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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웃사촌이 보험이다
- 아들이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며느리가 급성 맹장염이어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아이 셋을 당장 맡길 곳이 없다는 것이다. 고양시 일산에 살고 있는 아들네는 요즘 보기 드물게 아이가 셋이다. 맨 위의 손녀가 7세이고 그 밑에 4세 손자와 2세 손녀가 있다. 하나같이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들이다. 급한 김에 수원에 살고 있는 딸한테 전화를 했다. 딸은 전업주부이기는 하지만 돌이 갓 지난 아들이 하나 있다. 움직이려니 기저귀, 우유병 등 짐이 한 짐이고 밖에는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려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하소연만 하고 있다. 아이들의 할머니인 필자의 아내는 몇 달 전 새로 얻은 직장에 나가고 있는데 몇 사람이 서로 팀을 짜서 일을 하기 때문에 빠질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결국 불똥은 필자에게로 튀었다. 하지만 필자도 직장에 나가야 해서 손주들을 돌보려면 휴가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런데 아들은 필자가 아이들을 제대로 돌볼지 믿지 못하는 눈치다. 결국 아내가 회사 눈총을 받아가며 아이들을 돌보기로 결정했다.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전철로 이동을 하는데 아들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파트에서 같은 교회를 다니는 이웃 아주머니가 아이들을 돌봐주기로 했으니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일단은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그분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집도 또래의 아이 셋을 둔 가정이란다, 동병상련이라고 사로의 사정을 잘 이해하기 때문에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선 것 같다. 며칠 뒤 그 집 아이 셋과 우리 손주 셋이 함께 생활하는 사진을 보내왔다. 꼭 어린이집 같은 분위기라서 안도감과 함께 웃음이 나왔다. 물론 아들이 휴가를 내고 아내 간호도 하고 틈틈이 집에 와서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기고 찾아오는 일을 해야 한다. 아들이 집을 비우고 병원에 가는 시간에는 이웃집 아주머니가 틈새관리를 해줄 것이다. 맹장염 수술법이 발전해 예전처럼 오래 병원에 입원해 있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도 3일은 걸릴 텐데 흔쾌히 도움을 주겠다고 승낙해주신 분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도시의 현대인들은 거미줄처럼 꽉 짜인 스케줄대로 너 나 할 것 없이 바쁘다. 갑자기 계획에도 없는 일이 생기면 당황하고 우왕좌왕하게 된다. 도와줄 일가친척이 멀리 떨어져 살면 도움을 주기도 어렵다. 이런 시대를 반영하듯 예전에 없던 산후조리원이 생겨나고 간병인, 요양보호사라는 직업도 생겨났다. 그전에는 이런 일들을 모두 가족들이 해줬다. 도시인들은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른다. 이번 일을 겪다 보니 친한 이웃이 멀리 있는 형제들보다 백번 낫다는 생각이다. 살다 보면 나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하던 일들이 닥치기도 한다. 가까운 이웃을 가까이 알아두는 것은 마치 보험에 가입하는 것처럼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 2017-07-0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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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장기요양 등급 신청하니 울 엄마는 4등급
- 친정엄마가 89세가 되셨다. 예전 앨범 속에는 싱그럽고 꽃다운 모습이 많았는데 지금은 어느새 아흔이 다 되어가는 할머니다. 그래도 올 초까지는 지팡이를 짚고 버스를 타고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버스투어를 즐기셨다. 서울 종로구 옥인동이 고향인 엄마는 집 앞에서 버스에 올라 평창동 세검정과 부암동 윤동주기념관을 지나 엄마의 고향인 통인시장까지 가는 코스의 버스를 타고 나가 마음 내키는 정류장에 내려 구경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사드시고 오셨다. 그런데 요즘 다리가 무거워 영 버스투어를 갈 수 없다고 아쉬워하신다. 같은 아파트 옆 동에 살면서 필자도 요새 무엇이 그리 바쁜지 엄마를 자주 보러 가지 못하고 있어 항상 마음이 무겁고 편치 않았다. 다행히 아파트에는 할머니들이 많이 계셔서 마당의 정자에 나가 이야기 듣는 게 새로운 재미가 있다며 즐거워하신다. 그런데 어느 날 지팡이에 의지해서 걷는 모습이 힘들게 보였는지 요양보호시설을 운영하는 분이 지나가다가 엄마에게 노인장기요양 등급을 신청하라고 했다. 등급 판정이 나면 일주일에 5번, 하루 세 시간씩 요양보호사가 방문해 엄마를 도와준다는 것이다. 거동이 불편한 분을 위해 목욕이나 산책을 같이해주고 그 외에도 집안일이나 음식도 해준다고 했다. 그렇게 된다면 필자의 마음도 좀 편해질 것 같아 건강보험공단에 신청했다. 예약된 날짜에서 보험공단에서 심사원이 오셨다. 신청자의 상태를 판단해 등급이 정해지는데 65세 이상이나 65세가 되지 않았어도 거동을 못 하는 분과 치매가 있는 분은 1, 2, 3등급을 받는다고 한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이란 고령이나 노인성 신체 질병 등으로 일상생활을 혼자 하기 어려운 노인에게 신체 인지 가사활동 지원 등의 급여를 제공하여 노후생활의 안정과 그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어 국민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사회보험제도로 사회적 효를 실천하는 제도다. 우리는 그 제도에 드는 비용 중 15%만 내면 혜택을 볼 수 있다. 전적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경우 1등급이 된다. 상당 부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면 2등급이 되고 부분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75점 미만인 사람은 3등급, 일정 부분 도움이 필요하며 인정점수가 60점 미만일 경우 4등급을 받는다. 장기요양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은 1년이고 유효기간 끝나기 90일부터 30일 전에 갱신 신청을 해야 한다. 요양보호사는 수급자를 위해 신체활동으로 식사 및 약 챙겨드리기, 양치, 세면, 목욕, 머리 감기 돕기, 머리 손질 등을 도와주며 일상생활 및 정서지원 활동으로 장보기, 산책, 물품구매, 병원 동행, 수급자의 청소, 세탁, 식사준비, 조리, 설거지, 대화하기 등을 같이해준다고 한다. 친정엄마는 다리가 불편해 거동이 힘들어 집안일 도와주기를 원했는데 이제 4등급을 받았으니 도움 요청을 할 수 있다. 이런 혜택을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누구라도 나이는 드는 것이니 우리나라 노인복지제도가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부디 엄마와 잘 맞는 좋은 요양보호사가 와서 필자 마음도 좀 편해지고 엄마도 일상생활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다.
