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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Life” 나를 위하여 산다는 의미는?
- 인생이막에서 자주 등장하는 핵심단어는 ‘자아실현’이 아닐까? 나를 위하여 산다는 의미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이투데이 월간 자매지 “제2인생의 동반자 BRAVO my life”란 이름 속의 “my life’도 그런 뜻이 포함되어 있지 싶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고 주인공은 나지만, 대체로 전반생은 자신보다는 타인을 중심에 두고 살아왔다. 물론 그 타인 속에는 가족이 크게 차지한다. 가족을 위하여 살아왔음이다. 인생일막의 삶이 대부분 그러했다. 그것이 곧 자기의 행복 기준점이었다. 정년을 맞거나 은퇴하게 되면 삶의 방향을 타인을 위한 삶에서 자신을 위한 방향으로 선회하려고 한다. 생업으로 그동안 미뤄두었던 꿈이나 하고 싶은 일을 이루는 시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자아실현이다. 매슬로의 다섯 가지 욕구 중에서 최상위에 자리한다.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 공감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순이다. 하위 욕구들이 충족되고 개인적으로 안정하게 되면 더 나은 나를 위하여 자신의 적성에 맞는 취미나 특기를 개발하려 한다. 그것이 곧 자아실현인 셈이다. 인생이막의 첫 번째 희망으로 자아실현 욕구가 다가선다. 후반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주제로 이야기하게 되면 대체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용어가 바로 자아실현이다. 먼저 살다간 많은 분도 그런 측면에서 후회하곤 했다. 일본의 호스피스 한 분이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죽음을 앞에 둔 환자 1,000명도 그랬다. 임종을 맞으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다양한 대답을 했다. 눈에 크게 띄는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했던 일” “죽도록 일만 하지 않았더라면”이었다. 앞서간 사람들의 후회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후반생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지혜이지 싶다. 그래서 인생이막은 나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에 무게가 실린다. 나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과연 어떤 삶일까? 이런 분이 실제 있었다. 인생일막을 정말 열심히 살아왔고 주변의 박수를 받으며 정년 퇴직하였다. 이제부터는 자기를 위하여 살아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뒷전에 미뤄두었던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려고 별도의 오피스텔 하나를 얻어 집에서 나왔다. 이곳에서 숙식도 하며 혼자서 지냈다. 집에는 필요한 때에 간혹 들렸다. 서예도 배우고 색소폰도 불고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이것저것 마음껏 하였다. 집안일은 아예 신경을 끊었다. 집에 있는 안사람이 강력하게 항의하여도 들은 체 만체했다. 아내는 단단히 화가 났다. 두고 보자며 벼르기 시작했다. 남편은 그 동안 가족을 위해서 헌신했으니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이라며 버티고 있다. 과연 그것이 자기를 위해서 하는 일일까? 나 자신을 위하여 일한다는 것은 과연 나 혼자를 의미하는 것일까? 후반생에 있어서 “나”라는 의미 속에는 배우자가 포함되어 있다. 고리타분한 얘기가 될지 모르지만, 부부를 동심 일체라 한다. 나를 위한다는 의미에는 당연히 배우자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바른 생각이지 싶다. 나를 위하여 산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부부가 함께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인다. 함께한다는 것은 마음을 같이 한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전반생에 가족을 위하여 헌신해 왔지만, 따져 보면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은 사실 많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지 모른다. 지금처럼 친구 만나는 시간, 잠자는 시간, 텔레비전 보는 시간, 스마트폰 보는 시간을 제외하면 남편이나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인생이막에서 나 자신을 위하여 하는 일의 중심에는 끝까지 함께해야 할 배우자가 있음을 지나쳐선 아니 될 듯 하다.
- 2016-07-06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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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속으로]강원 영월읍 에어비앤비 ‘앞뜰농장’ 장미자씨 집
-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 에어비앤비가 내세우는 여행 방법이다. 친구, 가족이 아닌 현지 주민과 하루 정도 살아보는 건 어떨까? 여름휴가 시즌을 맞아 외국을 가보고 싶었으나, 강원도 영월의 한 에어비앤비를 찾아가 숙박했다. 혼자 떠난 여행. 역시 그곳에는 기분 좋은 만남이 있었다는 사실! 웃음 가득했던 시간이 벌써 그리울 따름이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2시간 달려 영월 시외버스터미널에 오후 2시쯤 도착했다. 때마침 빨간색 ‘붕붕이’를 타고 마중 나온 이번 달 에어비앤비 호스트 장미자(張美子·51)씨.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난 뒤 다짜고짜 “약속이 있으니 같이 좀 가자”하기에 무작정 따라갔다. 친절한 미자씨와 술 빚기 장미자씨를 따라간 곳은 영월청정소재산업진흥원(이하 청정원). 작년부터 이곳에서 술 빚는 동호회 ‘자주동샘’을 조직해 영월을 대표하는 술을 빚고 있다고. 현재는 시음 행사를 열어 선을 보이거나 영월의 벼룩시장에서 소소하게 판매하는 정도지만 정식 법인을 세워 술을 판매할 계획이다. 청정원에 도착해서 할 일은 아침에 빚어놓은 맵쌀죽과 누룩을 버무려 밑술을 만드는 것. 다른 회원들이 시간보다 조금 늦은 탓에 일손을 도울 겸 두 팔을 걷어붙였다. 처음에는 죽 반죽이 뻑뻑하지만 계속 손바닥으로 누르고 치대다 보면 걸쭉한 막걸리처럼 변한다. 치댈수록 달고 맛있는 술이 나온다고 해 열심히 거들었다. 영월 귀농 라이프, 1박2일로는 부족해요 집으로 돌아와서 가방을 숙소인 2층에 휙 던져놓고 장미자씨 일을 도왔다. 물론 쉬어도 상관은 없다. 에어비앤비의 정신대로 뭐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허락만 된다면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마침 호주와 제주에서 농장생활 했던 경험을 살려 장미자씨와 함께 마당에 난 잡초들을 뽑기로 했다. 힘들면 뽕나무 밭에 가서 오디를 따먹기도 했다. 사실 올해 오디 농사는 접었다는 정미자씨. 지난 3월 뜻밖의 한파로 전라도에서 가지고 온 뽕나무가 냉해를 참지 못하고 얼어 버렸다. 그래도 따 먹을 정도는 되기에 이웃 친한 분들이 와서 따가기도 한다. 머루랑 다래랑 따 먹고 살아요 장미자·안종호(安鍾浩·53) 부부는 인천에 살다 강원 영월읍 흥월리로 8년 전 귀농 했다. 작년 4월부터는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됐다. 손님 숙소로 이용하는 곳은 2층 공간 전체. 집을 지을 때 2층에 작은 부엌이 있으면 편할 거 같아 장만해 넣었고, 훗날 장성한 아이들이 살게 되면 편할까 싶어 밖으로 나가는 구름다리를 놓았다. 이 모든 것을 손재주 좋은 남편 안종호씨가 제작했다. 대학 졸업 후 취업한 아들, 대학에 입학한 딸이 외지에 나가는 바람에 공간이 텅 비어 버렸다. “에어비앤비를 열어 놓고 난 뒤 설마 이렇게 먼 곳까지 사람이 들어오겠어? 했는데 문을 연 지 한 달 됐을 때 첫손님을 맞았어요.” 주말이면 매번 꽉 차는 정도는 아니지만 꾸준히 손님들이 찾아온다. “바로 어제 왔던 손님은 어디 온천을 예약해 놓고도 저희 집이 좋다고 퇴실 시간이 훨씬 지나 오후 1시가 돼서야 떠나셨어요. 다음에 또 오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꿀맛 나는 식사시간 저녁에는 낮에 열심히 일한 농사꾼을 위해 두툼하게 썬 돼지고기를 넣고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여 주셨다. 다음 날 아침에는 직접 잡은 다슬기로 된장국을 끓여 주신 장미자씨. 안 먹어 봤으면 후회했을 맛에 눈이 트일 정도였다. 아침을 먹고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보니 각종 과일과 채소, 산나물이 지천이었다. 손님들도 적당히 먹을 정도만 담아가고 과일도 먹을 수 있어서 좋아들 한다고. 삼시세끼 먹을 것이 끊이지 않는다더니 절대 굶을 일 없는 곳이 바로 장미자·안종호 부부의 집이었다. 언젠가 또 만날 날을 기약하며. 안녕 친절한 미자씨!
