공주와의 관계가 생기는 거죠. 이전에는 공주 출신 작가들하고만 교감했다면, 이제는 공주에서 일하거나 공주에서 유학하거나 고향이 공주지만 다른 지역에 살거나 공주에 인접한 지역에 있는 작가들까지 연결하고 있어요.” 어쩔 수 없이 타지로 나가는 작가들조차 공주에 반드시 작업실을 두고 두 지역을 오가고자 노력한다. 이미정갤러리를 통해 공주에 살든 살지 않든 생활권을 공주에 두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난 셈이다. ㆍ이미정 관장과의 인터뷰 Q 갤러리를 열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A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 갤러리를 여는 건 로망이다. 미술 작가로 활동하면서 30여 년 미술 학원을 운영하고, 대학 강의도 나갔다. 일을 그만 두면서, 전업 화가로 살 것인가 전업 주부로 살 것인가 고민을 했는데 둘 다 어렵더라.(웃음) 갤러리가 수익 사업은 아니지만, 작업실의 연장으로 해볼까 싶었다. 7년째 자리를 지키다 보니 작가들도 모이고, 이 주변으로 작년에 두 개, 올해 두 개 갤러리가 개관하기도 했다. Q 갤러리 운영뿐 아니라 작가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프로그램도 만든다고 들었다. A 한 평론가의 말을 인용하자면 "갤러리스트는 대중과 예술가의 중간 역할자다." 원로 작가들이 공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기획전을 열거나, 그림을 판매할 수 있는 판로를 만들고 있다. 이 감영길을 '공주의 인사동'으로 만들어 보자고 행정기관에 제안했다. 작가 한 명에게 행정기관이 지원하는 금액을, 그림을 사는 사람에게 지원금 형태로 주자고 했다. 그래서 공주문화재단에서 '그림 상점로'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했을 때 갤러리로 참여했다. 그림 상점로는 그림 구매자에게 일정 금액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지난해에는 예술가 약 7명을 단순 지원할 금액으로, 1억 4000만 원의 예술품 거래를 만들어냈다. 7~80명 화가의 작품들이 팔린 거다. 올해는 참여 작가도, 작품 수도 더 늘었고 상반기에만 지난해만큼의 거래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공주를 오고가는 사람들은 이 주변을 둘러보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시게 된다. Q 젊은 작가들과 활발하게 소통한다고 하던데.. A 각자의 이유로 언젠가는 공주를 떠날 수도 있지만, 공주와의 관계성을 잃지 않도록 젊은 작가들과 자주 소통한다. '영영 아티스트'라는 20대 화가들의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작가들이 공주에서 개인전을 안 한다. 대전이나 서울처럼 큰 곳으로 간다. 공주를 떠나고 싶어 그런 게 아니다. 커뮤니티를 만들고 그림을 놓치지 않도록 도움을 주다 보니, 젊은 작가들이 학업이나 생계로 어쩔 수 없이 공주를 떠나더라도 작업실만큼은 공주에 두려고 하게 되더라. 이곳 감영길에서 누군가 그림을 전시하고, 누군가는 감상하고, 누군가는 소장한다. 그렇다면 예술 생태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Q 이미정갤러리를 중심으로 작가, 관객, 공주가 모두 연결되는 느낌이다. A 어린 학생들이 갤러리를 자주 온다. 한 학생이 “저도 대학을 졸업하고 예술을 하려면 공주로 와야겠네요”라고 했는데, 무척 기특했다. 아이한테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며 아이 손잡고 오는 엄마도 있다. 공주에 갤러리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찾아오는 작가들도 꽤 있다. 사람들이 건강하게 그림을 즐기고, 여러 이유로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던 작가들도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중간 역할자인 갤러리스트로서 역할을 다 하고 싶다. 앞으로는 공주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 공주에서 태어난 사람, 공주에서 일하는 사람 등 공주와 관계 있는 작가들도 연결하려 한다. ◆지역 오가는 더블로컬형 관계인구 1. 퍼즐랩 권오상 대표는 경기관광공사에서 15년 동안 해외 마케팅 일을 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공주에 매력을 느꼈다. 어느 날 마음에 드는 한옥을 발견하고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겠다며 회사를 그만두고 귀촌했다. 그는 근교인 세종시에 거주하면서 공주 원도심을 살리는 일을 한다. ‘봉황재’를 찾는 사람들에게 원도심의 맛집과 볼거리를 안내하다 보니 ‘마을스테이’를 꿈꾸게 됐고, 2019년 퍼즐랩을 창업했다. 2021년도 행정안전부 청년마을 만들기 공모사업에 이어 올해도 청년들의 지역 탐구와 정착을 지원하는 ‘자유도’를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참여한 청년들이 다음 기수에서는 프로그램 스태프로 참여했다가 결국 공주로 귀촌하는 사례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부 사업을 하기 전에도, 사업이 끝난 후에도 그는 공주를 느슨하게 연결하는 일을 이어갈 계획이다. 2. 다이얼팩토리 이병성 대표는 서울에서 권오상 대표와 독서 모임을 하던 사이로, ‘봉황재’에 놀러 왔다가 공주에 매료됐다. 그는 12년 동안 플랜트 설계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사이드 프로젝트로 ‘교육’을 주제로 독서 모임을 했다. 느슨하게 연결된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아 ‘공동체 디자인’을 하고 싶었다. 공주 원도심은 그 꿈을 구체화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서울에 살면서 공주에 코러닝스페이스 ‘와플학당’을 만들고, 청년마을 ‘자유도’를 통해 여러 프로그램과 워크숍을 기획했다. 커뮤니티가 마음에 든 청년들이 공주를 찾아 머무르기 시작했다. 이 대표는 올해 와플학당을 운영하는 기업 ‘에듀커넥트’를 다이얼팩토리로 리브랜딩하고, 커뮤니티 디자인과 대화 워크숍을 더욱 구체화했다.
- 2022-08-03 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