- 2017-07-06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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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감님은 언제쯤 드러내놓고 주책을 부릴까
- “망고, 어디서 났게?” 동생은 망고를 깎으면서 대단한 비밀이라도 들려주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의도를 알기 어려운 질문이어서 잠시 머뭇거리니까 동생이 그새를 못 참고 말을 이어갔다. “요즘 우리 시어머니가 이상해.” 그 말에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동생의 시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참 좋다. 그 솜씨를 동네 노인정에서 발휘하니 점심 먹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으쓱해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게다가 나이가 들었어도 무너지지 않은 얼굴선 덕분에 70세가 넘은 할머니치고는 예쁘장한 외모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당신이 노인정에서 인기가 많다는 걸 자랑 삼아 얘기하기도 한단다. 그러던 어느 날 초인종이 울려 나가보니 대문 앞에 계란 한 판이 놓여 있더란다. 사람은 없고 계란만 덩그맣게 있길래 의아해하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마당까지 쫓아 나와서 한마디 하셨단다. “노인정 영감이 놓고 갔나?” 그래놓고 당황한 기색으로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으셔서 “들어오시라 해서 차라도 한잔 대접하시지 그러셨어요” 했더니 “에이, 나이 들어서 주책이야” 하며 뛰어 들어가시더란다. 언제부터인지 시어머니가 아침 숟가락을 놓기 바쁘게 노인정으로 달려갔는데, 멜론이나 망고 등 시어머니가 평소에 돈 주고 사지 않을 과일들이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며 동생은 깔깔 웃었다. 모두들 나이 들어가면서 꺼리고 외면하는 것들이 있다. 나잇값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봐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을 감추기에 급급하다. 잘못했다가는 ‘나이 들어 주책이야’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얼굴에 주름이 파이고 육체의 기능이 쇠락해도 감정은 여전히 살아 있다. 사랑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라 느낌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 청춘은 갔어도 가슴 뛰는 인생의 봄날을 여전히 기대하는 것 아닌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라는 소설을 통해 90세 노인에게 찾아온 첫사랑을 이야기한다. 평생을 창녀들과 함께 보내면서 이 세상에 순정한 여자는 없다고 생각하는 독신이자 신문사 칼럼니스트 사비오. 그는 90세 생일에 자기 자신에게 아름다운 밤을 선사하기 위해 선택한 14세 소녀에게 빠진다. 사랑의 열병은 그에게 낭만주의 문학작품을 들추게 하고, 연애편지 형식의 칼럼을 쓰도록 만든다.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시적 방종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던 그가 사랑 때문에 죽는 일은 가능한 일일 뿐 아니라 자신도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 고통의 달콤함을 무엇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말한다. 위대한 첫사랑이다. 90세 노인에게 찾아온 첫사랑을 주책없는 늙은이의 추태로만 볼 것인가? 아니다. 그 사랑은 죽음과 멀지 않은 노인에게 찾아온 마지막 열정이자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순정한 고백이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외로움과 고독에 익숙해진다는 의미다. 함께 산책하고 함께 여행하면서 맛있는 음식 먹고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축복이다. 동생은 시어머니와 영감님이 언제쯤 드러내놓고 주책을 부릴까 그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 2017-07-0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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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여행 중인 우리 반 학생들
- 우리 반 학생들은 매우 오래 사신 분들이다. 평균 연령이 72세 정도이니 그야말로 아주 오래된 학생들이다. 이분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열심히 듣는 과목은 영어다. 왜냐하면, 필자가 그분들께 영어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목표는 입시나 공시가 아니다. 오로지 ‘배우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래서 진도도 없고 시험도 없다. 그렇다고 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멋진 세계여행을 설계하고 계신다. 그래서 강의 내용도 여행에 써먹을 만한 표현들을 많이 다룬다. 수업시간에 보여주는 그분들의 빛나는 눈동자는 상상여행 중임을 증명한다. 빛나는 눈동자와 함께 낡은 피부는 홍조를 띠고 어조는 들뜬다. 마치 고목에 새싹이 돋듯 교실 안은 생기로 가득 찬다. 아, 상상! 그렇다. 우리는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고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종종 다람쥐가 한여름 더위도 잊고 열심히 도토리를 주워 모아 보관해둔 곳을 겨울이면 까맣게 잊어버리듯 우리도 상상이라는 풍요한 창고의 존재를 잊고 현실에 찌들어 산다. 상상의 즐거움을 일깨운 공로로 상상여행을 안내한 가이드에 대한 감사의 팁이 심심치 않게 답지한다. 연희 할머니는 채소 담당이다. 마당에서 키운 고소한 상추를 씻어서 바로 먹을 수 있게 갖다 주신다. 그날은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야 한다. 정순 할머니는 장류 담당이다. 가끔 된장을 플라스틱 통에 담아 오신다. 손수 담그신 귀한 된장은 그야말로 ‘금된장’이다. 그 맛이 놀랍게 맛있어 식구들이 그 할머니 된장만 기다린다. 유난히 조용하고 태가 고운 소원 할머니는 마늘 담당이다. 가끔 마늘을 갈아 한 통씩 가져다주신다. 그러고 보니 모두 식생활에 꼭 필요한 물품들이다. 옛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반장 주도하에 학생들이 돌아가며 아침마다 교탁에 놓았던 커피 우유, 오렌지 주스 따위들에 비하면 얼마나 정감이 넘치고 영양가 풍부한가! 역시 연륜은 인간을 이해하게 만든다. 청일점 남학생은 명문대 출신이다. 사실 대졸 출신이 들을 만한 강의는 아닌데 하는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몸이 불편하면서도 보행기에 의지해 매번 열심히 출석하신다. 가벼운 영어회화나 가르치는 복지관 강의에 이분들이 이토록 열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새로운 것을 배우면 치매 예방에 좋기 때문일까? 어쩌면 배움이란 인간 생명의 원동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이 들면서 낡아가고 있다는 자각 때문인지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 점점 커진다. 모험이 젊은이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육중한 메타세쿼이아가 세월이라는 두꺼운 껍질에 싸여 있듯이 오랜 시간 쌓여온 삶의 무게가 도전의 의지를 누르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 반 학생들의 초롱초롱한 생기를 마주하고 있으면 상상이라는 작은 모험이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볼 수 있다. 몇 달 전부터 소원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얼마 못 사실 것 같다는 가족의 전언이다. 할머니께서는 그동안 새로움에 대한 열정과 상상여행 속에 무척 행복하셨으리라 확신한다. 마늘을 찧을 때마다 소원 할머니가 많이 그리워질 것 같다.