- 2016-07-04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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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그리움을 넘어
-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 하는 사람이 과거를 그리워하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리움이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어렸을 때의 일을 글로 한번 꼭 표현해 보고 싶다는 열망이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만큼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돌아가 볼 수 없는 정말 그리운 그 시절의 추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정말 기쁜 마음이다. 유년시절 필자는 살아오면서 자신을 서울 토박이라고 생각해 왔다. 60년 인생에서 50년이 넘는 시간을 서울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당연히 서울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는데 실은 고향은 대전이다. 필자 머리가 특별히 좋은 건 아니지만 유년 시절의 많은 일을 기억하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마 서너 살 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아버지, 어머니와 유성온천 만년장호텔의 개울 위 다리에서 벚나무에 기대어 사진을 찍었던 일도 기억나고, 만년장 객실의 커다란 전면 유리창 밖으로 봄날의 벚꽃이 하나 가득 흩날려 쏟아지던 것도 생생하다. 필자는 1952년 아름다운 계절 6월의 첫날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전 근교에서 큰 포도밭을 하시는 할아버지의 장남으로 많은 동생을 보살펴야 했으므로 피아노를 좋아하셨지만 예술가의 길로 가지 못하고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셨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평양이 고향인 이북 사람이셨다. 할아버지는 경성제대를 졸업하시고 충남대학교에서 사학과 교수로 평생 후학을 길러내셨으며 명망이 두텁고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아주 인자하고 훌륭한 분이였다. 아버지는 대전 사람이지만 어머니는 서울 옥인동이 고향이고 진명여고를 다니다 대전으로 피난 가서 대전여고를 졸업했다 어머니도 역시 피아노를 전공해서 초등학교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거기서 두 사람이 만났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집엔 피아노가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전쟁도 있었고 다들 어려운 형편이었을 텐데 두 시림은 어떻게 피아노를 그렇게 잘 쳤는지 존경스럽다. 필자가 태어난 동네는 대전역 건너편 골목의 정동이라는 동네였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인데도 그때 있었던 일들이 기억이 나니 필자 머리가 보통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한다. (크면서 공부는 잘 못 했지만…. 부모는 딸 셋을 낳고 더는 아이를 갖지 않으셔서 필자 집은 세 자매가 되었다. 필자 집은 대전역 건너편의 중심가에 있었고 친가는 조금 떨어진 가양동, 외가는 10km쯤 떨어진 문창동에 있었는데 아주 어릴 때부터 외가를 좋아해서 거기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어린 마음에도 그곳이 그렇게 좋았던 이유는 바로 꿈과도 같은 집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제 나라로 돌아간 일본 사람의 적산가옥이라 불리던 집을 외할아버지가 장만하셨는데 그 집은 정말 꿈의 동산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집 건물이 있고 왼쪽으로는 커다란 팽나무에 할아버지께서 필자를 위해 매어주신 기다란 그네가 보였다. 필자는 언젠가는 꼭 이 집에 대해서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필력이 모자라 표현을 어찌해야 할지 항상 머릿속에 담아 두고만 있었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하는 마음만 갖고 있었다. 마당에는 일본 사람 특유의 정원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아이들이 숨바꼭질할 수 있을 정도의 동산과 돌다리가 걸쳐진 연못이 있었다. 연못 속에 돌로 만든 거북도 멋있었고 연못 속에서 피어난 늘씬하게 쭉쭉 뻗은 수선화의 초록 이파리와 꽃도 아름다웠다. 대문에서부터 집 안으로 들어가는 현관까지 놓인 발 디딤돌 외의 공간에는 빼곡히 알록달록 키 작은 채송화가 융단처럼 깔렸기도 했는데 외할머니께서 가꾸신 것이다. 오른쪽으로 가장 끝에 부엌이 있고 그 옆에 칸 칸으로 나누어진 커다란 미닫이 유리창이 안방 문이었다. 부엌 앞에는 아래위로 손잡이를 움직이면 언제나 콸콸 시원한 물이 쏟아지는 펌프가 있었고 안방을 지나 돌출된 현관을 가진 작은방 옆에는 석류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새빨간 석류가 딱 벌어져서 그 안에 보석 같은 알맹이가 가득 들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외가에 들어와 본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필자는 덕분에 동네의 헤로인이 될 수 있었다. 놀이할 때에도 필자는 우선권을 가질 수 있었으며 동네의 또래 아이들은 모두 필자를 떠받쳐주었기 때문에 그곳이 그렇게 좋았을 수도 있겠다. 필자는 항상 집이 부자인 줄 알고 살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당시 처절하게 돈을 모으셨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부족함 없이 딸 셋에게 풍족하게 해 주려고 부모가 많이 노력하셨다는 걸 알았다. 필자는 어릴 땐 숫기 충만하고 남 앞에 서는 걸 좋아했었던 것 같다. 대흥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책 읽기를 잘해서 4학년 때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교장 훈화하는 단상에 올라 동화구연을 하기도 했다. 욕심 많은 어부의 아내 이야기로 어부가 잡아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부리다 망한다는 교훈적 이야기였던 것도 생각난다. 동화구연이 끝나고 과자를 사 먹으려고 교문 밖 문방구에 갔더니 주인아줌마가 “너 참 잘하더라” 라고 말씀을 해서 군것질을 못 사고 공연히 연필 한 자루만 사 들고 오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공인이 되면 그렇게 체면치레도 해야 하는가 보다. 필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유행가도 잘 불렀다. 또 어머니와 영화를 보고 온 날은 아이들 앞에서 어찌나 실감 나게 연기를 해 보였던지 극장에 갔다 온 것보다 더 재미있다는 말을 들었다. 필자는 어릴 때 그런 재주가 있었다. 이렇게 신나게 살던 필자 맘에 꼭 드는 도시인 대전을 떠날 일이 생겼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서울로 이사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전이 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던 필자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필자는 식구들이 필자만 외가에 두고 떠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지만 며칠 후 초등학교 6학년이 시작되던 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의 첫 집은 아현동에 있었고 아현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아현동 집은 대문 앞에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어서 대추나무 집이라고 불렸으며 아주 예쁘고 깔끔한 한옥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처음 다녔던 아현초등학교를 한 학기만 마치고 전학을 간 곳은 돈암초등학교였다. 집이 돈암동으로 이사했기 때문이었다. 돈암동 집 역시 한옥이었다. 그때로써는 더 좋은 동네로 옮긴 거지만 요즘으로 따져보면 아현동은 지금 너무나 발전한 고층빌딩 숲으로 시내 중심가가 되었으니 이사하지 않고 그냥 그 대추나무집에 살았다면 어머니, 아버지는 재테크를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이후 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필자는 동대문 밖 창신동에 있는 동덕여중에 들어갔다. 동덕여중은 일제 강점기에 여성교육에 큰 뜻을 품으신 조동식 박사가 설립한 민족 학교라 할 수 있는데 교정이 아름답고 건물이 너무나 멋졌다. 본관 건물의 빨간 벽돌담을 초록 담쟁이가 가득 뒤덮어 고풍스러운 모습은 그림 동화책을 보는 듯 마음을 설레게 했다. 등교하던 모습도 생생하다. 허리를 졸라매는 하얀 블라우스와 군청색 스커트의 교복을 입고 버스를 타고 등교했다. 등굣길의 버스 안이 얼마나 만원이었는지 그때 학교에 다녔던 학생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터질 듯한 버스 속으로 안내양이 등으로 밀며 필자를 구겨 넣었다. 그러면 운전기사 아저씨는 일부러 차체를 흔들어 뭉쳐 있는 사람들을 고루 뒤섞어 놓았다. 버스에서 내리면 반듯하게 다림질하고 주름 잡아 허리를 매어 입은 교복이 구겨지고 삐뚤어져서 한동안은 동소문동 집에서부터 보문동, 신설동을 돌아 창신동 학교까지 걸어 다니기도 했다. 혜경, 대학생이 되다 그리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고3 때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꼭 가고 싶었던 이화여대는 아니어도 청파동 언덕의 아름다운 숙명여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과도 영문과나 불문과 아니면 국문과가 좋았지만 예비고사 성적에 맞추어 무난하게 경제학과를 지망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최고의 학과이지만 그 당시 필자가 경제학과 학생이 된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뭐 어쨌든 이렇게 청춘 시대가 활짝 열렸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공부보다는 노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은 듯하다. 수많은 미팅도 있었고 친구들과 명동이나 종로 등 좋아하는 거리를 섭렵하며 다녔다. 이렇게 미팅 전성시대를 누렸지만 정작 결혼은 매우 철저한 중매로 했으니 아이러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었으나 그런 추억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 아닐까? 필자는 학교 다니는 동안 교직과목을 듣고 교생실습을 거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땄다. 친구들은 취직한다고 동분서주했지만 필자는 그때도 놀기만 했다. 