- 2017-07-0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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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초록산책단 인형극단 ‘오늘’
- “개굴개굴 개구리 노래를 한다. 아들, 손자, 며느리 다 모여서….” 노래와 함께 인형극이 시작된다. 거리를 걷다 멈춰 서다를 반복하다 간이의자에 자리 잡고 앉는 시민 관객들. 서울역 고가 보행길 ‘서울로 7017’ 개장과 함께 어린이들과의 교감을 담당하기 위해 탄생한 인형극단 ‘오늘’의 공연에 구름관객이 몰렸다. 활기차고 밝은 에너지로 중무장한 시니어들을 만나봤다. 시니어의 장점이라면 바로 노련함 아닐까? 인형극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다는 이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린이 관객들 앞에 서서 웃고 눈높이를 맞추며 노래하는 모습이 전문배우 못지않다. 인형극단 ‘오늘’은 ‘서울로 7017’을 지원하는 자원봉사단 초록산책단의 동아리반 활동 중 하나다. 평균연령 65세, 시니어 파워를 자랑하는 인형극단 ‘오늘’은 올해 1월부터 6개월간 맹훈련을 거듭해 인형극 ‘오늘이’를 들고 서울로 7017 담쟁이 극장에 입성했다. 인형극단 ‘오늘’에는 왜 지원했나요? 이인웅 초록산책단 안에 전체 자원봉사 활동 외에 동아리 활동반이 있습니다. 각자가 원하고 좋아하는 모임에 지원한 것이죠. 서울시 후원으로 전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연구소 부소장인 유홍영 예술감독을 비롯해 많은 스태프가 도움을 줘서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배우가 하고 싶었어요. 끈을 놓지 않았어요(웃음). 장광자 저는 사실 인형극단보다는 야생화반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제가 여기서 나이가 제일 많아요. 인형극단은 대사 외우는 게 무서워서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오라고 하더라고요. 다행히 대사가 많이 없는 백주 할머니 배역을 주시더군요. 그래도 대사는 까먹고 또 까먹고 해요. 김정자 저는 손주들하고 하려고 시작했어요. 백남재인형극단이 처음 모이던 날 남자 배우가 없다고 빨리 들어 오라고 하더라고요. 첫 모임에는 일이 있어 못 갔는데 배역은 이미 주어졌고 빠지지도 못하겠고. 재밌게 지내고 있어요. 한 장면씩 지나갈 때마다 잘 넘어간다, 좋다 이렇게요. 잘 끝났으면 하죠 늘. 그런데 우리 여배우들 나이가 너무 많아서 불만이에요(웃음). 주인공인 오늘이는 어떻게 발탁됐나요? 양희선 제가 원래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고 있거든요. 인형극을 하면 꼬마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지원했어요. 주인공이 된 건 아무래도 제가 동화구연 경험이 있다 보니 목소리 흉내를 좀 냈던 것 같아요. 미모도 한 미모 할까요 ?(웃음) 이야기꾼은 특별히 연출가가 직접 뽑았다면서요? 목소리가 듣기 좋았어요. 김정자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아들 셋 키우면 나옵니다(웃음). 맨날 소리 지르다 보면요. 관객들이랑 호흡할 때 느낌이 어땠나요? 이숙경 저는 많이 설레던데요? 아이들이 아직 어리잖아요. 눈높이에 맞춰서 노래도 불러주고요. 구연동화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데 여기서 공연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어요. 또 아이들이 우리를 바라봐주니까 좋아요. 오늘 무대는 어땠나요? 강부형오늘까지 총 4회 공연을 했습니다. 오늘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나름 집중했고 관객 호응과 몰입도도 높았어요. 배우로 공연하는 느낌 어떤가요? 이인웅 아직은 좀 긴장된 상태예요. 공연을 시작하면 정말 얼마 안 있어 끝나는 거 같아요. 왜 인형극을 선택했나요? 조정자나이 들면서 다양한 것을 해봤어요. 인형극도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분야였어요. 사람도 만나고, 매일 대사 암기를 하면 치매도 안 걸릴 거고요. 날마다 신나요. 연습하러 와도 즐겁고요. 인형극으로 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강부형 지금 제가 라는 대본을 쓰고 있어요. 완성이 되면 인형극으로 무대에 꼭 올리고 싶어요. 줄거리는 어느 정도 나온 상태입니다. 일반봉사하면서 동아리 활동을 한다고요? 김정자인형만들기 체험학습이에요. 목요일 4시부터 인형 만들기를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놀아주는 프로그램입니다. 늙을 시간이 없어요. 못 늙어요(웃음). 가족들은 뭐라고 하나요? 구경희 엄마가 어떻게 거기에서 그걸 하냐고 하더라고요. 저 어렸을 때 천 보자기 붙들고 연극하고 그런 시절을 보냈어요. 그때는 TV도 없었고요. 그런 게 항상 마음속에 있었는데 나이 먹고 기회가 있어서 하는 게 즐거워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인웅 거리에서 비보이가 춤을 추거나 가수들 노래하는 것들을 볼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런 연극은 많이 없는 거 같아요. ‘서울로 7017’에서만큼은 계속 다양한 공연을 하면 좋겠습니다. 누군가 지나다 우리 인형극을 보고 힐링을 할 수도 있잖아요?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2017-07-03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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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춘 성형이 있다는데?
- 친구 모임에서 성형에 대한 이야기로 수다가 벌어졌다. 필자는 몸을 무척 아낀다. 너무 아껴서 필자를 아프게 하는 건 참지 못한다. 하나의 예로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웬만한 사람은 다 하는, 귀에 꼭 붙은 귀걸이를 참 예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귀를 뚫는 게 무서워서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성형외과를 경영하는 친구가 있다. 나이 들어가면서 그 친구는 모임에 나올 때마다 우리에게 너는 여기를 요렇게 하면 훨씬 예뻐지고, 너는 여기에 필러를 하면 좋겠다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말을 들어도 필자는 초지일관 성형할 생각이 없다. 한번 손대고 끝나는 게 아니고 시작하면 평생 관리를 해줘야 하니까 귀찮기도 하지만 나이 들면 자연스럽게 노화 되는대로 살아야지 하는 필자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고 할까.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한심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점점 늙어 가는 모습을 확인하는 건 좀 슬픈 일이다. 거울 보기를 좋아하던 필자도 요즘엔 될 수 있는 대로 거울은 피하는데 너무 달라진 모습을 마주하는 게 싫기 때문이다. 그래도 순리를 어쩌겠느냐 하는 생각인데, 회춘 성형이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듣고 보니 가관이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 걸까? 귓불 성형은 150만 원, 배꼽은 120만 원, 손금을 바꾸는데 100만 원, 손등은 160만 원, 무릎은 180만 원, 아파서 하는 수술이 아니고 예쁘게 만드는 수술이란다. 쇄골 뼈까지 새로 만든다는데 듣기만 해도 섬뜩하고 무섭다. 이렇게 회춘 전신성형에 드는 비용은 920만 원 이라고 한다. 그 외에 쌍꺼풀이나 코 높임, 목주름 제거, 치아미백, 턱을 깎아 버린다는 양악까지 한다면 그 비용은 얼마가 될는지..... 비용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아프고 위험한 수술일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다. 물론 성형을 통해서 자신감도 얻고 자기만족을 하며 더욱 좋은 모습으로 바꾼다는 장점은 있을 것이며 예뻐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또한, 기형을 가진 사람이 보완하는 수술을 받아서 좋은 모습이 되는 것은 얼마든지 찬성이다. 다만 나이가 들어서 생긴 주름을 당겨서까지 얼굴을 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성형외과에 20대 아가씨와 70대 노인이 방문했는데 시술 상담자는 아가씨가 아니고 할머니셨단다. 이렇게 노인들도 외모에 큰 관심을 두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것도 순리가 되어버리는 세상일까? 각자의 판단에 맡길 일이지만 소신껏 잘 생각하며 살 일이다. 남들은 성형으로 다들 아름다워지는데 나만 늙은 모습으로 남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조금 걱정을 하며 실소를 머금는다.
- 2017-06-26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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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 예찬
- 하짓날 새벽 곁에서 자고 있는 아내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언제 저렇게 잔주름이 있었던가. 매일 매 시간 다른 어느 누구보다 많이 자주 본다고 자부하며 곁을 지켜왔어도 몰랐는데 갑자기 눈에 띄다니 서 있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바뀐다는데 혹시나 하고 발치로 옆구리로 옮겨 가며 바라봐도 보려고 해서 그런지 역시나 보인다. 가시덤불로 막아도 지름길로 온다는 흰 머리칼이 이겼구나. 오랜 연애 끝에 문서에 도장 찍고 맏며느리로 들어와 아이 셋 낳고 지지리 고생하는 자체를 아이 키우는 즐거움으로 퉁 치며 살았던 아내. 자신들이 좋다는 배필 토하나 달지 않고 승낙 해 아직 잡음 없이 무난한 삶 갖게 해줘 며느리 사위들에게 사랑 받으며 자주 찾아오는 휴일을 기다리는 엄마. 중학생 셋 초등학생 하나인 손자 손녀들에게 늘 공부하고 열심히 배우는 자세를 몸소 본이 되어주는 정신적 지주면서 절대 멘토인 스승 할머니. 두 식구 살면서 꼰대가 될 것이냐 어르신이 될 것이냐 물어보는 동반자. 친구들 연락에 순서 지켜 골고루 만나주고 함께 울어주는 듬직한 친구. 무엇하나 소홀한데 없이 묵묵히 중심 지키며 세상에 순응하고 철저히 준비하는 삶의 표본인 아내. 모든 게 부족하고 팍팍한 생활 속에서도 잠시 누가 무얼 하면 좋다는 말에 귀가 팔랑대 한눈팔려는 기미만 보이면 아이들 다 키워 보낼 때까지만 참으면 그 다음은 마음대로 하라며 오로지 아이들 건사하기에 올인 한 엄마. 이제 모든 걸 다 해 줬으나 단 둘이 남아 정작 기운도 없고 우리 몫은 없지 않느냐는 물음에 나를 못 찾은 것은 후회되지만 다시 그 일을 한다 해도 또 후회할 줄 뻔히 알아도 나는 다시 그 일을 하고 이렇게 후회하겠다는 아내. 인생의 정답이라는 게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잘 키웠지 않느냐 그거면 됐다 이 세상에 태어난 소명 중 내 일은 다 한 듯하다. 내 짧은 생각에 내게 또 다른 욕망은 욕심이니 가자 부르시면 기쁜 마음으로 가겠다는 아내. 내게는 아재나 꼰대가 아닌 어르신으로 사는 첫 걸음은 얼굴과 매무새가 정갈해야한다며 늘 양복과 넥타이를 추천한다. 시대를 리드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말수는 적게, 잔잔한 미소로 불치하문의 겸손을 갖추는 태도와 행동이 어르신일 것이란 확고한 개인소견. 