교사자격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근무지였다. 서울에서는 임용고시가 너무나 어려워 통과하기 어렵다고들 했다. 그래서 많은 친구가 경기나 지방으로 교사가 되어 떠났다. 지방은 서울보다는 선생님 되기가 쉬웠다고 한다. 그러나 딸만 셋인 아버지는 필자를 지방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결국 필자는 본의 아니게 빈둥빈둥 노는 신세가 되었다. 끔찍하게 딸들을 사랑한 아버지 덕분에…. 20대 후반이 됐는데도 시집을 못 가 나이가 27세가 되자 어머니는 매일 한숨을 내 쉬며 걱정했다. 대학 시절 그렇게 연애를 많이 했는데 정작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시집을 못 간 것이다. 그래서 선을 보기 시작했다. 무척 많이 보았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필자가 자타공인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많은 선을 보았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강력히 추천하는 사람을 만났다. 약대를 나왔고 시아버지는 변호사라고 했다. 어머니는 첫딸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야 동생들도 그렇게 될 거라며 이 사람을 만나보라고 했다. 선을 봤는데 남자가 너무 못 생겨 보였다. 못 생겨서 싫다고 했더니 제 복을 제가 찬다면서 야단치셨다. 그런데 이야기해 보니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그래서 이 사람으로 결정해 버리고 말았다. 부잣집 맏며느리? 이 남자를 만나보니 인물보다는 마음이 참 착해 보였다. 더구나 어느 날 자기 집 얘기를 하는데 집에 수영장이 있다는 게 아닌가. 필자는 거짓말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외국 영화에서 본 것처럼 넓고 푸른 잔디밭에 파란 물이 출렁이는 예쁜 풀장을 생각한 것이다. 실제 가서 보니 뭐, 거짓말은 아니고 정말 집안에 수영장이 있긴 했다. 집은 장충동 고급 주택가인데 어머니가 손수 지휘하셔서 아주 공들여 지은 집이었다. 필자가 상상한 그런 수영장이 있는 집은 아니었지만 멋지고 좋은 집이었다. 전면으로 볼 때 3층이었고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오른쪽으로는 분수가 나오는 정원이 있고 왼쪽으로 반지하인 1층이 있는데 그 층에 운전기사 방과 제사나 명절 때만 사용한다는 넓은 부엌이 있고 그 구석에 어린 시동생과 시누이를 위해 네모난 풀장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 수영장을 보고 필자가 엉뚱하게 상상했던 게 생각나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결국 결혼했다. 처음엔 결혼하고 바로 분가하기로 했었는데 사정이 있었다. 시아버지가 첩이 있어 따로 살고 있다고 했다. 시어머니가 집이 너무 큰 데 식구가 없으니 몇 년 만 같이 살자고 제의했다. 이혼의 위기에서 그런데 그렇게 시댁은 빌딩도 여러 채 갖고 있고 분당이 개발되기 전에 서현동이라는 곳에 정원이 아름다운 크고 근사한 별장도 있었으며 시아버지가 아직 현역 변호사로 활동하는 등 굉장한 부자이긴 했지만 첩과 나가 계셨기 때문에 좀 복잡했다. 그렇게 멋진 집에서 5년을 살고 분가했다. 분가는 친정 옆 동네로 했다. 시댁의 가정사가 복잡한 것과 대조해서 친정은 너무나 인자하신 아버지가 있어 언제나 평화로웠다. 특히 아버지는 손자를 목숨처럼 사랑했다. 이혼의 위기 부잣집 맏며느리라고 부러움을 받고 살던 필자에게 큰일이 일어났다. 상속받은 소공동 프라자호텔 뒤편 북창동에 있던 5층 건물이 넘어가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 건물은 시아버지가 죽기 직전까지 변호사 사무실로 쓰고 있었던 알토란같은 건물이었다. 위치가 좋아 건물세도 잘 나오고 필자도 황금알을 낳는 거위 같다고 표현하며 좋아했었는데 마음만 착한 남편이 사기에 걸려 보증을 서는 바람에 날려 버렸다. 그런 상황에 놓이자 이혼도 고려하게 되고 심각해졌는데 필자는 이혼하지 않았다. 아들을 생각해서 온전한 가정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변에선 필자를 바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은 가끔 남편을 구박하기도 하고 화풀이도 하지만 이혼 안 한 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큰 재산을 잃었지만 든든한 시댁과 친정아버지 덕분에 그리 힘들지 않게 살아갈 수 있었다. 아들이 잘 자라주었고 키우는 동안 너무나도 기쁘거나 즐거운 일이 많았기 때문에 없어진 큰 재산이 아깝긴 해도 무난하게 살아왔다. 이제 다섯 살이 된 아주 예쁜 손녀와 돌 지난 손자, 아들, 며느리를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행복한 일만 있을 줄 알았는데 큰 불행이 닥쳤다. 남편이 큰 병에 걸렸다. 정말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이다. 투병 중인 남편을 보며 한때 재산을 없앴다고 못되게 굴었던 일도 후회돼 마음이 아팠다. 이런 상황이 되어 보니 유행가 가사가 다 진리로 다가온다. 있을 때 잘하라는 유치한 말이 정말 가슴에 와 닿고 누구에게나 해 주고 싶은 말이다. 천상병 시인의 말처럼 소풍 나온 이 한 세상 잘 살았으며 이별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을 갖자고 다짐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 2016-06-30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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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그런 마음이었으면
- 책 한 권을 펼쳤다. 미국에서 이민 생활할 때 선물받은 책이었다. '이제야 나는 삶을 얘기할 수 있겠네'라는 제목으로 한 젊은이가 중병이 들어 죽음을 맞이하며 담담하게 써 내려간 내용이었다. 그는 지나온 날에 신명 나게 살아왔지만 병들어 지치고 나약해진 현실의 영혼 앞에 지나온 삶과 남은 삶의 회한, 인생에 대한 후회와 간절함 들을 하나님 앞에 의지하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주변에서 갑자기 처해진 절박한 삶 앞에서, 더구나 힘겨운 이민생활 속에서는 하나님과 교회를 접해야만 함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다. 때로는 정서적 마음의 의지와 외로운 타지 생활의 위안으로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가족 또한 미국 이민생활 동안 본의 아니게 신앙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낯선 이민 초기, 교회에서 베풀어 주는 사랑의 대가만큼이나 무조건 열심히 봉사 생활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늘 이방인에 머물고, 아무 느낌이 없는 나그네, 그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며 왔다 갔다만 하는 평신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 반복들은 오히려 신앙생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더욱 멀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가끔은 삶의 무게에 짓눌린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안간힘 쓰면서 신앙에 라도 의지하기를 원해보지만 그 기대감은 번번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었다. 어렵게 시작한 교회가 안정될라치면 잡음이 생기기 시작하고 머리수가 많아지면 이권다툼이 생겨나고, 목사님들은 신도들을 편가르고 신도들은 목사님을 심판대에 올려 마구 난도질을 해대고 전쟁터가 돼버린 교회는 결국 불씨의 잿더미가 되어 초라한 폐허가 되어 남은 자들만이 그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어찌 모든 세상사가 아니, 한 지붕 교회 아래 제각각 목소리 높은 신도들이 서로의 입에만 맞을 수가 있을까. 한때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도 요란한 잡음으로 세월을 가르는데, 하물며 미국까지 건너온 개성 강한 사람들이 온몸으로 하나가 될 수가 있겠냐 마는 필자 같은 초보 신도의 눈에는 가히 아름답지 않은 믿는 사람들 삶의 이면이었다. 서로 맞추면서 인내하는 것. 인내하면서 배워가는 것. 인생을 말씀으로 하나하나 깨달아 가는 것. 이러한 것들은 일반 대중들보다는 적어도 신앙인이라는 믿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신앙의 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신앙에 대한 근본 목적이 흔들리는 오늘날은 인간의 유독한 심리가 포화상태를 넘어 그 정체성을 잃은 지 오래인 듯한 느낌이 들어 안타깝고 슬픈 생각이 든다. 필자도 때때로 남들처럼 신앙의 길에 깊이 빠져들지 못하고, 인간의 모순들만 눈에 보이는 자신이 힘들고 고독함에 방황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차라리 평범하게 느낌 없는 소속감으로 구속력 없는 초심자가 때론 자유롭고 평화롭기도 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수없이 많았고 맘만 먹으면 그때마다 또 옮기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인간은 왜 하나님 앞에서도 아니, 위대한 신의 존재 앞에서도 그 끊임없는 욕심의 달성을 위해서는 한없이 싸워대야만 하는지, 고개 숙여 매달린 예수님이 가슴 아프고 처절하게만 다가온다. 또 교회를 옮겨야 하는, 떠나야 하는 현실 속 평신도의 마음은 마냥 가난하기만 헸다. 살면서 언제나 우리에겐 각자 주어진 삶의 이야기, 그리고 그 종착점은 순서 없이 당장 내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정이 흘러 넘쳐 우리 교회라는 소유의 아집보다는 차라리 가끔씩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정리하고 또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을 맞이하며 숙연하게 그리고 엄숙하게 저마다의 삶을 대처하는 자세도 필요할 것만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준비 없이 맞이한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만 뒤늦게 삶을 애절하게 갈구하고 삶의 절실함을 온몸으로 얘기하기보다는 미리미리 쌓아가며 준비하는 마음이, 즉 신앙의 자세가 오히려 믿지 않는 초심자에게는 삶의 표본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까지 신명 나게 쫒아 가며 애써서 잡아온 욕심의 삶들이 결국은 별 볼 일없는 명예나 이권이었음을 냉철한 이성으로 반성하며 두 손 모아 기도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숭고한 하나님 앞에 차라리 남은 삶에 미련보다는 지나온 삶에 부끄러움을 무릎 꿇고 통성하며, 진심으로 눈물 흘려 참회하는 소망이 담긴 진솔한 아픔의 삶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람이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 늘 그런 마음으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면한 죽음 앞에서 숙연한, 늘 그 마음으로 고개 숙여 하나님 곁에서 침묵하며 평화로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 할까.
- 2016-06-29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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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엄마의 미국이민이야기] 캘리포니아의 불꽃
- 덜덜거리는 중고차를 끌고 남편을 마중 나갔다. 미리 나와 기다리던 남편은 반갑게 가족을 향해 달려왔다. 남편은 그날 저녁을 쏘겠다며 ‘엘폴로코’라는 멕시칸 음식점으로 안내를 했다. 온갖 인종 사람들이 주문을 하기 위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처음으로 먹어보는 훈제 치킨요리는 소오스가 약간은 이상했지만 그런대로 동양인 입에는 맞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필자는 일 주일에 한번씩은 멕시칸 음식을 즐겨먹었고, 다이어트 식으로도 아주 좋았다. 온 가족이 기분 좋게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남편이 일하는 세탁소는 다우젼옥스라는 동네에 있었고 필자의 집은 시미벨리라는 곳에 있었다. 23번 후리웨이를 타다가 다시 101번 후리웨이를 타고 또다시 118번 후리웨이를 타야만 비로소 씨미벨리라는 시골 동네로 들어 설수가 있다. 말이 시골동네이지 숲이 우거지고 나무들이 무성한 완전한 전원도시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미국 레이건 대통령 라이브러리(기념 도서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한 동네이기도 하다. 집들은 거의 궁전처럼 커다랗고 전형적인 서부 미국의 베드타운 도시였다. 동네 뒤편으로는 뺑뺑 돌아 겹겹이 울창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그 아래 골짜기에 아늑하게 집들이 분포되어있는 분지 형 도시였다. 백인들은 주로 은퇴를 하고 조용히 노후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 도시는 한적했다. 한인들도 약 300명 가량 살고 있어 너나 할 것 없이 가족 같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특히 여름이면 뜨겁고 건조해서 더운 동네로 이름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한낮에는 그 열기로 집밖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어 나가 돌아 다닐 수가 없었고, 밤에는 너무 건조한 탓에 코가 헐기도 했다. 모든 실내에서는 가습기와 에어컨이 왕왕 돌고 있었다. 퇴근길에 이런 저런 이야기로 남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앞으로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는 석양의 노을이 길고 멋지게 깔려 있었다. 너무나 또렷하고 아름다운 붉은 빛으로 필자는 눈을 뗄 수가 없어 가족들에게 손짓을 하며 가리켰다. 남편과 두 딸도 두리 번 거리며 멋진 노을장면을 눈에 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아무리 쳐다봐도 무어라 표현 할 수 없는 묘한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멋진 사진 같은 장면은 무언가 지나침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필자의 집 쪽으로 다가 갈수록 매쾌한 냄새가 풍겨오며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열심히 앞을 주시하며 산등성이 고개 길을 돌아 씨미벨리 초입으로 들어서자마자 남편은 소리를 질렀다. “산불이다. 산불! 저거 불 난 거야!” 자세히 보니 정말 뺑뺑 둘러진 산등성이를 따라 불꽃이 길다랗게 잔잔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필자가 본 것은 석양이 아니라 산불이 나면서 시작된 불꽃의 여명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바라보는 잊지 못할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가족들은 당황과 흥분이 시작되었고, 필자가 사는 동네 쪽이라 우선 빨리 집으로 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동네 입구로 들어서자 회오리 바람이 탄내를 몰고 다니기 시작했다. 차 창문을 꼭 닫고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도 아파트 주변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필자가족은 궁금해서 그냥 집에 머물 수가 없었다. 불구경 이나 싸움구경은 누구도 못 말린다고 다같이 구경을 나가기로 합의 끝에 온 가족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집에서 조금 멀리 산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동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나와서 이리저리 더 잘 보이는 장소를 찾고 있었다. 맥없이 돌아다니는 차들이 어찌나 많은지 혼란스러웠으나 모두들 긴장한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북쪽 산등성이로 갔을 때는 이미 도착한 차들이 빈틈없이 들어 차있어서 차를 세울 공간이 없었다. 동네 사람들, 백인 흑인 멕시칸들은 각양각색의 카메라를 손에 들고, 그 신비로운 자연의 놀라운 한 장면을 담아두기 위해 하나같이 애를 쓰고 있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불꽃들을 찍어대느라 산등성이에 서있는 사람들은 또 하나의 작품이었다. 필자가족도 얼떨결에 빈손으로 나온 것을 후회 했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눈으로 구경하기도 바쁜데 그것들을 촬영까지 한다는 여유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불은 조용히 점점 더 길게 뻗쳐 나갔고 그 불 줄기는 굽이굽이 산등성이를 타고 밤하늘에 꽃처럼 피어올라 석양의 노을처럼 환하게 비추어나갔다. 목이 칼칼하게 매연으로 가득한 공기였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한인주민들은 들뜬 마음으로 이 집 저 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멀쩡한 평일 저녁에 한자리에 모여 티타임을 갖게 되었다. 터주대감인 집주인 집사님도 조금은 당황한 듯 흥분된 목소리로 그 동네 역사를 설명해 주었다. 캘리포니아 전 지역은 해마다 여름이면 산불이 연중행사가 되었고, 다만 그때마다 어느 곳에서 일어날지는 모른다고 했다. 씨미벨리에도 10여 년 만에 찾아온 큰불이라고 했다. 캘리포니아는 사막지대로 무척 고온 건조했다. 특히 여름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풀이나 나무들이 바싹 말라 바람만 심하게 스쳐도 그 부딪힘으로 불이 날수도 있다고 했다. 간혹 누군가 담뱃불을 아무 곳에나 버려서 그 불씨들이 끝내는 몇 날 몇 일, 심지어는 몇 달 동안 불꽃의 행진이 이어지기도 한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방화범은 언젠가는 꼭 잡혀왔고, 하늘에 뜬 헬기와 함께 소방관들은 맞불작전으로 뜨거운 열기를 진압해 나갔다. 미국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소방관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 중에 하나라고도 했다. 한 달 내내 타오른 거대한 산불이 초보 이민가족에게는 경이롭고 대단한 경험이었다. 어쩌면 천사의 도시라는 대자연의 축복아래로 인간이 겪어야 할 한편의 재앙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늘아래 축복과 재앙의 아이러니, 지구의 균형된 일면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도 캘리포니아는 전 세계 최고의 기후를 자랑하지만 매년 여름이면 산불이라는 골치 아픈 연중행사가 자리매김을 한다. 천사의 도시 산등성이에는 올 여름에도 타오르는 불꽃들이 수를 놓으며 이글거리는 붉은 빛으로 하늘을 향해 치닫고 있다.