상대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경청해 주고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잘 감지해 젊은이들 보다 한참 떨어지지 않도록 공부하며 어느 누구도 내가 아는 분야를 제외하곤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나서지 말라. 아재 꼰대 어르신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상대가 나에 대해 느끼는 것이니 답답하고 안타까워도 상대가 물을 때만 대답해 주도록 하라. 주름지고 쳐진 얼굴이야 흐르는 세월에 어쩔 수 없지만 그나마 가꿔야한다 나를 대신하는 게 내 얼굴이고 누구에게나 보여 지는 내 자신이다. 나는 나를 잘 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의외로 나를 모르는 경우가 대단히 많으니 거울 앞에서 얼굴을 자주 봐라. 한번 보고 두 번 세 번 볼 때마다 다른데 자주 볼수록 내 자존감이 커지고 보는 시간도 짧아진다. 찡그린 얼굴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밝고 맑은 얼굴을 만들자 한다. 아내 얼굴에 잔주름이 생겼다. 거울을 자주 보니 본인이 먼저 알 텐데 그 흔한 주사 한 방 안 맞았다. 더 자주 바라봐야겠다.
- 2017-06-26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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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 자전거
- 지인의 페이스 북에 만화계의 큰 별 신동헌 화백의 6월 6일 별세 소식이 올라왔다. 국내 최초의 극장용 장편 만화영화 홍길동으로 대종상을 받으신 분이라고 한다. 동생이신 신동우 화백의 만화는 어릴 적 많이 봐서 좀 더 친근하게 기억되고 있다. 어릴 때부터 필자는 만화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방학 때는 하루 종일 만화책 방에 틀어박혀 살아서 저녁밥 때가 되면 엄마가 필자를 찾으러 오기도 할 정도였다. 대전천 개천 옆의 판잣집이 단골 만화방이었는데 우중충한 그곳이 어찌나 아늑한지 온종일을 있어도 지루하지 않았던 이상한 추억이 있다. 점심때가 되어도 집에 돌아가지 않는 아이들에게 만화방 아줌마가 나누어 주었던 찐 고구마는 참 달콤한 맛이었다. 그때 보았던 라이파이와 제비양, 김 박사는 지금도 기억나는 캐릭터이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던 라이파이는 매우 멋진 모습으로 필자 머릿속에 남아있다. 필자는 만화책 보는 것만을 좋아한 게 아니라 초등학교 시절엔 한 때 만화를 직접 그리기도 했었다. 반을 접은 도화지에 칸을 치고 그림을 그리고 말을 넣어서 가운데를 실로 꿰매어 서투른 만화책을 만들었다. 한창 예쁜 아이들이 발레를 하면서 벌어지는 스토리의 만화가 유행이어서 즐겨 보았는데 필자도 따라서 발레 하는 여자아이들의 질투와 우정에 관한 만화를 그렸으며 주인공 이름은 그때부터도 필자 마음에 쏙 드는 ‘마리’를 주로 썼다. 동네 아이들에게 스케치북 한 장씩을 받고 필자가 그린 만화를 보여주었다. 그냥 공짜로 보여주는 것보다 도화지를 한 장씩 받고 보여주는 게 더 권위 있고 품위가 있어 보이는 것 같았고 아이들이 서로 먼저 보겠다고 종이를 내밀 때 기분이 퍽 좋았던 기억이 있다. 받은 종이는 실제로 아무 쓸모가 없었다. 아버지가 선생님이셔서 우리 집엔 종이가 풍족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왜 그렇게 유치하냐는 말까지 들으면서도 필자는 만화영화를 즐겨보았다.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을 볼 때마다 그 아름다운 그림과 풍경묘사에 마음이 찡할 정도였다.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애니메이션은 장면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큰 감동을 받았다. TV 프로그램에 ‘빨간 자전거‘라는 만화영화가 있었다. 채널을 돌리다 이 애니메이션을 만나면 꼭 챙겨보게 되었다. 원래 한국만화의 전설이라 불리는 김동화 화백의 만화 ‘빨간 자전거’를 오랜 기획 끝에 애니메이션으로 완성한 작품이라 한다. 어느 시골 마을에 잘 생긴 우편배달부 아저씨가 있다. 이 아저씨는 꽁지머리를 하고 있고 멜빵 있는 바지와 모자를 눌러쓰고 다닌다. 집집마다 편지를 배달해주고 그 편지를 읽어주기도 하는데 요즘은 고지서 전달하는 일이 더 많다고 한다. 이 시골 마을은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남아 농사를 짓고 있는 ‘옛 동’과 이제 막 조성된 전원주택인 ‘새 동’으로 나뉘어 있는데 그 길 위를 빨간 자전거를 타고 소식을 전달하는 게 아저씨의 임무인 것이다. 집배원 아저씨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전달하며 슬픔, 기쁨, 아픔, 웃음 등 모든 소소한 작은 일상의 이야기를 배달하고 있다. 오늘 보았던 내용도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였다. 어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나는 ( )처럼 ( )이 되고 싶다’ 를 숙제로 내 주셨다. 많은 아이들이 신이 나서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는 이야기들을 하는데 그 반에 다문화 가정의 아이가 한 명 있었다. 피부색이 달라 가끔 놀림을 받기도 했던 그 아이는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 아이의 엄마가 숙제를 보고는 미국 대통령 이야기를 해 주었다. 미국 대통령 오바마도 어릴 때 피부색이 남과 달라 놀림도 받았지만 훌륭한 대통령이 되었으니 너도 걱정하지 말라는 격려를 받고 ‘나는 (오바마)처럼 훌륭한 (대통령)이 되고 싶다’라고 숙제를 마친다는 이야기였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내용으로 가득한 ‘빨간자전거’라는 애니메이션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남들이 철없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나는 어른 동화인 ’빨간자전거‘ 를 계속 사랑할 것이다.