- 2016-06-29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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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환의 똑똑한 은퇴] 속지 말자 금융사기
- 최성환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50대 후반의 기혼자, 자신의 판단과 금융 지식이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 새로운 생각이나 판매 선전에 귀가 솔깃한 사람, 최근에 건강 또는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사람.’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금융사기를 당하기 쉬운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필자의 주장이 아니라 미국투자자보호교육재단(FINRA)에서 내린 ‘금융사기 피해를 가장 입기 쉬운 사람’의 정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때 만약 ‘50대 후반의 기혼자’를 ‘50대 후반 이상의 은퇴자’로 바꾸면 대부분의 은퇴자가 금융사기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은퇴자들이 사기꾼의 표적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은퇴자들은 직장에서 은퇴한 뒤 고정적 수입은 크게 줄어들지만 퇴직금이나 모아둔 사업준비자금 등 자금 동원력은 상대적으로 많다고 할 수 있다. 은퇴를 앞두고 있는 이들도 상황은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회사 생활을 20~30년 이상 해오면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판단과 금융지식이 평균 이상은 될 것이라고 믿고 있거나 그렇게 믿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간 일만 하느라 경제 및 금융시장 변화에는 상대적으로 어두울 수밖에 없다. 반면 은퇴와 함께 수입이 줄어드는 만큼 마음은 조급하고 귀는 얇아질 대로 얇아진 상황이다. 이런 틈새를 사기꾼들이 파고드는 것이다. 오죽하면 사기꾼 자녀가 퇴직금이나 목돈이 생긴 순간 ‘내 돈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을까. 설마 내가 사기를 당하랴 하겠지만 주위를 살펴보면 실제로 사기를 당한 경우가 적지 않다. 한국투자자보호재단의 2015년 조사에 따르면 금융사기를 당한 사람의 비율이 40~50대의 3.5%에서 60대로 가면 5.7%로 높아지고 있다. 5.7%면 조사대상자 20명 중 1명 이상이 사기를 당한 것이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다. 또한 금융사기를 당할 뻔한 사람의 비율도 40~50대는 20% 안팎이지만 60대는 27.3%로 높아진다. 60대는 10명 중 3명이 금융사기를 당했거나 당할 뻔했다는 것이니까 누구나 사기를 당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금융사기로 입은 피해 금액도 만만치 않다. 30대는 1900만원, 40대는 2328만원으로 그다지 많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피 같은 내 돈이라고 생각해보라. 특히 50대로 가면 9038만원으로 피해 금액이 급증하고, 60대도 5464만원으로 결코 적지 않은 돈이다. 50대의 피해규모가 가장 큰 것은 미국투자자보호교육재단이 정의한 금융사기 피해를 가장 입기 쉬운 사람 중 첫 번째로 언급한 ‘50대 후반의 기혼자’와도 맞아떨어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주된 직장에서 물러나는 나이가 53~54세이므로 50대들이 퇴직금을 포함한 목돈을 들고 뭔가 해보겠다고 나서다가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50대에게 9038만원이 얼마나 큰돈인가는 통계로도 확인할 수 있다. 통계청(2015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가구주가 50대인 가구의 순자산(총자산-부채)은 3억4363만원이다. 이 중 9038만원을 사기 당했다면 순자산의 26.3%에 해당하는 돈이다. 내 노후에 1억원이 더 있을 때와 없을 때를 생각해 보면 1억원이 얼마나 큰돈인지 잘 가늠할 수 있다. 한두 번 사기를 당하고 나면 세상이 허무해지기 마련이다. 그것도 액수가 노후 자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정도라면 그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돈과 사람에게 속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듯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방어책은 큰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서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다. 일확천금(一攫千金)의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 기회가 나한테 온다는 것은 로또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예금금리가 1%대인데 누가 6~7%대의 투자 수익률, 그것도 확정 수익률을 보장한다고 하면 그건 십중팔구 사기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6%의 확정 수익률이 가능하다면 은행에서 3%로 대출을 받아 투자하면 3%의 수익이 그냥 떨어지는 장사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게 쉽고 안전하면서도 많은 수익이 남는 장사가 어떻게 나한테까지 순서가 오겠는가? 그렇다고 금리 1%대의 은행예금에만 돈을 넣어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투자를 하더라도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다른 전문가들의 조언도 들어가면서 가능한 한 결정을 늦춰야 한다. 사기꾼들은 통상 희소가치를 들먹이는 동시에 특별히 당신에게만 기회를 주는 것이라면서 재촉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기꾼들은 엇비슷한 수법을 모방해서 우려먹는 경우가 많으므로 여기저기 소문을 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비슷한 수법에 사기당한 경우를 직·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듣기 좋은 말로 당신의 과거와 이력을 부추길 때 발을 빼야 한다. 전문 사기꾼일수록 왜 하필 나일까에 대한 대답을 미리 다 준비해 오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 인사들도 이미 투자하고 있다고 할 때 의심의 눈초리를 더 세워야 한다. 유명 인사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름이 팔리고 있기가 십상이고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 투자액은 미미하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사기 당하지 않는 다른 대비는 경제와 금융지식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주식이나 펀드에 수백만 원, 많게는 수천만 원 정도 투자해 놓는 것도 한 방법이다. 너무 많은 돈을 주식이나 펀드에 넣어두면 그에 따른 스트레스 또한 커질 수밖에 없으므로 여유분 중 일부를 넣어두고 말 그대로 여유만만하게 투자하는 것이다. 그러면 투자한 회사는 물론 그 회사가 속한 업종에 더해 경제동향과 전망, 뉴욕증시 등도 살펴봐야 할 과녁 속에 들어올 것이다. 이를 위해 평소 신문이나 인터넷의 경제면을 꼼꼼히 읽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일에 촉만 세워도 절반 이상은 성공하는 것이다. 지난 호에서 써먹은 명언(?)을 다시 한 번 기억해 보자. “현명한 사람은 들으면 알고, 보통 사람은 보면 알고, 우둔한 사람은 당해야 안다.” 금융사기는 일단 당하고 나면 돈도 친구도 잃고 남는 것은 실망과 후회, 노후빈곤뿐이다. 금융사기든 창업사기든 당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자 최상의 방책이다. △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 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
- 2016-06-27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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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교사에서 시인으로
- 가난은 나의 스승 지난 세월에 살아온 길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니 나이가 들었다는 걸 실감한다. 한편으로는 살아온 길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전쟁 직후 태어나 1960년대 중고등학교에 다녔고, 7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다. 이후 80~90년대 비약적인 경제 발전으로 이제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되었다. 가장 빈곤한 나라에서 태어나 가장 급속한 발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그 시간을 모두 경험한 세대다. 이런 삶을 살아온 세대가 세계적으로도 거의 없을 것 같다. 한국 민족이 가진 넘치는 정과 근면함이 지금의 조국을 만들어 간 원동력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가난은 벗어났고 이제는 어디를 가도 한국이 낯선 나라가 아닐 정도로 발전했다. 필자 역시 보편적 가난을 겪으며 학창시절을 보내며 교복과 교과서만 있으면 만족해야 했다. 요즘 아이들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학원을 가야 하고, 문제집과 참고서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는 걸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당시 필자에게는 참고서나 문제집은 사치품이었다. 교과서만으로도 충분히 수업할 수 있었던 당시의 교육제도가 감사했다. 물론 그 시대에도 과외나 학원은 당연히 있었지만 필자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가끔은 지금도 나처럼 그렇게 학교 다니는 학생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때와는 달리 열등감에 시달릴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그래도 가난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때는 사람들의 마음이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아주 힘들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늘 넉넉했다. 작은 일에나 큰일에나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정이 기본이었기에 가능했다. 친구들과 뛰놀던 뒷동산이 지금도 가끔은 생각난다. 위로 오빠들만 셋이고, 밑으로는 여동생이 둘이 있었다. 따라서 오빠들의 행동에 많은 영향을 받아 여성성이 전혀 없다. 더욱이 오빠들이 다정다감하지도 않고 무뚝뚝했는데 필자는 그것을 그대로 닮았다. 놀이해도 남자들이 하는 놀이를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동네 아이들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갖가지 놀이를 하면서 보낸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지난해 어느 봄날 유튜브로 ‘고향의 봄’을 들으며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라는 가사를 따라 부를 때 그 옛날의 뒷동산이 눈에 보이는 듯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늘 그 자체가 카타르시스의 효과를 준다. 필자가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아침이었다. 학교에 가려고 나와 보니 비는 주룩주룩 내리는데 우산이 하나도 없었다. 오빠들이 먼저 학교 가면서 다 갖고 갔다. 구석에 찢어진 비닐우산이 있기에 그걸 들고 갔는데 바람에 뒤집혀서 쓰나 마나 했다. 그렇게 해서 학교에 도착해 보니 지각까지 했다. 조용한 교실 문을 들어갈까 말까 하다가 살그머니 열었는데 웬걸 모든 눈이 필자를 향하고 있었다. 지극히 소심한 필자는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이후 비라는 소리만 들어도 경기가 날 정도였다. 그토록 비를 싫어했던 필자가 사춘기가 되면서 빗소리가 좋아졌다. 싫어했던 그 부피보다 몇 배는 더 좋아한다. 그래서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혼자 나무가 많은 길을 걸으며 혼자 빗소리를 음미한다. 그 맛은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다. 세상이 다 필자 것처럼 여겨진다. 어려서부터 교사를 생각하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여자 직업으로는 최고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왔었기 때문에 다른 직업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당시는 교사라는 직업이 지금처럼 최고 인기 직업이 아니었다. 경제가 엄청난 기세로 성장할 때여서 일반 회사원보다 비인기 직업이었다. 보수도 그렇고 업무 환경으로도 매우 후진적이었기 때문이다. 함께 입학한 남자 동창 중 교사로 남은 사람은 20%가 채 안 되었다. 그만큼 대우가 학교보다 월등하게 좋은 곳으로 빠져나가던 때였다. 사명감으로 한다고는 하나 일단 눈에 보이는 것에 움직이게 된다. 그런 분위기에서 대학생은 되었지만 머리로 생각했던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는 것이 필자에게는 어쩌면 사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자신을 옭아매는 삶이었다. 돌아보면 그 시간이 인생에 주어진 가장 밝고 환한 시간이었는데 필자는 즐기는 걸 몰랐고 언제나 기계처럼 살아왔다. 사람이 기계처럼 산다는 걸 뒤늦게 더 깨닫게 되었지만 성격상 주어진 책임에만 충실한 기계였다. 자신의 감성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학 생활은 더 많은 고민으로 채워지는 시기였다. 당시 집에서는 누구든 고등학교까지만 학비를 대주고 대학부터는 알아서 가야 했다. 오빠들도 다 그렇게 다녔고, 필자 역시 대학은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어서 다녔다. 그것이 자유를 빼앗기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생각의 틀이 굳어졌기 때문이지 환경이 필자를 누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졸업 후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첫 발령지가 충북 옥천군이었다. 생전 처음 접하는 시골 풍경이 생소했지만 그곳은 잠재했던 감성을 꺼내주었다.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었던 정서를 맘껏 풀어낼 수 있었다. 풋내기 교사를 맞아주는 학생들과 동료 선생님들의 아낌없는 격려와 배려가 삶의 기쁨을 주었다. 그중에서 학생들과의 만남이 참 좋았다. 필자를 잘 따라주고, 순수한 여고생의 감성이 한없이 즐겁게 했다. 국어 과목은 여고생들에게는 남다른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문학 작품을 공부할 때는 꿈속에서 헤매듯 빠져들었다. 가끔은 밖으로 나가 함께 시와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수업할 수 있었다. 지금 학생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낭만적인 시기였다. 사과 꽃이 필 때는 사과밭으로 가서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포도 철에는 포도밭으로 달려갔다. 필자에게 참 유익한 시기이었다. 조금은 느슨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자연이 주는 선물을 조금씩 맛보아 알게 되었다. 지금 부족하나마 시를 쓸 수 있는 감성을 일깨워준 고마운 곳이다. 언제나 다시 달려가고 싶은데 언젠가 가보니 아주 많이 변해서 그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더 깊은 속으로 들어가면 맛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다시 도전하는 삶 결혼하면서 교직을 떠났다. 그렇게 갑자기 전업주부가 되면서 마음의 고통이 많았다. 늘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필자의 행동이 후회됐지만 그런 모습 보이기 싫어서 가정에 더 충실했다. 그렇게 전업주부로 17년을 살면서 아들 하나를 키워 중학생이 되었다.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나니 삶은 참 무료했다. 그리고 우울했다. 40세가 넘은 그 시기에 인생 좌표가 어딘지 돌아보면서 그동안의 삶이 무척 우울하게 보였다. 그런 필자를 보던 남편이 대학원 입학을 권유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을 제안하는데 처음에는 거절했다. 40세가 넘은 나이에 어떻게 20대 학생들과 같이 공부를 하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결국 남편의 적극적 후원을 힘입어 1993년 가을에 대학원에 입학하고 5년 동안 모든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취득했다. 그 시기 필자는 다시 젊은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도서관에 가는 날이 빈번해지고 발표 수업이 많았기에 자료 준비를 위해 책과 씨름해야만 했다. 암기해야 할 외국어 공부는 예전과는 달리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으나 몇 배의 노력으로 해냈다. 그런 노력은 할수록 더 힘이 났다. 즐거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필자는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젊은이들과 계속 만나고 싶어 혜전대, 한서대, 경원대 교수까지 됐다. 필자가 전업주부로 사는 동안 학교 환경도 완전히 달라졌다. 실제 시간은 17년이지만 사회와 학교 환경의 변화는 30년쯤 지난 것 같았다. 사회 자체가 급속도로 변화하는 중이었고, 가치관도 하루가 다르게 확확 달라지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웠다. 가정이라는 테두리에서 조용하게 살았던 필자가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필자는 젊은 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많이 만들었다. 대상 학생들이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바뀌었지만 젊음 안에 있다는 것, 그들과 함께 호흡을 맞춰가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어느 날 문득 생각난 것이 필자가 고등학교 때 장래 희망에 교수라고 썼던 것이 생각났다. 결국엔 강단에 섰다는 생각이 들어서 혼자 웃었다. 창작과 신앙의 길 전공이 현대시였기 때문에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이 정도여서 학위를 마치면서 바로 시로 등단했다. 어려서부터 글 쓰는 것을 막연하게 동경은 했지만 등단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 수필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었는데 시를 쓰게 되었다. 창작이 고뇌의 산물이긴 하나 아주 조금씩 그 맛을 알아가고 있다. 모든 창작이 다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시 역시 그렇다. 필자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초보에 지나지 않지만 작은 희열을 알아가면서 보람도 느낀다. 나이 들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 더욱 애정이 간다. 이제 강의는 끝내고 창작만 남았다. 필자와 끝까지 함께 갈 절친한 친구다. 하나의 작품을 쓰기 위해 생각하고 삶을 반추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면을 볼 수 있어서 좋다. 필자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이다. 대학 재학 중 친구의 권유로 시작된 신앙생활은 삶의 근간이다. 중학교 1학년 때 짝으로 만나 친구는 대학교까지 10년간 같은 반, 같은 과여서 언제나 붙어 다녔다. 그가 내게 하나님을 알려주었고, 대학 3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한참 후였다. 하나님이 필자를 만나 주시면서 필자의 사고 체계가 바뀌었다. 아니 지금도 변화되는 과정이다. 인생의 윤택함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서 마음엔 여유가 생긴다.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삶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걸 깨달은 후부터 진실로 평안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사람이 애쓰고 힘써서 쌓은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 없이 이루어진 것은 언제나 불안하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있을 때의 평안은 세상에서 누리는 편안함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은 필자 인생의 전부다. 가장 의미 있는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바울이 했던 것처럼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온다.
- 2016-06-22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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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년의 유혹 Part 5 이성]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이성의 유혹에 빠져라!