- 2017-06-1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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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헝가리 도나우 강변의 예술인 도시, 센텐드레
- 헝가리는 부다페스트를 기점으로 도나우 강 근교 지역(약 45km)을 묶어 도나우 벤트(Danube Bend)라 부른다. 도나우 벤트 중 ‘센텐드레’는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다. 1000년의 역사가 흐르는 고도로 사적과 문화유산이 많고 17~18세기의 화려한 건축물들이 도시를 빛낸다. 특히 도시 전체에는 예술미가 넘쳐난다. 1920년대,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기 위해 시골 마을로 숨어 들어온 예술가들이 만든 도시답게 말이다. 신성로마제국 때의 건축물이 남아 있는 도시 부다페스트에서 센텐드레(북쪽으로 약 20km)까지는 대중교통(지하철, 버스 혹은 배)으로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도시의 ‘카노노크(kanonok)’ 거리를 따라가면 시 청사를 만나고 곧 메인 광장에 이른다. 메인 광장으로 다가설수록 골목길의 운치는 깊어진다. 반질반질 윤기 나는, 자갈돌 박힌 골목의 양 옆으로 고풍스러운 건축물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이 도시는 약 1000년 전, 고대 때부터 사람들이 정착했다. 로마제국의 통치 시절에는 ‘늑대성’으로 불리며 군사적인 요충지 역할을 담당했다. 9세기에 마자르족이 장악했고 16세기부터는 오스만투르크(1541~1686)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때 원주민들은 대거 이 도시를 떠났다. 17세기 말, 16년간의 질긴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1683~1699)을 끝내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의 신성로마제국이 이 도시를 점령한다. 이때부터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등 지중해 연안 사람들이 이주해오면서 바로크 스타일의 주택과 지중해풍의 교회 등을 건축한다. 자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던 센텐드레는 1872년에 도시로 승격됐고 2010년에는 인구가 2만5000명이 될 정도로 그 규모가 커졌다. 독립을 선언한 예술인들 모여들다 센텐드레의 메인 광장은 오래전부터 부다, 비셰그라드, 필리스의 시골길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였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1763년에 만들어진 ‘페스트 십자가’가 서 있다. 세르비아 상인들은 페스트에서 구제된 것에 감사해하며 바로크 양식의 그리스 정교 십자가를 도시에 헌정했다. 십자가에는 그리스도의 이콘(Icon)이 새겨져 있다. 십자가 밑에는 세르비아 남자가 거꾸로 묻혀 있다는 전설이 흐른다. 옛날 세르비아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위로 올라온다고 믿는 관습이 있어 시체가 나오지 못하도록 머리를 밑으로 매장했다는 것이다. 광장 주변으로는 합스부르크 지배 시절에 만들어진 17~18세기의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1752년에 건축된 바로크 양식을 가진 블라고베스텐슈카(Blagovesztenszka, 성 수태고지) 세르비아 정교회가 눈길을 끈다. 베이지색 건물에 청록 뾰족 지붕이 돋보인다. 그것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은 작은 개인 갤러리, 다양한 기념품 숍, 부티크, 액세서리 가게, 레스토랑 등이다. 특히 여행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곳은 숍에 진열된 전시품들. 예사롭지 않은 ‘예술감’이 느껴진다. 그 이유가 있다. 헝가리 공산주의 정권 시절인 1929년부터 예술가(화가, 음악가, 시인, 문학가)들은 이 도시에 울타리를 만들었다. 독립이 필요했던 200여 명의 예술가들이 집단으로 대거 이주한 것이다. 이후부터 이 도시의 트레이드마크는 ‘예술과 예술인’이 됐다. 헝가리의 대표 도예 작가인 코바치 머르기트(Kovacs margit, 1902~1977)의 도자기 박물관이 유명하다. 18세기의 건축물인 ‘소금 상인의 집’을 개조해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11개 전시관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300개 이상의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온 도시에 퍼져 있는 예술적인 제품들은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열게 만든다. 도시 가장 높은 곳의 플레바니아 교회 센텐드레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플레바니아(성 요한) 교회로 향한다. 약간 경사진 언덕의 좁은 골목에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건물이 많다. 이 교회 자리는 원래 성채였다. 중세 때는 성 안드레(Saint-Andre´)를 위한 로마네스크 스타일의 작은 교회가 있었다. 성 안드레는 ‘센텐드레’라는 지명과 무관하지 않다. 이후 몽골의 침공으로 파괴됐다가 1241~1280년 사이에 재건됐고 14~15세기에는 고딕 양식의 석조 성당이 최초로 건축됐다. 16세기에 터키 침공으로 파괴됐고 지금 건물은 18세기의 것이다. 교회는 작고 소박하다. 마침 일요일이라서 결혼식이 한창이다. 실내를 기웃거리는 여행객을 위해 성당 안을 보라고 친절을 베풀어주는 헝가리인의 마음씨가 살갑다. 교회에서 구시가를 내려다보면 매력적인 지붕들이 돋보인다. 숍이 된 주택 안쪽도 훤히 들여다보인다. 그러나 야트막한 언덕이라서 도나우 강을 훤하게 조망하지는 못한다. 교회 입구에는 헝가리의 전위 예술가인 초벨 벨라(1883~1976)의 박물관이 있다. 초벨 벨라가 죽기 한 해 전인 1975년에 개관했다. 내부에는 초벨과 그의 부인 마리아 모독(1896~1971)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또 일로스바이 바르가 이스트반(Ilosvai Varga Istva´n, 1895~1978)의 작품도 상설 전시되고 있다. 국제적으로 성공한 초벨 벨라는 1930년대 중반부터 센텐드레와 인연을 맺었다. 이어 옛 향기가 물씬한 토록(Torok)식 좁은 골목을 헤집으면서 18세기에 건축된 베오그라드 교회로 간다.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첨탑(48m)을 가진 베오그라드 교회는 성 요한 교회보다 훨씬 크고 화려하다. 1756~1764년에 체코의 둥근 천장이 있는 본당으로 확장했고 탑을 기점으로 중간은 ‘남성 교회’, 그 아래를 ‘여성 교회’로 나누었다. 주교들의 묘소는 본당 지하에 있다. 도나우 강변과 보그다니 골목 언덕을 내려와 도나우 강변으로 향하면 먼저 ‘보그다니(Bogda´nyi)’ 거리에 이른다. 도나우 강변과 가장 가까운 이 골목엔 해묵은 분위기가 켜켜이 배어 있다. 선착장이 인접한, 내륙의 첫 골목이니 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18~19세기의 낡은 건물들은 숍으로 이용되고 있다. 오래된 유적들은 긴 역사를 증명해준다. 로마 때 이용되던 공중목욕탕도 발견됐다. 현재의 와인 박물관도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도시의 와인 만들기는 수세기 동안 오랜 전통을 이어왔다. 오스만투르크 침략 이후 이주민(세르비아인, 달마시아인, 그리스인)들은 적포도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19세기의 펌프는 아직 남아 있고 당시 집집마다 갖고 있던 코챠뇨(kacsa´rnya, 포도주 저장실)도 많이 발견됐다. 코챠뇨 1호집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2세(1741~1790, 재위 1765~1790)가 치안 판사의 비리를 조사하라고 조사관에게 준 집이다. 이 집에서는 헝가리의 유명한 작가 모르 요커이(Mo´r Jo´kai, 1825~1904)가 러브 러비(Rab Raby)라는 작품을 집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편 보그다니 거리에서 가장 가까운 도나우 강에서는 옛 로마시대의 돌다리 흔적, 센텐드레의 섬, 포도원의 아름다운 언덕 등을 볼 수 있다. 토요일마다 예술 시장이 열리는 예뉴 둠챠 거리 보그다니 거리를 거슬러 올라오면 다시 메인 광장을 만나고 곧추 직진하면 예뉴 둠챠(Jeno″ Dumtsa) 거리다. 1897년, 시 승격 25주년을 기념해 당시 시장인 예뉴 둠챠(1838~1917) 이름을 붙였다. 그리스인 예뉴 둠챠는 부모를 따라 20세에 이곳으로 이주해와 79세까지 거주했다. 대법원장을 지냈고 시민에 의해 선출된 도시 최초의 시장이었다. 그는 부다와 센텐드레를 연결하는 ‘통근열차’를 만든 것 외에도 도시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이 거리의 특별한 재미는 주말에 열리는 장터다. 마치 잔칫날을 만난 듯 흥겨워진다. 생선, 소시지는 물론 다양한 먹거리와 기념품들이 등장한다. 할머니는 전통 빵 리테쉬(Retes, 얇게 편 반죽에 과일을 말아 넣어 구워낸 빵)를 구워 내온다. 체리, 스트로우베리 등 다양한 잼이 들어간 ‘리테쉬’는 달달한 게 맛이 좋고 가격도 매우 저렴하다. 전통 방식으로 굽는 키르토쉬칼라취(일명 굴뚝빵)도 좋은 간식거리다. 또 이 거리에는 예뉴 바르차이(Jeno″ Barcsay, 1900~1988) 화가의 컬렉션이 있다. 그는 여러 차례 센텐드레를 방문하다가 결국 이곳에서 살았다. “나는 센텐드레에서 살았고 센텐드레에서 회화의 길을 창조했다. 센텐드레에는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삶과 예술이 있다. 모든 것이 살아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또 센텐드레에서 가장 큰 정교회인 바로크 양식의 1753년에 건축된 성 피터 앤 폴 교회가 있다. 교회 안에서는 요한 바오로 2세의 동상 등을 볼 수 있다. 또 19세기의 유명한 세르비아 작가이면서 산문 작가인 야코프 이그냐토빅스(Jakov Ignjatovic´, 1822~1889)의 생가(No. 5)도 근처에 있다. 러시아의 ‘고골’과 자주 비교되는 그는 고향 센텐드레를 많이 언급한다. 작가는 책 속에서 묻는다. “당신은 아는가? 센텐드레가 어디 있는지?”라고. Travel Data 현지 교통 부다페스트 바티아니(Battiany) 역이나 테르(ter) 역에서 센텐드레행 초록색 교외 열차(www.bkv.hu)가 수시로 운행한다. 30~40분 소요된다. 버스(www.volanbusz.hu)나 유람선(www.silver-line.hu)을 이용해도 된다. 대형 유람선은 7~8월 주말에는 매일 운항한다. 비수기나 물 수위가 낮을 때는 작은 배가 정기적으로 운항된다. 센텐드레 관광 사이트 www.iranyszentendre.hu/en 기타 센텐드레 시내에서 약 2km 떨어진 곳에 민속촌이 있다. 약 100년 전 헝가리 각 지방의 가옥과 생활 모습을 재현해놓았다. '한국의 민속촌'과 비슷하다. 60ha의 면적에 여덟 개 지방의 312채 건물들이 있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복잡한 부다페스트보다는 센텐드레에 숙소를 정하고 여행을 다니면 좋다. 현지 주민처럼 살아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 된다. 헝가리는 부다페스트를 기점으로 도나우 강 근교 지역을 묶어 도나우 벤트라 부르는데 센텐드레 외에도 비셰그라드, 에스테르곰이 있다. 모두 센텐드레와 인접해 있는 소읍들이다. 특히 에스테르곰은 볼거리가 많고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와 바로 인접해 있다. 날짜를 잘 나눠서 살면 제법 유용한 여행이 될 것이다. 꼭 한 번은 경험해보고 싶은 한 달 여행 방식에 잘 어울린다.