- 이봉규 시사평론가 중년이 돼서도 예쁜 여자나 ‘쭉쭉빵빵’한 몸매의 여인들을 보면 눈이 자동으로 돌아간다.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품고 싶은 욕망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이 눈요기만 한다. 수컷 본능이다. 암컷들은 수컷에 비해 소극적이기 때문에 멋진 남성을 대놓고 쳐다보지 못하고 드라마를 보면서 눈요기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드라마 속 주인공과 비교하면 가끔은 신세가 한탄스럽기도 하다. 남자나 여자나 한탄하고 부러워하면서 늙는다. 포기하는 것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네 인생이다. 죽기 직전이 되어야 “왜 그토록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았나?” 하고 피눈물을 흘린다. 중년의 나이에도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인생을 허비한다. 어느새 중년이 되었듯이 불현듯 늙어버리고 한 줌의 재가 될 날도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며 다가온다. 후회하지 않으려면 짜릿하게 살아야 한다. 가장 짜릿한 것은 역시 연애(戀愛)일 것이다. 사랑하는 마누라와 짜릿하게 연애하듯 살면 최상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마누라가 엄마처럼 느껴지거나 선생님처럼 또는 가정부처럼 느껴지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짧은 인생 허송세월할 시간이 없다. 그럴 때는 이혼이 정답이다.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부부관계를 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이혼을 하고 다른 이성을 찾든지, 아니면 부부가 합의하에 다른 이성과 교제를 하든지 적극적으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아니면 부부가 서로 자위행위를 해주거나, 그 어떤 방법으로라도 서로를 위해 짜릿한 감정을 살릴 수 있는 특단의 돌파구를 찾아야만 한다. 참고로 필자는 요즘 정말 짜릿하게 살고 있다. 지난 3월 29일 일본 교토(京都)의 한인교회에서 하객이 단 한 명도 없는 단둘만의 멋진 결혼식을 올리고 짜릿한 재혼생활에 흠뻑 빠져 살고 있다. 매일 결혼식 사진을 보고 동영상을 관람하면서 마누라와 환하게 웃는다. 요즘은 회식도 줄이고 친구들과의 소주파티도 대폭 줄였다. 대신 마누라와 북한산 바로 밑 신혼집에서 거의 매일 저녁 단둘이 파티를 즐긴다. 달콤한 발라드나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블루스를 추고 난리다. 20년 전 이혼하고 숱한 연애를 했건만 지금처럼 행복하진 않았다. 지금이 인생 최고의 전성기다. 만약 하나님이 나에게 “언제로 돌아가고 싶니? 그때로 돌려 줄게!”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주저 없이 “지금입니다. 이대로 건강만 허락해 주세요!”라고 간곡하게 요청드릴 것이다. 누구라도 필자와 같이 행복할 권리가 있다.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의 생활이 무미건조하다면 과감하게 다른 이성을 찾아야 한다. 얼마든지 이성으로부터 유혹을 당할 수 있다. 그 상대가 나에게도 끌린다면 못이기는 척하고 넘어가 주면 된다. 수동태가 될 가능성이 없으면 능동태로 적극적으로 이성을 유혹해서 행복 찾기에 나서야 한다. 부인과 남편이 따로따로 불행한 나날을 보내면서 세월만 낚고 있다면, 내 인생은 물론 포기한 것이지만, 배우자의 인생도 같이 망가뜨리고 있는 공범이다. 중년인 지금부터라도 서로 의기투합하면 윈-윈 게임을 할 수 있다. 그게 이혼일 수도 있고, 별거라는 형식으로 합의하에 서로 다른 이성과 짜릿한 연애를 하면서 가정을 지키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면 솔직하게 서로 털어놓고 짜릿한 만족을 위해 요구하고 조정해야 한다. 결혼 30년 차인 내 지인은 아내와 잠자리를 한 지가 10년도 넘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그런데 몇 달 전 갑자기 신수가 훤해져서 나타났다. 마치 아우라를 드리운 스타와도 같았다. 이유인즉, 부인과 합의해서 서로 다른 이성을 찾아 연애를 하기로 의기투합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금 15살이나 어린 젊은 애인과 너무나 짜릿한 연애를 하고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부인은 어떠냐?”고 필자가 물어보니, “와이프도 초등학교 동기동창과 기분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데 아무런 감정이 없어서 자기 자신도 놀랐다고 심경을 피력했다. 털끝만큼의 질투심도 남아 있지 않아서 놀랐다는 자가진단이다. 오히려 부부사이가 더 편해져서 진짜 친구(Best Friend) 같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 전에는 부인과의 성생활이 전혀 없기에 본능적인 성욕의 해소를 위해 몰래 직업여성과 가끔 돈 주고 섹스를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부인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서 찜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서로의 연애를 인정해주니까 부인에 대한 죄책감도 없고 오히려 신뢰감이 더 쌓였다고 한다. 부인도 스스럼없이 초등학교 동창과의 만남을 소상히 얘기하면서 남자의 심리에 대해 물어보곤 하는데 정말 재미있다고 털어놓는다. 극히 드문 케이스지만 중년에 짜릿한 행복을 쟁취한 경우다. 전통적인 도덕관에 비추어 본다면 당연히 옳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도덕관마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불과 백 년 전에는 행세깨나 한다는 남자들은 첩을 두고 살아도 사회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질 않았다. 심지어 같은 집에서 본부인과 첩이 형님 동생하면서 의좋게 살기도 했다. 첩이 두세 명인 경우도 허다했다. 10년 이상 섹스 없이 서로 각방을 쓰면서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것보다는 배우자와 서로 합의하에 애인을 두는 편이 훨씬 도덕적으로 정당할 수 있다. 실비아 크리스텔(Sylvia Kristel)이 열연한 영화 에서 부부는 정말 사랑한다. 그 부부는 서로의 행복을 위해 다른 파트너와 잠자리를 적극 권장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 장면을 보면서 음미하기도 한다. 영화 의 스토리는 에로티즘으로 한 발 더 나아갔지만, 아까 소개한 지인 부부의 경우는 앞으로 백세 시대의 행복을 위해서는 보편화될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는 이혼한 지 20년 만에 짜릿한 재혼생활을 하고 있고, 전 아내도 필자보다 먼저 좋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딸에게서 전해 듣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혼하지 않고, 배우자 몰래 도둑연애나 하고 대충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에 급급하게 살고 있다면 얼마나 불행했을까 생각하면 끔찍하다. 자칭 대한민국 최고의 한량이라고 자부하는 필자가 독자들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지금 살고 있는 배우자와 짜릿하지 않다면 이혼이나 위에서 예로 들었던 케이스처럼 뭔가 특단의 조치를 강구해야 한다. 행복은 최고의 가치이고 쟁취해야만 한다. 눈치를 보다간 이 생명 다할 때 피눈물 흘리며 후회하게 될 것이다. 중년인 지금이 행복을 쟁취하기 위해 결심할 최고의 적기다. >> 이봉규 시사평론가 조지워싱턴대 정치학 석사, 한국외대 정치학 박사, 한국외대 외래교수
- 2016-06-21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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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문화] 60살에 배운 사진, 도랑치고 가재 잡다
- ‘도랑 치고 가재 잡다'는 속담이 있다. 한 가지 일하다 보면 곁들여 또 다른 좋은 일이 겹쳐진다는 의미다. 늦깎이로 시작한 사진 취미가 바로 그런 예가 되었다. 60세에 사진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지금은 그 사진취미가 바탕이 되어서 KBS 1TV ‘아침마당’ 출연을 비롯한 방송활동, 강사, 기자, 저자로 인생이 막을 의미 있고 재미있게 보내고 있어서다. 그뿐만 아니라 용돈도 벌고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가를 어떻게 쓸모가 있게 보내느냐를 고민한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상황은 많아지게 마련이다. 퇴직하면 매일이 일요일인 셈이다. 직장을 다닐 땐 대부분 시간을 바깥에서 보내게 되고 동료나 선후배, 관련 기관이나 거래처의 고객과 어울리며 시간을 무료하지 않게 보낸다.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난 후에는 그런 인간관계에서 서서히 벗어난다. 그리고 일상이 따분해진다. 수명은 날로 늘어난다.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늘어난다. 머지않아 120세에 이른다고 예측한다. 은퇴 후 보내야 할 시간이 엄청나게 길어진다.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의 발표로는 60세에 은퇴하여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였을 때도 하루 여가가 11시간으로 따져보면 잔여 시간이 8만 시간에 달한다. 그 긴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취미생활이다. 그래서 취미활동의 하나로 사진을 택했었다. 나이 60세, 그러니까 2010년 7월부터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물론 일반인들과 같이 자동모드로 예전에 사진을 찍기는 하였으나 사진에 대한 지식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기는 처음이었다. 필자가 사는 고양시 일산동구청에서 무료로 진행한 사진교실에 참가한 것이다. 6개월 과정이고 한 달에 1시간 반씩 세 번의 학습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사진에 대한 기초지식을 익혔다. 물론 카메라는 큰아들 녀석이 인터넷 쇼핑몰을 할 때 사용하던 작은 콤팩트 카메라를 얻어 사용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했듯이 취미활동에 끝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공인 사진작가가 되기 위하여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3개월 후부터 도전하였다. 사진작가 명함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다. 그중에 하나가 한국사진작가협회가 인정하는 전국사진공모전 수상을 통하여 당해 협회의 정회원이 되는 길이다. 필자는 그 길을 택하고 공모전에 출품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 첫 번째로 응모한 제1회 너브내감성사진전국공모전에서 작품 '형상I'이 동상에 입상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동상의 경우 사진작가로 등록하기 위한 점수가 3점에 불과하다. 입선의 경우는 2점이다. 지금은 규정이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점수의 합계를 50점을 넘겨야 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하여 꾸준히 응모하였다. 입선이 잘 안 되어 포기할까도 수없이 망설인 적도 많다. 그러나 한번 시작한 일을 중도에 포기할 수 없었다. 나태해지는 마음을 재차 다스리며 또 도전하고, 도전하기를 반복하였다. 수도 없이 낙선되었다. 필자의 서재에는 당시에 낙선한 작품들이 가득하다. 지금 다시 그 사진을 살펴보면 역시 낙선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우물 안 개구리였다. 일 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에 목적을 이루긴 하였어도 그 과정에는 수많은 고뇌를 반복하였다. 늘 카메라를 손에 놓지 않고 사진에 대한 공부도 계속하고 있다. 사진 관련 서적도 꽤 쌓였다. 찍은 사진도 500기가 용량의 외장 하드가 6개를 넘어서고 있다. 사진 촬영을 위한 명소로의 촬영여행은 잘 가지 못하여도 이른 아침부터 거의 매일 사진을 찍고 있다. 그리고 사진을 통한 재능기부와 봉사도 곁들인다. 사진강의와 촬영지도를 하며 사진과 관련하여 조선일보사 시니어조선의 사진 명예 기자로도 활동을 한다. 물론 작품을 사진대전을 비롯한 공모전에 출품하여 공개적인 평가를 받기를 좋아한다. 2013년에는 사진의 국전인 대한민국사진대전에 '무한질주'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하였고, 같은 해 10월에 부산일보사가 주최한 제21회 부일전국사진대전에 '닭장'을 출품하여 우수상을 받은 것도 그런 과정이다. 이러한 사진에 대한 도전과 취미활동은 의 생활에 더없는 보람과 즐거움을 준다. 특별한 재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가지고 있는 카메라 장비도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 한 동안 필자는 똑딱이라고 칭하는 소형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했다. 그 다음에 며느리가 사용하지 않는 캐논 400D 구형 카메라를 주기에 사용하다가 50만원을 주고 산 중고 500D를 지금도 사용 중이다. 물론 렌즈도 번들형에 가까운 저가형이다. 필자 카메라 장비를 보고 사진을 좀 한다는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런 장비로 어떻게 그런 작품을 만드느냐고 되묻는 눈치다. 좋은 카메라는 촬영자를 편하게 한다. 카메라 장비가 뒷받침되지 못하는 필자의 경우는 다른 사람이 겪는 노력의 몇 배를 하여야 한다. 쉽게 말하여 몸으로 때워간다.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며 사는 생활이 노후를 편하게 한다. 뱁새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 필자 방식대로, 내 형편대로 사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진은 누구나 한번 도전해 보아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은 주변에 사진을 무료로 배울 기회와 공간이 많다. 그리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장비도 무척 편해졌다. 스마트폰이 그 중에 하나이지 싶다. 침팬지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이 신문의 기사로 뜬 적이 있듯이 사진 촬영이 손쉬워졌고 소셜미디어 시대를 살고 있어서 사진을 찍지 않으면 아니 되된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사진 촬영 경험을 많이 했다.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음이다. 다만 사진이론적 측면에서 몇 가지만 가미하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다. 여러 사람과 또는 자연과 어울리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진 취미는 노후에 한번 도전해 볼만한 취미다.
- 2016-06-14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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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후경제] 노후준비의 첫째가 건강이다
- 미래연구소 통계조사 결과에 의하면 행복한 노후생활을 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시니어들이 첫 번째로 건강을 꼽았다. 두 번째로는 남자는 부인을 꼽았지만 여자는 돈을 선택했다. 두 번째에서 남녀 사이에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지만 부동의 1위인 건강은 모두가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건강은 돈이지만 돈은 건강이 아니다. 젊었을 때는 건강을 담보로 몸을 혹사하면서 돈을 번다. 나이 들어 그렇게 번 돈으로 건강을 다시 사려고 병원을 순례하고 몸에 좋다는 이것저것을 먹어보나 원래대로 몸의 건강을 되돌리지도 못한다. 즉 돈으로 100% 완벽한 건강을 살 수는 없다. 수학의 등식이 건강에는 통하지 않는다.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에 의하면 고령화 사회로 노인의 인구가 증가하면 할수록 고령자가 사용하는 의료비가 늘어난다고 한다, 노인들이 사는 집에 가면 이곳저곳에 약 봉투가 가득하다, 약국을 나서는 노인들의 손에는 시장바구니 든 것처럼 두툼한 약 봉투를 들려 있다. 그렇게 많이 먹은 약으로 반짝하고 건강이 회복되면 좋으련만 실제는 약의 효과를 의심할 만큼 차도가 별로 없다. 한번 나빠진 건강은 회복이 어렵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젊은이들보다 회복이 더디거나 약의 효과가 별로 없는 경우가 많다. 돈으로 건강을 사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건강하면 각종 의료비가 절감되므로 결국 건강은 돈이다. 의료보험 제도가 선진국인 미국보다 앞선다는 한국도 65세 이상 고령자가 중증 질환에 걸리면 모아둔 전 재산 날아가는 건 예사다. 자기 재산만 날리는 것이 아니라 친척의 돈까지 끌어다 쓰다가 끝이 좋지 않게 끝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낳은 자식도 병원비로 돈만 들어가는 부모를 좋아할 리가 없다. 하늘만 쳐다본다고 하늘에서 돈 보따리가 떨어질 리가 없는 것처럼 건강도 걱정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건강을 지키는 세 가지 요체는 편안한 마음과 적절한 운동에다 섭생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요즘은 건강정보도 넘쳐 나는 세상이다. 몰라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하지 못 하는 데 더 큰 이유가 있다. 평소 맑은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처럼 건강할 때는 건강관리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몸이 늙어가는 퇴직 무렵이면 제일 먼저 관심을 둬야 하는 것이 건강이다. 돈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가계부를 쓰고 저축한다면 돈이 불어나는 것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건강은 잘 모른다. 건강에 무관심하다가 덜컥 몸에 고장이 생겼을 때 그때 가서 후회한다. 예전부터 흔히 듣는 말로 ‘그렇게 고생해서 이제 밥술이나 먹으려니 큰 병이 왔다’는 말이 있다. 있을 때 잘하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 돈을 지키기 위해 세무사, 보험설계사, 자산운용전문가에게 도움을 받듯이 자기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전문가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건강 관련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시니어라면 가까운 보건소 건강센터를 강력히 추천한다. 보건소는 이제 예방주사나 놓아주고 거리 방역이나 하는 곳이 아니다. 의사는 물론이고 간호사, 영양사, 운동처방사들이 개인별 맞춤 처방을 통해 건강증진에 많은 도움을 준다. 특히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 같은 대사증후군도 측정해주고 비만도 검사와 체성분 분석, 신체균형발달도 최신 장비로 검사해준다. 나아가 운동능력 테스트를 통해 신체 부위별 근력, 지구력, 순발력을 알아본 뒤 적절한 운동 종목도 알려준다. 필자의 경우 스스로 운동도 많이 하고 건강하다고 자신하고 있었는데 병원 정기검진을 받아보니 지방간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깜짝 놀라 보건소에 가서 상담을 받으면서 나이에 비해 과식하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많이 먹고 많이 운동하는 것이 나이 들면 더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운동량을 늘리기보다 섭생을 줄여야 했다. 건강의 최대 적인 스트레스를 줄이는 마음의 평온을 얻기 위해서는 남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변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니어라면 이루지 못하는 꿈도 있다는 것을 알고 포기할 때는 포기해야 한다. 인문학 강좌를 들으며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게 좋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한발 물러서서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이유도 없다.
- 2016-06-13 1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