- 2017-06-09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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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member seoul, 북정마을
- 사라져가는 서울의 풍경, 우리가 보존해야 할 서울의 사대문 안의 마지막 달동네가 몇 군데 있다. 우리의 역사문화지구로 과거의 시간을 떠올려볼 수 있는 곳을 찾아가보려고 한다. 이름하여 ‘Remember seoul’이다. 허름하고 빛바랜 동네이지만 시간을 거슬러 역사를 되짚어볼 수 있는 북정마을, 김광섭 시인이 노래한 ‘성북동 비둘기’에 나오는 바로 그 마을이다.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廣場)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祝福)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중 첫 연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 6번 출구로 나와 초록색 마을버스 03번을 타고 북정마을 노인정 앞에서 내리면 눈앞으로 아주 오래된 마을이 펼쳐진다. 복잡하게 뒤엉킨 전봇대 위의 전깃줄이 먼저 이 마을의 인상을 알려주는 듯하다. 그리고 낡은 집들과 좁은 골목이 세월을 이야기하고 마을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전한다. 건너편으로는 성곽이 길게 보인다. 일단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서 꼭대기부터 내려오기로 한다. 가파른 계단과 좁은 골목길을 따라 숨차게 성곽까지 올라갔다. 성벽에 서서 내려다보니 오래된 북정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더 멀리 바라보니 서울 시내도 보인다. 흔히들 부자마을로 일컫는 성북구 동네가 옆에 있다. 성문 너머로는 아파트들이 빼곡하다. 마치 과거 속으로 사라져버린 듯한 옛 동네 북정마을과 개발된 빌딩과 아파트들이 묘한 대비를 이룬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돌려 눈에 담은 북정마을에는 따뜻한 옛정이 느껴지는 아늑함이 있다. 한양 성곽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어서 든든하기까지 하다. 마을의 가장 높은 성곽에 올라 마을과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바람에 땀을 식혔다. 성곽 바깥쪽 길을 잠깐 걸어보았다. 이 길을 따라 한양 안쪽 또는 바깥쪽으로 오갔던 조상들을 잠시 상상하면서…. 현재 이 길은 이 지역 사람들의 걷기 코스로 잘 이용되고 있는 듯했다. 산책길이고 운동코스인 멋진 길이다. 성벽을 통해 북정마을을 들여다본다. 저 안에서 성북동 비둘기가 날았을 테고, 만해 한용운이 나라 걱정을 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제 천천히 북정마을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군데군데 방치된 폐가가 보였다. 집을 비우고 이사 나간 사람들이 남긴 살림살이와 돌담 벽에 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길 옆 텃밭들에서는 채소가 자라고 자그마한 안마당엔 정갈한 장독들이 있었고 꽃을 피우는 나무가 우뚝 서 있기도 했다. 녹슨 대문 안에선 빨래가 뽀송뽀송 마르고 있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삶의 현장이다. 빠르게 변화해가는 문명 속에서 어서 빨리 변하자며 등 떠미는 세상과는 상관없이 무심한 시간을 살고 있는 마을이 의연해 보인다. 시간은 그렇게 간다. 마을 아래로 내려와 심우장으로 가는 골목에 들어섰다. 만해 한용운의 거처였던 곳. 집의 방향이 돌아앉은 모습이다. 이를테면 북향인 것이다. 조선총독부를 등지기 위해서 남향으로 짓지 않고 북향 터를 잡았다고 한다. 투철한 저항정신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한용운은 “조선 전체가 감옥인데 어찌 불 땐 방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는가”라며 볕이 들지 않는 이곳 북향 집에서 불도 때지 않고 겨울을 견뎠다고 한다. 심우장은 북정마을을 갈 때 빠트릴 수 없는 주요 장소다. 그러다보니 마루에 앉아 있거나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이곳에는 만해 선생의 ’님의 침묵‘을 비롯한 서적들이 진열되어 있다. 방이나 부엌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만해 한용운은 아쉽게도 해방되기 1년 전에 생을 마감했다. 심우장을 나와 주변의 조붓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길고양이들을 자주 본다. 이 동네에는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고 가끔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가게 앞에 나와 앉아 있다.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마을처럼 보인다. 저녁 무렵이 되니 시장을 다녀오는 어머니들이 힘들게 비탈길을 올라간다. 그 발걸음의 무게가 느껴진다. 한양 도성과 성곽이 인접해 있어 멋과 품위가 느껴지는 오래된 동네, 이런 성곽과 옛 향기가 스며 있는 문화재 보존을 위해 다행히도 재개발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마을 아래쪽에는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이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공방이 생겨나고 연극 포스터가 바람에 날린다. 이런 새 바람들이 다채로운 볼거리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새로운 변신에 기대가 된다. 서울의 옛 모습 속에서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북정마을이 변모하고 있다. 그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들이 현대 사회와 잘 어우러지면서도 푸근한 옛 모습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들이 할 일이다. 이제 내려와야 할 시간.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변화하며 느림의 미학을 보여주는 동네. 그곳을 거닐면 유년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따스해진다. 좁은 골목을 걸으며 지친 가끔 하늘도 올려다본다. 변화해가는 마을 아래도 내려다본다. 그리고 이 세상 어디쯤에 필자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 2017-06-07 09:36